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떡과 잔을 받으며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녹취자: 정유선
성찬에 관해서 지난주로 끝내려고 했지만 뒤에 본문을 제가 내친김에 성찬에 대해서 더 깊이 설교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영혼에 유익이 되리라 생각이 되어서 이어서 계속해서 성찬에 대해서 다섯 번째로 본문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성찬의 본론에 관해서 말한 다음에 성찬의 의미가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지를 26절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다음에 끝으로 성찬에 있어서 유의하여야 할 바를 27절에 말씀하십니다. 26절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떡을 먹고 그리고 잔을 마시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성찬에 아무런 감동이나 느낌 없이 참여하거나 경건치 못한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이러한 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한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어느 성찬식에서 아주 똑똑히 본 적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목사님이 울먹이시면서 집례를 하는데 뒤에서는 다리를 꼬고 하품을 쫙쫙 하면서 그 지루한 성찬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있습니다. 성찬을 하면 원래 예배가 좀 길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일마다 성찬이 있는 날은 설교를 좀 일찍 끝내려고 애를 씁니다마는 사실 그것도 이상한 거죠. 그렇죠? TV 앞에서는 드라마에 한 시간, 두 시간 미니시리즈 같은 거 하면 퇴근 시간을 다퉈가면서 TV 앞에 주저앉아서 밤새 앉아서 한 시간반씩 본 다음에도 “아이구 하필이면 왜 여기서 끝나나”, 광고를 보면서 채널을 돌리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이 뭐가 그렇게 지루하고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이 길어지니까 사람들이 하품을 하고 하긴 성찬을 안 해도 하품을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런 속에서 무슨 십자가가 기려지겠습니까? 어떤 식이로든지 간에 가볍게 우리들이 성찬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뭘 보여주냐 하면 첫째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얼마나 쉽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기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성찬 때에만 일어나서는 안 되고 언제든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언어 속에서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서 언제든지 누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적으로 메마른 시대마다 영적인 어떤 부흥을 일으켜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심령이 메말라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심령이 되어질 때마다 언제나 사람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이 무언가를 느끼고 감지하고 그리고 무언가를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모든 영성과 영적인 체험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사라진 영성 운동은 언제나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주는 것 가운데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전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으니 또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마실 때마다’ 라고 하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잊으면서 살아가는 인생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십자가의 영 아래서만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정말 이렇게 쉽게 범죄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십자가의 영 아래서 살아가는 삶을 우리들이 계속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쉽게 십자가 아래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고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성결한 그 고난의 영을 우리들이 간직하며 살아가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더욱이 그 십자가가 우리를 지배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같은 사람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에드워드도 마찬가지고. 공통적으로 왜 신앙에 있어서 정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정서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흐르는 그 느낌 우리의 마음, 주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에 우리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얼마나 그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깊이 애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마음에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그런 것을 신앙에 있어서 정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고 하니 영적인 정서 없이는 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영적인 사고 속에 깊이 들어가 있어서 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는 삶으로 은혜로운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 질문을 한 번 해볼게요. 시골에서 여러분 돼지 잡는 것을 봤어요? 가마니에 집어넣거나 꽉꽉 묶어서 비참하게 머리를 쳐서 잡는 장면 보잖아요. 그러면서 그 돼지가 꽥꽥거리다가 마지막에 그 도끼에 맞아서 죽어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봤었다고 생각할 때에 예를 들자면 적합한 예인지 모르지만 영적인 사고력이 없는 사람은 돼지고기 생각밖에 나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 해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니까요. 그러나 영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을 보면서 죽음과 죄에 대한 심판에 대해 생각할 겁니다.
