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부른 노래를 기억함(1)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시77:4-9)
녹취자 : 이경순
시인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한 내면의 작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4절부터 10절 이하까지 상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4절부터 이어지는 이 전체를 보면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작용은 두 토막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오늘 읽은 구절까지에서 이 시인이 불안하고 많이 괴로워하는 거죠 많이 불안하고 괴로워하고 방황하고 힘들어 하는 그것이 한토막이고, 그러다가 10절에서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면서 다시 믿음을 갖게 되는 내용들이 이어지는 두 번째 토막 이예요. 이자체가 시련을 당한 신자의 마음 안에 교차하는 두 가지 인식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는 환란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나의 죄, 잘못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아마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진 차가운 징계요 하나님의 복수일 것이야 라고 하는 마음이 신자들에게 늘 있게 마련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의미냐면 이게 양심의 작용이거든요 양심, 그래서 인간의 양심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있는데 하나는 내가 어떤 일을 행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선한 일에 대해 상을 주실 것이고 악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벌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상필벌의 의식 이예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선을 행하거나 혹은 악을 행할 때 이렇게 선명하게 상을 받고 벌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만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도덕철학에서는 또 하나가 인간의 양심의 작용 속에 있다고 보는데 신트레시스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 이예요. 그것들이 살아 있어서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혹은 어떤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그것은 옳지 않지, 라는 판단이 서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실 때 혹은 어떤 일에 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실 때 그것은 지금 현재 내가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판단일수도 있고 혹은 모두 잊어버렸다가 시인처럼 환란을 당했을 때 자기의 옛날 일을 기억하면서 다시 이 판단위에 올려서 양심에 비추어 이것이 옳았나. 글렀나. 라고 하는 것들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러한 양심의 작용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미 오래전일인데요 연세가 많으신 어느 부인이 회심을 하셨어요. 정말 아주 놀라운 회심 이였어요. 심방을 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그때 그분 연세가 60이 훨씬 넘으셨으니까 이십 세 때 이야기를 하니까 40년 전 이야기인데 40년 전에 자기가 자기의 삶을 하나님이 확 비추어주시는데 너무 부끄럽고 마음이 아파서 회개를 했노라고 평소의 의식 속에는 이미 다 사라진 거죠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보니까 옛날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행했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 이제 새로운 가책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거죠. 그게 사실은 이러한 작용 신테레시스와 신상필벌의 법칙 같은 것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사람은 회개할 수 없거든요.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말 회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다면 사실은 회개하지 않는 거죠. 어쨌든 이 시인이 하나님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이 고백이 이 한절만을 보면 도대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죠. 그러나 문맥전체를 놓고 보면 여기에서 괴로워하는 이것이 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봐요. 현재의 환란의 상태의 불안정에서 오는 불안, 그것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게 되고 두 번째는 자기가 이런 환란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때에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행했던 일들에 대해서 오늘 징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고 하는 불안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죠. 거기에서 인간은 큰 떨림을 경험하는 것이죠. 이게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죠 아우구스누수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 사랑의 끈끈이에 붙어 있지 말게 하시옵소서. 그는 무엇인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어떤 접착제로 물건을 붙이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였어요. 그러니까 우리 신자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붙어있는것이 마땅한데 이 연합이 흐트러지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세상사랑 이나 혹은 마찬가지지만 자기사랑에 단단히 붙어있는거예요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떼어놓아서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붙이시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불안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네가 네 마음을 붙여놓고 있는 이러한 상태, 이것은 너에게 적합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런 양심의 작용들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소위 이야기 하는 conviction이 있거든요 죄에 대한 확신이 생길 때에도 이렇게 무엇인가 자기가 달라붙어있는 그것을 떼어놓는 그런 작용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거죠 여기에서 오는 불안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나는 괴로워서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죄에 대한 인식이죠. 그러니까 어떤 신자든지 간에 환란을 당하게 되면 한 번에 이 환란과 시련은 나의 어떠한 잘못과도 상관이 없고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섭리 속에 내게 주시는 시련이다 이렇게 대담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후에 이 시인처럼 나중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렇게 할 순 있죠.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은 별로 없죠. 그 속에서 내가 옛날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지나간 세월이 뭐냐면 내가 이런 시련과 환란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많은 환란, 시련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될 나의 당연한 이유, 그리고 내가 그런 것들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많은 괴로움들 지나간 나의 삶의 흔적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것이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생각을 하는 거죠 이렇게 함으로서 막 불안해지는 거죠 거기에서 접착되었던 것들이 흔들리는 거죠 막 흔들리는 거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밤에 부르는 노래를 내가 기억하였습니다.