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예수의 몸 언약의 피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녹취자 : 정유선
오늘 이 시간에는 특별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성찬에 관해서 오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들으시면 아마 일평생 성찬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태도와 은혜가 새로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 년에 두 번 정도씩 성찬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담화를 하시고 유월절 만찬을 베푸심으로 당신의 죽으심을 예비하시던 그 의식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예식을 교회에 정해놓으신 데에는 이런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예식 뒤에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억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예식으로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의미를 깊이 느끼고 깨닫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이런 예식들은 규격화되어지기 쉽고 규격화되어져서 되풀이되면 형식화되어버려져서 내용을 잃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우선 이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 목요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위해서 즉 다시 말해서 고난 주간의 성찬을 위해서 우리가 따로 모입니다. 성찬만을 위해서.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서 있는 날 동안은 목요일 날 밤에 모여서 성찬을 합니다. 그것도 못나올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고난 주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장로교에서는 부활절 때하고 추수감사절 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또 어느 교단에서는 매주 합니다. 그런데 매주 하는 교단을 보니까 매주 하니까 헌금 순서처럼 구태의연해집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오히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이렇게 정하지 말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하나남과 우리와의 맺은 그 언약을 새롭게 하고 싶은 그런 동기가 있다면 그러면 당회의 결정에 의해서 몇 주일 전에 성찬이 있음을 미리 알리고 그리고 시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찬 예식은 근본적으로 구약을 생각해야 됩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그 주간이 유월절 주간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월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그때는 예수를 죽이지 말자고 도모하였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를 잡아 죽이면 예수를 추종하는 많은 세력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수난 주간 즉 유월절 주간에 예수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근본적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이 성찬은 근본적인 모형을 구약의 유월절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이 의미하는 것을 잘 파악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며 가지셨던 성찬의 의미를 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열 번째 재앙을 만날 때 원래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과 모든 애굽 땅에 거하는 모든 집에 첫 번째 낳은 것들을 죽여버리는 재앙으로서 모두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죽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임방에 바르고 쓴나물을 먹고 무교병과 함께 양고기를 먹고 지팡이를 잡고 허리띠를 매고 끈을 동여매고 급히 먹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떠나라 그러실지 모르는데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속히 모든 것을 떠나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유월절예식을 치렀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만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그날 밤에 구출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집 문 앞에서 죽어간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모세를 통해서 상세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피를 발라라,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너희 각 집을 돌아다닐 때 그 피가 너희의 집에 발려진 것을 보면 이 피가 발려진 그 집이 하나님이 사랑하고 아버지와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집안에 죽음을 주지 않고 넘어가리라. 그래서 영어로 패스 오버입니다.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다 지나가야 되는데 그걸 보고 예외적으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일반적인 것이지만 그 죽음에서 벗어나는 생명은 예외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날 밤 죽음을 보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그 문 앞에서 피 흘리고 죽어간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구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이 죽어간 어린양은 결국 앞으로 우리를 위해 오셔서 단번에 자기 몸을 속죄제로 드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표징이었습니다. 예표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완전한 제물이 되어서 우리 모든 사람들 쉽게 얘기하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이 죽음은 첫 번째 사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사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죽음 뒤에 있는 실제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있고 그리고 그 죽음은 마지막에 심판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그런 운명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구원한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들이 혈통으로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된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이 교회 다니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게 됐고 일반적인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예외적인 대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문 앞에서 피 흘리고 죽어간 그 어린양의 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은 것처럼 예루살렘의 문 밖에서 죽어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십자가에 매달린 그 사건은 양이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선택된 사건이고 거기에 못 박힌 그 사건은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문지방에서 그 어린양을 잡아 죽이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양이 죽은 것은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피를 흘려서 죽음을 면하게 하고 고기를 주어서 사람을 먹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모형이 예수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을 두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우선 어떤 사람들은 카톨릭에서 흔히 합니다마는 포도주와 떡이 사제의 축복을 받고 우리가 