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부른 노래를 기억함(2)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시77:4-9)
녹취자: 백지영
7절에서부터는 시인이 큰 환난을 당했을 때 자신의 마음이 미끄러질 뻔했던 기억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임에는 틀림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라고 하는 확실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이런 종류의 고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난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믿음으로 난관을 이겨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고통은 더해져만 갔습니다. 이때 내면의 세계에서 흔들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믿음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고,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는 난관을 이기는 어떤 강인함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이 믿음 하나면 되겠다. 이 믿음이면 충분히 모든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쉽게 그 강철 같았던 믿음이 흔들리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을 강조하면서, 마치 그 믿음이 내 안에서 생성되고 믿음 하나만 붙들면 모든 것을 이기고 극복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상당히 인위적(人爲的)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향해 펼치신 경륜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것은, -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부터 시작해서 구원받는 것, 그 다음에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고, 마지막에 영원한 세계에 들어간 그 후에 조차도 - 인간으로 하여금 혹은 모든 만물로 하여금 당신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내가 믿기만 하면 그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만능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지극히 자의적(恣意的)인 것이고, 성경의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저자를 성령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잘 믿는 믿음의 성향 그 자체가 성령의 손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 믿음이 없는 경우에도, 믿음이 있는 경우에도, 구원받기 전에도 구원받은 후에도 -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당신과의 관계를 독립과 의존의 관계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아름다움인 것이며, 신자(信者)에게 가장 추한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인 것입니다.
“나의 환난 날에 주를 찾았고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이 시인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 환난은 정도를 더하고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지고 고통은 증대되어 갔습니다. 그런 속에서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인 균열이 일어나면서 아주 작은 틈새를 파고 들어오는 바,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7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도와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커다란 환난을 당하고 지속적으로 시련이 계속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8절),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이 시인의 담대함은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 관계 속에서 베풀어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仁慈) ‘헤세드’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언약 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의심인 것이며 어떻게 보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언약관계에서의 약속은 은혜의 약속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어떤 의무의 조건 없이 은총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내미시는 혜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들이 다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9절). 더 나아가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9절). 아! 나의 어떤 잘못에 대해서 진노하시는구나.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나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기로 작정하셨는가보구나. 이렇게 7절부터 9절까지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묘사법을 통해 시인의 내적인 균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7절에서 8절, 9절로 점진적으로 더욱 심한 상상을 하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30편이나 다른 여러 시편에서도 시인들이 환난을 만나거나 커다란 시련을 접했을 때, 은총을 구하러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이러한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늘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환난과 시련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때 어느 정도까지는 믿음으로 지속이 되지만,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 은혜 베풀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셨는가, 내가 하나님께 미운 물건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뇌들로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말씀드린 당신의 위대한 경륜들을, -모든 피조물과 당신과의 관계를 독립과 의존의 관계로 만드시는-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패해지게 되면 우리 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릇된 안전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 나는 평안하다, 나는 충분하다, 하나님은 나를 계속 사랑하시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주님의 크신 돌보심 안에 있어서 내 인생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 낙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패한 심령의 특성으로 보며, ‘그릇된 안전의식’(false safety)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다.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작품이고, 그릇된 안전의식은 태만의 작품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다가오고 있는 위기나 어려움들을 인식하지 않는 데서 오는, 마음의 부요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부패, 영혼이 경계를 게을리 하는 태만에서 오는 안전의식인 것입니다.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우리는 환난 속에서 내적으로 이러한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보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거 없는 ‘그릇된 안전의식’이 함께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시련과 환난을 만난 신자의 마음 전체를 흔들어 놓으심으로써, 한편으로는 이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릇된 안전의식들을 떨쳐버릴 수 있게끔 기회를 주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련을 당했는데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관계, 삶에는 아무런 개선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말만 계속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영혼이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외부적인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섭리적인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각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과 그 거룩하심에 자신의 삶을 비추어 평가한 것이며, 그렇다면 전과는 다른 평가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이치로 보면 나만큼 괜찮은 사람이 없습니다. 윤리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고, 어디 가서 우스운 사람이라고, 하찮은 사람이라고, 너절한 인간이라고 짓밟히거나 모욕당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만큼만 살면 법 없이도 세상이 굴러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볼 때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의심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이야기하셨지만, 한 마음에 믿음과 의심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이나 환난을 만났을 때 시인이 느꼈던 의심과 흔들림을 통해서, 잠들었던 부패한 우리의 양심이 다시 일깨워지고 그래서 사물들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총명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마음의 작용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환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이러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건물 옥상 같은데 보면 큰 물통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래도록 물을 저장하게 되면 온갖 녹이 끼고 모래며, 먼지, 낙엽 같은 것들이 쌓이게 됩니다. 그것을 깨끗이 세척을 해서 씻어내고 다시 물을 부으면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엔진을 돌려서 묶었던 때들을, 그릇된 안전의식, 묶은 찌끼 같은 것들을 확 쏟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 잘 믿으면서 완전히 평화롭고 잔디밭 위를 걸어가는 것 같은 인생을 꿈꾸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환난과 시련을 인하여 기도할 때 그것을 물리쳐주실 때도 있지만 보다 많은 경우에는 은혜를 주셔서 그 시련을 견디게 하고, 오래 참게 하시고, 또 소망을 갖게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져서 주님을 앙망하게끔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라도 주님을 의존해야 할 필요가 없게끔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환난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이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장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주님 의지하면서 사는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