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찬과 자기를 살핌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7-29)
녹취자: 김경애
오늘로써 성찬에 관한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이 권면은 성찬의 의미를 모두 말한 다음에 부록과 같은 권면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하는 말이 누구든지 신앙이 깊은 사람이든 어린 사람이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누구든지 성찬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성찬을 의미를 모르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죄라는 뜻입니다.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성찬에 참여하고 나아가서는 성찬의 진정의 정신에 잠기는 일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가르치기를 그가 비록 성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깨닫지 못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미사에 참석하거나 성찬에 참여하기만 하면 거역할 수 없는 은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영혼 속에 주입된다고 가르친 이 교리는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적인 은혜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지성의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체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성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찬의 의미를 모르고 그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짐승들이 먹고 마시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때에는 성찬을 할 때에 우리처럼 작은 잔에 작은 떡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떡과 포도주는 정말 공복을 배불릴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고린도교회에서는 잘사는 사람들은 많이 차려 와서 자기들이 먹고 마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나중에 와서 먹을 것이 없고 소외되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죽으심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또 우리가 그렇게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인바 되어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성찬예식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지만 그러나 어리석게도 인생들은 거룩한 예식을 육체를 배불리고 육체의 유익을 가져오는데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영의 제도가 육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일들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성찬을 많은 술과 그리고 많은 떡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성찬 그 자체를 통해서는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나 설교 같은 것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드려지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그 말씀이 진리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있는가?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롭다는 것과 그리고 자기에게 도전을 주어서 자기를 하나님께 인도한다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우신 이 거룩한 제도들이 영적인 의미를 아는 가운데 매 순간 하나님 앞에 그 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거룩한 제도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 앞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십자가의 삶에 매이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 거룩한 성찬예식을 우리를 위해서 제정해 놓으시고 주께서 오시는 날까지 영원히 이 제도가 계속되도록 주님께서 경륜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성찬의 의미도 우리들이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리실 이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하는 이 성찬을 우리에게 제정해놓으셨을 때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그 성찬을 통해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즉 우리의 믿음과 삶과 우리의 모든 생각과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과 심지어는 죽고 다시 사는 내세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든 찬송의 제목이 되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깨닫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찬을 제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를 진실로 알고 그 성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 깨어있는 기도의 영속에서 복음의 감격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이 거룩한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내가 예수 죽인 것과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사랑의 줄에 매여서 그리고 그 은혜의 줄에 매여서 평생 떠나 살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줄에 매여서 죽기까지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생을 순례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 거룩한 성찬을 제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영동이라는 지방에 집회를 내려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집회일정을 짧게 잡아놓았습니다. 화요일 밤까지 마치고 밤에 밤길을 달려서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이번에 집회를 간 교회의 교인은 아니고 다른 교회 교인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시간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애를 쓰는데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정말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할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그럽니다. ‘목사님 열린 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매님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나는 어느 교회로 가야합니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주님이 이 세상을 오늘날 살펴보실 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수많은 인생을 보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숱한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래도 구별해주셔서 우리를 진리의 빛 안에 살게 하셨으니 우리는 더욱더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싶어 하는 바를 더 깨닫기 위해서 힘쓰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서 수시로 우리의 눈을 가리우려고하는 악한 자들의 가리는 영들을 물리치고 진리의 빛 앞에서 힘껏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다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는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가 다시 들려지고 그리스도께서 이 거룩한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그의 고난의 의미와 죽으심의 의미를 새롭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새로워질 수 없을 정도로 복음을 떠나고 십자가를 떠난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한사람이 성찬의 술잔을 대여섯 잔씩 마시거나 빵을 몇 개씩 주워 먹어서 배부르게 되는 것만 합당치 않은 것이 아니라 만약에 이렇게 큰 잔에 한잔을 먹고도 진심으로 주의 죽으심을 기릴 수 있다면 나는 이만 한 잔에다가 성찬을 할 수 있습니다. 