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성화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아침 구름 같은 사랑입니까?(호6:4) 2001.8.12 온가족여름수련회(저녁) 1
2. 제사보다 값진 사랑(호6:6上) 2001.8.13 온가족여름수련회(저녁) 17
3. 하나님을 아는 지식(호6:6下) 2001.8.14 온가족여름수련회(저녁) 36
1.아침 구름 같은 사랑입니까?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부름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대체로 주전 753년경쯤 시작을 해서 상당기간 동안 설교를 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시작하던 때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예후 왕가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루이 14세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영명하고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나라가 강한 힘을 발휘해서 주위의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판도를 확보했습니다. 국제적인 지위는 상승하게 되었고 무역은 활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40년 가까운 치세기 동안에 엄청난 국력의 신장을 보았습니다. 산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져서 해외의 문물들이 속속히 수입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무역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고 그것은 고스란히 국부로 쌓였습니다.
이와 동시대에 부름을 받았던 사람이 아모스 선지자인데 아모스 서에 보면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번영한 상태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침마다 귀족들은 상아로 깎아만든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름이면 여름별장으로 그리고 겨울이면 겨울별장으로 휴가를 다니며 그들은 토지에 토지를 이으면서 한껏 부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는 정신사적으로는 이미 철저하게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이 부패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타락한 사회상이 이 호세아 선지서를 비롯해서 아모스 선지서 같은데서 상세히 나옵니다.
사람들은 토지에 대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율법은 짓밟혔습니다. 백성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상도 함께 받아들이게 되었고 백성들은 죄를 짓게 되었고 제사장들은 그렇게 죄를 짓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 자신의 수입이 늘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오늘은 아버지가 자고 온 그 여자에게로 내일은 아들이 가서 자고 오는 기가 막힌 부도덕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지도자대로 썩고 우상 숭배의 열심을 내는 비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정통 왕국인 유대 나라도 아니고 북 왕국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호세아’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선지자를 소명하십니다. 이 사람은 정말 우리 모두가 아주 깊은 감동을 가지고 그의 소명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소명은 결혼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로 가서 장가를 들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당시 유명하게 이름난 그런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방 제사를 드리는데서 몸을 파는 그런 여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찾아가서 그와 혼인하라는 명령으로 소명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가 거룩한 직분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그런 여인과 결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혹은 그 메시지가 자기의 육신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메시지가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갈라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디블라임의 딸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명령은 순전히 호세아 선지자가 결혼하는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그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 눈물로 가득 찬 슬픔을 안고 그 유명한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러가는 그 광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번영한 시대에서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방종한 백성 북 왕국 이스라엘과 그리고 남 왕국 유다에게 고멜과 같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음란하게 변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눈으로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룩한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러가는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아오시는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남 왕국 유다의 백성들의 심령이 너무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행동 예언에 담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마음들은 세속적인 번영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순종했고 그리고 그 여인에게 장가를 들러갔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마지막 남은 세속적이지 않은 욕망, 경건한 여인과 결혼하여 경건한 자손을 낳고자 하는 그 가장 평범한 신앙 인으로서의 정상적인 욕망마저도 포기하고 고귀한 결혼 생활을 하나님을 등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버지의 아가페 사랑을 설명해주는 교제로 사용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게 됩니다. 나는 이 호세아 선지자를 구약에 있어서 사랑의 선지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기록하고 있는 이 호세아 선지서는 흐느끼면서 자기의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불붙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깨우치는 교훈이기보다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흐느끼면서 눈물과 피로 써내려 간 연애 편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호세아 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제 1장과 3장에서 개인적인 자기의 소명과 결혼에 대해서 말한 다음에 그 다음에 4장서부터 마지막 14장까지는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진술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5장 마지막서부터 6장까지의 부분에서는 실로 복음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철저하게 주님을 버리고 세상의 번영에 취해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거나 주님보다 우상을 섬기면서 그것이 국제화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 신앙들이 그 시대에 가득하지만 그러나 언젠가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고통받을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을 받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의 관계를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들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고통받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실 것이요 우리를 때리셨으나 고쳐주실 것이다.’ “이틀 후에 삼일 후에”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속히 우리를 용서하시고 고치실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알자.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런 놀라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의 신앙적인 부흥을 꿈꾸고 그리워하며 이 선지자는 흐느끼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이 사랑의 편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끓어오르는 사랑을 가지고 이 편지를 적어 내려가고 그리고 5장 마지막 절과 6장 앞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흐느끼고 회개하며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치셨으나 때리셨으나 싸매고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를 알아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알자. 그분께로 돌아가자 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의 돌아옴에 대해서 꿈을 꾸며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딱 끝나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현재 상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선지자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맨 정신으로 돌아가서 에브라임과 그리고 유다를 향해서 한탄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전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찌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찌하랴 너의 인애가 아침구름 같고 새벽의 이슬과 같도다”
에브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만들 때 가장 커다란 지파가 에브라임이었기 때문에 에브라임이 애칭입니다. 이 선지자 호세아는 북 왕국의 선지자였지만 남 왕국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는 두 나라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두 나라가 아니라 한 나라였고 그리고 그 한 나라, 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은 역시 유다였다는 사실을 신앙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북 왕국 에브라임이 하나님을 떠나고 방탕할지라도 유다만이라도 신앙을 장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그러면 이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두 나라지만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한 나라이기 때문에 유다를 중심으로 역사 하시는 그 하나님이 모종의 은총을 북 왕국에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나 북 왕국의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배교의 생활을 해나가는 그 백성들을 보면서 절망한 가슴을 안고 남 왕국을 바라다보니 남 왕국은 더더욱 소망이 없이 신앙을 버린 백성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찌하랴 유다야 네게 어찌하랴” 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탄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내가 너를 어찌하랴” 하고 지금 묻는 이 장면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 자신도 하나님 안에 있는 이 마음을 그 백성들에게 알기 쉽게 전해주도록 묘사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묘사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 자신의 어떤 번뇌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 이 에브라임을 어떻게 할까. 이 백성 유다를 내가 어떻게 할까. 하나님 안에 있는 이 번뇌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번뇌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남 왕국 유다나 북 왕국 이스라엘 즉 에브라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애”는 무엇인가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것인가 인간에게 대한 것인가. 성경은 그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듯이 이웃에 대해서 선한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통합되지 결코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인애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은 즉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만들까요? 율법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수많은 표준들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그가 살아가는 삶이 이웃에게 해로울 수가 없고 그 이웃에게 고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정신 그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 정신에 의해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남 왕국 유다나 지금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돈에 취하고 물질적인 번영에 취해서 미친 듯이 세속적인데 탐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율법이 읽혀지고 있었고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 제사장이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강포하게 살아가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고 음란하고 부도덕한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종교 제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의 삶이 어떠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일날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오는 그런 형식적이고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혀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우도 자기의 굴을 알고 소나 말이나 나귀도 자기의 구유를 압니다.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을 알아보고 닭이나 개도 자기에게 사료를 주는 그 사육 자를 알아봅니다. 하물며 이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철저하게 죄악 가운데 물들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지금도 그 언약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서에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연애의 때를 깊은 그리움을 가지고 추억합니다. 사실 광야 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따랐던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그랬는데도 호세아 선지자가 그것을 추억하는 것을 보면 지금 주전 750년경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게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독립선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 주님의 은혜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저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보편적인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교회를 볼 수 있고 어디에 가든지 교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에 이끌려서 교회에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한 마디로 장담을 하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들이 모두 교회에 나오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뵙기 위한 간절한 갈망과 그리움 때문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기대나 사랑,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만남으로서 내가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간절한 영적인 기대라기보다는 습관에 의해서 나오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라가 I.M.F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빚에 몰리던 사람들이 투신자살을 하고 약을 먹고 죽고 단란하던 가정들이 다 부서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수많은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어려움을 극복해야 된다는 국민적인 합의를 가졌습니다. 더 절약하자는 운동도 있었고 그리고 더 많이 힘쓰고 애써서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힘을 합해서 극복해보자는 그런 함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외화가 바닥이 나고 경제가 도탄에 빠진 것은 단지 우리를 물질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만들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백성들이 아무 것도 제고가 남지 않았을 때 그것은 단지 불편함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과 은혜에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한 시대의 자기의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다음에는 항상 그 시대의 교회를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교회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보내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셔서 그들을 감동시켜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아주 신기한 규칙이 하나 나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철저하게 타락하고 여호와의 유일신 신앙이 거의 잊혀 가는 때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아주 걸출한 주의 종들을 그 시대에 보내십니다. 이사야가 그랬고 에레미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엘리사가 활동하던 때는 북 왕국 그 유명한 이세벨과 아합의 때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렇게 패괴하게 모두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무너진 시대인데 정말 순결한 마음을 가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와 눈물로 가득 찬 선지자 호세아를 보내시지 않습니까?
부르짖는 사자와 같은 용맹으로 한 시대를 예언했던 아모스 같은 선지자를 바로 그 어두운 시대에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눈물로 호소하고 어찌하든지 그 백성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권고와 책망을 그치시고 이제는 한 시대의 교회들을 거두어 버리십니다. 오늘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주님만으로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적당 주의 적인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중 간첩과 같은 태도를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고 말씀의 맛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으로 가도 결코 그 세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언젠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 갈피 갈피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추억도 있고 은혜의 증거도 있습니다. 마치 수 만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 지층 속에 물이 흘러간 흔적이 남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간 흔적이 있습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중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뿐이지 실제로 과감하게 교회에 자퇴원서를 내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희미하나마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배 시간에 와서 졸다가 가지만 어떤 때는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예배당을 떠나지만 어떤 때는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이런 자각 속에서 예배당에서 예배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도해야 되는데, 순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순종하면 얼마나 좋을까,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엄마도 구원을 받아야 될텐데, 하나님을 열렬히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 나도 하나님을 저렇게 섬기면 참 좋겠다. 진실해져야 한다고 말하면 맞아. 나도 진실해지면 참 좋을 텐데. 그러기를 몇 년입니까? 있기는 있는데 그런데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침구름은 안개가 아닙니다. 안개와 아침구름은 다릅니다. 안개는 구름이 아니라 뿌옇게 끼는 것입니다. 안개는 모여 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퍼져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은 다릅니다. 아침구름은 아침에 일어나면 산허리나 동네 중간에 아주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뭉쳐있는 구름입니다. 아주 영락없는 구름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햇볕이 나면 모두 사라집니다. 안개 끼는 날은 절대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구름이 나오면 그 구름이 잠시 후에 해가 떠오르는데 해가 떠오르고 나면 신기하게 잠깐 사이에 사라집니다. 산허리를 돌다가 사라집니다.
아침에 이슬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언젠가 제가 시골에 가서 아침에 일어나서 개울가를 걸어가는데 개울가에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각도가 딱 맞았습니다. 아주 너무너무 황홀해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은데, 한 25년 전에 기억인데 잔디밭이 전부다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였습니다. 너무 신기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슬입니다. 그런데 불과 30분도 가지 않습니다. 해가 떠올라서 퍼지기 시작하니까 모두 햇볕에 증발되어서 사라졌습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신자가 되어야겠다 라고 하는 이런 바램이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님이 자기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어떤 은혜의 느낌도 물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나 혹은 유다를 이렇게 하나님께 심판을 선고받고 있는 에브라임이나 유다를 여러분들이 이 사람들이 악한 것을 가장해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이들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는 있는데 아침에 잠시 있다가 해만 뜨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는 그런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이면 다시 떠오르고 이슬처럼 아침에 반짝이면서 무엇인가 실제가 있는 것 같다가 태양이 떠오르고 나면 모두 잊혀져버리는 그런 신앙,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만약에 이것마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었더라면 하나님은 망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하나님이 이렇게 스스로 번뇌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그마나마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는 전혀 충분하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속성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번뇌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언약 관계에 충실하신 그 신실함의 배경은, 기초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그 뜨겁고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희미하나마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서 기대를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 있고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는 더 진실하고 순전하게 살고 신앙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믿음을 갖고 싶고 그리고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고 싶은 소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 소원은 간헐적으로 일어났다가는 신속히 사라지는 그런 종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 순간에 일시적으로 밀려오는 간헐적인 은혜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런 어느 한 순간에 특별하게 밀려오는 은혜가 자기의 영적 발 돋음을 위한 한 계기를 마련해줄 수도 있고 은혜 밖에 있다가 은혜 속에 들어가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사는 한 출발점을 새로 지정해주는 작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역시 사경회는 꼭 필요하고 여름수련회는 꼭 필요합니다. 아무리 성숙해도 꼭 필요합니다. 물론 목표는 그런 것들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넘어져 엎드린 자를 이런 사경회를 통해서 일으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일어나서 자기의 믿음에 갈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필요합니다.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도 꼭 필요합니다. 어려운 휴가를 마쳐서 많은 비용을 들이면서 여기에 온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쉬러 온 분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왜요. 왜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나 홀로 가기는 너무 힘겹게 때문에 그래서 무엇인가 나는 나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지만 지체들과 함께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면 혹시 찾아 오실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원히 그런 방식의 신앙생활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잠깐 자극을 받으면 생겨나고 자극이 사라지면 사라져버리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인애 이런 것들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순간에 간헐적으로 우리에게 부딪치는 그런 것 가지고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 평생에 항상 그분의 은혜를 알고 그 사랑 가운데서 사랑의 주님과 교통하며 주님은 나 때문에 행복하고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섬기며 자기를 소진하면서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사는 이것은 숨질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할 그런 숙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그것입니다. 내가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몸에 열매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다시 말하면 인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기대는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같고 주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기대와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무엇보다도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백성을 향해서 언약에 충실하시고 그 언약을 쫓아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들을 구원해주시는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행복해하고 그 사랑을 항상 눈물겨워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을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기대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수없이 실험을 해봐도 나오는 결론은 항상 동일합니다. 주님을 떠난 영혼은 항상 곤고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래도 죄와 슬픔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산 때가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전부였던 때,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화를 받으면서 살아갈 때,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감격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되던 그런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사랑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터질 듯한 유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시장을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좌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동시에 또한 원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항상 죽음을 옆에 두고 생활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 죽을 수도, 내가 그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다면 생명을 보존하는 것과 사랑을 잃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사랑을 선택하고 생명을 버리겠노라고, 그래서 사랑과 죽음은 친구입니다. 문학에서도 항상 이 두 단어는 같이 등장합니다. 쉽게 이야기를 해서 목숨을 건 사람이 아니면 그까짓 것이 무슨 사랑인가 말합니다.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향해 거는 기대입니다.
