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기뻐하심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녹취자: 박연주B
아마 신약 성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몇 개의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 일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는가 하니 그 바로 앞에서는 에녹의 이야기를 하다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야기가 나왔고 그 앞에는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그러면 아벨과 에녹이 나오는데 아벨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고 에녹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아벨은 제사를 드리는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벨과 가인이 나오는데 하나님 앞에 각기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아벨은 진정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 해석이 쉽지 않은 문제인데 존 오웬은 청교도 신학자는 이 문제를 이렇게 풉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미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직후에 두 가지를 인류에게 주시는데 하나는 그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시고 또 하나는 죄 때문에 당신과 만날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한시적으로라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게 바로 제사를 통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 후 즉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계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벨은 그제사법에 순종하여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그 제사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그게 결국은 믿음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어쨌든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기쁘게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은 사람과 기쁘지 않게 받았다는 차이는 제물과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릴 때 드리는 제사 행위와 이제껏 살아온 삶이 일치할 때는 살아있는 제사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그 제사 자체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가 될 수 없고 믿음으로 올리는 제사일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죄 속에서 깊이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로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보려 합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 하시나니 기뻐하였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왜 제사장이 없습니까? 아니면 짐승이 없습니까? 한 나라의 왕인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앞에 너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산제사라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영적 예배는 11시에 드리는 한 시간 반 동안의 예배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제물과 헌제자가 일치할 때 그 제사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제사가 됩니다. 정리를 하자면 아벨의 믿음을 이야기 하다가 봐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그랬으니까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이었느냐 하면은 자기가 가진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헌제의 삶이었고 자신의 삶과 제사가 일치하는 생활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두 번째 에녹에 대해서 하면서 하나님이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뱀이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하였더니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였는데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 그래서 뱀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질 것이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죽고 죽는 이야기로 창세기 5장을 도배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단 한사람이 나와서 이 죽음이 모든 인류가 경험하는 것이긴 하지만 숙명적인 것은 아니고 또 다른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바로 이 에녹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 에녹을 기뻐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신 에녹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에녹의 위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니 창세기에 뭐라고 나오냐 하면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그것이 끝입니다. 설마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해석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도 자식 낳고 사는데 안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그 속에도 아주 크고 비밀스런 일이 담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새벽시간이니까 꽤 긴 이야기를 필요로 해요 또 한 구절이 유일하게 에녹에 대해서 나오는데 유다서에요 유다서를 보면 유다서가 이 사람을 아담의 칠세 손으로 밝히면서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이 언뜻 나타나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선지자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제시가 되요 정보가 부족하긴 하지만 어쨌든 에녹을 종합해 보면 결국 그의 믿음이란 무엇이었는가? 모두 이세상이 죄에 물들고 하나님께 대적하며 살아가는 세상이었는데 거기서 올곧게 하나님을 믿는 성결한 사람으로 살면서 그 하나님이 당신을 떠나서 이렇게 패역한 세상 대해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외치면서 자신은 그 세상의 풍조를 거슬리면서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두 가지를 다 종합하면 어떤 결론이 나와요? 아벨은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리는 헌신의 삶으로 자기의 믿음을 보인 사람이고 에녹은 더러운 세상에서 성결하게 살며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던 사람으로서 자기의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러다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브리서를 쓸 때 수신자들은 이미 먹구름처럼 피어나는 로마의 조직적인 박해아래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10장에 보면 사람들의 핍박과 박해가 무서워서 잘 모이려고 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때에 히브리서 기자는 아마도 사도 바울로 여겨지는 기록자는 믿음을 또 하나 제시하면서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무리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마지막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더욱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였던 것입니다.
