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잔, 그리스도의 피(2)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5)
녹취자: 박효준
지난 시간에 이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나누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두 가지를 드렸습니다. 이 피라고 하는 것은 하나는 ‘죽었다’라고 하는 의미이고 ‘흘리는 피, 피 흘림’은 ‘죽음’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고 죽으셔야 될 것을 잔을 들고서 미리 보여주신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준다는 말씀을 두 번째로 드렸습니다. 오늘 두 가지를 말씀 드림으로서 이 잔에 대한 이야기를 맞히려고 합니다.
우선 또 하나 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생명입니다. 그래서 피를 모두 흘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니까 생명이 모두 빠져 나갔다는 것. 그것이 곳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미함과 동시에 또 하나 그 피가 우리의 몸속에 들어가서 그 피와 나눠진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나눠질 수 없는 삶을 우리들이 살게 된다는 면에서 이것은 생명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명 적인 연합. 그렇기 때문에 이 성찬을 때면서 특별히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떡을 받을 때와 똑같이 잔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 신비적인 연합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이 잔이 제자들의 몸속에 들어가서 그래서 피라고 말씀하신 이 잔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이 잔이 들어가서 그것이 우리의 피와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그 포도주로 말미암는 그 피와 그리고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피를 나눌 수 없게끔 되어버린 그런 생명적인 연합을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서 이렇게 “잔을 받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그 피로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 우리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피로 구속해 내시고 그 구속해 내신 그 구원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묶어서 이제는 도저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때어 놓을 자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갈라 놓을 자가 없는 생명적인 연합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한번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피로 구속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피로 구속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구원 받은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찬이 의미하는 가장 장엄하고 중요한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떡이 무엇을 의미하고 잔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냐, 몸이 아니냐, 진짜 살이 되는 것이냐, 피가 되는 것이냐, 혹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단지 기념하는 것이냐, 아니면 기념 할 그때 하나님의 실제 은혜가 임하느냐, 마느냐 하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찬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떨어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분이요,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성찬을 받을 때 말씀 드린 이 성찬의 모든 의미는 우리가 알 뿐이지 그러나 성찬을 받는 그 자리에 성령이 역사 하시면 지금 말씀 드린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성령의 역사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찬을 하는 그 시간에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절박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찬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면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그 보이는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거룩한 죽으심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놀라운 죽음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 놀라운 사실들과 축복들이 우리에게 생생한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때는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고 그의 다시 사심에 의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감화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간에 성령이 회중가운데 역사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죄악이 많이 쌓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바람이 허공중에 지나가는 것 같고 그리고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도,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지루하고 복잡하고 까다롭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저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많이 봤습니다. 앞에서 집례 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행을 하는데 뒤에서는 하품을 하면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여러분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설교와 그리고 십자가의 진리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성찬을 할 때마다 감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토대가 되지 않는 성찬은 깨달음이 없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무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십자가의 진리가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건져내고 그리고 우리에게 의미하는바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오늘 어느 잡지사에서 그 <십자가를 경험하라> 그 책을 출간한 기념으로 인터뷰를 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촬영을 하고 한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는데 거기에 온 어느 자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를 경험하라>는 책이 나왔다면 그저 벌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텐데 불꽃처럼 살아야한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 다음에 <십자가를 경험하라>라고 책을 내 놓으니까 마치 거기에 불꽃처럼 살 수 있는 비결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그게 정확히 맞는다고 했습니다. 정확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불꽃같은 삶,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불꽃같은 생애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간만에 나타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예화) 오늘 낮에 우리 이간사가 팩스가 하나 왔다고 갖고 왔는데 우리 테이프를 받아 듣는 사람인지 팩스를 써서 보냈습니다. 어디서 울산인가? 어디에서 부산까지 출퇴근을 하는데 하루에 3시간씩 운전을 하는데 그걸 그 시간에 전부 설교를 듣는답니다. 설교 테이프를……. 참 대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사람들이 끼어들어도 빵빵!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린답니다. 그만큼 설교 듣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자신은 괜찮답니다. 운전하고 가다가는 엎드려서 울고, 울다가는 다시 운전하다 가고 그런데 마지막 말이 인상 깊습니다. “목사님, 저는 결심 했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균형 잡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치우치는 사람이 되고야 말겠습니다.” 할렐루야! 아~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알고 나면 균형 잡을 수 없습니다. 