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9 (95. 1. 22)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2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욘3:3~5)
왜,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설교를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하는데 부흥회라고 써 붙이면 은혜가 되고 안 써 붙이면 은혜가 좀 덜 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드리고 그 다음에 여기를 나가겠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러니까 그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말씀을 전하는 자의 각오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에요. 즉, 집회 때는 이게 한번 지나가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절박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또 저도 지난 주간에 집회를 했습니다만 태어나서 여태까지 집회를 하면서 금년처럼 긴장 해본 적이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은 없는데 다른 교회 집회 나가는 것의 세 배, 네 배, 다섯 배나 긴장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말씀을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못 받으면 어떻게 하나? 야! 이러면 정말 큰일이다. 흡족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긴장 속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런 사모함속에서 말씀을 듣죠. 사람들은 오늘 저녁에 말씀이 열리기를 낮에 매달려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평시 주일에는 볼 수 없던 일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준비된 곳에 가서 집회를 하는 것은 정말 즐겁고 쉬운 일이에요. 피곤하지도 않아요. 그냥 술술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마구 감격하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많이 사모하니까. 준비되지 않은 곳에 가서 집회하는 것은 고통이에요. 보따리 싸서 오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들을 기억하면서 저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영원히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가 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죠? 이전에 우리 중학교 때만 해도 교회는 다섯 번 모였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다시 부활되기를 원해요. 어떻게 모였는지 아세요? 주일아침, 저녁, 수요일, 금요일오전,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 5일 예배로 모였어요. 5일 예배……. 5일 예배로 모여서 말씀을 쭉 듣고 정상적인 예배를 드린 다음에 그 다음에 기도에 불이 붙으면 더 기도하고 그것 가지고 모자라면 각자 남아서 철야를 했어요. 왜 그렇게 옛날 선조들이 그렇게 예배를 중시했던 이유가 무엇이죠?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그런 예배가 다시 재연되어서 주일 예배, 삼일예배, 오일예배, 정 급하면 이일예배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서 늘 깨어지고 발견하고 은혜를 받는다면 부흥회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수련회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늘 그렇게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해결되고 치유 받는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면 영원히 이런 것 써서 붙이고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렇죠? 말씀 한번 듣고 무엇을 압니까? 포식하고 끝납니까? 아니면 기도40일만 호흡하고 그 다음에는 입 다물고 사십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모든 것들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만큼 평소에 정상적인 영적인 생활을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제 3장부터 시작을 해서 어쨌든 4장 끝까지 나가겠어요. 몇 주에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들으시면서 그 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메시지를 들으면서 궁극적으로 요나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실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부탁드리는 것은 그런 사모하는 심정으로 우리들이 요나서를 2장까지 들은 마음으로 3장, 4장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집회의 마지막시간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니까 하나님이 간섭은 하셨지만 음성은 들려주시지 않으셨어요. 음성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간섭을 안 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기억하셔야 되요. 음성은 없어도 하나님은 간섭하시는 것이에요. 어떻게? 손으로 포위망을 좁혀 오시는 것이에요. 말로 안하셔요. 환경으로 하시고 행동으로 하심으로 좁혀 들어오는 것이죠. 기도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뢰는 기도가 올라가는 문을 얘기하는 것 아니에요? 기도의 문이 막히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도 우리는 들을 수가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의 진수를 체험한다면 기도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이고 그리고 기도는 훨씬 더 풍성해질 것이에요. 우리는 늘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과의 무엇이다? 대화인데 대화가 되고 있습니까? 대화가 아니에요. 한쪽에서는 가만히 계시는데 한쪽에서만 부르릉 해놓고 ‘이상 끝’ 해놓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에요. 통고지요. 그렇지요? 기도의 경지는 깊이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께 아뢰고 그리고 나는 또 한참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또 나에게 말씀을 하시고 그러면 또 한참 있다가 내가 또 말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또 말씀하시고 이것이 대화에요. 이게 기도란 말이에요. 그렇지요? 그런데 들려온다는 개념은 우리는 이미 접어둔 것이에요.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를 쪽지에다 다 써가지고 가서 ‘주님! 시작하옵나이다.’ 그리고 드르륵 한 다음에 ‘이상 끝’ 그리고 돌아선다는 얘기에요. 이것은 인격적인 기도가 아니라는 얘기죠. 그렇지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심에 있어서 환경을 통해서도 응답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도 응답해주시고, 여러 가지로 응답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믿어요.
그렇지만 깊은 기도의 경지 속에 들어갔던 신앙의 사람들을 성경 속에서 보세요.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그들은 주님과의 영적인 교통 속에서 응답을 받아냈어요. 저는 지금 신비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만큼 기도의 세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세계에는 신비한 면이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어때요? 그러나 그것이 끊어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간섭을 안하시느냐하면 아니죠. 절대 간섭하셔요. 행동으로 간섭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행동으로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요나를 향한 관심과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그 눈빛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자기의 인생에 간섭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는 만족하며 살 수 없어요. 무슨 의미인지 좀 더 설명을 드릴게요. 하나님이 이렇게 간섭하시는데 그 손길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도 어렵지만 설령 또 요나와 같이 막판에 가서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키셨구나! 나를 바다에 던져라! 그러면 바다의 파도가 잔잔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까지 나아갈 정도로 간섭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라고 할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그 손길을 분명하게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내 마음속에 충만한 은혜와 오늘 말씀드린 것 같은 생명수가 솟아나는 것 같은 하나님의 교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 얘기예요. 잘 기억하셔야 되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환경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 가지고는 만족을 해서는 안 돼요. 심지어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 가지고도 만족하면 안 돼요. 예를 들어볼까요.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잡히실 때에, 그 때에 심문을 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사람들이 막 이 예수를 어떻게 할까? 이야기를 하니까 ‘한 사람이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이 유익하니라.’ 성경은 자기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고 했거든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아닌데 부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예언했어요. 그런데 그게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무 상관이 없거든요. 아무상관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잘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죠.
