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시인 1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시편88:13-15)
녹취자: 김경애
헤만 이라는 사람은 우리로 말하자면 성가대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에 각각 성가대를 조직해서 하나님을 경배했는데 아마도 이 헤만 이라는 인물은 이때에 지도했던 인물이고 또 동시에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깊은 시련과 고난을 당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결심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되겠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말로 ‘카라’()라는 단어인데 (녹취자 주- 실제로 히브리어 성경에는 샤와()라는 단어 쓰고 있음, 도움을 청하는 외침, 확인바람) 소리를 내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고 또 사람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충동하기 위한 그런 부르짖음이 아니라 마음속에 홀로 담아두기 어려운 하나님께 대한 깊은 어떤 정들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토해놓는 그런 영적이고 정신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경건한 기도이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간절함이었다면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영혼이 아주 절실하게 주님을 갈망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시인의 상태는 고난을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리고 고난 받을 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믿음과 그리고 그러한 기도속에서도 해소되지 않는 영혼의 갈등을 동시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는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아침에 부르짖는 나의 기도가 주님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아침에 기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아침은 우리가 시간을 뭐라고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때 사람들도 각자 자신들의 일이 있었을 테니까 아마 그런 오전이라는 의미의 아침이라기보다는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비교적 이른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습관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가 이렇게 주님께 부르짖는다면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저녁에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아침에 응답된다는 내용일 수도 있고 내가 아침에 기도할 테니까 그러면 아침에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말도 될 수 있지만 어쨌든 아침이라는 것은 하루가 바뀌면서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침마다 변함없이 해가 뜨고 하루를 맞이하는 광경을 통해서 시인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느꼈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오늘은 비록 슬픔과 고통이 있지만 아침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나에게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이 시인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그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마음의 고통은 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라고 하면서 절규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라는 표현은 얼굴을 숨긴다는 표현과 함께 아주 극단적인 하나님의 호의와 은총이 사라진 절망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의 삶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으로 가득 찼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슨 사건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앞에 나오는 시인의 여러 탄식들을 보면 그냥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어렵다고 느끼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아주 절망적인 시련과 어려움이 이 시인을 억누르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것이 공동체의 시련이었는지 개인적인 시련이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자신의 삶을 향하여 전개되고 있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이 자신의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을 짓누르고 그래서 자신이 스올에 가까웠다고 이야기하니까 모든 희망이 끊어진 그런 상태를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을 암시하는 단어로 ‘죽은 자’, ‘웅덩이’, ‘음침한 곳’, ‘파도’, ‘갇혔습니다.’, ‘죽은 자’, ‘유령’ 이런 어두운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 시인 안에 남아있는 신앙은 (스스로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요청하였고, 그런 절망 속에서 (시인이) 찾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다짐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아침에 당신 앞에 -자신의 기도가 이루리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하나님의 어떠한 은총도 사라진 것 같고 어떠한 은총도 자신에게서 이제 기대할 것이 없는 그런 상황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런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이상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더 이상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으시려고 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는 이야기는 빛을 비추신다는 말과 반대인데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은 탁월한 은총의 상징이고 기쁨의 표현인데 그것을 거두셨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고난을 통해 그것을 느꼈는지 개인의 고난을 통해서 느꼈는지 그것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하나님이 은총으로부터 자신이 멀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 믿음이 있을 때는 믿음만 있고 죄가 있을 때는 죄만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있을 때도 그 속에 불신앙이 있고, 한사람의 마음속에 뜨거운 신앙이 있을 때도 또 한편으로는 의심의 그림자가 섞여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러한 사실을)을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떠한 의심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는 놀랍게도 신자 안에 크기가 다를 뿐 공존합니다. 여러분들은 파도 위를 걸어오라고 부르신 예수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담대한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파도가 치고 그 파도가 사람뿐 아니라 배도 삼킬 것 같은 그때에 그 위를 걸어오라고 말씀하시면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상상 속에서는 가능할 것입니다.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런데 잠시 후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도(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의심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인정해야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두 가지가 공존할 때에 우리가 어떻게 그 모든 것 위에서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붙들며 살수있느냐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이제껏 살아온 것을 회상합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회상해보니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당해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적이 많았고 주님이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드러내실 때 주님과 올바르지 않은 관계를 갖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두렵고 당황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시는 놀랍게도 우울한 이야기로 이 시를 끝냅니다. 그래도 이것은 하나의 탄원시인데 그 마지막이 감동과 영광으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 이 고난이 처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고난이 많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로 당신의 위엄으로 영혼이 정신이 당황하여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느낀 적이 많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암시를 줍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어릴 적부터 이런 고난을 많이 당하고 죽게 된 날들이 많았고 시련과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대도 이제껏 이 시인이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시인은 좀 더 절망하고 좀 더 낙심하기 위해서 과거를 회상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되고 주님 때문에 두려워 당황하던 때가 많았음을 고백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수많은 세월동안 은총으로 살아온 자신의 끈질긴 생명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지금 내가 당면하고 있는 이 시련과 어려움도 주님의 도움으로 이긴다는 처음의 기도의 신앙으로 돌아갔던 것이라고 보아야합니다.
시편이 우리에게 유용한 이유는 이 시편들을 통해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행동, 업적이 아니라 그 시인들의 마음속에 때로는 요동치는, 때로는 평안한, 때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때로는 범죄 속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시인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성경보다도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을 가득 차있는 것이 시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리고 의심이 공존합니다. 그때마다 살아온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이겼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붙들고 소망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