왜? 나의 생명이 그분에게 있는데. 그리고 내 생명과 나의 모든 이 삶이 그분에게 뿌리를 박고 있고 그리고 때려야 땔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주 받을 나 같은 인생에게 미치게 된 그 모든 아름다운 은혜와 그 놀라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이고 또 그 연합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여러분 잠시 살다간 이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영원히 간직하고 살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적인 연합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었고 주님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갖은 것을 모두 아낌없이 다 주셨고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모두 내어드릴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된 것입니다. 생명적인 연합인데! 생명이 연합되었는데 다른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성찬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주님 없는 우리는 없다.” 이것이 잔을 받는 성찬의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잔을 받을 적마다 우리는 그 잔을 받으면서 우리는 “주님 없는 우리는 없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받음으로서 우리는 주님 앞에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도 없사옵니이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럼 실제의 삶에 있어서 이 성찬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여러분 생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예수를 믿는 순간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공로에 의지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시고 그리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해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면? 우리의 삶이 실제적으로 그분과 연합된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천국을 주셨어도 오늘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귀하고 놀라운 진리를 모두 소유하고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구원을 받아서 천국을 갈지 못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가는 그 삶이 그런 놀라운 약속과 축복을 받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가난하고 초라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문제를 향해서 성찬은 무슨 의미를 주는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성찬을 마시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슨 메시지를 받는 것이냐면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피 흘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그 피 흘림을 통해 받은 영적인 연합을 이런 순교의 각오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 가겠나이다.” 라고 하는 서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치고 깊이 있는 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목사를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던 시대에는 앞도적인 주제가 무엇인가 하면 ‘거룩’이었고 그리고 ‘죄’였습니다. 왜냐하면 안일한 삶을 갖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생명적인 연합을 주셨어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된 관계에서 살아간다는 그러한 놀라운 축복들을 실제의 삶 속에서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모든 진리들인 관념으로만 남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그러한 능력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와서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랬습니다.
(예화) 참 요즘의 세태들을 보면 말입니다. 정말 어떤 의미에서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는 그런 세태들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독서하는 것들을 보면 말입니다. 정말 “야! 이 많은 책들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엄청난 부수가 팔려 나가는 깜짝 놀라게 팔려나가는 그 엄청난 책들. 저도 글을 써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을 때 왜 저도 “누구 책은 30만부가 팔렸다더라. 누구 책은 50만부가 팔렸다더라.” 그럴 때 왜 제 마음에 “나도 좀, 내 책도 사람들이 많이 읽어줬으면…….” 그런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 책이 많이 팔려서 벌어드리는 무슨 수익을 떠나서 말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내 마음 속에서 솟구치듯이 쏟아 져 나오는 이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이 받아먹으면 인생이 참 변할 텐데 그런 사모하는 마음이 왜 안 들겠습니까? 어제 3일 동안 집회를 했잖습니까? 서울 시흥에서 그런데 새벽 집회, 아침 집회, 저녁 집회까지 다 한 다음에 밤 시간입니다. 저녁 집회가 다 끝났는데 아주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 숙소에 들어가서 자야겠는데 이 머리 속에서 말입니다. 어제 밤에 마구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때 안 쓰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밤중에 교회에 와서 밤새 글을 쓰다가 갔습니다. 그러면서 ‘아……. 사람들이 이렇게 좀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왜 몇 만 명씩밖에 안 읽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 다 그런걸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몇 년 내에 추세로 무슨 책들이 그렇게 잘 팔리나 하면 책상에 저 자세로 앉거나 다 읽은 다음에 엎드려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책들은 안 팔리고 반바지 차림으로 소파에 벌렁 누워서 팝콘 먹으면서 한 눈으로는 가끔 텔레비전도 곁눈질 하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책이 수십만 부씩 팔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팔린 모든 책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추세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슨 의미이냐 하면 무언가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삶에 깊은 도전을 줘서 자기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자기를 교정시키는 설교, 책, 진리에 대한 토론들은 싫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자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를 즐겁게 해주고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던져 줄 수 있는 그런 책들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뿌리를 캐 들어가고 보면 무엇에 맞다 있느냐면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나태하고 안일한 견해에 맞다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잔을 따라주시면서 그 잔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언약의 피니라‘ 말씀하시면서 이 잔을 제자들에게 마시게 나눠주셨을 때 이것을 제자들이 마시면 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시는 그 피 흘리심과 살 찢어지심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적인 연합을 갖게 하졌사오니 이제는 내가 이 잔을 머금으며 주 앞에 서약하오니 이런 순교의 정신으로 일평생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은 성찬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갖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짐승처럼 먹고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의 이 잔을 통해서 깨달으면서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소명을 이루시고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인생 매순간순간을 진리를 위해 싸우시고 투쟁하시면서 