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의 범죄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시 107:17-18)
녹취자: 김 진아
여기서는 이제 그 하나님의 백성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메이게 된 원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련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미련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성경이 미련하다고 할 때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는 기능적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지식이나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비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을 미련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잠언에 미련하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의 일부에 내용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거보다도 보다 더 많은 경우에 이 미련하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오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인생을 사는 목적이라든지 방향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전적으로 그르치는 것을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이 미련은 따라서 판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힘이 없거나 그런 게 아니라 판단력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미련한자의 반대말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로운 자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경외함으로써 하나님이 뜻하시는 이 모든 인간세상의 질서와 심지어 사물들의 질서들을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할지, 어떻게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지,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판단력을 갖춘 사람을 가리켜서 지혜로운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가상적인 인물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그 근원적인 이유는 그가 미련하기 때문이다 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미련하게 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탁월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탁원한 지혜는 인간이 지혜로워지려고 애를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여기에서 진정한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깐 비록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면서 욕심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래도 비교적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지혜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으론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이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를 포기할 때 그때 진정으로 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대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게 될 때, 지혜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판단과 관련이 되고 이 판단은 대개 시간, 가치, 질서 이런 것들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볼까요? 우리가 어떤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치 있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간 있으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이 겉보기에 좋아 보이고 훌륭해 보여도 그것을 그렇게 집요하게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어볼까요? 여러분들이 집을 세 얻어서 살고 있는데 1년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1년 후에는 계약이 연장될 가능성도 있지만은 그러나 불확실해요. 그래서 1년 후에는 이 집을 비워주게 돼 있습니다. 그럴 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1년 후에 이사 가게 될 그 집에다가 큰돈을 들여서 실내장식을 꾸미지는 않을 겁니다. 왜? 어차피 1년 후에는 이 집을 내줘야되는데 그때 너무 아깝잖습니까? 자기 집이어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대개 이런 것입니다.
지혜는 이런 질서들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자신에게 누가 사랑해야할 사람이고, 누가 나의 의무를 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줄 사람이고 하는 것들을 파악을 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롭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가상적인 인물들은 미련하기 때문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악의 길을 따랐다. 길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길은 한번 길이 나면 사람들이 그길로 다니잖습니까? 그래서 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죄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기도 하고 또 자기 자신 안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습관화되어 걸어가는 그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들은 생각 없이 습관화된 죄악의 길을 계속 걸어서 따라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에 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흡연에 중독이 된 사람들이 그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힘이 들어서 편하게 담배를 피우고 그러면서 자신의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악을 범한다. ‘악’이라는 게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가 있습니다. 이 질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신앙생활에 있어서 좋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베어서 우리도 그 질서를 좋아하게 되는 것, 다시 말해서 강요받고 억압을 받는다는 느낌으로 그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 질서가 아름다운 줄을 알고 그 질서의 맛을 알아서 우리도 그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우리의 경향성이 되는 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다,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라는 각각 다른 말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을 범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질서를 싫어하고 자신이 독단적으로 질서를 다시 세우고 그 잘못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을 범하게 되면 결국은 마지막에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잘못했다고 징벌을 하시고 후려치시고 하는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고통이 오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이 모든 사물의 질서, 도덕의 질서 속에서도 우리가 그것을 거스르게 되면 우리에게 고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고 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질서들이 있잖습니까? 그 물질적인 질서들을 거스르게 되면, 우리의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나이가 들어서 근육 량도 줄고 운동량도 주는데 설탕을 많이 섭취하고 그리고 운동을 안 하고 그리고 술을 잔뜩 먹고 하게 되면 은 ‘너 왜 그렇게 술을 먹냐’ 이렇게 하나님이 징벌하시지 않아도 그 잘못되는 거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은혜생활 열심히 하면서 당뇨병 걸린 사람이 설탕을 퍼먹어보십시오. 그러면 은혜와는 상관없이 몸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큰일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도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지 않고 이렇게 잘못된 질서들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면 그러면 끊임없이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육체의 건강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건강 원리입니다. 물론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영혼의 고통이 오게 되는 것도 하나님 없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시편 107편에서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18절에서 이야기하는데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음식물을 싫어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만큼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육체가 쇠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더군다나 모든 음식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 한다면 ‘고난을 받아 그들은 식음을 전폐하게 되었고’ 정도의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깐 먹고 마시는 모든 것 자체가 싫다라고 하는 것은 삶의 의욕이 끊어진 것을 뜻하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사망으로 들어간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 문을 열고 깊은 사망 속으로, 시편에서 흔히 표현하듯이 스올로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18절이 그리고 있는 것은 결국은 절망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했던 모든 사람들이 돌이킴이 없이 그 길을 계속 가게 될 때 그들은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절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막상 그 욕망의 길을 걸어가 보고 나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깊은 절망이고 고통입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 하나님 없는 형통, 하나님 없는 즐거움, 하나님 없는 모든 희망은 마지막 그 끝이 이렇게 결국은 육체도 피폐하고 우리의 정신도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의 기쁨을 목표로 삶는 삶,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생활. 이것은 비록 걸어가는 그 길에는 고난이 보이고 시련이 보이고 때로는 우리자신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난관이 비칠지라도 마지막에 도달하고 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있고 그리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등지고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살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을 향해 주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희망이 이 절망적인 사람에게 어떻게 열리게 될까요? 내일 새벽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