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를 위한 기도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화와 기도(눅21:36) 2003.8.10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1
2. 기도와 열렬함(눅21:36) 2003.8.11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22
3. 기도와 지속성(눅21:36) 2003.8.12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43
1. 성화와 기도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21:36)
오늘 읽은 21장 36절을 3일 동안 다 설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충 앞에 나오는 “이 일들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중에서 “기도하고”까지만 3일에 걸쳐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 기간 세 번 새벽 설교에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찾아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저녁 시간에는 특별히 기도에 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첫째 날은 성화와 기도에 대해서, 그리고 둘째 날은 기도의 열렬함에 대해서, 마지막 날은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에 대해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물론 계획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은 말세의 교훈이라고 불려지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날에 되어질 일들을 주께서 다 교훈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자기의 사람들에게 부탁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 당부로 요약이 되는데 우선 첫째는 소극적으로는 이런 일들을 피하고, 두 번째는 마지막 심판주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인자 앞에 설수 있도록 그렇게 해라.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하고 깨어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피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앞에 술 취함과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방탕함과 술 취함은 소극적인 죄의 작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타락의 실천입니다. 적극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아서 그것을 선택하고 그것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하게 된 것입니다. 술 취하는 것도 자신이 원해서이고, 방탕한 것도 방탕함이 가져다주는 쾌감 때문에 방탕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찾아서 죄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 타락하게 되는 것을 조심하고 두 번째는 다소 동정적인 여지가 있는데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 염려를 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염려해야지 되겠다고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수많은 염려들이 밀려올 때 그것과 대항할 수 있는 적절한 은혜가 자신 속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염려와 근심이 밀려들어오게 되고 그 염려와 근심 속에서 마음이 둔하여져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처럼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것들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 모든 것들을 다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서 타락하게 될 것인데 그때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서 한때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이유가 커다랗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좋아서 따라가서 술 취하고 방탕하기 때문에 미끄러지게 되고, 또 하나는 은혜 안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밀려올 때에 그 염려와 근심에 떨어져서 마음이 둔하여지고 그래서 영적인 미각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결국 뒤로 미끄러진다. 이런 모든 일들이 모든 믿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반드시 일어나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확정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런 일들이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여러 차례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도 역시 그런 맥락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바보 같은 신앙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기준을 오늘날의 시대의 신앙생활에다가 두고 살아갑니다. 어차피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는 사람들이 다 미끄러져서 신앙의 표준들이 다 저하되고 쇠퇴하고 퇴락해서 그래서 비정상적인 것들이 기준이 되어버리는데 그것을 비정상적이고 은혜에서 미끄러진 생명 없는 삶들이 보편적인 것이 되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로마서 교인들에게 간절히 호소한 게 무엇인가 하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는 사도 바울이 속해있던 그 세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지금이 바로 이 세대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신실한 신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그 시대를 본받지 말아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하게 믿는 신앙이 보편적이 되던 시대는 역사 속에는 없었습니다. 어느 한 공간 안에서는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사회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응하여 이미 벌써 임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런 일들은 벌써 정확하게 예언의 말씀대로 응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결국은 이 두 가지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한편으로는 육체의 즐거움을 쫓고 죄가 가져다주는 죄의 낙을 찾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렇게 은혜로부터 멀어지니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이 신앙의 세계들, 경건의 세계들이 무너지니까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형편이 나아지고 모든 것들이 형통하게 풀리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리가 없습니다. 교만해지게 됩니다. 어려운 난관이 오고 시련이 오게 되고 상황이 눈에 보기에 잘못되어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막 무섭게 낙담해버립니다.
그렇게 낙담해버리고 나면 결국은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은 결국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불러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은 마음이 굳어짐을 초래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더 갈망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완전히 공격을 당해서 이 신자라는 이름의 껍데기는 남아 있지만 실제로 이 속의 내용 자체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그래서 사데 교회처럼 “너희의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은혜를 많이 부어주셨는데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이 있는데 그것도 막 죽으려고 합니다. 목숨을 거두려고 합니다. 남아 있는 은혜가. 그런 지경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일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그래서 안으로는 끊임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둔해지고 밖으로는 정욕을 쫓아서 끊임없이 이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 신앙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을 거침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꾸준히 나옵니다. 그리고 봉사도 하고 십일조 생활도 정확하게 하고 그리고 신자로서 하나님의 말씀도 배워가고 교회에 있는 많은 지체들에게 맞추어서 예의바른 삶을 살아가는 그런 것들이 몸에 배어서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성숙한 신자처럼 보이고 정직한 신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용은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은 정욕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그리고 심령은 근심과 그로 말미암은 어두움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것들을 피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있으면,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런 시대에 가만히 있으면 그러면 신자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방탕으로 흐르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교회는 다닐 뿐이지 그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존재가 못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못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것을 피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은 옛날에 은혜 받은 게 대단할지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지런히 정리된 것이 대단할지 모릅니다. 이번에 GBS 공부하는데 제가 대단히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구역장들이 고3 때도 그렇게 공부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물론 고3 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시 공부하듯이 공부했습니다. 정리가 잘되었다고 칩시다. 그런 것이 저절로 그것을 확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보면 압니다.
그런 것들이 다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이상의 그 무엇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이 방탕과 타락,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인한 마음의 둔하여짐, 이런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그를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중도에서 좌초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반적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이기고 그것을 헤치고 승리해서 그런 일들을 피하고 승리하여 이기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날에 은혜를 받았어도 말씀에 정리가 되었어도 옛날에 은사를 받고 성령을 경험하고 복음을 경험하고 자유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렇게 됩니다. 그것을 피해야지 됩니다.
또 하나 그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그것을 피하면서 적극적으로 해야지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 앞에 서도록”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우리들을 심판하시는 그분 앞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에 있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심판을 받고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을 그분 앞에 잘잘못을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해서 영원히 미루어진 종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매 순간 그리스도 앞에 선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 인자 앞에 서도록” 이 ‘선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아주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희랍어 단어의 배경이 히브리 단어인데 ‘아마드’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누가 주 앞에 서리이까” 할 때 그 선다. 라고 하는 의미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이 선다. 라고 하는 의미는 일어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막 불어도 서있다는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인자가 거룩하신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판단하고 심판하실 때에 그 엄격한 판단을 견딜 수 있도록 그렇게 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어떻게 우리 인간이 심판자이신 순결하신 예수님이 판단하실 때에 그 심판을 감당하고 설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도 시편에서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누가 주 앞에 서리요” 라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인가? 이것은 하나의 방향제시적인 단어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들이 주님 앞에서 서면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많이 몸부림쳤는가 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에 따라서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시고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훨씬 죄에 부도덕한 사람인데 한사람은 그런 사람이고, 한사람은 굉장히 도덕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도 부도덕해 보이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의 죄와 더불어서 투쟁하고 씨름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 도덕적인 사람은 평탄하고 좋은 가정에서 똑바른 것만 보면서 계속 자랐습니다. 그래서 죄와 악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런 욕구를 어렸을 때부터 억제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이기고 살려고 하는데 워낙 이 속에서 강력해진 부패성들이 너무나 엄청납니다. 아까 그 사람에 비해서, 막 그 죄의 세력에 휘둘리면서 수많은 죄의 맛을 보고 그러면서 정욕이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분투하고 싸웁니다.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더 중요한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 그 온전을 향해서, 그 온전한 신자, 그리고 참된 신자가 되는 그것이 정말 우리를 구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유일한 반응이고 그래서 내가 참된 신자가 됨으로서 진정한 사람이 되어서 죄 때문에 망가진 이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고 그래서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현재 여기 살아있는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는 비결이 둘이 있는데 첫째는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상 깨어있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을 먼저 잠깐만 설명을 하자면 영어로 말하자면 Be watchful 감시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이렇게 모든 것들을 이렇게 지금은 내가 그렇지 않지만 내가 어떤 상황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방탕히 흐를 수도 있고 또 어떤 상황이 되어서 내가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가 깊이 동의를 하고 그런 조짐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하면서 살아가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감시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피는데 있어서도 깨어있어야지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내 마음 안에서 그 다음에 밖에서 유혹과 더불어 어떻게 내가 죄와 더불어서 싸우는가, 이런 것들을 향해서도 깨어있어야지 됩니다. 그리고 죄가 어떤 상황을 시험으로 활용을 해서 내게 다가오는가. 그리고 그런 시험들이 다가올 때 나는 본성적으로 어떤 연약함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갖는 연약함은 어떤 것이고 내가 나이기 때문에 특별히 갖는 연약함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들을 모두 다 알고 그것을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일어나는 이 죄의 작용들을 조기에 발견을 할 수 있는 감시체제가 가동 중인 상태가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면 또 한없이 펼쳐지니까 그것은 다음으로 접고 그러면 이제 그것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냥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며” 희랍어 성경에는 모든 때 안에서 기도하라. 많은 때가 있는데 그 모든 때 안에서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때 안에서 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좀 어렵게 우리들이 펼쳤습니다만 자, 이런 것입니다. 내가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본분이 이 세상에서 술 취하고 방탕하면서 사는 것이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염려와 근심으로 둔하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혼하면 마치 배나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중년이 없듯이,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다음에 회사를 다니다가보면 배가 나옵니다. 점점 그러다가 나중에는 발끝도 안 보입니다. 발끝이 안 보인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너무 나와서 체중계도 안 보인다고 했습니다.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방탕하게 흐르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성화입니다. 성화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 왜 그런지 설명을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이 세상에는 항상 술 취하고자 하고, 방탕하게 살고자 하고, 육체의 쾌락을 쫓고자 하는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 항상 그런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에 가면 없겠습니까?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세상이라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끌려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육체의 쾌락을 하나님처럼 좇고 그리고 육신의 즐거움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그것을 위해서 허무한 일에 굴복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죽음이라는 질병적 상태에 들어간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환경은 참다운 신자가 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환경 그 자체가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남의 나라 땅에 가서 그 상대방 사람들만이 열렬하게 응원하는 외국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한골 집어넣으면 소주병이 날아오고 맥주병이 날아오는 그런 위험한 경기장에서 축구경기를 하는 선수들과 같습니다. 항상 그런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혹의 특징이 무엇인가? 유혹은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집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유혹이 뭘 유혹해서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의 목표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 그러나 어디에 감추어져있는 것, 그것들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옛날에는 방탕한 삶을 살고 쾌락을 좇고 육체의 낙을 위해서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믿었어도 은혜가 막 떨어졌을 때는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빌미삼아서 저 하고 싶은 대로 방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되어갑니다. 그러니까 이제 죄짓고자 하는 욕망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유혹이 옵니다. 유혹이 야, 어떠냐? 이제 뭐 꼭 그렇게 살아야지 되냐. 좀 어떠냐. 술 한번 먹어봐. 그렇지 않으면 야, 바람한번 펴봐. 그렇지 않으면 야, 왜 그러고 사냐. 너도 이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데 너도 한번 이제 광 좀 한번 내봐. 그래도 사장이잖아. 너 이만한 지위에 올랐잖아. 너 만한 사람이 없어. 왜 그러고 살아. 너도 이제 이렇게 한번 사람들 앞에 보란 듯이 이렇게 해봐. 유혹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적절히 이기면 괜찮은데 그게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유혹이 그렇게 해봐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 속에 죄가 아예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는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성화되어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유혹합니다. 그것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거의 잠재되어 있던 것이 막 이렇게 긁으면서 계속해서 다시 돋아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만한 종기가 났는데 긁으니까 이만해졌습니다. 수술하니까 이만해지고 더 수술하니까 이만해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 더러운 욕망이 마음과 영혼을 온통 더럽힌 가운데 죄의 지배 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시험의 목표입니다. 그런 게 옵니다.
또 하나, 옛날에는 세상 짐을 다 지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이제는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꾸 식어집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빛 가운데 살면서 순전하게 살아갈 때는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좋은 친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폭풍도 겁 없네,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낫도다. 그런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은혜생활을 제대로 안하면 그런 것들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게 됩니다. 요즘 무슨 광고가 나오는데 ‘보이는 것만 믿으십시오.’ 그런데 목사에게는 참 썰렁한 광고입니다.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니까 큰일 났습니다. 그럼 막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사람들을 자기의 종으로 삼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으로 삼으실 때에 사랑의 감화를 사용하셔서 그 사랑의 포로가 되게 하시지만 마귀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쌓여서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종의 영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가 마귀를 달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마귀와 화해하라, 마귀를 잘 달래라, 적당히 협상하라 그러지 않고 마귀를 항상 대적하라고 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신자들이 그러지 마라.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냐. 그렇게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그런 시험도 계속될 것이고 또 방탕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고치려고 노력해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버린 이 세상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전도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남아 있는 그 세상은 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마귀도 어떻게 할 수가 없고 그런 세상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우리에게 쪼그라들고 쪼그라들고 해서 조금씩 세상이 좁아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똑같습니다. 그 두 가지 영향이 계속 오는 것입니다. 방탕에 대한 유혹과 그 다음에 염려와 근심을 가져다주는 그런 시험이 계속 옵니다.
