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9월 18일 - 2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사58:9) 1995.9.18 가을기도학교사경회 1
2. 마음이 괴로운 자의 기도(삼상1:10-11) 1995.9.19 가을기도학교사경회 11
3. 성령을 구하는 기도(눅11:9-13) 1995.9.20 가을기도학교사경회 22
4. 예레미야의 서책으로 말미암아(단9:1-4) 1995.9.21 가을기도학교사경회 32
5.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사62:1-2上) 1995.9.22 가을기도학교사경회 45
1.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사 58:9)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1995.9.18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1)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종종 병원에서 의사를 만난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다 죽을병에 걸려서 병원 문을 두드릴 때, 건장한 의사가 아주 밝은 얼굴로 우리를 진찰해줄 때, 우리는 ‘저 사람도 병에 걸릴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이런 설교 사역의 길을 걸어오고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부름을 받게 된 과정 속에서도 그렇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기도를 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환난과 시련 중에서 온갖 많은 것들이 내 삶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고, 내 머리는 말하기를 ‘지금 기도해야 할 때다’ 하는데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응답도 없는 어두움 속에서, 환경 속에서 ‘혹시나, 행여나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면서 살아보지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난 이후에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몇 개의 상황 가운데 한 토막이었습니다.
우리는 환경으로부터 또 때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나 내 속에 있는 내 믿음의 말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내 속에 있는 불순종하는 육체의 자아를 볼 때나, 심지어는 악한 세력들이 나의 가정과 나의 영적인 삶을 파괴하기 위해서 덤벼드는 그런 모든 도전의 세력을 볼 때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類)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음성이 귀에 쟁쟁히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자리에 밀어놓고 기도 없이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두 번째 세 번째 자리에 놓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런 모든 어리석음들, 우리들이 이번 기회에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구원의 은혜의 나무가 심기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 되게 해달라고, 예수를 믿고 20년, 30년 세월이 지나도 누구인지를 모르는 그 사람들, 하나님만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도의 눈물로 여러분들의 신앙의 씨가 자랄 수 있도록 모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을 때에 거기에는 분명히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해주었던 설교자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전파된 주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이 거듭나게 되었을 때 그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전엔 믿어지지 않던 그 하나님이 내 마음에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 값없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죄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하게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의 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전 나를 낳아준 사람 이외에는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데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고, 나를 하나님 자녀로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우리가 처음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하며 우리가 죄인인 것도 아버지 앞에 고백했습니다. 지금 그 때를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그때는 기도가 감미로웠습니다. 달콤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자라난 신앙의 씨가 바로 기도와 관련을 맺으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싹트고, 그 기도의 눈물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나무가 자라고,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 우리는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된 즐거움을 누리면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모자란 그 기도를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름을 아는 어느 지체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의 목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기도할 수 없을 때조차도 하도 답답하면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님이 탄식하며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자리에 놓일 것이 아니라 신앙은 기도로부터 시작이 되고, 신앙은 기도로 말미암아 강화되며, 그 기도 속에서 꽃피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형식적인 기도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고 많이 하던 때, 그때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시기입니다. 하나님과 막힌 것이 없고 “하나님” 부를 때 “오 내 아들아 네가 왔니” “주님 사랑해요” 하면 “나도 너를 사랑한다” “주님, 저는 주님밖에 없어요” “나도 너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은 서열심을 느끼게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가 이런 것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할 때,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깊은 기쁨을 누릴 때, 그 시기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던 시기입니다. 욥기 22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던 때에, 하나님과 화목하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는 내가 여기 있다 말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예화) 영국 여왕을 만나고 온 목사님의 말이 4시간 전에 오라고 해서 여왕 폐하가 물어보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내용.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다 작업복차림으로 뛰어와서 “아버지”하면 “꼴이 뭐냐, 옷 갈아 입고 와라” 하시지 않습니다. 다급한 일이 생겨서 일터에서, 위기를 만난 현장에서 하늘을 향해 “오 주님”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무슨 일을 당하고 어떤 처지에 있을 때에라도 언제나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이 재산이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의 재산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났던 위대한 믿음의 증인들이 한결같이 시련과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의하여 옳다 인정함을 받고 믿음의 사람으로 히브리서 11장에 올라갔습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위대한 증인들 가운데 한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걸어갈 때 평안한 길을 걸었습니까, 부한 길을 걸었습니까, 또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길만 걸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심히 거부였습니다. 높은 지위에서만 살았습니까? 낮은 지위에 살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임금이 있었는가 하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씀을 전하던 순교한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그들 되게 만들었던 것은 세상에서의 지위가 아니라 언제든지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딴 사람은 소리쳐도 말 안하셔도 이 사람이 “오 주님, 내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하면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로 민족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로 나라를 이기고 어둠 속에 잠겨있는 한 시대에 생명의 빛이 흐르게 하는 위대한 영적인 각성의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런 일들은 일어났습니다. 언제든지 이런 일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붙들고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합한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도의 사람들로 만드시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무엇을 기도하든지 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예화) 기차는 철길만 있으면 땅 밑으로도 공중으로도 갈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가득 차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땅문서 집문서가 재산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 오시면 다 무너지고 끝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기도의 능력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을 때 이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제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에화) 총신대 체플실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던 내용.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겠다”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니까 그 다음에는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죽으면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즉시 주님을 만나니 ‘할렐루야’일 것이고 또 죽었다는 이야기는 사명이 다했다는 이야기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시련이 닥치던 역경이 닥치건 열린 기도의 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합니다. 유혹 가운데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혼돈 가운데서도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차피 내 인생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 몸, 인도 안 해 주시면 주님 손해지 내가 겁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을 살면서 예수를 제대로 믿기로 결심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인생을 사는 것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차피 내 인생은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인데 그 인생을 주님이 인도 안 하시겠다면 할 수 없는 것이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오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부르짖을 때 나는 응답하겠고 너희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여기 있다 대답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시련과 환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메시지입니까? “기도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크고 비밀스러운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과 같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부딪혀야만 깨닫는 존재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도합시다.” 해도 피부에 안 와 닿습니다. 그런데 환난의 비바람이 불고 시련의 모진 폭풍을 만날 때 혹은 우리 자신의 인생의 항로가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하는 갈림길에 놓여있을 때 그 때에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이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하는데, 지나간 날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한 것입니다. 왜냐면 너무나 엉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럴 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 같아서 너무나 죄송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과정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게 하는 회개의 힘이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칠레에서 들여온 대리석으로 지은 교회 안 부럽고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부럽지 않습니다. 부러운 교회는 하나있습니다. 기도의 영이 살아있는 교회,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는 교회, 그 교회는 언젠가는 자신이 머물러 있는 그 도시, 그 지역사회, 그 세상을 반드시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그리고 자기들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목회자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교회, 이 교회는 반드시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지금도 이미 강단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생명의 말씀으로 영혼들이 해갈되는 충만한 은혜의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단이 지켜지기까지 수많은 이름이 없는 성도들은 주께서 강단을 향해 여신 하늘의 거룩한 은혜,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들을 향하여 여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문을 닫지 말고 열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주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부와 명예를 가져가실 지라도 주께서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영의 문을 닫지 마시고 열어주셔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도록 간구하는 이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하나님이 문 닫으시면 끝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업도 하나님이 문 닫으시니까 끝납니다. 승승장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권세, 하나님이 문 닫으시니까 내리막길로 치닫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룩한 사랑이 흐르고 그 속에 뜨거운 사랑의 교통이 흐를 때, 우리가 그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이런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 자체가 이미 병들어 있는 신앙생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도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충만하게 기도생활을 할 때에 갈급함을 느끼지, 자기 전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중얼하는 것 이외에는 기도라고는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갈급한 것도 못 느낍니다. 영적인 감각이 마비상태에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인들 눈에 검은 안대로 가려놓으면 그가 어떻게 하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자랑하는 자연적인 지혜, 그리고 뛰어난 지식, 그리고 그 놀라운 자기 체험, 이런 것들이 영적인 눈이 바르게 뜨여있어서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고 그를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이 그를 주목하셔서 ‘내가 저 사람의 인생을 인정하기 때문에 내가 저 사람의 인생을 밀어줘야 하겠다’고 인정해주실 때 그런 모든 것들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사실 하나는 똑같이 신앙 좋으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세상에서 더 많은 빛을 발하고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때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시니까 하는 짓이 고약하고 기도도 거의 안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부흥회도 열어보고 기도학교 사경회도 열어봤지만 그때까지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 좀 봐야되겠다.’ 하고 마음먹으시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으로 인간이 잘 나고 지식이 많고 돈 많고 아는 사람 많고 빽 많은 것이 힘을 발휘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발휘 못하도록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못된 자식이라도 그 자식이 결국은 하나님과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경을 통해서 그런 결론 하나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2-30년 동안을 항상 충만한 기도생활 속에서 신령한 세계를 보면서 기도생활을 해왔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 늘 위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가장 약해져도 표가 비교적 늦게 나타나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한 주만 교회 안가면 당장 목사님으로부터 전화 오고 심방전도사님께 전화 오고 구역장에게 전화 오고 그러다 5-6주 정도만 빠지면 불러서 ‘형제,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면 안돼.’ 하고 야단치지만 기도를 5주 동안 안한 정도는 하나님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 떠먹은 자리 표 안 난다고 아무리 기도의 영을 까먹어도 표가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속에서 서서히 고갈되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영적인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이 닫칠 때 비가 그칩니다. 비가 그칠 때 비참하게 죽어 가는 들판의 죽은 곡식들을 보셨지요? 여러분, 하나님이 하늘을 여셔야 우리가 삽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오늘 ‘너’라고 말합니다. 중보기도를 가지고 매달리는 것도 한 달 두 달이지 그것만 밑천으로 해 가지고 자기는 기도 하나도 안 하면서 ‘우리 엄마가 기도 많이 해주니까’ 하는데, 중보기도의 역사는 받는 사람이 함께 그 기도에 화합하며 하나님 앞에 신령한 삶을 살아가고 영적인 교통이 있는 가운데 살아갈 때에 그 때에 중보기도가 위대한 힘과 역사를 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는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대에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셔야 할 필요를 이야기해 보십시오. 우리는 도처에서 이 세상의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볼 때 분초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매 시간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우리 죄로 가득한 탁류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이 세상 속에서 유혹을 받고 범죄 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쟁이라고 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마음 한 구석에서 울려나오는 신앙의 목소리보다는 우리는 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강력한 세상의 힘에 이끌려, 그리고 때로는 호소해 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우리 육신의 연약함에 굴복하며 살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이면 와서 하나님 앞에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늘 깨어지기 쉬운 죄인들을 용납해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십자가가 구속하여 주는지 우리는 알 수 없도다’ 하면서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백을 하고 예수 의지하여 일주일 동안 다시 한 번 승리하는 삶을 살겠다며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없는 수많은 죄악 된 요소들,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어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런 환난과 시련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 세상을 나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고 나 혼자 힘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앞에 생각나는 장벽이 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벽처럼 버티고 있어서 5년, 6년, 1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기도의 제목, 기도하다가도 그것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 오는 그런 해결되지 않는 난제들을 여러분들은 안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서, 그 장벽 뒤에서, 그 여리고 성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주님은 침묵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영적인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나를 의지하지 않고 살아왔을 지는 너의 무너진 기도의 골방이 보여준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늘 이런 세상과 나 자신의 연약함, 세상의 악함, 영적인 무지, 결심의 빈약함, 육신의 연약함,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영적인 힘은 나날이 쇠퇴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약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들이 필요합니까? 물론 기도해야지요. 그런데 기도해야한다는 사실은 오늘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다 알고 있었는데-원래 설교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 것이지만- 여태껏 해보니까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한 번 이런 집회를 통해서 말씀으로 우리의 영적인 쇄신을 경험해야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으로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은밀히 기도하라” 그러셨는데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골방을 주신 것입니다. 그 기도의 골방에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도의 향이 피워 오릅니다. 불이 잠시 꺼졌으면 즉시 가서 다시 붙이면 되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형식적인 기도 이외에는 해본 적이 없으니까 향로도 다 꺼지고, 꺼진 정도가 아니라 향로는 거의 녹슬어 버리고 문짝도 다 뜯어지고 벌레들이 잔뜩 있고 쥐가 돌아다니고 골방에는 거미줄이 잔뜩 있는 속에서는 향로를 피우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방을 한 번 청소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문제이고, 그 핵심적인 문제를 둘러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이해진 우리의 모든 삶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로 우리의 더러운 방을 씻어내고 성령의 불길로 더러운 벌레들과 모든 없엘 것들을 태워 버리고 우리가 기도의 땀으로 우리의 기도의 골방을 다시 한 번 깨끗이 청소한 후에 그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의 향을 피울 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할 수밖에 없다고 심판을 선언하시던 하나님이 오늘은 “이스라엘, 너희가 나를 향하여 부르짖을 때에 나는 ‘내가 여기 있다’ 이렇게 너희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리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으로 회복시켜주시는 것처럼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회개의 눈물로 자기의 기도의 골방을 씻어내고 성령의 불로 몹쓸 것들을 태워버리는 정결케 하는 영적인 각성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위대한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같이 죄로 가득 차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을 돌아볼 때에도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패역할 수 있을까?’ 분통이 터지고 슬픔에 잠기는데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타는 것 같고, 이 세상에서 속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당신 나라가 견고히 서기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의 연약한 실낱같은 기도를 붙들고 자기 생명도 거의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선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을 보면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셔서 “오 주님” 그럴 때에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능력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교회, 성도와 성도가 교통하며 형제와 자매가 그리고 자매와 형제가 형제와 서로 사랑을 느끼며 교통하며 하나가 되어서 한 마음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할 때에, 교회가 기도할 때에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이 무엇입니까? 