요나를 하나님이 주목하셨어요. 그리고 계속 간섭하셨어요. 그렇지만 음성을 들리지 않는 것이에요. 왜 그래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순종이 쌓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쌓여진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복 산에서 말씀하셨지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이 어떤 자들이 하나님을 본다고요? ‘마음이 청결한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 팔복가운데 제일 기초가 되는 복은 일복이고, 최고 꼭대기에 있는 복은 바로 그 복이에요. ‘마음이 청결한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러니까 복중에서 지복, 가장 그 팔복 산의 꼭대기에 있는 복이(가장 밑바탕은 첫 번째 복이고, 가장 그 복중에서 최상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그 복이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에요. ‘마음이 청결한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보면서 말하는 이러한 일들을 이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의 복으로 꼽으셨던 것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 청결한 사람들에게……. 씻긴 사람들에게……. 죄와 허물과 부패와 불순종이 씻기고 정화된 사람들의 마음만이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되었을 때에 결국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만 직면하게 하고 거기서 깊이 회개하고 대면한 다음에 결국은 두 번째로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일단은 회개를 했어요.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또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일단은 자기의 불순종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깊이 슬퍼하고, 그리고 회개했어요.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 두 번째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죠? 하나님과 막혔던 교제의 문들이 다시 열리기 전에는 먼저 풍랑을 겪고……. 풍랑을 왜 겪었어요? 깨닫지 못하니까 겪은 것이지요. 깨닫지 못하면 풍랑을 겪고, 풍랑을 통해서 비로소 기필코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세우고, 일대일로 세운다음에 거기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뉘우치게 하고, 뉘우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돈된 다음에 청결한 마음을 주시고, 거기에 신령한 빛을 비추시는 것이에요. 신령한 빛을 쭉 비추시는 것이에요.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쫙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3장에서의 요나의 감격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런 깊이 있는 영적인 생활을 한다면 우리들이 굉장히 잘 알 수 있어요. 주님이 오셔서 다시 한 번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시니라.’ 이 두 번째라는 말이 얼마나 재미있어요? 첫 번째에 임할 때는 하나님이 한량없는 은혜를 요나에게 주시면서 사명을 주셨어요. 그러나 두 번째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는 변함없으신 분이셨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듣는 요나는 불순종하고 실패한 사람이었어요. 완전히 죄악 가운데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다가 자신의 힘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불순종의 길을 더욱 가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바다에서 건져내셔서 토해내게 할 정도로 이렇게 극악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에게도 두 번째로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 그리고 어찌하든지 그 새로워진 관계 속에서 주님을 붙들고 살기를 원하는 이러한 진실한 소원이 사람들의 마음가운데 역사할 때에 주님은 이렇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에게도 주님께서 두 번째로 하늘을 여시는 것이에요. 가치가 없잖아요. 그런데 여시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선지서를(언제 기회 있으면 그것도 합시다.) 쫙 보면……. 선지서를 보면서 우리들은 선지자들이 얼마나 고난을 받고 잘했나! 그것만을 보지 말고 선지자들 속에 그 잠시 잠깐씩 얼마나 그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는 이러한 말하자면 쓴 뿌리들이 간단없이, 끊임없이 돋아났던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큰 능력의 선지자도 말이에요. 시냇가에 주저앉아서 ‘아! 이제 죽여주시옵소서!’ 절망하는 것이죠. 그것은 어때요? 패역한 것이죠. 그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현존하시는 임재를 체험했던 사람이 그렇게 살면 되나요? 안되지요! 안 돼요! 인간이 그래요. 은혜를 많이 받아도 불순종해요. 은혜가 깊은 사람의 불순종은 더 교묘해요. 은혜가 신통치 않은 사람의 불순종은 교회에 안 나와 버리거든요. 간단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그러거든요. 주일날 놀러가면서 ‘이러면 안 되지?’ 주일저녁에 열심히 화투치고 있는 시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이에요. ‘이러다가 하나님이 나를 손을 보시지…….’ 이런 생각이 가득 차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은 결코 그렇게까지 안 해요. 아무리 시험에 들어도 졸지언정…….교회는 나와요. 나와요! 그리고 많이는 아니라도 헌금도 드리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나름대로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교묘하다는 것이에요.
요나에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하늘을 여시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주님께서 두 번째 나왔다가 가셨어요. 정결한 마음, 그 속에서 신령함이 빛이 나는 거예요. 찬송가를 지었던 사람들의 영적인 통찰이 뛰어난 것이에요. ‘정결한마음, 그 속에서 신령한 빛이 나니…….’ 결국은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의 마음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고 말씀이 주어졌어요. 여러 말씀이 주어졌지만 그러나 여기서 핵심적인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이냐 하면 ‘니느웨로 가라.’ 는 것이죠.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옛날 얘기가 그대로 되풀이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요나가 결국은 그 말씀대로 일어나게 되었어요.