그럼 해결의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들이 공격할 때에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일차적으로 공격하고 우리의 영혼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거룩해져가서 유혹이 와서 우리를 방탕하게 흐르도록 끊임없이 유혹을 해도 그렇게 타락하고자 하는 욕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너무나 많이 죄 죽임이 되었기 때문에 반응을 안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 술도 많이 먹고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고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성화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술 먹자고 그래도 유혹도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나쁜 짓 하자고 그래도 안 합니다. 왜 그것이 가져다주는 괴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짐으로 말미암아 죄를 택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에 비하면 그 죄를 택하고 잃어버려야 하는 하나님과의 이 은혜의 세계가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유혹이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 됩니다. 끊임없이 유혹을 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봐라, 높은데서 뛰어내려봐라, 나한테 절해봐라. 그럼 세상을 다 줄게. 그랬더니 예수님이 넘어갔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강도를 높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끊임없이 죄 죽임의 삶을 살고 성결한 삶, 성화의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세상의 유혹의 물결이 점점 강해져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문제입니다.
또 그래,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그래. 보이는데 상황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는 큰일 났습니다. 이제는 시련을 만난 것입니다. 환난을 만났고 이제는 누구도 도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세계는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렇게 환난과 시련이 폭풍에 에워 쌓였는데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 나 같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그 눈물겨운 사랑,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이 내 가슴속에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는 것은 믿으려고 하는데도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을 보면 내가 지금 웃고 박수나 치고 그러면서 은혜나 받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런데 그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것 보십시오. 이게 성화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세상이 너무나, 아니 세상에 무슨 기대를 걸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세상에 무슨 기대를 걸었습니까? 세상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구속받는데 보태준 것이 있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뭘 기대하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어떤 세상을 기대하는지, 한때는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해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가 되니까 다 동성연애하고 가난할 때는 상상도 못했던 죄악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영원히 우리 친구가 아닙니다. 그러면 좀더 하고 싶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이 성화에 있어서 기도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 그럼 이제 방탕하고 타락하도록 유혹이 오고 그래서 꼭 뭐 술 먹고 방탕한 그런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하기에 부적합한 상태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이 다 유혹이고 시험입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 오고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시험이 계속 들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밀려오게 되면,
내가 사실은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고민이 많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야지 됩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눈뜨자마자 회사 생각을 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회사 생각합니다. 1개월이 지나면 한달 실적 때문에 고민합니다. 일사분기가 지나고 나면 분기 경영실적을 보면서 고민합니다. 거래처는 어떻게 해야지 되나. 돈은 어떻게 받아야지 되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야지 됩니다. 어째든 그런 시험들이 계속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은 아까 말씀드린 데로 피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나를 끌어내리려고 하고 밀어 넣으려고 할 때 이끌려지고 그리고 밀려들어올 때 그것을 받아주는 그 무엇, 그 무엇이 내 안에 있습니다. 불신앙, 죄가 있습니다. 남아 있는 잔존하는 죄가. 그래서 죄 죽임을 많이 실천해서 죄를 많이 죽이고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상당히 견고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갈대처럼 그렇게 연약하지 않습니다. 잘 흔들리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렇게 동창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도 의인은 “그러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흔들리는 것이 무슨 숙명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동창회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다. 왜 끊임없이 유혹이 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이 죄가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도의 유혹 가지고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정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가끔 유혹이 올 때 이런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합니다. 유혹이 올 때 유혹은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들이 거기에 반응을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거래가 너무 기우는 거래입니다. 주겠다는 즐거움은 요만큼밖에 안되는데 그런데 그 즐거움을 덥석 물면 빼앗길 그 신령한 기쁨은 너무 큽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거래를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이 속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죄를 택하고 죄에 자기를 넘겨주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뺏길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차피 하나님에 대해서는 지금 차가운 거절 감밖에 안 느끼고 그리고 말씀을 읽어도 들어오지 않고 신령한 기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 믿고 예수님 손에 붙잡힌 것 자체를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잃어버려야지 되는 것보다도 죄가 주겠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커 보입니다. 그러니까 거래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죄를 쉽게 집니다. 왜냐하면 그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빼앗길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이렇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착각입니다. 죄는 단순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해만 깨트리는 것, 그게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로잡아서 완전히 종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죄의 목표입니다. 시험이 밀려와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해결의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이 죄가 문제가 아니라 밖으로 들어오는 유혹과 시련, 이런 것들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 유혹에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고 의지적으로 그 유혹에 대해서 순종하는 게 죄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아니 이렇게 고개를 돌렸는데 나체 사진이 보이는데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회개할 거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음욕을 품고 무릎을 꿇었으면 회개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돌렸는데 돈 보따리가 보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훔쳐야 되겠다는 마음이 가득 찼으면 벌써 그것이 마음속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유혹을 받으면 유혹의 그 목표 자체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죄를 끌어내어서 결국은 욕심을 잉태하게 하고 그것을 산출해내어서 애 낳듯이 계속해서 그 죄를 실행에 옮겨서 낳게 하는 게 목표입니다. 애를 배속에 넣고 다니는 9개월째가 편합니까, 낳아놓고 한 6달 쯤 지난 다음이 편합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배 속에 있을 때가 편한 것입니다. 그냥 엄마 자면 애기도 자는 것입니다. 엄마 먹으면 애기도 먹는 것이고, 엄마가 미국에 가면 애도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낳아놓으면 안 그렇습니다. 엄마는 자는데 이 애는 웁니다. 엄마가 여기 아기를 갖고 있으면 본당으로 들어가서 예배드려야지 그리고 내려옵니다. 그런데 낳아놓으니까 자기 의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저기 유아 실에 가서 예배드려라 하니까 나는 못 간다고 합니다. 자기 의견을 내세웁니다. 아빠 여기서 예배드려야지 된다고 하면 그래도 나는 갈수 없다고 합니다. 애가 점점 커지면 그런 식으로 자식 교육하지 말라고 대듭니다. 그런데 그게 수십 명을 낳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자기 힘으로 통제가 안 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는 잉태하려고 하고, 유혹은 우리 안에 죄를 잉태시키려고 하고, 잉태된 죄를 키우려고 하고, 키운 죄는 반드시 출산하려고 합니다. 출산하고 나면 그 죄는 각각 자기 뜻대로 돌아다니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성품을 볼 때 그 사람이 살인할 사람입니까?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데, 그럴 위인이 안 됩니다. 그런데 살인합니다. 왜 죄가 산출되니까. 다윗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다윗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건은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 속에 깃들여있는 죄의 경향성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죄의 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죄와 정욕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여기서 헷갈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를 해주겠으니 들어보십시오. 죄는 정욕 자체가 아닙니다. 죄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반항하고 거역하는 경향성입니다. 그런데 이 경향성에 힘을 점점 더해주는 그 영양제가 있는데 그게 정욕입니다. 그러니까 정욕이 계속해서 속에서 울컥 울컥 솟아오르고 그것들이 통제가 안 되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하는 이 경향성, 죄라고 이름 지어 지는 이 경향성이 점점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한 힘을 얻게 되어서 거기를 저항하면서 살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우리들이 개울을 건너간다고 그럴 때 호수를 건너갈 때 요만큼 찰 때 건너갈 때는 별거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이 잔잔하게 흐를 때 건너가면 몸이 이렇게 움직입니다. 장마가 지든지 해서 급류가 내려올 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 물을 거스르려고 하면 그 물이 우리를 밀어서 넘어트립니다. 그런 강력한 힘을 정욕이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를 죽이고자 할 때 죄를 죽이려면 죄에게 그런 힘을 공급해주는 먹이가 되는 정욕을 계속 죽이면 죄의 경향성들이 약화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영양실조가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99년도로 기억이 되는데 패역을 고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불순종하지 말아야지 됩니다. 불순종이 계속해서 그 패역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속에서 그런 죄가 정욕을 먹으면서 정욕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샘솟듯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보는 데서 자극을 받아서 정욕이 생겨나고, 듣는 데서 자극을 받아서 정욕이 생겨나고, 생각하는 데서 생겨나고 이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온천이 솟아나듯이 계속해서 뭉게구름처럼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공급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욕이 솟아오르는데 이게 계속해서 죽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사기 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찬송가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부르면서 간음하기 위해서 침대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은혜가 끊어진 곳에서 죄가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내 영혼에 더 이상 은혜가 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는 이미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아직까지 바닥이 많이 남았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정욕들을 적절하게 다루어야지 됩니다. 그것이 곧 죄와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왜 죄는 끊임없이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그 정욕을 먹으면서 강해지려고 하고 그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자꾸 자기 마음에 있는 욕구들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싸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의 작용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령께서 우리들을 모든 불결로부터 본성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가 정체가 무엇인가? 이게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라고 하는 게 무엇입니까? 존재 그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그게 적대감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상이군인용사이십니다. 전쟁 때 중공군과 싸우다가 총에 맞으셨습니다. 이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아주 철두철미한 반공정신이 있으십니다. 요즘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아버님은 신문보실 때마다 열을 받으십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려고 하냐고, 그게 무엇인가 하면 동족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빨갱이라고 하는 적대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 해소되기는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또 그 세대 분들이 공산주의 그 이념 갈등을 겪으면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자기의 자식들, 자기의 부모, 자기 동족들을 눈으로 생생하게 본 것입니다. 양쪽 다 마찬가지겠지만 눈으로 다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적대감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적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싫다. 나쁜 자식, 나는 네가 보기도 싫다. 그래도 계속 잘해주고 위해서 기도하고 그러면 마음이 변합니다. 그러면 나를 대적하던 사람이 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사역하면서도 그런 것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속에 있는 적대감은 달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충신이라고 해서 큰 묘를 나라에서 지어서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순 나쁜 놈입니다. 죽여 버리려고 하니까 벌써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끝내야지 되는데 그런데도 적대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덤을 파헤쳐서 끄집어내서 그것을 ‘부관참시’라고 하는데 아예 관속에 있는 시체를 짓이겨버립니다. 그런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런 죄들이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유혹의 자극을 받으면서 이것들이 끌어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정말 내가 아는 사람은 너무 신실하고 정직하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속에도 죄가 남아 있을까요? 물론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적대적인가?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입니다. 죄가 하나님 자신이 싫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끊임없이 죽이고 없애려고 하더라도 완전히 그것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잘 기억하십시오.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많이 애를 썼는데도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죄를 나도 미워하고 그리고 그 죄가 싫고 그 죄대로 살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싸웠는데도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죄와, 내가 그 죄가 제공해주는 어떤 즐거움이 좋아서 버리지 않고 스스로 남겨두고 있는 죄는 두 가지는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독약과 그 다음에 약의 차이 정도의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무서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첫째는 하나님 자신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열망, 하나님의 영광, 심지어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세우신 은혜의 수단, 하나님이 세우신 은혜의 방편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계획 이런 모든 것들에 적대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자가 구원받고 나면 지금 말씀드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인생이 구원받은 다음에 어떻게 가야지 되는지에 대한 길이 설정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사는지를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왜 사냐 그러면 먹고 마시기 위해서 산다. 내 배가 내 신이다. 그러고 삽니다. 그런데 이제 믿는 사람들은 더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웃깁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내셔서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는 그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향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나는 지금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애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워낙 강의가 신통치 않을 때는 학생들이 어떻게 합니까? 분명히 경제학 시간인데 수학교 가서 펴놓고 공부합니다. 그러면 머리가 혼돈이 오기 시작합니다. 들리는 것은 지금 경제학이 어떻고 우리나라 경제가 어떻고 하는데 여기서는 미분적분 풀고 있습니다. 정치학 교수가 하도 강의가 후지니까, 차라리 경제학 책 꺼내놓고 요즘 정치가 어떻고 그러는데 여기는 주가 동향이 어떻고 저저고 읽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동이 생깁니다. 하다못해 수업을 들어도 이게 안 맞으면 머리 속에 혼돈이 생기고 끝나고 나면 머리가 아픈데 하물며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감으로서 구원의 참됨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고 신분이 그런데,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또 사랑했었는데,
그런데 내 안에서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사랑과 애정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그렇지만 나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 예수님이다. 이게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성령의 음성이 아니라 신자가 죄를 짓고자 할 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고 하는 그 마음을 갖게 되면 담대하게 그 죄를 지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 죄를 지을 상황에 있지만 그러나 내 사랑은 이 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 넘어지고 깨어져도 주님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복잡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쉽게 딱 깨트려서 이야기하면 이다음에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거야. 그런 고백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인간이 죄를 지어야지 되겠다는 욕망이 증폭될 때는, 인간이 암시하는 그런 생각이 지금 짓는 죄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할 텐데. 네가 이렇게 죄를 지고도 너는 그래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 없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속삭여줌으로서 그렇게 미래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분량에 비하면 지금 짓는 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서 담대함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받고 다 성화가 되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죄를 아는 지식이 너무 없습니다. 죄를 아는 지식이 부족해도 워낙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 한분에 대한 순결하고 열렬한 사랑을 가지면 또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목말라서 액체를 마시고 싶어도 여기 해골이 붙어 있으면 안 먹게 됩니다. 왜 먹으면 죽는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지식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가 그렇게 정체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활동을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방식이 둘로 나누어지는데 그 방식이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입니다. 반감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싫으니까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것도 싫고, 그 사람이 입은 옷도 싫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색깔도 싫고, 그 인간이 앉았다가 일어난 자리도 싫고, 그 인간이 서서 오줌 누는 방향도 싫은 것입니다. 모든지 싫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반감이 무엇과 관계가 있는가 하면 자기가 그렇게 반감을 품는 존재 자체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경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자기가 벌써 수용성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연합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해도 좋은 것입니다. 자는 것도 사랑스럽고, 우리 할머니가 옛날에 그랬습니다. 밤에 자면 와서 부채질해주시고 밥을 많이 먹는 것도 좋고, 절제를 하는 것도 좋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도 사랑스럽고, 노는 것도 씩씩해 보이고, 그런데 일단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하면 피곤해서 피로를 풀기 위해서 누워있으면 저거는 매일 자빠져서 뭉개나. 공부하면 잘난척하네. 그런데 죄가 그렇게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신자가 할일입니까? 지금은 예수 사랑해요. 나 주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 주께 드리네, 그러면서 이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찬송도 영혼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은혜의 질서의 상태로 들어가고 죄 죽임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진짜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신령한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그런 반감이 자신 속에 내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따라가는 것 같아도 절대로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정서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안 합니다.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주 강력한 그런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어느 지체가 교회를 떠났는지, 그런 말을 하는데 열린 교회는 예배 시간이 자기 체질에 너무 안 맞는데. 성도들이 왜 그렇게 우는지. 분위기가 너무 우울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내가 그랬습니다. 노래방에 가면 되겠네.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이 울든지 말든지 그게 무슨 문제인지. 웃든지 노래하든지 울든지 통곡하든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나. 무슨 말씀이 선포되었나. 그게 중요한 것인지. 주위에서 울든지 무슨 울고 싶으면 우는 것이지, 안 울고 싶으면 안 울고 자기 마음이지. 그것을 억지로 합니까? 그런데 무슨 말씀이 들렸나. 이게 아닙니다. 이런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한 그런 것들도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고갈되어 있으면서 그래서 그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는 나아가기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바닥으로 내려간 사람에게 그래서 한참 강퍅해진 사람에게 나 하나님께 은혜 받았는데 그러면서 한참 이야기하면 돌아서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왕년에 은혜 안 받아본 사람이 있나. 대게 잘난척하네. 그리고 갑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에게 가면 굉장하지요. 정말 나도 그랬어. 나도 요즘 그래. 아! 너 정말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구나. 아! 정말 나도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경험하고 사는데 아!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죄가 활동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대적입니다. Opposition입니다. 대적입니다. 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맛서는 것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딱 맛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설복당하고 이러는 게 아니라 설복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선택한 죄가 있고 그 죄의 경향성이 살아 역사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도 그것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성령을 소멸하는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성령을 너무 좋아하고 은혜 그 자체가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그게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는 자기 나름대로 법을 가지고 있는데 끊임없이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자기의 경향성을 강화해서 인간이 이 죄의 손가락 하나에도 움직이는 죄의 거의 노예 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계획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들어오면 그 은혜가 끊임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인격적인 감화를 통해서 그래서 은혜가 또 다시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맛서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런데 신자 안에서는 사실은 은혜의 법이 불리한 게 아니라 죄의 법이 불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지 못하게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죄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원리들을 대적하는데 그 활동할 때 죄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담대함이고 두 번째는 광기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열렬함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죄가 역사할 때, 그래서 유혹을 받으면서 죄가 계속 자극을 받으면서 끌어내어지면 그 죄가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담대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그래도 죄가 자기 속에서 많이 죽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두려워서 차마 지을 수 없었던 죄를 담대하게 짓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은혜를 받으면 소심해집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게 신앙적으로 양심에 어긋나지 않을까? 그렇지만 나중에 이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죄가 강하게 역사하게 되면 그런 고민 같은 게 완전히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마비상태가 되니까 담대하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무섭게 죄를 짓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가 계속해서 그렇게 담대함을 갖는 것입니다.