기도할 때에 온 성도가 한마음이 되어서 “주여, 오늘도 우리를 하감하옵시고 주께서 종들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뜻을 남김없이 이루시옵소서” 기도할 때에 초대 교회에 하늘이 열리고 옥토가 흔들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잠자기 전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5분, 10분 기도하는 것 가지고는 우리의 영적인 삶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 같이 장정인 사람들이 수프 두 숟가락 먹고 연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같이 장정인 사람들이 단지 라면 삼분의 일을 먹고 연명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일들은 불가능합니다. 장성한 사람들은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특별한 직분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그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하늘의 권세의 지원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껍데기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한 번 제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전에 예수께로부터 첫 은혜를 받고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젊은 청년일 때도 있고, 초등학교일 때도 있고, 시집와서 어렵게 시집살이를 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의 감격일 수도 있습니다. 청년시절에 만난 주님일 수도 있고 장년시절에 체험한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뜨겁게 기도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힘이 있고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그 넓은 사랑, 나같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에 한없이 연약한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기도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져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기도의 감격을 누리신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속으로 답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 안하고 신앙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하며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 없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 놀라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가까스로 이 세상에서 입술을 깨물고 고통과 모순과 시련과 위기를 견디다가 나중에 주께서 오라고 하실 때 ‘해방이다’ 하며 주 앞에 오라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 구속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인생을 살아감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사명의 성취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새카만 머리에 빛나는 눈동자와 팽팽한 살결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세월동안 고난과 위기의 사선을 넘고 수많은 역경과 환난 속에서 복음을 위하여 박해를 받다가 죽을 때가 거의 되었을 때에 흑발의 아름다운 머리는 백발로 변해가고 팽팽하던 피부는 쭈글쭈글해 가고 여기저기에서 뼈들의 형체가 드러나고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후폐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이것이 바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놀다가 인생의 말년에 “겉 사람은 후페하나 속 사람은 새롭도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놀라운 은혜를 자랑하고,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젊음도 소진하고 자기의 건강과 모든 소유를 소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 갔습니까? 변함없는 기도의 생활 속에서 이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터득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것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권세와 세상 주관자들과 어두움에 속한 악한 영들, 우리의 은혜의 세계를 위협하고 교회의 영권에 도전하며 우리의 신앙의 삶을 초토화시키기 위한 모든 세력들이 졸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쉬지 않고 깨어있는 동안, 이 선지자들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확신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지 않았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날인지를 알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필요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기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 나를 도와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나 혼자 힘으로 얼마나 잘 사는지 멀리서 보고나 계십시오’ 하는 고백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온 천지를 두루 살피며 하나님 앞에 빈 가슴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목마르게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날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는 삶 속에서 기도하지 않음으로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니까 그 자리에 죄악이 싹이 나고 불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꼬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 인생을 소진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상급도 없는 허무한 일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련과 위기 속에서 몸부림치는 생애를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 고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급을 받을만한 영광스런 고통이고 또 하나는 상 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하는 가슴 아픈 고통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낭비하며 살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날들이 언제나 많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후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것이고 우리들은 잠시 후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이력서를 하나님 앞에 보일 것입니다. 그 사는 날 동안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 피상적인 기도생활들을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부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병든 자가 그 손으로 일어났고 그의 말씀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가 죽으실 때 무덤이 깨트려지고 성도들이 부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제자들이 모두 잠들어있는 깊은 밤에 한적한 들판으로 나가셨습니다. 늦게 들어오셔서 주무시고는 제자들이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발꿈치를 들고 고요히 일어나셔서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광야의 새벽바람을 맞으시며 수척한 몸으로 엎드려 당신의 백성과 교회와 그리고 영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더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사도들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아셨기에 그분은 그 고단한 몸을 이끌고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부르짖으셨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조차도 그런 엄격한 예외 없는 기도의 법칙 속에서 사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처럼 완전하지 않은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도하면서 살아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못했던 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없이 안일한 삶을 사는 동안에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가정의 뜻들이 지연되었습니다. 가족의 영혼을 위해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까? 한 이불에 드러눕는 남편이 지옥의 불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남편을 내일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내일도 수많은 죽는 사람들을 만나고 당신의 남편이 그 사람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옥의 불길로 달려 들어가고 있는데 수많은 이세상의 재물로 환심을 사며 부모로서의 권위를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절박한 기도가 없기 때문에 구원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하십니다. 언제든지 그 지점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한 삶을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불꽃처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처럼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세상 속에 휩쓸리다가 이 세상에 직책 하나 남겨놓고 자식 몇 명 남겨놓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불꽃과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난관을 기도의 능력으로 격파하면서 믿음의 힘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가족들이 교회의 지체들이 죄와 이 세상 원수 사단의 사슬에서 고통 할 때에 그들에게 다가가 기도로 그 사슬을 풀어주고 자유케 하는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충만하게 이룰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넘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힘에 지나도록 주님을 위해서 살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다가 주 앞에 갈 때에도 우리는 주께서 마지막 하셨던 것처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주님 손에 부탁하나이다” 기도로 시작한 신앙이 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새로운 기도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2. 마음이 괴로운 자의 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1995.9.19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2)
인생을 살면서 극한 고통의 마지막 골짜기에서 시련을 받고 아파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고통 받는 인간의 마지막 절규와 같은 그 비참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인생을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인생의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던 한 사람을 적고 있습니다. 바로 한나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가나라고 하는 비교적 인품이 있고 신앙심이 좋았을 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없었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첩이 들어왔습니다. 그에게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세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거꾸로 이 브닌나가 한나를 업신여기고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약에 한나에게 아들이 있고 한나에게 자손이 있어서 그 집안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귀여움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면, 브닌나 같은 이는 아마 부뚜막에서 눌은밥이나 먹었을 신세에 있을 이 여인이 언감생심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대들며 이 조강지처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처음 얻은 아내가 가지고 있는 첩에 대한 권한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계통과 질서들이 다 무너져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욕보였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첩에게 인간 취급을 못 받고 고통받는 이 한나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엘가나가 위로했지만 엘가나 역시 브닌나가 자식을 낳았음으로 브닌나를 업신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왔다갔다 하는 엘가나 사이에서 이 한나의 문제는 문제가 깊어져서 이제는 영혼의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인격적인 상처가 아니라 이제는 영혼의 상처가 되고 심령의 고통이 되고 그것이 창질이 나는 것처럼 영혼 깊은 곳에서 비참하게 썩어 들어가고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고통은 이처럼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왜 아이를 못 갖게 되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성태치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로 하여금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그 태를 막아두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하나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신 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을 하셨는데 능력이 모자라서 안 열리는 것은 내가 더 능력을 발휘하면 확실합니다. 주님이 허락해 주셨는데 내가 부지런하고 성실하지 못해서 이루지 못한 것은 내가 삶의 태도만 고치면 됩니다. 생활의 방식만 고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오랫동안 몸부림치면 칠수록 사람의 진만 빠지고 신앙에 대한 회의만 깊어지는 것입니다.
문제에 부딪히면 즉시 판단하십시오. ‘이것이 내 능력의 부족으로 막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인가’ 하나님이 막으셨다고 판단될 때는 주위 사람과 의논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과 상의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에 부딪히면 즉시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이것이 주님이 막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겁니까?’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인간의 얍삽한 지혜가 아니라 거듭나고 신령한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목이 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금 손보시는 것이구나’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급히 하나님께 달려와서 “주여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다른 데서는 해결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한나가 성태치 못하는 것이 다른 생물학적인 요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것은 아직까지 한나가 아이를 안 갖도록 만드셔야겠다고 적극적으로 한나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막겠습니까? 그것을 막아야겠다고 작정하시면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누가 그것을 형통하게 열어줄 수 있다고 말하더라도 믿지 마십시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나의 인생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한나에 대해서 받는 인상이 어떻습니까? 몹쓸 여자입니까? 아니면 슬프고 가련하면서도 청순하면서도 아주 사랑이 가는 여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아이를 주시고 한나는 이런 괴로움을 당하면 안 되는 여자였는데도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태를 안 여십니다. 이것은 한나를 향한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이 문제에 부딪히고 막막한 길로 들어설 때에는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자기 발로 잘못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지혜를 구하면서 자기가 어느 지점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왔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똑바로 걸어가려고 계속 걸어갔는데 앞에 이런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결혼해서 아이를 못 낳으면 저주를 받은 것인데 하나님이 그 태를 안 열어 주셔서 아이를 못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신앙적인 여자였다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호소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우리 한국의 여성들이 이렇게만 살면 가정이 변하고 나라가 변할 것입니다. 아담은 원래 그렇게 뻣뻣합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항상 모든 문제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중보기도 한다면, 한나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였던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막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순풍에 돛단 것처럼 잘나가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우리의 인생이 벽에 부딪히게 하실 때에도 거기에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점을 하나님 앞에 맞추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평생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번 영혼 깊은 곳에서 기 펴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찬송 한 번 못하고 환경에 밀리고 여건에 밀리고 사람에 치이고 팔자에 치이며 살다가 ‘한 많은 세상을 살았다’며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후줄근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을 때에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합니다. ‘안돼. 포기야. 끝이야. 의사가 그러는데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데’ 그런데 한나는 그렇게 하나님이 태를 막으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그는 하나님이 계신 성소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신 문제는 하나님이 풀어주셔야만 풀리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에 제사하러 올라가면서도 브닌나가 뒤에서 마구 구박하는 것입니다. “바보같이, 아이도 못 낳는 멍청이” 그것을 다 당하면서 죄 많은 여인이 되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엘가나는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의 분깃을 나눌 때 한나에게 더 많이 주었습니다. 짐승의 넓적다리도 더 많이 주고 뭐든지 더 많이 주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엘가나는 친절하게도 아주 달콤한 말로 위로했습니다. “여보, 아들이 없으면 어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나 하나가 아들 열 명보다 더 나은 사랑을 당신에게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브닌나는 아이를 낳아 주었지만 내 마음은 브닌나에게 없어. 당신밖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예전에는 남편의 말이 위로가 되었는데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나니까 이제는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치유 받고 여호와 앞에서만 깨끗함을 받기를 원하는, 모든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고 하나님만이 나의 인생의 문제를 치유하고 내 인생의 모든 고통의 문제를 종식시키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일편단심의 믿음, 이것이 바로 한나 안에 있는, 한나의 인격 안에 있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나는 나아갔던 것입니다.
마음을 ‘주의 성소로 올라가야 하리라’ 결정을 하고 나니까 전에는 문제가 눈앞에 떠오르더니 이제는 문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신 문제는 문제 바로 옆에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난관은 그 난관을 극복하며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난관을 직시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나는 고통하며 깊이 괴로워하였지만, 오늘 이 한나가 문제를 주목하다가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하리라. 내 인생의 문제를 아버지께 직접 여쭈어 보리라’ 결심을 하고 올라갔더니 이제는 문제가 이 한나의 마음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한나의 온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 문제가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묵상을 했습니다. 10대, 20대..를 지나 40대에 들어섰는데 그 40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반추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결정적으로 내 인생이 축복된 길로 방향 전환을 할 때마다 거기에는 영혼 속에 깊은 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남이 안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서 가슴이 녹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가’ 그런데 언제나 그런 문제가 있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보이셨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들판을 보여주실 때에도 그런 영혼의 진통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해법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면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더 큰 섭리를 보게 되는데, 문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가 아닐 경우에는 커다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나에게 있어서 여호와께서 한나를 성태치 못하게 하신 것은 한나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결국 한나는 여호와께서 그 태를 막지 않으셨으면 그 시대의 평범한 아이 하나를 출산하고 그 아이가 부모의 유산을 받아서 땅 파먹고 살다가 죽었을, 그래서 역사가 주목할 이유가 없는 그러한 한 시대의 집안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나 앞에 문제를 두시고 한나가 그 문제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역사가 일어나니까 하나님은 그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서 이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까지 흐르고 있던 그 혼란스러운 이스라엘의 모든 부패상들을 정리하고 신정시대의 마지막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왕정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은 역사 깊은 사역들을 감당했던 선지자의 대부였습니다. 사무엘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영적인 성품을 가지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영적인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서 나라를 위기와 시련 가운데서 건지고 결국은 역사 속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까지 소개하고 죽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한 여인의 기도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움직이는 이 일들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문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뜨끔할 것입니다. ‘나만 쳐다보는구나. 그 말이 내 말이네’할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그 말이 내 말이네’ 하는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왜 그것이 변함이 없습니까? 기도를 하기 전에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기도를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올바르게 그 문제를 접근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능력 있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통회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타는 듯한 마음과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와서 그 문제를 기도할 때에는 핵 폭발적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끝없이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이웃의 구원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는 하늘을 나르는 새와 같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도를 먼저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데 가서 돈을 낭비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조차 범죄 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곧장 가십시오. 하나님이 막으시는 문제이면 하나님이 아니면 풀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직접 가십시오.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주님께 하소연하고 따질 일 있으면 주님 앞에 가서 따지십시오. 주님이 당사자입니다.
