2012.3.8 새벽예배
전도의 표지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시 74:8-9)
녹취자: 박세원
8절과 9절에서는 계속해서 이 시인이 원수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땅을 침공하여 파멸하고 있는 그 절망적인 상태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직접화법으로 그렇게 성소를 유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파괴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의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사실 이 회당이라고 하는 것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진 가운데 생겨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적합하지가 않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말로는 모에드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사실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지는 우리들이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성경에서 모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그래서 대회라는 말로도 사용이 되고 그래서 어떤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회집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그게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이 되긴 하는데 그래서 저의 생각에는 여기에 나오는 회당이라는 말은 여기에는 단수 되어 있는데 복수로 나옵니다. 회당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곳마다 이들이 불 질렀나이다. 이 정도로 번역을 하면 가장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들이 크고 작은 모임으로 사람들이 모일 때 그것이 꼭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일 때 허허벌판에서도 모이겠지만 그러나 대부분 어떤 장소에서 회집을 하는데 그 회집한 곳마다 파멸하였다 하는 그러니까 이건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성소를 유린하고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그런 거처들을 파멸한 그런 만행을 지금 하나님 앞에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아무튼지 간에 이것은 결국 만약에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무엇을 보여 주냐면 단지 성소가 유린된 것이 아니라, 이 성소만 유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모든 삶의 처소들이 이 원수들에 의해서 파멸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 해석이 정말 적합하다고 믿어지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 전체를 보면 말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때 두 가지 원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의 생활, 종교의 영역이고 밖에 있는 넓은 원은 그들의 일반적인 생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 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생활 그것들이 가장 잘 집약되는 것이 예배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생활의 핵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반응하는 언약백성들의 태도가 있고 그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율법의 계시들을 자기의 삶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밖에 있는 넓은 원에 비유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삶의 영역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재 적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떼놓을 수 없게끔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종교생활을 제대로 안하게 되면 바깥에부터 먼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제일먼저 안에부터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에 있는 예배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대게 은밀한 영역이기 때문에 바깥으로 깊이 표가 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에 뜰만 밟는구나. 이렇게 책망했을 때 그것은 선지자가 봤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 일반적이 사람이 보면 뭐 사람이 정해진 날 성소에 나가고 거기서 규례를 따라서 제사를 드리고 하는 그 모습 속에서 뭐가 얼마큼 무너졌는지 망가졌는지 그런 것들이 외면적으로 파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제사 드리러 가서 술 쳐 먹고 드러눕는 사람이 있겠으며 거기다 무슨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럴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먼저 무너지고 나서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렇게 정의되어 있던 그들의 삶이 바깥에 있는 원에 비유할 수 있는 삶이 무너져 버리면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자기 소욕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파괴되고 나면 그다음에 하나님이 삶의 외적인 영역들을 적절하게 다루시면서 하나님이 당신이 그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감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쉽게 얘기하면 징계 혹은 심판, 하나님의 책망하시는 섭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아주 놀라운 연관 속에서 직시했던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서 너무나 명백한데도 그들이 모르는 사실들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각성을 호소하고 충분히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든 교회든 혹은 한나라의 사회든 커다란 하나님의 심판 혹은 징계가 임하기 전에는 충분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충분히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많은 것들을 충분히 거절한 후에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 정확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차례대로 성소를 유린당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들의 종교생활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전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소를 유린당하게 하심으로서 이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그들을 향하여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 런지 우리 중에는 아는 자가 없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표적이라 하는 혹은 표징이라고도 합니다. 오트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표적은 어디에서부터 사용이 되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범죄 했을 때 모세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모두 진멸 해버리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용서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성경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을 차라리 지워달라고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두 번째로 제시하는 게 그러면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 근데 나는 가지 않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무 안타까우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신데 하나님이 없이 가나안땅을 차지하면 뭐하겠습니까? 모세는 그 핵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회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단장품을 모두 제하고 회막을 만들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 회막에 나아가서 자신들의 죄와 강퍅함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빌면서 아버지 앞에 매달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거두시고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모세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그러면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의 앞을 지나가는 큰 징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신다고 하는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표징입니다.