담대함을 갖는 이유는 그럼 무엇일까? 인간이 죄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질 때 거기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어 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이 거의 유일한 브레이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다 지을 수 있어도, 환경이 다 허락해도 죄를 짓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자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 죄를 토설하지 않고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죄를 토설치 않고 그냥 간직하고 있을 때는 이 속에서 막 그것들이 타올라서 여름가뭄같이 영혼들을 막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토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혹은 적당한 사람에게 나는 이런 죄를 지었고 나는 정말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고 토설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느 정도 자유가 옵니다. 그게 죄책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겼을 때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는 것입니다. 부정직한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죄가 강력해지게 되면 커다란 죄에 대해서도 사소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합입니다. 왕이 되었는데 나봇의 포도원이 너무 갖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민을 합니다. 왜 고민합니까? 죄책감이 있으니까 그 죄책감이 억제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뺏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이세벨은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냐고 때려죽이고 뺏으면 되지. 그리고 그것을 뺏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죄가 담대함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은 죄책감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죄가 반복되면 죄책감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은밀하게 짓던 죄를 공개적으로 짓게 됩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유혹이 올 때 수줍어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유혹을 향해서 언제든지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받아들이고 시험이 오면 시험을 빨아들입니다. 싹 빨아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을 주는 것입니다.
죄가 역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광기입니다. 광기가 무엇인가 하면 미친 기운이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지적을 받았던 문제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몇 만 명이 죽고, 그리고 나라가 망하고 그러는데도 그 광경을 뻔히 보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말세가 될 수록 죽는 것 자체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TV에 나오는데 밤중에 헬멧도 안 쓰는 폭주족들이 있습니다. 소음기 떼어내고 부왕! 하고 막 120킬로씩 그렇게 달립니다. 오토바이도 내가 보기에 별로 좋은 오토바이도 아닙니다. 저도 오토바이를 타봤습니다. 그런 속도를 감당해나갈 수 있는 그런 오토바이가 따로 있습니다. 그렇게 막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뒤에서 여자 아이들이 타고 막 소리를 지르면서 타고 갑니다. 기자가 세워서 그리고 헬멧이라도 쓰고 타야지 되지 않냐. 그러니까 뭐 어떠냐 하기에 다치지 않겠니? 했더니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가 하기야 지난달에 내 친구가 타다가 굴러서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고, 뒤에 타는 여자 아이에게 너 이렇게 타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여자 아이가 굉장히 맹랑했습니다. 한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놀다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데요. 화끈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지 뭘 그렇게 쫀쫀하게 살아요. 보십시오. 죽음에 대해서그만한 나이에 두려워해야지 정상이 아닙니까? 죄가 가져다준 담대함입니다.
신자들 중에서도 죽는 것에 대해서 하찮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바울타입니다. 너무나 그리스도에 대한 연모의 정이 강하기 때문에 삶의 강을 건너서 빨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너무나 현재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 죽음의 강을 건너고 싶다는 사람과, 죄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에이 콱! 죽어버려. 이러는데서 오는 죽음을 하찮게 생각하는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생사를 초월한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광기가 있습니다.
광기뿐만 아닙니다. 뭐가 있는가 하면 열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와서 한번 우리의 약점을 물면 죽어도 안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죄는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이게 우리 몸의 일부처럼 되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 죄가 그런 죽기까지라고 하는 그런 열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리라.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런 집요한 열렬함을 가지고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한번 죄가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고 그것이 구체적인 욕망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착상이 되는데 사고의 영역을 지배해서 우리의 상상을 좌우하고 우리의 삶을 죄가 가지고 있는 소욕을 따라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어서 조정할 수 있는 상태로 들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웬만해서는 그것들을 없애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교회에 오고 이런 정도의 신앙생활로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야! 그럼 우리가 1시간 가까이 이 죄가 그렇게 집요하고 엄청난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라고 하는 것은 뭔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그럼 도대체 이 자유는 뭔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이중적인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상태와 신분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신분이 자유인으로 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과 영혼에 내적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태까지 1시간 동안 설명한 것에 의하면 이 죄가 거의 숙명적으로 신자들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쉴 때도 죄는 역사하고 우리가 놀 때에도 죄는 어떻게 하든지 정욕을 먹고 강력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커집니다. 왜 만화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공룡 같은 게 막 쇠붙이 같은 것을 먹으면서 커지는 것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커집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영혼의 자유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것을 획득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임으로서 그런 자유들이 극대화되고 실효적으로 우리 안에 주신 그 자유의 법들이 실효적으로 역사하면서 마음과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잘 들으십시오. 오직 기도만이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죄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죄의 정체,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기 때문에 그 적대감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 한 죄는 모든 것을 양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일마다 가방을 들고 교회를 가는 것 가지고는 죄가 자극을 안 받습니다. 그것이 죄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를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가방을 들고 주일마다 교회를 가는데 죄가 충분히 그런 생활과는 공전할 수 있습니다.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또 목사가 되고, 일군이 되어도 그렇게 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죄가 어떤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본질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 한, 죄는 참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고 그리고 그런 것 문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실천하고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정리가 잘 되고, 주님의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고, 또 봉사도 열심히 하고, 그리고 꼬박꼬박 십일조 생활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삶 아무리 해도 그것을 죄는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죄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물론 환경적으로는 저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 속에 있는 죄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웃기는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착실한 사람이 그런 죄에 빠질 수 있었을까? 착실하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왜 죄 가운데 착실하지 않고 나쁘게 사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착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남이나 다른 사람이나 당신 참 훌륭합니다. 자꾸 그런 이야기도 서너 번 들으면 그러면 진짜 자기도 생각할 때 괜찮아 보입니다. 이만하면 뭐 흰죽사발 개 할타먹은 것같이 괜찮습니다.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수련회 참석하고, 열린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잘하고, 꼬박꼬박 십일조 생활하고, 그리고 주일 잘 지키고, 교회행사 안 빠지고, 교사도 열심히 하고 그래도 그것으로서 그가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도 그것으로 죽지 않습니다. 죄는 다 이해합니다.