버림받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것들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 투쟁하는 삶을 사시면서 결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몸을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성취하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그 잔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짐을 지고 그리고 죽음으로 그 길을 걸어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서 값없이 피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생명적인 연합을 그리스도와 나누는 관계가 되었사오니 이제는 우리가 삶으로 주와 연합되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이런 죽음을 각오하는 비장하고 결연한 각오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밖에 했던 모든 죄의 뿌리와 더불어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켜가겠다는 거룩한 서약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약과 고백은 삶 속에서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그리고 그 십자가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성의 기초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모든 영성은 항상 그릇된 길로 가고야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언제나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불의에 대한 진노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이글거리는 심판과 그것을 막아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많은 영적인 체험들 속에서도 안전한 영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잔을 받을 때마다 또 이 잔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이미 취소될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우리의 삶으로 지켜나가기 위해서 신성하고 거룩한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기회가 되면 내년서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삶에 대해서 풍부하게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때 여러분 이 설교가 너무 어렵다고 느끼면 어느 청교도의 말대로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하늘이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정말 이 조국교회의 통탄할 정도로 한심한 말하자면 말씀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변화되지 않으면 소망 없는 것입니다. 뭐 신앙이 점점 나아진다는데 뭐가 나아집니까? 올라갔다 시험에 들다 다시 기도해서 올라갔다가……. 제가 보기에는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똑 같이 이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이러가다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도 올라왔을 때 죽으면 그래도 실감이 나겠지만 떨어졌을 때 죽으면 면목 없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모두 무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범죄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무지는 절대적으로 죄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진지한 견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장난하듯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대한 진지한 견해에 대해서 눈뜨게 하고 그리고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 단지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해방감 하나라든지 아니면 천국에 갈 티켓을 얻었다고 하는 만족감 같은 것 하나를 갖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해결한다고 하면 바보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삶은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날 동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워진 것을 기억하면서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들에게 주워진 이 거룩한 순교의 각오와 결단으로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우리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인생들이라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보여주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뜻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 버리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좇으시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과 희생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뒤를 쫓아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찬을 어떤 의미에서도 가벼울 수 없고 경박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늘 성찬의 의미를 기억하고 또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가슴에 세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감동과 한 사람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참된 지식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놀라운 사랑은 삶에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의 설교를 듣고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흐느껴 울다 끝나는 것은 그것은 감화가 아니라 센치멘탈리즘인 것입니다. 감상주의의인 것입니다. 언제나 눈물을 씻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 흘리시는 고난으로 당신의 삶을 살아가셨던 것처럼 그 삶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피에 대한생각을 갖고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마지막 네 번째는 오늘은 두 번째고 지난주까지 해서 네 번째입니다. 바로 이 잔을 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인 쳐주시는 말하자면 성찬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같은 기사가 나오는데 제가 여러해 전에 그 기사를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는데 예수님이 주신 떡도 하나입니다. 잔도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인 성찬은 큰 떡을 하나 만들고 떡을 때서 먹는 것이 가장 성찬적인 본질을 잘 들어내고 잔도 커다란 대다 포도주를 잔뜩 부어서 같이 마시는 것이 진정한 성찬의 의미를 잘 들어냅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간염이 걸린다.” 또 어떤 사람은 벌컥벌컥 마시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궈지고 떡도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금 먹고 한 주먹을 때어 먹는 이런 일이……. 사람들이 참 눈치가 없습니다. 해봤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잔은……. 사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잔이 저는 좀 작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작습니다. 그런데 그걸 좀 큰대다 하면 어떤 일이 생기냐면 알코올에 워낙이 약한 사람들은 금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성찬을 마치고 가는데 얼굴이 벌겋게 되어 가는 것도 그것도 문제가 좀 됩니다. 그러다 또 자동차라도 운전하다 경찰에 걸리면 그 에누리 없이 음주운전 아닙니까. 그러니까 규모 있게 하려다 보니 이제 이런 일들이 나누면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식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이 잔을 또 떡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너희는 다 이것을 마시라.” 