그런데 한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도 나는 이제 하나님 없이 살겠습니다. 독립선언을 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라는 고백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이 만족을 안 하십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 고백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이 만족을 안 하십니다. 그럼 뭘 또 원하시는가? 하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이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얼마나 기회주의 적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뜨거운 열정이 없는 것도 사실은 기회주의적인 우리의 신앙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갖기를 원하고 세상에서는 환영을 받는 설탕과 같은 존재가 되면서 동시에 복음 앞에서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퍼부어지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세상도 한 품에 안고 있는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삼손처럼 자기가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 하나도 버리지 않으려고 하면서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한 몸에 받아보려고 한 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서를 읽어가면서, 혹은 이스라엘의 배교의 역사를 읽어가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을 말리고 싶은 충동을 우리는 느낍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이 도대체 무엇이 관대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한번도 그 백성을 향해 신실함을 저버린 적이 없는데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은 너무합니다. 주께서 용서해주시면 축복을 받고 번영하고 번영하면 다시 배교의 길을 걸어가고 배교의 (----?----) 축복해주시면 다시 번영하고 번영한 사람들이 다시 배교의 길을 가고 다시 징벌을 받고 다시 용서하고 하는 조금의 진전도 없는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역사가 이 선지자들의 시대에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이 백성을 붙드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존귀하고 소중하신 분이신 데 이 쓰레기 같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학대를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배반으로 갚는 그 백성들에게 자존심도 상하지 않으시면서 그렇게 매달리듯이 이 백성을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더 여러분들을 구속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통해서 구속함을 입은 우리가 과연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저는 21살에 회심하고 구원의 은혜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25년이 넘어 30년 가까운 세월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조금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3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는데 정말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이 내 인생에 전부였습니다. 주님이 제게는 (----?----)정말 제가 순수했던 적이 있습니까? 이 지체의 말이 맞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것이 어디 저만의 고백입니까? 좀 더 살면 혹시라도 좀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저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청년의 나이에 주님 만나서 하나님밖에 없다고 믿고 살아왔지만 정직하게 말씀의 빛으로 살아온 저의 인생과 하나님을 사랑한 마음을 비쳐볼 때 ‘순수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날들이 정말 있었는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너무 짧은 순간들이었다.’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크신 주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데 그래도 잊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미는 것처럼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소원이 솟아납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많은 잡다한 것들이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무엇인가를 우리를 향해서 계산을 하시면서 사랑을 베푸셨을까요? 저 인간을 구속하면 본전 값을 할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그렇다면 아마 돈 많은 사람, 머리 좋은 사람, 똑똑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더 많이 구원을 받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 중에 괴수와 같고 만삭이 되지 못한 자와 같이 존재하던 우리들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불변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얄퍅한 계산이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인해서 그 사랑을 이기지 못하는 그런 인애하심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당신 가까이 부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사랑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런 순수한 사랑을 닮아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를 당신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고 오늘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오늘 이 에브라임과 유다 족속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군사를 양성하고 무기를 많이 만들어서 다윗이래 최고의 판도를 점령했지만 하나님은 흐느끼고 계셨습니다. 어마어마한 흑자를 기록하면서 수많은 외제 생활 필수품들을 수입해서 번영을 구가하면서 여름이면 여름 별장, 겨울이면 겨울별장,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펴면 상아로 만든 침대였지만 하나님은 흐느끼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자기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사랑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향해서 그렇게 살아줄 수 없겠는가. 아침구름이나 태양이 떠오르면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은 간헐적인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이 굉장한 사랑인 것처럼 떠버리고 신앙에 도가 통한 사람처럼 외식하는 그런 것 말고,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언제든지 변함없이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힘입어서 하나님을 버린 배역 가운데서도 진멸 당하지 않고 용서와 긍휼을 입어서 오늘 살아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간헐적으로 아침이슬과 같이, 아침구름과 같이 와 닿는 그런 감정적으로 자극된 사랑을 가끔 느끼는 그것만으로 여러분들이 굉장한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고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시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두 손에 받들어 통에 집어넣는 헌금 봉투의 두께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이 왜 여러분 없이 살수가 없습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의 존재가 삶의 이유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 죽고 나면 생의 모든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어떻게 이따금씩 가슴이 뭉클하면서 뭔가 하나님을 향한 희미한 사랑이 느껴지는 것, 그것을 가지고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름은 주님의 마음에 기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주님을 모르고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을 욕하고 주의 거룩한 교회를 모욕하며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 때도 여러분의 이름 석자는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여러분들을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여러분들을 찾아내서 승복시키고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마치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립문을 열어놓고 오늘밤에도 행여나 올세라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낮은 베개를 고쳐 세우고 잠들던 시골의 부모님들처럼 그렇게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여러분들을 기다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죄악의 길에서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뼈 속까지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은 식었다 더워졌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일관되게 가슴에 불붙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자녀들에게 심판을 행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마음은 분노의 불길보다는 사랑의 눈물로 가득 찹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완벽하게 소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랑이 아니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왜 우리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할까? 왜 나의 신앙은 너무나 형식적일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 속에 정말 하나님의 그 실제의 은혜를 향한 사랑이 있는가? 누가 내 인생에 참된 기쁨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 주님밖에는 내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여러분들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태어나서 짐승처럼 살아가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주의 자녀 삼으셨을 때 여러분들의 가치는 정말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고 일편단심 주님께 붙은 자로서 주께 소속된 자로서 연합의 마음, 즉 다바끄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서 여러분들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쓸모 없었는데 소중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정말 쓸모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주님께 요긴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얼마나 소중합니까? 나는 토요일이나 금요일마다 감격을 합니다. 이제 18-19세가 된 어린 청년들이, 본인들이야 그렇게 말하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청년들이 교회에 와서 청소를 한다. 전도를 하러 나간다. 자기들이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겠어요. 교회에 와서 혼자 휴지를 한 보따리씩 싸놓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는 그맘때 정말 짐승처럼 살았는데 저렇게 하는구나.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게 살아가니까 지체들에게도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들이 와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복음을 한자라도 가르쳐주고 하다못해 유년부실에 들어가서 신발장 안에 신발을 하나 올려놓아도 그 섬김을 통해서 그 수많은 지체들이 유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밤거리를 지나가 보면 아저씨 한잔하고 가세요. 좋은 여자도 있습니다. 놀다가 가세요. 잡아끄는 애들을 이렇게 보면 똑같이 교회에서 만나는 그 청년 같은 애들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합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인생이 그렇게 바뀌어지게, 그렇게 될 수 있는 인생을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빼놓고는 뭐가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해서 학벌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만 공부를 많이 하고 더 야비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칼을 내놓고 다니는가, 품에 품고 다니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이지 무슨 차이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인생이 빛나는 인생이 되었고 그래도 쓸모 있는 인생이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사람이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여러분들이 주님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별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옥 속에서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자기의 심복을 삼은 오네시모의 이야기에 기록된 빌레몬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자인 빌레몬의 집에서 무엇인가 사고를 치고 도망 나온 노예였습니다.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명수배 되어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옥 속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정성껏 그를 돌봐왔고 그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갇혀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네시모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 아! 나의 소중한 아들, 그리고 나의 심복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이 오네시모를 내가 너에게 돌려보낸다. 그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 내가 다 알지 못하지만 무엇인가 너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내가 갚아줄게. 나에게 돌려라. 그 대신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친 노예로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따뜻하게 맞아다오. 이 오네시모에게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나를 생각해서 맞아다오. 너는 아직 모르지만 애는 내가 옥중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애가 나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고 이제는 쓸모 없는 무익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섬기며 살아가는 나에게 심복이란다. 그러면서 보냈습니다.
오네시모가 무엇이 변했습니까? 옥 속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습니까? 옥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유산이라도 상속을 받게 되었습니까? 고명한 스승을 만나서 인격적인 도야를 통해서 도덕성을 하명 받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그 오네시모가 변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는 걱정거리요 사회에서는 없어져야 할 아주 악한 존재가 하나님을 위해서나 로마를 위해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은 것을 빼고 나면 저나 여러분이나 무엇을 볼 것이 있습니까? 정말 쓸모 없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제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소년 때 꾸던 꿈이 꾸어졌다고 하더라도 어떤 웬만한 후진 대학교에 가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개똥 철학이나 가르치고 이상야릇한 글을 써서 젊은이들에게 혼란이나 일으키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소망대로 다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소망대로 안 되었다면 이것저것 다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이상주의 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숙제가 무엇입니까? 숨질 때 되도록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이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소유한 것이어야 합니까? 변함없이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과 사랑을 힘입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번 용서를 받고 긍휼의 은혜를 입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반응도 성숙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숙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압니다. 그리고 이전에 돌같이 굳어져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던 여러분의 마음에 이따금이라도 주님의 사랑이 밀려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없이 넉넉히 살 수 있고 신앙이 뭐 말라비틀어진 것인가 하고 무신론에 빠졌던 여러분들이 ‘우리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그 고백을 하게 된 것은 정말 대단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만으로도 살 수 있는 사람, 세상이 어떻게 변하여도 삶의 상황이 어떻게 요동칠지라도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주 되신 주님을 깊이 공경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의무요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 그 아래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눈뜨고 그 사랑 속에서 하루를 숨쉬고 마지막에 주님의 품에 안겨서 하루를 마치고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마지막 그 날도 그분의 품에 안긴 사랑에 충만한 교제 속에서 마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인 여러분들이 꿈꾸고 그리워해야 할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오늘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희귀한 시대, 아침구름과 같이 사라지는 사랑, 아침이슬과 같이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사랑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는 누구보다도 정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행복은 소유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의 만족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종종 행하는 버릇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참다운 사랑의 부어짐, 그리고 하나님과의 파기할 수 없는 언약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과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대신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이제 여러분, 한번 결단하십시오. 이제 또 한번 여러분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침구름과 같은 사랑, 이슬과 같이 간헐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기보다는 이따금씩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맛을 보는 그런 삶으로서는 이제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화를 받은 적이 있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잠시 스쳤다가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왜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과 남 왕국 유다 백성을 향해서 선지자가 “너희의 인애가 아침이슬과 같다”는 이야기는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을 사랑한 것도 사실인데 이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번영과 결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침구름과 같고 그치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새벽이슬과 같은 이유는 그 사랑이 하나로만 쏟아 부어진 사랑이 아니라 나뉘어진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의 번영과 영광도, 다시 말해서 세상도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이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하기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다시 말해서 무슨 뜻인가 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은 한 인격 속에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지금 이렇게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면 이 세상의 번영 때문이었습니다. 우상 숭배에서 오는 재미, 세상의 번영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여름이면 여름별장, 겨울이면 겨울별장 향락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그 번영한 삶이 주는 그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런 세상 사랑이라는 것은 모두 죄를 생산해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결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격이 최고도에 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완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순결입니다. 도덕적인 정결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긴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몇 마디의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우리의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사랑은 이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일을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산다고 해서 세상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기는 있었지만 아침구름과 같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세상을 향한 이들의 사랑이 워낙 집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향한 사랑을 끊어 버려야지 만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유다 나라의 역사에서 보면 가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결단하고 끊어버리는 혁명적인 결단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 놀랍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었습니다.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하나님께만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갈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차지 않으면 항상 목마른 사람처럼 헐떡이는 데 결국은 그 답은 세상을 향한 사랑을 정리하는 것인데 그러면 왜 세상을 향한 사랑과 결별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세상을 향한 사랑을 정리하고 결별하지 못하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결국은 불순종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집착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마음은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신자가 죄를 짓는 그 순간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표현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고 신자가 죄를 짓는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강한 집착입니다. 그것 때문에 못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집착하고 사랑하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정리하고 나면 자기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존재는 습관에 기대어 살지 않으면 그 사랑은 인간적으로 말할 수 없이 불안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으로 세수를 하러 욕실에 들어가고 다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누가 무엇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만큼 습관에 기대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딱 정리하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불순종 속에서 그렇게 안락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것을 치워버렸을 때 그때에 그는 근본적으로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사랑함으로 누릴 수 있었던 그 안락함, 세상을 사랑함으로 누릴 수 있었던 그 안정감은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팔아서 그것을 산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고 그 집착을 끊지 않고 결별하지 않고 살아감으로서 받을 수 있는 정식적인 위안과 안락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뜨거운 사랑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애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여름날에 땀을 뻘뻘 흘린 목마른 사람에게 그가 이 한 모금의 생수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데 한 종지의 간장이 이것을 대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에 대한 집착, 우상을 숭배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는 두려움들을 믿음으로 끊고 내 꿈과 소망, 내 존재와 그리고 나의 모든 행복과 불행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하고 그분의 은혜의 세계를 향해서 투신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에 세계를 여행해본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도 안 적이 있었을 것이고 혹은 책을 통해서도 안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고뇌하면서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그 애착하는 세계를 결별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기록들도 여러분 읽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투신했을 때 하나님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사랑의 세계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참된 만족은 그리스도 없이 세상에서 얻는 행복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진술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침구름과 같고 새벽이슬과 같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결단하고 돌이키지 못하게 하는 이 요인들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고 그 집착을 끊고 그리고 내가 이제까지 집착하고 사랑하던 것들과 결별을 고하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에 투신하면 주님도 잃고 세상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주님만을 사랑하지 않던 삶을 청산하고 주님만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던 세상의 집착들을 포기하고 주님 한 분만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그분의 은혜의 세계에 투신하면 이제껏 여러분들이 맛본 적이 없었던 그 가슴 벅찬 사랑의 세계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성실하심에 눈물겨워하고 저녁마다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찬송하면서 잠자리에 들 수 잇는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평화를 누리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인애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견고한 삶을 구축해 가는 진실한 성도들로 돌아서는 것, 이것이 바로 이번 수련회에서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제사보다 값진 사랑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上)”
