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지혜와 성령
(2008년 설교모음)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복음 지혜와 성령 5 (2008/07/30, 수요예배)
1. 복음의 능력과 지혜(고전2:4-7) 2008.4.30 수요예배 1
2. 복음지혜의 본질(1)(고전2:6-7) 2008.6.11 수요예배 9
3. 믿음으로 신학함(고전2:4-7) 2008.6.18 수요예배 19
4. 복음과 인간의 영광(고전2:7) 2008.6.25 수요예배 28
5. 복음지혜의 본질(2)(고전2:8-10) 2008.7.30 수요예배 38
6. 복음지혜와 성령(고전2:10-12) 2008.8.13 수요예배 50
복음 지혜와 성령 6 (2008/08/13, 수요예배)
7. 은혜세계와 성령(1)(고전2:12) 2008.8.20 수요예배 66
8. 은혜세계와 성령(2)(고전2:11) 2008.9.3 수요예배 78
9. 복음과 신령한 분별(고전2:13) 2008.9.17 수요예배 87
10. 복음에 대한 무지(고전2:14) 2008.10.1 수요예배 96
11. 신령한 자의 판단(고전2:15) 2008.12.10 수요예배 101
1.복음의 능력과 지혜
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4-7).
Ⅰ. 들어가며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사실 전도할 때 이렇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이 고백은 고린도 교회가 유일합니다. 그러면 늘 전하는 복음이고 늘 하는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인데 왜 하필이면 사도는 이때에 이렇게 두려워 떨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의 전도 행적을 되짚어 보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직전에 아데네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아데네라고 하는 곳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입니다. 그 도시는 그야말로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인류의 역사 이래로 가장 이성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살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특히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살았던 히랍 철학자들은 이후에 인간이 고민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그리고 철학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아마 이후에 인간의 철학의 모든 역사․사상의 발자취는 그때 그 사람들이 던져놓은 질문에 대한 답이거나 또는 해설일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가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죠.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철학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즐겨 경청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혹시 그 의견이 자기와 다를지라도 일단은 들어주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살아왔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토양을 흠뻑 마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이 사람들이 아주 놀라운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철학의 논변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이 세상 어디에 있는 모든 것들도 그 하나님에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에서 바로 이 아데네에서 행하는 연설 그 자료들을 추적해 가면 히랍에 희곡과 여러 작품들에서 일치를 이루는 병행들이 나타납니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데네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 강한 유혹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들 중에 스토익학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역사 속에서 스토아학파 철학자 사람들입니다. 불교 사상 비슷하게 이 우주 전체와 인간 그리고 이 모든 사물들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범신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여러분들이 잘 하는 아우렐리우스 같은 사람... 잘 모르시겠죠? 여러분들이 예전에 본 영화 글라디에이터에서 하얀 수염이 많이 난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같은 황제도 이 스토아 철학에 심취한 황제였습니다. 그가 남긴 명상록은 지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책이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바울이 논쟁했던 또 하나의 사람은 에피큐리오스 학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때에 쾌락주의자들이라고 배운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학자들과 논쟁을 했을 때 늘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언변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과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에 힘입어 존재하는 것이라는 소위 얘기하는 신 존재의 논쟁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물론 나왔지만 지극히 소수였고 예전에 사도바울의 전도 행적에서 보았던 그 회중들을 찝고 지나가는 강력한 복음의 역사 죄인들을 찔러 회계하게 하고 죄를 책망하며 중생케 하는 평만하고 놀라운 역사는 아데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여러 주석가들이 주석하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Ⅱ. 사도의 결단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그리고 고린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라는 곳은 아데네 못지않은 도시입니다. 여기에는 항구가 있는 도시이고 항구 그 앞에는 아고라라고 해서 커다란 국제 무역시장이 서는 곳이었습니다. 그 무역시장에는 상품만 실코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문물을 함께 실코 들어오는 거죠. 그리고 또 다른 먼 나라의 소식까지도 들어오게 되죠.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이미 유명한 굉장히 커다란 항구였기 때문에 많은 지역사람들이 활발할 교통을 하는 곳입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보면 그 사람들이 모여서 연설을 하고 연설을 듣던 그 터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융성했고 그리고 자기주장에 따라서 학파들을 형성하고 무리를 몰고 다녔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을 은혜 떨어진 고린도 교회가 배우고 그리고 교회에서도 똑같이 파장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죠.
사도바울이 아데네와 유사한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떨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아 그렇다. 이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아주 현란하게 복음을 철학적으로 설명을 해도 이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더라.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오는 두려움과 떨림이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린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생애적인 아주 위대한 결단을 한 거예요. 그게 뭐냐면 “내가 너희 중에서...”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제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인 너희에게 가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고 너희를 목회하는 그 동안 나는 예수그리스도와 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노라 고백했던 거죠. 그러면 옛날에는 사도바울이 이것도 저것도 알고 싶어서 안달하던 사람이었습니까? 이전에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 찬란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서 그는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나면 인생이 뒤집어 지지만은 이 사람은 좀 달랐어요. 뭐냐하면 지식이 많이 있던 사람이었어요. 유대종교에 대한 해박한 이해, 로마인으로서 정치와 문화와 경제, 세계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이해,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치하에 살면서 그 모든 철학과 그리고 히랍에 발달한 모든 학문에 대해서 꿰뚫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초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계의 초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니까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찬란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우주, 하나님, 세계, 역사, 인간, 정치, 문화, 사상, 철학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아주 선명한 이해를 갖게 되었던 거죠.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그리스도 예수 그 한 분을 중심으로 세계가 창조 되었고, 그 분 중심으로 세계가 붙들려 있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창조 하는 세계는 그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간다 라고 하는 확고한 예수 중심에 역사관, 우주관, 인생관을 보게 되었던 것이죠. 원래에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늘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혀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자기를 불러주신 그 하나님 자기를 그 모든 죄가운데 용서하여 죄인 중에 괴수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감격해 하는 착한 성도였습니다.
Ⅲ. 결단의 의미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그런데, “그리스도와 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노라” 무슨 의미냐 하면요. 우선 여기서 두 가지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면 “내가 너희 중에서...” 누굽니까? 고린도에 있는 예수 믿을 사람들,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되죠. “내가 너희 중에서...” 무슨 뜻이에요? 너희에게 철학이 있느냐? 사상이 있느냐? 놀라운 학문이 있느냐? 그래서 너희들은 서로 자기의 사상과 학문이 높고 참되다고 주장하며 학파를 형성하고 그리고 편당을 만들고 그리고 서로 지식을 겨루지? 그런 너희들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내가 있는 동안에... 그 뜻이에요. 여기서 우리들은 아주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있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 필요했고 그리고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갈 때에는 또 다른 것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그게 아니죠. 그러면 무슨 의미 입니까?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그것이 그들을 복음화 하는데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할 너희들이 어느 문화에 사는 사람이든지 얼마나 높은 철학과 사상을 가진 인간이든지 또 너희들이 어떤 학문을 숭상하는 사람들이든지 이러한 복음을 전파 받을 지역과 사람의 다양성 보다는 그들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우리 구주 예수그리도와 및 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 그것을 사도바울이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사상이 그러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반성이겠습니까? 아데네에서 그렇게 못했다는 것이죠. 아데네에 그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걸출한 철학의 사상을 가진 학파들 그리고 그 사상의 거두들 앞에 섰을 때 자기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잠시 확신이 약해져서 아니면 그들이 매우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또 다른 가공된 무엇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와 그리스도 예수 오직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오직 이것. 예수그리스도와 및 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그것으로 승부하지 못했던 것을 깊이 자책하며 사역의 본질로 돌아간 것이죠. 여기에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음이라 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모든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학문이나 이런 것들은 다 쓰레기처럼 갈아서 다 폐기처분 해버렸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똑같은 표현을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사용하고 있지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그리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죽 기록을 하면서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며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랑한다고 하는 말과 동의어 예요. 아는 건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아노라. 무슨 뜻이죠. 내가 너를 소중히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하는 이 말은 경험적인 사랑과 경험적인 지식의 통합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알기 쉽게 해설을 하면 이런 뜻이 되는 거예요. 내가 다른 도시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너희 고린도 사람들 중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 아무것도 사랑하고 또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겠노라... 그 뜻이에요.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해 그리고 너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것이 나에 마음속에 뜨겁게 와 닿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도록 결심하였노라. 그 뜻이에요. 그것이 사도에게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사역에 전환이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그가 고백하는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이에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전도에 있어서는 지혜가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이 지혜는 철학적인 가리키는 거예요. 내가 내 말과 전도함이 그렇게 지난번에 아데네에서 실패했을 때 했던 것처럼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기를 원하였다 이런 뜻이죠. 열심히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이 만물들이 존재할 수 있겠으며 그 분이 붙들고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신다면 어떻게 살며 기동할 수 있겠냐고 논변을 해서 그들을 설득했지만 그러나 설득되었다고 해서 믿게 된 것은 아니예요.
여러분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둘이 싸워요. 그런데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워낙 말을 잘하고 아는게 많아서 신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을 그냥 씩씩거리며 할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래 내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의 존재를 믿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거죠. 쉽게 말해서 내가 모른다고 해서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내가 따라가는 것은 아니죠. 사도 바울이 그것을 경험한 거예요. 그래서 절대 인간의 이성 하나만을 설득하는 것을 통해서는 그가 도저히 핑계를 댈 수 없도록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알고 동의하는 것은 영혼의 변화가 아니예요. 그래서 내가 알고 동의하는 것은 나의 행동도 바꾸고 생각도 바꾸고 마음도 바꿀 수 있죠. 예를 들자면 매일 받아먹는 생수가 있는데 그 생수가 질이 굉장히 나쁜 지하수라 그래서 거기서 불순물이 검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많은 변화가 있겠죠. 우선 그 물을 안 먹겠죠. 차라리 수돗물을 끓여 먹겠죠. 감정에도 변화가 오죠. 그 생수 만든 사람을 되게 미워하겠죠. 그리고 여태까지 돈 주고 사 먹은 생수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청구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본성과 영혼의 변화는 아니예요. 그러나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그 때에 소유하게 되는 그 믿음은 마음과 본성의 변화일 뿐만 아니라 영혼 전체의 변화예요. 영적인 일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 세상의 지혜로운 철학과 사상의 설득으로서는 인간에게 이것을 가져다 줄 수없는 거예요.
더욱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에 마주하던 사람들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지금으로 말하면 생불신자들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기를 원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어디에 역사하기를 원했던 것이죠. 전도예요. 전도. 그건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전도함이..’ 그랬습니다. 내가 불신자인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전도할 그 때에 성령의 나타남과 큰 능력이 역사하기를 원했노라. 뭘 원했을 까요? 아데네에서 이룰 수 없던 그 무엇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죠. 그게 뭐죠? 믿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 창조하신 것 다 알고, 만물이 하나님 때문에 기동한다고 할 때에 아무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어도 변화되지 않았던 그들의 영혼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이 고린도 교회에 와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참으로 영혼들이 변화되고 구원을 얻는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분이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였다는 사실을 굳게 믿도록 그래서 영혼이 변화되고 전 본성이 바뀌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에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게 되는 그런 사람들로 전폭적인 인생의 변화를 원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사도바울이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아데네에서 입증이 되었어요. 그러면 여기서 떨었다는 것은 결국 무엇 때문 이죠? 내가 전하나 성령의 나타나심이 없다면 그 분의 능력이 없다면 나의 이 유료한 말과 그리고 사상과 정교한 이 이론이 아무 쓸데가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영혼들은 구원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고 그리고 여기에 교회는 설 수 없게 될 텐데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심히 약하며 두려워하며 아주 많이 떨었어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나는 힘껏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못 박히신 것을 말하지만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초자연적인 진리 그러나 영혼을 바꿔놓고 본성을 변화시키는 이 위대한 이 능력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나타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역사하게 하심으로서만이 가능하다는 고백이죠. 그래서 그는 관록이 있는 사도답지 않게 고린도에 와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자 모였어도 그는 고린도 사람들 앞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어디서도 관록이 있는 사도 죽은 자도 일으켜 살리는 능력의 사도 같은 늠름함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부서진 마음이 되어서 아데네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었죠. 이렇게 한 이후 그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사람의 아주 유려한 언변과 뛰어난 학식에 의해서 설득 당했기 때문에 갖게 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바꾸어 놀 수 없도록 하나님이 심으신 그 능력으로 말미암은 믿음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것이에요. 단지 이성으로 설득되어서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은 더 뛰어난 논리가 들어오게 되면은 그것을 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초대 교부들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잘 들으세요.. 이단에 미혹되는 사람들을 이런 원리에 의해서 다루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참된 믿음은 결코 참된 진리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설득 되서 포기될 수 없다. 다시 말할 게요. 참된 믿음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설득되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는 거죠. 왜 그럴까?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영혼의 작용이에요.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영혼의 작용이에요. 영혼 그 자체가 성향이 바뀐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것을 믿었는데, 내가 믿었지만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믿었던 것을 버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가리킨다고 그렇게 일관되게 해석을 내렸던 거예요. 그래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절대 배교를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만약에 배교를 했다면 그것은 그가 이전에 아무리 헌신되고 탁월한 믿음을 가진 증거를 보였어도 그것은 참되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거꾸로 그렇게 확증시켜준다고 봤던 것 이예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잘 들으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혼의 성향이 이것이냐 거듭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변화된 영혼과 본성을 갖느냐 둘 중에 하나예요. 기본적으로. 물론 자기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아 내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는데 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도 한눈을 팔면서 세상도 참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전체적으로 흐르는 이 주도적인 성향은 딱 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든 자기를 사랑하든 이 인간을 하나님이 깨뜨려서 영혼을 변화시켜서 성향을 고쳐놓으셔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향으로 바꿔놓았는데 영혼에 이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바꿔놓은 이런 영혼을 누가 말로 했다고 해서 휘까닥 하고 뒤집어 져가지고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사상에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그럼 만약에 그렇게 됐다면 맨 처음에 있던게 믿음이 아니라 생각이 설득되어서 바뀌어 진 것을 다시 바꾼거죠. 왜냐하면 사람의 본질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같은 본질 안에서 인간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이해 안가요? 가잖아요. 불신자라도 돈 펑펑 쓰고 사치하고 살다가 돈 다 털어먹고 완전 알거지가 되어서 친척들에게 발로 치이고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하면 에이씨 이놈의 더러운 세상 그러고 이를 악물고 피를 흘리면서 돈을 벌면 수전노가 된다는 거예요. 구두쇠가 된다 이 예기예요. 얼마나 놀라운 변화야 그런데 기본 바탕은 하나도 안 변한거야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거란 말이예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는데, 누군가의 설득에 의해서 그것이 뒤집혔다고 하면 그건 참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철학의 지혜 사람의 사상의 언변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때로는 우리의 본성의 일부도 바꿀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우리의 영혼을 바꾸어서 다시 세상을 향하게 하거나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거나 이런거는 이 세상에 있는 학문과 이 모든 것들로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아까 얘기한게 참된 믿음은 결코 설득되지 않는다. 그래서 말이죠. 오늘 다 못해요. 다음 주에 또 할텐데 말이예요. 잘 들어봐요. 그래서 저는 말이죠 이제 교육관에 댁이 있잖아요. 거기에 토요일 같은 때 보면 애들이 올라와요. 그러면 이제 안녕하세요 그러구 인사해요. 그래, 너는 몇 학년이냐? 중학교 3학년이에요 그래요. 그래 너 어디가냐? 목사님 오늘 우리 기도회 해요. 그래서 우리 기도하러 나왔어요. 어 그러냐.. 그래서 이렇게 보면 세상에 있는 중3 애들하고 틀려요. 얼마나 되바라지고.. 오늘아침 뉴스보니까 충격적인 뉴스가 나오더라구요. 대구에서 5, 6학년 남자애들이 2, 3학년 여자애들을 데려다 놓고 TV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성행위하는 장면을 연출하라고 해가지고 애들 100여명을 성추행을 한거예요. 걔네들은 그런거 안합니다. 회심한 애들은 안 그래요. 혹시 그런데 눈을 팔리다가도 교회와서 찔리지요. 그리고 설교 듣고 회계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또 늦게 예수 믿었다고 너무 기죽지 마시고 잘 들어 보세요. 어려서 이성의 능력이 모자랄 때는 진짜 믿어지지 않으면은 절대 안 믿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근데 나이가 들면 인간의 묘수에 대한 생각이 많아요. 이게 믿어져서 믿어진 건지 설득이 돼서 믿어진 건지 오락가락할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회심한 사람과 회심안한 사람은 나이가 어린나이로 내려갈수록 그 구분선이 뚜렷해져요. 확실해요. 그런데 여러분 어른들은 애매하잖아요. 나이가 많이 들수록 점점 애매해져요. 그러니까 어렸을 때에 회심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그런 애들 이렇게 보면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요. 너무너무 감사해서요. 지금 이런 시기에 어느 애가 뭘 준다고 토요일날 나와서 그 컴컴한 방에서 기도회를 하겠다고 버스 두 번씩 타고.. 그 부모가 시킨다고 하겠어요? 돈 준다고 하겠어요? 그거예요. 그것이 가슴에 콱 새겨지게 될 때에 어린아이들의 가슴에 새겨지게 될 때에 이게 안 지워지는 거야. 제가 어렸을 때 4학년때 자전거를 배웠어요. 뭘 하여튼 배우면 꼭 하고 말아야 하는 직성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애들 자전거가 있었겠어요? 그런거 보지를 못했어요. 어른자전거 하나 몰래 꺼내가지고 와서 타고 다니는데, 얼마나 잘 넘어지는지 이상하게 쓰러질려고 해서 반대쪽으로 돌리면 항상 넘어지는데 여름이니까 여름방학에 시골에 내려갔을 때니까 반바지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넘어지면 피가 나는 거예요. 그래도 지독하게 탔어요. 근데 넘어졌는데 이번에는 좀 심하게 다쳤어요. 철조망에 넘어졌어요. 철조망에 콱 넘어졌는데 다행히 얼굴은 안 다쳤는데, 왼쪽 다리가 총알 맞은 것처럼 푹 파인거에요. 지금도 보면 이만큼이 푹 파였어요. 몇 십년이 지났어도 파였어요. 그런 것처럼 어렸을 때 강력한 인상을 가지고 팍 들어와서 내가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노라. 나는 주 예수그리스도요 그리고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노라. 그것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콱 믿어지게 될 때에 무엇으로도 설득 안 되는 거에요. 그걸 뒤집어 놓을 수 없는 거에요. 절대로 뒤집어 놓을 수 없는거에요. 잠깐 흔들리는 것 같아도 뒤집어 놓을 수 없는 거에요.
Ⅳ. 결론과 적용
그러면 마지막으로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요즘에 그 동안 우리 열린교회 목회해오던 걸 반성하면서 하여튼 가치가 좀 적고 이런 일들을 대폭적으로 줄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요번에도 4월달 부터 무슨학교 무슨학교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6월에 다 끝내라고 그랬어요. 한꺼번에 다 몰아서 해버리고.. 안 할 수는 없잖아요. 해외 아울리치 갈 테니까 선교학교 해야 되고 전도해야 되니까 전도학교 해야 되잖아요. 전도하면 사람 올 테니까 양육학교 해야 되잖아요. 이건 어쩔 수 없잖아요. 이거 하고 그 다음에 다 정리해라. 그리고 이제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그 단순한 신앙생활을 하자. 오늘도 보세요. 교회에 어떻게 하는게 그렇게 많은지 3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서 와보면 눈이 현란할 거에요. 30년 전에는 교육관도 별로 없었어요. 교육도 별로 안 했다구요. 예배드리고 그냥 가는 거죠. 뭐 이렇게 복잡한 학교가 많겠어요. 그죠? 그런데 이렇게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어요. 결국은 이유는 하나에요. 그리스도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교회를 찾는 불신자의 가슴속에 새겨지고 이미 신자들의 가슴속에 다시 한 번 새겨져서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될 때에 그 때에 사실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죠.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많이 해도 거기서 가르쳐주는 어머니가 되는거는 책가방 끈 길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에요. 그랬더라면 교회 안하고 어머니 사설학원 다녔겠지. 근데 어떻해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이 받은 고난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 그리고 인간이 참된 본분과 도리가 무엇인가를 내가 십자가에서 깨닫게 될 때에 내 아내를 용서할 수 있고 내 남편을 용서할 수 있고 우리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 엄마가 나에게 상처를 많이 줬지만 우리 엄마가 얼마나 가슴아픈 세월을 살아왔는지 알고 끌어안을 수 있는 거에요. 이게 생겨나는 거에요. 이제 5월이 다가오죠? 또 이제 우리들이 한창 은혜를 받아야 되겠죠? 근데 보세요. 언젠가는 한 번 젊은 청년인데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 가슴에 한이 맺혀 있어요. 그 증오하는 이름. 찾아가지도 않아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어요. 그리고 깊이 용서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부모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를 했어요. 자, 아들학교 과정을 몇 번 수료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책을 몇 권 때면 일어나겠어요. 그렇게 생겨날 일이 아니에요.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 강력한 능력으로 이 일들이 가능한게 되는 거에요. 이게 교회 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에 교회는 주님의 세워준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요. 그럼 뭐가 필요할 까요? 다음시간에...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5 (2008/07/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6 (2008/08/1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1 (2008/12/10, 수요예배)
2.복음지혜의 본질 (1)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Ⅰ. 들어가며
가정시리즈를 시작하기 직전에 고린도 전서 2장 4절부터 7절을 본문으로 복음의 능력과 지혜라는 설교를 하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갈 때에는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와는 다르게 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을 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그 직전에 전도여행이 바로 아테네였고 아테네에서 그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철학자들, 그리고 또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과 함께 신이 존재한다는 유신논쟁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논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분명히 이겼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만 예수 믿을 뿐이었고 이 사건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깊은 각성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제 고린도에 들어오면서 똑같은 실패가 반복될까봐 두려워 떨면서 고백하기를 너희 중에서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당시에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아테네는 그야말로 지방에서 한 가닥 한다는 철학자들이 올라오는 곳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충분하고 노예들도 있고 하니까 사람들은 하여튼 모여서 새로운 인생관이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어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장시간 그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이 귀한 밤을 보낼 수는 없고 그건 나중에 하고 그래서 누구든지 무엇인가 새로운 철학적인 견해가 있으면 시민들이 모인 광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우리 옛날식으로 해서 약장사오면 사람들 모이듯이 쫙 모이는 거죠. 그런데 그때 약장사 할 때 모이는 사람들의 수준은 별거 아니지마는 여기에서 이렇게 철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타부타 떠들고 논쟁을 할 정도 되면 이 사람들은 상당한 이성의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거죠. 그리고 일찍부터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준거예요. 그 당시에 채택한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에요. 그래서 모두 모여서 함께 투표도 하고 지도자 세웠다가 도편 추방해서 쫓아내기도 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시대였거든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뭐 복음을 전한다 그러니까 뭐 이 세상과 우주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 어디 하나 들어왔나 보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말을 못 한다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청산유수같이 말을 잘하니까 그래서 말쟁이 얘기 좀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귀를 귀울였던 거죠. 사도바울은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를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때 주님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당시 그 철학자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훤히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한번 저 사람들이 어디에나 신이 있다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저들에게 하나님을 한번 증거 해보자, 그리고 저 철학자들이 알아듣게끔 내가 한번 이야기 해 보리라. 그리고 자신의 온 지성을 쏟아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우리 모든 인간이 그 하나님의 창조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쭉 증거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아주 경청하기는 했지만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이 거기에선 일어나지 않았어요.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어요. 그때에 그는 아마도 반성을 하였던 것 같아요. 그게 뭐냐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이 그 최고의 지성인들에게도 선포의 중심이었어야 했는데 라는 반성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 고린도가 말이죠 아테네정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마는, 그러나 이 고린도시도 로마제국시대에 꽤 번창한 도시였어요. 지금도 거기에 가보면 사람들이 모여서 논쟁을 하던 커다란 회집장소가 있어요. 그러니까 아테네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사상을 발표하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말하자면 좋은 대학이 서울에 몰려있듯이 거기도, 난 인재들은 아테네로 가고 그리고 거기 못 올라간 사람들이 그런 큼직 큼직한 도시에서 그렇게 말하자면 이 철학적인 논쟁을 하면서 학파를 형성하고 그랬던 거죠. 그런 도시들 중에서 고린도시는 꽤 큰 도시였고 또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해외무역이 굉장히 활발한 도시였어요. 그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아주 잘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는 곳 이이었단 말이예요. 산간오지가 아니라 바닷가 도시였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아테네와 상황이 비슷한 거예요. 그때에 사도바울이 깊이 두려워 떨면서 걱정하는데 왜 두려워 떤거예요? ‘아, 내가 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가지고 이 인간들과 승부를 해야 될 텐데. 이 머리 좋은 고린도 사람들 아테네에 못지않은 이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이 아, 이것을 정말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을 전할 때 믿어줄까?’ 여기서 두려움과 떨림이 일어났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우리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거예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을 거스려 살던 인간을 돌이켜 창조 목적을 향하게 만들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죠. 다른 모든 시도 이런 것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이 시대보다 더 혼탁하고 불행한 시대예요. 이 시대에는 지금 논쟁이 뭐냐하면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믿게 할 것이냐 아니면 철학적인 이성의 논리를 따를 것이냐 두 가지를 가지고 지금 사도 바울이 고민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그때는 그래도 머리라도 쓰면서 ‘저게 참말일까, 참말일까?’이러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예요. 지금은 그런 거 안 해요. 일단 교회 오면 이성의 스위치부터 끄는 거예요. 그리고 매달리는 거예요. 이제는 이치에 맞고 논리가 맞아야지 믿는게 아니라 무엇이든지 가슴에 다가오면 좋은 거예요. 그런 혼탁한 시대가 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사실은 이 시대보다 훨씬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사람들에게 확 다가와서 그것이 압도할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껴지면 좋아요. 그런데 그것은 가장 비본성적인 사건이에요. 오늘날 같은 후기 근대주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떠받들어 주지 않으면 어떠한 사상도 다 거절합니다. 그런 사조 속에 있는 사람들 이예요.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그 복음, 그것이 아니면 인간은 결코 참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복음 없이 알게 되는 하나님은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참된 하나님이 아니예요. 도대체 이 서양의 철학사 속에서 하나님을 부정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신을 찾았어요. 심지어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그 니체도 사실은 신을 찾은 사람 이예요.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신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그 하나님이 아니예요. 그런 종류의 신들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로마시대에도 어디든지 다 있었어요. 술 좋아하는 신, 연애 좋아하는 신, 쌈질 좋아하는 신, 전쟁하는 신, 농사 짓게하는 신, 수 많은 신들이 있었어요. 그런 신들 중에 하나예요. 바로 그것 이예요. 그래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신은 죽었다” 그렇게 놓고 “이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던 그 신을 사람들이 믿지 않기 시작한 때에 하늘에서는 신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뭐든지 신이라고 받아들이는 옛날 그 원시시대의 정령신앙 같은 것들이 부활할 것을 보여 준거다 이거예요. 그래서 복음이 아니면 절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니예요.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면 더욱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불가능해요. 창조목적을 아는 일도 불가능하고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거예요. 오늘날 시대의 사람들은 이 복음을 싫어해요. 그리고 이 복음을 싫어하기까지는 아니 한다 라고 할지라도 복음이외의 또 다른 무엇이 첨가되어야지만 이 시대의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모두 거짓 이예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이 순수해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을 자꾸 섞은 복음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복음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러요. 듀나미스예요 그래서 다이나마이트가 나왔어요. 순수한 폭약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해요. 거기에다가 쓸데없는 것을 섞으면 섞을수록 폭약은 폭발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세상의 사람들이 아무리 인생의 가치와 목적, 의의에 대해서 수 없는 개소리를 하고 개똥철학을 떠들어도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기에 못 박힌 것의 의미 그 사건의 확실성과 역사성, 그리고 그 사건이 나에게 주는 의미, 이것을 깨닫는 것 없이 인생과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모든 생각은 암흑 속에서 길을 더듬는 오리무중과 같은 것이에요. 설교하러 내려오기 전에 양치질을 하면서 ‘허, 참 이렇게 단순한 걸 인간들은 왜 안 믿을까?’라고 그랬어요. 저희 집사람이 칫솔을 새로 하나를 사갖고 오면서 저에게 자랑을 했어요. 잊어 버렸는데 3개 값인데 1개를 샀대나 그러면서 당신칫솔은 특별한거다라며 줘요. 그런데 그 칫솔을 보니까 이 털이 다른 건 가지런히 나는데 이건 이렇게 패어서 나고 이 칫솔이 대개 머리가 하나로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건 머리를 반으로 쪼갰어요. 그래서 머리가 이렇게 움직여요. 그래서 이빨 사이에 끼면 아래는 이 쪽으로 붙고 밑에 껀 이리로 들어갈 수 있게끔 이렇게 칫솔이 생전 처음 가변 칫솔이더라고요. 그런데 처음엔 좀 불편한 것 같았는데 며칠 딱 가보니까 잘 닦여져요. 그리고 우리는 그 칫솔보고 뭐라고 그래요? 그렇지 ‘좋은 칫솔’, 왜냐하면 이 칫솔의 목표는 뭐예요? 이 이빨을 딱는 거예요. 그럼 뭐든지 좋은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물건이 만들어진 용도에 잘 이바지하면 좋은 물건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현실적으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칫솔과 비교해서 설명을 한다면 칫솔은 칫솔질을 잘하면 좋은 칫솔인데 인간은 뭔 짓을 잘하면 좋은 사람이 예요? 대답을 못하잖아요. 그러면 이빨을 닦기 위해서 칫솔이 만들어 졌듯이 인간도 뭔가 만들어진 목적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그거에 맞춰서 ‘아, 좋은 사람이구나. 에이, 별 쓸모가 없는 사람이구나 갖다 버렸으면 좋겠다.’ 그 판단을 하는 거 있잖아요. 그게 뭐예요? 칫솔은 양치질하는데 쓰는데 솔은 옷의 먼지를 터는데 쓰고 국자는 국을 퍼는데 쓰고 의자는 앉는데 쓰는데 이렇게 하면 밤새도록 해도 다 못할 것 아니예요. 인간도 뭐하는데 쓰느냐 이거죠. 어디다 쓰느냐 이거죠. 그거를 기준으로 인간이 좋은 사람 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기준이 있다 라고 인간들이 말을 안 하려고 그러는 거요. 차마, 왜?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살아야 될 의무가 생겨나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누가 나에게 그런 거를 부여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우스운 게 세상에 발 아래에 굴러다니는 개똥도 용도가 있는데, 약에 쓴데매요. 그 모든 용도를 판단하는 인간은 자기가 무엇에 쓸려고 만들어진 인간인지를 모르고 사는 거예요. 인간이 모든 사물들을 판단 할 때는 모든 사물보다 더 위대한 것 같은데 지는 뭘 위해서 만들어 졌는지도 모르는 걸 생각하면 이건 개똥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을 물기시작하면서부터 고민해야 될 문제가 그 문제에요. 그걸 못 풀면 사나 마나예요. 그 대답이 무엇인지를 뭐가 보여 준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이 보여준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그리스도예수와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 생애 이것이 찬란한 빛을 품으면서 그러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비유를 들어볼게요. 예배당에 들어왔는데 캄캄해. 아무것도 안보여. 그래서 막 더듬으면서 들어와요. 그러다가 착하고 촛불을 켰어요. 어떻게 되요? 빛이 촛불서부터 확 퍼지기 시작하죠. 가까운 데는 잘 보이고 먼데는 흐리게 보이겠지만 쫙 퍼지면서 보이는 거예요. 딱 보니까 ‘아! 여기는 문이고 기둥이고 의자고 바닥이고 천정이고 아! 이렇게 되는 구나. 저 멀리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는 이렇게 되어있구나.’ 그리고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것이 발견 되듯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즉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라고 하는 것을 인간과 하나님, 세계와 사물, 역사, 교회 이 모든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인간에게 찬란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같아요. 그래서 그것이 쫙 비추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의 자리가 어디고, 사람이 누구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이 세상에 있는 삼라만상 모든 만물들의 위치가 어디이고, 이것들은 왜 만들어 졌는가 라는 모든 것들이 찬란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핵심이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그거예요. 조금만 지성이 있어서 인류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탐구해온 발자취를 공부해 본 사람은 인간이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하늘과 땅의 뜻이 무엇이고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그 사상이 얼마나 진리와는 거리가 먼 허무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으로서는 전혀 인간을 구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 행복한 게 하니라 불행한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죠, 주전 5C~10C 사이에 아주 뛰어난 희랍의 철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그 기라성 같은 천재들이 있던 자살률이 가장 높은 시대였어요. 뛰어난 철학자들이 벌컥 벌컥 문을 열고 자살로 뛰어들어서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이러한 철학이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도 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진리를 보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거죠.
그래서 한 시대의 교회가 잘 들으세요,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 일은 선교도 아니고 불우 이웃돕기도 아니예요. 그게 뭐냐하면 이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교회가 충만해지는 거예요. 그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해 지는 거예요. 그러면 선교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이렇게 선교 지겹게 안 해요? 이게 믿음이 없어서 안 해요. 진짜 그리스도와 및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지 않고는 어떠한 인간의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거예요. 눈물로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지성의 눈이 어두워져서 캄캄해진 인간들, 타락으로 말미암아 흐려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반계시들 속에서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 죄악의 어두움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찬란한 당신의 빛을 비춰주시는 거예요. 그게 인간을 구원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거죠. 그걸 통해서 나타나는 거죠.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 이예요. 여기까지가 지난번 설교였어요. 그거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여러분 마음속에 심어 준거예요.
Ⅱ. ‘그러나’
자,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아! 이제 우리는 신앙생활을 좀 단순하게 해야 한다. 아! 그거구나, 예수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쓸데없는 것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거죠. 오직 예수만 알고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만 알면 되는 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거죠. 6절을 들여다보세요. 자, 4절에 내 말과 내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렇게 말을 하니까 우리 모두 아멘 그랬단 말이죠. 사도가 갑자기 ‘그러나’,그러나는 무슨 뜻 이예요? 앞에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예요? 뒤집는 거예요? 뒤집는 거예요! 그러면 뭔 얘기예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다만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아멘 했더니 ‘그러나’ 하고 앞에 말을 뒤집는 거예요. 그 다음의 내용이 우리의 눈길을 끌어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 ’온전한 자‘라고 하는 말은 희랍에 성경에서 보면 도덕적으로 완전히 갖추어진 그런 깨끗하고 순결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full grown, 다 자란‘ 대개 한 20세 정도 되면 다자라지 않았어요? 저 같은 경우는 14~15세 사이에 10cm 15~16사이에 10센치 16~17사이에 10센치, 그리고 3년을 크더라고요 그리고 그 다음에 17~18사이에는 거의 안 크고 지금 이렇게 됐는데 요새는 줄어요 자꾸 그래서 한 8년 전 보다 1cm가 줄었어요. 그게 ’full grown‘ 이예요. 다 자란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면 우리로 말한 이거는 결코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거는 너무나 잘 알겠죠? 그러면 우리가 볼 때에 다 자란 성도, 그러면 어떤 성도일까요? 우리들이 통념상으로 어린 사람들의 특징을 성경이 여러 개 이야기 하는데 믿음이 자꾸 흔들려요. 구원을 받았는데도 믿음이 약해질 때 있잖아요? 그런데 다 자란 사람이 믿음이 약해지는 것과 신앙이 어린 사람이 믿음이 약해지는 건 달라요. 다 자란 사람은 믿음이 약해져서 은혜가 좀 떨어져도 ’진짜 하나님이 계실까?‘ 자기가 아무리 개판을 쳐도 그런 식으로 믿음이 식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는데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그랬거든요. 회심을 하고 열심히 교회 다녔어요. 은혜도 받고 뭐 그랬는데 금요철야 기도에 가서 그땐 정말 밤새도록 눈물 흘리면서 기도했어요. 3시 반까지 기도하면 휴식시간을 한 30분 줘요.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 다음에 인제 교회에서 내려와 가지고 교회 변소간이 저 바깥에 있었어요. 거기 가서 가만히 않아서 그때까지 항상 담배를 폈거든요. 그래서 인제 철야기도시간 이어서 열심히 1부 순서 기도하고 막간에 거기서 담배를 한대 이렇게 피면서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게 실화에요. 뻐끔뻐끔 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내가 뭐 철야기도 가가지고 뭐 ‘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뭐 그런 거 아니었거든요. 담배를 뻐끔뻐끔 피면서 그 부서진 천정사이로 별빛을 보면서 새벽에 추운 겨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말짱 꽝이면 난 뭐가 되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게 바로, 그러나 그때 제가 중생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분명히 회심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그래서 로이든 존스 목사님도 신자 안에 의심과 믿음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요. 그래서 그 믿음이 흐려지는 거죠. 그렇게 보면 세례요한 같은 경우도 그러고 나오잖아요. 세례요한이 뭐라 그래요? ‘어린양이 예수가 세상 죄는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사람 보내오실 그 이가 당신이십니까?’ 라고 그리고 또 물어 보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실망시키죠. 그게 인간이 그런 거든요. 그런데 이게 근본적으로 그렇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이거예요. 그리고 신앙이 어린 사람이나 신앙이 다 자란이나 유혹을 받아요. 그런데 신앙이 어린 사람은 아주 심하게 요동을 쳐요. 그러나 다 자란 사람은 덜 요동을 쳐요. 여러 가지 차별점 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믿음 안에서 클 대로 큰 사람 중에서 나는 지혜를 말하노니 그러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이거는 조금 아까 자기가 얘기한 것과 정 반대예요. 1절을 보세요.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노니.’