먹는 그 순간에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와 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를 들면 간증이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신화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무슨 이야기가 있냐면 포도주와 떡을 성만찬에 쓰는 것만 성체라고 하는데 그 성체를 쓰다가 남은 것을 올려놨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와보니 진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코기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다 웃는 이야기지만 그 사람들은 매우 심각하게 그런 전설들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는가 하면 또 한쪽 극단의 사람들은 그 의식 자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건을 기념하라 하셨으니 또한 우리도 기념하는 것이다, 단지 기념할 뿐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옛날 일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기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경험과 우리 자신의 체험은 그렇게 성찬이 간단히 기념하거나 아니면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는 것들 말고 다른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화) 제가 75년도 10월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목사님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그 이력을 참작하셔서 11월에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성찬을 받았습니다. 같은 날. 그 때는 누가 세례를 그렇게 받으라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나에게는 그 세례가 그렇게 감격스럽고 기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다음서부터 웬만하면 어린 학생들이 마음에 느끼는 것도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을 말립니다. 깊이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아멘으로 그 은혜로운 세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오히려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일이 훨씬 더 은혜롭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권합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 때 세례를 받는데 그 세례를 받기로 문답을 하고 문답을 볼 때, 요즘 들어서는 떨지도 않습니다. 모르면 히죽 웃고 그냥 세례 주기 원하는데 그때는 얼마나 떨리는지 그 문답집을 달달달 외우면서 하꼬방 같이 생긴 교회에서 문답을 받고 장로님이 두 분이 있었는데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렇게 뛸 듯이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세례를 받는 그날까지 일주일을 기다리면서 매일 저녁 나와서 세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 이 표를 입혀주신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감사하고 세례를 받는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깨끗이 하고 그때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내 최고의 외출복이 추리닝이었습니다. 추리닝 하얀 것 깨끗이 빨아서 입고 가서 세례를 받는데 정말 그때 목사님이 눈을 떠서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내가 성부와...’ 그리고 손을 올려놓는데 이 머릿속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불이 확 내려왔습니다. 난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목사 안수 받을 때도 안 울었는데 세례 받을 때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러면서 막 울었습니다. 그때는 아쉬웠던 게 ‘물을 좀 많이 뿌려주지 수돗물이 뭘 비싸다고. 이 다음에는 목사가 되면 한 바가지씩 부어줘야겠다. 감기 걸리더라도 실컷 부어줘야겠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그 때 결심했습니다. 세상을 돌아보지 않고 예수만 바라보고 살리라. 그 다음 성찬을 했잖습니까. 성찬을 여러 번 했는데 그 중에 감격적인 성찬 중 하나가 아마 우리 영래를 낳아놓고 백일 됐을 때 성찬을 했는데 그 때 우리 아이가 유아 세례를 담임목사님에게 받았습니다. 안고 세례를 주는데 뭘 말씀하시냐면 아들을 주신 아버지의 사랑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그런데 내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데 그 아이를 안으면서 내가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이 없었을 때는 실감이 안 났습니다. 처녀들이 실감이 나겠습니까? 아들이 없는데. 껌벅 하면 자식은 필요악이다 그러고 다니는 신세대들이 무슨 뼛속깊이 다가오겠습니까? 그러나 시집 장가가서 아이 낳아보고 그러면 아들을 준다는 것 그것도 독생자를 준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말하자면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주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 아픔이 아들을 못 박게 내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픔이 확 다가옵니다. 마시는 그 잔과 그 떡이 바로 그 아들의 살과 피입니다. 성찬을 하면서 그 떡을 뗄 때는 살이 찢어지는 것 같고 잔을 마실 때에는 예수의 피가 내 몸에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구속하신 사랑의 큰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격한 의미에서는 성찬이 있는 날은 설교를 안 해도 괜찮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찬을 가리켜서 보이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체가 메시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찬은 회개를 창출합니다. 죄인을 회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를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만드는 위대한 회개의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회심케 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 그 성찬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단순한 예식이 아닙니다. 개천절이나 독립기념일 예식 할 때도 유공자들은 그 식장에서 막 웁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던 그 수많은 자신의 혈육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 예식과 이 세례식은 단순히 기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인 큰 은혜가 예식 속에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거기에 참여할 때 그 때에만. 남들은 울고불고 하긴 울고불고 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만 하여튼 막 눈물을 흘리면서 고난 주간에 성찬에 은혜롭게 참석했는데 아니 은혜 잔뜩 받고 밖에 나가서 눈물을 씻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아이, 입맛만 버렸네”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찬 예식이 기념일도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이제 그 문제가 풀립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여러분,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제자들에게 축사하시며 주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저희들이 먹을 때. 뭘 먹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밥 먹고 있는데 떡 줬습니까, 국수 먹고 있는데 빵 줬습니까?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손에 있는 것과 동일한 음식을 지금 먹고 있는 것입니다. 양식으로. 이 사람들의 주식은 밥이 아니라 여기선 떡으로 번역되었지만 빵입니다. 빵을 다들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잡아서 예수님이 한 덩어리를 떼신 것입니다. 