헬라어에 ‘탐테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이것을 다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었느냐면 가룟 유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시사 하는바가 굉장히 큽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는 것은 속죄는 결국 제한된 사람들에게 속죄의 효과를 갖고 왔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말하자면 자신의 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버지가 원하는 간절한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또 그 후에도 못 박혀 우리의 죄를 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잔을 가룟 유다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십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할 수 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사망과 형벌에 이르지 아니하고 아버지 앞에 구원을 얻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용서의 기도가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첫 번째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잔을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잔을 받는 우리들이 바로 잔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잔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들이 성찬을 주지 않습니다. 구원 받고 그리고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잔을 나눠줄 때 우리들은 비록 다른 컵에 따라졌지만 그러나 그것이 한 잔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잔을 나눌 수 있게 된 이 관계는 육신적인 혈육의 관계보다도 더 진하고 소중한 관계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암시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오로지 두 가지 사람들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와 함께 성찬을 받을 수 없는 용서 받지 못한 죄인들과 우리와 함께 성찬을 나눌 수 있는 이미 용서 받은 죄인들인 동시에 우리의 형제들만 있다는 사실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구분은 국적과 명예와 재산과 학력의 유무와 외모와 피부의 색깔과 태어난 고장의 같은 것들로는 갈라놓을 수 없는 그런 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무슨 영호남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로 좀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께……. “내가 죽어도 어느 지역 사람들은 장로로 새우지 말라고 유언하고 죽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어느 지역 사람들은 또 어느 지역으로만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 목사님이 개척하면 그 교회는 줄줄이 그 지역 사람들이 줄을 타고 올라와서 장로가 다 되고 어느 지역 사람들이 개척하면 완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의 야당이 되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는 날에 다 문제가 있습니다. 참된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마침 기회가 되어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어디 다니면서 무슨 경상도가 어떻고 전라도가 어떻고 충청도가 어떻고 그러고 다니면 어디 가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말고 열린교회 다닌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창피합니다. 저는 말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 우리 처가 집으로도 그렇고 하여튼 양쪽으로 속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경기도는 본적이고 강원도에서 살았습니다. 서울로 다시 왔습니다. 그쪽 아래쪽으로는 근처도 안 가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공평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망국지변이 아니라 망교지변입니다. 종교가 망할 징조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데 그 벽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복음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지역이 문제가 되면 오징어포 자르듯이 돌을 말입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기다랗게 작대기 8개를 쳐서 잘라서라도 도를 섞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본적이나 호적을 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면. 아니 그런 것 없어도 되지 않습니까? 어디 가서든지 어디가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면 벌금 10만원을 내라고 하면 되잖습니까. 이것은 너무 한심합니다. 더군다나 세상 속에 이런 나뉘는 것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교회에서도 여전히 갈라지고……. 그런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것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같잖은 복음을 들었으면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초라하고 한심하면 그 벽을 못 뛰어 넘고 그것을 세상 장단에 맞추고 살아가야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계의 지도자도 앉아 있다면 이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그 도를 기점으로 해서 정권이 이리 넘어가고 저리 넘어가고 교계가 이리 넘어가고 저리 넘어가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신학교가 단지 도 출신이 그쪽이라는 것. 저쪽이라는 이유만으로 갈라지는 이런 한심한 자태들을 보면서 이게 결국 무엇이냐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난 그 사람들이 1년에 두 번씩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한 없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뭡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은 어딜 가서도 절대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살면서 겪어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좋고 어떤 사람들은 안 좋다는 그런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다 겪어 봤습니까? 나는 살아가면서 그런 것 한 번도 못 느꼈는데……. 왜 혼자서 그런걸. 느낍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영남 총각을 호남으로 보내고 호남 처녀를 영남으로 시집을 보내면서 동서교류를 하겠다고 길을 뚫는 세상에서 교회에서 어디서 그 옹졸한 그것을 가슴에 품고 말입니다. 그러고 살면서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입니까? 알기는 뭘 압니까? 그런 사람들이 불신자하고는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얘기 했잖습니까? 성찬을 받는 사람과 잘못된 사람사이에 구별보다 더 큰 구별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구별입니다. 누가 와서 그럽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어이구~ 병신!’ 신학을 했다는 사람이 질문을 해도 말 같은 질문을 해야지. 대답도 안했습니다. 말하길 싫어서. 그걸 질문이라고 합니까? 결론은 된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겁니까? 이상훈. 오늘 팩스를 보냈는데 가끔가다 ‘이상훈’ 하시면서 말씀하시는데 되게 웃긴답니다. 이상훈 이가 아주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됩니다. 다음 집회 갈 때 데리고 가서 “이 애가 이상훈입니다.” 소개하렵니다. 관계없는 겁니다. 여러분 자매들이나 형제들이 가서 얼굴 새카만 자매를 대리고 와도 (중간 삭제) 목사님 전혀 충격 안 받으니까 걱정하시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구분은 무엇이냐면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과 성찬에 우리와 함께 떡을 나누고 잔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구분. 그 이상의 구분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정말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그것이 뭐냐 하면 오늘날의 영남 호남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빈부의 쌍곡선을 그리는 동네입니다. 산이 하나가 있는데 그 산이 이쪽으로 넘어가면 완전히 달 동내이고 달도 보름달이 아니라 초승달 동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이쪽으로 넘어오면 부자 동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애들이 같이 안놉니다. 교회에서. 저쪽은 저쪽 애들 끼로 놀고 이쪽은 이쪽 애들끼리 놀아서 내가 애네 들 중등부 공부할 때인데 제가 그랬습니다. “네가 예수 믿는 놈들이냐?” 그게 전통이랍니다. “어이구~ 전통 참 좋은 전통 하나 만들었다. 비복음이 전통이 되어 복음을 대신해서 아주 뿌리를 내렸구나.” 했습니다.
