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으로 먹이신 예수님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그가 동풍을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의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 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 같이 내리셨도다
그가 그것들을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시 78:23-29)
녹취자: 김유진
그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과 불신앙에 대해서도 제시를 한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총과 능력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 한 사람을 놓고 보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회개할 것도 많지 않고 돌이킬 것도 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아무 기준 없이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우리를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부당해도 우리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기 편애라고 말하고 싶은데 인간은 언제든지 자기를 편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그렇게 자기를 편애한 인생의 마지막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진리의 빛입니다. 이 진리의 빛이 없이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우리를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공정하게 볼 때에 우리의 영혼도 아울러 함께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묵상하고 정확히 아는 것은 이렇게 편애에 빠지지 않는 아주 훌륭한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영 죽을 때까지 자기 편애의 습성을 버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과도하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빛이요, 진리의 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사물들을 보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를 바라보면 결코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편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과도한 자기 사랑과 집착을 버리고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겁니다.
목사님, 요즘 주위에서 보면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너무 사랑하지 않아서 학대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개발서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권하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결론을 내리자면 그렇게 자기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것들도 사실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건 왜 그럴까요? 진리의 빛이 없으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들이 자녀를 기르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고 주님의 교훈과 교양으로 자녀를 양육하고자 할 때는 문제가 별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이 부모가 자녀의 미래의 행복을 염려한 나머지 과도하게 그것에 집착하게 될 때, 자기 아이가 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아이에게 부당한 압박을 가하고 급기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은 있는데 자기 자식을 향한 사랑이 빗나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거잖아요. 오히려 무관심했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사랑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되었을 때, 그것이 절망, 자기 학대, 자기 원망, 자기포기로 이런 쪽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으로 수렴된 까리따스의 사랑만이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주지 이 사랑으로부터 일단 멀어지고 나면 모든 것들이 온전히 균형 잡히지 못하고 어디론가 치우치고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게 되어 있고 그래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원인이 사랑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사랑 때문에 불행해 집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모든 불행한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참된 사랑을 거짓으로 여기고 거짓된 사랑을 참된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하지 말아야할 것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해야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반역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구절 23절부터 29절까지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하나님이 베푸신 신실하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대표적 사건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만나를 베푸신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지고 온 양식이 모두 고갈되었을 즈음에 하나님이 그들의 선조들도 그들의 후손들도 들어보지 못했던 독특한 방법으로 이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약 300만 명쯤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적인 문제였고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먹는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셔서 하나님이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넌 다음부터 광야길을 시작한 다음부터 만나를 내리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은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다양한 이유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실하지 못한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인 모습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패역하게 떼를 쓰는 때에도 만나를 내리셨고 이 만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곡식을 거둘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한 것도 그 만나먹고 힘내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이 그 만나를 먹고 힘내서 죄짓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 모독하고 했는데도 계속 그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진노하심으로 어느 날 만나를 거두시거나 화내셔서 만나를 하나님께 못 먹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만나는 내렸고 그들은 그것을 일용할 양식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양식을 먹는 것은 인간의 육체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영혼에 은혜를 주시지만, 양식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먹게 해주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식량난 때문에 전 세계가 어려움에 처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식량은 하나님이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탐욕과 탐심에 의해서 공정하게 배분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곡식이 아주 많으면 곡물의 값을 올리기 위해 곡식을 태우거나 페기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탐욕 때문에 양식이 모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그냥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 이 곡식들을 짐승들에게 먹이는 거죠. 소고기 1kg을 얻기 위해 곡식 12kg을 소비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불균형들이 이 세계를 굶주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예를 들어도 1년에 북한에서 모자라는 양식이 150만 톤이고 우리가 남는 쌀이 150만 톤이라고 합니다.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합니다. 평균하여 그것을 누리기에 딱 맞게 우리나라에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이것이 막히고 유통이 안 되니까 굶어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난의 행군 때 200만 명이 넘는 -어떤 사람들은 400만 명이라는데- 굶어죽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듭니다.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서 우리가 도왔어야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는 처지에서 정말 후일에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나 인종이나 정치색이나 차별이 없이 그들에게 모두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져다 설령 군인들이 먹어야한다고 해도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져다 무기로 쓰지 않을 겁니다. 군인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 먹고 살 수 있다고 은혜를 베푼 것은, 종교와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지어 이슬람, 이슬람 무장단체에서 굶어죽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그들도 먹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품어야할 자비요, 언약백성들의 헤세드란 말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각을 해보면 이것은 가장 평범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가장 커다란 감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계속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성령충만하고 진실하게 잘 섬길 때만 일용할 양식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그 음식먹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죄지을 때조차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그 음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방종하게 사는 인간의 불신실함 사이를 대조하는 놀라운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주님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며 신앙생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깊이 의지해야합니다. 인간의 범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실 지도 모른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진노에 대한 생각이 우리의 죄를 억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뿌리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목매여 하는 마음, 그 은혜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께 온전히 빚진 자라는 이 사랑의 부채의식! 그 속에서만 자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그것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적인 죄죽임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나를 내리신 것에 대해 신명기 8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 해석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만나를 내리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만약 공정하고 신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굶주린 자신의 배를 매일 만나를 통해서 채우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를 음식을 만들어 줄 때, 아이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엄마,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 오늘도 내일도 배부르지만 우리의 영혼의 양식은 어디에 있나요?" 이 만나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물건들을 재조직하거나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곡식들을 모아서 어떤 조작으로 재생산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의 능력이 매일 아침마다 나타나서 우리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 양식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그 질문을 하기를 바랐던 겁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좋은 것들을 집약하고 조작하고 해가지고 우리에게 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지식의 조작이나 결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당신 자신이 내려 보내신 말씀이고, 이 말씀이 곧 이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실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부터 온 산 떡,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신명기 8장의 구속사적인 맥락을 가지고 당신 자신과 연결해서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사전입니다. 단순히 떡을 먹였다는 사건이 아니라 이것은 기독론적, 구속론적, 그리고 영생론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마 구약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서 이 사건보다도 더 깊은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 흔하지 않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둘째, 메추라기를 먹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 설음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때는 고기도 먹었는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에 쓸어버릴 정도로 악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먼지처럼 비처럼 사람들의 발목에 빠질 정도로 메추라기를 먹이셔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고 말할 때, 우리가 평범한 시기에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보이십니다.
때로는 심판을 통해 당신의 권능을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심판의 권능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사랑의 권능은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말할 수 없는 기적을 베푸셔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오게 하셨지만, 우리의 마음을 에이듯이 밀려오는 가장 큰 하나님의 권능을 그렇게 외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리고 내 영혼이 핍절하였을 때, 나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이고 하늘의 고기를 먹여 내 영혼을 살지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하나님의 은총과 그 사랑! 그 은혜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가장 커다란 기적을 보고 가장 위대한 권능을 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말합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오는 연한 줄기 같아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도다." 그런데 사실은 그 연약하신 분이 하나님의 권능이었고 능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거룩하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실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죄인들이 이렇게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묶으신 사랑과 은혜의 줄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쓰러질 때도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주님을 떠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즐거운 곳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라고 해도 나에게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밖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사랑의 줄에 더 단단히 묶이는 것, 그 사랑에 묶여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내게 죽어도 유익한 것이 내안에 주님이 사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