인간이 침체와 낙담으로부터 상처로부터 인간이 결심을 하고 이렇게 일어나야 되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참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주님이 나의 엎드려진 이 상태에 대해서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깨닫는 것. 그래서 우리 교회에 가끔 사람들이 오잖아요? 그럼 무엇을 해야 할 생각들이 가득 차있어요. 개척교회는 연약하니까 가서 무엇을 좀 도와줄까? 그러지 좀 말아요. 우리는 필요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러한 삶으로서 계속해서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 그 직면하기를 싫어하는 그런 타성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개척교회에 가서 무엇을 좀 도와드릴까요?’ ‘우리는 도움이 필요 없다. 교사들도 넘치고, 구역장들도 넘치고, 다 넘치니까 걱정하지 말고 와서 말씀을 들어라.’ 그런데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렇게 봉사를 하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냥 열심 있는 교인하나가 오면 말이죠. 우리교회가 개척교회이니까 엎드려서 할아버지 할 줄 알지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해서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띄워놓으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만날 길이 멀어지는 것이에요. ‘아무소리 하지 말고 등록하지 않아도 좋고 헌금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라.’ 그러면 속으로 뭐라고 그러냐하면 ‘그래도 내가 왕년에 뭐도 하고, 뭐도 했는데 아니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서도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이 무슨 지하실의 조그마한 교회가(화장실 옆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교회가…….)아주 나를 알기를 우습게 아네?’ 아니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게 아니라 대단하게 알아서 그래요. 대단하게……. 그게 뭐에요? 여기가 뭐 노동하는 데가 아니잖아요? 와서 봉사하는 것은 귀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봉사를 하라는 것이에요. 우선 좀 숨을 돌리고 은혜를 받아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저 아프리카 난민처럼 생긴 사람이 삽을 들고 와가지고 우리나라에 홍수 났다고 도와준다고 그러면 제발 말려요. 뼈가 부러진다고 제발 좀…….
여러분! 먼저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그러시는지 깨닫고 변화를 받아야 해요. 일 년, 이년, 삼년, 사년 계속 듣고만 있어도 안 되지요. 은혜를 받았으면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겨야 해요. 교회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요일 날 계속하고 있지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서 시편86편을 하고 있잖아요? 그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우리들이 정리되는 것이 있지요? 그것은 뭐에요? 진정한 영적인 생활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여기서도 보면 결국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니까 말씀대로 일어났다고 했어요. 말씀대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메시지가 먼저 있으니까 그 다음에 일어났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소녀에게 다가가서 소녀가 일어나서 찬미하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생명이 있음을 노래하기 전에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났어요? 다리다쿰(딸아! 일어나라) 주님의 음성이 먼저 들렸어요. 그리고 비로소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요. 일어나는 일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렇잖아요? 똑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확신해요. 확신이 아니라 뭐 틀림이 없는 것이에요. 뭐냐 하면 그가 영적으로 아무리 곤고하고, 정말 흉악한 죄 가운데 있고, 완전히 진흙바닥 속에 있고, 그리고 꼴깍 꼴깍 죽을 것 같은 위기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눈이 빛나는 한 그의 영혼은 다시 살아요. 아주 속히……. 그것은 틀림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한순간의 시선의 부딪히는 것을 통해서 그를 문제 가운데 건져내실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허기진 사람이 누구냐 하면 굉장히 헌신도 있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면서 눈빛이 간 사람들이에요. 아주 불행해요. 그래서 옛날에 언젠가 한번 교사대학 할 때인가 한번 얘기했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셔서 말씀이 폭포수와 같이 터져 나올 때 계속 주무시고 그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러다가 여러 해가 지났는데 기도원에서 완전히 죽을 상황이 되어서 만난 집사님 이야기를 했지요. 며칠 전에 돌아가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그 길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시해주시고, 그리고 그 길은 강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셔요. 그러나 잘 기억하셔요. 그러나 그 기회는 무한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말해요? ‘저희의 영혼은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것같이 부끄러운 것이 될 것이나 그러나 저희의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준바 되어서…….’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의 기회가 지나가면 그만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그 길 앞에 우리들은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주어지니까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물고기로부터 토해내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하늘이 열리고 말씀이 주어질 때 요나가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이죠. 뱃속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요나 자신은 물속에 빠졌을 때 살아나는 것이 목표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살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에요. 혼동하면 안 돼요. 우리는 시험에 빠지고 시련에 들었을 때 이 고통스러운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만,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를 그 험한 시험의 물결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목표가 아니에요. 주님이 왜 요나가 탄 배의 바다에만 훅하고 바람을 던지시고 그 배만 흔들고 결국은 물고기가 먹게 하시고 거기에 토해놓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다 나타나잖아요? 요나가 딱 토해내침을 당한 다음에 말씀이 임하셔서 ‘요나야 네가 얼마나 물고기 뱃속에서 수고가 많았느냐? 얼굴에 붙은 그 미역줄거리나 좀 떼어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뭐에요? ‘니느웨, 네가 거기에 가라, 빨리 가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너무하시지 않아요? 좀 너무하죠. 어떤 면에서? 아니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그 가시하나 붙들고 미역을 뒤집어쓰면서 죽다 살아났는데 좀 회복이 필요하잖아요. 요양을 해야지요. 링거하나를 꽂아 주신 다든지……. 미음도 좀 쑤어주시고 그리고 기력을 회복한 다음에 가야될 것 아니에요? 그러나 딱 토해내침을 당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쫙……. 무엇을 먹었겠어요? 육지에 토해내침을 당했는데……. 먹기 뭘 먹어요. 그야말로 굶식이지……. 그 자의반 타의반으로 금식을 한 거예요. 그리고 삼일을 굶고 눈에 퀭하니 들어가서 먹은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는데 꺽꺽 하고 있는 요나에게 찾아가서 ‘요나야!’ ‘네!’ ‘빨리 가라, 빨리! 빨리 원위치, 가라!’ 이게 하나님의 시각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어야 해요? 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는 우리들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그 뜻대로 실천하고, 그러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 되어야지 그게 아니라 다른 것이 즐거움이 되면 큰일 나는 것이에요. 그게 누구냐 하면 광야에서 만나를 하나님이 끊임없이 내리시는데 만나는 싫다고 그러고 참외 좀 먹었으면……. 정력에는 마늘이 좋다는데……. 부추김치가 얼마나 맛이 있는데……. 그러면서 애급의 고기가마 곁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에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간섭하시면서 인생이 고달파지는 것이에요. 빨리 돌아서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 요나 한사람의 행복, 요나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것, 요나를 뱃속에서 건져내는 것, 그런 것이 아니에요. 여기보세요. 압도적으로 이 성경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 니느웨의 죽어갈 백성들, 심판을 눈앞에 둔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가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거기를 따라서 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셨어요? 그렇지 않아요. 요나가 이제 말씀이 주어지니까 그 다음에 일어나는 거예요.
