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불순종의 원인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시 78:30-31)
녹취자: 김유진
30절과 31절은 어제 나왔던 집요한 불순종의 뿌리가 무엇인가 보여줍니다. 그 불순종과 범죄의 뿌리는 탐심이었습니다. 성경에 탐심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탐심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원래 이 탐심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 제일 좁게는 성적인 욕망입니다. 둘째, 좀 더 넓게 사용되는 말이 인간으로서 분수에 어긋나는,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욕망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세 번째,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정욕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 세 가지가 세 개의 원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것이 제일 커다란 원이고, 그 다음 두 번째 것이 중간크기 원이고 첫 번째 말씀드린 바가 가장 작은 원입니다. 그러면 이 세원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느냐하면 넓이는 각각 다르지만 중심은 하나를 향합니다. 원이 비스듬하게 걸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운데 있는 작은 원의 중심을 뚫고 가는 축이 그 밖에 있는 두 번째 원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세 번째 원에 대에서도 가장 중심이다. 이 의미는 원이라는 것은 성질이 하나의 중심을 잡으면 그것을 컴퍼스로 아무리 확대해도 크기만 작으냐 크냐만 차이만 있을 뿐이지 중심은 아무리 크고 작은 원을 그려도 하나인 것처럼,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사람 가장 중심 속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자신의 인생이 주인 삼은 중심축이 존재합니다. 이 축이 얼마나 작은 범위를 그리느냐 큰 범위를 그리느냐 아니면 더 큰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이 자기 중심성은 다양한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크기는 각각 달라도 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사랑입니다.
오늘날 신문지상에 보면 성범죄가 만연합니다. 예전에는 교육을 별로 못 받은 사람들이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 못한 것이 일반적인 원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런 것이 광범위하게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시대의 정신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주인 삼으면서 살아가고 자신이 가진 욕망과 마음의 소원들을 밖으로 분출하면서 사는 것에서 도덕적인 기준들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학문이 있고 없고 식자고 무하자고 하는 것에 상관이 없이 광범위하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산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아무리 문화가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이러한 정신에 감염된 사회에서는 자기를 위한 소비가 중심을 이룹니다. 최근에 잡지에 보니까 "자신에게 선물하기"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날짜를 정해서 자기에서 선물을 합니다. 인간의 슬픈 군상을 보여줍니다. 자기에게 주는 것을 우리가 선물이라고 부르지 않고 공짜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몰두하다보면 다른 모든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교통 속에서 살게 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에 어긋납니다.
아담이 정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을 그 때만 행복했습니다. 그 고백이 사라지고 나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셔서 괴로운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리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은 안합니다. 성경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받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을 해서 마치 자기가 사랑받는 근거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제삼의 사랑에 있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오해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기가 사랑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탐심의 정체입니다. 이 탐심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우연적인 욕망의 분출들을 사용합니다. 비유를 한다면 탐심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경향이라고 말한다면 그 손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팥죽 끓듯이 올라왔다 사라지고 올라왔다 사라지는 그런 욕망들을 붙들게 될 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의 마음속에 탐심이라는 욕망의 경향성, 죄의 경향성이 없을 수는 없지만 현저히 부족하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정동들이 생겨나고 욕망들이 일어날 때 붙들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지만 하루를 살면서 얼마나 많은 욕망이 생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이 좋은 옷을 입으면 저 옷 가을이 왔는데 입으면 좋겠다는 욕망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한 욕망! 고단하고 그럴 때 여행을 가고 싶은 욕망! 그런 것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것이 모두 죄는 아니지만 심지어 죄가 아닌 중립적인 것부터 죄 된 욕망까지 막 가슴에 거품처럼 떠오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루에 십만 가지의 생각이 스쳐갑니다. 십만 가지 생각 중 그 사람의 성품이 성인과 같아서 90%가 선한 생각만 떠오르고 그럴 리 전혀 없지만 10%의 악한 생각만 떠올라도 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들을 붙들 힘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는 많은 것들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한 소원이 있으면 그 경향성에 맞는 소원을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탐심의 정체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마지막이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 끝나는데,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탐심이 곧 우상숭배니라 하면서 열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이 첫째 계명으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해서 탐심을 품지 말라는 계명이 결국은 우상숭배의 원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우상숭배라고 할 때, 지금도 물론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을 고백하면서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현대에 와서 더 많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외적인 우상숭배보다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탐심을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사랑 특별히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감격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의 세계는 탐심이 장악하고 있는데 십자가의 사랑은 탐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인데 이 두 정서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한순간 감상과 같은 것이 표피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가장 악한 사람에게도 선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고 가장 선 한 사람에게도 악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순간적인 욕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표피적인 것이지 심층적인 것은 아닙니다. 간헐적으로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악인이 아니고 간헐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쌓은 선에서 선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경은 탐심에 대해서 강력하게 권고하고 책망하면서 탐심을 버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탐심이 작용할 때는 한 번에 덮치듯이 작용할 때도 있지만, 서서히 의식 속에 파악되지 않도록 스며들어 어떤 사람을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반성과 자기성찰의 중요성을 고래로부터 강조하였습니다. 