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영혼의 병적 유아상태를 면하라(히5:13) 2001.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신령한 변화에 이르게 하는 말씀(히5:13下) 2001.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6
3. 우리의 의(義) 그리스도를 경험함(히5:13) 2001.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33
4. 그리스도에 관한 현재적 경험의 중요성(히5:13) 2001.1.18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4
5.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말씀을 경험함(히5:13) 2001.1.19 새해말씀사경회(저녁) 71
1.영혼의 병적 유아상태를 면하라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3)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신앙에는 어린 단계의 신앙과 성장한 단계의 신앙이 있어서 그 단계를 거쳐서 믿음이 자란다고 생각한 나머지, 오랜 동안 어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신앙도 신앙 가운데 한 종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생각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늘 결심해도 그 결심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입증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신령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만 그 세계를 사모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받고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이거늘 그 근본을 경험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히브리서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두 종류의 신앙을 말하고 있는데 젖을 먹는 어린 신앙과 의의 말씀을 경험한 성장한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구도를 가지고 고린도서에서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에는 태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장성한 어른이 되기까지 성장의 과정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성장의 과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아이의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영혼의 중요한 질병 중의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를 출산하고 낳아놓은 그 아이가 갓난아이로 태어나서 젖을 먹고 조금 지나서 기어다니는 성장을 9-10개월까지 한 후에 1년 정도만 그 상태에서 멈춘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그 아이를 정상적인 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7-8세쯤 되었는데 계속해서 우유 이상의 것을 먹을 수 없고 언어도 구사가 안되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변을 보는 것 이외에 더 이상의 성장에 진전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크게 낙심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을 낳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을 낳아 놓으시고 여러분들이 어리고 젖을 먹는 것 같은 유아시기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1년 2년 5년 10년 심지어는 20여 년 계속 되는 것은 성장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에 있다기 보다는 영혼에 중대한 결함이 있고 질병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병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적절한 해답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계속 그렇게 살다가 인생을 끝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사는 데는 인생의 법칙이 있고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듯이 우리 영적인 삶에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있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기적에 가까운 은혜는 있지만, 그 은혜라고 하는 것도 일정한 법칙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답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아무 의미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사경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처음 생각에는 요즘과 같이 곤고하고 어려운 때에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 수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말씀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우리 앞에 놓여진 상황이 어떠한 상황으로 변한다 하더라도-어떤 때는 우리에게 격려가 필요하고 어떤 때는 우리가 교만하지 않도록 경고해 주는 말씀이 필요한 상황이 우리 앞에 벌어질 수 있습니다- 계속 육에 속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주님이 어떤 은혜를 주셔도 여러분들은 그 은혜를 곧 흘려버리고 다시 고갈된 상태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여러분들이 만일 그 어린아이의 단계를 벗어나고 육에 속한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떠한 상황이 여러분 앞에 주어져도 능히 그 난관을 해치고 주님의 도움을 입으며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주 앞에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깨달아서 우리의 영혼의 참된 변화를 도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피할 수 없이 축복해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쳐져서 새롭게 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에게 축복하셔서 주님을 처음 부르신 그 부름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여하는 사람들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기록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방금 태어났기 때문에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건강한 어린아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초두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뭔가 병적인 상태에서 성장이 멈춘 이상한 병적인 상태의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서에 나와있는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들이 여기에 해당되는지를 깊이 성찰하고 그렇다면 이번 사경회에서 육적인 그리스도인, 병적인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의 탈을 벗어버리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진실한 신자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병적인 어린아이의 상태, 혹은 육적인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특징은 유아기가 이상하게 길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두 유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신앙생활 할 때 유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땀 흘리며 철야기도 할 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은데 철야기도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피며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말짱 거짓말이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는 다시 교회에 올라가서 눈물 흘리며 아까 하던 철야 기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맞아, 하나님 살아 계시지. 안 살아 계시면 어떻게 내 눈에 눈물이 흐르겠어’합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의심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아상태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거듭나자마자 순교하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하며 교회로 가는데 친구를 만나 ‘축구 시합하는데 너 없으면 안 된다’ 하면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이단이 와서 꼬이면 넘어가는 것도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려서 그렇습니다. 이런 유아적인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병적인 상태에서의 어린아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유아기가 굉장히 길다는 것입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20대에 주님 영접해서 거듭났는데 하얀 수염이 나오는데도 그 유아기가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에서의 유아상태가 아니라 뭔가 영적인 상태에 중대한 결함이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병적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는데 연약한 것이 아니라 병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걷지 못한다고 버리겠습니까? 악한 부모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병적인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사람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을 주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는 너무 소중합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소중한 것이고 병든 것은 병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있으면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만일 어린아이라고 할 것 같으면 걸어다니다 뛰어다니고 뛰어다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서 성인이 되어야지 중학교 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 여전히 기저귀 차고 기어다니면서, ‘이렇게 자라지 않는 이상한 병에 걸려서 어쩌니’하고 물어볼 때 ‘내가 이렇다고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안나요’라고 말하면 정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이것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혹은 병적인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신앙생활에 성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1년 전에 써놓은 여러분들의 신앙일기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워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2년 전, 3년 전의 교회생활을 생각하면 ‘내가 어쩜 그렇게 미숙했을까, 인격적으로 내가 어쩜 그렇게 못났을까,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아는데 있어서 그렇게 지식이 없었을까, 정말 오해했구나. 그때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하면서 살았을까’하는 성장에서 오는 격차를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가보면 넓던 길이 좁아 보이고 크던 건물이 작아 보인다-그것은 우리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며 성장에서 오는 옛날의 나와의 격차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것이 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왕년 얘기를 하는 것 아닙니까? 옛날에 받은 은혜에 대한 회상이 추억이 되고 그것을 오늘날에 비춰 볼 때 그때가 그리워지는 식의 신앙밖에 없다면 이것은 정상적이고 모두 당연히 거쳐가야 하는 유아기 상태가 아니라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병적인 유아기 상태가 계속 되면 그의 마음과 영혼은 단단하게 굳어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는 확률은 어릴수록 높습니다. 부흥회를 수없이 인도해 보아도 정말 보기 어려운 일은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들이 오랫동안 유아기 상태에 있다가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회심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 못 만나고 병적인 유아기 상태에서 계속 늙어가고 은혜의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지 못하면 나이 먹는 자체가 절망을 향해서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확신할 수도 없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는데 한번도 마음을 바쳐서 주님을 사랑해 본적도 없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본 적도 없는, 일생동안을 처음 은혜 받았을 때를 회상하면서 ‘그때가 좋았지’ 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뭐합니까? 그 사랑을 자기가 느낄 수 없는데 그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제적으로 감화와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질병입니다.
그리고 이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결정적인 특징은 죄에 대한 반복되는 실패입니다. 아까 그 사람들보다는 좀 나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사경회를 하면 어떤 때는 마음이 녹아 내리는 것같이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눈물이 마르기 전에 금방 실패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져서 감격도 하고 ‘주님의 뜻대로 잘살아야겠다’고 결심도 하는데 이상하게 그 결심을 비웃듯이 실패가 우세하게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삶이 계속 반복되면서 결국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주님의 은혜가 자신의 인생을 전혀 바꿔놓지 못한다는 불신앙적인 패배의식 같은 것들이 자리를 잡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넘어지고 계속 실패하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모두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실패하고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씩이라도 한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겠다’ ‘주님 뜻대로 살아야겠다’하며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느껴지고 은혜가 느껴지고 기도가 느껴져서 내가 감격하고 눈물 흘리며 회복하는 것이 나의 진정한 참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충분히 긍휼과 사랑을 입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이따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다는 것이 곧 성장의 증거는 아닙니다. 계속해서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심겨진 나무에 서너 달에 한번씩 물을 바가지로 붓는다고 해서 나무가 잘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기간만에 물을 주어 뿌리가 계속 촉촉이 젖어 있을 때에 성장이 되는 것이지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생명이 끊어졌는데 물을 다시 바가지로 붓는다고 해서 갑자기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번째 특징은 반복되는 실패를 말합니다. 실패 속에서도 가금 은혜를 맛볼 수는 있는데 그것이 곧 자기가 병적인 유아기 상태, 혹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입증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은 말씀을 흘려보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가끔은 은혜 받을 때 있지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가끔 여러분들의 마음에 왈칵 서러움이 복받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게 되는 때가 있지요? 기도회에도 참석 안하고 예배에서도 그런 것을 경험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철을 타고 가다가 우연히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다든지 혹은 너무 외롭고 힘들 때 하나님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져서 여러분들의 눈가에 눈물이 배는 적이 있지요? 그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지속적으로 실패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늘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어떤 형태의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실패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실패를 전체적으로 볼 때 성장하면서 실패하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있을 수는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패가 계속 반복되는 형태이거나 계속 내려가면서 실패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실패는 정상적인 성장을 동반한 성숙에 이르는 실패입니까? 아니면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기 때문에 되풀이되는 실패입니까?’라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실패는 할 수 있다고 치는데 실패한 후에 그 실패를 딛고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면 전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나타나면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자면 신년에 기도생활을 결심합니다. ‘새해에는 최소한 20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야겠다’ 어떤 사람은 ‘신년도에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새벽예배이다’하고 기도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결심했다가 몇 번 후에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도저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실패입니까? 아니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떻든 기도의 세계가 계속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고 그 기도의 세계가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되는 것이 느껴지고 몸에 배는 것이 느껴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폭이 넓어지고 두터워지는 것이 느껴지는 가운데 이따금씩 실패합니까?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성숙해 가는 와중에서 피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실패입니까, 아니면 실패가 여러분들을 다시 옛사람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게 하는, 아무런 성장도 진전도 없는 반복되는 실패입니까? 아니면 실패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공을 향한 도전이 있어야 실패가 경험되는 것인데, 그런 경험이 아예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가 실패와 성공 사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실패를 자신의 주어진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그런 영혼의 상태에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엉뚱한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저는 놀라운 은사를 받았는데요. 방언도 할 수 있고 어떤 때는 놀라운 영적인 현상들을 경험하기도 했는데요. 내가 병적인 어린아이의 상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신령한 은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는 “그럴 수는 없지요”라는 답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은사와 은혜의 차이점입니다. 은사는 그 사람의 성숙과 관계없이 유아기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런 것들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중생과 함께 회심하면서 강력한 그런 은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증거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일을 했는데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병든 것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하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는데 우리는 독단적으로 거기에서 가롯유다가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나아가서 귀신을 내어쫓고 영적인 놀라운 승리를 거두면서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은사를 경험했으면서도 여전히 유아기적 상태에, 병적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아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은사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의 신령한 변화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장치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다릅니다. 은혜는 그 사람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그 사람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서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더러운 하나님을 거스르는 부패한 본성들을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나님의 은혜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는 놀라운 일은 은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그의 영혼과 인격 속에 깊이 파고들어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새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주님에 대해서 끊임없이 들었지만 그분과 맞닥뜨린 적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공위성이 지구의 주위를 수없이 돌고 있지만 한번도 지구와는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기독교의 신앙의 개념, 기독교적인 문화, 교회의 생활습관, 에티켓, 교회의 관습들에는 익숙해져서 계속 돌지만 한번도 그 모든 것들의 원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뜨거운 만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적인 유아 상태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징은 신령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자들은 신령한 것을 받을 수가 없나니”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각과 사고가 항상 계산적이고 상식적일 뿐이지 그것을 뛰어넘는 믿음의 사고가 없습니다. 그런 육에 속한 사람에게 교회를 운영하는 것을 도우라고 하면 항상 사업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장사하듯이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는가 안 남는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면 항상 사고체계 자체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장사하던 세속적인 지혜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교회에 그 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세속적인 틀 속에서 행동하고 생활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무엇이 세속화입니까? 누가 그렇게 세속화되게 합니까? 사실 교회와 속세가 어떻게 분리되겠습니까? 교회에서는 여러분들이 거룩한 성도들이지만 문만 나가면 안 믿는 가정으로 돌아가고 내일 아침이면 불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직장에 가서 이중장부 삼중장부 쓰도록 강요받는 회계업무를 보지 않습니까? 세상과 교회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담을 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세속적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는 결국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병적인 유아기 상태에서 벗어나서 새사람이 되는 진정한 변화가 없이는 결국 그 사람이 오랫동안 몸담고 경험했던 세상의 육신적인 지식과 삶의 습관들이 교회로 수입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진실하게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변화된 내면의 질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죄악 된 세상에 가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이것을 사회사업 기관이 대신할 수 없고 자선단체가 대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금과 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라고 했을 때 그 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이 병적이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부끄러움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이 땅을 심판하시기 전에 항상 하나님의 교회를 먼저 심판하십니다.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들을 먼저 심판하셔서 청소해서 정결케 하신 후에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만큼 교회를 향해서 거는 기대가 크고 놀랍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이 교회가 숫자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이 진정으로 변화된 삶, 새로운 삶의 원리가 심기고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생명의 원리가 영혼 속에 심겨져서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그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는 나라입니다.
(예화: 어릴 때 뭐가 싶다고 조르면 할머니께서 밀가루에 이스트를 조금 넣어 반죽해서 한나절 아랫목에 묻어두면 커다란 양푼 가득 반죽이 되었다) 문제는 이 세상은 서 말의 가루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딱 한줌이어도 좋으니까 누룩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룩이 참된 누룩을 계속 만들면서 확장되어 가는 것과 같은 교회성장이 하나님의 나라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변화되지도 않는, 거듭나지도 않은, 혹은 거듭났다고 해도 10년 20년씩 병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꼬이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희망적인 증거가 아니라 절망적인 증거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들이 누구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죄인이었으며 당신의 외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셔서 우리를 사심으로 우리는 주 앞에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따금 말씀을 듣거나 혹은 기도를 하거나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자신이 너무 처량하고 비참하다는 이유 때문에는 울지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솟아오르는 깊은 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을 사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결코 여러분들을 거저 하나님께서 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복잡하셨습니까? 창조하실 때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불순종하고 범죄 하여 타락해서 죽은 그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는 자기의 고귀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후에야 우리를 사셨습니다. 주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쓸데없는 멸망할 존재였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구속하심으로 이제는 내가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머무르는 것이 가합니까? 여러분들이 계속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러 있고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가 2년 3년 4년 5년 10년 계속 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가당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무지몽매한 악한들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육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인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오늘 말씀의 진단에 의해서 여러분 자신이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판단된 여러분들에게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을 버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묻습니다. 여러분 행복합니까? 주님 없이 살아가는 것,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여러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그 삶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던가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 은혜가 없는 날은 은혜가 없어서 곤고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뜨겁게 은혜를 받는 날은 내가 이 은혜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의식 때문에 곤고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나아가서 사는 동안에는 주님이 생각나고 그래서 마음놓고 세상 사람처럼 즐겁게 살수도 없고 교회에 돌아와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가 없어서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곤고하고 세상에서는 슬픕니다. 그것이 만족이 없는 삶입니다. 그것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경험하고 있는 오늘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가 여러분들에게 몇 년 계속되었습니까? 예기치 못하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서 새사람이 되신 분들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변화되려고 하는 사람들만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 남아 있는 날들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 20세가 넘어서 회심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적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본 적도 있습니다. 양 세계를 다 살아본 사람으로서 저는 말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변화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우울하고 어두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죄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마음껏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조금 맛보았습니다. 주님 사랑이 뭔지도 맛보았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도 경험했습니다.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변화된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모르고 살 때보다 훨씬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삶이 세월이 흘러가면 언젠가 저절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저절로는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전에 주님을 만나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어두움으로 가득했던 신앙생활에 복음의 빛이 들어오고, 개념으로만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축복된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술 먹고 교회에 갔는데 예기치 못하게 변화된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먼저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만나고 내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이고 예감이 보이고 그런 것들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는 변화가 먼저 징조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감했던 그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혹은 오랫동안 병적으로 머물러 있었던 이 유아의 상태에서 신령한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주님을 버릴 수도 없고 사랑할 수는 더욱 없고 교회를 떠날 수는 없고 교회 속에서 온전히 행복할 수도 없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으로 안갈 수도 없는 상태가 행복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정은 이중간첩 같은 심정이 될 것입니다. 양쪽에서 모두 지명수배 되어서 쫓기는 자의 심정이 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뭔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고 중대하게 결단하지 않으면 이렇게 경험해온 불우한 신앙생활의 모습, 더 나아가서 이 불행하고 우울한 인생의 모습은 여러분들의 교회 출석과는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분 나쁜 예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신령한 신앙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들은 수없이 다른 집 아이들과 자기 아이를 비교합니다. ‘우리 아이가 말을 더 빨리 해’ ‘이가 몇 개 더 났어’ ‘엄마라는 말을 벌써 할 줄 알아’하는 쓸데없는 것들을 엄마들이 자랑합니다. 비교를 통해서 우리 아이의 성장이 빠른지 느린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표준적인 아이의 성장 발육 챠트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몇 개월에는 우유를 얼마큼 먹어야 정상이고 키는 얼마고 몸무게는 얼마이다. 남자아이는 어느 정도이고 여자아이는 어느 정도이다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가 발육이 더딘 것을 압니다. 그런 표준이 없다면 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설교자가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증거하고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그런 세계가 정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희망 없는 사람이 ‘냅둬. 이대로 살다 죽을 거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런 사람들은 짐승인데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생동물을 데려다 잘 길들여서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사는 문화에는 익숙해 있지만 본성은 야성을 가진 짐승입니다. 변화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신앙의 세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실 수 있는 최상의 세계였다면 뭔가 나에게 만족을 줘야하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만족이 아니라 내 인생이 그 신앙 때문에 안전하고 평화롭고 내가 견고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을 나에게 제공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못하면 그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그러나 병적인 유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사람들에게서 “아멘”이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것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조차도 마비된 데서 오는 평화이지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오는 진정한 신령한 차원의 평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의 변화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신령한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다니는데도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굉장히 커다란 불행입니다.
