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이시며 빛이신 예수님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추소서(시 80:1)
녹취자 : 김세나
이 시편 80편은 탄원시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곤궁한 형편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시는 바벨론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망할 때 그 때 즈음에 쓰여진 시가 아닐까 추측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 전편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을 허물고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간구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여기 이 요셉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구약에 나오는 족장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자주 그렇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종종 이 요셉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애칭으로 쓰여집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족장의 이름을 이스라엘, 어떤 때는 이스라엘 전체를 혹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 것과 유사한 예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애칭으로 요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야곱을 하나님이 어떠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하셨는가 생각해 보면 왜 이 요셉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의 애칭으로 사용하실 때 하나님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셨는지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을 때에는 야곱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보여주는 그림을 이스라엘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즉, 교만하고 인간적인 술수에 능하였지만, 그래서 늘 자신의 꾀 때문에 꾀에 빠져서 스스로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이 이 야곱과 주권적으로 약속을 맺으시고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총으로 그렇게 약사빠른 야곱을 결국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그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드러내 주신 당신의 성품과는 또 다른 빛을 요셉의 생애를 통해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알다시피 이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는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순전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본성 그 자체도 아버지처럼 약사빠르고 그리고 사기꾼과 같은 기질이 없는 아주 투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요셉이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애굽의 노예로 팔렸는데도 그 모든 일생 동안에 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리고 온갖 시련과 역경을 만나지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를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역경과 고난을 오히려 이 사람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이 간섭해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최고의 은총을 받은 사람, 이렇게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이스라엘을 하나의 상징하는 말로서 이제 이 요셉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요셉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요셉을 그렇게 섭리 가운데 인도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셉은 개인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어쨌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공감하는 단어이고 바로 이 목자라는 그림 속에는 비록 양을 치는 것이 직업이기는 하지만, 양과 선한 목자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직업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요즘도 아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두 입양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천여 명의 고아들이 외국으로 수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을 갓난 아이들을 어떻게 하든지 가정에서 길러서 성장해야지 이 아이들이 좋지, 시설에서 한꺼번에 젖병을 물리고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양이 안 된 아이들을 이제 입양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 보육계획을 세워서 상당한 돈을 주고 원하는 가정에 이 아이를 위탁해서 보육합니다. 그러면 이제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다가, 혹은 입양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달에 상당한 돈을 줍니다. 24시간 아이를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6개월 혹은 1년 계약을 하고 아이를 돌봅니다. 이 때에는 이 집이 아이를 기르고 나라에서 돈을 준다니까 아이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6개월 혹은 1년이 차서 그래서 이 아이를 돌려 보낼 때에는 그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아이를 양육하고 대가를 받았지만, 그러나 이 아이를 6개월, 1년 양육하는 동안 진심으로 이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자는 비록 양을 치는 것이 직업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소산으로 고기도 먹고 털도 쓰고 이렇지만, 이 양과 목자의 관계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이고 이것이 선한 목자의 도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떼를 사랑하고 양떼를 알고 그리고 언제든지 이 양떼를 위해서 맹수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목자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에 대하여 목자라고 말할 때, 그 그림은 이스라엘 사람 마음속에 훨씬 더 풍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다른 동물이 아니라 오직 양에 비유하신 이유는 양떼들이 목자를 의존하여 살게 되듯이 우리도 또한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양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라는 말이 그려주는 그림은 다른 모든 것 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야 할 존재다라고 하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호소합니다.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백성 중 어떤 사람이 너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 임금이 아닌 다른 모든 관리들과 벼슬을 갖은 사람들에게 호소해도 올바르게 자신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지 않을 때, 임금을 향하여 호소하는 간구가 바로 이 간구입니다. 성경은 종종 귀를 기울이소서 라고 하는 이 부르짖음을 하나님을 향해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의 백성들도 자신의 신들에게 이러한 호소를 하였고 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보증하는 증거자로서 땅과 하늘을 부를 때에도 이러한 동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귀를 기울여 달라는 간절한 간구는 다름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하나님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뚜렷한 인격적인 특징은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모든 것들이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저러한 것들을 주시고 이런 저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길로 인도하도록 역할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 도움을 받지만, 이런 것들을 의존하지 않고, 이런 것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매일 매일 살아가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매일 매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이스라엘의 목자인 하나님을 부르며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으니,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원하지 않는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통촉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만나거나 인생의 위기가 왔을 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해결의 길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붙들고 논쟁하고 사람을 붙들고 자기의 결백을 밝히고 사람을 붙들고 도움을 간구할 때 어떤 때는 모든 것들이 추해 보이는 적이 있습니다. 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혼자 힘으로 넉넉히 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깊이 늬우치며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할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양이 목자를 의지하는 것처럼 그 분께 호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는 이여 빛을 비추소서 라고 말합니다. 그룹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케룹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가까이 하다 라고 하는 동사, 카라브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약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핑계로 삼아서 부모를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변명에 대해 고르반이라는 단어를 쓰신 것을 보실 것입니다. 부모를 무언가를 가지고 섬겨야 하는데 아까우니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 바친 바 되었습니다라고 변명하며 자식으로서 부모공경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고르반이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룹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호위하고 있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호위하는 천사들의 이름입니다. 이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비추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빛이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것입니다. 자, 상황은 지금 이스라엘이 큰 위기를 만나서 악한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을 훼방하고 그리고 망가뜨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고, 빛을 비춰달라고 호소합니다. 이 빛은 무엇을 가리킬까. 성경에서 이 빛을 여러 용예로 사용하고 있는데, 제일 먼저는 물리적인 빛입니다. 보통 빛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빛을 윤리적인 빛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올바른 도덕적인 행실이 사람들에게 드러나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때는 이 빛이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3절에 보면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즉,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민족에게 침략을 당하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라진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시금 이 하나님이 나타내 보이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긍휼히 여기시는 임재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라가 되고, 그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이 모든 국가적인 시련에서 이스라엘이 구출받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하나님께 빛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빛을 잃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타락의 길로 갔기 때문에 주님의 강력한 임재의 영광이 사라졌으니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그러한 영적인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십시오 라는 탄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결국 이스라엘의 엄중한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해결이 무엇인가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주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언약 관계 속에서 당신의 은총을 베추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국방을 튼튼히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이고, 더 많은 군사와 무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나라의 많은 부를 헛된 곳에 써 버린 것도 후회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환란과 어려움이 올 것을 대비하여 서로가 분쟁하는 대신 일치하게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나라를 지킬 모든 힘들을 모으지 못하였던 것을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보다도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버렸고, 불순종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금 은총의 빛, 조상들에게 비추어 주시던 임마누엘의 빛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비추어 주시도록 호소하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의 어려움을 모두 호소하고 주님의 임재로 우리를 이기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