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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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자 : 김세나
4일, 5일 사경회 하는 것도 힘든데, 초대 교회 우리 나라에서는요. 6일에서 7일 했습니다. 일주일, 주일, 월요일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 월요일에 끝났습니다. 부흥회를 하면 자기 교회를 안 갔어요. 그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하루에 네 번 모인 적도 있었대요. 새벽, 아침 한 9시쯤 모이고, 오후 한 2시쯤 모이고 그리고 밤에 8시쯤 모이고, 참 피곤했을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견뎠겠죠.
오늘 이제 어제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충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제 내놔라 요나를 내놔라 요나를 내놓기 전까지는 바다가 풍랑이 그치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요나가 하나님한테 항복을 하는 거죠. 마지막 포위망이 좁혀서 마지막 하나님 앞에 딱 요나가 서게 되었는데, 그 때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은고인 줄을 아노라. 그래서 결국은 바다에 던지게 되죠. 결국 우리 자신이 죽은 자와 같이 던져지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 때 풍랑이 머집니다. 요나가 딱 던져지니까 며칠 걸려서 풍랑이 머진 것이 아니라 곧 즉시 훅 불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즉시 그리고 풍랑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요나가 물속에 던져 질 때까지는 계속 이 파도가 쉬지 않고 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둘 중의 하나 선택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누가, 누가 이기나 이거죠.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그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결단하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승복할 때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대게 나는 정말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꺾으셨다. 그런 이야기 가끔 하죠. 그것은 누가 하는 거냐 하면,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뒤를 돌아다보니까 내가 잘나서 승복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을 주셔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결단을 하게 하셨다. 그럴 때에 주님이 나를 꺾으셨다 라고 말하는 것이지, 뭐 나는 추어도 마음이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어떻게 하나님이, 목을 탁 치니까 고개가 탁 숙여질 것 아니에요. 교만한 목이. 그렇게 숙여서 인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질 않으셔요. 중심에서 우러나서 무릎을 꿇고 인격적으로 승복해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니까 인생들이 그것을 악용을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이제 문제죠. 그러다 그것이 계속 소망이 없이 오래 가면 하나님께서 줄다리기를 끝내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요. 그 줄다리기가 어제 잠깐 말씀 드린 에베소 경험 뭐에요? 어디서 떨어진 것을 기억하고 너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에베소 교회가 여태껏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여태까지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그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온전한 교회로 서기를 갈망하고 사모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어때요. 마침내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는 때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파국으로 가는 거예요. 파국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보존하셔요.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끝까지 양보하지 않고 물속으로 안 던지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는 거예요. 기억을 해야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안 나오는 이야기 이지만, 정상적으로 추리를 해 봅시다. 요나를 내 놓으라고 하는데 이 뱃사람들이 안 내놨어요. 풍랑이 거치니까 아이고 죽겠구나 난 살아야하겠다 그러면서 요나를 내 놨어요. 만약에 안 내놨다고 칩시다. 요나를 절대 안 내놔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죽어도 요나를 안 내놔. 그 뱃사람들이. 그러면 하나님이 포기하자 그리고 가시면서 얘들아 내가 졌다 그러면서 가시겠어요? 100% 틀림없이 요나를 안 내놓으면 파도가 쳐가지고 배를 박살내는 거예요. 그리고 예상 가능한 스토리를 해 봅시다. 그리고 어떻게 해요? 모든 사람은 다 파도에 떠내려 가버리게 만들고 요나 한 사람은 조각배를 타게 만들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승복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게 하신다 라고 하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참으시는 거죠.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결단이에요. 주님이 우리와 신앙생활 하면서 자꾸 딴 길로 가면, 두려움을 확 주시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과 사단이 주는 두려움이 차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은 우리에게 근심함을 줘요. 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다르게 살아야겠다. 그것이고, 사단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그 무서움에 짓눌려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행해 오던 것도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사단이 주는 두려움과 하나님이 주는 두려움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자기 뒷집 아저씨 부르듯 부르는 세상이니까 뭐 하나님 하고 놀자는 세상이니까, 뭐 하나님을 별로 두려워하는 것이 별로 없죠. 그러나 그 모두 다 자기의 신앙의 박약함을 보여 주는 것이에요.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요. 인격적으로 승복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거예요. 그렇게 나아가는 거예요.
내 놓아라. 결국은 하나님의 이 성품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을 가장 소모전 적으로 살지 않고 생산적으로 사는 비결은 속히 그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해요. 한 두 가지 잘못을 하고 불순종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즉시 발길로 뻥 차고,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워낙 다급하면. 워낙 다급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죠. 그러나 일반적이지는 않아요. 일반적이지는 않아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놔 두시죠. 놔 주셔요. 그 대신 장부에 적어 놔요. 적금 태워 주려고. 아, 장부에 적어 놓는다고. 그런데 그것이 이제 불순종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쌓이면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기억해야 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죄와 슬픔이 많은 곳에 살면서 하나님과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동행하고 남보다 선한 삶을 살고 남보다는 훨씬 빛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상대적인 것은 가능하지만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 그랬어요? 너무너무 괴롭다. 왜, 그렇게 헌신된 생애를 살면서도 자기 속을 들여다보니까 불순종하고 불법하려고 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자아가 뭉게구름처럼 솟아나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 그래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속에서는 솟아나고 그러니까 너무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 그래요. 내가 이곳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훨씬 좋다. 거기에는 이런 갈등과 고민과 고통과 이런 눈물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그 때를 그리워 하는 거예요. 나이 먹고 그러는 것 무서워 할 필요가 없고, 섭섭해 할 필요 없어요. 세월이 가면 다 이빨도 빠지고 머리카락도 빠지고 그래서 소갈머리도 없어지고, 주변머리도 없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점점 그 나라, 그 날로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백발은 인생의 면류관이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의 황혼, 하나님의 뜻대로 길을 걸어온 인생의 말년은 희망과 비전이 넘치는 거예요. 왜, 잠시 후 내가 눈물을 씻고 그곳에서 나의 하나님을 뵈오리라. 거기 올라가면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이 죄와 슬픔과 눈물이 많은 세상, 왜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아간 날이 너무 허망하고 비참하다. 그런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렇게 바다에 물고기를, 물고기란다. 요나를 바다 속에 집어 던졌을 때에는 뱃사람들도 요나가 살아나리라는 생각을 못했고, 요나도 살아나리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이방신들이 가끔 이렇게 그 인간을 물속에서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죠. 그 대표적인 게 춘향전에서 나오는 심청이 이야기 아닙니까. 아니야. 심청전에 나오는 춘향, 아니야. 며칠 집회 하더니 정신이 오락가락 하네요.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이 이야기 아닙니까. 인당수에서 용왕이 그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왜, 처녀 하나를, 왜 그 물귀신은 처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처녀 하나를 집어넣지 않으면 심술을 부리는 거예요. 그래서 파도를 치게 하고 그러는 거예요. 지금도요. 바닷가에 가보면 철저합니다. 이것은 뭐 보통 철저한 게 아닙니다. 속옷 하나 널고 빨래줄 하나 거는 것도 철저하게 그 미신이 지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우리나라에 말이야. 그 성령의 폭탄이 하나 떨어져야 되는 대가, 다 떨어져야 되겠지만 융단폭격이면 제일 좋겠지만, 그 중에서 진짜 폭탄 떨어지기 전에 변화 안 되는 곳이 바로 제주도에요. 섬이에요. 섬.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토박이들은 딸내미를 시집을 보낼 때, 빨간 보자기에 살아있는 뱀을 싸서 시집을 보낸다고. 토템이에요. 거기는. 그러니까 그렇게 거기는 토박이라서 예수 믿게끔 토박이를 전도한다는 것은 거기서는 목회자들 이야기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씨족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단절을 의미를 한 대요. 순교적인 사고를 가져야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대게 서울에서 건너온 토박이가 아닌 사람들,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거지,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기껏 해봐야 우리나라의 이십 몇 퍼센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제주도에는 5%가 안 된대요. 50만인가, 60만인데, 2만 5천명, 3만 명 밖에 안 된대요. 제주도에서는 70명 모이면 엄청 큰 교회에요.
이런, 이렇게 그 말하자면 인간을 요구하는게 있어요. 그때 이 집어 던질 때나, 들어가는 사람이나 그 물속에 집어 던지는 개념은 무엇이냐 하면 그를 죽게끔 재물로 신에게 줌으로써 신의 진노를 가라앉혀서 풍랑이 그친다 그런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선지자 가운데 누가 이렇게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요나가 그 선배를 보면서 희망을 갔겠지만, 그게 아니라 던져라. 자기가 잘못한 것 밖에 없고 하나님이 자기를 심판하신다는 것 밖에 없고 동네 사람들 이 뱃사공들은 집어 던지면 그러면 끝이다 하면서 집어 던진 거죠, 아깝지만. 짝 집어 던진 거죠. 미안하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세상이 이런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한 덩어리 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딱 우리를 찾겠다고 요구하시면 마지막에는 세상이 우리 관계를, 우리와의 관계를 끊고 버리는 거예요. 이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결과에요. 늘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과 떨어질 때까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는 거예요. 우리가 일단 하나님께로 딱 떨어졌다 생각이 되면 그 다음에는 빠이 빠이에요. 이게 매정한 세상이에요. 그래서 요한 크리토스툼이 그 훌륭한 설교자였죠. 존경하는 설교자인데, 4세기 때 사람, 그 사람이 뭐라 그랬어요.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명언이죠. 세상아 네가 나를 버비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그리스도만 따라가겠노라. 이런 결단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야지, 배반을 안 당해. 사랑을 안 하면 배반 당할 일이 없어요. 사랑하면 반드시 배신한다고. 그리고 사랑하던 그 가슴에 칼을 꼽고 도망가는 거예요.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어요. 그러니까 사랑하지 말아야 해요. 세상아, 유혹을 받을 때면,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리노라. 다른 대로 가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겠노라.
집어 던졌어요. 한번 성경을 읽을 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깊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해요. 상상력을.
(예화) 저는 지금은 수영을 조금 해요. 그래서 한 35미터 갑디다. 죽을 힘을 다해서, 잠수까지 포함해서 하여튼 살아서 헤엄치는 것 모두 포함하니까 발이 땅에 안 닿고 35미터 정도 갑디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수영을 못했어요. 물속을 들어갔는데 제 동생은 수영을 아주 잘 했습니다. 소양강을 노래 부르면서 들어 누으면서 건너갔다 건너왔다 건너갔다 건너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어요. 그게 너무 부러운 거라. 어떻게 하면 수영좀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맨날 가르쳐 달라고 하면 하는 말이 형은 왜 그것도 못해, 맨날 그 소리로 끝나요. 그래서 한번은 춘천에서 본격적으로 이제 배웠어요. 그래서 한 10미터 정도를 갈 수 있게끔 훈련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신날 수 없어요. 그 전에는 바다속에 들어가서 수영을 하는가 하다가 이렇게 다리를 펴서 다리가 땅에 안 닿으면 간이 콩알 만해 지는 거예요. 이제 죽는구나. 그런데 파도가 뭐 이렇게 치는게 아니라 5미터, 6미터, 7미터, 8미터 치는 거예요. 그러면서 큰 파도가 공중으로 솟았다가 쾅 때리는 거예요. 제방이 무너지고 제방 위에 놨던 승용차가 바다 위로 굴러 떨어질 정도로 그런 정도의 파도가 치는 거예요.
거기에 던졌어요. 거기에 바다 속으로 던졌는지 솟아 오르는 파도 위로 던졌는지 우리도 모르고 자기도 몰라. 던졌어요. 던지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났겠어요. 던지자마자 파도에 휩쓸려서 정신을 잃은 거죠. 예기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때 뭐야, 아 재미있다.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거 였어요? 눈 꼭 감고 내 인생 이렇게 끝나는 구나. 내 인생 이렇게 끝나는 구나. 그리고 혹심이 있다면 죽어 싸지, 그리고 물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제 여기가 어제까지이고, 오늘 이야기는 이거예요.