그렇습니다.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충분한 성도의 삶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그런 사랑과 인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향해서 탄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 자신을 미지근하게 섬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버림받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씀 속에도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을 인해서 탄식하셨고 대회와 성회와 절기로 성전 뜰에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보고 탄식하셨으면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그런 사람들이 드나들고 제사하는 그 성전 문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누군가가 닫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뜨듯 미지근하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견디기 힘든 모욕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그런 식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거짓된 자존심을 심어주시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그런 마음의 표현은 진짜로 성전의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든지 아니면 성전 뜰을 밟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없이 성전에서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든지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의 더 간절한 마음은 그런 주님의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내용과 중심이 있는 그런 예배와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가득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애를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호세아 시대나 오늘날 우리의 시대나 매우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소수는 물리적으로는 소수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다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문답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은 죄인이 많아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 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멸망한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방탕한 소돔과 고모라의 그 수많은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오히려 소수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의인 열 사람, 그 사람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수많은 소수는 멸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한 사람이 다수이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다수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버린 배역의 시대를 통해서 탄식하십니다. 에브라임아 유다야 너희의 사랑과 그 인애가 아침구름이나 새벽 이슬과 같은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내가 너희를 뜨겁게 사랑하자니 너희들이나를 사랑하지를 않고 내가 너희를 버리자니 내 안에 있는 너희를 향한 긍휼히 너희를 버릴 수 없게 하는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처럼 주님을 뜨듯 미지근하게 사랑하는 그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수많은 다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사람, 주님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는 사람, 지금은 주님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못하지만 평생의 소원이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것이 숙명인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삶을 꿈꾸고 그리워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바꾸시고 역사를 고쳐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유다 자손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가르쳐서 오늘 성경은 “그들을 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싸움을 하거나 혹은 대적을 상대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나니 심판은 바라는 빛과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고 우상도 섬기고 세상도 사랑하며 번영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상대하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실 사람이 보기에 가장 힘이 없는 것과 같은 그 무기를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를 등진 백성들에게 군대를 보내신 법이 없습니다. 무장한 천사를 보내어서 그들을 진멸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일먼저 당신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종들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고 주님을 끔찍이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는 길에 낙망하지 말고 걸어가도록 등을 밀어주는 추진역할을 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을 향한 인애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고 주의 엄위하심과 의로우심을 생각하면 큰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내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이 풍진 세상에서 억압을 받고 박해를 받지만 그러나 주님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불행하게 당하는 이 고통을 결코 좌우시하지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모순으로 가득 찬 내 주변의 삶을 평정시키셔서 주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주의 의로움과 주의 큰 영광을 목격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으로 가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마음에 걸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회피하고 싶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정곡을 찌르고 도전해오는 설교나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 앞에서 그들은 귀를 막고 싶어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적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애로 가득 찬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을 향한 공포가 없지만 주님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주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깊이 공경하며 살아가는 이 삶을 택하지 아니하면 그는 항상 번민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합니다.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만을 깊이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최대의 숙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금 죽어도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양다리를 걸치고 이따금씩 마음에 간헐적으로 다가오는 사랑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대단한 신앙의 사람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많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피할 수 없이 어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이 마치 나를 대적하고 계신 것 같은 그래서 주님이나를 무릎꿇게 하고 내 가는 길을 막고 그리고 나를 꺾어버리시려고 하는 의지를 선뜻 선뜻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주님을 향한 인애가 가득 찬 가운데 주님을 섬기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역할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우리를 쳐서 우리를 공격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진멸하시기 위함이 아니오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고치게 하시고 우리의 가는 길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강력하고 더 권세 있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고 선포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우리의 고집이 그만큼 심각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되는 양심의 가책이나 반복되는 하나님의 동일한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할 때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동일한 하나님의 음성을 대할 때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들을 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의지는 너무나 단호합니다. 자기의 백성의 육신을 멸할지라도 그 영혼을 빼앗기고 싶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누누이 징계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에 또 다른 표시라고 하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기의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 자식이 얻어다 기른 자식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낳으신 참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강력히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유다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고 그들을 말씀으로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소원이 그 백성들을 치고 공격하고 그 백성들을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역사 속에 오셔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말할 수 없는 프라이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말할 수 없는 사랑,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독점적인 관심 그것들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셔서 표현하고 싶어하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셔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부모라면 모두 자기의 자식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자랑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자식을 자랑할 이유와 근거를 찾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진대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자 하나님이 그의 정결한 믿음을 사단에게까지 자랑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사람이 없고 등경에 모두 두는 것처럼 자기의 백성들이 진실로 당신을 공경하고 자기의 백성답게 살기만 하면 어떻게 하든지 그 백성을 사랑하고 그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신 독점적인 은혜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자랑할 것이 있어야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아침구름과 같은 사랑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져 가는 이슬과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실하지가 않았습니다. 견고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그것은 정직한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 보여야 할 사랑의 태도가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반복되는 하나님의 경고와 거듭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그 백성들이 돌이켜 서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심지어는 그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순전하게 전해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음성에 귀를 막은 사람들을 향해서 행동을 개시하십니다. 왜냐하면 온 몸이 성하고 멀끔한 채 짐승의 길을 걸어가기보다는 어디가 얻어맞고 터져 피가 흐르면서도 사람다운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번쩍 하고 허공을 가르며 온 천지에 비치는 번개 빛은 다가올 우레의 예고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인애를 거부하고 주님만을 사랑하고 살아가야 할 성도의 신실한 의무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이제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수없이 권고해도 듣지 않으면 그의 삶 속에 다가오셔서 그의 삶을 흔들어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는 무디지만 자신이 익숙해진 삶의 환경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들의 삶의 환경을 흔드십니다. 잘나가던 사업을 도산에 빠지게 하실 수도 있고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건강의 위협을 경험하게 될 때도 있고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던 관계들이 깨트려져서 세상사는 모든 재미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내버려두신다고 할지라도 영혼의 말할 수 없는 번뇌와 고통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내버려두시고 밑도 끝도 없는 무서운 공허감에 시달리도록 만들기도 하십니다. 그때 수없이 들려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불안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때리고 치시고 꺾으시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복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하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무엇이 관대 우리 같은 사람을 향해서 복수심을 느끼시거나 보복하고자 하는 감정을 가지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환난과 시련의 도가니에 넣고 불피우면서 우리를 흔드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깨트려서 복수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삶의 껍질을 깨트리셔서라도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바윗덩어리와 같이 수없이 파도가 와서 때려도 수 백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서있는 바위와 같이 요동도 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흔들어놓으셔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마음의 문을 열어서 우리의 영혼에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게 하시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마음을 흔드시려고 우리의 삶의 껍질을 부수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 합니다. 주님의 목 매인 사랑의 음성에 반응할 수 있는 영혼의 감각은 사라졌어도 육체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육적인 감각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곤고해지면 괴롭고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트려지면 세상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으면 견딜 수 없이 괴로워서 죽음을 생각하고 그리고 사람조차 만나기 싫어지고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외톨이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혹독하리 만치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고,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린 대가로 움켜쥐고 살아왔던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뼈저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세상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의 대가는 세상으로부터 냉혹한 배신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자기가 주님을 사랑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랑을 선물로 받지만 세상을 사랑한 사람의 대가는 너무나 씁니다. 아주 조금 세상을 사랑한 이유 때문에 가혹하리 만치 긴 날들을 영적인 어두운 터널을 지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가져가시기도 하고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앗아가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무 것도 아니고 남아 있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은 결국은 사랑의 싸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 한 분의 사랑에 만족하며 살고자 하는 신앙적인 자아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님 사랑 하나로 살 수 있겠느냐고 우리를 유혹하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 유혹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성도들을 끊임없이 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까지 진전을 보셨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단계입니까? 이제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인가 여러분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제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끝나고 이제는 잠잠한 가운데 하나님이 행동으로 여러분들에게 시작하셔서 여러분들의 삶을 뒤흔들어놓고 있습니까? 폭풍 가운데를 지나시지는 않습니까? 누구도 도울 리 없어서 어두운 밤이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는가 한탄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연단 하는 하나님의 시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을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눈을 감고 잠이 들면 눈뜨기 싫은 혹독한 시련의 때를 지내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아니지만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고 지리멸렬한 인생,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지루한 인생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시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 모든 재앙의 한복판에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만드십니다.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도록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하찮게 대하시며 이 세상에서도 쓸모 없는 사람이 되게 만드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부뚜막에 있어서 모든 음식을 만드는 일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귀한 음식물을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는데 요긴한 소금으로 쓰여집니다. 그러나 소금이 그 맛을 잃고 나면 그것은 밖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소금을 오늘날 우리와 같은 천일염을 쓰는 것이 아니라, 늘 그것을 읽으면서도 소금이 어떻게 맛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하는 그 역사적인 배경을 읽고 나니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천일염이라는 것은 암염을 사용했습니다. 바위 소금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은 순수한 소금이 아니라 광물질이 섞여 있는 소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작용에 의해서 소금기가 녹으면서 다 빠져나가고 나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는가 하면 광물질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을 음식에도 넣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길거리에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간절한 소원과 기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귀를 기울이고 돌이키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로 할 때 듣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잘못하지 않은 것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실 때 돌이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랑을 되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잠시 하나님을 떠났던 것을 인해서 오히려 다시 만난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에 힘써야 할 의무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 연약함 때문에 강해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한마디로 말하기 힘듭니다.
다윗이 범죄의 길로 들어서서 하나님을 잠시 떠났습니다. 어째든 그것은 그가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아직 하나님 섭리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은 만약에 다윗이 그렇게 잠시 하나님을 떠나는 실패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순도 높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어서 때로는 우리들의 눈에 다윗의 실패조차도 아름다워 보이는 착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윗의 실패가 아름답기보다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신 하나님의 그 고치시는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그 사랑을 인해서 감격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의 축복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선택되었고 그 사랑으로 뽑힌 바 되어서 지명하여 불린 바 되어서 “너는 내 것이라” 지정함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관심이 없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삶을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수많은 오대양 육대주를 감찰하시는 것보다도 당신의 외아들을 피로 값 주고 사셔서 구속하신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 일에 더 골몰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까지라도 주께 열납 되기를 바란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여러분들을 향해서 주님이 행동개시를 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돌이켜서야 합니다. 주님만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후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이외에 내가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은 정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나의 사랑을 독점하시기에 충분한 분이시라고 믿으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내 인생에 경험되는 모든 번영과 축복들이 의미가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에 여러분들을 향해서 이미 행동개시를 하셨다면 여러분들은 더더욱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끝이 없으신 것처럼 또한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그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열정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한 손을 잘라서라도 새사람을 만들고 싶어하시고 한 다리를 잘라서라도 그를 정말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행동을 개시하셨다면 이미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폭풍 속에 시달리며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주님을 아는 사람들 사랑하고 의지하며 돌보아주며 살아가야 할 그 사람들은 우리의 섬김에 대상이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는 축복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인해서 복을 받아야 할 백성들입니다. 일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불쌍한 우리의 가족과 그리고 핏기 없는 얼굴을 한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아직은 나보다도 훨씬 연약한 지체들을 사랑과 눈물로 섬기다 죽어도 우리의 인생이 짧은데 좀 먼저 주님을 믿고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하는 우리를 인해서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교회나 우리의 지체들이나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를 고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에 교제로 그들이 사용되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어느 지체가 저보고 많이 변했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금도 화나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과 악수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눈가에 이슬이 고여있고, 어떤 사람들은 황망히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며 인사도 하지 못하고 피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아무 일도 일어난 것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마음만 더 곤고해진 것 같은 표정을 가지고 악수를 청하는 나의 손을 힘없이 붙잡을 때 나는 그 악수 속에서 파리한 영혼들을 봅니다. 그분들의 얼굴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몇 번 마음속에 강한 자극을 느꼈습니다. 그래, 내가 죽기 전에는 네가 살 일이 없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죽고 다른 사람들은 살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님의 사랑을 부인할래 야 부인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의무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내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언제나 사실입니다.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우리 서로 서로가 주님을 향해서 잘 죽어서 그래서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살도록,
보십시오. 우리를 주님이 부르셔서 수많은 사람들의 복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서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삶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새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모든 문제에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 두 가지와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첫째는 제사요, 두 번째는 번제였습니다. 이 부분은 문학적으로 평행법, 혹은 대꾸법을 사용한 수사구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는 것이 대꾸이고, 제사와 번제가 대꾸가 되고 있습니다. 번제는 제사보다 구체적으로 심화된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애보다 더 구체적으로 심화된 것이기 때문에 절묘한 대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대구일 뿐만 아니라 의미적으로도 점칭적인 대꾸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제사를 싫어하시는가. 아닙니다. 제사는 하나님이 범죄한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의 제도 자체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베풀어진 제도입니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번제는 제사 중에서 번제라고 하는 한 형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다함이 없는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는 것은 제사 자체의 거부이기보다는 그 제사가 무엇인가 제사로서 갖추어야 할 결정적인 요건을 결핍했을 때에는 하나님이 제도만 보고 그것을 좋아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요건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 제사상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제사는 제물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와 제물이 의미하는 정신이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치가 깨트려질 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욕이 되고 그 백성들이 그것을 그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사에 있어서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일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사가 의미하고 있는 그 정신을 그대로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물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죽여서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헌물인 동시에 또한 철저하게 죽는 그 죽음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만 공경하고 하나님께만 자기를 다 바치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인생의 모든 의미는 하나님께 예속되는 것이라고 하는 한 표시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물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공경과 거룩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그가 드리는 그 제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향기로운 제사입니까?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견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아브라함을 만나주시는 그 영광스러운 불꽃과 같은 그 임재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짐승을 쪼개어서 하나님 앞에 벌려놓은 제사의 순간에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불꽃과 같은 임재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왕국의 견고함과 축복을 약속하셨던 그 위대한 하나님의 현현은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일 천 번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제사의 자리에 주님이 친히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제사가운데 당신의 엄위와 영광 그리고 그 현존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제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사랑이 아침구름과 같은 너희들이 드리는 그 제사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제사는 형식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고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는 마음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위한 방편입니다. 내가 그래도 주일날 예배를 드렸는데,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우리 엄마 아빠가 교회에 권사님이시고 장로님이신데, 우리가 세례를 교회에서 받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자부심입니까?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거절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보고 제사 제도를 폐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런 광경을 보면서 당시에는 선지자와 제사장 사이에 일치된 신학이 없었고 제사 제도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고 말하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형식적이고 판에 박은 신앙의 생활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결정적이고 중요한 요구를 외면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네가 나만 사랑하는가. 이것을 외면하지 말아라. 대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꾸준히 교회에 나가고 그저 예전과 다름이 없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것 말고 대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차라리 그런 질문을 외면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잠시 그 제사의 형식을 멈추고 중차대한 질문에 대해서 실존적으로 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으로 그 대답에 대해서 반응하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제시하시는 근본적이고 중차대한 질문을 외면하는 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똑같은 논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청산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그따위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만두라고 그렇게 설교를 몇 번했더니 진짜 그만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설교를 해도 똑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교회당에 나와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출석을 하는 데도 안 변하는 사람이 그것마저 집어치우고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가 정말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제대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믿으려면 집어치우라는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똑바로 나와라 그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문학적인 이해가 없습니까? 똑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비탈길에서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뭘 택하기는 택합니까? 하나 그러면 지금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택할 수도 있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하나님을 섬기든지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부터 섬겨오던 그 우상을 섬기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진짜 택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결정적인 선택의 벼랑에 몰아넣었을 때 그때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그리고 우상에게 도장을 찍는 그 사람은 선택된 백성이 아닙니다.