뭔가 우리가 영적인 은혜로운 신앙의 정서 속에 있을 그 때에는 우리의 사고가 매사가 영적입니다.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하여튼 은혜로운 신앙의 정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에는 머리가 돌아가고 사고가 돌아가는 것이 세상적이 아니라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뭔가를 자꾸 영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의 사고가 늘 은혜로운 정서에 잠겨 있을 때에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을 때 그때는 즉시 사람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투덜거리지 아니하고 왜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이끌고 가실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이런 은혜로운 정서가 메말라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육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삶을 육체적인 사고방식과 육신의 생각으로 처리하면서 나아가려고 하니까 인생에 있어서 늘 부딪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점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약점을 아시고 우리에게 먹고 마실 때마다 그때마다 그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피로 사신 바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다시는 세상을 위하여 살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될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시켜주시려고 우리에게 성찬을 제정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그 성찬을 영적인 회복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이 공고가 되면 우리는 모두 그 성찬을 부흥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간절히 나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떡을 먹고 그 고통의 잔을 마시기에 합당한 존재인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성찬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떼고 그 고난의 잔을 마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가 장엄하게 다가오고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말미암아서 죄악 가운데 죽을 날 위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들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이 나에게 당치도 않은 사랑이었으며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을 입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와 그리고 사랑에 감사하는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는 성찬이 드려지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들의 삶이 비록 지금은 뛰어나고 위대하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는 진정한 소원이 있습니다. 어떡하든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자기의 살을 아낌없이 다 찢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을 본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며 사는 그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뒤따르는 제자들이 되고 싶다고 하는 거룩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의 실존 속에서 하나씩 변함없이 주님만 사랑하고 그리고 시련의 파도가 오고 유혹의 물결이 넘실거려도 도무지 그런 것들에 마음 쓰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고난의 십자가에 감격하며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완벽하게 살아가면 하나님은 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실패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고 죄악으로 혹은 허물로 무너진 신앙의 세계를 부여안고 고통 하는 인생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고난은 결국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회복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 그 세 번째 가상칠언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오래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마리아를 위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 어머니이니라’ 하고 그 어머니의 삶을 제자 요한에게 의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한은 에베소에 가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를 봉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부모에 대한 효성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제 생각이 번뜩 스쳐갔습니다. 묵상하는 가운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아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제 죽고 부활하시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어서 온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그 분이 마리아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어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의 생계를 부탁했다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셨으면 하늘 위에서도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을 기르시는 그 사랑으로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라도 그 어머니를 봉양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깨달은 바는 무엇이냐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한 그 가상 제 3언은 어머니인 마리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인 요한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한도 다른 모든 제자들과 더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가는 그 순간에 베드로와 함께 모든 제자들이 도망갔고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 요한이 도망가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빌라도의 뜰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언제 그 요한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달려왔는지는 모르지만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세 번째 말씀을 하실 때에 요한은 십자가 아래 있었고 주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알 수 있는 사실은 다 도망갔다고 하는 마태복음의 기사와 그 다음에 요한이 그 아래 있었다고 하는 기사 사이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추론은 오직 이것입니다. 요한은 도망가다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안 온 것이나 도망갔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순간에야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오는 것이나 사실은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됐다고 말씀하실 때 큰소리 친 것은 베드로였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다른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대답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그 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들으며 그 품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특별한 사랑을 입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가실 때에 함께 도망갔고 후에 뉘우치며 다시 그리스도 예수 앞에 왔지만 그러나 자기가 온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입니다. 