만약에 죄가 그런 것들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가 하면 외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그러셨습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길이 있고 언덕이 있으면 깎아서 이렇게 평지로 만들어서 시체를 집어넣고 문을 돌로 막고 회칠을 했습니다. 겉에는 회칠을 했는데 속에서는 뼈가 썩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심한 이야기를 하자면 새벽기도를 해도 죄는 안 죽습니다. 더 심하게 금식기도해도 안 죽습니다. 열렬히 찬양해도 안 죽습니다. 절대 안 죽습니다. 마치 더러운 병균을 빨간 보자기에 싼다고 죽겠습니까, 노란 보자기에 싼다고 죽겠습니까? 유리그릇에 넣으면 죽겠습니까, 쇠그릇에 넣으면 죽겠습니까? 냉장고에 넣으면 죽겠습니까? 끓이기 전에는 안 죽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런 죄가 있는데 여러분들은 새벽기도해도 죄가 안 죽는다고 하니까 이상하다고 그러는데 새벽기도에 아무리 가서 엎드려서 졸고 나오고 기도도 횡설수설하고 기도를 하면서 생각은 다른데 가있고 그러는데 죄가 왜 죽습니까?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죄와 맛 붙어서 그 죄를 피 흘리도록 그 죄를 칼로 찌르는 작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래서 거기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가 그런 열렬함을 가지고 있고, 죄가 그런 광기를 가지고 있고, 죄가 그런 담대함을 가지고 역사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마치 자기의 힘에 부치는 사람과 씨름을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지 됩니다. 엎드려서 기도되면 하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개인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안타까움은 무엇인가 하면 기도를 씨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가 받는 은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렬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도에 대해서 열렬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이렇게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깨달아집니다. 그 다음에 기도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이제 뭐가 죄라는 것이 분리현상이 일어나서 죄가 파악이 됩니다. 그런 기도가 계속 열렬하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죄를 향해서 칼로 그 죄를 찌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하자면 이게 칼로 콱! 쑤셔서 시뻘건 피가 확 솟아나야지 되는데 그런데 한두 번 칼 맞았다고 해서 죄가 그렇게 간단하게 죽지 않습니다. 진짜 짓이겨서 막 찔러도, 찔러도 안 죽는 괴물처럼 그 피가 쏟아져도 안 죽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죄가 있는데 한번 툭툭 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막 치니까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게 자기의 생명의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둡니다. 그리고 또 기도 시간에 한번 막 흔들어봅니다. 그런데 낙태는 안 됩니다. 그냥 계속 살아서 그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자랍니다. 성경시간에 또 한번 막 흔들어보고 툭툭 찔러봅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굉장히 하나님 앞에 잘 살아보려고 애는 쓰는 것 같은데 성화의 진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게 말만 그럴듯한 사람으로 이렇게 사람이 반질반질하게 달아갑니다. 아! 그거 나도 배웠어. 아! 그 정도야 내가 알지, 내가 말씀을 몇 년을 받았는데. 이러면서 계속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 자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자극하지 않고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잘못된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무엇으로도 안 죽습니다. 잠재울 수도 없고 흔들고 목을 조르다가도 내버려두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 속에 양심상으로 느껴지는 이런 죄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런 영혼의 상태가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들어오는 은혜가 없지는 않은데 이 속에서 그것들을 빨아 없애버리는 죄의 영향력이 너무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못 받는 것은 아닌데 은혜가 마음에 심겨지기가 무섭게 그 죄의 법에 의해서 약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은혜가 거룩해지도록 삶을 살아가도록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는데 은혜를 계속 집어넣으면 죄가 더 이상 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것까지 없어지면 늘 내가 이야기를 합니다. 죄 가운데 있어도 은혜는 받으려고 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계속 공급해주면 죄가 더 역사는 안 합니다. 그런데 이것까지 끊어지면 그 다음에 마음 놓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은혜는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삶이 안 변하고 영혼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은혜를 받는 것은 사실인데 그 은혜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데 쓰여 지는 게 아니라 자라고 있는 죄를 현상 유지하는데 거의 다 소진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 은혜를 이야기할 때 전투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바 된 하나님의 사람인데 내 안에 있는 이 지긋지긋한 죄가 자라서 그래서 역사하고 있고 그리고 은혜가 핍절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나의 정욕을 솟구치게 해서 그 정욕을 받아먹고 불순종으로 그것들을 강화시키면서 점점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내 안에. 그런데 그렇게 형성해 나아가고 있을 때에 그 죄와 더불어 싸워야지 되겠다고 하는 결의는 없이 그냥 말씀에 은혜를 받고 따뜻한 교제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상담을 통해서 은혜 받고, 받으면 다 받아서 그 입에다가 쓸어 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아도 그게 흘러넘쳐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는 공격적인 삶에 쓰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그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죄와 더불어 싸워야지 되는데 죄와의 싸움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죄와 싸울 때 마지막으로 죄에다가 칼을 꽂아서 붉은 피를 쏟아내게 하는 그 행동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 속에서 죄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죽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합시다. 정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정말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성화가 되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해내신 구원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죄를 죽여본 적이 있습니까?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정말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고 죄 때문에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그 죄와 맞서서 싸워본 적이 있습니까? 죄가 담대한 것처럼 여러분도 담대해본 적이 있습니까? 죄가 여러분들을 향해 광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들은 미친 듯이 그 죄를 미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죄가 열렬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 죄를 죽이기 위해서 열렬함을 가지고 그 죄를 맞서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번에 우리 5월 달에 우리의 신앙생활, 영적상태에 대한 앙케트 낸 것을 분석했는데 이만한 두꺼운 책 하나가 됐습니다. 도서관에 비치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고 상당히 공정하게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이 참 제법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온 교인 중에 거의 70%가 매일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온 교인의 65%가 예배 이외에 이미 지나간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혹은 빌려서 가서 한 주일에 하나 이상씩 듣고 있고, 온 교인의 60%이상이 한달에 한권 이상씩 신앙서적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교인의 78%가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15%정도는 아주 생애적인 은혜를 받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은 기도생활입니다. 100%로 볼 때 기도할 때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13.5%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머지 66%는 너무 기도하고 싶은데 잘 안 되서 고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그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렇게 여러분 속에 있는 궁극적으로 살아 역사하고 있는 죄를 내버려둔 채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 원하고 하는 그런 삶이 결국은 5-10년을 계속해서 살아도 성화에 있어서 어떤 깊은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유념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이 보자기에 싸고 저 보자기에 싸고 이렇게 어르고 저렇게 어르는 것으로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죄와 맞붙어 싸워서 그것들을 찔러 피 흘려 죽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한 성숙에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모든 고민이 마치 은혜가 그러한 것처럼 아침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은 죄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데 어느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현저한 방법은 자기 안에 있는 그 죄를 깊고 간절한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실제로 그 칼로 그 죄를 찌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해 진실해지고 싶다고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죄를 그런 식으로 다루려고 결심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이 은밀하게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에 대해서 찬동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찬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러나 지금은 죄를 짓고 있지만 하나님을 나는 없이 살수 없다고 하는 게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지금 자기가 짓고자 하는 죄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고 그리고 반감과 대적이고 그리고 열렬함과 광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역사하는 죄의 활동인데 그것을 좋아서 택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사랑을 빙자해서 내가 앞으로는 이렇게 주님을 사랑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죄를 범해도 좋다고 하는 사악한 담대함을 더하는 수단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이제껏 까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견해가 너무 하급 적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기도는 일차적으로는 구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기도를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로 이끄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오직 하늘 아버지께 로부터만 오는구나. 내가 가서 훔치고 내가 돈벌어서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 움켜쥔 이것은 이 땅의 자원입니다. 지상자원입니다. 그러나 내가 간절히 기도해서 주님이 내게 주신 소득은 하늘자원과 함께 온 지상의 자원입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손에 피 묻히고 번 돈 만원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주님이 주신 일자리를 가지고 감사해서 노동을 해서 얻은 돈 만원은 똑같은 돈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따라온 돈입니다. 틀립니다.
그럼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죄를 정말 우리가 죽여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그리고 말씀을 많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펑펑 울고 그리고 내가 정말 생애적인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죄는 죽지 않습니다. 정체를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래 나 여기 있다. 죄가 큰일 났다. 내 정체가 탄로 났다. 무지하던 이 인간이 진리의 말씀 자유가 있는 그 복음을 깨닫고 내 정체를 이제 파악하게 됐다. 이제 들켰구나. 그런데 공격을 안 하는 것입니다. 가끔 와서 한번씩 흔들어보고 툭툭 쳐보고는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빛이 비치면 죄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나 있다. 어쩔래. 어차피 너는 내 편이 아니냐.
그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많아도 성화의 진전이 거의 없거나 매우 더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밀려올 수가 없고 그런 사랑을 경험해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성령 안에서의 능력 있는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는 그런 진실한 죄 죽임이 없이는 획득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 10년 동안 수십 년 동안 운명처럼 알면서 자기에게 주인노릇하면서 살던 그 죄인데 빠른 시간 안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서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평생 숙명처럼 그 죄에 사로잡혀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이 되어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내 안에 죄를 말씀을 통해 파악하고 이것을 내가 정말 죽여야지 되겠다. 그리고 하나님 내 안에 어떻게 이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그 구속의 은혜로 속죄함을 받아서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예수 십자가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함을 받았고 거미줄 같은 믿음을 붙들고 살아온 인생의 길이지만 주님의 사랑에 사무칩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내 안에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반감과 대적함으로 역사하도록 내가 내버려두고 그 대적이 담대함과 광기와 열렬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내 마음과 영혼, 이윽고는 내 삶까지 짓밟도록 내가 그것에 내 삶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이것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이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죽일 수 없었던 그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검이 되어서 그 어마어마한 죄의 세력들을 찌르기 시작하는데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 피 흘려 쓰러진 그 죄의 시체를 밟으며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우리 안에 있는 이 자유가 얼마나 놀랍고 우리가 정말 믿음의 원리, 은혜의 법칙을 따라서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는 것이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온 교인들이 새벽마다 이렇게 모여서 정말 가슴을 찢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그런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루실 그 위대한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뭘 주신다고 하는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기도에 대한 유아기적인 이해입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도 자체를 거룩의 수단으로 활용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확 빛을 받아서 내 안에 죄를 발견하고 무릎을 꿇고 마음을 바치는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들이 숙명처럼 생각했던 죄들이 얼마나 빨리 죽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자유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기도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거룩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여러분들을 정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고 주님이 오늘도 복음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해서 예수 안에서 주님이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주신 그 보혈,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우리에게 보내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들 안에 있는 수많은 죄들을 죽이고 거룩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기도와 열렬함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 하시니라”(눅21:36)
어제 설교를 주의 깊게 들으신 분들은 틀림없이 이런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여태까지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그 무엇을 얻어내는 수단으로만 생각을 했지 성화를 위해서 이 기도가 꼭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은 우리들이 안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면 기도는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기도와 성화를 위해서 효능이 있는 성화용 특별한 기도가 따로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물론 아무 생각도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만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항상 제가 이야기하듯 추리소설을 읽는 것같이 그렇게 들어야지 됩니다. 논리적으로 사고를 하면서 들어야지 됩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진짜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뭔가를 얻어내는 용으로만 사용을 했지, 내 자신이 거룩해지는 용도로서는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면서 돈도 있고, 직장도 있고, 사업도 별일이 없고, 가족도 건강하고, 그러면 기도안하고 그리고 큰 환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금식을 한다. 기도원으로 올라간다. 철야를 한다. 새벽기도에 나온다. 그렇게 합니다. 기한부입니다. 언제까지? 문제 해결될 때까지,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하고 다시 노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그런 기도생활을 잘못된 생활이었고 그러면 성화를 위한 기도생활을 내가 안했구나. 그럼 오늘은 틀림없이 목사님이 성화용 기도생활이 뭔지에 대해서 진수를 보여줄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오신 분들은 모두 제가 두 글자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꿈 깨어야지 됩니다. 청탁용 기도와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게 됩니다. 기도가 죄를 죽인다고 말할 때 기도가 죄를 죽이는 그 효과는 그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그 기도에 몰입하는가에 의해서 기도가 죽는 것입니다. 그럼 이해가 안 가면 한걸음 더 나아가겠습니다. 나를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해주십시오. 구원의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주십시오. 이 땅에 부흥을 주십시오. 이런 모든 기도는 내용상으로 볼 때에 거룩한 기도입니까, 속된 기도입니까? 거룩한 기도입니다.
또, 하나님, 아침에 똥을 잘 누게 해주십시오. 변비에 걸린 사람들은 그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저도 변비가 자주 오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 먹을 것이 없습니다. 쌀을 주십시오. 직장에서 잘렸습니다. 새 직장을 주십시오. 사업을 하다가 들어먹었습니다. 하나님, 뭘 해야지 될까요? 애가 하나 있는데 정말 속 썩이는데 사람들은 우리 아들보고 비행청소년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이런 기도제목들은 내용으로만 보면 거룩한 기도제목들입니까, 세상적인 기도제목들입니까? 이 땅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오늘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앞에 이야기한 그 거룩한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를 해도 죄가 안 죽을 수 있는데 뒤에 나오는 그 세상적인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죄가 죽을 수가 있습니다. 아멘을 하고 싶어도 뭘 알아야지 하지. 그럼 그것은 어디에 달린 것일까요? 그러니까 교리적으로 죄가 거하는 자리가 입술이라면 그 거룩한 제목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 거룩한 기도의 제목들을 들으면서 죄가 죽어버릴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런데 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 속에서 거룩하고 신령하고 세계 선교와 아버지의 영광과 그 아름다운 그 교리적으로 합당하고 올바른 기도들이 수없이 내용적으로 쏟아져 나와도 죄는 그런 것들에 의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 기도의 제목을 따라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하는 이런 속에서 죄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똥 잘 누게 해주십시오. 오늘 먹을 것 주십시오. 직장이 잘렸습니다. 사업이 거덜 났습니다. 어떻게 좀 먹여살려주십시오. 우리 식구들 굶습니다. 이런 기도제목들은 세상적으로 보이고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기도지만 그 기도를 하더라도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열렬하게 드려질 때는 기도의 제목과는 상관이 없이 그 기도를 할 때 죄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깊이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마음에 어떤 출렁거리는 마음속에서의 변화가 없이 흘러나오는 모든 기도는 성경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의해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한,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죄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충분히 그런 기도의 자세와 더불어서 죄가 함께 공전할 수 있고 그런 기도생활이 죄인 자기 자신을 위협하고 헤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의 입장에서는 그런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훨씬 죄가 거하기가 좋습니다. 기도를 아예 안 한 사람들은 기도를 안 했다는 자책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거의 기도한 적이 없는데 자신은 늘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자동차가 더러워지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으면 터널식 세차기에서 세차를 해줍니다. 그런데 나는 취미가 이상해서 꼭 터널 속에 차를 타고 같이 들어갑니다. 거기 가만히 앉아있으면 내리시라고 하는데 나는 싫다고 여기 가만히 있겠다고 그리고 문을 닫고 거기에 가만히 있습니다. 그럼 막 물을 끼얹고 그 다음에 퐁퐁을 막 끼얹어, 그러고 나서 막 따르르 소리를 내면서 솔 같은 게 날아와서 몇 번을 지나가고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앉아있으면 소낙비가 막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안에는 물이 한 방울도 튀지 않습니다. 겉만 깨끗이 닦아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겉에서 별 난리를 하고 기도를 한다, 뭘 한다, 평생 새벽기도를 작정을 했느니, 뭐 금요기도회에 가서 철야를 했느니, 사십일 기도를 하느니, 개인 기도를 하느니 하는데 아무리 거룩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그 기도하는 마음의 작용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서 마음자체를 출렁거리는 어떤 변화를 동반한 가운데, 기도 속에 그 마음이 기울어져서 쏟아져 들어가는 그런 작용 속에서 죄가 죽는 것입니다. 새로운 교리를 배우고 그 다음에 말씀을 터득하고 또 새로운 교회 직분을 맡고 이런 저런 일로 봉사하고 그래도 죄는 안 죽습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 깨달은 것을 통해서 마음에 어떤 출렁거림이 오고 그 마음에 어떤 그 흐름이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 죄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경험을 보면 설교를 통해 깊이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진짜로 마음이 놀랍게 출렁거리면서 죄를 죽이는 본격적인 역사는 설교를 듣는 시간에도 물론 일어나고 성경을 읽는 시간에도 일어나지만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닫고 마음이 출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도하면 막 기도가 계속 마음에 출렁거리면서 기도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깨달음이 없이 마음이 고요합니다. 그런데 주여, 주여 하면서 출렁거리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의 간절한 열렬함이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청구용 기도와 그리고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죽는 성화의 작용은 그 기도가 어떤 제목이든지 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기도일 때 그 모든 기도는 성화의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돌아보면 어느 일정 기간동안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간절히 기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기도하는 제목을 응답받으려고 몸부림치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보니까 응답은 안 됐는데 엉뚱한 면에서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청구한 것은 하나님이 안 이루어주셨는데 그런 기도와 간구의 과정을 통해서 놀랍게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예화: 어느 전도사님이 일찍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내가 오랜 시 간 몸이 아파 간병하면서 아내를 위해 밤늦은 시간이 되면 늘 산에 기도하러 가 서 처절히 기도했지만 일년 만에 아내가 죽게 되자 그렇게 아내가 낫기 위해 열 렬하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내가 병들지 않았다면 도저히 자기 자신이 놀 랍게 변화되지 않았을 자기의 처지를 감사했다는 내용)
그러니까 이 예화가 청구용 기도와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제일 망가진 그리스도인은 기도하지도 않고 정해진 기도시간도 없고 기도의 의무자체에 대해서 아주 경시하는 것입니다. 더 덧붙이자면 기도에 총체적인 게으름에 빠져 있는 신자입니다. 아주 질이 나쁜 신자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확고하게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고 진짜 분명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가 힘드십니다.