한나가 그렇게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는데 기도할 때에 이 한나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였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랬습니다. 한나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나가 멀쩡하게 외출복을 차려입고 엘가나와 함께 길거리로 걸어갈 때 누가 한나 보고 팔자가 기구한 여자라고 말했겠습니까? 넉넉한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가나는 인품이 있고 인정이 있는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그 여자의 불행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집안에 들어와서는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그 끔찍한 수모, 거기에서 오는 슬픔과 죽어버리고 싶은 인생의 모든 좌절을 누가 이해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괴로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마음 깊이 괴롭고도 괴로울 때에 그 괴로움 속에서 마음속에 한겹 두겹 인생의 한을 쌓아가면서 괴로움을 삭힌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을 토해 놓았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입니다. 괴로우면 그것을 밖으로 표출해버리고 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화) 여러 가구들이 모여 사는 집에 산 적이 있었는데 옆집에 화만 나면 짜장면을 시켜먹 는 아주머니가 살았다.
그렇게 화를 바깥으로 푸는 사람들은 비교적 안으로 덜 쌓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여성도 아니고 안으로 오그라져서 갈피갈피 쌓는 사람은 큰일 납니다. 영적으로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대부분 마음에 한과 고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남모르는 슬픔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사단이 역사 합니다. 그런데 두 방법 다 건설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마음에 괴로운 일이 있어서 실컷 퍼먹고 찌는 이 살밖에 더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리고 속으로 삭혀봐야 사람들은 칭찬할지 모르지만 속에서는 심한 증오심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그득한, 그래서 아무 것도 와서 거할 수 없는 그런 황무지와 같은 그런 심령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가슴이 묻어두지 말고 쏟아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쏟아 놓으면 즉시 반응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십시오. “하나님,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나서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쏟아놓다 보면 나중에는 기도하다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며 깨닫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하나님께 직접 가서 하라는 이야깁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막으셔서 쌓이는 불만, 막으셨기 때문에 쌓이는 고통, 그런 시련에서 오는 아픔, 이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가서 이야기해야 소용이 있지 뒷집 갑돌이 엄마 붙잡고 냉면 사줘 가면서 하루 종일 수다를 해봐야 턱밖에 아픈 것이 없습니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 장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냉면 값으로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겠습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기도 속에서 자신의 심령을 많이 토로하는 사람은 인간의 위로나 인간의 이해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 내 마음 아시지요?’
(예화) 대학원 1학년 다닐 때, 신학교 선생이 되라는 소명은 주셨는데 교회 일이 바빠서 공부 할 시간이 없어 힘들었던 이야기 -하나님은 더 있어라 하셨다.
하나님이 인생에 있어서 세미한 부분까지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씩씩하게 막 나가다 보면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예화) 대학원 수업 시작 전 강당에 올라가 엎드려 ‘하나님 왜 나만 이렇게 고달프게 하십니 까’ 하면 “내가 너를 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항상 들렸다.
여러분, 하나님만이 우리의 필요를 가장 잘 아시는 것입니다. 괴로운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토하십시오. 인간에게 토해놓으면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감싸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람이 반작용으로 튑니다. 그러면 더 괴로워집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하던 때는 사람과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 할 때는 사람과 할 말이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어떤 사람이 삐딱하게 나가면 ‘네 마음대로 해라’ 하고, 엎드려서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손을 빌어서 심령을 녹이게 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끊어지고 나면 이런 힘이 없게 되니까 맨날 가서 봐달라고 사정하고 잘못했다고 빌면서 인생이 한없이 낭비되게 됩니다.
오늘 한나를 보십시오. 문제가 있을 때 다른 곳에 들리지 아니하고 즉시, 시위를 떠난 활이 과녁을 향하여 곧장 날아가는 것같이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것같이 한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심령이 괴로울 때 주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화) 철야 안 하던 사람이 철야를 하거나 철야하던 사람이 철야를 안 하면 문제가 있는 것 이다.
철야하면서 한없이 울 때 그 때 귀하다 생각합니다. ‘나는 왜 우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시지요. 주님밖에 저 눈물을 그치게 할 분이 없사옵나이다.’ 합니다.
한나는 마음에 괴로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다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들이 느껴야 합니다. E. M. 바운즈는 말하기를 “짧고 간단한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초토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깊이 해야지 뭐가 될 것 아닙니까? 오래도록 깊이 애착을 가지고 한참동안 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몸이 안 좋아서 한약을 먹게 되어 전자 약탕기에 약을 다렸더니 잘 우러나지 않았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깊이 들어가야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만 두고라도 할 말이라도 다 할 텐데 ‘주님, 아시지요, 이상입니다’ 합니다.
주님은 기도 가운데에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야지 만 우리의 마음이 변합니다. 잘못되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을 때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문제밖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를 통하여 문제의 근원이시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받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들이 어디서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말로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비천한 인생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영향을 받을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최고의 단계는 언어를 잃어버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비추는 은혜 앞에 고요히 우리의 영혼을 노출하고 거기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기도는 천사의 사발에 담겨져서 그리스도 예수께로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보십시오. 아래부터 올라 나오는 그 향연을 천사가 그릇에 담아서 그리스도 예수께 가서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기도가 짧고 간단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드리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해도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기 전에 이미 공중에서 흩어져 버리는 것과 같이 힘없는 기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들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강건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나는 여호와의 그 놀라운 임재 안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한나는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임재 안에서 한나의 기도를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때에 한나는 그 괴로운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고 위로 받는 은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괴로운 일이 많아도 괴로움보다 기쁨이 더 많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가 여호와께 기도하기만 하면, 여호와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기만 하면, 그 속에서 우리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도 문제를 능가하는 위로와 평강과 기쁨이 충만하게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런 고민거리도 없고, 눈뜨면 고통스럽고 결단을 해야할 다급한 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만한 기도의 영속에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고 있는데도 그 문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넘치게 기도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넘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의 문제이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던 때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구가하던 때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느낄 때, 그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것입니다.
저는 기도의 넓은 바닷가에서 왔다갔다 하는 조가비를 든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그 기도의 세계에 한 번 눈뜨게 될 때 이런 경험을 했었습니다. 신학교 1학년에 들어가서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신학교에 갔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면 내가 얼마나 더럽고 비참한 인간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내 자신의 불결과 내 자신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가로막고 주의 영광을 훼방한다는 느낌 때문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눈물이 흐르게 하는데, 그러한 기도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세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런 기쁨이 어디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나가도 내가 그렇게 쉽게 바뀌겠습니까? 우리가 자주 결심을 해도 우리가 얼마나 안 바뀌는 존재들입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쁘게 되었느냐면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기도가 시간도 초월하고 공간도 초월하며 깊이 있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가 이런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문제를 통하여서 역사적인 위대한 일들을 기도로 성취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고 때를 따라서 그저 간단 간단하게 기도하는 것 가지고 만족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그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뜻을 말씀해 주시는 이런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기도의 영을 부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문제를 통해서 이러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소유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또 한나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마옵소서” 기도했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하다’는 히브리 원문은 그야말로 통곡입니다. 엉엉 우는 것입니다. 심령이 얼마나 괴로우면 다 큰 여인이 엎드려서 엉엉 울겠습니까? 나중에는 그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가 술 먹었나 생각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몸부림과 의식 세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려지는 기도였는데 이 기도는 또한 통곡과 함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힘은 간절한 데서 나옵니다. 끈질긴 기도도 간절한 데서 나옵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 목사님이 방언을 달라고 몇 시간을 기도하다, 다리가 몹시 저린 가운데에서 ‘오늘 아니면 내가 언제 이렇게 기도하랴’며 “주님, 다리가 끊어져도 안 일어날 테니 돌려보내지 마시고 은혜를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은혜를 주셨다는 이야기.
이전에도 많이 기도했지만 그런 응답을 주시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는 많이 기도했으나 언제나 토막토막 끊어진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주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기 까지 내가 여기를 떠날 수 없으며 주께서 나를 공수로 돌려보내실 수 없나이다.”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성경에 비춰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필요도 없이 압니다. 성경에서 잘못된 것이라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아버지 뜻이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알 수 없는 뜻은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깨닫고, 기도할 가치가 있나 없나 판단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스러운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간절히 사모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쓸데없는 인간의 생각과 잘못된 인간의 계획을 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한마디의 기도는 뜻도 없이 반복하는 1년의 기도보다 더욱 위대한 능력과 힘을 발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을 고양하고 우리 속에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토양 위에서 꽃피우게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깊어지기 전에 먼저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일이 있고 나서야 기도가 깊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헌신을 동반하고 기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안일한 것들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광야에서 온 사람과 같은 강인함과 깊은 숲 속에서 온 것 같은 해맑은 영혼을 가지고 죄악이 가득한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죄악들을 보고 분별할 수 없는 것들을 분별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해도 응답 받을 수 없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을 마치 하나님을 홀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역사 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면 그 다음 그들이 기도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쉬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무엇이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합니까? 그들은 깊이 기도하기 전에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경박한 기도로 때우면서 오늘 하루를 안일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모든 유혹을 거절하고, 깊이 있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깊이깊이 매달리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그들의 매일매일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기도 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바꿨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영혼을 움직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그 자신의 인격까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서 이 땅에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간구하실 때에 그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힘을 다하여 기도하시고 기운이 진하시니까 천사가 와서 돕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도 기운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기운이라도 다 쓰고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우리의 힘이 탈진될 때는 하나님이 와서 도우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기도의 제목들을 보이시면서 우리의 기도를 움직이고 몰아가시는 역사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평범한 기도의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기도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냥 베개에 얼굴을 묻고 5분-10분 기도하는 것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도의 신령한 세계를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힘과 환경을 움직이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힘을 다해서 매달리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늘 ‘무슨 목마른 기도 제목이 있다고 저렇게 간절히 매달려야 되나’ 한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왜 기도 제목이 없습니까? 목회자인 제가 여러분을 볼 때 답답한데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도대체 열린 교회에 1년을 다녀도 그 턱이고 6개월을 다녀도 그 턱이면 어디 가서 어떻게 변화를 받겠습니까? 기도의 제목은 산적해 있습니다. 기도의 제목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거의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제목에 대한 감각조차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여호와께 드리는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기까지 이미 성전에서 제사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위로하는 남편도 뒤로 한 채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세상에서 겪었던 그 많은 고통과 아픔들을 하나님 한분 앞에 쏟아놓으며 통곡하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우는 사람은 사람 앞에 용기가 있습니다. 담대합니다. “내가 너 밀어줄 수 없어”하면 “나도 너 필요 없어. 네가 안 밀어줘도 돼. 하나님이 끌어주시니까 내게는 밀어주는 사람이 필요 없다”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약하니까 우리들은 늘 사람 앞에 약합니다. 사람 앞에 약하니까 하나님 앞에 와서 더 강한 겁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판사판입니다” 대들면 하나님이 꽤나 “겁난다”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기도의 깊은 영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 위대하시고 한없이 크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건 안 들어주시건 어쨌든지 내가 그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신 이 특권조차도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다가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기도 속에서 일어납니다. 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 아무리 불만해 봐야 세상이 여러분 장단에 춤 안 춰줍니다. 아무리 불만하고 불평하고 인상 쓰고 있어봐야 하나님이 겁먹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와서 “주님만 내 소망입니다”말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하나님 앞에 말했습니다.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리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한나가 왜 그렇게 아들을 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고통으로부터 출발되었지만 한나가 원하는 바는 그 기도의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사모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응답을 못 받으면, 기도가 응답될 때 가장 덕 보는 분이 누군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라면 좀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응답해주시지만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한나는 브닌나로부터 받는 설움과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서 하나님 앞에 아들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태를 막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포기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아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주신 결과를 가지고 자기가 수치를 면할 뿐 아니라 이 아들을 통해서, 이 아들의 태어남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 받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했습니다. 아이를 낳아본 부인들은 이해가 갈 것입니다. 삭도를 머리를 대지 않겠다는 뜻은 나실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가 죽어도 그 시체 곁에 올 수 없는 정도로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은 낳아봐야 자기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입니다.