그렇게 물속으로 꼬로로록 들어가고 있을 때, 바다 속에 뭐가 있었어요? 큰 물고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고래라고 하는데 누가 알겠어요. 고래인지 뭔지 모르죠. 히브리어 성경에는 타님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커다란 짐승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사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죠. 지금은 없는 또 다른 커다란 바다 생물들이 그 때에는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하여튼 들어갔어요. 바다 밑에 큰 물고기가 있었는데, 누가 예비 하셨어요? 거기 잘 보세요.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이미 그 다음에 큰 물고기를 그 다음에 예비하사.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요나를 던질까 말까 제비를 뽑아서 옥신각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 그 쪽 바다에서 제일 큰 물고기 나와. 나왔어요. 야, 저쪽으로 가. 우우우우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를 들어서 던져야 되겠다. 안 던지려고 도망을 가니까 물고기가 어떻게 했겠어요. 안 던지려고 도망을 가던 그 배를 쫓아갔어요. 배를 부수기 위해서 쫓아 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배는 하나님이 직접 부수면 돼. 뭘 위해서? 요나를 받기 위해서 쭉 쫓아갔어요. 요나가 이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긴 뭘 알아. 신령한 선지자라면 알았겠지. 알긴 뭘 알아, 몰라.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부사 하나를 주고 있어요. 이게 뭐야, 이미. 이미. 이미. 요나가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주시는 거예요. 물고기가 우연히 갔다고 했어요? 아니에요.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사 딱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요나를 던져라 하나님은 요구를 하시는데, 안 던지고 있고 물속에서 이 물고기는 요나가 빠질 때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제. 입을 쫙 벌리고 요나야 떨어져라. 오래 내버려두면 이제 죽을 것 아니에요. 물을 마시니까 죽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딱 어느 지점으로 떨어질 것인가 눈여겨보면서 장소 이동을 하는 거야. 마치 슛 쏘면 탁 그것을 받으려 하는 골키퍼처럼 말이에요. 쫙 쫓아 다니는 거예요. 그러다가 드디어 배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할 수 없이 집어넣자 하는 그런 소리를 딱 들은 거예요. 하나 둘 셋, 흉 날라가니까 공중에 붕 떴어요. 그때 볼이 어디쯤 떨어지겠구나. 슝 날라 가서 흉 하고 받았어요. 장난 같은 이야기죠.
그래서 주일 학교에서 맨날 고래 뭐 선지자, 고래 뱃속의 선지자 그러는데 이게 진짜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이냐. 그래서 내가 조사를 해 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래일수도 있고 상어일 수도 있대요. 그런데 만약에 상어라면, 백상어고, 고래라면 향유고래라는 종류래요. 많은 고래 종류 중에서 왜, 이 두 개가 덩치가 크다 이거예요.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상어는 고래보다 크다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고래보다 오히려 큰 상어가 있대요. 백상어에요. 그런데 이 바다 속에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상상을 불허하는 생물이 살고 있어요. 저는 몇 해 전에 잡지를 봤는데 오징어를 한 마리 잡았는데, 17미터, 오징어가. 그러니까 오징어를 말려 놔도 그 오징어 위에서 우리 교인들이 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정도의 그러한 정도에요. 그러한 정도에요. 17미터. 그러니까 그것 하나만 구워 놓으면 아마 발 가지고도, 발에 붙어 있는 빨판을 떼어도 물을 따라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될 거예요. 그런 짐승이 있다는 것이 상상이 갑니까. 상상이 안 가죠. 그런 별의 별 짐승이 다 살고 있다.
(예화) 난 한번 박물관에서 직접 본 것인데, 이것은 뭐 그 오징어는 남의 나라에서 잡혔으니까 말발이 안 서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나라 남해 먼 바다에서 잡혔어요. 그런데 갈치, 갈치가 대게 우리나라 갈치는 길어야 요만해요. 갈치 한 마리에 진로유통에서 만 칠천 원을 달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요만해요. 그리고 외제 갈치는 그것보다 좀 더 크죠. 그런데 커 봤자 이만하거든요. 갈치가 7미터짜리가 포로 말린 용액에 들어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을 했어요. 7미터, 7미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사람이 1.8미터 밖에 안되니까 사람 한 세 사람을 엎어 놓은 것 만큼의 길이가 돼요. 그리고 그 다음에 그 굵기가 진짜 뭐에다 비교할까. 하여튼 이래요, 이래. 그렇게 커다란 갈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요나 정도를 삼킬 물고기가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이야기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잘 먹는 참치도 큰 것은 얼마나 큰지, 킬로그램이 잘 생각이 안 나는데 200킬로그램인가, 몇 킬로그램인가 최근에 잡혔는데 4천만원에 팔렸대요. 한 마리에, 물고기 한 마리에. 바다 속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살고 있어요. 더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증거를 가지고 나왔어요. 1912년에 플로리다 주에 나이스키라고 하는 바다에서 잡혀서 현재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스유니온 연구소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고래가 한 마리 있어요. 그러니까 살은 보관을 못하고 이제 뼈를 보관을 했겠죠. 그런데 길이가, 놀라지 마세요. 135미터. 지금 현재 있어요. 확인하고 싶으면 가서 확인하고 오세요. 135미터인데, 축구장이 110미터에요. 길이가. 그러니까 눕혀 놓으면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를 넘어 서는 거예요. 저쪽 골대를 넘어 서는 거예요. 135미터. 입 넓이가 1미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무게가 13톤인데, 13톤. 13톤인데 더 놀라운 것은 잡혔을 때, 이 놈을 해부를 해 보니까 배 속에 고기가 한 마리 들어있었는데, 통자로 그게 680킬로그램짜리 고기가 그 속에서 나와요. 먹이가 나왔어. 680킬로그램이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가죠? 소 2마리에요. 송아지 2마리. 큰 소가 450킬로그램쯤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중 소 두 마리가 들어간 거예요. 한우 두 마리가 세트로 딱 들어간 거예요. 그 정도 크기의 물고기가 배속에서 서서히 소화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요나 선지자가 제 아무리 고기를 많이 먹고 살이 쪘다고 하더라도, 100킬로 밖에 더 나갔겠어요. 100킬로. 그렇지 않으면 6-70킬로 밖에 더 나갔겠어요. 뭐 한껏 양보해가지고 200킬로그램이 되었다고 칩시다. 돼지같이 그래도, 그래도 고래가 이것을 삼키는 데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 이거예요. 꿀꺽 삼킨 거죠. 그런데 토해 냈다는게 문제에요. 어떻게 들어갔다가 다시 토해낼 수가 있느냐. 물론 이런 이야기는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이 하셨으면 한 거죠.
(예화) 그런데 이제 1758년에 지중해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그만 갑판에서 한 선원이 굴러 떨여졌는데 상어가 먹었어요. 상어가 휙 하고 삼켰단 말이에요. 그래서 마침 대포를 쐈는데 정통으로 맞았어요. 상어에. 1700년대 대포니까 지금 같이 한방에 배 한척이 날라가는 그런 배가 아니었겠죠. 콩 하고 쐈는데 그게 맞았어요. 이 충격 때문에 이 상어가 선원을 토해내는데 살았어요. 뭐, 그런 정도를 가지고 세상에 할 것은 없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다 이거죠.
그러면 그 다음에 의문 하나 남는 것은 그거예요. 물고기 배속에 요나가 들어갔는데, 알다시피 여러분 680킬로그램 되는 고기를 소화 시키려면 강력한 소화액이 나와야 돼요. 여러분, 배속에서 얼마나 무서운 물질이 나오는지 모를 거예요.
(예화) 어렸을 때 제 동생이 50환짜리 백동화를 먹었어요. 먹고 이틀 만에 나왔는데 뒷면 50환이라고 쓴 게 지워졌어요. 그렇게 무서워요. 위액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화장실가서 받아내 가지고 씻어서 가게 가서 뭐 사먹었죠. 아니, 뭐 김옥분 집사님 증인도 계세요. 사 먹었죠. 그런데 뒷면이 한면이 다 지워 졌어요. 위액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런데 680킬로그램 되는 것을 소화시킨다 그러면 우리하고는 비교될 수 없는 그야말로 위액이 수십드럼이 들어있을 거예요. 그 속에 선지자가 3일동안 있었는데도 말짱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죠. 그래서 프린스톤에 있는 맥클로키라는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교수 한 사람은 뭐라고 결론을 지었냐 하면, 이 선지자가 위 속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고래 배속에 들어갔지만,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지만 위속이 아니라 후두부, 후실 그러니까 의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대충 추측할 때는 여러분, 밥풀이 코에 끼는 경우 있죠. 재채기 할 때 고기, 그러니까 고기가 이런 정도 이 이렇게 그 대형 물고기의 경우에는 거기가 사방 한평 정도가 나온데요. 거기만이 공기가 통하는 유일한 곳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암시가 나오는데 2장에 보면 잘 보세요. 뭐라고 나오냐 하면 이렇게 나와요. 5절에 보면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원, 이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목구멍이거든요. 목구멍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애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것을 통해서, 거기는 바람도 들어오고 물도 들어오는 곳이라는 거예요. 물이 들어오면서 거기에 풀 종류들이 딸려 들어오는 거죠. 그리고 고래가 물속으로 들어올 때에는, 물이 한번 푹 할 때에는 물고기가 물을 머금을 때는 물이 확 쓸고 지나가면서 거기에서 이제 고통을 받으면서 매달렸겠죠. 그리고 다시 물위로 나오면 숨을 쉬고 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선지자가 3일을 지낸 거예요. 저는 그 설명을 절대적으로 맞냐, 틀리냐 그렇게 규명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를 다 보면서 상당히 타당성 있는 추측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됐어요. 위 속에 들어가면 위액에 다 용해 되었을 거라는 거예요. 후두부에 딱 들어갔을 거라는 거예요. 후두부에. 그러다가 토해냈다라고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에취 하면서 이제 말하자면, 에취 하면 밥풀이 튀어 나오듯이 말하자면, 재채기와 함께 토해 나오는 거죠.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해요.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뭐 요나가 어느 물고기에 들어갔고, 어떻게 코에서 나왔는지 입에서 나왔는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요나가 이제 끝이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니까 내가 바다 속에 들어가서 죽어지내자. 그리고 이 풍랑이 멎게 하자. 눈 딱 감고 바다로 풍 들어가니까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할렐루야. 그거예요. 바로. 예비하고 계신 거예요. 딱 예비하면서 그 요나를 하나님께서 건지시기 위해서 큰 물고기를 언제, 이미 예비하셨어요. 그러니까 인생들이 그것을 알아야 해요. 문제가 생길 때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문제 옆에 해결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문제,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해결을 보여주세요, 안 보여주세요? 언제까지. 죽어서, 죽겠다고 물속으로 풍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해결이 무엇인지를 보이시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감추어서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어때요. 막 보이는 것은 물고기가 바닷물의 물고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막 파도치는 큰 풍랑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예수님께로 나아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걸어갈 때는 안 빠졌지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물결을 보면서 빠졌던 것처럼 인간은 그 속에 있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손길을 보는 일에 실패하고 오히려 말하자면 뒤웅 치는 파도를 보면서 그 문제 속에서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게 내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제 삼의 해결이 있지 않겠느냐. 해결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누군가 한 사람이 실마리를 풀어가야 해요. 그리고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큰 풍랑 속에 뛰어들 각오를 해야 되는 거예요. 각오를 해야 된다고요. 그 지점에서 뭐,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님도 다 알아요. 그 이야기. 그 이야기, 쟤 때문이래요, 그 이야기는 이제 지긋지긋 한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면 쟤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왜, 하나님이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느냐. 내가 너보고 사명 감당하라고 할 때에 공짜로 감당하라고 그랬느냐. 하나님이 먼저 뭘 주셨어요? 그럼요. 은혜를 주셨어요. 거저 감당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셨어요. 그래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남이 보지 못하는 현실을 보게 하셨고, 남이 깨닫지 못하는 아픔들을 보게 하시고, 그런데 네가 그것을 감당을 안 하고 도망하려고 하느냐. 해결이 안 되는 거죠. 왜 하나님 나를 통해서만 합니까. 은혜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저 사람이 교회 더 오래 다녔으니까 쟤에요, 쟤. 쟤하고 잘 하면 나도 덕분에 구원 좀 받읍시다. 하나님이 소용없다 이야기 하셔요. 너다. 너. 요나가 아니라 요너.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다그치는 거예요. 피할 수가 없어요. 은혜 받은 물러 달라고 해도 물러 주시지 않아요. 일수불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그런데 그러면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큰 고난과 쓰라림만이 기다리고 있느냐. 그것 아니에요. 선지자들을 보세요. 나라가 멸망을 향하여 치들어 가고 고난을 받는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언했죠. 그 예언할 때 선지자들이 얼마나 고난스러웠어요. 한번 외치고 오면, 죽도록 두들겨 맞는 거예요. 정말 그런 식으로 말할 거냐. 이딴 놈이 있느냐. 그리고 감옥에 집어넣고, 패고, 심지어는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고, 사자 굴에다가 집어넣고 밧줄로 올가 메고 막 이런 혹독한 시련을 주는 거예요. 고난이죠. 그런데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러면 한번만 은혜를 주신다면 내버려 둬서 그렇게 고난을 받게끔 내버려 두셨냐 하면, 아니에요. 고난이 넘치는데도 옥 속에서도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에게 그렇게 찾아와서 직접 말씀하시는 은혜를 준적이 어디 있어요. 왜,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누구도 안 당하는 고난을 끔찍하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당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감당할 때에는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 은혜를 또 주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있는 힘과 폭풍을 해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큰 동력을 제공해 주시면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 지나게 하시는 거예요. 왜, 그게 바로 은혜 받은 자의 사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그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서 사명을 감당하면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구출을 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히브리 성경에는 베 카 그랬어요. 모든 사람이 너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품에 들어오면서 은혜를 받는 거예요. 