Ⅲ. 복음 교리
그 다음 4절에 ‘내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그랬어요. 분명히 안한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6절에 들어오면서 ‘그러나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거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면 이렇게 되는 거죠. ‘나는 전도할 때에 너희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전도하러 갔었다. 그때에 나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사람의 권하는 말로 아니 했다. 그렇지만 사도인 나와 우리 동역자들은 믿음이 다 자란 사람들 중에서 진리를 가르칠 때에는 지혜를 말했다.’ 그 뜻 이예요. 이제 이해가 되시겠어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에게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은 도대체 이 지혜, 6절에서 이야기하는 지혜와 1절과 4절에서 이야기 하는 지혜가 같은 거냐 아니면 다른 거냐 아니면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 라는 질문이 이 문제를 푸는 결정적인 질문 이예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두 지혜는 같은 지혜일까요? 다른 지혜일까요? 다른 지혜죠. 앞에 나온 이 ‘지혜’나 4절이나 6절에 나오는 이 ‘지혜’라는 단어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소피아’라는 단어예요. 소피아. 철학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필로소피’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나와요. ‘필로’는 ‘사랑하다’예요. 그러니까 지혜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 이예요. 이걸 읽을 때 사람들은 전부다 지금 제가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 고린도전서 2장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나가는 거요. 그러면 그 두 지혜를 사도는 오늘 6절과 7절에서 명료하게 대조해요. 첫째가 뭐냐하면 세상의 지혜와 그리고 7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예요. 만약에 이것을 다른 말로 푼다면 앞의 것은 세상의 철학이고 뒤의 것은 하나님의 철학이 되는 거예요. 그럼 세상의 지혜는, 세상의 철학은 세상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철학이고 그 다음에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철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철학이란 말 이예요.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렇게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착했을까 이거죠. 우리가 가끔 도대체 무언지 이 물건이 도대체 뭐하는 건지 무슨 물건이지 모르겠다 그럴 때에는 성분이 돌이냐, 플라스틱이냐, 신소재냐 철이냐 이런 걸 모르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그리고 이야기 하는 건 뭘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노인네들이 무엇에 쓰는 물건 인고 하고 묻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소. 아니 뭘 몰라? 고무 다섯 개 달리고 여기에 글자 새겨져 있고 플라스틱이구만, 은색이고 그런데 그런걸 아는 건 중요한게 아니죠. ‘나는 인간을 알아’ 그럴 때에는 피가 몇 리터이고 땀구멍이 220만 개고, 머리카락이 몇 개고, 무슨 눈의 수정체의 성분이 뭐고, 그런 걸 안다는 게 아니 예요. 똑같은 거죠. 그렇기 전에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 건지 알지 못하는 거죠. 부시맨이라는 영화에서 조종사가 콜라를 하나 마시다가 코카콜라병을 하나 뚝 떨어뜨리잖아요. 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그걸 갖고 떨어진걸 보고 이걸 뭐하는 것이냐고 사람들이 생각하잖아요. 그러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벌어지잖아요? 똑같아요. 콜라병이 떨어졌는데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니까 온 코미디 같은 쇼가 벌어지듯이 떨어진 인간이 무엇에다 쓰는 물건이지를 모른다면 생 쇼가 벌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삼자적 입장에서 인간의 하는 일을 이렇게 보면 이게 얼마나 웃기는 시트콤이겠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일 먼저 그런데 지혜는 바로 그것을 고민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런데 이 세상의 지혜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이 이것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이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이 뭐냐? 이 지혜는 결국은 복음지혜거든요. 복음 지혜의 본질이 뭐냐 라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복음 교리에요. 그래서 잘 들으세요. 써 놓으면 더 좋고.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핵심적인 이야기를 지적했어요. 천천히 2번 할게요. 뭐라고 했냐면 이렇게 했어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곧 복음과 복음 교리를 안다는 것이다.’ 다시, ‘복음을 안다는 것은 복음과 복음 교리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과 복음 교리는 뭘까요? 복음은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 이게 복음이예요. 그걸 더 짧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고 다시 사신 것, 그렇게 더 줄일 수 있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고 다시 사신 것, 그게 복음이예요. 더 줄이면 그냥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깜깜한 가운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처럼 개판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게 뭐죠?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예요. 그 사람들에게는 복음만 전하면 되요. 그러니까 한사람이 회심하는 것은 죄와 은혜의 지배 같은 장중한 설교를 20번, 30번 이상 들어야지만 겨우 회심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14년치 설교테잎을 다 들어야지만 회심하는 게 아니예요. 딱 한 순간 그리스도께서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고 너를 구원하기위해 다시 사셨다. 그 사실이 ‘아멘’하고 확 믿어 질 때 그래서 자기가 창조주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를 굳게 붙드는 신앙이 생겨날 때 회심하고 구원을 얻는거예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들이 회심할 때에는 대개 들어온 메시지가 논문처럼 들어온 게 아니라 사진처럼 ‘팍’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다시 한번 할게요. 그래서 우리들이 깊이 어느 순간에 ‘확’ 회심할 때에는 논문처럼 설교가 들어온 게 아니라 ‘팍’하고 찍힌 한 장의 사진처럼 ‘팍’ 들어오는 거예요. 그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 이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온전한 자들 중에서’라고 말한, 이 사람들은 그런 비회심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회심해서 은혜도 받고 침체에도 바지면서 유혹에도 빠지고 극복도 하고 하면서 연단되면서 이젠 자랄 만큼 믿음이 자란 사람들 이예요. 이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지만 복음만이 아닌 복음과 함께 복음의 교리가 필요한거예요.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죠?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감격하는 것 없이는 성화의 삶도 없다고 제가 늘 가르치죠.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 경험해 본적 없어요? 아주 분명하게 목회자가 섞이지 않고 진짜 선명하게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설교하고 설교자도 감격에 겨워서 감동을 하고 옆에 듣는 사람도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때 있어요, 없어요? 있죠? 분명히 있죠. 그죠? 왜 그럴까요? 이것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이성적으로까지는 동의가 되어도 이 안에서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지는 못해요. 그건 성령의 역사죠. 그런데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 놀라운 사건이 복음의 교리로 설명될 때에 그것이 새로운 감동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거죠.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되는 거죠. 화산이 터져요. 편평한 땅이었는데 쿵하면서 쾅하고 터져요. 구멍이 뚫어지면서 거기에서 토하듯이 막 수많은 용암과 바위덩어리들이 막 쏟아져서 위로 연기를 내면서 분출할 것 아니예요. 이것들은 솟아오른 것들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산을 형성해요. 그래서 정상이 있고 가운데가 제일 높고 그 다음에 가장자리부터 이렇게 낮아지면서 산이 형성이 되는 거죠. 봉우리가, 분화구가, 불이 쏟아져 나오는 거기가 만약에 복음이라고 한다면 떨어진 흙과 재에 의해서 형성되는 이 장엄한 산은 이 전체가 복음의 교리 인 거예요. 그거를 오늘 사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거예요. 너희들은 이 맨 이성을 가지고 신이 누구일까? 인간이 어떻게 태어났을까? 무엇을 하는 인간이 참일까? 선이 무엇일까? 악이 무엇일까를 가지고 고민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써 인간은 중심점을 찾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더욱이 운명적으로 하나님을 따나서 영혼은 얽어매고 있는 이 죄의 사슬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눈이 어두워서 참 하나님이 누구이고 진정한 선이 무엇이고 그리고 악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도 없거니와 백 번 양보해서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악을 버리고 창조의 목적인 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의 사슬이, 악의 사슬이 그의 영혼을 얽어매고 있어서 길을 모르고 그리고 길을 알았으나 그것을 따라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없는 거죠. 그런 처지에 있는 인간 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 안에 화산이 터지는 것 같은 이런 중생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확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것들이 쏟아져 내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쏟아져 내리는 이 하나 하나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의 교리예요. 그러니까 처음 예수님을 믿고 복음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을 전혀 안 믿던 사람들, 그러나 믿었으나 복음에 대해서 아주 희미해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 자체를 설교할 때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지만 다 자란 사람들은 오히려 복음의 교리, 죄와 은혜가 우리 안에 어떻게 지배하는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예수의 그 탁월하심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할 때에 놀랍게 화산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 십자가의 경험들이 복음교리에 대한 이해 속에서 새로워지게 되는 거예요.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 이예요. 이단 중에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부인하는 이단은 역사적으로 별로 없었어요. 그것마저 부인하면 그건 이단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이교가 되 버리는 거예요. 이단은 그래도 시작은 비슷해야지 이단 이예요. 이교는 아예 처음부터 기초가 틀린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복음 교리 다 털어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생각하는 교회 안에서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탐구하면서 그 위대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원칙을 굳게 붙든 거예요. 이 화산의 비유 같은 이런 원칙을. 그래서 그리스도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것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리 아름다운 교리, 인간의 입맛에 달콤하고 인간의 이성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수많은 교리들을 만들어내도 이 교리들 하나하나가 그리스도 안에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면 이걸 다 쓰레기라 생각했단 말 이예요.
결론을 얘기할까요? 무슨 설교를 들어도 예수가 생각나고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 앞에 죄인일 뿐이며 이 더러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감동으로 밀려와야 해요. 무슨 설교를 해도. 그게 바로 복음 교리예요. 복음은 간단하지만 복음의 교리는 한이 없어요. 그거예요. 바로 그것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맨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경에 있는 사상에 접근하려고 하는 그 모든 인본주의적인 노력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잘 알아 가냐 하면 일 단계 이 단계 삼 단계 성경 공부 교재 옆에 끼고 교회 다니고 살아서 가방 끈이 길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때문에 늘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 이예요. 존 뉴턴 목사님이 그랬죠. 아주 신령한 주의 종이었는데 말년에 치매끼가 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너무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목사님 괜찮으세요?’ ‘내가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희미해지고 내 정신이 흐릿해져도 적어도 두 가지만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요. 내가 말할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 말 이예요! 그게 항상 이 가슴속에 역사해야 돼요.
(찬양)“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Ⅳ. 결론과 적용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이 그 구원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구속주로서의 그 영광과 그리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온전케 하시는 주로서의 그 찬란한 광채가 우리를 압도했어요. 그래서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주님을 위한 헌신 자연적인 특징들 이런 모든 것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아주 하찮게 보일정도까지, 그래서 그 한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고 마지막에는 그 분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까지도 잊혀질 것 같은 그런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하는 것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얼마나 가방 끈이 긴가 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영광 앞에 엎드러지는 거예요.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확 엎드려지는 바로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1장을 펴보세요. 제가 몇 일째 읽으면서 감격하고 있는 구절인데요. 보세요 1장 12절이야. 보세요. 337쪽이예요. 내가 읽을게요 보세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주의 은혜가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할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그리스도예수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 뭐라 그래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어지이다” 이게 무슨 뜻 이예요? 사도는 이 글을 쓰면서 17절에서 온 땅과 하늘위에 높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본거예요. 만세의 왕, 시간이 무궁하게 흘러가도 그 모든 시간 속에 왕이시고 수 많은 사물들이 시간 속에 부패하며 변해도 불변하시며 그러면서도 보이는 물건 중에 하나가 아니신 보이지 아니하신 그리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거예요. 그 영광을 언제 보게 되었냐 하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의 행동을 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찬란함이 그 찬란한 영광이 이 사람을 압도했던 거예요. 그거예요.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 이예요. 그리고 그 지식의 성장 없이는 십자가에 대한 감격도 없어요. 혹시 만약에 그런 게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아니라 감상의 눈물일 뿐 이예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불쌍해서 흘리는 눈물,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힘없는 처지가 이 세상에서 찢기고 고통 받는 내 상처와 비슷하다는 그러한 동질화에서 오는 감상적인 눈물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복음과 복음교리에 대한 지식의 증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그것을 알아가는 것 이예요. 그것을 신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끊임없이 발전 하여야 하고 그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신자는 복음 자체의 깊은 감동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성에 대해 눈뜨게 되고 그러면 나라는 인간이 그 그리스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우리가 성장해 가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그 광대한 지식으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겠느냐 이 문제예요. 다음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믿음으로 신학함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4-7).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알지 못 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에요.
I. 신학 - “하나님을 앎”
우리는 흔히 “신학” 하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학문을 말하나보다 전문적인 학문을 가르치나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어요. 이 신학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대로 사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안 대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신학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신앙이 없으니까 희미하게 하나님을 배우는 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방 신들을 하나님인 줄 알고 섬기고 해와 달과 별 같은 자연 사물들을 하나님인 줄 알고 경배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바로 잘못 신학을 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올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그 즉시로부터 제대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이 신학은 뒤에 “학”자가 붙었다고 해서 우리들이 너무 주눅들 필요 없어요. 이거는 그냥 배워 나가는 거죠. 그래서 이 신학은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을 아는 대로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과 후기의 개혁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담긴 신학 책을 서술할 때 1부와 2부로 나누어 서술하기를 좋아했어요. 1부는 학문으로서의 신학, 2부는 경건으로서의 신학, 1부는 지식을 다루고 2부에서는 생활을 다루었어요.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나뉘어지지 않는 일체가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머리는 크는데 뭐 그 생활이 뭐 어떻고..뭐 생활은 되는데 뭐 마음이 뜨겁지 않고.. 이런 것들은 이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에게는 아주 낯선 신학의 방식이었고 그렇게 하는 거는 정상적인 신학이라고 생각을 안 한 거죠. 그래서 이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삶의 교리” 이것이 바로 신학이라고 본 거죠. 그러니까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고 아는 것들이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되어서 본성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그 변화된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실천 이것이 3자가 합일될 때에 아는 것은 마음을 변화시키고 본성을 바꾸며. 잘 들으세요. 아는 것은 지성을 통해서 아는 것은 마음과 본성을 바꾸며 본성과 마음을 바꾼 것은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고 삶의 실천은 아는 것을 더 잘 알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예화)자. 어떤 사람이 꽃과 나무에 대해서 잘 배웠다고 칩시다. 그런데 자기가 실제로 가꾸어 보면 꽃과 나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겠죠? 실천은 그처럼 지성을 강화시켜 주는 거죠. 그러니까 이 3개가 함께 움직이는 거에요. 이러면서 우리의 의지나 지성이나 감정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이 3자가 전체적으로 움직여서 그래서 우리를 바꿔놓는 거죠. 예를 들자면 지식주의는 첫 번째 것에만 집중하고 신비주의는 2번째에만 집중하고 도덕주의는 3번째에만 집중하죠. 이건 모두 다 참된 영혼의 변화가 아냐. 이거는 절대로 참된 영혼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부분적인 변화를 가지고는 그 사람의 존재가 예수를 닮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 전체가 창조의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그런 삶이 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깨달을 때마다 성령의 강한 역사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과 은혜를 불러 일으키고 그것이 우리의 자신을 바꾸어 놓아서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그렇게 될 때에 흉악한 죄인도 아주 빠른 속도로 하나님을 향해 변화된 존재가 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에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하거나 혹은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도 인생이 꼬이고 깊은 시련과 고통 속에 있다가 그 깊은 절망과 고통의 늪에서 벗어날 때에는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오거나 빈 통장에 기적적으로 입금이 됐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풀린 게 아니예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나는 죄인이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긴 세월 동안을 하나님과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방황했구나
(찬양)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깨닫게 되는 거에요.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온 것도 아니에요. 눈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닌데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거룩하고 나는 죄인이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깨닫게 될 때에 이게 머리 뿐 만이 아니라 가슴에 깊은 고통을 가져다 줘요. 그러면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거죠. 이것이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전인적인 변화에요. 전인적인 변화야. 인본주의는 이런 전인적인 변화를 기다리지 못 해. 이 전인적인 변화. 그러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이에요. 그게 우리를 불러 일으키는 거예요.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는 거죠. 만약에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잘 들으세요.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누군가가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확하게만 가르쳐 주면 모두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이해하게만 되면 그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야 될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근데 실제로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러죠. 안 그래요. 저 설교에 토를 달수도 있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고 모두 수긍이 되는데 수긍이 될 뿐 그 이상의 아무런 변화도 자기의 가슴 속에서 자기의 모든 영혼 안에서 안 일어날 수가 있는 거야. 안 일어날 수가 있어. 그게 바로 사도가 “네 말과 네 전도함이 사람의 지혜와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이거를 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우리들이 어느 날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확 임해서 자기가 다 깨뜨려지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깊이 통회하며 하나님을 만났다고 칩시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한 편의 설교를 모두 기억하겠죠? 확신을 못해. 어떻겠어요 그럴 것 같죠?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어요.
(예화)스펄젼 목사가 아직 청년이었을 때 열 여섯 살 때 시골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어요. 시골 교회 목사님이 얼마나 설교를 지루하게 하는지 스펄젼이 푹 잤어요. 졸면서 계속 잤는데 그 시골에 예배 드리러 온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 가운데 앉아서 청년이 계속 자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죠? 하도 화가 나니까 이보게 젊은이 눈을 들어..그 때 깜짝 놀래서 깼죠. 예수를 바라보라고. 그 순간에 성령이 확 임했어요.
그럼 그 사람 앞의 설교 기억했겠어요 못 했겠어요. 잤는데 어떻게 기억을 해. (예화) 방배동에 있을 때 사람들이 막 바글바글한데 지하에 식당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불이나 났으면 어떻게 했을까 걱정돼요. 한 80명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에 막 한 삼백명 사백명 줄을 서서 내려가요. 그래서 너무 걱정이 돼 가지고 위에서 내려갔어요. 근데 형제들이 성도들이 밥 타러 쭉 내려가는데 난 뒤에 있으니까 인제 모르지. 자매 둘이서 머리를 이렇게 하고 서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언니 언니. 걔가 아마 언니라고 하는 사람을 데리고 온 모양이야. 언니 언니 우리 열린교회 예배 참 은혜롭지 그러니까 무슨 소리 하나 궁금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설교자니까. 뒤에 이러고 서 있는데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 너무 은혜롭더라 야.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 다음에 뭐라하냐면 한참 졸다가 깨어났는데도 은혜롭더라. 그래서 도로 위로 올라왔어. 후반부에 그 자매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칩시다. 전반부를 기억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우리를 우리가 처음부터 마음이 활짝 열려서 그 진리를 잘 깨달으려고 집중하면서 설교 들었을 땐 다 기억할 수 있지만 그런 의지가 별로 없는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확 사로잡혔을 때는 사실 성경 본문도 잘 기억이 안 나고 짤막한 그림 같은 한 폭의 찰칵 하고 사진 같은 그림이 탁 남는 거예요.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이 방탕한 길을 헤매는데도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그게 확 하고 어느 한 순간에 그 스틸 사진처럼 선명하게 팍 하고 찍히는 거예요. 근데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오냐 하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오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신자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앎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시는 거예요. 가끔 여러분 이런 생각 안 들어요?
II.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이심
복음이 뭐냐 그랬더니 목사님이 가르쳐 주기를 복음은 아주 짧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고 더 짧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다 십자가다 이렇게 얘기 하는데 사실 그거는 분량으로 보더라도 성경 전체에서 몇 줄 안 되잖아요. 근데 마치 기독교는 복음이 전부인 것 처럼 복음 복음 그러면서 복음을 강조한다 이거예요? 그러면은 분량적으로 볼 때 그것 밖에 안 되는데 왜 복음이 성경 전체의 모두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느냐 이 얘기예요.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 중 일부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과 무엇으로 이뤄지죠? 큰일났다. 교리반 이거 다시 재시험 봐야지 안 되겠다. 무엇과 뭘로 이뤄져요? 율법과 복음으로 이뤄지잖아요. 그러니까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도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런데 왜 복음이 이렇게 강조되냐 하면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셔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시는 거죠. 지난 시간에 우리가 신비주의에 대해서 공과공부 했죠? 아마 마지막에 보면은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이 나오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출발을 성경에서 할 수도 있고 순수한 이성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대상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순수한 인간의 이성으로 쭉 논리적으로 찾아가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찾아낼 수 있는데 이렇게 도달되는 결론이나 성경을 믿음으로써 도달되는 결론이나 일치를 이룬다고 생각한 거예요. 근데 실지로 그렇게 해서 찾아갈 수 있었냐 하면은 찾아갈 수 없었거든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성경을 젖혀놓고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모든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래서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은 직접 찾아갈 수 없지만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때에 그분에게서 비치는 삶과 성품의 찬란한 빛을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는 거죠.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이 이성으론 알 수 없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 모든 빛을 그리스도 예수께 모아주신 거예요.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을 때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데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예요.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직통으로 보고 이성으로 그 하나님을 알아감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광의 신학이에요. 십자가 신학은 그렇게 해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그 분을 우리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데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다 그래서 이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십자가 신학이에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장 잘 증거한 것이 바로 성경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잘 읽고 성경을 잘 깨달으면 이 성경은 중간에 그리스도 예수를 세워놓고 거기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 비치고 거기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희미해지는 것이 성경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은 모든 부분이 똑같이 풍부한 계시의 양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곳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고 지금 읽는 부분 같은 거..이거 보다는 예수를 증거 하긴 하지만 흐린 부분이 있는 거예요. 그 때에 이렇게 찬란한 빛이 있는 부분을 탐구할수록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누구에 대한 믿음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중보자로 세우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존재와 성품 그 성품이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나타나신 거죠. 죄인들을 보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행동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 너머에 계셔서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마음이 어떤 가를 알게 되는 거죠.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당신을 보이신 것이에요. 그래서 이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태어나고 살고 죽고 부활하신 일 그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전할 때 장황하게 진리가 어쩌고 저쩌고 얘기를 하지 않고 그건 믿는 사람들끼리 얘기하는 거지. 진리가 어쩌고 저쩌구 떠들고 철학이 어쩌구 얘길 안 하고 당신은 죄인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먼저 말 하는 이유가 바로 무엇 때문이냐 하면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이게 십자가 신학이에요. 막 고생하는게 십자가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십자가 신학, 영광의 신학에서 그 영광은 하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가리켜요. 그렇게 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신앙의 모든 비밀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생동안 그리스도를 탐구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뭐에 대한 탐구라고 그랬어요? 복음에 대한 탐구라고 그랬어요. 근데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해요 안 받았으면 회개해야 돼. 그게 뭐에요? 그렇게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으니까 복음을 아는 것이 가장 커다란 숙제인데 그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죽으셨다 그게 복음이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진짜 복음을 안다는 의미는 이런 좁은 의미의 복음만이 아니라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하는 복음 교리에 대해서도 알아야지만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 이거죠. (예화)자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이런 거 아니겠어요? 그저 뭐 적합할지 모르겠는데. 자 여기 보세요. 요즘 의사들도 신뢰하지 않는 환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죠? 특히 아주 드문 희귀병일 경우에.. 그래서 예전에는 그냥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같은 데 모이면서 스스로 의학 공부를 하고 약을 연구하면서 그러면서 치료 방법들을 함께 나눈다고 해요. 왜냐하면 병이 워낙 희귀하고 의사들도 그 병을 다루어 본 풍부한 경험이 있는 의사가 없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럼 자 생각을 해 봐요. 예를 들자면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무슨 아주 희귀한 질병에 걸렸다 라고 가정을 합시다. 그런데 누구라고 그럴까? 누구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내라고 그럴까 아 그럼 뭐 남편이라고 그러자 남편, 남자들이 빨리 죽으니까. 남편이 무슨 병에 걸렸어요. 근데 평소에 저 인간 언제나 죽나 이러고 살았어요 아내가.. 그럴 경우에 남편이 죽을 병에 걸리면 복음이겠지. 유산도 남기고 뭐 죽으니까. 근데 아내가 남편을 한없이 사랑해요. 아 이거 기가 막힌 비유다. 나 이거 지금 생각한 거거든요? 아 이거 들어봐요. 진짜 기가 막히네 자 남편을 뜨겁게 사랑해요. 어 근데 병에 걸린 거야. 이게 한국에서는 그런 병에 걸린 게 서너 사람 밖에 없었고 다 죽었어 한 20년 전에.. 전 세계를 뒤져봐도 그런 병 걸린 사람은 서른 댓명 밖에 없다는 거야. 그리고 치료 방법도 제대로 없고 누가 뚜렷하게 말해 주지를 못 해요. 그런 상황이 됐어요. 그러면은 그런 경우에 남편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더 이상 그 병을 포기하지 않겠어요? 뭐 없는데 어떻하겠어요 그죠? 예 근데 남편을 너무 사랑해. 그 실지로 어느 신문에서 읽었어요. 아주 눈물겹게.. 그 어머니가 아이가 아주 특수한 병에 걸렸는데 한국에는 환자가 거의 없어요. 그래가지고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영어 공부까지 해 가면서 국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을 해서 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그래서 자기 아이의 병을 고치는 거예요. 그 보세요. 그렇게 남편이 아파서 죽을 병에 걸렸다 그러면은 이 사람이 이러이러한 병에 걸렸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 병에 걸렸구나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겠어요? 그러면 만약에 한 번에 살려낼 약이 없다면 무슨 식품이라도 먹여야지 좀 생명이 연장될까 어떤 생활의 습관이 질병을 더 심각하게 하고 어떤 환경에 있으면 이 질병이 완화될 수 있는가 고민하지 않겠어요? 쉽게 얘기해서 만약에 내 남편이 병에 걸렸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복음의 사실이라면 그러면 내가 남편에게 어떻게 해 줘야 되는가 하는 것은 복음의 교리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라고 하는 사실만 딱 생각하고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만약에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사람이면 그러면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나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궁금증이 생겨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게 교회 생활하고 관심 있겠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까 교회 와서 헌금은 얼마나 해야 하나 그리고 설교를 듣는 태도는 어때야 되나 선교 헌금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구역 예배는 몇 번 참석해야 되나 이런 것만 생각하겠어요? 아니죠.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모든 방면에서 다 생각나지 않겠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나는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되나 어떻게 돼야 되나 그런 것들이 매순간 밀려오니까 교리에 대한 갈급증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래서 나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밖에 없는데 나는 모든 삶에 있어서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거예요. 그럴 경우에 기도 생활에 있어서는..하고 가르치면 그게 기도의 교리가 되는 거예요. 봉사 생활에 있어서는 섬김의 교리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어떻게 마음을 지킬 것인가. 마음 지킴의 교리가 되지 않겠어요? 그렇죠? 교회란 무엇이고 나는 거기서 어떻게 봉사해야 되는가 교회의 교리가 되지 않겠어요? 그렇잖아요. 가정에서 온전해지고 싶습니다. 가정의 교리가 되지 않겠어요? 그게 바로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는 곳에서는 복음 교리가 환영을 받지만 복음에 대한 감격이 없는 곳에선 그런 거 가르쳐 주면 짜증이 나는 거예요.
(예화)애국심 없는 군인에게 전쟁이 났는데 끊임없이 무기를 줘 봐요.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요? 도망가야 되겠는데. 도망가야 되겠는데 폭탄이 너덕너덕 달린 조끼가 위로부터 내려오면 그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거 입고 가가지고 적군과 함께 자폭하라는 건데. 그거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그렇잖아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한테 제일 짜증나는 선물이 그 책하고 노트하고 연필이에요. 게임기나 사 줘야지 좋은데 말이지 그런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잘 들으세요. 어느 날 여러분들이 교리가 싫어지기 시작하면 예수님이 싫어진 거예요. 아주 정확한 지적이에요. 교리가 싫어지기 시작하면 삶이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어떻게 살아야지만 지혜로운 삶이며 어떻게 살아야지만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삶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는 거죠.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이 신학함이 결국은 앎과 삶으로 집약이 돼요. 앎과 삶으로 집약이 돼요. 앎과 삶으로 집약이 돼요.
III. “앎”과 “삶”
우리가 나그네와 외인처럼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할 때 “한 번 믿어봐”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믿음의 세계는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거야. 너희 같은 짐승들이 우리 성도들의 삶을 알겠어?” 누구 놀리는 거예요? “신앙의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거야 경험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어” 이런 거는 아주 무책임한 거예요. 아주 무책임한 거라는 거.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것을 이성으로 할 수 있는 데 까지 잘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마치 이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내가 설명을 잘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이치에 맞게끔 가르쳐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그랬느냐면은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1절에서는 지혜로 아니할 것이요 그랬거든요? 근데 7절에 가서는 우리들이 전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라고 말해요. 그 차이는 지난 시간에 설명했죠? 그래서 어떻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왜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 지를 할 수 있는 한 이성적으로 잘 설명해서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끔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또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될 뿐이지 그것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바뀌어지는 것은 그것은 단순한 이해를 가지고 일어난 일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냐면 우리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그리스도를 잘 가르쳐 줄 때에 그의 이성에 호소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이치에 맞게끔 잘 설명을 해서 그에게 지혜롭고 쉬운 말로 가르쳐 주어야 해요. 그러나 의지하는 것은 나의 말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전할 때에 그들의 마음에 부딪쳐서 그래서 하늘의 빛이 들어와 믿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죠. 전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 때에 큰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잘못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면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 잘 설명하며 그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은 성령을 의지하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예화)그러면서 예를 들기를 일제 시대 때의 최권능 목사님은 평양 거리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만 외쳤는데 그 중에 그 말씀을 듣고 찔린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 실제거든요. 그런데 제가 직장 다닐 때도 항상 서울역에서 똑같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렇게 빨갛게 망치발 들고.. 내가 수없이 봤는데 아무도 안 믿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만약에 그 때 그 목사님이 사람들이 더 알아듣기 쉽도록 설명을 하면서 왜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가게 되고 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지를 외쳤더라면 더 많은 사람에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겠죠. 그러니까 이 둘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 좋은 비유가 바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가지고 갔던 물맷돌이에요. 물매는 가죽 끈 같은 데 돌멩이를 얹어서 휘둘리다가 놓으면은 피육 하고 날아가는 것이거든요 이 사람은 늘 양치기를 하면서 이거를 돌리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골리앗이 나올 때에 그는 칼과 단창으로 왔지만 이 다윗은 물매를 가지고 나간 거죠. 생전 처음 나온 왜 이 사람이 갈 때에 생전 써 보지 않은 군대의 큰 창이나 아니면은 무기를 가지고 덤벼들지 않고 물매를 집어 던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그런 거는 예전에 사용해 본 적이 별로 없고 그리고 물매는 늘 사용하던 것이기 때문에 물매 들고 나간 거예요. 그 기술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죠. 그러나 다윗이 믿었던 것은 물매를 던지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던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런 자세가 필요한 거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물어요. 아이구 뭐 예수 믿는 게 그렇게 힘들어서야 그러는데 내가 묻고 싶어요. 무슨 힘을 그렇게 쓰셨길래? 무슨 힘을 그러게 쓰셨길래? 내 더 찔리는 질문 하나 할까요?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죄에 대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중요해요 이종 보통 면허 따는 사건이 중요해요? 대답을 해요. 전자가 중요해요 후자가 중요해요. 근데 세례 문답 공부를 우리 교회는 안 그래요. 그렇지만 세례 문답 공부를 더 열심히 해요 이종 보통 운전 면허 시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요? 창피해서 대답이 나오느냐 이 얘기에요. 아니 그런 정도도 싫으면 그냥 살다가 죽는 거지 뭐 힘들게 예수를 믿어요. 더 해 볼까요? 애들을 놓고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의 도리를 가르쳐야 되잖아요 부모가?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살아가는 일이 중요해요 아니면은 공중 도덕 지키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해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그러면 아이들 예절 교육 시키는 것 만큼도 하나님 진리에 대해서 안 가르치면 그게 사육이지 양육이에요? 삯꾼 부모지? 그러니까 그런 얘길 하지 말라 이 얘기에요. 얼마나 얼마나 힘을 써 보셨길래. 힘들어서 어떻게 예수를 믿냐 그러는데 쪼그만 일에 힘든 사람은 계속 못 믿는 거예요. 아니 뭐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이시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며? 아 그런데 그것도 안 하려고 해 가지고 뭘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겠느냐 이 얘기에요. 하나님이 눈을 주신 것은 성경을 읽게 하시며 그리고 귀를 주신 것은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입을 주신 것은 찬송하고 진리를 전하게 하심 위함이요 지성을 주신 것은 지성의 눈을 들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고 알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이게 주된 사용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거에요. 마늘을 마늘을 찌개에다 넣으려면 찧어야 되잖아요. 근데 어떻게 마늘을 찧어요? 아 칼등으로 이렇게 찧잖아. 아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칼 사러 갈 때에 칼날 안 보고 칼등 보고 그 나무 자루 보고 삽니까? 야 이거 진짜 나무가 넓적해서 마늘이 잘 빻아지겠다 이러고 사냐 이거에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머지 사용은 그거 그거하고 남으니까 쓰는 거에요. 하나님 찬송하고 진리의 말씀 전하고도 남으니까 말도 하고 밥도 먹고 시도 읊고 그러고 사는 거예요. 이 지성도 그런 거예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잖아요?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하여 지은바 된 존재들이오니 우리가 당신의 품에서 안식을 누릴 때 까지 쉼이 없었습니다.”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에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해서 복음과 복음 교리에 대한 충만한 이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저한테 물어봤어요. “목사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정말 감격하는데 우리가 어떻하면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잘 간직하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어봤는데 그러면 그거를 잘 가르쳐 줘야지 “아 그냥 해 보면 돼 십자가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게 그냥 저절로 돼” 이렇게 여러분 설교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다음엔 그 다음에는 그 복음이 그 그 진리가 왜 진리인지를 우리들이 깨달을수록 놀라운 기쁨과 감동이 우리에게 밀려오게 돼요. 그 다음에는 그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고민하게 돼요. 그러니까 이 교리의 설교를 막 쏟아놓게 되잖아요? 그럼 아주 그냥 아주 그냥 확연하게 무리가 둘로 쫙 갈라져요. 근까 뭐 여태까지 나온 교리 시리즈 무지하게 많잖아요 그쵸? 성화와 올곧음 그 다음에 뭐 성화와 싫증 그 다음에 성화와 헌신 뭐 회심 중생과 회심 뭐 이렇게 시리즈로 쫙 있잖아요. 뭐냐면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들은 막 이 교리가 너무 그 목마른 자에게 다가온 한 모금의 생수와 같아요. 그 감격이 확 밀려오면서 아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야지 왜? 평소에 주님을 위해서 잘 살아드리고 싶었는데 길을 탁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기쁜 거지. 근데 그게 없어요. 복음에 대한 감격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었어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살면 돼 이렇게 살면 돼 이렇게 살면 돼 하고 가르쳐 주면 어차피 심부름 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칼라로 된 약도 여러 장 내미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짜증이 나는 거예요. “아유 거기 아무도 못 찾는대” 그게 복음이지 어차피 가기 싫은데. “아유 그 홍수가 나서 다리가 끊어졌대.” 그럼 너무 신나는 거죠. 이렇게 해서 복음과 복음 교리에 대한 사랑이 하나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일생 동안의 의무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되면 이 복음이 항상 감격으로 다가오게 돼요.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한 감격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아드릴까 그 삶의 감격이 이어지게 돼요. 이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충만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해요. 이성의 잔재주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러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역사가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거예요. 믿음을 불러 일으켜. 어느 한 순간에 논리론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속에 확 믿어지는 거예요. 밀고 들어와. 아 나는 이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 주님을 꽉 붙들고 살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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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1 (2008/12/10, 수요예배)
4.복음과 인간의 영광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Ⅰ.본문 해설
사도는 복음을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는 누구도 직접 알 수 없는 지혜인데 그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 세계를 통해서 나타난 거죠. 그래서 창조된 이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만들어 진거죠. 우리들이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살던 집터, 그들이 만들어 놓은 도구들, 그들이 쓰던 많은 무기들이나 장신구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떤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어떤 사고방식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똑같이 하나님 자신은 우리들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가 있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우리들이 잘 보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죠.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한 뒤로는 하나님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보면서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게 되었어요. 알 수 있는 정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선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핑계할 수 없는 정도로 알게 된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보고 처음 창조되었던 인간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보다 뛰어났어요. 즉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 사물 등을 볼 수 있었던 거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분명한 모습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었어요. 그런데 타락하면서 둘 다 어두운 눈과 그리고 희미해진 하나님의 흔적을 보여 주게 되었던 거죠. 그러고 나서 거기에서 많은 오해가 생겨나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태양을 창조하신 것은 그 태양을 통해 빛을 내고 그 빛을 받아서 많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들이 생활을 함으로서 하나님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는데 사람들은 그 태양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태양을 숭배하는 종교들이 생겨나게 된 거죠. 또 어떤 사람들은 변함이 없는 태양보다 수시로 이지러졌다가 가득 차는 규칙적인 달의 변화를 보면서 더 큰 신비를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달 신이 태양신을 능가한다고 생각한 된 거죠. 그래서 저녁이 되면서 붉은 노을이 확 지면서 태양이 사라질 때에는 달의 신이 태양의 신을 피 흘리면서 이기는 거라고 상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달 신을 숭배하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놓인 문화적인 문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물고기를 어떤 사람은 동물을 어떤 사람은 또 곡식을 심지어는 돌멩이나 바위까지도 신처럼 생각하면서 섬기게 되었으니 그들이 그 신을 놓았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셨어야 할 자리다 이런 이야기예요.