한나는 기도에 있어서 사심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영광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 때 한나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아이가 젖을 먹고, 젖을 떼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엄마를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기 시작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그 아이가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이 그렇게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 아이는 얼마나 큰 위로고 기쁨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를 데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바치고 다시 집으로 내려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의 제목이 되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역사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지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제 인생에 이런 계획이 있는데 한 번 밀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러면 나에게는 어떤 영광이 돌아오니?” 그것은 생각도 안하고 가서 무조건 떼를 써보면 하나님이 밀어주실 것이고 한 번 챙긴 다음에는 하나님과는 안녕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자 하는 일과 물리치고자 하는 문제들과 넘고자 하는 위기가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이 될 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헤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기업을 나실인의 정신으로 경영하는 사람의 이야기-기업을 나 잘 먹고 살려고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도산시켜버리시라고 기도한다는 내용, 사업에 어려움이 와도 어차피 주님의 기업이기에 태연하다.
얼마나 자유 합니까? 무슨 걱정입니까? ‘우리 회사 사장은 주님이십니다. 당신이 부도내고 싶으시면 부도 내시겠지요.’ 주님의 손에 있다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인생의 문제를 극복해서 고통만 털어 버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들을 가지면서 살아가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좀 더 바뀔 때까지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의 신에게 중언부언하고 빌면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구하는 삶은 아닙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이 아들을 주시면 아버지께 바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그 서원을 이행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한나의 마음이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상실감 속에서 더 큰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세상에서 기도의 제목을 신령한 것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기도의 제목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고 탁월한 열심과 목마름으로 뜨거운 간절함과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응답해 주시기까지 부르짖고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자유함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재 해주시는 인생을 살아가며 기도 속에서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승리와 위대한 역사를 쟁취하면서 자기를 통하여, 자기의 기도를 통하여 세상을 바꾸시고 사람들을 움직이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면서 어두운 세상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영과 기도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빛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를 보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이 과연 동행하시는 사람이 얼마나 역동적인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헤치며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의 노예가 되어서 억눌려 살아온 세월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우리가 환경에 아부하고 우리에게 놓인 운명과 팔자에 대해서 굴복하고 반항하지 않고 고분고분 순종했더니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무엇을 남겨주었습니까? 수많은 근심과 염려와 고통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가 이제는 깨어서 일어나서, 이렇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 한분 앞에 나아가서 그 모든 문제를 토로하고 그 하나님 앞에 주의 임재 속에 기도하며 끈질기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결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았던 한나와 같이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이렇게 지배하며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성령을 구하는 기도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9-13)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1995.9.2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 3)
아마 본문을 읽으면서 좀 의아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설교하면서 이렇게 긴 본문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속에는 주기도문이 들어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네 복음서 중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는 좀 더 깔끔한 문장으로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들이 읽은 누가복음 1절부터 13절까지의 본문을 세 편의 설교로 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 세 편이 아니라 삼십 편의 설교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13절, 더 넓게 잡으면 26절까지의 본문이 하나의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연속된 스토리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이 나아와서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과 같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하느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서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형식을 갖춘 그 기도를 어떠한 자세로 해야 할 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또 이르시되...” 하면서 떡을 빌려 달라고 떼를 쓰는 어떤 강청하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그렇게 강청하는 태도로 우리가 주기도문을 기도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같이 주문처럼 외우고 예배를 끝내는 것은 주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의도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까지 그런 형식으로 기도를 하고 그런 형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이루어 가는 삶이, 그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의 자세가 간절하고 사모하고 강청하며 ‘안줄 것이다’ ‘받을 수 없을 것이다’고 하는 것들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떼를 쓰고 강청하고 간절히 요구하는 그런 자세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실상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고 있지만 우리의 장부에 기록된 기도의 시간과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된 기도의 시간이 얼마나 다른 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아마 충격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기도했지만 그 수많은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성품과 혼과 우리의 모든 체력을 다해서 그렇게 사모하며 부르짖을 때에, 그 강청함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것이 기도의 올바른 자세임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분들은 기도의 자세를 바꾸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뒷부분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그렇게 강청하는 자세로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하심으로서 간절히 구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신 다음에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하고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두 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깊이 기도하고 싶으나 우리로 하여금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하나님 앞에 영혼 깊은 곳에 묻어있는 더러운 죄악의 찌끼들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회개의 눈물로 씻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기도생활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모하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해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크게 부어주셨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어눌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 주신 은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기도를 하게 하시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오늘 아침에는 이런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지’생각하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던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기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30분 기도했나’ 하면 세 시간 네 시간 흘러갔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기도의 진수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별로 유창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에게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깊이 있었던 신앙의 조상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 앞에 아뢰는 기도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성령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생명수를 부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승리를 꿈꾸나 꿈꾸는 것은 우리지만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살고 예수를 믿고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받는 고난과 박해를 기꺼이 견디면서 이 불신의 시대를 신앙의 횃불을 치켜들고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은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만한 성령의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 속에 부어주실 때 그 때 우리는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따라서 세상의 풍파와 유혹을 거절하며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우리가 믿을 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예수쟁이들이 주일에 성경책 끼고 걸어가는 꼴을 보면 주는 것도 없이 속에서 역겨운 것들이 솟구쳤었는데 어느 날 내가 욕하던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게 되는 것도 성령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에스골 골짜기의 영혼들이 살아나는 비결도 성령이 찾아오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사람의 지혜로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성령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성령을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기를 사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하나님의 자녀라도 승리하는 믿음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성령을 힘입어서 마귀를 이기고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으로 성결의 영으로 부활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을 하나님 아버지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의 십자가는 늘어나지만 술집의 간판도 늘어납니다. 그리고 교회의 십자가도 높아지지만 여관의 네온사인도 빛나고 있습니다.
(예화) 강남에 술집이 많으니 여관이 늘어나고 죄를 많이 지으니까 교회가 늘어난다고 비꼬는 이야기.
이런 타락한 세상을 무엇이 변화시키고, 죄악의 물결을 쓸어버리고, 이 세상의 패역한 죄들이 변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의를 찬송하는 부흥의 불길이 이 어두운 땅에 치열하게 타오르게 하는 위대한 역사를 누가 이루십니까? 성령이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하나님께서는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의 교회가 메마른 땅과 같다면 하나님은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땅이 갈라질 때 우리는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는 고통을 경험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메말라 터진 신자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타는 듯한 마음으로 갈망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렇게 좋은 것이고 하나님은 그 성령을 값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물 붓듯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극히 소수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주일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행복해 보이지를 않습니다. 빚쟁이 앞에 빚 진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 예배 시간에 오실 때 그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졸면서 부르던 찬송을 눈물을 쏟으면서 부릅니다. 설교를 한 시간만 해도 길다고 하던 사람들이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하면서 “조금 더하지” 합니다. 성령이 오실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과 사람이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섬기며 종노릇하고 서로를 높이고 서로를 상석에 앉히고 나보다 남을 귀하게 여기는 곳이 교회인데 사람들은 물고 뜯고 치열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다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다투던 사람들이 얼싸안고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고 “아우, 그것이 무슨 말이야” “집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며 얼싸안고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밤새 설명해도 끝이 없지만 결론을 내리면, 성령이 없으면 신앙생활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령을 하나님이 얼마나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 개인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태생 자체가 죄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씨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기대를 걸겠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인생은 숫자에 치지도 말아라. 생명이 그 호흡에 달려있지 않느냐”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또 내가 성령이 오셔서 내안에서 나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드려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오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이 실제로 오시지 않고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먼저 성령을 구하는 자세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갑자기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기 몸으로 낳은 아버지와 아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고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한 사람들이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주고받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즉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두 가지 교훈을 받게 되는데 첫째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을 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미 자녀가 되었는데도 또다시 성령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회개케 했습니다. 중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가 또 다시 성령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성령님은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버려도 그분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불순종 할 때 성령은 근심하시고 탄식하시지만 그러나 떠나지는 않고 영원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또한 성령은 위로부터 오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데 또 위로부터 오실까요? 신이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도 끊임없이 오시는 성령,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서도 또한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셔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고 역사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령을 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성령이신 주님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날 능력을 상실한 교회와 생명을 잃어버린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주시는 성령에 대해서 눈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만지고 지나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다름없던 신앙생활을 살아있는 군사와 같은 신앙생활로 바꾸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할 수 있고 주시는 자격을 받을 그러한 여지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이와 같이 성령 주심에 대해 기대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성령 주심에 대해 진실한 소원을 가지십시오. 오늘날 잠들어 있는 신앙생활을 깨우는 방법은 오직 성령, 어두운 가운데서 죄악의 쇠사슬에 매여서 고통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해결도 성령이 그 죄악의 사슬을 끊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그 성령을 어떻게 구할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성령을 구하는 문제에 답함에 있어서 이중적인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먼저 말씀하신 것이 떡을 빌리러 오는 강청함입니다. 밤중에 한사람에게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배고픈 그 친구를 위해서 저녁을 대접해야 하는데 집에는 대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웃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문을 다 잠그고 잠든 친구가 하찮은 떡을 꾸어주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없다” “나는 벌써 잠자리에 들어서 싫다”고 하면 갈 줄 알았는데 이 친구가 달라고 계속 문을 두드리며 그 문 앞에서 안 가는 것이었습니다.
(예화) 어릴 때 식구 중 누가 아파서 통행금지 중인데도 약국 문을 계속 두드린 이야기.
영화를 볼 때 어느 장면은 전의 그림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장면이 떠오르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오버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겹치면서 뒤의 그림이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글을 쓸 때 특별히 중요한 역사나 이야기를 쓸 때 이처럼 앞 뒤 부분의 일부를 겹치기로 해서 반복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가 신약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 지 아십니까? 강청하는 비유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의 말씀이 바로 겹치기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즉 강청하는 비유를 상세히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신 다음에 그 친절한 설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해 주신 것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있어서 강청함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떡을 빌리는 강청하는 비유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는 것은 그 간절한 기도를 실제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를 보여주기 위해서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은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신자들에게 마땅히 성령주심이 꼭 필요한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기도로 구할 때까지 내버려 두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며 살기 위해서 성령이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데 아시는 주님이 그것을 주시면 되지 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신앙의 힘이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도를 통해서 확인시키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패배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혹시라도 이기는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데, 없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신앙생활은 언제나 패배입니다. 패배를 하다하다 나중에는 승리라는 단어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마귀가 꽉 눌러주면 오히려 편안하고 죄가 짓누르면 안정감이 생기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상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불신자와 거의 다름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안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실패를 숙명처럼 삼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오늘과 같은 말씀을 들을 때 ‘아 그렇구나. 이때까지 내가 경험이 모자라서 신앙에 실패하고 머리가 좋지 않아서 믿음의 생활이 늘 실패로 접어드는 줄 알았더니, 나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신앙의 원동력인 성령이 고갈되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령 좀 줘요” 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늘 기도했는데 내일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조금 더 내어서 “주님 성령 없이는 못살겠습니다. 성령을 주시옵소서. 성령 받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니 차라리 개같이 사는 것이 낫습니다.”고 기도를 해도 성령님이 안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성령이 내 안에 오시지 않으면 결국은 패배하는 생활밖에 할 수 없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주님, 저를 죽이시든지 성령을 주시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괴롭사옵나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 태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갔던 사람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령을 달라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고 나중에는 금식까지 하며 매달리는데 어느 날 주께서 하늘을 여시고 “받아라.” 하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실한 예수 믿는 사람이 됐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성령이 하신 것이라고 말하게 되고, 누가 줬느냐고 묻는다면 나로 하여금 예수를 제대로 믿게 만든 것은 성령 때문이고 성령을 주시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직 하나님 때문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성령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그냥 안 주시고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게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대를 물려가면서 성령주시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소용없습니다. 손자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기도를 하니까 성령이 안 오시고 성령이 안 오시니까 깊은 기도로 못 들어가고 깊은 기도로 못 들어가니까 죄를 짓고 죄를 지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지니까 기도가 막히고, 그렇게 휘말리면서 소용돌이처럼 끌려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사단의 권세들이 그를 물밑바닥에 깔아뭉개서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때까지 끌고 내려갑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더 진지한 기도, 더 간절한 애원, 더 절박한 부르짖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간구하십시오. 매달리십시오. 낙망하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 달라고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화) 청년 수련회에서 귀신들린 한 자매 이야기/ 하나님을 알고 싶으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는다고 유서를 남기고 죽은 청년 이야기.
