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위해 부르심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을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장:17-19)
녹취자: 이미란
예수님이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제껏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말을 안 믿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세 번을 물으심으로써 마치 한번 대답할 때마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한 번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처럼 부인도 세 번, 질문도 세 번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넓게 적용하여 말하면, 모든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명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도록 이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예화) 몇 달 전부터 한 50년 만에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다 기르고 있습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성남에서 개들이 어떻게 학살당하는지를 보도를 했습니다. 무슨 도축장에서 잡는 것이 아니라 개고기 파는 집에서 개를 뒤뜰에다 놓고 전기로 지져서 죽인답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털 제거기 세탁기 같은데다 돌리면 털이 깨끗이 빠지고 안 빠진 털은 토치로 구운 다음에 큰 도끼로 내리쳐서 각을 떠서 한 근에 4000원씩 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자가 보도하기를 그 밑에 있는 커다란 통속에 있는 개들은 이미 그 냄새도 맡고 다 알고,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죽을 처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때 저희 집에 코코와 그 개의 운명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그 얼마나 현저한 차이가 납니까? 생후 한달 된 강아지가 온지 얼마 안 되어 내 마음을 빼앗기고 나서 얘가 만약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내가 얼마까지 병원비를 지불할 수 있을까 계산하고 확정하지 못했지만, 내가 힘이 있는 한 개를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과시가 아니라 그 아이에 대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보편적인 소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소명인지를 모릅니다. 그건 단지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 이것을 바쳐라. 저것을 바쳐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도록 부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중 제일 큰 계명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어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은 손해를 보십니까? 그런데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덕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당신을 사랑해야만 참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이 사람답게 안사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당신을 사랑하라 라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최고의 신율주의이고 신본주의인 동시에 최고의 자율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 없이는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베드로이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회를 잘 하려면 먼저 목회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없이 같이 앉아 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관심사가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부르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 우리가 먼저 예수를 잘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지난주에 어느 저자가 옥한흠 목사의 전기를 썼는데 추천사를 써달라고 해서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추천사를 썼는데, 15년 전에 제가 위임 목사가 될 때, 이때 교인이 1000명 모였을 때인데, 옥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이 고린도전서 11장 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게 되라” 그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간절한 소원이 두 개가 있었는데, 지금도 유지되는 소원입니다. 큰 교회로 책을 많이 쓴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언젠가 이 무거운 짐을 벗고 교회를 떠나는 날이 있을 텐데 그때 두 가지를 꼭 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마지막 설교를 하는 날 성경을 펴고 설교 본문을 읽었는데, 내 설교를 30, 40년 들었는데, 듣는 사람들이 무슨 설교를 하는지 예측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날이 이제껏 목회자로 살아온 날 중에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날이고 이후에 살아 있는 날에 비하면 가장 예수님을 덜 사랑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바램이었습니다.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님들도 나와 함께 이 소망에 같이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그렇게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양을 먹이라는 사명과 함께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혹시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딴 생각을 할 까봐 이 복음서의 기록자인 요한은 아예 해석을 붙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라고 말입니다. 요약을 하면 이것 아닙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해?”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는 죽어라.” 그것입니다. 이렇게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목회의 복을 주시고 자손의 복을 주시고 이 세상에서 명예롭게 하시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관점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첫 번째 지도자를 세우시면서 여지없이 부셔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뵈면, 진짜 자녀들이 잘 된 집안이 많습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신앙 생활하면서 교인들이 복 받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아무개 권사님은 그렇게 헌금 많이 하고 충성하더니 자녀들이 복 받았습니다.’ ‘첫째는 예일, 둘째는 하버드, 셋째는 스탠퍼드 그리고 사위는 변호사..’ 한참을 듣고 있는데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들은 하버드 못 갔는데, 우리 아들은 예일대 못 갔는데, 나는 신앙생활을 잘못한 것인가?’