Ⅱ. 창조, 구속, 완성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그 지혜를 모두 알 수는 없었던 것이죠. 타락하기 전에도 맨 이성만으로 창조된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에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들에게도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보다 죄가 없고 순전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역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은 그 당시 타락하기 전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믿음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도 믿으라고 그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셨던 것이죠.
A. 신적 지혜의 완성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의 창조를 통해서 두 가지를 보여 주셨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었어요. 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큰 권능을 나타내 보여 주셨지만 권능은 질서 있게 권능이 행사되게 하는 지혜를 보여 주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폭력이죠.
B.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하나님의 큰 권능이 질서 있게 행사된 창조의 과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마치 쓰레기를 확 부어 버리듯이 달하고 별하고 비벼서 바닷물도 섞고 그리고 흙도 섞고 새고 섞고 사람도 섞고 마치 빙수처럼 만들어서
시간 공간 속에 확 부어 버리시지를 않고 ‘빛이 있으라’ 그리고 ‘육지가 드러나라’ 그리고 ‘물에는 고기들이 있거라. 하늘에는 새들이 날거라. 씨 맺는 과목들을 내라. 하늘과 그리고 하늘에 광명들이 있거라.’ 이렇게 질서 있게 하나님이 명령하심으로 그럼으로써 이 모든 세계를 권능을 행하시되 하나님이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 번 봐라 그것 보다는 권능의 지혜로운 행사로 말미암아, 질서로운 행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있는 탁월한 지혜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던 것이죠.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이 탁월하신 지혜로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들도 탁월한 지혜로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를 공부하면 할수록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심에 대해서 그 탁월하신 지혜에 대해서 한없는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거예요. 탁월한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죠. 어떻게 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은 그런 하나님이 이미 보여주신 지혜의 흔적을 발견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식물학은 식물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가는 것이에요. 그 증거가 이 식물 안에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죠. 동물학은 동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를 찾아가는 거예요. 물리학은 물리 현상 속에 있는, 천문학은 천체 속에 있는, 그럼 천체물리학은, 물리는 물린데 천체에 있는 물리를 찾아 가는 거예요. 정치학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하는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찾아 가는 것이에요. 학문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지혜로서만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사랑으로 창조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배려가 얼마나 뛰어난 지를 설명하면서 제가 주일 학교 다닐 때 “야, 만약에 우리의 코가 거꾸로 돼있다고 생각해봐라. 비오는 날 우리는 참 얼마나 불편하겠니? 눈이 머리 위에 달렸다면 우리는 뭘 찾으려면 모두 고개를 숙여야 될 거야”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는 집에 가면서 몇 번 씩 코를 만지면서 ‘하나님이 뚜껑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 참 감사하게 생각을 했어요.
1. 창조와 타락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지혜를 보여 주실 때 지혜는 능력이 행사되는 질서였고 또 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흔적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되 사랑과 지혜안에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은 제일 먼저 창조 안에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인간을 또한 만드신 후에 하나님이 갖고 싶으셨던 관계가 뭐라 그랬어요? 사랑의 관계였어요. 지난 시간에 주일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마치 아무것도 필요없으시면서도 스스로 충만하신 분 이시면서도 인간이 필요한 것처럼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인상 깊은 이야기를 남기죠. ’하나님,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대체 무엇이길래 우리 같은 인간들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마치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라고 으르고 협박하시면서 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나이까.‘ 진짜 우리에게 사랑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불쌍해지나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마치 우리가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당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것처럼 ’너, 나 사랑하지 않으면 혼난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당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우리 인간 같은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 줄 정도로 그렇게 뛰어난 존재로 우리를 선대해 주시는 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거죠.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잖아요. 많은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죠. “아니,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을까? 안 만드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 뱀이 와가지고 선악과를 보여 주면서 이거 먹을 만하지 어떠냐? 이랬을 때에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으면 절대로 선악과를 안 먹었을 거예요. 뱀을 잡아 먹지. 뱀이 훨씬 맛있고 몸에 좋으니까. 아담과 하와가 실수한 거지. 한국 사람이었으면 사과를 먹겠어요. 정욕에 좋은 뱀을 먹고 말지. 근데 만들지 말든지 아니면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그럴 때 손을 한 번 딱 쳐서라도 범죄하지 못하게 하시지. 그런 반론들을 제기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거예요.
음식점에 가면 제일 짜증나는 게 인형이 문 열고 들어가면 ‘안녕하세요’ 그러고 인사하는 거죠. 그거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직장 생활 할 때는 명동에 냉면집이 하나 있었어요. 말하는 새 본 적 있어요? 구관조라고 있어요. 막 들어오면 분명히 인사하는 사람은 없는데 ‘안녕하세요’ 저 쪽에서 인사를 하는 거예요. 아줌마 목소리도 내고 어떨 땐 아저씨 목소리도 내고 막 내요. 저 쪽에 보면 새 한 마리가 새장 속에 들어가서 그러는 거예요. 심지어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그런 것도 있고 ‘빨리빨리’ ‘냉면 하나’ 별얘기 다해요. 그러니까 입력된 게 딱 그대로 여자 목소리면 여자 목소리 들어가서 그대로 나와요. 어떻게 과학적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들어가면 깜짝 놀라요. 이렇게 쳐다보면 새야.
하나님은 우리를 새나 감정이 없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신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신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타락하게 내버려 두신 자체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셔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손목을 잡아 비틀지 않고 자유롭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지혜와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그 창조세계 안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을 지으신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지를 하나님이 이미 보여 주셨지만 그것은 앞으로 인간의 구원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그 큰 영광과 찬란한 은혜의 빛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단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타락하고 한 순간에 죄가 확 들어오는 거예요 온 세상에 가득히 죄가 들어와서 이 세상은 마치 미친 것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임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여전히 질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창조시의 그 아름다운 질서가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없어진 거예요.
이번에 중국 갔다 왔는데 우리가 중국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어야 될 거 같아요. 보도된 거는 아주 일부구요. 지금은 올림픽에 집중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예 보도를 안 ?는데 지금 우기 쟎아요 지금 보통 염려가 아니에요. 요번에 가서 들은 이야긴데 마을이 하나 있었대요. 양쪽에 높은 산이 있었는데 지진과 함께 이 두 산이 합쳐서 하나가 된 거예요. 마을 하나가 헝겊 쪼가리 하나 안 남고 완전히 산과 산이 합쳐지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정말 너무 너무 가엾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죽어간 거예요. 뿐만이 아니죠. 이제 재난이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우리들이 무감각해져서 그런데 미얀마에는 아직도 하천에 시체들이 떠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가 의약품을 보내줬는데 너무 너무 비참해요.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들이 다 파괴된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의 탐욕이 질서를 잃어버린 이 세상의 질서를 더 망가뜨리면서 그러면서 탐욕으로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들을 더 어지럽히게 된 거죠.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물질세계 속에서 나타난 거예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보게 되면 이 자연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 때문에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 자연 세계와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고립되고 말았던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본래 나온 고향인 하나님의 품을 잊어버리게 만들었고 비참하게 되면서도 더욱 모질게 하나님께 반역하며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그렇게 비웃으며 그렇게 인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싶어서 몸부림치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죄가 들어오고 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다 망가지고 인간도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어요.
2. 구속과 완성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지고 파괴된 그 모든 어두운 세계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할 계획을 보이시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탁월함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드디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이 세상에 나타나 보여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나타난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지혜가 창조의 지혜보다 훨씬 뛰어나게 하나님을 보여주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아무리 들여다보면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지만 비참한 죄인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에요 얼마나 놀라워요.
Ⅲ. 지혜와 사랑의 핵심, 그리스도
오히려 인간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캄캄해진 그 어두움 때문에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들과 같이 나타났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는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연결하는 보석의 줄 같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한 후에 그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통해서 그것들을 실행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은 인간을 향한 당신의 뜨거운 사랑과 그리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철저히 망가뜨려 버린 이 세계를 회복하시고 그 안에 범죄의 당사자인 인간을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사랑을 찬란하게 보여주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은 성장하면서 엄마의 사랑을 언제 느꼈어요? 언제 느꼈어요? 어머니가 예쁜 옷을, 옛날에는 예쁜 옷을 사다가 꼭 설날 아니면 추석 때. 추석 때도 별로 안주죠. 설날 주죠. 큰 애들은 덕을 보죠. 작은 애한테 옷 물려주고 자기는 어차피 몸집이 크니까 새 거 사 입으니까. 그렇게 새 옷을 사서 입혀 줄때도 아, 엄마가 날 사랑하는구나 생각을 해요. 그리고 학교 갔다 오면서 배가 고파서 정신이 못 차릴 때 엄마가 맛있게 간식을 주거나 밥을 해서 줄 때 그걸 맛나게 먹으면서 그때 야, 참 어머니 고맙다. 그렇게 생가할 거 같아? 안할 거 같아. 그런데 사실은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알게 되는 것은 용서를 통해서예요. 그래서 자라면서 아이들을 야단치는 것은 좋은데 아주 확실하게 용서해 주어야 해. 그게 아이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알게 하는 비결 이예요. 아무리 좋은 선물을 많이 사주어도 그 사랑은 가슴에 아로 새겨지지 않아. 절대. 두고 보십시오. 절대 아로 새겨지지 않아. 그러나 잘못한 것을 용서해줄때 거기에서 깊이 부모의 사랑이 아로새겨지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똑같은 거예요. 온 세계를 다 주어도 하나님 고마운지 몰라요. 절대 몰라요. 요새 로또가 이백사십억 까지 올라갔다고 그래요. 한번 도전해 보면 어때요 제가 얘기 했죠. 그런 거 십일조도 안 받는다고 . 그 대신 회계하는 맘으로 다 내면 참작해볼 수 있어요 당회에서 의논해보겠어요 받을까 말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를 당첨되게 해주셔도 그 감격 오래가지 않아요.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생각이 나.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생각하면서 가슴을 막 에일 듯이 밀려오는 거예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고난 당하셨도다. 그 사랑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가슴에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을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 대충 살려면 더 이상 생각 안 해도 되는데 더 잘 살려다 보니까 내가 누군지도 알아야 되겠고 영혼들이 누구인지도 알아야 되겠고 교회가 어딘지도 알아야 되겠어요. 그래야만 우리 사는 것이 허공을 치는 것 같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배움이 필요한 거죠. 그런데 그 많은 지식이 있어도 마음속에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랭이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세상 지혜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다면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가슴 저미는 깊은 자각이 없으면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그렇게 우리를 구속하는 과정을 통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그 탁월한 지혜 그 탁월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눈 어두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이 되었는데 우리에게는 그 눈을 열어주어서 그래서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해주시고 남이 보지 못한 세계를 보도록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지혜, 그리고 그 탁월한 은혜의 세계를 보도록 만들어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거예요.
여러분, 잘 들으세요. 가장 훌륭한 설교는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 그리고 자신감 갖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면
(찬양) 놀랍다 주님의 큰 사랑 우리의 죄를 구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었네.
하나님 말씀 듣고 나면 아,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구나. 말씀을 듣고 나면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띄어나구나 그래서 나는 차라리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되는 구나 이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좋은 설교예요. 어디에 가나. 그게 영혼의 양약이 되는 설교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지혜와 사랑은 구속에서 뿐만 아니라 완성에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가장 찬란하게. 그 완성이 뭐냐 하면 인간의 구속의 완성 이예요 구원받을 인간을 모두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고 창조된 이 모든 세계를 타락한 인간의 악한 영향으로부터 모두 건져내셔서 창조의 본래의 그 찬란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여주시는 때. 인간은 죄로부터 구속되어 거룩한 상태가 되고 자연의 이 모든 세계도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상태에서 풀려나서 그 죄가 없던 때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모습들로 다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타락한 시대에 비춰보면 완성이지만 그 앞으로 영원무궁토록 불멸하는 인간과 함께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드러내게 될 그 무한한 점증하는 영광을 생각하면 과거에 대해선 완성이지만 미래에 대해선 시작이 되는 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되겠죠 “그럼 목사님,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찬란하게 보여 준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인간의 구속과 함께 하나님의 지혜와 사항은 다 드러난 것입니까” 아니에요. 인간의 구속을 통해서 인간의 구속의 완성을 통해서 다 드러난 것이 아니에요 그 이후에 영원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은 더 찬란하게 인간에게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에 가서도 그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찬란하게 꽃 피는 과정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그 영원한 세계에서 거치는 것이 없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방해하는 것이 없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그 영광 속에서 인간들은 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새롭게 발견하며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보십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저 좋다고 막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되요.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많은 소유와 높은 지위, 아름다운 미모, 젊은 육체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였고 아름다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후에 정말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제가 어렸을 때에 어느 집사님이 회심을 하신지 얼마 안 되셨어요. 그러면서 어린 저한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한테 말해요. 그때 서울 시내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22층이었는데, 조흥은행 빌딩이었어요. 광교에 있는 거(?). 저 빌딩을 줘도 하나님 사랑과 안 바꿀 거라고. 어린 내 생각에는 ‘어우, 그 빌딩이 얼마나 비싼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과 바꿀 수 없다고. 그게 뭘까‘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여태까지 생각하고 바라던 세상에 대한 생각이 하얗게 지워지면서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인간관이 생겨났던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그렇게 매일 매일 새로운 찬란한 빛을 보게 되는 거예요. 창조부터 시작해서 완성까지 영원무궁한 세계까지의 모든 계획이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지혜의 핵심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라 이거예요. 그리스도. 복음이라 이거예요. 복음이 뭐라 그랬죠? 비빔의 반대. 볶음? 이제 그만큼 했으면 외우세요. Jesus died for us.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게 복음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그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위하여서는 무슨 뜻이라고 그랬어요?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도다. 이게 복음이라고 그랬어요. 더 짧게 하면 뭐예요? 예수. 제일 짧게 하면 예수. 이게 복음 이예요. 이 복음은 아까 가르쳐 드린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저 완성과 종말과 저 완성에 이르는 이 모든 계획이 영원 전부터 있었고 영원 후 까지 계속될 터인데 이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사랑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하는 이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거예요. 그럼 왜 예수가 이 웅장한 우주적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핵심이 되느냐. 뭣때문이냐 하면 타락해서 갈 길을 잃게 된 인간이 그 타락했을 때 타락하자마자 누가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셔서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실지 보여주셨는데 그게 이렇게 이렇게 모여져 오면서 여기서 이렇게 모이는 거예요 여기에 이렇게 십자가가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다시 주욱 퍼져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의 구원이 확장되면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모이는 그 한복판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창조로 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잘 몰라요. 가보지도 않은 저 종말로 가도 몰라요. 제일 잘 알 수 있는 곳은 십자가예요. 십자가에서 찬란한 불꽃이 피면서 점점점점 주위를 환하게 하고 저 끝은 희미하고 이 끝은 희미하지만 거기서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속에 나타난 그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그 다음에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탁월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보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에요. 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니까.
Ⅳ. 복음과 인간의 영광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래서 여기서 영광이라는 의미는 무슨 뜻이냐 하면 중요하다 그런 뜻이예요.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한 사람이 영광을 받는다 하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존재. 그게 영광 이예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 예요? 우리는 항상 영광을 구하되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자기가 만족스러운 영광을 구하는 거예요. 그럴려고 하니까 하나님을 떠난 영광 밖에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정말 인간이 가장 영광스러울 때는 언제나 하면 하나님을 보여 줄때.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길을 걸어갈 때에는 그가 돈이 많아도 건강해도 젊어도 모두 추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는 항상 ’이 벌레 같은 나‘라는 고백이 있었고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나 더러워진 나‘라는 고백이 있었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는 참 예쁘고 아름다워요. 바닷가에서
쭈욱 날라가는 갈매기들의 한가로운 모습은 너무 예쁘죠. 파란 하늘, 에메랄드 빛 바다 그다음에 눈부신 모래알, 모래사장 그리고 하얗게 줄지어 일어나는 거품, 거기에 하얀 갈매기가 날아가요. 예뻐요? 안 예뻐요? 그런데 교회에 한 열 마리 쯤 날아왔다고 생각해봐요. 예배 시간에. 예쁘죠? 예쁘지 않아요. 절대 예쁘지 않아요. 왜냐하면 여기는 갈매기가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렇죠? 그게 바로 질서예요. 그래서 형이상학적으로 추함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의 이탈 이예요.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에서 이탈한 것이 그게 추함이에요. 그게 추함 이예요. 그 자리에 있을 때 제일 예쁜 거예요.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무 한 그루도 심어 놓으신 데가 있으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곳이 있어요. 거기가 바로 내가 존재해서 아름다운 곳이에요 타락은 그 자리를 떠나는 거예요. 구속은 그 자리에다 돌려놓는 거예요. 성화는 그 자리에서 온전하게 되는 거예요. 영화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찬란하게 흠 없이 티 없이 되는 거예요. 그럼 거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거라 이거예요. 주일날 갈매기는 바다로 가고 성도는 교회로 와야지. 성도는 바다로 놀러가고 갈매기만 교회로 모인다면 추하게 되겠죠. 그렇죠. 그렇게 해서 인간이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거예요. 그거는 우리의 영광인 동시에 누구의 영광 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이죠.
Ⅴ. 결론과 적용
그래서. 잘 들으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질 때조차도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의 성과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고 싶어 해요. 그런데 그것보다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은 있어야 될 자리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있어야 될 그 자리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그게 첫 번째 아름다움의 조건이예요. 아름다움의 조건이예요. 그게 아름다움의 조건이예요. 지금 여러분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다 가고 여기에 갈매기들이 와서 앉았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추하겠어요 그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바닷가에 이렇게 주욱 앉아 있을 때 그게 얼마나 추할까 그렇게 생각 안하잖아요. 무슨 소린지 이해 안가요. 그니까 주일날 갈매기들이 이렇게 줄지어 앉아 있을 때 그것은 정말 추할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 떠나서 어디 방황해서 놀이터나 야유회나 아니면 돈 버는 일터나 바닷가에 줄지어 주욱 앉았을 때 그것도 그렇게 추하다는 생각은 안하쟈나. 그것도 편견이라 이거예요. 잘못된 생각이라 이거예요.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자연 이예요.
때로는 거기서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시련을 당하고 고통을 받아도 거긴 가장 아름다운 자리예요. 가장 예쁜 자리. 그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답도록 지정해주신 자리이기 때문이에요.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이 충돌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요. 가장 아름다운 곳, 가장 예쁜 곳. 복음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이 우주 전체의 영원하고 무한한 계획 속에서 인간이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할지 누구를 사랑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사용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십자가 앞에서 보여줘요. 그래서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인간의 영광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사랑의 핵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5 (2008/07/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6 (2008/08/1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1 (2008/12/10, 수요예배)
5.복음 지혜의 본질(2)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 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8-10).
Ⅰ. 본문 해설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그 하나님이 복음으로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도 영광스럽게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사도는 이 8절부터 다시 복음의 본질이 육신의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신령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에 오늘 이 설교를 잘 듣게 된다면 이 복음이 우리에게 믿어지는 것이 우리의 자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Ⅱ. “이 지혜” : 복음지혜
A.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보여줌
우선 사도는 8절에서 “이 지혜는” 이라고 말합니다. 명백하게 이 지혜는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복음 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뜻입니다. 그러면 이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지혜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지혜다”라고 하는 것이죠. 인간의 모든 고민은 도대체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죠. 자기가 누구이며, 그리고 왜 여기 존재해야 되는가, 어디로부터 왔고, 자기가 누구이고, 또 무엇을 향하여 가고 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이러한 것들에 대한 답이 있을 때 인간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흔히 좋다는 말 사용 많이 하잖아요. 똑같은 핸드폰을 샀는데 그 사람들이 새로 나온 핸드폰이 있으면 옛날 핸드폰을 버리고 또 새것을 사요. 똑같은 집인데 좀 후진 집에 있던 사람들이 더 좋은 집을 사서 이사를 가려고 해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그것은 더 좋기 때문이에요. 왜 좋은 걸 더 좋아하죠? 그럼 여러분들은 좋으니까 이렇겠죠. 내가 묻는 것은 왜 더 좋은 집을 더 좋아하죠? 더 좋은게 그 물건의 목적에 더 맞게끔 해주니까 좋은 거죠. 그렇죠?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좋은 것은 사람들에게 많이 환영을 받아요. 오늘 신문에 보니까 그런 얘기가 났어요. 무기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늘 봤는데, 우리나라에서 한 2년 전에 새로운 탱크를 개발을 했어요. 그 탱크는 제가 보기에는 세계 최고의 탱크예요. 보통 탱크가 이렇게 그저 뭐 그런데, 이 탱크는 기계 얘기하면 한 없이 기니까 시간이 없어요. 성경 얘기해야지 탱크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하여튼 세계 최고의 탱크예요. 제가보기에는. 몇 가지 점에서 탁월한 데 다른 나라에서 만드는 탱크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탱크를 지난 10년 동안 연구해서 만들었어요. 탱크가 완전히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탱크는 우리나라 탱크밖에 없어요.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가요. 나오자마자 즉시 사격이 가능하고 3km까지 사격을 할 수 있고, 그리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명중 확률이 98%예요. 80km로 달리면서 쏴도 98%로 맞출 수 있어요.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 북쪽에 있는 탱크는 포를 쏴도 우리나라 탱크에까지 날아오지도 않는 거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맞출 수 있어요. 그렇게 최고의 탱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다른 나라 탱크를 쏴도 부숴지지 않는 그런 탄탄한 탱크를 만들고, 비행기만 만나면 밥이었는데 이 탱크는 탱크 안에서 자기를 공격하는 비행기를 향해서 미사일을 날릴 수 있게끔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최고의 탱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탱크를 10년 동안 개발한 비용이 2000억 이었어요. 근데 요번에 터키에서 당신네 탱크를 4대만 만들어주면 와서 우리한테 기술을 가르쳐 주면서 4대만 만들어 준다면 4000억을 주겠다고 계약을 했어요. 왜 그렇죠? 좋은 탱크니까. 탱크의 목적은 뭐죠? 지상에서 전쟁을 해서 적에게 파괴당하지 않고 적군을 많이 무찌를 수 있는 탱크이면 최고의 탱크죠. 근데 4대를 만들어 주는데 기술을 물론 가르켜 주지만 4대를 만들어 주는데 4000억을 주기로 했어요. 2015년까지, 그동안에 우리는 다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서 그쪽에서 탱크를 양산해 낼 때에는 그게 구식이 되도록 새롭게 다시 발전을 하면 또 그런 기술을 팔 수 있는 거죠. 미국이 하는게 그런 거예요. 더 좋은, 더 좋은 거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에 꼭 맞는 거예요. 탱크는 전쟁하기에 좋고 피격을 안 당하면 좋은 탱크죠.
그러고 총은 사람을 쏘기 위한 거니까 이번에도 총이 하나 새로 나왔다잖아요. 총을 쏘는데 총은 여태까지 보면 탕하고 쏘면 총알이 요만한게 나가서 사람을 맞춰 죽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힘든건 뭐냐면 시가전을 할 때 저쪽에 있으면 벽에 있으면 나와서 쏘다가 맞아서 죽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총을 개발했는데 여기에 모니터가 달려서 총만 이렇게 내 놓으면 텔레비전이 나와요. 적군이 있는데. 쏘는거죠. 이번에 개발한 거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고 저런 보이지 않는 벽 뒤에 숨어있으면 그 벽에다가 레이저를 쏘면 레이저가 돌아와서 거리를 즉각 계산을 해 주고, 그 다음에 총을 쏘면 총알이 날아가면서 돌면서 총알 그 앞에 유도탄처럼 전자칩이 달려서 레이저로 측정한 거리가 총알에 입력이 되요. 총알이 쭉 나가는 거예요. 저쪽 벽 뒤에 숨어 있으면 벽 뒤 3m 쯤 간 다음에 총알이 팍 하고 공중에서 터져요. 그러면 거기에서 수많은 총알 파편들이 날아와서 3~4 m 안에 있는 사람이 10사람이든 20사람이든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런 총이 나온거예요. 그래서 이미 벌써 전부다 시장이 끝나고 금년서부터 각 부대에 배치가 된다고 해요. 그것도 역대 최고의 총이라고 자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그 총은 굳이 사람을 겨냥할 필요가 없고, 4m 근처쯤에서 쏘면 어디서 총알이 터져야 되는지를 총알 자체가 계산을 해서 거기서 자기가 유도탄처럼 탁 터지는 거죠. 굉장하잖아요. 그런 총을 좋은 총이라고 그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다른 총은 가서 사람을 보고 맞춰야지만 맞추는데 이거는 사람 보지 않고도 쏘면 해서 맞출 수 있으니까 대단한 총알이잖아요. 전쟁통에서 총알을 2만 5천발 내지 3만발을 쏘면 한 사람이 죽는 걸로 통계가 나왔어요. 그러면 그런 총은 아주 적은 총알 수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으니까 좋은 총이죠.
그러면 숟가락이 좋은 숟가락이다. 그러면 밥 떠먹기에 좋은 숟가락이면 되는거거든요. 모든 것이 다 그런 그 쓰임에 만들어 있는데 제일 궁금한 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냐 이거죠. 어디다 써먹기에 좋으면 좋은 사람이냐, 이것은 그렇게 대답이 간단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죠? 그게 바로 이 세상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고 인간이 속해있는 이 세상과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 때 비로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만 올바른 삶이고 좋은 삶인가 하는 대답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인류가 생겨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고민했던 질문이예요.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왜 살아야 하고 죽음 이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그런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물건을 생산하고 그것을 많이 먹고 많이 쓰고 호화롭게 살고 그런 이것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종교가 생겨나고 그리고 철학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근데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무엇도 이것이라고 바로 보여주지를 못하는 거죠. 그래서 귀를 기울이고 쏟아져 나오는 인생의 갈 길을 묻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그 수많은 사상에 관한 책들을 보면 이 사람은 이 말을 하고 저 사람은 저 말을 하고 해서 도대체 누구를 따라가야 될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고, 그리고 그 이 세상 안에서 인간은 누구이고 인간중의 하나 영원히 다시 생겨나지 않을 단 하나의 존재인 나는 그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인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존재이고 이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 존재인가 하는 그 답을 이 세상의 철학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죠. 그것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하나님은 그런걸 이미 알고 계획을 가지고 세계도 창조하시고 인간도 창조하시고 그 모래알처럼 수많은 인간 중에 나라고 하는 존재도 만드셨을 것 아니예요? 하나님 안에는 그 모든 지혜가 있는 거죠. 그 지혜는 실로 성경이 사도바울이 고백했듯이 “깊도다 그 지식의 그 지혜의 부요함이여” 인간이 다 더듬어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신기하고 오묘하고 정말 헤아릴 수 없어요. 그쵸? 너무나 슬기롭고,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며 헌신적으로 산 착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죽음으로 불러 가시는가 하면 또 정말 천에 몹쓸 악하고 더러운 인간들을 이 세상에 오래 살려두시고 그들이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모독하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세요. 신실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데도 부자처럼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헤아릴 수 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 자신은 가지고 계실까요? 안 가지고 계실까요? 가지고 계시죠.
그래서 윌리엄 헨드릭슨이라고 하는 경건하고 아주 어린 아이같은 신앙을 가졌던 미국의 신약 학자가 있었는데 그분이 복음서를 주해하는 가운데 이렇게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의 일어남, 조리에 맞는 것 같지 않는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비단을 짜는데 비단 앞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다 찍히지만 뒤집어 보면 무엇인지 알아 볼 수 없는 실밥으로 가득한 것처럼 우리의 현세의 세계는 모순이 많아 보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은 신적인 지혜를 가지고 질서 정연하게 당신 계획을 짜고 계신다하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 북한에 갔을 때에 공항에서 중국에 공항을 거쳐서 오는데 거기에 면세품점에 비단으로 된 물건이 많아요. 생전 사지는 않지만 가서 한번 이렇게 뒤져보는데 정말 확인했어요. 아주 아름다운 이불보를 비단으로 수를 놓아서 짰는데 너무 예뻐요. 근데 뒤집어 보니까 진짜 볼 수 없을 정도로 온갖 지저분한 실밥들이 무질서하게 그렇게 널려져 있었어요.
우리의 인생도 그런거예요. 어떤 지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안 알려지고 영원히 감추어져 있고 하늘나라에 간다고 해도 우리들이 다 알 수 없는 지혜들이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놀라운 지혜는 무한하게 크지만 그 지혜의 핵심이 뭐냐하면 복음이에요. 복음. 복음이 뭐라고 했죠? 외웠나 못외웠나, 자 복음이 뭐라고 그랬죠? 어떻게? 알면 확실하게 대답해야죠. 복음이 뭐라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게 복음이예요. 그게 복음의 가장 짧은 한 문장이에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좀 더 정확하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렇게 하면 이것이 아주 훌륭한 복음이 되는 거죠. 그게 핵심이예요. 그러면 거기서 누구를 위해서 죽었느냐 왜 죽었느냐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느냐 등등의 이야기를 설명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핵심은 바로 복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렇게 고백하게 될 때에 그게 하나님의 지혜는 깊고 넓어서 인간이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하지만 핵심은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그걸 굳게 붙들면 이제 다 설명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야 했는가?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실 수 있었는가, 언약에 대해서, 다 그 설명을 조금 더, 조금 더 붙여나가게 될 때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진리의 체계가 되는 것이니 그게 바로 복음 교리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B.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
그런데 바로 이러한 복음이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말이죠. 인생이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지 그냥 고민을 많이 하고 그걸 찾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해서 사상을 섭렵했지만 아직 이것이 진리다 라고 붙잡지 못한 사람보다는 그런거 아무것도 몰라도 예수님이 나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구나, 그래서 내가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구나, 이 단순한 사실을 아멘하고 마음 깊이 붙들고 사는 사람이 훨씬 철학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훨씬 더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Ⅲ. 육신의 이성으로 알 수 없음
A. 이 세상의 관원들도
그런데 이 놀라운 지혜를 사람들이 모두 갖게 된다면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인 자기 자신의 존재의 위치와 본분을 올바로 깨달아서 거기에 부합되는 삶을 살게 될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가 못하죠. 사도는 이러한 사실을 뭐라고 얘기하냐면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또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육신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육신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다. 뭐가? 이 복음이, “육신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지혜다”라는 거죠.
그러면 육신의 이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이성도 이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도 있었기 때문에 그 신앙과 이성이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이 세상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등등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있었어요. 그 신앙과 그 다음에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하나씩 하나씩 원인과 결과를 추론해서 정리해 나아갈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이성이 있었어요. 이 두개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해서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은 왜 만들어졌으며 그 수많은 인간 중에 한 사람인 나는 왜 하나님이 빚어 놓으셨는가에 대해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죠.
그러나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이 신앙이 파괴되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러한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미련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영혼의 죽음의 상태예요.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들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자세를 갖기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이 마음이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는 이것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욕망에 의해서 심각하게 방해를 받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의 판단력은 아주 극도로 흐려지게 된 것이예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 학문을 많이 쌓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진 사람, 철학과 사상을 많이 이해한 사람도 이 복음이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어요.
B. 눈. 귀. 마음으로도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어요. 육신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모두 물질적인 것이고 육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인과 결과를 아무리 찾는다고 할지라도 물질을 넘어선 세계와 물질이 갖는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거죠.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가구는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다가 목수가 만들어서 칠하는 사람이 칠을 입혀서 그래서 여기에다 갖다 놨다, 그러나 그 나무는 목수가 이 책상을 만든 것은 나무를 베어다가 만들었지만, 그 나무를 누가 거기다가 심어놓았느냐 할 때에 산주인이라고 말하겠죠. 그러면 그 산주인이 그 나무를 심기 전에도 그 나무가 있었을텐데 그 그럼 그 나무를 맨 처음에 누가 만드셨는가, 이렇게 나아가면 그것은 대답을 찾을 수가 없죠. 왜냐하면 작은 나무의 씨앗이 묘목으로 자라고, 묘목이 큰 나무가 되고, 큰 나무가 목재가 되고, 목재가 가구가 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다 찾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있어라 하고 창조하실 때에 그렇게 창조됐다는 사실은 이러한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연결이 끊어져 버리는 거죠.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그 끊어진 연결 너머와 관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만물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기동하고, 그리고 생명을 지니게 되는 거라는 말이죠.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을 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그것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존하는 것 아니예요? 근데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눈은 이제 죄로 말미암아서 어두워져서 보지를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뭐냐하면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신랄하게 중세의 기독교 철학을 비판한 것 가운데 하나가 “존재의 유비”라는 하나님 존재 설명 방식이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인간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닮았는지를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등한 사물부터 시작을 해서 고등한 사물에까지 다 설명해 나아가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사실을 믿지 않았어요. 소위 analogia entis 라는 그 존재의 유비를 그래서 천년동안 내려온 존재의 유비(類比)를 다 버립니다. 이것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고, 인간이 맨 이성으로 아무리 많이 심사숙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분이 계시고, 그리고 우리는 양심을 따라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거기까지만 알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지만 인간이 핑계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신성이 모든 만물에 명백하게 나타났으니” 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그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진정한 앎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맨 이성을 가지고 이 사물들의 이치를 깨닫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론해 나가서 결국은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믿게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들을 우리들이 증거하고 발견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위해서 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었고 그런 것 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정녕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구주라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놀라운 증거들을, 그 아름다운 질서들을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을 이미 믿는 우리의 마음속에 감격이 더해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이 세상의 만물들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었고, 그런 것 몰라도 충분히 하나님을 충분히 믿을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의 위대하고 선하심, 아름다움을 더 많이 알고 그 분을 높이고 경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이 세상의 학문 속에서, 또 이 세상의 사물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 안에서 발견해 가는 거죠. 그러니까 그 모든 배움 자체가 하나님을 믿기 위한 배움이라기보다는 이미 믿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배움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때 인간은 아주 빨리 학습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언제 교리를 배우면 제일 재미있게 배우냐면 회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넘칠 때 하나님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뜨거울 때 그때 교리를 배우면 이 머리가 굴러가기 전에 마음이 먼저 굴러가요. 아멘 아멘 아멘 하는 거죠. 은혜가 떨어져서 교리반에 이제 들어오게 되면 까칠한 거죠. 그래서 뭐든지 한번 꼬치꼬치 캐보고 나중에 안될 때 안되더라도 한번 찔러보는 거죠. 아멘, 아멘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 교리가 믿어지게 되는 거란 말이죠.
