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지킴의 교리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화의 소명과 신자의 마음(잠4:23上) 2002.1.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마음을 지킨다는 뜻(잠4:23上) 2002.1.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22
3. 지켜야 할 마음: 부드러운 마음(잠4:23上) 2002.1.16 새해말씀사경회(저녁) 43
4. 버려야 할 마음: 강퍅한 마음(잠4:23上) 2002.1.17 새해말씀사경회(저녁) 69
5. 부드러운 마음의 회복과 유지(잠4:23下) 2002.1.18 새해말씀사경회(저녁) 91
1.성화의 소명과 신자의 마음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上)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닷새 동안 이 본문을 가지고 신자의 마음 지킴의 교리, 영어로 말하자면 ‘A doctrine on keeping heart’ 마음을 지키는 것에 관한 교리를 닷새 동안에 여러분들에게 전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닷새로 충분하지 않겠지만 닷새로 전체적인 교리의 윤곽을 보고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하나씩, 하나씩 옛날에 죄 죽임의 교리처럼 그렇게 공부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음의 중요성
이 성경 구절은 우리들이 상당히 많이 알려진 성경구절입니다.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아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영혼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도 마음을 통해서 영혼에 변화로 가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미끄러져서 불 신앙으로 떨어질 때도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하나님을 버리는 삶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신앙적인 삶과, 하나님을 버리고 짐승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삶 그 한복판에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든지 간에 그 마음을 통해서 삶의 방향이 결정되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경고와 가르침, 인간의 마음의 본질이 어떤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교훈들이 성경에 굉장히 풍부하게 나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리의 처음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도 보면 결국은 사단이 있었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죄를 통해서 온 세상의 죄가 물밀 듯이 들어와서 그래서 죄가 창일 하게 온 세상에 가득해지고 그 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아니라 죄가 다스리고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아무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희미한 약속만 있을 뿐이지 실제로 이 땅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본연의 모습으로 변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그런 절망적인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바 된 인간은 철저히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는 대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서 경외해야 할 하나님을 거스르고 주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하나님과 가장 친한 관계에 있어야 할 피조 세계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통해서 한순간 둑에 잔뜩 갇혔던 물이 제방이 터지면서 밀려들어와서 온 땅에 창일 하게 된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죄가 밀려들어와서 온 땅을 가득 채웠고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죄 가운데서 태어나게 되었고 그리고 피조 세계도 창조의 아름다운 영광의 광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재앙은 모든 변화가 무엇을 통해서 왔습니까? 죄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무엇을 통해서 들어왔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게 되었을까요? 그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동산 한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지 말도록 아담과 하와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는 아주 엄한 계명을 거기에 붙이셨으니 이것은 인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결국 정확하게 말하면 하와가 그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줌으로서 불순종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불순종을 통해서 죄가 물밀 듯 들어와서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이 창조하신 많은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와가 가서 그것을 따서 먹었다고 우리들이 생각할 자유는 없습니다. 아마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상당한 시간동안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살면서 그 선악과를 보면서 그것을 ‘따먹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욕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금하신 그 실과를 먹고 싶고 또 그것을 통해서 먹음으로서 이루어질 어떤 결과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작용들은 하와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불순종을 통해서 물밀 듯이 들어오기 전에 제일먼저 온 세상에 밀려오기 위해서 노크하고 두드린 아주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은 바로 하와의 마음이오, 아담의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은 보도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딱 보니까 보암직하고 또 먹음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유혹이 있었습니다. 완전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자 하나님의 계명은 아주 사소해 보이고 자신 속에 있는 저 선악과를 먹고 이루어지게 될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굉장히 크고 중요한 것으로 부상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어기고 마음의 작용에 순종해서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조선소에 가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해 바다에 가면 배를 건조하는 조선소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보면 때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몇만 톤 몇십만 톤 되는 배도 건조가 됩니다. 그렇게 지상의 배를 놓고 만들 때에 그 배를 하나 주문을 받으면 2-3년, 4-5년이 걸려서 만드는 것은 보통입니다. 20만 톤 정도 되는 배라고 하면 상상할 수 없는 배고 25,000 톤 되는 배만 해도 건물의 높이가 10층 높이는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5-6만 톤 혹은 10만 톤 되는 그 어마어마한 배도 그 배를 움직이는 방향타는 그 배의 덩치에 비해서 비할 수 없이 작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교회 빌딩 몇 채씩 되어 보이는 합쳐도 될까 말까한 그 어마어마하게 큰배도 실제로 그 배를 움직이는 방향타는 그저 승용차 한 대 정도의 넓이정도밖에 안 되게 되는 방향타가 한 두개가 딱 서서 그것이 이렇게 움직이면 배가 이리로 가고 저렇게 움직이면 저리로 가는 그런 것이 바로 배의 방향타의 역할입니다.
1. 타락 전, 인간의 마음
똑같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커 보이고 인간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무궁무진한 것 같아도 그 인간의 모든 삶을 움직이는 방향타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세상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따라 살고, 그 마음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탐욕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의 이 마음은 완전했습니다. 우선 그의 지성은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인간이 하나님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에 유한한 인간에 의해서 모두 파악되는 하나님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 한도 내에서는 충분한 이해력에 지성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아주 명료한 이해력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들을 최대한 발휘해서 적어도 주님이 알려주신 것은 똑똑하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하기 전에 그 인간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그런 복종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하기 전에 인간의 정서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무시로 흘러 들어오는 그런 정서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그 피조물인 인간의 기쁨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일어나는 많은 작용들과 창조 세계를 바라보시는 그 애정스러운 눈빛이 처음 창조된 아담과 하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담과 하와가 만약에 지금 타락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았다면 이런 식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이 창조된 세계에서 명령을 수행하면서 이 창조의 세계를 돌보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것입니다.
2. 타락 후, 인간의 마음
그러나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먼저 죄의 유혹에 빼앗김으로 그들은 불순종하게 되었고 불순종의 범죄를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를 자기 자신들의 내면의 세계로부터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지성은 이제 불완전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똑바른 것을 알려주어도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성으로 바뀌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 지성에 대해서 스스로 교만해짐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이 알게 하신 지성을 굽게 잘못 사용함으로서 주님을 믿을 마음을 스스로 털어 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지는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복종되었던 의지는 그 상태에서 완전히 풀어져서 방종한 가운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철저히 복종할 뿐 누구를 위해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렇게 통제할 수 없는 의지의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은 이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명령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죄 된 부패성 속에서 솟아 나오는 욕망과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훨씬 더 잘 예민하게 영향을 받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마음에 모종의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는 일평생을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수가 없고 그 마음에 강력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는 아무 소망이 없이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타락한 인간 속에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지각하기 힘들 정도의 작은 감각들이 살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영원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그 살아 있는 작은 감각들은 충분히 느낄 수 있고 강력한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으며 모든 의지를 자기 자신의 욕망에 굴복시키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부패하고 강력한 마음에 비하면 그것은 별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그런 아주 작은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태로 인간들은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성도다운 삶을 잘 살아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노력해야될 일이 많지만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힘쓸 일이 없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누구나 충분히 지옥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힘써서 지옥을 가기 위한 교리를 공부하고 지옥에 가는 연습을 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내키는 대로 살면 아주 안전하게 지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삼켰는데도 아직도 지옥의 불길은 넉넉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은 넓은 길입니다.
3. 중생 후, 인간의 마음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두 대조를 보았는데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누군가 하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앞에 있던 두 종류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셔서 십자가 사건 앞에 참회하고 믿음을 가져서 회개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거듭난 사람은 내면의 세계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그 내면의 세계에 참된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흔히 이야기하는 내면의 변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내면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설교 중에 자꾸 내면 세계의 변화라고 하는 애매 모호한 말을 쓰는가.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의 변화인데 이 변화된 영혼의 상태가 어디에 반영되는가 하면 마음에 반영됩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삶을 살아가도록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과 그 영혼을 함께 싸잡아서 내면 세계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 특별히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제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렇게 해야지 만 도대체 신자가 왜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왜 그렇게 결정적으로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주님을 믿고 거듭나는 이 영혼의 변화는 ‘중생’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다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한번 태어났는데 그 다음에 육체 안에 있는 속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니까 그런 의미에서 중생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하나는 원래의 우리들이 인간 전체를 놓고 볼 때에는 그러니까 교리 적으로 볼 때에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이 한 인간, 한 인간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실 때에 ‘그 사람 속에 넣으신다’ 라고 하는 것이 개혁 신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렇지만 우리가 전체적으로 보면 그러면 우리가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모르는 무죄 상태에서 살아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말하면 우리의 영혼의 참된 모체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 인간이 다시 태어나서 영혼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거듭나는 순간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린다는 점에서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말만큼 적합한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자어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중생’ 하면 신자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오는가. 그래서 어떤 변화가 오는가 하면 주님을 믿고 거듭나게되면 신자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는 타락하기 전에 인간이 가졌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하고 그리고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상관이 없는 마음이었던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스며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거듭난 사람들 속에 일어난 변화를 통해서 경험하는 이 지 정 의 세 가지 작용은 불행하게도 처음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것처럼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주면 잘 이해를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아담과 하와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해했던 지성에 비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에 있어서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또 비록 성향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해야겠다는 거듭나기 전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것도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를 다 굴복시키려고 하는 경향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이것을 굴복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굴복하고 싶은, 굴복해야지 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놀랍게 물려받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고자 하지만 어떤 때는 그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가? 그것은 주님이 범죄한 인간,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에 거듭나게 만드실 때에 그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부분적으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래서 전에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정죄 되었던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고 마음속에 새로운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을 창조하시지만 한편으로는 뭐가 여전히 남아 있는가 하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부패한 마음속에 있는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거듭난 그 순간 인간은 엄밀하게 말하면 육적인 마음과 신령한 마음을 육신 적인 마음과 신령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앞에 이야기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과 그리고 타락한 후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 비하면 아직까지 너무 불안전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타락해서 주님을 모르는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에 비하면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spiritual한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 신령한 삶이고 한편으로는 fleshly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령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 받은 자이고 육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타락한 부패성이 그 속에서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순간에 하나님이 두 일을 한꺼번에 행하셨는데 하나는 우리를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음으로 너는 이제 의로운 사람이오 너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니 너는 이제 더 이상 정죄 받을 죄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과오를 지워 버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가끔 가다 보면 죄를 지었는데 어느 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다 옛날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 그것도 너무 자주 있으면 안 됩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싹 지워버립니다. 옛날에 살인죄로 복역했고 뭐 했어도 빨간 줄을 딱 지우면 옛날에 그런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면 위법입니다. 그것이 칭의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또 하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부패성입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성화의 삶을 통해서 이제 계속해서 이루어가야 할 또 다른 의미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칭의 의 부분이 즉각적인 구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점진적인 성화를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두 가지 자아가 함께 있는 상태의 그 인간이 마음은 어떠한가. 마음도 똑같습니다. 마음도 똑같이 육적인 마음과 신령한 마음이 공존합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공존하는데 모든 사람이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적인 마음이 월등히 강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마음이 거의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악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갑니다. 믿는 사람으로서는 말도 붙이기 부끄러울 정도의 아주 타락하고 더러운 삶을 영위해갑니다. 반대로 신령한 마음이 거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고 육신 적인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영혼의 변화가 우리의 모든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영혼의 변화도 마음을 통해서 일어났고 또 반대로 그런 변화된 좋은 영혼이 삶의 영향을 미치는 것도 거꾸로 마음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육신 적인 삶의 영향을 주어서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성화의 소명을 이루는 사령부로서의 마음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끊임없이 성화의 삶을 살아야지 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성화의 삶을 살지 않으면 결코 그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No, holiness No, happiness 경건 혹은 거룩이 없는 곳에는 어떤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 관한 이야기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No, holiness No, happiness 아무런 거룩함이 없어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거룩함이 없으면 어떤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룩한 성화가 없으면 행복도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면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에 나아가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신앙을 버리고, 혹은 신앙을 하찮게 여기고 그리고 세상에 열중하면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이렇게 볼 때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열망보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그 사람이 정말 거듭난 사람이라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처럼 보여도 세상을 향한 열망은 언제나 일시적이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희미해 보여도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닮고자 하는 성화의 열망은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 하나 더 나아가서 신앙생활 하는 신자가 세상에 열중하면서 신앙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에서의 번영을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던지기까지 희생을 한다고 할지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 열정만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삶을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순간의 열정일 뿐이지 그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평안과 축복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거듭난 사람들은 그러니까 거듭나기 전에 놀던 세상에 거듭난 후에 돌아가 보면 세상이 옛날에 놀던 그 세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전하면 회개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도 몰랐던 사람도 회개하지만 그러나 비율적으로 그것은 적고 옛날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던 사람들이 그 사랑을 말할 때에 깊이 찔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자신 속에 이미 세상을 향해 열심히 살고 세상을 더 가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에 헌신하며 사는 것 같아도 마음 깊은 밑바닥 속에는 그 세상에 대한 열망은 암시적인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으로부터 오는 참된 평안과 축복 그리고 그분을 닮아서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성화의 욕구가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그 속에 있는 거룩의 욕구들을 일깨울 때에 힘없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설명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마음과 관련시켜볼 때에 신자에게 성화의 소명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 마음이 성화의 소명을 완수하는데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자 보십시오. 성화는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두 부분으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까지도 인격적 본성 속에 남아 있는 야비하고 부패한 본성들을 주님의 은혜로 계속 새롭게 성령께서 고쳐주셔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아 가는 주님의 자비하시고 의롭고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런 성품, 진실한 성품을 닮아 가는 인격적인 변화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자 하는 그 실제적인 생활, 섬김의 생활 두 가지를 함께 묶어서 우리들은 성화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 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성화 되면 될수록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육체적이고 강퍅하고 모질고 복수하기 좋아하고 원한을 품고 그 다음에 신경질을 내고 하던 이런 야비하고 더러운 인격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리고 뭔가 그 속에서 주님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인격으로 자꾸 변화되어가고 삶 자체도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떻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을 인생의 행복과 가치로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 자신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는 목소리에 의해서만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presence 현존을 통해서 능력 있게 하나님의 말씀이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사람들에게 선포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이 어떤 영향을 갖는가. 둘로 나뉘어서 성화의 영역 두 가지에 마음이 미치는 영향을 각각 우리들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화의 첫 번째 영역이라고 우리들이 제시받은 인격적 변화의 부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가장 어려운 것이 그 사람 자신의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쁜 인격으로 형성되는 것은 인간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생각 없이 살면 마지막에 그 사람은 막대 먹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환경이나 자라온 여건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현재를 보려면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미래는 현재에 묶입니다. 과거는 A라는 삶을 살았는데 지금은 B라는 삶을 살고 있고 그리고 미래는 C라는 삶을 살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는 가능한 것이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물론 옛날에 뼈빠지게 가난하던 사람이 지금은 좀 부자가 되었고 미래에는 재벌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외부적인 환경을 이야기하고 물질을 소유하고 지위가 얼마나 높고 낮은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제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도둑이 크게 도둑질을 하고 들어가서 회개하고 전도사가 되었는데 그래서 수많은 매체에 감동적인 간증을 연재했는데 일본에 가서 도둑질을 하다가 또 걸려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묶입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과거에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으시는 영혼의 변화가 있으면 변화된 영혼에는 뭐가 있습니까? 변화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자체가 예전에 그런 삶을 살았던 마음과 완전히 이질적인 마음으로 바뀌고 나면 옛 삶과는 결별하고 옛 삶을 통해서는 도저히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안 가던 인격, 상상도 안 가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울과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사도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훌륭하게 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신 사실에 대해서 사도가 감격하며 모든 죄인과 모든 더러운 사람들도 복음 안에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의 변화가 과거에 본성을 바꾸어놓기 위해서는 강력해야지 됩니다. 아주 강력해야 됩니다. 가벼우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인격입니다. 그게 고쳐지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제가 알던 친구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도 사람이라는 게 밥을 내가 세 번 사주면 자기가 한번은 사야지 되는데, 아니 내가 얻어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래도 사람이 택시 몇 번 같이 타고 돈 내면 그래도 하다못해 토큰이라도 하나 내야지 되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영원히 빈대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 사람의 돈을 내가 빌려서 밥을 사준 적도 있습니다. 밥 먹으러 갈래 그러니까 가자고 해서 돈이 있는가 하니까 없다고 합니다. 나도 돈이 없는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 밥 사먹을 돈은 없는데 급한데 쓸 돈이 있다고 해서 빌렸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옹졸하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니까 내가 객관적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라온 성장의 환경이 그 사람은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자기 돈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아주 험난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물론 저도 험난한 세월을 살았습니다만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보호하는 방법은 자기 수중에 돈을 갖고 있지 않으면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고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오랜 방식이 그 사람을 그렇게 영원한 빈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온 과정과 인격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everybody 빈대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서 다 빈대입니다. 그렇게 영원히 빈대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그리고 자기를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서 왕따를 당한다고 해도 자기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 훨씬 편한 것입니다. 이 본성이 노력을 해서 생겨난 본성이 아닙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살다가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인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것입니다. 아마 죽을 때도 누구 묘 자리 파놓은 것 옆에 살짝 파고 가서 묻힐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죽을 때까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적인 특징을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 고쳐본 적이 있습니까? 작은 습관 같은 것은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낭비하던 사람이 조금 절약을 한다든지, 아니면 밥을 많이 먹던 사람이 좀 줄인다든지 이런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 그 자체를 바꾸어 본 사람이 있다면 그러면 성경을 다시 써야지 됩니다.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혼의 참된 본성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거룩의 영향력을 통해서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서 인격이 거룩하게 바뀐다라고 하는 것은 죄인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것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을 동원해서 설명을 하면 여러분들이 가슴에 아주 쉽게 와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격 가지고는 주님의 자녀다운 사람이라고 감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쉽게 이야기하면 배나 사과를 다 수확해서 그래서 과일을 선별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저는 과일은 세 개를 먹을 것을 돈을 합쳐서 참았다가 하나를 먹더라도 아주 좋은 것은 것을 먹어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양은 어떨지 모르는데, 양의 문제가 아니라 맛에 질 자체가 크고 실하고 흠집이 없는 과일은 맛이 완전히 다릅니다. 등급이 틀립니다. 그래서 과일을 어떻게 합니까? 오면 흠이 있는 정도와 그 다음에 크고 작은 것을 다 선별해서 제일 좋은 것을 이렇게 붙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일 중에 하나가 귀한 것인데 황도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는 게 딱 열흘간만 납니다. 출하가 되는데 그렇게 큰 황도를 껍질을 벗기면 싹 벗겨지는 큰 황도입니다. 내가 이야기하는데 왜 자기가 침을 삼킵니까? 그 황도가 있는데 그것을 냉장고에 차갑게 한 다음에 그것을 껍데기를 벗겨서 한입 콱 깨물면 굉장합니다. 그런데 올해도 먹고 싶었는데 사러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가격이 차이가 나는가 하면 키로가 정해져 있는데 개수가 작게 들은 것일수록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그래서 7개정도 들어있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사먹기 힘들 정도의 가격입니다. 한 20개정도 들어있는 것은 쌉니다. 25개정도 들어있는 것은 아주 쌉니다. 요만하게 귤보다 좀더 큰 것은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최고 품종을 뽑아서 거기다가는 골든 마크를 붙입니다. 금딱지를 붙입니다. 그리고 아예 그 밑에다가 생산자 사진까지 붙여놓습니다. 그리고 딱 전시를 해놓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를 하얀 포장지로 싸고 골든 마크를 붙여서 놓습니다.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이제 품종 분류를 합니다. 여기 다 갖다가 이제 통에다 놓고 천사들과 함께 분류를 할 때 어떨까? 그저 그냥 하나님과 천사가 이것 얼마입니까? 하고 와서 물으면 그거 그냥 사은품이니까 떨이로 가져가십시오. 이것 사면 저것은 그냥 드릴게요. 그럴 정도의 품종인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으면서 너무 많이 변화되어 와서 주님이 많은 사람들 중에 골라내서 하나 탁 들면서 천사들아, 진짜 우리들이 뿌린 씨앗들이 열매를 맺었는데 열린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인격이 이렇게 잘 여물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골든 마크를 붙여라. 그래서 골든 표를 딱 이렇게 붙일, 난 적어도 그 정도는 된다 하는 사람은 손들어보십시오. 어떻게 할까요?
주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이제 노력하면서 주의 성령의 은혜를 입으면 인격적으로 새사람이 되었으면 생명의 능력을 우리 안에 중생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교회에 보내서 목회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참회하고 믿음을 갖게끔 만드셨습니다. 연약해질 때 사랑하는 지체들의 격려를 힘입으면서 이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계속 배우면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을 계속 가르침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새사람이 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 노력의 진지한 실천의 여하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 거의 쓸모 없는 인격이거나 혹은 정말 하나님이 세상에 두시기 에는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그런 골든 마크가 붙여진 그런 인격이 천국의 표가 붙은 그런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천사 표’가 붙은 그런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천사 표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떨이로나 봉지에 넣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가 하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성화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성화에 의해서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망은 어떤가 하면 여기서 10%만 쓸모 있는 인격으로 변화시키고 나머지는 대충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자. 그러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중에 아무리 개떡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골든 마크를 붙인 진짜 천사 표 인격이 되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은 꿈도 야무지시지, 내가 얼마나 막대 먹은 인간인데. 내가 이만큼만 사는 것도 정말 우리 집사람에게 베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내가 이만큼 사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더 변해서 모든 사람에게 뛰어난 천사 표 골든 마크를 단 그런 인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지 하나님도 내가 아마 이 정도 사는 것만 해도 아마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가 주님을 닮은 그런 인격적으로 성화 된 사람이 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성화와 마음
그런데 그 성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 됩니까? 그렇습니다. 지속적인 자기 인격에 대한 불신과 깨트려진 자기 부정,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너 성질이 나쁜데 다음주까지 좋은 성질로 고쳐서 오지 않으면 넌 내가 너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너 죽여 버릴 거야. 너 세상에서 끝나는 줄 알아. 죽음을 보고 싶지 않거든 그 성질머리 고치고 와. 그러니까 공포에 덜덜 떱니다. 내가 일주일 내에 이 성질머리 못 고치면 죽는다. 그래도 사는 게 낫지, 고쳐질 수가 있습니까? 고쳐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목에 칼을 들이대셔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어린아이를 보고 여기서 뛰어내리면 100원 줄게. 그래서 100원을 줬다고 해서 이곳보다 100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10,000원 줄게 그러면 그 애가 뛰어내릴 수가 있습니까? 뛰어는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를 보장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하나에 의해서만 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를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만들고 자기 인격을 싫어하게 만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격에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미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가슴아프게 하고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셔서 그가 점차적으로 새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그런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만져주신 그 역사가 밀고 들어오는 통로가 무엇인가 하면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애야, 너 그런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천사 표가 될 수가 있겠는가. 너 있는 그 자리마다 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 다 떠나가는구나. 너 그렇게 해서 어떻게 변화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세상에 변화가 될 수 있겠는가. 너 정말 새사람으로 변화 되라. 마음을 탁 닫고 나를 냅둬요. 이대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이만큼 변한 것만 해도 많이 변했다고 우리 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되었지. 그렇게 순종할수록 끝까지 변화되라고 냅둬요. 변화는 무슨 놈의 변화, 너무 많이 변화되면 광신자나 되지.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성화의 역사도 없습니다. 마음이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아멘 맞아. 나는 정말 오랫동안 주님을 믿었지만 내 인격이 너무 조잡해. 너무 이기적이야. 알고 보니까 정말 나밖에 몰라. 그리고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신앙생활을 한 것 같지만 뒤돌아 서서는 그런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자비와 공평의 삶이 내게는 없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나의 못난 인격이 주님을 근심시켜드리는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너 이렇게 변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실 때 아멘 하는 마음, 맞습니다. 하나님 정말 제가 나쁜 사람입니다. 주님이 밤이나 낮이나 얼마나 열심히 목사님을 통해서 사랑하는 지체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의 눈물의 중보 기도를 통해서 나를 바꾸어놓으시려고 했지만 제가 주님 항거하면서 이렇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변화되지 않은 나를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흐느껴 울면서 참회하는 그런 마음의 받아들임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들어가면서 아주 강력하게 역사해서 사람을 바꾸어놓습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아주 엄청나게 빠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수십 년 동안 딱딱하게 굳어온 인격이 불과 몇 개월 안에 아주 놀랍게 변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너무나 강력하게 받아서 완전한 내적인 순복 속에서 아주 급진적인 성화의 변화를 일어날 경우에는 사람이 얼빠진 사람처럼 멍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야. 그러니까 멍합니다. 폭탄 맞은 사람처럼 멍합니다. 그러면서 옛 자아가 무너지고 새 사람, 새 인격으로 변해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까? 마음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물론 그 마음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 마음의 문을 열고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향에 항거하셔서 역사 하시지 않고 그 점에 있어서,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뜻을 쫓아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십니다.
그 다음에 작게 두 번째로 보면 성화의 또 다른 영역인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순종의 생활도 결국은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시는가 하면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영혼의 변화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의 삶을 바꾸십니다.
(예화: 아시는 분이 군사정권 시대에 권력 기관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자기의 일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살다가 주님을 믿고 영혼의 참된 변화를 경험하고 어느 한순간에 자기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직 속에서 움직여지는 거대한 물결을 자신은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부러워한 직장을 버리고 조그만 구멍가게를 했다는 이야기)
이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영혼의 변화가 가져온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로 가고 영혼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영혼의 변화를 받을 때에도 마음을 통해 들어가고 영혼이 변화되었을 때에도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흘러나오면서 인격의 변화를 주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죄악 된 행동들이 있을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의 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생활하는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 지속적으로 뇌물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회사를 경영하면서 습관적으로 이중 장부를 쓴다든지, 아니면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안하고 지속적으로 커닝을 한다든지 뭐 하여튼 사회적으로 이렇게 자기의 삶을 거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런 악습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술 중독에 빠졌다든지, 아니면 젊은이들이 흔히 유혹을 받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음란 사이트에 중독이 되었다든지 그런 습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대로 굳어져서 자동으로 자기가 갑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냥 들어가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니 왜 허전합니까? 빨리 빨리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지. 그런데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매일 먹고 들어갑니다. 그러니 퇴근하면 한참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다가 보면 술집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먹고 갑니다. 그렇게 오랜 동안에 걸쳐서 삶이 그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죄악 된 길을 따라 가는 삶으로 이렇게 서서히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거의 흘러 가버려서 고착화된 삶입니다. 그런 삶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굉장히 불가능합니다. 담배를 피다가 끊은 사람은 살인도 할 정도로 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입니다. 사실인데 나는 몇몇 사람들을 쭉 다루면서 음란 사이트에 중독 되었다가 그것을 결단하고 그것을 끊어버리는 사람은 수백 명을 살인하는 전쟁도 일으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입니다.
