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인정받은 종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2-23)
녹취자 : 정유선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써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종들을 불러서 자기 소유를 맡겼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한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종에게는 많이 맡기고 어떤 종에게는 조금 맡긴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설교할 때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 설교는 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다섯 달란트를 맡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안 들기 때문에 저는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훨씬 친근합니다. 이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가서 즉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란트 맡은 사람도 그렇게 했다고 했으니까 아마 똑같이 장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왔을 때 각자 이제 그 동안 자신이 행한 대로 주인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맡은 자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랬습니다. 두 달란트 맡은 사람도 갖고 가서 그랬더니 똑같이 칭찬을 했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이 너무 돈에 대해서 굳은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 이것을 하다가 잃어버리든지 밑지면 어떡할까 하고 그냥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말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러면서 책망을 했습니다. 여기가지는 우리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섯 달란트 맡은 종, 두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해서 주인이 칭찬한 말을 보면 세 가지 점에서 이 두 종들은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잘하였도다’라는 인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나는 재능이 뛰어나지 못하니 내가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나는 교회가 크지 못하니 나는 분명히 못하는 걸 거야’, ‘나는 하나님을 큰 일로 섬기지 못하니 내가 잘하나 못하나 큰 차이가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라는 가정은 쓸데없는 거지만. 여러분 한 번 퀴즈를 내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이 가서 열심히 해서 한 달란트를 남겨가지고 왔으면 주인이 뭐라고 했을까요? 또 똑같이 “그렇지, 잘 하였도다.”, ‘잘하였도다’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큰 헌금을 하겠습니까. 노래를 못 부르는데 어떻게 성가대를 하겠습니까. 아니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사람들은 자꾸 생각할 때 자기에게는 없는 것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꾸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그게 없기 때문에 뭘 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미 그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삶에 대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평생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하고 쓸모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혹시 안 주신 줄 알고 잘 몰라볼 수 있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주셨는지 안 주셨는지 너무 잘 아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당신이 안 주신 것을 가지고 얼마나 잘하나 이걸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얼마나 잘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아, 그게 나한테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은혜가 떨어져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주님 내가 이렇게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이것도 나이 많아서 무르팍이 고장이 나서 기동을 못하면 못나옵니다. 이것도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능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마찬가집니다. 허황된 사람은 자기에게는 전혀 없는 것, 계발하고 계발해 봐도 전혀 나올 가능성이 없는 것을 가지고 그게 없다고 투덜대고 낙심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정말 특이하게 생각해 봐야 될 게 뭐냐 하면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누구는 다섯 개를 맡기고 왜 난 두 개를 맡기나’ 이렇게 불평하고 투덜거리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것은 왜 그랬느냐고 종들이 주인에게 책망하면서 물어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기 다른 재능, 다른 것들을 주셔서 하나님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것을 가지고 잘하는 것,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잘하는 것. 그래서 마지막에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주님이 ‘잘했다’ 이렇게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는 잘하는 것입니다.
(예화) 요새도 할머니 생각이 가끔 나는데 우리 할머니가 저 어렸을 때 가끔 사랑과 일하는 것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얘야, 옛날에 어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렸단다.” 옛날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남자가 새 여자에게 푹 빠진 겁니다. 말하자면 옛날에 소실입니다. 이 남자가 양말이 떨어져서 양말을 꿰매야 됩니다.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양말 깁는 법도 학교에서 남학생들도 다 가르쳐 줬잖습니까. 전구를 집어넣고 속에 헝겊을 넣고 꿰매라고 가르쳐 줬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자가 작은집에 가서 양말이 떨어졌으니까 휙 던지면서 양말 좀 꿰매라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양말을 꿰매고 그러더니 다 양말을 꿰맨 다음에 신던 양말이니 냄새가 날 것 아닙니까. 그러더니 코를 막고 가위를 가지고 오더니 마지막 실밥을 딱 하고 자르더라는 겁니다. 그러다 또 며칠 지났더니 또 양말에 구멍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큰집에 가서 양말을 휙 던져주고 꿰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부인이 양말을 다 꿰매더니 이빨로 실을 끊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거기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집에 가서 남편 양말 꿰맬 때 꼭 이빨로 끊기 바랍니다. 사랑은 결국은 그 사람을 향해 하는 일을 통해서 결국은 묻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예화) 일본 역사에 보면 주인이 새벽마다 말을 타러 나가는데 어느 날 보니까 신발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면서 “신발 어딨냐?” 그랬더니 종이 품 속에서 꺼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딱 보기에 자기 신발을 훔쳐가려고 그러다가 걸린 걸로 본 겁니다. 호통을 치고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매일 매일 그 주인의 구두를 일찍 나와서 품속에 넣고 따뜻하게 덥혀서 댓돌 위에다 올려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면 결국은 마지막에 그 사람을 향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하는 것이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얼마의 달란트를 맡겨주셨든지 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착하다’라는 인정이었습니다. 착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자녀들 길러보셨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말 착하구나, 우리 아들 정말 착해” 그리고 등을 두드려주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안아주는 때는 언제입니까. 엄마, 아빠의 뜻을 잘 따르는 행동을 했을 때 그때 우리는 ‘착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착하다 그러실까요? 그냥 물에 물탄 것처럼 흐리멍덩한 사람, 누구하고도 절대 싸울 줄 모르는 늘 주눅 든 사람, 아니면 무지렁이 같아서 사람들한테 쥐어 박혀도 기 한번 펴지 못하는 비굴한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착하다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잘못됐을 때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 ‘착하다’라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하나님 당신의 생각과 뜻을 그대로 따르면서 살 때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뜻이면 언제나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착하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착하다’라는 말이 성경에는 종종 ‘합하다’라는 말로 나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뒤따라오는 자” 이렇게 나옵니다.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고 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 얘가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뒤따라올까.” 그것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것이 착한 겁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무지렁이 같고 누구한테 바른 소리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은 착하고 착한 사람은 불의와 악을 보면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지만 함께 그렇게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동정, 그리고 긍휼이 있습니다. 그것이 착한 사람입니다.