Ⅳ. 성령으로 보이심
근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그러냐면 육신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뭐라고 그랬냐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이 성령으로써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거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러한 복음 지혜가, 복음 진리가 믿어지지 않는 거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황당한 거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또 무슨 인간이 아담이라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나는 맛본 적도 없는데 나도 도매급으로 같이 형벌을 당해야 된다고 하고, 그러고 무슨 그래서 내가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날 대신해서 죽었고, 아 이게 이 자다가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같이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거죠. 우리 모두 한때 그랬죠. 세상이 유치하기 그지없는 종교가 기독교다. 맨 처음에 제가 기독교를 철이 나서 대했을 때 그런 느낌이었어요. 뭐냐면 이건 사람들을 안 믿게 하려고 작정한 종교구나, 사실이 그렇더라도 슬그머니 뒤에다 감추고 처음에는 믿어지는 것을 이렇게 하다가 조금씩 하다가 한편이 되면 그 다음에 믿기 힘든 거를 믿게 해야지. 뜬금없이 예수님 아십니까? 알죠. 사회 시간에 배웠는데. 2000년 전에 못 박혀 죽으신 죄가 지금 당신의 죄 때문에 못 박힌 겁니다. 뭔 소리예요? 나는 그렇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믿어지지 않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으로서만 이것이 우리 마음에 믿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들이 요새 고린도전서 13장을 하고 있잖아요. 그죠. 근데 처음에 시작하면서 은사와 은혜에 대해서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지만 이게 그 산을 옮기고,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있고, 신앙의 비밀스런 세계를 보고 뭐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게 신비한 게 아니라 이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 자체, 복음이 믿어지는 것 자체가 최고의 신비예요. 이것은 그 어떠한 은사보다도 탁월하게 뛰어난 거예요. 이런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이렇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거예요. 이게 놀라운 거예요.
맨 처음에 인간은 논리적으로 볼 때에 죽은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이 예배시간에 기도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그러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죽어버린 죄인, 이미 죽었던 그래서 성경은 “너희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너희들을,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너희들을” 그게 우린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죽은 사람들이었어요. 육체는 죽으면 아무것도 못하지만 영혼은 죽으면 죽은 행실들을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죽음의 의미와 영혼의 죽음의 의미가 틀리기 때문이에요. 육체의 죽음의 의미는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고, 호흡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게 죽는 것이고, 영혼은 그런 식으로 창조된 영혼은 그런 식으로 죽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영혼은 죽음이라는 의미가 육체의 죽음하고는 달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그러한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영혼의 죽음이라고 그러는거죠. 끊어졌어도 영혼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죽은 체로 살아있기 때문에 말이 좀 이상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은 체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영혼은 행실들을 만들어 내는데 하나님과의 생명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삶들은, 생활들은, 열매는 죽은 행실들이예요. 육체의 각양 탐심들이 만들어 내는 아주 저열한 욕망의 산출들 이런 것들이예요.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숙명적으로 죽은 행실밖에는 쏟아놓지 못하며 사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거예요. 이거는 누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인간을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거죠. 이렇게 인간을 거듭나게 할 때 두 가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요. 그게 하나는 성향의 변화예요. 그 성향이 뭐냐하면 사랑의 성향이 생겨나게 되요. 사랑의 성향이 생겨나게 되요.
아까 그 우리가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집사람하고 옛날에 살아온 고생스러운 때의 얘기를 이렇게 했어요. 근데 참 한 25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20여년만 거슬러가도 우리는 늘 가난한 동네에서만 살았거든요. 지금도 뭐 부자 동네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한 집에 7~8 가구씩 세 들어서 살고 화장실을 한번 가려면 아침에 줄을 서야 되는 그런 집에서 살았는데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악악대면서 그렇게 살았는지 몰라요. 그래도 어쨌든 그런 날들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니까 주위에 사람들에게 우리가 참 친절하게 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어요. 그게 바로 사랑이 시키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온유함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해 유익한 존재가 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예요. 그래서 마음속에 사랑이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용당할 때 그렇게 기쁜 거예요. 이걸 또 오해하면 안되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있게 될 때, 그때 그렇게 기뻐하게 되는 거죠. 그게 마음속에 은혜와 사랑이 있을 때의 일이예요.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게 있으면 그 충만한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아주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성향을 지니게 되는 거죠. 그게 사랑이예요. 이거는 중생과 함께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회심과 함께 중생하고 거듭나게 되면 이 세상이 모두 다르게 보이는 거예요.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차게 되니까 변하게 되는 거죠.
또 하나의 변화가 오는데 이것은 뭐냐하면 감각의 변화예요. 이것을 새로운 감각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 새 감각은 뭐냐하면 예전에는 전혀 없었던 아주 새로운 감각이 중생과 함께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 감각은 육체의 감각이 아니라 육체의 감각은 뭐 중생한다고 해서 그렇게 변하는게 아니죠. 돼지고기 싫어하는 사람이 거듭나고 나니까 갑자기 좋아지고 그런거 없어요. 이런거는 육체의 감각은 그대로 있는데 영혼의 감각이 깨어나는 거예요. 그 영혼의 감각은 뭐냐하면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감각, 그리고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예수께 속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 이것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A. 중생과 “새 감각”
그런데 그러한 예수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선하심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가 성경의 진리예요. 그래서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 선하심과 자비를 보여주는 엑기스예요. 그러니까 거듭나고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게 됐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계속 가르쳐주면 그 영혼이 쭉쭉쭉쭉 자라는 거예요. 이 신앙이. 사랑과 믿음이 이런 것들이 쭉쭉쭉쭉 자라면서 아주 강건하고 훌륭한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는 거죠. 그러한 새로운 감각을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그렇게 기뻐하게 되는 것이죠.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 하나님에 의해 빚어진 지극히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하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모래알같이 수많은 인간들 중에 나를 창조하셨구나 하는 감각이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예전에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그렇게 감격을 하게 되는 거예요. 1월 달에 눈 두 쪽을 수술했잖아요. 근데 처음 며칠 동안은 참 무지하게 감사했는데, 요새는 벌써 식어서 깜짝 놀란게 뭐냐면 수술하기 전에 크림색으로 보였던 교회의 모든 색깔이 알고 보니까 하얀색이었어요. 그리고 도대체 누가 등을 수없이 달아놨는지 교회당이 대낮같이 밝아요. 눈이 흐려서 안보이니까 다른 사람도 나처럼 어두려니 하고 계속 등을 달라고 해서 완전히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쳐도, 바느질을 해도 될 정도로 그렇게 많이 달아서 요새는 계속 끄라고 너무 밝다고 눈부시다고 그러고 다니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게 하나님이 이런 영적인 감각들을 딱 뜨게 해 주실 때, 그때에 남녀노소, 학력 이런 거는 아무 상관없어요. 아주 어린애들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감각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말하자면 그런 걸 발견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거죠.
어린아이들 속에 이런 일들은 더 아름답게 생겨나게 되죠. 아이들은 이게 전부다 표현을 못하잖아요. 근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렇게 다 주님을 믿고 회심하게 되고 거듭나게 되면 그 아이들의 눈에 비친 그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나는 그런 애들을 참 많이 봤어요, 주일학교 사역사면서. 근데 걔네들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서 그렇지 너무 기뻐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던 풀포기 하나, 돌멩이 하나, 하늘의 구름, 새,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그러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별로 느끼는 게 없어도 엄마가 가르쳐 주면 그렇게 말하잖아요. 근데 그거를 자기가 진짜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는 사실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새기게 될 때 그 감격이 얼마나 큰거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큰거겠어요.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환경교육을 그런 식으로 시켜야 해요. 그리고 사실 미래의 환경교육을 책임져야할 중요한 소명이 교회에 있어요. 교회에서, 스위스란 나라가 그렇게 그룬투비나 이런 사람들이 개척자적인 생애로 이제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지저분한 땅이었대요. 말도 못했대요. 그 후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나라가 되었잖아요. 호숫가에 가면 우리는 컵라면 봉지, 나무젓가락, 무슨 담배갑, 별 오물들이 다 발견되는데 거기는 일체 없어요. 그래서 꽃잎 떨어진 거 몇 장 굴러다닐 정도지 전혀 그런거 없어요. 이거 어떻게 했냐, 아이들 교육을 시켜서 철저하게 어려서부터 이 아름다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교육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 말로는 산에 올라가서 우리는 밥을 안 해먹고 내려오면 산에 간 의미가 없잖아요. 그죠? 먹으려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거기는 산에 가서 밥을 해 먹는다는 개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샌드위치 정도 싸가지고 가서 먹고 쓰레기 넣어가지고 오는 거예요. 우리는 삽겹살에 된장찌개까지 끓여먹고 와야지 직성이 풀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그런 성경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 속에서도 그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자비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중생과 함께 생겨나게 된 이 새로운 감각은 복음을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복음만큼 하나님이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낮고 이 비천한 나라는 인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게 별로 감격스러울 수가 없잖아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으시고, 또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나라는 존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시고 그리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나에 대해서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거죠. 중생으로 깨어난 새로운 감각은 그 복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나를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나같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찬란한 자비의 용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근데 그 모든 아름다운 일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는 거죠. 그리스도 예수의 중심성이예요, 그게.
B. 그리스도의 중심성
그래서 참된 복음적인 깨달음, 참된 복음의 깨달음을 통한 영혼의 변화와 그렇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중심성에서 보면 되는 거죠. 오늘날 무슨 관상기도니 무슨 신비체험이니 하면서 영적인 많은 것들이 있잖아요. 내가 언제는 설교를 하겠지만 많이 혼란스럽잖아요. 그죠? 그 중에서 그것들을 잘 분별해 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어요. 우선 급한대로 몇 개만 가슴에 두면 분별하는데 좋을 거예요. 어떤 사람이 열광하고 놀라운 체험을 했을 때 그에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가, 이게 첫번째 검증이예요. 아니 난 그런건 모르지만 하여튼 들뜨고 놀라워 그러면 이것은 참 성령으로 말미암는 참되고 순수한 은혜의 작용이 아닐 수가 있는 거예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가, 두 번째는 뭐냐하면 그리스도가 그 모든 깨달음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있는가, 세 번째는 사랑하게 되는가, 사랑이 넘치게 되는가, 사랑이 넘치게 되는가, 그래서 어떤 신령한 경험을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진리에 대한 명백한 깨달음에서 시작되고, 그리고 그 모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가장 중심부에 예수가 계시고, 그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온유해지고 오래 참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은혜의 경험이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중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감각을 주신 사람들은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만, 그 중에서도 성경,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이 복음적인 사실들 속에서 가장 하나님의 아름다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것을 발견할수록 기뻐하게 되고 발견할수록 행복하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놀라운 복음지혜의 본질이 신앙없이 접근하는 누구에게도 차단되어 있는거예요. 누구도 이 아름다운 비밀, 이 복음의 비밀, 이 사랑의 비밀, 이 은혜의 비밀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의 눈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신비한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바로 이 복음 지혜의 본질인 복음을 굳게 붙들고,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통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우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우리 인간의 의무를 배우는 것이예요.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하신 분이시고 그 탁월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신지를 깊이 깨닫고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문이예요. 그래서 이 복음은 그렇게 한두 번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이미 다 띠었다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놀라운 요소들을 이 안에 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복음 그 자체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간단한 선언이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알아가는 복음의 교리는 끝이 없이 무궁무진 한 것예요. 이 두 가지를 모두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알았다 할 수 있는 것이니 어떤 의미에선 우리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복음을 이미 안 사람이지만 그런 복음 교리들을 여전히 배워 가야 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우리는 아직도 복음을 안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에게 있는 그칠 수 없는 소원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그리고 그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묘사했으니 그는 일평생을 달려가도 알 수 없는 지식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예요. 우리 그리스도인도 바로 그런거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졌고, 그리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 있어요. 이 비밀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적인 신앙생활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보다 더 존귀하고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배워가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수록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할수록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비록 높은 철학적인 지식, 그리고 수많은 사상들의 번뇌가 우리에게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또렷하게 그리스도 예수 한분을 바라보고 믿고 사랑함으로 그 길을 따라 복음 교리를 배우며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그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사람들이 미처 가지 못했던 그 아름답고 보람있는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예요. 이러한 지혜를 하나님은 교회에 위탁하셔서 교회를 통해서 그것들을 나누어 주시고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할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교회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서 이런 하나님의 복음을 선명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의 방황과 그 고독의 몸부림 속에서 돌이켜 돌아오게 하고 그래서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끔 그렇게 돕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고, 어느 시대에는 교회가 이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말씀이 아주 풍부하게 그 교회로부터 쏟아져 나왔고, 어떤 때에는 말씀은 쏟아져 나오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쓰레기와 찌꺼기 같은 사상들이 교회를 통해 토해내듯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 시대의 세상은 너무나 불행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 시대에 그런 진리들을 수없이 쏟아내어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 이후에 오는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복음 안에 돌아와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본분을 다 하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그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그래서 인생을 사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우리들이 취해야 할 행동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받은바 이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늘 감읍(感泣)해야 하며 그러면서 매일 매일의 삶이 감사의 열매가 되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5 (2008/07/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6 (2008/08/1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1 (2008/12/10, 수요예배)
6.복음지혜와 성령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0-12).
Ⅰ. 복음지혜를 알게 하심
이어서 사도는 이러한 지혜가 결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지혜나 혹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어떤 뛰어난 것을 통해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 인간에게 알려 주시는지 그것을 여기에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지혜는 이미 앞서 여러 시간에 걸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복음 지혜입니다. 즉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그리고 우리가 누구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하는가 하는 이 모든 총체적인 지혜, 이세상의 철학과 사상이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그 지혜 그것이 바로 복음 안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 한 내용이 이 사실과 관련을 이루지 않습니까. 저는 다시 이 하나님이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거 하나는 이 지혜는 우리가 누구이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지혜라고 하는 것이죠.
복음을 우리들이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미래에 지옥을 갈 우리들이 천국을 갈 수 있기 때문에도 기쁜 소식이겠지만 그보다도 더 그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복음을 들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 복음은 가장 짧게 말하면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것이 복음이요 이것을 좀 더 길게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이렇게 길게 얘기 할 수도 있고 더 길게 얘기 할 수도 있죠. 아주 길게 얘기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는 것이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인간 홀로 놓고만 보아서는 이게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가 없고 그리고 이것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가 없고. 왜? 모두 분해해봐야 물같이 흐르는 피와 살코기 몇 점 그리고 뼈다귀. 이것만 나오니까 그것만 봐가지고는 알 수가 없는 거죠. 무엇보다도 더 궁금한 건 이 인간이 무엇에다 쓰는 물건인가예요.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저마다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거죠. 그런데 아무 것도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으면 엄청난 혼란이 생겼을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막 뒤죽박죽되어 버릴 테니까 최소한 인간에게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을 비슷하게 갖게 하셔서 그래서 서양에서 나쁜 짓이 동양에서도 나쁜 짓이 되고, 경상도에서 못된 짓이 전라도에서도 못된 짓이 되게 하고 우리 어렸을 때에 착한 일은 지금도 착한 일이 되게 하시고. 조금씩이야 계속 변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선악의 판단은 유지하게끔 하나님이 만드신 거죠. 그러나 그것만을 알아가지고는 인간이 충분히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선과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이게 왜 악한 지 이게 왜 선한 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언젠가 어떤 교회에 갔더니 어떤 분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강사를 갔더니, 그래서 둘이 앉아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서 명함을 주셔요. 장로님이. 나는 뭐 그런 명함 같은 거 별로 안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보니까 대한민국 사법연수원장님이예요. 그러니까 사법고시 합격한 학생들 데려다가 2년 동안 가르쳐서 법관 만들고 판사 만들고 그러는 거기에 말하자면 원장님이죠. 그리고 거기에 높으신 분이죠. 그래서 이제 밥을 먹으면서 그 분하고 무슨 얘기를 해야겠어요? 법 얘기를 해야지. 사법고시.. 그래서 법 얘기를 주욱 하면서, 저녁밥 먹는 내내 법이야기만 했어요. 그래서 나도 잘은 모르지만,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성경도.성경도 잘 안다고 말하면 안 되지. 여러분의 신앙을 가리키는 거야 잘 알지 다른 거 뭘 알겠어요? 그래도 사람하고 앉았을 때 뭐 서 너 시간은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쟎아요. 그죠. 그래서 이제, 그래야지 얘기가 통하지. 그래서 저기 헌법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민법 이야기 그 다음에 우리나라 절차법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중국법과 우리나라 법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했는데 주거니 받거니 한 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왔길래 내가 이야기 했어요. “장로님, 이 법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데 그런데 법은 선한 걸 잘하기 위해 만든 게 법인데 그런데 그 법을 만들게 하는 법 너머에 있는 그 절대적인 기준 즉, 어떤 법은 보면서 이건 좋은 법이다 이건 나쁜 법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그 근거는 뭡니까? 그러니까 ”그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셔요. 그러한 법에 선하고 나쁜 것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결국 두 가지로 나뉘어요. 두 가지 설로 나뉘거든요. 하나는 뭐냐 하면 실정법 사상이라고 해서 ‘그런 건 없다’ 그런데 같이 살고 있는 한 공동체가 한 나라가 ‘자 도둑질 하지 말게 하자. 이거 하면 가두자. 그래서 한 5년 동안 콩밥 먹이자. ’ 그리고 요거를 죽이면 이놈도 죽이자‘ 그렇게 이런 식으로 약속을 하면 그게 그 법의 근거라는 거예요 그런 사상인데 그게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었는데 20세기에 수많은 제국주의들이 출연을 하면서 나쁜 법을 만드는 거예요. 나치나 이탈리아 파시스트나 일본의 군국주의 같이 법을 만드는데 그런데 막 다른 나라 깔보고 군국주의 체계.이런 나쁜 법을 만든다는 거죠. 그러나 나중에 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그 법이 시행되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고 사형 당하고 고문당하고 하는 일이 일어나니까 야, 이건 옳지 않다. 그래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자연법사상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사람이 법을 만들기 전에 이미 이 속에 절대자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게 누구냐 이거죠. 그래서 밥을 다 먹고 나서 슬며시 도덕적 통치 한 권을 꺼내서 ’잃어 보십시오. 하면서 줬어요. 어쨌든 그 분들이 그런 책들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고. 결국은 뭐예요.
그 책이 이야기 하는 것은 선악이 뭐가 선악이냐, 그 책이 이야기 하는 건 뭐냐 하면 창조의 목적이에요. 인간이 악하다는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도 무엇에 쓰는 물건으로 하려고 만들었는데
그 쓰임새대로 안 살면 악이야. 그 쓰임새대로 살면 선이고. 근데 하나님이 무슨 쓰임새대로 만드셨어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한 방식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게 선이예요. 너무 간단한 답을 성경은 우리에게 뚜렷하게 주는데 그래서 여러분에게 늘 이야기 하는데 열린교회 와서 꼭 들어야 될 시리즈가 ‘천지창조의 목적’이예요. 작년에 설교한 세 개짜리를 급한 대로 들어도 좋고 가능하면 그 세 개짜리 듣고 그 다음에 2004년도엔가 한 그 천지창조의 목적 여덟 개짜리 테이프를 좀 머리가 아프더라도 다 들어야 돼요. 그래서 분명한 생각을 가져야 돼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무엇에다 쓰는 물건으로 만드셨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뭐냐 하면 복음이라는 거예요. 복음이 뭐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것을 더 짧은 세 글자로 하면 십자가가 되는 거예요.
A. 십자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를 지은 죄에 대해서는 심오하게 형벌을 내리셔서 그래서 처참한 형벌을 가하시는 그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면서 죄지은 인간은 정말 하나님 앞에 이미 영적으로 죽었지만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철저하게 형벌을 받고 죽게 되어 있는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잘 들어봐요. 그러면.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실 수 있도록 형벌을 내리실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인간을 죄를 지었을 때에 죽일 수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죽여야 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이 그 하나님 앞에 어떤 책임을 지고 있다라는 이야기 아니예요? 받은 것 없이 책임을 질 수 있어요? 그럼 무슨 이야기예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며 산 것에 대해서 존재가 멸절될 정도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라면 그것으로서 인간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증명해 주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십자가 하나에서 창조를 따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한과 권리를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를 지었고 지금도 그 씨를 받은 우리들이 죄를 짓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 그래서 그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어야 한다라는 사실을 그 십자가가 다 보여준다 이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는 뒤로는 구약을 다 보여주는 거야. 십자가 하나로 뒤를, 구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죽이신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예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러면 그것 하나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려 했다는 사랑을 보여 주고 그렇게 살리셨으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셨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거란 말이죠. 그게 구속의 목적이에요. 창조의 목적을 실패했기 때문에 구속을 통해서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하니까 구속의 목적은 창조의 목적의 연속이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하나를 통해서 이쪽으로는 구약을 다 보여주고 이쪽은 신약을 다 보여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에 의해서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될 때에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해 지는 거예요. 네가 늘 이야기 하지만 이런데서(강대상 위에 십자가를 들어서 밑에 부속을 빼시며) 이런 부속이 하나 빠졌어.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 그럴 때 이걸 처음 보는 사람이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이걸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이걸 보여줬어요. 그리고 이게 이렇게 돌리면 요기 이렇게 돌아가서 요렇게 요렇게 돌아가면서 이게 이렇게 고정되는 거라고 하는 것을 조립을 해서 보여주면 ‘아하, 그거구나’ 그러면은 여기에 있는 이 나사가 좋은 나사라고 하는 것은 끝이 뾰족해서 사람을 폭 찌르기에 좋다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은 끝에 사탕이 묻어서 빨아먹으면 달콤하다든지 이런 게 좋은 게 아니라 요기에 이렇게 구멍에 잘 들어가고. 들어간 이거는. 이게 이 속에 들어가서 ‘아 이게 똑바로 들어가서 딱 고정될 수만 있다면 아 그게 좋은 거구나.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는 이 종에 쓰는 좋은 나사를 골라 보시오 하고는 죽 갖다 놓고는 끝이 뾰족한 놈, 돌멩이로 만든 놈, 그 다음에 종이로 만든 놈, 설탕 칠한 놈, 빨간 놈, 파란 놈, 노란 놈. 보석으로 깎은 놈 다 갖다 놔도 그 수없이 다르게 생긴 나사를 보면서 항상 좋은 나사를 고를 때 뭐냐 하면 이거를 고정시킬 때 사용되는 용도를 생각하면 딱 이거를 고르는 거야. 그게 굳이 금으로 만들 필요도 없어. 거기다 설탕 안 발라도 괜찮아. 그 속에 붙은 걸 누가 빨아 먹겠다고. 그러면서 이 나사가 어떤 게 좋은 것인지 하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어오는 거야. 근데 이게 이 속에 드라이버가 들어갈 수 없게끔 밋밋한 머리를 하고 있다면 그게 좋은 나사일 수 있겠어요? 나쁜 거죠. 그렇게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도 전혀 복음이 들어 올 때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십자가의 복음이 딱 들어오고 나니까 인간도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인간도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에 창조하셨구나. 아,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리고 죄를 지었구나.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구나. 그래서 인간은 갈 길을 잃어버렸구나.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를 딱 들어서 보게 되니까 이제는 이게 무엇에 써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예요.
그 기준을 놓고 보면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하면 딱 나오는 거예요. 예전에는 돈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왜? 하다못해 빌리더라도. 보증을 한 번 서줘도. 그지. 그런 사람하고 사귀어야지 뭐 생기는 게 있지. 만날 손가락 빨고 있는 사람하고 만나서 교제해봐야 돈 꿔달라는 얘기 언젠가는 분명히 나올 거라 이거지. “어, 오래간만이야. 그지?” “ 어, 오래간만이야” “ 한번 만나야지” “ 그래야지. 돈 좀 있어?” 전화 털컥 끊는 거 광고 나오잖아. CF에. 옛날에는 그런 거 인간이 어디다 쓰는 건지 몰랐을 때에는 얼굴 예쁜 거, 얼굴 예쁜 사람 그런 것만 이렇게 탁 보는 거야. 그렇게 이쁘면 뭐할 건데.
거, 뭐 맨날 두고 볼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 자기하고 같이 살 사람도 아니고. 살아봐야 6개월이라고 그랬잖아. 그렇게 생각을 한거야. 최고 공부 잘하는 사람, 뭐 하는 사람, 뭐 수없이 기준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는 그게 아, 그게 아니구나, 그게 아니구나. 그럼 뭐야. 인간이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데 그렇게 쓰여지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 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구나. 그런 판단이 딱 생겨나는 거야. 그 시선을 갖고 딱 보니까 우리 아빠가 나쁜 사람이야. 그럼 그 사람 좋은 사람으로 변해야 되잖아. 그래서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야. 그 기준을 갖고 딱 보니까 우리 남편이 나쁜 사람이야. 그래도 버릴 순 없잖아. 하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기도해서 고쳐서 쓰는 거야. 그렇게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만약에 선하고 악한 것이 인간의 신장이나 돈, 외모 이런 것에 달렸다면 사람 맘대로 그렇게 바꿀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참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남자고 여자고 키가 작고 크고 신체에 장애가 있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영혼과 정신과 마음에 달려 있는 거라 그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바꿔 놓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 뭘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그 사람을 그렇게 바꿔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뭐냐면 모든 사람이 선하게 될,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복음 안에서 발견하는 거야. 그게 희망이 되는 거죠.
주일날 마지막 예배를 드린 사람은 내 예화를 들었을 텐데. 그지? 지난주에 우리 교회 성도님 한 분이 하늘나라 가셨거든요. 4년 전에 철저한 불교신자였어요. 온가족 교회 오는 날 와서 주님 딱 만나고 아주 신사적으로 자기 다니던 절에 가서 ‘내가 아무리 다녀 봐도 뭔지 몰랐는데 교회 가보니까 세상사는 이치가 있습디다. 작별 인사합니다‘ 그리고 교회 왔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일평생을 나쁘게 살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람이 선하게 변화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인간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거예요. 그때에 인간이 비로소 탁 깨닫게 되는 거죠. 아,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는데 다 갖다 놓고 열어 보니까 이게 여기 쓰는 물건이란 걸 딱 안거야. 내가, 아, 그런 존재였구나. 그런 존재였구나.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보다는 뛰어나고 하나님 보다는 못한 존재이구나. 그리고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이렇게 쓰시려고 만드셨구나. 그거를 깊이 깨달으면서 그때에 인간의 자존감이 생겨나게 되는 거야. 비교할 이유가 없는 거야. 왜? 하나님이 내가 귀하고 내가 꼭 필요하다고 그렇게 사용하시는데. 리더십에 있어서도 참 탁월한 게 뭐냐 하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일을 하는데도 그 사람들을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 그게 리더십이야. 그게 뭐냐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과 더불어 일하는데 그 사람과 일하면서 ’나는 우리 이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나 없으면 우리 사장이 쓰러진대. ‘ 이런 착각을 다 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야.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 닮게끔 그렇게 이끌어주는 거죠. 그런데 인간의 자존감이 그런데서 또렷하게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너무 더러운 죄인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도 나를 구원하고 싶으실 정도로 그렇게 내가 소중한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거야. 그러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는 너무나 분명해 지는 거죠. 너무나 분명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그 옛날 사람들이, 그러니까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배고픈 땅에서는 안 나와요. 먹고 살만하고 밭 갈아줄 사람 있고 시간이 나니까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까 밥 먹는 것만 가지고는 못살겠는 거야. 나는 왜 살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우주는 도대체 무엇일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꾸 딴 생각을 해야지만 그런 게 나오는 거거든요. 헛된 생각을. 그런데 거기서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그 답이 바로 인간들이 그렇게 찾고 싶어 했던 지혜란 말이예요. 지혜. 그래서 철학이라는 말이 필로소피아. 지혜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지혜가 바로 이 지혜예요.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무엇을 참 지혜라고 말하고 인간들이 인간을 어디서 왔다고 말하고 인간들이 인간을 누구라고 가르쳐 주고 인간들이 인간을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 가 그리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머리가 터지는 거예요. 왜? 이 양반은 이 말하고 저 양반은 저 말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불행해진다 하는 그 길을 그 사람은 걸어가면서 그게 행복의 길이라고 이야기 하고. 머리가 터질 정도로 수없이 별의별 소리들을 다 떠드는 거예요. 개똥철학이라 이거예요. 결국 그거를 배워 가지고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하는 것을 명료하게 깨달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정도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무나 소수이고.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 지혜를 한 번에 확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십자가가 원래는 뭐하던 거였어요.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던 그 십자가였어요. 요즘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할 때 전기로 많이 죽여요. 그래서 의자에 사람을 묶고 몇 만 볼트의 전기를 의자에 확 통하게 하면
한 번에 죽으니까 고통 받지 않고 가장 낫잖아요. 옛날에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교수형이었어요. 그래서 사형하는 날이 되면 사형수를 끌고 가서 그래서 유원을 남기게 하고 그리고 단 위에 올라가게 해서 여기에 이렇게 올가미가 내려오는 거죠. 그리고 스위치를 누르면 바닥이 텅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매달리는 거죠. 30분이면 죽거든요. 정확히 30분이면 저 쪽에서 관에 씌워져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사형수를 매달은 오랏줄을 들고 다니면서 “누구든지 이 밧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이 밧줄은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시는 표요, 그가 목매어 죽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 때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측은하게 생각할 거예요. 왜? 아무도 이해될 수 없는 그런 정신병자 같은 생각을 하는 거니까. 이미 그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 세계에서 종교화 된, 상징이 된 지금의 문맥에서 보면은 이런 이야기가 절실하게 실감이 안나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십자가, 스타로우스라고 하는 그 십자가가 로마인들이 거론하기 조차 불쾌해하는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말로 육실할 놈, 육시, 육시가 뭔지 하세요? 몸을 여기, 여기, 여기, 여기, 머리, 해가지고 여섯 군데로 묶어요. 그리고 거기다 밧줄은 매달아. 그리고 큰 황소를 매달아 여섯 개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거지. 몸이.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 없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이런 육실할 놈’ 그런 소리 되게 많이 들었거든요. 요즘은 그래도 그런 말 잘 안쓰더라구요. 그래도 그게 그림을 그려 보면 정말 끔찍한 이야기거든요.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거거든요. 말하자면, 육실할 놈이라고 하는 것도 지금은 그런 걸 하는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사형당하는 사람을 보이기 위해서 공개처형을 할 때 반역자의 집안이나 그런 사람들을 육시를 했단 말이예요. 그런걸 또 사람들은 보러 가잖아요.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인간에게 있는 호기심 때문에 가는 거예요.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내장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육실할 놈 할 때에 조선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그것과 십자가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보면 돼. 문맥적으로 보면.
B. 성령으로써
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그러고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뒤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내게 자랑할 것이 없노라. 내가 그 십자가를 지노라. 그러니까 이게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이미 로마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 자체도 싫어하거든요. 그 십자가 제도를 내가 묘사할 수 있는데 안하겠어요. 들은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소름끼칠 정도의 사형 방법이에요. 그런데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믿는 거는 인간의 힘으로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믿은 거와는 비교도 안 되게 그 당시에는, 우리는 십자가 그러면 목에 달고 다니고 교회 붙이고, 적어도 거부감은 없잖아요. 그런데 만약 교회 위에다가 그렇게 막 육시를 해가지고 갈기갈기 찢어진 그 테러를 당한 시체 그 모습을 걸어 놓고 그게 우리의 구원, 그렇게 죽은 누군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었다고 그럴 때 사람들이 받아들이겠어요? 그러니까 지금의 문맥이 아니라 이 당시 문맥으로 돌아가 보면은 인간이 이 십자가를 볼 때에 아예 처음서부터 안믿어야되겠다 라고 하는 반감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믿어지는 사람은 아주 쉽게 얘기하면 제정신으로 믿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그게 어떻게 믿어진 거예요? 신들려서 믿은 사람이라고 예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는. 성령이외에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 성령이외에 그 지혜를 알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십자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걸 전해주는 거예요. 그럼 생각해보세요?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게 훈련을 덜 받아서 그래요? 다 쓸 데 없는 소리예요.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어떤 청년이 옛날에 내가 전도사때 그런 얘기를 해요. “ 아, 전도사님, 제가 헌금하는 훈련이 안돼서요. 훈련이 된다고 그게 되는 게. 어떻게 훈련을 시키겠어요? 훈련을 해서 되는 방법 있으면 나 한번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요즘 교회도 어려운데. 훈련 많이 시켜서 1단계, 2단계, 3단계 계속해서 훈련을 많이 시키면 헌금을 많이 할까요?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주님 앞에 깊이 깨뜨려져서 내가 받은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고 하는 은혜의 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 가르쳐 줄 필요가 없어요. 제가 회심하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난 다음에 제일 괴로웠던 게 뭐냐 하면 내게 바칠 것이 없다는 거. 오죽하면 내가 생닭 한 마리를 누런 봉투에다 담아다가 교회에다 갖다 바쳤어요. 실화에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예배 끝난 다음에 그거 가져다가 그거 가지구 그 날 저녁에 병든 환자 심방 가셔서 이거 우리 김남준 청년이 헌금한 거라구 그러구 갖다 줬어요. 진짜예요. 나두 그걸 어디서 구했거든요. 돈이 있으면 돈을 내지, 그걸 왜 복잡하게 시장에 가서 닭을 사다 그 피 뚝뚝 떨어지는 걸 내겠어요? 비닐봉지도 없어가지고 내 잊혀지지도 않아, 그 누런 봉투 그 비료봉지에 이렇게 싸서 잘 묶어서 예배 끝난 다음에 ”목사님, 이걸 제가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같으면 아마 황당해하겠지요. 그런데 황당해하지도 않으셔요. ”아, 그럼 이걸 어떻게 하냐, 주님은 직접 못 드시고. ‘ 그러시더니
“아, 야, 지금 아무개 집사가 병에 들어 누워 있는데 우리 그 집 심방가자.” 그래가지고 “ 이거 우리 교회 새로 나온 김남준 청년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건데 이게 청년이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는 거요.” 그분이 그거를 끓여먹었어요. 그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여도 변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뭐, 예수 믿으면 잘 사는 방법이 있다고 그러더라. 예수를 믿으면 꿈이 생긴다. 그러더라. 그리고 뭐, 예수를 믿으면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서 안 되던 일도 된다고 그러더라. 이런 것들은 수 없이 듣는데 눈이 팍 열리면서 ‘나라는 인간이 어디다 쓰는 물건이구나.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죄를 지은 인간이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존재인데 근데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셨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선한 사람으로 만드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목적을 이루게 하시려고 그래도 나를 이 온 우주를 아름답게 하는데 하나의 나사로 나를 쓰시려고.’ 똑같은 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드셨구나. 아, 그렇구나’ 이런 깨달음은 죽었다 깨나도 안 오는 거예요. 그건 안 오는 거예요.