주님이 제사를 집어치우라고 하는 이야기는 똑바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 제사를 드리면서 내가 내 안에 이 제사의 합당한 그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내가 제사를 드려도 그 제사 때문에 하나님이 더 진노하시고 하나님께 더 많은 고통을 드리고 나는 위안을 받지만 하나님은 더 괴롭고 아프시다.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꾸준히 교회에 나옵니까? 여러분들 중에 또 누가 오해할까봐 내가 떠나라는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 떠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냥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계속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기왕에 하나님을 떠날 수 있으리 만치 담대하지도 못하고 그럴 수 있으리 만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십시오. 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좋은 신자가 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행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만 사랑하지 아니하므로 무슨 대가를 세상으로부터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얼굴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돌이키지 않으면 삶이 얼마나 곤고하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피곤하고 고통받고 살다가 교회에 와서 위안을 받아보려고 하면 죽일 듯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가도 마음둘 곳이 없고 교회에 와도 마음둘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의 생활을 가봐도 하나님의 마음둘 곳이 없고 교회에 와서 어떻게 좀 변화를 받나 하고 교회에 와 앉아있는 그 친구를 봐도 마음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시간을 끌고 세월이 흘러간다고 해서 해결이 될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지리멸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고 세상에 가면 세상이 온전히 자기를 사랑한다는 느낌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틈새에 끼어서 세상 축에도 못 들고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의 축에도 못 드는 그런 껍질과 같은 인생을 살면 뭐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제사가 의미하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그 형식을 집어치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 속에 내용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서 되겠는가. 당신 신앙생활이 지금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이렇게 공격을 했더니 기도 생활을 집어 치워버렸습니다. 실화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한참 생각하더니 진짜 읽기는 읽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집어 치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해를 못합니까? 그렇게 도전을 하면 자기의 성경을 읽는 생활이 내가 왜 이렇게 꾸준히 성경을 읽는데 나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될까 생각하며 고민하고 매일매일 기도하는 데도 그 기도 생활이 여러분들을 신앙적인 궁핍과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형식 속에 내용을 집어넣으라고 하는 도전이 아닙니까? 갑자기 순진한 척 하면서 바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너무 싫어하시는 것이 내용이 없는 형식에 가득 찬 신앙생활입니다.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형식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내용을 집어넣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한마디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줄 세줄 네 줄 계속 나오는데 자기의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올라가든지 똑같은 그런 미사여구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기도를 줄여서 예배 시간을 당기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 하나를 진실하게 그 속에 마음을 실어서 내용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기도 한마디를 해도 10분 할 것 2분해도 좋으니까 진실해지십시오. 그리고 솔직해져서 어떻게 하든지 나의 고백과 마음이 하나 되어서 그 기도의 고백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영향을 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도저히 예배에 집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예배가 그 모양이냐고 그랬더니 너무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후 예배를 면제해주겠으니 오전 예배만 드리라고 했습니다. 수요 예배에 안 나와도 좋으니까 세 번을 다 멍하게 앉아서 졸면서 예배를 드릴 바에야 다 집어치우고 한번을 드려도 제대로 드리라고 그런데 그 충고를 받고 그 지체가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형식 속에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불러서 요구한 것입니다. 주일 저녁 예배에 안 나와도 되고 피곤하면 예배 끝나고 가서 구역 예배고 뭐고 다 그만두고 가서 자라, 왜냐하면 어차피 구역 공부를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수요 예배도 힘들면 나오지 말아라. 그대신 세 번의 모든 것을 모아서 한번 드린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마음을 모아라.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정신이 집중된 그 예배를 드려라. 그런데 꾸역꾸역 예배를 여러 달 나오다 빠지다 그랬지만 변화 받지 못하던 그 사람이 그 권고를 받고 불과 한 두 달 안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형식이 있는 것은 참 좋습니다. 젊은이들이 주일날 돌아다니면서 놀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11시 30분쯤 슬리퍼를 끌고 오더라도 교회에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설교하기 직전까지 오는 사람들은 다 이해를 합니다. 안 오는 것보다는 낫다.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 속에 내용을 채우십시오. 가슴을 담아, 마음을 실어 그리고 그 마음을 찌를 수 없을 정도로 신앙도 어린 사람이 수많은 일을 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량 것 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싣고 마음을 담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번제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분주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헌신이라고 그래야 하는데 헌신이라는 말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데 누구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까?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분주함입니다. 하나님 없는 일에 치인 생활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아침에 나와서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새 가족 반 그것 하나 인사하는 것밖에 없는데 집어치우라고 하니까 진짜 집어치웁니다. 그게 뭘 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번제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의 정신 자체가 내가 주님 앞에 다 이 제물을 태워 이 향기를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제물이 불에 타서 모두 제가되어서 없어지고 그 와중에서 생겨나는 그 향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내가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일하는데 혹독한 시련의 불길을 만날지라도 거기서 내 몸과 마음을 다 태워 사라지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헌신된 섬김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그 고백입니다. 그것이 번제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왜 싫어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고백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하는 것입니다. 막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일은 하고 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인애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모든 섬김에 구체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이나 하던 일을 그만두면 실추될지도 모르는 자기의 명예에 대한 집착, 위신에 대한 자기 존중심, 자존감 이런 것들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의 영역 속에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데 매일 연기를 태워서 성전 뜰에서 날리면서 하나님 앞에 거짓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그런데 자기를 위해 숨겨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한 집착이 너무 많습니다. 고백만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한 가지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좋으니까 하다못해 아침 일찍 교회에 나와서 댓돌을 쓸어도 좋으니까 휴지를 주어도 좋고 화장실의 유리를 닦아도 좋으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게 하고 그리고 우발적인 섬김이 아니라 정말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제가 마태복음 6장을 언젠가 한번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참된 신앙을 말씀하시면서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고 한 예수님의 교훈을 소개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행하는 이 섬김이 우리를 하나님과 매우 가깝게 만들어주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조건이 있는데 그 섬기는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의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섬기면 섬길수록 주님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꽉 차서 완전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다 되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섬김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존재가 안 되었는데 내가 이런 종류의 섬김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다가 보니까 그 섬김에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단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멀어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역을 하고 나서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가까워집니다. 차이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무엇을 하든지, 작은 일을 하든지 그 작은 일과 섬김에 자신의 마음을 싣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일을 해나가려고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영혼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의 맛을 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목회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그 세계를 볼 수도 없고 볼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제가 느끼고 있는 하나님의 많은 마음들은 혼자서 명상하면서 알게된 하나님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영혼들을 섬기고 곤고한 영혼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는 영혼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 하는 영혼들과 함께 신음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깨닫게 된 마음이고 전수 받게 된 마음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번제를 하나님이 싫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번제가 싫은 것이 아니라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싫은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번제를 드릴 때 번제에 합당한 마음을 거기에 실어서 그래서 그 번제의 정신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스며들도록 그런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면 놀랍게 바뀝니다.
여러분들이 영혼을 섬기는 직분을 맡거나 교회에서 무엇이든지 직장에서 무엇이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섬기게 되면 반드시 그 섬김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복된 변화에 이르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태도로 섬겨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대하면서 그 섬김에 합당하지 않은 자기를 보고 그 부족한 부분들을 주님의 은혜로 채우려고 하는 그런 갈망하는 마음들을 끊임없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섬김의 태도는 우리를 바꾸어놓습니다. 우리를 고치고 우리를 변화시켜놓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는 채 하나님 앞에 바쳐지고 있는 이 번제를 싫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분주한 섬김, 하나님이 모두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두 가지로 다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인애요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인애에 대한 관계는 곧 번제의 제사에 대한 관계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즉 제사는 범위가 넓고 번제는 그 안에 있는 한 가지이듯이 인애는 범위가 넓은데 그 인애의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히브리말로 ‘다아트 엘로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애입니다. 즉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람에서 비롯되는 사람들을 향한 지체들을 향한 영혼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형식에 치중한 생활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형식에 치중한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결핍된 모든 신앙적인 행위가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형식을 만들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형식을 내용으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형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탁월하게 전도해서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던 사람들에게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고 나니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을 무엇인가로 돕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사랑이 생기고 나니까 방법은 저절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충성과 지혜가 항상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나중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 혹은 악하고 미련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것이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일을 맡겨주셨는데 그것을 잘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몰두하면서 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많이 연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을 제일 잘 압니다. 물론 사랑에 눈이 멀어서 모르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터프한 것이 좋다고 그래서 시집간 자매 하나가 매일 맞으면서 산다는 이야기, 사랑에 눈이 멀어서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랑하고 그를 추구하는 사람이 그를 가장 잘 압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인애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형식이 아무리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그 형식을 유지할 수 있겠으며 유지를 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그렇게 큰 의미를 갖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형식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지만 속히 그 형식이 형식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거기에 가득히 무엇인가 채워지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어 달리고 자기를 돌아보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고갈되면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파악하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우상으로 여겨 허물며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독점하도록 그렇게 씨름해야지 되는데 이것은 모두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투쟁하는 몸부림을 통해서 여러분 각자 각자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과 진실한 신앙의 생활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가득 찬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랑의 감격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루에 한번쯤은 예수 십자가에 나 같은 죄인을 인해 못 박히신 그 사랑 때문에 감격해서 그 눈물로 세상의 욕망들을 쓸어내고 또 한번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수많은 영혼들,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 맡겨주신 이 세상들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과 내가 돌보고 있지만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그 사랑의 마음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감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된 이 것을 한없는 특권으로 여기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갑자기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시련을 당할 때도 있고 주님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도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사역 앞에서 자기가 절대적으로 무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눈물을 삼켜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분투하는 성도의 이 거룩한 삶은 성과로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의 전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우리가 일생을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사람이 다는 저울은 잘못 달수가 있는데 주님의 저울은 정확합니다.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우리의 존재 그대로 주님이 달아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기쁨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기업 되심에 대해서 시편 73편에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밖에는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찬송가는 우리 주님을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고 노래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슴 벅찬 일은 내가 이 땅에 살아서 주님의 사랑을 받다니,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해주셨다니 이것 때문에 감격했습니다.
이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원리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원리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 성령의 역사 하심이 한 사람을 가득 채우고 나니까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을 수 없어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쏟아놓으면서 그가 성령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정복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먼저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다락방에 모인 그 제자들에게 남기신 최후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쩌면 그 말씀이 그렇게 무책임하실 수가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의 땅 끝까지 이르러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 그것도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든지 그것이 아니라 '된다.' 단순 미래입니다. ‘될 것이다’ 언제 성령이 임할지도 대답이 없고 그리고 훌훌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누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락방에서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위대한 선교의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약속을 따라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성령이 부어주심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을 때 그 배에서 솟아난 성령의 은혜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을 적셔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의 예언을 쫓아서 사랑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고갈된 마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섬기도록 주신 그 수많은 기회들을 인간의 방법과 사람의 모든 도구로 불가능한 그 어려움을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 모든 도구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우리는 선교의 현장에서 목회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수시로 봅니다. 그렇게 내 속에서 솟아나는 그 사랑을 보면서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그 사랑이 넘쳐나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먹고 마시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보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이 너무나 건조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에 울 줄 모르는 교인,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며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가슴아파할 줄 모르는 신자들, 주님만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심령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을 정복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먼저 정복되어야 합니다. 강물같이 밀려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분께로부터 그렇게 사랑을 입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오 축복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이 여러분들에게 그리움이 되고 주님과 나누는 교제가 한없는 행복이 되어서 주 얼굴을 뵈며 그 얼굴을 구하며 사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세우고 나서 압도적으로 많이 설교한 주제를 들으라고 말한다면 세 가지로 요약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십자가,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기도하는 일에 매우 약합니다. 정말 마음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마음이 자기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는 이런 영적인 회복, 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보기가 그렇게 많이 설교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충만한 기도의 영은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사랑의 영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언제 기도가 청산유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고 한참 기도해도 일어나고 나면 잠깐 기도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탁월한 기도 생활이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주님만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면서 살고 그 사랑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성도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른땅과 같은 광야를 지나면서도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들판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생명수를 마시는 특권을 누릴 것이며 가시 넝쿨이 가득한 숲 속을 가시에 찔리면서 지날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날 것입니다. 폭풍이 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며 시련이 그들의 기도를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도 성취되고 소망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들이 섬기고 애써오던 모든 일도 두고 가고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결별하지만 주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되고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사랑에 너무 감격해서 주님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지나가다 누구의 이야기만 들어도 견딜 수 없이 복 바치는 그런 사랑의 감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목회하고, 그 사랑 때문에 섬기고, 그 사랑 때문에 복음의 불모지의 선교사가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가 없는 그곳에 가서 예수의 참된 생명의 진리를 전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자들의 발을 씻기며 그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면서 우리들이 점점 더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삶에 있어서 가장 존귀한 가치를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해가면서 사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 사랑에 있어서 진전을 본 사랑이 충만한 지체들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마치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것처럼 사랑의 인격으로 다듬어진 사람들을 흠모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날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그 희생과 고난에 빚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눈물겨워하며 그 완전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잘 살아드리지 않을 수 없는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지 않을 수가 없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인애의 생활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난 노래하네 사랑을 노래하네 주님께
이와 같은 때에 난 높이 드네 손 높이 드네 주님께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정말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우리 같이 쓸모 없는 죄인 중에 괴수를 그 피로 씻어서 정말 주님의 나라에 요긴한 도구로 쓰시려고 우리 각자 각자의 사명의 자리에 세워 주셨을까 할 때에 그때는 정말 주님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이 나의 전부입니다. 세상에 무엇보다도 귀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려도 내가 주님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 고백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항상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잠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심하면 주님보다 세상을 노골적으로 사랑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깃들였던 사랑의 빛은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의 어두움 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던 우리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거미줄이 끼고 그리고 더 이상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영혼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할 줄 모르는 상태가 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는 위기를 만나기도 하지만 죄와 슬픔이 가득 차고 안팎에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성도의 연약한 처지에서 보면 언제든지 이런 일은 가장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몇몇의 위대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나 여러분은 그저 한 시대에 태어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만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언약을 가슴에 새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만 있을 뿐이지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모든 연약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고 어두움이 깃들 때도 있습니다.