감당하지 못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포식을 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을 기릴 수만 있다면 나는 요만한 빵이 아니라 이만한 떡을 한사람 앞에 하나씩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합당치 않게 잔과 떡을 마신다는 이야기는 단지 예식의 순서나 떡의 종류나 혹은 포도주의 종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성찬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성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그 결과가 성찬을 받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합당케 그 잔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세우신 성찬의 의도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그 성찬을 통해서 떼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가슴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그 사랑의 빛, 그렇게 빚진 자가 되어서 사나 죽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에 묶여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살아도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고 죽어도 십자가를 높이기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에 매인바 되고 그 사랑에 매인바 된 나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없이 잔을 먹고 떡을 드는 모든 것은 합당치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빵에 설탕을 넣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그 빵을 부풀려야하는가 아니면 그냥 구워야 하느냐, 포도주는 알코올이 들어간 진짜 포도주면 되느냐 아니면 포도즙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환타는 안 되느냐, 깡통에 든 포도주스는 안되느냐 그런 쓸데없는 일에 왜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바보 같은 논쟁입니다. 허기진 사람을 위해서 만찬을 베풀었는데 다 죽어가는 주제에 얼른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할 텐데 그 음식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아니하고 음식을 담고 있는 그릇의 문양이나 모양을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저는 그 예식이 거룩한 예식이니까 거기에 기여되는 모든 물건들을 정성껏 준비하기를 저는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번의 포도주도 지난여름에 담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가 아직도 따로 있어서 이번 신년에도 성찬때 우리가 그 포도주를 씁니다. 오죽 성의가 없으면 가게에 가서 진로포도주를 달라고 해서 병따개로 따서 그것을 나누어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시작 30분전에 슈퍼로 카스텔라를 사러 뛰어가서 그것을 사서 잘라서 나누어주느냐는 것입니다. 정성껏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마음을 반영해서 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찬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성찬예식을 제정해놓으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받아 누리기를 원하셨던 그 영혼의 유익을 우리들이 그 예식 속에서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찬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에 합당하게 먹고 마셔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은 의미의 성찬은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넓은 의미의 성찬은 우리 삶의 전체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예식을 통해서 한 교회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고 있는가하는 것이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이 그 사랑에 매여서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살던지 죽든지 전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 살아있는 인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전파를 위하여 기여하는 인생이 되어야겠다고 몸부림치며 사는 사람들 마음속에 십자가의 감격이 없다면 그것은 코미디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성공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순수한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전해본적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복음이 왜 이렇게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과 오늘날 우리가 전도지나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통해서 듣는 그 십자가의 복음이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것으로 우리들에게 들려오고 다가오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의 복음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 십자가의 죽으심에 자기의 인생에 매여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과 삶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매인바 되었다는 개인적인 십자가의 체험이 자기 속에 살아있어서 어찌하든지 이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를 원하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헌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본받으며 살기를 원하는 거룩한 다짐과 그리고 고난의 참된 의미에 동참하는 그런 진실한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십자가의 복음은 순수하게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그렇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매인바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를 깨닫고 바울과 같은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예수의 복음을 말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의 마음에 괴로움을 더하기 위해서 그를 악평하면서 잘못된 동기에서 그렇게 그리스도를 말하게 되었고 또 그리스도는 전파되었습니다. 여러분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사도는 즐거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복음은 자기의 마음에 십자가의 피를 발리운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되었습니다. 삶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좇아가는 삶이 아닌데 그 사람 마음속에 순수한 복음이 보존될 수 있습니까?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한때는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이 생명도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기꺼이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수 있다는 고백은 사람이 움직인 결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가 그를 항복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감격이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정신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아는 것은 참된 복음인데 복음은 아는 것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복음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아가는 그 삶 속에서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한때 참된 복음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오늘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지 아니하면 여러분 모두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움직이지 않는데 삶이 그것에 의해서 지배받고 삶이 그것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데 남보다 더 순수한 복음을 들었던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가져다줄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 그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감격하고 그리고 감탄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 사랑에 매여서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순수한 복음이 보존되고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개인에게나 고난을 마다하는 교회 속에서 순수한 복음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찬 예식에서 그 잔과 떡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의미가 그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적인 유익을 받지 못하면서 성찬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그 성찬예식을 그렇게 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찬의 정신을 투영하는 그런 삶을 구현해 나아갈 때 이 거룩한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체험하고 거룩한 감화가 있는 예식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이 우리의 