절대 안 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그런 거 있어요. 하나님이 내 사업 밀어주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이런 거는 있어요. 이런 거는 있다 이거예요. 그런 거 있어요. 그런데 그게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여러분, 작년인가 언젠가 뭐 백만 부가 넘게 팔린 엄청나게 인기를 끈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 있잖아요. 이런 얘기 하면 그 분에게 너무 가혹할지 모르지만, 저는 목사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그 사람 크리스천 아녜요. 그런 책이 한국교회에서 도배를 하는 거예요. 절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만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확신해. 다시 반복해요. 만약에 조엘 오스틴이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나는 그 사람하고 절대로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난 그리스도인 아니예요.그리고 그것도 기독교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쏟아져 나와 가지고 그걸 어느 교회에서는 단체로 5백 권을 사가지고 나눠준데. 그게 뭐냐면 양들을 잘 먹이다가 어느 날 청산가리 가져와서 물 타서 꼴에다가 막 뿌려가지고 먹이는 거야. 그걸 먹고 뭐가 되려고 그래요?
우리가 너무나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고는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오늘 분명히 얘기하잖아요. 이 세상에 있는 관원도 알 지 못한다 이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현자도 누구도 그 영광의 빛을 볼 수가 없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볼 수 없게끔 막으신다 이거예요. 볼 수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수없이 교회 다녀요. 교회 다니면서 이런 저런 거 활동하면서 교회 다니지만 교회 다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자가 된 사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거예요. 그리고 나아가 나라고 하는 인간이 어디다 쓰는 물건이가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 간증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예수님께 기도했다니 병 낫게 해주시고 돈 많이 벌게 해주시고 사업도 잘 되게 해주시고 또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더니 내가 이런 것도 되고 이런 것도 되고 막 그러더라. 이런걸 아무리 많이 해도 그건 이런걸(시계 나사를 집고). 아무리 색칠을 하고 파고 길게 만들고 짧게 만들고 그것에 대한 설명이지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라 이거예요. 그렇잖아요. 내가 잘 못하던 사업인데 교회 나와서 생각 좀 똑바로 하고 사람들에게 좀 친절하고 그러면 당신도 잘 될 거라고 그래서 태도를 바꿨더니 장사도 잘되고 그리고 뭐도 잘되고 뭐도 잘되더라 치자 이거예요.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되는데.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요. 잘 사는 사람하고 안사는 사람하고. 그런데 그게 궁극적으로 우리가 불행한 게 그런 것 때문에 불행한 건 아니잖아요. 우리들이 불행한 건 그런 것 때문 아니잖아요. 자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지독한, 저녁때 잠자리에 들었는데 막 머리가 터지는 것 같고 온 몸에 막 식은땀이 나는 거예요. 잠을 자서 누울 수 없을 정도로 막 허파가 튿어질 정도로 막 기침이 나는 거예요. 그리고 막 콧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뭐가 된 거예요? 감기몸살이 걸린 거 아니예요? 그런데 콧물이 못나오게 여기다 휴지를 틀어막았다던지 기침 안 나오게 해줬다든지 땀이 안 나오게 해줬다든지. 아마 나는 의학은 잘 모르지만 그,러면 안될 거예요. 감기에 걸렸으면 덜덜 떨리고 콧물이 나오고 그 다음에 기침이 나오고 이래야지 되는 거지, 뭐 속에 증상은 하나도 없고 감기만 잔뜩 걸렸다 그런 거 없잖아요. 그럼 핵심은 뭐예요? 지금 콧물 안 흘리고 땀 안 흘리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아, 땀 안 흘리는 거야 그저 활딱 벗겨 놓고 위에서 에어컨, 선풍기를 서너 개 틀어 놓으면 땀 못나오겠지. 그런데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 뭐예요? 그 질병을 치료하는 거잖아요. 그 증세만 가지고 싸울 게 아니라. 그런 간증 속에는 그런 치료책이 아니라 이거예요. 그런걸 보여 주는 건 뭐냐 하면 우리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 같은. 아니, 지금 바빠 죽겠는데 십자가가 무슨 상관이냐는. 이런 바빠서 죽겠고 힘들고 괴롭고 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증상이라 이거예요. 그럼 그 복음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문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거지요.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그 지혜를 갖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머리 굴리고 철학책 뭐 별 난리를 다해도 소용이 없어요.
제가 회심하기 전에 고등학교 1학년 말로부터 시작을 해서 회심하고서도 꽤 많이 읽었어요. 그 상당한 기간 동안에, 저는 뭐, 그 사춘기 기간 동안에 몇 번을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이니까. 왜 그랬냐, 뭐 가난하기도 했지만, 집에 돈이 없기도 했지만 뭐 그런 정도로 자살할 정도는 아니고. 그러면. 인간으로 살아있는 게 너무 견딜 수 없이 힘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인간으로 살아있는 게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회심하기 전에도 저 풀들을 되게 부러워했어요. 저 풀들은 생각도 없이 태양빛 마시고 그냥 쭉쭉 크다가 죽어 버리면 아프지도 않을 텐데. 아침에 일어나도 인간이에요.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사람 저 사람 책을 수없이 읽어봤어요. 그게 그때는 다 쓰레긴데 지금은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도움을 주고 있는 거예요. 그게 쓰레기라는 걸 아니까. 그런 사람들이 몇 십 년, 몇 백 년에 한 번 씩 나오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정신의 사람들이겠어요. 근데 뭐냐 하면. 자기도 행복한 거 갖질 않더라 이거예요. 자기도. 그걸 읽어 보면서 이 사람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정말 행복했구나. 이런 사람이 없더라 이거예요. 그럼 뭐예요? 자기가 써 봐도 안 되는 약을 누구에게 먹이겠느냐 이거예요.
그게 내가 회심전의 모습이었어요. 어디 손바닥을 치고 무릎을 치게 해서 아, 하고 감탄을 하게 하는 사람들은 가끔 있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이렇게 살면 행복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주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만약 있었더라면 내가 기독교에 귀의를 안했지. 절대 신앙을 안 가졌겠죠. 없어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나에게 그렇게 체계적으로 뭐 엄청난 걸 가르쳐줬겠어요? 내가 처음 교회 나가서 문 드리는 교회가 쉰 세 살에 무인가 신학교 나와서 목사 되신 분이고 전직은 정치 깡패 하시던 분이었어요. 어떤 때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국어가 잘 안 돼. 그래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사도바울이 나의 생명이 부음이 되고 이런 게 나오는데 이게 관제로 부음이 되고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제사 위에 액체로 뿌려 드리는 그거잖아요. 그런데 한 시간 내내 부고장 예기 하시는 거예요. 부음. 왜, 신문에 나오잖아요. 누가 죽었다는. 부고장 얘기만 한 시간 내내 계속. 아가서 설교 하다가 ‘네 유방은 쌍태 노루 같고’ “우리 교회에 유방 하면 조집사지.”하고 조집사 가슴 이야기를 사십분 동안 계속 하는 거야. 실화예요. 조금도 보태지 않은. 그 속에서 무슨 번득이는 체계적인 기독교의 진리나 그런 게 뭐가 있겠어요? 유교예요. 그분은 유교 신자였어요. 유교 사상가였어요. 그런데 그 체계적으로 가르쳐준 수십 명의 사상가와 철학자를 통해서는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내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티끌만큼도 덜어주지를 못했어요. 오히려 찢어지고 가슴 아픔 내 가슴에 알코올을 들이부었어요. 소다를 들이붓는 것 같이 그렇게 헤집어 놨어요. 요즘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면서 세상사상 얘기 하는 거 요즘 읽는 책이 아니라. 요즘 내가 그런 거 읽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 시절에 한 참 우그적 우그적 먹던 거 그런 거예요.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프리드리히 니체 전집이라고 해서 스물 몇 권 나왔거든요. 그거를 그 어린 시절에 다 읽었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을 그 어린 시절에 그 스물두 권중에 상당한 권수를 열 권 이상을 그 대작들을 다 읽었어요. 그리고 새빨갛게 줄을 치면서 읽었어요. 기억도 안 나지만 그 때는 막 박수를 치면서 읽었어요. 그러면서 와, 인생을 이렇게 사는 거구나. 난 바보같이 살았구나. 근데 뭘 행복하게 해줬냐. 자기도 길거리에서 객사하고 죽는데.
다 헛된 거예요. 제 말을 믿으세요.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 있어요. 다 헛된 거예요. 그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해. 절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왜? 거기에는 지혜가 없어요. 절대 없어요. 그 속에 지혜가. 근데 그런 황당한 교회에서 제가 뭘 배웠겠어요? 뭘? 세례를 받는데 세례 어떻게 해야되냐고 그러니깐 그냥 문답집 하나 주면서 그냥 읽고 오라고 그래서 가서 문답을 하는데 나는 시험이라고 그래서 되게 떨었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 맞지?” “ 네” 이런 식이야. “ 예수님이 너 위해서 죽었지?” “ 예” 잘 모르겠다고 그러면 가르쳐 주는 거야. 그러니 거기서 뭘 배우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체계적으로 가르쳐 준 천재들의 글을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것을 아는 거예요. 십자가를. 십자가도 이렇게 체계적으로 설명 안 해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짓는 많은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사실 우리를 죽이셔야 됐는데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신 죽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잘 믿어야 됩니다’ 그거예요. 그거 하나가 들어오니까 탁 깨트려지면서 그러면서.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제가 그렇게 남의 얘기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쉽게 믿는 사람이었으면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책들을 들여다보면서. 요즘에 컴퓨터 게임 하고 그런 애들 주면 아마 읽지도 않으려고 할 거예요.
어떤 거는 뭔 소린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새까맣게 줄을 치면서 읽어. 그러면서 감격하면서 읽었어요. 그 때 뭐 고등학교 1학년 뭐 이런 애가. 근데 뭐냐 하면 , 그래도 나름대로 얼마나 논리에, 읽으면서 논리에 닳고 닳았겠어요? 그런데 이 천 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종교에 뭐 좀 해보려고 그러다가 실패해가지고 사형당한 사 대 성인 중에 하나가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죄 때문에 죽었다고 그러고. 그리고 뭐 그렇게 죽어서 우리에게는 구원이 있다고 그러고. 그리고 뭐 그러면 성령님이 쑥 들어온다고 그러는데, 그걸 사기도 비슷한 사기를 쳐야지 그걸 사람들이 고지를 듣지, 그 때에도 복음 진리를 딱 대하면서 드는 생각은 뭐냐 하면 어쩜 이 세상에 있는 종교 가운데 이렇게 되지도 않는 방법으로 포교를 하려는 종교가 있을까. 뭐 그래도 처음에 제시를 하려면 인간이 알아듣게 살살 사탕발림 하다가 살짝 집어넣어야지. 그런데 뭐냐면, 이 천 년 전에 죽은 사 대 성인 중에 하나가 네 죄 때문에 죽은 거다. 그걸 믿으면 그 분이 온다는 거야. 이 속에. 그게 말이 되냐 이거야. 무슨 애들 장난이냐 이거야.
근데 그게 믿어지더란 그거예요. 믿어진 다란 표현은 좀 그렇지만, 그게 그렇다고 이해되더라 이거예요. 그게 뭐예요? 믿음이 왔기 때문에 그게 이해가 된 거죠. 누가 한 거예요? 성령님이 하신 거죠.
십자가를.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것이 십자가라 이거예요. 십자가에 대한 아무리 유려한 변증을 쓰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글을 쓰고 해도 그것을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거듭나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그게 절대 이해될 수 없는 거라 이거예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에요. 머리를 벽에 짓찧으면서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에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에요. 아, 그렇구나. 하는 수긍조차도 불가능한 거예요. 불교는 그래도 수긍이 가능해요.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는 그게 불가능해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복음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알게 하시는 방법도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에 속하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그 지혜를 믿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니까 믿은 게 아니라 믿으니까 알게 되는 거죠. 믿으니까 알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그런 얘기 뭐 한 번 들었겠어요? 정말 황당한 인간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한 순간에 닫혔던 마음이 확 열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그 전 단계가 있어요. 대부분 천천히 열려요. 어느 날 밤새도록 공부를 하는데 새벽에 안개가 하얗게 내렸는데 집 뒤로 들판이 있었어요. 그 들판 한 가운데 교회가 있었어요. 지금은 아파트에 묻혔지만. 그 종이, 뎅그렁 뎅그렁 하고 치는 거예요. 근데 그 종소리가 쫙 들려오는데 마음이 형언할 수 없이 그 종소리를 들을 때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거예요. 막 죄에 대한 회개가 나오고 그러는 게 아니라 마음이 평안해요. 그리고 막 가보지도 않은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막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아,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는 구나 그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어느 한 순가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여 지는 거예요. 아직 설명할 순 없는데 먼저 만나주시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였어요. 펑펑 울면서 처음으로
(찬양)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그리고 그 때는 교회에 가면 십자가 찬송만 그렇게 많이 불렀어요.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런 찬송을 들으면서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정리가 안됐는데 어느 한 순간에 회개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러고 나의 모든 인생의 모든 불행이 목자이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성경을 막 깔보고. 동생이 교회 잘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불러가지고 성경이 얼마나 공갈인지 얘기해가지고 교회 못 다니게 했거든요. 뭐 못가게 압박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 버리게. 그런 죄까지도 다 회개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돼요? 내가 눈으로는 안 보이는데 그 분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지고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울게 하시고 나를 기쁘게 하시는데, 이건 만지면서도 이거 가짜 아니야? 이거 내가 착각이 아니야? 이럴 수 있지만 영혼 속에 와서 내 마음에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은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무슨 역사예요? 성령의 역사예요.
그러면. 훨씬 더 많이 해야 하는데 오늘 이 정도에서 끝낼게요. 그럼 마지막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왜 이렇게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도 왜 이렇게 ‘ 아, 그거구나. 나라는 인간이 바로 이런데 쓰는 물건이구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데 쓰는 물건이구나. 나라고 하는 인간이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쓰시려고 만드셨구나.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쓰셔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중 하나를 이루게 하시려고 그 험난한 길 죽지 않고 살아오게 하셨고 여기에서 주님을 알게 하셨구나. 아!’ 하는 감격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거든요. 그게 있으면 잘 살고 못 살고, 남자로 살고 여자로 살고, 길게 살고 좀 짧게 살고, 건강하고 병원 좀 다니고, 못 생기고 잘 생기고 하는 것은 그냥 이 세상사는 동안에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면 다 예뻐.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고 지체들을 딱 보면은요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또 그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아도 코나 귀 그런 거 변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그게 뭐냐면 은혜가 떨어지면 그 자글자글한 주름에 인생의 시련 고통 짜증 분노 이런 것 밖에 안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주름 사이에 그 인생을 살아온 경륜과 지혜, 그리고 주님에 대한 간절한 소망. 하늘나라에 기쁨을 바라는 눈동자. 이런 모습으로 변하면서 그 사람으로서 충분히 아름다운 거예요. 그렇게 변화되는 거예요. 그렇게 그게 더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돈 떨어져서 밥 끓여 먹을 수도 없어서 예수님 찾은 사람도 있지만 우리 모두 그렇게 해서 예수님 찾은 거 아니거든요. 먹고 살만하고 그리고 몸에 질병 없고 그래도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고 너무 괴로워서. 저처럼. 그래서 문 두드리고. 그리고 교회에 들어왔는데 그러면 선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아. 인간이 그런 존재였구나.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홀로 있어서는 알 수 없는 존재이고 관계에 의해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규정이 되는구나. 하나님이고 사람이고 교회이고. 그런 것이었구나.
그런 깨달음이 오게 하려면 수많은 객설을 늘어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십가가예요. 십자가를 설교하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줄 때 무엇을 설명해도 그 중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될 때 그 때 그 십자가가 어느 한 순간에 성령의 역사로 심령에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어두운 눈이 열리고 ‘아, 내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 볼 때에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뭐예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거, 참회하는 거 밖에는 없는 거죠. 그러니 오늘날 그런 진실한 회개가 사라져 간다고 자꾸 걱정들을 하는데 십자가에 대한 설교 없이는 절대로 회개 안한다 그거예요. 절대로 회개 안한다 이거예요. 당신이 복 받고 못 사는 건 모두 당신이 성경을 통해서 요령을 못 배우기 때문이다 라고 할 때에 사람이 가슴을 치며 회개를 하겠느냐 이거예요. 이 사람이 당신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더니 저렇게 부자가 되었더라 그럴 때 가슴을 찢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것은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 안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거든요. 그거거든요. 그런데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것은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한없이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게 뭐예요? 성령의 강력한 역사예요. 성령의 강력한 역사. 성령의 강력한 역사예요. 그거는 그 사람의 심령을 깨우는 거예요. 그거예요.
그런데 그 성령의 역사는 표시가 나게끔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요렇게 요렇게 만들어 놓으면 이렇게 일어날 것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에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복음 지혜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그게 그 가슴 속에 믿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에요. 그러니 어떻게? 우리는 전하기만 된다 그게 아니라 성령님이 그의 마음속에 어느 한 순간에 찬란한 빛과 함께 아멘 하고 믿어지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전심으로 그 영혼, 잘 살고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해도 결코 개선될 수 없는 그 영혼의 병적인 증상을 아파하면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그 말씀, 복음을 전하는 곳에 있도록, 그것이 우리 복음 전도자들이 전하는 것이든지 내가 전하는 것이든지, 내가 보여 주는 삶이든지 선교의 선명한 설포든지 아니면 책을 읽는 것이든지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인터넷을 이 시대에 발견하게 하신 것에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이것을 통래서 인류의 쓰레기 같은 더러운 것들이 많이 전파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전달을 하는 역할도 하는 거예요. 한 3년 전에 있었던 일이예요. 나도 알지 못하는 여성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여성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이를 데리고, 남편은 어디 출장도 다니고 그런 거 같은데, 뭐,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몇 통 받은 편지의 분위기가. 어머니하고 아이하고 같은 방을 쓰는데. 이 글을 쓴 여자 분은 삼십 대 후반 정도 되는 자매예요. 자는데, 어머니가 교회 다니시는 신자예요. 자는데, 새벽에 가끔 아이 때문에 눈을 떠서 얼핏 보면 어머님이 주무시지를 않고 새벽 1시쯤 슬그머니 일어나서 저 웃묵에 앉으셔서 컴퓨터를 보신다는 거예요. 컴퓨터를.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났는데 어느 날 어머님이 거기에서 새벽에, 밤잠을, 분명히 잘 때는 같이 잤는데 그런데 어머님이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우시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매는 전혀 교회에 나간 본 적이 없는 생불신자예요. 그런데 이 어머니도 별난 분이예요. 우리 같으면 며느리 예수 안 믿으면 교회 나가라고 막 그랬을 텐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으면서 “어머니, 도대체 밤마다 일어나서 뭘 보세요? 야동을 보는 것도 아니고. 뭘 보세요?” 말을 안하더래요. “너도 궁금하면 한 번 들어가 봐라” 그리고 우리교회 사이트를 가르쳐 주더래요. 그런데 이 자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안 오고 ,그것도 하나님의 역사지. 말똥말똥하고 잠이 안 오더래. 그래서 일어나서 어머님이 누르시던 거기를 티카닥하고 눌렀대요. 그래서 좌악 펴지는데 기가 막히게 복음 전도 설교가 나온 거야. 그런데 그거를, 그 설교가 길잖아요. 옛날 거는 더 길잖아요. 한 80분 정도 되는데. 이 자매가 그거를 듣는 거예요. 그래도 일생을 살아왔는데 인간이 그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듣는 순간에 한 번도 교회 안 나간 사람 마음속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그렇게 처참하게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그 밤에 믿어지더라는 거예요. 거기 엎드려서 한없이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한 거야. 할렐루야.
그게 뭐예요? 분명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강한 역사. 비유를 하자면 칼이 십자가의 복음이라면 그걸 들고 휘두르는 장수의 손은 성령 이예요. 그 손에 붙들려서 그 검에 휘둘려 질 때 사람들은 그 칼에 맞고 자아가 꺾이고 피 흘리고 쓰러져서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거예요. 그로부터 정확하게 두 달 후 교회를 정하고 출석하고 있노라고 편지가 왔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게 뭐예요? 십자가와 성령 이예요
교회가 이 두 가지만 다른 개혁이 문제가 아니예요. 장로를 더 엄격하게 해서 틀림없는 사람을 뽑자, 그것도 좋아요. 아, 그리고 뭐, 목사를 뽑을 때는 최소한 이런 자격을 갖고. 좋아요. 교인 등록을 받을 때도 아무나 받아주지 말고 뭐 어쩌고 저쩌고. 뭐 다 좋아요. 그리고 위원회도 만들고 뭐도 만들고. 좋아요. 그리고 뭐, 한 번 나온다고 교인으로 받아주지 말고 유예기간을 주고. 다 좋아요. 그리고 교회에서 예산을 썼으면 그거 자기네끼리 하지 말고 공인회계사 감사 받고. 그거 다 좋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거 급한 게 아니야. 더 급한 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선명한 복음. 그걸 전할 때 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황당한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어느 교회에 가서 십자가를 설교했는데. 잊혀지지도 않아. 교회도 크지도 않아. 이백 명 모이는 교회였는데. 아주 열심히 십자가 설교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열심히 듣고 있는데. 저 쪽에 있는 사람이 부시럭 부시럭 부시럭 해. 한 오십 살 쯤 먹었어. 궁시렁 궁시렁 대. 십자가를 설교해서 교인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는데 벌떡 일어나더니 다 듣게 “에이 씨” 그러고 나가버리는 거예요.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시면 많이 듣지 않아도 어느 한 순간에 막 밀려오면서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올렸던 나름대로 인간은 나름대로의 개똥철학을 가지고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엉성해. 그런데 그게 어느 한 순간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같지도 않은 인생의 철학을 믿으며 살아와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자신에 대해서 깊이 실망하는 거예요. 자기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거예요. 자기와 헤어지는 거예요. 이제껏 나는 너를 믿고 살아오다가 이렇게 내 인생이 엉망이 되었는데. 나는 너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미워. 이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 거야. 그 분에게서 배울 거야. 그 분의 사랑 안에 살고 싶어. 그 분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어. 그리고는 꽉 붙드는 거야. 그 때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와 계신 게 느껴지는 거야. 충만히 오셔서.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Ⅱ. 결론
믿어져. 이게 주님의 기쁨과 그 다음에 주님의 슬픔과 주님의 애달음의 눈물이 내 마음 속에 확.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정서가 풍부한 사람이 돼. 조금만 얘기 들으면 막 웃고. 조금만 얘기 들으면 감사하고. 조금만 얘기 들으면 마음에 슬픔이 생겨나고. 그게 뭐냐면 자기의 육체의 혈기를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그렇게 하면서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내 안에 품고 살아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라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 제목은 그거예요. 이 수요일 날도 여기 꽉 차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선명한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개소리처럼 들리던.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철학들을 다 버리고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사대 성인 중에 한 분이시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그 사람 마음속에 오셔서 그를 회개 하게 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기쁨 속에 살아가게 될 때에 굶어도 행복하잖아요. 그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막 전파하는 거예요. 한 6,7년 전에 하도 궁금해서 우리교회에서 전도 받은 사람들을 다 명단을 놓고 누가 전도를 해서 왔는지를 조사를 했어요. 놀랍게 65%가 새가족반에 있는 사람이 전도한 사람이에요. 뭘 보여 주냐 하면, 복음은 그 복음을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되고 있는 거예요. 절대로 오래 교회 다닌 사람에 의해 전파되는 게 아니에요. 그 상관없이 이 속에 살아있는 사람을 통해서 전파되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 봐. 창피해서 낮에 물 길러 온 여자가
“선생님이 여태까지 내가 행한 것을 다 얘기 해 주셨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그게 뭔데?” 그 때 뭐라고 대답을 할 거예요? 남편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있는 그 놈도 사실은 남편이 아니라는 거 그거. 짜증나게 뭘 물어봐, 알면서. 그런데 막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조국교회의 살 길은 너무 단순한 거예요. 다른 것도 필요하지만 제일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선명한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과 성령의 강력한 역사. 이걸 통해서 주님 앞에 변화돼요. 기도합시다.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5 (2008/07/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6 (2008/08/1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1 (2008/12/10, 수요예배)
7.은혜세계와 성령 (1)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Ⅰ. 본문 해설
지난 시간에는 설교가 꽤 길었죠. 복음 지혜와 성령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즉, 복음 지혜는 지엽적인 것들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서 해답을 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장시간 설명한 것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고, 인간이 누구이고, 그리고 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마지막에는 그가 무엇을 위해 죽고, 죽은 후에는 그가 어떻게, 그의 운명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들은 세상의 학문이나 지식이 절대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철학이 있어서 철학에서 이것을 알고 싶어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이것을 끄집어내서 고쳤네 누가, 그래서 한참 나사를 가지고 설명을 했는데 그런 것들을 복음 지혜는 보여준다는 거죠. 어떻게? 복음의, 복음이 뭐라구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걸 더 짧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더 짧게 하면 예수, 두 자까지 줄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그 하나 안에서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의로운 분이신데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렇게 구원을 얻어서 어떤 존재가 되는 모든 것을 그 십자가 하나가 모두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것은 이성적으로는 믿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믿게 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절대로 필요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보면 볼수록 이 하나님을,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정말 신기한 것이죠. 이게 믿을 수가 없는 건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믿게 해 주신 것이에요.
자 오늘, 그래서 지난 시간에 복음지혜와 성령, 그 복음지혜를 복음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지혜를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이성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에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주셔야 되는데 그게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믿음 좋다고 너무 폼 내지 마요.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참된 성령, 사랑을 가지고 있고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자랑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자 그런데 오늘은, 그러면 복음 지혜만이, 복음 지혜가 우리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건데 복음 지혜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은혜의 세계가 인간의 모든 이성을 또한 초월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만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에요. 오늘 그것을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에요. 우선 11절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그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은 이 구 절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심오한 마음을 인간에게 수시로 전달해 주는구나, 그러니까 인간의 사정을 인간의 영이 아는 것처럼 성령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서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속사정을 수시로 알게 되는구나,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기 쉽거든요.
근데 여기에서 조심해야 될 것이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이것을 너무 과도하게 해석을 하게 되면 직통주의가 되는 거죠. 직통주의가. 그래서 하나님과 직접 통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은혜의 체험이 있고, 은사의 체험이 있고, 또 어느 정도 신앙의 세계 자체에는 신비함이 있으니까 그런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런 것에 대해서 아주 깊이, 마음 깊이 동의할 뿐만 아니라 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되는 것이죠.
Ⅱ. 하나님의 사정(事情)이란?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구절이라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결론부터 내리자면 여기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사정은 인간에게 복음 지혜를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예요.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 되냐면 말이죠. 우리가 아무리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아도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아도 우리가 하나님과 직통해서 아주 충분히 교제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특히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통적으로 교제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신앙은 신비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신비주의는 아니죠. 신비주의는 그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이 아닌 자기의 주관적인 경험, 그것에 입각해서 신앙의 토대를 세우는 모든 사상과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행동을 총칭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의 토대는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 근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체험을 가지고 판단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없는 말씀을 더 보태지 않고 반대로 내가 어떤 경험을 하거나 또 어떤 은혜의 세계를 체험했을 때 이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을 성경을 가지고 측정해서 부합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부합하지 않는 것은 버릴 수 있어야지만 그것이 참된 신앙이 된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직접적인 전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아주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느니 혹은 주님이 자신에게 계시를 주셨다느니 혹은 그거보다는 좀 약하지만 큰 감동을 주셨다느니 심지어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나를 사로 잡으셨다느니 이런 표현들을 자주 많이 사용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절제를 해야 합니다. 절제를. 그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영적인 교만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틀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엊그제 제가 한번 예화를 하나 들어드렸죠. 어느 목사님이 존 맥아더 목사님이, 미국에 존 맥아더라는 목사님이 있어요. 목사님에게 ‘목사님 저는 늘 우리주님을 만납니다.’ ‘그러세요?’ ‘어제 아침에도 면도하는 중에 주님이 화장실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 우리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면도를 하고 주님은 제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인제 맥아더 목사님이 너무 황당한 표정을 하니까 ‘아니 목사님은 제 얘기를 못 믿으시는가보죠 안 믿으시나보죠’ ‘예 나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목사님이 그거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거룩하고 위대하신 주님이 오셨는데 자기는 파자마 바람으로 면도를 하고 주님은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데 자기는 거울을 쳐다보며 면도를 할 수 있느냐 이거죠.’
성경을 보면 주님의 임재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중에 그런 경험은 없어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포도주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죽은 자처럼 엎드려졌어요.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뵈었을 때 배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예수여 나를 떠나소서 라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예수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을 때 사도바울은 죽은 자처럼 엎드려져서 눈이 멀고 벌벌 떨며 ‘주여 뉘시니이까 내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하고 물었고, 밧모섬에서 유배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계시를 보여주실 때 그는 죽은 자처럼 엎드려졌다고 했습니다.
모두 마음이 그려내는 현혹이에요. 그건 절대로 신뢰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어떻게 자기가 파자마바람으로 런닝 셔츠 바람으로 주님이 오셨는데 진짜 오신게 사실이라면 빨리 면도기 버리고 그 바닥에 엎드려서 어떻게 이렇게 쓸모없는 나같은 죄인에게 주님 이 누추한 곳에 찾아오셨습니까, 아니 그렇게 해야지, 성경에 어디에 그런게 있느냐 이거예요. 그건 아주 경박한 것이죠. 더욱이 그런 감정의 경험을 가지고 어떤 선악을 판단하고 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이죠.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죠. 언젠가 사람들이 가슴에 와 닿는 체험을 하면 그게 곧 하나님과 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자기와 자기의 경험을 판단하여 그것이 옳지않다 그러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어쨋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런 어떤 신비한 하나님 속에 있는 수많은 생각들이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이 인간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그런 어떤 비의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셨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복음 지혜를 통해 우리 인간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려놓으시려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그 탁월한 지혜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거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심지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것까지 다 본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그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몰랐어요. 그러니까 잘 보세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셔서 병을 고치고 약한 자를 고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세를 주셨잖아요. 근데 그것이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성령이라기보다는, 일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무장시키는 은사로서의 성령의 선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도 부활하신 것을 봤는데도 그게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걸 깨닫게 된 것은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이 있을 때에 그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모든 연결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에요.
Ⅲ. 은혜로 주신 것들
그러면 도대체 이 성령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이 성령은 우리에게 무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에게 은혜의 세계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해서 마음 깊이 아멘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것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위한 탁월한 지혜이기 때문에 아멘할 수 없고 왜냐하면 이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하나는 그렇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그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사랑의 그 하나님을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아멘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 지혜를 깨달을 수 없고 그 다음에 은혜의 세계를 알 수가 없고 경험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님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지성을 밝게 해 주어서 믿음을 갖게 만들어 우리가 인간의 이성의 노력만을 가지고는 알 수 없는 저 높은 세계의 진리를 한 번에 뛰어 넘어서 그것을 알게 만들어 주시는데 그걸 사용하시는 수단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거죠.
그래서 성령님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인간의 이성의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저 높은 세계의 지혜들을, 하나님의 지혜들을, 복음 지혜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예요.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다시, 믿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일이에요.
A.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들
그래서 성령께서 그것을 믿게 하시는 거죠. 근데 그게 뭐냐하면 오늘 은혜로 주신 것들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선물과 같은 것이에요. 그게 바로 은혜로 주신 것이죠. 그것은 좋은 것이죠. 그래서 은혜라는 말이 히랍어로 좋은 것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선물은 항상 좋은 거예요. 그죠? 선물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요. 한번 그래보세요. 옆 사람한테 내가 선물줄께 너무 좋아하죠. 선물은 좋은 거예요. 무엇이든지 간에. 근데 그 은혜로 주신 것들은 두 가지로, 그럼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이냐, 둘로 요약되는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유익이에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유익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 성령님은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하시는데 우리들이 흔히 은혜의 세계, 그러면 아주 신비한 어떤 그런 세계인가보다 그러는데 그건 맞아요. 신비한 세계인데 그 신비한 게 그냥 내일 될 일을 나에게 미리 알려주고 그 다음에 누가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서 미리 점치듯이 알려주고 이런 종류의 신비가 아니에요.
그래서 왜 언제 내가 그런 얘기 요새 금 이빨 교회에서 만드는 게 유행이라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메뚜기처럼 몰려다닌다고 그러는데, 그래놓고 사람들은 자꾸 뭐라고 그러냐면 진짜 금이 됐데? 그러고 물어보는데 그런데 그건 핵심이 아니에요. 금이 됐으면 그럼 믿을 거예요? 아주 심각한 질문이에요. 그렇게 됐다 이거야, 어느 교회에서 막 이를 악물고 기도를 했더니 됐다 이거야. 근데 자기 여기 봉에다가 무슨 쇠 비슷한 걸 해 박았는데 나중에 금이 됐다더라 그걸 빼가지고 가서 금방에 가보면 진짜 금이라고 그러겠는가? 그런데 조사를 했더니 순 거짓말이라고 하더라 하면 그럼 당연히 안 믿겠죠. 진짜 금이라고 그러더라 그럼 믿을 거예요? 그럼 어떻해요. 어떻게 안 믿어요. 진짜 금이 됐는데, 그것도 한 두사람이 아니라 온 교인이 다 찬양 부를 때 번쩍번쩍하는 금으로 변했는데, 그게 너무 분명하고 명백해도 우리는 성령님이 그런 거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설령 그것이 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믿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마귀도 얼마든지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으니까요.
그 비근한 예가 뭐죠? 모세가 애굽에 가서 바로에게 우리 백성을 놔달라, 그랬더니 화 냈잖아요. 그래서 지팡이를 치니까 온 땅의 물은 모든지 피로 변했잖아요. 근데 애굽의 마술사들이 똑같이 따라했어요. 그 다음에 개구리, 그 다음에 파리, 거기까지 다 따라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믿을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는 여호와로 말미암고 하나는 귀신들로 말미암은 것들인데 그것을 믿을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금이빨이 됐고 안 됐고 그리고 그거는 그 문제가 아니예요. 그거는 됐다고 하더라도 얼마안돼, 값을 별로 안쳐준대 그게 만약에 사실이면 오늘 가서 기도하고 빼놓고 가서 또 하고 아니 왜? 하루에 한번만 해 새벽에 한번 아니 뭐하러 그래 그냥 계속 한 시간에 한 번씩 해서 계속 이빨 빼내면 직장 다닐 필요도 없겠네, 그것이 설령 금 비슷하게, 설령 금, 아주 값비싼 금으로 변했다고 하더라도 그거를 보고 믿는 것은 그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거죠. 성령님은 그런 걸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죠.
그래서 믿음의 신비는 그런 것들이 신비가 아니라 감정적인 신비가 아니라 잘 들으세요. 지성적인 신비야, 그 지성적인 신비라는 것이 뭐냐하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실 수 있을까. 참 사람이신 그분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어떻게 우리 많은 사람들이 그 피로 내 죄를 씻을 수가 있을까 이런 것이 신비예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신비란 말이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 가장 하고 싶어하시는 성령의 본무가 바로 이렇게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성령의 본무예요.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우리 눈에 엉겨붙었던 수많은 편견의 껍질들을 벗게 되는 거예요. 예수는 4대 성인중의 하나지 어떻게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가 있겠어, 평화주의의 한 사람일거야, 이렇게 생각했던 예수에 대한 수많은 편견들을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거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논쟁이 끝나지 않겠지만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논쟁하다가 무신론자가 질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유신론자가 될 수 없죠. 똑같은 것이에요. 성령님이 아니고는 그리스도에 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편견들을 벗고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최고의 지성적인 신비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님은 그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에요. 그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게 은혜의 세계인거예요.