그런데 은혜를 받으니까, 성령이 그들 가운데 오시니까 영적인 바른 시각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바쁘고 씩씩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낭비가 없이 올바른 길을 분별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오실 때 이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니까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귀한 선물은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 문을 드나드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당 왔다갔다 해봐야 성령은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 받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큰 성령의 구함은 마치 친구를 위하여 떡을 빌리러 온 사람처럼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섬기는 열망을 가지고 강청하는 기도의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진리는 예수께서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자동적으로 오셨겠지’하고 생각하는데, 기도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누가는 그의 복음서 3장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와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더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기도하심으로 성령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진리에 눈뜬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역사적인 오순절 성령세례가 있기 전에 그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슬 시퍼런 로마인들의 감시의 칼날 끝에서 그들은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마음을 합하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주실 것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와 눈물로 힘쓰며 기도하던 열흘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와 요한이 관원들에게 끌려가 협박을 받던 때에 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하면 끌어낼까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특공대를 조직해서 담장을 내려가서 벽을 폭파시키고 두 사람을 구출해낼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사람이 옥 속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하던 습관대로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지도자가 없던 위기의 순간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축복의 순간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기둥과 같은 교회의 두 지도자를 잃어버린 예루살렘 교회가 슬픔에 잠기는 대신에 열심히 하나님께 소리 높여 장시간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희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우리를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단번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너희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으나 우리가 또 전한다.”하며 쏟아져 나갔습니다. 전에는 두 사람이 전했지만 이번에는 은혜 받고 성령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예수, 너희가 예수를 믿고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얻으라”고 외쳤습니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질렀습니다. 온 도시가 활활 타버렸습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다메섹으로 끌려갔습니다. 다메섹으로 끌려가서 제일 먼저 경험하게 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서 기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눈에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지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성경은 고넬료가 이방인으로는 첫 번째 성령 받은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더라” 말합니다. 그냥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는 먼저 간절한 기도를 원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 역사도 증거 합니다. 19세기 정치적인 부패로 얼룩진 미국, 시카고의 무디 성서 신학교에서 다섯 명의 교수들이 모여서 황당한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온 세계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지도를 펼쳐놓고 다섯 명이 손가락으로 한 땅을 가리키며 “주여 이곳이옵나이다. 성령을 주시고 부흥의 불길을 주시옵소서” 그들이 손잡고 기도하는 그곳을 따라서 부흥의 역사가 영국, 아일랜드, 수많은 나라들을 헤치며 역사 했습니다.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를 두드렸습니다. 온 대륙을 부흥의 불길로 몰아넣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열 명, 스무 명, 백 오십 명, 삼백 명, 기도 모임이 삼백 명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는 위대한 불의 열차를 골방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날 우리 동네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계획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카고 무디 성서 신학교의 교수들이 학생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실 계획표를 짠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교회에 새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권능과 기쁨을 더해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것 없이는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또 이것 없이 교회가 커지면 뭐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을 교회당에 모아다가 위선의 탈을 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서 나아가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욕 먹이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서 뭐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연보를 받아서 교회를 3층, 4층 올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커 가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아뢰며 하나님께 간절히 이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도 교회가 자신의 심령의 부흥을 열망하는 여러분들을 향해 하나님은 간절하고 안타깝게 매달리는 기도가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가슴에 아로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제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와서 박힌 사실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 받기 위해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달라고 피는 그만두고 땀이라도 떨어질 정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울부짖어 본 것이 언제입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능력 있는 삶을 못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도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에게 또 다른 강론을 하고자 합니다.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다 성령을 받습니까? 백퍼센트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축복스러운 성령주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철야하고 금식도 하고 성령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부러울 정도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충만한 영적인 체험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열매가 너무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전에 너절하던 사람이 지금도 너절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전에 탐욕스럽던 사람들인데 지금도 그대로 살아갑니다. 실없이 거짓말 잘하던 사람들인데 성령을 받은 지금도 그대롭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열매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두렵게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성령을 구하는데 있어서 간절한 기도, 그리고 강청하며 울부짖는 매달림, 이것은 필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기도의 접근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에 있어서 기억해야할 것이 또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는 것입니까? 이것은 성령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가 말의 기도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것이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하라’ 입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 눈으로 찾으라는 것입니다. ‘두드리라’ 손으로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말 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달라고 구하는 방법은 전인격적인 구함, 삶에 의하여 포괄된, 기도 자체가 삶인, 이런 식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토록 성령을 구함에서도 실상은 성령에 대한 빈곤한 경험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놀라운 신의입니다. 예수께서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메마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단지 ‘간절히 구하라. 하나님께 뺏어가라’ 말하지 않고,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면서 성령을 구하는 우리의 방법은 전인격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와 삶이 떨어지는 것은 삶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 속에서 심령이 움직여진 기도라면 삶이 바뀌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거룩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온몸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고의적으로 범죄 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찬송 부르면서 도둑질 할 사람입니다. 기도가 진실되다면 그런 것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기도는 삶에 묶이고 삶은 기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떡을 빌리기 위해 간청하던 어떤 사람,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떡을 구했다는 사실 속에서 열망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질문해 보십시오. 그렇게 그가 밤중에 가서 멸시를 당하면서 문을 두드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배고픈 상태에서 구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섬김을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발상으로 성령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구하는 동기는 대부분 희생의 동기가 아니라 이기심이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의 이기적이고 영적인 자기만족이나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성령을 구하는 실패는 초대교회에서 이미 거론되었습니다. 그 같은 그릇된 접근에 대해서 사도들이 얼마나 바른 분별력으로 준엄한 하나님의 책망을 던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돈을 주고 성령을 달라고 간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말했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이 성령 받게 하옵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말했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며 시몬이라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 앞에는 사마리아 섬 전체가 복음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시몬도 경험했습니다. 더욱이 13절은 그가 믿고 세례를 받은 후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난 표적과 능력을 보고 놀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성령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 인격적이고 올바른 삶의 동기가 동반되어지지 않은 채 성령을 구했을 때 성령을 받기보다는 저주를 면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사모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 주심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인 빈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성령 구함과 빈곤한 영적인 삶이라는 모순된 신앙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입술로 성령을 찾지 말고 삶으로 성령을 구하라” 우리가 입술로 성령을 아무리 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발이 불순중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우리의 손이 범죄 하는 일에 담그고, 우리의 눈이 성령을 근심케 하고 있는 한 아무리 강청하다고 해도 거룩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 성령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 주를 영화롭게 하며 주와 하나 되어 주 이름 찬양하면서, 그렇게 주의 성령을 내게 주시면 그 성령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인생의 비극과 시련 속에 소망을 잃어버리고 낙망한 사람들을 빛으로 건져내는 이러한 소망을 더하겠으며, 썩어 가는 세상이기에 소금으로, 어두운 땅이기에 빛으로 고난을 받으면서 살겠나이다.’ 하는 태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심령을 다하여 그것을 위해 입술로 간절히 낙심치 말고 오래도록 끈질기게 쉬지 말고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삶으로 신앙고백을 하며, 온몸으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삶으로 아멘 이라고 말하는 여러분들이 될 때 아버지는 약속대로 성령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4. 예레미야의 서책으로 말미암아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단 9: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태어났고 또 활동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들이 쳐들어 와서 유다나라를 다 멸망시키고 많은 귀족과 왕족들을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그 때 함께 끌려간 사람 중에 바로 이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이 다니엘이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왕궁에서 기거하면서 느부갓네살 왕 때에 식민지 지배를 하고 있는 나라에 인재로 삼기 위해서 이들을 훈련시키는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령한 사람이었던 고로 요셉처럼 하나님이 앞길을 열어주셔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오늘 이 구절은 역사가 흘러가서 느부갓네살 왕이 지나고 벨사살 왕이 지나고 다리오 왕이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이 기도에 대해서 너무나 귀한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을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를 하고자 하지만 우리가 아직 기도에 있어서 어린아이와 같을 때 그 때는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또 무엇을 기도해야할 지도 바르게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성숙해지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삐뚤어지거나 굽어진 사람은 기도를 거의 안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신앙이 여전히 삐뚤어져있는 사람은 잘못된 것을 구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기도를 하고 기도에 대한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에 관한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로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움 속에서 어려움을 능가하게 하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누리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기쁜 찬송을 부르며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 속에서 혼탁하고 어지러워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올바르게 알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님의 신령한 교통 속에서 성령의 지도하심을 따라 바른 길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다소 모자라는 사람도 때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지식으로 잘 헤아릴 수 없는 일도 바른 방식으로, 바른 교리를 가지고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종종 때가 늦기는 하지만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올바른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하고 풍성한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고 때우는 식으로 이어가는 기도생활만큼 우리의 영혼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 없으며 기도를 쉬는 것은 모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모든 범죄로 이르는 첫발자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통과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그 교통 속에서 맛보는 사람들은 기도가 십자가가 아니고 고통이 아니고 달콤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잠시는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기도가 끝난 후에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그 평강과 비할 데 없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는 깊은 기도 속에 잠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심으로 얼룩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얼굴을 묻고 부르짖으며 간구할 때 그 얼굴이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빛나는 얼굴이 되는 것도 바로 주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나태하고 박약한 신앙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어두운 신앙생활,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도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생활, 내가 생각해도 질식해버릴 것 같은 신앙생활 같지 않은 신앙생활,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의 기도의 세계의 병폐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심을 하고 우리의 이 기도 생활에 수술의 칼을 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다니엘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신앙의 절개라든지 어떠한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조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참 대단하고 훌륭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다니엘서를 뒤편으로 읽어갈수록 우리는 그 다니엘에 대해서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 나라에 정붙일 곳 없이 생활하면서도 깊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셔서 이방에 노예로 다 끌려가도록 만드시고 본토에 있는 사람이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하도록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주실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18년 전 쯤 처음 은혜 받을 때 교회 자체가 큰 시험에 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생활을 거의 못할 때-백 명 모이는 교회에서 새벽 기도에 두세 명이 나왔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내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을 봤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자기를 바라고 찾는 사람들에게는 주위가 어떨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의 환상을 보여주실 때에 에스겔만은 그 마른 뼈가 아니었던 것처럼 어떠한 비참한 영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주목하는 사람들을 감찰하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이 이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가 망하고 이방으로 다 포로로 끌려가고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회복될 가능성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은 점점 역사 속에서 지푸라기가 되어서 흩어지고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바벨론과 주변의 나라들은 점점 강성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찾아볼 수 없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마치 죽은 개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보호할 길이 없는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악한 세력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는 이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에 다니엘은 가장 비참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뜨거운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얼어붙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 그 비참함과 그 차디찬 시체와 같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얼음과 같이 냉담한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상태를 녹이려고나 하는 듯이 그는 뜨거운 눈물과 타는 가슴으로 마음에 불을 안고 새로운 역사의 미래를 보며 역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기도의 횃불로 홀로 밝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죄악들을 모두 회개하여 씻어버리고 정결케 된 가운데 주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고 나아가서는 몸담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변혁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 교회가 놓여있는 이 나라와 이 민족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그렇게 민족의 진정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수립을 위해서 간구하고 기도할 수 있는 헌신된 종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신앙을 지탱하는 기도 생활에 있어서 조차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쓰고 애쓰나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은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전심으로 힘을 합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이적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의 한 번도 마음을 모두 합해서 기도해 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부흥을 더디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문제가 많은 이 세상에서 문제를 치유하고 상처가 많은 이 땅을 고치는 그리스도 예수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만들고 죄악을 널리 널리 퍼트리는 역할에 쓰임을 받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영적인 삶의 나태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어떤 것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여야 할 것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이 나라와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하여 반역하고 직무를 태만하게 함으로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뛰어나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그 시대의 역사가 어두움을 향해 치닫고 나라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그는 오히려 말하기를 “내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복잡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심각한 범죄요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게 하고 위기 속에서 그 나라를 건져내는 대신에 그 나라를 더 깊은 위기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십일조를 떼어먹은 것에 대해서는 가책을 느끼는 교인들이 더러 있겠지만, 자신이 마땅히 기도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다니엘과 같은 기도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새벽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이 소망은 끊어졌고 갈 길은 어두움밖에 없다고 말할 때에도 홀로 기도함으로 역사 속에 새벽의 여명이 오게 한 사람이고 어두움 속에서도 등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9장을 계기로 해서 다니엘의 기도의 구도가 굉장히 장엄해집니다. 9장 뒤편으로 넘어가면 굉장히 놀라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기도가 점점 깊어져서 나중에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시는 그런 선지자적인 체험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자세로 그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갔는지를 오늘 우리들이 읽은 부분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바벨론 땅에 끌려가서 경건한 사람으로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로 이겼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9장 이후로부터는 그의 기도가 장엄한 우주적인 성격을 띠면서 수천 년을 흘러갈 장엄하고 엄청난 역사의 흐름을 기도로 어거해 나가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 사라진 수많은 임금들이 역사의 주역처럼 느껴졌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만들어 쓴 저 황금의 면류관은 광채를 잃겠네’ 이 세상의 임금들이 역사를 주관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은 역사가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 그 사람들이 역사를 고요히 움직여 갔던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쁘게 움직이고 뛰어 다니는 일꾼들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역사 하는 것 같으나 정말 교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여 교회를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너무 경박해서 그런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일에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의 눈앞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기록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눈앞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화)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밥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사람이 차릴 때가 되면 목사님이 앉는 자리에 나타나서 생색내는 사람-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보이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사람의 눈앞에서 인정을 받던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깊이 있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이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도 다 훼파당하고 성전도 다 허물어 졌고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 도 없이 뿔뿔이 다 흩어졌는데, 하나님은 종종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위기 가운데에서 건져 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으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방의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사람의 심리입니다.