(예화: 스물 몇 살에 직장 생활할 때 기도원에서 새벽 시간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시편을 두 장정도 읽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마쳤다. 그런데 그 시편을 읽으시며 그 목사님이 계속 우셨다.-‘나는 정말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시는 목사님이 이상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상이고 그렇게 한번도 눈물 흘려본 적도 없이 성경을 읽는 내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읽는데 있어서도 나와는 다른 또 다른 신령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야 그분이 경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때야 비로소 그 때 내게 직감처럼 다가왔던 그 확신이 사실이었고 성령이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파급효과는 수천 장의 전도지 보다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나누어주는 전도지는 복음을 선전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삶은 현존하는 자체로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화: 요즘은 선전에 노이로제가 될 정도이다) 그런 요인이 전도지로 전도가 잘 안 되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일도 물론 해야 합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는 전도에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존재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신령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신앙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신령한 참된 변화가 내면의 결정적인 사령부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전 인격과 삶 전체에 파급되어집니다. 귀신이 들어도 사람이 표가 나는데 신령해져서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화: 놀음에 미친 사람의 눈빛-돈에 혈안이 된 사람의 눈빛) 강력한 욕망 하나도 그를 그렇게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데 예전에 없던 신령한 실재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가 어떻게 새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에 ‘아, 이것이 바로 그 듣던 그것이구나’하며 ‘나의 이 유아기의 상태가 성장과정에 있는 유아기 상태가 아니라 병적인 유아상태구나’하는 것을 즉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에 있으니까 좋아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놀랍게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면 싫어할 수 있습니다. 싫어할 수도 있고 좋아할 수는 있는데, 그러나 신령한 사람이 되고 나면 누구도 무시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구현해야할 실존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난 아직 그런 놀라운 사랑, 빗줄기와 같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그 폭포수와 같은 사랑을 경험한 적은 없으나 내 옆의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지금 경험하면서 한없이 주님에 대한 자신의 영혼의 만족을 고백한다면, 그 때 그러한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는 것이 자신이 변화되는 지름길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말라깽이와 같이 아주 비참하게 비틀어져서 죽어가면서도 누가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비정상이라고 합니다. 뭔가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신앙의 경험을 다른 사람이 하면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병적인 유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비결은 어찌하든지 간에 그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우리가 압니까? 그의 사랑의 세계를 압니까? 그 십자가의 복음의 세계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이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그 세계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그 세계를 알고 난 다음에 두 번째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에이 토레이’ 목사님이 음식점의 여종업원에게 “자매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말하자 그 종업이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답니다.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이주정도 후에 갔더니 이 자매의 말이 “아무리 회개하게 해달라고 이주를 기도했지만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구원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그러면 기도를 바꿔보십시오.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나 자신을 보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 자매가 열심히 기도하니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는 안보여 주시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죄인이고 그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이 자기를 위해 얼마나 놀랍게 희생하셨는지를 보여주시자, 단지 기도한 것은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면서 회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참되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진실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이렇게 저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바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에 장기간 있는 질이 안 좋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습니다만 그는 여태껏 세금 한푼 떼어먹은 적이 없는 아주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진실하다’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의 일반적인 도덕적인 통념 속에서 오가는 정직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비추어보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이 동반된 진실함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세금 안 떼먹고 약속 잘 지키는 사람이 진실하고 정직하지만, 교회에서는 옛날에 주님 모를 때에 세금도 떼어먹고 약속을 좀 어겼다고 할지라도 그런 도덕적인 개념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설교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이 복음의 도리를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적용시켜보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 진실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교시간에 멍청하게 잠이나 자고 졸기나 하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생각 없이 덜렁덜렁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그 사람이 신호등도 잘 지키고 세금도 잘 내고 약속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을 향해서 그런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은 여러분들이 벌벌 떠는 열정도 아닙니다. (예화: 기도할 때 의자를 흔들어대는 사람 이야기) 하나님의 마음을 강력하게 끌 수 있는 최상의 무기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아무리 전해도 ‘그것은 목사님 말씀이고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안 믿어진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처방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니까 직접 여쭈어 봐라”합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거짓말로 ‘믿어집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진실로 말하라면 저는 정말 안 믿어집니다. 그러나 믿고 싶습니다.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충고했을 때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해도 믿을 수 없던 사람들이 혼자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진실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도 믿어지지 않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멘, 아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못 만나고 “하나님, 진짜 주님이 살아 계신 것이 안 믿어집니다”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납니다.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또 다른 문제점은 자신의 영혼의 곤고한 상태에 대해서 의문점은 많은데 마침표는 한번도 못 찍어본 사람입니다. 오늘은 ‘내가 왜 이렇게 곤고 할까?’하고 생각하는데 내일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그 질문이 그 때 끝나버린 것입니다. 수없이 물음표가 떠오르는데 그냥 자기 스스로 떠올랐다가 비누방울 터지듯이 다 터져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병적인 유아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지금의 나는 어떻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내 영혼은 정말 안전한가, 위험한가?’ ‘내게 지금 놓여있는 이 영혼의 상태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상태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제가 30분을 설교해서 여러분 모두를 눈물 흘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수없이 눈물을 흘려도 그 눈물이 여러분들의 피부만을 적시면서 흘러내리는 은혜라면 여러분들의 실패는 올해에도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잘해야 내년 사경회에 금년과 똑같은 마음으로 참석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경제상황, 집안문제,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제일 시급한 것은 이제는 오랫동안 이 병적인 유아상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있었던 실패를 벗삼았던 옛 삶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정직하게 성찰하고 그 성찰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말씀의 빛으로 주님이 지적하시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실한 마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해지기만 하면 어떠한 죄인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화: 중대한 범죄를 하고 괴로워하는 한 청년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죄인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가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이라면 지옥 이외에는 갈 데가 없지만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갈 수 있는 곳이 또 한곳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품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한없이 가슴아프게 했던 죄인들을 당신의 품에 품으셔서 그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입니다. 그렇게 장기간 동안 병든 유아 상태에 머문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짐승처럼 살아가던 사람들, 마치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이기라도 한 냥 시종일관 인생전체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가슴에 칼을 꽂는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그 칼을 다 버리고 마지막으로 곤고한 영혼의 상태에서 어느 한순간 진리의 빛 앞에서 진실해지고 나니까 오직 하나의 길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찬송: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흉악하기로 이름난 죄인일수록 참되고 진실한 회개는 그분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탕자를 내보낸 아버지가 그 아들이 돌아와서 자기의 품에 안기자 “이는 내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왔음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이렇게 노래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더 기뻐하시겠습니까?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설교자로서 설교 단을 내려오면서 가슴이 도끼로 짓이기는 것처럼 무너지는 때는 거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졸거나 하면서 생각을 멈춘 상태의 사람을 볼 때입니다. 그는 주어진 질서에 순종하기는 하지만 한번도 진실해져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정직하게 헤아릴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으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습니다. 그 영혼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들은 급히 멸망하리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변화 받을 수 없으면 하나님 앞에 그것도 고백하십시오. “저는 변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싫으면 그것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변화 받는 것은 싫습니다” 그것이라도 매일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변화 받아야 된데요” 그것도 기도하십시오. “나의 이 싫은 마음이 변화 받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지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라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해지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성령님의 은혜를 간구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내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그러한 병적인 유아기의 상태에서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말씀의 빛 앞에서 정직하게 인정하고 진실하게 깨닫는 그 사람들을 성령으로 감화시키셔서 역사 하실 때 그가 한 순간에 육신적인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성큼 신령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로의 진입을 경험하지 아니하고는 여러분들은 성도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실제적인 삶이 도저히 성도와 같을 수 없고 성도를 닮을 수도 없고 성도와 비슷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출석교인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성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역사를 일으키시지만 통상적인 우리의 경험은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응답으로서 자신의 성령을 보내셔서 그를 이러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에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수많은 문제들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이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멘”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반은 진척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여러분 자신의 이런 병적인 유아의 상태로부터 탈출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는 것은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세계로 돌아가기를 주님 앞에 진실하게 갈망하는 것 이외에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 실패했던 나의 모든 이 패배한 삶의 한 복판에는 여전히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변화되지 않는 내 영혼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변화되지 않는 이 영혼을 끌고 금년 한해도 여전히 실패할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는 먹고사는 문제, 취직의 문제, 사업의 문제, 가정의 문제, 무슨 문제보다도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의 성령의 뿐이시라는 것을 알고 내가 간구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가 주님께 간구합니다. 주님의 성령을 내게 보내주셔서 나를 역사해 주셔서 내가 들어갈 수 없었던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변화를 내게 주시옵소서. 이제껏 내가 알았던 신앙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겨우 안 신앙이었다면,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이 여인이 물동이를 내어두고 동리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그분을 만났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후에 그들의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전에는 네가 증거 하는 것을 통해서 내가 그분을 알았으나 이제는 우리도 그분을 만났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는 한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신령한 변화에 이르게 하는 말씀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3下)
저는 지난 시간에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성장하는 신앙의 단계에서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도기적인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그런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병적으로 오래도록 유아기의 상태가 지속되는 그런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으면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그들의 인생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유아기가 병적으로 길다는 것이고 그리고 죄에 대해서 거듭거듭 실패한다는 것이며 비록 은사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령한 은혜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며 나아가서 신령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육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제일 먼저 자신이 신령한 신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것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성령님으로 의해 변화되도록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며 그런 변화를 하나님 앞에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어린아이와 반대되는 사람으로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를 그 반대편에 세우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의 표현대로 한다면 이 어린아이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요, 그리고 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은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즉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습니까?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상당히 다가간 비교적 나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신령한 사람 중에서도 상당히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까?” 물론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신령한 상태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완성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어느 영역에 사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신령한 세계에 눈을 뜨고 그 신령한 세계에 들어갔을지라도 그는 그 세계 안에서 성숙도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느 한 순간 신령한 세계에 눈을 뜨고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그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일단 벗어나게 되고 거기에서 더욱 더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회심이라고 우리들이 부릅니다.
회심이라는 것은 교리적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지만 대개 크게 말해서 이 회심은 구원을 받을 때에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어느 한 순간에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예전과는 훨씬 다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있어서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켜서 회심의 사건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회심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회개, 다른 하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회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는 과거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또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성숙한 사람이 있고 아직 초보인 사람이 있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면 내가 비록 미숙하지만 신령한 세계 속에 있는 사람인지 혹은 교회 생활에 익숙해져 있으나 여전히 육적인 그리스도인인 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어제 말씀드린 것의 정 반대입니다. 첫째는 이제 유아기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유아기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신앙이 진전되고 있다는 성장의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는데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오면 속도에는 차이가 있을 지는 모르지만 눈에 뜨이게 자신의 신앙이 진보되고 있다는 성장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병적 유아기적 상태의 그리스도인이었을 때에는 죄에 대해서 거의 지기만 했는데 신령한 세계 속으로 옮아간 사람들은 지금도 죄에 대해 지기도 하지만 이기는 때가 훨씬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 쪽 영역에서는 싸워도 질 것이라는 패배감이 가득했는데, 여기에서는 질 때도 가끔 있지만 싸워볼만하다고 생각하며 이길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면 번번이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여기에서는 비록 은사를 경험했다할지라도 은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비록 내가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지 못하고 방언을 하는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내면세계 속으로 깊이 흘러들어 와서 예전에 자신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혼자 있을 때 느낄 수 없었던 누군가가 자신 안에 살아 계시고 움직이고 계시다는 은혜의 증거가 그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특징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적대감까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할 기회가 있어서 십자가 설교를 했는데 교인의 다수가 강렬한 은혜를 받고 있었으나 가운데 줄의 오십대 중년 남자가 시종일관 불만의 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냄. 성경을 집어 던지기도하며 벌떡 일어나서 나갔는데 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임.
그러나 신령한 세계에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가 비록 미숙할지라도 영적인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으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는 것을 보면서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있는데 자기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라고 생각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그들의 경험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미숙하지만 신령한 세계에 있습니까?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 속에 들어온 사람의 네 번째 특징은 매우 강조됩니다. 그것은 신령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세계에 대해 파헤치고 그것들을 증거할 때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지각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지적인 능력과 상당히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 눈뜨는 것입니다.
저는 한글도 모르는 분들이 아주 깊은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설교를 그들이 이해하고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능력이 아니라 신령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신령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느 영역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그 상태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이 없는 한, 그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 가서는 신앙의 갈등을 느낄 것이고 교회에 와서는 세상의 갈등을 느낄 것입니다. 그는 죄와 싸우려고 시도도 하지 않지만 싸우려해도 그는 번번이 질 것입니다. 그런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그 신앙 생활이 매우 성공하면 그는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즉, 마음에는 없는 그럴듯한 종교생활로 치장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실패하면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도 다니지 않고 다 집어치우고 세상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든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설령 그러한 심판이 최후의 심판인 죽음 이후로 연기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상세계에서의 삶은 불우하기 짝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행복한 가정한 가정을 떠나 거리에서 유리하다가 객사하는 그런 신세가 될 것입니다. 이제껏 육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오셨다면 지금 저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을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되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의 교회 생활은 여러분에게 어떤 희망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두 번째 시간의 관심사는 “그렇다면 정말 회심치 못한 자들을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가 이처럼 준엄하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변화되어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비록 미숙할지라도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역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답을 주는데 이틀에 걸쳐서 진행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먼저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의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먼저 그 말씀을 경험하는 사람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서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들어가도록 만드시는지 그 방법을 여기에서 보게되는데 바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공통된 특징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거의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매우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경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다가 갑자기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 기도하는 중의 느낌 등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예화)신학교 가기 전 총각 집사 때, 아이들을 데리고 부흥회를 하는데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고 아이들을 기도시키는데 회심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초등 학교 2, 3학년 아이들이 마루바닥이 미끈미끈하도록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이 끝까지 울지 않습니다. 강퍅한 인간이 어른만이 아니라 어린아이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울었고 기도회가 끝난 후에 불러 확인하려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울은 이유를 물었더니 뜻밖에도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은 다 우는데 자기만 울지 않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심겨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 분위기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감정적인 경험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경험이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말미암은 경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적인 유아기에 오래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맛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늘 설교를 듣는 데에 산만하며, 신앙 서적은 거의 읽지 않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사랑하는 신앙 생활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부 후탁(먼지를 후 불고 탁치는) 교인입니다. 집사가 되었는데도 야고보서를 찾으려면 성경 전체를 다 뒤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도 행복하지 않고 그런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워하신 하나님도 행복하지 않으며 그 교회의 목사도 괴롭습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가 그 사람을 보고 괴롭지 않으면 그 교회의 목회자도 괴로운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 헌금을 하고 뭘 좀 한다고 다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조기 축구회에 커피 타 가지고 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 사람들은 영혼의 참된 변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한 가정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쓸모 없는 바퀴벌레 같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은 그러면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어제 설교에서 사랑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바퀴벌레 같다고 하면 그래도 혹시 자극을 받고 회개할까 하여, 오늘도 이렇게 모아 놓고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자식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병적인 유아기의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세계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쪽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선 개인의 경건 생활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성경의 맛을 알게 됩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내 노래 되도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변하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어머니 같으면 말씀을 사랑하고 삶의 모습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의 눈에 그 변화가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면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자식들이 엄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곗돈 적힌 장부를 들여다보며 전화 거는 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고 나니, 말씀을 보며 눈물 흘리는 어머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하시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일 때에는 성경을 읽기만 하면 수면제였는데 말입니다.
저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을 때에는 열심도 있고 기도도 하는데 성경은 어려웠습니다. 앞장을 읽고 뒷장을 읽으면 앞의 내용이 다시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대하소설은 다 읽어 이해하는데, 내가 그렇게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쨌든 성경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말씀 속에 깃들여 있는 연속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사랑스러워지고 말씀에 대해 사모함이 생깁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가면 제일 힘든 것이 설교 시간입니다. 그래서 견디고 참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것이 가장 큰 근심입니다. 졸음을 쫓으며 애를 쓰지만 개선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배를 사모하게 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어느 지체가 말씀의 은혜를 한참 받았을 때 교통 사고라도 났으면 말씀을 실컷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하며 말씀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할 말이 많아집니다. 전에는 기도 시간이 너무 길었으나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기도할 때에 연설하듯이 했는데 이제는 기도 속에 구구 절절한 눈물도 사연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어루만지셨다는 느낌이 확 듭니다. 기도에 있어서 그런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성품에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그에게 자꾸 영향을 미치니까 그의 성품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리컬하던 사람이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깍쟁이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성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대인기피증을 가진 사람들이 지체들과 어울리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 그런 성품을 닮아 가는데, 그 성품은 바로 그러한 신령한 변화의 통로를 통해서 주님께로 흘러 들어온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네 번째로 성장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갖게 됩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에 제일 부러운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었고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오고 나서 정말 부러운 사람은 자기보다 훨씬 더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아주 훌륭하게 가르쳐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나면 깊은 감동이 생기면서 빨리 집에 돌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고 싶은 그런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성장에 대항 관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자에 대한 관심이 생기니까 자연히 말씀의 배움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열망을 가지니까 갈증을 느끼고 말씀에 대한 왕성한 식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장하고 성장하니까 더 많은 식욕을 느끼고 다시 자랍니다. 그런 성장에 대한 강력한 관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기껏해야 불우이웃 돕기나 했는데,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자기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아가페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놀라운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예전에는 교회와도 뻣뻣하고 목사의 질문에도 무뚝뚝하던 사람들이 놀랍게 변해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돌덩어리 같은 얼굴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라도 행복해지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거룩해지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됩니다. 목표 자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결론은 천차만별의 차이 곧 어마어마한 차이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 더 든다면, 전에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의 기쁨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구역장 시키면...... 교회가 망하려면 무슨 일을 못합니까? 다 털어먹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책이 하나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하면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 내가 섬긴 일을 통해서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 내가 주님 앞에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고 봉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익한 도구가 되는 것,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로 옮아가고 나면 첫째는 교회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일 때에는 잘 해야 주일 예배, 그것도 설교 시간 직전에 고개 숙이고 들어오던 사람이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고 나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는 제품을 다 소개했습니다. 두 가지를 다 비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분명한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나의 이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이것이 자연적인 성장의 과정에서 어린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병든 상태의 어린 아이 상태가 해당되며,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징후들이 내게 해당되는 구나. 그런데 신령한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정반대로 정말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정말 내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령한 세계로 옮겨가는 사람이 되어야할 텐데 그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세계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제일 먼저 궁금한 것은 이 경험한다고 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자요’의 의미는 ‘페이러스’라는 희랍어인데 이것은 ‘페이라조’에서 온 것입니다. 이 ‘페이라조’는 ‘시험하다. 혹은 입증하다’ 그런 뜻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경관을 굉장히 멋진 나무로 장식한 것을 보았습니다. 보기에도 그러하고 만져봐도 나무가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는 관심으로 자세히 들여다보고 끝을 약간 벗겨 보았더니 플라스틱이었습니다. 이렇게 끝을 파서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페이라조’입니다. 불 붙여 보면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경험하다’의 의미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이해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냥 설렁설렁 스쳐 갑니다. 그런데 항상 머리에서만 돌고 마음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내려와야지 뭔가 뜨거워지기도 하고 변화되기도 하고 녹아지기도 하는데 계속해서 머리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이것은 페이라조가 안된 상태입니다. 입증이 안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말씀에 대해 많이 배우고 공부했더라도 이것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융합하는 반응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이 곧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진리의 말씀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확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서 쪼갠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4장 12절 을 외워서는 알지만은,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 자기를 어떻게 쪼개는지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페이라조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수없이 설교를 듣고 가끔 성경을 읽고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서 가끔 경건 서적도 읽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설교를 듣는 다고 합시다.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 와야 진정으로 여러분들을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세계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세계로 옮아가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회심의 역사가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동의가 되고 확실히 목사님 말씀대로 가슴으로 내려오는 마음의 작용들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내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 가지고 신앙 생활 한 것이 아니고 국어 책 가지고 신앙생활 한 것입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들이 명석하다면 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우리 책임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그 말씀을 성령님이 사용하신다는 전제하에서 이 말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 안에는 마음먹은 대로 뜀틀을 뛰듯이 오늘로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끝내고 내일부터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는 이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그 일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리한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에 머물러 있는 것은 결국 성령님이 나를 그렇게 회개하고 새롭게 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못된 것이 아닙니까?”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굉장히 고심했는데 어떤 분이 아주 기가 막힌 성경적인 비유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렇게 성경적인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회개를 경험하게 되고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핵심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케 하시는 주체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아무나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을 회개시킵니다.