(찬송)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만날 수 있는 사이입니까? 없는 사이입니까? 왜 말을 안 합니까? 없는 사이였습니다. 영남 사람하고 호남 사람하고 골이 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골이 깊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까 그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콧김 앞에 티끌처럼 사라져갈 인생이 하나님과 손잡고 그분의 발 앞에서 그 거룩하고 엄위로우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도저히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격을 좁힐 수 없는 운명적인 골 깊은 사이다라는 관계가.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어떤 관계를 예로 들것 같습니까? 우리 시대에 말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계가 어떤 관계입니까? 여러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관계하고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골 깊은 관계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보십시오. 영남, 호남이 서로 골이 엄청 깊다. 서로 욕하고 그런다고 하는데 그럼 깊으면 얼마나 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최소한 영남 사람이 호남 사람보고 지역의 땔 깜이라고는 안하잖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을 보고 그랬습니다. 신앙 고백입니다. 잘못된 신앙 고백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왜 이방인을 만드셨을까?” 대답은 “지역의 땔감으로 쓰시기 위해서.” 그게 대답입니다. 빠짝 마른 사람은 별로 탈게 없고 요즘 떵떵한 사람은 탈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땔감으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셔서 이 세상사는 과정은 장작 말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쭉 거둬들여서 계속 불 집히시는데 쓰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깁니다. 고넬료와 같이 아주 경건하고 탁월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이방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냐면 천국에서 발 닦아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아주 인간 같지도 생각 안한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인들을 유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천하에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희가 이 문화를 아느냐? 헬라 문화를 아느냐?” 알렉산더가 왜 죽어라 정복하다가 마지막에 아프리카 끝에까지 가서 해변이 나오니까 거기 앉아서 통곡했다고 나옵니다. 왜 통곡했다고 합니까?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뭘 원했던 것입니까? 돈이나 금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헬라 문화의 사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문화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짐승 같을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철학을 모르는 인생들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일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헬라의 유서 깊은 철학들. 오늘날의 모든 철학들의 토대가 모두 거기에 노였잖습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그런 지혜들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로마가 그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지만 깡통들이었습니다. 야만인들이었단 말입니다. 쳐들어와서 헬라세계를 정복했는데 문화에 대해서는 헬라에게 정복된 것입니다. 그 로마가 이뤄 놓은 찬란한 문화가 로마 자신의 문화가 아니라 헬라의 문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토대들을 놓았던 그 탁월했던 철학들. 지금도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부인하고 철학의 세계를 세울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러한 지식의 빛 아래에서 지혜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정말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일리가 있었던 것이란 말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만났습니다. 이야기가 통하겠습니까? “너희는 지옥의 땔 깜이다.” 이쪽에서는 “너희는 짐승이다. 너희에게 지혜가 있느냐? 모세오경을 들고 날치는데 너희에게 무슨 지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옥의 땔감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 부여안고 눈물 흘리며 형제라고 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미련하다고 말하던 유대인들을 얼싸안고 형제라고 부르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좀 낮죠? 종과 자유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종과 자유인들의 차이는 오늘날의 재벌과 말단 직원과의 사이와도 비교 되는 것입니다. 주관할 수 있는 그 사람들이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사회 전체의 기강 자체를 뒤 흔드는 이런 폭발적인 사회 변혁을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까 잘 이해가 안갑니다. 한번 잘 묵상하며 그 시대 문맥으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밖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완전히 혁명적인 일입니다. 무너져 나가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어느 날 복음을 듣고 회개하더니 종과 자유인들이 얼싸안고 형제라고 부르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된 일들이 노예 제도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제도는 남아 있는 실제로 지배 받는 자도 없고 지배 하는 자도 없는 말하자면 계급 평등의 사회가 이뤄진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도는 없는데 실질적으로 종과 노예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때의 문맥으로 돌아와 보면 그야말로 그것은 충격입니다. 충격. 말할 수 없는 충격! 