기도의 의무를 총체적으로 무시하고 그리고 정해진 기도시간도 없고 실제적인 기도의 실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에 이미 죄악 된 경향이 득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든지 간에, 교회에 착실히 출석하든지 간에,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간에, 말씀의 빛을 왕년에 얼마나 받았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의 마음은 깊은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고 그리고 그의 마음의 세계는 죄에 대한 모든 저항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듣고 있지만 말고 생각을 하십시오. 내가 여기 해당되는가. 제일 나쁜 사람입니다. 아주 크게 회개해야지 됩니다. 이미 벌써 그런 상황에 떨어지기 전까지 여러 단계에 기도생활에서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닥까지 엎드려진 상태가 바로 그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나쁜 사람은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닌데 기도에 있어서 스스로 마음에 정해놓은 규칙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생각날 때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기도 안 해도 기도에 대한 간절한 필요성을 지식적으로도 거의 못 느끼는 상태로까지 미끄러진 사람들입니다. 영혼으로 갈급함 같은 것들은 두 번째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갈급하지 않으면 영혼이 질병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끊어졌는데도 갈급하지 않으면 영혼이 질병적 상태로 들어간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나쁜 사람은 기도하는 규칙은 정해져 있는데 거기에 마음을 쏟고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하는 사람, 새벽기도라는 형식은 있고, 저녁기도라는 형식은 있는데 그 형식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면 굉장히 많이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엎드려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요동하면서 죄를 죽이는 작용이 가능하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시간은 엎드려있는 시간에 비해서 현저히 적거나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자고, 기도하다가 잘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워낙 많이 받으면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적이 없이 규칙적으로 시간만 지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기도생활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기도가 되기는 하는데 아주 짧은 기도의 시간밖에 기도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죄가 설죽습니다. 그래서 칼을 찌르기는 찔렀는데, 어떤 살아있는 동물을 칼로 찔러서 죽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부위를 한번 찔러서 목숨을 끊어버리든가 아니면 치명적인 곳을 찌르지는 못했지만 무수히 찔러서 그래서 결국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신경계통이 끊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찌르기는 찔렀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짐승을 죽이는데 그냥 짐승의 등에 하나 쿡! 찍고 말았습니다. 심장을 찌른 것도 아니고 머리를 찌른 것도 아니고 그냥 가죽을 뚫었습니다. 그냥 칼을 꽂은 채로 이 짐승이 뛰어다닙니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마음이 움직이면서 기도가 나오기는 하는데, 열렬하기도 한데 장시간을 헌신하지 못하고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과가 오는가 하면 죄를 향해서 칼을 꽂기는 꽂는데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죄는 설죽을 때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합니다. 죄를 자극했기 때문에,
여러분, 예를 들자면 옳지 않는 일인데 어떤 일을 하고 싶을 때, 완전히 차단되어버리면 욕구가 한참 있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젊은이들 핸드폰 중독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 때도 들고 잡니다. 그리고 5분 10분 안에 한번씩 안 열어보면 안 됩니다. 열어서 게임이라도 한번 해봐야지 됩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을 다 두고 가야지 됩니다. 처음에는 죽을 맛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집니다. 왜 원하는 소원을 가져도 군대에서 핸드폰 들고 보초를 서는 일은 법적으로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못하게 하는데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욕구가 더 길길이 뛰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제가 콜라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가 하면 건강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몸에 어떤 부분이 안 좋으시니까 콜라는 드시면 안 됩니다. 그날부터 그렇게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콜라에 입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하루에 한잔 정도 안 마시고는 못 배깁니다. 인배긴 것 같습니다. 식탁에서 점심식사 후에 한 두 잔정도 마셔야지만 소화가 됩니다. 왜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그것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으니까 금지한 것이 오히려 자극이 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지 아실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많은 시간 헌신하며 드리는 그 사람이 죄를 많이 죽이는 기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청탁용 기도제목과 성화용 기도제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럼 크게 세 번째, 그럼 우리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한번 적용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앉아있는 그 시간이 100시간이라고 할 때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막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그 시간은 몇 시간쯤 될까요? 한 10시간,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100시간 모두가 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땅에다가 지하수 공을 파면 막 물이 확 하고 용출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기도가 꽉 차있어서 그렇게 쏟아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상태가 아닌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서 13%가 자신은 그런 상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100시간을 기도하면 기도할 때 마음으로 확 쏟아져 나오는 기도로 쏟아져 들어가기 위해서 소비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또 되다가 안 되어서 그런 기도를 못 드리면서 지속하다가 기도가 끝내는 나오는 시간 같은 것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그것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가는 사람의 영적상태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가, 죄의 지배아래 있는가의 중립지대는 없지만 죄의 지배아래 있는 정도가 굉장히 심각하고 배교에 가까운 상태부터 시작이 되어서 그것보다 훨씬 나은 상태에까지 정도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은 둘로 딱 나누어지고 중립지대가 없지만 그러나 병이 중병인가, 가벼운 병인가에 따라서는 정도가 각각 다를 것입니다. 여러분 모기가 물어서 피부가 안 좋은 정도는 경증이고, 암에 걸려서 한달밖에 못산다고 그러면 이것은 말기 암입니다. 똑같이 환자지만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일단 그런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100시간을 기도할 때 100시간 다 마음을 쏟아 붓는 사람이 기도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설교를 들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아! 그럼 나는 그 설교를 지금 듣고 보니까 나는 100시간 정도 기도해도 한 1시간도 그런 시간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금년 들어서 거의 그런 경험을 못했는데 하면 그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어떤 성화의 효과를 가지고 오는 죄 죽임의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를 했는데 100시간을 했는데 한 10시간 정도는 그런 정도가 있었던 것 같은데 90시간 정도는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열렬한 기도가 아니었다고 생각이 된다면 그가 실제로 기도한 시간은 10시간이라고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과 열렬함은 초기적 신앙이 특징이다. 영적으로 깊이가 있어지면 그런 열렬함도 점점 사라지고 더 객관적으로 기도하게 된다고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기도에 있어서 정서적인 열렬함이나 마음을 쏟아 붓는 이런 모든 것들은 신앙의 초보적 증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도 처음 믿을 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숙하고 보니까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뭐가 쓸데 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그 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그 죄가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함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기도생활은 죄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열렬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열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통성기도로 막 부르짖는다든지, 아니면 손바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든지, 앞에 있는 책상을 뒤흔들면서 기도한다든지, 아니면 자기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방언으로 따따부따 하면서 기도한다든지, 무슨 자기 자신에게 어떤 최면 같은 것을 걸면서 열렬해지려고 몸부림을 친다든지 이런 것들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열렬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열렬함의 기원이 무엇인가? 그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됩니다. 인간은 비록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성령을 매개체로 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하실 때, 그때 제일먼저 일어나는 특성이 우리의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게 성령의 가장 고유한 기능입니다.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닫게 되는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기 때문인데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시는 작용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 우리의 생각이 여태까지 중요했는데 우리의 생각은 덜 중요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내 인생과 내 마음과 내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내 감정과 내 정서가 훨씬 중요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과 감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나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것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더 아픈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하면 전에는 내 뜻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성령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 싶고, 주님의 뜻대로 선택하고 싶고,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그 뜻을 찾고 그 뜻대로 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입니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우리들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우리가 기도 속에서 그런 열렬해지는 것이 성령의 역사하시는 효과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지 되는가?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도에 있어서 열렬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있어서 간절하게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만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열렬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열렬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다 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그런 사모함을 가지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역사하게 하셔서 신적인 열렬함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있어서 그런 간절한 소원이 없이 그냥 되면 하고 말면 말고 그러면 항상 안 되는 쪽으로 기도가 결론이 지어집니다. 그래서 성화의 영역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항상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도 똑같이 미안합니다. 좀 영어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Cod works in us and with us not without us and against us 하나님이 이 기도에 있어서도 다른 성화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지 우리 밖에서 우리를 거슬려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면 이제 정리가 되면서 의문점이 좁혀질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러면 열렬함이 문제구나. 그러면 그렇게 간절히 열렬해지려는 마음을 가져야지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그렇게 열렬해지는 비결은 또 뭔가 하는 마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잘못 선택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에다가 어떤 광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한다든지, 기도원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붙들고 기도를 한다든지 그래서 그것을 뽑습니다. 목표가 간절함이 아니라 그것을 뽑는 것, 대게 묘목을 붙듭니다. 작년에 심은 묘목을 붙들고, 그러지 않으면 아주 미신적인 어떤 행동들, 누가 이렇게 하니까 열렬한 기도를 했다고 하더라. 그런 것들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미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다 헛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기도라고 하는 이 영역만큼 성령과 악령의 대립이 처매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게 여러분들이 보면 굉장히 이상한 악령에 사로잡혀있거나 아주 잘못된 신앙으로 미끄러져서 이단적인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 중에서 기도의 체험 속에서 잘못 그런 영을 받으면서 망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영적이 되고 싶은 나머지, 열렬해지고 싶은 나머지 그러한 미신적인 방법들에 호소하거나 육체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육체로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어떤 때는 사람들이 기도도 되지 않는데 막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기도하고 그러다가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런 외적인 행동이 그런 기도의 열렬함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열렬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열렬해지고자 할 때 오류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성령이 열렬하게 하실 만큼 그렇게 우리가 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하려고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요소를 유념해야지 됩니다. 우선 첫째는 정직의 빛, 그것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성찰하는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그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진실해져야지 됩니다. 이 이야기는 완벽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든지 혹은 아주 굉장히 훌륭히 헌신적인 사람의 삶을 살아야지 된다든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잘못했던 잘했던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숙제는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먼저 그 열렬한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런 도움을 성령으로부터 힘입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에 상태를 지적받음에 있어서 정직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게 결국은 진실해진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살아가면 진실한 사람들은 대부분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진실해진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진실하게 살아오려고 하는 과정들이 성화의 동기가 되는 가운데 그 사람의 삶이 점점 온전해져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직해야지 됩니다. 뭐 앞에서 정직해진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신자가 기도가 거의 되지 않을 때 기도의 영을 거의 잃어버리고 그가 기도의 의무자체에 대해서 총체적인 게으름에 빠지게 될 때 하나님은 결코 그를 그냥 그렇게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지 그의 상태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것과, 기도에 태만한 것이 영혼의 적신호라고 하는 것과, 그 기도의 태만함으로 말미암아 몰고 오게 될 영혼의 그 두려운 재앙과 삶의 위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수시로 말씀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비쳐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은혜의 세계가 많이 무너지고 죄의 지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런 분명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거나 들려도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을 하면서 그러면서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의 영혼의 곤경에 처한 상태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말씀하시는군요.’ 이렇게 고백을 안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저쪽 보고 설교해도 이쪽에 있는 사람이 한번도 안 쳐다봤는데 오늘 말씀은 정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저 사람에게 줬는데 말입니다. 그럼 저 사람이 맞아, 그거 너 준거야. 그러니 변화가 되겠습니까? 그게 모두 부정직한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핍절해가는 영혼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그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실 때 그때 죄인들이 핑계를 대면서 부정직해지는 방법은 너무나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이 시간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습니다.