얼마나 귀해. 왜, 나만, 왜 나만 그럴 것 없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희생을 해가지고 물속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면 그 사람들을 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여러분 같이 걸었던 그 길을 또 걷게 하시는 거예요. 어디에 가서든지 간에. 믿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 되어 가는 거예요.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고난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리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을 원하고 순종하면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이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답게 깨달아 지는 거예요. 그래서 뭐에요.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모두 주셨으니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할 지어다. 누구와, 요나와 같이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천하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처럼 나타나셔서 우리 앞에 열린 문을 주셔요. 열린 문이 아니라 닫힌 문 밖에는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그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목숨을 걸고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께서 가르쳐 분부하신 것들을 지켜 행하도록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기 위해서 선교의 전선으로 뛰어 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믿습니까. 그래가지고 잘못 한 사람 붙잡아 놔놓고 멱살잡이 해가지고 그러면 힘센 사람이 이기고 큰 소리, 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이제. 그래서 항복을 받아냈다,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도움이 돼요. 무슨 궁극적인 문제가 다 해결이 돼요? 이게 모든 풍랑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왔는데, 풍랑 속에서 너 잘났다, 아니야 내가 잘났어 그러다가 그래 내가 졌어. 니가 잘났다. 둘 다 뽀로롱 하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둘다 물에 빠져 죽는 거예요. 그렇게 씨름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렇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튼튼히 못 잡을 때, 인간을 붙잡고 승복을 받아 내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인생이에요. 어떻게 책임지겠어요. 어떻게 책임지겠냐고요. 책임 질 수 없어요. 맨날 책임진다는 이야기 하는데, 뭘 책임져요. 돈으로 물어내는 것은 책임 질 수 있겠죠. 그러나 어떻게 책임져요. 다리 부실 공사 해가지고 꽝 하고 나니까 46명이 떨어져서 죽었어요. 책임지겠다. 어떻게 책임져요. 그 중에 하나라도 살려낼 수 있어요? 불가능한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이에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요나가 물속에 던져질 때 물속에 큰 물고기를 이미 이렇게 예비하셨는데, 이것, 이랬는데 또 어떻게 했다고요. 요나를 어떻게 했다고요. 요나를 어떻게 하셨어요. 물고기가 요나를 먹었더라도 씹어서 먹었더라면 회복이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삼킨 거예요. 물과 함께 호로록 삼킨 거죠. 하나님은 환란과 시련과 문제 속에서 죽고자 하는 사람들을 죽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잘 생각했다. 진작 죽어야지, 죽어라 그러지 않으시고 문제 속에서 이 모든 문제가 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나이다 하면서 내가 죽어야 하리라. 그리고 파도 속에 뛰어 들어가는 역사가 일어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과 연약함을 아시고 그리고 감당할 수 있게끔 그들을 구원하시는 예비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나니. 우리가 시험을 당해서 어디까지 견딜 수 있고 그리고 순종을 하더라도 우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때에 물속에서 물고기를 예비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뭘 기억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비하신 것을 기다리며 예비하신 것을 보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예비하신 계획이 나타나야지만, 우리가 문제로부터 해결이 되고 궁극적인 해결에 도달할 수 있어요. 인간이 인간 서로를 붙들고 매달리면 일시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은 언제나 미봉책이에요. 언제나 또 뜯어지고, 또 뜯어지고, 또 뜯어지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해결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아예 치료하시고 그 모든 상처들을 짖어버리셔야 해요.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그렇잖아요. 확 재발하는 거예요. 수시로. 사단은 그것을 활용하고, 이런 관계에 우리들이 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가 죽고자 물속으로 뛰어 들었을 때 요나는 눈 딱 감고 죽을 날을 기다렸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요나를 원하셨고, 요나는 타의적으로나마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서 물고기를 예비하시는 거예요. 이미 예비하신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실 때에는, 문제의 물밑 바닥에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해결의 큰 물고기가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에 뭐 만을 요구하는 거예요? 나 때문이옵나이다. 무릎을 꿇고 그리고 그 문제의 바다에 뛰어들게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해결하려고 하니 그게 해결이 되겠어요.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해결을 하고 빨리 들어가. 너 말이야. 너 들어가. 모든 문제는 너 때문이야. 너가 물 속에 들어가야 해. 백번을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답답한 거죠. 그 사람이 잘못한 것 나도 다 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너에게 먼저 은혜를 주었고, 그리고 내가 너를 통해서 이 문제를 치유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너를 달라. 싫다고 핑계대는 순간까지 계속 큰 물결이 일어나면서 파도가 그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드디어 요나를 물고기가 삼켰는데 후두부인지 어딘지 간에 하여튼 요나가 죽지 않고 살아서 얼마,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에 관하여 예언을 하였죠. 그렇죠.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삼일동안 무덤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요나의 이 물고기 속에 있는 이 상태가 완전한 죽음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완전한 죽음의 상태. 실제로 죽어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MP3 7번, 46:58 부분부터 47:15까지 설교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속에 빠져서 물속에 빠져서 왜, 하나님께서 물속에 하필이면 그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물고기 예비하지 말고 물속에 빠졌을 때에 거북이를 예비하셔서 등에 태워가지고 말이야. 두루두루 헤엄쳐서 니느웨 갔다가 자, 다왔습니다. 내리시옵소서 그렇게 하지 않고 물고기를 예비하신 이유는 뭐에요. 이제 물에 빠지는 물에 빠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면, 나 때문이옵나이다,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여기에서만 끝나도 그래도 좋을텐데, 나 때문이야. 말하지마, 다 나 때문이야. 나는 더 이상 누구 원망안해. 나 때문이야. 그래. 그래. 다들 잘났어. 나 때문이야. 나는 못났다. 그래. 그래 다 잘났다. 난 못났다, 그래. 그래 나 못났다고 치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기까지가 아니에요. 거기까지였으면 좀 하겠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요나를 바다 속에 집어넣은 것은 요나를 바다 속에 풍덩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물고기 배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물고기 배속에 요나를 집어넣은 이유는 뭐예요? 메시지는 간단해요. 단 둘이 조용히 만나자. 그 이야기에요. 단 둘이 조용히 만나자.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할 수가 없겠죠. 단 둘이 만나는 게 너무 쓴 이야기니까.
찬송 한 장 하겠습니다. 335장 하겠습니다.
(찬양) 양 떼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나 목자의 소리 싫어서 먼 길로 나갔네
방탕한 이 몸은 불효막심하여 부친의 음성 싫어서 먼 길로 나갔네
양 잃은 목자는 그 양을 찾으러 산 넘고 물을 건너서 사막을 지났네
갈 길을 모르고 나 지쳐 있을 때 그 목자 마치 나타나 날 구원 하셨네
내 목자 예수는 날 사랑하셔서 내 상한 몸을 고치사 그 피로 씻었네
길 잃은 양 찾아 위로 주시고 그 우리 안에 이끌어 늘 보호 하시네
양 떼를 떠나서 맘대로 다녔네 나 지금 목자 따르며 그 음성 듣도다
나 이제 후로는 방황치 않으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네 아멘
중요한 것은 요나가 순교의 정신으로 물고기, 바다 속으로 던지움을 받았다 아니면 요나가 그래 그것이 나 때문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중간 결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결론은 그게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양심에 화인 사람이 아닌 한, 문제가 크게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풍랑이 출렁 될 때에, 주님 이게 다 쟤 때문이옵나이다는 생각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꼴 보기 싫으니까, 잘난 척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게 다 나 때문이지 하는 그 말은 안 하지만, 속에 양심은 다 그것을 말하고 있어요.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이게 나 때문이지 하는 생각을 암시적으로나마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요나가 오늘 하나님이 마지막에 막다른 길로 몰고 가서 목에 칼을 대면서 항복을 요구했을 때, 저 때문이옵나이다 한 것은 평소에 깔려 있는 그 생각을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야기 에요. 그렇지만 이것도 대단한 거죠. 전에는 나 때문이옵나이다 말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렇지만, 물론 그것, 물론 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그렇지만, 그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 때문이다 하고 싶은게 아니라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만, 뒤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물론 나한테 책임이 없을 수가 있나. 있지, 그렇지만 대게 목소리가 커져요. 물론, 내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 없지, 그렇지만 큰 목소리로 니느웨 놈들이 쳐들어왔고, 니가 한번 내 입장이 되어 봐라 하면서 따지는 거죠. 니느웨 놈들이 쳐들어와가지고 우리 모든 동네를 약탈하고 너도 안 당해봤으니 그렇지, 한번 당해봐라. 너도 내 심정이 된다. 그러면서 이제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그것은 간단하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폭포수와 같이 처음에는 지렁이 눈물만큼 이만큼 나 때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그렇게 하고서 그 다음에는 폭포수와 같이 그렇지만 니느웨 사람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다음에 배에 탄 사람을 원망하고 폭포수와 같이 쏟아 내는 거예요. 그것이 마지막에 문제 해결의 단계에 가기 전에는 그렇지만 이해가 안 들어오는 거예요. 갑자기 모든 것이 여호와로 말미암았고, 이것은 나를 부르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뭐에요. 다른 사람이 니느웨가 뭐라 그랬지, 난 관심이 없어요. 문제가 뭐에요. 결국은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가면 이제 문제가 다 해결 되겠구나 그러는데 여기까지 가도 여전히 파도는 쳤어요. 이렇게 생각이 딱 굳어지고 오, 주님 죄인 받으시옵소서. 모든 것이 나 때문이옵나이다 그랬는데도 결국은 바다로 던짐을 당했어요.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배속으로 꼴깍 들어가게 되었어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것, 그 고백만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인격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 인격적인 결단은 고백 이상이에요. 무슨 이야기에요. 주님 사랑하옵나이다. 그런 느낌 우리 들 때 있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면, 뭘 좀 보여 달라 이거예요. 말로만 하면 무슨 소용 있냐고 요새 그러지. 말로만, 말로만 하면 뭐해요. 뭔가 씹히는게 있어야지. 사랑합니다. 씹히는 게 있어야지. 껌이라도 하나 가져다주면서 사랑한다 해야지 성경이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해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그러면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거예요. 제가 잘못하였사옵나이다. 제가 죄인이옵나이다. 이 고백 하기 되게 힘들잖아요. 거기까지 간 것 가지고 충분하지가 않다 이야기에요. 그 고백이 참이라면 주님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물속에 들어가겠나이다. 들어가는 거예요. 퐁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는 것도 굉장히 힘든 거죠. 그러니까 거기까지, 아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딱 결론을 내리고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야, 이것은 내 문제야. 나 때문이야. 내리는 것은 여기에서 일어난단 말이에요. 대게 머리에서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선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를 정돈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어요. 이제 좀더 좀더 이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서 파도가 더 높이 쳐야지만 생각을 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이게 자기 머리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댓가를 많이 지불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것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어린아이와 같이.
(예화) 집회를 가끔 가보면 그런 교회 있어요. 다리 다 꼬고 앉아서 뭐라고 떠드나 보자. 먹을 게 있을까. 꼭 뷔페에서 먹고 싶은 것, 젓가락 가지고 와서 고르는 사람처럼 자, 한번 늘어나 봐. 내가 한번 먹을 게 있는가 볼게. 그리고 다리 딱 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집회는 죽은 거예요. 속으로 왜 이런 데서 날 오라고 그랬나. 이러고 무슨 집회를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누구 잡을 일 있나.
그런데 요나가 이렇게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요나에게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이옵나이다 한 다음에 그 다음에 뭐냐 하면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고래 배속에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오직 누구만 있어요? 요나만 있고, 안 계신 곳 없으신 하나님 딱 두 분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단 둘이 앉았어야지 깊은 이야기를 할 것 아니에요. 단 둘이 있어야지 깊은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뭐, 옆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껌 팔러 온 사람들, 와 가지고 떠드는 사람들, 이게 뭐가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깊은 이야기를 주님이 하시려고 그래도 듣지도 못하고 이래 가지고 혼돈의 세월을 자꾸 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예 요나를 물고기 배속으로 집어넣고 하나님과만 딱 마주하게만 하는 거예요.
