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적 연대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 (시 74 : 22)
녹취자: 이병두
사실 하나님이 원통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통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시인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만연한 그 죄와 강포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 땅에 불의한 자들이 번영하고, 그들이 가난하고 궁핍하고, 학대받는 자들로 하여금 괴롭힘을 당하도록 그들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백성들 속에 원통함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 시인이 ‘주의 원통함을 푸십시오.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십시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하는 단어들이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자연적인 동작으로 일어나는 것도 물론 거기에 포함이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은혜가 없는 표현이지 않습니까? 대게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무엇인가 이렇게 커다란 사실을 깨닫고 결단하면서, 어떤 새로운 삶을 향하여 일어나는 자기 개혁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결단의 똑같은 용례가 신약에 와서도 구약의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돼지의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하는데 찾을 수가 없을 때, 그때 그가 결단한 것이 “일어나 일어나자.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자.” 그러한 장면도 사실 구약에 나오는 ‘일어나’라는 말이 주는 의미들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어떤 동일한 단어들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는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해석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어째든 하나님에 관해서 이 단어가 적용될 때는, 하나님이 앉아 계시거나, 누워계시거나, 뭐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상황들이나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들에 관한 모든 것들이 떨칠 듯이 일어나는 어떤 개혁과 변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일어나’라는 말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지금 우리들에게 어떤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정말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제 것 우리들을 지켜보셨다면, 이제는 이 역사적인 상황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일종의 탄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를 문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내버려 두신 상태로 묘사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힘입어 떨치고 일어나 무엇인가 현실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원통함을 푸십시오.’ 여기에서 시인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있는 언약적인 연대입니다. 연약적인 연대란, 어떤 사람은 학대를 받고, 어떤 사람은 포악한 자들에 의해서 억눌림을 당하며 짓밟힐 때, 그것이 현상적으로 보면 그냥 사람이 짓밟히는 것이고, 인간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보면, 바로 그렇게 학대받고 짓밟히고 고통을 받는 그 백성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실질적으로 그 언약을 파기한 악한 자들에 의해서 짓밟히고 이 민족에 의해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는 이 모든 고통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은 독일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을 역사를 통해서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독일만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만은 유독 일류 역사상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유럽을 점령하면서 가는 곳 마다 나라를 정복한 다음에는 유대인을 색출하는 작업을 벌이고,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을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의 사건 같은 것들이 처음에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고, 자기가 죽을 구덩이를 스스로 파서 죽이고 하는 이런 일들을 하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나중에는 계곡으로 사람들을 몰고 가서 계곡에 수만 명을 집결시키고, 총을 쏴서 죽여 버리고, 계곡에 죽은 사람들을 가득 채워놓고 흙으로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으로도 도저히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 죽일 수 없으니까 만들어 낸 것이 가스실입니다. 가스실에서 죽은 시체를 가스실 옆에 소각장을 만들어 계속 사람을 태우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 했을 때는 러시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침공을 했습니다. 전투기가 3,000대, 대포가 8,000문에 156개 사단 300만 명 군인들을 동원했습니다. 결국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 같았지만 겨울이 오면서 불리해졌습니다. 포로를 잡을 때 한 번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형 부대 포로를 한꺼번에 잡았는데, 한번은 60만 명을 한꺼번에 잡고, 한번은 70만 명을 한꺼번에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처음부터 그 포로를 먹이거나 수용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못 도망가게 한군데 모아놓고 서서히 130만 명 모두를 굶겨 죽인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만행들을 저질렀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유대교 출신으로 그 사람들이 다 유대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도 있고, 여러 철학자들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때에 이러한 사건이 사실은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홀로코스트와 그 모든 끔찍한 일들이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몰살당하는 그 민족적인 고통의 경험을 ‘몰트만’이나 ‘레비나스’ 같은 이런 위대한 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전부다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신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고통의 신학’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유대인들이 말이 600만 명이지, 서울시내 인구의 절반인데,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대답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다. 고통 받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학대받고, 짓밟히고, 고통을 받는 모든 상황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원통해 하고,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그 비참한 비극 한가운데 주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그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원통함이라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연대입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신약시대에 아주 명료하게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을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해서 박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가 되셨는데, 그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그 모든 상황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에게 대한 박해로 받아들여 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언약적인 연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바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러시면서 “가시 돋친 막대기에 뒷발질 하는 것이 너에게 고통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이나 소가 거치적거린다고 계속해서 뒷발질을 할 때, 만약에 뒤에 있는 것이 가시덤불이라면 차면 찰수록 가시덤불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발로 차는 자신의 발에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언약적인 연대를 이 구약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이 영적인 연합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도를 가지고 이 본문을 보면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바로 그렇게 고통 받고 학대받는 그 백성들 속에서 바로 주님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이 능력이 없으시거나 혹은 권세가 모자라서 그렇게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과 함께 언약적인 연대를 맺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건 그들이지만, 그 언약적인 연대를 통해서 그 고통과 수치는 하나님께로 그대로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역사적인 상황들을 개입하셔서 이 상황들을 정리하시고, 이 사람들을 올바르게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이 시인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억은 은총이고,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억은 심판입니다. 그래서 기억해 달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이 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이들을 심판해 달라고 하는 탄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합니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매하다’라고 하는 것은 동정적 의미에서 ‘우매하다’는 것이 아니라, 징벌적 의미에서 ‘우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정신과 마음을 버렸기 때문에, 어리석고 우매한 자가 되었고, 그렇게 어리석고 우매하기 때문에, ‘종일토록 이 사람들을 학대하고 짓밟은 것으로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이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과 하나님의 명예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이렇게 짓밟히고, 학대받는 이곳에서 주님의 명예도 땅에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이 백성들을 위하여 일 하시고, 이 백성들의 원한을 푸심으로 당신 자신의 원한도 푸시고, 당신 자신의 이름이 다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그 고백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간절한 기도의 탄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품이 우리 안에 충만해 지면 가장 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 하였듯이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기에 형제 이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면 거기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시겠습니까?’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닮음, 이것이 결국은 참된 사랑의 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때문에 이 기도를 드리는데, 이 두 개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적으로 연대되었으므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 모든 일들을 위하여 일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는 탄원을 아버지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