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 74:2-3)
녹취자 : 조원정
시편에 보면 독특한 구성이 나오는데 화자가 바뀌는 겁니다. 내가 주어가 되어져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어떤 암시도 없이 툭 끊어지면서 화자의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생각하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언적 화법이라고 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전달하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화자로 해서 전달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도 흔히 아이들을 타이르고 할 때
(예화)너 이거 이렇게 하지 말아라. 아빠가 오면 이놈 너 왜 이랬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아직 지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직접화법을 사용하는데 그 직접화법의 주어는 글 전체를 전달하는 문맥의 주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 경우가 있고 저는 좀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한 해석의 원칙을 모든 시편에 인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구절들이 없다고 말은 못하지만 그리고 정확하게 어느 구절이 그런 구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예언적 화법이 다른 선지서나 혹은 성문서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추측도 얼마든지 나타나고 현실성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보다 더 많은 경우에 이것이 신탁의 말씀으로 주어졌다 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전달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시편 중에 대부분을 구성했던 선지자 같은 경우는 다윗 같은 경우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런 신탁의 말씀이 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봅니다.
모세 오경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런 도입부들이 생략된 형태로 시어가 시적 구성을 이루었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그런 것들이 잘 안 나타는데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히브리어 자체가 시어입니다. 시를 쓰기에 아주 좋은 언어입니다. 앞에 궂이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이 하나의 시로 물 흐르도록 쓰면서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시편에 이런 인용구들이 어느 것이 신탁의 말씀이고 어느 것이 예언적 화법인지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은 그러나 나는 후자의 가능성이 전자의 가능성보다 훨씬 더 많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데 ‘주의 말씀에’ 왜 주어가 안 맞으니까 이렇게 보역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시인이 노래합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가까우십니다. 늘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이 백성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끼치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그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감격에 차서 하나님께 고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신탁의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권고하신다 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권고하시는 날에,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리라. 이번 성경에는 다 바뀐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권고하다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바카드 라는 말인데 사람들을 권면하고 타이른다 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방문한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권고하시는 날에는 아주 쉽게 번역하면 주께서 오시는 날에 주께서 임하시는 날에 정도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임재가 가까운 날들은 두 가지 국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심판의 국면과 축복의 국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오시는 그날이 위로와 그들의 원한을 푸는 날이 될 것이고 주를 거스리고 악하게 행했던 사람들에게는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사태를 공정하기 하시기 위하여 불의한 자들을 징계하시는 날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가 명료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가 아니냐 라고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대해서 회의를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안계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 여전히 번성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밭에 곡식을 심었는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렸고 거기서 가라지들이 막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에 비추어 보면 그 가라지들을 모두 솎아내서 정리해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추수 때까지 버려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가라지들을 싫어하는 땅 주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추수 때까지 곡식을 보호하려는 알곡에 대한 사랑이 알곡에 대한 희망이 가라지들을 내버려두게 만드는 겁니다. 이 비유는 완전히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알곡을 상하지 않고 가라지를 뽑아낼 능력이 없지만은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악인들의 활동과 번영은 의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이런 것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인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이 잘 이루어 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러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악인들은 각각 악을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그 사람 자신에 대해 혹은 모든 공동체와 사회에 대해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시면서 인간이 쏟아 놓은 악한 의지의 행사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아주 요긴하도록 사용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고 아주 커다란 계획입니다.
이렇게 볼 거 같으면 오늘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이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땅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셔서 이 역사에 개입하고 계신 주인이시다 라는 사실을 선인이 악인 모두 함께 보고 느끼게 되었다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지만 특별한 시점이 오면 모순처럼 보이는 악들을 제거하시고 고통 받는 의인들을 하나님이 상주고 격려하시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우리들이 가게에다 장부 적어놓고 물건을 사다가 외상으로 쭉 해놓은 다음에 마지막에 월말에 가서 돈을 들고 가서 정산을 하고 앞에 있는 외상 장부를 쭉 하고 줄을 그어 버리듯이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지혜로운 섭리 속에서 악이 번성하고 의가 억눌리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계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이것들을 깨끗이 정리하사 다시 만물을 온전한 상태로 돌리시는 일들이 부분적으로 사회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이런 일들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행하심으로 공의를 다시 올바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인이 하나님의 이름이 가깝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은 번영과 축복이 쏟아지고 있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건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호와의 날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그 예가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하박국서에 언제나 유명하게 인용되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무화가 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 없어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라.
갈대아 사람들이 이미 나라를 거의 식민지 상태로 만들었고 처처에서 악인들이 갈대아 사람들과 내통을 하면서 그 민족을 박해하고 나라를 모두 거덜 냅니다. 그들이 승승장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설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회의주의자가 된 겁니다. 그런데 깊이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은 이런 속에서 오직 우리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겁니다.
저의 표현에 의하면 c급 선지자에서 a급 선지자로 등극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심판을 쭉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심판의 결과 포도나에 열매가 없고 무화가 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가옥이 완전히 초토화 된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라보면서 이 선지자는 기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심판을 받아서 모든 번영이 사라지고 커다란 재앙이 오게 되었는데도 기뻐하는 겁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서 기뻐하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놀라운 증거를 악인들을 심판하는 그 속에서 악인이라고 심판하시는데 족집게처럼 골라내서 악인들만 고난을 받겠습니까? 한나라가 악해서 전쟁이 일어나서 왜적이 침입해서 초토화 되면 경건한 사람들도 함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오는 바디 사상입니다. 언약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시는 해석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란을 당하고 초토화 되었어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영과 궁핍을 초월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양식으로 삼는 것인데 이것이 언약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시인에게 들려온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바르게 심판을 하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는 이 시인에게 복음처럼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이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를 했냐 하면 이 땅 자체가 유대인들은 지구자체가 수박 반 덩어리를 잘라 놓은 것 같은 것이 우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땅은 평평한 쟁반과 같고 그 위에는 원형으로 된 유리막 같은 것들이 쳐있고 바로 그 하늘에 하나님이 실처럼 매달듯이 별들을 매다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쟁반같이 넓적한 땅은 뭐가 받춰 줘야 되는데 그 밑에 기둥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 당시에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 생각을 하나님이 염두에 두시면서 그들의 생각에 이해 될 수 있는 언어로서 말씀하신 겁니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다.” 무슨 뜻이죠? 창조된 이 모든 세계를 지탱하게 하는 모든 기초는 내가 세웠다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 모든 땅의 사물들은 존재의 근거를 갖는다. 세웠거니와가 아니라 땅의 모든 기둥은 내가 세웠으며 그러니 땅과 모든 주민은 소멸되리라 이 모든 땅은 주민들보다 더 영원합니다. 그 땅은 변함없지만 그 위에 주민들은 영토가 바뀌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나라가 사라지기도 하고 새나라가 세워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덧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초를 세워 이 땅을 연구하게 한 자가 나인데 땅위의 주민들을 향하여 나의 주권이 없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소멸하시고 그 땅을 다른 자 들에게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이 그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 땅 백성들이 패괴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번영이 아닙니다. 이 땅의 가난이냐? 그렇다고 가난을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번영과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 목적 언약의 백성들이 선택된 그 목적 그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세우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인에게 2절 3절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전에도 그것을 구하면서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일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도록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