큰 덩어리를 떼셔서 통째로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들 이 떡을 나누어 먹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이 안 되잖습니까? 잘 먹는데 뭘 또 떼어서 또 줍니까? 뭘 의미하고 싶으셔서 예수님께서 당연히 떡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내어 미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떡으로 가득 찬 상에서 똑같은 떡을 떼어서 굳이 제자들에게 주면서 이것 말고 이걸 먹으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이것은 보여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하나는 제자들이 떡을 먹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떡을 먹는 제자들의 그 떡은 말하자면 일용하면 사라지는 양식이었습니다. 똑같은 떡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졌을 때 이 떡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인생의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으십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으로 우리의 허기짐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것으로 우리가 영원히 배부르고 그것으로 우리가 충분히 안식하고 그것으로 충분히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다른 빵을 제자들에게 내어 미셨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흔히 먹는 그 빵이 아니라 또다른 빵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매일 우리들이 밥을 먹지만 매일 먹는 밥 말고 또 다른 양식을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그 양식은 우리의 몸에 살과 피가 흐르게 하고 하루를 활동하게 하지만 그러나 후자에 있는 그 빵, 그 양식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영생하도록 살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나누는 그 떡, 스스로 먹으며 스스로 베푸는 그 양식으로써 충분한 것처럼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양식을 우리가 필요로 함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양식이 무엇입니까? 죄송하지만 당신 자신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먹는 육신의 양식으로 부족한 것이 없고 그것이면 모든 것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고 생각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또 다른 떡을 내어 미심으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세상이 주는 양식으로서는 너희가 배부를 수 없느니라. 세상의 양식으로 채울 수 없는 배고픔이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는 기억해야 하느니라. 너희는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새로운 양식을 먹을지니 곧 나를 먹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마다 오늘은 먹으나 내일은 주릴 것이며 오늘은 해갈하나 내일은 또 다시 목마를 것이니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피 흘리며 싸우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그림은 바로 그 떡 하나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을 가지시고 떼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한 덩어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덩어리에서 떼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뗀 한 덩어리를 가지고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빵을 하나를 성찬에 쓰는 것이 좋습니다. 쪼가리 내지 않고. 그리고 뜯어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그렇게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서 그렇게 해보니까 문제가 뭐냐면 사람들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적당히 떼먹어야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에 배부르려고 그런 건지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왕창 떼먹어서 뒤에 있는 사람들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덩어리라는 의미가 사라지잖습니까? 그냥 조금씩 깍두기 반만큼 그렇게 떼어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요번에 잘해야 합니다. 딱딱 맞춰서 눈치껏 떼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뜯어지는 그 순간을 통해서도 우리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예식을 기가 막히게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몸이 떼어지는 것, 그 뜯어지는 것 그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떼어지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이 내 손에 의해서 떼어지는 그것이 엄청나게 의미 있는 사건인데 이것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형제가 그 일에 똑같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자매가 똑같이 그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부하시는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그 살을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형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임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감격적으로 그 의미를 알고 일 년에 서너 번 참여하는 교회라면 분쟁할 수 없습니다. 분쟁하던 사람은 그 성찬의 시간에 통회를 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고귀한 몸을 나만이 아니라 내 형제도 똑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리는 그 놀라운 감격,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살을 찢으시는 그 은혜가 나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형제에게도 베푸시고 내 뒤에 있는 노인에게도 베푸시고 내 옆에 있는 어린아이에게도, 성찬에 참여는 안하지만 그러나 똑같은 그런 육신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그렇게 하나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덩어리의 떡을 떼어 주신 다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통곡과 눈물로 “아버지여 내가 두고 가는 이 세상에서 저이를 하나 되게 하시옵소서.” 하며 하나됨을 위해 간절히 밤새워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성찬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참여할 때 그 교회의 영성은 발가벗긴 것처럼 드러난다고 확신합니다. 그 교회가 복음 안에 있는가 그리고 예수를 얼마나 뜨겁게 실제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려고 작정하는가 하는 이 모든 영성이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성찬 속에서 발가벗긴 것처럼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우리 교회를 떠나서 나중에 다른 교회를 가시더라도 그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깨어있는 교회인가 보고 싶으시면 성찬에 참여해 보십시오. 거기에 감격이 없으면 예수를 향한 사랑이 없는 교회, 거기에 눈물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위해 흘린 피가 없는 교회입니다. 문제는 너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교를 좋아해야 됩니다. 귀를 기울이고 알기를 깊이 사모해야 합니다. 넥타이만 메고 오고 목욕만 하고 포마드만 바르고 온다고 해서 예식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합니다. 여러분, 여태까지는 어떻게 했던지 이번엔 매우 의미 깊은 성찬입니다. 우선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찬을 집례 하는 그런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로 말하자면 담임 목회자가 직접 성찬을 주도하는 첫 번째입니다. 