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표적으로 보이소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녹취자 : 오희열
86편의 마지막 맺는말로 17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인은 악한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에워싸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은총의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은총의 표적을 보여 달라는 기도는 다윗에게만 고유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세에 의해서도 하나님 앞에 드려졌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기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범죄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너무 고통스러우시니까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네가 이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그 땅을 가져라. 그런데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내가 보내는 사자와 함께 가겠다.” 이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모세는 하나님 앞에 중대한 결심을 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백성들도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은 단장품을 제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커다란 하나의 영적인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이 은총의 표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쉼 없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또 하나님이 이 백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시는데도 은총의 표징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의 표징은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의 앞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반석위에 서 있는 모세 앞에 영광을 지나가게 하시고 그를 반석의 품에 숨겨두고 덮었다가 거두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보되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시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십계명을 쓰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나안을 향해 가게 됩니다. 아마 이런 역사를 이 시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다윗이 오늘 여기서 은총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기도는 아주 비장한, 모세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였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표징이라는 말인데, 표징은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그것은 아니지만 그 작은 것으로서 뒤에 있을, 혹은 이미 있었던 어떤 커다란 사건을 상징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이 바로 표징, 표적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여성이 지나가는데 손을 보니까 반지가 끼워져 있다면 그 여자는 결혼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반지를 낀 모든 여자가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보통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반지가 결혼은 아니지만 그 반지가 그 사람의 손에 끼워져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라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성찬에서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데 그것은 물리적으로 보면 포도주와 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그 표징 뒤에 있는 실제의 사건, 그 표징이 가리키는 본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이지, 떡이나 포도주 속에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자신을 찢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하는 실체에 대한 표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빵이 하나이듯이, 그 빵과 우리의 몸이 하나가 되듯이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된다고 하는, 복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표징과 실체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얼마나 간절하게 은총의 표적을 구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시인이 이런 은총의 표적을 어떻게 보기를 원했을까요? 17절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암시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자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은총의 표적은 한편은 고난 속에서 그것을 이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이 시인을 격려해주려는 표징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시인을 헤치려고 하는 모든 악한 사람들이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하나님이 저 사람을 돕고 위로하시는구나, 하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런 표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표적이 이 시인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을 돕고 위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구하는 표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제적인 도움이, 어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에게서의 높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마음에 밀려오는 평화가, 기도의 응답이 이런 은총의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무엇을 주시든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시인이 간절히 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낙담하고 영혼이 깊은 어둠에 있다면 정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과 슬픔, 걱정과 눈물의 구름들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의지하며 간절히 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 아니겠느냐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식으로 기도하고 그것을 극복하게 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시인은 많은 것을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사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악인의 끔찍한 저주를 구하거나 하지를 않고 오직 그가 의지했던 것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기고 하나님이 당신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국은 선을 베푸실 것이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절히 구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종이나 하수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받들며 사는 사람들이지 주님이 우리를 받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양심을 따라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어떠한 삶의 상황에서든지 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원인과 이유를 모두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여호와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의 수많은 위기와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며 주님의 성품에 대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실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믿음을 붙들고 시인은 오늘도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시인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주님을 붙들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