인간이 그 습관적인 죄악 된 생활에 대해서 돌이키는 것에 있어서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거룩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지금도 도저히 우리 자신으로서는 고칠 수 없는 그 삶을 고치십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가지고 있는 간증이 아닙니까? 알코올 중독 같은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단정한 사람이 되어서 가정을 팽개치고 거의 다 쪼개진 그런 가정들 속에서도 변화되어서 다시 단정한 사람이 되고 가정을 잘 돌보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성화의 변화를 주십니다. 젊은이들도 음란 사이트에 중독이 되어서 거의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다시피 했는데 그런데 자기 자신은 그것을 고치려고 몸부림을 쳐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내일 기말고사인데 오늘 컴퓨터 앞에 두드려서 그런 속으로 몰입해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살수밖에 없는데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가 거기에 항거를 안 했겠습니까? 그러면 안 된다. 내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화: 캐나다의 어느 목사님의 집에 컴퓨터 앞에 써 붙인 내용, 게임은 금년에는 죽어도 안 한다고 썼다는 이야기)
얼마나 중독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에서 안 된다고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양심이 자기를 정죄하고 가책이 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항거합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안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사람은 고칩니다. 그래서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리수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해서 내가 하리수가 뭔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느 영화 배우인데 나는 여자 배우인줄 알았는데 남자였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트렌스 젠더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뭐라고 심하게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실수하신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합니다. 여자인데 잘못 계산 착오로 남성의 몸으로 입히신 것이라고, 그게 아닙니다. 사람 속에는 모두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속에도 여성 성이 있고 남성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도 남성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올바르게 살면서 일반 은총 속에서 그런 것들을 유지하면서 살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하자면 성도착의 패역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스르고 항거하고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는 패역입니다. 그런데 노력을 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굽어진 이 성에 대한 편견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얼마든지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패역도 자기 자신이 아무리 항거하려고 해도 항거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성도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심으로서 그들의 삶을 고치십니다. 그게 성화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자신의 힘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받으면 담배도 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장본인입니다. 끊을 수 있습니다. 한 갑 반씩 심하면 두 갑을 피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의 강력한 힘은 인간의 내적인 패역보다 훨씬 강합니다. 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술도 끊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패역도 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진리와 성령을 통한 그런 은혜가 그 사람 속에 역사해서 자기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삶에서 돌이켜서 새 삶을 살게 만드는 이런 놀라운 변화들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마음이라는 문을 여닫으면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들이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에 대해서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신 비유가 무엇인가 하면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씨는 길가에 떨어진 것이나 돌짝 밭에 떨어진 것이나 가시밭길에 떨어진 것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이나 모두 그 씨가 다른 것이 아니고 똑같은 씨고 완전한 씨입니다. 그리고 그 씨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설명하신 바입니다. 모두 완전했는데 그 결과는 모두 달랐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시지만 여전히 인간의 마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입니다. 각 사람의 마음에 주인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의 마음의 주도권을 가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우리들이 무엇인가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선한 영향을 받았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도저히 수없이 결심해도 자신이 이길 수 없었는데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여시고 역사 하시니까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마음을 여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는 우리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져서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로 갔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게끔 그렇게 강퍅하게 만드셔서 그렇게 갔다. 우리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을 갖고 강퍅해졌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마음을 강퍅케 하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바로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강퍅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하나님이 은혜로 영향을 주던 그 영향력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냥 갈 때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묘사한 것이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마음을 딱딱하게 하시려고 막 노력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로의 마음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놓아줄까 어떻게 할까 막 고민하는데 하나님이 싹 은혜를 거두어 가시니까 그 영향력마저도 사라지니까 원래 가지고 있는 본성을 그냥 확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 은혜의 영향력들을 거두어 가시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에 영향을 주면서 우리의 성화의 두 영역을 어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넓은 사랑입니다. 그래도 결국은 그 모든 성화의 영역을 정복하는 그 은혜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군사들이 모두 마음이라는 성문을 통과해서 적진을 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떤 상태에 달려 있는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청교도들을 통해서 죄 죽임의 교리를 발견하면서 하나의 깊은 탈출구를 얻었고 여러분들과 나누었습니다만 그런데 그것을 설교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 죽임의 교리를 이렇게 다 가르쳐주었는데 왜 나를 비롯해서 많은 성도들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 이 교리를 들을 때 받았던 그 충격에 어울리는 성화의 진전이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거의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 번 세미나 때, 그런데 그런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면 이제는, 어떤 몇몇 지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리를 깊이 깨달으면서 아! 이제 죄는 없다. 끝났다. 죄야 너도 이제 제삿날이다. 이제 더 이상 너는 내 삶에 있어서 성화를 방해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몇 사람이 있었는데 몇 년 지났는데 별로 안 바뀐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충격을 받던 강도만큼의 충격을 변화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보일 수 있어야 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간 동안 묵상하면서 깊이 캐들어 가면서 느낀 것이 죄 죽임의 교리도 마음 지킴의 교리 위에 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죄 죽임의 교리의 요체가 무엇인가 하면 죄를 내버려두면 욕구가 점점 강렬해지니까 최초의 죄의 욕구가 나올 때 말하자면 자기 집안에 침입한 구렁이나 더러운 짐승들을 찔러 죽이듯이 그렇게 혐오하면서 그를 대적하라는 것인데 문제는 혐오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결국은 다시 뭐로 돌아가는가 하면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개혁자들이나 청교도 자들이 이 마음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연구를 했습니다. 이 마음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으로 보면 거룩한 성화를 깊이 강조하던 강단에서 마음에 대한 설교들이 많이 행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아무리 강단에서 이 거룩의 길을 이르는 길을 수없이 가르쳐준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점령당하지 않는다면 그 수많은 교리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으면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 성화에 이르는 수많은 상세한 길, 경건의 놀라운 비밀, 죄를 이기는 실제적인 방법 많은 것들은 무엇과 똑같은가 하면 적과 싸울 의지가 없는 군인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병기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특히 이 성화에 강력한 소명을 성도들에게 설교하면 설교할수록 그 성화에 진전이 있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성도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풍부한 그 설교들을 남겼던 많은 사람들, 논문들을 남겼던 그 많은 사람들 그것을 교리화 해서 남겼던 그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성화에 이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자기 자신의 육적인 자아에 의해서 “오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하고 자기의 부패한 생활을 직면하면서 절망하고 또 그것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보고 하는 이런 처절한 피 튀기는 내적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들을 엮어갑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마음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이루십니다.
샤마르와 나챠르; 힘써 지켜야할 마음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수없이 많은 은혜를 받고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성화의 삶에 대해서 강력한 소명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지지부진한 여러분들의 성화의 지연들, 그래서 결국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번 체험했고 심지어는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적인 영혼의 변화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성화의 삶에 있어서는 전혀 충격적인 열매가 없는 그런 빈약한 삶의 결과가 어디서 왔는가. 그렇습니다. 한때는 영혼이 뒤집어지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 마음은 빼앗겼습니다. 너무나 쉽게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남이니라”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미슈모르’라고 그렇게 하는데 ‘샤마르’라는 동사에서 나오는데 ‘샤마르’는 이렇게 망을 보는 것, 지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이렇게 파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파수, 모든 지키는 것 중에서 더욱더 너의 마음을 지켜라.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지키다라는 단어는 샤마르가 아니라 ‘나짜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나짜르’라는 단어가 ‘내쪼르’라는 동사로 변형이 되어서 명령형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명령형입니다. 너는 네 자신의 마음을 지켜라 그런데 그 나짜르라는 말도 지키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나훔 2장 1절로 돌아가면 군인들이 성을 지킬 때 단어입니다. 그래서 킹 제임스 버전에서 이것을 Keep이라고 번역을 했고 지킨다. 그리고 NIV 성경에서는 이것을 Keep 가지고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서 Guard 라고 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켜야 할 모든 것보다, 그러니까 지키는 것 보다, 무엇보다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번역 자체가 지키는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사수하는 것이라고 번역하면 더 실감이 날 것입니다. 적군들이 막 성으로 몰려옵니다. 군인들이 그 성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짜르입니다. 지킬만한, 파수할만한 모든 것보다도 너 자신의 마음을 파수하라. 그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마음이 가만히 있는 중립지대가 아니라 나의 마음 하나를 놓고 수많은 대적들이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역사하고 죄도 역사 합니다. 유혹도 역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도 역사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주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마치 전쟁을 할 때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하는 것처럼, 육이오 휴전되기 전에 철원 같은 곳에는 백마고지 전투 같은 곳에는 하루 밤 동안에 전투가 일어나는데 그 고지의 주인이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바뀌었다고 하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점령하고 나면 소낙비처럼 폭탄을 퍼붓고 수많은 전사들이 개미떼같이 올라가서 점령하면 다시 폭탄이 터지고 다시 내려오고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 됩니다. 그런 고지와 같은 곳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1.마음을 노리는 대적들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점령하고 싶다고 안달을 하는 것이 둘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과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자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애를 쓰는가 하면 마귀와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만 하면 나머지를 점령하는 것은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에 있는 것은 꼭 하고 맙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감정적인 배설의 효과를 느낍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굉장히 강력하게 점령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신자가 마음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두려운 대적은 마귀도 아니고 세상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인가 하면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마귀도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고 또 세상의 유혹도 우리의 마음을 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독립적으로는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러니까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싶어하고 세상도 우리의 마음을 유혹해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하는데 이 둘은 각각 독립적으로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주인인 우리의 동의가 없이는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언뜻 언뜻 스쳐 가는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를 지으려고 한참 그렇게 하니까 아 진짜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은행에서 자루에 현금을 담아서 막 싣고 있습니다. 저 돈 한 자루가 3억인데 저것 한 30자루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은 하지만 한번도 칼 들고 간 적은 없습니다. 스쳐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으로 스쳐 가는데 속 사람이 동의를 안 해줍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지, 뭐 24평도 족하지 뭘 40평씩이나, 이렇게 말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협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성립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 사람의 영혼 속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가다가 저 돈이 내 돈이었으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고 해서 그래서 와서 기도가 안 된다든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왜 스쳐지나갔을 뿐이지 내 속에 있는 자아가 연합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유혹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예수님은 유혹을 안 받으셨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봐라. 그것도 스쳐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에 반응을 안 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여기 청년들이 많이 있지만 젊은 예쁜 여자 보면 ‘아! 참 예쁘다. 한번 사귀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안 하면 그것은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연합을 안 해줍니다. 지금 한참 공부에 열중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목사님도 연애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반응을 안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이상한 음탕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성적인 욕구를 안 느낀다면 그 사람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냥 스쳐가듯이 한번 봤습니다. 탁 스쳐 지나가는 속에서 아니야. 그리고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영향을 안 미치는 것입니다. 마귀도 우리를 유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마귀도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동의해주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 안착하지 못합니다. 착상되지 않습니다. 태반에 아이가 탁 앉혀지듯이 착상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쳐 지나가면 더 야한 것이 없을까? 그리고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또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하나 하나 더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의 죄악 된 유혹이 자기 마음속에 딱 착상됩니다. 그런데 딱 한번 앉으면 태아가 어머니의 태반에서 뿌리를 내리듯이 안 떨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잉태되어서 어느 순간에 출산합니다. 이게 행동적인 범죄로 출산하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아이를 자기 스스로 통제를 못합니다. 아이가 크면서 그 다음에 그 아이가 다시 출산하고, 출산하고 해서 떼를 지어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유린합니다.
2.부패한 본성과의 만남
그러니까 결국은 제일 처음에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세상에 아무리 많이 우리를 유혹해도 이 속에 있는 부패한 우리의 자아가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고 연합하지 않으면 그러면 결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칼빈 선생도 그의 성화의 교리에서 말하기를 신자의 가장 커다란 원수는 마귀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때 거기서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패한 본성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이 문제가 됩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껏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 그리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사랑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살아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 그 빛처럼 쏟아지는 교제 안에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죄에 지는 이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면서 살던 삶을 정복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단 일년만이라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념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했습니다. 여러분 모든 속에는 그런 착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 간절함이 여러분의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한 것 같아도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는 더 사랑한 것 같았어도 그 세상을 사랑하면서 느낀 만족은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갔을 때 주님 때문에 느꼈던 만족에 비하면 여러분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주님을 거슬려서 행복하게 살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그리고 많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그리고 새벽 시간이면 그 먼길을 걸어나와서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찬송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씀을 듣고 결단하고 살았습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의 이 삶이 실패로 얼룩진 삶을 살았던 것은 깊이 캐들어 가면 그 출발점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 속에서 지킬 수 있는 그 마음을 못 지켰기 때문에 수많은 불순종과 악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착상되었고 그리고 그들은 잘 자라서 출산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에는 안식이 없고 그 죄의 결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성화의 소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진보에 있어서도 발전이 없고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섬김의 소명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열매있게끔 응답하지 못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은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도 지킬 그 모든 것보다도 너희 마음을 지키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고 경고한 지혜자의 글이나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서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달라고 한 아버지의 마음을 설파하였던 이 지혜자의 탄식 어린 권면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삶, 성화의 소명을 완수하는 그 모든 요구 한복판에 마음이 누구에 의해서 점령되는가가 최상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신앙 인들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에 절망하도록 하나님 앞에 통곡한 죄목은 자신의 마음에 악함이었습니다. 그는 경건과 거룩으로 가득 찼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자 죄는 그 마음에 착상되었고 그리고 그 죄는 장성해서 수많은 죄를 낳고 자신과 자기의 왕국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교리의 빛을 받아갈 것이지만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인정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 이제껏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삶에 있어서 진전이 없고 많은 은혜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신앙이 진보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주님이 그 참회의 은혜를 통해서 깨끗이 씻어주신 순수했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살을 에이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싶어했던 그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그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까? 그 마음을 갖는 것이 정말 신앙의 초보 때나 가능한 그런 마음의 작용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위하여
깊은 참회는 우리의 마음에 착상되는 수많은 죄들을 떨어냅니다. 그리고 그 참회의 은혜는 성령의 역사를 불러와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다시 순결하고 보전할 가치가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요 보혈의 은혜입니다. 많은 주의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씻김을 받았고 마음에 더러움과 죄악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참회의 은혜,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의 은혜의 감화를 통해서 자기 속에 이미 착상된 죄들을 모두 그 마음속에서 유산해내고 그리고 다시 정결한 마음으로 돌아갈 때 주님이 다시 옛 길을 버리고 새 길을 돌아갈 희망을 주셨으며 불순종의 길을 버리고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우리 앞에 주셨습니다.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교리의 빛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 함께 모두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주시도록 그렇게 간구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마음을 지킨다는 뜻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上)
마음 지킴의 교리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또 인간의 마음이 타락 전에, 타락 후에 그리고 거듭나도 난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제 마음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을 싸우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자로서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사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 없이는 어떠한 풍부한 가르침을 우리들이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다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배들이 떠 있습니다. 아직 승선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가르친 신학생 중 하나는 선장을 하던 학생이 있었는데 6,5000톤 짜리 몰았다고 하니까 2,5000톤 짜리까지는 제가 가까이 볼 기회가 있었는데 6,5000톤도 사실 유조선 같은 것으로 올라가면 작은 배랍니다. 20만 톤, 요새는 40만 톤이나 되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배가 많다고 합니다. 거기에 원유를 싣고 오면 전국에서 3일을 쓰고도 남는다고 하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배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움직입니다. 그 어마어마하게 큰배도 작은 배에 비해서 수백 대나 되는 선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장이 배를 모는 그 운행하는 방은 작은 방입니다. 그리고 큰배나 작은 배나 요만한 운전대 하나가 있어서 그 키를 잡고 그리고 배를 운행합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 어마어마한 배가 바다를 가르면서 빠른 속도로 전진할 때 마주 오는 배를 보면서 여러분들이 그 뱃머리를 돌리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큰배 앞머리에 붙어서 한번 열심히 밀어볼까요? 아니면 수백 명이 달려들어서 한번 떠밀어볼까요? 줄로 당겨볼까요?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힘으로도 그 어마어마한 힘으로 큰 대양을 가르고 도도히 항진하는 그 배의 항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 배의 항로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선실을 점령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그 키를 붙들기만 하면 이 키의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방향타가 움직이면서 수만 명이 매달려도 움직일 수 없는 배의 항로를 이리 바꾸기도 하고 저리 바꾸기도 하고 혹은 뒤로 돌아가기도 하고 앞으로 항진하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게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늘 느끼면서 삶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삶을 바꾸는데 얼마나 우리가 무능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오랫동안 자기의 삶을 바꾸려고 노력을 하다가 도저히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으니까 이제 나는 도저히 못 바꾼다. 나는 내 삶을 바꾸는데 있어서 어떤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다. 하나님만 바꿀 수 있을 뿐이다. 한번 더 나아가서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개판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내가 그런 논리를 가졌다고 자랑은 안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어찌할 수 없다라고 하는 변명 하나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궤적을 계속 그리면서 갑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환경을 통해서도 바꾸어보려고 하고 또 여러 가지 별의별 노력을 다해서 자기를 바꾸어보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곧바로 삶으로 덤벼드는 것은 마치 도도히 항진하는 수십 만 톤의 배 항로를 바꾸기 위해서 정면 대결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승산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그럴 능력이 있는 존재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래도 점령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관한 진리, 마음에 관한 여러 가지 속성, 그리고 마음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풍부하게 깨달아서 그래서 나 자신의 마음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알고 또 자기만의 독특한 그 마음을 아는 지식이 있어서 마음이 내 수중에 들어와야 됩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자기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대책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미친 듯이 아무렇게나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는 통제할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거의 마음이 자기 수중에서 어느 정도는 통제가 되는 삶을 살아가고 그 통제력이 점점 더 강해져서 마음이 내 손안에 탁 있을 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혔을 때 그때에 이 삶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아멘 좀 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되어야지 만 가능해집니다. 아주 굉장히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
자, 그러면 이제 갈 길이 바쁘니까 그만 서론을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다룰 내용은 도대체 그러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개념적으로는 우리들이 희미하게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크리스천의 이 성화의 소명과 관련해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이것을 이 시간에 크게 다섯 가지 내용으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첫째 의미는 마음의 작은 동작에도 유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더러운 생각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세 번째는 마음에 재갈을 물려서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고 네 번째는 은혜를 통해서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들을 활용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자신의 마음에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상 다섯 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해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마음의 작은 움직임에도 유의하는 것
우선 마음을 지키다 고 하는 첫째 의미는 마음의 작은 동작에 유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에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삶의 어떤 방향이나 변화를 지배하는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면 그 마음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떤 쪽으로 변화되는가. 어떤 경향성을 갖는가에 시발이 무엇인가 하면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제 우리들이 잠깐 그 말씀을 다루었습니다. 생각이 스쳐 가는 것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좀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항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스쳐가고 혹은 죄악 된 생각일 경우에는 그것이 유혹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데 그 생각들이 자라서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1)생각으로 시작됨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어떤 경향성은 어떤 생각으로부터 시발을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마음을 지키는 기본적인 방법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감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각들에 대해서 감찰하는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스쳐 가는 생각이 마음에 착상이 되면 생각이 점점 구체화되어가고 그리고 그 생각이 이제는 객관적으로 스쳐 가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마음이라는 밭에 착상되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생각이 서서히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해갑니다.
뭐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해서 좀 안 되었습니다만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하다 탁 들어가서 음란 사이트를 접속을 했다, 그래서 한번 이렇게 야한 그림을 봤다. 한번 이렇게 클릭 하다가 어떻게 하다가 들어가서 한번 봤다고 해서 그게 죄겠습니까? 그리고 죄라고 또 그러면 그게 얼마나 큰 죄이겠습니까? 만들어놓은 것 그냥 한번 봤는데, 또 자기가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렇게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침에 교회 앞에 보면 이상한 사진들이 잔뜩 떨어져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본 게 그게 죄겠습니까? 또 죄라고 한다면 얼마나 큰 죄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멀리 해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한번 딱 보면서 생각하는 것들은, 죄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큰 죄가 아니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아닌데 그 생각들이 씨앗이 되어서 마음에 딱 떨어지기 시작하면 착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그가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예화: 어느 청소년이 음란 사이트에 빠져 중독이 되어서 쓴 수기의 내용- 자신이 그런 것을 보고 길거리에 나와보니까 걸어다니는 여자들이 다 자기의 먹이 감으로 보였다는 이야기)
그게 어디서 시작이 되었습니까? 생각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을 감찰해야 할 의지를 갖지 않으면 그 후에 쉽게 이야기하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게 됩니다. 손가락으로 막을 수 있는 재앙을 온 몸을 던져도 막을 수 없는 재앙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의 삶을 살겠다, 어떻게 하든지 그 하나님 앞에 나는 성도로서 살겠다. 아주 목회자가 되고 고상하고 그런 삶은 그만두고라도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영위해나가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가졌다면 제일먼저 해야 될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쉬운 의무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감찰하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하루 종일 스쳐 지나가나. 생각해야 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은 대게 오관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어떤 계기나 연상하게 만드는 자극이 없는데 생각이 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그렇습니다.
2)봄으로써 자극을 받음
그러니까 무엇을 봤을 때 눈에 띄었을 때 그것이 어떤 생각을 자꾸 뿌립니다. 예를 들자면 제일 쉬운 것은 보는 것입니다. 딱 보았을 때 보면서 그것이 어떤 생각을 확 갖다줍니다. 그리고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는가.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별의별 것을 다 보면서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일 좋은 것은 지저분하고 더럽고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것은 안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지구를 떠나야 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죄인들과 함께 모여서 사는 세상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옛날에 수도사와 같은 사람들이 저 산 암벽 꼭대기에 수도원을 짓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또 그런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야지 만 전도할 기회도 있고 선교할 기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산다고 선교가 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성화의 삶을 살아야지 만 그게 문제입니다. 수 없는 것을 봅니다. 선하고 좋은 것을 보면 선하고 좋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것들은 착상이 되도 문제가 없고, 착상이 되야 좋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들을 봤을 때 어떤 유혹이나 잘못된 것들이 스쳐올 수 있습니다. 털어 내야 합니다.
3)말하고 들음으로써 생각을 유발함
보는 것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을 통해서 그런 것을 통해서 주위의 많은 환경들을 통해서 여러 자극들을 통해서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속에 하루에도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하루에 10만 번의 생각이 스쳐지나간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대부분은 우리의 마음에 착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착상이 되면서 우리의 마음을 태반으로 해서 어린아이가 안착이 되듯이 거기에 착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마음으로부터 진액을 빨아먹으면서 그게 성장합니다.
무엇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뿌리를 내리고 어떤 생각이 그 사람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의 인생의 모든 항로가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살피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더더군다나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음을 오가는 생각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게 유의하고 그것에 대해서 아주 세심하게 관찰을 하면서 그 스쳐 가는 생각들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헤아리고 그리고 그 중에 어떤 생각들이 지금 내 마음에 떨어져서 착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헤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생활은 너무 유별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유가 있지 않는가 하는데 사실은 그것과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그것들이 다 자라게 내버려두어서 그런 작은 생각도 자기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가 없는 사람이, 그런 결단도 못하는 사람이 그 생각이 자라서 마음에 착상해서 그 마음을 지배하고 어마어마한 세력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의 항로를 그릇된 방향으로 자기의 마음이 이끌어가려고 할 때에 그것을 정면으로 승부해서 그 방향을 돌려놓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라고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속에 오고가는 생각을 살펴야 합니다. “깨어있다”라는 말에 가장 우선적인 의미가 그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오가는 생각이 어떤 것이고, 그리고 자기의 마음이 지금 마음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이 어떤 것이고 그 중에 어떤 생각들이 지금 떨어져서 마음 밭에 착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살피는 시간의 간격이 짧을수록 유리합니다. 그 생각을 이기는데 있어서 짧을수록 유리합니다. 살피기는 살핍니다. 그런데 한 일년에 한번 정도 살핍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살펴보니까 이제 생각이 오가는 게 아니라 아주 나쁜 생각이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흔들 수 없는 나무가 되어서 자랍니다. 살펴서 확인을 해봤자 대책이 잘 안 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몰랐던 옛 성현들이 ‘일일 삼성이면 명견지수라’(?)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하나님은 몰랐지만 일반 은총에 빛 아래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더러워지는가를 확인했고 하루에 세 번쯤은 반성을 해야지 만 거울과 같은 맑은 마음이 되어서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정돈된 정신의 상태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그분들이 보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비관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일 삼성 가지고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짧을수록 유리합니다.
그러니까 매순간 자신의 생각을 시간을 정해서 몇 시간에 한번씩 자기의 마음을 감찰하는 어떤 그런 의무적인 감찰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눈이 외부의 세계보다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래서 그 속에서 자기의 마음의 밭을 정직하게 살피면서 그 마음 밭 위를 떠가는 씨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생각들의 씨앗, 거기에 착상될 수 있는 수많은 생각들에 흩날림을 쭉 주목해야 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생각들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은 그만두고 설교 시간에 졸지나 말고 가만히 앉아서 들으면 할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거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무를 심으면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햇빛도 비추고 하면 점점 자라서 거목이 됩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를 성화에 진전이 없이 오래 믿으면 분재가 됩니다. 아주 해괴망측한 분재가 됩니다. 누가 보여주는데 요만한 소나무 분재가 20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200만원 달라고 합니다. 나는 거짓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되어갑니다. 거목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이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신자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은 자동차를 운행하기 위해서 휘발유를 넣는 것과 똑같을 정도로 아주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아주 정확한 상태를 묘사하자면 이 시대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이 거의 방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늘 울어도 그렇게 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늘 우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됩니까? 정말 몇 년에 한번씩 비오듯이 어떻게 한번 은혜를 받고 그것으로서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마치 깊이 잠드는 것이 자기의 운명인 것처럼 하나님이 막 흔들어 깨우시면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한번 고개를 들었다가 며칠 있다가 다시 푹 꼬꾸라져서 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그런 신자의 삶에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상당히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행복합니까? 하고 물으면 그들은 말로는 행복하다고 말해야지 된다고 의무감을 느끼겠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예수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세상에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면 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 마음은 누구나 와서 놀다가 갈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창기의 마음처럼 완전히 개방됩니다. 아무나 와서 놀다가 갈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됩니다. 그 사람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렇게나 삶이 됩니다. 무엇이든지 그 마음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 마음에 지배된 생각대로 일관성도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그런 동안에 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기대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삶을 살면서 일생을 허비하다가 그러다가 부끄럽게 구원을 받습니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지킨다는 첫 번째 의미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은 생각들에 흩날림을 아주 유의해서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많은 생각들이 흩날리는데 그 생각들을 보면서 정확하게 이것은 옳은 생각이다. 옳지 않은 생각이다. 이런 것들이 이렇게 정확하게 탁 찍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그냥 지켜본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장님이, 아니면 장님까지 안 가도 아주 심각한 약시여서 거의 코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분간할 수 없는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안경점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안경을 맞추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나사로 끼어주세요. 저게 제 나사입니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안하고 다른 나사로 안경을 자꾸 끼우더랍니다. 신경질을 내면서 아니 이 나사로 끼우라고 하니까 왜 그래요 하니까 아줌마 그거 빵가루입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못 보는데, 판단력이 없는데 뭐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결국 무엇인가 하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계속해서 선악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정확한 분별력이 성화와 함께 같이 자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간절히 빌면서 하는 말이 선악을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 장성하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게 성화 자체 속에 들어있는 특정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는 멍청하면서 거룩한 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모든 신자는 지혜로운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한 욕심과 더러운 세상에서 정말 뱀같이 지혜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몸부림치지 않은 사람이 거룩의 고지를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화는 물론이거니와 구원에서까지, 생각이 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그렇게 성화에 의해서 계속 지식에서 장성하면서 그 분별력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이 성화 된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면 아주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저는 밝은 것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식당 보셨을 것입니다. 환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한 세배는 더 환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빛이 환하게 비추면 작은 물건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어두컴컴하면 큰 물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화가 많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례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은 말하자면 아주 밝은 서치라이트를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분별해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신앙이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과 같이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날 아는 것보다 저 사람이나를 더 잘 알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 사람 앞에 탁 들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못 만나보셨는가 봅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럴 때 확 들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 그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의 판단력에 의해서 어떤 생각이 나쁘고 좋고 그리고 그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나중에 가져오고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그러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성화 된 상태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분별력을 활용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조언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그런 모험을 통해서 자기 속에 들어오는 지식이니까 그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 성찰에 의무를 해야 됩니다. 자기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을 쭉 살펴야 됩니다. 그것이 마음을 지킨다는 첫 번째 의무입니다.
