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이 가까울 때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녹취자: 박세원
75편 전체는 분류상 찬송 시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아삽의 시라고 했는데 아삽의 시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혹은 다윗이 기록하였거나 혹은 다윗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기록을 한 것을 아삽의 가문에서 보관한 시다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떤 것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대개 다른 시들 같은 경우는 문체의 특성이나 이런 것들을 고려를 해서 이미 시편에 나와 있는 다윗의 시가 80여 편이 되니까 그렇게 어휘들을 비교를 하고 분석을 하면서 다윗에게 속한 시인데 아삽이 보관한 것이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75편도 그런 시 가운데 하나인데 저는 시편 75편을 읽으면서 이것이 다윗의 시여야만 한다고 하는 어떤 확증 같은 것들은 저 개인적으로는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쨌든 아삽이 지은 시든 혹은 아삽의 가문에서 보관한 시든 이 시편이 이제 찬양을 성전에서 인도하는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서 알다스헷 이라고 하는 당시의 그 곡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곡조들이 나오는데 그 곡조에 맞춰서 이 가사를 가지고 부르게 되어 있었던 시다 이것이 표제에 나오는 설명의 내용입니다.
본문에 들어가면 이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주의 귀한 일들을 전파합니다.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주님의 이름이 가까이 온 것을 주님의 기사들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지만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시는 주인이시라고 하는 것을 역사 속에서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역사 개입 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어떤 역사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님이 아주 깊이 평소보다는 더 깊이 역사에 개입 하셔서 그래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역사의 개입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한 역사의 개입입니다.
긴 안목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전부다 하나님의 축복의 과정이지만 짧은 안목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축복 일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 앞에 내리는 징벌 일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 속에 깊이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을 하시는 이 강한 개입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나라가 비록 사람인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나라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고 징계를 받을 때에는 돌이켜 회개하고 축복을 받을 때에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 하도록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도 알 수 없고 그때에 역사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역사에 깊이 개입 하셨고 오만하고 교만하던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시는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운 것을 주의 기사가 선포합니다. 라는 뜻은 무슨 뜻이냐면 시편에서 시편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깝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삶에 기준점들이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런 하나님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국은 살아있는 신앙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이 세상에서 내가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나중에 큰소리 칠 수 있다. 그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 되었고 나의 인생에 진정한 가치는 그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이라는 그러한 기대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당신 자신의 이름을 따라서 살게 하신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패의 관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서 살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나오는 주의 이름이 가깝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주님이 멀리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실수도 없고 가까이 계실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하시는 분도 아니고 하나님은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겨 다니시는 분도 아닙니다. 이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안 계신 곳이 없고 그 다음 없으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 시고 어느 곳엔 하나님이 안개처럼 많이 모여계시고 어느 곳에는 맑은 공기처럼 하나님이 거의 계시지 않는 그런 곳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은 계시고 그리고 어디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물질을 초월해 계시므로 있다고 하는 표현이 이 세상에 사물이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주님이 가깝습니다. 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의미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하는 것이 나타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고 여기에서 이 시인이 주님의 이름이 가깝습니다. 가깝다는 사실을 주님의 기사가 선포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매우 가까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 속에 나타나는 것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면 무릎을 꿇고 두려워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부복하고 자기의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계명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어제 밤늦게 문상을 갔습니다. 모든 장례식장이 그러하듯이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설계를 아주 시끄럽게 해서 식탁에서 밥 먹는 사람들에 손님에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문상하는 그 빈소에 다 들리게 통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기가 아주 불편했는데 그 집에 아들 하나가 조그마한 초등학생 하나가 정장을 하고 까만 넥타이를 하고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손자입니다. 그래서 인제 시끄러운데 그래도 설교를 하는데 오히려 어른들은 좀 산만한데 이 아이는 바로 옆에 앉아서 똑바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아주 경청을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인데 회심을 한 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광경들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서 아 지금 이시간이 그냥 객담하고 노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고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구나. 라는 것을 사람들이 의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가까운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식론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하나님이 가깝다 안 가깝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매우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무데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 청소년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갔는데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 이였으니까 수련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유치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이 안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거기 수련회에 와서 전도사에게 솔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날 아침에 그 아이들을 모아놓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는데 바로 그 전날 하나님이 어디에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다고 말하던 그 자매가 이야기 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제 마음속에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하나님이 정말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체험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주권적인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 생활 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따르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의 고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깝다는 사실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이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신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이 주님의 귀한 일들을 통해서 전파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귀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롭게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정말 개입하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아주 뚜렷한 증거들이 이 세계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안에 나타는 것 을 보면서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 때문에 예전과는 다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심지어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거의 실천적인 무신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은혜를 구하고 이 땅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역사의 상황에 간섭해 주시기를 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주님의 크신 사랑 앞에 부복하고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바로 이렇게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교회에 온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그들이 단정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로 변화될 때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이 거기 계시구나. 라는 것을 아주 또렷이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먼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