자, 두 번째 단계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난리를 친 것이 뭐냐 하면 포위망을 좁혀가서 딱 받아 낸 것이 뭐냐 하면 너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옵나이다. 이 승복을 받아 낸 거예요. 그 다음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과만 직면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대면한 거예요. 그러니까 2장에 보면 재미있게 시작을 해요. 1절을 보세요.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야, 이거 대게 재미있죠. 하나님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어요.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어떤 하나님, 어떤 하나님, 그 하나님인데 어떤 하나님이에요. 끝까지 찾아와서 결국은 항복을 받아내고 요나를 바다 속으로 집어던지고 거기에서 물고기를 보내서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그래서 요나를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요나를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세우신 여호와에요. 여기에 보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은 요나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그렇죠. 요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의 대명사였고, 그 하나님 여호와는 해결을 가지고 있는 본인, 당사자이셨어요. 당사자이셨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도하여. 이제야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번 집회에 제가 늘 말씀 드리는게 그거잖아요. 어떤 사람도 기도해도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 그런데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야지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는데 그런 것은 내버려두고 여전히 쟤 때문이래요, 쟤 때문이래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다 이거예요. 아무리 울고불고 기도해도 응답이 안돼요. 왜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지, 누가 목소리 큰가를 보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것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함정이 많아요. 오히려, 기도를 아예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책 의식이 있거든. 나는 기도를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다 안 되는 것은 기도를 안 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책 의식이 있는데 기도를 좀 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함정이 있느냐 하면 말이에요. 부르짖어도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부르짖어도 안 되는 이유는 뭐냐. 하나님은 들어 주고 싶은데, 나는 이렇게 부르짖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이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가면 이제 다시 출발하게 되는 거예요. 욥바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보다 무지목매해요. 무지목매해요. 그리고 또 용감해요. 아무리 맞아도 이게 맨 처음 맞을 때는 한 두 대 맞을 때는 겁이 나는데, 그냥 줄 배트로 맞으면 이게 매집이 생겨가지고 이제 몇 대 정도 맞아 가지고는 끄떡도 안 해요. 그러면 때리십시오. 하나님 자식 죽지, 내 자식 죽습니까. 그리고 이제 버티고 고래 심줄처럼 나가게 되면 이것은 점점 어려워 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제 평범한 방법이 아니라 이제 완전히 새롭게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모든 문제가 정돈이 되고 나서 비로소 요나가 기도를 하니까 기도하자마자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 기도가, 여러분 2장을 잘 읽어보시면 알지만, 이것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이 기도가 보통 기도가 아니에요. 정말 이런 수준의 선지자에게서 이런 고차원적인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 정도의 기도에요. 이게 지금. 그렇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도 불순종해가지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면서 콧노래를 부르다가 풍랑을 만나도 배 밑창 삼등칸에 들어가서 잠이나 퍼자고 그러던 오바이트로 이리저리 구르다가 항복을 안 하다가 결국은 이렇게 끌려온 수준 낮은 정신병자 비슷한 이 선지자가 이런 고차원적인 기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 요나의 이 기도가 가만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상당히 일치하는 점이 많아요. 그리고 이 기도가 벌써 기도의 내용만 읽어봐도 써놓고 읽어봐도 성령 안에서 깊이 기도하던 기도는 써놓고 읽어봐도 이게 깊이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요.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설교를 성령의 권능에 충만해서 했던 설교는 써놔도 성령이 충만해서 하지 못했던 설교와 내용이 달라요. 그런데 2장의 이것은 완전히 책 한권 감이에요. 그 연구의 대상이라고요. 이 기도가 얼마나 멋있는지, 오늘 아침에도 읽으면서 감탄했어요. 참 대단하다. 이 수준의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이에요? 확인하건데, 1장에서는 이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어요. 1장에서. 그러나 2장에서 가능했어요. 왜 가능했어요? 문제를 정돈하면서 내릴 중간 결론을 내리고 정돈된 관계 속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니까 기도가 갑자기 깊이 있게 확 들어가는 거예요. 남이 보기에는 뭐 울고 불고 방언을 다따부따 하고 철야를 하고 뭐 그러는데, 여러분 기도는 그것 보다 더 깊은 거예요. 그것 가지고 제법 기도 많이 하는 것처럼, 누가 그러더라고요. 금식을 밥 먹듯 했대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금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밥먹듯 했대요. 여러분, 그런 것 가지고 마음이 부요해진 사람들 이렇게 볼 때에 내 마음에 스쳐가는 생각이 야 참 불쌍하다. 대부분 자기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를 안 믿고 개판으로 살다가 교회 나온 사람들은 교정이 빨리 되요. 말씀이 주어지면 어 아멘 교정이 빨리 된다고. 그런데 은혜가 좀 있고 기도빨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은 이 얼마나 사람들이 기도하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주여 하면서, 물론 자기처럼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없어요. 어떻게 뭐 평범한 사람이 3시간, 4시간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3시간, 4시간 기도한다고 해서 그게 신령한 기도가 아니에요.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거예요. 왜 그래요.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다고요.
어느 교회 목사님이 그러잖아요. 집사님이 막 기도를 많이 해요. 무슨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냐. 몇 시간 하냐. 열 시간, 열 두 시간을 했대요. 열 두 시간을 할 기도 제목이 있느냐. 없대요. 뭐냐. 여섯 시간만 기도하면, 왠만한 할말은 다 한 대요. 생각나는 사람들 모두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해도 한 여섯 시간 정도만 하면 다 한 대요. 그러면 여섯 시간은 뭐 하냐. 그랬더니 하나님은 나를 쳐다보고 웃으시고 나는 하나님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여섯 시간을 지낸대요. 그렇게 막 고래고래 통성 기도 할 때 간절한 마음이 생기고 뭐 눈물을 쏟고 하는 것이 기도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그 이상 기도를 들어갈 수 없어요. 기도의 세계가 얼마나 심오한지 그런 교만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문제가 깊으면 내가 왜 이 정도밖에 기도가 안 될까 하면서 더 깊고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야 하는데, 눈물 나오는 것 정도로 만족하니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가지고 또 자기가 옳다는 사실을 매일 확증을 하니까 그러니까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나와서 맨 날 하는 말이 얘 때문이래요. 그러니 그것은 1장의 기도거든요. 그러니까 요나와 같이 이렇게 기도를 안 하다가도 한번 탁 기도할 때, 슈 그러면서 깊은 기도로 들어가서 문제를 들어내면서 하나님 앞에 본말을 붙들고 씨름을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해결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기도해도 계속 안 되는 것은, 나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저 사람이 아니면, 저 환경이 개 꼬리 3년 묻어서 황무 안 된다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성경에 어디 그런 대답이 있어요. 한 사람의 위대한 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꿔놓고, 환경을 바꿔놓아요. 믿습니까. 그거 이야기 했잖아요. 한 사람의 위대한 기도는 폭우가 내리게 해가지고 불붙는 곡식단을 보호할 정도라고요. 이러한 힘이 있는 것인데, 문제가 있는 거죠. 뭐, 그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가지고 못했으니까 그런 것 위험 이야기 해봐야 소용도 없지만, 나중에 한번 조용히 이야기 할께요. 여러분 얼마나 이 신앙의 세계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자기 확신에 차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의에 빠지고 그리고 교만함에 빠져가지고, 그런 것은 진짜 원인도 없어요. 침체가 원인도 없다고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몇 달 전에 하나님의 신앙과 참된 은혜 체험에 대해서 한 열 번에 걸쳐서 설교 했죠. 여러분 너무나 무지가 가득해요. 그 속을 헤치면서 평생 이제 자기에게 속고 사는 거죠. 난 잘났고, 쟤는 못났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죠. 증거가 뭐냐. 봐라. 난 이렇게 기도 한다 이거예요. 기도하냐. 기도 안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2장으로 빨리 들어와야지, 3장으로 들어가야 뚤리는데, 3장으로 가서 뚤리는게 아니에요. 나중에 기회 있으면 이야기 하겠지만, 3장에서도 안 뚤려요. 그래서 4장, 5장, 3장에서 안 뚤려 가지고 결국은 4장에까지 가가지고 결론을 내리고 그 4장 요나를 넘어서서 이제 하박국까지 가야 하는데 그래야지 결국은 요나서 하박국에 가서 끝이 나는 것인데 그런데 이제는 뭐 기도 좀 하는 것 가지고 1장에 와 가지고 있으면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답답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제가 수준에 안 맞는 사람들과 같이 교회 생활을 하는데서 만약에 목회자들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나와 같이 수준이 안 맞는 인생들하고 뭔가를 우리를 통해서 이뤄 가시려고 할 때 얼마나 답답하실까. 참 답답하시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1장에서 계속 맴 도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문제 대로 있고, 기도는 자기는 기도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속에서 자기는 잘났고, 다른 사람은 못났고, 그러면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하면서 그 동안에 파도는 점점 깊어가고 포위망은 점점 좁아 들고, 피해는 속출하고 결국 나중에는 나도 모르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기억을 해야 해요. 요나가 기도하는 게 비로소 2장 1절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1장에서, 1장에서 기도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을수도 있겠지만, 했을수도 있어요. 풍랑이 막 일어나는데 했을 수도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관심 없어요. 기도를 여기에다가 적어 놓지도 않았어요. 2장에서 우선 머리가 정돈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시인해야 할 바를 시인하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했어요. 어떤 자리,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것, 그 자리에 있게 하고 그 다음에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그 기도를 보겠습니다. 그 기도를 보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결했는가 보겠어요. 자, 이것을 다 풀 수는 없겠지만 보겠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뢸 수 없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음부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물고기 뱃속의 그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거죠.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왜 조금 이상하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3절을 잘 주목해 보세요.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둘렀고 주의 바다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보세요. 누가 던졌어요? 사실은 누가 던졌냐고요. 그거 뱃사공들이 던졌잖아요. 분명히 다시스까지 주는 노잣돈 다 받아놓고도 자기를 도중하차 시켰잖아요. 돈도 환불도 안 해주고 도중하차 시켰잖아요. 그랬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딱 서서 생각을 해 보니까, 던진 사람들은 뱃사공들이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를 던지게 하신 이는 뱃사공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파도치고 있는 그 끔찍한 물결, 지금도 고래 뱃속에서 꼴깍꼴깍 넘어오는 이 물과 물풀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느껴지는 거예요. 바로 이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 앞에 홀로 딱 서니까 환경을 보는 관점이 바뀌는 거예요. 환경을 보는 관점이. 이 풍랑이 왜 일어나냐. 얘 때문에요. 왜 파도가 왜 이렇게 배가 뒤 흔들리냐. 파도 때문에요. 이러면서 초등학교 1학년 같은 대답을 하다가 이제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던지셨나이다. 사공들이 물속에 집어넣지만, 던지는 이는 주님이시옵나이다. 그러니까 뭐에요. 뱃사공들은 주님의 사자야. 주님의 사자고 그리고 파도치는 그 물결을 그때까지 자기가 그 물결과 더불어 싸웠는데 이제 보니까 그 파도와 그 풍랑도 주님의 심부름꾼이에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드는 거예요. 주님의 심부름꾼인데 원망할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잡혀서 집어던지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죠. 이 일은 누구 때문이야. 내가 죽어도 그 사람은 내가 용서를 안 하겠다. 내가 하여튼 이를 간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직 먼 거예요. 1장도 못 온 거에요. 아직. 그러니까 해결은 캄캄한 거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원망하다가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서 정돈이 되고 주님 앞에서만 홀로 서보면 이 불행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데 그것은 뭐에요. 일어났던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였다 깨닫는 거예예요.
(예화) 그러면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신학대학원을 졸업할 때, 어느 교수님이 나오시더니 여러분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이리 가운데 내보내는 것 같다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의 교회에서 어디를 가시든지 가면 뿔이 달린 송아지, 뿔 달린 염소가 있어서 말이야. 여러분들을 갈구고 그리고 들이 받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 사람이 여호와께로 보냄을 받은 사자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게 없으면 뭐 긴장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냥 가는 거예요.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면서 뿔을 딱 세우고 쓴 뿌리가 되면서 달려와서 엉덩이로 박고 막 박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안아 줬더니 확 받았는데 그 뿔에 채여서 입 천장이 찢어 지는 거예요. 이럴 때 여러분들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원망과 미움 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고 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이루셨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와서 들이받는 염소도 불쌍해 보이는 거예요. 인생아. 인간아. 인생아. 와서 들이받는 심정은 오죽 하겠느냐. 야, 한 번 더 받아라.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어디냐 하면 창세기 50장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대부분 인간들 마음속에 생기는 끔찍한 상처 있잖아요. 그 상처는 상처를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줄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그 상처가 점점 아물지 않고 덧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이러한 폭넓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더 덧나는 거예요. 상처 그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들 보면 막 뛰놀다가 쾅 하고 넘어져서 찍 하고 긁히면 들어오는 것 보면 끔찍해요. 시뻘겋게 까져가지고 피가 줄줄 흐른다고요. 그래도 병균에 감염만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약 좀 바르고 물로 좀 씻어내서 내버려 두면 그 다음날에 꾸둑꾸둑 해지고 3-4일이면 딱지 떨어지고 나면 언제 그랬나 겅둥겅둥 뛰어다니며 잘 논다고. 그런데 이게 오염이 되기 시작하고 말하자면 이물질이 들어가기 시작해서 썩기 시작하면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분명히 상처 그 까짓것 이만큼 밖에 안 되었는데 날줄 알았는데 거기에 병균이 간염 되어가지고 이게 아물지를 않는 거예요. 약을 발라도 속으로 점점 깊어지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태까지 나오는 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인간이 얼마나 여린지 알아요.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고 그래요. 상처를 받아요. 그런데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피할 수가. 왜 그래요. 자기는 그렇게 안사나. 자기 지나갈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어요. 상대적이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상처를 준 것은 생각이 안 나지, 안 나지. 그리고 자기가 받은 것 만 생각이 나는 거예요. 다들 나와 가지고 하는 말이 자기가 준 사람들에게 가가지고 내가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 나한테 상처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라 그런 사람 봤어요?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마음속에 독한 쓴 물을 머금고 저 놈 니가 나를 상처했지. 언제, 18년 전에. 이러면서 씹으면서 사는 거예요. 이게 막 속에서 번져가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가죠.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엄청난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상처에서 벗어났던 예가 수 없이 많지만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어요.