2. 더러운 생각을 버림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더러운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켜야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에 대해서 제가 이제 내일과 모레쯤 될까, 하루나 이틀 혹은 삼일, 제가 설교하겠습니다만, 하여튼 그것은 내일 배우기로 하고 어째든 지켜할 어떤 마음이 있다고 칩시다. 그 마음은 다른 여러 가지의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기본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마음을 지키는 것을 가지고 마음을 지킨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일정한 상태의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가르쳐서 마음을 지킨다고 합니다. 예수를 아무리 전해도 안 믿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죄인을 향해서 우리들이 저 사람은 너무나 마음을 잘 지켜서 예수를 못 믿는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지키는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이 신자의 성화를 위해서 신자 속에 두시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지킨다라고 할 때에 그것은 그 마음에 반하는 더러운 생각들이 수시로 착상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털어 버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1) 생각과 마음의 차이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과 마음이 굉장히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은 상당히 객관적입니다. 객관적으로 마음 위를 떠돌아다니는 씨앗과 같습니다. 객관적입니다. 생각만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주 쉽게 그 생각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막 잡념이 떠오르는데 한번 흔들면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 그렇게 하잖아요. 이렇게,
(예화: 신학교 교수로 계실 때 어느 학생이 히브리어 시험을 보기 위해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머리를 감싸고 들어가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외운 공부의 내용 중 히브리어에는 동사 표를 하는 점들이 많이 찍혀서 머리에 외운 동사표의 점이 떨어질까봐 그렇게 했는데 뒤에 있는 학생이 지우개를 빌려달라고 하기에 고개를 돌리자 다 떨어졌다며 친구를 원망했다는 이야기)
머리를 한번만 흔들어도 대부분의 생각들은 스쳐지나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막 떠오릅니다. 어느 한순간에 이것이 다 쓸데없는데 그리고 창문 한번 내리고 바람 한번 쐬면 다 날라 갑니다. 그만큼 생각은 객관적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맨 처음에 어떤 생각이 떨어져서 그 마음에 경향을 지배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마태복음 13장에 씨뿌리는 비유에서 거기에 보면 길가도 나오고 돌작 밭 가시밭도 나오고 옥토 밭도 나옵니다. 모든 밭의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은 씨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객관적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니 저 목사님이 돌았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는데 예수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니, 그것은 벌써 여러분들의 마음이 신앙에 의해서 주님 때문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여러분들이 살아갈 때 예수가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교회가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목사 되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되게 만들어진 것은 어느 날 생각이 우리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생각이 우리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존재이다. 정말 절망 앞에 처했을 때 누구의 훈수도 내 인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 하나님은 나를 도와 주실까?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주님이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어. 다른 사람이 맨 처음 말할 때 그것은 내게 생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해력을 통해서 마음에 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막 믿을까 그렇게 하다가 옆에 있는 친구가 예수는 뭐 고리타분하게 야, 술이나 먹으러 가자. 그러면서 이렇게 흔들면 다 떨어집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에 착상이 되면 한 생각이 마음으로 확산되어가면서 영향력을 마음전체로 확산됩니다. 어느 날 와르르 무너지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막 회개합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생각이 확대되다가 그 마음을 모두 지배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우리의 마음이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그게 생각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2)생각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
그런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생각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이 마음이 또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마음이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그래서 일정한 마음이 되면 그 다음에는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왜 누군가 그랬습니다. 공자가 그랬나 15살에 뜻을 세우고 학문을 하고 쭉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50에는 천명을 알고 그리고 60에는 귀가 순해지고 70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종신소욕하나 불육이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다 살아도 인간사는 법도를 넘어섬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말에 상당히 많이 뻥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는 상당히 많이 적용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덜 성화 되었을 때에는 온갖 생각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성화가 오래두고 견고해지면 아예 생각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 퇴화됩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나서 한참 동안 신앙에 빠져서 세상 모르고 정말 주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살던 끝에 아주 확실하게 퇴화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락에 대한 감각입니다. 제가 옛날에 헤비메탈을 비롯해서 팝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겨우 잠을 잤습니다. 그랬는데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다시 음악을 듣는데 너무 싫었습니다. 지금도 택시를 탈 때가 거의 없지만 타면 제일먼저 하는 일이 끄자고 합니다. 좀 조용히 가자고 말합니다. 거기서 내 귀에 선한 음악이 나올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끄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또 뭐가 있는가 하면 마음이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계속 악한 생각들이 스쳐갈 때 강렬하게 그 마음이 생각들을 붙듭니다. 호응합니다. 계속해서, 그런데 많이 성화 되어서 선한 사람은, 물론 선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악한 생각이 전혀 착상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비교적 아주 선한 사람들은 악한 생각들이 떠오르면 아주 토할 것 같은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화에서 끔찍한 살인장면 같은 것을 보면서 요동도 안하고 껌을 질겅질겅 씹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보십시오. 무섭다고 하면서 눈을 가립니다. 그게 저게 가공의 현실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 밭 자체가 다릅니다. 매일 칼 갖고 피 흘리며 싸우는 폭력배가 그런 영화를 볼 때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자신의 삶을 구현한 영화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주 친화 적입니다. 아래를 찔러야지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마음이 틀리면서도 아주 밀접한 유기적인 관계가 됩니다. 생각을 통해서 마음이 지배되고 동시에 그 마음이 생각을 지배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그 마음에 날아가는 많은 생각가운데 악한 생각들을 더러운 생각들을 수시로 털어 내는 것입니다. 안돼,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할 때 여러분 흔듭니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 흔듭니다. 털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악한 생각이 잘 안 털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이 상당히 그 생각에 어울리는 마음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조짐입니다. 그때는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러면 그런 상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이 마음 자체를 바꿀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내일 다룰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악한 생각들을 떨쳐 버리는 것이 마음 쪽으로 굉장히 힘들다 라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 하면 마음 자체가 상당히 악한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심각성에 대해서 아주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긴 마음인데 하나님을 은혜에 잠긴 마음을 가진 사람도 수시로 악한 생각이 오갑니다. 그런데 털어 내는 것이 상당히 쉽습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악한 생각을 털어 내는 것이 쉽습니다. 물론 신자가 너무 신령한 은혜가운데 있을 때는 악한 생각 떠오르는 자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도의 성화의 상태이고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은혜 안에 있을 때만 해도 악한 생각이 떠오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니지 그리고 톡톡 털어 버립니다. 그게 상당히 쉽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상당히 은혜가 떠나고 강퍅해 지기 시작하면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저는 식물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만 소위 이야기하는 ‘와디’ 라고 무수 천이 있습니다. 더러운 물이 흐르다가 물이 그쳤습니다. 물이 안 흐르는 무시천이 되었습니다. 신기한 게 물이 흐르지 않는데도 거기 개천 바닥에 굉장히 많은 풀들이 돋아나고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풀들과 이런 과목들이 자랍니다. 그런데 다시 환경의 변화가 생겨서 철철 넘치는 물이 가득 차서 유수 천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몇 년 지나고 나면 생태계가 완전히 바뀝니다. 물이 없을 때 자라던 식물들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 물이 있을 때 자라는 생태계가 전에 무수 천이던 생태계와는 전혀 다른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똑같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질 때에 잘 떨어지는 씨앗이 있고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잘 떨어지는 씨앗이 따로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되든지 저런 마음이 되든지 항상 인간의 마음은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런데 생성되는 그 생태계가 다른 것처럼 자라나는 그 식물들과 그 다음에 거기서 맺히는 모든 열매, 거기에 착상되는 씨앗들이 은혜 안에 있는 신자의 마음과 강퍅해진 신자의 마음속에 자라나는 모든 것들은 완전히 다릅니다. 대조적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아주 정확하게 대조를 했습니다. 그렇게 어디 비슷한 게 있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육체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기쁨이라고 하면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그럴 때 여기에는 그 오래 참음이 있는데 육체의 열매는 덜 참음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성령의 속한 열매는 오래 참음인데 육체에 속한 열매는 덜 참음이 아닙니다. 그럼 포악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열매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그 마음이 붙잡는 생각들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 오늘 여러분들이 정확한 바로미터가 주어졌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요즘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쭉 살피면서 성찰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악한 생각들도 떠오르고 조잡하고 더러운 생각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은혜 안에 있는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 쉽게 떨쳐집니까? 아니야 그러면 떨쳐집니까? 주여, 하면 싹 달아납니까? 아니면 한번 떠오른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으면서 집요해서 그래서 금식을 해도 안 떨어지고 찬송을 해도 안 떨어지고 한번 붙잡힌 생각들이 며칠 가고 그래서 결국은 그 생각이 시키는 대로 무엇인가 행동을 하게끔 이 마음이 움직이는 경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건강한 상태를 측량하는 아주 훌륭한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화에 있어서 주최는 자기입니다. 물론 더 강력한 주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붙드셔서 그래서 부패한 본성과 싸워서 거룩한 본성을 심어나가시는 역할을 하시는 이니셔티브을 성령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 성령님 다음으로 이니셔티블을 쥐고 있는 사람은 목회자도 아니고 구역장도 아니고 자신의 엄마 아빠도 아니고 자기 자신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 마음을, 멀쩡하게 예배에 나와서 가만히 앉아서 찬송 부르고 단정히 앉아서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 일어나서 가는데 그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자기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도 “사람의 마음을 누가 알랴” 그렇게 말합니다. 자기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게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더러운 생각들을 털어 냅니다. 왜 그 생각이 마음에 착상되어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몰아낼 수 없을 정도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선실에 가서 방향타를 움직이는 항해키를 탈취하다가 실패한 사람이 뱃머리로 달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도 선실에 들어가서 격투를 해서 그 키를 빼앗는 것이 낫지, 캄캄한 밤바다에 혼자 수십 만 톤의 배 앞머리에 가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죄인의 인생에 그 도도한 항해의 위력을 여러분이 느껴보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은 거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은혜 받은 사람이 통곡하듯이 탄식합니다. What a miserable man that I am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후일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doomed to death" 사망으로 운명지어진 자신의 몸으로부터 자기를 구출할 사람이 누군가 합니다. 누가 자기를 건져내랴.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의 본성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 하나님을 거스르며 지나가던 이 도도한 삶에 이 항해, 이것을 일주일에 한번씩 형식적으로 들어가는 예배가 막을 수 있다고 되지도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이렇게 집사니 교사니, 구역 장이니 불림을 받는 그런 직분이 그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는데 그런 어떤 기독교 가문에 프라이드 같은 것으로 그 도도한 마음이 점령당했기 때문에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도도한 그 인생의 항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막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지 않고는? 마음에 수시로 떨어지는 더러운 생각들을 털어 버리지 아니하고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절대로 기억해야 됩니다. 그게 두 번째입니다.
3.마음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함
그 다음에 세 번째, 마음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즉 마음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한번 말씀을 드렸는데 시골에 언제 한번 갔다가 그 집에서 묶고 있는데 그 집에서 송아지를 코 뚫으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거기 공부하러 갔는데 그래도 심심하니까 따라갔습니다. 그 양반들이 겨울에 너무 바빠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코를 뚫어야 할 시기를 두 달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송아지가 꽤 커졌습니다. 개처럼 여기다 줄을 매고 그리고 그 놈을 끌고 가는데 이 자식이 길로 가야지 되는데 산으로 갑니다. 그래서 두 장정이 그것을 붙들고 가는데 우리가 산으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내려오느라고 고생을 하니까 지나가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야, 진작 코를 뚫지 이렇게 다 크도록 내버려두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서 옛말에 코 안 뚫은 송아지 삼부자가 못 당한다는 말도 있단다. 장정 셋이 붙잡아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가 하면 코만 뚫으면 황소를 초등학생들이 끌고 다닙니다. 가야 되는데 이 놈이 풀을 뜯겠다고 안 갑니다.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습니다. 그러면 줄을 잡고 당기면 끌려옵니다. 왜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라 코가 아프니까. 코가 찢어지니까. 그러니까 끌고 옵니다.
달리는 말을 누가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초등학교 때는 다 사람들이 말에다가 구루마를 연결해서 연탄도 싣고 다니고 쌀도 싣고 다니고 했습니다. 막 겨울에 나가보면 코 김을 뿜으면서 막 채찍질을 합니다. 그러면 말이 달가닥 달가닥 열심히 달립니다. 경마 하는 그런 말같이 훌륭한 말은 아니지만 말 비슷하게 열심히 갑니다. 여기 서야지 되는데 서라 서라하면 말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러면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줄을 탁 잡아당깁니다. 줄이 여기 이렇게 묶여있으니까 재갈이라고 합니다. 그럼 말이 무슨 뭐 감동을 받아서 서는 것이 아니라 빨리 달려가다가 안 서면 입이 찢어지겠으니 까 서게 됩니다. 급히 서려면 세게 잡아당기면 말이 앞발을 번쩍 들면서, 왜 듭니까? 만세를 부를 것도 아니고 입이 너무 아프니까 발을 드는 것입니다. 그게 힘센 가축들을 통제하는 인간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짐승과 같아서 잘 길들여질 때에는 마치 서커스단에 있는 그 표범과 같습니다. 호랑이와 같습니다. 호랑이를 어떻게 훈련시켰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 위험하기에 그렇게 합니다. 언제 한번 TV프로에서 보니까 대게 추석 때 그런 것을 많이 보여줍니다. 여자가 사자 입을 벌리고 그 속에 머리를 집어넣습니다. 그 사자가 입만 다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안전하다고 생각되니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떤 남자는 이번에 팔을 쑥 집어넣습니다. 그것은 굉장합니다.
(예화: 선교지에 가셔서 들으신 이야기- 서부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선교사 부부가 사파리에서 내려 사자 옆에서 사진을 찍는데 플레시가 터지면서 그 사자가 순간에 돌변해 짧은 시간에 선교사를 찢어 죽였다는 이야기)
그런 짐승으로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것은 영원히 은혜를 잘 받으면서 그 마음을 계속 유순한 마음을 가지고 일평생 살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 사자와 같이 돌변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무엘하 11장까지 살았던 다윗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거기서 하트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뒤따라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바로 뒤에 있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빼 닮은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의 상태는 어떤 야수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야수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됩니까?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 나서 그 다음에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야수로 돌변합니다.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그냥 죽입니다. 그것도 아주 간교한 방법으로 죽입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안 느낍니다. 그런 통제될 수 없는 그런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재갈을 딱 먹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재갈이 무엇으로서 재갈을 먹일 수 있을까? 우선 이 문제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정서,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악한 마음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한 진지한 추측, 자, 그럼 설명을 해 보이겠습니다.
1)사랑의 정서로 재갈을 물림
사랑의 정서가 마음에 재갈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 하나가 147장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이 정서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강력합니다. 이해가 안 가는 눈빛인데 지성, 의지, 정서 이 세 가지 있는데 인간의 마음은 이 세 가지에 의해서 다 영향을 받는데 그런데 정서에 의해서 제일 영향을 받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자, 어떤 예를 들면 잘될까요? 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은 예가 생각이 났습니다. 은혜로운 예는 아닙니다. 자 약을 먹는 중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당신 술 먹으면 잘못하면 큰일나 경고를 했습니다. 당신 지금 위가 뚫어지기 직전인데 내가 주는 이 약을 먹으면서 매일매일 병원에 와서 잘 해야돼. 그래서 가슴속에 딱 새겨졌습니다. 뭐냐하면 나는 지금 금주해야지 된다. 술 먹으면 안 된다. 새겼습니다. 그것은 지식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지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버팁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정말 이상합니다. 돈만 원만 꿔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뺀질 대는 사람이 한 병에 수십 만원 짜리 양주를 따라서 사람들에게 막 먹으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하도 답답해서 나 약 먹어서 안 돼. 에이 그래도 먹어,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이게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인데, 약 봉지를 꺼내서 나 약 먹는데 의사가 술 먹으면 끝이라고 그랬어. 사람들이 먹어. 맛있어 자꾸 설득을 합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먹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발언이 하나 있습니다. 나도 약 먹어. 그러면서 술을 먹습니다. 마음이 확 녹아집니다. 그 사람이 담대함을 주었습니다. 술에 대한 생각이 난 것입니다. 어제 황도 이야기를 하니까 침이 확 고였습니다. 그게 뭐입니까? 느꼈기 때문에 고인 것입니다. 황도란 하고 내가 여기서 백과사전을 읽어줘도 고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정서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게 정서에 의해서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은혜의 체험이 없이 아무리 여기서 좋은 교리를 많이 배워도 이상한 기도원에 가서 불 한번 받고 오면 이것은 날라 가는 것은 순간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사실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직 성경만으로 개혁 신앙을 가르치는 목사님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왜 지식이 기가 막힌 데 결국은 그 지식이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은 어떤 체험이 들어오게 되면 한방에 날아갑니다. 그리고 다 뒤집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경우입니다. 유대주의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지성과 모든 의지가 유대주의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유대주의에서는 무엇도 느낄 수 없었지만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어떤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았고 그런 모든 정서가 아주 분명한 깨달음을 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다 버립니다. 가족도 친척도 모두 떠나고 전도 유망한 지도자의 길을 모두 포기하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 마음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의 정서 속에서 살 때에 갱신됩니다. 그래서 제가 의로운 생활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에 핵심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분 앞에 쓸모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두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나를 사랑하셨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십자가 체험의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 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가 아니라 사실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십자가의 아가페의 사랑, 그것을 느꼈습니다.
147장 작사한 사람의 이야기도 그것입니다. 잠시 마음이 부요 해지면서 세상에 헛된 욕망들이 막 생겨납니다. 그래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버리게 됩니다. 그런 사랑의 정서를 느낍니다. 그때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한번씩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이 잘못된 곳으로 흐를 때 우리를 재갈먹여서 우리를 잡아당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바른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할 때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강퍅할 때에 우리의 생각이 같습니까? 다릅니다. 오가는 생각도 다르고 마음도 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실제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그런 사랑의 정서를 느끼는 일들이 부흥회 때 한번 일어나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늘 그런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그것입니다. 마치 옛날에 낭군을 멀리 전쟁터에 떠나 보낸 아낙네들이 자기의 정절을 지키며 가슴에 장도를 품고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서의 재갈이 물려있을 때 그때 신앙의 정절이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정절은 무슨 놈의 정절입니까? 마음이 다 개방되었는데 누구든지 놀다가도 문제가 안 되는데 정절은 무슨 놈의 정절입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에게는 이 신앙의 정절이라는 단어, 순결이라는 단어가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이지 마음이 개방된 사람들에게 이 모든 단어들은 다 추상적이고 자신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주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야지 됩니다.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구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나를 어떠한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쓸모 없는 존재인가 아주 뼈저리게 느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주님의 그 사랑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가 동시에 느끼는 것은,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주님의 큰사랑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내 사랑하는 일들을 좀 포기하는데서 오는 고통이 고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게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마음에 밀려오는 악한 생각을 떨쳐냈을 때의 그 기쁨은 그 죄를 잠시 누리는 기쁨보다도 더 큰 기쁨이 밀려옵니다. 유혹을 이겼을 때 그 큰 환희, 유혹을 이겼을 때 그 놀라운 기쁨,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더러운 생각들을 떨쳐냈을 때 그 아침햇살처럼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과의 그 친밀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에서도 이겼노라고 하는 이 은혜의 감격, 그게 얼마나 기쁩니까? 마음속에 밀려들어오는 악한 생각을 떨쳐낸 것이 희생입니까, 아닙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신령하고 놀라운 기쁨으로 보상을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음의 재갈을 먹이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사랑의 정서 속에서 살아야 된다.
2)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재갈을 물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악한 생각을 향해서 자기의 마음을 거의 다 개방해버리고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점령될 수 있는 방치된 마음에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사랑의 교리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곡된 사랑의 교리에 집착합니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가두어서 자기를 심판하실 수도 없고 자기를 책망하실 수도 없는 하나님으로 가두어버립니다. 그리고 누가 그런 정확한 하나님을 묘사하면 그것은 잘못된 교훈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죄 된 마음을 속이기 위한 심리적인 간교함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되었는데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그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밀려들어오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어떤 친화 적인 마음에 반응이 생겨나려고 할 때 그때에 이 생각을 내가 붙잡아서 이 생각을 내 마음 밭에 착상시키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불쾌함을 나에게 보여주실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내 영혼에 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슬프고 큰일이다 하는 감각을 유지해야 됩니다.
3)마음의 미끄러짐이 몰고 올 불행을 생각함
세 번째는, 그런 악한 생각들이 마음에 착상될 때 마지막에 이루어질 결과를 미리 내다보는 것, 그런 의식이 발달되어야 합니다. 아니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함께 그 집 내실에 잠시 머문 것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떤 청년들이 그런 것을 물어보는데 노래방에 가면 죄입니까? 어디 성경에 노래방에 가는 게 죄라고 쓰여있습니까? 별로 안 좋지, 그러니까 거기 가서 복음성가를 부르면 안 될까요? 웃고 말았습니다. 아니 카바레에 가서 앉아 있으면 그게 죄이겠어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단란주점에 가서 앉아 있으면 그게 죄겠어요?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그것은 거기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단란주점, 노래방에 가서 맥주나 몇 병 놓고 친구들이 거기서 니나노를 부르는데 거기서 무슨 생각이 떠오르겠습니까? 물론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 이 인간들을 불의 심판에서 건져달라고 눈물을 펑펑 흘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십시오. 현장까지 가서 중보 기도를 안 해도 되니까 교회에서 하십시오. 복음성가를 부른다고 하는데 남 잘 노는데 가서 그런 것 불러서 초치지 말고, 그래요. 누가 말리겠습니까?
내가 옛날에 알던 어떤 사람이 자기가 전도하기 위해서 사창가에 들어간다고 그래서 창녀촌에 막 들라날락 하는데 물론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공격적인 선교입니까? 그런데 특수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거기 단란주점에 들어가서 앉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거기 벌거벗다시피 한 여 종업원들이 와서 술 따라주는 그 현장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이 인간들은 베수비오스 화산이 폭발할 때에 묻혀죽었던 품페이 그 여성들과 똑같구나. 주여 이 심판이 여기에는 있지 말아지리라. 그리고 벌거벗은 여자 붙들고 통곡할지도 모릅니다. 교회에서 하십시오. 거기까지 현장출동을 안 해도 되니까. 그 자체가 무슨 죄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많은 생각들이 잠시 후에 마음을 점령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나 뻔합니다.
(예화: 직장에 다니는 형제가 동료들이 억지로 끌고 가 술집 여자와 간음하도록 해놓고 교회에 다니면서 그럴 수가 있는가 하며 핀잔을 주기에 괴로워하면서 편지를 보내 위로의 답장을 보내셨는데 처음부터 가지 않았어야 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어떤 나쁜 생각들이 막 오갈 때 그것이 착상될 것을 생각해야 되고 착상된 생각이 아직은 성장을 안 했지만 계속 성장하면 마지막에 몰고 올 최악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딱 재갈이 물려집니다.
자, 어리석은 부자가 고난이 있었습니다. 추수를 했는데 어마어마하게 곡식이 걷혔습니다. 도저히 자기 창고에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에게 퍼주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계속 고민하다가 큰 창고를 지어서 가뜩 집어넣고 오래도록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영혼을 데리고 가시면 어떡하겠는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날 밤에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이 취하실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면 그가 그런 삶을 살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살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아는 은혜가 그래도 남아 있는 신자는 그 악한 생각이 착상될 때 몰고 올 최악의 생활을 상정하면 죄지을 맛이 싹 달아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 금연학교를 아실 것입니다. 데리고 가면 일주일 동안 하는데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게 폐암으로 죽은 사람의 일대기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사람을 보여주면 안 되니까 그룹의 회장, 사장, 누구, 누구 잘나가던 사람들이 5-60대도 안 되어서 퍽퍽 쓰러져서 죽은 것을 보여주면서 그 사람들을 해부한 것을 찍어놓은 그런 폐 같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일 금연학교에서 노리는 효과는 결심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담배 맛이 떨어지게 만듭니다. 담배를 보면 그 시커멓게 절어서 피가 맺힌 그 폐가 생각이 나게끔 연상을 하게끔 합니다. 딱 붙드는 순간 연상을 하게 합니다. 혐오감을 느끼면서 못하게 합니다.
(예화: 근처에 있는 설렁탕 집에서 식사를 드시는데 설렁탕에 수세미, 이쑤시개가 나오고 머리카락이 나와 불결하고 혐오스러워 다시는 가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지 말라고 전도하신다는 이야기)
이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나쁜 생각이 마지막 몰고 올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그때에 막 마음이 개방되어서 악한 마음으로 치달아가고 있던 그 상황을 못 가게 확 당겨서 재갈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헤아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 번째입니다.
4.은혜를 강화할 기회를 활용함
네 번째, 은혜를 강화할 기회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에서 은혜는 신자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신령한 정서를 유지한 상태입니다. 그것을 강화하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는 것도 아주 훌륭한 자신 속에 있는 약화된 은혜를 강화하는 방법입니다. 또 어떻습니까? 교회에 다닐 생각도 점점 사라지고 까 부러져서 주저앉을 것 같은데 몇 사람이 심방을 왔습니다. 그리고 와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데 와서 과일이라도 나누어먹으면서 자기들 은혜 받은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합니다. 한참 듣고 보면 그런 신앙의 교제를 나누다보면 마음속이 따뜻해지면서 맞아, 저분들은 나보다 늦게 와서 저렇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미끄러져서 냉담한 가슴을 가지고 있구나. 헤어질 때가 되어서 같이 손잡고 기도하면 눈물이 핑 돕니다. 그리고 정말 나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이 강퍅해지고 딱딱해졌는데 목사님이 하도 전화해서 왜 금요기도 안 나오는가 하고 들볶아서 아주 볶이기 싫어서 하루 나갔는데 아 그날 찬양을 부르는데 마음이 막 녹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부르는 찬송이 계속해서 뭐 손들고 옵니다. 나 이제 주를 떠났다 돌아옵니다. 어머니 기도 못 잊어 나 집에 돌아갑니다. 이런 찬송만 계속 부릅니다. 그러면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니까 주님이 여기에 부르셔서 이런 찬송을 부르게 해주시는구나. 그러면 은혜의 정서가 회복됩니다. 이런 은혜의 정서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부지런히 참여해서 은혜를 받음으로서 마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부지런히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쓰고 은혜를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의 자리를 헌신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5.그 일을 위하여 힘쓰는 것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마음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마음을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보면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많은 영어 성경에서 Keep your heart with diligence 그러니까 열심히 힘써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힘써서”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 “힘써서”를 넣었는가 하면 여기에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도 내 마음을 지키라” “지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단어가 “나짜르”라는 단어인데 이게 나훔 2장에 보면 군사들이 성을 지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샤마르”라는 동사에 비해서 이 “나짜르”라는 단어는 “지킨다”라는 말에 의미가 훨씬 더 공격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 with diligence 집어넣은 것입니다. “힘써”란 단어를 부사구로 하나 만들어서 집어넣은 것입니다. 전 적절한 영어 번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더욱”이란 말을 썼습니다. “힘써라” 그랬으면 더 좋을 뻔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나짜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게 결국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이 마음을 지키는 이 일은 이렇게 잘 되겠지, 하나님이 내 마음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 믿음대로 된다며, 이런 식의 소극적인 방어를 통해서는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도 마귀도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부패성도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하나님의 은혜가 한 신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눈뜨고 보지를 못합니다. 미친 듯이 그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서 유혹하기도 하고 악한 생각이 떠오르게도 하고 그리고 신앙에 태만을 조장하기도 하고 무지 속에서 살게 나두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치열하게 그 마음을 뺏으려고 합니다.
자,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산꼭대기에 집을 하나 짓고 예쁘게 집을 짓고 산다고 칩시다. 그런데 밤에 잘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을 다 걸 것입니다. 왜 도둑이라도 와서 문을 열고 들어와서 뭘 가져갈지 모르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문을 걸고 그리고 문단속을 잘 하고 그것도 좀 불안하면 좀 환하게 불을 켜놓고 들어가서 자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극적인 방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집을 지키는 것이 그런 정도가 아니라 군인들이 창칼을 들고 공격해올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집을 지켜야된다고 할 때 그 정도 가지고 되겠습니까? 불을 환하게 켜놓고 문을 굳게 잠그고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신발을 여러 개정도 갖다 놓는 정도가지고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나훔 2장 1절에 나와있는 것처럼 적군이 밀려들어올 때 성을 파수하기 위해서, 그럼 어떻게 합니까? 문을 잠그는 것은 물론입니다. 불을 환하게 켜놓는 것은 물론인데 창칼을 들고 군사들을 그 성 위에 올려보내서 모두 둘러싸서 적군이 공격을 할 의사는 없지만 올라오면 너 죽고 나 죽는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방어인데 전자에서 이야기하는 그 디펜서 하고 완전히 다른 개념의 방어입니다. 여기서 쓰여진 이 “나짜르”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의미의 단어입니다. 공격적인 방어입니다. 할 수 있으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가 조심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 수 없도록 어떤 공격적인 저항의지를 가지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신자가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될 것이 소극적인 방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믿음에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겠지 라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자기의 마음을 오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색출해내고 그것들, 더러운 것들은 털어 버리고 좋은 생각들은 착상을 해서 열매를 맺기까지 자랄 수 있도록 그 생각을 보호하고 그 생각이 마음에까지 이르도록 자극을 주어서 그 은혜로운 생각이, 신령한 생각이 마음 전체를 지배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그리고 악한 생각들이 들어오면 그것을 가차없이 처단하리라는 이런 자세를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뭐 하나만 생각을 골똘히 해도 막 뒷골이 댕기고 잠이 안 오고 힘들고 그럴 때 이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환한 지식의 등불, 서치라이트를 밝히고 그리고 그 악한 생각들을 색출해내고 좋은 생각들이 착상하면서 자랄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관리하는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참된 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신자의 삶에는 그 태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허리띠를 동이고 긴장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게 얼마나 힘든가. 힘듭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버려두어서 악한 생각들이 착상해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난 다음에 지불해야 될 그 피나는 결과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희생입니다. 지금 그것을 잘 하면 적은 희생으로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살아서 아주 빛난 빛과 소금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에 방향으로 항진할 수 있도록 되는데 이 작은 수고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 방치해두고 나면 그 다음에 삶의 방향이 틀어지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결과를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릅니다. 때에 따라서는 그 결과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 결과를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은 어두움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신자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마음을 우리가 일생동안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정결하게 잘 관리해서 우리의 삶에 항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항로가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드려야 합니다. 마지막에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우리가 주님께 열납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 지킴이, 마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고, 마음을 지킴 이것이 바로 성도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마음을 잘 지켜서 그래서 일평생 사는 동안에 그 성화의 소명을 따라서 이 세상이라는 대해를 항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 지켜야 할 마음: 부드러운 마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上)
지난 시간에는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장시간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세 번째로 이 시간에는 그러면 지켜야 할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어떤 마음을 성도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파수해야지 되는가. 그것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마음 중에서 자연인의 마음과 중생한 사람의 마음을 비교하고 크게 두 번째로는 강퍅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비교하면서 이제 우리들이 지켜야 할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두 종류 인간의 마음
우선 첫째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다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열 사람은 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사람마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마음은 크게 두 마음으로 구분이 되는데 하나는 아직까지도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마음이고, 또 하나는 주님을 만나고 거듭난 중생한 신자의 마음입니다.
