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상할 때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시편 77:3)
녹취자: 오정민
시인은 앞 절에서 환란 날에 자기가 주님을 찾았고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며 주님 앞에 간절히 간구 하였던 것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3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는 도다. 이 구절을 말한 것이죠. 1절과 2절로만 미루어 본다면 이 시인은 기도에 대한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환란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린 실천적인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헛된 위로로 마음을 흩트려 트리지 않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심령이 상한다고 고백을 했습니까? 여기에서 심령이 상한다. 라고 하는 이 말이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심령이 약해진다. 이런 뜻이 있어요.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글키고 뭐 이렇게 상처가 나는 그것 보다는 핍절해서 매우 약하게 되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1, 2절에 나오는 기도의 실천, 확신, 기도하는 올곧은 마음 이것에 비하면 3절의 내용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에 관한 매우 중요한 비밀을 담고 있죠. 그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않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불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고백 문에서 내가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내 영혼에 쉼이 없었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 불안정 혹은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한 미확정의 상태에서 오는 불안이었어요.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기도 생활 속에서 오는 이 시인의 불안은 그런 종류의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그것은 어떤 종류의 불안일까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분이 나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 그분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다 믿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실제적으로 그분과의 친밀함 이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데서 오는 경험적인 불안입니다. 모든 일들이 평탄하고 그리고 자기 원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많이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란이 닥쳤습니다. 시련이 왔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대두되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피하거나 넘어보려 하지 않고 하나님 의지하며 기도로 해결해보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영혼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 시켰습니다. 환란과 시련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용기는 시련을 만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는 데서 오는 확신이요.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담대함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면 이 시인이 그런 담대함을 가질 수가 없죠. 환란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적당히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인간의 마음속에는 적절한 자기 독립심이 있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덜 의지하려고 하죠. 그런데 시련이 닥쳤습니다. 큰 환란을 만났습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환경적인 기품이 밀려 닥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강력한 확신은 현재적인 하나님과의 친밀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런 것들을 이겨 나갈 수가 없죠. 이 시인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여 내 마음이 상합니다. 라고 고백을 했던 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 제일 먼저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했다고 했습니다. 이 기억의 기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련을 만날 때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주 많이 했던 경건의 기술입니다. 회고의 기술입니다. ‘자카르’ 라는 기억하다는 동사는 금지 명령과 함께 구약 성경에 아주 많이 사용됩니다. ‘잊지말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적인 경건의 기술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시련과 환란을 만나면 항상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많은 시련과 죄악 가운데 건져내어 주신 그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출애굽 사건 그리고 광야에서 각 나라들을 이긴 사건들 만나와 매추라기를 먹이신 사건 홍해를 건넌 사건은 더 유명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얻게 해 주신 큰 은혜 그 가나안 원주민들 자신들 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을 격파하던 그 승리의 때 이런 것들을 회상 하는 것입니다. 왕정이 세워지고 난 다음에도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이긴 것들 등등을 많이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이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지켜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개인의 삶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시편에 아주 많이 나오죠. 자 이제 권고했던 날에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승리하게 되었는지를 회상하게 되면 그 회상 자체가 커다란 확신을 주고 그러면서 이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신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를 방문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기억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는 행동들이었죠. 그래서 구약의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성소에 오르거나 혹은 왕들이 성전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혹은 최소한 성소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죠.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니까 불안하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왜 환란 날에 하나님을 기억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던 기억의 기술을 따라서 이 사람의 심령이 강해지고 새로워지고 확신이 생기고 하는 대신 불안하고 근심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 시인이 환란을 당하기 전에 태만한 신앙생활을 했고 환란을 당하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까 자신의 많은 죄들이 생각이 나서 그래서 이 환란이 결국은 나의 죄 때문에 미치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불안하고 근심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슨 뚜렷한 증거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전 오히려 그거 보다는 큰 환란을 당해서 영혼이 각성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그런 각성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인간은 죄에 대해서 아주 예민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풍부한 인상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즉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나면 반드시 두 가지 감정이 뒤따라오게 되는데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주 티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의 주권에 굴복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자기는 아주 더럽고 추한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의 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함에 대해 각성이 가져다주는 두 번째 결과예요. 그러니까 죄가 많다기 보다는 “뭐에다가 비교할 수 있을까.” “아! 좋은 비유가 생각났어요.” 밥에 커튼을 치고 그리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막 뛰어다니다가 이제 자요.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막 갭니다. 그리고 창문 커튼을 확 열면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죠. 그러면 전깃불 아래에서는 안 보이던 수많은 먼지들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특별히 많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고 심령이 아주 크게 각성이 되었을 때에는 이런 모든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자신의 불안정한 죄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강한 말하자면은 확신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감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될 때에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불완전한 존재이고 죄가 큰 인간이라고 하는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당연히 불안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긍정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지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안전한 인간인가를 깨닫고 온전해지기를 사모하게 되는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통의 문제는 간단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아주 중요하게 사용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숙시키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결케 하시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시인이 불안하고 근심한 이유죠. 그 불안의 이유는 사실은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깊은 신뢰가 생기기 전까지는 불안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날 버리면 어떡하나 내가 무언가 결함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부합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그런 근심들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심령이 연약해졌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연약하다. 상하도다. 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이런 걸 생각하면 되죠. 먹지도 못하고 많이 몸이 아파요. 앓아요. 그럼 육체적으로 기력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죠. 그래서 평소에 건강할 때면 넉넉히 들 수 있었던 물건도 들 수 없고 발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고 하면서 힘들어지게 되죠. 이런 것들이 그치고 이런 것들이 바로 영혼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와 같이 힘 있게 우리에 정신과 영혼이 활동을 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영혼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조나단 에드워드는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이다. 힘차게 운동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을 했어요. 뭐 어디 열정뿐이겠습니까? 불안하고 고통을 받을 때도 영혼이 막 힘차게 움직이죠. 그런데 그 움직이는 방향은 다르겠죠. 어째든 건강할 때에는 마치 물에 돌이 떨어지거나 바람이 불면 물이 막 흔들리고 나부끼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쉴 새 없이 막 움직이고 활동을 하겠죠. 그래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기뻐하는 것 아파하는 것 이런 감정들이 영혼이 활동을 하고 감점이 막 출렁거리면서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적인 변화들이 힘 있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령이 매우 약해지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아주 깊이 스며드는데 평소에 했던 기쁨 즐거움 희망 기대 이런 것들은 막 움직이던 영혼들의 움직임이 아주 둔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런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영혼이 각성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깨달으며 하나님께 다 가까이 가고자 하는데서 오는 하나의 갈등이고, 하나의 마음의 상함이라 하는 것이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하는 사람들만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고자 하는 사람들만 불결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신앙으로 걸어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 생활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이다. 라고 여겨지는 것이죠. 이것은 시인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을 때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돌아보게 되었는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시련이나 어려움도 역시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는 간구이고 또 하나님을 향해 매달리라고 하는 그 은혜의 표라고 하는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