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주님은 조금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상급을 소망으로 삼으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축복에 대한 관점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적용이 되겠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간 예언자들,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에게 그 공식이 적용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바로 그 선지자와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여기에서 방점은 어떠한 죽음으로가 아니라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학적으로 영광은 세 개의 범주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인데 어떠한 장소에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셔서 그곳이 다른 곳과 구별되게 하십니다. 모세의 가시나무 떨기, 스랍가운데 하나님을 뵈었던 이사야의 성전, 성막 이런 것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이 의미로 사용되는데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존재나 말, 인격, 어쨌든 그가 가진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 이것이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설교를 조금 잘 해서 은혜를 끼치면 회중이 그 목사를 존경하게 되지만, 진짜 주님을 깊이 만나면 설교자가 누구였는지가 잊힙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너무나 깊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고귀한 섬김은 이 세상에서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해 갚으십니다.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이것을 모르고 신자는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목회의 영광을 측정하거나 신자의 성공을 잘 저울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한줌의 흙과 같아서 결국은 모두 부스러질 육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7) “실로 이 백성은 풀이로다”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아서 모두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함으로써 까지 부인했던 베드로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당신의 위대한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고 4복음서 전체의 부록입니다. 20장을 보시면, 사복음서의 끝이 되기에 아주 적절한 구절이 씌어 있습니다. 만약에 21장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주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들이 바로 뒷장에서 예루살렘의 교회에 기둥 같은 지도자들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21장이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 것 자체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꿈을 꿉니다. 한 사람, 예수의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는데, 한명만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돌에 맞고 죽은 줄 알고 버렸더니 그 더렵혀지지 않은 사람이 살아나서 예수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처음부터 이 제자들이 당신을 버릴 것을 아셨고 아무것도 상처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며 하나님이 그런 형제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같이 실패했던 사람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하신 것을 감사하며 삽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님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텐데 이것은 곧 베드로의 체포와 신문 처형에 관한 예고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시기에 베드로에게 자기를 따르라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잠시 후면 하늘로 올라가실 분인데 어떻게 거기로 따르게 하셨던 것일까요? 이것은 공간적인 것보다는 의미적으로 예수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죽는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자신과 함께 여태까지 있었던 요한의 미래는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신경 꺼라. 걔는 걔고 너는 너다.’라는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은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목회와 다른 사람의 목회를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그래본 적은 없는데, 책을 보면서 ‘야.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라고 자존심 상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길을 걸었고,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갑니다. 내가 모든 걸 알 수도 없고 모든 걸 할 수도 없고 내가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안 쓰실 수도 있고, 그건 주님의 주권에 맡기고 나는 오늘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들이 대충 살다가 보내버리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허락이 안 되었고, 우리에게는 허락이 되었기에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예수 따르는 사람들이 됩시다.
(예화) 로마에 집회가 있을 때, 쿠어바디스 교회에 저를 데려갔습니다. 베드로가 밟고 섰다는 돌멩이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의 박해가 너무 심해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이끌고 황급히 도망쳐 나올 때 맞은 편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뵈었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시고 지나가실 때 베드로는 황망하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남겼던 말이 그 유명한 ‘쿠어바디스 도미네(주님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 다시 못 박히러 가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새벽닭 울 때 통곡했던 것처럼 예수님 앞에 울면서 주님 제가 로마로 들어가 형제들과 함께 죽겠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돌멩이가 그 베드로가 섰던 돌멩이인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 골목에 섰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 우리 목회자들이 버린 양떼를 위해 예수님이 못 박혀 가시는구나.’
그러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은 능력이 없고 감당할 힘이 모자라도 내게 있는 것만이라도 모든 것을 드려서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렇게 목회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며 주님이 주신 모든 것을 사용해서 힘닿는 데까지 그렇게 우리의 사명을 위해 살아간다면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길을 가서 영광을 받는 대신에 베드로처럼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그 상급이 크지 않겠는가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목사님들이 노예와 함께 심령의 큰 확신을 가지고 한번 부르신 이 목회를 위해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