1.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 완전히 굳은 마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견고하고 그리고 결코 하나님 앞에 깨어져본 적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이 돌맹이와 같고 어떤 감수성도 없습니까? 그렇지만 여기에서 ‘견고하다’ ‘깨어져본 적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사물에 대해서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과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 전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못한 사람들도 삼류소설을 보고 눈물을 펑펑 흘릴 수 있고 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보면서 손수건에 눈물을 흠뻑 적시고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오늘 우리들이 논증하고자 하는 부드러운 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견고하고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부서져 본 적이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부서져 본적이 없는 영적으로 아주 딱딱한 마음입니다. 그러면 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돌처럼 딱딱할까? 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신령한 은혜에 대해서 그렇게 견고하고 깨트려져 본적이 없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녹은 적이 없는 그런 굳은 마음일까? 이것을 크게 우리는 네 가지 이유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영적 어두움 때문이고, 둘째는 그 마음이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이고, 네 번째는 어떤 변화를 거부하는 영혼의 완강함 때문이라고 구별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우선 첫 번째 들 수 있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하나님을 향해 견고하고 부서지지 않은 마음은 영적인 어두움 때문입니다. 어떤 영혼의 빛도 없고 그들은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불 신앙 가운데 살아가면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해 그 사람의 태도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어떤 지식도 없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역시 돌같이 굳은 마음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깨트려지지 않은 그런 마음입니다. 이런 영적인 무지 속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마음은 무지 무각 하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느낄 줄을 모르는 돌 같은 마음입니다. 이런 영적인 무지가 자연인들에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돌 같이 딱딱하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질 줄 모르는 마음입니다.
2)사단에 의해 지배된 마음
두 번째는 보다 본질적인 것인데 그들의 마음을 사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에 고린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이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의 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어두워져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논증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사단이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사단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죄에 대해서 친화 적인 경향을 가지며 그리고 육체의 일을 행하는데 아주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런 마음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론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일정한 선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이 약간의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신앙심에서 비롯된 선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는 선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사단에게 붙잡혀 있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돌 같이 굳은 마음입니다.
3)허물과 죄로 죽음 마음
뿐만 아니라 세 번째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허물과 죄로 죽은 마음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그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을 통해서 그 마음에 어떤 선한 영향을 미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영혼으로부터 오는 어떤 신령하고 좋은 변화, 이런 것들이 그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그 마음을 각성시키고 변화시키는 그런 것들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어제 이 마음을 논증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마음과 영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에 미치고, 그리고 영혼의 참다운 변화는 다시 마음에 영향을 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결코 영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기 때문에 그 영혼의 변화가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돌 같이 딱딱합니다.
4)의지적인 완고함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이들의 마음이 이처럼 딱딱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적인 그 완고함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고집합니다. 이제껏 자신들이 생각하고 왔던 것들을 고집하고 그 이상의 새로운 사실들, 인생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기질적으로 의지적으로 더 이상 깨트려지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점 그들의 마음은 더 굳어지고 더 강해지게끔 되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2. 거듭난 사람의 마음: 완고함이 남은 마음
오늘 우리에게 더 관심을 끄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의 마음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어떨까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돌 같다면 그러면 거듭난 사람의 마음은 부드러운 케이크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그 자체가 죽어 있는 마음이오, 그 자체가 이미 사단에게 사로잡힌 마음이오, 완고함 속에 있는 마음이오, 영적 어두움 속에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바위와 같이 변함이 없지만 거듭난 신자의 마음은 맨 처음에는 부드러운 마음이었으나 이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어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거듭나서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살아나게 하심으로 그 살아난 영혼이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은혜를 받으니까 영혼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상호 작용이 일어나면서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아주 부드럽고 살아 있는 마음으로 이제 변화되게 되는데,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주님을 믿는 그 순간에 거듭나게 하셔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놓으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본성 속에는 타락한 본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남아 있어서 언제나 이것이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고 굳은 마음을 굳게도 하는 이 부드러움과 굳음, 이 두 가지가 한 마음속에서 함께 이쪽이 커지기도 하고 이쪽이 작아지기도 하면서 항상 가변적인 마음으로 되어 움직입니다. 이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굳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거듭난 신자의 마음은 완전히 굳은 마음은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은 완전히 굳은 마음도 없고 완전히 부드러운 마음도 없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항상 공존해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수시로 자신의 성화의 상태에 따라서 이 마음의 상태가 두 가지 마음이 항상 공존하면서 한쪽이 커지면 한쪽이 작아지고 하는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영어로 말하면 자연인의 마음은 ‘hard heart’입니다. 딱딱한 마음인데, 거듭난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굳은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hardness of heart’ 마음에 굳음의 문제이지 그러니까 굳은 마음이 아닙니다. 자연인의 마음은 절대적으로 돌 같이 딱딱한 마음인데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굳음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래서 굳은 것이 많아지면 거의 불신자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딱딱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던지면 그것들이 꽂히는 것이 아니라 탕탕 튑니다.
어렸을 때 가만히 생각하면 먹을 것도 없고 간식거리도 변변치 않고 그러니까 어렸을 때 늘 집에서 즐겨먹던 것이 시장에 가서 술 약을 사다가 밀가루에 집어넣고 해서 아랫목에 묻어두면 밀가루가 부풀어오르면 그것으로 빵을 해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빵도 해먹지만 수제비를 하려고 밀가루로 주물주물 해서 놓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참 내버려두면 어떻게 됩니까? 겉이 바짝 마르면서 딱딱한 껍질이 생깁니다. 원래는 이렇게 만지면 손가락이 쑥쑥 들어가는 밀가루 반죽이었는데 한참 건조한 방안에다 내버려두면 딱딱한 껍질이 생기는 것처럼 이 신자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이었는데 어떻게 잘 관리를 못하면 딱딱한 마음이 되어서 그 딱딱함이 아주 지나치면 불신자의 마음과 뭐 다를 게 있을까 할 정도로 그렇게 굳세고 딱딱한 그런 마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이제 신자의 마음과 불신자의 마음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1)지켜야 할 마음: 부드러운 마음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러면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이 신자 안에 공존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굳은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구약 성경에 보면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 에레미야서 같은 곳에 보면 하나님이 새 언약을 약속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때 그 굳은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찾아보면 굳은 마음은 ‘레브하 에벤’ 부드러운 마음은 ‘레브하 밧샤르’입니다. 에벤이 무엇인가 하면 에벤에셀에서 여러분이 배운 것처럼 ‘돌맹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굳은 마음은 돌맹이의 마음, 레브하 바샤르입니다. 바샤르는 살입니다. 살코기, 그럼 무엇인가 하면 돌의 마음과 살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선명합니다. 부드러운 소고기 덩어리와 돌덩어리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칼을 꽂는다면 돌맹이에는 아무리 칼로 내리쳐도 결코 그 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칼끝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고기에는 칼을 꽂으면 꽂힙니다. 썰면 썰리고 그리고 주무르면 주물러집니다. 그러나 이 돌은 짤라지지도 않고 썰어지지도 않고 어떻게 해도 안됩니다. 어떤 주부들은 고기를 사다가 연하게 하기 위해서 병 같은 것으로 두들깁니다. 그럼 아주 맛있는 고기가 됩니다. 돌맹이를 갖다 놓고 연하게 하기 위해서 병으로 막 두들기면 어떻게 될까요? 병이 계속 깨트려집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지켜야 할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당연히 부드러운 마음을 지켜야지 됩니다.“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셨을 때 그 지키라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악하고 죄 가운데 살아서 대적한 인간을 향해서 네 그 마음을 계속 지키라. 그것은 죽으라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a. 하나님의 생각에 예민한 마음
그러면 이 부드러운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첫째는 센서블한 마음입니다. 예민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그러니까 여러분 마음이 딱딱하다는 것, 굳어졌다 라고 하는 것 이해가 가시지요? 좀 시원하게 이해가 간다고 하십시오. 굳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 이해가 가시지요? 내가 지금 뭘 이야기하는지 여러분들의 가슴에 다가오지요? 그런 굳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안 기뻐하십니까? 안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하다가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마음을 녹이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사람은 말이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 “녹는다”는 표현을 봤기 때문에 그것을 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몇 번 회심하는 사람들 몇 사람을 보면 교회에 처음 왔기 때문에 녹는다는 표현이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도 마태복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고 간증을 할 때 그 마음을 녹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게 성경지식의 유무를 떠나서 그게 얼마나 인간의 굳은 마음이, 돌맹이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할 때 경험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마음이 녹는다” 이해가 가십니까? 마음이 잘 녹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돌맹이같이 굳었던 마음에 모정의 변화가 일어나서 그 마음이 부서지는 그런 경험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녹입니다. 그렇게 녹여서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녹아서 그 마음이 아주 부드러운 마음이 될 때 특징은 아주 예민해집니다. 어떻게 예민해 지는가 하면 부드러운 마음이 없었을 때는 자꾸 그 길이 아닌데 거기로 갑니다. 그래서 목사가 불러서 경고를 합니다. 안타까우니까. 이런 말하면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해 줘야지 어떻게 합니까? 내가 이쪽만 자꾸 가르쳐서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이야기를 해서 뭐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리로 가면 안 된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 그렇게 좋게 이야기해서 못 알아들으면 큰일나 하나님이 혼내신다. 그 길은 죄 짓는 길이다. 그리고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이 이야기 할 정도면 하나님이 그 사람 자신의 양심에는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을까요? 양심도 사실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많이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어서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서 ‘쾅‘ 하고 부딪혀서 피 터지고 나면 이 길이 아니었구나. 왜 그렇게 바보처럼, 아니 이렇게 큰길을 가다보면 부산으로 가고 싶으면 쭉 가다가 부산 표지판을 보고 가야지 ’부산은 이리로 가면 안 됩니다.‘ 써 있는데 가보기 전에 누가 알겠어 그리고 끝까지 갑니다. ’낭떠러지 위험‘ 이렇게 써 있으면 낭떠러지가 안보여도 가지 말아야지 아니 입증해 보지 않고 어떻게 남의 말만 듣겠어 하고 ’붕’ 하고 올라가면 눈뜨고 나면 지옥입니다. 그게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들 누구의 마음이나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졸지에” 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졸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수없이 말씀하시고 경고하시고 타이르시고 수없이 표지판을 보여주시고 그렇게 끊임없이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감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과 신앙, 그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에 어두움이 찾아올 때 주님이 이렇게 설교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지체들의 권면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것은 너무나 일반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나같이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다 흘려버리고 그리고 살아가는데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그 사람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을 붙들지 않으면 그 무엇으로도 그 사람이 가고자 하는 그 잘못된 길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흘려버리고 다 떠내려갑니다. 그러다가 큰 일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제 늘 부르는 찬송입니다. ‘손들고 옵니다.’ 평소에 손을 드십시오. 그때만 손을 들지 마시고, 그리고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펑펑 울면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빛을 보고 나니까 자기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으면서 그야말로 마음이 막 녹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떤 변화를 주시니까 그 변화가 그 마음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심령이 마음이 녹아 내립니다. 그리고 나서 놀랍게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나니까 어떻게 변합니까? 아주 센서블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아주 예민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뭐에 대해서 예민한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성령의 분부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것은 마음이 굳었을 때도 예민함이 있습니다. 마음이 굳었을 때에는 세상 적인 것에 대해서 아주 예민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고 마음이 강퍅해져 있을 때에는 이 세상 적인 것에 대해서 너무 예민합니다. 먹고 싶은 것은 죽어도 먹어야 되고, 입고 싶은 것은 카드 빚을 내서라도 입어야 되고,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육체가 원하는 요구에 대해서 거의 저항을 하지 않는 아주 민감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 그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은혜가 뚝 떨어지면 그 사람이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본분이 월요일은 전도하러 가는 날이고, 화요일은 복음 전하는 날이고, 수요일은 신문 돌리는 날이고, 구역 예배드리는 날이고, 교회 청소하는 날이고 늘 그렇게 하고 살다가 은혜가 뚝 떨어지면 그 일을 안 하니까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천만에 다른 일이 많이 생깁니다. 동창회도 가야지 되고, 계도 가야지 되고, 패션쇼도 가야지 되고 별의별 세속적인 것에 대한 즐거움을 찾으면서 막 살게 됩니다. 그렇게 세상에 예민해집니다. 그 대신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둔감해집니다.
오늘날 진짜 심각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든지 천명 모이는 교회에 부흥회 하면 사 백 명 오 백 명도 안 모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하도 답답하니까 나보고 주일 날 자기와 교회를 바꿔서 설교를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부흥회를 토요일 날부터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아니 왜 그런가 했더니 아무리 강사를 불러서 뒤집어놓으려고 애를 써도 아니 와야지 만 뒤집든지 말든지 할텐데 반도 안 온답니다. 그래도 많이 모이는 날이 주일이니까 그렇게 가서 목사님이 확 뒤집으려면 목사님이 자기 대신 여기 와서 설교를 해야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 강단은 비니까 자기가 오겠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내가 뒤집을 테니 당신교회나 혼자 실컷 뒤집으라고 했습니다. 안 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무지 무각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내가 지금 어느 장소에 있으면 성령님이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안 기뻐하신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누구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대화를 나누면 집에 가서 한참 생각해보고야 그것은 내가 잘못된 것이었구나. 이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느낍니다. 내가 이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고 느껴집니다. 아주 예민해집니다. 그게 ‘성령을 따라서 산다’라고 할 때 성령이 결국은 어디에 말씀하십니까? 사람의 영혼을 향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빌립보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고 루디아를 통해 빌립보 선교가 이루어지게 하셨는데 성령님이 루디아를 어떻게 그런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성령님이 말씀하실 때도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따라서 산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성령님이 가지고 계신 인격적인 느낌과 생각, 그리고 성령님이 가지고 계신 그 마음에 대해서 성령님이 ‘지 정 의’ 알고 느끼고 그 다음에 행동하시는 성령님의 의지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면서 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삶과 마음에 있어서 완고하면서도 자꾸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뭔가 움직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신비주의자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인도 받는 사람의 특징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놀랍게 지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잘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딱 떨어지면 그게 이렇게 빨아 듯이 싹 빨아들이면서 그 마음에 딱 떨어집니다. 그리고 착상이 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같이 ‘훅’ 불면 날라 가는 것이 아니라 딱 떨어지면 오늘 습기를 머금으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 속에서 자라면서 말씀이 그의 삶에 인격에 생각에 영향을 주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센서블하다는 것, 부드러운 마음이 아주 예민해진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느끼시고,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들에 대해서 아주 민감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 은혜에 의해서 잘 기경 된 마음이 되었을 때는 세상에 있는 씨앗이 딱 떨어지면 잘 안 자랍니다. 그게 자연적인 밭과의 차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밭이 아주 기름지면 잡초도 잘 자라고 곡식도 잘 자랍니다. 맞지 않습니까? 왜 서로 그것을 빨아먹으면서 자라니까,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부드러운 밭과 같이 되었을 때는 다릅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뿌리시는 말씀의 씨가 그것을 통해서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지 정 의는 잘 전달되지만 세상에 그런 것들이 이렇게 와서 뿌리며 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굳어졌던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고 나면 예전에 세상에 대해서 사랑하던 많은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좋은 옷 입고 그런 것 자랑하고 하는 그런 것 옛날에는 자기도 그랬지만 예수 믿고 나니까 그런 것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마음이 됩니다. 그러니까 부드러운 마음은 첫째 예민한 마음입니다.
b.하나님의 의지에 쉽게 영향받는 마음
그 다음에 이제 부드러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하면 잘 휘는 마음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비유를 한번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배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해변에 두었더니 염분에 의해서 배가 많이 부식되고 뒤에 방향타가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도 다 녹슬어서 딱딱하게 뒤엉켜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배를 이제 배 사람들이 밀어서 아주 몇 년만에 항해를 하려고 바다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부지런히 선실로 올라갔습니다. 거기는 키가 있습니다. 딱 잡고 키를 돌리면 뒤에 있는 방향타가 같이 돌아가야지 되는데 키를 돌리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는데 저 뒤에 있는 방향타가 녹이 슬어서 이게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게 강퍅한 마음의 특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부드러운 마음의 특징은 평소에 그 방향타를 기름칠을 잘 해두어서 그래서 바다에 밀어 넣고 탁 치면 커다란 키를 한 손에 이렇게 돌려도 그 뒤에 있는 방향타가 그 키가 움직인 것만큼 정확하게 방향이 움직입니다. 그런 잘 휘는 마음, 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휘는 그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의 특징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가던 삶의 방향을 돌이키려고 할 때 제일먼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마음을 보이심으로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선회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런 영향을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십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은 생각, 똑같은 의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뭐 사람이 회개하고 마음이 겸비하고 부드러워지기만 하면 순간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아주 쉽게, 쉽게 그 마음을 능숙한 농부가 홍수가 났을 때 물길을 돌리듯이 그렇게 능숙하게 그 마음을 하나님이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릴 적마다 쉽게 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굳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삼십 년 전에 원수인 사람 지금도 계속해서 원수입니다. 작년에 하기 싫던 일을 올해도 죽어도 하기 싫어합니다. 작년에 저 인간 안 보고 살아 하고 원수 맺은 사람이 금년에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늘 변화가 있습니다. 형제님, 이 일로 한번 교회를 섬겨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못 합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그렇게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면서 예수 믿으시라고 제가 그것이 싫어서 보험회사도 그만두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나는 그런 체질이 아닙니다. 그렇게 합니다. 못 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갔는데 찔립니다. 목사님이 하도 안타까워서 전도 좀 하라고 그렇게 하셨는데 내가 불순종했나. 그리고 이제 새벽기도를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했는데 내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기도를 하는 가운데 확 마음이 바뀌면서 정말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그리고 나는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는 그 일에 실패했지만 지금 내가 들고 나가는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좋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자기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있는데 이 마음속에서 하고자 하는 소원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그 마음을 확 휘게 만드셨습니다. 이게 강퍅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제 그 사람이 오늘 그 사람입니다. 오늘 그 사람이 내일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잘 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한번 잘못 생각하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왜 그 길로 계속 가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는 은혜의 교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잘못했는데도 혼자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게 하다가 그 마음이 바뀝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을 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변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드러운 사람의 마음만 움직이십니까? 그런데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마음도 바꾸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렇게 쉽게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잘 휘면서 움직이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게 부드러운 마음의 특징입니다.
c.하나님의 정서에 쉽게 흔들리는 마음
그 다음에 마지막 세 번째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정서에 쉽게 영향을 받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잘 승복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의 육적인 고집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훨씬 강하게 그 마음속에 역사 하는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육신 적인 생각이 항상 은혜의 성령의 생각에 의해서 잘 항복을 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잘 항복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잘 승복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와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이 쉽게 항복을 합니다. 그러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어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승복합니다. 고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이나 생활의 철칙을 버립니다.
가끔 보면 우리 인생관이 워낙 뚜렷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게 안 깨트려진 사람들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는 가훈이 없다고, 애들이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고 하면 아무 것이나 엄마보고 써달라고 합니다. 교회의 표어도 없습니다. 무슨 독특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성경 진리 가운데 한 두개를 붙들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독점 물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일은 아집이 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면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약속시간 안 지키는 사람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딱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사람에게 한번 찍히면 신앙이 없습니다. 한번 회개해도 안 받아줍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회개하면 받아주시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하고 사과를 해도 그것으로 끝입니다. 영원히 그 마음에 찍혔습니다. 그래서 안 돼. 그럼 그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정도의 단호함을 가지고 산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오면서 자기가 만든 인생관입니다.
물론 우리는 보편적인 가치를 생각할 때에 약속 어기는 것을 식은 죽 먹듯이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보다는 약속을 잘 지키면서 사는 그런 사회가 훨씬 좋은 사회라고 하는 것은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너를 인간으로도 생각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인생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밟고 올라선 이데올로기입니다. 오히려 깊이 변화를 받고 은혜를 받고 나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오히려 아가페의 마음이 생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멘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됩니다.
그리고 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것은 다 이해할 수 있어도 돈 빌려가고 안 갚는 사람 나는 상종도 안 해. 그런데 자기는 어려워본 적이 없으니까 진짜 갚고 싶은데 없어서 못 갚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떼어먹으려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못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를 은행에서 참 좋아합니다. 신용카드를 쓴지 10년이 넘었는데 한번도 연체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은행에 가면 돈 안 빌려 가십니까? 합니다. 그리고 계속 올려줍니다. 얼마든지 물건사도 된다고 막 올려줍니다. 별로 쓰지는 않습니다. 그게 뭡니까? 신용이 계속 쌓여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의치 않은 사람들 깊이 이해를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많이 쓰고 그리고 수입이 적으면 연체할 수도 있지, 그것을 한 두 번 딱 집어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그런 사회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수가 있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의 돈 빌려가서 떼어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주 단호하게 칼을 빼들 듯이 자기 인생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깨트려지면 그 인생관은 허물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것에 의해서 지탱되어 살아온 그 사람의 삶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 응답하십니다. 어떤 사람 약속 안 지키는 사람도 용납하시고 은행 연체한 사람도 받아주시고 그렇게 모든 사람을 다 받아주십니다. 왜 예수님의 마음속에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판단이 없으십니까? 생각이 없어서 예수님이 그 모든 다양한 종류의 허물 많은 사람들을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그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생각들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장 잘 영향을 받는 것이 이 부드러운 마음의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언제나 승복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의 인생관도 깨트려버리고 그리고 자기의 사랑도 깨트려버리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항상 승복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나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놀라운 변화가 무엇인가 하면 말씀이 가슴에 잘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변화는 마음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영향을 미치고 그 말씀이 마음에 들려올 때에 늘 승복하는 성도의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시간관계상 이 세 가지 정도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결국 여기서 이야기한 부드러운 마음의 특징, 이 정도만 듣고 나도 그것을 빼버리면 신앙생활이 성립을 합니까, 안 합니까? 그런 정도로 부드러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신앙생활, 성화의 소명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마음이 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부드러운 마음, 소위 이야기하는 ‘tenter heart' 이 부드러운 마음이 우리의 모든 지체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보편적인 현상입니까, 특별한 현상입니까? 그렇게 이해가 안 가십니까? 그러니까 부드러운 마음이 우리들 가운데 누구나 다 거의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까? 그러니까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한번도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 본적이 없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 대부분은 특히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은 영혼의 변화를 받고 마음이 부드러워 본적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된 경험은 우리 가운데 보편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여러분 중에 소수입니다. 그러면 이런 과거의 경험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한때 부드러운 마음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마음은 정지되어있는 마음이 아니라 항상 가변적인 마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은 언제든지 시간이 흘러서 다시 굳은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러니까 자연인의 딱딱한 마음, 돌 같은 마음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나 하여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굳은 마음이 될 수 있고 지금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적절한 조치를 하나님이 취해주시면 그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그 사실에 대해서 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 부드러운 마음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이것은 다음, 내일이나 모레하고,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사람은 소수니까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을 해야지 됩니다. 그것은 나두고 오히려 보편적인 것은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다시 변화될 수 있을까? 살펴보고 싶습니까, 알고 싶습니까? 항상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으십니다. 이해가 됩니다.
2.어떻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상하고 통회함으로써
우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됨으로서 부드러움은 회복됩니다. 그러면 제일먼저 상한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 두 가지를 같이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상한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버림받고 깨진 나의 영혼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갑니다
그 지치고 상한 마음이라는 것과 통회하는 마음의 차이가 무엇일까? 이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러나 둘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두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1)상한 마음: 각성된 마음
그래서 들어보십시오. 상한 경험만 있을 뿐 깨트려지지 않은 마음은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깨트려지기 전에는 반드시 상한 마음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을 통해서 깨트려진 마음으로 가고 그 깨트려짐의 경험을 통해서 굳었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상한 마음이었을 때는 그 마음도 상당히 부드러워진 것을 느낍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이 되었는데 마음이 비관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도대체 나는 주님을 위해서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왜 이렇게 어두움 속에서 살까 하면서 한없이 슬픈 생각이 듭니다. 그게 상한 마음입니다. 그러다 그 생각이 지났습니다. 그런 마음의 느낌이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했는가 하면 ‘no’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상한 마음과 깨트려진 마음을 혼돈합니다. 그래서 상하기만 했을 뿐인데 자기는 깨트려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회개 비슷한 경험이 많이 있는데 마음이 강퍅함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리를 하자면 상한 마음은 상한 마음이고 깨어진 마음은 깨어진 마음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상한 마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아주 쉽게 정의를 하자면 상한 마음은 곧 각성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와르르 무너지는 깨트려짐이 없어도 각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껏 까지 쭉 살아온 신앙생활인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가, 내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탁 듭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다 옳다고 생각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정말 더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있는 일이지만 지금 각성과 관련되어서 기억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예화: 몇 해 전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청년 집회를 하셨는데 그곳에 있는 어느 자매가 그곳의 전도사님께 하는 말이 자기가 지금까지 모범적인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설교 를 듣고 나서 집에 와서 그 다음날이 되었는데도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데 자기가 마치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창녀처럼 수치스럽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는 이야기)
이것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각성된 것입니다. 그 자매가 실제로 그렇게 부도덕한 삶을 많이 살아서 보편적인 사회에서 낙인찍힌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예전에는 희미하다가 환하게 비치고 나니까 뭘 깨달았는가 하면 심령이 각성이 되면서 그렇게 마음이 어두웠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컴컴한 방에서 옷을 입고 밖에 나가다가 거울을 보니까 와이셔츠가 새카맣습니다. 그래도 입고 가야지 하면서 입고 가려고 하니까 김치 국물이 떨어져 있습니다. 침을 발라서 지워보다가 아무리 해도 안 지워지니까 할 수 없이 집에 들어가서 벗고 새것으로 갈아입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빛이 비치지 않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영적 각성입니다. 그러니까 상한 심령은 각성된 마음입니다.
a.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그러면 무엇이 그를 각성시키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이 그를 각성시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막 자기가 이렇게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막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딱 깨닫는데 ‘너 그렇게 살면 죽어’ 딱 써있습니다. 그때에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법의 유익은 바로 그것입니다. 법을 모를 때에는 사람들의 범죄가 담대합니다. 그런데 법을 알고 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담대해질 수가 없고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도 소극적이 됩니다. 두려움 속에서 행합니다. 그런 내용인지 모르겠는데 요즘 뉴스에 보니까 스펨 메일이라고 해서 e-mail에 이틀에 한번씩 들어가 보는데 어떤 때는 수십 통 편지가 와 있는데 물건 사라고 이상한 물건 파는 것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을 보내면 전부다 처벌하겠다고 합니다. 아주 강력하게 처벌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것을 보내던 사람이 이제 법이 딱 생기고 그 법이 생겼다는 것을 알면 이제부터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통제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이 죄인들의 마음속에 이제 각성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런 상한 마음이 없이 단숨에 깨뜨려진 마음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무엇이 죄이고 어떤 것들이 하나님께 불쾌감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만큼 상한 마음이 될 가능성이 적어지고, 상한 마음이 보기 드문 교인들 속에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통회의 역사를 보기 힘든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것입니다. 율법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끔 만듭니다.
b.하나님의 엄위를 인식함으로
또 하나는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엄위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각성됩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이 됩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너무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데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다 는 생각, 그것이 유쾌한 생각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벌레와 같이 너무 가치 없는 인간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그분을 많이 사랑하면서 살면 주님이 위대하시다 는 것 때문에 자신이 오히려 기쁜데,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할 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그 일기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렸을 때부터 조나단 에드워드가 굉장히 무서워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번개와 천둥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번개와 천둥소리는 생래적으로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많이 줍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연 숭배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훌륭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 천둥과 번개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 나무도 때려서 부수고 사람도 태워서 죽이는 것을 볼 때에는 진짜 신이 있는가 보다는 굉장히 두려운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불이나 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서 그렇게 무서워하고 천둥 번개만 치면 숨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서 그때를 회상하면 자신은 너무 좋은 때가 천둥과 번개가 치는 때라고 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낙뢰가 떨어지는 날이면 창문을 열고 평온을 바라보면서 그 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낙뢰와 그 천둥소리를 들을 때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인간을 덜덜 떨게 하시는 이 천지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그 위대한 하나님의 위엄, 그것을 보면서 그런 위엄을 가지신 그분이 자기가 너무 사랑하고 자기를 개인적으로 너무 사랑해주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천둥과 번개 소리가 예전에는 무서웠지만 그렇게 감미롭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마음인가 하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해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삶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아가는 죄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위엄이 그 죄인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는데 주님의 그 위대하심을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이렇게 초라한 자신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항상 그 속에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상한 마음이 됩니다.
c. 자기의 무능을 자각함으로써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성찰은 즉각적으로 자신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것은 곧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마음이 상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주님의 그 엄위로우심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무엇을 보는가 하면 절대적인 무능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도 상한 마음이 잘 안 되는 원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너무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에 상한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만만한 사역 자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의 사역에 대해서 자기가 꽉 쥐고 있다는 자신 만만의 충만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성령 충만하지 않습니다. 자신 충만합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도 자신 충만한 사람과 성령 충만한 사람은 차이가 납니다. 왜 자신 충만한 사람은 신념에 넘치는데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항상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제 인생의 목표가 목회가 인생이 되어버렸는데, 분리할 수 없는데 그래도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이만큼 끌어오면서 ‘역시 난 참 그래도 더 살아야지 되겠다 쓸만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겠습니까? 안 했다면 거짓말입니다.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저것도 사역이라고 하나, 왜 저러고 사나. 호떡가게도 하다가 안되면 뒤집어서 찐빵 가게로 바꾸는데 어떻게 저러고 사나.’ 그런 생각 안 해봤겠어요? 그런 생각합니다. 아무리 못난 신자도 그런 생각을 다 합니다.
