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간구함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8-10)
녹취자: 정윤미
이제, 서론을 마치고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본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예로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위한 말하자면, 간청이었습니다. 어떻게 오네시모를 만나게 되었고, 또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 되었는지는 성경이 가르쳐주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사도바울이 갇혀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오네시모를 이렇게 관계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성경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고 하였으니까, 분명히 사도바울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또 그 복음을 듣고, 거듭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아주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지극히 말하자면, 친밀한 그런 복음 안에서의 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을 보여줍니다. 아직 안 나오지만, 뒤로 내려가 보면, 이 사람이 자신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심복이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심복이 원래 심장이라는 말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인 성도와 목회자의 그런 관계가 아니라, 아주 그 말하자면, 뛰어나게 아주 그 깊은 그런 어떤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래서 사역 적으로도 이 사람과 많이 의논하고 사도바울의 분신처럼 옥 밖에서의 어떤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이 사람이 정말 오네시모를 구원하였고, 그리고, 그 사람 오네시모가 그렇게 구원받은 후에는 옥에 갇혀있는 사도바울을 위해서 그의 마음과 동일한 충성심과 헌신을 가지고 그 사도바울을 도와서 동역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사도바울은 아무튼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사도바울의 관심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많은 만나는 영혼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복음을 전한 사람을 내버려 두면, 저절로 신복이 되고 동역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를 끊임없이 돌보고,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붙들어주어서, 그래서 신복과 같은 동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는 옥에 갇혔으나,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사도와 함께 옥에 갇히지 않고, 옥을 넘어서 오네시모에게 전파되었고, 오네시모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도 편지를 쓸 때에 사도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자신이 옥에 갇혔지만, 그러나 기뻐한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전하고, 어떤 사람은 다투면서 전하지만, 어쨌든 그리스도 예수가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한다고 피력을 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이 오네시모에게도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도는 그 감옥 속에 갇힌 죄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한 사람은 옥에 갇힌 죄수이고, 한 사람은 옥밖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지극히 사랑해서 이 사람을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처지에서 보면, 정말 신분이 도망쳐 나온 노예밖에 안 되는 그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 때문에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해서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사도의 신복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니,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이 오네시모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아마, 그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가 바로 이런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전파했으면, 그 복음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겨서, 그래서 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라게 하고,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유용한 사람으로 삼는 그것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의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자가 되어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커다란 손해를 끼쳐드리고, 그리고, 도망친 노예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늘 있었고, 그렇게 하나님의 집에 손해를 끼치고 도망쳐 나온 노예와 같은 처지로서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외에 기다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탄원하시고, 그 탄원이 바로 사랑의 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죄짓고 멀리 떠난 그 인간들,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는 어쩔 수 없는 이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사랑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실 때에 일생동안 하신 일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고, 안타까워하셨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밖은 그 사악한 죄인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도바울이 예수께 배웠습니다. 그리고 배운 그 사랑, 자기가 받은 그 사랑, 받은바 그 은혜를 옥에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도바울이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아주 낮은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서, 그래서 빌레몬에게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는 “나는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거나 아니면, 오네시모를 이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거라”, 이렇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방법을 택하지를 않고,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도바울이 빌레몬의 마음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호소하고, 그래서 빌레몬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 그리고,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하늘나라의 신령한 양식들을, 말씀들을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도바울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받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사도바울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능지처참해야 마땅한 오네시모를 용서해 주고, 오히려 사도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대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그렇게 대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빌레몬에게 그저 자신의 가족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노예에 불과했고,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무 쓸모없는 사람을 위해서 사도바울이 사랑에 호소했습니다. 자, 그럼 빌레몬은 어떻게 해야 마땅했을 까요? 사도바울은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 얻는 과정, 신앙이 자라는 과정, 자기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섬기는 그 모든 과정을 은택을 다 입었지만, 빌레몬은 그런 이득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존경하는 목회자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자 그럼 빌레몬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도바울이 원하는 것은 “아유, 높은 분이 말씀하시니 내가 순종해야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여기에서 간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으로서, 어떤 사랑, 빌레몬을 향한 깊은 사랑으로써 우리 둘이 모두 그리스도 때문에 목자와 양이 되지 않았느냐?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기 전에 너는 예수님 사랑했고,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도망쳤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너의 노예,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주기를 바라시겠느냐? 나는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을 때에 도망쳐 나온 노예지만, 이제는 나의 동역자, 나의 아들이 되었다, 그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도, 내 안에 사랑도, 너 빌레몬 안에 있는 사랑도, 모두 하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내가 너의 사랑에 호소한다.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우리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간구하셨는데, 이 사람은 돈이 많으니, 이 사람은 재능이 있으니, 이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으니,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면서, 하나님이 긍휼이 여겨주시도록, 하나님께서 자기의 양떼들을 보호해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대부분의 내용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자기의 양떼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내려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면, 목회자도 그리스도 때문에 한 교회의 목자가 되었고, 양떼의 성도들도 그리스도 때문에 그 교회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돌아가면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 속에서 교회를 향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마치 빌레몬에 마음속에 있는 긍휼을 자극하려는 듯이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그리스도예수를 위한 갇힌 자가 되어서”, 나이는 많아 늙었습니다. 젊었을 때에 그렇게 패기 충천하던 사도바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옥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 사역을 위해 수고 하고 있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바로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나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면서 살았다고 치지만, 본질적으로 도망쳐 나온 노예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입은 그 은혜의 크기와 넓이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동역자들, 우리의 이웃들을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은혜를 내려주셔서 저희들이 아버지 앞에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도와 주셔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워지도록 주께서 역사해 주시고, 지켜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