쓰러지면서 다시 그 사랑을 잃어버린 죄를 뉘우치며 용서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갈망하는 우리들에게 그 신령한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을 용납하시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셔서 주 앞에 다시 살게 하시는 그 끝없는 용서의 사랑을 힘입어서 쓰러지면서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서 그러면서 단 하나의 목표, 내 생애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의 싸움이라 어찌하면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나의 온 삶이 주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고 주님이나를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리신 것처럼 나도 그분을 위해 나를 버리며 살 수 있을까 고뇌하고 끊임없이 묻고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그 길이 성도의 길입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도 그분을 공경하지도 않고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 악한 죄인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가끔은 쓰러질지라도 주님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합니다. 주님 말고 다른 것들을 잠시 사랑한 내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의 시간을 줄여서라도 단 일년만이라도 주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이 주님이 내 생애 전부인 것처럼 원 없이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을 가진 성도들을 만날 때 하나님의 눈에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로 보일까요? 유능과 무능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참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결별하고 십자가를 붙들게 만들었던 그 동기, 육체에 붙은 헛된 욕심을 버리고 세상의 욕망보다는 고난의 십자가를 따르고 싶게 만들었던 그 근본적인 동기를 다시 붙들고 사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것이 인애의 삶입니다. 그것이 아가페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럴듯한 번제를 드리느냐. 율법에 맞게 제사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내가 정말 이 제사에 합당한 인애가 있는가. 내가 이 번제에 합당한 자기 죽임이 있는가. 내가 죽어야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서 사는데. 이런 고민이 우리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물으신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왜 실패했는지 앞으로 그런 실패를 되풀이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에 대한 다짐보다도 훨씬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 검은머리가 하얗게 새어서 파뿌리까지 될 때까지 세월이 흐르고 나면 많이 변할 것입니다. 검은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윤기 있고 팽팽하던 여러분들의 얼굴은 굵은 주름에 패일 것입니다. 건강하던 육신은 날로 후패해 갈 것이고 열심히 섬기던 자리는 여러분들의 후배에게 물려주고 여러분들은 뒷전으로 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삶의 환경이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감격, 그래서 그 사랑을 전하고 싶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인애의 마음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말기를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사라지지 말기를 바라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주께서 부르실 때에 주님께 두 팔을 벌리고 갈 때에 그때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도록 그날까지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끊임없는 진전이 있도록 우리들이 이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인애를 가능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놀라운 감화와 그 은혜가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나를 아는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그들을 버리고 그 자손들도 버려서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지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내일 설교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거짓된 사랑들을 몰아내고 우리가 순수하게 어린아이처럼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될지도 모르고 목사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었을 때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만들었던 그 원래의 자리, 거기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주님의 인애가 내 안에 가득해서 무엇이든지 내 인생이 주님 쓰심에 합당하도록 쓰여질 수만 있다면 주님의 축복을 받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것 중에 하나만 될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 한없는 영광이 되겠다 라고 생각하던 그 초심으로 우리들이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일 때문에 겨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더더욱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격과 성품에 매료되어서 사도 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는 그런 사랑의 고백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도록 끊임없이 형식적인 신앙의 생활을 타파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분주하게만 살아가는 그 영양가 없는 삶을 배척해서 정말 신앙의 참된 실체인 이 아가페의 사랑에 접근하고 그렇게 해서 변화되는 여러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하나님을 아는 지식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下)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제사로 표현된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그리고 인애를 결핍한 번제로 표현된 쓸모 없는 분주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인애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래서 결국은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 통합된 인애의 삶이야말로 일평생 성도들이 견지하며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러나 어제 논증한 바와 같이 우리들 가운데 이렇게 견고하게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이 일시적으로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가지고 있을 뿐 견고한 사랑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사실 그의 내면의 세계를 뒤집어보면 그가 그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 기초하지 않고 단지 일에 대한 성취감이나 혹은 그 일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상황 때문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애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의 배어야 할 덕목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인애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말과 그리고 우리의 행실과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삶과 마지막에는 우리의 죽음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성도의 신앙의 승리는 사랑의 승리요, 한 성도의 신앙의 실패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실패가 있습니다. 한쪽에서 실패한 것은 다른 쪽에서의 성공으로 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실패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다시 보충할 수가 없고 그 전세를 역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다 더 내면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통찰들을 가질 필요가 있고 신앙의 진정한 본질이 우리의 삶에 껍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진정한 영적인 관계와 그리고 그 관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우리의 내면 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성도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가 주님을 향해 정화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최고의 기업은 하나님 자신인데 하나님 자신은 누구도 자기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인애의 삶이 없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애의 가득 찬 성도들이 되어서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의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인애로 가득 찬 성도들이 삶 전체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소망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가. 주님을 뜨겁고 진실하게 사랑하는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 그 사람은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있기는 있지만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구름과 같고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은데 왜 어떤 성도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견고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일까? 그것을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궁극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기에 대한 대답이 ‘다아트 엘로힘’입니다. 히브리말로 ‘다아트 엘로힘’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어마어마한 광맥입니다. 그것을 한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모두 설명해서 보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성경에 흐르고 있는 그 위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사상을 여러분들에게 간략하게 소개하겠으니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지 그리고 그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으니 오늘의 이 설교가 여러분들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서 정말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정말 주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성도의 성숙과 미성숙을 재는 그 궁극적인 잣대가 어떻게 해서 ‘다아트 엘로힘’이 되는가, 이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단초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저는 이 커다란 주제를 오늘 말함에 있어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 말씀을 드리고 다시 그 세 가지는 두 가지 식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림으로 여러분들에게 이 주제를 풀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크게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 그리고 두 번째는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그 하나님의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야 하는가. 다시 작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우선 첫째는 정확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정의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크게 두 번째로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가에 있어서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함으로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논증하며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서 이 주제를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분이 자기를 선택하고 구원하신 뜻에 합당하도록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근본적인 그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호세아 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아주 이례적으로 진노하시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말씀하시면서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저희를 버리리라”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논리는 내 백성이 망하는 이유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식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백성들의 특징은 율법을 버린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4장에 보면 바로 그런 논리적인 순서대로 나옵니다.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린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은 아주 중요한 논리를 하나 얻게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지식은 아닌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삶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고 지키면서 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함께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포기하면 그는 사실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풀어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그 표현에는 어떤 오해의 여지가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극히 작은 것밖에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근본적으로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이 지식에 관해서 세계의 역사인데 이 지식에 관해서 크게 두 가지의 문화적인 경향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헤브라이즘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헬레니즘입니다. 헬레니즘은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입니다. 그러나 헤브라이즘은 근본적으로 체험적이고 통합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계속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기독교가 국교로 됩니다. 카톨릭이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세계는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교회에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의 영향을 받는 동안에는 인간이 무엇을 안다라고 하는 지식에 대한 사상도 다분히 성경 적이고 헤브라이즘 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 후에 인문주의 운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중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외치게 됩니다. 신앙이 점점 무시되기 시작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성보다는 오히려 과학과 사람의 학문을 더 많이 신뢰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움직인 근본적인 정신이 헬레니즘입니다. 거기에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과 생각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양 사회에 오늘날의 문명에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에 대한 생각은 엄청 달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아름다움이다, 예를 들자면 아름다움이다. 혹은 지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그것들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을 보는데 있어서도 항상 그 관심사가 선, 모양, 대칭, 구조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 헤브라이즘의 생각은 사물을 봄에 있어서 그 사물의 선이나 미 이런 특징, 이런 것들이 아니라 그것에 내재하고 있는 그 본질적인 문제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예가 조선공학을 하는 사람들이 창세기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지으신 그 방주를 쭉 설명한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밖에서 만들어진 배의 설계도를 보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배 안에 들어가서 설명하는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가 어떤 식으로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 앞부분은 어떻고 뒷부분은 어떻고 이런 관심사가 아니라 그 배가 실제로 안에 어떻게 생겼고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으며 그리고 그 안의 제도가 어떻게 되고 거기에 누가 승선하고 어떤 것들이 그 배에 타는가는 그런 생각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 적인 관점에서 지식은 지식적으로 그것을 습득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안다라고 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면 결코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인 생각은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그 관점이 그런 히브리 적인 관점, 성경 적인 관점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내가 저 사람을 잘 알지 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의 주소나 이름을 외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통성명을 하고 함께 인사를 나눈 정도를 가지고는 우리는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지 말합니다. 우리들이 안다라고 할 때는 그 사람과 오래도록 삶을 함께 나누면서 그를 깊이 이해한다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안다”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아트 엘로힘”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지식 “다아트”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야다”에서 왔습니다. 야다는 창세기로 넘어가면 제일처음 쓰여진 것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다”입니다. 동침한 것이 사실 “야다”입니다. 그러나 사실 동침하다라는 뜻이 있는가 하면 사실 그것이 아닙니다.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know” “알다”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성교하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하게 킹 제임스 버전의 번역의 영향을 받은 사전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히브리어 단어 야다를 성경이 번역을 할 때 영어를 know라고 번역을 하니까 그 know를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동침한 것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영어 know 속에 ‘남자 여자가 함께 자다’라고 하는 뜻이 거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놀라운 일이지만 영어의 지식이라고 하는 “날리지” 그 속에 남녀가 성행위를 나눈다는 뜻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제가 영어 책을 많이 읽었지만 한군데서도 현대 영어를 쓰면서 know를 그런 의미로 쓴 영어를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담이 하와를 알매 가인을 낳은지라” 이렇게 했을 때 그것은 “동침하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이상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부의 결합을 통해서 진정으로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깊이 알게 되니까, 물론 그 속에는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실제 야다의 의미는 그것보다도 훨씬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아담이 하와가 누구인지를 경험을 통해서 깊이 알게 되니까 가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것이 ‘선악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그 선과 그 악의 지식의 나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라는 말이 성경 번역에는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나무 한 그루를 세워놓으시고 이 열매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이름을 그 선과 그 악의 지식의 나무라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이 무엇이지를 정확히 말하면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악이 무엇이지를 알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 거룩하신 임재 가운데 에덴 동산에 나타났을 때 황급하게 숨어버렸습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는 단지 지식적으로 선과 악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헬라 적 개념으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경험을 통해서 악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아무도 그 죄에 대해서 꾸짖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우신 분인지를 단번에 느끼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자유 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던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 떨며 숨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 결코 차가운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 파악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호세아서 뿐만 아니라 선지서에 많이 나오지만 시간상 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바로 신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신약으로 넘어갈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아주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도 바울이 왜 무슨 말을 하다가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할례 받은 사람이라고 뻐기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자신들이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을 뽐냈습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이 회고하면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사실 너희들이 육시로가(?) 말하자면 나만큼 정통 유대인이 없다 난 진짜 히브리인이다. 히브리 인 중에 히브리인이오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의 지파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다. 진짜 만약에 육신 적인 그 표를 가지고 정말 참된 유대인인가 아닌가 그것을 너희들이 잰다면 나도 너희들에게 뒤질만하지 않고 정통적인 유대인인 랍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랬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게 이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나아가서는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는데, 무엇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것입니까? 자기로 하여금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것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이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겨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까? 베냐민의 지파였던 것을 뉘우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조차도 그는 후회하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던 생활을 지금 탄식하고 있습니까? 왜 그때 짐승처럼 막 살 것을 왜 그렇게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을까 하고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그렇게 후회하면서 모든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 자랑거리를 부끄러운 수치나 되는 것처럼 지금 고백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자부심, 그것이 그리스도를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못 보게 만든 것입니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그 당시에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구약 시대니까. 그런데 그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가운데 ‘내가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인은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성령 충만한 설교자 스데반을 죽는데 내어주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옷을 지키는 그런 우를 범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니까 막 뼈저리게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 나에게 유대인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태어나지를 않아서 내가 만약에 이방인이었다면 좀더 일찍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 내가 할례 받지 못하는 무 할례 자였다면 정말 선택된 백성이 되기 위해서 길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그 복음을 먼저 알지 않았을까. 내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부랑자 같이 살았더라면 가슴을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하면서 자기에게 없는 그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그 그리스도가 자기의 구주 시라고 진작 붙들지 않았을까 그것을 후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주님을 알고 나서는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그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자기가 이제껏 소중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똥처럼 더럽게 여기도록, 불결하게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바울이 된 변화 속에 근본적으로 그를 사울에서 바울이 되게 했던 핵심이 무엇인가. 무엇이 바울 속에 있었기에 사울을 버리고 바울이 되었을까를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주님을 앎이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에 신약 적인 성취는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면 왜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구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 엄청난 사상의 광맥,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성취될 수 있을까.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계시한 실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잘 살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구원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 주님의 생애, 주님의 가르침, 주님이 누구인지를 보게 되는 곧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구약에 대해서 전문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의 랍비의 길을 걸으면서 종교 지도자를 꿈꾸던 사람이었으니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달 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성경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연구하다가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짤막한 주님과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내가 어찌하리이까” 짤막한 대화가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광 가운데 만나는 현격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만난 것은 신약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열린 것은 신약이 열린 것이 아니라 구약이 열렸습니다. 그때 신약은 열리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이 아직 없는데 어떻게 열리겠습니까. 그때는 성경이 무엇밖에 없었습니까? 구약밖에 없으니까 신약이 있어야 열리지. 없는데 어떻게 열리겠습니까. 이제 자기가 써야지. 신약에 주님을 만났는데 열린 것은 구약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신약 성경은 구약에 대한 이해입니다.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구약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만난 것은 신약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열린 것은 구약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약 성경은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새롭게 알게 된 구약을 풀어놓은 책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논지를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그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사울이었던 삶에 모든 변화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빼어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즉 자기 속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이 없었을 때에는 그는 종교 지도자를 꿈꾸고 살아가는 열렬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세상에서 출세하려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욕망이 종교계 안에 들어온 이외에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가마리엘과 같이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질머리 때문에 될 수가 없었습니다. 