여러분, 한번쯤은 스스로 여러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랍구나. 그리고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너 같은 죄인 실리신 주님의 은혜는 참 놀랍고 나는 참 정말 착해. 정말 신자 중에 신자야. 교회가 나만 같으면 목사님이 놀지’ 그렇게 한번쯤은 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대화를 보면 군대갔다가 온 대화와 똑같습니다. 군대에 갔다가 온 젊은이들이 앉아서 같이 군대 이야기를 합니다. 나야 방위를 갔다가 왔으니까 군대 출신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지만 모여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웃기는지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 자기 군대에서 고생을 죽도록 했다고 하면 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는 몽둥이로 맞아서 죽었다가 살아나고 겨울에 찬물 속에 들어가서 동상이 걸려서 발가락이 떨어질 뻔하고,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 합니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나는 진짜 군대에서 편하게 지냈다고 말을 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또 다 뒤집혀서 자기는 작대기 하나 달았지만 별하고 마찬가지였다고, 자기는 장교들에게 격려 받으면서 군대 생활을 했다고 자기는 별 운전병이었기 때문에 별이 안 타도 자기에게 다 경례를 붙였다고, 그러면서 이제 다 자랑을 합니다.
아주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여 앉아서 어떤 한사람이 우리 남편 인간도 아니야 하고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행복하다고 하면서 우리 남편은 그것은 진짜 인간도 아니기에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서러운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그래도 우리 신랑밖에 없어. 그러면 다 뒤집어집니다. 세상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신랑은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막 자랑을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여 앉아서 자기의 은혜 받은 이야기를 막 합니다. 그러면 모여 앉아서 다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기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한사람이 자기는 이래 이래하면 또 한 사람이 그래도 난 참 사느라고 열심히 살았어, 주님의 사랑도 많이 받고 그렇게 하면 그까짓 것 가지고 내가 기도원에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하면서 막 왕년에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사람이 정말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비참한 사람이야. 나는 정말 내 안에 선한 것이 없어 그러면 사람들이 또 숙연해지면서 넌 그래도 낫지. 나는 괴수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 무능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깨달을 때 그때 상합니다. 그런데 살면서 괜찮다 하는 것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을 만나면 또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나 자신도 나야 그래도 괜찮지. 그래도 평균은 넘지, 그래도 내가 좀더 살아야지 만 하나님이 괜찮으실 걸’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안 한 적이 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주 가끔이고 매일 나는 마음이 슬픈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설교를 끝내고 나서 저 뒤에 서서 악수를 하면서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왜 악수하면서 저렇게 울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가 별로 마음이 안 드시나. 그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 감동도 없이 무지 무각하게 자신만만하게 꺼덕 꺼덕이며 걸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 마음속에 ‘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더 많이 죽으면 저 사람이 살텐데’ 거의 80%는 그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시간에도 눈물이 안 나오다가 뒤에 서서 아주 맹숭맹숭하게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 다음주에 저리로 내려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나를 만나고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누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변화 안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랬습니다. 사실 나에게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주님께 죄송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정말 가슴아픕니다.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많을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게 주님께 도움이 되나.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 종량제 실시하시기 전에 처분하심이 어떠하옵니까? 내가 하나님께 가로막힘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는 마음에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일 때는 깨트려진 마음이 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럴 때 가서 엎드려 기도하면 통곡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진짜 쓸만해. 너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는 놀랍고 나 같은 의인을 살리신 은혜는 정말 일반적이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잘 나오는 기도는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세리의 기도입니다. 너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는 놀랍지만 나 같은 의인 살리신 주의 은혜는 정말 당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는 이런 것도 잘하고 이런 것도 잘하고 저 사람 같지 않고 막 나옵니다. 그것이 상하지 않은 심령을 가진 사람의 대표가 바로 누군가 하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그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정말 상한 심령이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눈물이 가득 해지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달았을 때 가슴에 가득 고이는 그 눈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눈물이 가득 고이는 마음이 수시로 된다고 해서 그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것은 단지 각성된 마음, 곧 성경에 표현으로 말하자면 상한 마음일 뿐입니다. 상한 마음까지만 간 경험이 많이 있어도,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함은 상당히 많은 경우에 통회함이 섞이지 않으면 상한 마음의 상태는 항상 일시적입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어떤 사람이 막 상한 마음으로 와서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오늘 상담을 하고 싶습니다. 내일 오십시오 그러니까 내일은 이 마음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사라지면 그것은 중요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상한 마음은 일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회함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상한 마음은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그래도 잠깐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또 생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드러운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 상한 마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2)통회하는 마음: 깨어진 마음
그 다음에 필요한 마음은 무엇인가 하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break heart' 깨트려진 마음입니다. 상한 마음이 되는 것을 통해서 깨트려진 마음까지 가게 되는데 이 깨트려진 마음을 통해서 신자 속에 있었던 마음에 굳은살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껏 까지 계속 설교하면서 여러 번 강조했던 것은 참된 신자의 표가 깨트려진 마음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의 굳음은 수시로 굳어지기 때문에 몇 년에 한번씩 모아서 회개하는 것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회개를 믿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영혼을 다루었던 목회자들의 공통된 말은 회개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회개를 믿지 말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이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마음이 살짝 굳어졌을 때에는 한 두 번의 통회함의 깨어짐을 통해서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데 오랫동안 마음이 돌 같이 굳어졌을 경우에는 한 두 번의 가슴을 치는 경우에는 그 원래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사실 이런 마음과 관련시켜서 직접적으로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패역을 고치는 길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미 굉장히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러니까 패역 그 자체는 굳은 마음이 일상화되어서 만들어놓은 도덕적인 굳음입니다. 종교적이고 굳은 이 성품과 삶에 있어서 굳음입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쳐질 수가 있겠습니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늘 깨어짐의 마음이 마음의 굳음을 막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나는 잔디만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으면 넓은 잔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누가 서울 같은 곳에 땅에 그런 생각은 사치라고 했습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 집에 갔을 때 마당에 잔디밭이 있는데 수십 평의 잔디가 깨끗하다면 그 사람의 성실성은 일단 인정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 잔디의 종류에 따라서 틀리기는 하겠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제가 방위생활을 하면서 잔디 풀을 많이 뽑았습니다.
(예화: 육사 연병장 잔디밭에 일주일만 잔디를 뽑지 않으면 운동장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지저분해지는데 잔디는 똑같은 키로 자라지만 그 위에 잡초가 빠른 속도로 자라서 일주일에 한 두 번을 연병장 양쪽에서 수백 명이 줄을 세워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손으로 뽑는데 기계로 뽑을 수도 있지만 풀의 질이 다르게 되고 계속 뿌리가 강력하게 자라게 됨으로 그 안에서 번식을 하기 때문에 뿌리 채 뽑아야 되는데 불성실한 사람이 뽑은 자리는 표가 난다는 이야기)
똑같은 원리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언젠가는 될 것입니다. 되는데 그 마음이 그 부드러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게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각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계속해서,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항상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그것으로도 모자랍니다. 모자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깨달음을 얻으면서 거기서 자기가 아직 행동으로까지 나와서 뻗어나가서 습관화되기까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움직임에 대해서 하나님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상한 마음이 되고 나아가서 깊이 깨트려져서 아파할 때, 그때에 깨트려지면서 각질이 제거 되면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굳은 마음 자체가 그렇게 깊지 않으니까 한번에 깊이 있는 회개를 통해서 다시 각질이 걷히고, 걷히고 해서 계속 닦아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싫으면 짐승 같은 삶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데요.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 삶을 안 살면 어떻게 될까요? 풍성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래도록 경험해왔던 주님을 믿었는데도 전혀 구원받은 것이 기쁘지 않고 그리고 주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삶과 신앙 사이에 괴리만 더해 가는 그런 모순된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빛으로 하나님이 부르셨으나 불이 꺼져서 불빛이 보이지 않고, 소금으로 부르셨으나 그 맛을 잃어버려서 밖에 내어버려서 사람들에게 밟히는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무슨 타협의 길이 없는가, 없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괴로움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저 놓은 곳을 향하여 싸우며 나아갑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성도들이 이 지상에서 면류관을 쓰고 제왕이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삶의 무게와 그런 긴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깨트려진다고 합니다. 그 깨트려짐을 통해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의 전 인격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깨트려짐이, 그런데 상한 마음은 그 정도의 영향을 못 줍니다. 그런데 깨트려진 마음은 우리의 전 인격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먼저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깨트려지고 나면 뭐가 바뀌게 되는가 하면 생각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나면 생각 자체가 바뀝니다.
두 번째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나면 정서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것들이 지금 사랑이 안 됩니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것이 좋지 않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이제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깊이 깨트려지고 나면 전에는 쉽게 행했던 것들이 지금은 힘들게 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던 것들에 대한 의지가 생겨납니다. 주님을 섬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섬길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의지 같은 것, 생각도 못해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의지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변화들이 생겨납니다.
a.자기 의에 대하여 깨어짐
그러면 도대체 깨트려진다는 것이 무엇에 대해서 깨트려진다는 것인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자기의 의에 대해서 깨트려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의에 대해서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이런 일들을 했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 이러한 정도의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러 이러한 정도의 훌륭한 면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는 자기 장점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문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그런 가난한 마음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믿으니까. 그 삶이 실제로 의로운가 안 의로운가는 별개 문제입니다. 별개 문제고 그렇게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생각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근거가 있고 없고 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적인 심령이 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인간이 일평생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쌓아 올린 그 의와 한순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그 의, 그 두 개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엄청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그 의가 대단합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같은 은혜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정말 그렇게 죄인으로서 일생을 살아왔는데 주님이 그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일평생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수도자적인 삶을 살면서 나같이 죄 짓지 않고, 나 같이 나쁜 짓 안 하고, 나 같이 부도덕한 삶을 살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왔으면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가 비교가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깨트려지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항상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고 정말 ‘그래도 나만한 사람이 없지’ 생각하는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깨트려지는 것이 곧 깨트려지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깨트려지는 심령이 되는 것의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의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 그 마음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깨트려지면서 내가 일평생 이렇게 저렇게도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죄의 덩어리며 그리고 자기 자신이 너무나 더러운 인간이고 일평생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는 설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깨트려진 사람은 너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깨트려진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모든 마음속에 동일한 판단이 있는데 그것은 ‘나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로다’ 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정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그림을 이제 상당히 뚜렷하게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자기의 마음을 꼼꼼하게 살피고 지키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힘나는 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고 그리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서 부단히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 가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주를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정말 저 사람이 진짜 예수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 같구나 그럴 정도로 그의 건강도 젊음도 재산도 모든 것도 주님을 위해서 쓰는 일에 거의 혈안이 되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헌신적인 삶을 살면서도 항상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어떤 선한 것도 없습니다. 제가 힘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고 그리고 내 재산과 내 건강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지만 그렇지만 하나님 제 마음에는 악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 마음은 순결하지 않고 그리고 제 마음은 더럽고 그리고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거기에는 순수하지 않은 동기,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섞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어떤 자부심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막 추켜세우고 칭찬하는 그 현장에 있는 것이 지옥입니다.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그대는 나를 보고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자네가 만약에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본다면 나를 존경하기는커녕 혐오하고 말걸.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데. 열심히 섬기면서 살면서도 주님을 향해서 어떤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도 없습니다. 어떻게, 수시로 하나님 앞에서 그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들이 깨트려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들이 깨트려지면 깨트려질수록 오직 붙들고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주의 십자가 붙들겠네
왜 그 하나님 앞에 다 깨트려져서 나는 아무 볼품없는 인간이야.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어떻게 세울 수가 없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내가 설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그래도 유일하게 피난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몸을 찢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롭고 산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체험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의에 대한 이런 깨트려짐이 바로 참회의 마음, 깨트려진 심령을 통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는 것에 요체이기 때문에 이런 자기 의에 대한 철저한 깨어짐이 있고 나면 붙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믿을 수 있는 은총이 무엇을 통해서 나타났습니까?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향해서 인간이 호소하고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려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구속의 십자가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의지할 의가 있습니까? 나머지 모든 의는 넝마주의와 같고 모두 쓸모 없는 의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다 깨트려져서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물론 우리는 의롭게 삽니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것을 의지해도 좋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바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구속의 십자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의로운 행실로 말미암지 않으시고 중생과 성령의 씻음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그것을 의지하면서 다 깨트려진 마음이 그 십자가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거기에서 다 깨트려집니다. 그리고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면서도 우리의 사랑을 받는 험한 십자가,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고난의 십자가, 이것 때문에 부족한 죄인이지만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깨트려진 마음은 첫째는 자기 의에 대해서 깨어지는 마음입니다.
b.죄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깨어짐
마지막 두 번째, 깨어짐의 마음에 본질적인 특성은, 죄에 대한 사랑의 관해서 깨트려집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도 넘쳤다”라고 하는 성경의 진술은 죄가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은혜를 걷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 그런 고백이 터쳐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까? 깨트려짐이 있는 곳,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한가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타락은 은총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신학에 있어서 최대의 화두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신학을 ‘은총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그런 철저한 타락에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모든 사람들이 다 은총에 대해서 깨달았습니까? 아닙니다. 타락했던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어거스틴처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성이 어거스틴만 못했기 때문에 은총에 대해서 못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에게는 타락에 버금가는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그 회개를 통해서, 죄에 대한 사랑에 관해서 깨트려짐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깨트려짐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 깨어짐을 통해서 자신의 타락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깨어짐이라고 하는 사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깨트려지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면서 참회를 하고 상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데도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있다 마다 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대신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인데 그 부드러운 마음에도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순간, 순간 아버지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서 솟구어내는 참된 참회가 있고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자기 깨어짐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생각이 있을지라도 어떤 특정한 죄가 뿌리를 내리고 깊이 자라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잡초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습니다만 뽑지 않고 내버려두면 몇 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몇십 년 지나면 거기에 잡초가 우거진 풀밭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나무도 자랄 것입니다. 왜 나무 씨는 안 날라 오겠습니까? 지금 전 세계 산에 있는 나무가 사람들이 올라가서 심은 나무는 아닙니다. 자기가 씨가 퍼져서 자란 나무들입니다. 대부분이, 그러니까 나무는 안 자라겠습니까?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계속해서 잡초를 뽑아내도 잡초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무엇인가 하면 장성하기 전에 모두 제거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도 죽을 때까지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습니다.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습니다. 그 대신 무엇인가 하면 그 죄가 계속 자라서 착상하고 뿌리를 내려서 장성해서 그것이 잉태된 가운데 밖으로 산출되어서 행동으로, 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고 지배된 마음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아주 뿌리깊은 패역을 만들어서 인격을 굽게 만드는 그런 일들은 날마다 깨트려지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깨어짐이 없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는 그것들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 참회하는 마음입니다. 이것도 가만히 보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자극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이 깊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나면 죄에 대한 사랑이 아주 현격하게 감퇴합니다. 한번 더 깨트려지면 더 감퇴하고 더 감퇴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전에는 사랑하던 그 죄를 혐오하는 단계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을 통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깊이 상한 마음이 되어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의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의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깊이 깨트려지고 나면 그 다음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완악함이 제거되면서 우리의 굳은 마음은 아주 부드러운 마음을 오래간만에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굳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는데 그것으로 여러분의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부드러운 마음, 그 속 어디에서도 잘 만져보면 거의 제거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굳은 마음으로 자랄 수 있는 씨앗이 남아 있습니다. 가능성들이 남아 있습니다. 환경이 조성되고 여건이 떨어지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마음을 지키지 않아서 악한 생각들이 거기에 떨어지면 받아들여서 바로 착상이 되고 그리고 서서히 성장할 것입니다.
마치는 말
그러니까 두 가지 노력을 함께 해 나아가야지 됩니다. 한편으로는 굳어진 우리의 마음에 각질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상한 신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통회하고 깨어진 심령으로 자기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부서트려서 부드러움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모처럼 회복하는 심령의 부드러움을 일정한 방법을 통해서 그 부드러움을 계속 보호하면서 살아가는 노력, 두 가지가 함께 겸비될 때에 그때에 그 마음이 바로 오늘 주님이 지키라고 분부하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살 때에 여러분들의 삶에는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이고 가시덤불과 엉겅퀴 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여러분들의 삶에는 더 큰 하나님의 축복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4. 버려야 할 마음: 강퍅한 마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上)
지난 시간에는 신자의 의무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면 신자가 의무를 다하여 지켜야 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논증하면서 그것이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면 신자가 버려야 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은 이미 논증한 바와 같이 육적 마음과 신령한 마음, 즉 신령한 은혜가운데서 부드러운 마음과 강퍅함, 이 두 가지가 한 마음속에 섞여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부드러움을 잘 지키고 또 한편으로는 강퍅한 마음을 자꾸 버림으로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갈 수 있고 또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신자가 버려야 할 마음, 즉 강퍅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화에 있어서 신자의 마음에 강퍅함에 대해서 논증해보고자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많은 내용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그러나 치명적으로 중요한 내용, 세 가지를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신자의 마음에 강퍅함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다루고 두 번째는 왜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을 강퍅해지도록 내버려두시는가를 다루고 마지막 세 번째 결론적으로는 강퍅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 신자의 마음의 강퍅함에 대해서 두 가지로 다루어보고자 하는데 첫째는 그 의미와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강퍅하다”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 6번 가량 나옵니다. 그리고 그 동사는 ‘스클레리노’ 그리고 형용사는 ‘스클레로스’ 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강퍅함’이라고 번역되었고 이 두 단어는 모두 ‘스켈로’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은 ‘마르다’라는 뜻입니다. ‘투 드라이 마르다입니다 이것은 영어에 해골, 혹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를 가르치는 ‘스켈레튼’ 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 희랍어 ‘스켈로’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짝 마르면서 딱딱해진 상태를 신약성경에서 ‘강퍅함, 혹은 강퍅하게되다’ 라는 말로 번역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강퍅함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러면 지금 희랍어 의미로 보면 그 강퍅함을 히브리어에서는 돌맹이를 갖고 이야기하는데 ‘레브핫 에벤’ 이라는 말이라고 했는데 돌의 마음, 혹은 살의 마음 이렇게 비유했는데 희랍어에서는 이것을 딱딱한 것을 돌맹이나 쇠 같은데 비유하지 않고 어떻게 비유했는가 하면 뭐가 이렇게 말라서 딱딱해진 것, 예를 들자면 그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북어를 한번 먹으려면 하여튼 부엌에서 난리를 쳐야지 만 한번 먹습니다. 왜냐하면 사정없이 딱딱하게 말려서 북어 요리를 집에서 하려면 우선 축축하게 젖은 베 보자기에 그것을 싸서 한 두 시간 나두었다가 그것을 방망이로 두들기면서 그것을 펴서- 북어포를 따로 팔지 않았으니까, 모르겠습니다. 파는 게 있었는지 모르지만 비싸서 못 사먹었을지 -그 다음에 뼈를 발라서 껍질을 까서 그래서 하나 하나 찢어서 그것으로 북어국도 끓여먹고 아니면 무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북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북어로 한번 맞아 본적이 있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진짜 맞아 본적이 있는데 마른 막대기같이 아픕니다. 이빨로 씹어도 거의 안 들어갈 정도로 딱딱한 상태로 말랐습니다. 그런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회화적인 묘사가 될 것입니다. 강퍅함을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로마서에도 나오고 히브리서 유다서에 보면 그 강퍅함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 강퍅함이라는 표현은 거기서 공통적으로는 대체적으로 강퍅함을 택한 백성들의 강퍅함과 관련지어서 이 강퍅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언젠가는 살처럼 부드러웠던 마음이 세월이 지나서 그것이 딱딱하게 말라서 그래서 때리면 아픈 그 북어처럼 된 상태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주 적절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그 마음이 ‘레브 핫바살’ 그래서 살의 마음이라고 그래서 이것은 육포의 마음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딱딱하게 굳어져서 그래서 딱딱 두들기면 딱딱 소리가 나는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이 강퍅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강퍅한 마음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부드러운 마음의 정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 부드러운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특징을 세 가지로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센서블하다는 것입니다. 잘 감지한다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서 잘 휜다는 것, 또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적으로 자기를 굴복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 이렇게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그것을 따라서 생각하면 정 반대입니다. 우선 이 강퍅한 마음은 감지력이 없습니다. 지각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강퍅해지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마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무슨 국어 책 배우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뭐 마태복음 1장에는 무슨 내용이 나와 있고, 이 이야기는 이러 이러한 뜻이다. 원어는 이렇게 뭐는 이렇다. 그리고 이것은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썼고 저렇게 생각한 사람이 썼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지 되는구나. 그것은 공부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노출되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의 전달은 하나의 한 수단이고 그 지식의 전달의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인격 그 자체가 말씀의 깨달음의 통로를 통해서 한 사람 속에 흘러 들어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살고 싶어하셨던 그 마음이 신자 속에 전달되는 것,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는 지식 없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지식을 도구로 해서 인간에게 전달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은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이 백성이 어떤 존재가 되고 또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의지적으로 이 백성을 만들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적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잠꼬대처럼 나온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속에는 우리를 향한 의지가 계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우리를 향해서 어떤 정서가 없이 말씀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감정이 없이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편견 없이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이 항상 이렇게 냉담하게 그냥 지나가는 말로 똑바로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막 분노하시면서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따위로 사는가. 이렇게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못 사는 인간들이나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든지 아니면 한바탕 웃으시면서 나는 너희가 이 세상에 나를 위해 살아있는 것이 너무 기쁘다 이런 감정을 가지시든지 아니면 오늘 내가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하시며 진지해지시든지 그러시지 어느 곳에서도 농담하시는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인간은 정서 없이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뜻 없이,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계시를 전달해주실 때에 당신의 마음 없이 어떤 느낌이나 정서,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그 말씀에 대해서 어떤 그 정서가 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나님의 정서가 먼저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속에서 인간을 보면서 무엇인가 느낌이 생겨나셨을 때 그때 그것이 언어화되고 그것이 계시가 되어서 인간에게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 라는 것은 이 세 가지 영향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잘 깨달으면서 지식적으로도 잘 정리가 되면서 아울러 하나님이 이렇게 하고 말겠다 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의지 앞에서 자기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지식 앞에서 자기의 서푼도 안 되는 그 지식을 포기하고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확 부어질 때 우리들이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해주실 때에 우리에게 살고 싶어하시는 그 삶을 살 그 마음을 가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드러울 때에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주 놀랍게 지각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면 이렇게 탁탁 깨달아지면서 뜨끔뜨끔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막 기쁨도 다가옵니다. 난 여러분들 중에 성경을 읽으면서 우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나는 궁금합니다. 눈물은 그만두고 그냥 눈뜨고 읽기만 해도 할아버지입니다. 뺀질 대고 안 읽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센서블한 마음입니다. 지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강퍅해진 아주 훌륭한 증거는 신령한 정서가 없습니다. 지각력이 없고 이해력도 없고 신령한 것과 이렇게 터치가 되어도 금방 그것이 전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매일 분노하시는데도 자기는 히히덕 거리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보면서 너무 사랑하시는데도 하나님을 괜히 미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서에 물에 기름이 돌 듯이 이게 말하자면 스며들지 않습니다. 이게 강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드라이합니다. 진짜 아주 정확합니다. 스켈로튼입니다. 해골처럼 바짝 말라서 그래서 아무런 어떤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해도 뒤에서 끄덕이면서 졸고 있고 그리고 기도하러 나와도 그저 중얼중얼 몇 마디 하다가 그냥 들어가 버리고 그러니까 마음을 드리지 않는 의무는 쉽게 행할 수 있는데 마음을 요구하는 의무에 대해서는 요새 말로 젬뱅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자체가 고장이 났기 때문에 마음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 자체에 어떤 강력한 쇄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제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 위해서 나옵니까? 나와서 쭉 버티고 앉아서 그런 사람이 교회의 주권이나 잡는 날에는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그런 강퍅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는 심령이 깨트려짐, 하나님과의 만남, 죄를 이기는 삶, 거룩한 은혜의 생활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마음이 담겨 있어야지 만 고민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뻔합니다. 교회에 돈 돌아가는 것, 아니면 무슨 교회가 어떻게 되는 것 이렇게 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물론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것도 관심을 가져야지 만 그것 밖에만 관심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지 교회를 돕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조직이고 무엇을 위한 교회고, 무엇을 위한 행정입니까? 그렇잖아요. 그런 모든 섬김과 이런 것들은 교인을 위해 있고 교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있고 세상을 위해 있고 세상은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각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번 실제로 이 시대의 조국 교회의 상황들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마음과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각력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인이 교회를 가득 메워도 그 중에서 7-80% 이상이 일년이 지나도 회개의 눈물이 무엇인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밤을 수 십 년이 지나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런 무감각한 교인들이 천지인데 우리들이 과연 그 사람들의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을 썼는데 막 읽어보고 어떤 사람이 육적 그리스도인은 참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래서 그랬습니다. 육적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할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지, 그게 최하급의 교인이 육적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착각입니다. 그 정도도 안 됩니다. 구원 자체에도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육적 그리스도인은 무슨 육적 그리스도인입니까! 거듭나야지 그것도 육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말이지. 얼마나 무감각한가 보십시오. 이것이 결국은 그 교인들의 현재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심령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강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백 번 양보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강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기에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런 저런 일로 바쁘게 움직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로 교회도 섬기고 밖에 나가서 활동도 한다고 하면서 여기 저기에 명함을 갖고 다니면서 무슨 교회 일을 한다고, 교계 일을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자기 좋아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위해 바쳐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을 품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이 바쳐지지 않는데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살면 그 정략 결혼이지 사랑입니까? 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지 그게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까?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은데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 지혜자도 자기 아들에게 뭘 이야기합니까?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퍅해지면 그런 센스가 사라집니다. 그런 감각이 모두 무감각하게 사라집니다. 더 하고 싶지만 이 정도에서 그치겠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강퍅한 마음의 두 번째 특징은 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려고 해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 목사님이 자기 자서전 같은 곳에 썼습니다. 제가 그것을 읽고 집회에 가서 밤새도록 뱃살을 잡고 구르면서 웃었는데 저는 그 이야기가 농담반 진담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화: 전도사님이 시골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젊은 전도사로 가서 열심히 일하는데 그 교회에 있는 장로님이 사사건건 자기를 괴롭게 하기에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장로님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며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은 하나님도 못 바꿨다고 하시며 네가 바뀌라고 하신 이야기)
농담반 진담반이겠지만 강퍅한 사람의 특징은 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 마음을 돌리시려고 해도 완고하게 저항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교리 적으로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못 하시는 일이 있네. 그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못 하시는 일 하고 안 하시는 일을 구별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일은 하나님이 못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하시는데 하나님이 원칙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원칙은 움직이려는 사람의 마음만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이게 성화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휘려고 하는 마음자체를 안 가지고 있습니다. 강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휘게 아무리 감동을 주셔도 휘지를 않습니다.