‘니느웨로 가니라.’ 그런데 ‘니느웨는 큰 성이므로 삼일길이더라’ 이것 가지고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많아요. 삼일길이라……. 여러분! 남자가 부지런히 하루에 10시간을 걸으면 시속 4Km씩 칠 수 있어요. 40Km를 걷는다고 보죠. 물론 마라톤 선수처럼 뛰면 2시간 40분이면 40킬로를 뛸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계속 열 시간씩 할 수는 없잖아요? 대개 40Km정도로 봐요. 그러면 이게 삼일길이라고하면 그리고 만약에 더 걷는다면, 24시간을 계속 걷는다면 그러면 엄청난 길이가 되겠지요. 삼일길이라는 것은 고대의 이렇게 큰 도시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삼일길이라는 말은 서울이 며칠길이나 되느냐고 물을 때에 애매한 것이죠. 그렇지요? 말하자면 남태령에서부터 수유리까지를 얘기하는지, 아니면 저기 명일동서부터 시작해서 불광동 쪽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지요. 서울이 며칠길이냐? 옛날의 이 시대 사람들의 며칠길이라 하는 말을 어떻게 표현했느냐하면 중요한 곳을 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을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삼일 길이라는 말은 니느웨 성읍의 중요한 곳을 관람하고 돌아보는데 삼일길이 걸린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니느웨가 전설이라고 그랬는데 성터가 발견되었어요. 19세기 20세기에 들어와서 발견이 되었는데 성의 둘레가 약 90Km정도니까 그것을 만약에 넷으로 나누면 22,5Km정도 되니까 그러니까 한쪽 변이 약 50리 정도 되는 그런 굉장히 커다란 성읍이죠. 그런데 성이 어느 정도냐 하면 높이가 30m, 두께는 만리장성 스타일로 쌓았는데 큰 마차 3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성이에요. 틀림없이 토성이었을 것이에요. 그쪽 지방에는 워낙 흙이 많으니까 토성으로 지나가는 것이죠. 그럴 정도의 엄청난 큰 성읍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촌사람이(촌사람이죠? 그렇죠?) 거기를 딱 들어간 거예요. 딱 들어가서 쳐다보니까 기가 막힌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를 미국의 가장 번화한 뉴욕에 갖다 놓은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에요. 아마 저 시골의 사는 사람을 울릉도쯤 사는 사람들 불러다가 LA쯤 갖다가 놓은 것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에요. 이건 뭐 어마어마한 선진대국이죠. 그 앞에서 요나는 정말 왜소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사람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서 있을 때에 그들은 결코 문제 앞에서 왜소해질 수 없어요. 쉽게 얘기해서 요나가 거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너는 무엇이냐?’ 그러면서 발길로 차고 성문에 들어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연약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작은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시는 사람이에요? 그렇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누구에게 함께 하셔요? 은혜를 받고 사명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려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요.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강력하게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환경과 둘러싸인 니느웨성과 같이 엄청나게 보이는 그 성읍 앞에서도 고요히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 성에 들어가면서 외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던 모양이에요. ‘사십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 그러면서 이제 그 성읍으로 들어가면서 외치는 것이에요. 삼일길인데 하루밖에 안 걸었거든요. 하루를 걸어 다니면서 회개하라는 말도 아니었어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하루밖에 안 돌아다녔는데 삼일길이나 되는 니느웨성의 모든 사람들이 큰 사람, 작은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베옷을 입고 그리고 회개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어요. 막 회개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의 영혼이 각성하게 되는 것은 많은 말을 통해서 각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말하자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 우리의 삶의 현주소를 직격으로 찌르는 단 한마디의 말로써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질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단 한마디의 말 그리고 단 한마디의 선포가 이 니느웨 사람들의 심장에 가서 박혔고, 그리고 그들은 즉시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념을 가져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제 열린 교회에서 일 년 가까이 약 320시간 정도를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전에 잘못 생각하던 것들이 정리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요. 그리고 그것이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계속해서 속에서 체계가 잡혀가지고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되는 것이에요. 보세요. 여러분 오늘날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요소라고 말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우습게 여겨요. 그 이유는 무엇이에요? 성령을 체험했으나 너무나 불안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리니까 쉽게 얘기해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거는 기대가 너무 없는 것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아시죠?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그것이 말하자면 견고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생각이 정돈되지 않으니까 성령의 체험을 해도 뭔가 번쩍하는 생명은 나타나는데 그 불씨를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그런 모든 체계와 힘들이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체계를 잡아가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극한 혼동이나 아니면 넘어짐으로부터 우리들을 지켜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체계가 잡혀지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앙의 눈을 가지고 이제 오류가 바로 잡히면서 바른 것들을 보게 될 때에 주위에서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들과 신앙의 문제들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그리고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 오해들을 어느 것이 잘못된 생각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러한 신앙적인 인식이 탁월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이것이 결코 저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저는 이 사실 하나를 가지고 너무나 고통 받는 교회의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주신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사사기 2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섬겼어요.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율법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믿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에요.