언젠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었나, 여기었나 어디었나 내가 하도 많이 다녀 모르는데 어쨋든 설교를 쭉 하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 하늘이 얼마나 좋은데 이 비참한 목수의 집안에까지 내려오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때 사람들이 막 우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그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신비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시는데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시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분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처럼 이렇게 낮아지셨을 때 그게 얼마나 힘들고 그리고 그분에게 모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그거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게 신비예요. 그게 바로 신비의 세계야, 그게 은혜의 깊은 세계예요. 그래서 은혜 세계의 중심에는 누가 계시다구요? 그리스도가 계시는 거죠.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은 모든 은혜의 경험은 일단은 그 순수성을 의심해 보는 거예요. 오늘 성령님께서 그러는데 오늘 직장 가지 말라고 했어 그러면서요.
나는 그런 사람 많이 봤어요. 옛날에 제가 아는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형제를 좋아한 모양이에요. 그 사람 표현이 참 재미있어요. 자기는 나는 당신같은 스타일을 싫어하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당신 사랑하라고 그러신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에 의해서 나에게 찜 됐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그랬더니 형제는 아니 그러면 나한테도 하나님이 그러셔야 되는데 나는 너한테 장가가라는 말 안하시더라. 언젠가 깊이 깨닫고 돌아올 날이 있을 거다. 그 사람 장가갔는데 안 가고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약혼을 하고 결혼을 했는데도 뭐라고 그러냐면 하나님이 너무 분명히 그 형제가 내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도덕적인 모순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끔찍한, 무서운 여자 아니에요. 도덕적인 모순, 그럼 뭐냐 둘 중의 하나일거 아니에요. 그 가정을 깨고 오든지 자기가 첩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부인이 죽어버려서 오든지 그건 도덕적인 모순도 아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이거예요. 성경과 이런 모든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고 그때 팍 꽂힌 필 하나를 보고 그러는 거예요. 지금 걔네들이 대학 들어갔어요. 그 자매는 지금도 그러고 사는지는 모르겠어요. 물론 이제 하나님이 사람을 엮어서 부부를 만들게 하려면 둘이 서로 물보듯 얼음보듯 해 가지고 그게 엮어지겠어요. 하나님이 누구가를 흔들어서 그래서 편지도 보내게 하고 전화도 걸게 하고 그러다가 엮어지는거 아니겠어요? 나도 그랬고.
그렇지만 성령의 본무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는 것예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설교할 그때쯤이었는데 그 어떻게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실 수 있었는가 그러니까 양성이잖아요.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예수 인격 안에서 만나는 건데 그 부분을 묵상을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신비하고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최대의 신비예요. 그런데 그게 말도 안 되는건데,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래서 그것을 비춰주시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것이 아주 뼈져리게 믿어지면서 그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노래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 지위가 높으시고 권세가 높으셔서 아름답다고 하셨다면 주님은 멸시 받기에 합당한 분이셨죠. 근데 그 아름다움이 뭐냐면 바로 그렇게 이 세상 어떤 인간에게서도 볼 수 없게끔 그리스도는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다, 그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의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뭐예요? 그리스도. 그래요 그리스도.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가슴이 답답하니까 뭐라고 말하냐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예요. “그런즉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 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그리스도예요. 잘 들으세요. 그러므로 진정한 정말 깊은 신앙이 되면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거기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거예요.
오늘도 저녁먹고 우리 집사람과 내려오다가 TV를 탁 켰는데 장미란 이가 이거 드는거 나오던데 다 끝난 얘기인데 걔가 메달을 따고 나니까 두 손을 꽉 모으고 기도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울더라구요. 울면서 끝나는데 가슴이 찌릿해 순간, 찌릿한데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도 그런데 저 부모는 이거를 보는 순간에 그 마음이 어떨까? 더 바라는 게 있을까? 아마 저녁 안 먹어도 괜찮을 거예요.그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가 너무너무 놀라워서 우리에겐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 사람이 그런 소망 속에 살던 사람이 성경에 보면 많이 나오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누구냐면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할례 할 8일이 되어서 성전에 갔을 때, 그때에 이제 예수님이 결례를 드릴 때 거기에 와서 예수님을 본 사람이 있었어요. 그 중의 한사람 시므온과 안나였는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얘기해요.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 그런데 이 시므온에게 아이를 줬는데 이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한 첫번째 한 말이 우리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한 말씀이예요. “주제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놓아 준다는 말이 뭐예요? 아 이제는 제가 죽어도 되겠습니다. 왜 못 죽은 거야? 예수 그리스도가 올텐데 너는 그분을 뵈오리라, 그 하나에 붙잡혀서 그 긴 세월을 노인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그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아 주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이제는 당신의 종을 놓아주시나이다, 살았던 이유가 뭐였어요? 오직 메시야 한분의 출연을 뵙기 위해서 산 것이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바는 뭐냐하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지혜를 모아서 응축시키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십자가 안에 있고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그렇게 찾고 싶어했던 진리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녹아져 있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이 곧 위로는 하나님과 자신과 이 온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비결이에요. 근데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신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 곳에서 성령을 예수의 증인으로 묘사해요. 사람은 보고 입으로 사람의 귀에다가 말하는 전도자들이었지만 성령은 그들의 심령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신비를 알게 하시는 분이셨다는 말이죠.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나게 되는 거죠. 성령 받은 사람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누구냐면 쉭쉭거리고 불 때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들이 누구냐면 예수를 많이 알고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예수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를 아는 것, 알고 싶은 것, 사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거기에서 모든 뜨거움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모든 뜨거움, 그 예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에 뜨거운 믿음이 생겨나게 되요. 그리고 뜨거운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또 하나는 뭐냐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것들, 혹은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유익들이예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깨닫게 되면 그것을 통해서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수적으로 주시는 많은 것들이 있어요. 그걸 보면 우리에게 선한 모든 것들은 다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에요. 한때는 막무가내 인간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깊이 깨닫고 났더니 이제는 노예 상인이었던 사람이 그렇게 영혼을 위해 진실하게 목회하는 존 유턴같은 그런 목사님이 될 수 있었죠. 그러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고 나니까 악한 성품이 변하여 선하게 바뀌었어요. 그건 그리스도는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받는 유익이죠. 그뿐만이 아니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알고 구원받고 나니까 예전에는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그냥 괴로워하면서 당했는데 그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이 은혜는 사랑의 감화야, 그런 감화를 주셔서 전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련들을 이기고 극복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래서 찬란하게 비취는 그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수많은 유익들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한번 상상력을 동원해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찬송가에 보면 그런게 나오잖아요.
(찬양)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봤도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그 그리스도 예수의 찬란한 모습을 보면 그러면 그분에게서부터 성령의 기름이 쭉 흘러 내리겠죠. 그 향취가 풍겨나겠죠. 그 얼굴에서 비취는 찬란한 빛으로 주위가 환해지겠죠. 거기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겠죠. 그 영광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우리들이 매료되겠죠. 그것들은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유익이에요. 그런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가 하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게 해주세요. 저는 예수 믿고 나서 비로소 인간은 그렇게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다 나쁜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나니까 정말 좋은 사람도 있더라구요.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즐거워하고 하는 그런 것들은 예수 믿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어요. 더군다나 가니까 피도 안 섞이고 살도 안 섞이고 그런데 형제라고 하고 자매라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보면 가족들보다 더 잘 해, 그런걸 보면서 결국은 그게 어디서 오는 건가, 그런 세계에 대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적만으로는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거죠. 성령이 오시면 그런 신비한 세계에 대한 놀라운 이해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아멘. 성령이 오셔서 그걸 알게 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왜 하나님께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 그 마음 안에 성령을 주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충만하게, 이 모든 것들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이에요.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논리로서는 설명이 되고 납득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성령에 비춰주시는 믿게 하시는, 보게 하시는 그 번쩍이는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그 빛에 의해서 우리는 그 은혜의 세계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신앙의 세계에 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 비밀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걸 알지 못하죠. 우리들은 종종 보면 예전에 공산 치하나 독재 치하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막 사는 사람들의 그 고난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보면 물론 거기에도 좀 과장이 있겠지만 어쨋든 정말 안 믿어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그 혹독한 핍박과 시련을 이기고 그렇게 견뎠을까 궁금하잖아요.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거죠. 그런데 대답은 성령의 은혜를 알게 하시는 성령에 있는 거예요. 루마니아에서 공산치하에서 22여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신 목사님이 계셨어요.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목사님인데 그분이 결국은 나중에 자유를 얻어서 풀려났어요. 기자가 물어봤어요. 그렇게 심한 고문과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었을텐데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그러니까 거기는 이 감옥 바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 그때에 자신들에게 임하여 역사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그 성령님이 주시는 그 기쁨과 위로가 고난으로 인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초대교회 때에 사도들이 그렇게 열렬히 복음을 전했던 한 이유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한군데 나오거든요. 많지만 그 중의 한군데가 어디냐면 이거예요. 헤롯왕이 손을 들어서 본보기로 예수 믿는 사람 몇명을 잔인하게 죽여서 기독교의 씨를 말고 싶은거예요. 그래서 제일 먼저 택한 사람이 누구냐면 야고보였어요, 야고보 사도. 예수님이 특별히 세 사람을 아끼셨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었고, 그는 요한의 형제였어요 근데 오락가락 하던 도마 같은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면 뭐, 들 아까운데 아니 기둥같은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목이 댕강하고 한 번에 날라가버리니까 유대인들이 온통 박수를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인심을 사기 위해서 베드로를 죽여버려야 되겠다, 그러고 베드로도 거기에 가뒀어요. 베드로는 옥 속에서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렇게 능력 많이 받은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해 주셨던 야고보도 목 잘려서 갔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한 칼에 목을 자르더란 말이에요. 날이 새면 자기도 죽을 텐데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근데 뭐했어요? 푹 잤어요. 오죽하면 천사가 왔는데도 못 알아보고 계속 잠을 자서 천사가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옆구리를 손으로 쳤는지 발로 쳤는지 모르지만 쳤어요. 일어나라 천사가 뭐라고 했냐면 좀 빨리 일어나라, 급히 일어나라. 근데 나는 여기에서 이 잠 잤다고 하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최악의 잠은 아니잖아요. 이게 믿음의 삶이예요. 어유, 내일 목 잘리면 곧바로 주님 나라에 가서 쉬겠네, 그리고 나는 부활할 거야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두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가르쳐준 위로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범브란트 목사님이 탁 감옥을 나와서 출옥했을때의 느낌이 어떠시냐 그러니까 “천국에서 땅으로 푹 떨어진 느낌입니다”.
여러분은 막 모슬림들이 격렬하게 대모하고 그러는거 보잖아요. 모슬림들이 여기 한국에 많이 와서 우리 대학가에 대학생들이 오잖아요. 우리 그 사람을 전도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 사람들 90%이상이 선교훈련 다 받고 오는 사람이에요. 미션이 뭐냐면 교회에 접근해서 순종적이고 예수 잘 믿는 자매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그를 모슬림으로 개종시키면 본국에서 큰 상을 내리는 거예요. 무슨 얘기인지 알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지혜롭게 잘 판단하고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최근에 내가 무슬렘 사역 전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데 우리는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하고 이러는 것들은 전부다 출세를 위해서 하는 거지 신앙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예요. 오늘날 기독교에서 이 진정한 신앙이 식는 것처럼 거기에서도 이미 오래전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게 이란에만 비공식적 지하 교회가 3000개가 있대요. 귀를 의심해요. 그게 정말이냐 그러니까 정말이래요. 걸리면 어떻게 되냐 현행법상 사형이라는 거예요.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다는 거예요. 왜? 곤고하고 갈급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모이고 자기들끼리 소박하게 숨어서 예배를 드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는 거예요. 그게 뭐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것들, 알지 못하는 그 비밀스런 은혜의 세계는 아무도 몰라요. 성령 받은 사람들이 아니면 알 수 없어요.
(찬양)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그 새로운 은혜의 세계, 아니 머 연애해서 사랑에만 빠져도 굴러가는 개똥도 별나게 보이는데 그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비밀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거를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을 보면 똑같이 고통스러운 길을 지나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아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그러죠. 그렇지만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잠기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세계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는 거예요.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위로가 있는 거예요.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래서 젊은 시절에 연애라도 한번 깊이 해 봤으면 이 설교가 이해가 잘돼요. 그것도 못해봤으면 더 열심히 기도해야 돼. 이해가 더 잘 안가니까 더 충만한 성령을 주시도록 사랑에 빠지도록 기도하는게 아니라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도록 그래서 알 수 있도록 말이지, 그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은혜의 세계에서 살게 해 주는 거죠. 이 은혜의 세계는 인간의 단순한 이 사색이나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거예요.
Ⅳ. 결론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할께요. 이런 의문이 들거 아니예요. 그래 결국은 지난 주 설교와 이번주 설교를 묶으면 복음 지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그렇게 인생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서 몸부림 쳤지만 찾을 수 없는 대답이었는데 그거는 바로 복음지혜다. 그런데 그거는 거저 믿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오셔야만 믿어지는 거다. 아멘. 아 맞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셔서 자연적인 인간은 도저히 모르는 세계가 있다. 자연적인 인간들이 아는 세계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리고 동물처럼 즐거워하는 이 세계에는 거듭나지 않아도 다 알아요. 그렇지만 신령한 세계의 그 아름다움은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성령이 오셔야 가르쳐 주신다. 야, 참 쉽다. 그러면 이제는 굳이 사람들에게 이러니까, 이러니까, 이러니까, 이러니까, 이러니까, 이러니까, 예수를 믿어라 말해줄 필요가 없겠구나. 맨날 믿음의 불을 때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죠. 그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잘 정리된 이성적인 논리와 설명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잘못된 이 모든 오해, 그리고 선입견 이런 것들을 풀어버리는 역활들을 하는 거예요. 그런 역할들을 하게끔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태도를 상당히 많이 바꿀 수가 있는 거죠. 그렇죠. 그런거예요.
최근에 스탠포드 대학 교수가 책을 한권 썼는데 유기농에 관한 거예요. 우리는 유기농 무조건 비싼 값에 주고 사먹는 사람도 없지만은 여러분은 사먹겠죠. 그런데 나는. 유기농을 하여튼 좋아하잖아요. 유기농 그러면 좀 비싸도 먹고 그러는데 그 사람 얘기는 참 재미있어요. 농약을 안 주면, 살충제를 안 주면, 스스로 해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 살충제를 만들어 내는데 이게 식품 기준치의 4배에서 1000배까지 올라가는 아주 독한 물질이라는 거예요. 차라리 살충제가 낫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결론이 모든게 다 똑같은게 아니기 때문에 경우 경우마다 이해를 해서 선택을 해야지 무조건 유기농이면 최고다 생각하면 큰일난다 이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상식이나 이 중에 유기농 사업하시는 분에게는 실망스러운 설교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러면 태도가 바뀌어지게 되잖아요. 하나하나 기독교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설명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하죠. 긴장을 모두 허물고 하나하나 풀고 그렇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예수를 그에게 믿게 해 줄 것이라고는 우리는 믿지 않고 다만 그것은 그의 마음을 풀게 만들고 마지막에 그의 마음속에 비취는 것은 성령의 빛에 의해서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그걸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얼마 안 있으면 어린이 회심집회를 하는데 가장 관건이 그거예요. 그 순간에 그 장난치던 애들 마음속에도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믿게 될 때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거는 우리 힘에 달린게 아니고 그래서 우리는 전심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되는 거죠. 어쨋든 성령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영적인 은혜의 아름다운 세계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때 우리는 정말 신앙이 쑥쑥 자라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겠어요. 이렇게 충만한 성령 안에서 예수와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은혜세계와 성령 (2)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구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Ⅰ.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의 줄거리를 잠깐 말씀을 드리고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켜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12절을 보십시오. 12절을 보면 오늘 설교할 부분인데,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은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유익들로 대별되는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은혜예요. 왜냐하면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예요.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은혜이신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결국은 성령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이것이예요. 이것이 지난시간에 얘기한 것인데, 왜그러냐 하면 우리가 이성적으로는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들이 알수 있지만,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아는 것은 결코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예요. 이 기독교의 신비는 감정적이고 그리고 다른 어떤 신비가 아니라 지성적인 신비예요.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으로서는 알수없는 그런 세계의 신비인데, 성령님께서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의 눈을 열어주시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수 없는 높은 진리들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것,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우리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 그분이 부활하신 것, 보좌 우편에 계신것,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인간의 지성이 미칠수 없는, 자연인의 지성으로 미칠수 없는 신비한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쳐 주실 때 그때 우리가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은혜인데 이 성령님의 임무는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에 있어서 많은 체험을 하지만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은 신비한 체험들이 모두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체험하게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묘사해요.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그 신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존재와 성품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죠. 왜냐하면 이 지식이 단순히 아는 지식이 아니라 이 지식을 아는 여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영혼이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이 세상을 사라아가는 그 사람 전체에 방향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찾아서 악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을 전하지 않을수 없는 긴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얘기예요.
Ⅱ.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유익들
그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은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까지 말씀드렸는데, 이번 시간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유익들을 알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이런 얘기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유익들인데, 이것은 은혜의 세계예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는 철저히 멀어진채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기 전까지는 어떠한 은혜도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만약에 그랬더라면 이 세상은 훨씬더 복잡하게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고,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예요. 이 은혜는 지금 하나님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도 받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은혜예요. 이것을 가리켜 우리들이 일반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죠. 예를 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놀랍게 선한일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면 그 마음에 편안함이 오고, 양심을 거슬러서 악행을 행하면 불안과 고통이 찾아와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악을 행하고 나면 마음에 깊은 고통과 번민이 찾아오고 심지어는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여 목숨을 끊기도 해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은혜 때문이예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 때문에 도덕들이 유지되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 현상을 생각해보세요. 봄 다음에는 여름,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 와요. 물론 이거는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것이죠. 이것은 일정해요. 만약 열대지방인데 갑자기 내년에는 거기가 극지방처럼 추워지고, 극지방은 열대지방처럼 더워지고 규칙이 없이 움직인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게하면 인류자체가 생존이 안되겠죠. 그래서 그렇게 절대 안되요. 이상 기온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그렇게 뒤죽박죽되지는 않고 일정한 질서를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예요. 예를 들면, 기상학에 나오는 건데 지구가 이렇게 동그랗게 있으면, 그 위에 부분에는 모자를 쓴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씌워져있어요. 이것을 cold cap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게 어떤 기후의 변화에 의해서 모자가 내려가요. 그러면 모자가 내려간 부분에는 한파가 몰아치고, 모자가 삐뚤어졌으니깐 반대쪽에는 이상 고온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거죠. 이렇게 완전히 예측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수 있도록 온다 이거죠. 이건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막 사용해서 그런거죠. 폭풍이 일어나고 어마어마한 바람이 부는 것들은 자연 이치로 보면 온도 상승과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바다 표면을 보면 온도가 1도 정도만 높아져도 엄청난 증발이 일어나서 기류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아주 하찮아 보이는 그것이 증발하면서 폭풍을 만들고 바람이 모여서 시속 180, 250k 가 되는 어마어마한 폭풍을 몰고오게 되는 거죠. 어쨎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은 인간이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평온하게 되게 되어 있는 거거든요. 이런것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일반적인 은혜죠. 그래서 선하고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셔서 그래서 심고 거두고 춥고, 덥고 하는 것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질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도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일반적인 은혜라고 할수 있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만약에 사람이 사는데 아무런 조직도 없고 나라도 없고 이렇게 산다고 하면 인간이 불안해서 살수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인간이 그렇게 사는 인간이 거의 없고, 사람이 한 모여서 한 마을만 이루기만 하면 이상하게 약속이나 한듯이 조직을 만들고 그리고 마을 장을 뽑고 혹은 왕을 세워서 질서를 세우게 되는데, 모든 나라 법이 놀랍게도 뚜렷한 일치를 가지고 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A 나라에서는 사람을 죽이면 사형을 시키는데 나라에서는 사람을 죽이는데 상을 준다는 나라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서로 의논하지 않아도 놀랍게 일치를 이루면서 그러한 권력을 스스로 형성해서 그 권력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욕망은 억제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질서와 평안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라고 불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돌아봐도, 이렇게 돌아보면 놀랍게도 역사가 아무렇게나 마치 사람이 미끄럼판에 미끄러지듯이 아무렇게나 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규칙이 있는것 같고 놀랍게 누가 시나리오를 쓴것처럼 그렇게 아주 질서 정연하게 흘러가는 역사를 보잖아요. 그런 역사를 보더라도 역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안계신것 같은 큰 혼란을 겪을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게 되는 거죠. 이것들도 하나님의 일반 은헤예요. 그런데 이런 은혜는 아주 신비한 은혜는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씩 연구하고 공부하고 깨달으면 그 법칙들을 하나씩 밝혀 가는 것이예요. 그런것들이 바로 과학이 하는 일이고 역사가 하는 일이고 그런 것이예요. 그렇게 증진하여 얻는 많은 지식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집어던져버리고 아무런 상관도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래서 이땅에 자연적인 생명을 생존하게 하시고 그리고 종족들을 번식하고 살아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예요. 그런데 이런것들은 이것도 성령님의 은혜이시지만, 이것도 성령님의 은혜예요.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다스리시는 한 증거다 이거예요. 그렇지만 이것을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수는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막연하게 생각해볼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같은 것들은 우리가 알수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것을 은혜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 일반적인 은혜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서 거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약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룰수 있었으니 그들이 구약에 희미하게 전개되는 그리스도를 믿고 참으로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앞에서 여자가 난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세례요한은 구약시대에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 상에 서 있는 인물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구약의 선지자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예요.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탁월하게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뵈었던 선지자들이었지만, 그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부어주실 성령의 시대를 통해서 누리게 될 영적인 축복과는 비교할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들이 받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가르쳐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이 은혜의 세계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그 은혜의 세계를 알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이 결코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수 없다는 것이죠. 자 여러분들이 예전에 예수 믿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언젠가 예수 안믿는 불신자로서 신자들을 볼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삶 중에서는 이해할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해할수 없는 부분도 참 많이 있었겠죠. 그 이해할수 없는 부분중에 하나가 무엇일까요.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자기와 똑같이 죄짓고 악을 행하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앞에 펑펑 울며 회개하는 장면은 회개하지 않은 자신의 입장으로 보면 아무리 사람의 생각으로 생각해봐도 이해할수 없는 것이죠. 왜 이천년전에 죽은 그리스도 앞에 지금 자기의 죄 때문에 그분앞에 회개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볼수도 만질수도 없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눈물흘리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것은 이해할수 없는 것이고, 그가 온 마음을 다해서 성실하게 간증해 준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그런일이 있을수도 있고 참된것일수도 있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져다 줄 뿐이지, 그사람처럼 똑같이 눈물흘리며 회개하도록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그게 바로 사람의 지혜로 사람에게 가르쳐줄수 있는 한계예요. 그것은 성령님께서 오셔야지만 그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은혜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예전에는 교회를 한다고 하면 교회를 2층이라도 하고 교회를 하는 교회가 없었죠. 왜냐하면 그럴수 있는 사정들이 안됐거든요. 그래서 대개 자기 건물 지하실을 빌려다가 기도회를 하다가 거기다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그랬어요. 옛날은 지금처럼 이웃들간에 조금 시끄럽다고 경찰서에 신고하고 전화하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상당히 괴로우면서도 세상이 늘 시끄러웠기 때문에 교회에서 시끄러워도 그러려니 하고 참았어요. 근데 어떤 사람이 이제 자기 집 지하실에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개척교회를 하기 전에 기도회를 했대요. 주택가에서 아무리 지하실이지만, 자하실에 모아놓고 기도하니깐 뭐 창문까지 닫아놓고 한다고 해도 ‘와글 와글’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그래 동네사람들이 이게 뭐냐 하다가, 도대체 이게 뭐 상가도 아니고 말이지 주택가에서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매일 대낮에 울고불고 하고 말이지 하고서 경찰서에 신고를 해버렸어요. 신고가 한번 두 번 들어가니깐 경찰서에서 형사를 내보냈어요. 형사 두 사람이 도대체 뭔 일이냐고, 내구역에서 일어나는데 한번 가보자고, 그래가지고 들어왔는데, 한참 어떤 여자가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더래요. 그래도 배운 사람들이니깐 거기에 대고 소리지를수 없잖아요. 다들 경건하게 무릎꿇고 설교를 듣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 그럴수 없잖아요. 그래서 끝나면 뭐라고 하든지 단속을 해야겠다 그러고 자기네들도 쪼그리고 앉았는데, 설교가 끝나더래요. 그래서 ‘아, 이제 얘기해야겠구나’ 그랬더니,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더래요. 다같이 막 기도를 하는데 아 이 두사람이 거기서 회심을 한거예요. 뭐 가가지고 뭐라고 하겠어요. 별거 없다고, 그래서 나중에 만나서 조용히 하라고 했던지 했겠죠. 저는 거기까지만 들었으니깐. 그것을 설명을 할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되는 그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우리들이 해보지 않으면 알수가 없는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이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언어가 있는거죠. 그래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 하면은 서로 통하는 거죠. 저는 회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게 친구들을 만나는 거예요.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토요일이면 캠핑가자고 그러는데 하루는 하두 나한테 욕을 해서, 그렇게 의리없이 말이지, 교회 다닌다고 그렇게 우리를 처다도 안본다고 해서 할수 없이 토요일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청평으로 캠핑을 갔어요. 주일날 아침 새벽이 되었는데 견딜수 없어요. 심령이 괴로워서. 그래서 너희들이 뭐라 그래도 나는 우리 주님이 있는 교회에 가야겠다. 뒤에다 대고 막 욕을 해요. 욕을 하건 말건 나는 이제 갔는데, 나는 그 사람들하고 만나서 할 얘기가 별로 없는거예요. 그 전까지는 막 나누던 잡스러운 이야기 이런것들이 이제는 너무 싫은 거예요. 사람이 싫은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은 거예요. 나는 내 안에 하고 싶은 것이 무지하게 많은데, 교회와서 지체들하고 이야기하면 너무 이야기가 잘 통하는데, ‘맞어’ 하고 무릎을 치는데, 이사람들은 내가 이야기해 봐야 듣지도 않고 나도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왜 그러죠?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수 없는거죠. 큰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서 마음이 분요하고 괴로움이 가득하고 견딜수 없어서 마음이 불안해지고 괴로울때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맏기고 주님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 고난의 시간을 자기를 정사하는 시간으로 삼을때 그때 가슴에 밀려오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 그 놀라운 평강 그게 오디서 오는지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해줄수 있어요?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사도들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그랬어요. 거기서 ‘지각’이라는 말의 뜻이 뭐냐고 하면 영어로 ‘understanding'이예요. ’이해‘예요.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 왜 그런지 모르는, 왜 그런 평강이 오는지 알수가 없는거죠. 그래서 레오 톨스토이가 자신의 참회록 끝부분에서 그런 얘기를 해요. 주님을 믿고 보니까 그 신앙안에서 자기가 견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자기가 왜 이렇게 견고한가 내려다보니깐 커다란 반석같은 위에 자기가 있는데, 공중에 붕 떠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평평한 돌맹이의 공중위에 있으니 언제 든지 굴러 떨어질수 있는데 내가 왜 이렇게 편할까, 그래서 굴러도보고 뛰어봤는데 흔들리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바위 밑에서 이렇게 내려다 보니깐 아주 큰 튼튼한 기둥이 쫙 뻗어서 아래로 내려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름이 가려서 그 끝은 보이지 않더라는 거예요. 굉장히 성경에서 묘사하는 것과 유사한 묘사예요. 그거는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알수가 없는거예요. 확실한거 하나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안식을 하고 나니깐 그 안에서 뛰고 구르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위에 내가 섣는데, 그 근거가 뭐냐하면 그 근거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설명할 수가 없는거예요. 그 큰 고난 속에서 기도할 때 그 고난의 폭풍을 모두 잠재우고 내 마음속에 밀려오는 위대한 놀라운 평강, 그게 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왔는지, 그것을 안믿는 사람도 모두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할 수가 있겠어요? 설명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게 동행하며 사는 신자의 모든 삶은 어떻게보면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왜? 은혜의 세계속에서 사니까 설명할 수가 없는거예요. 어느날 조용히 묵상하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당신의 의를 나에게 덧입히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큰 사랑이 그리고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자비가 나의 마음속에 밀려와요. 설명할 수가 있겠어요? 카톨릭의 신학과 종교개혁을 일으킨 종교개혁의 신학의 뚜렷한 차이가 뭐냐하면 저쪽에서는 예수 안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알수가 있고 신학을 할수 있다고, 이 종교개혁 이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신학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신학이 하나님을 가르쳐줄수 있다는 것이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이 하는 사람들이 신학이라고 봤던 거죠. 그러니깐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이렇게 설명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삶이예요. 그 은혜의 세계를 알게 해주시는 분이 누구? 성령님이에요. 그러니깐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면 헤아릴수 없이 많은 간증거리가 있는거예요. 간증거리는 이해할수 없는 거를 간증해야 간증거리지 다 이해되는 것을 간증하는 것은 간증거리가 아니라는 거죠. 내가 은행에다가 1억원을 넣었더니 12월달에 700만원 이자를 주더라. 그런거는 간증거리가 아니라는 거죠. 그거는 누구나 다 할 수가 있는거니까. 간증할 때 이렇게 간증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거든요.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억수로 물려주셨고, 우리 아버지가 저에게 억수로 물려주셔서, 억수로 돈을 물려주셔서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살거든요, 할렐루야‘ 아무도 아메 안해요. 대개 거덜났다는 얘기부터 시작하는거예요. 거덜났다가 다시 성공하는 것은 사람이 굉장히 이해하기라 어려운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시니까 그게 은혜의 세계에 대한 증거고 간증이 되는거죠. 또 거기서 만난 하나님의 큰 사랑, 이런것들. 그러니까 이해할수 없는것들을 계속 경험할 때 그게 간증거리가 있는거지, 너무나 당연한것, 남편과 제가 정말 열심히 절약해서 35평 아파트로 갔거든요, 그게 무슨 간증거리가 되겠어요. 우리가 집이 하나가 있었는데, 교회가 어려워서 그것을 팔아서 교회를 섬겼더니 뜻하지 않게 복을 주셔서 집을 얻게 되었다든지 이래야지 간증이 되는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해서 그 은혜의 세계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왕년의 얘기 안해도 되요. 왜냐하면 계속 새로운 간증거리가 일어나게 되니까. 그러나 성령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와서 별로 할 얘기가 없는거죠. 왜?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것이 없으니깐.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없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바도 ’까만건 글씨고 하얀건 종이구나. 요즘 나온 종이 질이 참 좋구나‘ 그냥 그럴 분이지, 성경 속에 담겨져 있는 비밀스럽고 은혜로운 것들을 알수가 있겠어요? 알수가 없죠. 성령 충만하면 그냥 교회에 와서 봉사를 하고 이웃을 위해서 수고해도 이상하게 일로 끝나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세계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거예요. 알게 해주시는 거예요. 너무나 놀라워요. 저는 이번에 영국에 갔거든요. 3일동안은 영국에 있는 한국의 유학생들을 위해서 집회를 하고 3일은 어느 교회를 가서 3일동안 두교회가 합쳐서 집회를 했어요. 그리고 인제 제가 존 오웬을 존경한다고 하니까 그 근처에 존 오웬이 목회하던 교회가 있다고 해서 한번 가봤어요. 존 오웬 목사님이 직접 오랬동안 목회를 하시던 교회가 당시에 한 2000명 정도 모였더라구요. 그때도 굉장히 큰 교회였죠.. 그때는 영국 국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예를들면, 관양동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열린교회 나와야한다. 이렇게 되어 있었던거죠. 근데 교회 크기는 우리 교회의 2/3밖에 안되요. 근데 거기에서 200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데요. 아니, 그때는 1, 2, 3, 4부 예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2000명이 들어갔냐고 그러니까, 기록에 보면 모두 서서 예배를 드렸데요. 그 목사님 설교가 결코 짧지 않았거든요. 최소한 두시간은 걸렸을 정도의 설교 분량이예요. 그렇게 긴 설교를 하는데 어떻게 서 있을수 있느냐고 하니깐 자기도 그때 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존 오웬 목사님의 깊은 애정을 갖고 방문했고, 가서 보니깐 교회 옆에 교회가 세워진 1200년대가 그때부터 담임 목사 이름이 쭉 나오더라구요. 16대 정도의 목사님이었는데, 바로 그 위가 ’오바댜 세즈윅‘이라는 위대한 청교도였어요. 그리고 더 걸출한 존 오웬 목사님이 거기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던 거죠. ’존오웬 목사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도 여기에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렇게 얘기해서 ‘그럼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난 모른데요. 교회들이 다 죽어가고 있어요. 너무 너무 비참해요. 어느 교회를 한번 방문했는데 잘못알고 간 교회였어요. 폐허인줄 알았어요. 유리창도 다 깨지고 잡초도 무성한 교회에요. 얼마나 모이냐고 그러니까 35명이 모인데요. 그러면서 교회가 다 죽어가고, 지금 교회가 팔리는데 잘 사가는 사람들이 모슬렘들이 교회를 사가요. 교회가 모양은 헐어버릴수 없도록 지정이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옛날 건물이니까. 그리고 시에서 조금씩 유지비가 나와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건드리지 못하고 가만히 두고, 교회 내부만 싹 쓸어버리고 연립주택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거는 참 다행스러운거고.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모스크가 들어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디스코텍, 술집, 레스토랑 이런걸로 팔리는 거죠. 이유가 무엇때문이죠?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그 선조들은 풍푸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존 오웬 목사님을 알지도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싫어하지만 왜냐하면 국교도에서 뛰쳐나왔거든요. 그래서 고난을 받는 비국교도의 길을 걸었거든요. 그래서 그사람들이 볼때는 분리주의자들인거죠. 그래서 싫어하죠. 싫어하지만 지금까지도 전설적으로 내려온데. 이 목사님이 이 마을에서 엄청난 설교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들었던, 그거는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전설처럼 내려온다는 거예요. 그 말씀의 큰 능력을 가지고 목회하셨던 분이 계셨다는 거죠. 근데 결국은 차이가 뭐겠어요? 모든 성령의 역사가 사라졌어요. 주님이 예배가운데,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임하셔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알수없는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들을 보이시고, 그 은혜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와 은혜와 그리고 그 은혜의 세계의 비밀들을 알게 하실 때 그때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런 놀라운 일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새까만 역사 속에 잊혀진 것이예요. 더 안타까운 것은 누구에게도 그런 영광스러운 복음이 있었고 그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헤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 이거예요. 그사람은 공무원이거든요. 그래서 나라에서 돈이 다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어떤 처절한 갈망,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이죠.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바로 우리에계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들을 보여주셔요. 은혜를 세계를 보여주실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놀랍게 인도하셔요.