옛 성현들은 일일삼성이면 그 마음이 명경지수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한다면 그 마음이 거울과 같이 많은 물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백퍼센트 신뢰하지 않지만 그러나 욕망으로 출렁거리는 마음보다는 어떤 잔잔한 침잠 속에서 우리의 사리분별과 판단이 올바른 이치를 따르게 된다는 사실 만큼은 우리들이 쉽게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로 보면 이것도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성경에서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하나님께서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고 특별히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욕심을 지속적으로 간직했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길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입에 있을 때에 그들의 욕망을 채우자 새로운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탐심은 하나의 개별적인 욕망이 채워지면 또 다른 것, 또 다른 것으로 이동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성의 사악함을 드러냅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명예에 대한 욕망에서 성적인 욕망으로, 성적인 욕망에서 자기 우월감에 대한 욕망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휘돌면서 우리 마음속에 팥죽 끓듯이 솟아오르는 헤아릴 수없는 다양한 욕망과 만나서 그것으로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그것을 채우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갈망을 만듭니다.
자기 사랑의 욕망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욕망과 아주 흡사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켜야겠다는 그 중심성에 한 번 꽂히면 대용품으로는 만족이 안 됩니다. 돈을 얻어서 부요해지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위에서 칭찬해주면 욕망을 누그러뜨릴 수 있느냐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개별적인 욕망들이 극대화대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전까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고 그 하나를 만족시키면 또 다른 갈망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속에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기도시간에 늘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기쁨이 있고 지금이라도 순교의 자리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죽고자하는 자발적인 헌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마음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망들 중에서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 전도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끓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성향이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주제를 꼭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열렬하게 전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전도했고 그리고 또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갈망은 다 채워져서 "하나님을 위해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원이 없다"고 그러겠습니다. 아닙니다. 막 전도하다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여요. 저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실습니다. 팥죽 끓듯이 욕망이 솟아오릅니다. 그걸 딱 붙들었습니다. 다음에 그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수없이 떠올라요. 무엇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마음속에 어떤 소원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해도 이것이 마음속에서 충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더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욕망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게 하고 싶은 일 하나하나에 대한 욕망이 아주 끈끈한 끈을 이루면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탐심으로 바꾸어보면, 마음에서 팥죽 끓듯이 솟아오르는 정동들을 탐심의 경향성들이 붙습니다. 그 일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자신을 위해 할 것입니다. 다양한 많은 일들을 해도 그것은 하나씩 조각조각이 아니라 이 안에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고 자기를 가장 소중히 섬기고 싶다는 자기 사랑의 마음과 단단한 연결을 이루면서 모든 것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증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어느 한순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쓰레기 같고 이렇게 사는 자신 때문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뼈아픈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마치 매달린 모든 연들이 끈 떨어지면 모두 떨어지듯이,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하나하나 명예를 좇고 욕망을 좇고 부귀를 좇던 모든 것들이 의미 없는 일이 되어서 두두둑 떨어집니다. 뒤집어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전도도 하고, 성경도 배우고, 선교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고, 진리의 말씀도 가르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동안에는 이 모든 것이 연관을 이룹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변심해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을 두두둑 떨어집니다. 그런데 주변의 평판이나 자신의 의무 같은 것들이 있어서 그 일을 지속할 수도 있지만 이미 예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던 그 때의 그 원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탐심과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닮은꼴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불을 가슴에 품고서야 어떻게 타지 않겠느냐?" 사악한 욕망이 가슴에 타오를 때 우리 가슴을 데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여움을 나타내서 "강한 자를 죽이시고 이스라엘의 청년을 엎으셨도다." 강한 자, 청년은 말하자면 좀처럼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기운이 왕성한 자를 치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구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안하면 복수님의 불타서 죽여 버리는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경륜으로 볼 때 우리 개인은 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넓게는 인류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좁게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무리로 우리를 부르셨고, 더 좁게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즉, 여기에는 언약 안에 있지만 언약 밖으로 떨어져 나갈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 안에 하나의 구성요소로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강한 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엎으셨다고 할 때 이 사람들은 언약 안에 있었지만 언약을 파기하고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징벌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한 그 몸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광야에서 나타난 이일을 거울삼으면서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이 탐심이 하나님 사랑과 얼마나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 앞에서 탐심을 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