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에 간구하기를, 밤에 부른 노래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밤에 부른 노래일수도 있겠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하나의 은유죠. 그래서 인생의 캄캄한 밤과 같은 대조가 되는 거거든요 밤, 흑암 이것이 햇빛 , 혹은 빛, 대낮, 혹은 정오, 정오 대낮 햇빛 이런 개념들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진리와 함께 하는 삶이고 밤 어두움 흑암 이런 것들은 불안 절망, 진리의 빛이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 그런 그림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였습니다. 예전에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그래서 자신이 방황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인식하며 탄식하므로 하나님 앞에 불렀던 그 절망의 시간들을 기억한 거죠 그 밤에 이 노래는 하나님 앞에 부르는 노래였는데 그 노래는 시였겠죠. 자신을 하나님에 고백하며 드리는 탄원의 시였을 수도 있고 혹은 어두움 속에서 자기를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일수도 있었던 것이죠. 어쨌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그러면서 주님이 나를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이렇게 자기의 마음속에 오갔던 불안한 생각들을 토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은 버리신다는 개념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사람들은 지금 우리보다도 율법에 대한 훨씬 선명한 의식이 있었고 복음에 대해서 우리와 같이 이렇게 풍부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율법의 원래정신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은혜들의 정신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 율법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다. 라고 하는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하나의 경고였고 위협이었고 그리고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언약관계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실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주님이 나를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질문이라고 보기에는 주께서 영원히 나를 버리신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겠죠. 라고 하는 불안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두 가지가 가장 커다란 위안이 되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단지 우리와 명목상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그래서 이 은혜는 외적으로 그들의 모든 삶의 질서를 안정되게 하셔서 인도하시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먹을 것을 입을 것이 필요하면 입을 것을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외적인 섭리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뿐 아니라 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그들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이기고 유혹도 이기고 그렇게 베푸시는 은혜 함께하심과 은혜 베푸심 이 두 가지가 언약백성이 받는 가장 커다란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였어요. 이 결정적인 것을 제일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언약백성으로서의 모든 특권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이제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닐까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오는 이불안과 커다란 고통이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은 증표는 아닐까 하면서 깊은 고뇌를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약속도 폐하였는가, 다시 불안해하면서 노래하는 거죠 여기에 인자라 하고 하는 것은 헤세드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8절보다 뒤에 나오는 이유는 나는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언약백성이 하나님께 붙어있다고 하는 마지막 마지노 선이예요. 그래서 언약이 약속이 같이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해세드라고 하신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을 하나님의 대표적인 사랑의 표현 이예요. 이것이 영원히 끝났는가, 사실은 불가능 하거든요 언약백성과 하나님과의 맺으신 언약관계는 항상 인간에 의해서 파괴되었지 하나님에 의해서 파괴 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의 인자하심은 끝났는가? 이것을 이야기 할 때는 요즘 우리말로 말하자면 모든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망이 바닥까지 내려간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습니까. 주님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습니까?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은혜의 대표적인 표징이거든요. 언약 그 자체가 대표적인 약속하신 그 자체가 영원히 표지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의 아무 공로나 인간의 어떤 좋은 가치에 입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이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약속 이예요. 이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폐하셨습니까, 나 여호와가 인자한 여호와지만 너는 이미 나의 언약관계에서 끝났다 내 약속도 언약 안에 있는 나의 자손들에게 준 것이지 너에게 준 것은 아니다 이런 음성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란과 시련이 겹칠 때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지고 우리가 어떠한 죄가 운데 있을 때 깊이 고통을 받으며 우리의 양심에 깊은 찔림을 경험하게 될 때 이 시인과 같은 방황을 하나님 앞에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대서 우리를 떼어놓는 또 다른 은혜의 작용의 과정 이예요.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는 진정한 평안과 안정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에요 ,이러한 양심의 작용 그리고 고뇌의 작용을 통해서 정말 우리들이 힘없이 사랑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분밖에 없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어떠한 해가 됨이 없이 온전히 우리들이 헌신하고 긍휼히 여기실 분이 우리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신앙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이 시인을 거울삼으면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모든 양심의 작용으로부터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는 법은 없고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이 모든 불안과 고통의 작용들은 결국 하나님 아닌 것들에 붙어있는 우리의 사랑을 떼어놓고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놀라운 은총의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