그럼 11장 6절로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제일 첫째는 무엇을 믿어야 하면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이 듭니다. 아니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 믿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막연한 신의 존재의 가능성에 동의를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께 올렸던 가장 큰 찬송 제목의 하나가 무엇이냐면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어느 때 그의 앞에 나아가 뵈올꼬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계시다고 할 때의 하나님은 돌멩이로 만든 석상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계시다 하면 인격적인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고 당신의 능력과 권위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자신의 삶을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목회하면서 낙심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믿음이 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일생을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더 절망적이고 비참한 때에도 어린 나이에 더 뜨겁고 열렬한 믿음을 가질 때가 많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의 가능성에 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고 나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실패에 익숙해지고 그 다음에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은 마귀가 박수칠 일이에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실수 있는 분이시다 라고 하는 확신과 신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안 되었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될 것이라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 병아리를 길러봤습니다. 싸리가지를 엮어가지고 덮어 놓는 병아리 홰에다가 병아리를 넣어 놓고 한참 기르면 이 속에서 병아리가 점점 커집니다. 주인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전할 테니까 돌아다니면서 지렁이도 잡아먹게 해줘야지 그리고 한 달 만에 이렇게 뚜껑을 엽니다. 그럼 병아리들이 안 움직여요 왜냐하면 그 속에 갇혀있는 동안에 나가려고 몇 번 해보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홰를 들어버려도 동그란데 뭉쳐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발로 땅을 한번 쳐줍니다. 그러면 병아리들이 튀어나가면 병아리가 눈을 껌뻑껌뻑 합니다. 아 이게 튀어나와도 갈 수있는거구나. 그러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어촌 전도를 나가보면 전도대원과 목사님이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대원들은 전도하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고 목사님은 해도 안 된다는 믿음을. 이해는 합니다. 오래 해봤는데 거기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깨야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돌아가시면 교회강대에 엎드려 기도하시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대로 그냥 가다가 내 인생을 끝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 눈물도 쏟고 땀도 쏟고 피도 한번 쏟아서 장렬하게 산하 하더라도 뭔가 여기 하나님의 교회에 큰 영광을 볼 것인가 딴 교회 갈 생각하지 말고 오라는데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인들은 그런 걸 좋아합니다. 갈 데도 없다 이런 목사를 좋아합니다. 나오라는 데 많다는 목사는 싫어합니다.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상은 무엇입니까?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졸업식을 했는데 졸업생 모두에게 상을 주었다는데 그건 상이 아닙니다. 한사람씩 나와서 모든 졸업생에게 상장을 주면 애들이 그걸 집에 갖고 가서 과연 방에다 걸어다 놓을까? 모든 사람들이 받았다는데. 상은 모든 사람이 받는 게 아니라 그중에 한두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올림픽 하는 것을 보았잖아요? 수많은 사람이 스케이트를 하고 그 사람들이 자기나라에서 치열하게 경쟁에서 한두 사람 뽑혀서 가고, 뽑힌 사람이 예선에서 수없이 경쟁하고 몇 명만 올라가고 몇 명 올라간 그 사람이 마지막에 경쟁하는 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세 명, 그것도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그 중에서도 금메달 탄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느냐? 자기를 찾는 자에게 베푸십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단어는 구약성경에도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나 하고 무슨 바늘 잃어버린 것처럼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려서 찾는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맞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되게 하고 싶은 사람이 되게 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추구한다,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반짝하고 하는 일이 아니라 일평생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왕들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그는 일평생 다윗의 길로 행하였도다 나쁜 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도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산 사람의 대표자는 다윗, 배교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산 사람은 여로보암, 두 사람이 길이 있어서 이 사람은 다윗의 길, 이 사람은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진실하게 기도하며 하루를 연다고 내 목회가 금시발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한편 설교를 열심히 준비한 것과 대충 준비한 것 사이의 차이를 사람들은 모를 수 있습니다. 준비 안하고 올라갔는데도 은혜를 끼칠 수도 있고 준비하고 올라갔는데도 은혜가 없을 수도 있고,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은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그것을 보시고 그런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하나 이어지면서 하나님이 이 목회자는 나를 찾았던 사람이고 이 사람은 아니다. 판단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루아침에 끝나는 게 아니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이 소중하고 그분의 이름이 존귀하고 그분이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무엇을 하면서 주를 위해 살든지 간에 마음속에 넘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속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우리의 마음에 넘쳐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하면서 사도를 괴롭힐 때 뭐라고 말합니까? 결국은 그렇게 야단을 치다가 마지막에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러면서 마음속에 불 일듯 사랑이 일어나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젠 내가 사는 것 아니요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아래서 사는 것이라 자신의 혈기로 할 것 같으면 폭발했겠지만 그러나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요 자기 안에 사신 이가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리스도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살려 주셨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사랑이 주님을 찾고 추구하고 말도 되지 않는 대접을 받으면서도 목회의 길을 가게 만들었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합을 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은 그것을 좋은 일로 바꾸셔서 그 나쁜 일이 안 일어난 것보다도 더 좋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마시고 절대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주의 종들이 되어서 생명을 살리는 이 일에 헌신하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