옛날에 시골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쳐서 가져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마른 장작으로 만들기 위해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끼모양은 좀 달라도 통나무 자르는 것은 같습니다. 도끼를 세운 통나무에 대고 자릅니다. 어디에서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서양에서 자연스럽게 이치에 맞게 공통적으로 같아진 것입니다. 항상 ‘결’을 따라 자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원칙입니다. 특수한 경우에 하나님이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압도적인 경우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가 가슴 아파하고 회개할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원리가 생깁니다. 회개를 누가 하느냐 할 때, 회개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회개한 후에는 하나님이 회개시키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을 사용하신다라고 하는 전제 조건이 있고 나서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신령한 세계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또 들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신앙 생활하고 오늘 설교를 듣고 보니 내가 육신적인 상태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내가 확실히 시인은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설교도 들었고 성경도 읽었고 그리고 성령의 은혜도 체험했습니다. 병도 낫고 환상도 보고 아무튼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는데 왜 나는 신령한 세계로 못 올라갔습니까?” 여기에서 이제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육신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령한 세계로 옮긴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은, 전제 조건이 성령이 그 말씀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는,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 그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것은 이렇게 묻는 것과 똑 같습니다. 목사님, 이미 20세기에 들어서서 전 세계가 공해의 영향을 받는데 완전히 순수한 100%의 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면서 똥물과 수돗물이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면 기름 냄새가 나는 먹어서는 안돼는 오염된 지하수와 정수기의 물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물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두 물은 놀라운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교인이 금강산에서 사 왔다고 해서 생수 한 병을 사다 주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먹었던 생수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순도 높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의 혼탁함이 사라지고, “그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가질 것이며, 어두움을 헤매는 것 같은 모호하게 보였던 신앙 생활의 길이 확 드러나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그런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강원도 쪽의 길을 갈 때에는 안개등과 라이트를 켰는데도 계속 경종을 울리면서 가야할 만큼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다가 신기하게 고개를 넘으면 거짓말처럼 안개가 끝이 납니다. 맑은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물의 모습이 선명하고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도가 높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들려질수록 기독교 신앙의 개념과 진리들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기도가 안 되었는지, 왜 죄에 대해 계속 실패했는지, 구원의 확신에 대해 불확실했는데 이런 것들이 명쾌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그런 말씀의 세계가 다가올 때에는 엄청난 충격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조건은, 인간으로서 절대적인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최대한 순도 높은 말씀을 전하려 애써야 하고, 순도가 떨어질수록 영혼의 변화는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교회에 왔을 때에, 며칠 동안 혼란한 상태에서 헤맬 때에,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왜 타락했으며, 그래서 죄의 영향력이 어떠했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예수의 생명 안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가르쳐 주면 그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그것은 당연히 성경에 나온 말씀입니다.) 형제가 이렇게 괴로워할 때에 하나님이 형제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모두 진리이지만 지금은 충분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설교자는 요리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먹고 싶은 것을 요리해서 가져다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엑스레이를 찍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아무리 사랑하지만 엎드려 놓고 양복 고치듯이 배를 갈라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 말씀, 그 말씀을 설교한 그 설교가 성경 자체의 내용을 다시 잘 설명해 주어서 그렇게 그에게 영향을 미칠 때에 그 때에 그것을 성령이 사용하시면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먼저 갖추어야 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조셉 얼라인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 회심치 못한 자에게 주는 경고” 라는 글 속에서 회심하지 못한 죄인들에게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고 강력하게 선포되는 그 현장에서 그것을 듣는 것 말고는 희망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런 상태에서 그를 변화시켜서 옮기게 하는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데 그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시점에서 이런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설교 안 들으면 회심을 못하는가? ”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가, 책을 읽다가, 다양한 방법으로 회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설교를 들으며 회심하는 길이 가장 쉬운 길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혼자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아는 사람 있습니까? 한국 교회사에서 여기저기 선교사들의 보고에서 전설처럼 흘러 내려올 뿐이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터전에서 흔하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쉬운 방법을 활용할 수 없는 사람이 보다 더 어려운 방법을 통해서 그런 놀라운 복음 진리의 인식을 갖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서 신앙의 세계 속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혀 기독교라고 인정할 수 없는 이단들 중에서 이 성경을 자신들의 종교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새로운 경전을 만든 이단보다는 이것을 경전으로 삼은 이단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읽으면서 자기 스스로 그런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복음을 전해줬을 때에 에티오피아의 그 구스넷이 “깨닫느뇨?” 라는 질문에 이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깨닫겠느냐고 답합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말씀을 풀어 주었더니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그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고난받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다 듣고 알고 있었는데도 그들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와 시편에 기록된 글들을 가리키면서 풀어서 설명해 주셨을 때, 주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은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불붙지 않더냐”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이 은혜의 시대에 회심의 방편인 설교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는 그 메시지를 통해서 회심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신 것이 이 신약의 시대에 일반적인 회심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조건이 가능한 한 순수한 그런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가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성령님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옮기시는데 그렇게 옮기시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비유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비참한 비유는 그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떨어진 그 씨는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길가에 떨어진 종자와 가시나무 돌밭에 떨어진 종자 그리고 옥토에 떨어진 종자가 각각 다른 종자이기 때문에 하나는 말라 터지고 하나는 오르다가 눌려서 성장하지 못하고 하나는 삼십 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고 아예 땅에 뿌리도 내리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씨앗이었는데 길가에 떨어진 씨는 바람이 불어오니 날아가 버리고 새가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떨어진 것이나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뿌리를 잠깐 이라도 내릴 수 있었던 경우는 이해를 한 경우였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상태의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다녀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이 걸림이 되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니까 회심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겨 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교회에 올 때에는 끝나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오고, 한 번도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 보지도 않고, 성경이 관연 그러한가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 보지도 않는 그 사람에게, 그 영혼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어느 집회에서 집회가 끝나고 오려 하는데, 알지도 못하는 어느 형제가 찾아와서 저를 미워했었던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것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미워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인상이 좋지 않아서 저 얼굴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랴 하고 들었는데 첫 시간의 설교부터 자신을 비난한다고 느끼고 듣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저에게 복수가 안되어서 끝날 때까지 째려보리라고 생각하며 계속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 집회에서 중간쯤 앉은 탁월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노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려보던 중 말씀을 듣다가 이틀 째 저녁때부터 말씀이 흘러 들어와 와르르 무너졌다고 합니다.
호의적으로 저를 쳐다 볼 수 없으면 졸지 말고 차라리 노려보십시오. 그 같은 경험을 전도사 시절에도 서너 번 했습니다. 전도사님이 너무 미워서 예배 시간마다 노려보았는데 그러다가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 중 한 자매는 사모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순수하게 전파되어도, 결국 그것을 성령이 역사 하시기 위해서는 그것을 우리가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동반될 때에 그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며 우스개 소리와 예화만 생각이 나고 설교의 핵심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는 이해를 하려고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담겨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령한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가끔 자신의 영혼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사모함이 약간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변화 받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고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은 계속해서 증진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고, 나를 고치며, 나를 지도하고, 나를 훈련시키고, 나로 하여금 행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아주 확고한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신령한 은혜 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으로 보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리거나 음악 예배를 드리거나 찬양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님의 순순한 말씀을 들으면서 깊은 감화와 감명을 받아서 그런 놀라운 정서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오늘날 세 가지가 모두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으려는 회중들의 노력, 이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영혼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지금 죽어 가고 있는데 그 사람을 데려다가 예쁜 옷을 입히고 머리를 치장하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바르는 고운 화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병들어 가고 있는 그의 내면의 세계에 참다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생명이 그 속 사람에,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심겨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 무지로 가득찬 어두움의 세계 속에 찬란한 빛이 들어 와서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깨달아 아는 놀라운 분별력이 생깁니다.
죽은 자들이 모인 공동묘지와 같던 예배의 현장이 주님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눈물이 솟아오르고, 자신의 죄와 자신의 패역과 불순종을 후회하고 회개하는 아픔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놀라운 감동과 감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속 사람이 거의 죽은 것과 방불한 병적인 유아 상태에 있는 사람이 집사가 되고 시간이 흘러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 장로가 되고 하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옷만 수시로 갈아입는 것과 똑 같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계속해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그는 살아서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참고 기다리시면서 그의 변화를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동안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도 행복하지 않고, 그의 목회자는 더 괴롭고, 그의 가족들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계속해서 제공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 이 진리를 불쑥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금년에 이것 말고도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위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때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때일수록 소망을 주는 누군가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루고자 하는 소원도 참 많습니다. 축복을 기원해 주는 그런 집회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긴급동의입니다. 왜? 이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들을 금년에 소유한다할지라도 여러분들은 결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육적인 상태에 머물러서 여러분들은 거의 죽은 자와 방불한 가사 상태를 오랜 동안 면할 수가 없는데 몇 가지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잠시 몇 일은 행복하겠지만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병적인 유아 상태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 갈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 기회를 모두 흘려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았고 또 성령의 역사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그런 말씀이 들려질 때에도 마음을 다해서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야 되겠다는 것을 다짐하며 그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리챠드 백스터라는 목회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의 도리에 대해 가르쳐 주었더니 어느 농부가 와서 “목사님,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농부인데 나 같은 농부도 그것을 다 알아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 목사님이 “천국은 당신이 가기에는 너무 높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날의 신앙 생활의 가장 어려움은 모든 것을 간단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만사형통, 운수대통하고 모든 것이 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열심히 봉사하면 주님이 축복을 물 붓듯 부어주시고, 십일조 내기만 하면 창고가 터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가난하고 서글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몸에 핏줄을 잇고 살과 살을 잇는 이 일도 수십 년을 공부해서 칼 들고 사람 하나 수술하는 것인데, 인간의 미세하고 복잡한 이 영혼을 병든 상태에서 고치고자 하는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다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었으면 그 길을 따라서 가십시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커다란 죄는 ‘무지’입니다.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으며, 자기를 참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복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 속에서 생명을 얻었습니까?. 무지는 거의 악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교회 문밖을 나가기만 하면 주기적으로 밀어닥치는 수많은 난제들이 여러분들 앞에 밀어닥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저나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금년 한 해에 그런 무겁고 어려운 짐을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의 변화가 없는 행복은 노예의 상태에서 잠시 맛보는 휴식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넓은 은혜의 세계,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지금 누리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수많은 축복들을 주께서 예비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힘들이 우리에게 쏟아 부어집니다.
이유는 경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말씀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자신이 그대로 전수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집간 딸이 똑 바로 쓰지도 못한 비뚤어진 글씨로 빽빽하게 써서 날아온 친정어머니의 대여섯장 되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단지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이 눈물 젖은 마음이 그 속에서 전수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달지 않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성경을 듣는 그 시간이 인내만을 필요로 하는 시간입니까? 아주 분명하게 말하지만, 여러분들은 아직도 병적인 유아 상태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경험되었고 입증되었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거의 못 받았었습니다. 그 때에도 제가 설교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설교하면 제일 먼저 서가에 가서 설교 잘한 목사님의 설교 한 편 읽어보고 그것으로 뼈대를 잡고 글짓기를 해서 연설문을 만들어 놓고 열심히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은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나 자신에게는 그 말씀에 대한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말씀이 있는 설교 속에 들어가게 되니까 전에는 콘크리트와 같았던 말씀이 이제는 아주 우거진 숲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일년 후든 십년 후든 무생물이니 항상 같았습니다. 그런데 숲은 봄과 여름, 가을에 가면 다릅니다. 겨울에 가면 더 많이 다릅니다. 일년 후, 이년 후에 가면 역시 다릅니다. 똑같은 상태에 있는 숲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신학과 인격과 모든 것을 다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여 순도 높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평가나 호의 아니면 허불허에 매이지 아니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지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을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진리의 말씀 속으로 이해하며 들어가려고 하는 의지적이고 지성적인 노력 없이는 여러분들의 병적인 유아 상태에서 신령 은혜의 세계 속으로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기침 소리 같은 것도 나지 않습니다. 하다가 보니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들여 투자해서 이렇게 소리가 나지 않는 교회당을 일부러 만든 것입니다.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환경 자체가 듣기를 거절하는 여러분들 속에 말씀을 넣어 줄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 누구도 방해받지 않도록 만들어야할 의무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아이들 데리고 오면 유아실로 보냅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 화를 내고 이런 교회가 있느냐며 나갔지만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소중하지만 여기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배려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하고 들으며 이해하려고 해야하며, 한 번 들어서 모르면 두 세 번 다섯 번까지라도, 그래도 모르면 물으면서라도 깨달으려고 해야 합니다. 들리면 들리고 말면 말고 하는 식으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에 변화의 기회를 수 없이 놓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시지 않은 책임은 하나님이 지실 것이며 참되고 순수한 진리를 선포하지 않은 책임은 설교자가 질 것입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은 책임은 여러분들이 무슨 핑계도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지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놀면서, 무슨 취미 생활하는 것 같이 신앙 생활하면서 여러분들이 거룩한 성도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며, 여러분들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답답하고 무기력하고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렸는지를 정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신앙 생활을 이어갈 때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하나님의 회심하지 못할 자들을 향한 준엄한 심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떠한 아름다운 결과도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 속에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의 위험함을 알고 진정으로 변화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기도 중에 하나가 진리의 빛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온전히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어두운 눈을 밝혀 진리를 보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내 모습을 비추어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까지 내 마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생은 농담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결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해지고 정직해 져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자꾸 숨기고 가식으로 하려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정직하게 듣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 받는 것보다 훨씬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빛 가운데서는 진실함! 이것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에 들어서면서 사경회에 무엇을 해야할지 미리 방향을 다 정했습니다. 12월말에는 고통을 생각해서 위로와 소망을 주고 싶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다가오니 바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정말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그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내가 이 땅에 살아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함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주님의 마음에 근심과 고통을 안겨 드리고 살아 있는 그 자체가 주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외는 남기는 것이 없는 이러한 상태에, 내가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내게 필요한 것은 금이나 취직자리나 사업의 번영도 아닙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고쳐 주시옵소서. 주님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신령한 세계 거기로 하나님께서 나를 옮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성령을 보내 주시고 그리고 나에게 순수하고 깨끗한 진리를 접하게 도와주시고 나에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순전한 마음을 주셔서 나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제 영혼이 변화될 수 없다면 차라리 더 이상 저를 이 세상에 살게 하지 마시고 생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이 주님이 만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자녀가 기쁨으로 떡을 달라고 하면서 엄마를 부르며 손을 내미는데 그것을 떨구어 버릴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다운 변화, 사랑이 많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성품을 기대해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함이라. 주님은 오늘도 그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즐겁게 웃고 세속적인 즐거움 때문에 기뻐하던 때에는 여러분 혼자 웃었지만, 여러분들이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회개, 은혜를 경험할 때 이러한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신령한 은혜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 살을 찢어 너에게 피 발라준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서 어디에 가든지 그 분과 동행하면서 나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어서 행복하신 그런 관계가 되어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신령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여러분들을 이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초청합니다. 여러분이 응답하고 오랫동안 병들었던 유아기적인 세계와는 결별하고 이 신령한 세계 속에 발을 들여 놓는 복된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우리의 의(義) 그리스도를 경험함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3)
병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변하여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여야 한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는 설명을 못 드렸지만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뭔가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경험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고 또 하나는 그 경험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경험하게 하시며, 그 경험하게 하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어제 우리들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그리고 두 번째는 최대한 순도 높은 복음진리의 말씀,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집중된 이해가 필요하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하시므로 숙명처럼 여겨왔던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옮기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역사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며, 우리는 단지 애써서 구할 뿐이며, 그리고 두 번째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여러분 자신에게 전적으로 달린 것인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집중된 노력을 통해서 그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이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역사 할 때 여러분들이 놀랍게도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말씀인데 도대체 그 순수한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따라서 설교하려고 하는 그 구절은 한 글자입니다. “의” 그것을 오늘 여러분의 가슴에 잘 새겨 들어야합니다.