여러분, 구약에 나타난 많은 믿음의 사람 가운데 요셉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 없어요. 그가 어떻게 보면 부모에게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렇게 생각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왜 그래요. 얘가 얘가라고 해서 미안하지. 그 요셉이 성격이 좀 별난 사람이었어요. 평밤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별난 사람이었어요. 아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을 봤으면 봤지, 조용히 아빠 찾아가서 이야기 하면 했지 왜 그것을 모든 형들이 보는 앞에서 잘났다고 그러냐 이야기에요. 그리고 뭐 채색 옷 입혔으면 입혔지 형들이 언사가 불평할 정도로 그렇게 특혜를 받으면서 그 특혜를 누렸으니까 형들 보기에 이것은 진짜 아니꼬운거죠. 재수 없는 놈 하나가 태어나가지고 말이야, 웃긴다 이거죠. 그래서 동생 태어나고 나니까 동생 미워하는 애들 보잖아요.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놈이 상처를 준 거죠.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뭘 잘못했냐 이거예요.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 밖에 없다 이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사랑을 거절해야 하느냐 이거예요. 채색 옷을 아버지가 입혀줬는데 싫다고 벗어 던지고 그러면 무명옷을 입어야 되겠느냐 그거예요. 요셉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요셉은 형들이 잘 있나 보라 그렇게 할 때에도 3일 길을 걸어서 가고 없으니까 또 거기에서 더 걸어가지고 걸어가면서 형들의 안부를 아버지에게 그대로 전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갔다 이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를 왜 팔아 먹느냐 이거예요. 아버지가 용돈을 안 줬냐 이거예요. 내가 뭐 소냐, 짐승이냐. 그리고 그것도 끔찍하게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교묘하게 내 옷을 벗겨가지고, 빨개 벗겨서 그것을 염소피를 칠해가지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갖다 주고 이러면서 결국은 팔려가지고 애굽으로 갔더니 애굽으로 오면 이제 형제들 떠났으니까 나는 좀 상처를 주는 사람이 없겠거니 했었는데, 왠 도깨비같은 여자가 하나가 나타나가지고 말이야. 좋다고 덤벼들어서 난 싫다고, 믿음을 지켜, 그러는 거예요. 자기도 한 번 그 여자와 같이 동침했으면 기분 좋았을지 모르지. 그러나 자기는 하나님이 보시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그리고 뿌리쳤다 이거예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한테 뭐 있냐. 옥 속에 쳐 넣은 것 밖에 더 있냐 이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뭐예요. 만나는 사람마다 다 상처를 받은 것 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더니 나중에 뭐라 그래요. 그런 상처를 다 받았을 때, 그 사람보다 상처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 가는 곳 마다 상처를 받았어요. 신실하게 살수록 상처를 받았어요. 그 모든 상처가 인간에게서 온 상처에요. 그렇기 끔찍한 상처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뭐라 그래요. 형들이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무서워지는 거예요.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아니까, 저 놈이 애굽의 국무총리인데 야, 이 쓰레기들 갔다가 쳐 넣어 그러면 끝이거든. 그러니까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거야. 아버지가 유언을 했는데, 언제 유언을 해. 거짓말이지. 유언을 했는데 형인 우리들을 잘 봐주라고 그러더라. 요셉이 눈물을 흘리는 거야.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왜, 무슨 눈물인지 알아요? 인생아, 인간아 불쌍하다, 불쌍하다. 왜, 아직도 내가 그런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줄 아느냐. 난 아버지 잃은 슬픔밖에 없다. 그리고 뭐라 그런지 알아요? 당신이 나를 상처를 주고 해쳤으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당신은 나에게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 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였나이다. 이렇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대국적으로 나갈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아이고 참.
그러니까 이제 이 요나가 이런 관계 속에서 환경을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니느웨 사람 이야기 할 개제가 안 돼요. 왜 그래요.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움직이시는구나를 인정하게 되는 거예요. 상처가 깊어지는 것은 여러분의 잘못이 커요. 그것을 기억해야 해요. 요즘 뭐 치유설교가 유행해가지고 다 상처 받은 것, 뭐 싸매준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상처가 싸매지는 것 아니죠. 일리는 있죠. 일리는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깊이 이해가 가지만 그러나 상처받는 것은 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피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받은 상처보다 준 상처가 훨씬 많을 걸요. 그러니까 세상이 이렇게 슬프죠. 누구든지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난 것처럼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거예요. 상처를 주는 것은 그 사람 잘못인지 모르는데, 그것이 빨리 아물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라고요. 빨리 아물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의 책임이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 분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상처가 덧나고 거기에 고름이 나고 썩고 거기에서 창질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말씀의 칼을 대려고만 하면 진저리를 친다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 거죠. 기억해야 돼요. 상처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어요. 그것은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나 상처를 간직하고 치료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 상처가 더 깊어 가는 거예요. 그것은 본인의 책임이에요. 그렇게 해서 막 자란 것 가지고 그렇게 해 가지고 원망을 하면 안 된다 이거예요. 그 사람의 책임은 상처를 준 것 만큼만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것이 골마서 연고만 발라서 낫을 수 있는 게 점점 번져가지고 팔까지 자르게 된 것은 그것은 자기 책임이라 이야기에요. 언제든지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것을 잘 이해하셔야 해요. 상처 이야기는 그만 하고.
여기 물속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하니까 이제 이 기도가 관점이 틀려지는 거예요. 뭐라 그러느냐 하면, 주님이 날 던졌습니다. 그 물결은 주님의 물결입니다. 주님의 파도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던진 뱃사공도 주님의 사신이었고, 그리고 나를 삼켜버린 그 큰물도 주님의 심부름꾼 이었사옵나이다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심부름꾼과 사신은 보내신 자에게 순종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주님이 나를 던지게 하셨는데 원망할 필요가 없는 거죠. 주님이 나를 쳐내셨는데 파도를 원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를 갈아야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해결을 받고 싶으면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집어 던지도록 움직이시고 분부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건져 내시는 것도 주님의 손에 있는 줄 믿사옵나이다. 파도를 일으키게 하신 주님, 파도를 심부름꾼처럼 사용하신 하나님, 잔잔케 하시는 힘도 주님에게 있사옵나이다. 이 고백을 하게끔 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약을 정리하고 하는 10분의 기도는 정리 안 된 상태에서의 100시간의 기도보다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거예요. 믿습니까. 그래요.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가 먼저가 아니라 생각을 하고 말씀으로 정리를 하는 거예요.
찬송 한 장 더 하겠습니다. 218장 하시겠어요.
(찬양)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날 붙들어 주시고 내 마음에 새 힘을 주사 늘 기쁘게 하소서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 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내 소원 다 아시고 내 무거운 짐 맡아 주사 맘 편하게 하소서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 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날 정결케 하시고 그 은혜로 내 맘에 채워 늘 충만케 하소서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 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내 앞길 인도하여 이 세상을 심판할 때에 날 흠없게 하소서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 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아멘
어제 우리들이 요나 편을 들어주면서 요나의 입장에서 요나가 이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여러분들 같이 한번 살펴봤죠. 그죠. 그런데도 기이한 것은 뭐냐 하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 요나의 상처를 가지고 거론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거론하는 것을 보세요. 우리 속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요나의 입장에서 그 큰 은혜를 받고도, 이 큰 불순종으로 나아갈 때에는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거든요. 니느웨 사람들에게 절절히 맺힌 그 원한, 그 슬픔, 하나님을 향한 원망 그것 있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요나를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보복을 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비뚤어져 나간 그 관계를 하나님께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이거든요. 이 관계를 지금 치유해 나가시는 과정이 결국은 1장, 2장에서 쭉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이 문제를 다뤄 감에 있어서 그러한 요나 속에 있는 상처가 이것이 회복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도 그것부터 먼저 건드리셨겠죠. 그렇죠. 그런데 그것을 건드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요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상처를 통해서 치유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바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따지고 물고 늘어지시면서 바른 관계로 돌아오게 하셔서 그 관계 안에서 치유하시는 거예요. 선후를 잘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축복받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으로 인해서 참 감사를 드려요.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뭐냐 하면 내가 내 자신을 긍휼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 보다 앞선다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어떤 때에는 우리 자신이 한 없이 불쌍해지는 때가 있죠. 불쌍해지는 때가 있죠. 그러나 그렇게 우리 자신이 불쌍하게 생각될 때보다 하나님은 특별한 때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일반적인 때에도 그것보다도 우리를 훨씬 더 뜨거운 감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이에요.
(찬양)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그러니까 우리가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주님이 우리를 인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는 거야. 누가 그 사랑을 따라 갈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뭐 몸값을 지불한 것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서 삼시세끼 밥 먹으면서 산 것 밖에 없어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버리사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셨죠.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겠어요. 할렐루야. 그것은 말할 수 없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들이 원하는 바는 뭐냐 하면 우리를 치유하시고 그래서 치유된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거예요. 오늘 이야기 잘 들으세요. 그러므로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받은 상처를 더 키우는 것은 여러분들의 책임이고, 한 단계 더 나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도록 부르고 계신데, 그 상처를 부여안고 흐느끼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에요. 기억하셔야 해요. 누가 뭐라 그러든지 여러분들이 이것을 기억하셔야 해요. 기회가 있으면 상처에 대한 설교를 하겠지만, 다시 한 번 반복할게요. 핵심만. 상처를 받은 것은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상처가 덧나고 깊어지는 것은 여러분들의 책임이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부르실 때는 상처를 먼저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상처를 먼저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주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들여다보라고 여러분들 부르시는 거예요. 그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들의 상처가 온 몸에 퍼졌다고 할지라도 그 상처를 부여안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라고요.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데,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보지 못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삶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을 온전히 느낀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가 자기를 긍휼히 여길 필요가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더 큰 사랑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그 사람들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거예요. 나는 그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오늘날에 인간들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들은 가상하고 양 떼들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다 좋은 것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상처를 먼저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를 먼저 부르시는 거예요. 그러면 씻은 듯이 나아요, 그게. 그리고 그렇게 고쳐지지 않은 것은 고쳐지는 것 같지만, 금방 재발해요. 금방 재발해. 그러니 결국은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기독교적 염세주의로 가는 것 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것은 반항이에요. 불순종이에요.