(예화: 아시는 선교사 한 분이 어느 교회에 초청을 받아서 저녁 헌신 예배 때 불을 토하듯이 열심히 설교를 하시니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은혜를 받았는데 장로님 한 분이 광고하시는 시간에 선교도 좋지만 돈을 빨리 모아서 묘지를 사야지 된다고 광고를 했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무엇인가를 가슴에 심어주려고 애를 쓰시는데 문제는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강퍅한 마음의 특징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강퍅한 마음의 특징은 항복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멸될지언정 항복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의 아주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퍅한 사람들에게는 참회의 생활이 없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최고고,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아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이것들이 깨트려지고 무너지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무너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억수로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 항복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진전에 대해서 아주 상당히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의적인 것이 아니라 ‘성화’라고 하는 단어 자체를 들어보지 못한 교인이 상당히 많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라면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저마다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 그렇다고 해서 목사님께 대적하는 것이 사명일 수는 없습니다. 아니면 열심히 전도하는 것,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에 바치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소명은 성화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는 것, 참된 신자로 사는 것, 이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 이 교리를 준비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저의 간절한 소원은, 만약에 제가 하나님 앞에 정말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버려야 된다고 하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분들의 영혼이 매우 소중하고 귀하고 이 교회도 귀하고 사명도 귀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로서 주님이 부르신 그 소명을 따라서 살고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여기에서 목회 사역을 거드는 일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상한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복음도 전했고 수많은 회의를 주도하고 그리고 엄청난 선교의 프로젝트를 가졌지만 그가 가장 고상하다고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선교나 사명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는 그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러 가기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가장 고상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왜 그 지식을 그렇게 고상하게 생각했습니까? 그 지식이 아니면 그 사명감도 그 지식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의 그 사명감, 예루살렘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고 죽어야 되겠다는 그 결의 그 자체도 성화에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그 커다란 소명의 길속에 있는 한 갈래의 길일뿐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고민하지 않는 그 신자는 그는 정말 신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고민하지 않는 사람의 그 미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대할 것이 별로 없는 삶입니다. 자기 좋은 멋에 열심히 이런 저런 일하다가 죽는 그런 인생입니다. 이처럼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 항복할 줄 모르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참회 없이는 성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연세 드신 분들에게는 더 간절히 말씀을 드리는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의 만져주심이 없이 세월이 많이 흐르면 너나 할 것 없이 인간 안에 있는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굳어지기가 십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세가 드실수록 더 깊은 은혜에 잠겨야지 됩니다. 정말 잠겨야지 됩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마음이 없이 강퍅해져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생이 될 수가 없고 그는 신자로서 이중적인 삶의 고민 속에서 끊임없이 시달려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가 만약에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위선적인 신자가 될 것이며 그나마 그 성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그 교회 생활도 없다면 그는 신앙을 떠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중간의 선택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질까? 하나님이 거듭날 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하고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을 통해서 마음이 쇄신되어서 아주 부드러워졌는데 그 부드러운 마음이 왜 강퍅해질까?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내적 부패성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은혜 아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 신자가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굳은 마음이 성장하고 그 다음에 부드러운 마음이 퇴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어떤 죄와 여러 가지 영향으로 인해서 부드러운 마음은 퇴보하고 그리고 부패한 마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생한 사람, 즉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마음에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서 둘째 날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주님을 전혀 믿지 않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주님을 전혀 믿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그야말로 ‘hard heart’ 딱딱한 마음이라면 주님을 믿은 사람의 마음은 그 마음속에 딱딱함이 깃들여있다라고 표현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육적인 마음과 한편으로는 신령한 마음이 한 마음 안에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죄 아래 살면 딱딱한 마음이 급속히 성장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퇴보하고, 은혜 아래 살면 부드러운 마음이 급속히 성장하고 딱딱한 마음이 퇴보합니다. 이런 계속 상관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적인 부패성 때문에, 내적인 부패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육적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계속 어떻게 하든지 성장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습니다. 거의 죽은 것처럼 될 수는 있는데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이 기회만 있으면 그 부패한 마음, 육적 마음이 자라서 그래서 마음 전체를 딱딱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성향이 계속 바운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 치고 올라오려고 계속 이러고 있습니다. 그런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웠던 마음인데 딱딱한 마음, 강퍅한 마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은혜 아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면 죄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크게 두 가지로 표현이 되는데 은혜 그러면 객관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호의, 은총, 자비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감동시키시는 신령한 정서를 가르쳐서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찬송을 다 부른 다음에 “아 정말 은혜롭다” 그런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찬송을 부르면서 신령한 하나님의 그 어떤 은혜로운 정서를 인격 속에 느낀 것입니다. 그게 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종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굳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꾸 변해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앞에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데 하나님 앞에 다시 나와서 은혜 받고 그러면서 그 마음이 변해갑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 그런 때가 있습니다.
수요예배 늘 갔으니까 별일 없어서 가긴 가는데 정말 집에 들어가서 목욕이나 하고 잠옷입고 벌렁 누어서 TV 나 보면 좋겠다.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꾸역꾸역 나와서 앉았는데 그냥 마음이 갑갑하고 딱딱합니다. 그래서 매일 앞자리에 앉았다가 저 뒤에 구석에 앉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뒤에 앉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가 없어서 그렇지. 여기 자리 남았는데도 저 뒤에 가서 앉습니다. 안내위원이 “조금만 들어가시죠” 이렇게 합니다. 강퍅한 것입니다. 그렇게 있습니다. 뭐 세상에 감사한 것도 없고, 기쁜 것도 없고 그저 인생사는 게 왜 그리 고달플까?
그리고 하루동안 일어난 섭섭한 일들, 직장에서 무시당한 일들 그런 것들이 다 떠오르면서 인생사는 게 정말 개떡같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날 예배를 드리는데 찬양을 부르는데 이상하게 그 찬송을 부르면서 옛날 일들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찬송 하나,하나에 신앙의 과거가 있습니다. ‘내가 이 곡을 처음 불렀을 때 눈물로 이 찬송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했었는데’ 그러면서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니까 얼마나 잘 떨어지겠습니까? 이것은 뭐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 딱 나 하나 홀딱 벗겨놓고 나에게만 계속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설교가 끝나자 엎드려서 통곡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10시가 넘으니까 다 돌아가는데 11시 반이 넘도록 엎드려서 뒹굴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립니다. 12시가 다 되니까 관리 간사들이 와서 “가실 겁니까 철야하실 겁니까” “가야지요” 그리고 보따리 싸고 내려갔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난 알았네 내게 주밖에 없네
눈물인지 빗물인지 막 쓸려 들어갑니다. 집에 가서 마지막에 취침하려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옛날 같았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벌렁 드러눕는데 그때는 ‘oh my god goodnight 하나님' 그런데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막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돌보지 못한 영혼들도 생각이 나고 그리고 안내위원이 조금 더 들어가라고 했는데 이랬던 것도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따뜻한 터치가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것이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은혜 아래 있으니까 아주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아래 있을 때는 조금 잘못해서 주님을 약간 슬프게 해도 금방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죄 죽음의 교리를 하면서 그런 설명을 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시골에서 아궁이에다 불을 잔뜩 때서 아궁이가 뜨끈뜨끈 할 때는 불 때는 게 쉽습니다. 그런데 엄동설한 안에 아침에 일어나니까 아궁이가 차갑게 식었습니다. 거기다 불을 때려면 어렵습니다. 나무도 차갑고 그래서 불이 잘 안 붙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촛불에 처음 불을 붙일 때에는 성냥에 불을 붙여서 심지에 비벼야지 만 붙습니다. 그런데 불을 껐다가 금방 아참 그리고 탁 갖다 대면 근처만 가도 펑 불이 붙습니다.
그게 은혜아래 살 때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아래 살지 못하니까 강퍅한 마음이 계속 성장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계속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런 시대에 정말 우리들이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힘써야지 됩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원리 적으로 근본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범죄 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함으로써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도 작은 범죄는 우리를 강퍅하게 하게 가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큰 범죄는 우리를 아주 순식간에 강퍅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작은 범죄도 우리를 강퍅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금방 회개하면 벗겨집니다.
그런데 큰 범죄는 우리를 순식간에 아주 딱딱하게 강퍅하게 만듭니다. 그런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이 죄에 대해서 범죄에 대해서 무딘 마음을 갖게 해서 범죄 하게 합니다. 범죄를 하고 나면 그것이 영혼의 죄이기 때문에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까 잠자는 심령이 강퍅한 마음을 내버려두고 강퍅한 마음이 죄를 짓게 하는데 죄를 짓고 나면 영혼의 더러움이 오고 영혼의 더러움이 오면 마음을 무디게 만듭니다. 이게 계속해서 순환 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통해서 마음이 딱딱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이 점차 죄를 지면서 딱딱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감각이 점점 퇴보됩니다.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인간의 양심도 상당히 믿을 만 합니다. 절대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의 양심과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양심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는 사람이라면 하나는 짐승입니다. 그런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 아래 있을 때는 점점 무감각해지기 때문에 그러니까 죄를 쉽게, 쉽게 짓는 것입니다. 고민 같은 것 별로 안 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지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여러분에게 칼 한 자루 쥐어주고 닭 한 마리 잡으라면 여러분들 중에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못 잡습니다. 차라리 돈주고 잡지 그것을 못 잡습니다. 옛날에는 다 잡아서 먹었습니다.
(예화: 수련회 가서 애들에게 주려고 닭을 잡아달라고 하니까 예쁘게 생긴 주인 아주머니가 서슴없이 닭을 잡았다는 이야기)
폭력배들이 살인을 하는 것이 맨 정신으로 못합니다. 그러니까 훈련시키는 코스가 돼지나 개 같은 것을 산에 풀어놓고 그것을 사시미 칼로 죽이는 연습을 수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담대함을 얻고 피 흘려 쓰러지는 동물을 보면서 갖는 것입니다. 투견 개도 그렇습니다. 훈련시킬 때 무수히 개를 물어 죽이게 합니다. 그래서 개 자신도 상대방 개를 탁 물어서 쓰러질 때는 개도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계속 개를 물어 죽이게 합니다. 그래서 적개심을 일깨워서 투견대회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범죄는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강퍅한 마음은 죄를 쉽게 지게 만듭니다. 이게 계속 악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런 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두 번째로 무엇인가 하면 결국 실제적인 면으로 돌아가 보면 그 시발은 마음을 지키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보면 마음에 문제를 잘 정리하지 않으면 가치관에 있어서 혼동에 빠집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그렇게 가르쳐 혼돈에 빠졌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음에 도둑질하는 것과 실제로 도둑질하는 것이 거의 같다라고 하는 논리를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습니까? 안 같습니까? 저는 그런 윤리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긍정적으로 보면 마음까지 깨끗하게 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면에선 좋은데 윤리 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그 마음으로 간음하였노라” 얼핏보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간음과 그 다음에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똑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똑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 당시에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이미 마음의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법처럼 내가 마음속으로 저 사람을 죽어라 미워합니다. 그래서 매일 빕니다. “천지신명이여 저 인간을 급살 하게 해주십시오” 이게 현행법에 걸립니까, 안 걸립니까? 이게 양심의 자유입니다. 내가 속으로 ‘누구누구는 나쁜 자식’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걸리지 안 습니다. 그런데 나쁜 자식이라고 신문에다 내면 명예훼손죄로 걸립니다.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것을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법은 항상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상당히 치중합니다. 물론 전혀 우발적으로 죽인 것과 계획적으로 죽인 것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관심을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보면 법을 엄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고친 적이 없습니다. 18세기에 영국에 신앙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얼마나 사회가 부도덕하고 문란했는지, 그러니까 죄를 범하면 사람이 보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목을 매달아 죽이는 죄목이 160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남의 집 담에 낙서하는 것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는데도 그런 엄격한 형벌을 만들어 냈는데도 결국 그 사회의 타락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법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시발점 자체가 마음을 지키는 데로부터 흘러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그런 모든 문제를 가져오는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아! 생각이 났는데 이제 밖으로 실제 적으로 행한 범죄와 마음의 범죄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마음으로 지은 죄와 실제로 그 죄가 똑같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 죄의 뿌리를 밝히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뿌리는 전혀 문제로 삼지 않고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결과인 나무만을 보고 자꾸 문제를 삼는 다고 할 것 같으면 결국은 환경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안 나올 수 있겠지만 그러나 계속된 뿌리는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들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모든 선과 악을 뿌리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내고 선한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내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깔려 있는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그리고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단초가 되어서 신자의 부드럽던 마음이 딱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무리 그 사람이 생애를 뒤흔들고 신앙에 지축을 뒤흔드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이 마음을 지키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지금 한없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강퍅하고 북어와 같이 딱딱한 마음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시간만 적당히 흘러가고 여건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그렇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을 신뢰한다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누구를 신뢰한다는 것은 참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월이 많이 흘러가야 겨우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쉽게 사람들을 신뢰하면 굉장히 안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서로 의심하면서 살자는 그런 뜻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도자로 세우고 그렇게 할 때 또 교역의 길을 걸어가게 하고 그럴 때는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두고 검증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정확하진 않지만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들을 들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연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점검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 예수 믿은 지 1년밖에 안 된 사람들이 집사가 되고 3-4년밖에 안 된 사람들이 안수 집사가 되고 5년도 안 된 사람들이 장로가 되는 이런 것은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디모데서에 보면 처음 믿는 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진지하게 그 마음을 시험해서 그 마음이 진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마음인가 하는 것을 점검하는 과정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자기를 그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자기 자신도 항상 자신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열심, 충성심 그리고 나의 헌신적인 섬김 그리고 나의 철저한 물질적인 헌신 이런 것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뭐가 섞인 것이 없는지 가려내면서 자신의 마음을 아주 잘 점검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마음에 연단에 대한 기도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정확하게 신앙에 있어서 정곡을 찌르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자기를 이길 수 없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시는 훌륭한 길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강력하게 연단 하셔서 정말 풀무에 7번이나 연단 한 은과 같이 정 금과 같이 자기를 그렇게 연단 하시는 것만이 자기로 하여금 주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스피리어치 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별로 놀라지 않는 눈빛인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그런 신자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뭐 이런 과정을 다시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니까 악한 생각들이 마음에 착상하고 그것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점점 암세포처럼 우리의 마음을 굳게 만들고 그래서 강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하면서 뼈를 도려내듯이 아플 때가 그때입니다. 신자가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 것을 볼 때,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는 자신들의 교인이 자기 자녀이니까 그 자녀가 강퍅해져 가는 것을 볼 때입니다. 그런데 한번도 강퍅해지는 사람이 ‘그래 나 강퍅해졌다 어쩔래.’ 그런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강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댑니다. 그러면 굉장히 슬픕니다. 너무 너무 아픕니다. 정말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너무 아픕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 그러면 하나님은 대체 신자가 강퍅해질 때 무엇을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강퍅해지도록 왜 내버려두실 까? 이게 우리의 총 관심사입니다. 왜 하나님은 내버려두실 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선 먼저 서론적으로 성화의 일반적인 원리를 우리들이 이해를 해야지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성화 자체가 인간의 부패한 성품으로부터 그를 순결하게 만들어 가시는 성령의 은총 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성화에 있어서 그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성화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반드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신자 자신이 순종으로 반응하는 마음을 사용하셔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신자의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했다가 부드럽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이니셔티브를 하나님이 쥐고 계시고 부드럽게 만들어 놓는 이 마음이 강퍅하게 변해갈 때는 이니셔티브를 인간이 쥐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인간의 마음이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성화 되어 가는데 있어서 이니셔티브를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많이 성화 된 사람일수록 많이 성화 된 사람이 자기가 성화 되었다고 자랑한 것을 보셨습니까? 아! 나는 진짜 너 같을 때가 있었어. 인간 같지 않은 때, 짐승 같고 교회에 늘 걸리적거릴 때가 있었어. 나도 그랬어. 대부분의 애들이 지금도 네 수준에 있지. 그런데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나 한 성화 한다고. 이 교회에 와서 한 성화 했지. ‘성화’ 하면 나 아니야. 이름도 김 성화이잖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낱말의 의미만 알아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화 되면 될수록 생각이 달라집니다. 성화가 초기 단계에서는 내가 결단했다. 내가 순종했다. 그리고 내가 담배를 끊었지, 내가 술병을 집어 던졌어 그러면서 굉장히 내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것이 지금 느껴지는데 성화가 많이 되고 나면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포기할 수 없는 열정으로 나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하나님의 그 주권의 개입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를 정말 사랑하시고 내가 그렇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밖에는 굉장히 잘못한 사람도 있고 떵떵거리고 잘 살게 내버려두시는데 나는 잘 살다가 조금 잘못했는데 하여튼 송두리째 뒤집어서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고난을 받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서 항복을 받고 그리고 다시 성화의 길에 들어서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이 성화 될수록 너희 안에 깊으신 뜻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게 성화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너희 안에 깊으신 뜻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뭔가 하시고 싶으시면 우리에게 그 뜻을 기뻐하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 안에 오셔서 그것을 하게끔 막 자극하면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나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이 도저히 그런 성화의 삶을 살수 없는데 주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흐르는 물에 나무토막을 붙들고 떠내려가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이 성화 되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이 내가 만약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뭘 자랑하겠다고 했습니까?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해지는 방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것 역시 또 강퍅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것 역시 모두 성화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의 반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순종을 이야기할 때는 ‘순종’ 그러면 무엇에 비결입니까? 두 글자, 순종하고 뭐 받자고? 축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순종은 단순히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엑스트라 보너스를 받는 그런 믿음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이 망쪼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상당히 교묘한 것입니다. 순종이 축복의 비결이라고 하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냥 살아가면 본봉은 받는데 그런데 순종을 하면 보너스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들 속에 있는 안목 적인 이해입니다. 아, 좀 그렇다는 반응을 보여주십시오. 뭐가 맞아야지 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살면 본봉은 받습니다. 그런데 순종하면 보너스가 뭉탱이로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순종을 사행심과 관련시켜서 순종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순종의 요구자체도 잘못된 것이고 순종의 도리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순종은 복음에 총체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로마서에 보면 뭐라고 했는가 하면 “믿어 순종케 하는” 다시 말하면 복음은 사도를 비롯한 일행이 열심히 전파하고 그리고 이 복음을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실제로 그 복음 사역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자기를 버리면서 살던 사도들의 생애는 결국 무엇을 꿈꾸고 있었습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자, 우리의 최고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통일! 아니 왜 그렇습니까? 여기가 무슨 반공 강좌입니까? 모르면 좀 가만히 계십시오. 통일은 무슨 통일, 통일도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세상 가득하게
인정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온 세상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 차고 그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러면 자 봅시다. 그저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드니까 마지막 때까지 그런 날이 잘 오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깊이 깨트려지고 진짜 근래에 보기 드문 진짜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모인 이 교회가 거의 마치 하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신자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삶의 모든 방면과 모든 영역에 있어서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주님을 온전히 높이며 살아가는 절대적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복음 전파 자체도 화두가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화와 관련시켜서 이야기하자면 순종하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이길 수가 없고 그리고 죽어도 자기의 패역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제 이 문제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이 계속 떨어지는데 그것을 쓰러버리지 않으면 다시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이게 마음에 착상되면서 그 다음이 생각이 마음에 점령하게 됩니다. 불순종할 마음이 점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점점 굳어지면서 불순종을 향해서 훌륭하게 준비된 마음이 되고 어느 날 죄를 산출하게 됩니다. 한번의 죄는 마음을 무디게 만들면서 두 번 세 번의 범죄를 얼마든지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해가면서 죄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죄에 대한 애착과 집착 사랑 같은 것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뼈 속까지 깊이 배어서 굳어져서 인격적인 특징이 되는 것을 ‘패역’이라고 가리킵니다. 그것은 한 두 번에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해결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도둑 이야기도 예를 들었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그 패역을 사람들이 고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와서 은혜도 받고 그리고 어떤 때 눈물도 흘리고 가고 또 말씀을 듣고 깨닫기도 하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저쪽에서 계속 더러운 물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더 이상 불순종을 하지 말아야지 만 이쪽이 맑은 물이 되면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계속해서 더러운 물이 들어오는데 여기서 계속 퍼내 봐야 어떻게 물이 맑아지겠습니까?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패역을 고치는 길은 다시는 불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화에 삶에 있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순종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순종을 꼭 건축헌금 비슷하게 이야기합니다. 건축 헌금은 일생에 몇 번하지 않습니다. 매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매년 짓는 교회로 옮겨 다니는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 빼놓고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순종’ 그러면 한참 살다가 어쩌다 한번 순종한 것을 두고, 두고 국보처럼 욹어 먹습니다. 20살 때 순종한 이야기를 60이 들어도 계속 합니다. 그런 식의 어쩌다 있는 순종을 가지고는 성화가 안 됩니다. 성화는 범위에 있어서는 삶의 전 방위에 걸쳐서, 정도에 있어서는 완전히 가깝게 순종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성화가 촉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결국은 이것을 논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그 성화가 인간의 순종이라고 하는 인간 쪽의 반응과 함께 역사 함으로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강퍅함을 내버려두는 과정,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는 이 모든 것들이 성화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그럼 왜 하나님이 인간을 강퍅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일단 총론 적으로는 답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답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완악해지는 마음속에는 항상 자신이 죄를 사랑하고 완악하게 되고 싶어하는, 뭐 완악하게 되고 싶어하지는 않겠지만 죄를 사랑하고 은혜 안에 있기를 거절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자기 반응이 있습니다. 그런 굳은 마음, 강퍅한 마음으로 되어가게끔 만드는 그런 방향이 죄인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총론은 그렇게 하고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강퍅해지도록 인간의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섭하셔서 강권적으로 막으시면 사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성화에 있어서 부주의와 패역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강퍅해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자, 그게 무슨 뜻입니까? 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강퍅해지도록 내버려두심으로서 성화에 부주의함과 강퍅함의 패역을 어떻게 고치 실까?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부주의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마음이 부드럽다가 강퍅해지고 나서 자기의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딱딱한 마음이 되었을 때 신자는 고통 하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마음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퍅해져서 그 부드러움 마음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나서 비로소 그 성화의 의무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힘들어도 은혜 생활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그 은혜가 없었을 때 고통스러웠던 삶을 생각하면 의무가 쉽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잘 됩니다. 기도하면 은혜가 있습니다.
새벽에 나오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때 뭘 생각하는가 하면 새벽에 기도를 하러 나갔는데 그나마 안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차갑게 거절 감을 느끼다가 힘없이 돌아오던 그 아침, 기도할 제목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마음이 무거워서 도저히 기도할 수 없었던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생각하면 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아닌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런 부주의함을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패역을 서서히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마음을 전체적으로 쇄신할 기회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어떨까요? 차를 타고 다니는데 가다가 자꾸 쉬고 그리고 막 가다가 엔진도 꺼지고 브레이크도 안 들어서 몇 번 부딪혀서 난리가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차가 여기 저기 부딪혀서 자꾸 찌그러지고 그랬습니다. 고치려고 합니까, 안 고치려고 합니까? 내버려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팔아버리고 새 차를 사려고 하니까. 차가 다 망가졌습니다.
(예화: 차가 오래되어서 안 좋은 상태에 밤에 비가 오는데 차를 몰고 가시다 큰 차가 다가와 차의 앞부분이 망가지게 되었지만 조금도 화가 나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성한 곳이 없는 차였기에 고침으로 오히려 새것과 같이 고치게 되었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못 지키면서 계속 마음이 강퍅해져 갑니다. 하나님이 물론 경고하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계속 자극하신 은혜를 어느 정도 거두십니다. 그러면 이제 급속하게 강퍅해져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끝이 있습니다. 끝없이 강퍅한 것은 그것은 불 택자의 마음입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강퍅해지는데 신자의 강퍅함은 끝이 있습니다. 막가는 ‘막가파’는 못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까지만 갑니다. 가다가 거기서 딱 멈춥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부분적으로 그 죄에 대해서 고치실 수 있을 텐데 아예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분적으로 고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면서 저 바닥까지 내려가게 만들어서 한번에 통째로 고치시려고 하십니다. 그런 섭리 속에서 신자의 강퍅한 것을 내버려두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의 친구가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친구였는데 공부하다가 싫으면 책을 다 묶어서 다락에 넣어버리고 책가방만 들고 학교에 가던 친구였는데 그런데 열흘만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공부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책을 꺼내서 공부를 하는데 결국 그 친구는 철학과를 지망했다는 친구의 이야기)
그런데 그 모든 사람이 그런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진짜 줄로 묶어서 던져놓았는데 영원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애입니다. 그 애는 빌게이츠처럼 다른 쪽으로 나가야지 됩니다. 그런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던져 놓고 다시 공부하는 마음이 안 생기는 이 놈이 불택자의 마음이고 던져 놓았는데 책 한번 안 보고 공부를 안하고 놀다가보니까 다른 친구들 공부하는 것을 보니까 너무 괴로워서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면서 다락으로 올라가서 줄을 풀고 다시 수학 책을 펼쳐놓고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는 그 놈은 택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분적으로 아니라 전체적으로 우리를 쇄신하시기 위해서 잠시 은혜를 거두는 것처럼 우리를 강퍅하게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아! 그러면 위로가 됩니다. 나는 바닥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 멀었는데 그럼 이번 집회에 특별히 은혜 받을 필요도 없고 계속 갑니다.’ 그런데 그게 바닥입니다. 그 마음이 바닥을 기는 마음입니다. 난 참 걱정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쓸데없는 쪽으로 이해를 하도 뛰어나서 걱정이 됩니다.
