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노하신 것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시78:21~22)
녹취자 :이경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반역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고 물이 없을 때에 물이 넘쳤는데도 누가 능히 떡도 주시고 고기고 예비하시랴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셨다는 이야기가 21절에 나오는데 그것이 얼마나 컸는지 불같이 노하셨고 진노가 불타올랐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진노가 매우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의 하나님이 이렇게 불타오르는 진노를 하게 하셨던 것은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온 이 후부터 원망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난후 하나님이 제일먼저 아담에게 오셨습니다. 그가 언약의 당사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네가 어찌 이같이 행하셨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하와의 탓으로 자기의 범죄의 원인을 돌렸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죄가 처음 들어와서 한 일이 자기의 죄를 남의 탓으로 전가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놀라운 습성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정직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언제까지 오냐면 주는 의로우십니다. 라고 인정하고 그 판단 하에서 자기를 성찰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진심으로 돌이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의 특성자체가 바로 이렇게 회피하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부당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비난을 받으셔야 된다면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다루시는 처사가 정당하지 않고 불법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면 안 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지금 잘못 아셔서 혹은 하나님이 잘못 판단하셔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이나 어려움들을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난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이 잘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의 당신의 통제 안에 두시지 아니하거나 혹은 부주의함으로서 이런 어려움이 자기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보던지 간에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게는 합당한 비난일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고 보면 그러면 원망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매우 부당한 도전이고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어떤 식으로든지 원망하는 마음은 마지막에 결국은 그를 절망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 절망의 마지막 끝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가 스스로 파멸해버리는 것이 그 모든 절망의 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절망은 그래서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유일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고 동시에 육적인 죽음 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원망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심각한 죄요 그리고 도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 원망은 결국은 칼을 손에 들고 자신의 몸을 해치는 자해 행위입니다. 원망을 시작할 때 인간의 마음은 급속하게 굳어지기 시작하고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굳어지게 되면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도 무서워하지 않는 굳은 마음으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모두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중대한 자해행위입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극대화 되는 것이 결국은 뭐냐면 자살입니다. 오늘날 보면 이유도 없이 살인을 하고 불을 지르고 하는 그 무서운 범행들 미국 같은 나라는 총기를 난사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게 결국은 절망의 하나의 표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는 자기가 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간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원망과 그리고 좌절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그 범죄자 한사람이 체포되어서 조사를 다 해보니까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는데 휴대폰을 조사해보니까 아무에게도 메시지도 없고 통화도 없고 누구에게 보낸 메시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통이 완전하게 끊어질 때 그때에 아주 절망은 쉽게 오고 절망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자기 파멸의 길을 가기가 아주 십상인 것입니다. 이 사랑과 절망은 아주 놀라운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 극대화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누군가 사람을 깊이 사랑해도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원망하고 절망해도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했고 그 원망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면 도대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원망을 하게한 궁극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이 믿음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들이 흔히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심리적은 믿음하고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단순히 심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어떤 사실을 믿는 그러한 어떤 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고 믿기 때문에 믿는바에 대해 자신의 마음이 쏟아지고 기울어지고 믿기 때문에 믿는 그 대상의 말이나 약속들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런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철학자들은 믿는 성향이 곧 사랑하는 성향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믿어줍니다. 그것이 사랑 입니다. 그것이 또 사도바울이 고린도 13장에서 가르쳤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해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깊이 하면 할수록 서로를 오해할 여지가 현저히 적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이야기 했다면 굉장히 마음상하고 괴로워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왜 그 말을 했는지 자기가 이해할 수 없지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 속에 나에게 한 이 말속에 악의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가 레오10세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주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만 사랑이 반드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면 그 뒤에는 항상 사랑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뒤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진심으로 사랑하면 믿음이 항상 뒤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개의 사랑의 의미가 다릅니다. 자선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톨릭에선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그를 통해서 내게 제시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줄 마음이 생겨서 행위를 한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 안에서 솟아올라서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르틴 루터는 믿음중심으로 이 모든 것을 파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이 세 가지가 서로를 배제하면서 존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동일하게 그것은 사랑한다. 동일하게 그것은 의지한다는 표현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이 많을 때에는 사실은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고 굳건하죠. 예를 들어봅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큰 시련이 와서 나에게 고통을 준다고 합시다. 그런데 기도를 해요 그래서 이 환란이 이 시련이 나의 무슨 죄 때문에 오는 겁니까? 그런데 대답이 없습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추어 봅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것은 거리낌이 있든지 없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그렇겠습니까. 우리들이 남에 집에 가서 애기를 활짝 웃으면서 안아주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도리질을 치고 나를 밀어 내도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은데 어려움을 만나고 내가 비난을 당하고 시련의 고통이 내게 있는데 그것이 나의 죄든지 아니든 지간에 고통스럽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다. 그러한 모든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살아갈 때에는 이 세상을 향해서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 와서는 언제나 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그래서 아주 아름답게 묘사를 해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은 한사람의 바깥에서 모든 질서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제일 먼저 한 인간의 마음중심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시는데 그 마음중심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지의 마음 의존하는 마음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종교 심리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은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헤쳐갈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해주지만 이런 힘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은혜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세상의 힘을 많이 갖고 은혜의 힘이 없으면 없을수록 인간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교도소를 선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뭐 그중에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지만 결국 그렇게 흉악한 죄를 언도받았지만 말씀을 전할 때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형수들을 기독교에서 회심시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막 이야기 왔다 갔다 하면서 사형을 집행 안한다. 이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 마음들이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 입니다 그런 내용들이 오가지 않았을 때는 언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내일이라도 276번 형장으로 하면 가는 거니까 살아있어야지만 살아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국제적으로 사형집행을 못하도록 압력이 들어오고 그리고 이런 움직임들이 사회에서 강력하게 일어나니까 절대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우리에게 걱정거리가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부자연스럽고 어떤 때는 마음 아픈 것이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달라붙지 않고 이 세상으로부터 떼어져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주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상처가 나서 병균이 침투하면 온몸이 깨어 일어나서 거기에 피를 보내면서 병균을 잡아먹고 온몸이 깨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침의 원리가 그런 것입니다. 침을 콕 찌르면 몸이 어떻게 느끼냐하면 외부로부터 아주 의외의 공격이 온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몸이 확 깨어나고 잠자던 기능까지도 확 깨어나서 내 몸에 침투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던 몸의 에너지들을 일으켜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오고 그러면 침이 입니다. 꽉 하고 한번 찔리면 그담에 우리의 온 영혼과 신앙이 밑에서 깨어나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몸부림치며 반항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시험을 주시고 또 시련을 주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했고 이 원망은 하나님의 큰 진노를 불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인생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면서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상한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의 보좌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의 모든 형편이 자기를 배반하고 기대에 어긋나고 자기를 좌절하게 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서 주님 우러르고 바라보는 그런 시간과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