그런데 7절에 보니까, 4절에 보니까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였나이다. 야, 이것은 기도 몇 마디밖에 안 했는데 이게 이제 요나가 해까닥 했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원래 요나에요. 요나의 본모습이거든요. 그 은혜를 받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인이다 라고 하는 이 요나의 본모습이에요. 그런데 요나가 자기의 상처를 부여안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니까 말하자면 이러한 좋은 본바탕을 다 까먹은 거예요. 그러다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가고 하나님 앞에 서서 깊이 기도하니까 주님은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가 드디어 깨닫는데 이것은 진짜 처절한 고백이에요.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였나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1장을 생각나게 만들죠. 뭐 때문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전에는 주님, 도망가겠사옵나이다. 주님의 얼굴을 피하겠나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래, 가라. 가. 그런데 안가. 가. 그리고 하나님이 발로 뻥 차셨는데도 주여, 제가 어디로 가겠사옵나이까. 또 기어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면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쫓아내실 지라도 나는 주의 성전을 바라볼 수밖에 없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거든요. 주님, 상처가 있어도 나는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나이다. 발로 차셔도 나는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나이다. 쫓아내셔도 나는 돌아올 수밖에 없나이다. 주님을 떠나서 부귀영화와 형통함이 기다리고 있고 성전을 바라보며 사는 삶에 몽둥이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주여 저는 몽둥이에 얻어맞으면서도 주님 앞에 있을 수밖에 없나이다. 이런 고백이거든요. 신파조이지만 이런 고백이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요나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된 모든 인생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주셨는데도 순종하면서 걸어가는 인간들 보란 말이에요. 전부다 제정신이 아니에요. 상식이 통하지 않아요. 막 고통하고 물고 뜯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자기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니까 이제 본바탕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은혜 받을 때, 주님이 내 마음을 녹이시고 그리고 주께서 바짝 고치셔서 그때 내가 주님의 한없이 은혜, 이것을 힘입어서 나로 하여금 문제가 있는 곳에 나를 보내주시고 고통이 있는 곳에 보내달라고 짝 기도하던 그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셨네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러면서 손들고 주님, 내가 주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주 없이 살 바에야 차라리 주 있이 죽으라고 말씀 하옵소서. 그랬거든요, 요나가. 그 다음 불순종의 길을 택하니까 그런 모든 정체가 다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오면서 기도하니까 옛날 생각이 나고 그러면서 아, 맞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사옵나이다. 주님 쫓아내실지라도 나는 주의 성전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왜 주의 성전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한나가 엘가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브닌나로부터 격동함을 당하였을 때, 엘가나가 그를 위로하고 더 많은 양식을 주고 당신이 나에게 있어서 열 아들 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면서 변함없이 사랑하고 위로해주었는데도 해결이 안 되었어요. 어디로 올라갔어요? 성전으로 올라갔어요. 그러면서 엎드려서 주여, 쫓아내실지라도 내가 주님 앞에 갈 수밖에 없나이다. 그러면서 그 앞에서 모든 희망과 절망을 토로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복을 구하는 거죠. 야, 그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회복의 조짐이 보이는 사람들 치고 교회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정착을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교회 나오지 못하면 아직 먼 거예요. 아직 1장에 있는 거예요. 아직 멀었어요. 1장 초반부에 있는 거예요. 중반절까지 왔다가 다시 욥바로 돌아가고 또 왔다가 욥바로 돌아가고, 이게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점점 더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쌓여가고 교회는 고통을 받고, 여러분들은 인생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연습하면서 살아가겠어요. 한번 시험해 봤으면 족해요. 왜 자꾸 시험해 봐요. 그 욥바가서 다시 한 번 배타보면 길쭉한 배 타면 풍랑을 안 만나겠지. 똑같아요. 길쭉한 배나 둥그런 배나 호떡 같은 배나 하나님 불순종하고 떠나가면 풍랑이 일어나고 똑같은 상황은 맞이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깊어지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서 요나가 결단을 표명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 보겠다 하였나이다. 언제 이랬다는 거예요 언제 이랬다는 거예요 옛날에 이랬다는 거예요. 옛날에 이랬다는 거예요. 그게 지금 내 마음에 다가온다 이거예요. 맞다. 이것이다 라는 생각이 다가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무슨 이야기에요? 풍랑이 일고 파도가 치고 순풍에 돛 단 듯이 가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주 앞에 살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저께 우리들이 불꽃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랬는데, 그 불꽃은 우리의 불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나오는 불꽃이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꼭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하나님 면전에 사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요나가 이 결론을 회상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새롭게 얻은 결론이에요, 이미 가졌던 결론이에요? 이미 가졌던 결론인데 그것을 시험해 보다가 여기에서 맞구나 하면서 정답을 내리는 거예요. 그런데 고액의 과외비를 지출했죠. 출혈이 많이 됐죠. 그렇지만 어떻게 해요. 그렇더라도 학교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낫죠. 떨어지는 것 보다. 진도 나갑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원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애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오래도록 나를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주님이 건지셨어요? 건지시긴 건지셨죠. 물속에서 이제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갔는데 건져냈어요. 건져냈는데 살만해요? 뭐가 살만하긴 살만해요. 진짜 뭐 삶의 유쾌함 그런 것은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틀림없이 그 후실에 들어가가지고 거기에서 밥알처럼 붙어 가지고 물결이 확 들어올 때 어느 가시 하나 붙들고 말이에요. 와 그러면 물이 휙 날라 가고 이렇게 일어나니까 여기에 미역도 걸리고 김도 걸리고 뭐 건더기, 오물도 걸리고 뜯어내면서 다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거예요. 조금 평안 한가 했더니 후 물이 또 넘어 들어오는 거예요. 이만한 물고기 새끼까지 달려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미역을 뜯어내면서, 이게 살만해요? 건져 내신 거예요? 건져 내신게 아니에요. 여기에 건져내셨다고 하는 것은 바다에서 자기를 건져 낸 것이 아니라 1장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걸어갔던 그의 영적인 생활이 죽음과 같고 흑암과 같았음을 말해 주는 거예요. 그 영적인 캄캄한 흑암에서 자기를 건져내 주시는 것, 이것을 지금 말해 주는 거예요. 자 그러니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니 어때요. 이제는 이 육신이 살아있고 안 살아있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돼요. 요나에게 있어서는. 그런데 1장에 하나님 없이 배 밑창에 가서 비록 잠을 자긴 했지만 피곤해서 자긴 했지만 그 마음 조리면서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죠. 죽음보다도 더 진한 고통이 그 풍랑 속에서 그리고 제비 뽑는 가운데서 마음 조리면서 그렇게 요행수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인생이 죽음의 방부라는 인생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셨나이다. 할렐루야. 환경은 변한 게 있어요,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배 밑창에 있을 때가 훨씬 더 편했잖아요. 지금 여기에서 가시 하나 붙들고, 후 으악 그러다가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다시 또 기어 올라오고 또 가시 하나 붙들고 미역을 뜯어내면서 말이에요. 김을 뜯어내면서, 미역을 뜯어내면서 그러면서 3일 동안 그 속에서 뭘 먹었겠어요. 뭘 먹었겠어요. 그러니 금식 아닌 금식기도를 하는 거죠. 기껏 가끔 먹는 것은 소금물 조금 먹으면서 붙들고 기도하는 거죠. 살만한 거였어요? 살든지 죽든지 이것은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안 돼. 어차피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즐거움이 있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건 문제가 안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 그래요? 내 생명을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아가는 불순종한 길을 걸어갈 때, 그 때의 요나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 그 때 바다는 고요했고 욥바를 떠났을 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순풍의 돛단배와 같이 그렇게 배는 바다 위를, 유리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지만 제 마음은 이미 풍랑이 일고 있었습니다. 배 밑창에 들어가서 잠은 자고 있었지만, 꿈속에 시달린 그 악몽을 주님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자고 있었지만 자고 있는 것이 아니요. 순풍의 돛은 달고 있었지만 이것은 잔잔한 것이 아니었사옵나이다. 죽음과 같이 진한 그 끔찍한 고통을 그러니까 사람들이 고통이 심하면 오죽하면 자살을 해 버리잖아요. 죽는 게 나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나니까. 그러니까요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뭐라 그러냐 하면 건지셨나이다. 이것은 요나의 영적 해방을 말하는 거예요. 요나의 영적 해방, 영혼의 해방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만 해방이 되면 라면 먹으면서 살 수 있어요. 한 두 끼 굶으면서 살 수 있다고. 영적으로만 해방이 되고, 우리끼리 탁 털어놓고 이야기 합시다. 여러분들 지금 이 풍랑 계속 들으면서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면서 4일 왔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 것 같다. 저 사람은 어떻게 내 마음을 꿰뚜나. 난 몰라요. 아무것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마음에 그 문제가 해결되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 전세 집에서 살다가 사글세 집으로 갈 텐데 바꿀 수 있겠어요? 바꿀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자기 집 살다가 전세 집으로 가는데, 살 수 있겠어요? 50평 살다가 10평으로 사는데 하겠어요? 그런 거예요. 인간이. 인간이 바로 그런 거예요. 영적인 이 고통에서만 해방될 수 있으면 죽음에서 살아난 거예요. 뭘 바랄 수 있겠어요. 나머지는 좀 불편하죠. 불편하지만 죽음은 아니잖아요. 불고기 먹다가 라면 먹는다고 해서 그게 죽음이에요? 독약이에요? 아니거든요. 좀 불편한 거거든요. 좀. 50평짜리 집에서 물침대에 살다가 그러다가 100만원에 10원짜리 사글세방에 들어가서 연탄 피고 쪼그리고 누우면 좀 불편하지. 사망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어둠 속을 지나가는 것, 이것은 사망이에요. 죽음이에요. 무엇으로도 그런데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훌륭한 차를 타고 다니고 날마다 사 놓은 증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라가도 이 고통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풀리지 않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요나는 말하기를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여러분의 영혼이 이렇게 해방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기도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절에 보니까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이게 누구 얘기에요? 이게 누구 얘기에요? 요나 얘기에요.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요. 그것도 동시에 누구 얘기에요? 그럼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그러니까 뭐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이탈되었기 때문에 내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이 지체되고 있는가. 그것에 대한 가책은 없어요. 내 상처가 최고야. 그 다음에 주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불순종의 길을 걸어감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얼마나 덕을 세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에 먹칠을 하였는가. 그 분의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손실을 주었는가 그런 것은 생각이 안나요. 내 상처가 최고에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상처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것은 불쌍하기는 하지만 극도의 이기심이에요. 극도의 이기심이라고. 그렇게 자기 상처 받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받은 상처를 가지고 덧나게 하고 그것을 자기가 부여잡고 있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한 번도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 이런 길을 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더렵혀졌고 주님의 교회가 상처를 받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요. 그러니까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그러한 애정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향한 강한 불순종이라고요. 사단은 우리에게 와서 맞아, 너같이 불쌍한 놈이 어디 있냐. 주위를 돌아봐라. 누가 너를 불쌍히 여기느냐. 그러면서 이제 위로처럼 천사처럼 다가오는 거예요. 성경이 말하잖아요. 광명한 천사처럼 위장하고 우리에게 사단이 다가온다 이거예요. 결국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면 그렇게 부여안고 살면 치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치유가 없어요. 치유가 없다고. 치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나는 이러한 결론과 이러한 정신을 교회도 견지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상처들을 교회가 더 깊어지게 만들고 있어요. 그것을 기억하셔야 해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꾸 그 편을 들어 주니까 그 편만 들어주고 그 상처의 심각함과 고통만을 자꾸 싸매니까 그러니까 본말이 전도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할 욕망보다도 그런 필연성보다도 내 고통의 절대성을 붙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복이 점점 안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식으로 치유하지 않는 교회에 가서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상처를 일으키는 거죠. 뭐 하겠어요. 울고불고 막걸리 한 잔 먹고 난다고 해서 해결이 돼요? 그렇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손이 오셔서 치료하시고 고치고 싸매시는 일이 일어나야 해요. 거기에는 자기의 고통을 내려놓는 일들이 일어나야 해요. 그러니까 하여튼 조심하세요. 이것은 아주 지금 오해가 평만하고 있어요. 이것이 작은 오해인데 이 오해가 우리들의 생명을 좌자우지 하고 있다고. 무지가. 기억해야 돼요. 결코 치유가 안 돼요. 실험해 보려면 실험해 보세요. 안 돼요. 그래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자기가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이방인, 이방인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뭔가 계획 하신 것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길을 걸어가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회개를 하든지, 그 말대로 심판이 임하든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기가 순교를 하든지 무엇 때문이지 모르지만 하여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선입견, 원망, 미움, 하나님에 대한 불평, 이런 것들을 그 사명의 자리에다가 대치해 놓은 거예요. 이유 없었던 게 아니라 이유 있었죠. 그렇게 거짓된 것을 숭상하는 자들은 결국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어떤 삶이었다고 요나가 깨닫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삶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삶이었다.
여러분, 진지하게 사는 게 다 옳은 것이 아니에요.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진지해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봐요. 그러니까 웃기는 게 뭐냐 하면 요즘에 치유 설교 한다고 몰려다니잖아요. 일리가 있어요. 교회에서도 그런 것들을 보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배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거기 몰려다니는 사람들은 꼭 그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거예요. 가서 보면 요나가 이럴 수밖에 없었나이다 하면 내가 요나 같거든. 그러니까 막 울고 울고불고 통곡했는데 그런데 뭐 변한 게 없단 말이에요. 다음에 또 오는 거죠. 다음에는 요나 같지 않고 또, 여러분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과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울고, 그리고 갔다가 다시 돌아와요. 다윗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울고 성경에 울 일이 하도 많죠. 그게 은혜인 것 같은데 은혜가 아니라고.