우선 이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다할 때 이 “의”의 말씀이란 무슨 뜻이냐? “의”의 관한 말씀 또는 “의”에 대한 말씀, “의”의 말씀이라고 그랬습니다. 소유격입니다. 그래서 희랍어 성경에 보면은 “한 의의 한 말씀”이라고 되어있는데 어쨌든 “의”의 말씀입니다. “의”에 관한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의”가 무엇이냐? 이 “의”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의”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또 하나 따라서 “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하나 “의”의 말씀은 의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뒤에 것은 너무 기니까 오늘 하면 12시까지 해도 다 못합니다. 그래서 이건 내일로 넘어가고 오늘은 그 “의”의에 말씀인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경험하는 것이다 라고 오늘 결론을 내리고 이제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먼저 결론부터 내겠습니다. 육적인 병적으로 오래되는 유아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옮아가는(?) 비결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경험함으로써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에 나와있는 이 “의”라고 하는 말씀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가 됐느냐 하는 것이죠.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의”에 관한 사상을 누벼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성경 신・구약을 읽으면서 “의”라고 하는 단어를 수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어는 한 페이지도 이 “의”라는 단어를 찾지 않고는 성경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성경 신・구약에 전체적으로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이 “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의”의 개념은 굉장히 방대합니다. 아마 평생을 이 “의”에 대해서 연구해도 아마 모자라다 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렇게 풍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그 모든 장황한 논의들을 모두다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의”라고 하는 것, “의”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의”에 대한 사상에 큰 줄기를 우리들이 잡아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 “의”에 관한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참 뭐라고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의”라고 생각하는 것, 성경에 보면 의롭다, 의롭고 의로운 사람, 의로운 행동, 의로운 백성, 의로운 나라, 의롭지 못함으로 또 반대로 불의 하다, 어 정의롭다, 공의롭다. 하여튼 그 비슷한말과 반대말이 수 없이 많이 퍼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전체에 이 구원사상을 말해주는 커다란 그 한 물줄기가 이 “의”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흔히 “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일까요? 의롭다 하면 어떻습니까? 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죠? 그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들은 모두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 어떤 불의가 있거나 악을 행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 의로운 사람은 항상 찹니다. 차갑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은 까다롭습니다. 따지기 좋아하고 항상 칼을 들고 있는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런 개념이 성경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한 그 사상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의”의 사상하고는 많은 다른 생각이에요. 다른 생각이고,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그런 식으로 성경의 “의”를 생각하는 것은 한 30%정도만 맞고 70%정도는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야될 생각들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고를 가지고 성경의 “의”를 드려다 보면은 복음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냐? 그러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뭘 이야기해야 되냐면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게되는 약속을 이야기 해야됩니다.
사실 이 “의”, “의롭다”라는 말은 인간이 타락하면서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죄와 불순종 ,불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것과 상대적인 말로써 “의”라는 개념이 들어옵니다.
“노아는 의인이라 당대에 의인이라 완전한자”라고 했을 때 그 “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서 이야기하는 “의”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대로 정의로운 사람이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라 진실한 사람이라 이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노아를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배경에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불의한 세상이 있었기 때문에 노아에 대해서 불의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죄시대에는 “의”와 “불의”를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불의” 자체가 그 기원이 악이고 죄니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 모세 이전에도 “의”에 대한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알아야될 것은 성경에서 의인이라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짜 절대적인 의인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나중 문제입니다. 하여튼 “의”에 대한 생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성경에서 “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막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은 모세 이후에 일입니다.
모세 시대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은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약속을 맺고, 양자가 서로 어떤 의무를 다하기로 조약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약속을 주시냐 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심이라” 그 다음으로 성경전체에 주목해야 할만한 구절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유명한 성경 66권의 요절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함이라”라고 하는 이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에 약속도 사실은 아까 말씀드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정도로 그렇게 이게 큰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그렇게 큰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타락한 가운데 특별히 한 민족을 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위로 올라가면 한 가족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그죠? 그렇게 해서 이제 하나님이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면은 당신 자신을 알게 하셔야 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늘에 있는 별과 달 해를 보면서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가 들어온 후에는 자연계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 특별히 그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을 보고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공상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려야할 경배를 피조물에게 돌리고 심지어는 그 우상자체를 섬기고 심지어는 천사를 섬기고 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부채질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 자신을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택하시는 한사람이 아브라함이요 그래서 택한 한 가정이 그 이후 이삭과 야곱과 이후로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가정이요 그것들이 한 무리가 되어서 민족을 이루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택된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을 택하셔서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고 하는 약속을 주시는데 그러나 그것은 거저 주시는 약속이 아니라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자기의 백성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시며 은총을 베푸시고 축복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광스러운 민족들로 보호해 주셔야할 책임을 하나님이 스스로 지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니 이것은 양자 중에 누군가가 이 약속을 어기면 죽을 것이라고 하는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이시므로 죽음을 보실 수 없는 분이신데도 주님께서 그렇게 언약을 맺으신 것은 결국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당신 자신이 그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약속하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기까지 이를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그에게 순종하는 백성들이 되겠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죽음의 저주가 임하여도 우리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맹세의 서약이 바로 피를 뿌리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서 “의”의 개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의”의 개념이
그 “의”가 뭐냐 하면은 언약을 맺은 두 당사자가 이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바를 지키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기만 하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의로우신 분이 되는 것입니까? 약속대로 변경 없이 그들이 순종하기만 하면,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친 백성으로 여기고 축복하시고 보호해주시기만 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러면 “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셨을 때 ‘이젠 너는 나와 특별한 관계이니 이 법을 지켜라’ 하고 주신 그 율법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예체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 이것을 지키면 그들이 의로운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은 그것을 지키셨는데 인간이 적극적으로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했습니다.여러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언약을 받은 후 이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후 율법을 받고 신정국가의 백성이 된 이래로 광야의 생활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적극적으로 범죄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시켰는지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출애굽기와 민수기 그리고 모세의 회고적인 설교인 신명기 등등은 거기까지만 하더라도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역사만 있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악하게 범죄하고 하나님 없는 백성처럼 살고자 했고 적극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주님이 주신 율법들을 깨뜨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려고 했는지 여러분들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의 역사는 그 후로도 계속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한줄기 별빛처럼 영롱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소수가 나타나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를 말하며 죽어간 소수가 있었지만 항상 하나님을 거스르고 범죄하고 언약을 파기한 사람들은 대부분이었고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연대적인 책임을 면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제는 하나님이 그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당신에게 도전하여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이상 하나님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정한대로 그들을 모두 죽이시고 형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를 다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아래, 진노아래 놓여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려고 하니까 하나님에게는 의로우신 성품 말고 또 한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사랑의 성품이었습니다. “의”는 “의”는 잘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지만 범죄한 사람들에게는 형벌을 가하는 공정한 판결이 “의”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 이 두 가지 사이에 조화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느 한 사랑의 성품이 의로운 성품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의”대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대로 만족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안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의 재수립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진 언약을 내버려두셔도 되는데 그러면 인간에게는 비참한 죽음과 멸망,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밖에는 그들에게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의 성품이 그들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기회를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하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거기서 푸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는 했지만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죄를 저질렀지만 그러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해봐야 자기가 저지를 그 죄의 대가를 책임지고 형벌을 받아서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인간의 그 죄로 말미암아 훼손된 그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그 죄를 짓고 심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두 가지 효과밖에는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그를 향해 가지셨던 진노의 불을 끄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직까지도 가망성이 남아있는 인간들에게 범죄한 사람이 어떻게 비참하게 죽는지를 보여주심으로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살아있는 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산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은 죽어가면서 그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교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결국은 죄는 지을 능력은 있는데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결국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 것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었습니다. 자기의 모양을 따라서 자신의 이 영혼의 형상을 인간 속에 부어주심으로 당신과 교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수많은 피조물 중에 하나로 생각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창조 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창조하는 가운데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모두 만드시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손으로 흙을 빚으셔서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당신의 형상을 집어넣으시므로 그를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는 흙에서 취하여졌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흙일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피조물 속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들과 동기생이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피조물이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요, 주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모두 죄의 형벌에 의해서 쓸어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이 시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또 다른 성품이 있었으니 그들을 향한 창조하신 아버지로서의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아버지가 사실은 우리들이 이 유교적 가부장제 하에서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합친 것 같은 그러한 자애로움이 깃 들어 있는 아버지랍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시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죄 없는 상태에서 범죄하므로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율법을 깨뜨리므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죄없는 두 번째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 없는 순결한 몸으로써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향해 쏟아 부으실 진노를 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방법으로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만들어 내놓은 죽음에 이르는 형벌가운데 가장 악랄한 방법인 십자가에 형벌을 채택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아주 여러분들이 더 생생하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 위에 엎어놓고 도끼로 온몸을 내려 쪼개시는 것과 똑같은 형별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그 흔적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 그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다시 오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지만은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동안에는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여러분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십자가의 그 형벌에 잔혹성에서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거나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무에 매달려 죽는 자는 구약시대부터 저주받은 자로 지칭되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그 죽음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주님이 생생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타우형 십자가였습니다. 타우는 히브리어의 ‘T'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세로목을 새우고 그리고 가로목에 죄수를 매달고 손에다가 못을 박고 그리고 높이 끌어올려서 털컥 끼우는 그런 형태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살이 찢어지면서 서서히 몸이 흘러내리는데 이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최고의 고통을 맛보게 하고 결국에는 그 고통 속에서 최후에 죽게 한다라는 사건입니다. 그 이유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것 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내려온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부요하게 살다가 갑자기 가난해져도 견디기 힘들어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상에서 하나님 자신이셨던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와 결핍으로 가득 찬 어두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 취급을 받으시면서 긍핍 속에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사람대접 받지 못하시면서 그렇게 인간의 시절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신 백성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전 생애가 고난이었습니다만은 그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죽음의 형벌을 당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그 손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못박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죄인들이요,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엄밀하게 말하면 당신 자신이 그 아들을 나무 위에 놓고 말하자면은 도끼로 그 몸을 쪼개듯이 가혹한 형벌을 가하시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게 하셔서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형벌은 그분이 대신 당함으로 이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살과 뼈를 깎고 찢으시는 피 흘리시는 그 비참하게 저주받은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거기에서 사랑하는 아들조차도 십자가에 못박아, 사랑하는 아들일지라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에는 그 죄에 대한 진노를 차마 이기기 못해서 십자가에 못박으시는 하나님,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떨며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진실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거듭나지 못한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이런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심판이 연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관계에서 할 일을 다하지 못한 이 “의”의 결핍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대속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왜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시는가에 대해서 여러분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떻게 네 아버지냐 넌 누구냐?’ ‘저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네가 어떻게 내 자녀냐? 너는 나와 언약을 맺었고 그리고 너는 죄를 지어서 나와의 언약관계를 깨트렸고 율법도 지키지 않는 범죄한 자들이 되었거늘 네가 어떻게 감히 내 앞에 설 수 있느냐?’ 그때에 우리들이 하나님께 내밀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한 장본인이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만은 그러나 당신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내가 당신과 언약관계에서 이행하지 못한 그 의무를 대신 짊어지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불의 하지만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의”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아 그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었던 결정적으로 믿을 수 없었던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들은 “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라고 주신 그 율법들을 열심히 지키면 그것이 “의”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율법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선조들부터 모두 파기함으로 연대적으로 그 언약관계를 깨트리는 그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또 그 중에서 몇 가지를 훌륭하게 지켰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라고 하는 것은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혼돈이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무슨 혼돈인가 하면은 ‘그건 말도 안 된다 이겁니다. 왜? 아니 분명히 교리에 의하면은 인간이 아담과 하와 이래 타락한 이후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성은 부패하게 되어서 그래서 이제는 그 죄인으로서 무능하게 되었는데 그 인간을 향해서 율법의 요구를 다 지켜야지 의로운 백성이 되고 그렇게 해야지만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한다니 그게 말도 안 된다 지킬 수 도 없는걸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느냐’ 그것도 또 사실이에요 사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면서도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내가 주는 이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고 지키면 너희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사실은 실현이 불가능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우리에게 떠오르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놀리시는 것도 아니고 아니 어떻게 해서 지킬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심각하게 약속을 하시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이렇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을 지키면 너희들이 내 백성이 되고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지킬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방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방, 금방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질 때 함께 무엇이 주어지냐 하면은 제사제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사제도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은 구체적인 규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하면은 어기면 안되지 않습니까? 그 율법을 어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어기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벌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율법을 어겨서 죄를 지은 사람이 다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사란 말입니다. 제사, 율법을 지키려고 했는데 아까 여러분들이 의문을 제기했던 이 내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으로 인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혹은 최선을 아예 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하여튼 어떤 경우든지 간에 하여튼 그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한가지 죄는 용서받을 수 가 없었습니다. 고의적으로 지은 죄, 그건 용서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순도 높은 삶을 요구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고의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는데도 인간 자체 속에 내재하는 연약함을 인해서 죄를 짓게 되었을 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제사를 드리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내가 어겨서 깨뜨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는 그걸 지키면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는 약속을 이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데 내가 벌써 이 약속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너질텐데 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어떻게 하는가 하면 자기 지은 죄를 고백하며 자기가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이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손을 얹고 제사장이 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실하게 참회하는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과 약속관계를 깨뜨린, 그 율법을 어긴 범죄를 짐승에게 옮아가게 하고 그리고 죄 없는 짐승이 바로 자기자신이 당하여야할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거기에서 죽임을 당하면서 콱 피가 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그 하얀 양이 피를 흘리면서 비참하게 그야말로 진짜 저주를 받아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가죽이 벗겨지고 그 내장이 파헤쳐지면서 막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연기가 올라가고 죄인은 거기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시고 자기를 언약 관계 안에 지속적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은총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그들에게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오셔서 이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영원히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그리스도를 바라본 믿음이었습니다.
굳이 나사렛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 그 설교를 듣지 않아도 그것으로서 그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이유라 이 얘기입니다. 그 이유라 이 얘기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의”가 된다 이것입니다. ‘너는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고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가운데 살고 그리고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너, 네 위에는 죄가 있고 그 죄의 위에는 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데 네가 어떻게 해서 내게 나아와서 지금 네가 나와 아직까지도 관계가 있고 그리고 네가 스스로 의로운 백성이라고 말할수 있느냐’ 그것에 대한 대답은 ‘우리는 범죄 하였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범죄에 대가를 치르시므로 우리는 값없이 의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셔야 합니다.’ 요구할 수 있는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죄에 대한 형벌을 다 치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대속의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는 회개이고 또 하나는 신앙입니다.
그 무엇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고 있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것을 보면서 그것을 보면서 진심으로 참회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입니다
왜 십자가 아래에서 참회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은 의로운 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분이었지만은 그러나 내가 지은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저렇게 비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 됐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아파하고 다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저렇게 돌아가시게 만들었던 죄 가운데 살지 않겠다고 돌이키는 그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회개 없이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흉내를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요구되고 있는 사실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믿음입니다. 믿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하면 ‘내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입니다’ 라는 사실을 믿은 신앙입니다. 은총에 대한 신앙, 죄에 대한 회개와 은총에 대한 신앙이 필요하다 이것입니다. 은총에 대한 신앙, 여기서 얘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단지 ‘내가 내년에 성공할걸, 사업이 잘 될 것을 믿습니다. 뭐 올해는 시집갈 것을 믿습니다’ 라는 그런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해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고한 신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그들에게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왜? 그것이 신앙의 중심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하라 이겁니다. 오늘날에 유행하는 이 신앙에 대한 개념은 전부다 쓰레기 신앙입니다. ‘아 역시 믿으니까 되더라, 아 복권하나 사놓고 그냥 믿었더니 되더라’ 그런 믿음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 즉, ‘나는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의가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심으로 전적인 하나님 은총으로 내가 주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 이것이 신앙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와 은총에 대한 신앙 이 두 가지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을 경험한다 라고 하는 의미인데 여기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죄인이 구원을 얻는 길을 여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뭐냐하면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어린아이의 상태” 이것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또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냐 그렇게 말할 때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러분에게 이런 혼란이 또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럼 도대체 지금 쭉 설교한 것을 보면은 결국은 이게 ‘그리스도 예수를 왜 믿어야 하고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여야지만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그것인데 그걸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적인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그런다면 논리적으로 이 사람들이 구원을 못 받았다 라고 봐야되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사람들이 모두 이 회심이라고 하는 사건을 이제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게 사람에 따라서 그 깊이와 그 나타나는 형태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듭나는 그 순간에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뚜렷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이런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 사건 앞에서 최초로 경험하면서 나는 진짜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깊은 회심을 경험하면서 그 당시에 거듭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특히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엔 말입니다. 언제 내가 거듭났는지도 모르는데 거듭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강력한 회심의 경험 하나만을 가지고 만약에 그 사람의 그 구원받은 유무를 판단한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러면은 그 어려서부터 이 신앙의 익숙해져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뭐냐하면 항상 그 양자를 양쪽 극단을 피해야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한쪽에서 무엇을 얘기하는가 하면은 ‘강력한 회심을 경험해서 언제 그런 회심을 경험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구원을 신뢰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경험 제일론자파에요 이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하나는 뭐냐하면은 회심의 필요성은 거의 부인하고 그냥 이렇게 교회 속에서 그런 회심이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 속에 와서 저항하지 않고 그 분위기 속에서 계속 살면 그는 저절로 참된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이런 사상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회심을 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렇다면 그런 강력한 회심이 없는 사람의 구원 여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것은 뭐냐하면은 결국은 뭐냐하면은 그것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면은 나무가 살아있는지를 볼 때에 굳이 뿌리를 파서 뿌리가 촉촉이 젖어있고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산 나무와 죽은 나무는 확인이 됩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은 뿌리를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이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나고 구원받은 영혼의 결정적인 특징은 뭐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인격을 느끼는 것입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강력한 이런 회심의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만약에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그리고 생리적으로(?) 죄에 대한 강력한 종교적인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의롭게 사는데 말하자면 영혼의 참된 만족을 느끼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영혼 속에 오셔서 만지시면서 지각할 수 있도록 자기를 대신해서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으면 그는 그런 강력한 회심의 경험을 날짜를 정확히 댈 수 없어도 그는 구원받은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문이 풀렸죠.