못박혀 죽어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의 형상을 바라보며 감히 눈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이할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기다리고 있었을 그 요한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을 붙이셨던 것입니다. ‘아들아 너의 어머니이니라’ 그 말은 ‘너는 나를 버렸으나 나는 아직 너를 제자로 생각하는도다’ 이 메시지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게 한 장본인인 우리들을 향한 어떠한 원망도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시며 자기를 버리고 배신하며 도망갔던 제자 한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똑같은 정신을 십자가 앞에 나올 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만이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를 그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연약함과 그리고 우리 자신 속의 아직까지도 도말되지 않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 사랑하기를 더 좋아하는 옛 성품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 고난을 바라보며 그 고난의 뒤를 따라가며 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그 공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교만하고 무감각한 인생들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성찬을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가가의 고난에 대해서 잊어버리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금년에 우리가 고난주간 사경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더군요. 오지 않아도 그저 보통 예배에만 참석하고 새벽기도 열심히 나와도 늘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들만 집회에 모였습니다. 생짜배기 같고 돌덩어리 같은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히게 은혜 받은 자리를 피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타락할 때는 또 기가 막히게 찾지 않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앙의 세계에서도 부한 자는 점점 부하여지고 가난한 자는 점점 가난하여지는 그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공의, 그 십자가 사경회를 계획했을 때는 정말 교회 다니면서도 회심치 못한 사람이 회심하고 예수 믿으면서도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이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은혜 받게 하려고 그렇게 애써서 만들었는데 얼마나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 은혜가 늘 마음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더 부어주시고 빼짝 말라서 그런 은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집회에 기가 막히게 골라서 빠지는지 모릅니다. 우리 전도사님들이 전화통에 불이 나게 전화를 하고 기도하고 구역장들이 연락을 해도 은혜 받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인생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러한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1월 첫 주에 새해를 맞으면서 하나님 앞에 성찬을 합니다. 그때 이 성찬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심령의 부흥의 기회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부터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이번 성찬에 내 영혼에 감당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그 은혜가 하나님 내 마음속에 깨달아지게 도와주시고 그리고 내 인생을 주님 사랑의 줄로 매어서 사나 죽으나 내 몸 주의 것 삼으소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그런 성찬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는 오늘 말합니다. 두 번째 가서는 이 성찬이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찬은 주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 고난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영광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광을 따라가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복 받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좋은 것을 받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가르치든지 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참된 신앙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심의 의미를 알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셨던 그 의미 앞에서 감격하며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미래에 주어질 영광스러운 약속을 바라보면서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나그네와 행인처럼 그렇게 싸우고 투쟁하고 이기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예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가장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모든 기독교적인 삶 속에 ‘예수님처럼’이라는 말을 붙이면 됩니다.
(찬양)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어떻게 기도하면 가장 좋은 기도일까요. 목사님처럼? 아니! 전도사님처럼? 아니! 바울처럼? 아니!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면 될까요? 예수님처럼! 어떻게 하나님 사랑하면 될까요? 예수님처럼! 어떻게 하나님 섬기면 될까요? 예수님처럼! 어떻게 형제를 용서하면 될까요? 예수님처럼! 사는 것도 예수님처럼 죽는 것도 예수님처럼. 그러나 오늘날을 보십시오.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닮기를 포기한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신 한 구원자이고 우리의 삶과는 실질적으로 관계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고상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대로 기준을 설정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 같은 사고방식들이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왜 우리를 그렇게 감동 시킵니까. 그리고 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본받는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 거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사도 바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도 바울은 감히 담대하게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그렇게 모든 삶에 있어서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의 약속을 붙들고 살고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잠시 있을 이 세상의 수치와 멸시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살고 싶어하는 그 처절한 열망이 사도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와 흡사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세상 사는 동안에 많은 부를 쌓아두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얼마나 즐길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까. 