여러분! 쉽게 생각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인 사이트(신앙에 대한 어떤 깊은 통찰력)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우리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깨달을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들 속에 이러한 문제들을 분별하고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쌓여가게 되는 것이에요. 왜 오늘 이 이야기를 드리느냐하면 이 니느웨 백성들은 죄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였어요.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심판을 눈앞에 두면서도 전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렇지요?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 앞에 위기가 다가왔다고 하는 사실을 한 번에 깨닫게 만들어준 사건이 무엇이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고 온 이 요나의 메시지였어요. ‘사십일 후에 망한다.’ 그리니까 온 백성들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것이에요. 물같이……. 요나가 이 같은 일을 기대했을까요? 안했을까요? 그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뒤에 보면 알지만 그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삼장을 보면서 또 사장을 보면서 깨닫는 바는 무엇이냐 하면 요나가 불순종함으로 이 니느웨로 들어가지 않았던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백성들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우선적인 것은 가장 월등하게 그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만들었던 요소는 내가 보기에는 니느웨성에 찾아가는 두려움 그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두 번째 ‘들어가라 니느웨로 가라.’ 할 때에 이 요나는 죽음에 넘나드는 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그는 ‘죽더라도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자.’하며 들어갔을 것이라는 계산이 4장을 강해하다가 보면 상당히 정확하게 드러나요.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게 되어가지고 거기서 하룻길을 행하며 회개하라 외쳤는데 말하자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이렇게 외쳤는데 백성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것이 무엇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지적을 해준 것이었죠. 무엇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것이……. 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야훼를 믿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즉시 그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나라에 외국 사람들이 찾아오면 금방 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아볼 수 있었고, 그가 그렇게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칠 때 그 사람들은 즉시 어떻게 하기 시작했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제까지 자기네들이 믿던 신들을 신들에 대한 관념들이 다 무너지는 것이에요. 왜? 그 신들이 자신들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깨닫는 것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지요. 두려움.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두려움도 있어요. 큰 두려움이 떨어지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은 그 두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요.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두려움은 두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큰 두려움이 이들에게 임한 것이에요. 그리고 어떤 일들이 일어났느냐하면 5절에 보니까 니느웨 백성이 어떻게 하고? 하나님을 믿고 두 번째는 금식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무론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첫째 하나님을 믿었다는 신앙을 만들어냈어요. 이 요나의 메시지가 신앙을 불러일으켰어요. 믿음을 일으켰다는 것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어때요? 우리를 위로하는 메시지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다가왔다는 메시지도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에요. 이 세례요한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던 방식을 보십시오. 그는
A면과 B면 사이
하나님이 멸망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굳이 심판의 무서움을 알릴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무슨 뜻이에요? 보기 싫어서 무슨 핑계를 잡아서 두드려 팰 것인가를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말릴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웃으면서 다가가서 패는 것이죠. 그러나 아이들에게 매의 무서움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때리고 싶다는 것이에요? 아니면 말고 싶다는 것이에요? ‘너 오늘 말 안 들으면 (몽둥이를 직접 보여줍니다.) 이 몽둥이로 삼십대를 맞는다.’ 삼십대를 강조해야 되요. 그 얘기는 무슨 이야기에요? 겁먹고 내말 좀 들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지요. 겁먹고 내말 좀 들어라. 그것이죠. 평소에 유감이 있어서 너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너는 내손에 죽는다. 벼르고 살다가 마침 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면 그러면 웃으면서 다가가서 패는 것이에요. 군대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하는 이 간단한 메시지 앞에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졸지에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느냐? 그것은 이 사람들은 가난한 심령으로 ‘선지자여 이번 사경회에 오시옵소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우리가 깨지겠나이다.’ 그러면서 사십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았어요. 제멋대로 살아가다가 딱 나타났는데 선지자가 ‘사십일이면 무너진다.’ 선지자가 이것을 외침으로써 사람들이 그냥 눈물을 흘리고 돌아와야 될 텐데…….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죽이려면 죽여 나는 이리가도 죽고 저리가도 죽으면 마찬가지니까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래도 사람들이 안 죽여. ‘무너진다.’ 잡아갈 줄 알았더니 안 잡아가……. ‘사십일 후에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랬는데 잡아가는 게 아니라 진짜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선지자가 이것을 싫어했다고 했어요. 싫어했다고…….
그것은 다음 주에 볼 것이지만 아무튼 이렇게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왜 이런 거짓말 같은 역사가 일어났느냐? 성서 해석가들은 여기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해줍니다. 쉽게 얘기하면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던 이때가 그쪽 지방에서 일식을 볼 수 있는 시기와 바로 일치한대요. 그것은 주기가 있으니까 연대계산이 정확하게 나와요. ‘사십일 후에 하나님이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는데 ‘미친놈, 어떤 촌놈이야 그리고 119에 신고해라.’ 그리고 신고하려고 하는데 어, 이렇게 보는데 해가 점점 시커메지는 것이에요. 해를 달이 가리니까……. 갑자기 벌건 대낮에, 멀건 대낮에, 허연 대낮에 이 반달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이 지방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애급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은 어느 고장에서든지 당연히 태양이에요. 태양. 이집트에서도 최고의 신이 라신이에요. 혹은 레신, 태양신이에요. 그 신이 모든 조무래기 신들을 거느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신이 아니라 그 하위의 신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면 상위의 신에게 호소했을 텐데 하나님께서 곧바로 최고의 신을 치신다고 느껴진 것이에요. 빛을 일어가는 것이에요. 이게 일 년에 한번 이년에 한번 일어나면 익숙해졌겠지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역사기록이 별로 없으니까 수십 년, 수백 년 만에 한 번씩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당대에 본적이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왕이건 제사장이건 백성이건 어른이건 어린아이건 다 보잖아요. 조그만 애들이 이렇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대부분의 말에 대해서 수염이 긴 할아버지들은 인생을 오래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덜덜 떨면서 ‘나도 저것은 처음 본다.’ 이것은 큰일 난 것이에요. 그러면서 큰 불안이 확 감도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을 사용하신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여태까지 믿었던 신으로부터는 도움을 받을 길이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이에요.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모든 일들을 다 이렇게 예비를 해놓으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보고 가라고 그러시는데 요나는 가면 그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죠.