그래서 실제로 치유 설교를 전공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의 하는 얘기가 마약과 같대요. 마약과 같대. 그래서 거기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설교 가 보면 웃기는 거지. 나는 나는 지금 필요로 하는 설교가 뭐냐 하면 그래, 너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탈 수밖에 없다. 없었구나 너 마음속에 있는 니느웨를 향한 원망이 커서 얼마나 아팠겠니, 이 설교를 듣기 원하는데 요나는 불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람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예요. 진짜 바람이 나오잖아요. 바람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고 그리고 이제는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껏 하는 이야기가 설교가 실제적이지 않다. 세상이 참 힘들어요. 정말 목회하기 힘들어요. 너무나 박사들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다 아는 거예요. 드러누워서 지금 걸어도 못 다니는 배 짼 주제에 그 가위 말고 저 가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칼 말고 저 칼 그러면서 이제 입만 살아가지고 그러니 뭐 의사가 여기 대 여섯 명이 앉아가지고 말이야, 수술을 하는데 그 칼 말고 저 칼, 아니, 아니 이 칼, 저 칼, 이 약 말고 저 약, 미제 말고 일제 그러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러고 있으니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이러한 무지가 교회에 충만해요. 충만해. 그러니까 점점점점 희망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오해의 껍질들이 벗겨지기 위해서는 겸비해 져야 해요. 겸허하게 나는 그 광대한 하나님의 그 말씀과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정말 잘 알지 못하오니, 그러니까 망망대해에 조각배를 띄우고 가는 심정으로 주여 인도 하옵소서 하면서 그 길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이런 겸비한 것이 필요한 때에요. 참 걱정이죠. 그렇죠. 진도 나갑시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분명히 요나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 구절에서 울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울었을 것 같아요.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롤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그런 것을 보니까 분명히 요나가 은혜를 받았을 때, 무슨 서원을 했나 봐요. 주님이 하늘 열고 은혜를 주시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하늘을 여셨는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기분이 좋은데, 무슨 서원을 못하겠어요. 주여, 땅 끝까지 가겠나이다. 아골 골짝 빈들에 날 보내주시옵소서. 안 보내 주시면 섭섭하옵나이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주님, 나를 갔다가 아골 골짝 빈들에 안 보내시고 강남의 편안한 곳으로 보내시면 나는 차라리 죽겠나이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복음 들고 가오리다. 순교를 하겠나이다. 앞서간 위대한 선지자, 선배 선지자들의 그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모세와 같이 살다가 죽게 하옵소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그 서원은 새카맣게 잃어버린 거죠.
(찬양)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너는 어찌 잊었나
찬송도 있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은 여기에서 깨지는 거예요. 무너지는 거죠. 나는 감사하옵나이다. 뭐가 감사해. 감사할 게 뭐가 있어요. 지금도 가시 하나 붙들고 말이야. 대롱대롱 매달려 가지고 후 하고 불면 이번에는 긴 미역이 매달려 가지고 김 떼어내고 미역 떼어내고, 해초를 떼어내고 말이야. 물고기들이 코로 들어오는 이 난리의 상황을 통해서 감사할게 뭐가 있어요. 주여 감사하옵나이다. 물고기가 요동을 치니까 저리로 나가떨어지면서 미끄러지는데 뭐 감사할게 있어요. 환경이 뭐 바뀐 게 있어요. 그런데 감사 충만 한 거예요. 할렐루야.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잠잠함과 평안을 주시는 거예요. 감사함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를 봐요. 7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 딱 들어가서 의연하게 쫙 서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와 능력을 공급받는 사람들은 그렇게 풍파를 이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야기는 쥐어짜듯이 감사 헌금을 내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물론 감사 헌금을 해야지 교회를 하지요. 그런데 그런 감사가 아니라 불꽃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이미 이런 초보 단계를 초월한 사람이에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불꽃과 같이 사는 게 아니면 사는게 아니라니까요. 누차 이야기 하지만. 쓰레기처럼 살던지 불꽃처럼 살던지 둘 중의 하나지, 중간 선택은 없어요.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영적인 제사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8번 MP3파일 31:00부터 31:20 까지 설교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형통하면서 이제 좋은 길로 나아가려는 조짐이 보일 때는 아 감사 찬송이 나와요. 시련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것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데 파도가 더 치는 것 같아. 그리고 물고기가 토 해 놓치를 않아. 이게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고비에요. 하나님 앞에 탁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막힌들 두려우랴. 한번 해 볼까요. 하나 더 해 봅시다. 542장입니다.
(찬송)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
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로리라.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감사는 환경에 매이는 것이 아니에요.
(예화) 어느 아들이 집에 돌아와 가지고 신앙이 신통치 않았어. 아빠, 아빠 나는 있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해 본 적이 없어. 왜 그러니. 아빠, 아빠. 놀래지 마세요. 고속도로에서 차가 뒤집혀져서 네 번 굴렀어요. 그래, 안 다쳤니? 이것 보세요. 이렇게 멀쩡해요. 차는? 폐차 처분 했어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안 감사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나는 고속도로를 가지 않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단다. 인간이 꼭 그렇게 튀겼다가 살아나야지만 감사하다 이것은 그러거든요. 감사하다. 생명이 있음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를 드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풍만한 감사에요. 단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려 놓으시니까 이제 이렇게 감사할 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되니까 이 속에 문제 충만한 것이 아니라 불만 충만이 아니라 감사 충만히 꽉 찬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어찌다 말로 하랴. 그런 사람이에요. 환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가 참 크고 크도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러니까 어때요. 사람은 뭘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을 말하게 되어 있는 거거든요. 자기 마음속에 상처가 충만하면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씹는 일 밖에 없어요. 그 일 할 때가 제일 기분이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런 분들은 사탕을 꼭 넣어 가지고 다니세요. 누구 씹고 싶은 사람 있으면 사탕을 집어넣고 콱 씹으면서 입을 꽉 다무세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씹는 일을 즐거워해요. 그렇죠.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불순종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이야기를 하기에 즐거워해요.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와서 이 변화를 받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환경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늘 환경을 주목해요. 앉자마자 한숨이에요. 후. 그렇게 한 다음에 예수님처럼 성령을 받아라 그렇게 하면 얼마나 은혜롭겠어. 후. 충만하던 사람도 그 사람 옆에 가면 김새요. 그런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해결을 받을 생각은 안 하고요. 그런 사람들은 환경 이야기만 해요. 네가 내 입장이 한번 되어 봐라. 살 수가 있겠냐. 못 살지. 그런데 하나님이 충만한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 안하고 사람 씹지 않고 입만 벌리면 감사하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님 앞에 옳다. 얼마나 감사하냐.
꽃동네에서 나온 유명한 얘기 있잖아요. 막 몸이 아파가지고 빌빌 거리며 얻어먹는데도 감사해. 뭘 감사하냐. 얻어먹을 힘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옵나이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교회가 감사가 넘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충만하니까 모든게 감사의 조건이에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니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고맙대는 거예요. 정말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나도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고맙다고. 심지어 어떤 사람이 그래요. 정말 전도사님 감사하대. 뭐가 감사하냐고 하니까 전도사님이 거기 서 계신 것이 감사하대. 내 옆에 그 모인 무리 가운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감사하대. 나한테만 그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소리를 해요. 야, 살아있어서 감사해. 누가, 너. 아니, 너. 너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그러면서 축복이 넘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러니까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에 문제를 드러내고 문제가 치유되고 고치는 말하자면 샬롬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데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기도의 결론이에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야, 이거 정말 재밌죠. 이거 하나 깨닫기 위해서 이게 기도의 총 결론이거든요. 이게 이 이야기가 딱 떨어지고 나니까 물고기가 애취 하면서 토해낸 거예요. 왜 다른 때까지 안 토해 놨어요. 하나님이 마지막에 받고 싶으신 것이 이 기도였어요.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무슨 뜻이에요. 주님은 못 말리옵나이다 그 뜻이거든요. 그것을 빨리 고백해야 해요. 주님은 못 말리옵나이다. 주님을 어떻게 말리겠어요. 하늘의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일을 여러분들 말릴 수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은 그 고백을 받기를 원히시는 거예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살아간다. 뭐 주님을 붙들며 살아간다. 그 뜻이 뭐냐 하면 이 고백이에요. 주님은 말릴 수가 없나이다. 누구도 말릴 수 없나이다. 심지어 우리의 죄로도 말릴 수 없나이다. 말릴 수 없나이다. 그 고백이에요. 구원은 주께로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이게 뭐에요? 주님은 못 말리옵나이다. 말리실 수 없는 분이옵나이다. 또 그것은 뭐에요? 주님, 난 이제 포기했사옵니다. 그 뜻이에요. 이제 주 뜻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의 기도와 일치하잖아요. 주 뜻 이루어지이다. 진작 그랬으면 회개 외쳐라, 외칠 때 회개를 시킬 것인지 불순종하게 해서 심판하시든지 그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일이니까 자기는 따질 필요 없고 아멘,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는 것이 주님의 뜻이면 죽기도 하겠나이다. 서원까지도 한 사람이니까 가서 외쳐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불순종의 길에 가서 결국엔 마지막에는 수많은 사람들 고생시키고 제물 다 잃어버리고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내고 마지막에 깨달은 결론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옛날에 다 알았던 것, 새 것을 배우려 하지 마세요. 옛날에 알았던 거나 잘 붙들어요. 이미 가르쳐 준 것이나 굳게 붙들으라고요. 모세가 이것을 알았어요. 모세같은 영적 지도자가 늘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잊지 말라. 잊지 마라. 배워라 배워라 그러지 않고 잊지 말아라. 잊지 말아라. 옛날 거나 까먹지 말아라. 누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그러니까 있는 복이나 빼앗아 가지 말아라 그랬듯이 새것 새것 그러는데 새것 말고 가르쳐준 것 똑바로 붙들고 살아라.
여러분 결국은 요나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았나이다 고백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무엇을 보고, 자기를 구원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주님은 결국은 무엇으로도 막으실 수 없는 분이옵나이다. 주 뜻 이루어 지이다. 그러는 거죠. 그 이야기를 하자마자 물고기가 탁 하고 토해 낸 거예요. 누구 명령을 받고?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토해 하니까 탁 토하는 거예요. 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그 풍랑을 누가 잔잔하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명하신 거예요. 잔잔하라. 명하신 거죠. 폭풍이 일어나게 하신 이도 주님이시고 폭풍이 멎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우리도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거예요. 이 고백이 될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문제가 일단락되는 거예요. 물고기를 명하시니까 토해냈어요. 물고기가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토해라 명했는데 이 요나가 가시에 걸려서 못 나왔어요? 가시에 걸려서? 토해라 그랬는데, 들어갈 때는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물을 너무 먹어서 요나가 불어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까? 그런 가능성은 있죠.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실 때, 그것을 모든 피조물은 순종해요. 그러니까 요나는 물고기 속에서 튀어 나오면서도 또 배우는 거예요. 누구한테, 물고기한테. 물고기한테 무릎을 꿇고 선생님, 당신은 주께서 명하시면 톡 토해 놓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사옵나이다. 다 순종하잖아. 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르는 뱃사람들까지도 순종을 해요. 그런데 불순종하는 것은 오직 누구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 요나 하나만 순종을 안 하는 거예요. 돌덩어리 같은 이 요나. 그러니까 어때요. 물속에서 그냥 물고기가 애취 하면서 토해냈을 때, 무릎을 딱 꿇어야지. 선생,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야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사옵나이다. 바다도 선생님이고, 파도도 선배고, 그리고 그 자기를 토해 놓은 물고기를 봐도 자기의 스승이에요. 모두 배워야 되는 거예요. 눈을 들어 하늘을 봐라. 주님이 명하시매 구름이 일어나고 주께서 명하시매 사시와 연안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께서 명하시매 짐승들이 겨울에 잠을 자고 여호와께서 명하시매 봄이 옵니다. 완전하게 순종하고 있죠. 완전하게 순종하고 있잖아요. 주께서 명하시매 눈이 내립니다. 완전하게 순종하고 있잖아요. 안 하는 것은 누구에요? 이 은혜를 받은 이 나, 나 같은 인생이 끝까지 혀를 깨물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하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은 받아 내셔요.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육지로 토해 내니라. 여러분, 요나가 물고기 속에 들어가 있었지만 그러나 어떻게 자기가 살아날지는 알지 못했어요. 요나는 그것이 이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도로 나가냐, 도로 안 나가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뭐에요? 관계가 회복되고 나니까 아까는 이것이 스올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처소로 바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면서, 마지막 결론은 주님은 내 힘으로 말리실 수가 없사옵나이다. 주 뜻 이루어 지이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하니까 하나님께서 명하시매 물고기로 토해 놓는 거예요. 여러분 환경을 향해서 얘야, 이 환경들아 저 형제들을 둘러 싸고 있는 이 환경아. 이제는 그만 잠잠해 주어라 하면 환경이 싫어요, 그럴 수 있어요? 불가능한 거예요. 얘야, 저 딸이 이제 나와의 바른 관계로 돌아왔다. 큰 풍랑과 파도를 칠 때, 그 파도를 보면 머질 것 같았어요? 머질 것 같았냐고? 물고기가 자기 말을 들을 것 같았어요? 그 큰 놈이 그냥 멋대로 돌아 다니면서 물을 먹이고 말이야, 심지어는 해초를 먹이고 이 난리를 쳤는데 그게 순종할 것 같았어요? 안 순종할 것 같았잖아요. 상황을 보면 순종할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잠잠 하라. 토해 놔라. 그러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토해 놔라고 하셨는데 안 토해 놨다가 죽을라고. 죽으려고 불순종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잠잠 하라. 왜, 받아먹게 한 받아 삼키게 한 이도 하나님이시니까, 토해 놔라. 예. 툭 토해 놓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결국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잠잠 하라. 명해 주셔야지만 궁극적인 해결이 되어요. 믿습니까. 그래요. 그래야지 궁극적인 해결이 된다고요. 그래야 궁극적인 해결이 된다고. 더 하고 싶지만 3장으로 넘어가겠어요.