종종 목회자들을 만나면 교회도 크고 세상말로 보면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착하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확신에 차고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그리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착하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옛날 모두 못된 사람들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물론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셨을 때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강조해야 될 것은 늘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면서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이렇게 변화되어 가면서 우리가 착한 사람들이 되어간 겁니다. 오늘날은 어디를 돌아봐도 착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이 살기에 점점 부적합한 세상이 된 겁니다. 왜요? 그렇게 부적합하게 착한 사람이라도 인정받으며 살면 이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절대로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우리들이 아이들을 교육할 때는 “착한 사람이 되거라.” 하지만 요즘 부모들이 자녀 교육시키면서 “착한 사람이 돼라” 그러는 집안이 어디 있습니까? 맞고 오면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하며 더 때립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착하다는 개념 자체가 이미 모두 붕괴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 이게 하나님의 일꾼에 가장 중요한 증거고 일곱 집사를 최초로 세울 때에도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착한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 착한 인격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됩시다. 아멘
마지막 세 번째 ‘충성된 종아’ 그러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충성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어느 한 순간에 발끈하고 하나님을 위한 신경질을 낸다든지 말도 안 되지만 뭔가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면서 뜻대로 안될 때 발끈하고 파르르 하고 성질을 부리는 것 이런 것들이 충성이 아닙니다. 충성은 그 사람의 인격의 특징입니다. 게으른 사람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고 나태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어서는 충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충성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인격의 특징입니다. 그럼 그 충성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충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것에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예화) 제가 우체국장을 하다가 직장을 그만뒀는데 우표를 사러오는 고객 가운데 한 사람이 있는데 우표수집광입니다. 새로 우표가 나오면 첫 새벽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 사갑니다. 이 사람이 진귀한 우표를 모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끄트머리가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상품가치가 떨어지잖습니까. 그러니까 옛날 얘기죠. 부부가 한방을 쓰고 애들 둘이 한 방을 쓰고 방 두 개를 전세 살던 사람인데 한 방을 빼서 도로 세를 놓고 그리고 네 식구가 합친 다음에 그 전세금 방 하나 뺀 걸로 일본에 가서 금고를 사옵디다. 그리고 그걸 방구석에 놓고 방습이 되는 금고를.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표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저 애들하고 같이 살더라고 그 우표를 잘 보관하고 싶은 겁니다. 결국은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로 마음이 쏠리게 되어 있고 충성은 결국은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는 겁니다. 그건 흉내 낼 수 없는 겁니다.
(예화) 어제 제가 이재실 목사님 얘기를 해드렸잖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시고 변하시니까 가장 뚜렷한 변화가 충성스럽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새벽 세 시면 사모님하고 봉고 두 대를 몰고 교인들을 실어 날랐는데 일주일이나 이주일은 할 수 있겠지요. 특별기도 기간에. 그런데 그걸 매일 한다는 게 가능합니까? 그 연세에. 그런데 그걸 합니다. 왜? 하나님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이른 새벽밥을 하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것은 노동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돈을 주실 수 있고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주실 수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이 부족해서 교회가 잘 안되면 재능 있는 사람을 보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계처럼 우리들을 사랑하게끔 그렇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 찬송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충성한 우리들을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마음은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될 때에는 누가 충성스러운지 누가 아부하는 사람인지 분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 주님 따르는 것이 득이 되는 것보다는 손실이 되고 주님 따르는 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많을 때 변함없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될 때 거기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비록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크게 쓰임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얼 맡겨 주셨든지 간에 세 가지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됩시다. 작은 일을 맡았어도 주님이 마지막에는 ‘참 잘했구나’ ‘잘하였다’ 인정을 받읍시다. 그리고 ‘착하다’ 그리고 ‘충성된 종이구나’ 인정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