깨달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 아니면 우리는 그 복음의 순수함을 간직하면서 이 어두운 세상을 사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성찬예식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는 예식의 절차의 문제나 포도주의 질이나 떡의 종류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찬의 예식이 먹고 마시는 잔치로 변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가진 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성찬의 정신은 사라지고 이제는 인간의 날카로운 이기심이 교회에 상처를 내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성찬예식이 이렇게 본래의 뜻을 잊어버리고 성찬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유익을 누리기는커녕 그 성찬 때문에 교회가 찢어지고 고통을 받고 영적인 손해를 보는 이런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십자가의 정신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에 의해서 지배받은 삶을 잃어버리자 십자가의 의미를 집약한 이 성찬이 그들의 영혼에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 영적인 순발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내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아무런 흠도 티도 없이 아버지께만 바쳐져야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것들이나 그리고 어리석은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 같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묵상할 때 그리고 그 십자가의 선포를 들을 때 그리고 주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고난의 의미와 그리고 왜 주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쪼개고 피를 쏟아서라도 그 사이에서 나와 함께 평화를 누리시기를 원하셨는지에 대한 의미를 우리들이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 속에 떠올랐었던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허탄한 의지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는 헛된 자기만족을 정말 헛된 줄 알고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찬양)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저는 참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어떤 때는 별로 키가 크지도 않는데 나는 왜 이렇게 키가 크지 아담하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이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키가 작으면서도 아담하면서도 다부지게 생긴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저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별의별 공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실 신학대학원을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서도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뒤에 있는 학생 하나는 그냥 이틀 만에 원서를 한권씩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면 열등감이 덜하겠는데 독일어 원서입니다. 도대체 나보다 좀 더 잘생기기는 했지만 똑같이 생긴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하면서 별 열등감에 다 잠겼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깊이 치유를 받은 것이 언제냐 하면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내가 열등감을 느끼던 것이나 혹은 자랑하던 것이나 그리고 내가 귀하게 생각하던 것이나 하찮게 생각하던 것이나 이런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의미에 비답해서 우선순위가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거듭나지 않은 가치관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신나게 살다가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연구대상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꿈이 무엇이냐고 말하면 기껏해야 그런 식으로 밖에 자기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뭔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은 무엇에 의해서 무슨 원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의미의 빛 아래서 점검되어져야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빛 아래서도 의미 있다고 동의해주는 것이 성경이 의미 있다고 동의해주는 바입니다. 그 십자가의 빛이 비치지 않을 때에는 다 빛나는 것 같다가도 십자가의 빛이 비치면 빛을 잃어버리고 십자가의 의미의 빛을 받지 않을 때에는 빛나는 것 같지 않다가도 십자가의 빛을 받으면 진짜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빛나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의미 있다고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죽어도 그 의미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십자가의 의미에 비답해서 우리의 인생을 보지 못하니까 여전히 열등감과 그리고 여전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바로 그 순간이 무슨 순간이냐 하면 찬란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빛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아래서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한번 그 거룩한 빛 앞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순간인 것입니다. 헛된 줄 알고 그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 빛을 받으면서 헛된 줄 내려놓았던 것을 평생 살면서 사랑하고 추구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디에 매이고 우리의 삶이 어디에 묶여야하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살길과 우리가 어떻게 피 묻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야하는가 하는 것을 결심하는 순간이 바로 이 거룩한 성찬예식의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그 잔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서 자기를 살핀다는 의미는 한 가지 의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성찬의 의미는 단지 성찬은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졌던 사람들을 성찬을 통해서 하나 되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서 은혜를 받게 해주는 것만이 성찬의 목표가 아니라 성찬 예식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살피게 하시는 유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찬예식에 관한 광고가 나갈 때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리고 성찬예식이 행해질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성경에 의하면 그 성찬예식은 우리를 발가벗기는 날입니다. 하우엘 해리스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휫필드의 친구로 기억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받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예배당에 와서 예배시간마다 늘 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일도 설교를 듣고 계속 졸다가 광고시간에 깼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주일은 성찬이 있는 날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개떡처럼 살다가 온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 말이 하우엘 해리스의 마음에 칼 같이 꽂힌 것입니다. ‘나는 아마 성찬에서 제외될 것이다. 주님이 나를 성찬에서 제외하실 것이다. 나는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고 가슴을 찌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는 교회 종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개인적인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웨일즈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찬의 광고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성찬을 받으면서 예배당에 들어오고 나서 하얀 보자기가 덮여있는 성찬대를 보고서야 ‘아참 오늘 성찬 하는 날이구나!’ 를 깨달은 적이 있었다면 우리 모두 회개합시다. 그렇게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오늘 성경이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함이라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을 신부님에게 가서 이야기해야합니다. 지나가다가 ‘교회가 가까운데 가서 고해성사나 할까?’ 