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님은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녹취자: 원수연
시인은 악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짧게 보면 그 고통은 어떤 악한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기 위해서 준 것이지만, 더 넓게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질서를 통할하시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시거나 나쁜 일을 행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악이나 나쁜 것들을 허락하셔서 그것으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약학에서 독과 약은 서로 뒤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몸에 이로운 약은 어떤 면에서 우리 몸에 원래 독이었는데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양을, 일정한 조건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작용함으로 우리에게 약이 되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함으로 우리의 몸에 독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인간들을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기계는 정확하게 제작자의 의도대로 움직입니다. 병원에서 요새 사용하는 로봇 수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고 나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는데 아직 한 번도 사고의 보고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인간이 지시하는 대로 로봇이 움직이며, 인간은 손이 떨리고 혹은 자세가 불안정해서 실수할 수 있는 부분들을 밀리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수술을 해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마나이프 수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데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아닌 모든 동물들은 각기 다 자기의 수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만도 못한 개는 없고, 소만도 못한 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만, 인간만 못한 짓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개보다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는 악한 사람들이 하는 일을 못 막으시느냐, 결국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 게 아니냐?”라고 반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역설적으로 인간을 위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록 악한 것이라도 인간이 선택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정말 나쁜 사람들을 만납니다. 혹은 그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쁘지는 않아도 비교적 나쁜 사람들도 만납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시인은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역설적으로, 악인은 그런 것을 전혀 의도한 적이 없었지만 시인은 그렇게 악인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분이시구나!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 가서는 이 시인에게는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긍휼한 성품을 깨닫는 데 있어서,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해줄 수 없는 정말 놀라운 일들을 악인들이 해 준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악인들이 시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더라면 몰랐었을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위대한 성품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시인을 괴롭히기 위해서 악을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궁극적으로 선으로 바꾸어서 시인에게 선을 베푼 사람들이 시인에게 해줄 수 없는 너무 좋은 것이 되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악인은 이 시인에게 그렇게 좋은 일을 했으니까 칭찬받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은 동기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악인은 자기가 악을 베풂으로써 시인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깨닫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시인에게 악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한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시인의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이 나쁜 자식!” 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더라면 그 사람의 악이 이 시인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시인이 힘이 없고 능력이 부족해서 자기를 괴롭히는 악한 사람들의 그 악행을 참고 견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의 빛 아래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류도 있고 죄도 지었지만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의 인생을 끝마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긍휼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피할 때 그 은혜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시인이 시편 31편에서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그것을 악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깊이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던 시인의 영혼을 깨우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던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시인이 겪었던 유익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런 것도 배웁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한 하나님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을까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악인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라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이 그렇게 나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돌이키도록 오래 참으시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이런 것입니다. 악인들이 자신에게 끝없는 고통을 가해서 삶의 평화를 흔들어놓고 아프게 만듭니다. 시인이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악인을 멸하소서’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금방 응답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악한 사람인데도 하나님이 한 번에 정리하셔서 공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십니다. 내버려두십니다. 그것을 보면서 시인이 그런 걸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아, 하나님이 악한 사람들을 내버려두시는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 의에 대해서 무관심하신 분이구나.’ 이런 것을 배운 게 아니라 ‘저 나쁜 악인을 향해서도 저렇게 오래 참으시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를 향해서는 그 오래 참으심이 얼마나 오랠까?’라는 것을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아무튼 마지막에 시인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라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 자신의 죄와 불순종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보신다면 누가 그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면서 기다리시기를 마치 부모가 자식을 향해 오래 참고 기다리듯이 그렇게 기다리시는 걸 보면서 인생을 다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자와 진실, 이 두 가지는 시편의 노래 속에서 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실은 하나님이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대하는 모든 것들이 이 진리에 합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기반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님을 떠나 살다가 다시 돌아가면, 언제나 주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예화) 신문을 보니까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군대 간 자기 애인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고무신’이라고 그런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고무신은 언제든지 거꾸로 신을 수 있기 때문에 고무신이라고 그런다는 겁니다. 예전에 같이 연애하고 사귈 때는 고무신이 아니었는데 군대 가면 고무신이랍니다. 여러분 그 얘기 아십니까? 예전에 여자들이 신었던 고무신은 높이가 아주 낮고 요즘은 신지도 않는데 이게 앞뒤가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루로 올라올 때 앞꼭지가 마루를 향해 있게 하다가 급한 일이 생기거나 반가운 사람이 오면 내려가서 그냥 신발을 돌려놓지도 않고 신고 나가는 겁니다. 그래도 충분히 신겨집니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는 얘기가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2년 동안 자기를 기다려준, 기다려준다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군대 가는 아이들이 보통 22살, 20살 이렇게 군대 가고, 학교 다니다 갔다면 24살에 가기도 하는데 한창 팔딱팔딱할 나이입니다. 그런데 자기 여자 친구가 끝까지 기다려준 겁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꽃신을 구해 와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애인에게 그 신을 신겨주는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말이 군대 갈 때 남겨진 여자 친구는 ‘고무신’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준 여자 친구는 ‘꽃신’입니다. 새로운 용어가 생겨난 겁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고무신’이지만 하나님은 ‘꽃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을 악인들로부터 받는 고통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자기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것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 머리 의지하고 살면 됩니다. 신앙을 장식품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생명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식품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성으로 살고, 무늬만 신앙입니다. 자기 편할 때 신앙의 이름을 갖다가 붙이는 겁니다. 이사 갔다고 심방을 받고, 개업했다고 예배를 드리고, 아들 시집 장가간다고 교회에서 결혼식하고, 회갑 되었다고 뷔페 집에서 담임 목사 불러다가 예배드리고,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그 사람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정말 그 마음속으로 우리의 인생에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그리고 고통을 당할 때, 악인들이 괴롭힐 때, 삶의 모든 사태가 자기를 엄몰하듯이 그렇게 고통을 주며 다가올 때, 그런 시련이 속의 근심, 밖의 걱정으로 밀려올 때,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면서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오늘 가장 아프고 쓰라린 이 시련의 때가 먼 후일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것을,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고 이제껏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입각해서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 그것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똑같은 방식으로 악을 해서 복수하거나 앙갚음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대범함과 너그러움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당신을 의지하고 악인들의 박해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을 향한 최고의 격려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악인은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다보면 어느 틈엔가 눈을 떠보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자비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언젠가는 정말 곡식을 쓰고 싶어 하는 농부가 정말 그 곡식을 써야겠으면 키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날아가 버리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에게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누가 죄가 없겠습니까? 누가 잘못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그 무한하게 아름다운 성품을 배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세계, 그런 것을 보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