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망했다는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백성이 망했을 때 이방의 수많은 나라들은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만백성 가운데 존귀히 여김을 받아도 시원치 않은데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비참하게 조롱당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서 결국 이것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나 한사람이 사자 굴에서 나오고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는 것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이런 역사의 어두움 속에서 고요히 예레미야의 서책을 펴게 되었습니다. 선지서를 펴게 되었습니다. 죽 읽어나가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이들이 망하기 오래 전에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예언을 하신 사건이며 예언을 따라서 이루어진 일인데 예루살렘의 멸망만 예언되었을 뿐 아니라 멸망당한 후 칠십 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예언도 함께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이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섭리의 예언을 깨닫게 되니까 그는 기도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도의 수준이 향상되고 기도의 세계가 달라지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기도가 깊어지지 못하는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기도해야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이 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인지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그들은 그 기도를 힘 있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깊고 간절한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깨달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났는데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를 모르겠다면 둘 중의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뭘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 거짓말이든지 은혜 받은 것이 거짓말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특별한 내용이 메시지가 되어서 자기의 신앙의 깊은 곳에 박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박혔기 때문에 감화를 받고 회개가 쏟아지고 죄악 된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윤허를 받아내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화) 집회에 가서 박수를 치라고 해도 치지 않는 사람과 기도하라고 해도 속으로 중얼거리다 마는 사람, 설교 본문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
그러니 변화될 리가 있습니까? 말씀이 강력하게 달려와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을 발견하고 그 기도의 제목을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기도함으로 그 기도 속에서 자신이 바뀌고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그렇게 살지 못했던 자신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야지 사람이 변화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개꼬리가 3년을 묵어도 황모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3년 5년 믿었어도 추억은 성탄절에 떡국 먹은 것밖에 기억에 없는 사람들,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민족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후줄근하게 살다가 보람도 없이 죽든지 아니면 확실히 예수를 믿고 불꽃같이 살다가 옛날 선지 에녹같이 하나님 앞에 올라가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기도의 세계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성경을 고요히 묵상하고 공부하고 깨달을 때 그의 가슴에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불과 같지 아니하냐 방망이와 같지 아니하냐’ 하며, 예레미야 25장을 볼 때 다니엘의 상식을 부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70년 동안 이 포로생활이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위대한 영적인 회복을 이 백성에게 주시리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때 이 다니엘의 마음은 두 마음이 함께 범벅이 되면서 강물같이 심령 속에 밀려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 주님, 70년입니까?’ 70년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70년 후에 이중에서 만날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장구한 세월 동안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그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마치 옛날 사사시대 때에 이방의 나라들에게 압제 당하다가는 훌륭한 사사를 일으켜서 곧 광복을 얻게 하신 것 같은 그러한 단기간 내의 회복을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이미 상당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이라는 세월을 채우기에는 아직도 캄캄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통한 생각에 접어들게 되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래도 하나님이 이 백성을 영영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금 다윗 시대의 찬란한 영광을 이 민족에게 주시리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과 감격과 슬픔과 설움과 옛날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바르게 살지 못했던 후회들이 강물처럼 밀려들며 다니엘을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떠내려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여러분들의 기도의 생활에 대해서 깊이 불만을 느끼고 기도의 세계가 놀랍게 바뀌기를 사모한다면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과 함께 말씀을 깨달아서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기도를 하게 하고 싶어하는지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혼자 잘난 척 하면서 교만하게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단단해져서 이제는 변화가 안 됩니다. 아집과 독선으로 똘똘 뭉쳐서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생활이나 열심히 합니까? 교회생활이 재미없으니까 세상 속에 빠져서 한발은 세상에 걸치고 한발은 교회에 들여놓고 한참 놀다 불안하면 교회에 한 번 와서 하나님께 문안 인사 한 번 드리고 또 다시 양심에 가책이 올 때까지 세상에 나가서 재미있게 놀다가 한 번씩 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뭐가 변하겠습니까? 기도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꼭 기도를 해야 되느냐,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다 기도지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성경의 어느 곳에서 그렇게 말합니까? 하나님은 입을 열어서 무릎을 꿇고 말로 정리를 해서 호소하며 부르짖고 그러다 안 되면 목이 쉬고 그래도 안 되면 눈물이 쏟아지고 그래도 안 되면 금식을 하며 부르짖기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셨듯이 구하지 않으니까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화) 예배시간에 눈을 내려뜬 채 정답을 말하나 하는 자세로 다리 꼬고 듣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났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기도가 변한다면 그것은 연구대상입니다.
(예화) 찬송 부를 때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벌게 질 정도로 찬송하고 설교 시간에는 코를 골고 자다가 기도할 때는 눈물을 펑펑 쏟는 형제 이야기.
이런 혼잡한 신앙생활들은 모두 사상누각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감정적이지 생각이 있어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소리를 질러도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와 악 쓰는 소리는 사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기도가 놀랍게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기대할 바에야 석고상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나을 정도였던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 무너져서 내려 깔았던 그 눈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며 눈물을 쏟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변화되어서 앞자리에 나와 앉아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하며 찬송 속에 기도의 영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있다가 말씀을 들으니 말씀이 얼마나 가슴에 박히겠습니까? 그러니 껍질이 깨트려지고 신앙이 죽죽 자라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렇게 변하기까지 중간에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전에는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던 인간의 목소리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한 부분을 찌르고 자신을 회개시킨 것입니다. 그 때 깨닫습니다. 깨달으니까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인정하지 않던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할 때 깨트려진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깨트려지니까 그 속에서 향기가 나옵니다. 옥합이 깨트려져서 향료가 쏟아질 때 향기가 방안에 진동한 것처럼 깨트려진 그 속에서 기도의 영이 흘러나오고 인격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영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은혜 받고 나면 맹숭맹숭하게 예배드리다가 졸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오는데 아무런 감동도 없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도 안 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뭐라고 말했는지 생각도 안 나는 그런 예배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하며 신앙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두 가지만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빠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주신다.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오늘 예레미야의 서책을 보다가 기도의 세계가 우주적으로 펼쳐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함께 끌려온 친구 포로들이나 예루살렘에 남겨두고 온 친척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이후에 칠십 년만에 회복시키는 이 사건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이 다시 서게 만드시는 위대하고 장엄한 역사에 대해서 눈을 뜨고 기도를 통해서 그 구속의 역사의 물줄기를 움직이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도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잡념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어느 한 순간에 우리에게 감화를 주시고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터트리십니다. 그런데 이런 것 없이 기도하려고 애를 써도 성과가 매우 미약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집회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기도의 영을 새롭게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오늘 이 다니엘이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깨달으면서 기도의 놀라운 세계를 들어간 것처럼 기도의 세계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여러분들은 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 속에서 기도의 놀라운 제목들을 발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깨달아 가는 그 성숙의 과정만큼 기도도 깊이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만큼 우리의 영적인 삶이 풍요해져 가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니엘이 기도로 들어간 자세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랬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이해가 안 갑니다. 칠십 년 후에나 이 나라가 다시 고토로 돌아온다, 칩십 년 후에나 회복시켜주신다고 역사는 확정되었는데 왜 금식을 하는 것입니까? 금식기도 하루 하면 일 년씩 줄여준다고 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칠십 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울고불고 소리쳐봐야 칠십 년 지나기 전까지는 역사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합니까? 왜 금식하게 되었습니까? 다니엘이 금식 기도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칠십 년을 앞당겨 주시지도 않는데 금식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금식기도해도 자기 눈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볼 수가 없는데도 금식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칠십 년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리라고 한 역사는 하나님의 신적 작정 속에 규정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다니엘은 그 때를 기다리면 이렇게 불신앙과 이방의 사상으로 가득 차 있는 바벨론의 심장부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가장 어두운 역사의 한마당에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없고 희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엄연한 역사의 계획을 하나님 앞에 확인 받으면서 그는 오히려 금식할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 금식은 집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금식을 한다고 해서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삼일만 안 먹어 보십시오. 눈이 빙글빙글 돌고 오일 칠일이 되면 헛것이 보이고 삼십 오일이 되니까 성대한 잔칫상이 보이고 풍악이 울리는 것이 보이더랍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랬을까요? 그런데 그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까? 거의 기도 못합니다. 그저 눈을 감고 “주여”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집중 때문입니다.
금식을 하며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게 되면 모든 욕망이 사라집니다. 먹고 싶은 욕망도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사라집니다. 피를 말리며 금식기도 하는데, 멋있는 옷 입고 싶은 욕망이 생기겠습니까? 성적인 욕망도 사라지고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얽매인 사슬을 끊어주고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힘과 능력이 있다” 하셨습니다. 언어를 많이 토해놓기 때문에 그 기도가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금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몸의 힘이 완전히 빠지지만 눈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그분 이외에는 내가 소망이 없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빠지면서 자신이 아무 것도 못하니까 자신의 비참함과 무기력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금식 기도하다가 혈기부리는 사람 못 봤습니다. 혈기를 부리고 싶어도 기운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금식기도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했습니다. 육신의 아무 관계가 없는 지체들이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마치 세끼 잘 먹고 다니는 사람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금식하고 있다고 떠벌리면서 하는 금식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거의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하나님을 주목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 기도를 하면서 이 다니엘은 혼탁하고 어지럽고 희망이 없는 역사 가운데에서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응시하는 소년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큰 목소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집중된 마음은 기도의 놀라운 통찰을 가져다주고 집중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질 때 성령께서 그 기도를 힘껏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순간 기도했지만, 이러한 집중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열심히 쏘아 올렸으나 허공중에 흩어진 총알처럼 목표물도 맞추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져버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장부에 기록된 기도의 시간과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된 기도의 시간이 다른 이유도 바로 이 집중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이 그 시대의 역사 속에 자신은 비록 그 바벨론 나라에서 부를 누리며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금식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화려한 궁정으로 들어가서 내각의 회의를 하는 곳에 참여하고 있는 다니엘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기름진 산해진미를 왕과 함께 즐겼을 것입니다. 그 때 고요히 식탁에서 일어나서 밖의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얼굴을 대고 흐느껴 우는 이 다니엘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칠십 년 후에 끝날 이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그 칠십 년을 바라보며, 이 긴 세월을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가 되며, 자기와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이 어두운 역사의 한복판에 믿음으로 살며 신앙으로 이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자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그는 마음과 생각의 모든 뜻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회복시키는 역사에 모으고 간구하고 기도하고 탄원하였던 것입니다. 간절히 몸부림치며 집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중하지 않는 수백 시간의 기도는 단 30분의 집중하는 기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집중하는 기도만이 깊이가 가능하고 깊이 있는 기도만이 강하여질 수 있고 강하게 된 기도만이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악한 영과 사단의 세력들을 꿰뚫고 하늘에 우리의 기도의 화살을 쏘아 올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점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회에 참석하거나 기도를 할 때는 집중된 가운데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마음이 산란한 가운데 나와서 무슨 기도가 되겠습니까? 집중된 마음으로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옷을 입었습니다. 베옷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입습니다. 베옷은 슬픔의 상징입니다.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관을 씌우신다”고 성경이 말한 것처럼 이 베옷은 슬픔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다니엘은 그 훌륭하고 화려하였을 바벨론의 아름다운 제복을 벗고 죽음을 상징하게 하는 베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자신과 민족의 죄를 뉘우치며 얼마나 낮아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재를 무릅쓴 사건은 바로 자신이 그 티끌과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이니 주님의 긍휼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기도의 두 번째 특징은 죄에 대한 깊은 후회를, 회개를 동반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손이 짧아서 너희를 구원치 못함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니라 오직 너희의 죄가 너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느니라”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처리 없이 기도의 능력을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 없이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마른땅에서 샘물이 나오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기대인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깊은 기도의 세계로 인도해서 하나님과 온전히 사귀기 전에 먼저 주의 제단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마라’ 주의 제단 앞에 모든 것을 다 바친 후에 주와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기도의 모양은 만들 수 있어도 그 경건의 모양 속에 그렇게 어두움의 세력들을 파하고 역사를 한 손에 잡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의 도우심을 이 땅으로 불러 내리는 놀라운 영적인 능력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 없이 기도가 깊어지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들이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가로막고 있고 어떤 것들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피상적으로 이어가도록 만들어주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사람에게 기도의 능력을 물 붓듯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깊이 체험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했던 것이 회개에 대한 깊은 경험입니다. 그래서 죄를 깊이 회개하고 죄로부터 자신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한 이후에 비로소 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속에서 기도만큼 신비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외모를 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에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기도의 영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놀라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시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좋은 수많은 축복들을 앗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여, 내 자신의 모습을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그렇게 보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우리 자신 속에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그 수많은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눈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각성시켜주시는 역사가 없이는 우리가 죄인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겸비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기껏 기도시켜 놓으면 ‘하나님, 내 옆에 앉은 박 집사와 같지 않게 하심을 감사하옵나이다’ 같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그런 기도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없고 하나님 앞에 지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심오한 각성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피상적이면 기도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기도의 모습은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쳐오르는 성령이 역사 하는 위대한 기도, 그리고 자신의 이 간절한 기도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고 상황을 변화시키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죄에 대해서 아주 철저할 정도의 견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루터였습니다. 그 루터의 친구 가운데 파코미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신이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으니까 루터에게 편지를 해서 “나는 아무래도 오래 못살 것 같으니.” 하니 루터가 답장하기를 “당신은 약하나 하나님이 강하심으로 당신에게 은혜를 주셔서 나보다 훨씬 오래 살 것입니다”하고 파코미우스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파코미우스가 편지를 받아 읽다가 “당신은 나보다 오래 살 것입니다”를 읽은 순간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파코미우스는 루터의 예언대로 루터보다 훨씬 오래 잘 살았습니다. 무엇이 이 일들을 가능케 했습니까? 자신의 죄를 깊이 하나님 앞에 정결케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깊이 헌신된 이 루터가 하는 중보기도는 위대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화)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리며 깊이 기도하고 난 후 변하지 않는 자식의 자는 모습을 보면 미운 생각이 든다-내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철판을 깔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중보기도는 끝난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을 때 그 기도를 받는 사람을 탓하게 되면 그 정신 가지고는 중보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정말 기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 기도를 힘 있고 능력 있게 하는 정결함이 나에게 없다’ 이것을 깊이 뉘우치면서 자신의 이 기도의 능력의 한계를 자신 속에서 찾아야지 변화가 일어나고 자신의 껍질이 깨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 아니겠습니까?