그래도 의문이 또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그러면은 ‘나는 전자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내가 진짜 주님 사랑하나. 그리고 죽어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데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뚜렷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해 본적이 없다’
여러분 자신이 받았다고 느끼는 그 구원이 가짜일 수 있다라고 하는 것과 가짜일 수 있다라고 하는 것과 또 하나의 가능성은 뭐냐하면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긴 되었는데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들은 그 복음이 이렇게 선명하고 명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사실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라는 사실을 믿기는 믿었는데 그 진리 자체가 우리를 아주 근본적으로 깊은 충격과 변화를 주면서 우리를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가운데 구원을 얻게 한 경우입니다. 그 두 가지를 둘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어떻든 지간에 둘 다 모두 완전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병적으로 유아기적인 상태가 오래 계속 된 그리스도인들은, 오래 계속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아까 말씀드린 후자의 경우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설령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강력하게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할지라도 그 후에 죄 가운데 살아간 날들이 너무나 많아서 처음에 가슴에 새겨졌던 선명한 구원의 확신과 복음의 진리가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주장하는 그런 것들로부터 많이 멀어져서 그 복음 진리로부터 이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래된 병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하던지, 어떠하던지 여기서 우리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상태, 어떻게 된 것이던지 간에 하여튼 병적으로 오래도록, 오래도록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그리스도인들로 변화되는 중요한 관건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이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 속에서도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강력한 체험이 그를 신령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십자가 사건의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실 수 가 있겠죠? 안 믿으면 이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정상적인 경우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사건의 경험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 구원은 일회적입니까? 아니면 계속 해서 반복되는 체험입니까? 구원은 일회적이지만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은 일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또 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부인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제일 이상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디모데서를 쓸 때 그는 이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이었습니다. 옥 속에 있었습니다. 뭐라고 회상합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함이로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로라” 그는 사도로서 혁혁한 선교적인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데 괄목할만한 고백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가운데 채우노라” 그런 고백을 계속 남겼다고 하는 이유는 결국 뭐냐하면 이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단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복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굉장히 중요한 그저께서부터 계속된 중요한 질문,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육신에 머물러 있는 병적인 어린아이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육신에 속한 나쁜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이라 이것입니다. 그게 여기에서 “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병적인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의의 말씀, 곧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증언, 십자가 사건의 증언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체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교회 처음 등록하고 왔을 때, 우리 교회에서 무엇을 제일 먼저 배웁니까? ‘십자가를 경험하라를’ 제일 먼저 배우죠. 이게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맞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성경공부가 그리고 그 설교가 말하자면은 오랫동안 육신적인 상태에 매여서 병적인 유아기를 거쳤던 그리스도인들을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옮기게 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나 주기도문 이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적인 유아기 상태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체험의 영역에서 말하자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결정적인 체험을 결핍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병적인 유아기 상태가 오래 계속되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신앙의 체험이 있을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까?, 없다고 그랬습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뭐 기도해 주니까 응답을 받은 경험이 있을 수가 있고 예배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험이 있을 수도 있고 막 흐느끼면서 기도한 경험이 있을 수가 있고 또 어느 순간에 뜬금없이 확 솟아나서 주님을 위해서 살았으면 하고 신학교 입학원서 들고 왔다갔다하는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교회 건축에 집을 팔아? 하는 그런 결단의 경험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집 팔아 바친 사람이 모두 육적인 그리스도인 이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육적인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수없이 많이 봤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거의 재산의 반 이상을 드렸는데 나는 목회자의 양심으로 그 사람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그 모두 거의가 이 십자가의 경험에 비하면 모두 쓰레기와 같은 경험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대부분의 경험이라 이것입니다. 다 쓰레기와 같이 하잘 것 없는 경험이라는 겁니다. 그 자체만 보면은 가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말하려고 하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 십자가에 대한 이 경험에 비하면 이것은 하찮은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 앉아있죠? 저 위에도 앉아 계시군요. 여러분 유아실에도 있죠.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을 제가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신앙의 세계에선 내가 한가닥하는데...’ 그렇죠? 여기 와서 이 장시간의 설교를 들을 정도면 그런 정도의 자부심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는 것입니다. 그렇죠? 양심이 있으니까 아멘을 못하는군요.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부하게 만드는 그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다고 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 ‘뭐 우리 딸 시집 보낼 때도 응답 받고 보냈고 아 우리 아들 사업할 때도 응답해 주셨고 우리 애기 아빠 허리 디스크도 기도로 나았고’ 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많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전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아니라 이것입니다. 어리둥절하죠?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병적인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를 그럼 다시 한번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 네 가지를 가지고 내가 다시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뭔가를 본 것은 내가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경험한 것도 인정을 하고 그리고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통해서 경험한 거라는 것도 제가 충분히 인정을 해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아기 상태가 왜 그렇게 오래 계속됩니까? 왜 그렇게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실패하는 때가 압도적으로 많습니까? 왜 거의 성공 못하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체험은 많은데 그런데 그건 모두 하나님이 해주신 어떤 일에 대한 체험이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까?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주 찬송하리-
거룩하신 하나님 주 송축하리
이 찬송이 가슴에 다가옵니까? 정말 주님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까? 그분을 만져보길 원합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경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야 너 아버지 있니? 아버지 진짜 네 아버지 맞니?’ ‘그래, 임마 이 안경 우리 아빠가 사줬고, 이 리모콘도 우리 아빠가 사줬고 이 찬송가도 우리 아빠가 돈줬고 이 손수건 이거 이거 다 줬어’ ‘니네 아버지 뭐하시는데?’ ‘뭐한다고 그러더라. 네 아버지 이름 뭔데? 성은 나하고 같은데’ ‘너 아버지 성격은 어떠시니?’ ‘나 몰라 돈만 온라인으로 받았을 뿐이지’
그건 아버지를 아는 아들이 아닙니다. 겨우 통장에 들어오는 온라인을 가지고 김 아무개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게 신앙입니까? 그게 진짜 신령한 신앙이냐는 것입니까 그래 그런 식의 경험을 수없이 했다고 칩시다. 그런 경험 따위에 의해서 붙잡히는 신앙이 오죽한 신앙이겠어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죄에 대해서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적인 유아기 상태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예수, 예수 믿은 것은 받은 증거 많다는 건 분명한데 그 수많은 그 증거와 경험이 오늘 나를 견고하게 세워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혀 신령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신령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진리를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목사님 뭐 그렇게 복잡합니까?’ 어 자기가 돌인 생각은 안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자체가 쌓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절대 안됩니다.
그런 증거로 말하자면 할렐루야 기도원에 있는 사람들 증거 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증거가 많았으면 매독이 올랐는데 그게 성령의 불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결국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결국은 말이죠 그 체험이 예수를 못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그 체험이 거꾸로 예수를 못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주님 이외의 체험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설교자체가 도의 초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단 한번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래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수많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처음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것도 없습니다. 그래요 처음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런 경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경험, 그런 다양한 경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여러분들은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무른 기간이 오래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신령한 사람으로 나아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출석하는 생활이 몸에 틀이 잡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간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교회 문화에 익숙해져가고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져가고 기독교의 호의적인 태도가 되어져간다는 것이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해서, 결정적인 증거는 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없는데 그 죄에 대해서 지는 그것이 어떤 특정한 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아 정말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하나님이 정말 이런 분이셨구나 아 정말 내가 간절히 알기 원하는 것은 주님과의 더 깊은 교제 속으로 그분의 성품, 그분의 은혜의 세계,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성품의 비밀들 속에 내가 잠기고 싶다’라고 하는 욕망이 없쟎아요. 주님의 아름다우심, 주님과의 교제의 달콤함이 없쟎아요 그리고 언제나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낯설쟎아요? 그렇죠? 그게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지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냐 이겁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경험 없는 그리스도인,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정직하고 분명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될 때 단번에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연약한 그리스도인인데 그 유아기 상태에서 벗어나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나는 지고만 있는데 저 처음 시작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이기면서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처럼 뭐 기도해서 복권 당첨되고 기도해서 아들, 딸 시집 장가 보내고 무슨 무너진 사업 일으킨 수많은 경험들은 아직 좀 부족하지만은 왜? 이게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됐으니까 어떻게 그 수많은 사연 있는 여러분들하고 같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여러분보다 더 또렷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감격할 줄 모르는 주님 자신의 성품에 대한 앎이 그들에겐 있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은혜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다 깊은 말씀의 세계 속으로 계속해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지금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딛고 서있던 밑바닥을 흔든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전하는 나를 미워하면 여러분들의 신앙의 반석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의 상태에 빛이 비추죠?
그럼 오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특별히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도 어저께 말씀드린 것과 같은 꼭 같은 공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우 굉장히 간단하구나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나는 뭐 굉장히 장기간에 수업을 거쳐야 되는지 알았더니 간단하구나. 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면 되는구나. 오늘밤에 경험하고 가야지’ 그런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어저께 말씀드린 것과 꼭 같은 세 가지 요소가 그대로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가 아닌 것을 들으면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굉장히 위험하거나 불완전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그리고 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에 선포가 필요합니다. 첫째가 ...(?) 두 번째는 뭐냐하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이 나 자신의 그 탐구의 마음을 동반한 이해, 이해의 자세, 이해 그 자체가 필요하고 세 번째는 이러한 관계 위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 체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거참 신기합니다. 만약에 역사에 일어난 어떤 다른 사건을 이렇게 2000년이 넘도록 울궈 먹었으면 이미 거덜이 났을거에요 -> 계속 사용했으면 이미 끝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긋지긋할 것입니다. 그렇죠? 지긋지긋한데 지금도 계속해서 이것을 설교해도 사람들이 죽어있는 상태의 사람들 아니고는 이것을 전혀 이젠 지루한 설교의 제목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하면 이렇게 설교하는데도 누군가가 이 선포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집중된 이해력을 통해서 2000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을 지금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는 그때에 너무 신비로 왔던 경험이 이 십자가 경험이었습니다.
-어느날 그 복음을 들으면서 그 회개를 하는데 말이죠 그 갓난아기서부터 교회 다니다가 중학교2학년까지 그만두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시 들어왔는데 그러다가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하고 경험하면서도 내가 이해 안간 것이 그거에요. 예수님이 내가 이렇게 운다고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렇게 울까? 그리고 이상하다.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걸 내가 보기를 했나, 그 십자가를 만져보기를 했나 더군다나 그 사건은 이미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때 그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라고 하는 그 복음의 메시지가 들려올 때 그 지금 내 눈앞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살을 찢으시고 피 흘리시는 것 같이 가슴이 아픈 거예요.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내가 못하고 망치를 든 것입니다. 내가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우리의 죄와 우리의 형벌 받을 불순종을 인해서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2000년 전인데 선명한 복음의 선포와 거기에 임재 하시는 성령과 그 복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역사 하셔서 이 사건을 지금 신앙의 영역 안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재연해 주시는 것입니다.. 재연해 주시는 것입니다. 재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이 십자가 사건에 관련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특징은 뭐냐 하면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거기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못 박혔고” 그 부분을 제가 한 10년 전에 희랍어 텍스트, 희랍어 성경을 보면서 어 막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희랍어 말로 ‘에스타우로타이’ 이 결국 뭐냐하면 그것은 영어로 말하자면 have crucified가 아니라 have been crucified 현재완료입니다. 십자가에 한번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인데 그 효력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현재완료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셨도다 라고 하는 그 동사도 ‘에르게이타이’라는 동사가 씌여졌는데 그것 역시 현재완료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있었는데 그 부활하신 사실이 화자인 오늘 말하고 있는 나에게 지금 현재적으로 그 경험이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 속에 이 십자가의 사건이 그 당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못 봤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자신이 이 신앙의 영역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상기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재연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난주간에 한번에 나타나는 것으로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오늘날같이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안 들어서는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적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서 신약성경에서 이 십자가라고 하는 주제가 갖는 압도적인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압도적 성격에 대해서 복음서 전체의 약 7분의 1이, 7분의 1이 삼 년 동안에 관한 기록인데 어 천체가 3년 동안의 기록인데 7분의 1이 단 삼일 동안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과, 그리고 부활하신 때까지의 일어날 일들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오늘 그래서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결정적인 체험 없이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에 대한 숙명적인 매임 없이 그는 복음의 증언을 하는 증인이라 말할 수 가 없다 이것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적으로 계속 경험되는 것...?
그런데 잘 보십시오. 이게 이제 소위 얘기하는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들이 성화 되어 가는 삶과 깊은 관련을 맺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이 우리에게 뭘 가져다 주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그 십자가 사건이 요구하고 있는 두 가지를 우리에게 다시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가 뭐냐하면 회개와 신앙을 다시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져다 줍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막 개판치면서 그런 말써서 미안합니다마는 어쨌든 뭐 형편없이 개차반 또 개가 나오네 하여튼 개는 참 안 좋아요. 하여튼 형편없이 하나님 앞에 면목없이 막 그 막 살아요 그렇게 막 살아요 ‘야 너 그렇게 살면 되냐’ 돌아서면서 ‘에이씨 되게 잘난척 하네’‘야 임마 순 나쁜놈이구나 너 교회다닌다는 놈이 이놈아 아 왜 그딴짓 하고 돌아다녀’
‘어이씨 저는 얼마나 잘나서’ 이 그 사람을 사람이 그를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야단을 맞고 책망을 들어도 회개할 수 없던 강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를 경험하면 그 마음이 물같이 녹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막 흉악하던 죄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주저앉으면서 막 우는 것입니다. 무엇에 우는 것입니까? 그 사랑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뭘 창출합니까? 회개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막 깊이 회개하고 나면 어떠한 신앙이 생깁니까?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아, 내가 이렇게 쓰레기 같이 살았기 때문에 회개하고 나 같은 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은총으로 나를 구원하셨구나 하는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회개와 신앙 이 두 가지가 거룩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두 날개짓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대 역사에서 거룩한 성인의 경지에 도달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날개를 가지고 거룩한 신앙의 세계로 날아올랐던 것입니다. 회개와 신앙 두 가지. 그래서 그 회개를 가지고 죄를 미워하는 삶을 살고 그 신앙을 가지고 오직 은총은 하나님께만 이라는 하나님 제일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사라졌다. 의의 증언에 대한 경험이 사라졌다’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들 속에 이러한 반복되는 회개와 신앙의 재충전의 경험이 고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제가 말하고 싶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자꾸 지적을 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지적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그래 여러분들이 ‘내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뇨 내 상태가 병적 어린아이 상태라뇨? 난 아닙니다. 난 수많은 경험들을 했습니다. 목사님보다도 더 다양한 경험들을 했습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의의 증언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것 같으며 여러분들 속에는 끊임없는 회개와 신앙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래 그렇게 많은 경험했는데 그게 여러분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반복을 가져다주던가요? 가져다 주더냐구요? 기적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바알브올의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면서 범죄 할 때 어디서 했습니까? 그 밤에 뭐 라이트가 있어야지만 범죄를 할 것 아닙니까? 그 라이트가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의 불기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원망하고 애굽에 돌아가겠다고 땡깡을 놀 때 무슨 힘으로 그렇게 땡깡을 놨어요? 만나먹고 힘낸 것입니다. 만나먹고 고기가 잇 사이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했는데 그 고기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셔서 메추라기가 기적적으로 날라 와서 무릎까지 쌓였습니다. 발목까지 쌓였어요. 그걸 어떻했습니까? 다 거둬들여서 육식을 포식했습니다. 그 기적의 고기를 먹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기적 중에 최고의 기적은 우리 밖에 있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기적이 없으면 밖에 있는 수많은 기적이 여러분들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켜서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 수 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방언을 하고 수많은 은사를 받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자연보호 하는 대신에 소나무 뿌리를 몇 개를 뽑았다고 할지라도 죽은 소나무만 불쌍할 뿐입니다. 진짜 신령한 것은 그런 기적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최고의 기적이고 신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뭐가 결핍되어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입니까?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분명하고 선명한 증언입니까? 그걸 접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껏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을 바람결처럼 스쳐보냈습니까? 그것보다 더 커다란 죄가 없습니다. 깊이 뉘우치고 이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겠노라는 결단을 내리고 돌아서기 전에는 여러분은 계속해서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왕국은 손해가 날것이며 주님은 여러분을 인해서 마음 고생할 것이며 교회에는 누가 될 것이요 결국은 여러분들은 아끼는 자 없이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명한 복음의 진리를 만천하에 울려 퍼지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의 진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오래된 병적이 유아상태에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면하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수 있도록 주님 앞에 간절히 구하고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그리스도에 관한 현재적 경험의 중요성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3)
병적으로 오래 계속되는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고 그들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또 하나는 의로운 삶을 말씀의 능력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전망하기를 어제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하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잠깐 살피다가 시간이 없어서 끝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라는 주제를 말씀드리지 않고는 이 히브리서 5장 13절을 절절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서 오늘 이 시간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현재적 경험의 중요성과 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현재적인 경험으로 반복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신령한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내일 저녁에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의 근원으로서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함으로서 이번 사경회 전체를 5장 13절로 채우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줄거리의 말씀으로 증거 했습니다. 여기서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는데, 우선 결론부터 내리기를 이 의는 첫째로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관계를 맺었고, 그것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파기되었고, 그래서 아무 희망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는 백성이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파기된 언약을 재수립하시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재수립하는 방법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불순종과 죄를 짊어지게 하심으로 징벌하게 하셔서 의로우신 자기의 성품을 만족시키시고, 우리는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의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의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뭔가 반응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의로 전가되기 위해서는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는데 하나는 회개요 또 하나는 신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그 분의 그 고난이 자신이 언약을 파기한 불순종 때문에 당한 고난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회개와, 자기의 이 구원이 자신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 그래서 이 회개와 신앙이 우리를 신령한 세계로 날아오르게 하는 두 날개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요”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인데, 성경을 보면 그것은 단회적인 경험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어야 할 경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사건에 대한 회고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회개와 신앙을 재무장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끝없이 사랑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어제 시간을 끝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적인 경험과 신령한 삶이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하고 들어갔어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끝났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일단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오랫동안 계속되어왔던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역에서 신령한 영역으로 성큼 옮아가게 하는지, 이 첫 번째 경험의 중요성을 말씀드린 후에, 두 번째로는 신령한 삶의 진보를 위해서 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반복적인 경험이 필요하고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신령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둘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의 많은 의문들이 풀리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성경에 나온 이런 저런 지식들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오래도록 집안이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라온 가정이기 때문에 저항 없이 기독교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예수를 안 믿어도 교회에서 결혼식하고 싶어하고 죽으면 교회 식으로 장례를 지내고 집안의 큰일이 있을 때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예배를 드리고 우상을 싫어하는 것-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가치의 체계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님으로서 우리 안에 와 계신 실제적인 영혼의 변화에 뒤따른 결과입니다.