혈기 충만한 그런 것 때문에 안 되었을 것입니다. 가마리엘은 사도 행전에 보면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종교 지도자의 꿈을 꾸면서 살았는데 주님을 만난 뒤에 무슨 꿈을 꾸면서 살았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꿈을 꾸면서 살았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일만 교회를 개척하는 꿈을 꾸면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큰 교회를 만드는 꿈을 꾸면서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물론 그는 세계 선교의 초석을 놓았고 성경을 기록했고 위대한 목회자가 되었고 많은 교인들에게 감화를 준 신앙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이 추구하던 바도 아니었고 목표로 하던 바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우리가 이처럼 모여 앉아서 그가 쓴 편지 가운데 한 구절을 놓고 서너 시간씩 설교를 들으며 흐느껴 우는 그런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서 산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꿈이나 이상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 사역이나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하나의 일거리로 만들어서 나는 이것을 위해서 산다. 나는 저것을 위해서 산다라는 과업 중심적인 사람의 시각에서 바울의 영성을 본 것이지 바울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는 선교의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와 기꺼이 바꾼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선교에 대한 비전이 그를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개척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없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산 영역이 선교뿐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아닙니다. 그것은 선교 적인 시각에서 보니까 선교를 위해서 물불을 안 가리고 목숨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개인적인 성화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생명도 버린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그 사람은 사실은 개인적으로 성화를 목표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았던 사람이라고 그런 관점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또 교회 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그것도 필요 없고 저것도 필요 없고 가 아니라 성도들의 진정한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한곳에서 여러 해 동안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많은 성경의 해석 가들이 자기 필요한데로 뽑아옵니다. 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선교의 모델로, 제자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제자 훈련만 평생 시키면서 사는 것처럼 교회 성장을 꿈꾸는 사람들은 개척가로서 이렇게 뽑아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하나님이 주신 사역에 임하는 그 과업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바울의 다양한 모습이지 궁극적인 비전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궁극적인 비전이 무엇인가. 그것은 3장 10절 이하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여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식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알기 위해서 막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쫓아간다”고 하는 이 희랍어 표현을 히브리어로 거꾸로 뒤집어서 옮겨놓으면 무엇인가 하면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할 때 그 “힘써”입니다. “라다프”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PRESS"입니다. 막 달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주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사상이 이런 호세아서 같은 데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대한 사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사람이 개인적인 그 모든 선교 목회, 이런 모든 삶의 다양한 모습이고 궁극적으로 그가 진신으로 그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일평생 예수가 누구인지를 가르치면서 산 사람인데 그런데 이 문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과 나누었던 대화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빛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꾸러진 다음에 조금 정신을 차린 다음에 제일먼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주여 뉘시오니까” 그의 일생은 이 대답을 찾기 위한 일생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가.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주님이 누구인가를 찾기를 원했을까? 왜 그랬습니까? 주님이 누구인지를 참답게 알기만 하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생겨나는데 주님을 아는 지식이 자기 속에 생겨나기만 하면 그의 삶이 그 지식에 의해서 성도로서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탁월한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저 평범하게 “인애”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열렬한 삶을 살았던 사랑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외톨이가 되면서도 그들은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편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도움과 위로를 구하는 대신에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그분께 충성하며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환경과 상황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도 그들은 상관없이 의연하게 서서 연단 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으로 어두운 시대를 헤쳐나갔습니다. 일만 대 일의 싸움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으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자신의 사역의 길을 완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열렬한 삶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모든 공통점들은 열광주의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의 명예를 초개처럼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서의 수많은 영광과 즐거움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야비한 시대에 성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들로 하여금 변천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붙들면서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번영하는 시대에 망가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통곡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두 절망하는 그 시대에 역사를 뛰어넘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낙관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이어지는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갈렙, 그리고 걸출한 몇몇의 사사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영적인 거인 사무엘,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진실한 그리고 열렬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비롯해서 줄을 잇는 수많은 성경의 인맥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그 인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성도의 급수를 재는데 있어서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이 얼마나 치사하고 졸렬하고 세속적인지를 압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지고 성도의 수준을 잽니까? 누구 앞에서 설 때 여러분 주눅이 드십니까? 한 교회에 토박이를 만났을 때 처음 교회를 찾은 사람으로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믿음의 집안에서 대대로 자란 사람들을 보면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신앙이 없고 날라리처럼 굴어도 왠지 내게는 없는 믿음의 뼈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많이 올라가면 그 사람을 여러분들이 여러분보다는 훨씬 나은 성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직책이나 제도를 사람들이 배척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은연중에 거기에 깊이 무릎을 꿇는 모습도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교회에서 심지어는 목회자의 인정을 많이 받는 사람을 보면서 혹시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일을 잘해서 성도들에게 만족을 주는 사람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여튼 나서서 휘두르기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아직 급수가 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자기의 성취 욕에 들떠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서 인간적인 열심을 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그레이드가 높은 교인인 것 같다’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 묻습니다. 그 모두다 배설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배설물과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세속적인 성도인지 압니까? 여러분들은 누구를 부러워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돈 많은 형제에게 시집간 자매도 부러울 것이고, 얼굴이 예쁘게 생긴 자매에게 장가를 간 형제도 부러울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아니면 공부도 별로 못한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한 형제에게 시집간 것도 어떤 때는 부러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도로서 정말 부러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 그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해야 합니다.
사역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이야기해서 세상 적인 용어로 성공한 사역 자들을 부러워해 봐야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성공이라고 표현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했지 자기가 했나. 아무리 바라보아야 무엇하겠습니까? 노래를 못 부르는 동네 애들이 거울을 보고 김건모 흉내를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이고 나는 나의 삶인데, 힙 합 바지 입고 엉덩이만 흔들면 김건모가 되는가. 또 부러워해서 똑같이 되어본들 뭐합니까? 모두 세상의 영광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말 그렇게 큰 교회가 부럽습니까? 저는 몇 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도 설교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부러운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 내가 껍데기가 다 벗겨지는 것 같습니다. 쭉 읽어 내려가면 넌 이런 놈이지. 넌 안 그렇다고 말하지만 속 심은 이렇지. 그래도 아니라고 그럼 내가 증거를 대지. 1.2.3..... 쭉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마주할 때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뭐만 있습니까? 듣기만 하면 됩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겠습니까? 번데기 앞에서 무슨 주름을 잡아. 돼지 앞에서 코 벌리기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해도 벅차. 왜 흘러 들어오는 그 자료가 어마어마하니까. 그러다가 그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서 가끔 질문이라도 해보면 그 사람은 왜 그런 질문을 하지. 그러면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뭐가 좀 비슷해야 출력을 하지. 그냥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냥 흘러 들어오는 것을 담기에도 헉헉대는데, 뭐 있지도 않은 것을 뒤적여서 쏟아내서 황당하다는 이야기만 듣느니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런 영적인 거인들이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산에 묘목들이 많아도 거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거목의 그늘 아래서 떨어지는 잎사귀로 비료를 삼으면서, 거기에서 흩날리는 꽃가루로 먹이를 삼으면서, 거기에서 날려오는 꽃씨들로 다시 작은 묘목들을 삼으면서 산이 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제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를 하잖아요. 나는 산 아저씨입니다. 나는 거목이 못 되었으니까 산 아저씨하고 그리고 열린 교회 혹은 조국 교회에 이렇게 묘목을 심는 중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은 묘목입니다. 그래서 특히 우리 교회 청년들을 보고 목사님 교회의 청년들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우리 교회 청년들 한마디로 말하면 거목이 되기를 꿈꾸는 아직은 묘목들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성숙하게 자랄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우열을 가리는 길입니다. 성도들에게 우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일하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똑같이 사랑하시는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 사랑에 더 깊고 진실하고 열렬하게 반응을 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물로 사랑해주어도 비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로 대해주셔도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그것이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보다 많이 성공하고 지위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이 높고 그래도 기죽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좀 기백을 가지십시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기백을 가지십시오. 나보다 좀더 좋은 직장 다니고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넉넉하게 살고 교육을 좀더 많이 받고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것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한 스타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기가 죽고 그렇게 한다면 정말 창피한 것입니다. 좀 기백을 가지십시오.
장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나이에 변변히 직장도 없고,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잠시 직업 활동을 쉬고 놀면 어떻습니까? 광야에서 연단을 받는 중인데. 아니 진짜입니다. 실패의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안 됩니다. 기백을 가지십시오. 나는 그런 것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이 다 무엇인가 하면 한 가지 이외에는 사람 앞에 주눅이 들거나 내가 그 사람만 못하다는 자기 비하를 갖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가지는 예외입니다. 그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주름 잡지 마십시오. 코 벌리지 말고 인정을 하십시오. 어떻게 같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저 어린 나이에 저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날까. 인정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십시오. 자식 몇 살이라고, 그렇게 누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질적인 차이를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지금도 잘 살지 않지만 더 가난해지는 것과 주님을 더 아는 것을 바꿀 수 있다면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지 않지만 더 낮아져서 더 바닥으로 내려가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내 마음에 늘어날 수 있다면 그 바닥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아는 미천한 지식으로 천년 동안을 제왕 노릇을 하며 살래, 주님을 아는 깊은 지식 속에서 단 하루를 노예처럼 살다가 죽을래 하면 후자를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도대체 어떻게 획득되는가. 우선 그 문제를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함량을 원하는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가장 풍부한 계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보면 주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고 딸을 보면 어머니를 안다’ 한참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고 살다 보니까 심방을 가서 아빠는 없고 엄마만 있습니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를 한번 쳐다보고 엄마 한번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아이 얼굴에서 엄마 닮은 것을 다 빼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남을까요? 아빠가 남습니다. 사진 안 봐도 거의 70%는 알아 맞춥니다. 엄마는 코가 주먹코인데 아기는 딸기코입니다. 그러면 아빠가 딸기코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엄마는 주걱턱인데 아이는 턱이 동그랗고 예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엄마하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아빠를 닮은 것입니다. 물론 또 아빠가 전혀 턱이 없는 사람인데 길쭉한 엄마 턱하고 합쳐져서 이게 중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찾아내면 신기하게 결론이 나오는데 어떤 때는 깜짝 놀라는데 그렇게 다 상상을 하고 있는데 나오다가 현관의 사진을 딱 보니까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나도 참 사람을 많이 상대하고 살았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아니 말 못하는 애를 봐도 아빠가 누구인지 느껴지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는 계시의 최종적인 완성으로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단순한 계시의 전달 수단이 아니라 계시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아무 말을 안 하고 가만히 계셔도 그분 자체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그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미루어보면 유대인으로서 날라리 신자로 살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하나님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호세아가 만난 그런 하나님은 못 만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호세아 정도만 되었어도 그가 그렇게 미련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 속에 나와 있는 풍부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계시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못 만난 것입니다. 못 만났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 지식을 소유하게 되니까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을 그렇게 많이 이해하고 있었는데 구약이 아닌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얻게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의 빛을 가지고 구약으로 들어가니까 구약이 확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그 구약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해주시고 싶으셨던 그 복음의 진리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다 신약입니다. 신약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라고 말할 때 아주 우리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함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인격을 안다라고 하는 지름길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경험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진정으로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사도 바울과 같은 방식의 통로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그렇게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제 잘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가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사실은 제일 재미없는 것이 구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이 지금은 더 뜨겁게 애착이 갑니다. 이런 표현을 하면 좀 과장일지 모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때는 신약 성경을 읽으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 같고 구약 성경을 읽으면 텔레비전 방송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경험하게 될 때에 구약에 대한 이해가 놀랍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약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고는 구약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구약의 뿌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신약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사실 실제 영적인 경험에서 보면 대부분 반대입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구약이 열리기 시작하고 열린 구약을 보면서 지식을 축적하면 신약이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까 잠깐 들었던 비유로 표현한다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고 구약을 읽을 때 구약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의미가 드러나면서 신약을 라디오 방송처럼 들리고 구약은 텔레비전 방송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구약을 그런 방식으로 깊이 이해하고 그 뿌리를 가지고 신약을 이해하고 보면 80미리 시네마 코플을 서라운드 시스템으로 장착된 영화관에서 보는 것 같은 장엄하고 웅장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초점이 무엇입니까? 계속 교회에 잘 나오는데 목표가 무엇입니까? 믿음 좋은 청년을 만나는 것이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이미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대게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머뭇머뭇합니다.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의 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사상을 들어가 보면 신기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계신 것과 동의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다고 고백을 하는 그것은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동일한 고백입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생생한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아주 분명하고 투철한 지식을 체험 속에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생명 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그 연합이 구체화되어가고 실제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단한 결합이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 안에서 풍성히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정말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혜를 받고 정말 충만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낄 때 단지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있다고만 가지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표현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산 것이라” 사도 바울이 내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내 안에 예수님이 마치 살아 계신 것 같이 착각을 느낀다고 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사도 바울 안에 계신 것입니다. 실제입니다. 환상이나 느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이 사람들이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거의 없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 속에 거의 안 계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 있다면 조금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아침구름과 같이,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이 오락가락 한다면 정상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것이다 라고 하는 어떤 느낌들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중입니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취적인 삶은 주님에 대한 열정이나 혹은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취적인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것을 간절히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물을 때 바보같이 어떤 위인을 닮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제 영혼에 가장 큰 고통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에 천박함입니다. 견딜 수 없는 그 지식에 가벼움을 인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오해를 받을만한 여지가 있는 어록을 하나 남기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어떤 설교자가 나에게 우리 주님이 누구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희미하게나마 어떤 빛을 내게 비쳐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때에 존스 목사님이 말했던 그 희미한 빛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존스 목사님, 이 성경 구절에 원어가 이것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히브리어를 좀 하셨나.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아트 엘로힘’ 혹은 신약의 표현대로라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러니까 잘 보십시오. 그 걸출한 설교자에게 자기도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희미하지만 뚜렷한 빛을,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의 빛을 그에게 던져주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총체적인 부분에서 그 설교자가 그 걸출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 설교하고 있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중에 어떤 부분이 자신에게 없다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만든 그 설교자는 그렇게 단순하게 어디서 성경이나 몇 구절 찾아서 신약 서적이나 몇 장 뒤져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인가 희미하나마 주님에 관한 선명한 어떤 불빛을 던져줄 수 있다면 그는 주님을 아는 뚜렷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고 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일평생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그런 빛을 던져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러니까 그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하는 진리의 증언, 그리고 그 증언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기반이 되어 있을 경우에는 자기가 그의 모든 부족한 것을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 결정적이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성품과 인격에 대한 체험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바보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당신이 매일 설교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그 친밀한 교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보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상세히 그림을 그려주어도 이해를 못하는 친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알 수가 있다고,
제가 언젠가 어느 부흥회를 가서 설교를 듣는데 어떤 분이 불쑥 설교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데 자기는 사도 바울을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왜 그런가 했더니 사람들이 모두 사도 바울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해서 자기는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아 너 비켜라. 내가 직접 그분을 대면하리라. 내가 그래서 그 사람의 성경을 다시 쳐다봤습니다. 혹시 신약을 뜯어서 다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다행히 신약은 붙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지. 아니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못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직접 봅니까?