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 쪽의 연구대상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고 그리고 그 성찬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베풀어지는 이 성찬이 자기를 살피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과 또 자기를 살피고서야 이 성찬에 참여해야한다는 사실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적인 죄악에 계속 빠져있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 그런 교회는 이제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직접 가보지는 않았는데 캐나다에 갔을 때 저를 안내해주었던 목사님이 존 맥아더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책도 많이 쓰셨습니다. 그 책을 다 사보십시오. 참 좋은 책입니다. 그분의 교회를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교회에서 목사님이 나오셔서 광고를 하시는데 ‘다음 주일날 여러분 모두 성찬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날 교회 앞에 광고를 하는데 아무 아무개 자매와 또 아무 아무개 자매 두 사람은 우리교회의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음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합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상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첫째 자매는 남편과 별거하고 아직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사귀면서 계속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교회가 수차례 경고하였으나 교회 말을 듣지 않고 때문에 이 사람은 성찬에서 제외됩니다.’ 두 번째 사람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러면서 선을 그어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시대의 교회에 우리 한국의 상황에서 그런 용기를 가진 교회가 몇 교회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 모든 죄와 악들을 끌어안고 그 위에 거룩함을 부어보려고 하니 성경에 이른 말에 따라서 공고하고, 은밀히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그렇게 교회는 권징을 행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초대시대만 하더라도 교회의 권징 가운데 수찬정지라는 것이 아주 자주 오르내리는 징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바쁜 일이 있다고 성찬에 참여 하지 않고 주일에 다른 곳에 가는 사람들에게 ‘당신 금년에는 성찬 두 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만두지 뭐!’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은 출교입니다.’ 그러면 ‘헐, 순복음교회로 가지 뭐!’ 그러면서 갈 것입니다. ‘감리교회로 가지!’ 그러면서 갈 것입니다. ‘다른 장로교회로 가지!’ 그러면서 갈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모든 삶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이렇게 천방지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은 어느 날 갑자기 왔는데 ‘기분도 그렇지 않으니 성찬 합시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찬을 하기 전에 최소한 일주일이나 바람직하게는 최소한 이주일 혹은 사 주 전에 아니면 일 년의 계획이 미리 세워서 혹은 꼭 다급하게 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 혹은 이 주일 혹은 삼 주 전에 미리 미리 광고하고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하고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과연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그 시간을,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미 성찬을 통해서 주님이 약속하신 그 아름답고 고귀한 신앙의 놀라운 각성과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감격들을 성찬을 통해서 회복하는 일들에 아주 크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더 낯설어하고 십자가의 복음에 낯설어지니까 삶이 십자가의 정신에 의해서 지배받는 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니까 십자가의 의미는 더 깨달을 수 없고 십자가의 의미는 더 낯설어지니까 성찬은 행사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찬은 자신을 깊이 살피는 계기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성찬 앞에 나아와야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끊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죄가 있다면 그는 성찬에 참여하지 말아야합니다. 여기서 죄라는 말은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어쩔 수 없이 범하게 되는 우발적이고 그리고 그 연약함에서 말미암는 불규칙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까지 포함한다면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성찬에 참여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습관적인 죄 즉 같은 죄를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규칙적으로 계속해서 범하고 있고 벗어나야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그 죄를 즐기거나 혹은 즐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사정으로 거기에 발을 담그고 스스로 발을 빼지 않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은 참여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참여하면 영혼이 더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위에 또 한 가지의 죄를 더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할뿐만 아니라 성찬은 성찬의 광고가 나가고 성찬을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의 삶이 정말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인지를 살피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기 전에 광고가 나가면 우리는 정말 자신을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성찬을 받기 위해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찬을 받기 위해서 날짜를 정해놓고 금식하면서 성찬을 기다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성찬을 집례 하는 사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렇게 성찬을 기대하면서 그 성찬 앞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앞에 발가벗겨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피할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결국은 그 십자가에 자신을 살핀 나머지 도저히 그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깊이 고통하며 하나님 앞에 통회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세상 끝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길이라고 말씀하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특별하고 우월한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모든 성도들이 참여해야할 자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특수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성찬에 참여한 사람은 성찬에 참여함으로 유익을 받고 자신을 살핀 끝에 성찬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하고 영적인 축복이 자기에게서 사라진 것을 인하여서 애통하고 회개함으로 어찌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피 묻은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새롭게 헌신하고 언약을 갱신하는 충성하는 시간이 바로 성찬에 참여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14일부터 시작되는 사경회를 마친 다음에 그 다음 주에는 반드시 성찬을 합니다. 