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뀌어진 가치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 희랍어로 ‘크리스토이’하는 말은 ‘호이’는 남성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어이고 ‘크리스토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A뒤에 그 말이 붙으면 ‘A를 열렬히 추종하는 추종자들’의 뜻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어거스틴’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을 ‘어거스티니안’, ‘바르트’의 학설을 따르는 사람을 ‘발티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론자’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된자’,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다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된 자들’의 의미가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갖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의 체계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껏 만나본 적도 없고 오랫동안 같이 살아본 적도 없는,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이 되어서, 그에게 예속된 사람으로서 그분 안에 있는 가치체계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인생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그런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뭔가 사건이 있지 않고는 일반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런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병적인 유아상태가 오래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전혀 구원받지 않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구원받았지만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 없이 구원받았을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 속에서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순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병적인 유아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넘어간다고 했는데, 이들이 이렇게 유아 상태에 있기 전에 불신자였다가 구원받은 것도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왜 그렇게 경험한 이 사람들이 유아 상태를 거쳐서 단번에 신령한 세계로 가버리지 왜 그런 것을 경험했는데도 여전히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우선 첫째는 구원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의 정도가 모든 사람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명하고 확실한 복음을 들어서 복음 전체의 체계를 샅샅이 알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말이 맞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끗하고 선명하고 총체적인 복음 선포를 풍부하게 들으면서 결단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속에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로 복음의 총체적인 내용을 경험하고 구원 얻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총체적인 복음을 듣지 않고 그 중에 간단한 한 두 가지 사실을 듣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성령님이 반드시 그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역사 하셔야 만 그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가지 요인이 더 추가되는데 그것은 거듭나는 즉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죄에 대해서 능히 항거하고 싸우며 살아갈 수 있는, 그리고 본성적으로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를 적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간직하기만 하면 능히 죄와 유혹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본성을 심으십니다. 그것이 중생한자, 거듭난 자에게 임하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 변화 자체가 혁명적인 변화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서 죄가 온전히 그의 인생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 지배의 세력이 철저히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사는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모든 죄의 지배가 파괴되어서 거의 무력화되고 거기에 새 생명의 질서가 세워지기는 했지만 우리 안에 부패한 경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라고 할 때 두 가지가 문제가 됩니다. 하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데서 오는 원죄의 죄책입니다. 원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모두 연대적으로 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적인 부패성입니다. 그런데 원죄의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인정해 주심으로서 완전히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죄에 대한 부패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생명의 능력과,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능력과 서로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 안에 살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한 성품-정욕,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 등-이 완전히 멸절되지 않고 남아 있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을 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그래서 신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수시로 변합니다. 은혜의 수단- 예배, 기도, 성경공부, 묵상-에 부지런히 참여하면서 하나님 자신을 구하면 계속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런 수단에 참여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개인의 경건이 거의 파괴되고 아무렇게나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성령의 충만함이 점점 고갈되기 시작하고, 이것이 고갈되는 것과 함께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죄의 우등한 지배 현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도다”할 때 사도 바울 자신이 그 전자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서 그 부패한 성품을 거의 누르고 신령한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하는 때는 정반대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거의 고갈되고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과 부패한 성품이 아주 우등하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우리를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한 성품에 대해서 절망하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는 법도 없습니다. 신자 안에는 성령 자신이 임재해 계시고 그분을 통해서 십자가의 능력을 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고 은혜의 수단에 잘 참여하면서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고 충만함으로 나아가면 능히 누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절망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조금만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은혜로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이 죄는 기승을 부리면서 고개를 드는데, 어떤 때는 정말 내가 구원받은 자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성령의 은혜는 사라지고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차서 우리의 삶 전체를 내 속에 있는 누군가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를 끌어가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후자의 상태로 계속 발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했는데 그 복음의 내용 전체를 이해 했느냐도 문제이고, 영적인 신령한 경험의 정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둘 다 문제가 별로 없어서 이상적인 상태로 주님을 영접해서 뭔가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끊임없이 죄에 지는 죄 죽임이 없는 삶을 계속 살게 되면 한두 번 정도 경험한 그리스도 예수의 경험에 대한 사건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그 삶을 장악하고 지배하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병적인 유아상태가 계속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과 신령한 삶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적인 유아 상태에서 오래 있을 때 그 병적인 유아상태를 청산하고 신령한 세계로 옮아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새로운 경험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경험은 구원받을 때 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의 반복일 수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옴으로서 병적인 유아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을 청산하고 신령한 세계로 첫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첫발을 들여놓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경험 때문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은 확실한데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이 워낙 부분적이었고, 그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이 있기는 있었는데 그래서 구원을 받았는데 그 십자가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그 깊은 복음의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이 워낙 희박했기 때문에, 거듭났지만 신령한 세계로 옮아가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새롭게 경험해야 합니다. 이때 근본적으로 어떤 회의가 드느냐면 ‘내가 정말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맞는가’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경험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란 것이 워낙 부분적이고 깊이가 얕은 것이었기 때문에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옮아가는 변복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한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 십자가를 경험하면서 얻은 지식이 워낙 풍성하고 워낙 풍부하고 복음의 내용을 워낙 깊이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전에 알았던 것은 안 것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은 우리를 병적 유아 상태에서 신령한 세계에 첫발을 딛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지만 당시 헬라 세계 속에 살았고 헬라의 학문을 달통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에 대한 열심을 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의 문헌, 당시 유대교의 관습은 물론이고 구약성경 자체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표준적인 유대인들은 성경을 무척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해서 아주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그 율법이, 그리고 선지서가, 시편이, 구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을 따라서 오셨는데, 모든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이 똑똑한 사도 바울의 눈에도 그리스도 예수가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는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조상들의 거룩한 종교를 훼방하는 자요 교훈을 어지럽히는 자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신성모독 하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괴수인 그리스도는 처형이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정신 못 차리는 추종분자들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면서 유대의 정통적인 신령한 종교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열심히 뛰어났기 때문에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체포영장이나 구속영장 같은 것을 청해서 다메섹에 있다는 그들의 본거지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생애에 잊혀질 수 없는 중요한 사건 하나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변화될 것을 기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신약성경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구약성경 속에서는 그리스도를 읽어낼 능력이 없을 정도로 눈이 유대교 쪽으로 먼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 그리스도 예수가 수없이 예언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의 종교는 내려오다 끝납니다. 구약종교의 핵심은 제사인데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이방나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니까 제사 자체가 중단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는 구약종교를 계승한 종교라기 보다는 구약종교의 전통을 옆으로 굽게 만든 이교화 된 구약종교입니다. 신약종교가 나오면서 구약종교의 맥을 이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시발점으로 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창출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고난받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는 가히 신적인 존재였고 왕과 같은 권세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 왕이라고 하는 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왕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왕권을 가진 정치적인 탁월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큰 나라를 정복하고 탁월한 통치를 할 수 있는데 다윗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의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인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고, 영적인 왕국을 건설하고, 대속을 하는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살던 모든 성도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되면서 급속히 그런 불신앙들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적인 배경이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때, 그리고 그 이전에는 헬라, 바사 , 메대,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서 바벨론과 같은 이민족의 계속되는 지배아래 놓여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가 간절하게 소망하던 메시아 사상과 그들이 간절히 메시아의 출현을 바라는 정치적인 상황이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희망하는 메시아를 그려내는데, 그것은 고난받고 우리대신 어린양처럼 죽어 가는 그 메시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영적인 왕국,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로마라는 이민족 지배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신들을 위해서 정치적인 지도자가 되어줄, 그러면서 패배를 모르는, 죽기는 죽지만 가히 신에 가까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속한다는 의미는 그 이민족의 고통에서 구해준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국과 같은 번성한 나라가 재건되고 수많은 나라가 다시 조공을 드려서 종주국이 되는 찬란한 꿈을 꾸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런 시대에 태어난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가 들어올 리 없는 것입니다. 구약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정말 강권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누가 증거 하는 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직접 만난 것입니다. 찬란한 빛-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며 그 앞에 엎드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말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이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면 어쩌겠다는 거요?”식의 말이 하나도 안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때 그 위엄과 영광과 권위 앞에 완전히 엎드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들이 못박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이고 바로 메시아이시며 그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 내가 교회를 핍박하는 이것이 바로 그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 한꺼번에 총체적으로 확 밀려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짧은 순간에 그 복음의 내용 전체를 환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목회를 하면서 진전되는 내용이 있지만 기본적인 골격을 거기에서 다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회개와 신앙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통쾌하게 금방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신 부활의 영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요소를 들라고 한다면 그가 성경 자체에 대해서 엄청나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지식의 골자가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시대의 잘못된 메시아 사상에 눈이 멀어서 그 골자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골자를 다 빼고 나머지 부분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니까 성경을 열심히 탐구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축하시고 싶으셨던 그 종교가 아니라 괴상한 종교가 하나 탄생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나라와 같이 성경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존경심을 가진 나라에서는 성경을 부인하는 이단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을 부인하면 사람들이 꼬임에 넘어가면서도 기독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딴 종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부인하고 다른 것을 든 종교는 이미 이단이 아니라 이교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나타난 이단 가운데 성경을 부인한 이단이 없습니다. 부분적으로 고치려고 했지 성경을 통째로 부인하는 이단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도 같이 씁니다. 수없이 예배시간마다 성경을 펼치고 그것으로 공부하면서도 결국 진리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중심 사상을 빼버리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빼버리면 어떤 이단도 성경을 통해서 수립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경 자체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 없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 예수였고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자기 교회와 생명적인 연합을 가지고 계셔서 한 몸을 이루고 계신 머리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순간에 성경을 보는 눈이 확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아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지만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 그 공산당 사상을 고취시키고 확장해 나가는 방법이 공산당 부흥회입니다. 모택동이나 모택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새로운 세계관을 가르칩니다. “인류의 역사가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데, 있는 자가 없는 자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역사이고 없는 자들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항거하며 살아온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세상이 되어서는 결국 세상은 자멸하고 불행해 질 수밖에 없다. 힘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들고 일어나서 부르주아들을 뚜드려 눕히고 열 개를 벌어서 열 명이 골고루 나눠먹는 사회가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당신들은 부르주아 쪽에 산 사람이 아니었느냐. 또 부르주아같이 돈이 많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르주아들에게 항거하지 않으면서, 부르주아들이 그런 방식으로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며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만들도록 당신들이 침묵하고 거기에 은근히 동조해준 사람들이 아니었느냐”하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화: 주사파에 빠진 한 학생 이야기-결단 초청의 시간) 그렇게 한 번 회심을 경험하고 나면 일회로 충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회심의 경험을 반복시켜줍니다. 수시로 모아놓고 공산당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 피 빨아먹고 나쁜 짓 한 것을 예로 들면 흐느끼며 헌신을 맹세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상의 현재적 경험의 반복입니다. 이것이 계속되면서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맞는 부분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 견해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속에 있는 가치 체계와 사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real christian)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공산주의자들처럼 tjd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독특한 사상과 가치체계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면 소통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저쪽에서 이야기하면 이쪽에서는 “우리의 모든 보화는 천국에 있다”고 이야기해서 서로 통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잘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Real christian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못해본 것도 없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몹쓸 일을 할 수 없이 당해본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본 적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무엇인가 포기해본 적이 있습니까? 포기할 기회가 없어서 포기를 안 한 것이 아니라 포기해야 할 결단의 순간이 수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포기해야할 내적인 강한 충동을 못 느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치관 자체가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거니와 받아들여졌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없으니까 자기의 신념대로 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박해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순교한 것 아닙니다. 지조를 지킨 사람만 순교했습니다. 잽싸게 투항한 사람들은 거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고 나니까 이제껏 까지 조각조각 흩어 돌아다니던 성경이 전체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맥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자체가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증언이니까 논리적으로 당연합니다. 그분과 강력하게 만나고 나면 그분의 글들이 잘 이해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화:군대 안 간 사람이 군대 간 사람끼리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를 할수록 가슴에 와 닿는 성경이 목회서신입니다. 목회를 몰랐을 때는 사도 바울과 경험이 많이 달랐는데 목회를 하고 나니까 경험의 세계에 공통부분이 많아져서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예화:인터넷에서 중학생들끼리 주고받는 편지를 보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른다)
성경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니까 확고하게 이해된 것입니다.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주인공적인 성경이 워낙 어마어마한 부피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화: 외국 영화를 보며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착각을 했다면 그 영화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성경을 그런 식으로 보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확실하게 경험하게 된 것은 성경 자체가 놀랍게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너무 친숙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전체를 달음질치는 강력한 물줄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제 나름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있고 거듭났고 구원을 얻었는데도, 은혜도 받았고 교회가면 기도할 때 눈물이 펑펑 나고 교사도 열심히 하며 예수밖에 없는 것처럼 살았는데도, 성경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어려웠습니다. 청소년기에 ‘칸트’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 어려웠는데 오히려 그 사람들의 책이 더 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성경을 잘 안 읽게 되었습니다. 마음먹고 성경을 읽으려고 뒷장을 넘기면 앞장이 전혀 생각이 안 나고 윗 단 읽고 아래 단을 읽으면 위 단이 새까맣게 생각이 안 났습니다. 한글성경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때 성경이라는 것이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제 신앙인생을 10년 이상 절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혼자 읽을 때 혼란스러웠던 성경이 조금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찬양 부를 때 눈물 펑펑 쏟고, 설교 시간에는 졸고, 끝나고 나면 열심히 주의 일 하고, 돌아올 때는 성령 충만해서 돌아오고,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도 가며 사는데, 성경은 의무이니까 읽을 뿐이지 재미도 없고 몸살나서 입맛이 없을 때 고기 씹는 맛이었습니다. 이해 할 수 없었던 말씀이 ‘성경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수준에서는 심도가 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제가 설교자가 되었다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 예수를 개인적으로 깊이 경험하고 나니까 제일먼저 찾아온 놀라운 변화는 성경 20장을 읽어도 앞의 19장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가 명색이 교수생활 1년 차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수가 되었는데도 성경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성경 전체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수업시간에 제가 가르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인 찬동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도 그렇게 말 안 하면 신학교에 붙어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답안지에도 그렇게 쓰지 않으면 점수가 안나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성경 전체의 주인공이고 성경 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로부터의 구원이다’를 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적인 입장이고 성경 속에서 그것이 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성경 전체가 굽이치듯이 좍 펼쳐졌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성경이 연결되면서 성경 자체가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예전보다 훨씬 더 명료해졌습니다.
그러한 저의 경험은 사소한 경험이었고,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경험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의 때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이 부흥의 경험의 핵심부에 와 있을 때 그것이 참된 부흥입니다. 지금처럼 그리스도 자체가 빠지고 성령의 희한한 역사에만 집중하는 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험이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데 그런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신령한 세계로 옮아가게 되면, 자신의 성화생활과 경건의 전 영역에 강력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선 지난 번 말씀드렸던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신앙의 정반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계속 세련되어가기만 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있는 진보라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았는데 (예화: 아이들이 계속 자라고 있을 때는 매일 자라는 것을 느낄 수는 없지만 한해 지나고 나면 바지가 짧아져서 입을 수 없게 될 정도이다) 그것을 보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는 마치 어른 옷처럼 일년이 지난 후에 바지를 입어봐도 맞고 오년이 지난 후에 입어봐도 맞습니다. 육신적인 상태에 있을 때는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의 모습과 비춰봐도 작년의 모습이 그렇게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재작년의 모습과 비춰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일예배에 전화 안 와도 나가니까 좀 나아졌지’ 정도가 있을 지 모르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던 상황에서 그 상황이 종식되면서 자신이 급속히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에 머물러 있을 때의 자신의 삶의 모습, 영적 생활의 피폐함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깝고 원통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내가 그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았을까? 그것도 예수 믿는 것이라고 살았을까?’ 제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다음에 글을 쓰며 규탄할 때에 두 사람을 마음속에 그렸습니다. 하나는 32년 동안 교회 다녔던 제 동생이고 또 하나는 나의 옛날의 변화되지 않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책 속에서 신랄하게 지탄받는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은 자와 같이 예배드리고, 기도 거의 안하고, 어디 가서 쪼가리 체험 하나하고 우쭐거리고 돌아다니던 시절을 상기했습니다. 그 감정적인 발로는 그 세월이 너무 억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장기간 머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수도 없고 안 살수도 없는 그런 세월을 보냈을까?’에 대한 원통함이 거기에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서 급속하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자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모든 방면에 있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전에는 죄에 대해서 지는 것이 거의 숙명적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어떻게 이렇게 꼼짝 못하고 살았을까?’ 말씀대로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사니까 죄에게 지는 것이 숙명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물리치니까 승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는 삶이 이것이구나’를 느끼며 강한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론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빈번한 승리를 거둔 후에 몇번 지는 것입니다. 다시 털고 일어나서 또 이기고 또 이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병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시절에 은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병적인 유아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을 경험했는데, 신령한 세계로 들어 온 사람은 특별한 은사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그 때에는 그런 은사밖에는 경험하지 못했는데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신령한 세계로 들어오고 나서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한 감동 속에서 살던 사람이 이번에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의 아름다움, 그분 성품의 고결함, 그 거룩하심에 대해서 감격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화: 남녀가 사랑을 하는데 매번 만날 때마다 그의 재산이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감격하는 이야기)
이것을 보고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도 땅문서와 집문서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개발지구를 걸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제 승용차에 시승해서 부잣집 사모님의 미래 모습을 시연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땅이 어디 있는지 집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만나서 꿈과 사랑과 태어난 인생과 살아가고 싶은 삶을 이야기하고 돌아오며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불행한 사람에 대해서 저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구나’하며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에 만나니 처음부터 자기를 너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졌는데도 가슴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와의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사람이구나’를 뼈저리게 느끼며 그를 알아갔습니다. 이제는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그가 어디에 사는 지도 모르고,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앞의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뒤의 사람은 그 사람을 거의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와 은사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는 신앙과 그분 자신의 성품을 경험하는 차이입니다.