복음 사역이라는 미명 하에 그 사역을 통해서 자기의 배를 불리고 욕심을 채우고 야욕을 채우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대접을 받는 삶을 사는 기회로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을 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명예를 받는 길을 택하시면서 사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산하고 가난하게 되어진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 고통과 눈물이 많은 사람들만 찾아다니셨습니다. 병든 자들은 그분의 친구였고 시련에 처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방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큰 교회를 이룰 꿈도 그 분에겐 없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규합해서 가슴 들뜨게 만드는 그 시대의 꿈을 안겨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은 흔들 수 있는 깃발이 아니라 생명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법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번제단 앞에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 세상을 사신 방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후에 물과 피를 다 흘리셨는데 자기가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모든 영광을 다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바꿔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신앙으로 살면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참된 신앙은 그런 것들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서 죽는 것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미래에 대한 거룩하고 영광스런 상급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잠시 있다 갈 세상의 모든 것에 꿈을 묻은 사람들은 그 마음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할 마음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있다 살아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붙들며 살아가는 일에 자신을 모두 버렸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내어줄 마음도 없었고 그리고 자신의 삶에 한 구석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성찬은 말합니다. 그럼 그 죽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죽음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를 위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필요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당신이 자기를 버려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다면 그분은 결코 죽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따라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은 우리는 또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죽으심이었고 그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죽음으로 이어진 생애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 그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야 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그 눈물을 닦고 단지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신파조의 신앙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버려 피 흘려 죽으셨던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의 고난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그의 놀라운 은혜로 살리심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어야 되겠다는 그 거룩한 죽음에 대한 결단을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았던 사람들,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살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했습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해 사랑
그리스도에 있는 그 사랑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에게 다가와서 그 사랑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 마귀는 여러분들에게 다가와서 “교회 다니지 말아라, 불교로 전향해라, 이단 종파로 쏙 들어가라.” 그렇게 말 안합니다. 왜? 해봐야 씨가 안 먹히니까. 어떻게? 형식은 그대로 놔두고 주사 바늘 집어넣어서 골수를 쭉 빼가는 겁니다. 그게 뭐냐? 사랑의 정서를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형식은 그대로 놔요, 내가 집사일도 하고 구역장도 해요, 교사도 하고 또 전도사도 하고 목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교회도 다녀요. 그런데 이전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참된 그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감격할 때에는 그 모든 섬김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그것이 모든 섬김과 신앙생활의 동기였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런 것들이 모두 다 빠져나갑니다. 교회도 다 다니고 섬기는 것도 다 섬기니까 자기는 자기가 제법 잘사는 걸로 생각한다고.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중심 속에서 빠져나간 그 사랑. 바싹 메마른 정서 껍데기만 남아있는 신앙생활. 우리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대견하고 감사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장엄한 목표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또 그 영광 위해서 죽게 하시려고 주님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있는 가장 커다란 병은 사랑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치지 않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참 대단한 삶인 것처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몰라도 자신의 영혼은 압니다. 노래 할 이유가 있어서 노래하는지 감사할 이유가 있어서 감사하는지 섬길 수 있는 원동력이 있어서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그 이름을 걸고 그 껍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지 아니하면 안 될 존재인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광을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그 때에 죽을 수 없습니다.
(예화) 북교의 순교자들의 족보가 쭉 이렇게 그림에 그려 나왔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일정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시던 분이니까 매주 교역자 시간마다 회의 시간마다 한사람씩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이분은 신앙의 인품이 얼마나 뛰어났고 이분은 신앙의 정절이 얼마나 뛰어났고 그런데 그 중에서 순교자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글쎄요. 이 사람이 순교를 했을 것인가. 순교를 했는지 왔다 갔다 하다 이중간첩으로 몰려서 죽었는지 난 확신이 없습니다. 사람은 몰라요 그러나 나는 알아요. 