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든지 혹은 쓸데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든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의 빛을 받아야지 되는데 그런 자리 자체를 자꾸 피하는 것입니다. 자꾸 소외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해주어도 정직하게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코 열렬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열렬한 기도, 죄를 충족히 죽일 수 있는 그런 열렬한 기도를 성령님께서 안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욕구가 충분히 반영된 것을 기도로 하나님 앞에 드려야지 됩니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고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시간이 입술의 기도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께서 주시는 그런 열렬함, 죄를 죽이는데 있어서 효능을 나타내는 그런 신령한 열렬한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대표 기도하는 사람들은 제가 꼭 기도를 쓰게 해서 기도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에 기도시키지 말라고 우리 목사님에게 항상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저의 이런 생각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그 시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하는 것이지 무슨 미리 정해놓고 기도를 쓰는가 하는데 그런데 그 이야기도 또 맞는데 그런데 미리 쓰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님이 인도하시지 않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주일예배시간 기도시간에 은혜를 참 많이 받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도 아닌 젊은 여 집사님들이 적어서 나와 기도하는데 그렇게 소리소리 지르고 그렇게 폼 잡는 기도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겸손하게 기도를 하는데 그것을 차마 계속 읽지를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그런 대표기도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올 때에 예기치 않던 열렬함을 그 시간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할 때 항상 어떤 생각을 해야지 되는가 하면 많은 기도를 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시간을 기도로 도배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여야 할 내용들이 머리에 떠오르면 끊임없이 머리에 떠오른 기도의 제목에 대해서 마음이 길어 올려져서 이 기도제목위에 피같이 부어지는 작업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간절히 그런 작업을 하다가 보면 처음에는 잘 안되는데 몇 번 걸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내가 이렇게 내 마음을 길어 올리려고 애를 쓰지만 궁극적으로 내 영혼에 마음 깊은 곳을 후벼 파서 이 기도의 열렬함에 불을 붙이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의지하면서 기도하면 요지부동하게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들다가 그냥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날 오면 더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그러면 그게 얼마나 힘든지 들어보십시오. 어떤 때는 가슴에, 이렇게 머릿속에 기도제목이 있는데 이것을 마음에서 길어 올려서 부치려고 하니까 이 기도가 반복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동일한 말씀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까? 중언부언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된 것입니다. 떨어지는 모양이 피처럼 떨어진 게 아니라 실제로 그 땀 속에 피가 섞여서 붉은 피가 쏟아진 것입니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정말 그렇게 됩니다. 금식 같은 것 많이 하면 소변에 막 피가 섞여 나옵니다. 그렇게 진액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렇게 뚝뚝 떨어진 것입니다. 씨름하시는 장면으로 표현이 됩니다. 기도하면서 씨름하는 장면으로 표현이 됩니다. 영어에 agony 라고 하는 단어가 거기에서 온 것입니다. 고뇌라는 단어입니다. 거기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제목이 있는데 그것을 그냥 내보내지 말고 마음에서 이렇게 길어 올려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나쁜 게 하나님 아버지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충만하시고 이렇게 공식화된 것들이 줄줄 생각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들은 모두 기도의 영을 쇠퇴시키고 말리는 행동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그 기도제목이 그냥 나가게 하지 말고 그냥 나갔으면 그냥 거두어들이십시오. 그리고 어차피 주님 안 들으셨으니까. 아니 뭐가 우스워 당연하지. 마음 없이 하나님께 쏟아 부은 것인데 하나님이 들으셨겠습니까? 알고는 계시겠지만 들으신 것은 아닙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나간 것은 헛것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기도제목이 있으면 그것을 이렇게 예를 들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목사님 영 육간에 강건하게 해주시고, 집회가면 매일 듣는 소리야. 그거 다 자기네 부흥회 잘하게 해달라고 그런 것이지, 간 다음에는 기도 안 할 것입니다. 마음을 실어서 정말 애정을 가지고 정말 저 목사님이 건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된다. 이런 마음으로 이렇게 마음을 길어 올려서 여기다 피처럼 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이것을 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한번 이렇게 누르면 짝 하고 진심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피처럼 자기의 기도의 언어에 쏟아 부어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르면 확 솟구치고 부어져서 쏟아져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하늘보좌로 이 기도는 쏜살같이 올라가기 시작하고 이렇게 펌프질 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죄들이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안하고 놀던 사람들, 또 이런 작용을 거의 안 한 채 살았기 때문에 그냥 입술로만 기도를 한 사람들은 이 마음에 펌프 자체가 이미 녹이 슬은 것입니다. 녹이 슬어서 눌어붙어서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할 때는 여기가 빠개지는 것처럼 힘이 들고 그리고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될 때 힘이 듭니까, 안 힘듭니까? 안 힘듭니다. 뭐가 힘듭니까? 그런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될 때 기도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안 힘듭니다. 그러나 기도가 안 되는데 그것을 하려고 몸부림칠 때는 무지무지하게 힘이 듭니다. 정말 헉헉할 정도로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간절히 모으면 조여 오는 것이 느껴지고 이 뒤에 땀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게 오랫동안 기도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 마음이 삐꺼덕 삐꺼덕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어져서 녹이 슬어서 달라붙었던 기관이 움직이는 것처럼 굉장히 많은 힘을 가하는데도 잘 안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죄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리고 죄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쏟아 부은 그 간절함이 자기의 머리에서 내려오면 기도제목위에 얹어지면서 그러면서 성령께서 어느 한순간에 쏟아지듯이 기도를 부어주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이를 낳아본 애기 엄마들은 이해를 합니다. 그 큰 아이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확 배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 아이를 거의 본능적으로 반사적으로 아이를 밀쳐냅니다. 그래서 그 큰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누가 도왔습니까? 천사가 도왔습니다. 힘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니까 천사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열렬한 기도를 도왔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그런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열렬한 기도를 드린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할 때 그 마음 깊은 곳에서 머릿속에 있는 언어를 향해 자신의 기도에 마음의 피를 짜서 그 피를 그 위에 부어버림으로서 그 기도의 제목을 적신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됩니다. 단언 코 이런 과정이 없이는 누구도 죄를 죽이는 열렬한 기도 속으로 회복되어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정말 마음의 피도 묻히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제목들을 날려버리거나 아예 언어조차도 잃어버린 가운데 기도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기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예 마음자체가 모아지지 않기 때문에 언어조차 잃어버린 채로 엎드려있는 시간을 기도시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성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은 상당히 교회 중심적이고 신앙적인 것 같은데 의외로 영적인 기반이 너무나 취약하고 거 룩에 대한 열정이나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이나 살아있는 영혼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는 너무나 쉽게 착상하고 그 안에서 자라 가는데 죽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끝이 결국은 외식입니다. 충만한 외식입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열렬함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는 말씀의 빛 앞에 정직해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기도를 마음속에서 길어내려고 하는 작업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간절하게 기도하려는 마음을 가져야지 됩니다. 이 간절함과 열렬함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열렬함은 맹렬하게 뜨거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간절한 것은 자신의 기도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히 매달리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게 은혜의 지배아래 있고 기도의 은혜가 충만할 때는 나와 너무 상관이 적은 아주 먼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까지도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심령의 아픔과 연약함이 내게 전해져서 그렇게 마음이 쓰리고 아프며 그를 위하여 매달리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뭐가 있는가 하면 그 속에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간절함을 누가 죽이는가 하면 죄가 죽이는 것입니다. 죄가 그 간절함을 자꾸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신령한 일에 대해서 굉장히 태평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일에 있어서는 안타까운 게 너무나 많습니다. 왜? 아! 철이 바뀌었는데 좋은 옷도 하나 못 사 입고, 아파트도 32평짜리 아직 그냥 살고 누구 집은 48평으로 갔다던데. 눈꼴이 시어서 어떻게 보나. 누구 집에는 장롱을 새로 샀는데, 차를 바꿨는데, 누구는 콧대를 낮추었는데 이런 비교의식에 대해서만 열렬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그러니까 은혜의 지배아래 있고 기도의 영으로 충만할 때는 그에게 사소한 기도제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은혜가 충만할 때는 사소한 기도제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다 간절합니다. 주님이 꼭 들어주셔야지 됩니다. 혹은 내가 구하는 것이 최선일지는 모르지만 어째든 하나님이 나의 이 간절한 심사를 통촉하셔서 주님이 좋으신 대로 하여튼 여기에 대해서 뭔가 간섭해주셔야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기도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작은 기도제목이나 사소한 기도제목, 그런 것은 없습니다. 대게 그런 분류는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나는가 하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주 이기적인 방식으로 큰 기도제목들과 작은 기도제목들을 분류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모두 다 간절합니다. 그렇게 간절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위 이야기하는 간절함이라는 정체가 무엇인가? 어떤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을 향해 소망하는데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애물들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런 방해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소망을 붙드는 것, 그것이 간절함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안 좋은 환경이나 상황이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도제목은 응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때에 더 이상 희망을 안 갖고 포기하는 것은 간절한 것은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한 비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니까 예수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게 마땅치 않다. 그 자체가 장애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엄청나게 강력한 장애였습니다. 완전히 뭉개버리시는 발언이었습니다. 넌 개다. 나는 개를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왔다. 그랬더니 이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맞습니다. 그렇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나 개입니다. 주님의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내게 주시면 예수님이 내 딸을 가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 얼마나 기대하는 바가 끈질겼으면 그 엄청난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그 기대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간절함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기도할 때에 그 기이한 간절함으로 오로지 하나님께만 강력하게 달라붙어서 주님과 연합된 그 기도의 장엄함과 열렬함은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성령이 본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그렇게 간절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의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어떤 소망을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런 기대를 자꾸 버리게 만들고 그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생겨날 때까지만 그 기대를 갖고 그 다음에는 기대를 접어버리는 것은 간절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그 기도가 신적인 열렬함을 갖도록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기도가 열렬해져야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어제 제가 신자 안에 죄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할 때 그 죄는 맹렬함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광기와 맹렬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맹렬함이 어떤 쪽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이 죄가 맹렬함을 띠는데 그 맹렬함은 어디에 대게 사용되는가 하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은혜의 세계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맹공격을 하는데 사용되는 그런 맹렬함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의 영혼에 직접 달라붙어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맹렬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라고?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 은혜들이 다 고갈되도록 열렬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열렬하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지금 전쟁이 지금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소방서에 전화를 하면 소방서에서 무조건 소방차를 몰고 뛰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불이 났습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신고한 사람이 이야기한 게 아이가 성냥불로 장난을 했는데 뒤뜰에서 쌓아놓은 휴지통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러면 한대가 옵니다. 그런데 보일라가 폭발해서 일층에 불이 붙고 이층, 삼층, 사층으로 불길이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백 대의 소방차가 몰려옵니다. 사다리차까지 오고 필요하면 헬기까지 동원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죄가 그런 맹렬함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만약에 그것에 대해서 열렬한 기도로 대응하지 않으면 결국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은혜들을 모두 잠식해버리고 또 그렇게 죄의 지배를 갖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은혜를 받은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의 지배아래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들어오는 은혜들도 모두 잠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죄의 맹렬한 공격을 통해서 그것들이 모두 잠식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정부가 우리의 영혼을 모두 지배하고 그리고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항하는 무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맹렬한 죄의 공격에 대해서 열렬한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마음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자신도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으면 목사에게 와서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그러는데 해주겠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그런 성화를 거스르고 있는 죄들이 남아 있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본인 자신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고 본인 자신이 그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게 만약 가능하다면 기도 많이 받으면 성화를 많이 받을 것입니다.
옛날에 선교사들이 조선시대 때 와서 운동을 하느라고 테니스를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하니까 선교사들이 전도해서 예수 믿고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이 와서 보니까 선교사님이 바지를 입고 상스럽고 경박하게 사나이가 몸을 움직이면서 정구를 치니까 선교사님 왜 이런 것을 하십니까? 제가 테니스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 것은 아랫것들을 시키시지 직접 하십니까?