이전에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성찬에 참여했던지 이번에는 전혀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일주일 동안 원하면 금식도 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아침마다 금식하기도 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철야기도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기도 하고 혹은 가무나 음복을 금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금하면서 모든 오락과 즐거운 일을 멀리하고 십자가만을 응시하는 이런 기간을 가진 이후에 그 떡을 떼기에 합당할 때에 그 때에 여러분들이 성찬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허겁지겁 나왔다가 그 날이 성찬의 날인 줄을 비로소 아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이것을 받아 먹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떡, 쉽게 얘기하면 빵이 주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등가번역을 한다면 저희가 밥을 먹을 때 예수께서 한 사발의 밥을 가지고 축복하시며 제자들에게 퍼 주시고 가라사대 ‘너희끼리 한술씩 떠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매일 하루에 세 번씩 접한 그 빵, 그 앞에서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인생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를 설교할 때 여러분들이 만약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는다면 최소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의 임재 앞에 마주하게 되리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왜 다른 물건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물건이 아니라 늘 먹고 있는 지금도 제자들이 먹고 있는 그 빵 중에 다르게 만든 빵이 아니라 늘 먹는 그 빵 중에 하나를 택해서 그 빵 중에 한 덩어리를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면서 빵을 먹고 있는 그들에게 이 빵을 또 먹으라고 말하며 이 빵은 너희가 먹는 빵과 같지 않다고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주신 이유가 바로 무엇입니까? 똑같은 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이런 일용할 양식으로 기근을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신 예수 자신을 우리의 영혼이 필요로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떡을 떼어 주십니다. 그 떡을 떼어주시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니 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떼어주신 그 떡은 평범한 떡이었습니다. 그 떡은 먹고 소화되어서 모두 용해되고 그들의 혈육으로 남을 것이었습니다. 육체로 남을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때에는 떡과 내 몸이 다른 것이었는데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내 몸에서 떡을 갈라놓을 수 없이 하나 되었습니다. 이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의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먹고 나서 그 떡을 우리 몸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까? 잘라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렇게 우리와 하나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를 성찬의 그 떡을 떼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떼면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떼면서 우리는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나누어질 수 없는 생명적인 관계가 바로 성찬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살과 우리의 살이 십자가의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 되었습니다. 우리의 살 속에 그 분의 살이 덧입혀졌습니다. 우리의 살과 그 분의 살이 이제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살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잔을 마시기 전에 먼저 그 떡을 떼면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다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떠나서 살 수 있습니까? 주님 떠나서 살 수 없죠? 그것을 구체적으로 성찬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들이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있다면 오늘 그 성찬에 참여하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과의 관계를 새롭게 붙들고 그 관계를 생명적으로 누리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수백편의 설교가 하나의 성찬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으면서 감격하는 사람들은 백 퍼센트 성찬을 받으며 감격합니다. 말씀을 받을 때 도무지 감동이 없고 지루한 사람은 성찬을 받을 때에도 그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만 합니다. 성찬의 첫 번째 부분인 떡을 떼는 부분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셨는데 이 잔도 하나의 잔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하면 우리도 하나의 잔에다 포도주를 가득 따라서 돌려가며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간염이 옮으니 어쩌니 하면서 싫어하는데 할 수 없이 그렇게 작은 잔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잔에서 따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들은 빵을 먹으며 당연히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그들의 식생활이었습니다. 이미 먹었습니다. 어쩌면 배가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 한잔을 드시며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잔을 받아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니 고난의 피니라’ 주시는데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희는 이것을 누가 먹어라? 그때에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자리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가룟 유다가 끼어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제해놓지 아니하시고 동일하게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유다야 너도 이 잔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에게는 이것이 회개의 기회였습니다. ‘다’ 라는 말 하나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잠시 후면 그리스도를 잡아 죽일, 이미 그 전에 미리 피가 묻은 그 손에게도 포도주를 주시며 내 피를 마셔라. 잔을 주신이가 떡을 안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유다를 향해서도 예수님께서 떡과 피를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셨습니까? 