그 다음에 이제 강퍅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이유에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고통을 맛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 신비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보내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마치 연어가 돌아오듯이, 방탕한 연어가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는 그냥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는데 세상에 가보니까 주님 믿기 전에 그렇게 재미있었던 그 세상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술 먹고 놀고 그래도 기분이 좋고 깨고 나면 그 여력으로 탄력을 받아서 그 다음날 술자리를 예비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내가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된 다음에 이상하게 세속적인 기쁨이 마음을 지나간 다음은 울고 싶을 정도의 공허감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봐라.’ 그리고 보내도 한참 있으면 자기 발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상처받고 곤고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신자가 무엇을 깨닫는가 하면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멍에를 지면서 사는 이 의무가 굉장히 힘들고 크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를 들어도 영감이 마르지 않는 그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탕자는 집에서 있으니까 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거들고 품꾼들을 지휘하면서 그렇게 거들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싫은 것입니다. 내가 젊은 나이에 시골구석에서 처박혀 되지도 않는 품꾼들과 어울리고 그리고 논밭을 가꾸고 이렇게 도대체 사나이로 태어나서 이게 도대체 할 짓인가. 좀 뭔가 호강하게 이 넓은 세상에서 그래도 한판 뒤흔들어 봐야지. 사나이로 태어난 뜻을 펼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미명에 방탕한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한번 흔들었습니다. 술집에 가서 흔들었는지 어디서 흔들었는지 흔드는 바람에 아버지 유산을 다 털어먹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극도로 가난 속에서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리면서 바닥까지 내려간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무엇이 생각났습니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는데 아버지에게 있는 형은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감히 생각도 못했습니다. 뭘 생각했는가 하면 우리 아버지 집에는 배부른 품꾼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이제는 그 품꾼을 부리던 사람이 그 품꾼이 밥 실컷 먹는 것, 그것만 그렇게 부럽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집에서 노예처럼 품꾼으로 살아서 밥만 먹을 수 있어도 그 밥 먹는 대가로 지불하는 그 내용이 사실은 베풀어주는 그 배부른 은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완전히 180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버지의 집으로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며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안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제 상상을 한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신발도 신기고 옷도 새로 입히고 반지도 끼어주고 그랬습니다. 이제는 ‘내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야, 유산이 남았는데 한번 더 나가라. 그랬습니다. 삼세판을 해야지, 사나이가 뜻을 못 이루고 왔는데 가봐야지. 그리고 아버지가 돈 가방을 싸주면 이 아들이 간다고 하겠습니까, 안 간다고 하겠습니까? 안 간다고 할 것입니다. 그때 안 간다는 생각이 어떤 생각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래도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받아주었는데 내가 아무리 가고싶어도 어떻게 또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 마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안 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가 진짜 행복하니까. 물론 저쪽에 가면 타락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누리는 그 기쁨과 타락의 기쁨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래도 넌 가야지 돼.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여기서 죽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게 뭘 의미하는가 하면 타락을 통해서 그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입니다. 신자가 마음이 강퍅해지면 하나님만 괴로우신 것이 아니라 목회자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더 괴로운 사람은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이 영혼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나면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이 있다고 해봐야 세상 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 돌 같이 굳어진 마음 때문에 오는 이 영혼의 평안 없음, 거기에서 비롯되는 이 고통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시지 않습니다. 잠시 수면제처럼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바쁜 일에 몰두하고 살다가 보면 잠시 잊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어두운 밤에 주님과 대면하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편 6편을 강해하면서 밤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밤은 외로움의 상징입니다.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로부터도 멀어지고 만나는 사람,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홀로 딱 떨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강퍅하게 내버려두시는 동안에 신자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신자가 깊이 깨달을 때 강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뼈저리게 아픈 것인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 마음을 지키며 경건을 위해서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가벼운 멍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는가 하면 인격적인 승복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인격적인 승복이 가능해집니다. 무릎을 꿇고 ‘죄악 된 세상에 주님 없이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사는 것보다는 주님의 집에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심령이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사도 바울도 이미 논증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거한다고 했습니까? 은혜가 더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우리가 모두 적극적인 범죄를 하자 그러면 더 많이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건 서적의 저자들의 글을 봐도 깊은 죄악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몸부림치다가 거기에서 구출되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성화의 참된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의 글 속에는 마치 문학가들의 삶과 죽음사이로 오간 사람들의 글 속에 짱짱하고 부딪히는 칼의 소리가 있듯이 그런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스피리어칠한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 속에, 그런데 이제 그런 경험이 없고 죄에 대해서 치열하게 싸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틀린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데 자기 가슴에 와서 꽂히는 이야기는 없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게 글 속에 피가 안 묻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성화의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시시합니다. 지금 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뭔가 막 헤매고 있는데 마치 멸치 서 너 마리 넣고 큰솥에다가 끓인 물 같은 것을 칼슘 영양분이라고 하는데 이게 안 차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죄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죄 속에서, 그러니까 모든 죄인들이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에 그 영혼이 깊은 곤고함을 느끼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들은 어째든 그 속에서 처절하게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드러운 마음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는데 그것을 포기하자 완전히 강퍅한 마음이 되어서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죄에 져서 신음하는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은혜 안에 살기 위해서 애쓰는 성도의 의무가 얼마나 죄를 견디는 이 고통의 무게에 비하면 가볍고 쉬운 무게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릎을 꿇는 인격적인 승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강퍅해져 가는 동안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데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속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더러워지는 마음을 내버려둔다고 해서 내일 완벽에 가까운 강퍅함이 되고 모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세월이 흘러서 바닥을 치고 고통 가운데 슬피 울면서 내 강퍅한 마음 좀 구원해주시면 내가 모든지 하겠노라고 손을 들게될지 그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인생 마지막에 손을 드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성화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동안에 그 수많은 날들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러니까 돌이켜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게 마지막 결론적으로 세 번째 ‘강퍅’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제 상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이제 마음이 너무 강퍅해져갈 때 신자들이 흔히 갖는 어리석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잘 들어보십시오. 이게 무엇인가 하면 내 마음은 마귀의 강력한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악마적인 생각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 자신도 내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성경에도 보면 인간이 도저히 죄를 이기지 못하지 않은가.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이렇게 몸부림치지 않는가. 그런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죄에 대해서 짓는 그런 고백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 나 같은 평신도가 어떻게 자기들도 못 이기는 죄를 나보고 이기라고 그렇게 하는가. 내 마음을 어떻게 내가 지킬 수가 있는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어두움 속에서 살았고 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지금 내 마음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어서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럴 때 이제 해결의 길이 하나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수 만 명 가운데 한 두 명 일어나는 엽기적인 흔히 있지 않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대결이 일어나서 자기의 마음에 마귀의 지배를 완전히 물리쳐서 자기도 어찔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기적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런 것을 기대하는데 아무에게도 안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대체로 그런 일들이 없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믿음으로서 여러분들의 성화에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아예 편하게 그런 일은 나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하고 접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내가 지킨다 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네 마음을 내가 지킨다’고 하지 말고 그리고 오늘 ‘내 마음은 내가 지킨다’ 이것이 성경의 견해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지켜라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강권적인 영의 역사로 네 마음을 지키라 그것을 기대하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성화의 영역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하나 그럴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 그러니까 이것도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데 마귀에게 영향을 받는 것과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영향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뭐 어떤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자다가 가위에 눌리고 눈을 떠보니까 시커먼 놈이- 개는 왜 꼭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지 수천 년이 지나도 패션이 바뀌지 않아, -뒤에 앉아있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에 대해서 굉장히 죄책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해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를 해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론 죄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관리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마귀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잘 관리를 해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 눌리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이 마음가지고 똑바로 살면 그런 것에 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막 억눌림 같은 것이 올 때 대게 마음이 잘 준비된 사람에게 성령도 오시고 마귀도 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상당히 잘 준비된 마음에 옵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갸롯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이 사단의 책임이지 왜 갸롯 유다의 책임이냐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갸롯 유다에게 들어갔습니까? 이미 벌써 돈 통에서 돈을 꺼내 쓰고 나쁜 짓 하면서 예수를 팔 수 있는 그 사단이 들어와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친화 적인 성격으로, 모두 일제가 쳐들어왔을 때 쌍수 들고 환영했던 그 매국노처럼 그 마음이 벌써 손들고 대환영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거기 들어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준비 된 마음에 들어갑니다. ‘그런 마음이 되었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뭔가 와서 영향을 주었다는 그 자체가 죄일 것이고 생각하는 그 자책감,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강력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나도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 영적인 악함의 정도는 점점 심각한 상태로 치달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서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 콱 사로잡힌 상태, 이럴 경우에는 벌써 정신상태가 모두 없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다중인격화 되어서 마음자체가 이미 완전히 분할이 되어서 그 일어나는 정신작용 속에서 정신병자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 속에서 이 말이 이 사람의 마음에 반영하나 안 하나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전문가도 굉장히 힘듭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그것은 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마음의 상태가 자기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며 자기는 도저히 그것을 이길 수 없다 라는 그런 생각은 그것은 성경에 가르쳐주는 가르침과 정말 어긋나는 길입니다. 그것은 그릇된 확신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마음의 키를 붙들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혼자 그것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특히 옳은 길로 가는 그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그 마음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위 ‘슈브’ 마음을 돌이키라는 그 수많은 요구를 결국 그 주체를 인간을 겨냥하면서 그 마음을 돌이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반드시,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결국은 강퍅한 마음이 깨트려짐으로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하고 깊이 회개하는 마음, 통회하는 마음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좋은 환경에다가 갖다놓으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너무 강퍅해서 이 사람과 저 사람과 막 부딪힙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다 받아주는 곳에 가면 마음이 유순해질 것이라고 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의 문제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 되는 심령 'break heart'가 되기 전에는 결코 그는 'tenter heart'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만 그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겠는가 또 부드럽게 된 마음을 유지하겠는가는 내일로 넘어가는 문제입니다. 어떻든 그렇게 강퍅해진 사람을 향한 유일한 대안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강력한 참회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령이 그 어두움을 뚫고 그 강퍅한 마음속에 흘러 들어가서 그 마음이 녹아지고 깨트려지는 강력한 참회의 역사 없이는 그는 몇 년 더 앞으로도 얼마나 더 긴 세월을 강퍅한 가슴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갈지 하나님만이 아실 뿐입니다. 세월이 약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 영혼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20년 이상 끌어안고 그 상태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젊은 시절에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는데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성화에 있어서 거의 진전이 없는 사람, 내가 그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세월이 약입니까?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이 됩니까? 상황이 바뀌고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니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상한 심령이 되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마음이 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신자로서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결코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할 수 없고, 그래서 성화 된 신자의 마음이 살아 있는 그 부드러운 마음 그것을 가지고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의 삶을 보십시오. 강퍅해져 가는 일은 수시로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면 여러분들의 속에 특별한 죄를 짓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녹이고 지나가지 않으면 계속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강퍅해져갑니다. 그리고 강퍅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죄에 대해서 너그럽지 않고 실제로 범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점점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죄 가운데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참회 생활은 어떻습니까? 정말 참회합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의 삶 속에 참회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여러분들의 신앙의 특징이 참회하는 마음입니까? 깨트려진 심령입니까? 상한 마음입니까?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 마음, 그리고 주의 말씀과 그 은혜의 마음 앞에 녹아지는 마음입니까?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자기 부족을 깨닫고 찢어진 가슴으로 주의 은총을 기다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여러분들의 인격에 특징이라고 주님이 인정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 삶을 살았던 신자들도 마음이 굳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그 눈물 몇 방울 떨어트리는 참회, 깨닫는 것 없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로 신자의 긍지를 더해 가는 그 야비하고 조잡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신자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기대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기의 자녀들, 자기의 백성들의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새 언약을 주실 것을 예고하시면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 가운데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도록 우리에게 증거 해 주시면 그 눈에 보이도록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애정을 깊이 느끼고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 십자가 앞에서 늘 참회하며 하나님 앞에 온유한 마음이 되어서 무엇이든지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무엇이든지 주님이 움직이시고자 하는 마음대로 움직이고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주님 앞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항복하는 그런 삶의 방향 전환, 그리고 여러분들의 참된 신자 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의 위대한 새 시대를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살아있는 신자, 주님을 생각하는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눈물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는 없어도 그 십자가를 보면 의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기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애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주의 자녀로 삼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명백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고 죄인인 우리들을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이 그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드러났거늘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게 내버려두더라도 이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구원받은 그대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떻게 마음을 지키며 이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아야 할지를 깨달은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부드러운 마음의 회복과 유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지난 시간에는 제거해야 할 마음, 신자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서 장시간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 마지막 시간으로 오늘의 주제는 오늘 성경의 하반 절,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를 중심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는 길과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편의상 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첫째는 본문 23절 하반 절을 해설하고, 그리고 두 번째는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는 길에 대해서 네 가지로 설명한 후 크게 세 번째는 그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길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로 본문을 해설하도록 하겠습니다. 23절 하반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키 밈메누 토체오트 하임’ ‘키’는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이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밈메누 거기로부터 from there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토체오트’ 이것은 샘들, ‘야짜’ 라고 ‘나오다’라는 단어에 명사형태입니다. ‘토체오트’ 샘들이 있다, 그런데 그 샘은 어떤 샘들인가 하면 ‘하임, 생명’ 혹은 생명의 샘들이 거기로부터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과 비교해볼 때 별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래도 차이가 있다고 하면 이것입니다. ‘왜냐하면’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지킨다’라고 하는 것보다도 더욱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잇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마음을 지켜야 할 아주 강력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거기는’ 어디입니까? 마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터치 엇트 하임, 생명의 샘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생명의 근원이라’고 그랬습니다. 비슷하기는 해도 좀 다릅니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면 거기에서 말하자면 생명의 어떤 근원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생명의 샘들, 그래서 우선 차이가 나는 점이 ‘복수’입니다. 그래서 샘들, 많은 샘에서 퐁퐁 샘물이 솟아나듯이 그런 샘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샘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샘들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묘사가 그림 같습니다.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도 더욱 너의 마음을 군인들이 성을 사수하듯이 그런 방식으로 지키라. 왜냐하면 바로 거기로부터, 그러니까 앞에 나오니까 강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장의 어순상, 거기로부터 혹은 거기에 생명이 샘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어 성경에서 Springs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이야기하는 ‘생명의 근원’이라고 번역된 생명의 샘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우선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아주 많이 표현합니다. 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불신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삶을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돈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는 이 잠언 24장 23절에서 이야기하는 여기에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샘들’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들 심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복수로 표현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신자답게 살아가도록 주시는 그 생명의 역사에 다양성들을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더더욱 신약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힘에 의해서 신자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 말할 때 그것은 열심히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많이 베푸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평면적으로 진술하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훨씬 더 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착한 일을 하고 그리고 가난한 삶에게 많은 구제하고 그리고 도덕적이고 똑바른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외면적인 모습이어야 된다 라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성경처럼 인간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삶을 강조하는 경쟁도 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사람의 삶이 그렇게 어떤 도덕성을 내포하지 않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구원도 의심이 간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런 논리가 가능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문제, 도덕적인 삶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성경에서 지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평면적인 진술로 간단하게 소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비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삶에 실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사람에게 이런 저런 방식의 삶을 가르쳐서 새롭게 제시되는 규범에 맞도록 생활하게끔 만들어주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어떤 지식만을 전달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저런 삶을 살아야된다는 표준을 제시하면서 그러면서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윤리적인 규범들을 준수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어떤 격렬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서 열광에 들뜨게 만드는 것도 사실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진실한 성도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람됨과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체는 어떤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영혼에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 그의 성향을 완전히 바꿈으로서 전개되어 가는 새 삶,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그러면 그는 근본적으로 그 영혼에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강력한 변화를 경험해서 그래서 그 속에 새로운 성향을 부여받은 사람, 그리고 그 새로운 성향 때문에 마음이 새로워졌고 그래서 새 마음을 가지고 옛 삶과는 다른 새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간적으로 즉각적 구원에 의해서 변화 받은 성도들 속에 여전히 부패한 본성,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육적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것만큼 충분히 그렇게 변화된 존재,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성향에 있어서는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 성향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죄악 속에 있으면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기쁨도 느끼지만 기쁨도 지나가고 나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데 그 고통에 정도가 거듭나기 전에는 막연했었는데 거듭난 후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속에 어떤 성향이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런 영혼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그래서 새 성향을 갖게 되었는데 그 새 성향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성령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어째든 신자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신자 안에 두신 그 생명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은 정말 아주 칼리플 합니다. 아주 총천연색으로 신자 안에서 아주 다양하게 그 생명을 가지고 역사 하십니다.
마치 우리의 인체가 있으면 인간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과 죽었다고 하는 것이 숨 하나 끊어진 사이인데도 살아있는 사람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느끼는 감각과 이런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죽은 사람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보는데 보는 것으로 따지면 카메라도 보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만이 아니라 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불쾌한 감정과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갖고 싶은 감정을 갖기도 하고, 냄새를 맡으면서 속에서 먹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하고 아니면 토하기도 합니다. 만지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하고 아주 견디기 힘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반응이 아주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일어납니다. 그처럼 이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도 그 생명이 나타나는 양상들이 너무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생명도 역시 그러합니다. 다양하게 역사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속 사람이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 있으면 육신의 인간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렇게 다양하듯이 카메라가 이렇게 있어서 ‘찍’ 하고 사람 모습을 비쳐주어서 TV로 보내는데 그 카메라는 아무리 고성능이고 리모콘을 움직이고 자기가 움직이고 그렇게 만들었어도 눈물나는 적은 없습니다. 기뻐서 눈물 나는 법도 없고 너무 깜짝 놀라서 스스로 떨어지는 법도 없고 이게 아무리 발달되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아무리 저능아라도 마지막 숨을 거두는 직전까지는 아주 감각을 통해서 다양한 생명을 가진 기능을 합니다. 그런 게 그대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렇게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짧은 시간에 그것을 어떻게 다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신비할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삶과 죽음 사이 하나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차이는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속 사람이 그렇게 그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는 그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게 아까 말씀드린 그런 감각을 통해서 다양한 반응을 하듯이 똑같이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면서 그렇게 다양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죽은 사람은 전혀 그것이 없습니다. 살아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다양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신비를 우리들이 어떻게 쉽게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가 막히게 생명의 근원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고 여성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터치엇트’ 그리고 생명의 샘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참 신비한 것입니다.
신자의 소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성화’라고 그랬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고 그래서 주님을 닮은 존재가 되어 가고 거룩한 존재가 되어 가고 그리고 주님을 잘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성화의 요체입니다. 그 성화 없이는 어떤 행복도 신자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두 행복해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를 잘못 믿으면 안 믿고 사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게 보입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고 내일 죽을지라도 오늘 먹고 마시며 죄를 지으니까 아무 가책도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때 그 소명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것이 성화가 하나님 앞에서 소명이라고 느꼈으니까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부패성을 누르고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서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통해서 깨트려짐으로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그리고 또 주님을 잘 섬겨서 모든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한 사람으로 주님을 섬겨 가는 것, 그래서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을 닮아가서 주님을 섬기면서 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고 하나님을 섬기고 찬송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도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신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맨 처음에 예수를 믿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했는데요. 은혜가 떨어지니까 너무 사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내 인생에 최고의 실수는 당신을 믿은 것입니다. 그때 아마 구원을 취소할 수 있었다면 내가 물렀을 것입니다. 이제 나중에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성화의 삶을 오늘 결심한다고 내일 성화의 삶을 살수가 있는가 하면 아닙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은 물론 자기도 애를 쓰지만 그러나 성화의 삶에 있어서 이 주도권을 누가 쥐시고 계시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여기 표현대로 말한다면 생명의 샘이 그것을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인간이 정말 지긋지긋하게 미웠습니다. 저 인간이 나는 진짜 싫다. 너무 싫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인간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이 자기가 죽는 것보다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을 하든지 자살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구 하나를 미워하면 용서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거의 못한다고 봅니다. 물론 복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인간으로 생각 안 해. 한번만 봐줘. 알았어. 봐줄게, 알았어. 봐준다니까 자꾸 떠들어. 그 대신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마. 예전에 빌려간 돈 다 필요 없어. 안 갚아도 돼. 그 대신 너는 이제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겠어. 그것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단호하면, 그러나 다시 뜨겁게 사랑하는 것, 그것을 왜 합니까? 어떤 인간에 대해서 질렸을 때에 한번만 질려서 질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수없이 반복했으니까 질린 것인데 그 왜 다시 합니까.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도 힘든 세상인데 그 지겨운 인간, 뭐 내가 매일보고 안 보면 끝나는데 뭐 용서하고 더 가슴아파하며 살아야 하고 그것은 못합니다. 죽어도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밉던 남편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이렇게 웃는 그 모습들이 상당히 수상합니다. 얼마나 많이 미워했으면, 저는 진짜 헤아릴 수 없는 경험을 가졌습니다.
가정이 다 부서지기 직전까지 갔는데 부인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시니까 남편에게 잘합니다. 그러니까 ‘잘 해야지’ 결심을 해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어느 날 어느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긋 지긋해서 저 인간과 안 살면 내가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제 은혜를 받았는데 집에 들어가 보니까 남편이 먼저 와 있었다고 합니다. 술을 실컷 먹고, 그렇게 은혜를 받았으니까 ‘먹고’ 라고 하지 은혜 받기 전에는 ‘처먹고’ 그랬습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자빠졌다’고 했는데 이불 위에 옷도 벗고 누워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까 너무 너무 불쌍해서 그 남편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여보, 인생사는 게 너무 괴롭지. 곤고하지’ 그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 인간 진짜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그 자매가 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심정적으로 보면 ‘저 사람을 호랑이도 안 잡아가나. 요즘 호랑이는 뭘 먹고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데 목사님 무서워요. 이렇게 남편에 대해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뭐 뻔하잖아요. 사고나 나서 죽어버리든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떨어지면 보상금도 많이 나오고 그런 상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생명의 샘이 솟아나니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너무 곤고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서부터는 술 먹고 와도 앉혀놓고 발을 씻겨주고 하니까 남편이 그렇게 말합니다. ‘여보, 요즘 약 먹었어’ 그랬다고 합니다. 부인이 더 재미있는 것은 ‘먹었지. 신약 구약 두 병을 먹었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부인 속썩이면서 방탕하게 살고 그래도 마음 구석에서는 정말 사랑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내가 도리 상으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렇게 해야지’ 하는 그것이 아니라 진짜 그 남편을 향한 눈물이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가진 마음이 아닙니다. 속에서 이렇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훌륭한 사랑의 삶, 훌륭한 헌신의 삶 이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시킨 것입니다. 진짜 주님이 이 안에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를 들자면 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떤 형제는 주님을 몰랐을 때 매일 뇌물이나 밝히고 살았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좋은 자리에서 스스로 자천되어서 가겠다고 요청해서 자천된 곳으로 갔습니다. 가기 전에 다시 한번 그런 유혹이 강력하게 들어올 때 돈 세탁해서, 지저분한 돈을 이렇게 싸서 밀어 넣으면서 한번 봐달라고 하니까 밀어 넣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것 나는 필요 없습니다. 만약에 통과되고 싶으시면 규정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마음에 뭐가 꽂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저 자식들 잘난척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야! 요즘 돈을 싫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네.’ 그런 것들이 자기가 할 수 있겠습니까?
박봉에 막 시달리고 사는데 한 일년 치 연봉을 무릎 앞에 갖다가 놓는데 먹어도 표가 안 날 정도로 다 낡은 지폐를 묶어서 갖다가 놨는데 그것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것을 받고,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주는 사람이 오면 눈이 벌겋게 되다가 그런 돈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그런 것에 익숙해져있는 구조에서 살던 사람이 그것을 끊어버리면 사실은 자신의 생활 자체를 접는 것입니다. 상납은 무엇으로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누어먹는 것은 무엇으로 하고 삶 자체가 완전히 소외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꺼이 자청합니다. 뭐가 그렇게 만듭니까? 은혜 받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샘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성화의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성화가 어떻게 저절로 되겠습니까? 아니 자동차를 타도 좋은 자동차가 멀리 갑니까, 나쁜 자동차가 멀리 갑니까? 아니 좋은 자동차가 멀리 가다니, 기름 많이 넣은 자동차가 멀리 가지 어떻게 좋은 자동차가 멀리 갑니까? 언젠가 한번 고속도로를 가는데 그랜저가 서 있기에 하도 불쌍해서 망가졌는가 하고 물었더니 기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내차 산타모는 쌩쌩 거리고 잘 나가는데, 그것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차도, 아무리 낡은 차도 차종에 따라서 멀리 가고 조금 가는 게 아닙니다. 기름을 가득 넣으면 멀리 갑니다.
그것 보십시오. 자기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이 없는데, 생명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나지 않는데 어떻게 성화의 소명을 다해서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어느 순간에 머리에 띠를 두르고 ‘성화 되자. 성화 되자. 부패야 물러가라.’ 그리고 궐기대회를 한다고 해서 성화가 될 것 같으면 나야말로 매일 궐기대회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화가 되면 될수록 마귀는 늘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열심을 내서 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그 샘을 막는 것입니다. 여러 많은 샘들을 어떻게 하든지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몹쓸 것으로 만듭니다.
여러분, 우물이 기억이 나십니까? 옛날에 시골에 가면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에서 맑은 물이 나올 때는 모든 사람이 그 우물을 아낍니다. 양철로 만들어 뚜껑을 덮어놓고 거기에 가서 애들이 침을 뱉는다든지 하면 그 동리 사람들 누구든지 보면 볼기를 맞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이 같이 먹는 물이니까 이놈의 자식들 하면서 욕합니다. 뚜껑을 열고 물을 퍼서 목마른 나그네도 축이고 그리고 빨래하는 아낙네도 좋아하면서 물을 길러가고 합니다. 그러다가 물이 안 나오든지 문제가 있어서 폐쇄된 우물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애들이 와서 거기에 작대기도 집어던지고 돌맹이 집어던지고 침 뱉고 잠시 후에는 거기에 장구벌레들이 진을 쳐서 모기가 막 쏟아져 올라오는 악취가 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 우물을 누가 묻어버리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수가 솟아나는 그 생명의 샘들을 어떻게 하든지 막고 폐쇄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고 그 동안에 성화의 삶을 많이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여러분들이 차로 말하자면 에쿠스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름을 모두 뽑아버리면 길거리에서 렉카차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똑같이 어떻게 하든지 그 샘을 말려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고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귀도 다 양해를 합니다. 이미 다 이해가 된 상황입니다. 양해를 다하고 묵인해주기로 다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사가 되고 권찰이 되고 하는 것도 다 마귀가 이해를 합니다. 뭐만 하면, 생명의 샘만 모두 반납해주면 그러면 아주 이해를 하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높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더 좋습니다. 높이 올라가서 만약에 아주 교회에서 중심적으로 섬기는데 샘이 막혔다고 하면 누구 기뻐하는 일을 하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의 샘들을 통해서 성도는 성화의 소명을 완성해갑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나는가 하면 마음에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영역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하는 은혜의 샘이 실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민 메뉴’라고 하는 단어가 이유나 근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것 때문에 생명의 샘이 있다.’ 이렇게 번역을 하면 아주 훌륭한 번역입니다. ‘생명의 샘들이 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장소 적으로 마음 안에 생명에 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샘을 두셨는데 그런 영혼 속에 생명의 샘들이 물처럼 은혜를 솟아나게 하는 그 기능들이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마음을 통해서 그것들이 흘러나와서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개념입니다. 전치사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 때문에 생명의 샘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생명의 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통해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고 변화된 영혼에서 솟아나는 그 샘들이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그 마음이 삶을 살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스피커 같은 것을 보면 막이 있습니다. 전류가 이렇게 흐르면서 막을 때려서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 퍼지게 하듯이 마음이 말하자면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위치가 이러하기 때문에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 자체를 너희가 지키지 않으면 결국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정확하게 말하면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게 하는 그 하나님의 생명이 너희 속에 역사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되겠는가. 너무 비참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기껏 성공한다고 하면 형식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는 외식하는 종교인들이 될 것이고, 그나마 실패하면 교회도 뛰쳐나가서 막 가는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제 크게 두 번째로 그러면 그 부드러운 마음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지키라고 그랬는데 지킬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자체가 너무 강퍅해져 있어서 뭘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마음이 강력하게 어떻게 변화되어서 부드러운 마음이 강퍅한 마음보다 훨씬 많아야 지키지, 마음 자체가 거의 돌덩이처럼 강퍅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지킬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우선 굳어진 마음이 모종의 변화를 통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상한 마음을 거쳐서 통회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상한 마음을 거쳐서 깨어진 마음의 변화로 갈 때에 그 마음이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딱딱해졌는가에 따라서 한번에 깨트려지는 깊은 통회를 통해서 굉장히 놀랍게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딱딱함이 만약에 정도가 심한 것이라면 한 두 번을 가지고는 안 되고 여러 번 깨트려지는 가운데 비로소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있지만 어째든 간에 이 굳은 마음, 강퍅한 마음은 상한 심령과 마음에 깨트려짐을 통해서 부드러움을 회복한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그러면 그런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부드러운 마음을 우선 회복해야지 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가. 저는 여기에서 기억하기 좋게 네 가지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마음, 머리, 허리, 무릎 그래서 첫째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 그리고 둘째는 머리를 차갑게 하라, 세 번째는 허리를 굽히라. 마지막 네 번째는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 부드러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퍅한 마음에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상한 심령과 깨트려진 심령이 됨으로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첫 번째로 잘 들으십시오. 상하고 깨트리기 전에 먼저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뭐 심장온열치료법도 아니고 뭔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 죄의 심각성을 보이고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삶을 계속하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함으로서 하나님의 율법과 엄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 회개에 이르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식입니다. 공식은 그렇지만 실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굳어져있을 때에 그때에 그렇게 나쁜 짓하고 사는데 성경에 의하면 너 같은 놈은 돌로 치라고 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 같은 삶을 계속 살면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되어 있고 그리고 구약에 돌아가면 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일찍 죽고, 그리고 한 사람은 칼에 맞아 죽고, 한 사람은 돌에 맞아 죽고, 한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어. 결론은 무엇인가 하면 네가 그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이 너 아주 가까운 장래에 요절을 내신다. 어쩌면 네가 죽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네가 너무 사랑하는 첫째 딸을 하나님이 데리고 가실지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 그래. 그러면서 덜덜 떨면서 무릎을 꿇는 일들이 일어날 수는 있는데 별로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 지옥 보내셔 그러면 지옥이 있어, 너 갔다가 왔어. 내가 이렇게 살아서 난 잘못되었는데 너는 잘 믿어서 잘된 게 뭔가. 지금도 일정한 직업도 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넌 뭐가 잘된 게 있는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것이 아무리 진리이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시골에 장날에 가면 하여튼 애들이 코를 흘리며 가장 오래 재미있게 구경하는 곳이 두 곳입니다. 하나는 강냉이 튀기는 집입니다. 강냉이 튀기는 집은 ‘뻥이요’ 하면 다 도망가는데, 애들은 귀를 막고 바짝 다가갑니다. 거기서 뻥! 하면 떨어지는 강냉이를 주어 먹으려고 덤벼듭니다.
그런데 그 집 말고 또 한집이 있는데 그 집은 대장간입니다. 대장간에 한번 기회가 있어서 가보니까 진짜 자동화가 되어 있습니다. 스위치를 누르면 해머가 소리를 내며 칩니다. 그래서 이렇게 쇠를 갖다가 놓고 자동으로 망치가 되어서 움직이는데 옛날에는 러닝 셔츠 바람으로 땀을 뻘뻘 흐리면서 대장장이가 해머를 들고 그리고 이것을 불에 집어넣어서 만약에 낫을 만들고 싶다면 철판을 잘라서 쇠 동아리를 풀무에서 집어넣어서 시뻘겋게 달구어서 갖다 놓고 막 두들깁니다. 잔 망치질을 하면서, 얼마나 능숙한지 손이 몇 번 왔다갔다하면 아주 훌륭하게 낫이 되어서 나옵니다. 여러분도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머가 크고 그리고 기계가 발달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구를 만들기 위해서 생짜 쇠 덩어리 무쇠를 놓고 두들기는 어리석은 대장장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쇠가 깨트려집니다. 또 그렇게 두들겨서 불에다 굽지 않고도 저절로 연장을 만들 수 있는 쇠라면 만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게 이렇게 몇 번만 쓰면 쇠가 물러서 전부다 날이 가버립니다. 두들기기 전에 먼저 어디다 집어넣는가 하면 불 속에다 집어넣어서 벌겋게 달군 다음에 톡톡 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건 혹은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이 강퍅해져 있을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데 그러면 누가 사랑해달라고 그랬나.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살아. 그리고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니? 눈물을 흘리고 전해도 너 왜 우나. 그런 정서에 동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야기해도 바위를 치는 것처럼 아프기만 합니다.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탄탄해서 철판에다 쇠 구슬을 던지는 것처럼 탕탕 팁니다. 그런데 이제 그 쇠를 불 속에다 넣고 달군 다음에 탕탕 두들기면 아주 놀랍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가 집회를 하러 가면 그런 것을 느낍니다. 강력한 대포는 저녁 집회에 장전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녁 집회에 가장 사람이 많이 오니까 그때 한번 발사를 해서 터트려야지 만 변화가 일어나든지 할 것이니까, 그리고 이제 아침에는 사람들이 별로 안 옵니다. 아줌마들 몇 사람이 이렇게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주부들은 시간이 있으니까 이렇게 앉아 있고 남성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소리지를 일도 없습니다. 저녁때만 소리지르는 것만 해도 힘들어죽겠는데 아침에 그것도 심리적으로 사람이 많아야 소리를 지를 맛이 나지, 서너 줄 앉았는데 소리를 지른다고 뭐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살살 이야기를 합니다. 웃기도 하고 찬송도 부르다가 살살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그런데 말하자면 저녁 집회에는 최신 미사일을 장전해서 왔고 아침 집회에는 소총을 들고 왔는데 미사일을 퍼부어도 안 깨지던 사람들이 소총을 맞고 하나씩, 하나씩 쓰러집니다. 어떤 때는 깜짝 놀랍니다. 그러니까 미사일을 대포고 콱! 쏜 다음에 진짜 오늘은 시원하게 설교했구나 하면서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는데 아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소리만 들립니다. 아침에 살살 이야기할 때 웃고 찬송하고 떠들고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이 맞지요 그러면 막 이야기하다가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면 기도를 끌 수가 없을 정도로 막 통곡하면서 그렇게 눈물을 흐리면서 매달립니다.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슬비에 옷 젖는지 모른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진리는 똑같은 진리이지만 한번 붙어볼래 그리고 역사 할 때는 마음에 준비가 된 사람들은 아주 시원한 것입니다. 주소서. 미사일이 뭡니까? 원자탄을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왔는데 살살 하면 실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 저렇게 하지. 소리 좀 지르지. 우리 좀 야단도 치고 그렇게 하시지.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마음에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막 그런 사람들은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안 된 딱딱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이 가정주부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바쁘고 곤고합니다. 그 마음이 딱딱해져 있습니다. 그때 들어가서 이제 자분자분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할 때 어떤 효과가 일어나는가 하면 우선 그 속에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게 관건입니다. 우선 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진리를 집어넣으면서도 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저희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을 함께 느끼게 한 다음에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고 생각이 될 때 콱! 찌르는 것입니다. 이제 집어넣고 그 속에서 터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웁니다.