그 엄청난 민족적인 편견, 심리적인 편견 , 신학적인 편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너져 나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만 감격에 아니라 이 성찬을 함께 나누는 이 지체들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를 새롭게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만한 것을 갖고 토라지고 터지고 하면서 말입니다. 다투고 삐치고 그러니 무슨 복음이 들어가서 사람이 변화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찬을 나누는 이 같은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말하자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사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찬을 나누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식으로 내 인생과 가까운 관계를 맺은 사람. 심지어는 나를 그 몸에서 태어나게 한 그 분도 성찬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신앙고백 없으면. 매일 같은 이불 속에서 덥고 그렇게 매일 살아가는 남편도 만약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성찬을 나눌 수 없습니다. 어떤 가까운 세상의 인간도 성찬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찬을 교회 안에 지체들이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법 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 볼 때 혼자 성찬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적입니까? 비성경적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 성찬은 목사님이 집례 하는 건데?” 아니 그러면 내가 저 경포대나 부산에 가서 포도주 한 병하고 그리고 크림빵 하나를 사다 놓고 축도를 하고 성찬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듯이 무엇이 있어야합니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합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무리들이 있고 그것을 집례 하는 목회자가 있을 때 성찬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합니까? 똑같은 잔, 똑같은 포도주. 오늘도 여기를 뒤지면 이제 나옵니다. 포도주는 저희 집에서 보관중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잔을 하나같다가 올라가다가 카스텔라를 쪼개서 경건한 마음으로 접시에 올려놓고 장독대에 가서 포도주를 떠다가 한컵 떠다 놓고 그러다가 까만 가운을 입고 혼자서 성찬을 하면 안 됩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누가 있어야합니까? 가족이 있어야합니다. 함께 믿는 자녀들이, 함께 믿는 지체들이 있어서 그들 가운데……. 그것도 아무렇게나 “저, 오늘 성찬 해야 하는데. 잘생긴 사람 순서대로 10명만 쫓아와.” 해서 대려가 성찬을 해도 안 됩니다. 왜? 여기 한 가족의 단위입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연합을 해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건 여기 이 한 단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만을 위한, 노년들만을 위한 성찬 그런 것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 가족들이 하는 움직이며 성찬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 가족들이 전부다 수련회를 가면 수련회에 가서 성찬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건물이 문제가 아니라 이 형제, 자매들의 영적인 연합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때면서 그 성찬을 할 때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요한 한 사람을 불러 성찬을 하시지 않고 거기에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함께 하는 뜻 깊은 유월절에 성찬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의미가 성찬의 또 하나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 마다 자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도망가던 베드로를 포함해서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팔아버렸던 가룟 유다를 포함해서 연약하여 모두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그 연약한 모든 제자들, 잠시 후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은 피땀 흘려 기도할 동안에 다 졸며 잘 그 한심한 제자들을 놓고도 성찬을 받게 하시고 그 잔을 베풀어 주셨을 때 결국은 그것은 끝까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떠나실 때가 가까워오매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으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찬을 때면서, 잔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이 성찬을 통해서, 이 잔을 통해서 이렇게 끝까지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잔을 받으면서 모든 미움과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갈등과 이런 것들을 용서하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 한 가족이 되어서 그렇게 잔을 마시면서 우리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살아있는 동안에 영적인 이 가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용납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납하고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며 한 가족으로서 기쁨과 서러움을 같이하며 살아가겠노라는 신앙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지체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성찬을 받을 때에는 지체들 간에서 뭔가 마음 가운데 깊은 맺힌 게 있어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심각한 갈등을 느끼고 있다면 성찬에 참석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용서하고 용서 받고 화해하고 그리고 성찬에 참여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성경 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이 형상화된 이 성찬의 의미를 아는 깊이는 곧 기독교의 진리를 아는 깊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마음 깊이 이런 상찬의 의미를 언제나 가슴에 되새기며 이런 것들이 성찬을 받는 그 시간에 한 번씩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새겨져서 언제나 느끼는 바를 성찬에 와서 새삼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이런 일들이 여러분들 속에 일어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