독생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이단 시비에 휘말리지. 그런 것 필요 없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이런, 이런 역사적인 사람들을 짝 드는데 거의 전부다 비정상적인 신앙을 가진 계보들입니다. 신비주의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인가 하면 설 아는 것입니다. 좀 잘 알든지, 아니면 모르면 무릎을 꿇고 나는 아무 것도 몰라. 제대로 좀 가르쳐 줘 그렇게 하든지. 참 걱정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작은 두 번째로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름길이라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가. 그것은 두 가지의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리고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이 둘은 진리만을 경험하고 은혜도 또 다르게 경험해야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구분해서 설명하자면 진리를 경험하는 것과 그리고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위해서 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진리의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증언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은혜는 바로 그런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해서 그것을 이해하는 데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받게되는 은혜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두 가지가 ‘앎’ ‘알다’. 앎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그 앎에 대상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느낀다고 하는 이 정서적인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항상 같이 따라다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두 가지의 경향성을 주셔서 사물을 판단하게 만드셨는데 하나는 사물이 무엇인가 이것인가를 판단하는 지적 판단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어떤 사물을 향한 성향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볼 때는 마음이 막 끌리고 좋은 감정이 생기고 어떤 것을 대할 때는 싫고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적절하게 정확하게 통제될 때 그리고 영향을 받을 때 그때 비로소 정확하게 그 두 가지가 주님에 의해서 통제될 때 그것을 통해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인식에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적으로 볼 때 앎이라고 하는 것과 그 앎에 대상에 대해서 갖게 되는 느낌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는 함께 따라 다니는 통합적인 존재이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그러나 함께 따라다녀도 구분을 할 수 있습니다. 구분은 할 수 있는데 그렇게 구분을 한다면 무엇인가 하면 진리를 깊이 깨달음으로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대뜸 이런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참 모순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도대체 무슨 성경을 읽거나 누구에게 EBS를 공부한 것도 아닌데 그랬는데도 그냥 다메섹으로 가다가 찬란한 빛과 함께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놀라운 회심을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로 그 지식이 계속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그런 경험이 오늘 우리에게는 반복될 수가 없는 것일까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세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경험이 아주 이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도, 그것을 보편화 시켜서 그런 일이 오늘 내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 확률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당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사도 바울을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숫자에 있어서 바울에게까지 가서 무엇인가 분명하게 상세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복음을 전해 줄만한 사람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편견 때문에 그런 것들을 설명해도 받아들일만한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편견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그리스도일 수 없다라고 하는 편견이고 신학적인 편견 이외에 심리적인 편견이 있었는데 그 심리적인 편견은 무엇인가 하면 무엇을 통해서든 어쩌든지 간에 우리 유대인을 헬라인과 하나라고 말하도록 만드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왜 그 놈들은 지옥의 땔감이고 우리들은 천국의 백성들이라는데 무엇이 우리로 하나로 만든다 이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싫다. 그런 심리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역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완고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꺾으시는 좋은 방법은 그렇게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기적 가까운 체험을 통하는 것 이외에는 그런 완고함을 꺾으시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전혀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예전에 가르치던 학생 하나가 옛날에 깡패의 두목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술 을 먹고 집에 가다가 교회에 가고 싶어 술김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강력한 불과 빛이 날라 오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거꾸러지면서 구멍이 난 곳은 다 피가 쏟아지는 경험 속에 놀라운 회심을 하고 자기 스스로 교회를 찾고 그리고 신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런 식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사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가르쳐주면 듣고 그리고 들을 용기도 있고 가르쳐 줄 사람도 있는데 왜 그것을 다 마다하고 수십 만 명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그런 기적적인 경험 하나에 자신의 인생에 모든 미래와 영혼의 운명을 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못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해야지 되잖아요. 더군다나 신자임을 자처하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다시 불신자로 사도 바울이나 김태촌이 데리고 놀았던 그 사람과 같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심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서 서방 파가 싹쓸이를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거기에 남아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지금 김태촌이가 있는 그 자리에 자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그것을 알고 그 결투에서 지게 만드셔서 그래서 퇴장시키셨다고 하는데 나는 맞다라고 봅니다. 그 무엇 하러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제일 먼저 진지하게 깨달으려고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여튼 내가 마지막에 죽으면서 열린 교회에 유언하라고 한다면 ‘잘 들어라’ 그리고 죽을 것입니다. 진심입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언젠가 한번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것, 학원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도 먹고살게 없으니까 그것이라도 하려고, 수강료도 비쌉니다. 실습비까지 포함해서 한 달에 12-8만원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르포를 보여주는데 강사가 수영복 차림으로 학생 하나를 엎어놓고 때를 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를 미는 광경을 손에, 손에 수첩을 들고 열심히 메모하는 것입니다. 웃지 마십시오. 아니 그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쁩니다. 왜 웃습니까? 손에, 손에 수첩을 들고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 때는 때밀이 강사만도 못하구나.’ 조는 사람, 멍하니 널을 놓고 있는 인간, 기껏 설교하고 나서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면 모르겠는데요. 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안 쌓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백발이 얼룩, 얼룩해도 깨닫지를 못한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머리가 하얀데도 하는 짓은 애입니다. 철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역사에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로 성숙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역사와 전통에 빛날 뿐이지 신령한 성숙이 되어야지, 주님을 만나야지 무슨 신령과 관계가 있고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지 무슨 있든지 말든지 하지, 깡통처럼 매일 덜렁덜렁 하고 왔다가 가고, 마지못해서 오고 아니 누구를 위해서 믿습니까? 그렇게 해서 뭐합니까?
내 오죽 답답했으면 어제 말했지만 그 지체에게 내가 말했겠어요. 일주일에 세 번 교회에 나오는데 매일 다른 생각하고 졸기에 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만 나오라. 한번 나오고 그 세시간 동안에 농축해서 집중을 해서 한편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들어라. 그랬더니 두 달이 되기 전에 변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내가 했잖아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 아는 지식이 쌓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적으로 보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을 정상적으로 소유한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그리스도와의 아주 놀라운 영광스러운 만남이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 있고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신비주의 길로 빠져버린 사람들입니다. 신비주의 이야기만 나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아씨시의 프란시스코’를 제가 비난을 해서 미안한데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전기를 읽어보면 황당 무지로소이다 입니다. 계곡에서 막 기도하다가 보니까 여기에 핏자국이 막 났더라. 순 뻥입니다. 기도하는데 여기 어떻게 못 자국이 생깁니까? 여기 가시 면류관이 생깁니까? 그러면 신실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럼 옆구리 열어보면 다 창 자국이 있겠네. 그렇게 도대체 믿을 수 없는 뻥을 카톨릭 교회에서 만들어서 튀겼습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모르면 그가 사랑하는 주님은 주님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주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그가 사랑하는 분이 주님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우상 숭배에 대해서 치열하게 질타를 하는데 이것이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외래적인 종교로서의 우상이 있고 자생종교로서의 우상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차별이 없이 선지자들의 폭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래적인 종교로서의 종교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아세라나 바알이나 이런 것들은 다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자생종교로서의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뿌리가 굉장히 깊습니다. 그것은 벌써 아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만들어놓았던 그 송아지 신상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버리고 소를 섬긴다는 그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이게 형상화를 그런 식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게 절하고 예배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왜 그렇게 성경에서 두 가지 우상 숭배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폭격을 가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슴에 새겨두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이 있고 비로소 경건도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예배보다 먼저이고 경건보다도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저절로 생겨납니다. 주님이 정말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서 주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지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아! 주님이 신실하신 분이시구나. 그것에 깨달음을 통해서 내가 야비함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야곱처럼 막 기회주의로 살던 이런 삶을 청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깊이 녹아져서 그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왜 내게 베풀어주셨을까. 왜 날 사랑하실까. 이렇게 깊이 감화를 받아서 진짜 하나님이 사랑이시구나. 이것을 깨닫고 나면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향을 안 주고 자신 속에 가만히 묶여있을 수 있다라고 하는 방식은 희랍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 적인 사고 방식은 그렇습니다. 역사 하는 것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삶 속에 치열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나가면 잊어버릴까봐.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면 그럼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한번 생기면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번 들어오면 영원히 계속 있는 것인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들은. 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지식은 한번 들어오면 다시 나가는 법은 없습니다. 나가는 법은 없는데 그 지식이 미치는 영향은 흥왕 할 수도 있고 쇠퇴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종종 드는 예이지만 이런 것입니다. ‘엘리’라고 하는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왔습니다. 어느 날, 저 부르셨어요. 그리고 사무엘이 오니까 안 불렀는데 와서 불렀느냐고 하니까 나는 너를 안 불렀다. 조금 있으니까 또 와서 저를 부르셨지요. 아니 너 안 불렀다. 그때에 엘 리가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 하나님이 애를 부르시는구나. 그것을 알았다는 이야기는 그런 지식이 그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예전에 하나님을 그렇게 만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면 엘리가 이런 식으로 충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음에 또 그런 소리가 들리면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그렇게 충고를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아니 왜 하늘에 계신 분이 여기에 와서 히브리말로 하시나. 헛것을 본 것이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 그럴 것입니다. 이 사람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한때는 그렇게 주님을 알았었는데 그래서 그 지식이 있는데 그런데 무엇이지요. 그 지식이 계속해서 경건과 거룩 속에서 살아서 역사 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버리니까 그 차가운 정보만을 남기고 그 지식 속에 깃들여 있던 깊은 경험들은 고갈되어버려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지식을 버렸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4장에서 보면 “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그렇게 말하는데 호세아 선지자가 바로 성경이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때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연애하는 것처럼 따라다녔던 경험을 나눈 지식을 가진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안타깝게 추억하면서 그것을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6장에 나오는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과 같다”라는 이야기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체험하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 왕국의 번영과 함께 세속적인 삶을 즐기면서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계속 하다가 보니까 이 신앙적인 지식 속에 깃들여야 할 생생한 생명의 체험들이 다 빠져나가고 앙상하게 지식만이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마음이 흔들리면 얼핏, 얼핏 얼개미만 남은 이 지식 속에 뭔가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대한 따뜻한 느낌들이 얼른 들어오는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머물다 사라지는 상태가 어떤 정도인가 하면 아침에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제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용어 하나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서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서 주님을 아는 지식이 생겨나고 나면 그 지식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업그레이드가 되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어떤 수준은 이렇게 다시 퇴보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상태는 늘 가변적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깊은 영광과 위엄, 그리고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많이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이시라고 하는 지식은 남아 있지만 그런 지식 속에 깃들여진 그런 뜨거운 하나님과의 교감, 그리고 성품에 대한 풍부한 경험, 이런 것들은 빠져 나가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만큼 그렇게 높은 수준에 주님을 아는 지식은 소유하지 못했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터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준이 높으면서도 상태가 아주 나빠서 지식은 있지만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독특하게 가질 수 있는 열정, 정염, 끓어오르는 의에 대한 사모함, 거룩에 대한 열망 이런 것들은 수준만 높아서는 안 되고 상태도 좋아야지 만 함께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수준이 워낙 나쁘면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아! 하나님 나만 사랑하시나봐. 다음달에 월급을 올려주실 것인가 봐. 이런 정도의 생각밖에 못합니다. 이것 봐. 하나님이나를 얼마나 사랑하셔. 나를 좋은 학교에 들여보내시고. 오늘도 사장님께 칭찬 받게 만드시고, 그 이상의 뭔가를 뛰어넘는 것들에 대한 기대나 이런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나은가는 둘 다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런 상태와 수준이 항상 그렇게 분리된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주님을 아는 지식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런 기복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떤 영적 연단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이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의 성품을 알아감에 있어서 연단 된 성숙함입니다. 성숙한 경건히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린 사람의 영적 침체는 막 이렇습니다. 난 이 교회밖에 없다고 그러다가 몇 주 있다가 안 나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은 침체에 들어도 새벽 기도는 기본입니다. 그리고 깊이 영혼이 메말라도 늘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기초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메마른 것 같아도 회복이 빠릅니다. 순발력이 뛰어납니다. 신앙의 수준이 어릴 때에는 순발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순발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곡선을 그린다면 막 이렇게 요동치다가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이렇게 점점 파장의 증폭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자, 그것은 그렇게 설명을 하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면 정확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앎으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에 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장사를 잘 하고 싶은 사람은 장사를 잘 하게 해주는 학원을 찾아가야지 논산 훈련소에 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 것이든지 배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최대한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가장 체험적으로,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감동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그 진리들을 접해야 합니다. 그런 방편들을 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노력을 안 합니다. 하여튼 절망적일 정도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데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속에 천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성도 안에 생겨난 주님을 아는 지식은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이샤라의 빌립보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신앙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그러나 그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니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까?