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올리는 탄원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시74:10~11).
녹취자:이경순
그러면서 시인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이 이 상황에 개입해 주시도록 간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대적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항하여 훼방하고 원수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름의 명예예요. 그렇게 당신 자신의 이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지금은 원수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소가 파괴되고 주의 백성들이 모인 곳 마다 훼파되고 파멸되어 주님의 이름이 현저히 모욕을 받겠금 내버려 두고 계십니다. 대적들은 자신들이 짓밟히면 짓밟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너희의 신이 어디 있느냐 말하는 것 같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력하게 파멸당하면서 자신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현실 속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인은 자신의 안녕과 행복만을 위해서 이러한 탄원을 아버지께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인은 마음속에 그보다 더 큰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백성들의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현저히 모욕당하고 계시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에 파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쓸어버리고 모세 너를 통하여 새로운 후손을 세우리라 라고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더 없는 명예이기도 했을 하나님의 그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한번 선택한 자신의 백성을 그렇게 파멸하실 때 이방가운데 받게 될 하나님 이름에 대한 모욕 이었습니다.그래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마치 설득하는 것 같은 화법을 동원 합니다. 이러 이러하게 되면 이방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신이 자기의 백성들을 막상 애굽에서 탈출 시켰지만 능력이 모자라서 그들을 온전히 약속의 땅으로 인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실을 잡아서 파멸시켰노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침 예레미아 시대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을 때 예루살렘 거민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훼파되어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말발굽으로 성소를 유린했고 언약 백성들은 개같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예레미아는 가슴에 불이 임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처럼 모욕을 받는 상황 속에서 그 유명한 예레미아 애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장롱 깊이 묻어두었던 패물과 재물을 가지고 양식을 사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안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가치가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분명 언약백성으로서의 올바를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모든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보람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존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에요. 그럴 수 있다면 고난의 길을 가도 거기가 천국이고 그럴 수 없다면 이 세상에 왕궁의 영화도 그에게는 가시방석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언약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인은 통탄하며 대적의 훼방과 원수의 능욕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능력이 모자라시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간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사람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성소가 유린되고 언약백성들이 모인 곳이 훼파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불순종과 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당신의 불쾌하심을 보이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꿔달라고 탄원하는 이것은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발견 하고 민족의 불순종이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터득하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역경이나 어려움이 오게 되고 신앙에 반하는 상황이 전개될 때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능력은 너무나 멀리 있고 그분의 권능은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돕기에는 너무 멀리계신 하나님 세상사는 결국 이렇게 우리의 의지대로 악하면 악한대로 선하면 선한대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간섭하지 않으시는 그러한 국외자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이 왜 떠났는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왜 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라고 우리를 일깨우시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대적들의 훼방과 원수의 능욕을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 기도에 마음을 쏟아 동참할 수 있다면 이들이 악인들에게 짓밟히는 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이 상황에 개입하실 것이고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애쓰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바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할 분이 그분이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어달려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멀리계신 하나님을 가까이 있는 우리로 이끄는 수단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생각해 보면 결국은 그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분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을 구하던 우리들이 바뀌어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도록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보다도 더 커다란 선물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성도들 치고 기도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없고 기도의 세계 속에서 자기를 주님 앞에 복종시키는 기도의 정신을 함양한 사람 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은 기도의 연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늘도 교회의 상황은 선교의 상황은 우리에게 이런 기도를 많이 하도록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구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악한 상황을 보며 거기에서 짓밟히고 모욕 받는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들에게 능력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상황을 주님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둔 신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른손은 능력의 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선택한 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4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오른손은 선택의 상징이고 하나님의 권능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오른손의 능력이 이스라엘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이스라엘을 모욕할 수 없고 그분의 이름을 유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을 거두시자 원수들은 능욕하기 시작했고 주의 성소를 불사리고 주의 이름이 있는곳은 더렵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오른손은 곧 하나님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큰 권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은혜의 큰 권능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교회를 지키시는 크고 놀라운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이라고 믿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종종 이 세상의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정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려움과 환란 시련과 핍박이 있을 때 하나님이 큰 권능의 손으로 그 오른손으로 교회를 붙들고 계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원수들이 목숨을 잃고 파멸하는 일이 일어납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을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서 이방의 백성들을 파멸하는 사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약성경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앗수르 군대들이 하루저녁에 18만여명이 몰살을 당하였는데 예루살렘을 에워싼 로마의 디도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그렇게 멸망하였다는 보도를 신약성경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방식이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양식에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에 카타콤에 가면 그림이 하나 걸려 있습니다. 이상하게 로마에 높은 군인이 로마군인 들에게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처럼 되어서 죽어가는 장면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초기 기독교 시대에 성도들이 복음을 열심히 전했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황제를 시위하는 경호 실장쯤 되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카타콤에 숨어있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물과 떡을 공급해 주었어요. 어느 순간에 그것이 발각이 되었고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에게 허락된 처형은 멀리서 수많은 군사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화살을 쏘는 것이었습니다. 온 몸에 고슴도치처럼 그 화살을 맞으며 이 세상 누구의 얼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지극한 평화와 용서 그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가득한 가운데 그는 운명합니다. 그때 그 순교와 함께 남긴 그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 화살을 쏘았던 많은 군인의 가슴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리스도는 정말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이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정복하시는 방법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교회를 헤꼬지하거나 우리를 개인적으로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앙심을 품으며 그들에게 구약에서 임한 것 같은 천벌이 임하기를 바라면서 기도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는 여호와의 오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원수가 불행이도 커다란 고통을 만나거나 혹은 가슴 아픈 일을 만나 괴로움을 당했다면 오히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에 나타난 오른손은 바로 그런 무력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교회에 오른손을 얹고 계실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가장 완악한 죄인들을 굴복시키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오른손을 거두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하며 품에서 그 오른손을 빼서 마치 모세가
손을 빼어 기적을 행한 것처럼 그런 놀라운 능력을 행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오늘 그렇게 주님의 오른손으로 당신의 교회에 복음의 일들을 행하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매달리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악인들의 박해나 혹은 괴롭게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버린 것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오른손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에워싸던 수많은 대적들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주님의 능력이 당신의 교회에서 거두어 주실 때 주님의 교회가 어떻게 초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때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아버지 앞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아버지 앞에 온전히 아버지와 함께하도록 기도하고 매어달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