제가 스물한 살 때 예수를 처음 믿고 나서 큰 난관에 부딪쳤어요. 그래서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 때는 뭐 깊이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하튼 소리만 지르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야밤에(그 때는 통금도 있을 때입니다.) 밤10시가 넘었는데도 삼각산꼭대기를 혼자 뛰어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리고 ‘주여!’ 그 때는 진짜 추웠어요. 침을 바르고 기도하면 금방 얼어붙을 정도로 그렇게 추웠어요. 한 시간 기도를 하고 또 한 시간을 녹이고……. 아직도 못 들으셨나보다 하고 또 다시 나가서 한 시간을 ‘주여!’ 그런데 문제를 풀어주기는 뭘 풀어줘요? 하나도 안 풀렸어요. 그래서 이제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는데 그날 밤에 꿈을 꾸는 거예요. 큰물이 흘러가는데 그야말로 시퍼런 물인데 강폭은 좁지 않은데 진짜 끝도 안 보이는 너무너무 무서운 강물이에요. 그런데 그 강을 건널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꿈에서도 기도를 하는 거예요. 생시 때 기도를 많이 하면 꿈에도 그렇게 신령한 꿈만 꾸고, 생시 때 개판을 치면 꿈에서도 개판을 치는 꿈만 꾸는 모양이에요. 꿈을 꾸는데 그 물 앞에서 ‘주님!’ 그러는데 발을 들여놓는 거예요. ‘으악’, 하는 거예요. 소리를 한참 지른 다음에 눈을 딱 떴더니 요단강이 마른 것처럼 마른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다가 발을 집어넣었거든요. ‘으아악!’ 얼마나 놀랬는지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이 깼는데 그 꿈의 마지막장면이 무엇이냐 하면 그 시퍼렇고 그리고 물살이 얼마나 흐르는지 막 거품을 일으키면서 물이 흐르는 것이에요. 그리고 안개가 펴서 서기가 감돌아요. 그래서 돌아오지 않는 강처럼 느껴지는데 죽어도 할 수 없다. 하면서 으아악! 식은땀을 흘리다가 잠에서 깼는데 마지막 장면이 무엇이냐 하면 물이 발목에 차요.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명의 길로 인도하여 가실 때에 그 길이 피할 수 없는 사명의 길일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넘을 수 없는 끝없는 깊이를 가진 그러한 어마어마한 강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고자 그 물에 발을 드밀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길을 예비하셔요. 나는 꿈속에서도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래도 이게 이렇게 시퍼런 물결이지만 내가 믿음으로 들여놓기만 하면 종아리까지 밖에 안찰거야. 꿈에도 생각이 안가요. 상상할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에 법궤를 메고 들어서라고 했을 때에 들어섰을 때 물이 탁 마를 것이라고 상상했겠어요? 상상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하시면 떠내려가는 것이지요. 간단한 것이죠. 그런데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눈을 감고 믿음으로 들여놓는 것이에요. 요나의 심정이 바로 그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니느웨가 뭐 회개하고 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가라고 그러셨는데 죽음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는데 왜 내가 가야하나? 잘생긴 선지자들 많은데 왜 내가 하필이면 거기를 가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산다. 이거에요. 그러데 그것만은 하라고 그러지 말라 이거에요. 왜 하필이면 그것이냐 이거에요. 이게 사명을 회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것이에요. 왜 꼭 그것이냐 이거에요. 왜 꼭 그것을 하면서 살아야 되느냐 이것이죠. 왜 하필이면 꼭 그 옥합이냐 이거에요. 딴것 많은데 다섯 개를 드릴 테니까 그것만 달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다 가져가십시오. 그런데 주님은 ‘아니! 바로 그것, 바로 그것,’ 배에 물건도 드리고 딴 것 다 드릴 테니까 요나만 달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아니야, 요나 너 너만 튀어나오면 되 요나! 톡 튀어나와라.’ 이거에요. 톡 튀어나와라. 옥합 그것만 꺼 내와라 이거에요. 다른 것? 다른 것은 너 다 가져. 나한테 줄 생각하지 말고 다 네가 가져. 그것으로 먹고, 바르고, 그것으로 세수하고 너 다 가져. 그리고 고것이죠. 고것. 뭔데? 벽장 속에 감추어놓은 것, 끝까지 안주려고 하는 것 그것을 내놓아라.
여인이 그것을 깨뜨려서 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여인을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그 여자의 행한 것도 기념하게 하신 것이에요.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이 이스라엘 선지자가 이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엄청난 선진도시, 자기네 나라와는 상대도 안 되는 선진도시에요. 미국, 프랑스, 일본 합쳐놓은 것보다 더 번화한 나라라는 이야기에요. 거기에 발을 딱 디디고 들어가니까 눈이 두리번두리번 하게 되는 것이에요.