평소의 그 사람의 신앙적인 삶을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결코 믿음을 따라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교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확신이 안 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 하나님을 위해서 산 자처럼 죽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떡과 잔을 받으면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성찬을 받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야 할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죽으심은 명백하게 사람들을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셨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단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만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우리 같은 수많은 인생을 바라보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한 그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시에 이 떡과 잔을 받을 적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해야 할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거룩한 하나님과 범죄 한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성찬을 기리면서 이제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또 다른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복음을 전하는 중보자가 되어야 할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주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은 세상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명을 안겨줍니다. 사명감이 없는 십자가에 대한 묵상,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깊이 깨달으면서도 오늘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결단과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십자가에 대한 모든 명상은 신비주의의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십자가 앞에서 삶을 결단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한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죄인 그 양편을 위한 고난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법이야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십자가의 사랑에 불붙는 사람치고 세상을 위해서 근심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의 영혼에 대해서 그토록 무관심하고 방치된 상태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가족들의 영혼이 급격히 불쌍해 보이고 그 영혼들을 향해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떠오르는 각성의 순간은 항상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각성과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깨달으면서 그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올 때 세상을 사랑하고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향하여 안타까워하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이 그 심장이 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각성은 언제나 이와 같은 십자가에 대한 사랑을 깊이 동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탐내고 사랑하고 세상을 따라가기를 원했을 때에 그들은 똑같이 그들처럼 세상을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사랑한 것은 동기가 같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 알게 되기를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 깊이 사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였습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향해 돌을 던져서 피 터져 죽게 한 그 성난 군중들 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저들의 죄를 저이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예수님과 똑같은 기도를 하고 죽은 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이번에는 영광 가운데 보좌 우편에서 일어나신 것을 보던 그 때에 그가 ‘저들의 죄를 저이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모두 세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세우지만 그러나 이 세상이 복음화 되어지는 비결은 계획과 전략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복음화 되어지는 것은 사람 사람들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이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를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이 세상의 구원을 향해서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영혼이 숙명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불붙는 전도자들이 되어질 때에 그 때에 세상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은 이렇게 펄펄 붓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가슴속에 처절하게 끌어안고 그리고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생애를 사는 것보다 위대한 생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당동을 열심히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욕을 하든지 말든지 우리를 통해서 복음을 매주 듣지만 그러나 정말 저 외딴 어촌 그리고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말 도저히 우리가 갈 수 없다면 사람을 사서라도 보내야 되지 않겠는가. 일당을 주고 사람을 사서라도 보내야 되지 않겠는가. 전 요새 그런 생각합니다. 어느 신학생들 불러놓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 마음이 없느냐? 먹고 살 것은 어디서든지 대줄테니까 한번 그런 삶을 살 사람이 없느냐. 다만 일생 중에 육 개월이라도 아니 두 달이라도 아니 급하면 한주라도 좋으니까.
(찬양)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예화) 저는 몇 달 전에 울산에 헌신예배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울산 같은 데서 집회도 아니고 헌신예배를 하러 오라고 해서 처음에 좀 꺼렸습니다. 근데 목을 매는 겁니다. 강사 가면 저녁 해줘야죠, 또 숙소 잡아줘야지요, 오고가는 비행기 표 끊어 줘야죠, 헌신예배 한번 인도하는데 얼만한 것을 기대하길래 나를 그렇게 과분하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안 가려고 했습니다. 근데 꼭 오셔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갔는데 거기에서 목사님 댁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탁자 밑에 있는 쪽지를 봤습니다. 보고 마음속으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실까 그런 아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어느 목사님이 사영리 같이 쪽복음 전도지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 한 16페이지 정도 되는데 뭐라 그랬냐면 이 내용은 내가 22년 동안 사람들이 교회가 없는 곳에 모여 사는 화전민을 쫓아다니고 그리고 두메산골의 외딴집 한두 집을 찾아다니면서 전하고 전하던 끝에 이렇게 전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어서 만들어본 전도지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사연을 써내려가고 일곱 개인가 여덟 개 항목으로 복음을 제시를 해놨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 마음 속에 정말 이 분이야말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은 생애를 사신 분이구나. 개척교회도 안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하나님 앞에 의탁하고 먹을 걸 이고지고 화전민 그리고 산골오지에 도저히 전기도 들어가지 않는 그런 곳을 걸어 다니면서 그 외딴집 한 집 한 집을 떠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우리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편안한 여건에서 그저 너무 많이 먹어서 기름이 지고 배가 나오고 그래서 그걸 고민하고 살아가는 동안에 이렇게 예수의 정신으로 화전민들이 사는 산골을 누비고 초막에 흩어진 수많은 집들을 누비면서 그 사랑은 하나님 산골짜기에 있는 한 집도 내 동포 내형제인데. 그래서 요즘은 제 마음속에 나는 가지 못하지만 아마 그런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동족들의 그 울부짖는 영혼의 외침을 외면하고 산다면 나도 천국 못 갈지 모른다고 하는 느낌이 듭니다.