신앙의 심장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찬송: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신앙의 핵심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문서만 만져보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랑할 수 있다면 'I love your pocket'이 되지 어떻게 ‘I love you'가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경험하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심장부에는 하나님에 대한 목 메이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 이름만 들어도 목이 메고 그분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소식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찬송: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프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신 주님을 왜 저렇게 믿으면서 살아갈까? 그분이 얼마나 고귀한 분인데 저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까? 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저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면...’하며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영적인 유아상태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신령한 영역 속에 들어간 사람의 은혜 안에서 사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있을 때는 코메디처럼 하는 설교가 제일 신났습니다. 왜냐하면 스트레스가 팍팍 풀리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짧게 끝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가고 나면 설교 같지 않은 설교를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니까 들으면서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간단하고 웃기는 설교는 천박스럽고 싫고,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고 뜨게 해주고 그래서 여태껏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확 열어서 보여주는 신령한 설교에 대해서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갈망이 생겨나면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한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들을 수만 있다면 불언천리하고 가서 듣고 싶은 생각이 나고, 책을 보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탐독하는 것입니다. 연예소설 보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열정으로 탐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머츠’라고 하는 영국의 (?)편집장이 전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토마스 맨튼’이나 ‘죤오웬’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대들은 이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13장밖에 안 되는데 죤오웬이 깨알같은 글씨로 600페이지 되는 책 8권을 썼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헬라어 70인역 같은 온갖 언어를 동원했습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으니까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간략하게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채워서 길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요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고 이해하게 되니까 깊이 파헤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대의 설교가 그렇게 방대한 것입니다.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유아상태로부터, 성장이 없던 상태에서 성장으로 죄에 대해서 늘 실패하던 데서 승리로,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은혜 안에 살고 마지막에 신령한 것들에 대한 놀라운 은혜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이해해야 될 것은,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까지는 파악을 했는데 어떻게 해야 그 십자가를 경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 경험을 전수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 안에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의 재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이 경험한 것을 들은 것과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대한 질문 하나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어떻게 경험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둘째 날 여러분에게 거론했던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과 똑같은 세 가지 요소가 여기에서도 강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구속에 대한 분명한 교리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면 안됩니다. 간단한 것부터 점점 자세하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었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식의 몇 줄로 된 간단한 것 가지고는 장엄한 경험이 나오기 힘듭니다.
우선 첫째 있어야 될 것은 질적으로는 순수한 성경적인 그리스도 예수와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관한 교리여야 하고 내용 면에 있어서는 상세하고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들로 채워져서가 아니라 내용 면에 있어서는 그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의 풍부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내용의 양이 어느 정도 확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설교 한편을 듣고 혹은 사영리나 쪽 복음 한 두장을 읽고 경험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체험이 그 지식에 있어서는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그 체험에도 상당히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신령한 세계로 이동을 하면서 그 후에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그 십자가와 구원사역에 대한 교리들을 계속 섭취함으로서 신령함에 있어서 진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든 필요한 것은 질적으로 순수하고 양적으로 풍부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그리고 믿음과 구원에 대한, 변화에 대한 폭넓은 교리들을 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조금만 논리를 전개해 나가면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코메디나 보고 드라마나 보던 수준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그 사람들이 신령함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맛보고 하나님의 교리의 깊이를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들이라면, 사고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제시하고 설교하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체계 속에서 반응을 하니까 설교가 들리는데, 속이 텅 비어서 들어있는 것이 없고 한심할 정도로 교리에 대해서 모릅니다. (예화: 이단 반대 서명하는 사람들에게 교리 문답을 해보면 믿고 있는 신앙의 상당부분이 이단들이 믿고 있는 것들을 믿고 있다) 임상 실험한 결과입니다.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인내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성경을 조금 읽고 주제를 희망이라 정하면 그 다음부터는 성경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들며 말하는데 모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흔히 볼 수 있는 한 빛인 것입니다. 그 빛이 아니라 한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일리입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도 그리스도 예수와의 결정적인 만남의 경험들이 일어나기 어려워지는 현상들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에 대한 폭넓은, 그리고 질적으로 순수한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두 번째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 교리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해야합니다. ‘십자가’할 때 ‘하나님의 사랑’ 그것밖에 더 이상 생각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하려는 진지하고도 집중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난 섞인 태도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하면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 때는 거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살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풍성한 삶이 없습니다. 그들이 천국 간다면 그야말로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된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교리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보려고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 복음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누차 호소한 것이 “당신들은 설교자에게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였습니다. 십 분만에 복음을 다 설교하고 내려오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 몇 개를 가닥 잡아서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것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설교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6주 정도라도 그런 설교를 연속해서 들어본 경험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기초적인, 복음의 기본적인 교리를 설교하면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불신자가 아니라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돌아서면서 감탄을 하지만 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통탄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믿었는데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거의 복음의 교리를 접하지 못하면서 살아왔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결정적인 요건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강력한 체험을 통해서 그분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될 내적인 숙명적 강요성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관원들에게 체포되어서 핍박을 받을 때 “내가 너희들 말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겠느냐 생각해 봐라. 우리가 누구를 기쁘게 하랴” 했는데 그것은 그분에 대해서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내인이 그들 속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들의 증거의 결정적인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풍부하고 분명한 선포가 많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집중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진지한 청취자로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그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또 다시 또 다른 개념으로 머리 속에 상징적으로 맴돌 뿐인데, 성령이 역사 하시면 가슴을 찢고 들어오면서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나의 신앙의 기초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강력하게 감동을 받으면서 그분 자신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토대가 되어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초적인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에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력하게 도전하는 바는, 여러분이 진지하게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고백을 여러분들이 들어봐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아덴에 먼저 들렀습니다. 거기에서 철학자들과 만나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그들과 철학적인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들을 꼼짝 못하게 눌렀습니다. 그러나 선교적인 성과는 미미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을 놓고도 학자들 간에 견해가 갈리기는 합니다. 소위 ‘칸텍스쳐라이제이션’이라고 하는데 유대인으로서 헬라철학의 본산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옷을 입고 복음을 전한 성공적인 케이스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 능력 많이 받은 사도 바울이 어디를 갈 때에도 그렇지 않았는데 아덴에서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에 들어갈 때에는 심히 두려워 떨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데네에서 아주 비참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복음 사역의 역사에서 뼈저린 실패를 경험하면서 고린도라는 항구 도시를 향해 가면서, ‘내가 아데네에서 그렇게 실패했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할 때 사도 바울의 마음에 번쩍하면서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거기에서 작정한 것입니다.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든 것이 없고 예수님을 어쩌다 만난 사람이 그 얘기를 하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결심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은 헬라철학과 그 시대의 모든 사상을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라고 고백하고 고린도에 들어가서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습니다. 그것은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고 신령한 세계 속에 들어온 사람이 계속해서 그 십자가의 체험을 붙들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의 중심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는 교훈을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의 사건이 계속 죽을 때까지 우리의 영적인 영역 안에서 반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고난 주간 때 사람이 모이기가 굉장히 힘든 주간입니다. 그런데도 혼신을 다해서 사경회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와서 강력하게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사건의 현재적인 경험의 필요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본성상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순수하고 풍부한 십자가에 대한 증언,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진지하고도 신실한 청취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울려 퍼지는 그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들으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면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풍부하게 기록된 십자가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리를 묵상하십시오. 성경의 강력한 빛과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충족한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몇 날을 가지 못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간절하고 애절한 열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천하에 다시 주신 적이 없는데 얼마나 그 이름을 명상하고 그 이름을 경외하고 그 이름에 매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간절히 원하시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안에서 계속 경험되어야할 사건입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영역으로 옮겨간 후에도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갔을 뿐입니다. 이제 성장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막 은혜가 흘러 들어오고 있을 뿐이지 더 이상 성장이 필요 없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죄에 대해서 실패만 하다가 이제 막 이기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지 죄를 뿌리째 뽑아서 모든 것을 끝장 내버린 상태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지, 모든 신령한 세계가 그의 두 눈앞에 밝히 다 드러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거기에서도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한데 문제는 죄가 속에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우리 밑에 깔려있는 부패한 성품이 고개를 들어서 우리 안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상태를 고갈시키고 전세를 뒤집어엎어서, 구원받았지만, 십자가를 경험했지만 죄 아래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를 배교시킬 수 있는 힘이 사단에게는 없지만 죄 안에 배교자와 비슷한 상태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과 맞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대의 수도사들과 금욕주의자들이 착각했던 것이 그런 영적인 현상을 육으로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행을 하고 무릎에 피가 나도록 돌계단을 오르내리고 금식을 하고 자기 몸을 혹독하게 괴롭히고 죽이면 그 속에 있는 죄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화: 육체적 정욕으로 괴로워하던 전라도의 한 중 이야기) 죄에 대한 욕망이 손끝이나 지체의 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종식시키려면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어떻게 종식이 되겠습니까? 입을 꿰맨다고 해서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귀를 막아버리면 음악이 듣고 싶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더욱 강력한 열망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영으로서 육체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고 강조한 이유가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성령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죽임의 교리’라고 하는 청교도들의 교리에서 그런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솟아오르는 죄와 신령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고사시키려고 하는 끊임없는 도전이 신령한 세계 속으로 옮아간 후에도 계속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극복하고 누를 수 있는 놀라운 무기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현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나의 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서 한없는 고백과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찬송: 이 천한 몸 이 생명을 왜 아끼랴)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 시점에서, 이 병적인 유아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 시점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에 동참해야 합니다.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한번 그리스도 예수를 전심으로 추구하고 그분의 십자가의 위대한 비밀과 그 교리의 풍성함에 눈뜨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거나 그 신령한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말씀을 경험함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5:13)
병적인 유아 상태의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이 ‘의’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자신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세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며, 또 한가지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첫 시간은 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의가 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우리를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현재적인 경험이 우리의 신령한 삶의 유지에 어떻게 중요한 지를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서 이 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말씀이므로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 즉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 수 없었던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함으로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림으로서 5장 13절에 대한 모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성경이 많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의인과 악인을 대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악한 사람은 불의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의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불의한 삶을 산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우리들 속에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법대로 사는 사람, 남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대쪽같은 정신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도 받는 올곧은 사람, 그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의한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거나 빼앗고 괴롭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불의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의로운 사람, 의로운 생활에 대한 생각을 손질하고 나서야 진짜 성경이 이야기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당시 유대인이 생각하는 것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와 그들의 지도를 받아서 신앙 생활을 하는 유대인을 통렬하게 공박하신 내용 가운데 하나가 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렬하게 반박하고 그들이 실상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실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볼 때 전혀 의로운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 오히려 썩은 시체를 넣어둔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적나라하게 폭로하심으로 결국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면하실 수가 없었고 그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핍박받으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걸고 ‘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외치셨을까요? 이것도 알고 보면 예수님에 와서 새롭게 시작된 사건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오랜 역사에 걸쳐 그 시대의 박해를 받으면서 통렬히 맞서 싸웠던 ‘의’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의에 대한 생각은 수많은 선지자와 예수님께서 생명을 걸고라도 성경 적인 그 ‘의’가 무엇인지 밝히고 그렇지 않은 ‘의’를 공박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던 개념입니다.
이 선지자들과 사도들, 예수 그리스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렇게 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박해까지 받아가면서 무엇이 참된 의고 무엇이 참된 의가 아닌지를 통렬하게 주장하면서 고난의 길을 갔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거기에 몰두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의’에 대한 생각을 똑바로 해서 무엇이 의로운 생활이고 어떤 사람이 의인인지를 분명히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님께 항복하고 그 분을 믿으면서 하나님 자신의 통치가 그 사람들 속에 이루어질 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 속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이 하나님의 통치에 전혀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리라고 한다면 이 집단은 교회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못하게 항거하는 집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 그 나라의 모습이 의로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끊임없이 ‘의와 공평, 정의와 공법’ 같은 개념들이 계속해서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의의 자로 재어서 심판을 내리기도 하시고 복을 내리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 ‘의, 의로운 생활, 의로운 사람’의 개념이 잘못 수립되고 나면 그 시대에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은 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자신이 의인이 아니면서도 의인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 속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왕국 속에 서 있다고 하는 그릇된 자부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은 그들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 ‘의’를 외치다가 수많은 선지자들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그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의가, 그 유대인들만 아니라 신앙이 침체되었던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흔히 생각하기 쉬웠던 그 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왜 도움이 됩니까?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던 그 의의 개념을 오늘날 신령하지 못한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성경 적인 의로운 생활을 서로 비교해봄으로서 육신 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의로운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허물어버려서 성경 적으로 진실로 의로운 생활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가기 위해서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그 의는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봅시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수하는 율법준수의 삶이 의로운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사람들을 의롭다고 재실 때, 그것이 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빼 놓을 수 없었던 것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 다는 아니지만 중요한 척도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재려고 했던 것은 전적으로 비난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성경이 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 할 때 율법 준수,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서 그들이 틀렸고, 설령 그것이 의로운 삶이라고 할 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율법을 준수하는 의로운 삶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원래 ‘의’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본래적인 의인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성경이 ‘의’를 그렇게 율법준수 하나만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얘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의로운 삶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그들 자신도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그리스도를 대치할 정도의 의가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이 잘못된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들이 불순종해서 언약을 깨뜨렸으면 깨뜨린 사람이 언약을 다시 세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시대의 계약이라는 것, 언약이라는 것 자체가 삶과 죽음을 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맺고 어느 한 쪽이 그것을 파기했을 때에는 파기한 쪽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 언약을 다시 수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파기한 사람에게는 그 언약을 파기한 책임만 존재할 뿐이지 그것을 복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주도권이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 있어야만 했습니다. “네가 이 언약을 깨뜨렸지만 내가 다시 이 언약을 세우겠다.”라고 해야 그 언약이 다시 수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들이 불순종함으로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미 깨뜨린 그 언약 속에서 주어진 율법 중-그것도 다가 아니라- 일부를 지킴으로서 깨뜨린 언약을 재수립해서 하나님에게 자신을 축복해야 할 의무로 부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한없이 얕잡아 보는 신성 모독적인 발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율법 생활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얼마나 그 율법을 준수하려고 애를 썼나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을 걸고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구체적으로 지킬 수 있는 규칙들을 만들고 그 규칙들을 다시 세목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준수하는 것을 삶의 엄중한 의무로 삼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항상 진지하고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는 매우 불쾌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의’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께 고통스러운 생각이 되었던 이유는 자기들이 언약을 불순종으로 파기했을 때 이미 그 관계를 자기들의 힘으로 복원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땜질을 하면 다시 자신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옛관계로 하나님이 돌아가셔야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구조 속에서 우리들의 무능한 죄와 불순종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대신 죽으셔야만 우리의 의가 성취될 수 있다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필요를 느낄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들을 구하셨는데도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선두 주자였던 사도 바울 자신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의, 의로운 생활, 의로운 사람에 대한 생각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성서적인 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에서 얘기하는 의로운 사람은 내면의 세계는 어떠하든지 그저 율법을 준수하고 지키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불의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재판을 아무렇게나 하고 가난한 과부를 억압하였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런 불의한 재판장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이었다고 성경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롭다’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폭넓은 개념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과 경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율법의 조항 자체를 외부적으로 준수하느냐, 아니냐 보다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예를 든다면 의로운 사람 고넬료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의로운 백부장이었다고 성경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기도와 구제에 힘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성경의 소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물건을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한 원초적인 내면의 세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이방인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경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인정받은 노아가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아직 율법이 들어오기 이전인데 무엇을 가지고 그를 의로움의 자로 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논리적인 모순이 생기지 않습니까? 유대인의 개념으로 보자면 그런 의로운 사람의 개념이 율법이 있기 전에는 성립되기가 굉장히 힘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이 아직 확정되지 않던 시대에도 의인은 존재했던 것입니다.
에녹이나 아벨도 그런 의로운 사람으로 성경에 드러나는데 그런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외부적으로 어떤 율법과 계명을 지켰다 라고 말하기 이전에 그들은 그 시대에서 뛰어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인이 되는 중요한 자격 요건이었습니다.