B. 이성을 초월함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길이 없는데, 주님이 오셔서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수 없는 길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이예요. 그래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알수가 없는 것들이예요. 지금 유럽에서는 9월 10일날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기계 하나를 돌리는 깊이가 100m 되는 곳에 직경이 되는 곳에 28km의 관을 만들어서, 여러분들이 설명하면 아마 이해할수 없느 이야기하면, 거기에서 광자역학을 실험하는 거죠. 거기에서 우주탄생의 비밀을 밝힐 기대에 부풀어 있어요. 그때 순간적으로 올라가는 온도가 1경도래요, 조도 넘어서, 상상할수 없는 온도죠. 오죽하면 그 실험하는 동안에 잠깐동안이지만 그 안에 블랙홀이 생긴다는 거죠. 그렇게 하면 우주가 하나의 점에 불과 했는데 폭발을 일으키면서 큰 우주가 되었는지가 맞는지를 알수 있는 힉스라는 물질을 그 안에서 얻는 거예요. 그거를 확인하려는 거죠. 만약, 그게 안되면 100년의 물리학이 모두 무너진다고 해요. 근데 나는 말하고 싶은게 그거예요. 그렇게 해서 놀라운 창조의 신비를 밝혀 내었다고 합시다. 물리적인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밝힌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가게 만들어 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선하게 말들어 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눈부시게 과학이 발달해도 그리고 이 세상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오고 정치 체계가 바뀌고 역사가 격동을 치면서 변해가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존재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하는거죠.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얻을수 있는 지식을 통해서 도달할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렇게 뛰어나고 놀라운 과학의 신비로운 세계를 모두 모르고, 우주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생물들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냥 하나님이 세계와 나를 창조하셨고, 나와 세상은 주님의 것이고, 그리고 나와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거를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훨씬더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이 모든 은혜의 세계는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의 세계를 아는것 조차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 자신의 발달한 두뇌와 과학의 지혜 이런 것들로서는 자연의 법칙을 밝혀 가지만 아무리 이것을 통해 뛰어나게 밝힌다고 해도 하나님께 가는 길은 알수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 나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이죠.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워요. 그래서 은혜의 세계는 머리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음이 훌륭하고 성령의 은혜를 흠뻑받는 사람들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다 설명할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큰 사랑,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자비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매일 매일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혹시 그럴때 있잖아요. 믿음이 약해지는것 같을때, 흔들리는것 같을때, 그럴때 있쟎아요. 뭐가 결핍되어 있냐하면 은혜의 경험이 결핍되어 있는거죠. 그래서 신령한 은헤의 세계에 대한 경험, 그것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예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사 보좌우편에 계신 그 우주의 통치주로서의 그 영광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서 사라질때 그때 우리는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아무리 세게 기도해도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지 않으면 그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예요. 그때에 우리의 삶은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을 알수 있고 성령께서 끊임없이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것들을 많이 알게 하시죠.
Ⅲ. 결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것들을 많이 알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감사, 감사가 일어나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안하시는 일이 있어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주시지는 않으세요. 인간의 욕망을 아무리 만족시켜주시려고 해도, 마지막에 인간이 원하는 것은 뭘까요? 그렇죠. 그래서 역사를 보면 왕이 총해해서 자기 밑에 데려다 놨는데도, 하난데 한끝발차이인데 왕을 베신하는 사람이 역사에 수없이 많은 거예요. 인간이 그런 존재예요.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이 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을 자신 아래 두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끝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시고, 그 사람을 바꾸시는 것이죠. 그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이예요. 만족시킬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끊임없이 욕망을 품고사는 인간을 확 변화시켜서 그래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리스도의 집에서 종으로 사는 것을 이 세상에서 제왕의 면류관을 쓰며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게 그 사람을 바꾸어 놓으시는 것이예요. 그게 뭐예요? 은혜의 세계에요. 은혜의 세계에 속한 것들을 성령을 통해 많이 알게 되면 많이 알게 될수록 감사가 이 안에서 계속 솟아 오르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의무를 행할때도 감사가 넘치면 그게 짜증이 안나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 자체가 큰 은혜고 그게 하나의 감사의 제목이 될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복음의 빛이 있는 이 나라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저도 감사해야죠. 정말 그런데 살아서 그런 사람들이랑 같이 살라고 하면 같이 못살거 같아요. 요즘들어 갑자기 영국갔다 오면서 은혜로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도 내가 행복한 사람이지.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있고, 이렇게 초자연적것들을 증거할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알기를 바라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마음을 가지니까 갑자기 몇가지 짜증나는 일들이 있었는데 스르륵 없어지고 하나님이 ‘너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알아라‘ 그러는거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 더 있다가 올라고 하다가 빨리 왔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은헤의 세계를 많이 보여주시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의 세계속에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하나님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를 열렬하게 구하시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2 (2008/06/1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3 (2008/06/18,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4 (2008/06/25,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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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지혜와 성령 7 (2008/08/20,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8 (2008/09/03,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9 (2008/09/17,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0 (2008/10/01, 수요예배)
복음 지혜와 성령 11 (2008/12/10, 수요예배)
9.복음과 신령한 분별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Ⅰ. 본문 해설
사도는 오늘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무엇을 말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 앞에 나오는 멀리 가면 하나님의 지혜요. 가까이 오면 하나님의 사정이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이것을 간략하게 이야기 하면 복음이에요. 이것을 말하는데, 그것을 말하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복음을 너희들에게 전해줌에 있어 내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Ⅱ. 바울이 전한 것 : 복음
A. 사람의 지혜가 아님
그래서 바울이 전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해준 이 복음은 제일 먼저 사람의 지혜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 두 개를 대비시켜서 말하면서 자신이 전해주는 이 복음이 지혜이긴 지혜인데, 이게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사람이 마음을 많이 기울이고 노력하면 더디기는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이성에서 이성을 오고 가는 지혜이기 때문에 교육과 지성의 훈련이 덜 된 사람들은 더디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을 쉽게 하고 이치를 잘 따져서 가르쳐주면 사람들에게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사람의 지혜였습니다. 이런 지혜는 바로 어떻게 인간이 살아야지만 행복해 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동물들과는 달리 먹여주고 입혀주고 잠만 재워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피조물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먹고 살만해 진 나라가 가장 행복할 거예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오히려 경제적으로 잘 살고 넉넉한 나라의 사람들일수록 고뇌가 훨씬 더 많아요. 저도 신문보고 깜짝 놀랐는데,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첫 번째 나라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에요. 국민소득이 몇 백 불 밖 에 안 되는 나라에요. 우리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전혀 행복할 것 같지 않은데.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거죠. 결코 인간은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며,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걸 깨달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사설들을 만든 사람들이 철학자들이요, 사상가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도의 이성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좀 어렵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치를 좀 알고 나면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렇게 철학을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을 아무리 지식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이해 못할 것은 없어요.
누군가가 말을 쉽게 해 주고 이해시켜주고 하면, 결국은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러면 복음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에요. 바울이 복음을 전했어도 만약에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죠? 그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그 복음이 증거 될 때에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을 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복음은 생명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씨앗과 같아요. 씨앗이 바구니에 받혀져서 집안에 있을 때는 씨앗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그 씨앗이 땅에 뿌려져요. 땅이 그 씨앗을 받아들여요. 습기와 양분과 모든 온도가 맞혀진 가운데 받아들여져요. 그리고 거기에 씨앗이 썩으면서 씨눈이 자라면서 뿌리를 뻗고 싹이 나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것이 점점 자라서 눈에 넣어도 감출 수 있는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 수 있는 큰 나무로까지 자라게 되요. 복음 그 자체는 믿음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과연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을까?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며 놀라운 힘을 뻗쳐 나가는 거예요.
요즘 중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어요. 왜 이 세상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들, 그리고 카스트 제도 같은 것들이 있는 인도, 이슬람 국가, 이런 나라들에서 만약에 자기들의 사상이나 생각이 훨씬 우월하고 좋은 것이라면 왜 떳떳하게 한 번 겨뤄보자 하고 기독교를 향해서 문을 못 여는지 아세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하고 놀라운 능력 때문이에요. 그게 사회를- 그 사람들 표현대로라면 좀먹는 거지만- 우리의 표현으로는 다 두드려 엎어서 완전히 바꾸는 거지요. 놀라운 능력이에요.
우리나라 1900년대 초만 해도 양반이면 기본적으로 첩을 거느려야지만 체면이 섰어요. 별로 동의 안 되죠?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그게 재산과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표시였어요. 그런데 그게 왜 결국 무너져 버렸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또 조혼의 풍습이 있었죠? 그래서 일찍 시집을 보내는 거예요. 우리 할머니도 16세에 시집을 오셨대요. 신랑이 14세더래요. 그런 조혼의 풍습 같은 것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여자들을 중국에서 공출해 가기도 하는 것들,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동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조혼의 풍습들을 다 타파한 게 어디부터 시작됐는지 아세요?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그 역사를 들춰보면 얼마나 재미있냐면, 이제 예수를 믿겠다고 했는데 이미 예수를 믿기 전에 첩을 얻은 거예요. 이미 들어온 거죠. 그런 걸 교회에서 어떻게 해결했냐면 딱 내쫒으며 가정에 보통 복잡한 일이 일어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결했냐면 회심하기 전에 얻은 첩은 할 수 없고, 이제부터는 안 된다. 그렇게 과도기를 둔 다음에 그 다음부터는 철저하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들어서 수 없이 설교하면서 교인들을 가르친 거예요. 그리고 어느 시점에 와서는 이제 그렇게 됐을 경우 교회에서 치리하기 시작한 거예요. 치리하기 시작한 게 1920년도 후반 이후부터 교회들에서 그런 문제를 치리하기 시작한 거예요. 회심한 사람으로서 다시 첩을 둔다든지 씨받이를 한다든지 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치리하는 거예요. 그런 놀라운 능력을 하는 거예요. 남녀가 평등하다고 하는 거, 만약에 기독교의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바꾸지 않았으면 굉장히 오랜 세월이 흘러야지만 바뀌었을 거예요. 놀랍게 바뀐 거죠. 미국에서도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게 얼마 안돼요. 몇 년 안돼요. 그런데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 복음이 사람들을 바꾸어 놓으니까, 여자를 하찮게 여기던 것 다 깨뜨려지고, 아이들을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 다 깨뜨려 져서 아이들을 어린이로 높이는 이런 운동들이 일어나고, 이게 복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죠?
자기들이 유지하고 있는 이 체제나 사상 자체가 반 복음적 이예요. 복음이 들어오면 반드시 한 판 뜨고 본다는 얘기죠. 그런데 그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으면 굴복하지만, 복음의 능력이 그 사람들 속에 역사하면 그 사회를 바꿔 놓고야 마는 거지요. 그 위대한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큰 힘을 복음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 결국은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전해지는 지혜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람의 영혼과 인격, 마음, 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 아주 강한 힘이 있는 거예요. 그런 강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 복음이 사람들을 바꿔 놓는 거예요. 바울이 바로 그 복음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전해 준 것이었어요. 이 놀라운 잘못된 이 세상의 질서를 부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서를 세우는 이 놀라운 능력과 복음의 큰 힘은 복음이 그 사람 자신을 사로잡았기 때문 이예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과 모든 것을 외형의 껍데기만 남겨놓고 바꿔 놓은 것 이예요.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꿔 놓고 ,그 사람의 영혼을 바꿔 놓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인간을 하나님 사랑하도록 바꿔 놓고, 자기를 이길 수 없던 인간을 자기를 이기며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바꿔 놓은 거예요. 이런 놀라운 변화를 복음이 일으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전해주는 지혜가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 이예요. 만약에 이 복음이 사람의 지혜였으면 누가 이 복음을 가장 잘 전해서 이길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가르쳐서 사람들을 이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 사람이 이길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죠. 그럼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면 “아! 그렇구나. 그럼 결국은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이성에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구나.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구나.” 하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즉 이런 거죠. 비록 우리가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그 큰 구원의 비밀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성에게 전해질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잘 가르치면 어떻게 까지는 될 수 있냐면, 우리들이 핑계할 수 없게끔 까지는 되요.“아!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는 말할 수 없겠구나. 하나님이 나처럼 막 사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벌 주시겠구나.” 이런 정도 까지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이예요. 그러면 그 이상은 할 수가 없는 거죠
B. 성령에 의해 받은 것
그래서 이 복음은 전하는 사도 바울의 일행도 그렇게 이성의 탐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받은 것 이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 그랬냐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했어요. 즉 성령이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래서 이 부분에 와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복음을 말해 주는 것 뿐 이예요. 그런데 아무리 이 복음을 정교하게 말해 주어도 그러한 사람의 말의 논리가 인간에게 우리가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비유를 하자면 옷을 벗고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와 그 옆에 있는 칼의 관계와 유사해요.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칼을 환자 옆에 놔두어도 그 칼이 환자를 수술 할 수는 없어요. 의사의 손에 딱 들릴 때 수술이 가능해 지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있는 칼이 불행하게 부엌칼 이예요. 그럼 수술 할 때 돼지고기 썰 듯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럼 정교한 수술이 어려워지겠죠?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든지 이 죄인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죄인의 마음을 꼭 찌를 수 있도록 복음을 잘 (그러나 잘 하기 위해서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안되요.)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잘 준비할 수 있는 것 까지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훌륭하게 잘 준비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말로 이성을 설득함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겨줄 수는 없는 거라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왜 선조 때 훌륭하던 신앙을 그 후손이 약속이나 한 듯이 다 외면하고 껍데기도 안 남은 신앙을 가지고 교회가 망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 이예요.
저번에 영국에 갔을 때도 얘기를 하는데, 제가 간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영국에 있는 교회들은 대개 세워진 지 오래된 교회기 때문에 캐 들어가면 다 역사가 있어요. 제가 설교한 교회도 조지 뮬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였고, 다른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예요. 그리고 그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할 때 쓰던 강대도 거기에 그대로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그 강대를 사갔다고 그러더라구요. 골동품으로 가져가려고 한 것이지요. 처음엔 어느 목사님한테 이 강대를 좀 치웠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니 그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우리가 가져가겠다고 어느 교단에서 전화를 했더니 안 준다고 그러더래요. 돈 받고 팔은 모양이에요. 그 교회가 우리로 보면 굉장히 유서 깊은 교회잖아요. 그런데 지금 문 닫기 직전이에요. 그러면서 사정 하는 게 한국 교회가 넉넉하니까 이 교회를 좀 사면 안 되냐? 왜냐하면 그래봤자 건축업자한테 팔리거나 디스코장이 되거나 이슬람한테 팔릴 게 빤 하니까 한국교회가 사면 안되냐? 얼마냐니까 40억이라고 그러대요.. 내가 40억이 어디 있어요? 기도원 치고 너무 멀잖아요. 자기네 나라에 있는 유적도 관리를 못하는데 거기까지 가서 그거 사겠어요? 지금 그렇게 고민을 하는 거예요. 웨슬리 목사님이 오랫동안 목회하시던 교회를 직접 갔는데, 목사님이 쓰던 방이랑 다 있더라구요. 나오다가 입구에 보니까 아주 애원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어요. 뭐냐면 한 달에 이 건물을 유지하는데 드는 돈이 대충 따질 때 천만 원인가 드는데, 유지할 돈이 너무 없으니까 여기에 기부 좀 하고 가라고 써 붙여 놓은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차도 팔고, 목사님 책도 팔고 하는데, 그게 무슨 돈벌이가 되겠어요? 그렇게 기라성 같은 주의 종들이 목회하던 교회가 이제는 건물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무슬림들에게 팔아서, 그 선조들이 예배하던 자리가 허물리고 그 자리에 돛 자리가 깔리고 카펫이 깔리고 무슬림들이 거기 와서 절하는 그런 곳으로 바뀌어 지는 거예요. 왜 그럴까? 간단한 거예요. 아무리 그 자식들을 놓고 좋은 얘기를 하고 교회를 손잡고 다니고,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주고, 시집 장가를 보내고 마지막엔 교회에 묻혀도 결국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예요. 성령님이 그 사람 마음속에 강력하게 역사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기를 이 영원한 형벌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고 누구든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믿는 것, 그래서 자신의 모든 생사간의 소망과 위로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것, 그래서 그 분을 전심으로 붙들고, 그 분을 의지하고 그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되는 이 모든 것, 이것은 성령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 세상에 어떤 입심 좋은 설교자가 오고 어떤 놀라운 종이 와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역사를 보면 그렇게 나라가 기독교화 되고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올 때 교회는 항상 교만해져요. 본질적인 문제를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고 ‘아! 사람들이 모이는 구나. 몰려오는구나. 아! 우리 새끼들이 정말 착하구나.’ 착하긴 뭐가 착해요? 만약에 자기 자식들보고 착하다고 그러면 그 교리를 잘 못 배운 사람들이에요. 인간이 태어나면 하나님과 원수 맺은 마음의 상태로 태어나 계속 다니는데, 착한 건 자기가 보기에 착한 거죠. “교회 나가라.” “예.” “주일 지켜라.” “예.” “연보해라.” “예.” 그것은 그 영혼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영혼 깊이 심겨져서 그래서 자기 안에 이 변화된 영혼으로 자기가 독자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이 된 건지, 집안 분위기가 예수 믿는 분위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건지, 이런 거를 어느 날 쫙 가르고 들어가서 이 새끼들이 나하고 내 남편하고 다 죽고 없고, 심지어는 환난과 핍박이 오더라도 얘들이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예수를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이들 안에 있을까? 이런 걸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 이예요. 늘 가정에 성실하고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가족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제가 시키는 대로 교회도 잘 나오고, 단 하나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 빼고요.” 그러면서 그 사이를 한 번 명확하게 구분해 보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왜? 심리적으로 그런 게 두려우니까. 자기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것, 자기 남편이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것, 이것으로 만족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결국은 바람이 확 불면서 결국은 신앙이 없다는 게 드러나는 거예요. 왜? 성령에 의해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성령에 의해서 그것을 받아도, 정말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한 때 생애를 주님께 드렸던 사람도 핍박이 오면 주님을 배반하고 잘 나가면 타락하는데, 그렇게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본질에 붙잡힌 적이 없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그래서 흘리는 뜨거운 눈물의 경험,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 보다도 더 선명한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 계심과 그 사랑- 이것을 경험하고 그것에 굳게 붙잡힌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을 지킬 수 있겠어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녀가 교회에 따라 나오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걸 충분히 신뢰하지 말아라 하는 얘기에요. 진짜 이 아이의 마음속에, 우리 가족들의 마음속에 정말 주님이 살아계시나? 그러면 도대체 성령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지혜를 어떻게 성령이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에요? 논리적으로 보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이 먼저이고 믿는게 그 다음이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데 어떻게 가르쳐 주시느냐? 사람이 사람에게 가르쳐 줄 때에는 영혼이 어두워도 괜찮아요. 영혼이 어두워도 어차피 사람이 사람에게 이성에서 이성으로 가르치는 것은 괜찮아요. 어두운 영혼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이 사람 이성에서 저 사람 이성으로 지식이 오고 가면서 전달되기 때문에 괜찮은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 보면 비 온 뒤에 무지개가 확 뜨잖아요. (요즘은 무지개가 잘 안 보이더라구요.) 길이가 1km, 2km 될 정도로 큰 무지개가 하늘에 선명하게 떠요. 너무 신비하잖아요. 나중에 초등학교, 중학교 올라가니까 그게 물방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햇빛이 비쳐서 그렇게 되는 거다. 프리즘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거다 라는 걸 알게 되요. 그럼 신비한 마음이 사라져요. 그렇게 이성에서 이성으로 오고 가요. 그럼 사람들이 다 이해를 해요. 그런데 그 이해하는 것도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를 잘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평생토록 무지개가 왜 저렇게 알록달록하게 뜨는지를 모르다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죽은 거예요. 다만 나타나도, 나타나나 안 나타나나 해로울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고 그냥 멋있다 그러시다가 죽은 거죠.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한 게 없었죠.
그런데 이 복음의 지혜는 어두워진 영혼으로서는 볼 수 없는 진리들 이예요. 그래서 성령님이 어떻게 가르쳐 주시냐면 빛을 비추어 주시는 거예요. 언제 한 번 무슨 일로 고속도로를 갔었어요. 그런데 밤중에 너무 피곤해서 고속도로에서 멈췄어요. 고속도로에서 멈추면 구경할 게 하나 있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구경할 게 없는데, 트럭에다가 별난 물건 갖다놓고 파는 사람들 있잖아요. 전등, 칼, 모자, 이런 거 갖다놓는데 대부분 조잡스러워요. 그런데 이상한 망원경이 하나 있어요. 망원경을 보니까 “그거 깜깜해서 안 보이니까 이걸 한 번 보세요.”해요. “이게 뭐예요?” 그러니까 적외선 망원경이래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런 것도 파냐니까 물 건너 온 거래요. 러시아에서 온 거래요. 얼마냐니까 80만원이래요. “어쨌든 한 번 봅시다.”하고 썼는데 “선생님, 그 쪽 보지 마시고 저기 빛 없는데 보세요. 빛 없으면 더 잘 보여요.” 해요. 쪼그리고 앉아서 자동차 밑을 봤는데 선명하게 보여요. 오히려 빛이 들어오면 컴컴하게 보이는데, 빛이 없는 델 보니까 아주 선명해요. 그래서 멀리 캄캄한데 쳐다보니까 사람 지나가는 게 아주 잘 보여요. 그런데 그냥 보면 캄캄해서 아무 것도 안 보여요. 그런데 이 속에는 대낮처럼 선명하게 약간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다 보여요. 무슨 뜻이냐면 육신의 눈으로는 캄캄하고 빛이 없으니까 안보여요. 그런데 망원경을 딱 쓰고 보니까 이 망원경은 이렇게 보이는 빛에 의해 전달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적외선이 방출되잖아요. 그것이 수집되어가지고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있는 것이 꼭 이런 게 (종이를 들추며) 있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여러분! 양심 이란 게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이 양심이 있다고 하는 그 사람을 수술대 위에 놓고 배를 가르면 거기서 양심이 나올까요? 없잖아요. 없는 거죠? 어떻게 알아요? 염통에 붙어있나? 무슨 얘기냐면 해부학적으로 피를 흘리고 물컹물컹한 살덩어리로 있어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만약에 그런 식으로 얘기하자면 영혼은 없는 거죠. 머리를 다 갈라도 영혼이 어디 있겠으며, 마음 찾자고 염통 뜯어봐야 피 몇 컵 정도지 거기에 마음이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는 마음의 존재를 믿잖아요. 그런 거죠. 이런 복음 진리도 해부학적으로 만져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도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계시고, 그 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는 구속의 제사도 있는 거죠. 그것이 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성령님이 성령의 빛으로 비춰 주시지 않을 때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봐요. 그런데 성령의 빛으로 확 비춰주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 빛을 우리들이 ‘성령의 조명’ 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런데 조명할 때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조명하세요. 성경을 조명하셔서 이 지식이 우리의 지성에 보탬이 되게끔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눈으로 불 수 있는 것들은 있다고 말하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은 없다고 얘기했는데, 성령이 확하고 빛을 비추시니까 이 말씀을 보는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은 항상 착각일 수 있거든요 제 김 장로 밑에 동생이 또 있어요. 셋째가 있는데, 이 친구가 “형, 내가 슬슬 걸어 다니면 사람들이 계속 인사해.” 그래서 내가 “너 행동 조심하고 다녀라.” 전엔 차도 똑같은 거 타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내가 봐도 흡사해요. 키는 내가 조금 큰데 열린 공간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아주 가까이 와서 인사하더래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니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대요. 내가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너 진짜 조심해라”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눈으로 보는 게 다라고 하면 굉장히 신뢰할 수 없는 거예요. 틀림없이 봤는데 아니에요. 어떤 때는 목숨까지 걸 정도로 확신을 하는데 찾아보면 아닌 적 있잖아요? 그렇게 인간의 눈은 불확실해요. 그래서 진짜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사람의 눈으로 확인하게 하신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지성으로 확인하게 하신 거죠.
그런 사람이 또 있어요. 김희철 장로님도 흡사한가 봐요. 사람들이 자꾸 인사하나 봐요. “김남준 목사님 안녕하세요?” 특히 노회 때 슬슬 다니면 여러 사람이 그런데요. 그만큼 인간의 눈은 불확실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육신의 눈으로 보게 하지 않으신 거죠. 예수님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제가 회심하지 않았을 때는 ‘아! 예수님도 핑계 대는 데 도사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보고 믿으면 ‘착각 했을 거야. 내가 잘못 들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죠. 더 선명하게 보이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라고 했을 때 안보여 주시겠다는 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지성 속에,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팍 찍어주시는 거죠. 그래서 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죠. 우리가 만약에 수십 년 전에 어떤 사실을 눈으로 보고 확인을 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시는 못 봤다면 그것을 확신하고 신뢰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고, 함께 밥을 먹은 적도 없고, 육신의 눈으로 뵌 적도 없는데 성령께서 그 분을 만나게 해 주시니까 (수십 년 전의 만남에 있어서 보고 듣고 만진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그 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게 지금 이 시간에도 믿어지게 만들어 주잖아요. 이러한 신령한 분별을 성령을 통해서만 하게 되는 거죠.
Ⅲ. 신령한 분별
누구든지 성령의 은혜의 감화를 받은 사람 이외에는 “주가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죄인이고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나를 위해 그 분이 흘려주신 보혈의 피로 나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할 수 없어요. 성령님이 역사해 주지 않으시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고백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게 되면 그것은 누구에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의 자녀를 향해 물어봐요. 굉장히 기분 나쁜 가정이지만, 내가 죽고 없어져도 이 아이들이 홀로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수 밖 에 없는 사람들일까? 교회 목회 하다보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거든요. 그게 뭐냐면 어느 날 와서 허풍을 떠는 거야. “목사님 제 친구가 있는데 걔는 왜 인생을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걔는 진짜 하나님 말씀 듣고 깨뜨려져야 해요” 하고 가서 전도해 오더라구요. 보면 진짜 답답한 사람이에요.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요. 그리고 진짜 감격스럽게 살아. 그런데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저는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 그런데 그 사람은 든든하게 뿌리를 박고 신앙생활을 하며 오히려 타이르는 거야. “너 믿음 생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게 바로 독립하는 믿음이에요.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해서 독립하는 믿음이에요. 그게 진짜 믿음이에요. 가정 분위기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그냥 주일이면 교회 나가는 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역사와 전통으로 그냥 교회 나가는 거 그건 전혀 신앙이 아니에요. 성령님께서 오셔서 사람의 말이나 모든 지혜로 수없이 얘기해도 소용없어요.
교회는 두 가지를 잘하면 되요. 교회는 어머니처럼 교인들을 꼭 끌어안고 사랑하고, 어머니처럼 그 자식을 기르는 것이 교회에요. 그런데 엄마가 계속 밥만 먹이고 살만 찌게 한다면 우리에서 돼지를 사육하는 것과 뭐가 틀리냐는 거예요. 그건 엄마가 아니지. 목부지. 엄마가 엄마이려면 그 아이를 무릎에 놓고 하나씩 가르쳐야 되잖아. 그래서 교회는 어머니처럼 양떼를 꼭 끌어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선생님처럼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해요. 그래서 모르는 것은 교훈하고, 잘못 아는 것은 책망하고, 틀리게 사는 것은 고쳐서 바르게 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어야지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예수 믿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 그는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책가방을 메고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오는 거예요. 가끔 보니까 우리 교회 어떤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이과 나온 사람은 열린 교회 다니기 힘들겠어요.”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뭐 공부 하라는 게 이리 많은지······” 그거 많지 않아요. 운전면허 따려고 일주일씩 공부하고 석 달씩 학원 다니잖아요. 여러분 세례를 받으려면 운전면허보다는 공부를 많이 해야 되지 않겠어요? 당연하지 않아요? 돈도 한 백만 원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세례교육 받을 때 돈 받아요?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에요? 예수 믿은 그 순간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한 거예요.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오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하려고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로 그 지식을 통해서 내가 만난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의 큰 사랑, 아름다운 은혜,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자비. 나는 믿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안 배워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자비가 뭘까? 하나하나 알아 갈수록 그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아 나는 거죠. 그래야지만 그게 공부가 공부되는 거라는 거죠. 깨달아지는 거라는 거죠.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역사가 없으면 결코 인간 속에는 믿음이 일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Ⅳ. 결론: 우리가 기도할 것
그러면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가 무엇이겠어요? 지금 이 세상의 사조와 풍조로 볼 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오래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우리의 조상들이 듣고, 우리의 선조들이 듣고, 우리의 사도들이 들으며 기뻐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증거 하기를 기뻐하셨던 미련해 보이는 이 복음을 굳게 믿고, 매일매일 그 복음을 경험하고, 성령의 놀라운 능력 안에서 우리와 우리의 세대들, 자손들이 예배 속에서, 성경을 읽고 경험하는 그 속에서 이 진리를 비춰 주시는 성령의 강한 은혜에 의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는 것 이외에, 그래서 이 세상이 모두 버려도 나는 내가 만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분을 붙들고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죽어도 문제없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어서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다음 세대에 하게 하시는 거예요. 이 일에 전심해야 하는 거예요.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그래서 이 아이의 회심이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 자식의 회심을 네 목숨과 바꾸겠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일초도 망설임 없이 “아멘” 하고 말할 수 있어요? 그게 신앙이에요. 그래서 이 신앙은 대대로 물려지는 신앙이 아니에요. 대대로 물려줘 봤자 기독교 문화적으로 물려주는 것 아니에요? “뿌리가 있습니다.” 뿌리는 무슨 뿌리에요. 뿌리가 되려면 아버지가 만난 그 큰 하나님을 아들도 만나야 해요. 그렇게 할아버지가 만난 하나님을 아버지가 만나고, 아버지가 만나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붙들고 놓지 않은 십자가의 복음을 아들도 믿게 되었을 때 그게 진짜 뿌리가 되는 거죠. ‘아! 우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셨고 우리 아버지가 이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성경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셨고, 나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내 지식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는데, 내 자식이 이렇게 주님을 만났다. 이게 바로 진짜 뿌리가 되는 거예요. 큰 뿌리가 되는 거죠. 이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30년이 지나기 전, 아마 우리나라에 있는 큰 교회들의 대부분의 건물이 쓸모없는 건물들이 될 거예요. 이걸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고 주님이 내 마음에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우리가 고난이 와도 우리가 복음을 믿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자식들도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단순한 문화로서의 복음이 아니라 살아있고 생생한 진리로서의 이 복음, 이것이 아이들의 가슴에 불로, 불에 단 쇠로 살을 지지는 것처럼 그렇게 깊이 예수의 흔적으로 아로새겨지는 거죠. 이를 위해서 교회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복음 지혜와 성령 1
복음 지혜와 성령 1 (2008/04/30,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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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복음에 대한 무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Ⅰ. 본문해설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유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Ⅱ. 육에 속한 사람
오늘 살펴보는 본문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신령한 일들을 받지 못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A.원어 : “프슈키코스”
이 본문에 나오는 “육”에 해당하는 원어는 프슈키코스로, 이것은 프슈케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프슈케는 영혼 중의 “혼”에 해당하는 단어로, 희랍인들의 인간관인 3분설에서는 영,혼,육 가운데 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희랍사람들은 인간을 영, 육, 혼으로 나누어져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설명은 얼핏보면 편리합니다. 육체가 있고 영이 있는데 그 사이에 혼이 있어서 영과 관련된 작용도 하고 육과 관련된 작용도 하니 설명하기에 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혼을 영과 육의 중간적 존재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영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혼, 목숨, 욕심, 정욕의 의미를 지닌 프슈케를 참고하면, 프슈키코스는 육적 생명의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B. 이표현의 의미
본문에서 말하는 육에 속한 사람이란 육적 생명의 사람 즉, 명백히 아직까지도 성령에 의해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자연인, 즉 회심하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타락한 인간자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의 의미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죽어있어서 육적 생명밖에 없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 가운데는 육에 속한 사람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는 본질적인 면과 현상적인 면 이렇게 두 각도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신자는 중생한 자이고 하나님이 영혼을 다시 살리신 사람이기 때문에 육적 생명에만 속한 자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에 대한 믿음을 항상 일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중생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중생으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감각이 항상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신자는 중생으로 인해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용서에 대한 감각, 영광에 대한 감각, 사랑에 대한 감각이 새롭게 생겨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인식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하찮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도 없는 영광스러운 분이시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이 중생으로 인해 생겨났을지라도 그 후 미끄러짐으로 인해 그러한 감각에 대해 무뎌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들이 별 특별한 변화가 없어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자꾸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신령한 것, 영광 등은 잡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영으로 아는 것이므로 육욕에 사로잡힌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육신에 속하는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영혼의 감각에 대하여는 더 쉽게 망각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은혜에서 미끄러져 육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신자에게는 신령한 것들에 속한 감각에 대하여는 무뎌지게 되는 것입니다.
Ⅲ.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
A. 하나님에 대한 무지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무지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무지입니다.
1. 존재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 유물론자였는데, 유물론적 사고에서 돌이켜 회심한 이후 “하나님은 물질의 존재처럼 이곳에 계시면 저곳에 계실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하시지 않으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질의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사고를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식에까지 이를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빛은 입자이기도 하지만 파장입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소리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리 역시 파장입니다. 소리 중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대역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파장이 너무 길거나 짧으면 인간은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빛도 우리의 눈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역이 아주 좁습니다. 자외선과 적외선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눈, 코, 귀, 입, 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중에서 극히 일부분입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봐도 우리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됩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2. 성품에 대해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우연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 이후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결국은 가인은 하나님을 몰랐고 아벨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것을 믿었기에 자신의 첫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이런 것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합니다.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겠다는 소망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무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거듭남으로써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성경의 진리가 믿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만을 가지고는 아무리 슬기롭게 이성을 활용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그들은 모든 인생을 살면서 삶의 이유와 선악의 판단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기초 없이 쌓여진 모래성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을 신뢰하지 못하며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B.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무지
육에 속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성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성령의 일을 일컫는데, 그 성령의 일이란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인간이 죄인이고 그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지에 대한 지혜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사람 안에 오셔서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이루시는 은혜 안에 있는 신비한 일들에 대해서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역사하시며 은혜로 보존하시는 일을 행하시는지에 대해 무지합니다. 신앙의 중심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아무리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이치를 많이 터득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실제의 영의 신비 안에서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많은 진리가 우리를 견고하게 세우는데 있어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가 교리를 많이 배울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듭니다. 성경을 수없이 읽고 교리를 아무리 공부하고 여러 가지 이치를 탁월하게 깨우쳤다하더라도 현재 은혜 안에서 살아가지 않고 있다면 그러한 것들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육에 속한 사람은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영혼의 본성을 바꾸시고 심령을 위로 하시며 깊이 베어 있는 악한 본성을 거룩하게 바꾸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는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C. 무지의 이유: 육적 사고
육에 속한 사람이 이러한 진리의 세계에 무지한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들이 육적 사고의 틀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그 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완고해서 절대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면서 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이 복음을 우리는 믿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이 참으로 신비한 것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진리와 사실들을 어떻게 우리가 믿게 되었을까하는 신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을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어둠의 세력은 참으로 강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는 “이세상이 신의 복음의 빛이 비추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라고 표현하였다. 결국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것이 진리로 믿어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둠의 세력이 물러나도록 성령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은 생애에 일대의 신비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못하도록 각 사람의 마음을 어둠으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복음에 대한 반응은 참으로 영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입니다.