어느 아랫것이 와서 여러분의 성화를 도와줄까요? 자기가 싸워야지 됩니다. 그런 동기들은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기도가 메말랐는데 기도의 불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또 냉랭했는데 말씀을 듣고 마음이 깨트려지고 나면 마음이 막 하나님 앞에 움직이기 시작하고 기도를 쏟아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렬해야지만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그 맹렬한 죄의 작용에 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죄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금 조금 정직하게 냈다고 해서 죄와 싸워서 이겼다고 생각하면 여러분 착각입니다. 학생들이 이제는 커닝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와 싸워 이겼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다 더 그 죄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인 투쟁과 싸움은 신자의 마음속에서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죄의 맹렬함에 대해서 마음을 짜서 하나님 앞에 생각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제목 위에 쏟아 부으면서 드리는 기도, 이것이 점점 힘찬 박동이 되어서 막 쏟아 부을 때 여기서 피가 솟구치면서 그것들이 내 기도제목 위에 쏟아 부어져서 하늘을 향해 올라갈 때 기도는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미사일처럼 첫 번째, 두 번째 하늘을 뚫고 하나님이 보좌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는 실제로 우리를 괴롭혔던, 맹렬하게 우리의 영혼을 공격했던 죄와 들붙어서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누가 유리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쏟아 붓는 이 기도의 은혜가 유리하겠습니까, 죄가 유리하겠습니까? 은혜가 유리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거듭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자유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고 고백을 했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주시는 두 가지 자유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를 죄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신분을 옮겨주셔서 신분과 상태의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내적인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동안에 죄에 순종했고 거의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부어지지 않았고 그 은혜가 내 안에서 일어나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정권인 이 죄의 세력에 의해서 내가 불법하게 무법하게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다 올바르게 신자 안에서 역사할 수 없는 원리들이 불법하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와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마음으로부터 열렬하게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께서 그 열렬함을 부어주실 때는 그렇게 견고하게 서있는 것 같았던 죄의 세력들이 밑 둥부터 잘리면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수 년, 수십 년 동안 이 죄가 지배력을 행사하고 통치권을 행사하다가 그냥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합법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박효준 장로님 간증이 그런 사실들을 반응합니다. 하루 저녁 사이에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바꾸시고 죄수들은 나쁜 자식들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불쌍한 영혼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인데 예전에 쌓아왔던 잘못된 생각이 오랜 세월을 두고 쌓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무너트려주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협력하고 정욕에 순종하면서 죄와 싸우려고 하니까 죄와의 싸움이 끝도 없이 힘든 것으로 생각이 되지 진짜 인연을 끊고 너 다시 안 본다. 그리고 돌이켜서 결단을 하고 싸우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을 대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든지 간에 죄와 완전히 결별을 못하고 그 죄의 욕구에 한편으로는 순종을 하면서 한편으로 싸우려고 하니까 그 싸움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마음으로 죄를 죽이는, 우리의 성령으로 죄를 죽이는 가장 전제조건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총체적 순종입니다. 총체적으로 순종하면서 너 다시는 내가 보지도 않을 것이다. 상종도 안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죄와 싸우기 시작하면 허무할 정도로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너지는 이 죄를 일평생 동안 이길 수 없는 숙명적인 나의 지배자인 것처럼 생각하며 조공을 바치며 살아왔던 내 인생의 날들이 얼마나 비참한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심하게 결론을 내리면 열렬한 기도가 아니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눈물을 펑펑 흘린다든지 소리를 고래고래 하든지 그런 열렬함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이 속에서 우러나옵니다. 정직한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마음에 간절함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낸 마음의 이 피가 기도의 제목 속에 묻어서 쏟아져 나올 때 이게 열렬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항상 그 열렬한 기도 속에는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고 피가 있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님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예수님이 이런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우리는 죄가 있고 게으름이 있고 부패성이 있고 그래서 입술의 기도 따로 마음이 틀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펌프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간절하게 피어린 통곡으로 당신의 온 생애를 점철시키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성품을 미루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는 모두 자신과의 싸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부둥켜안고 그 죄와 싸우지 못하면서 받는 고통이 예수님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지 못한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도 없고 부패성도 없는 흠 없는 그분의 생애는 가슴을 찢는 기도와 피로 물든 통곡으로 어우러진 간구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그런 점에서 무릎으로 걸어가신 생애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곳도 예수님이 스치고 지나가신 곳치고 그분의 무릎이 꿇어지지 않았던 곳도 없고, 쏟아지는 피 방울이 흥건히 고이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는 우리를 위해 매달리는 그 십자가상에서, 한적한 빈들에서도 그분은 그렇게 기도하셨고, 감람산에서도 그렇게 기도하셨고, 요단강에서도 그렇게 기도하셨고, 산에서도 그렇게 기도하셨고, 유대광야에서도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십자가에서도 죄인들을 위해서 핏빛 기도를 하나님께 토해내셨습니다.
정말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의 생애의 소원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그렇게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서 머리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의 제목 위에 들어붓고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달라붙어서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는 그 죄들을 비로소 찔러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죄를 죽이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를 죽이는 효과만 가져올 뿐 아니라 다시 그 죄가 융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오는데 이것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음의 틀, 즉 frame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기도에서 미끄러질 때 처음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열렬하게 기도하다가 아까와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열렬하게 시간을 정해놓고 장시간을 기도에 헌신하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열렬함은 남아 있는데 기도의 시간이 짧아집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다음에 열렬함이 사라지고 기도의 시간의 형식만 남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의 시간의 형식도 무너져버리는 그런 상황으로 계속 바닥을 칠 때까지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단 기도의 은혜가 내 속에서 역사하고 있을 때에는 그래서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는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지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거짓된 진술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에 간절한 영이 충만할 때는 장소에 상관이 없이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운전하고 눈 똑바로 뜨고 가면서도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충분히 다 기도합니다.
어느 자매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진짜 기도의 은혜로 충만해지니까 전에는 가정의 일 때문에 기도가 방해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가정의 일이 방해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저귀 갈며 똥치면서도, 그러다가 설거지 하면서도 기도는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설거지 하다가 눈물을 씻으면서 또 똥 기저귀 빨고 마루바닥 닦으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이 삶의 상황이 기도에 쏟아 부어지면 영의 역사를 단절하지 못합니다. 이게 사도가 이야기했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따라서 죄가 기도의 세계를 공격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래서 제일먼저 기도의 형식을 포기하게 하는 일에 죄가 몰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에 죄가 그 사람을 유혹합니다. 새벽기도를 10년 동안 다녔는데 내일부터 퍼질러 자. 가지마. 그렇게 유혹을 해도 이 사람이 10년 동안 자동으로 새벽에 일어났는데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그것은 유혹이 안 됩니다. 오늘 새벽기도를 시작한 사람에게는 유혹이 될 수 있지만 10년씩이나 부지런히 나온 사람에게는 유혹이 안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계속 하지 마.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죄가 공격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위해서는 이 마음이 그런 기도를 쏟아내기에 적합한 질서들을 가지고 있어야지 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frame 틀을 가지고 있어야지 됩니다. 은혜의 통치를 받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틀을 가지고 있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런 틀은 은혜의 지배아래 있어야지만 올곧게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를 받는 정도에 따라서 이 틀은 조금 망가지기도 하고 아주 심하게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게 아주 심하게 망가지게 되면 명백하게 죄인데 그것을 죄라고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머리가, 뭐 어때.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 아파하시는데 전혀 그런 마음의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그게 아닌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 좋다고 하는데. 그리고 쉽게 이야기하면 이 틀이 다 무너져버리면 하나님을 막 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해야지 됩니다. 안 하면 어때. 내가 싫다는데.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야지. 싫어. 왜 싫으니까. 하기 싫으니까. 이게 구원받은 너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야. 이렇게 살아야 돼. 못해. 왜 힘들어. 이러면서 하나님을 내어쫒고 자신이 최종적인 권좌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안 될 때는 벌써 이 틀이 그만큼 많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아주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이게 다 무너져 내렸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무슨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를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기도에 은혜의 틀들이 다 마음에서 무너져서 하나님을 거의 맛보는 삶을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기도라고 하는 과정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준 죄를 죽이는 역사를 할 수 있다면 뭔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지 잘 한번 추론을 해보십시오.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영혼에 들러붙어서 맹렬하게 공격하는 이 죄를 내가 성령을 보내줄 테니까 열렬함을 가지고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렬함을 가지고 맹렬한 죄의 공격에 대해서 싸워서 불법한 정부를 무너트려버리고 그리고 이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만 같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사후도 문제가 됩니다. 왜 죄가 잠시 물러가지 영원히 물러갑니까? 유혹이 잠시 그치지 영원히 유혹이 그치겠습니까? 또 공격을 합니다. 여러분, 한번 이긴 죄는 영원히 이깁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물러가지만 다음에 오면 그 죄가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가 우세하기 때문에, 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또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지혜로 말미암아서 그 죄에 굴복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 찾아오면 충분히 그 죄가 그 사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옛날에 이겼던 죄를 요즘은 질 수도 있고 옛날에는 졌던 죄를 요즘은 죽이고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번 승리가 영원한 승리도 아니고 한번 패배는 영원한 패배도 아닙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맹렬하게 영혼을 공격하는 그 죄를 죽여야지만 이 죄의 지배가 종식될 테니까 그것도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면서 마음의 틀들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무너진 틀은 은혜가 거하기에는 매우 조잡한 환경이고 죄가 들어와서 살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입니다. 정욕이 역사하기에는 아주 딱 알맞은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일 뿐만 아니라 이 속에 있는 틀들도 은혜아래 있는 사람의 틀로 하나님이 복원하셔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런 틀은 마음과 영혼에 이루어진 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마음과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의 작용이 지속적으로 미칠 때에 비로소 다시 하나님 앞에 은혜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그 마음의 틀들로 복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기 위한 방법으로서 마음밑바닥에서 쏟아져 나오는 간절함, 말씀의 빛 앞에 정직한 자세로 자신의 자세를 인정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와 그리고 어떠한 저항에도 끊어지지 않는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그 과정을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서 무너져 내렸던 이 마음과 영혼의 틀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기에는 적합하고 죄가 거하기에는 아주 나쁜 틀들로 하나님이 만드심으로서 일단 그를 죄의 지배에서 건져내시고 성화를 촉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기도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간을 무릎을 꿇었어도 진짜 우리가 기도한 시간은 너무나 소수였고 이따금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들을 툭툭 건드리고 쓰다듬어본 적은 있지만 칼을 겨누고 그를 찌른 적은 너무나 소수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렇게 성화되지 않고 있는 이 모습이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 주님의 기대는 영원한 형벌로부터 용서받은 다음에 그냥 죄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연명하다가 천국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들어오는 그런 삶을 염두에 두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라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성화될 때 그 사람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에게는 이 마음의 거룩하고 죄악 된 상태와 세상의 상태가 균형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 성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내 마음이 세상과 다름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마음의 틀들이 무너지고 죄가 거하고 있으면 불법하고 타락한 세상이 사랑의 대상이 되지 울어야 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의 은혜에 의해서 내 죄가 많이 죽고 내가 정말 많이 성화되고 나면 이 신자는 매일 매일 세상을 보면서 고통 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이 거룩한 세계와 하나님이 다루시는 은혜의 통치아래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와 저 죄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이 세상 사이에 너무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세상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입니다. 그 하나님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이 불법한 방법으로 강탈하고 그리고 죄에 굴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드리던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인가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기도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때로는 이 기도는 너무나 간절해서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폐부를 정육점에서 사용하는 뼈 자르는 기계에 집어넣고 갈아버리는 것 같은 그런 통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다스려야 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알아도 그분께 복종하지 않는 이 불법한 세상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많이 울고 이 땅을 고쳐주시고 그래서 고쳐서 우리 달라는 게 아니라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런 주님을 모르고 그 은혜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그 십자가의 은혜를 거역하는 이 무지한 인간들 사이에 또 다른 의미의 중보자가 되어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간절히 탄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곳 어두운 세상에 구원받은 우리들을 데려가지 않고 이 슬픔 많은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그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그분 옆에만 있기를 원했습니까? 마치 변화 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가 초막 셋을 짓고” 라고 말했던 제자들처럼 교회 안에서 그렇게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만 받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고 이 세상과 얼마나 결별하고 싶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괴로운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홀로 안 보내시고 우리의 손을 붙들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와 더불어 우리와 같이 가십니다. 그러면서 변화되지 않은 자신을 보며 끊임없이 애통해하며 죄 죽임의 삶을 살면서 거룩해질수록 내 마음에 있는 이 거룩한 은혜의 통치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밤마다 이 사람을 위해서 저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그 일들을 위해서 힘쓰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그런 뜻들이 이루셨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기뻐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예수님이 지금 여기 사셨더라면 사셨을 그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분의 생애는 다 자기를 드리신 희생의 생애였고 그리고 그 희생은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붓는 자신을 소진하는 그 탁월한 기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넘겨봐도 주님의 눈물 흘리시는 기도가 없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볼 수가 없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렇게 많이 기도하셨고 열렬히 기도하셨고 언제 기도하시든지 간에 그분의 진액을 짜서 바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고 여러분들을 위해 그렇게 눈물로 자신의 고열을 짜 바쳤던 많은 섬기는 사람들의 눈물의 기도를 먹고 주님의 은혜로 죽지 않고 여기 살아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는 십자가, 누구라도 나누어질 수 없는 십자가, 그리고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십자가로서 거룩에 이르는 이 기도의 의미가 우리에게 남아 있고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한 것입니다.