(예화) 90년도에 제가 학생들 집회를 인도했는데 대학교 다니던 자매 둘이 은혜를 크게 받았습니다. 근데 두 자매가 동시에 얘기하는 건 아니고 따로따로 은혜를 받았는데 얘기 하는 게 뭐냐 하면 “전도사님 이상해요. 눈만 감고 기도하면 수십만 명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요.” 막 통곡하면서 울부짖는 신음소리가 들린다고. 그 다음날 다른 자매가 와서 똑같은 소리를 해요 “전도사님 이상해요.” “뭐가?” “글쎄 눈을 감고 기도하려는데 소리가 들려요.” “뭔 소리가 들리는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막 울부짖으면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난 그것을 이 세상에서 탕자처럼 기진하고 목말라 애통하고 고통 하는 영혼들의 그 울부짖은 소리를 하나님께서 자매들에게 들리게 해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데 너희는 꼭 복음을 위해서 살아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라.” 내 얘기를 귀담아들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둘 중에 하나는 전도사에게 시집을 갔답니다.
우리 귀에도 이것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안일한 삶과 그리고 하루하루의 만족하는 삶이 우리의 영혼에 지방질이 되어서 기름이 끼어서 이제는 우리 자신도 부패해가서 느낄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 아닙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은 울부짖으며 자신들을 위해서 죽을 전도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해줄 사람들의 피 묻은 외침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불타는 전도자들을 오늘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갈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될 사람들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만약에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고 관심이 없다면 그런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은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주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실 때까지 성찬이 전해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실 때까지 성찬이 전해지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생명 주기 위해서 몸 찢으셨던 것처럼 너희의 몸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알리기 위해서 찢어져야 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피가 단번에 관제와 같이 부음 받은 것처럼 또한 그 사랑을 알고 받은 너희는 이렇게 그 사랑을 위해서 너희도 너희 자신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를 위해 부어지는 인생이 되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성찬을 끊임없이 제정해 놓으시고 여기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 중 일 년을 학교를 먼저 졸업하거나 일 년 동안 직장을 더 다니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딸린 식구들 없을 때 한 일년 떼어내어서 교회에 후원을 받거나 헌신적인 성도들의 물질의 후원을 받으면서 한번 산 넘고 물 건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환경 속에 살아가는 내 동족들을 위해서 동가식서가숙 하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하나님 앞에 한 일 년 정도나 육 개월 정도 바칠 사람 없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한 한달 정도는 또 어떻습니까.
(찬양)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여러분, 나는 후원하겠습니다. 교회가 능력이 없으면 내가 사람들 사제를 털어서라도 후원해 주라고 제가 솔선해서 나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 알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떡과 잔을 우리에게 기념하게 하시고 이것을 먹음으로 우리가 이렇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살아야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 성찬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바로 성찬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결심해야 되는 일인 것입니다. 성경이 왜 붉은 색으로 모서리가 칠해졌는지 아시죠? 언제나 가는 곳에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물든 그 성경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패한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에 올망졸망 모여서 여전히 세상 것들을 사랑하며 호세아 시대의 백성들처럼 교만하게 살아갈 때 주님의 사랑이 움직인 사람들 그 사랑이 마음에 감동된 사람들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화목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이 불타오르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살피며 이렇게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 백성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내 죽어가는 자녀들에게 이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응답할 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한사람이라도 이런 거룩한 소명에 응답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시지 않은 특별한 사랑과 그 은혜를 그 영혼에게 물 붓듯 부어주셔서 예수의 사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두워져 가고 부패해가는 이 세상에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해맑은 영혼으로 예수 복음 위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성찬의 정신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이름을 기억해 줄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성찬의 정신을 따라 산 사람들을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인으로 기록되고 영웅으로 녹명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렸건만 이제 성찬에 참여하는 너희는 내게 무엇을 주려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