내가 외국에 안 가는 이유가 그렇게 촌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안가요. 이것도 이러면서 아이고 창피해……. 그렇게 들어갔을 때 나는 죽을 것이다. 물에 빠져 죽으나 아니면 잡혀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발을 들여놓는 것이에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진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계획한 것이에요. 우리가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잃어버린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어요. 할렐루야!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다고요.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야! 위대하고 놀랍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다 순종의 길로 걸어갔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놀다가 보니까 뻥! ‘워’ 그런 것 없어요. 대개 그런 사람들이 가서 간증하는 거보면 다 남의 간증만 해요. ‘누구는 예수를 믿어서 뭐 끝내줬대.’ ‘그럼 너는?’ ‘나는 후줄근하지 뭐!’ 그런 것이에요. 일인칭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해요. 나는……. 할렐루야!
요나가 상상할 수 없는 예비하심이 그가 순종의 길로 돌아가자 아주 정교하게 예비 되었어요. 요나가 발을 들여놓자 해가 빛을 잃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빛을 잃어가는 해를 등지고 ‘사십일 후에 니느웨가 망하리라.’ 말하니까 그 요나의 후줄근한 소리가 온 니느웨에 쩌렁쩌렁 울리면서 저 사람은 하늘이 보낸 사람이로다! 그러면서 누구 앞에 엎드렸겠어요?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 누구 앞에 엎드린 것이었겠어요? 요나 앞에 엎드려지는 것이에요. 똑같은 말인데 ‘사십일 후에 니느웨가 망하리라.’ 그 말과 그 다음에 ‘나는 히브리사람인데 천지를 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인데…….’ 배 밑창에서 코너에 몰려가지고 겁을 바짝 집어먹고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던 변명을 말하던 그 사람으로 보여요? 보이지 않잖아요? 이제는 천하의 모든 권세를 손 안에 딱 넣고 니느웨의 모든 백성들이 나라의 살고 죽음이 오직 저 한사람에게 달린 것같이 그렇게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었어요. 할렐루야! 이게 있어야할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조금만 더하겠어요. 찬송하나 하겠습니다.
(찬송)
271장
1.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없는 이때에 누가 가서 거둘까 내가 어찌 게을러서 앉아있을까 어서 가자 밭으로 보내주소서, 보내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2. 주가 두루 다니시며 일군 부르나 따르는 자 적구나 보라 주의 사랑하는 익은 곡식을 어서 거두러 가자 보내주소서, 보내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3. 누가 나를 인도하니 언제 어디나 기뻐 가서 일 하리 주가 명령 내리실 때 능력 받아서 기뻐 거두리로다. 보내주소서, 보내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그러면서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딱 예비해 놓으시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신앙생활하면서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정도가 다 틀려요. 신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정말 그렇게 하나님이 신뢰하실만한 분이시라고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들이에요. 나는 이런 생각할 때마다 늘 그 기억이 나요. 나는 어렸을 적에 대화에 살았거든요. 그곳에서 유치원을 다녔어요. 제가 그래도 그때에 유치원을 다닌 사람입니다. 중퇴했지만……. 벌써 그게 36년 전 이야기에요. 그 때 한번 강릉 쪽에 갈 일이 있어가지고 한번 그 근처를 지나면서 이렇게 보니까 그게 빨간 벽돌로 다시 지어져서 여전히 그 유치원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블록가지고 놀고 그러던 생각이 나는데……. 그런데 나는 서울에서만 살다가 유치원 다닐 때쯤 해서 거기를 잠깐 갔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데 그때는 그 개울이 왜 그렇게 커보였는지 몰라요. 어렸을 때는 왜 자란 다음에 가보면 어렸을 때 무지하게 넓었던 골목도 가보면 이상하게 골목을 왜 이렇게 넓게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다리가 있었느냐하면 큰 개울이 흐르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진짜 정말 만리장성 같은 다리였어요. 그 다리가 뭐냐 하면 그 구멍 뚫어진 공사판에서 쓰는 철판 있잖아요? 그것을 깔아놓은 다리였거든요. 그리고 옆에는 난간이 이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애들이 그 물 건너로만 놀러가자면 나는 사색이 되는 거예요. 나는 거기만 올라가기만 하면 그냥 다리가 달달 떨리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밑이 들여다보이는데 어린마음에 너무 무서워요. 그 다리를 건너는 방법은 뭐냐 하면 다리에 털썩 앉아서 미끄럼 타듯이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런데 저쪽동네 애들은 완전히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 태어난 애들이에요. 나보다 훨씬 조그만 애들인데 거기를 난간도 안 붙잡고 고무신을 양손에 들고 들뛰는 것에요. 넘어지지도 않아요. 그리고 저쪽으로 건너가서 나를 흉보는 거예요. 서울서 온 애는 못 건너온다고. 그때는 그게 얼마나 서러운지……. 그런데 나도 용기를 내서 일어나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거예요. 다리 밑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거에요. 왜 나는 못 건너는 다리를 걔네들은 그렇게 신나게 건너요? 왜 그래요? 수없이 뛰어다녀보고 뒹굴었는데도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요. 밑이 보이는 게 맨 처음에는 좀 무섭고 두려웠을 거예요. 그런데 몇 번 건너보니까 그 구멍에는 발도 안 빠지고 다리가 걸리지도 않아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에요. 체험을 못해보니까 불안해서 못 건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체험을 많이 했고 순종해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비록 ‘발을 들여놓아라.’ 할 때 밑도 끝도 안 보이는 시퍼런 강이 흐르는 것 같아도 일단 집어넣으면 발목밖에 안차든지 아니면 물을 말려버리시든지 아니면 갑자기 구름다리를 놓으시던지 그것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왜?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발을 들여놓으면서 지난번 성경에서는 물을 말렸고, 지난번 김 강도사의 체험은 발목에 닿았다는데 이번에 내가 들여놓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몰라요. 왜 그래요?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방법이 신묘막측하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그래요.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발을 들여놓으려면 ‘너 죽으려고 그러느냐?’ ‘아니’ ‘그러면 이 시퍼런 물에다 발을 들여놓으면 어떻게 되니?’ 설명할 수 있어요? 없어요? 설명할 수 없는데도 발을 들여놓는 것이에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해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해요. 그것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에요. 그렇지요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더 확실한 사실 하나는 눈앞에 보이는 이 시퍼런 강물보다 더 확실한 것은 순종함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내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에요. 확실하게 아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거기에 딱 들여놓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우리가 더 깊은 믿음으로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처음에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이렇게 엄청난 것을 요구하지 않아요. 예수 믿으려고 오늘 나와서 말씀을 듣고 조금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형제! 주와 함께 죽으시렵니까? 세상과 함께 사시렵니까?’ 이것 참 사람 괴로운 얘기입니다. ‘주와 함께 죽으시고 사시렵니까? 아니면 세상과 함께 살고 죽으시렵니까?’ 눈을 껌벅껌벅하는 것이죠. 야, 너무 어렵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을 하는 것이에요.