성경 적으로 볼 때, 특히 시편에서 악인과 의인의 날카로운 대조가 보이는데 거기에서도 의인과 악인의 개념이 한 쪽은 의만 행하는 사람이고, 한 쪽은 악한 짓만 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기에서 ‘의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악인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비록 삶의 와중에서 여러 가지 연약함과 죄성으로 인해서 순간적으로 범죄하고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가 다시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주님 앞에 용서를 받으면 그 사람은 다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들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구약을 들여다보십시오. 구약이라는 껍데기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교리가 큰 광맥이 되어 흘러서 신약의 바다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체험함으로 구약 속에서 이런 복음을 보게 만들어 준다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난 시간에 입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은 경외할 필요가 없고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은 율법의 준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의뢰, 그 분과 연합된 사랑의 마음, 그리고 그 분께 온전히 매달려 있는 거룩한 친교, 그래서 그분께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는 내면의 세계를 가질 것, 이것이 의인의 가장 중요한 첫 번 째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이 있을 때 그 다음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게 결론을 내리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사가 어느 계명이 제일 큰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수준에 맞게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과 성품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그 내용은 이미 구약에 율법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율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대한 민국 국민이면 당연히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류에 처한다’는 법조문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법조문으로 제정할 수 없습니다. 신명기에도 모세가 ‘너희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율법 속에 한 조항으로 들어있는, 다른 율법들-민법이나 제사법 등-과 어깨를 겨루는 한 율법의 조항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 전체를 지켜 나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의 내면의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총체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강령은 희랍어로 ‘못’을 말합니다. 못이 박혀 있으면 그 곳에 옷들을 걸어둡니다. 율법도 걸리고, 선지서도 걸리고, 수많은 가르침이 한 가지의 주된 가르침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걸린다’라고 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서에서 많은 것들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그것 하나하나를 지키는 율법 준수의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법과 세상 법의 차이입니다. 나라는 세금만 내면 차압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나라에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건, 세금이 과하다고 불평을 하며 내든 나라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쨌든 세금만 내면 되는 것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런 식으로 율법을 대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생활, 의로운 삶에 대한 견해가 예수님과 엄청나게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움에 대한 개념을 앞에 말씀 드린 그러한 개념으로 계승하셨고, 그 가르침들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꽃 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원래 들어있는 의로움, 의로운 삶, 의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어 있으니 그것을 계승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있어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있는 자랑이 교회를 몇 년 다녔다, 늘 교회만 섬기며 살았다, 나는 성가대를 5년 동안 했는데 한 번도 안 빠졌다 등등.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을수록 내세울 것은 그런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입력이 되고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차이가 나니까 의로운 생활에 대한 생각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와 목회자의 양심을 걸고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반듯한 신앙 생활을 하는데 사실은 거의 죽어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못 보았습니까? 주일은 빠지는 적이 없고, 십일조를 거르는 법이 없고, 교회밖에 모르는, 심지어 싸우는 것도 교회에서, 화를 내도 교회에서, 친교를 나누어도 교회에서 나누지만 그에게 생명이 없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없기에 확 꽃피는 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은 속에 있는 마음의 정서와 다른 행위를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주님을 뜨겁게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주를 위해서 섬기는 것은 헌신입니다. 주님을 하나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고서 하는 행위는 외식입니다. 그래서 의에 대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 사이에 외식이 찬란하게 거품처럼 꽃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하나님 없는 악의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해 칼을 들고 공격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개념으로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실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 진실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진실이란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것의 의미는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가장과 가식, 위선 같은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진실해진다, 정직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을 알고 그 분의 인격을 경험하면 할 수록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며 진실의 가치를 알고 정직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많은데 기도회 때마다 펑펑 우는 그들이 막상 학교에 가면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던데요?” “사업을 하면 이중장부를 쓰고, 탈세를 하는 경우도 있던데요.” “오히려 진짜 죽은 신자의 표시가 역력한, 예배 시간에 늘 졸고 , 말씀이 심겨지지 않고, 그런데도 신호등 한 번 위반하는 적이 없는 그런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릅니다. 후자의 사람들, 영적으로 거의 죽은 것 같은데도 도덕적으로 탁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가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습관이나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영향받지 아니한 가치관이 그를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젠가 한 번 신문을 보니 역대 대통령중 한 분을 무척 존경하는 분이 글을 썼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청와대에 가서 화장실을 보니 좌변기 뒤쪽 물통에 벽돌 두 장이 들어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이발사가 청와대에서 이발을 해주는데 속옷 윗도리에 구멍이 너무 많이 있었고, 허리띠는 얼마나 오래 찼는지 벨트 구멍이 다 늘어나 있었답니다. 그러면 그 후에 뚫어진 속옷을 입지 않은 대통령, 허리띠를 늘 새 것으로 쓰는 대통령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만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런 환경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라왔기에 체질적으로 늘 그렇게 살아왔을 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라 사랑과 상관없이 재벌로 살았다 하더라도 그런 습관을 지키며 살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캐나다에 집회를 갔는데 어느 집사님께서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어느 재벌의 회장이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안나오더랍니다. 속옷을 빠느라고 말입니다. 세탁비를 아끼려고 호텔 화장실에서 그것을 빨고 있었답니다. 끓어오르는 애국심이 그것을 시킨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냥 어려서부터 그런 가풍 속에서 살아왔기에 그렇게 습관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개념이 하나님과 연관된 것 이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이웃에게 약속을 지키고 신실하게 대하며 그들에게 인정과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웃을 그렇게 대하는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을 따라서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정을 베풀고, 어떻게 이웃을 섬기고 어떻게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살아야 할 지를 율법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기준에 맞춰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막바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더 중요한 자격인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그 토대 위에서만 그것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난 다음에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내가 천천의 수양과 번제를 드릴까? 내 자녀를 드릴까?’ 고민하는 장면이 바로 미가서 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천천의 수양과 경배를 주께 드릴까
내 몸의 열매로서 주께 바칠까
이것이 끓어오르는 애달픈 질문이 아니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높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까 말하지만 다 필요 없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너희의 생각하는 바와 다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외면적으로 무슨 제물을 드리고 어떤 율법을 지키고 그리고 이웃에게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외형적인 의무를 다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우발적으로 어쩌다가 행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인품과 내면의 세계 자체가 굽은 일을 도저히 행할 수 없고 삶 자체가 의를 행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런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의 공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에 과거에 잘못한 것을 보상하듯이 수재 의연금을 내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을 동족들에게 베풀었을 때 기쁨을 느끼고 그렇게 베풀어진 현상을 볼 때 기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고 무자비하게 행하는 광경을 보면 괴롭고, 죽을 것만 같은 것,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TV에서 엽기적인 장면이 나올 때 괴로워하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내면의 세계가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거부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성이 둘이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하면서 토할 것 같은 반응을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어울리는 장면을 볼 때는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것은 최상의 표현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인정받았음을 뜻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해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바로 그와 동행해주시는 것, 그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 모든 것은 내면에서 진실 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변화된 내면의 세계 없이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적인 의고, 거기에서 우러나와서 인자를 베푸니까 하나님 사랑이냐, 이웃 사랑이냐, 하나님 사랑하니까 이웃은 돌아보지도 않느냐, 신앙 생활만 열심히 하고 윤리적인 생활은 엉망이다, 그러니까 이제 신앙 생활은 조금 쉬고 이번엔 윤리만 재건하자는 논리가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얘기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어떤 계명을 준수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사람하고는 완전히 다른 내부구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제 명백해 졌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불의한 사람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과 경외의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성품에 어울리는 삶을 살 때,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공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끊임없이 만나기 때문에 의로운 삶을 살아야지만 그 분과의 교제를 촉진할 수 있습니다. 자비한 삶을 사는 것은 그 자비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영향을 지금 자기와의 친교 속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웃을 향한 윤리적인 삶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삶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 내면의 세계가 핵이고, 그것을 싸고 있는 껍질이 이웃을 향한 의로운 삶이어서 그 전체가 바로 의인의 삶의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많이 안 쓰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 하시는 이러한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구약에서는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이 철저하게 자아 중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던 사람이 신령한 변화를 받지 않고, 그가 신약 시대이든, 구약 시대이든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회개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자기가 죄 가운데 살다가 깊이 회개하고 나면 두 가지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굉장히 가볍다는 느낌과 자기가 깊이 회개하기 전에 사랑하던 것이 사랑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이전에 사랑하지 않았던 주님이 사랑스러워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심령이 변하는 만큼 신령한 변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신령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룰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사람이 된다고 말했는데 지금 여태까지 저는 여러 시간에 걸쳐 성경 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얘기하는 신령한 사람인데, 그런 신령한 사람이 되려면 그런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말씀을 경험해야 하는데 논리적으로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명쾌하게 이해가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은 그 사람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인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아주 간단한 자기 측정의 방법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시편 119편 같은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을 읽고, 그러한 시속에 시인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과의 커다란 인격적인 경험들을 수없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가 너무나 영적으로 침체되어 진토에 떨어진 것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말씀이 자기를 살린 것,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자에게 주시는 위로,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더 말씀을 사랑하게 되어서 고난받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지만 고난받은 후에는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되었다는 그러한 개인적인 간증,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이라는 주옥과 같은 고백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깊이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항상 그런 시를 읽을 때 허풍이 많구나 라고 느끼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선전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 이상을 갖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또 뭔가 한 구절, 두 구절이 자기 상황하고 비슷해서 찡하고 와 닿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다 그래서 불의한 사람이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다 하는 것 자체도 손에서 손으로 전수해서 쥐어줄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경험의 영역에 다분히 속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설명을 듣는 사람 자신이 그런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났습니다. 정말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흘 동안의 집회 기간 동안 확실히 인정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나는 병적인 유아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게는 하나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도 별로 없고, 교회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예수님 개념의 의로운 생활이 아니라 진짜 유대인 개념의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신령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이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럼 답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째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은 이제껏 여러분들이 이것만은 내가 그래도 내세울 만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의로운 삶에 대한 자부심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지푸라기와 같고 아무 쓸모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모두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희망이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그 삶 때문이 아니고 의미가 없는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의라는 사실만이 그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것들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없는 것처럼 다 내려놓고, 이런 것들에 대한 자부심을 버린다 하더라도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그 의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그 때에 그렇게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의밖에는 나를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다고 하게 될 때에 이제 여러분 속에 십자가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그리고 십자가 없이는 나도 없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실제적인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그냥 설교 한 두개 읽고 눈물을 조금 흘리고, 십자가에 감격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제가 설교자로 부름을 받고 2,3년이 지난 즈음이었을 때였습니다. 설교할 제목이 말라서 무엇을 설교할 지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막 눈물이 흘러서 앞이 안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리라 결심을 하고 집에 와서 설교할 준비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날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눈물을 늘 간직하고 살았는데 설교를 하려고 하니 무엇을 설교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십자가의 사랑으로 안 사는지 가슴 아파하면서 울 수는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설교할 것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한 교리를 결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경을 읽고, 책을 읽고, 깊이 묵상하면서 탐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설교한 시리즈 중 가장 많이 반복된 시리즈가 십자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책과 설교 테이프를 하나 하나 다 탐독하고, 매달려서 들으십시오. 진짜 십자가가 뭔가를 찾으십시오. 성경 전체를 흐르는 복음의 물줄기들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유일한 의라는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 째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명백하게 지키며 살라고 말씀해 주실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성경을 읽으면서 야, 이것을 지키라고 하시는구나, 아, 이것도 지키라고 하시는구나 하면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고문서처럼 보이지, 이 말씀이 살아서 역사 하여 나를 굴복하게 하는 그런 일은 신령한 그리스도인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예배 시간에 나와서 설교를 듣고 마음에 깊이 찔려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면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고 실천하려는 순종에 여러분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결코 신령한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서도 여러분들이 또 다른 함정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라 하고 말씀하실 때 아멘 하며 순종하는 그 삶이 열심히 살아도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있는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말씀에 도전을 받고 이제 올바른 생활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치하기 위한, 구원을 얻기 위한, 나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어제 말씀드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죽으심이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이런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죄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그 분께 내가 한없는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이런 정도 내게 명령하시는 것, 이 정도는 내가 지키며 살아야 내가 진정으로 구원에 감사하는 삶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이제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념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의 체험이 현재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운동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이 축구 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터졌습니다. 제일 못하는 학생을 나오라고 하고 제가 대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왜 이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요? 제가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보는 사람들이 뱃살을 잡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도 아는 것만 가지고는 살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내게는 어차피 능력이 없으니까 멋대로 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더 타락하는 일밖에는 없겠지요. 실질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사실을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에 정말 살 수 있는 능력이 제게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안 주셨기 때문으로 돌리는 것은 안됩니다. 내 의무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 까지만 생각하고 실천은 주님의 것으로 미루어 버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의로운 삶에 잊지 말아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메일을 받았습니다. 제 책을 감명 깊게 읽어서 대여섯번을 읽었다고 칭찬하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지체여 내 책을 보고 그렇게 감명을 받았다니 정말 기쁩니다. 그러나 형제여 잊지 마십시오. 그 곳에서 뭔가 형제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 주님 때문이고 무엇인가 말이 안되고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내가 그 분의 쓰심에 덜 준비되었기에 완벽을 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의로운 삶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잘 살고 난 다음에는 자기는 전혀 의로운 삶을 산 것에 대한 자기 역할이 없었던 것처럼 말해야 하고,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못 살았을 때는 그것을 다 자신의 책임으로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려면 하나님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셔야 하는데 그렇게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며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신데, 그 능력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면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던 통나무를 자르는 예를 들었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성화에 있어서 거룩해 지고 싶어서 고뇌하고 애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자신 속에는 거의 없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전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계시를 열어서 보고 깨닫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그러한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그러한 능력을 통해서 의로운 삶을 살고 나면 하나님의 강력한 도우심을 경험하면서 내면의 세계 속에 주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이 새롭게 불일듯 일어나서 신령한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되어 가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살고자하는 마음을 전혀 안 갖는 사람이 있는가, 자기가 의로운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 중에 그러한 생각을 안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그런 생각을 안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실천하는 삶의 분투를 통해서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증진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단지 그랬으면 하고 소원한다는 것과 갈망한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제가 잃어버리기를 잘합니다. 우산도 많이 잃어버렸지요. 그런데 성경을 한 두 번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헌신 예배에 초빙을 받아서 급하게 갔는데 가방 속에 성경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시간이 되었는데 성경이 없었으니 난감한 일이었지만, 다행히 그 날 본문을 다 외우고 있었기에 설교단상에 올라가서 본문을 외우고서 설교했습니다. 한번은 여권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집회 인도를 하러 가야 하는데, 그 여권을 어딘가 책갈피 속에 잘 두었는데 그것이 어떤 책인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찾느라고 3일 내내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비자를 받는 까다로운 절차를 또 다시 하려니 바쁜 일정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때 제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아, 이게 바로 찾는다는 의미구나. 하나님을 찾는 것도 이런 것이겠구나.’
단순히 바란다는 것과 갈망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대로 의롭게 살면 좋을 텐데 하며 생각하는 것은 소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정도의 소원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해져 가는 사람은 그런 정도의 소원이 아니라 갈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이 말씀에 충성하며 사는 것에 따라서 내 영혼의 참된 변화가 달렸다 하는 것을 그것을 순종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쓰고 간절하게 그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그 말씀대로 아직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는 내가 순종하는 것처럼 해야 하고, 순종했을 때에는 주님이 시켜서 순종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 중심의 신앙 생활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간절히 그것을 잡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상기시켜 드리고 싶은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탐을 끝내고 그 곳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을 건너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그 곳에 들어가면 너희를 위해 기적을 행하고 그 물을 말리겠다는 말씀이 있었지만 흐르고 있는 시퍼런 강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물은 말랐고 백성들은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가나안의 거민들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순종하는 믿음이 성령의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천천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아무런 원칙도 정하시지 않고, 아무렇게나 좌충우돌 식으로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령을 부어주시고, 사마리아 성에 성령이 부어지고,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고넬료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또 4장에서 핍박받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성령 체험을 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성령체험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기도와 순종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10장에서 기도하던 베드로와 기도하던 고넬료가 만나서 성령의 부어주심을 경험하는 것이 계속해서 펼쳐집니다. 그런데 특별히 순종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의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령 부어주신 것에 대한 나름대로 하나님의 그 섭리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안 하느냐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 학생보고 미적분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야단을 치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들은 뺄셈, 나눗셈만 잘해도 그 수준에서는 대단한 것입니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야단 치지 않는 것은 우리 악한 부모들도 하지 않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은혜와 능력의 수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깨닫지 못한 말씀에 대해서는 아직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깨달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감화를 주실 때에는 그것만이라도 순종하면서 살고자하는 말하자면 분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듯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도구로 해서 우리를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신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집중하면서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주 깨끗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집중해서 그 말씀을 듣게 하셔서 이해를 했는데 성령이 그것을 감동시켜 주셔서 자신의 마음속에 차가운 강의로 다가온 게 아니라 큰 감동을 주고 찔림을 준 것입니다. 아, 그랬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런 것을 요구하셨는데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하고 큰 찔림을 받으면서 회개와 믿음을 함께 갖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이제 그 감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막막한 것입니다. 왜냐햐면 여태까지 나의 신앙 생활의 전부가 명목상의 신자로서의 생활이 다였는데 내가 아까 감동을 받고 그래서 찔림은 받았지만, 그래서 은혜는 받았고 기쁨도 있었지만 내가 여태까지 지켜 본 적이 없는 이 말씀대로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문제와 부딪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이렇게 깊이 깨닫게 하셨는데 내가 이것을 순종하면서 행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삶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러면서 내 안에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누군가가 내 안에서 느껴지게 됩니다. 그 분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때 그 아이가 어떻게 몸 안에서 빠져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면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복부에 강력한 힘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반사적인 힘이지요. 마찬가지로 나는 도저히 살아갈 힘이 없는데, 내 안에 누가 살아 계신 것이 육적인 그리스도인 시절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내가 살 수 없는 삶을 끊임없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포근히 감싸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있을 때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내 안에 계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소리에 그것이 대체 뭔가 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령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없는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게 됩니다. 머리만 들이밀면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면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살아야되는 것처럼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순종합니다만 그러나 이 순종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게 하시는 이는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면서 분투하는 삶이 이어집니다. 혼자 버려진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분투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능력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만드십니다.
핍박받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계속 해서 핍박만 받는다면 못 견딥니다. 그런데 박해받을 때에는 신기하게 박해 받고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 드리면 박해받을 때에 마음 아팠던 것 보다 더 큰 위로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니까 내일도 또 욕먹으면서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넘치는 위로가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매일 분투하며 살아가면서 전심으로 추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려는 실천적인 삶이 없이는 하나님을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 속에서 상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삶을 동반한 총체적으로 인격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 속에 위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용기를 경험하고 말씀 속에서 위대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죽었던 영혼을 살리는 말씀의 영적인 위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사람으로 점차 점차 전진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최초의 강력한 경험이 우리를 육적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옮긴다고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실천하려고 하는 그 몸부림이 우리를 그 신령한 세계에서 끊임없이 더 진보한 신령한 세계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께 한 두 달 전에 충성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여러분께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에게 절박한 기도의 제목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들어주랴 라고 하실 때 “음, 저, 뭐더라, 내일 말씀 드리면 안돼요?”라고 반응한다면 결국 그것은 삶의 추구가 없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렇게 그런 의로운 삶을 추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주님이 무엇을 내가 네게 주랴고 말씀하시면 그 사람에겐 분명히 자기가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뜻과 성품을 집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무엇엔가 깊이 몰두하면서 신령한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 없이 안수 기도나 한 번 받아서 신령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성화의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령함도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러한 순종과 실천을 경험하고 날 때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 그 변화가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리 오라고 부르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능력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통해서 그 말씀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광대함 속에서 쏟아져 나온 시가 시편 119편입니다.
결국은 성경 적인 신령함이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자기가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이 신실한 삶과 결별한 영적 체험, 그리고 신비한 경험 , 그 모두 다 신비주의이지,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신실하고 의로운 삶, 분투하면서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그 지성의 생애와 신령의 경험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치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와 동떨어진 교회의 영성, 역사와 동떨어진 교회의 부흥 운동은 다 쓸 모 없는 것들이고 그리고 개인의 삶과 결별한 어떤 영적인 높은 경험,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성경 적인 영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추구하고 그 분에게 가치를 두고 그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사건이 재현 속에서, 그 현재적인 경험이 재현되는 가운데 살고, 거기에서 얻은 감화와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매일 매일 자신에게 하시는 그 말씀대로 살려고 분투하고 몸부림치며 거기서 하나님이 순종하면서 살 수 있도록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그 사람의 삶이 계속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끊임없는 승리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시니까 깊이 그가 사랑스러우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친밀하심을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들과 더 풍부한 교제를 나누십니다. 더 신령한 세계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수준을 계속 높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쳤습니다. 저는 힘을 다해서 히브리서 5장 13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여러분에게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느냐, 살지 않느냐는 저의 몫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번에도 또 ‘아, 참 좋았어’ 흘려 보내고 말 것입니까, 아니면 여기에서 무엇인가 주옥같은 교훈들을 찾아내고 이젠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실천적인 순종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병든 육신의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가시렵니까? 사경회는 끝났지만 이제 삶으로 하는 개인적인 사경회는 오늘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보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