다니엘은 이렇게 깊이 자신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재를 무릅쓰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기도 속에서 깊이 깨닫게 될 때 중보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를 깊이 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인격이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의 깊은 속으로 덜 들어간 것입니다. 기도의 깊은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정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우리가 주 앞에 이렇게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응시하려 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의 큰 긍휼을 응시하려 함이오니 주여 들으시옵소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 어려운 속에서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린 다니엘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진 가운데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지나쳐서 마치 하나님이 자기 손안에 있는 것 같이 말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기도의 세계가 얼마나 경박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에스라는 크고 위대한 일들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이루었고 바벨론으로부터 이 다니엘이 본 이 예언을 따라서 이스라엘 고토로 돌아오는 백성들을 진두지휘하며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 위풍당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율법을 손에 들고 온 백성을 가르치던 모든 학자적인 위엄과 제사장적인 위엄을 모두 버리고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지방에 엎드려 자신을 낮추고 흐느껴 울며 통곡하는 기도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기도로 역사를 움직이고 교회를 움직이고 가정을 움직이고 이웃과 가족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도 속에서 겸비할 정도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이 이런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낮아지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겁니다. 깊이 낮아지십시오. 낮아지다 낮아져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도 사실은 받을 자격이 없는 것과 같은 깊은 낮아짐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오. 이 때에 여러분들은 그 낮아진 곳에서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과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수종 들다 보면 -바빠서 기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더 많이 이행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겨주실 때 더 많이 일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일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름을 내고 자신의 얼굴을 내고 대접받는 일, 교회를 지배하는 일을 하면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참하게 낮추는 낮고 천한 일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거룩한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것같이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고 더 낮아지고 겸비해져서 하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먹어야 살겠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같이 깊이 낮아질 때 그들은 섬길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놀라운 은혜를 신앙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낮아지십시오. 깊이 낮아지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주님,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더 낮추시고 낮아지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소망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간구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놀라운 은혜를 더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다니엘은 결심을 한 가지 하였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했다” 다니엘은 그렇게 오랫동안을 아무도 보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한 후에 나중에 말하기를 그 기도는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던 중 말씀이 나를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도케 하셔서 내가 그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관복을 벗어버리고 그 초라한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도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확실히 강력한 기도는 하나님이 시키십니다.
(예화) 교회 개척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시키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이 원하는 기도의 소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마음먹으신 대로 우리의 기도를 몰아가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를 다 한 후에 뒤를 돌아 볼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이 밀어주신 기도였다’고 말하는 것이지, ‘요즘 하나님이 안 밀어주셔서 기도생활이 신통치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은 결심했습니다. 기도하며 간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동시에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간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물리쳐버리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새벽기도 못나오게 하는 요인을 물리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과 싸우기로 결심을 하고 기도하는 일을 가장 중심 자리에 놓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 결심이 다니엘로 하여금 기도를 시작하게 만들었는데 이 시작은 미약했지만 점점 창대 하여 져서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역사 가운데 누구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 바사가 망하고 헬라가 망하고 로마가 망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이 임할 놀라운 구속사의 전망을 이전에 있던 어느 선지자보다도 뛰어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놀라운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만 열어주신 것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은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싸워서 수많은 상처를 입은 백전의 노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 그러셨겠습니까? 그 전 날에는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치시고 새벽미명에 일어나실 때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곁을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가서 빈들에 나아가서 그 추운 벌판에서 혹은 감람산에서 혹은 요단강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속에 이슬이 내리고 어두움이 물러가고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높이 떴을 때 제자들은 아침 다 먹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깊이 기도하셨습니다.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자 “예수님, 어떻게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질문하자 “강청함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이런 놀라운 위력 있는 역사를 발휘합니다. 그리고 이 다니엘은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요인이 자신의 삶 속에 죄악과 이방의 사상이 가득한 바벨론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싸워서 기필코 기도를 하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굳게 결심할 때 다니엘이 몇 퍼센트는 내가 열심히 하고 몇 퍼센트는 하나님이 밀어줘야 하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는 결심하여 기도하리라’ 하였습니다. ‘어떻든 나는 기도할 것이고 기도 못하게 하는 요인과 더불어 싸울 것이다’ 결심할 때에 다니엘은 깊고 신령한 기도의 사람으로, 영적인 축복이 완전히 끊어진 캄캄한 시대에, 이 사람 하나를 위해 하늘을 여시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홀로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역사를 기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 다니엘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여러분, 조연과 같은 인생 살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용하셔서 무엇인가 일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주역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5.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사 62:1-2上)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는지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믿는 것이 다 믿는 것이 아닌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정말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한 사람이 옛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그 사람이 옛날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이전에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실질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통해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겉모습을 보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새로운 사람이라면 꿈이 변하여 새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느냐는 그 사람의 욕망을 좌우합니다. 또 그 사람의 욕망은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삶은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해 가게 마련입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대개 직업을 알 수 있습니다. 세일즈맨, 공무원...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합니다.
오늘 이사야는 이전에 6장에서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이후로 이제껏 예언을 하면서 살아오다가 62장에 와서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토로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고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을 잠시 점검해 보고 이 말씀을 풀어가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것을 점검 받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기초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말씀이 허공중에 있는 말씀이 아니라 언제나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으로 보여주셨어도 그 말씀을 어떻게 믿고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다행이 우리가 바르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말씀대로 믿으려고 노력을 하고 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참된 신앙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이 세상과 필연적으로 타협해서 삐뚤어지고 뒤틀린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가장 커다란 꿈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여기에 나와 앉아 있는 것입니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주일날이면 외출을 못하는 날이라고 생각을 하고 교회에 묶여서 살아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를 바르게 믿는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꿈이 우리의 꿈이고 우리의 믿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속일 수 있습니다. 못생긴 사람도 수술해서 잘 생긴 사람처럼 보이게 할 수 있고 주름이 많은 사람들은 주름을 펴서 젊어 보이게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숨길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욕망입니다. 이 욕망이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겉모습은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속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옛날 욕망을 가지고 살면 이상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위선과 뒤틀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욕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제가 성경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닷새간의 집회를 통해서 어떻게 기도를 해야지 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가 되는가? 기도의 자세, 믿음의 목표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도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가슴에 타오르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온과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알다시피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예언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또 이 예언은 그대로 역사 속에 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가장 험악하고 관영한 죄악 속에서 신앙의 불꽃이 꺼지고 어두움 속에서 타락을 향해 줄달음질치던 이런 신앙의 역사 속에서 오늘 이 선지자는 자기 속에 있는 진정한 기도의 소망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령한 것만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 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빗나간 영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든지 정직하게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받고 그것을 인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러시아에서 선교를 하고 온 어느 선배 목사님의 이야기-공산당들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20루블만 달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한 순경이 듣고 자기 구역에서 기도하는 것이 발각될까봐 그 돈을 주었다는 내용.
얼마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 거룩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구별이 없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5시 15분에 새벽예배를 인도해야 하는데 5시 3분에 눈을 뜨게 되어 15분 안에 교회에 데려다 달라고 한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이야기-사당동 꼭대기에서 세종로까지.
거룩하고 큰 목표만 고상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빗나간 영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구할 수 있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올바른 기도다, 잘못된 기도다 라고 획일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범죄가 아닌 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소한 것부터 모든 것을 우리가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일용할 양식까지 구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우리는 크고 고상한 일들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작은 일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리심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영역을 넓혀서 아주 작은 일까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점점 자라고 말씀을 먹으면서 성숙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구하기는 구하는데 달라고 하는 종류가 틀려집니다. 어린아이는 딱지 사달라고 엄마 치마를 붙잡고 매달려서 통곡을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갈 나이가 되었는데 여전히 딱지 사달라고 운다면 연구대상입니다. 고상해져 가야합니다. 그런 것이 신앙의 생활 속에서도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신앙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까지는 없지만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크면 클수록 구하는 것들의 차원이 높아지고 의미 있는 것들을 구하는 수준으로 점점 높아져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기도생활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 중 작은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다 구하십시오. 직장의 문제나 사업의 문제나 자녀의 문제나 자신의 버릇의 문제나 심지어는 편안히 잠드는 문제나 이런 모든 사소한 문제도 하나님 앞에 다 기도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크고 위대한 문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자디잔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작은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섬세하게 아뢰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듣고 성경지식이 쌓이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깊어져가게 되면 우리 속의 욕망이 이전과는 다른 욕망들이 생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처음에는 이런 것 저런 것 다 구했지만 점점 신앙이 들어가고 보니까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이 아니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는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서 내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되겠다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깊이 성숙하게 되면 나이가 아직 어려도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틀려지는 것입니다. 철이 안 들면 머리가 희끗희끗해도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점점 깊어지고 나니까, 영적인 수준이 점점 향상되고 나니까, 예전에는 전혀 가지지 않았던 다른 욕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욕망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넘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나만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내가 알게 된 이 신실하고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며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점점 깊어져서 깊이 박혀서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이 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합왕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이 열매도 잘 열고 좋으니 그것을 갖고 싶어 병이 났습니다. 마찬가지고 어떤 것을 사모하는 욕망이 깊은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이 되는 것입니다. 탐심이 나오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소망하다가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마음속에 한이 되고 원망이 되면 그것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일그러집니다. 돈은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고 선한 일에 쓰려고 모으는 것인데 한 번 잘살아보기 위해서 한 맺힌 사람들은 없이 살 때 개처럼 대접받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도 한 번 떵떵거리고 살아보겠다고 한풀이 식으로 돈을 모으는 사람들이 제동이 걸려 돈이 잘 모아지지 않고 사업이 계속 엎어지고 위기를 만나고 가난해지게 될 때 사람들은 속에서 깊은 원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 원망하고 죽는 것입니다.
(예화) 한 서울의 큰 교회 집사가 투신자살한 이야기.