오늘날 예수를 잘 믿고 십일조 생활 잘 하는 저와 여러분들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소망 없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죄를 밥 먹듯 먹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든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회심치 않은 많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소망 없다고 낙인찍은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너도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피를 흘리고 살을 찢어서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조차도 이미 손에 칼을 들고 있고 피 냄새가 나고 있는 그리하여 잠시 후면 자신을 입맞춤으로 악한 군병들에게 내어줄 가룟 유다조차도 제외해놓지 않으시고 ‘다 마시라’ 이것이 예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 안함으로써 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성찬에 참여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나 같은 죄인 위해 흘리신 보혈을 보며 이제는 내 몸에 흐르고 있는 이 피가 나를 위해 흐르지 아니하고 세상 끝 날까지 나를 위해 이렇게 피 흘리심으로 내 안에 또 다른 피가 되어서 흐르고 계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리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가룟 유다에게조차도 다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위해서라도 살을 찢고 피 흘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피 흘리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피 흘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 살 찢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 찢고 피 흘리셨지만 예수의 피가 부족하고 찢으신 그 살이 모자라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그들이 그리스도의 그 찢으심을, 피를 마시기 싫어하고 그 살을 먹기를 거절하므로 사망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살을 찢으시고 이 떡을 떼시고 잔을 따라주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을까요? 우리에게는 이 사건이 기념이 될 수 있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이 사건이 기념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체로부터 찢어진 이 빵의 찢어짐이 곧 몇 시간 후에 매달려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자신의 살의 고통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 앞당겨서 (?) 죽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 그것은 잔을 따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 붉은 포도주를 보면서 예수는 잠시 후 채찍에 맞아 가시관을 쓰고 못 박혀 나무에 달려 흘린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심장이 터져 흘러내린 그 모든 피흘림을 앞당겨서 영혼 속에서 고뇌하며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살을 찢으시고 그 피를 흘리셔서 다 이것을 마시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 앞에 설적마다 기도 제목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랴 말할 때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절에 이행하는 것은 의미 깊은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 맺으시는 열매를 보십시오. 그가 살을 찢으시고 그의 피 흘리심으로 그토록 그리스도는 우리 몸속에 흐르고 싶어 하셨고 우리 몸속에 떼어질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우리 몸속에 살아계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것을 마시거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붉게 넘실대는 포도주 잔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 흐르는 그 피를 보셨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 떡 속에서 제자들은 깊이 예수의 살을 느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죄사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나를 살리시고 환난과 질고 속에서 고칠 수 없게 병들었던 나를 새롭게 살리시는 예수의 놀라운 은혜가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그리스도는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던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늘 울어도 늘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 흘리신 피와 이 천년 전에 찢으신 그 살은 오늘 우리의 살 속에 우리 혈관 속에 붙어있고 흐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왜 우리가 다시는 육체를 위해서 살 수 없고 세상을 위해서 살 수 없는 인생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살이 역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살을 찢은 세상의 손과 악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 찢으시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도록 만들고 그 예수를 향해 침 뱉었던, 예수의 그 육체 위에 침 뱉었던 세상의 입술과 입 맞출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예수의 피 때문에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그 고결한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오늘도 우리의 혈관 구석구석에 흐르고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의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신 그 보혈의 은혜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정신, 우리의 혈관 구석구석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순간순간 우리의 가슴에 밀려오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육체에 속한 더러운 욕망들을 이 십자가의 피가 이 모든 노폐물들을 실어날라 정결케 해 주기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흘리신 피는 사실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흘린 그 피는 분명히 옆구리를 찔렀을 때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왜 옆구리에 창을 들자 그렇게 엄청난 피가 흘러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 창은 밑에서 대각선으로 위를 향해 찔렀고 거리를 조절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창은 옆구리를 찌르고 예리한 창끝은 허파를 뚫고 왼쪽 가슴 깊이 묻혀있던 그리스도의 심장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모두 쏟아진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그렇게 피 흘리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운명하신 그 순간에서라도 몸에 있는 모든 피와 물을 쏟아내서 이 세상을 향해 흘려내어 보내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도 자신은 우리 안에 피로서 살아계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사도가 고백한 것도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예수의 피라면 여러분은 그 예수를 위한 생각에 가득 찬 사람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잠을 자면 예수를 꿈꾸고 잠을 깨고 나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야 할 소망을 생각하는 이 일들이 성찬을 보내는 우리의 가슴 속에 밀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산산이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 흘리시고 우리 안에 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 때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죄악과 더러운 욕심과 부패한 욕망과 사악한 증오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날 동안 피할 수 없이 우리의 몸은 분해되었고 우리의 피는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성찬에 참여하여 다시 한 번 ‘오 주님,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를 위해서 살지 않고는 저주받은 인생일 뿐이오니 예수의 살이여 우리의 몸을 지배하소서. 그리스도의 피여, 우리의 마음과 사상을 지배하소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될 각오를 새롭게 다짐해 주께서 위로부터 공급해 주신 새로운 생명의 끈인 예수의 오심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며 성찬을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이번 성찬은 생애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