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흥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 85:6-7)
녹취자: 김지혜
이 구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로서 특히 부흥과 관련해서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이것을 평범한 문장으로 풀면 ‘하나님이여 우리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도록 해주십시오’ 이렇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 그들에게 나타난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의 미국을 바라보며 이 백성이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떨리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시고 탁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떨리는 것입니다. 이 앞에서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께 복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어떤 한계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기꺼운 순종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두려움만을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사랑스러우셔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리는 친밀함 속에서 진정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만큼만 온전히 기뻐할 수 있고 온전히 기뻐하는 만큼만 하나님을 올바르게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고 두려우신지를 보여주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어서 그 하나님께로 이끌리게 하며, 그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신 큰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본문에는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현재는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죽어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이 무엇이냐고 정의를 내릴 때 그 정의가 기막히게 적합해서 모든 사람이 수긍할만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생명의 특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타자에 대한 것입니다. 생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신진대사로서 자가 능력이 있습니다. 피가 돌고, 세포가 죽으면 다시 살아나고, 저녁에 자고나면 눈을 뜨게 되고, 무언가를 먹으면 소화가 되어 에너지가 되고, 또 그 에너지를 다 쓰면 배가 고픈 현상이 일어나는 등 스스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현상들이 살아있는 것들에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생명의 특징은 자기의 생명을 방해하거나 편안함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반응인데, 이것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로 나무로 만든 문화재들이 자주 불시 되는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집을 지을 때 일기가 좋고 순조로운 때 쑥쑥 자란 나무를 사용하면 나무가 마디지 않기 때문에 트고 갈라지고 벌레가 먹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문화재를 가꾸는데 사용할 나무를 가꾸는 숲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900ha정도 있는데 2000ha이상은 되어야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길러서 모든 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1년에 2mm씩 자란 나무들만 사용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일 년에 1cm이상 자란 나무까지 사용하고 있어서 나무의 마디 길이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날이 춥고 기후가 안 좋으면 나무가 천천히 자라고, 일기가 좋으면 나무가 쑥쑥 자라기 때문에 열대지방에서는 나무가 1년에도 몇 cm씩 큽니다. 50여년 됐다고 하는 나무를 보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400년 이상 된 것 같이 보인 나무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외부의 작용에 대한 반응이며 생명인데 죽음이란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피가 돌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고 신진대사가 멈추고 바깥에서 뭐라 해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죽음은 이와 다릅니다. 영혼은 처음부터 불멸하는 존재이므로 이런 식으로 소멸하거나 멸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스스로 신진대사를 한다기보다는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이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영혼은 영혼의 올바른 양식인 진리를 공급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 진리를 소화하고 영혼으로서의 독특한 기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기와 활력, 기운을 잃어버리고 힘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기뻐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게 되며, 영적인 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주 나태하고 게으르거나 거의 하지 않게 되고, 영혼을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 상태를 영혼의 죽음이라고 보면 다시 살려달라는 얘기는 다시 우리의 영혼에 진리의 빛을 주셔서 올바른 영혼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주님의 백성들이 당신을 기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면 당연히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이유는 부모와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그 부모를 진정으로 기뻐하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진정으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순종적인 행동이 효도입니다. 자식의 부모사랑이든지 부모의 자식사랑이든지 이것은 한결같이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영혼을 살려달라고 하는 이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것은 부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를 확 살아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7절에서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병행법으로 같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은 주의 구원이며,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자하심, 즉 헤세드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이 시인이 말하는 구원은 불신자이니까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아가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알고 다시 그 영혼이 살아나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탄원입니다. 왜 이런 탄원을 드리고 있을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의 삶을 살고 영혼이 죽은 자처럼 있는 그 비참한 상태가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향해 분노하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부흥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도 그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이렇게 교회를 하나님의 생기로 다시 살리셔서 주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기뻐하는 교회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빌어야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급한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