삐뚤어진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것이 그의 인생을 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욕망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인생이 굽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큰 열망을 가지고 그 열망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과 얼굴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나게 만드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욕망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는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지자의 소원은 시온의 공의가 빛나는 것이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온 천하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시온의 공의가 빛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같은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율법은 예루살렘에서” 시온으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이 말미암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는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온은 바로 공의가 빛같이 빛나야 하는 이유이고 바로 이 시온이 공의를 빛같이 발할 수 있는 이유는 시온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하고 예루살렘보다 강성했습니다만, 더 많은 부를 누리고 더 넓은 영토에서 더 많은 나라들을 지배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려주는 생명의 참된 도는 오로지 시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시온을 통하지 않고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참된 생명의 도가 무엇이고 여호와를 아는 참된 신앙의 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관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힘쓴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퍼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참된 공의와 의로움이 가득하게 만들어서 온 세상에 어두움이 사라지고 찬란한 하나님의 의로운 빛이 대낮과 같이 밝혀지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오직 시온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타락을 하든 부흥을 하든 다 쭈그러들었든 어떻든지 간에 희망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하고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진리를 오직 교회에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곳에 가도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그것을 바르게 가르쳐 줍니까? 그렇지 못할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언제나 이 직무로 말미암아 세상의 공의가 빛같이 빛나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가장 큰 재산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집을 높이 짓고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 그것이 교회의 재산이 아니라 언제나 거기 가면 때 묻지 않은 진실한 복음의 선포를 들을 수 있고 깨끗한 무공해 율법을 받을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자신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문제를 위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강남에 있는 한 교회에 집회를 한 후 어느 집사님이 무공해 신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물어왔다-깨끗하고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만 사모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제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하시겠습니까? 물이 나오면 어떱니까? 중요한 것은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로부터 흘러나올 때 그 물을 먹고 하나님의 성도들이 정오의 햇빛같이 공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시온에서 공의가 빛같이 발하게 됩니까? 시온의 공의는 무엇입니까?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그 산에 찬란하고 기이한 빛이 감도는 것이 아니라, 시온은 시온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이 빛같이 살지 아니하면 시온은 빛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흩어져서 세상에 산다고 할지라도 그 흩어진 곳에서 여러분들이 공의를 행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비를 베풀며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이 세상에 보여준다면 여러분들을 보는 사람들마다 바로 교회를 새롭게 보고, 교회를 새롭게 보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오늘 우리에게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빛나기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교회는 더욱 빛을 발하여야 하고 최악의 세상일수록 최상의 그리스도인들의 출연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이 악하고 세상이 타락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롭고 바르게 살아서 시대를 거스르고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로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는 사람들은 누가 있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기 싫고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고 혼탁한 세상에 맑은 무공해 신앙을 가지고 나타나서 어두운 세상을 나 때문에 더 더럽히는 대신에 오히려 이 어두운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실패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공의를 드러내기는커녕 더욱더 그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어두워지는,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며 살아가는 슬픔 많고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무엇으로 빛같이 찬란하게 비추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까? 그것은 그 백성들이 시온으로부터 나오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면속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하수같이 공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교회가 흘려보내기를 원하지만 아무리 흘려보내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각 성도들 안에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가 흐르고 있지 않은 한 세상의 교회를 통해 그런 공법과 정의가 물같이 하수같이 흘러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각 사람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 강물이 모여서 더 큰 강물을 이루고 강물은 거대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놀라운 역사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최고의 기도의 제목은 시온이 시온에만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빛으로 나타내는 그러한 공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죄로 가득찬 사람이 시온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공의를 사랑하고 주와 함께 겸손히 동행하기를 원하는 변화는 심령의 사람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교회가 진리를 가지고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커다란 기도 제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천막이든 궁궐이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거기가 곧 천국이고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전혀 이스라엘의 혈통을 갖지 않은 이방나라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열두지파 속에 다 집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 출신인 갈렙도 유다지파에 소속된 사람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헷사람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훌륭한 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루살렘을 통해서 구원이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하나님, 그리고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홍해를 가르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고 요단강을 말리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내 인생과 관계있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일하게 그 예루살렘의 백성으로 차별 대접받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구원은 구약시대든지 신약시대든지 예루살렘을 통하여 말미암았습니다. 오늘날도 이 놀라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이 복스러운 구원의 역사는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도하기를 그치면 세상은 구원이 오지 않습니다. 교회는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맡은 곳입니다. 선지자는 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전의 모든 인생을 다 태워서 없애버리고 불꽃과 같이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디서든지 횃불을 치켜들면 그 횃불이 있는 곳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예루살렘의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알리는 소식으로 나타나서 매주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이런 영혼의 변화의 역사, 그리스도의 구속의 놀라운 역사,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훌륭한 건물을 짓거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디서도 할 수 없는 일, 인생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바꿔놓는 이 일을 교회가 능숙하게 행할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죄인을 불러 모으고 나온 죄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앞에 회심시키며 자기의 죄로 인하여 심오하게 애통하게 만들며 뉘우쳐서 좋으신 하나님 앞에 새로운 꿈과 거듭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을 수용할 수 있게끔 교회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 하는 이 세상은 그 고통에 대한 이유로도 수많은 원인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 고통의 원인이 물질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 고통의 원인이 독재자의 잘못 때문이고 독재정권의 포학한 불법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결핍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너무나 풍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허무주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생의 고통의 이유를 말하고 해답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고통 하는 인생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고통 하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정답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어져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고통 하는 이 세상을 건지고,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 비결은 각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예수 안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을 사형시키고 죄지은 사람들을 오랏줄로 묶어서 어두운 감옥 속에 처넣는 것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나라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가 이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애끓는 음성으로 그 시대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말합니다. 방탕과 사치함과 투전과 간음과 살인, 이 모든 것들은 광야에서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 선지자의 마음에 한없는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그 어두운 역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한없이 고통 하는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과 빗나간 관계 속에서 임박한 심판의 재앙을 눈앞에 두고도 여름이면 여름별장 겨울이면 겨울별장, 상아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아침을 맞이하고 부유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점점 잊어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비록 강건한 나라였고 놀라운 부를 소유하고 수십 년만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위대하고 영명한 군주에 의하여 국력을 최고도로 신장시키고 국제 사회에서 그 지위가 높아진 때였습니다만 이스라엘의 국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하여 무너진 신앙을 고쳐줄 수 없었습니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료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금으로도 은으로도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사랑을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나라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의 할 일이 있고 교회의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나라가 할 수 없는 일, 곧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죄와 사슬에 얽매어서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생들을 자유케 하고 해방시켜주는 복음의 섬김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옥 속에 있습니다만 더 많은 사람들은 옥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옥속에 있는 사람보다 더 부자유하게 사슬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옥밖에 있습니다. 죄의 사슬에 매이고 인생의 정욕과 탐욕의 사슬에 매여서 영혼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날이 살아가는 인생을 통해 심판의 불길로 다가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구원,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은혜밖에는 그런 비극으로부터 그 인생을 건져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찌하든지 간에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개척교회를 하다보면 어려운 일도 많고 특히 물질적인 궁핍으로 가난하게 삽니다.
(예화) 교인이 3명인 개척한 지 6개월 된 교회가 있었는데 2년 후에 물어보니 교인이 조금 오기는 했었는데 지하실이라 물이 나오니 다 떠나고 교인이 2명-본인과 아내-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타는듯한 열망을 오늘 이사야의 마음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마음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기도제목은 예루살렘에서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횃불 하나를 들고 들에 나가면 십리 밖에서도 그 횃불이 다 보입니다. 담배불빛이 4키로 밖에서 보인답니다. 그러니 횃불은 오죽하겠습니까? 모두 볼 수 있도록 지켜줍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사모하는 것이 선지자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인데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에 있는 우리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잠깐 동안에 급성장한 교회에 가게 되어 그 목사님께 가르쳐달라고 하니 “교회가 부흥 하지 않는 것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바깥에 안 믿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바깥에 추수할 곡식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교회에서 사례금 받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서있는 것은 가득 차기 위해서 서있는 것입니다. 수가 늘어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무리들이 늘어나게 하는 일들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해서 선지자가 이렇게 타는 것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처럼 또한 우리들도 이렇게 기도해야지 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이 줄고 있습니다. 몇 명씩이라도 늘어나고 있는 교회는 전국에 있는 교회 가운데 20%도 되지 않습니다. 줄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바로 예루살렘의 구원의 횃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꺼져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워도 사람들이 교회의 생명을 인하여 고민하고 마른 뼈와 같은 마음들을 새롭게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새벽기도는 언제나 교역자들이 몇 명이 나와서 드리거나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잠 안 오는 새벽에 와서 중얼거리는 시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나 이틀 계속된다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몇 년씩 계속된다면 그것은 교회의 생명이 사라지고 더 이상은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시기를 사모하는 구원의 역사를 앙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속 전도를 해서 구원 받는 백성들의 숫자를 늘려 가는 교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눈물 나는 기도의 사람들이 교회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교회가 죽어 가는 것 같은데 교회에 수많은 영혼들이 매주일 들어와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교회가 서있는 이유는 추수하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해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이 교회, 예루살렘만이 인간의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려 주어서 교회의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의를 강물과 같이 흘려보낼 수 있는 영적인 정화의 능력,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횃불과 같은 타오르는 구원의 불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살아있는 구령의 역사를 가진 교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 제목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교회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고 이런 교회들을 통해 한없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생명처럼 귀중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어떻게 생명처럼 귀중한 교회의 이 본질적인 사명을 교회가 감당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잠잠치 아니할 것이요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잠하지 않겠다” 그리고 “쉬지 않겠다”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속에 교회로부터 흘러가고 있는 공의의 물줄기, 정의가 하수와 같이 공법이 큰물같이 -히브리어에서 ‘하수’는 바닥이 끝이 없는 심연을 가지고 있는 전설 속에나 나타나는 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로부터 흘러가는 공법과 정의가 졸졸 흘러갈 때는 막을 수 있으나, 그러나 실에 돌멩이를 달아도 끝없이 내려가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가진 강이 공법과 정의를 흘려보내고 있다면 댐으로도 막을 수 없고 보로도 막을 수 없고 무엇으로도 그물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놀라운 물들을 흘려보내는 교회는 언제나 소수입니다.
교회가 시온의 공의를, 그리고 시온의 공법을, 시온의 정의를 흘려보내고 빛나게 할 때 언제나 그것을 덮어버리고 막아버리고 가리우게 하고 말라버리게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들이 교회를 에워싸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악령의 역사가 가장 강력한 곳은 사창가도 아니고 투전판도 아닌 ,성령이 충만한 교회의 주변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영적인 전선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싸움으로, 공의가 빛같이 시온을 통해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수많은 궤계들을 가지고 교회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술수로 교회가 이런 공의를 흘려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구원의 횃불을 높이 쳐들어서 모든 사람이 그 횃불을 주목하고 구원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시를 뿌려놓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혼미한 어두움의 그림자를 드리워서 복음의 광채가 드리우지 못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악한 세력들의 역사는 졸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충성스럽고 헌신된 각오를 가지고 이 일들을 총단결하여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왕국에 악한 귀신들이 서로 편 갈라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교회에서 성도들이 한마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한마음이 되어서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며 시온의 공의를 말려버리고, 시온의 공의의 햇빛을 어둡게 가리우고, 타올라서 만천하에 비추는 예루살렘의 구원의 횃불을 끄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투쟁과 싸움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시온의 공의의 빛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잠잠치 아니하며 예루살렘의 구원의 횃불이 악한 세력들에 의하여 꺼지지 아니하도록 쉬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께서 계속해서 시온의 공의의 빛을 대낮같이 밝게 하시며 타오르는 예루살렘의 구원의 횃불에 기름을 부으시도록 간구할 수 있는 그런 기도의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일에 참여할 것입니까? 선지자 이사야를 불렀던 하나님이 또한 동일하게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불렀던 하나님은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가며 우리가 누구를 보내며 그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렇게 부르실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날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이 “누가 꺼져가는 시온의 공의의 빛을 더욱 찬란하게 하기 위하여 잠잠하기를 쉬지 아니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예루살렘의 구원의 횃불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되는 구령의 역사를 위하여 쉬지 않고 부르짖을 것인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할 것이며 누가 나의 영혼을 위하여 부르짖을 것인가?”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일은 세상에서 대접받는 일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닙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을 위한 일꾼들을 하나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작게 여겨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크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를 개혁했던 존 낙스는 결국 정치적인 변화로 말미암아서 거의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친구가 존 낙스 곁에서 그의 행하는 바를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고요히 정원을 거닐다가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중얼거리는 기도이더니 조금 있다가는 부르짖는 기도가 되고 그 다음에는 절규하는 듯한 기도가 되더니 그 다음에는 기도가 언어를 잃어버리고 심한 아픔으로 인하여 신음하는 소리로 변하였습니다. 부르짖는 소리는 없어도 끙끙거리는 심한 신음소리와 함께 언어를 잃어버리는 고통의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루 평균 여덟 시간 가까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또렷한 기도의 소리를 스코틀랜드의 개혁자이던 존 낙스의 등 뒤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님, 내 조국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죽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교회의 역사를 바꾸고 타락한 카톨릭의 땅에 역사적인 장로교회가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교회에 하나님의 거룩한 종교개혁의 공의가 빛같이 타오르고 올바른 하나님의 진리의 횃불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기도, 시온과 예루살렘을 위한 몸부림치는 기도는 교회를 움직이고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지위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우리의 모든 영광은 불꽃같이 사라져가나 주의 나라와 영원히 서있을 하나님의 교회가 견고히 되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의 눈물로 초석을 놓고 기도하기 위해서 자신의 헌신의 진액을 짜내는 기도로 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서 그 이름이 성문에 새겨질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빛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만방에 횃불같이 드러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아무래도 좋다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사람들을 하나님은 오늘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영광을 사모하는 사람들, 세상에서 보상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예루살렘의 구원이 빛같이 횃불같이 드러나서 주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서는 이 일들을 위해 이 세상에서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을 오늘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 주춧돌을 놓고 벽돌을 쌓고 내부 장식을 하고 첨탑을 올리고 십자가를 꽂아서 보이지 않는 교회로 세상의 수많은 권세들이 흔들 수 없는 여호와의 거룩한 구원의 성으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경회를 마치면서 저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사용하소서. 내가 쉬지 않고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빛나기를.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 부르짖고 간구하겠나이다” 하나님 앞에 응답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며 이런 응답의 정신으로 일평생을 살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영광스러운 믿음의 증인들로 기록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거기 계시며 응답하시는 하나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