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1)
녹취자 : 조원정
이 77편은 찬양시라고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도 나오지만 대부분이 찬양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표제에 보면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게 무엇인지 오늘날은 정확하게 잘 알지를 못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많이 부르던 가락이 있었고 그 가락을 제시하면서 이 찬송시는 그 가락에 맞추어서 부르라고 지시가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슴곡에 맞추어서 부르라던지 백합화 곡조에 맞추어서 부르라던지 이런 지시가 나옵니다. 그런 곡이 어떤 곡이었는지는 지금 모릅니다. 아마도 당시에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박자라던지 그런 법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이 이걸 부를 때는 우리처럼 이렇게 내가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이런 식으로 읽지 않고 높낮이를 두면서 성조가 있게 노래처럼 부릅니다. 그걸 부를 때 어떤 장단으로 부르라 이런 내용들이 지시되어 있는 것이 77편의 표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보면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이렇게 촉론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뒤에 쭉 보면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간증들이 나옵니다. 이모든 환란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간절한 기도의 경험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다 언제 입니까? 시련과 환란을 만날 때에 그 어느 때에든지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이것이 정말 결과가 있고 열매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내 음성으로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입니다. 이런 결심적인 것들이 나오는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데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내가 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맥락에서 볼 때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사태가 위급하다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절박하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뒤에 나오는 부르짖는다는 단어가 원거리에 사람이 떨어져 있을 때 소리를 쳐서 부르는 것 이런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큰소리로 부르짖는 이런 것들을 전부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시인이 내가 목소리를 내어서 하나님을 큰 소리로 부르리니 이런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 사태가 심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주 절박하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기도이지만 그러나 일상적일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똑 같은 기도이지만 그 양식은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찾는 그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있는 때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는 위기에 처하고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이런 때에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그것이 훨씬 더 간절하고 절박해지지 않겠느냐는 이런 얘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사태에 처해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이 깨달은 비결은 뭐냐고 하면 기도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환란날을 만나고 밤에도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시인이 사태적으로만 환란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 환란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겠는가? 이제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가? 인자하심은 끝났는가? 약속도 영원히 폐하였는가?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긍휼을 그치셨는가? 이런 확신이 약해지는 두려움 속에서 이중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치유책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며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자기의 목소리를 내어 주님을 간절히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시인을 붙들고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라고 하는 하나님에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시편 속에 나오는 경건한 시인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확신이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5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 하옵소서 부르짖는 소리에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은 마치 왕이 아주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이 와서 그 왕에게 간절히 탄원할 때 왕이 그의 청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면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뭐냐? 무엇이 억울하냐? 그게 왜 중요하나 하면 왕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올바로 판단만 서면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권력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로 판단하고 무엇을 알았다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행하실수 있습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소망을 갖는 겁니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큰 환란과 내적인 고통, 번민과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이 시인에게 더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 환란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지키시는 분이고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부르짖으면 그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이 환란과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과정 그리고 또 내적인 모든 갈등의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마치 긴 터널 끝을 지나다가 마지막 그 끝에서 눈부신 햇볕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이 시인이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백성들을 향한 자비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경건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홀로 서는 신앙을 통해서 비롯된 것이고 그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과 간절함의 최고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복종되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엇이든지 이 모든 갈등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17세기 신학자 보헤티우스라는 사람은 기도야 말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이다 했습니다. 이 시인이 그것을 체험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받을 줄 알고 기대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은 나쁜 것을 통해서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고통을 받으며 간절히 매달리고 오늘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환란 날에 주를 찾고 밤에도 내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이 한 번에 모든 일을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불안하고 근심하여 심령이 상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마음을 쏟고 기도하는 이 시인을 고치고 깨끗케 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모든 기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쏟는 기도 중심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기도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 부인을 배우고 거기에서 자기 극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주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그 무엇이 우리의 마음과 삶속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주님의 고통을 기도시간에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고 포기할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렇게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아는 지식이 많고도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작아도 그것을 믿음으로 기도하고 꽉 붙들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 하나님 앞에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환란과 시련이 좋고 외로운 것이 좋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잠시 연극을 보거나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를 들으며 외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외로워지고 내동댕이치진 것처럼 홀로되고 환란을 당하고 시련을 당해서 쓰라린 마음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시련과 환란 그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산만하게 흩어졌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 한분께 다시 모으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련과 환란 속에서 주님을 찾으면 우리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 한분을 향하게 되지만 시련과 환란 속에서 근심에 매몰되고 걱정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게 되면 거기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우리의 심령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그 큰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당신을 찾고 풀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고 무슨 환란을 만났던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것을 더 많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웃을 것이며 하나님 한분 앞에서 비굴해지는 사람은 이 세상을 향하여 결코 자존감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굳건한 확신 속에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특권, 기쁨은 바로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최고의 자비이며 은총이요,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극히 연약하지만 상한 갈대와 같이 약하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이 약하지만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 부르짖는 모든 사람들은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능력이 부족하면 주시고 환란을 만났으면 그것을 피할 수 있고 혹은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길들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빈부와 귀천이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 주셔서 당신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순간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