여호와의 말씀이, 그런데 육지를 요나를 어디에 토해 놨어요? 바다에 토했다면, 이것은 또 곤란한 일이 생기죠. 톡 토해 놨는데 바다에 토해 놨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러면 또 하나님이 물고기를 예비하시든지 배를 타든지 복잡한 일이 발생하잖아요. 주님의 해결은 이렇게 미봉책이 아니에요. 탁 토해 놨어요. 토해 놨는데 물고기 말이야. 암초 위를 지나다가 탁 토하면, 휙 날라 가서 바위에 부딪히면 어디 골절상이라도 입었을 것 아니에요. 분명히 이것은 큰 물고기가 툭 하고 토해 놨을 때 아주 부드러운 모래에 있는 해변에다가 탁 토해 놓은 거예요.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짝 준비하시고 예비하셨잖아요. 쫙 예비하시는 거예요.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사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거예요. 그 물 속에서 물고기에게 뱉음을 당해서 튀어 나올 때, 그 요나가 3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하고 소금물 조금 먹으면서 그 속에서 비참하게 있었어요. 그 육신의 연약함을 알아요. 강건할 때는 바다에 토해 내도 헤엄칠 수 있지만 그러나 연약하니까 육지에다가 토해 놓게 되는 거예요. 짐승도 이것을 알아요.
(예화) 개를 키워 보면, 새끼 날 때쯤 출산일이 되면 그냥 엄마가 바빠져요. 이 강아지가. 가마니 대기를 발로 막 긁는 거예요. 왜 그러나. 물어뜯고, 왜 그러나. 막 긁어 가지고 완전히 솜사탕 같이 만들어 놔요. 솜털처럼. 그것을 귀퉁이에 놓아 가지고 이만큼 놓는 다고요. 자기가 몇 마리 낳을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시트를 딱 만들어놔요. 그것을 만약에 건드렸다면 주인이고 뭐고 없어요. 막 물어요.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새끼를 딱 낳아요. 짐승도 새끼가 나오면 그러한 폭신한 자리에 놓아야 된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는 애 낳을 때 안 그래요? 낳기도 전에 다 준비해 놓죠.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시련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거예요. 육지에다가 툭 토해 놓은 거예요. 그 다음.
여호와의 말씀이, 야 이게 얼마나 멋있어요. 1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것 봐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 번째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문제가 다 해결된 다음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 사이에서는 1장에서는 파도만 치고 물고기만 길길이 뛰었지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어요. 왜, 말해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관계가 돌아오기 전에는 기도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이러한 신령한 체험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찬송이 말하잖아요. 주의 재단 앞에 모든 것 다 바친 후에야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그러잖아요. 하나님 앞에 모두 드리고 나니까 그러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첫 번째 열렸던 그 하늘이 다시 열리는 거예요. 왜, 이게 열려야지만 비로소 선지자가, 선지자 일 수 있거든요. 열리는 거예요. 훅하고 열리는 거예요. 열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는 거예요. 뭐라고 그러셨어요? 일어나. 일어나가 신비한 단어라고 했어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회복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이전에 갖지 못했던 기이한 신앙의 체험을 다시 주시면서 하나님이 너의 회개를 기뻐하시고 이제 네가 나와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왔음을 내가 인정하노라 하는 그 인치심이 뭐냐 하면 그 신비한 영적인 교제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겨우 살게 되는 것, 그 이상이라고요. 살게 되는 것, 그 이상이란 말이에요. 자식 때문에 요나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면 속을 안 썩이는 것, 그 이상이라는 거예요. 물질 때문에 망했다면 물질을 다시 돌아오는 것, 그 이상이라는 거예요. 무엇이냐.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전에는 받지 못했던 영적인 더 큰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 속에서 한없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 거기까지가 회복이라 이것이에요. 그래서 쉽게 이야기해서 불꽃이 되는 것, 그게 진정한 회복이에요. 그렇잖아요. 겨우 죽을 때 돼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이지. 생명처럼 말이에요. 이 환란을 인해서 연단을 받아 가지고 금과 같이 찬란한 빛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서 이제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말이에요. 치유해 주는 거예요. 탁 고쳐 주는 거예요. 나는 이 시련에서 고통이 3년이 걸렸지만 이제 가서 치료해주면서 1년 만에, 6개월 만에 해결이 되고 주님을 찬송하고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 일으키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일어나.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에요? 일어나. 침체됐고, 낙담했던 자리에서 결단을 촉구하면서 일어나라는 명령형이에요. 일어나는 거예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참, 이게 기가 막힌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 파도를 치고 파도를 타고 죽을 고생을 하고, 죽다 살아나고 이제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그랬으면 주님이 그래, 너가 그 속에서 얼마나 고생 했냐 이제는 쉬어라 그러면 좋겠는데 묻어놨던 그 사명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수학문제 2번 풀다 덮어 놓으니까 3년 만에 열어 보니까 다시 2번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은혜 받은 사람의 사명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빗나가가지고 사명을 버려두고 도망가면 그러면 세월이 지나면 묻히고, 그리고 2번 풀다가 도망갔으니까 세월이 지났는데 이제는 18번부터 풀면 되겠지, 어림없어요. 다시 3번부터 다시 시작이에요. 주님은 다시 처음부터 다시, 푸는 거예요. 또 도망가면 다시 또 푸는 거예요. 그러다가 일평생 살아도 1번 문제도 다 못 풀고 죽는 사람들 허다 한 거예요. 25번까지 풀고 가야 하는데. 1번 문제도 못 풀다가 풀다가는 식 하나 써 놓고 도망가고, 와서 답 하나 써 놓고는 틀렸다고 짝대기 하나 그어 놓으니까 지우개로 고치다가 또 도망가고 또 탈영하고 계속 이러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못 이루고 죽는 인생들이 허다한 거예요. 봐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제 그래,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 우리는 잘 그러지.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고, 하나님이 그러셔요. 지나간 것은 안 지나간 거다.
(예화) 그 전에 목사님들과 공부를 하는데 나이 지금 생각해 보면 55세 쯤 흰머리가 이렇게 나셨는데 45살서부터 목회를 시작하셨대요. 그래가지고 지금 천 명 정도 되는 교회를 하고 있는데 그 분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45살이고 교회를 개척하고 나니까 48살인가, 49살이래요. 그래서 이제 6-7년인가 10년 목회를 하신 거예요. 그러더니 그 분 하신 말씀이, 자기는 대학교 다닐 때 소명을 받았는데, 그것을 버려두고 세상이 좋아서 요나처럼 돌아다녔는데, 그러다가 늘그막에 하나님이 부르시더래요. 그래서 손들고 옵니다 그러면서 왔대요. 올 때는 내가 늘그막에 신학을 시작하는데 하나님이 그저 뭐 25문제 중에서 20번부터 빨리 풀다가 죽어라 그러실 줄 알았는데, 다시 1번으로 데려가시더래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냐 하면 나는 젊었을 때 분산해서 할 고생을 20년 동안 농축해서 액기스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쓴물이 나온대요. 쓴물이. 얼마나 힘든지, 지금은 힘도 없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는 며칠 밤씩 술 먹고 화토 치느라고 밤새도 끄덕도 없었는데, 이제는 한번만 철야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길길이 매는데도 어림없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 철야 못했던 것 전부다 농축해서 철야 시키고 집회 다니게 하시고 설교하게 하시고 이야기 하면서 나 같은 목소리로 하더라고요. 쉰 목소리로 그러면서 고생이라고 하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젊은이는 얼마나 좋아. 그래. 그리고 지금 10년도 넘었으니까 이제 좋아보였겠죠. 아, 부럽대요. 너무 부럽대요. 그러면서 많은 후배들에게 이야기 하셨어요. 충성하라. 한 길을 가라. 접어놓고 도망갔다 나오면 여러분 큰 일 난다. 고생을 농축해서 액기스로 한다 이거예요. 다시 1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1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1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버려두고 가니까 하나님이 취소가 없어요. 취소가. 취소가 없어요. 그것을 떼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꺼져 이러실 수는 있지만, 취소는 없어요. 해방이다. 이런 것 없어요. 하나님이 다시 맡기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이 연단을 믿게 될 거예요. 저는 사역을 하면서 연단을 받게 돼요. 싫어, 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때요? 언젠가 어디 가서 또 다시 연단을 받아야 돼요. 전도사님들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에서 고통도 있고 아픔도 있고 연단을 많이 받을 거예요. 그런데 안 받아요. 그러면 마음대로 해요. 피하면 하나님이 안 시켜요. 피하면 안 시켜요. 그러나 어떻게 해요? 언젠가는 어디 가서 다시 직면하게 되는데, 그 때 그것. 다시 문제 푸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불꽃과 같이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강하게 연단시키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미 주셨던 그 사명으로 돌아가도록 다 만드시는 거예요. 다 만드시는 거죠. 그 사명 꽁꽁 덮어 놨다가 요나는 새카맣게 잊어 버렸지. 주님은 잊지도 않으셨어요. 그러다가 문제지 딱 갔다놓고 요나야, 1번 풀다가 갔지? 다시 시작이다. 친구들은 벌써 10번 나갔는데요. 그것은 필요 없다. 걔네들은 걔네들이고, 너는 다시 1번서부터 다시 풀어라. 다시 푸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피하면 피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고달파지고 나중에 고생을 농축해서 액기스로 마시게 되는 거예요. 아 고달픈 거예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하서 마지막 3절에 2절에 마지막에 뭐냐 하면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이게 첫 번째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해요. 주님이 이렇게 요나가 눈물 빠지게 생명을 걸고 회개 했으면, 주님이 탁 나타나서 요나야 미안하다. 야, 머리 몰골이 뭐냐. 김을 뒤집어썼구나. 야, 미안하다. 사실은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 줄줄 알았죠? 아니에요. 하나님은 뭐라 그랬는가 하면, 가라. 그리고는, 어떻게 보면 좀 매정하지 않아요? 옛날에 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라. 그리고 너는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동그라미 쳐야 돼요.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무슨 뜻이에요? 주님은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이놈에게 이 사명을 주었는데, 요나가 상처를 부둥켜안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주신 사명을 부둥켜안고 있는 거예요. 누가 부둥켜안고 있는 게 우선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게 우선인 거죠.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님이 딱 내 놓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고 우리가 상처를 받으면서 우리가 고통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가 되냐 하면 주님은 잃어버린 사명, 내가 집어던지고 간 그 사명을 품에 안으시고 그것을 상처 삼아서 나보다 수천 배 더 고통 하시겠구나. 그리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본 말이 전도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요나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딱 들었을 때, 3절, 마지막 결론,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이게 결론이거든요. 부흥회의 결론이에요. 요나서 전체의 결론은 아니에요.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거기에서 동그라미 쳐야 할 구절은 뭘까요? 일어나, 앞에도 나오잖아요. 뭐? 아니, 아니. 그렇지. 여러분들 성경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해요. 말씀대로. 말씀대로. 진작 그러지. 진작 그러지. 그러니까 어때요? 그 파도치고 한바탕 전쟁이 일어났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원위치. 그리고 말씀대로 가니라.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이 1절에서 함께하시던 그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기뻐하시면서 함께 한 거예요. 그리고 니느웨 성을 들어간 거예요. 비록 처음에 은혜를 받았을 때 너무도 당당하게 너희의 생명은 내 손안에 있다. 그리고 걸어갔으면 얼마나 멋있었을텐데, 이제는 완전히 이제 뻣뻣하게 도망치던 사람이 완전히 소금에 푹 절은 김장철의 배추처럼 야들야들 해진 거예요. 이제 나같은 사람은 아무 소망이 없다 이거죠. 그런데 주님이 가라 그러시는 거예요. 비록 후질근 하지만 그 한 사람이 걸어가는 발걸음에 이 니느웨의 생사가 달린 거예요. 자, 얼마나 놀라워요. 그리고 그 길을 결국은 걸어가는 거예요.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MP3 8번 1:02:18부터 1:02:43 끝까지 설교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