이미 광고는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준비하며 성찬과 함께 우리 자신을 살피는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찬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향하여 베푸신 의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살핌의 기회로 삼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시간에 걸쳐서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미들이 포함되지만 그것은 이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사람들이 다 흩어져서 각자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피가 섞이고 살이 섞인 가족관계가 아니었던 제자들 사이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한 잔을 베푸시며 이 잔을 마시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바 나의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한 덩어리의 떡을 주시며 축사하실 때에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그 잔과 그 떡을 통해서 하나 된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우월한 신앙을 가지고 또 말씀에 대한 뛰어난 지식이 있거나 혹은 독특한 개인적인 삶의 목표와 하나님 앞에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그 성찬의 의미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맺어진 교회라는 이 공동체 속에서 성찬을 받는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곧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다시 나아가서 모든 지체들과 연합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 속에 있는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알고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공동체와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요번에 두란노에서 그림책이 하나 나왔는데 참 정말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찍어냈는지 골목이 쭉 있는데 교회의 간판이 쭉 걸렸습니다. 한 사람이 그 골목을 다 돌아서 배가 이만해져서 이빨을 쑤시면서 나오고 있는데 뭐라고 쓰여 있느냐하면 끄윽 하고 트림하는 장면인데 뒤에 지나온 교회 간판이 보이는데 뭐냐 하면 ‘찬양전문교회’ ‘제자훈련전문교회’ ‘선교중심교회’ 그러니까 각 교회에 들리면서 한 번씩 맛을 다보면서 배가 이만큼 불러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교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중심교회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얄팍한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잘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로부터 무슨 유익을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그러나 여러분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부름 받은 이 운명적인 공동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지체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마시는 이 잔과 내가 먹는 이 떡을 함께 떼는 지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와 그 살이 고귀한 것처럼 그것을 함께 먹도록 부름 받은 이 모든 지체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정서를 지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거룩한 성찬에 참여하면서 내가 아니라 우리로 부름 받은 거룩한 공동체 그리고 교회와 나눠질 수 없고 떼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룩한 삶 그리고 일평생 사는 날 동안에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교회를 위한 아름다운 헌신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충성된 삶 이것들의 통합을 성찬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를 우리들이 안다면 이 성찬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주신 하늘로부터 오는 그 사랑에만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은 곧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으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함께 소명된 공동체를 향해서 우리가 그런 사랑의 정서를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찬에 참여할 때 공동체의 지체를 심하게 미워하는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를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자기를 살핀 후에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비록 습관적인 죄이고 공동체를 향한 죄라고 할지라도 자기를 살피고 그것을 교정한 후에는 하나님의 사죄를 확신하면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의로운 자를 위한 죽으심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죽으심이었고 건강한 자를 위한 고통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한 죽으심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로서 부름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내가 내수동 교회에 있을 때 보면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대학부 아이들을 보고 어느 집사님이 임대료를 내라고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너희는 임대료를 내야한다. 왜냐하면 주일 낮 예배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 낮 예배는 본 교회에 가서 드리고 그리고 오후에는 밥 먹고 슬슬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학부가 은혜롭다고 하니까 오는 것입니다. 대학부가 끝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저녁예배시간에 자기네 교회의 성가대에 가는 것입니다. 수요일에는 선교단체에 갑니다. 토요일에는 사회사업단체에 갑니다. 그러면서 다 찢어진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슨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본교회가 있는데 특별히 마음이 갈급하고 그래서 와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일 예배는 거기서 드리고 오후에는 여기로 오고 밤에는 또 저리고 가고 수요일에는 교회에도 안 나오고 선교단체로 가고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유익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다 배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골고루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속에 가장 희박한 의식이 무엇이냐 하면 공동체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식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교회의 유익이나 아니면 자신의 단체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공동체를 모르고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그는 내안에, 나는 그 안에’ 공동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모든 우리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 이런 정신들을 성찬이 훌륭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을 베푸실 때 그 떡과 잔을 베푸실 때 너희 모두 다, 너희는 다, 가롯 유다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찬의 의미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 같은 죄인이 한 상에 먹고 한 상에 마실 수 있는 거룩한 이 공동체 속에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같이 허물 많은 사람이 그 거룩한 성도들에 의해서 한 지체로 받아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살핀 후에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는 마땅히 성찬이 있기 전에 자기를 깊이 살피고 또 살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빛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과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이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기다리면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잃어버렸던 십자가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 그런 영혼의 변화들이 일어나기를 우리는 고대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못 박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의식이 없이 아무렇게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영혼의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리고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하는 은혜에 분깃들이 어떻게 약속되었는지를 모르면서 그렇게 의식도 없이 성찬에 즉흥적으로 참석하고 그 예식에 나아오는 것이 유익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해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살피는 분명한 깨달음과 그리고 그 십자가의 정신의 빛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꾸고 고치는 자기 혁신과 변혁 이것들을 통해서 성찬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꽤 긴 시간 동안 성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익히 들었으니 이번 성찬에 이 성찬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