이 표징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표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치를 보나 종교를 보나 백성들의 일반적인 삶을 보나 어느 영역을 들여다보아도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이 자신의 절망적인 심경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표징과 함께 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선지자도 다시없으며 선지자도 다시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최고의 진노의 표현이 무엇이냐 하면 징계하시는 게 아니라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시는 것. 그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최고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주 아이러니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 앞에 반항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그의 섭리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세상의 인간들 심지어는 신자들이하도 하나님께 대하여 그 반역하는 감정을 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이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반역과 하나님을 향한 도전은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끊임없이 막으십니다. 인간의 양심의 자연적인 작용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하나님의 큰 징계에 이르기까지 그사이에 하나님의 자연적인 섭리 속에서 그 일을 막으시는 억제의 은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 죄의 출산 반역의 노골화를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진노하시면 그 붙들고 있던 손을 탁하고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극악한 악인들의 형통함이 바로 그런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나님이 공동체를 다루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거두시는 것. 선지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물으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갈지 모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진노의 표현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명예와 부와 지위를 주시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돌이켜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큰사랑과 은혜 그리고 자비를 당신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진노하시는 그때에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붙들고 계시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보면 선지자도 없습니다. 선지자도 다시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 런지 우리 중에는 아는 자가 없나이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철저히 감추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불쾌함과 진노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이고 계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단하나의 해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시대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그 마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 모든 상황을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힘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신약에서 교회사 속에서 늘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만이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각자 정치적인 견해는 다르고 그리고 그 생각은 서로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모두 공통적인 합치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통치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이 하나님의 교회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이 사회가 하나님이 주신 정직과 공평,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땅에서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닙니다.
온 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약백성들로 가득차지 않아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일반 은총 안에서 주신 그 삶의 질서를 따르며 사는 나라가 되어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일반적인 은총으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평과 정의가 무너지고 파괴가 되면 하나님이 그 나라를 심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몸서리 쳐지도록 정말 가슴 아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탈북한 사람들을 북한 보육위에서 나와서 데리고 가는데 여기로 철사를 집어넣어서 입을 뚫어서 그래서 모두 굴비처럼 사람들을 꿰어서 철사로 꿰어서 데려간다고 합니다. 일루 이렇게 뚫어서 그러니까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굵은 철사로 해서 다 묶었으니까 손바닥을 구멍을 뚫어가지고 철사로 묶어서 간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보면서 너무 끔찍하니까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계속 끌고 하면 중국에서 포로 안 넘겨주겠다고 탈북자들 안 넘겨주겠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요즘 밧줄로 묶어가지고 가게 된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지금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가고 식량사정도 나아진 게 아니라 훨씬 더 못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93년도처럼 그렇게 굶어죽지 않는 것은 옛날에는 사람들이 배급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 이걸 해결 못 해준다는 것을 아니까 산 밑에도 호미로 파가지고 조금만 땅을 만들고 물고기를 잡아먹고 이렇게 하면서 생존하는 법을 터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광경을 이렇게 보면서 참 재밌는 게 뭐냐 하면 거의 10년을 넘도록 중국, 일본, 한국 다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딱 북한만 십년이 넘도록 흉년이 들은 것입니다. 그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 회계하게 살아가는 그 삶의 상황과 그 땅이 그렇게 척박해 지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하던지 북한을 도와야 합니다. 오늘 이번에도 돌아오면서 참 마음에 눈물이 났는데 그것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었을 때 지금 거기에 2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그중에도 상당수가 굶어 죽었습니다. 옛날에 너희들은 그 탈북자 한사람이 남한에 넘어와서 남의 집 앞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붙들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을 이렇게 넉넉하게 사는데 왜 우리를 돕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김정일 이가 개념 없어서 하도 얄밉게 굴어서 안도와 줬다. 그럴 때 하나님은 고사하고라도 역사 앞에서 그것이 정당화 될 수 있겠느냐. 정말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느냐 깊이 반성해야 되는 지점에 와 있습니다.
근데 현실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굶주리는 동포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이번에도 가서 절실하게 느끼면서 이 모든 슬픔을 종식시킬 수 있는 분은 사실 정말 하나님 한분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어제 신문에 보니까 식량을 가지고 카드로 내밀면서 북한을 설득하자 그러는데 불가능 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것이 역사 앞에 서있는 중요한 실체입니다. 그래서 한나라의 백성이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다 할지라도 포악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 완악하면 하나님이 일반 섭리 속에서 그들을 다루어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선지자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오랠 런지 아는 사람도 없다고 호소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토로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유일한 기대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내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