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위로 주는 교제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 1:7)
녹취자: 문미경
앞 절에서는 빌레몬과 성도들 사이의 교제가 선을 알게 하고 또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이 얼마나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제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시고 은혜를 주신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교제였고 또 하나는 그런 교제 속에서 교제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리스도께로 그 모든 사람들을 이르도록 그렇게 역사하는 믿음의 교제였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7절에서는 사도바울이 개인적인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개인적인 은혜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너희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바울이 왜 빌레몬과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위로를 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이 빌레몬의 교제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건을 두고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알 수가 없지만 그게 한 두 개의 특정한 사건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 특정한 사건뿐만 아니라 그 오랫동안 빌레몬의 교제를 통해서 지난시절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교제는 단순히 인간관계를 가지고 사귀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제를 통해서 물질적인 것들도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불신자들이 비방했을 때 ‘통화통색’(通貨通色) 하는 무리들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여기서 색이라는 것은 남녀의 구분입니다. 이놈들이 교회를 가더니 남녀가 구분이 없이 섞여서 어울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통색입니다. 통화는 물질을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 당시 구한말에, 그 궁핍하고 어려울 때에 이상하게 예수 믿는 것들은 남녀가 모여서 성별의 구분 없이 어울리던가 하더니 가난한자와 부한 자들이 함께 모여서 물질을 서로 나누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때까지 거의 본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역사의 기록에도 보면 부자들이 회심을 한 다음에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흔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아주 기이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처럼 ‘코이노니아’, 교제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나눔을 동반하는 겁니다.
(예화) 어제 신문을 보니까, 후배목사교회인데 전국에 있는 매우 어려운 교회 180개를 선택해서 전교인을 180군데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냥 보낸 게 아니라 아이들과 어른들이 가서 자립하지 못하는 가난한 교회를 위해서 율동과 찬송과 먹을 것 등을 준비하고 그 교회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금을 가지고 가서 연말에 힘들어하던 교회를 도왔다는 기사였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이게 바로 교회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정말 가난한 교회들이 월세를 못 내서 쫓겨날 지경이 되고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그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교회가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게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럼 생각해봅시다. 교회를 해서 월세를 못 내서 쫓겨날 위기에 놓이고 성탄절이 오고 연말이 오는데도 교인들이 몇이 없고 교회가 어려우면 교인들은 떠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모든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이 사람들이 가서 그런 성탄절의 즐거움을 나누고 충분한 물질들을 교회에 나누어주고 180개 교회에 100만원만 갔다 줘도 2억 가까운 돈 아닙니까. 얼마 줬는지는 안 나왔는데 어쨌든 그런 도움을 줬을 때 그 도움 받은 교회가 평안해 질 거 아닙니까? 밀린 월세도 내고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따뜻한 것이구나.’ 가서 위로도 하고 이런 것들을 보면 교회가 기쁘지 않겠습니까? 평안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싸우고 분쟁하는데 빌레몬이 가서 화해를 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궁핍 속에 있고 무엇인가 조화가 깨트려져서 힘들어할 때 그럴 때에는 능력 있는 사람들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사도바울이 듣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마음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 ‘이 빌레몬이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구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자기 혼자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안의 형제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것을 사도바울이 깊이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들려오는 이야기는 항상 긍정적이고 기쁜 소식만은 아니었습니다. 골로새의 이쪽지방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비롯해서 핍박들이 있었습니다. 만만하고 쉬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소식 저런 소식이 많이 들리는데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갈 때 기쁘고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많겠습니까? 더욱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괴기들과 도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믿음 안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변질된 사람들, 예전에는 주님을 깊이 만났지만 죄에 감염이 되어 부패된 사람, 넘어진 사람, 쓰러진 사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왜 사도바울에게 고통들과 괴로움이 없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적절한 때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염려 속에서 일생을 살았는데 그에게 정말 기쁨이 되는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진정 기쁨을 줄만한 소식은 바로 성도들이 섬김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고 그들이 그리스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그들이 빌레몬의 섬김을 통해서 더욱 선에 이르는 그런 교회가 되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속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너무 기쁜 일만 일어나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약점을 보고 그러면서 마음이 깊이 낮아지는 겁니다.
(예화) 얼마 전에 책을 다 썼는데 갑자기 어느 날, 낙심하는 마음이 확 밀려오는 겁니다. ‘이게 책이라고 썼나.’ 한때는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별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해집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살면 우리에게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쁜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가지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옥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부자유할 때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사도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었고 고난 속에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교회에 영적으로 병들고 연약한 지체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끊임없이 당신의 교회는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매일매일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 교회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시던 그리스도께서 그런 성도들의 아름다운 섬김을 보면서 기쁨과 위로를 얻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머리되심의 그리스도의 기쁨과 위로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겁니다.
오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하루를 지내면서 힘들었던 일, 상처 받던 일, 괴로웠던 일, 이런 일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나로 말미암아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었을까? 나라는 존재가 어떤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었을까? 한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생각이 발산적이어야 합니다. 자꾸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모든 생각이 자신에게 집중되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 내가 얼마나 힘든가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샘솟듯이 솟아나면서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그렇게 됩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왜 시련과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삶에 우연적인 겪음을 초월해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이 우리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기쁨과 위로를 얻도록 그리스도교회에 근심과 염려대신 기쁨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나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렇게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