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나를 누구냐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말할 때 사람들이 다 횡설수설할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성경 어디를 다 뒤져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표현 그대로 가르쳐서 문자대로 일러주신 구절은 없습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맞는 답이 여러 개 있는데 어떻게 한번 찍으니까 맞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 때의 영적인 수준이 그렇게 탁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활용 가능한 주님의 가르침과 진리를 가지고 그는 고민하면서 예수는 누구실까를 생각하고 그 기적과 가르침 그 복음의 전파, 자기를 버리시는 살신성인의 그 희생적인 삶의 모범, 이런 모든 것들을 보면서 그분이 도대체 누구인가를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한 영적 순례의 여정 속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물론 그 고백도 충분한 고백은 아니었고 그 고백 중에서 상당 부분은 성령 강림 이후에 사도 베드로가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고백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이지를 알고 싶어하는 치열한 영적 순례의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아이고 성경 공부를 해야되겠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해야지 되겠지만 성경 공부가 적어서 지금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전 존재를 건 전적인 추구와 함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에 의해서 드러난 주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성품이 내게 요구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그 성품을 가지신 주님께 나의 지식과 삶으로 영광을 돌려야겠다 라고 하는 전 존재를 건 주님을 향한 추구 속에서 획득되는 지식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일주일에 세 번 예배 나오던 것 한번 나와도 좋으니까 좀 한번 나와서 마음을 다 해서 예배를 드리고 정말 진심으로 ‘내가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저보고 날라리 신자라고 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나보고 그렇게 말하는데 당신은 천국에 가려면 멀었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 모든 비극은 내 안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서 주님을 뵈옵게 되겠습니까? 주님, 정말 주님을 알고 싶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라도 주님이 어떤 분인지 내게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리고 좀 무릎을 세우고 바짝 다가앉아서 정신 바짝 차리고 정말 주님이 누구이신가, 신앙이 무엇일까, 내가 왜 주님을 믿어야 하는가, 저 설교자는 왜 그렇게 간절하게 열렬하게 주님을 알아야 된다고 말하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주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마치 아담이 하와를 알았던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전 존재 적인 체험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가는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통해서 그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은혜’입니다. 베드로도 베드로 후서에서 이런 권면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그런데 지식보다도 은혜를 먼저 사용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꿔서 사용했지만,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객관적으로 말할 때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시는 값없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호의입니다. 그런데 주관적으로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영적 정서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이 없이 이렇게 주님이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아! 주님이 지금 내 곁에 계시구나. 아! 정말 주님이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럴 때는 어떻습니까?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막 뭉클합니다. 누가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회개의 기도를 하면 가슴이 막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이 한번 택한 주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럴 때 그 하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말씀처럼 막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준과는 상관없이 은혜입니다.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런 은혜 속에 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언제든지 그런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아주 굉장히 자주 주십니다. 그런데 심령이 너무나 방탕한 길을 걸어가거나 너무나 오랫동안 죄 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완전히 돌덩어리처럼 굳어지기 전에는 그저 그렇게 기본적인 경건 생활을 해나가면 하나님이 놀랍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일주일동안 정신없이 별로 신경도 못쓰면서 기도도 많이 못하고 살았는데 주일날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면 순식간에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막 오열하는 것입니다. 맞아.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계속해서 승리하는 사람만이 그런 신령한 정서를 느낍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어떤 때는 개떡같이 살다가 왔는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막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계속 간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심히 미약하거나 그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계속 추구하는 성실한 의지적인 노력이 동반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어느 한순간에 밀려왔다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쭉 빠져나갑니다. 그런 속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성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모’ 벼를 생산해내는 그 못자리의 모라고 말한다면 주님과의 교감에서 오는 그 따뜻한 은혜의 경험은 못자리입니다. 종자가 아무리 좋아도 사막과 같은 곳에서 못자리가 자라는 법은 없습니다. 못자리는 따뜻하게 만들고 보드라운 흙에다가 진흙처럼 된 그곳에 씨를 뿌려서 거기에 싹을 내어서 모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못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굉장히 커다란 놀라운 체험, 그렇지 않으면 뭔가 뒤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괄목할 만한 업적, 주님이나를 들어서 놀랍게 사용하신다 라고 하는 이런 것, 그래서 어릴 때부터 들었던 기도가 그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 우리 자녀들에게 주님을 향한 신실함에 있어서는 다윗과 같게 하시고, 물질적인 축복에 있어서는 누구와 같게 하시고, 벼슬에 있어서는 요셉과 같이 다니엘과 같이 좋은 것만 하나씩 다 뽑아서 만들었는데 기도 응답이 잘 안 됩니다. 왜 기도는 많이 했는데 그 자식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세상을 아는 지식은 충만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열렬히 알기를 원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핸드폰을 사용한지 제가 거의 8-9년이 되어옵니다. 완벽한 사용법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린애들은 뭐 하나만 나오면 얼마나 순식간에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속속들이 알아야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눈이 새빨개져서 착시 현상이 일어날 때까지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게임을 하고 그렇습니다. 어떤 애는 그 스트리트파이프 게임을 하다가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그렇게 합니다.
그 노력의 십분의 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합니까? 은혜 안에 살기를 애씁니까? 주님을 향한 신령한 사랑과 따뜻한 사랑의 정서가 우리의 마음속에 유지되기 위해서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잠시 슈퍼에 외출을 해도 문단속을 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그렇게 문단속하며 여러분의 입술에 자갈을 먹이며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줄까 생각하면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따뜻한 사랑에 정서,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하며 살기를 힘씁니까? 일주일동안 기도도 안 하고 하나님이 마음에 주시는 은혜의 불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걸레처럼 살다가 주일날 와서 하나님이 부어주시겠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요행수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사람이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펑펑 울고 가도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을 아는 탁월한 지식 속에서 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신비한 만남 한두 번을 통해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체험에 크기가 사도 바울의 주님을 아는 지식의 위대성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편견을 버리고, 심리적인 편견을 버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했던 그 모든 방해물들과 결별하는 중요한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주님을 아는 탁월한 지식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서술해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경험한 그 체험 하나로 일평생을 먹고사는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그는 전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추구했습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사실 수만 있다면 자기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기는 잊혀지고 예수님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마음속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맡겨주신 선교와 목회 그리고 저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일생을 경주 자처럼 살았습니다. 그 모든 총체적인 추구의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는 진리에 대해서 눈뜨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아갔고 그의 영적인 위대함은 이런 두 요소에 결집을 통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령하고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늘 폭발할 듯한 환희와 터질 듯한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어쩌다 어느 한순간에 메마른 속에서 하나님이 그런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견고하게 그것을 붙들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지키지 않고 아주 쉽게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을 기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크게 세 번째 어떤 자세로 주님을 알아갈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 본문이 기록된 것과 같은 맥락인 6장 3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하는 때가 오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힘써 알자”
그런데 정말 그 모습이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고, 편지를 보내도 마찬가지고, 전화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뭐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그것이 뭘까 그리고 편지를 써서 목사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고 어떤 때는 너무 짜증납니다. 왜냐하면 아니 사전만 찾아보면 금방 나오는데, 그것을 나같이 바쁜 사람에게 자기 하나를 상대를 해서 해달라고 하니 투덜대면서 해주기는 해줍니다. 그런데 금방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무슨 스터디 바이블만 찾아봐서 그 밑에만 들여다봐도 나오는 것인데 뭐 그렇게 쉬운 것을 물어보는지,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데, 그리고 뭘 질문을 하려면 남들이 뭘 질문했나 보면 되는데 이순신 장군 시대에 살던 사람은 지옥에 갔습니까, 천국에 갔습니까? 그 질문은 벌써 댓 번 받았습니다. 뭔가 이렇게 고뇌가 서린 질문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한 것입니다. 요즘 그 집에서 아직 만두를 파나. 그것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편지는 고뇌가 묻어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편지가 어떤 때는 야비할 정도로 나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치고 들어오는 편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의 고뇌가 묻어있다고 생각되면 나는 고뇌하면서 답장을 합니다. 뭐 언제까지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싶어요, 안 갖고 싶어요? 갖고 싶으면 아멘을 해보십시오. ‘아멘’ 별로 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대답하기는 쉬운데 실제로 그렇게 원한다면 힘을 써야지 됩니다.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즐기면서 살겠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아는 어떤 의대생을 만났는데 요즘은 모르는데 그때는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야, 의대에서 공부를 많이 시키지.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주당 수업 시간이 42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와!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수련회 가서 설교를 네 시간을 했는데 목사님, 아무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앉아 있는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니까 9시간씩 앉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하지요. 목사님, 의사가 되는 길이 너무 힘들어요. 예배실과 학교, 기숙사 이외에는 1년 동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사람들 헌데 고쳐주려고 하는 사람도 그렇게 힘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소유 여부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가, 의미 없게 하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다가 죽는 것과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사람과 벌레만큼의 차이보다 더 어마어마한 차이를 빗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엉뚱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시대에 태어났다가 이슬과 같이 모두 사라진 사람이었지만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두운 시대에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스러운 귀환을 알리면서 절망의 그 시대를 찬란한 하나님 왕국의 영광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그에게 그런 희망을 불어 넣어준 사람은 예레미야였습니다. 역사 속에는 그 두 사람보다 걸출한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살다간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대접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칭하려고 한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누린 영광과 권세, 왕국의 위엄이 오늘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정확한 지식이 여러분들 속에 끊임없이 열렬하게 역사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지식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준다면 지금 비록 여러분들이 내놓을 것이 없는 볼품없는 아주 일개 작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역사를 움직이고 지나간 수많은 왕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의미를 가진 채 일생을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것입니다. 주님을 믿었지만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고 주님을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껄떡대다가 결국은 세상에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죽어간 신앙과 불 신앙의 이중간첩과 같은 그런 처지로 인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인데 그런데 힘써야 됩니다 자기를 절제하고 이기면서‘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은혜를 간절히 알기 원하네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정말 어린아이와 다름없을 정도로 유치하면서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는 엄청난 관록을 지닌 사람처럼 자고 하고 수십 년 전의 경험이나 되씹으면서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병든 삶을 살아감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고 모든 삶의 동기가 주님이 되게 하고 언제 어디에 있든지 환경의 탓을 하며 주님을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자기를 세워주신 주님을 찾고 그리고 자기와 함께 교제하며 긴밀한 친교 속에서 살아가야 할 주님을 추구하고 전심으로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하고 주님에 관한 희미한 지식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을 파고들며 젖을 빠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알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자라가기를 힘쓰고 정말 목마른 사람처럼 그렇게 주님을 아는 지식을 생수처럼 마시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모든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간절한 추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도 그 다음날 또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에 대해서 설교를 듣고도 그 눈물을 흘리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그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가운데 그것이 설교자 속에 있는 지식이 여러분들의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럼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사는 그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를 써야지 됩니다. 힘써야 됩니다. 노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쓰여진 ‘라다프’라고 하는 이 단어는 ‘프레스’ 경주자가 아무도 안 보고 그 트랙만 보고 막 달려가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게 내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 미천함을 깨닫고 그리고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 자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에게 있는 지식이 없고, 혹은 건강이 없고, 남에게 있는 재물이 없고, 남에게 있는 많은 좋은 친구가 없어도 내가 주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지식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조국 교회 한 구석에 살아도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 살아도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분 깃을 감당하며 주님의 마음에 기쁨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주님이 유명하게 쓰시면 그는 그렇게 살고, 주님이 크게 쓰시면 크게 쓰시는 데로 고달프게 살고, 주님이 작게 쓰시면 작게 쓰시는 데로 신실하게 살고,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리더로 세우시면 죽도록 충성하며 그렇게 살고, 일평생 이름도 두각도 나타나지 않는 헬퍼로 쓰시면 헬퍼로서 부지런히 주께 하듯 섬기면서 살고 그러면서 결국은 전체로 우리 모두 종이 되어서 주님 섬기면서 살아가고 그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정말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내 기쁨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애를 쓰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합니다.
빌립보서를 쓸 때에 사도 바울은 사형을 당할 죄수의 몸으로서 말년에 이 편지를 써내려 갔습니다. 그런데도 무엇인가 하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바울을 따라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무엇인가 하면 그분 앞에만 서면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주님이 누구인지를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삶에 진전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 옥 속에서도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석방이 아니라 주님께 더 포로가 되는 것이고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부활의 권능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서 그는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직도 자기가 고난받아보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푯대만 향해서 달려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힘쓰십시오. 주님을 알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을 하십시오. 정말 노력을 하십시오. 구걸해서라도 주님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무릎을 꿇고 빌면서라도 주님이 누구인지를 가르쳐달라고 애원하고 그래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면서 그분을 닮아가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특권이고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복을 받으려고 꾀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꿈은 이 세상에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과 하나되고 그래서 걸출한 신앙의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만큼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길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일생을 경주 자로 살아가면서 주님을 아는 탁월한 지식 속에서 죽음과 함께 그분과의 완전한 연합을 위한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맞기까지 주님을 아는 지식을 끊임없는 주님에 대한 추구 속에서 터득해가고 자신 속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그것이 마치 자기의 전투의 노획물인 것처럼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자랑하지 않고 겸비하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더 많은 지식이 있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무릎을 꿇고 그렇지 못한 성도들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이 삶이 바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