Ⅳ. 결론: 성령의 비췸을 구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항상 그 분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말씀을 들을 때에도 신자는 그 말씀에 따르는 하나님의 마음과 감정을 모두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 말씀은 듣는데 감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것은 그 영혼의 상태가 건강하지 못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하나님과는 관련 없던 것들이 하나님의 생각이 나에게 전해져 나의 생각을 지배하고 주의 마음으로 가득차고 나의 의지를 꺾고 주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이것이 진정한 말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신령한 작용이 소진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은 차갑고 건조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때 교리적인 지식이 없다면 더욱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다할지라도 마음 안에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가 계속되어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울려서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감정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지성, 감정, 의지가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느끼고 의지한다는 것과 일직선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악기와 같습니다. 악기는 울림통이 중요합니다. 마치 악기가 울림통을 지니고 그 소리를 울리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의 빛이 우리를 밝게 비춰주시면 그 말씀을 우리의 영혼에 울리게 하여 삶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일 형편없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이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추어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또한 옳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은혜의 감격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백 개를 깨달아도 한 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보다는 한 개를 깨닫더라도 그걸 진실하게 붙들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은혜가 유지되게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늘 듣던 말씀도 자신이 어떠한 자세로 듣느냐에 따라 은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받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영향을 받도록 우리는 날마다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는데 우리의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간구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진리를 듣는 것 자체가 병들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치유책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반만 맞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들을 때 거듭나고 회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그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성령의 은혜의 작용 때문에 그 심령이 상한 심령이 되게 하셔야만이 하나님에게 자신의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불신자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간구하는 자를 찾으셔서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 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씀 앞에 나아가려하지 않고 성령께 순종하지 않을 때 그냥 내버려두실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진리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마음을 지키며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얼마나 가벼운 멍에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은혜의 빛이 사라지고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 가운데 있는 우리를 성령께서 깨끗케 하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강권적인 은혜가 임하도록 날마다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일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신앙입니다. 한때 주님을 만나고 알았다는 것 때문에 교만해지고 지금 은혜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강력한 은혜의 빛을 비추고 우리들로 하여금 은혜의 세계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믿음 안에서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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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신령한 자의 판단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Ⅰ. 본문 해설
우리가 좀 지나긴했지만 이전에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부를 하였습니다. 오늘 여기서는 그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되는 신령한 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신령한 자 그리고 육에 속한 자의 대조는 복음을 중심으로 두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대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에 속한 모든 사람이 방탕하고 죄를 짓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도 도덕적일 수 있고 영적인 사람도 죄 가운데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문제의 핵심은 복음에 대한 생각의 문제인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모든 사고방식이 육신적이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의 지혜 이외에는 믿지를 않습니다. 즉, 자신이 이성적으로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모든 것들은 거부하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방식이 복음을 어리석은 것이다, 미련한 것이다라고 말하게 만드는데 사실은 그 어리석은 복음 안에 인간의 창조와 구원과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완성에 관한 비밀들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미련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 미련한 것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에 미련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의 지혜를 초월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그 육에 속한 사람 즉 육신적인 생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지혜인 이 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신령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Ⅱ. 신령한 사람
A. 원어: ‘프뉴마티코스’
이 신령한 사람의 원어는 ‘프뉴마티코스’ 라는 것입니다. ‘프뉴마’는 영 혹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 영은 히브리어로 ‘로아흐’고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에 나오는 삼위일체 중 삼위인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죠. 거기에 형용사가 되어서 ‘프뉴마티코스’가 된거죠.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 성령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B. 이 표현의 의미
이 표현의 의미는 앞에 나온 ‘사르키코스’라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정신과 사고와 모든 것들이 본성에 매여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죠.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을 부여받았잖아요. 그러면 영혼과 육체가 만나서 산사람이 된 것 아니예요. 육체에는 육적 기능이 있고 영혼에는 영적 기능이 있는데 두 개는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수치심을 느끼는 것, 이것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심을 느끼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후끈거립니다. 이와 같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는 구분이 됩니다. 정신적인 것에는 판단력이 있는데 이 판단력에는 자연적인 판단력과 도덕적인 판단력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판단력은 2더하기2는 4가 된다, 나무에 열매가 맺기 전에는 꽃이 피어야한다, 나무가 살아있다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나 자란다는 것은 자연적인 판단력입니다.
이런 자연적인 판단력에 도덕적인 판단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질서를 위해 그런 판단력을 인간에게 갖게 하셨습니다. ‘신은 절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악한 일을 한 날은 밤에 잠이 안 오고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 날은 달콤한 피곤 속에 보람을 느끼며 잠이 듭니다. 이런 것들은 약간의 도덕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연적인 판단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은 모두 보고 계시고, 마지막에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 심판하시고, 지옥과 천국이 있고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다는 모든 믿음과 판단은 자연적인 인간의 지능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신령한 영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 때문에 타락을 했어도 첫 번째 영적인 것들 가운데 정신적인 판단들은 상당부분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좋은 사람이 잘하는 것입니다.
가끔 공부 못하던 애가 은혜를 받으니까 꼴등에서 전교1등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그 아이가 은혜를 못 받았어도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애예요.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서 뚜껑이 열린거죠. 은혜를 받아도 못하는 애들이 훨씬 더 많은데 그런 애들은 간증을 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걔 혼자 간증을 하는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거예요. 그렇게 타락을 해도 남아있다는 거죠.
정신적으로 자연적인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것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아주 뛰어난 효력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으로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다주는 것이죠.
여러분 혹시 독수리나 아니면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이 있잖아요. 그것이 위에서 날아와서 잡는데 그런 새들의 눈은 놀랍게 이렇게 보다가 쫙 조리개를 모아서, 왜 그 텔레비전에서 넓은 땅을 보여주다가 클로즈업을 하면 렌즈가 줄어들면서 한 지점만 크게 보이잖아요. 그렇게 볼 수 있는 조절기능을 얘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눈에는 하나도 안보이는데 이 새의 눈에는 그게 보이는 거죠. 고기도 물 속 깊은 곳에 다니면, 1미터쯤 속에 있다면 다이빙해서 잡을 수 없는 거잖아요. 고기가 표면에 막 뜨는 거예요. 그러면 고기를 쏘아보고 있다가 고기가 표면 위로 뜨면 기가막히게 새가 부리로 고기를 탁 찍는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면 신기한 거예요. 왜냐하면 새가 물고기가 보이는 곳을 보이는 지점을 찍고 돌격하면 10년을 머리를 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어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죠. 굴절현상을 말하는 거예요. 절대 위에서 보는 그 지점에 물고기는 있지 않아요. 대야에 젓가락을 넣으면 휘어보이잖아요. 그러니깐 이 물고기는 실제 있는 곳보다 앞에 있다는 것인데 놀랍게 새가 이것을 계산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실은 표면으로 보면 물고기가 없어 보이는 그 지점을 공격을 해서 자기의 눈으로는 맹물밖에 없는 그 지점을 찍으면 물고기가 잡히는 거죠. 나는 새가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거듭되는 훈련에 의한 것인지, 천부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것도 어떤 종류의 새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실이라고 생각을 안하고, 사실은 고기가 없는 그 지점을 향해서 입을 벌리면 잡힌다는 사실은 이중의 의식이 이 새의 머릿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새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 새의 머리도 아니고 안 믿는다는게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머리 좋은 사람들은 그것이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는거죠.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 믿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판단을 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프뉴마티코스’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것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충분히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도 원래는 안그랬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다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Ⅲ. 신령한 사람의 특징
세 가지입니다. 자연적으로 우리들이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믿어야 하는데 그 믿음은 적어도 세 가지를 함께 동반합니다.
즉 우리가 인간의 이성의 지혜로 더듬어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성경의 계시. 그거예요. 이게 기독교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와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이유예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는 많아요. 그 대신 그 믿음의 대상이 계시의 말씀이 아니예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많은 믿음, 다양한 종류의 믿음, 다양한 종류의 체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동일한 교회에서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동일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동일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동일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인데도 신앙의 색깔이 알록달록해요. 얼마나 다양해요. 우리들이 누가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을 너무나 만났기 때문에 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누구든지 진지하게 하나님 만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면 나에게는 너무나 새롭게 다가와요.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얼마나 넓고 위대하신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그래서 누가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일평생 하나님을 만나온 사람인데도 자기보다 교육도 덜 받고 자기보다 지적으로나 모든 것으로 어린 사람에게도 오히려 자기가 여태까지 알지 못한 하나님을 그의 고백을 통해 깨닫게 되는거죠.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만난다는거죠.
그런데 그런 많은 다양한 경험, 다양한 체험, 다양한 신비, 다양한 신앙의 색깔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다양성 때문에 완전히 다른 신앙이 되지 못하도록 붙들어주는 유일한 판단이 객관적인 성경의 계시예요. 체험, 내 신앙, 나의 신앙의 색깔,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에게 적용하는 생활 이 모든 것은 주관적이 것이예요. 그러나 성경은 객관적이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언제나 모든 사람의 다양한 체험에 대해서, 다양한 신앙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의 진리를 적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최후의 판단자가 되는거죠. 그러면 그 판단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이 되면 그 다양성 자체가 성경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을 훼손되지 않는 그 내에서 다양성이 되는거죠. 그런데 그 판단에서 어긋나면 칼같이 잘라내지 않으면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아주 다른 신앙이 되는 거죠. 이것을 우리는 이단이라고 하는거죠.
두 번째는 성령이예요. 여기에 신령한 자라고 하는 것은 성령받은 사람을 이야기하는거예요. 거듭난 모든 자는 성령받은 자예요. 왜냐면 누구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도 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 성령은 공동체 속에 부어진 영이예요. 우리가 한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 각자각자가 성령께 붙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보편 교회로 연합된 가운데 그 안에 성령이 계셔서 우리가 그 구속의 기업으로 성령을 누리며 사는거죠. 하나님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영이예요. 물론 구원받은 사람들도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하나님 믿느냐에 따라서 그가 가지고 있는 성령에 붙잡힌 삶의 정도는 각각 달라져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성령 충만할 때는 우리의 생각도 훨씬 더 신령해지고 성령 충만할 때는 우리들이 사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지혜에 속한 판단력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판단력을 훨씬 더 기쁘게 받아들여요.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이예요. 우리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되어 있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도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해요. 또 믿음 그 자체가 성령이 하시는 일이야. 객관적인 계시의 말씀이 있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들이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는 인간의 지혜만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것을 파악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거죠. 이것은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한 밤중에 군인들이 투시망원경을 쓰면 흑백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어두워질수록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 얘기는 우리들이 맨 눈으로 볼 때에 어두움 속에서 무엇인가 볼 수 있게 해주는 파장이 계속 온다는거예요. 그런데 그 파장이 우리가 볼 수 있는 파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맨 눈으로는 그 파장을 볼 수 없어서 안 보이는거죠. 존재하는 파장의 범위가 이만큼이라면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파장의 범위는 요만큼인거죠. 또 물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아서 전혀 볼 수가 없죠. 그때 사물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가 실제로 망원경을 쓰고 보면 거기 또렷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숫자까지 알 수 있잖아요. 10년 전에 망원경으로 250배율로 봤는데 해운대 이편에서 저편까지 3킬로가 넘는데 여관 앞에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또렷이 보여요. 맨눈으로는 여관 자체도 식별이 안돼요. 우리가 듣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너무 파장이 짧으면 단파예요. 초음파. 안들려요. 파장이 너무 길어도 못들어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파장의 대역은 아주 협소해요. 또 우리 신체에는 통점과 압점이 있어요. 모든 게 다 감각을 느끼는 게 아니예요. 각각 통증을 느끼는 지점과 압박감, 무게를 느끼는 지점이 각각 따로 있어요. 그 지점을 벗어나서 누르면 통증이 안 느껴지는거죠. 한의원에 가면 침을 맞고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는데 어떤 때는 무지 아픈데 어떤 때는 아무 의식도 없이 바늘이 그냥 스르르 들어가요. 그런게 통점과 관련되어 있는거예요. 혓바닥을 보면 양쪽에 쓴맛, 신맛, 짠맛, 단맛, 맛보는 부위가 달라요. 그러면 만약에 단것을 쓴맛을 느끼는 지점에 밀어 넣으면 그리고 이속에 침성분이 전혀 없으면 단맛을 전혀 못 느끼는거예요. 그래서 내 입속에 들어온 그것을 설탕이 아니라 모래알이라고 판단을 해도 사실은 사실이 아닌거죠. 위치가 틀려서 맛을 못보는거죠.
이렇게 인간의 모든 것들은 한계가 있는거죠. 인간의 이성으로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좁은데 그 속에 들어오는 것만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것과 똑같은 것이죠.
낮에 사물들이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어요. 그리고 불을 모두 껐어요. 빛 하나 안들어오는 캄캄한 세상이 되었어요. 실낱같은 불빛이 들어와서 길게 비추어요. 의자 하나씩만 보여요. 그것만 있고 나머지는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성으로 생각해서 찾아내고 알 수 있는 것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들이 훨씬 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 자신이 속한 곳은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에 있고 물질적이 것들에 속해 있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영적인 것과 정신세계에 속한 것이예요. 그것을 이런 물질세계에 속한 것과 똑같은 이치를 가지고 그것을 파악하려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죠.
연탄불 위에다가 만약에 공깃돌 같은 것을 올려놓고 뜨겁게 연탄을 피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그대로 있던지 열을 세게 받아서 돌이 터지든지, 혹은 시벌겋게 되던지. 혹은 만약에 은성분이 섞여 있다면 은물이 줄줄 녹아 내릴테고, 유리가 담긴 칠레초석과 같은 것을 올려놓고 뜨거운 불을 때면 그걸 하기도 할거예요. 규석을 발견한 섬 사람들이 여행자들이 돌맹이를 놓고 불을 잔뜩 땠는데 바위가 오줌을 줄줄 싸는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오줌을 싼다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불을 때고 끝나고 나니까 오줌이 얼어 붙었요. 딱딱해졌는데 꺼내보니까 이게 신기한 거예요. 돌맹이 같은데 투명한데 뭐가 비취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리의 발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그 연탄불 위에다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중에 하나가 되어야할거 아니예요. 오줌을 줄줄 싸든가 그래서 유리를 내든가 터지든가 가만히 있던가 해야되죠. 기체로 다 날라가버려요. 다이아몬드가 다 탄소이기 때문에 이산화탄소와 화합을 하면 드라이아이스 날아가듯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걸 받아들일까요? 다이아몬드는 날아간다는걸. 더구나 화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한다고 받아들이겠냐는거요.
지식의 부족이 결국은 그러한 현상을 가지고 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선악 간에 그분이 위엄 있으신 마지막 판단자라는 사실, 그분이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 믿는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셨고, 그분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우리의 구속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부하는 지혜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래서 신령한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어요. 육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징이예요.
A. 하나님에 대한 앎
그게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앎이예요. 하나님에 대한 앎은 존재에 대한 앎과 성품에 대한 앎으로 나누어져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 정신의 눈이든지 무슨 눈이든지 간에 우리가 직접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거예요. 하나님 자신은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계시지 누구도 하나님 자신을 파악할 수 없어요.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요. 그런데 증명할 수 없이 믿어요. 다양한 증명의 방법들이 나왔지만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필요성을 퇴출시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너무나 훌륭하게 설명한 나머지 굳이 믿을 필요가 없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우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왜 믿음이 없으면 안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비행기가 수시로 추락하죠. 테러도 당해요. 그래서 어제도 비행기 한 대가 떨어졌다면서요. 왜 하필이면 한국사람 집에 떨어져서 너무 안됐더라구요. 마음이 좀 안 좋더라구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좀 민가가 아닌 곳에 떨어지지 왜 그랬을까.. 오히려 몇 년전 추락해서 죽은 한국군 조종사가 생각났어요. 공군 관계자가 평가하기를 탈출안하고 비행기와 함께 사망한 원인을 민가에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몸부림쳤다고 판단하는거죠. 비행기가 떨어지잖아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비행기를 탑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타겠느냐 말하는데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비행기를 타는 순간에 비행기가 안떨어질 것이라고 아무리 믿어도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변화를 가져오는 믿음은 아니예요. 그것은 확률에 의존한 믿음이예요. 비행기가 얼마나 안전하냐면요, 추락을 많이 해도 일 년 동안에 타고 다니는 사람하고 비행기 추락하는 사람하고 나누면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가다가 차가 뛰어올라와서 치어죽을 확률보다 낮다는거예요. 그러니깐 안심하고 타는거죠.
그런데 그런 믿음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그런 종류의 믿음은 아니예요.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 그리고 신뢰, 그리고 자기 포기, 그리고 구원의 길이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확실한 믿음 그래서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운명을 그분께 맡기는 이 영혼의 활동이예요. 그래서 그 믿음은 우리의 영혼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와요. 그래서 마틴루터가 이런 인상적인 말을 했어요.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온다. 그래서 온전히 그분을 믿을 때에는 그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거죠.
그러나 우리가 비행기가 절대로 추락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믿는다고 소리쳐도 우리가 비행기 사랑하지 않아요. 그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니깐 돈 내고 탄거지 우리가 회사 사장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애사심도 없어요. 비행기 내릴때마다 우리 항공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난 사랑한적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마틴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한거죠.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때 이 사랑은 아까 말한 사랑이 아니라 본성에 속한 사랑이죠 그건 아가페에 속한 사랑이 될 수 없는거죠. 그런데 그런 변화를 가져온다는거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져 오는거죠. 그러니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은 무엇에 의해서도 증명이 안되는거죠.
이런 경우는 있어요. 이미 믿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이야기해주면 그 믿음이 든든해질 수 있어요. 그것도 상당한 유익이죠.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안 믿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성공할 수는 없어요. 또 설득을 해도, 고개를 끄덕인다해도 그것이 믿은 것이 아니다. 왜 영혼의 참된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은 존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믿는거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앎에 대해서는 성경에 명백하게 설명되었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는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에서 서서히 밑으로 내려와서 성품을 알게 되는게 아니라, 성품의 발현을 통해서 우리에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어떠하신지를 거꾸로 유추해가는 거예요.
자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내 마음이었어요. 약간의 양심과 도덕성이 있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진리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어요. 세상적으로 봤을 때는 불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불순종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는 것 같고 기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고 막 고민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야 비로소 자기의 삶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거예요.
어느 형제가 하나님 앞에 깊이 결신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갔어요. 대학원에 합격을 했어요. 모아놓은 돈도 없고 굉장히 힘들어 입학을 할 능력이 안되는거예요. 걱정을 하니까 같이 있던 동료가 돈이 좀 있어서 이런저런 신학생들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 선한 집사님이 교회에 계시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집사님께 가서 얘기했데요. 집사님 우리 같은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는 아무개 형제가 소명을 받고 신학대학원에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입학을 할 수 없는 처지랍니다. 좀 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했는데 갑자기 안색이 싸늘해지면서 지금 나도 굉장히 힘들게 살아가고 지금 돕는 것도 힘에 지나칠 정도로 도와서 기력이 없는데 왜 하필이면 나한테만 부담을 주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더라는 거예요. 자기가 가면 아이구 그렇나구 하면서 도와줄줄알았는데굉장히면박을주더라는거예요. 그런데 다음날 전화가 와서 태도가 180도 바뀌어서 자기가 내줄테니까 지금 빨리 오라고 그러면서 등록금을 주면서 하는 얘기가 자기가 집에 가서 자는데 밤새도록 잠이 안오더라는 거예요. 그 대화가 떠올라서. 그게 뭐예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나와 있어요?. 심지어 성경에도 그런 명백하게 아무개 몇 월 몇 일날 안도와주면 재미없다, 이런거 안다오죠. 그런데 성령님께서 자신의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해주신거죠. 하나님은 그렇게 소명을 받고 학교 다니는 사람들에게 너희 믿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어라 하는게 하나님의 성품인데 자기가 돈이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을 돕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굳이 그 형제까지 도와야하냐라는 생각으로 칼같이 자르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성품에 안어울리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걸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는거죠.
며느리하고 시어머니는 둘이 와서 함께 교회에서 은혜를 받아도 함께 사는 것은 쉽지가 않거든요. 그 사람이 동료라면 옆에서 은혜를 받으면 감사합니다. 저 자매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시다니. 그러지만 시어머니는 옆에서 며느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으면 속에 꼬인 것이 있다면 으이구 집에서 나한테 죄 많이 짓더니 여기 와서 회개하는구나 지난주에도 은혜 받더니 별로 달라진 것도 없데 이렇게 생각하는거예요. 옆에 있는 시어머니가 은혜를 받으면 며느리가 뭐라고 생각하냐면 으이구 교회에서나 신령하지 집에 가봐라.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너무 부당하게 자기를 대하는거예요. 그래서 경우대로 따져보려고 시작하려다가 주님이 참아라 얘야 너는 집사니라 쿵 들려오는거예요. 그래 내가 참자. 그런데 왜 참아야되는지 자기도 모르는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네가 참 잘했다 위로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때에는 내가 왜 참야야하는지 몰랐지만 그 때 한 행동이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거예요.
예전에 우리 교회에 있던 형제자매 얘긴데 이 형제자매가 교리반에 들어왔어요. 대속의 교리에 대해서 배우면서 자매가 간증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제가 대속의 교리에 대해 생각이 희미했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다녀서 월급을 받아서 애들이랑 살아가는데, 월급 받는 사람들은 넉넉지 않게 간신히 간신히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뜬금없이, 벌써 10년 전 얘기인데, 여보 나 30만원만 줘. 당신 뭐하는데 30만원이나 필요한데. 친구들한테 회비내야 해. 무슨 회비가 30만원이나 해 어딜 가는데. 아 그런게 있어. 그냥 줘. 아 뭔데 얘기를 해야주지. 제일 친한 친구 아무개가 이혼을 했는데 위자료를 줘야하는데 돈이 없데. 그래서 친구 10명이 돈 모아서 보태주기로 했단말이야.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 전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확 솟구치더라는거야. 친구가 교통사고가 나서 도와준다면 그래도 많지 그런데 못된 놈 바람피워서 부인한테 고소당해서 이혼하는 그놈이 자기 위자료 보태달라고 손 벌리는 놈이 된 놈인가 말이지 해서 확 솟구치더라는거야. 안돼. 그 돈 있으면 내가 밥이나 사먹겠다. 하고 교리반 예습이나 해야지 하는데, 대속. 아하, 이렇겠구나. 우리는 대속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거요. 예수님 그분은 우리 위해 죽기위해 태어나신 분이지. 마치 자식이 애 이거 먹어라 어머니 고기 좀 드세요 맨날 그러니까 나중에 지 색시 와서 어머니 고깃국 좀 드세요 그러면 아이 우리 어머니는 그런거 싫어하셔 고기 아주 싫어하셔 콩나물 국이나 좋아하시지 그러니깐 주지마 예수님 죽으신거 당연하죠 십자가에 못박히셨어 고마운건 고마운거고 당연한거 아니야 예수님 어짜피 죽기위해 오셨는데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거죠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이 되면 견딜 수 없더라는 거죠 그걸 통해서 우리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리고 그것을 비슷하게라도 흉내내보려는 이것이 실제 우리 삶에 있어서 얼마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가를 알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가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의 발현이야.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가는 거죠.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걸 좋아하시다가 다음에 또 그렇게 행동하려니까 야 임마 그건 재작년에 법이고 이젠 바뀌었단말이야. 하면서 수시로 변덕을 부리시면 하나님의 존재의 불변하심에 의심이 느껴질텐데 하나님은 언제가 거기 계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게 당신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거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어렴풋하게 하나마 하나님의 존재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성경의 진리가 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스스로 입증 받게 되는 것이죠. 이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주님에게 나아가게 되는거죠. 이게 하나님께 대한 앎이예요. 사실은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앎은 그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B.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앎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죠. 미래에 예측이 가능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얘기하죠. 빛은 앞으로 환하게 비춰서 어디로 가야할지 보여주죠. 발 앞에 등불은 한 걸음 한 걸음 헛딛이지 않도록, 우리를 한 걸음 한걸음 올바르게 띄어 놓을 수 있도록 발을 딛일 수 있는 걸음을 불빛이 우리를 인도하죠. 그렇게 해서 한 걸음씩 걸어갑니다. 그게 신앙생활 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앎을 갖게 되는거죠.
이미 하신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앎을 가지니깐 앞을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어떻게 하면 기뻐하시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알게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을 알게 되는 일이 더듬어 올라가보면은 세상의 물정을 아는 이런 이치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믿는 그 믿음,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 진리를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하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물질들을 볼 때에, 그 구성요소가 무엇이고 원소가 무엇인지를 기가막히게 알고 그 모든 것들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보다도, 차라리 그게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몰라도 나무 한토막이라도 보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에 의해서 이것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는 거예요.
도로 전문가가 있어요. 그래서 도로를 콘크리트 도로와 아스콘 도로로 나뉘는데 콘크리트 도로는 어떻게 건설을 하고 깊이는 어느 정도 파고 밑에는 어떤 돌맹이를 넣고 그리고 콘크리트 배합을 물, 콘크리트, 모래, 자갈이 몇 비율이 되어야 하고 어떤 시공사가 시공을 잘하고 그리고 어떤 조건이 되면 이 도로가 어떤 특성을 발휘하는지를 아무리 잘 알고 아스콘의 가격을 잘 알고 아스콘을 깔 때에 오래도록 도로를 탄탄하게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수없이 잘 안다고 하더라도 부주의하게 운전하는 사람보다는 누가 깔았는지 깔린 시커먼게 종이인지 흙인지 뭔지 모르고 콘크리트 도로가 어떤지 아스콘 도로가 어떤지 몰라도 설 때 서고 신호 지킬 때 지키고 선 따라 가는 사람이 안전하게 간다 이 얘기예요. 쉽죠. 그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식을 아무리 강조해도 잘 믿고 잘 순종하고 온전히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이 지식이 많은 삶이 더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거에요.
무디 선생이 말을 잘 못했데요. 초등학교 다니다 그만 두었으니까. 그런데 이 양반이 40분을 설교를 했는데 끝나고 나서 어떤 사람이 와서 무디 선생님 40분 동안 문법이 24번 틀렸습니다. 그래서 무디 선생이 그랬데요. 형제님, 40분에 24번 문법이 틀리는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100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문법 잘 맞는 형제의 말로는 몇 명을 전도하셨나요? 뭐라고 대답을 했겠어요? 대답을 했다는 얘기가 없어요. 슬며시 간거죠. 이게 신령한 사람의 특징이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끊임없는 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짧아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어요, 근데 자신은 확고하게 믿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워요.
C. 앎의 이유 : 영적 사고
그런데 그렇게 끊임없이 알게 되는 앎의 이유가 뭐냐면 영적인 사고 방식이예요. 무슨 뜻이냐면 두 개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믿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면 하나하나 이치적으로 사물들 속에 나와 있는 이치들은 그것대로 이해하면서 믿고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초자연적인 신비에 의해서 믿을 수 있는 것들은 믿음에 의해서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믿음에 의해서 아는 것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아래에서 이성의 생각이나 논리들을 여기에 복종시키면서 믿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니깐 끊임없이 앞서가게 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신학이라는 학문이 공부를 엄청나게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 공부라고 하는 것은 이미 받은 지식을 가지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지 신학에서의 지식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지식은 아니예요. 무슨 뜻이냐면 있는 어떤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것을 재료로 해서 우리들이 학문을 잘 공부하게 될 때에 이것들을 가지런하게 잘 정리해서 자기도 쉽게 믿음의 근거를 갖고 또 사람들에게도 그 믿음을 이해시키는데 쉽게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속에서 설명하고 싶던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어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율법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한거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학문이 없었다면 로마서를 그렇게 조직적으로 쓰지 못했을거야. 믿어봐. 진짜라니까. 어이구 답답해. 이렇게 썼을거라 얘기예요.
제 책을 읽은 어떤 독자가 얘기해요. 목사님이 쓰신 책 가운데 제가 모르고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어도 설명이 안되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책 속에다가 설명을 그렇게.. 아이구 이런건 나도 알 수 있는데, 나도 알 수 있는데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가는데 실제로 내가 해보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그런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송편을 빚는 탁월한 기술이 있다고 합시다. 송편을 빚으려면 우선 떡반죽이 있고 거기에 넣을 수 있는 속이 있어야 하잖아요. 콩이든지 팥이든지. 이 두 가지가 많고 재주가 뛰어나면 하나하나 예쁜 송편을 수천 개를 빚어낼 수 있을거아니예요. 한 말이면 바람떡이 1500개 정도 나오거든요. 만약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재료가 없다면 빚어낼 수가 없는거죠. 그런 사람이 뭐냐하면 하나님은 못만나고 공부만 잘하는 신학자들이예요. 이 사람이 이 말했고 저 사람이 저 말했고 그리고 이 말한 사람하고 저 말한 사람하고 서로 싸움 붙이는거지 자기 생각은 없는거예요. 새로운 건 없는거죠. 반대로 전혀 공부는 안하고 하나님만 많이 만난 사람들은 뭐냐면, 이만한 반죽에 기술이 없으니까 크게 구멍을 파서 한바가지 다 집어 넣어버리고 덮어버리는거예요. 그거 어떻게 먹어요. 올해 겨울에 이런 떡을 만들어보실래요? 이런 웃지못할 일이 나오는거죠.
그러니까 두 개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는데 항상 앞서가는 것은 믿음이다 이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믿음 하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 믿음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떡반죽을 계속 가져오는 행동이라는 거죠. 여기서 잘 되면 그것을 끊임없이 빚어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지식이 잘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믿어봐 하면서 우격다짐으로 하는거예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놀랍게 거기에 권위 같은게 되더라구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전도한 얘기를 하시는데, 돼지갈비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갈비 자르는 자매에게 “자매, 교회 다녀요?”,“아니요.”, “그럼 하나님 한 번 믿어보지.” 이렇게 목사로서 품위 있게 전도를 했더니 “거기 왜 나가요. 밥 벌어먹고 다니기 힘든데. 그런데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가는데지.”라는 거예요. 몇 번 권유를 해도 이 자매가 거부를 하자 이 목사님이 화가 나셔서 “알았다. 너 평생 여기서 돼지갈비나 가위질 하다가 뒈져라.” 그러고 가셨데요. 근데 놀랍게 그 자매가 교회에 왔더라는거야.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그 자매가 밤에 자는데 ‘그거나 자르다 뒈져라, 그거나 자르다 뒈져라.’ 계속 밤새도록 소리가 들리더라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내가 지금 30대 중반인데 이거나 자르다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런 권위가 깃들긴해요. 근데 그게 항상 통하겠어요? 어쩌다가 한 번 통하는거지. 그래도 인격적으로 따뜻하고 이치적으로 하나하나 이치에 맞게 설명할 때에 그게 진짜 하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잖아요. 예쁘게 빚어서 한 입에 들어가게 고소한 참기름 냄새 나는 송편을 이렇게 해가지고 입에 딱 넣어주면 오물오물 씹으면서 말로 듣던거 보다 진짜 맛있네 그러겠지 한 덩어리 주면서 한 번 뜯어먹어봐. 뭘 느낄 수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믿음이 앞서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는거야.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많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가 맨 처음에 거듭나고 은혜를 받았을 때, 이 성경 순 거짓말이라고 그랬거든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봤더니 보지 않는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속으로 못 보여주니까. 그리고 어쩜 그렇게 성경이 피해갈 데를 다 마련해 놓은거예요. 근데 거듭나고 나니까 너무너무 잘 믿어지는거예요. 제가 마지막에 목사님께 뭐라고 고백했냐면 자네 믿음은 이슬같은 믿음이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런데 목사님 제가 예수 믿기 전에는 성경에는 순 피해갈 데를 해놓은 걸로 생각했는데요 나중에는요 이 성경이 정말 믿어지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했어요. 이 성경이 전부다 가짜라고 해도 저는 믿을거 같아요. 그러니까 뭐라시냐면 야 그건 이슬 같은 믿음이 아니라 불같은 믿음이구나 하시면서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게 마음속에 확 믿어지는거예요. 믿음의 불이 확 일어나는 그 불길이 놀랍게도 사랑의 불길이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할 때는 언제였냐면 믿음이 확확 강물처럼 밀려올 때, 아 그렇구나.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러면서 예전에는 내 인생이 꼬인 것 같아서 하나님 원망하고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살아계시다면 나 같은 인간은 버리신게 분명해 이렇게 투덜대던 인간이 어느 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신실하심이 강물처럼 확 밀려오는 거예요. 수많은 인간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 하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거예요. 부인할 수 없는거예요.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죠. 그 때 이 속에서 뜨거운 사랑이 생겨나요.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 고난이 와도 이길 수가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재료들이 확확 밀려들어오는거죠. 그런데 그냥 덜렁거리고 박수나 치고 기도원에 가서 불이나 때고 그러면 금방 사라질텐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를 공부하는 거예요. 그러면 또 끊임없는 질문이 생겨나게 되는거예요. 그러다 대답을 찾으면 날아갈 것처럼 기쁜거야. 아멘, 아 그렇구나, 그러면서 지식이 차곡차곡 쌓여서 그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조용히 이야기하면 그 속에는 진리의 요소들이 강력하게 배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인생을 판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기 전에는 안그랬는데, 그리고 침체 속에 있을 때는 안그런데, 예수 믿고 은혜 많이 받고 말씀에 눈이 확 열리면 왜 그렇게 답답한 사람들이 주변에 수없이 많은지. 야 저 인간 왜 저러고 사냐. 세상에 아이큐에 스위치를 꺼도 분수가 있지 눈 감고 살아도 저렇게는 안살겠다. 어떻게 길이 아닌데만 저렇게 골라가나. 그래서 속이 터질 것 같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중보기도가 막 나오는거예요. 그를 위한 섬김의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거예요. 그게 바로 지혜로운 사람의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삶이예요. 그래서 이 모든 지식들은 한꺼번에 모든 믿음과 함께 엮어져서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냐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을 힘입어 살아가는 삶에 이바지 하는 이 지식이 되는 것예요. 믿음과 이 모든 이성의 지식들이. 활발하게 이성이 있고 열심히 지식을 습득하지만 언제나 이성의 지식이 믿음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거예요. 그게 정말 멋있는 그리스도인,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예요. 그래서 그 눈빛이 진리의 빛에 찬란하게 빛나는 거예요.
Ⅳ. 결론 : 진리와 성령 안에서 사는 행복
결론적으로 진리와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참다운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철학, 사상, 종교, 문학, 모든 학문, 과학 이런 것들은 이렇게 진리와 성령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고 있는 그 길속에 있는 어떤 반짝이는 몇 가지들의 요소를 발견한 것이예요. 그런데 그것을 엮어낸 것이 매우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사상으로 엮어냈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 가서는 결코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없는거죠. 우리의 온전한 행복도 보장할 수 없는거죠.
그래서 가만히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진짜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에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정말 우리 행복의 최고의 조건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것, 그리고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은혜, 주님 없이 대궐같은 집에서 호위호식 하는 것보다는 주님과 함께 고난의 풀무불을 지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요.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해요. 그게 전부 다잖아요.
그것으로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은 자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변심한 것이예요. 그렇게 진리에 기뻐하던 사람이 재미를 찾아 교회에 오는 것이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면 충분히 만족하던 사람이 신앙에 세속적이 요소를 들여오려고 해요. 그래서 신호등이 있어요. 신자가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쁨을 얻기 시작하면 영혼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이예요. 경고예요.
오늘 성경에 보면 판단이라는 얘기가 나와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 무슨 얘기냐면 학문이나 모든 것에 대한 게 아니예요. 무엇이 옳고 그르고 있고 없고에 대한 도덕적이고 하나님의 지혜에 입각한 판단이예요. 그것을 할 수 있다는거예요. 왜? 자기는 비록 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무슨 식물학의 원리가 작용하는지 왜 노란색인지 왜 하필이면 백합꽃인지 모두 설명할 수 없어도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이런 판단이예요. 하나님이 이것을 내셨으며 이 풀꽃 하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이 풀꽃이 시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이 꽃 하나만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송한다고.
(찬양)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런 판단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게 화학적 성분이 뭐고 식물학적인 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600페이지 논문을 쓴다고 해도 그게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전엔 이게 왜 있는지 몰랐는데 하나님이 내셨어, 그리고 이 풀꽃 하나에 깃든 생명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영화보다도 더 뛰어나. 그러니까 주님이 이 시든 풀꽃을 보면서 우리의 세상에 영광도 시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 이 세상의 임금이 꾸며 쓴 황금의 왕관도 그 빛을 잃게 돼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불변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지 여기에 뭐가 틀린게 있냐 이거예요. 좀 못 배워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 못한들 뭐가 틀린게 있냐 이거예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가장 평범한 신자의 판단을 뒤엎을 판단을 할 자격이 없다는거예요. 어떤 철학자는 2더하기2가 4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600페이지짜리 논문을 썼다는거예요. 그냥 믿으면 되는걸 그걸 왜 그렇게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이것은 말이죠 오늘 벌거벗고 나가 춤을 추어도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우리가 받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권하시는 말씀이 금이나 은을 모아서 부요한 사람이 되지 말고 차라리 그것들을 팔아서라도 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부유한 사람이 되어라. 인생의 참된 행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멘.
이렇게 하면서 사도바울이 맨 처음에 왜 그렇게 고백했는지가 떠오르는 거예요. 내가 너희 중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게 결론부터 얘기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제 여러분의 가슴에 새롭게 다가오는거죠. 잘 믿읍시다. 열심히 배웁시다. 충만하게 삽시다. 아멘.
복음 지혜와 성령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