나는 막 아침 본문이 그저 가기 며칠 전에 슬슬 요것, 요것 그리고 갔고, 저녁 본문은 막 써넣고 머리에서 준비하고 기도할 때도 그저 저녁에다가 승부를 걸었는데 저녁에는 썰렁하고 아침에 박살이 납니다. 그것도 괜찮지 새벽 기도에는 총도 아니고 칼을 작은 것을 들고 나갔습니다. 집회를 가도 새벽에는 딱 15분밖에 설교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저녁 때 와도 맹숭맹숭하던 사람, 아침에 와도 맹숭맹숭하던 사람이 새벽 기도에 15분 설교에 퍼 지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합니다. 왜 마음이 따뜻해질 때에 들어간 한 마디 한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으로 그에게 하나님 없는 삶을 폭파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막 와해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야 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따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이것입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려면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래서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마음이 딱딱해서 성경도 눈에 안 들어오면 나는 성경을 읽는 것을 잠시 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쉬운 책을 읽으라고 합니다. 읽어서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지고 ‘나도 정말 주님의 은혜를 받고 싶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쉬운 책들을 읽는 것입니다. 읽으면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때에 그때 성경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경건 서적을 통해서 받는 유익이 굉장히 컸습니다. 우리는 책을 안 읽으려고 뜻을 세웠으니까 저는 거의 절망적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안 읽는지 정말 일간 신문만큼만 읽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정말 얼마나 안 읽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가끔 은혜를 받아도 다른 보조적 수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방 마음이 건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깊이 본질적으로 변화를 받았으면 좋을 텐데 뭐 그냥 겉만 슬쩍 구워졌는데 그리고 자기는 굉장히 변화를 받았는지 알고 꺼덕 꺼덕이며 사는데 찬바람만 지나고 나면 다시 상한 마음이 굳센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 강함보다도 더 강하게 거듭나서 그래서 더 강하게 안 깨지는 마음으로 그렇게 변합니다. 안 읽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데 작년에 경건 서적을 다섯 권 이상 읽은 사람은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손 내리십시오. 그래도 열린 교회 교인들은 좀 낫습니다. 우선 구역 예배를 하려고 해도 한 네 권은 읽어야 되니까. 그런데 그것 말고 자기가 마음이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읽은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맨 처음에 마음이 강퍅해지고 그럴 때 그런 책들이 굉장히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너무 건조하게 느껴지면 책을 읽으면 마음이 너무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모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경건 서적을 ‘반찬’이라고 부르고 성경을 ‘밥’이라고 불렀습니다. 밥맛이 대게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이 집에 가서 왜 밥맛이 없지 하는 그 이야기는 반찬을 개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좀 알아야 합니다. 밥맛이 없다고 하는데 기껏 하는 대답이 무엇인가 하면 이천 쌀인데, 뭐 통해야지. 아니 이천에서 나오는 임금님 표 쌀인데 왜 맛이 없어. 그게 아니라 반찬을 좀 다른 것으로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밥이 계속 맛있는 게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김치 하나에도 잘 밥을 먹는 것이 진짜 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항상 그러면 좋은데 건강한 사람도 어떤 때는 밥도 먹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녁에 반찬이라도 맛있게 해놓으면 그러면 반찬 맛에 먹다가 진짜 맛있다. 정말 맛있다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식욕을 회복하듯이 말씀에 대한 미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또 이제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일까요? 따뜻한 교제, 그러니까 마음이 강퍅해지면 은혜 받은 사람 속에 있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자꾸 소외감을 느끼니까. 셋이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친한 친구인데 한 사람이 너 지난 주일날 어땠니 그러니까 아! 말하지마. 나는 가슴이 미어져서 죽는 줄 알았어. 그러니까 모임은 자기가 주선했는데 한 십분 후에는 둘이서만 막 이야기를 합니다. 넌 어땠니 그러니까 나 잤지 뭐. 그리고 이야기하는데 접촉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강퍅해지면 은혜 받은 신자들의 모임이 자꾸 부담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강퍅한 마음에 어울리는 데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강퍅한 마음은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는 감각이 떨어지고, 무디어지고 그 대신 육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예민해진다고 했습니다. 강퍅한 마음은 갖고 은혜 받은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있으면 소외감을 느끼지만 노래방에 가면 주도권을 쥡니다. 여기는 내 세상이다. 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은혜가 떨어지는 것 같을수록 성령 충만해 보이는 지체들 속에 들어가서 교제를 나누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지체들은 그런 것을 고려해서 그렇게 마음이 딱딱해져가고 있는 신자들을 사랑으로 잘 감싸고 보살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유익을 바로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아주 큰 축복입니다. 따뜻한 성도들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래서 그런 지체들과 같이 밥도 먹고 교제도 하고 그렇게 해야지 됩니다. 저는 그런 것을 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식어져 가는 것 같을 때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간증들을 보면서 그 모임이 끝날 때쯤 되어서 마음이 너무 따뜻해져서 맞아.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불러주셨는데 정말 저들처럼 저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지체들이 많은데 아, 나도 정말 그렇게 살아야지 그리고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져서 뭔가 은혜를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찬양, 굉장히 찬양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공급받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조금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찬양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리고 찬양을 통해서 변화를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약간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찬양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이런 것들은 총체적이지 않고 간헐적입니다.
지금 마음에 관한 교리들을 여러분 안 들은 이야기를 새롭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평소에 다 듣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화에 삶에 있어서 그 성화의 소명의 효과적으로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지식은 조금만 도움이 됩니다. 아무리 충격적으로 만났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도움이 됩니다. 진짜 우리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 소명을 따라 사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강한 힘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 죽임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안 들어본 것이 있습니까? 대부분 우리들이 들은 내용들이고 또 생각하는 내용들인데 표현을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듣고 나니까 그것들이 우리들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굉장히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가르쳐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찬양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수단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성화의 소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체계적인 지식들을 전달해주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 찬양이 주는 강력한 유익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과 그 은혜를 받아들일 마음으로 쇄신시키고 바꾸는 강력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역 속에서 훌륭하게 사용했던 사람이 누군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입니다. 그래서 ‘아이라스 생키’라는 사람이 항상 동행하고 다니면서 찬양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확 열고 나면, 제 표현에 의하면 따뜻해지고 나면, 그게 여러분의 표현에 의하면 마음을 열고 나면 그때 무디 선생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가슴에 막 꽂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녁이 있는데 거기를 향해서 표창을 던지면 그 과녁이 바위로 만들었으면 아무리 던져도 꽂히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 영화에서 가끔 꽂힙니다. 그러나 안 꽂힙니다. 그런데 그 과녁이 아주 부드러운 살코기 같은 것으로 바뀐 다음에는 힘없이 날아간 표창도 꽂힐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놓는 그 힘이 찬양 속에 있습니다. 찬양을 쭉 들으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적인 노래 계속 들어봐야 ‘아! 이 세상 진짜 사는 것 서럽다’는 이런 생각밖에 안 들지만, 아니면 정 반대로 ‘신나게 놀아보자’ 이런 결론밖에 안 나지만 그러나 찬양을 잘 듣든지 아니면 성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클래식 같은 것을 들으면 우리의 마음은 놀랍게 깨트려집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접촉하는 이 문화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교적이고 타락한 문화에 계속 접하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안되지만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질수록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 곁에 들어가서, 밥을 먹어도 그 사람들과 함께 먹고 하루 밤을 자도 그 사람들과 자고 교제를 해도 그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는 성도들의 삶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입니다.
두 번째는 정반대인데 ‘머리는 차갑게 하라’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뜨겁게만 하면 자기가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몇 십분 씩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통성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찬바람이 횡 일어나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인간적인 열광이 우리의 영혼의 치유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히려 머리가 차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유언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생각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으려고 해야합니다. 우선 자기를 성찰해야 하는데, 즉 자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사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꼼꼼하게 자기를 살피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사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아는데도 그렇게 안 살고 있거나 잘못 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몰라서 못사는 것은 성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알고 있는 것은 생각을 하고 성찰을 하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몰라서 못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비교적 잘못이 적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알려주셨는데도 자기가 부지런히 자기를 성찰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안 사는 것은 불 신앙입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태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 안 믿는 삶을 살려고 뻗대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파악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껏 까지 여러분들이 배운 성경 지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자기 삶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빛으로 보기에는 불빛이 너무 흐릴 때가 있습니다.
(예화: 눈이 나빠서 잔글씨는 잘 못 보는데 밝은 불을 켜면 보기가 좀 더 낫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성찰을 하는데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자기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없으면, 그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심령이 굳어져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심령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욕구도 함께 감퇴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현격하게 퇴보합니다.
앞에 앉아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작은 노트를 준비해서 골격은 적어놔야지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예화: 전에는 교인 중 주별 회원이 많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대한 사모함이 있으니까 두 번 세 번 들은 다음에 다른 사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확실히 받으면-말씀의 빛은 자기가 깨달아야만 등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다-자기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뜨거운 머리로는 안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나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를 받아야지 하는 펄펄 붙는 가슴보다 깨달아야지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예배 시간에 상습적으로 조는 것은 여러분들의 심령이 강퍅해져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너무 피곤하거나 감기 약을 먹었다거나 밤을 새서 가끔 조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예외 없이 예배시간에 존다는 것은 그대들의 심령이 강퍅해져 있다고 하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분명히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예배 시간에 졸았다는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성화가 되겠으며 부슨 변화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강퍅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리 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이해에 비춰서 잘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강퍅한 가슴이 상습적이고, 은혜 받아서 마음이 녹는 경험은 간헐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마음을 기울여서 그것을 하나씩 깨달아가려고 하는 마음으로 아주 냉철한 머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높은 고도의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정직하고 진실한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만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음이 오면서 자신의 영혼에 그 말씀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방법보다 우회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단해볼 수 있는 신뢰할만한 신앙의 선배와의 상담 같은 것도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예화: 만일 무릎이 아프다고 할 때 혼자 왜 그럴까 고민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왜 그럴지 말해보라고 하는 것보다 의사가 한번 만져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예화: 어떻게 하고 싶다고 상담해올 때 오히려 그가 40일 기도하고 판단하는 것보다 내가 기도 안하고 즉석에서 판단하는 것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자기는 잘 모르니 기도해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느낌이 게재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충분히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린 것이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확신을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응답보다 정확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신앙이 선배인 사람과 교제를 나누면서 그 속에서 정확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강퍅한 마음을 회복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그것은 이런 모든 일을 하는 것,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려고 하고, 신앙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하는 모든 과정이 겸비의 마음이 동반된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알고 싶다.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가 아니라 ‘나의 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는 스스로 길을 알 수 없고 나는 스스로 나를 돌이킬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이분들을 통해서 내게 도움을 주십시오.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변화를 주십시오. 이런 은혜로운 찬양을 통해서 내 마음을 열어주십시오’라는 부복하는 겸비함이 있을 때에 굳은 마음이 아주 겸비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무릎을 꿇으라는 것인데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따뜻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바꿔달라는 탄원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없으면 그 굳고 딱딱한 마음이 깨트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깨트려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깨질 수도 없고 사람이 와서 깨트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이 역사 하실 때에 불과 같고 방망이와 같아서 그 굳음 마음을 깨트리는 것이지,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아니하시면 울리는 소리일 뿐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깨트릴 수 있겠습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은혜를 받아야 될텐데 마음이 강퍅해서 도저히 그러질 않습니다. 집회를 가서 아홉 번이나 열 두 번쯤 설교를 하는데 그 중에서 죽을 쑤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는 지워버리고 싶은 설교인데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어눌한 말을 들어서 성령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잘 안 일어나지만 성령님 마음 대로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사오니 주님 내 마음을 녹여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을 정금과 같이 정결케 해주시옵소서. 정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나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인간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주님, 내 마음을 바꿔주시옵소서. 성령의 역사로 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하며 간절히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런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으면서 하나님 앞에 갖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나의 이 굳은 마음을 고쳐주실 것이다’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강퍅한 사람의 특징은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도전함에 있어서 지구력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은혜에 차있을 때는 한번 기도해서 안되면 ‘내가 부족한 것이 있나보다’ 두 번 기도해서 안되면 ‘하나님이 나를 연단 하시나보다’ 세 번 기도해서 안되면 ‘하나님이 내 기도의 강도를 높이라고 하시는구나’하면서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도전하는데,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내편이시고 나의 말에 기울이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지고 나면 그런 지구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의 선배들의 조언을 받고 나서 ‘정말 이렇게는 살기 싫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줘. 내일부터 금식할거야’하는데 조금 있다보니 퍼져버립니다. 겨우 한끼 금식하고 ‘뜻을 세우고 매달렸는데 그렇게 기도해도 안 들어주셔’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굳은 심령이 되면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는 지구력이 있습니다. 지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주일 빼먹고 놀러가서 엎어져서 다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인생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뢰가 벗겨진 세계에서는 지구력이 없습니다. 삼일만 가도 좋을 텐데, 주일 오후에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목회자가 답답해서 내일 새벽 기도 올 사람만 앉으라고 하면 월요일은 나오고 화요일부터는 비고 목요일에는 조금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지구력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부족인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레미아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새 언약이라는 자체가 “너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내가 너희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는 것이 새 언약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셔서 본질적으로 변화된 마음을 갖게 해주시는 것이 새 언약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만큼 분명한 것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도하는 신자의 마음이 아무리 강퍅한 심령이라고 할지라도 믿고 기도하면 물같이 녹이시리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속해주신 십자가라고 하는 진리만큼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책이 없을 정도로 강퍅해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의 마음을 녹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가슴이 녹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이 녹이시는데 하물며 주님 믿고 변화된 적이 있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 그 은혜의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눈물 흘리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녹이실 수 없다면 그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 우리의 마음이 확 녹고 나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약속도 있지만 우리가 강퍅해져 본 적이 이번 처음입니까? 첫 사랑은 하나밖에 없어도 강퍅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녹이셨습니다. 나의 마음을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이 어느 순간 찾아오셔서 녹이신 것입니다. 다시는 내 마음이 녹지 않을 줄 알고 하나님을 향해 토라진 마음을 가지고 살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놀랍게 우리의 마음을 녹이셨는지 모릅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렇게 녹이시고 이렇게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돌처럼 강퍅해도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게 마지막 세 번째는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할 수 있는데 첫째는 두려워하라, 두 번째는 주의하라, 세 번째는 힘쓰라입니다.
첫째 두려워하라는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까? 크게 세 번째에서 다루는 사람들은 강퍅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은혜를 받아서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쉽게 얘기해서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늘 주님을 생각하면 눈이 촉촉이 젖어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기쁘고 그를 보면 주님이 그 안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되는 것보다는 그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면서 사는 일이 훨씬 더 힘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지식도 강퍅한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올 때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노력도 훨씬 더 많습니다. 즉 전쟁을 해서 한 번 승리하는 것도 힘들지만 끊임없이 무기를 준비하고 복수를 꿈꾸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보호하면서 우위에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전쟁의 위협이 점점 사라져간다고 말하지만 한참 냉전에 있을 때 우리가 힘이 없었다면 벌써 어떤 식으로든지 통일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십 년 동안 국민들의 혈세의 30%를 군사비에 지출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정금같이 귀한 때에 총 들고 훈련을 받으면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그것을 만일 국민 총생산으로 친다면, 그것을 지불하고 이만큼 잘사는 나라가 된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적 축복입니다. 이 분단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통해서 겨우 전쟁 없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엉터리 같은 지식으로는 절대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잘 정리되어야 합니다. 정말 책 좀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확한 빛을 갖게 만들어주는 그런 신령한 책을 한 달에 한번씩 계속 소개해도 문서선교부에서 별로 팔리지 않는답니다. 담임 목사가 꼭 필요한 책이라고 소개하면 사서 읽어야 합니다. 일년에 열두 권씩만 사서 5년만 예수 믿으면 책꽂이 하나는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한 30년 예수를 믿었으면 자신의 방안에 기독교인의 서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몇만 원어치씩 먹어도 책은 비싸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냐면 첫째는 자기가 그렇게 부드러워도 곧 강퍅해질 수 있다고 하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부드럽고 눈물이 글썽거렸었는데 1년 지나고 나면 잘 안보입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고 다시 강퍅한 마음으로 변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이었던 사람이 강퍅해지면 오히려 완전히 두 얼굴입니다. 은혜 받은 부드러운 마음이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룰수록 괜찮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강퍅한 사람, 저 사람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금방 판단을 내리면 나중에 반드시 회개할 일이 생깁니다. 그럴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은 이렇게 부드러운데 강퍅해질 수 있다’ ‘강퍅할 때 얼마나 힘들었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가슴을 부여안고 고통스럽게 살던 때를 기억하면서 자기 마음의 부드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이 수고와 희생을 크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신자의 행복이여.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정말 먹고만 살아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너무 소중합니다.
두 번째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기가 지금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따라가지만, 자기가 주님을 크게 배신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때는 정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신자와 같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중 한사람이 구약의 사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셨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하나님 제가 어떻게 왕이 됩니까? 우리 집안은 보잘 것 없고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하며 기름 부으려고 할 때 숨었던 사람이었는데 마음이 강퍅해지고 나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재물을 노획물로 획득하는 못된 일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랑스러운 우리아를 죽입니다. 두 얼굴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능성이 그런 탁월한 영적인 인물들에게 일어났다면 우리에게는 확률적으로 너무 일어나기 쉬운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해야합니다.
‘부드러운 마음, 깨어진 심령 하면 나 아니겠어’했어도 언제든지 우리도 그런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도 믿음에서 미끄러져서 크게 타락한 사람들을 보면서 정죄하라고 가르쳐주는 대신 ‘저것이 내 일일수도 있다’고 경계를 삼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근신하는 마음이고 두려워해야 할 것들입니다.
세 번째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종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안고 그대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세월이 흘러가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연한 기대 속에서는 ‘했으면, 할텐데’하다가 끝나지, 정말 놀라운 일들이 그런 막연한 기대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강퍅한 가슴을 갖고 일평생동안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살았는데 불현듯 어느 순간 주님이 목숨을 거두어서 주님 앞에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행합니까?
살았을 때는 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어도 죽는 그 순간에는 은혜가 최고도로 달해서 주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땅의 수고를 끝내고 내 품으로 돌아와 영혼이 안식하라” 하실 때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나의 사모할 자는 우리 주님밖에 없나이다”하며 올라가야 영광인데, 두려움 속에서 끌려가듯이 가는 일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나님 앞에 녹아진 심령을 가지고 사는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말로 근신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의하여야 합니다. 무엇을 주의하여야 하느냐면 첫째 죄를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부드러웠던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나 근심은 좀 소극적인 요인인데 죄는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강력하고 적극적인 요인입니다. 그런데 이 죄에도 양심을 거스르는 작은 죄가 있고 큰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질적으로는 마찬가지지만 그것이 마음에 미치는 효과는 다릅니다.
저는 처음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가책을 많이 받았습니다. 살다가 일상화된 거짓말-보고서 쓸때 점검 안하고도 했다고 쓰는 것 등-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가책을 받았습니다.
(예화: 극장 같은 데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면서 나이를 속이는 것)
그런 것들도 정직하지 않으니까 죄는 죄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양심을 거스르는 작은 죄입니다. 작은 죄는 양심만 어지럽히는데 큰 죄는 영혼을 죽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조심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작은 죄는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혼돈 시키고 어지럽히면서 우리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하는데 그것은 아주 얇게 무감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큰 죄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죄에 대해서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잘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의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염려 같은 것들입니다. 염려는 결국 사랑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술취함과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잠드는 마음, 무딘 마음, 굳어진 마음, 강퍅한 마음, 다 비슷비슷한 표현인데 어떻든 생활의 염려가 죄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지 않는데서 비롯된 과도한 염려는 우리의 마음에 생기를 몰아내고 우리의 마음을 점점 굳어지게 만드는 그런 효과를 가져옵니다.
더더군다나 여러분들이 특정한 쾌락에 집중적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터넷, 채팅, 낚시, 바둑... 이 모든 것들이 너무 과도하게 될 때에 반드시 경건에 해가 됩니다. 적절하게 해서 정신과 육체를 순환시키는 것은 괜찮아도 과도하면 반드시 영적 생활에 해가 됩니다. 집착을 가질 정도로, 말하자면 끊었을 때 금단현상이 올 정도로 미치듯이 빠지는 것은 모두 나쁩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드러웠던 마음들을 딱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굉장히 안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은혜 생활하면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복 주십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이 나아지면 조금 낫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성경 적으로 주님이 주신 것을 어느 정도 누리며 사는 것은 정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직장에서 좀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게 하시면 조금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멍가게 하면서 힘들었는데 사업이 점차 번창해서 큰돈을 벌게 되면 차도 조금 나은 것 타고, 집도 조금 넓은 집으로 가고, 아이들 교육도 조금 높여서 시키십시오. 괜찮습니다. 가난할 때는 밥 한술에 고추장 찍어 먹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지만, 넉넉해지면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반찬도 넉넉하게 해먹고, 좀 여유 있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가난하고 힘들 때는 여러분들이 절약하며 살지만, 하나님이 복 주셔서 조금 나아지면 옷도 좀더 맵시 있는 것 입고, 교제하는 사람들도 일정한 수준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보다 뛰어날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들과 거의 맞서서 옷을 입는 것이 정죄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나치면 반드시 그것이 물질에 대한 집착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져오고 과도한 물질에 대한 집착과 사랑에 대한 집착, 그것에 대한 선호함은 반드시 영혼의 원기를 감퇴시키고, 반드시 그 사람의 부드러웠던 마음을 딱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의해야 될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마음 바침이 없는 신앙생활이 상습화된 결과가 위선입니다. 고도의 결단을 통해서 위선자가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치지 않는 신앙생활이 상습화될 때 위선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선이 나쁜 이유는 외식입니다. 이 문제를 깊이 다루어 보고 싶으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과 외식’이라는 시리즈를 들으면 많이 해결되리라고 보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외식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참된 마음이 없이 일정한 신앙의 모습을 흉내냄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으려고 하는 자기 의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구속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우월감에 가득 차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을 만난 인격적인 교제가 있는 진실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진실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선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자기가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진실해지면 너무 역겨워합니다. 모두 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진실해지면, 진실한 사람 속에서 외식하는 사람이 너무 역겨운 것과 같은 역겨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 속에서 한 사람이 진실해지면 즉시 나오는 말이 ‘저만 예수 믿나. 유별 떠내’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을 바치지 않고 자기가 무엇인가 그럴 듯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연출해 가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이 급속하게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일에 있어서 상당히 익숙해져 있던 바리새인, 율법사가 예외 없이 강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확연하게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힘쓰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힘써야 하느냐면 첫째로 순종하기를 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성찰을 통해서-자기 성찰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있을 때에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순종은 우리 안에서 마음이 굳어지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훌륭한 제동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면 반드시 죄, 불순종이 친구입니다. 죄, 불순종과 함께 맞아떨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이 급속히 굳어지는데,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 순종이 어떤 종류의 순종이냐면 범위에 있어서는 전 방위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와서 하는 생활에 있어서만 순종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되고 자기의 직장 생활이나 가정생활의 모든 삶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대로 살고자 하는 삶에 있어서의 전 방위적인 순종하는 삶의 노력이 필요하고, 정도에 있어서는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온전한 순종이 되도록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해보기도 전에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인데 어떻게 온전히 순종하겠어’하는 것은 ‘대충 살지 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온전한 순종을 하려고 하나님 앞에 애를 쓰면서 살다가 결국은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히 못사는 것과 처음부터 인간이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당연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말은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마음 그 자체가 불순종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기를 힘씀으로서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왜 순종을 하기 위해서 힘쓸 때에 마음의 부드러움이 유지되느냐면 순종하려고 목표를 삼고 애를 쓰는 사람만이 불순종했을 때 아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화와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이유는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안 살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룩하게 못살았을 때는 즉시 가책이 오고 아픕니다. 그래서 잘 못살았어도 그 다음에 나타나는 반응은 그런 목표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완전히 다릅니다. 한 사람은 가책을 느끼고 한 사람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힘을 쓰는 사람도 불순종합니다. 그런데 힘쓰는 사람은 불순종했을 때 아픕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미워합니다. 불순종 한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는 상한 마음과 깨어짐의 기회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속 그 마음을 쇄신시키면서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 나가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룩한 교제를 유지해나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로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계속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실한 경건 생활이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 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처음 딱딱한 심령이 부드럽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는 우발적으로 새벽기도에 나오기도 했는데 부드러운 심령을 가진 다음에는 꾸준히 경건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목양을 하면서 보면 대부분 하나님이 부드럽게 고쳐주셨는데도 이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견고하고 지속적인 개인 경건 생활의 실패입니다. 그것이 저항력을 앗아가 버리고 많은 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마음을 쇄신시키셨는데도 밀려들어오는 염려, 근심, 죄에 대한 유혹,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느슨함, 이런 것들이 집합적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순식간에 마음을 점령해서 굳은 마음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깊이 변화를 받고 부드러운 심령이 되었으면 필연적으로 지속적인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파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새벽 기도 나오십시오. 안되면 밤 기도를 나오든지 일정한 시간에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경건에 바치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읽고, 경건 서적을 읽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Simple Life가 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삶을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쓸데없는 비생산적인 취미, 쓸데없이 과도한 시간을 낭비하는 소일거리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세속적인 교제생활도 당장 정리해서 심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남는 시간을 모아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지체들과의 따듯한 교제입니다. 이것은 아까 딱딱한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의 준비 적인 것이었지만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필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들이 항상 그 은혜의 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오르는 성도들과 함께 포개어져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 받다가 남은 시간을 가장 릴렉스하게 보내는 생산적인 방법은 은혜 많은 지체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교제하고, 집을 오가면서 함께 간증하고, 같이 기도하고 헤어지는 것들이 그 거룩한 교제를 촉진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따뜻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은 상당히 많습니다. 기도도 은혜의 방편이고 공적인 예배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은혜 받을 수 있는 방편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은혜의 방편이 주어질 때 그 은혜의 방편들을 활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잊혀져버린 기술이지만 마음의 굳음을 방지하고 마음의 굳음에 저항하는 훌륭한 방편 중 믿음의 선조들이 잘 활용했던 것은 금식입니다.
금식은 우리로 하여금 잡다한 욕망들을 잠시 접게 만듭니다. 실제로 우리의 하루의 삶 속에서 밥 먹을 것을 준비하고, 밥을 먹고 포만감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소화가 안돼서 화장실을 드나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흐트러지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면 일정 기간동안 시간이 많아진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밥 먹는 시간이 쎄이브되서가 아니라 먹으려고 염려하고, 먹고, 먹으러 가고, 포만감 때문에 사고가 일시 정지하는 시간들이 모두 시간으로 바뀌고 나니까 금식 기도를 하면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진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세탁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금식, 예배, 기도, 좋은 세미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고백들을 통해서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 은혜 받은 사람들로부터 내가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기회들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경회가 있으면 참석해서 깊이 은혜 받으려고 한두 달 전부터 결단하고 할 때 심령이 굳어지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늘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경회를 모두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결론적으로 말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월이 많이 흐르고 아무리 세상의 풍조가 바뀌어도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옛것과 새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샘에서 고전적인 부르심 속에서 안식을 누렸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소명에 불타는 삶을 살았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이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제껏 성화의 삶을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를 쓴 사람도 있지만 자포자기한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찾아왔고 우리는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면서 영혼의 암흑 속에서 주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느끼며 성경에서 약속한 풍성한 삶과 우리의 빈약한 삶 사이에 무한한 괴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익숙해진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졌고 우리의 마음은 굳어져서 이전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배신하는 삶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일반화되었습니다. 이런 삶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천하보다도 귀한 구원의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이 은혜의 불을 질러 어두운 세상을 빛처럼, 그리고 불꽃처럼 살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예수의 생명을 전해주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소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결코 빛 바래거나 쇄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 소명을 따라 사는 자녀들과 동행하시고 어두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은 분명히 곧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든지 부르시는 그날까지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참 행복이 무엇입니까?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에 기쁘신 뜻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분이 우리 안에 파 놓으신 생명의 샘이 솟아 나와서 그 샘이 우리 앞에 차고 넘쳐서 강물과 같이 우리의 삶의 현장을 뒤덮고 온 세상을 가득히 덮어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가득하게 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참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온 세상을 두루 덮고 우리 교회와 이 시대의 패역을 두루 덮을 수 있는 이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불행하게도 그 일은 놀라운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인 우리의 마음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주님께 점령되고 또 지배되어서 어두운 세상에서 정말 순결한 성도들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밖에 모르고 우리의 마음의 소중한 것은 그분께만 다 드리고 일생을 살아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주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지킴의 교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