어느 교회에서 어느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데 집사 한사람이 찾아와서 그 집사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전에는 이런 것을 몰랐는데 목사님 설교를 계속 듣고 믿음이 생기다 보니까 이래도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그게 뭐냐?’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직원인데 매달 오만 원씩 부정을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냥 전에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것이래요. 건수가 있어서 오만 원씩 부정을 하는데 이게 마음에 걸리는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신앙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은 문제도 안 돼요. 그까짓 거 오만 원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데 그러면서 문젯거리도 안 돼요. 그런데 신앙이 어린사람들에게는 이게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가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에요. 진짜……. 그런데 그런 작은 결단들을 순종을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때에 점점 더 커다란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미국에서 다리를 놓았는데 양쪽이 전부다 출렁거리는 다리를 놓는데 쉽게 얘기하면 이 계곡이 너무나 깊어가지고 이쪽하고 저쪽하고 연결을 해야 하는데 연결을 할 수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 때의 건축기술로써는 도저히 그것을 할 수가 없는데 다리를 하나 놓아야 되겠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화살로 다리를 놓았대요. 화살에다가 가느다란 실을 엮었어요. 그리고 쐈어요. 그 실에다가 철사를 놓고 철사 뒤에다가 약간 가는 철근을 놓고 철근 뒤에다가 더 큰 철강을 놓고 해가지고 저쪽에서 잡아당기면서 그러면서 저쪽 건축자재들을 이쪽으로 옮겨 가지고 연결해서 다리를 놓은 것이에요. 이런 작은 순종을 통해서 작은 그 신앙의 즐거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작은 축복들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큰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런 결단과 은혜들이 생기는 것이에요.
여기에서 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로 돌아가서 무너지리라고 하는 단순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쳤더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놓으신 것이에요. 그리고 놀랍게 역사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아무리 많은 인간의 궁리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예비하셨는데 하나님이 예비안하시면 인간의 궁리가 필요 없고, 하나님이 예비하셔도 인간의 궁리는 필요 없어요. 전자는 인간이 궁리를 해도 반드시 사고가 나게 마련이고, 후자는 인간이 궁리를 아무리 해도 인간의 힘을 의존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에요. 첫 번째로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이것은 요나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어요.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명의 자리로 우리를 돌려보내실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일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순종하면서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늘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리고 그 뜻대로 행하기를 기뻐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이에요. 그렇지요?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거나 교회를 옮기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물어보지 않고 덜컥덜컥 했다가 집어던지고 집어던졌다가 다시하고 그러는 사람들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표본이에요.
요나는 결국은 이렇게 했을 때 이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고 두 번째로는 금식을 선포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간절함이에요. 간절함과 겸비함. 내가 이 음식을 입에 대기에 합당한자들이 아니더라는 겸비의 고백이에요. 그리고 베옷을 입은 것은 슬픔의 표징이에요. 슬픔, 슬프도다. 뭐가 슬프다는 것이에요? 어쩌다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하여서 이렇게 재앙을 당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깊은 회개가 온 땅에 불길과 같이 번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에요. 그러니까 부흥이죠. 부흥이에요. 이런 것을 부흥이라고 해요. 진짜 전격적인 부흥이죠. 그리고 이 부흥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돌이킨 그 선지자 한사람에 의해서 말하자면 사망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던 이곳에 말하자면 생명의 빛이 다시 들어오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한사람의 순종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또다시 생명을 가져다주는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왔고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우리에게 이르게 되었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 앞에 깊이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거기가 고통스러워보일지라도 그것은 머리의 계산이에요. 하나님의 사명의 자리를 이탈해서 다시스로 가는 표를 끊을 때 여러분들은 분명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잔잔한 바다, 최신식 배, 훌륭한 대우 이런 것을 가지고 한 번도 이 배가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맞은 적이 없다. 요즘은 풍랑이 부는 계절이 아니다 이런 판단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순종의 길로 가고자 할 때에 거기에는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위험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커다란 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더 커다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듣기만하지 말고 결단하고 이렇게 깊이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서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주위에 풍랑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샬롬을 얻게 되는 이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