전 여러분들을 보면서 제 모습을 봅니다. 정말 간절히 보고 싶은 것은 교회가 만 명, 이만명이 되는 것을 보고 싶은 게 아닙니다. 한번 정말 예배시간에도 좋고 언제든지 좋으니까 우리 여기 모인 사람들만이라도 온 마음이 하나 된 채로 그런 열렬함으로 그런 간절함으로 그런 정직함으로 하나님 앞에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마치 자신의 내장까지라도 모두 짜서 그 집을 기도 속에 부으시려고 했던 것 같은 그런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는 그런 교회 한번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으면서 정직하게 인정해야지 됩니다. 얼마나 마음을 드리는 기도생활이 없었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획기적으로 돌아서야지 됩니다. 평생 새벽기도는 장난이었습니까? 이렇게 마음을 드리는 진실하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간절한 기도가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그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놓고도 그 약속 안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이 그렇게 장난입니까? 그렇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모든 자원을 홀로 가지고 계시고 지금도 그 문을 열어서 하늘에 기이한 은혜의 복들을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부어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겠다는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일어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기까지 살겠다는데 하나님이 왜 그 하늘자원을 쏟아 부어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요 며칠 동안에 마음에 눈물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를 만나든지, 신학생을 만나든지, 성도를 만나든지, 선교사님들을 만나든지 정말 이 세상에 할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일군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우리를 위해 누구를 보낼꼬. 할 때 날 보내소서.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가야할 사람들은 날 보내소서. 하지 않고 그리고 보내달라고 손드는 사람들은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버려 우리를 구원해주실 때에 그 구원을 받고 남아 있는 우리가 이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내 평생소원 이것 뿐, 주의 일 하다가 주 앞에 가는 것, 그것이 아닙니까? 안으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화에 힘쓰고 밖으로는 그런 은혜를 주신 나를 위해서 불러주신 부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주께서 맡기신 일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것처럼 일사각오의 정신과 지사충성의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신명을 바치면서 섬기는 것 이외에 여러분들에게 다른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은 소망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많은 세월들을 보내며 이런 열렬함이 없는 기도로 기도의 의무를 땜질하고 매일매일 게으름과 영혼의 실증, 그리고 생활의 방종함 속에서 살았는지를 깊이 깨닫고 회개해야지 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 조국교회의 포도나무로 심어놓으시고 극상품의 열매를 원하셨는데 들 포도만 맺고 있다면 그 포도원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날은 가슴 아프지만 그렇게 실패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우리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심각한지 몰랐습니다.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깊이 회개하면서 하나님 이제 정말 우리가 죄와 더불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이제는 도저히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알게 하셨습니다. 이제 안 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서 안하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그리고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고 정말 복음이 우리에게 약속된 이 자유를 충만하게 누리기까지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정직하게 기도해서 열렬함을 회복하고 그래서 죄를 이기고 죽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과 온 삶의 틀이 그 은혜로 회복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기도와 지속성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21:36)”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방향만 설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 열렬함이 나와서 우리의 기도제목을 적시고 기도하게 될 때에 죄가 거하기에 적합했던 마음의 틀까지 변화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영향들이 그렇게 흘러나올 때 비로소 마음이 움직이면서 마음의 작용들이 변화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마음으로부터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길어져 올려지면서 마음의 어떤 움직임을 가져오고 그 마음의 작은 움직임이 마음의 출렁거림으로 변해서 그 마음의 틀들이 움직이면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많이 기도했는데 그 기도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하나님께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거의 기도한 적이 없고 그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변화된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많이 기도했다고 하는 생각 속에서 산 것입니다. 이런 잘못들을 오늘 우리들도 충분히 범할 수 있고 실제로 기도되지 않는 자신의 현실을 진정한 기도의 개념 자체를 변경시킴으로 말미암아서 합리화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가 되지 않는 자신의 현실을 고장났다고 진단하고 뭔가 고치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화에 이르는 효과를 가져오는 기도가 뭔가를 찾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이것도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기도해도 사실 마음으로부터 우리나온 기도가 아니고 열렬한 기도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기도의 세계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가 된 적이 꽤 있는데 왜 성화에 있어서 이렇게 진전이 없을까요?’ 이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간헐적으로 기도가 용솟음쳐 올라오는 은혜들을 경험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그의 마음이 굳어지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그 마음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영혼의 상황, 무너져 내리는 마음의 틀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기이하게 어느 순간에 -자기의 죄를 진지하게 회개한 것도 아닌데-마음이 흔들리면서 기도가 되기 시작하는 때가 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그렇게 기도하는 경험의 가치를 과대평가해도 안 되고 과소평가해도 안됩니다. 과소평가해서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을 계기로 정말 본격적으로 이 기도의 씨름을 통해서 죄를 죽이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과소평가 되서는 안되고 또 비록 이런 열렬함을 동반하고 진지함을 동반했다고 할지라도 이 기도가 가끔 이루어지는 간헐적인 기도일 경우에는 기도하는 그 순간에 느끼는 그 열렬함과 진지함에 비해서 아부 적은 정도 밖에는 죄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자체는 우리 속에 흐르고 있는 악한 경향성이고 정욕들이 계속 그 죄의 법에 힘을 공급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아 부어서 기도하고 아버지 앞에 마음으로부터 우리나오는 열렬한 기도로 마음을 짜서 드리면 정욕은 한번에 싹 가셔버립니다. 마치 음식을 앞에 놓고 먹으려고 하다가 뭔가 기분 나쁜 생각이 들면 입맛이 싹 사라지듯이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나면 그 순간에 마음속에서 그렇게 가득 차있는 것 같았던 육체의 정욕들이 한번에 싹없어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정욕이 자기 마음속에서 사라진 것이 죄가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정욕은 정욕이고 죄는 죄입니다. 죄는 속에서 계속 하나님을 적대하고 하나님께 반감과 하나님을 향한 대적을 하려고 하면서 그런 영적인 무모함과 맹렬함과 광기를 가지고 역사 하는 하나의 경향성입니다. 그리고 정욕은 계속 그런 것들에 힘을 더해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더해주면서 정욕이 극대화되어서 실질적인 죄를 밖에서 산출하고 정욕이 가득 차면 죄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러나 정욕은 정욕이고 죄는 죄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정욕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마음의 틀들이 아주 쉽게 죄에 적합하도록 움직이면서 정욕들이 다시 뭉개 구름처럼 솟아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간절히 기도하면 기도가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했으니까 그것이 응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목숨을 걸고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성화의 문제는 한번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정해놓으신 은혜와 믿음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매우 미운데 그 미움의 감정 때문에 영적 생활이 지장을 받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기도가 됩니다. 마음이 쏟아지면서 기도가 되는데 ‘하나님, 네가 여태껏 누구를 미워했는데 용서해 주십시오. 이 미움의 감정들이 자꾸 생겨나는데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을 싹 씻어주시고 제가 저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 해주시옵소서’하는 순간 기도가 하늘로 쫙 빨려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 때 ‘내가 지금껏 기도하면서 이렇게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적이 없었다.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밉습니다. 그리고 또 죄를 범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 사람은 성화가 어떻게 오는 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으로 가서 예증을 들어 설명하면 간단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철천지한은 자기 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오셔서 “내가 너희에게 그 땅을 주었다”고 완료형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하나의 약속입니다. 믿음이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순종하면서 가나안으로 가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싸우면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우는 방식이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그 싸움이 팽팽하게 싸워서 피를 흘리고 양쪽 군사가 거의 다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 소수가 남아서 차지한 승리였습니까? 그냥 여리고 성을 빙빙 도니까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요단에 들어가니 물이 마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이나 군사의 힘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가를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지성적 혼란이 생겨납니다. 저도 여러 해 동안 굉장한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그것이 벗겨지면서 복음의 비밀들이 깨달아질 때 정말 하늘을 나는 것 같았습니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하라” “이미 받은 걸로 믿어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실현시켜주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렇게 쏟아 붓게 기도했고 그 순간 마음을 녹이시면서 내 기도를 빨아올리시던 그 기도응답의 체험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데 혼란에 빠질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저 사람의 미움을 내게서 다 지워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 응답입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말고 순종하면서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고 사랑하려고 해라. 그러면 내가 힘을 공급해준다. 너는 이긴 싸움이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 안하고 다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안하고 그리고는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손을 내미셔서 나를 그 자리에서 독수리처럼 채서 어디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화의 원리와 안 맞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지속적인 기도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미움이 남아있는데 간헐적으로 간절히 기도해서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응답을 확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응답은 받았지만 아직까지 속에 남아있는 저 사람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을 죽여나가야 합니다. 성화를 제가 지금 말씀드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마지막 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유혹과 죄의 열렬한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서 지속적인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제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마음을 드리는 그 열렬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 진지한 그리고 정직한 기도가 간헐적이어서는 안되고 지속적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이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의 자유는 단번에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가 개떡같이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신분의 자유뿐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불러줘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행복하지 않으면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기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퍼져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이 이 복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과 영혼의 내적 자유입니다. 내적 자유가 있으면 자신이 생활하면서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열등감을 느끼다가도 주님이 오셔서 내 안에 자유를 주실 때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유혹이 밀려오면 불안하고 떨었는데, 시련이 오면 괴로웠는데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놀라운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죄를 죽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런 죄를 죽이는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정말 마음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열렬한 기도여야 하고 죄의 맹렬함과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정직한 기도여야 하고 그 기도가 매일매일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여기에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고행으로 가득 찬 삶을 생각합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마음으로 기도를 짜서 드릴 뿐 아니라 늘 그렇게 기도에 힘쓰면서 그런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구나. 예수님 믿고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거저가 아니네’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지금 기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경험으로 더듬어 들어가겠습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기도가 메말라있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의 은혜를 소유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짧았을 수도 있고 좀 길었을 수도 있는데 어떻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바쁜 직장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새벽기도 나아가고 그렇지 못하면 밤 기도를 나아가든지 건넌방에서 문 잠그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으니까 조금만 기도를 시작하면 기도가 봇물처럼 확 쏟아져 나옵니다. 마음과 영혼의 틀 자체가 기도하기에 적합하고 죄가 거하기에 좋지 않은 은혜로운 틀들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도의 사전 준비 운동이 매우 작아도 됩니다. 그래서 묵상하면 바로 기도가 시작됩니다.
제가 맨 처음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15분 정도 묵상합니다. 그러면 기도를 시작도 안 했는데 가슴이 아프면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묵상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면서 그 십자가가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시작하면서부터 바로 깊은 기도의 경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옵니다.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짜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짜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음의 틀이 보존이 잘 안되어서 죄에 적합한 프레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스러운 틀들이 형성되었으니까 계속 짜는 노력이 필요하지 그런 경지로 들어가게 되면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기도를 한다는 느낌이 안 들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당신 하시고 싶은 기도를 실컷 하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정도까지는 여러분들이 못 갔을 수 있습니다. 너무 열등감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못 갔지만 ‘너무 기도가 잘된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오고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아주 쉽고 행복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그렇게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붓는 그 기도시간은 얼마나 달콤한 시간이었습니까?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그렇게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으로 기도하고 매일 그런 기도 속에서 살라고 하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구나 생각하는 것은 지금 그 기도의 감미로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의 틀들이 너무나 육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무거운 노동이요 힘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상처받지 말고 들으십시오. 이러한 무거운 부담을 느끼는 그 감정의 정체를 밝혀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에 대한 반감입니다. 적대감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동의하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늘 그렇게 마음을 바치며 기도하며 살 때에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할 때 얻게되는 자유의 행복보다는 지불해야 하는 그런 기도의 실천이 커다란 노동처럼 다가오고 힘들겠다고 생각되는 그 감정이 바로 죄의 본성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와 마음속에 깃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누구와 얘기할 때마다 ‘제 소원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하면 하나님께서 웃으십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것과 진짜 소망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희망하는 것은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자신에게 해프닝처럼 생기기는 바라지만 그 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구체적으로 노력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전자는 믿음이 없는 허황 된 사람이고 후자는 실제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쏟아 붓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마음이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자가 되었을 때에 기도 속에서 수시로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죄만을 가지고 씨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성화 될수록 다른 사람의 죄도 자기의 죄인 것처럼 끓어 안고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구나. 한 지체구나’하는 것입니다. 단합대회 한다고 말하는데 신앙생활 잘하면 저절로 단합이 됩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 구원의 계획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못한 그리스도인과 창조의 계획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하늘 자원이 끊어진 상태 속에서 고통 하는 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가슴아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면 괴롭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기도 시간에는 자기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말씀이 없는 것을 인해서 울고 이 땅의 황무한 것을 인해서 울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을 인해서 아파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아픔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기쁨이 한 인격 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를 돌아보면 가장 기도하면서 가슴이 아팠을 때가 가장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기뻤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가슴아픈 일이 있어나는데 그것은 육체의 정욕 때문에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니라 신령한 목적을 위해서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그리스도인 의학자의 말에 의하면 건강에도 고통을 안 준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괴로움은 절대 우리 육신의 건강에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이 암 걸려 돌아가셨어야 합니다. 제자가 배반하고 얼마나 죄인들이 속 썩였습니까? 그런 놀라운 행복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땅에서 살게 하시고 싶으시던 삶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기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원을 자기 자원인 것처럼 탈취해서 움켜쥐고 서로 죽일 듯이 빼앗으면서 탐욕스럽게 살아가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믿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그렇게 놀라운 사랑을 주어서 구속해놓고 나니까 구원받은 것을 자기의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으면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서 자기의 죄를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니까 그렇게 매일매일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런 기도가 되면 지속적으로 기도를 실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서로 통하면서 주님 속에 있었던 그 마음이 우리 속에 흘러 들어오고 우리 속에 있었던 소원들이 흘러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싶으셨던 그 삶을 그 사람이 그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구원받지 못한 세상,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고 고난을 받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세계를 발견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뛸 뜻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불같은 확신 속에서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 드려서 그 예수님을 섬겨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얼마나 예쁘게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내려다보실 때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충분히 사시도록 그래서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걸어가고 싶으셨던 그런 길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자의 삶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면서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 정말 놀랍게 변화되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았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에 그 말씀의 은혜가 실제적으로 그 사람의 죄를 죽이면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를 사용하셔서 죄를 죽이시지만 기도는 본격적인 죄 죽임을 위해서 그 죄와 들러붙어서 싸우면서 그 커다란 죄라고 하는 경향성에 칼을 꼽고 피를 쏟기 시작하는 작업이 바로 기도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생활해도 죄를 거의 죽이지 못하는 기도생활이 있고 죄를 아주 효과적으로 죽이는 기도생활이 있는데 어제, 오늘에 걸쳐서 지금 효과적으로 죄를 죽이는 기도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집중해야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고 그리고 그 죄의 맹렬함을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한 것으로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죄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의 이러한 사실에 눈뜨게 되었을 때 제가 느끼는 것은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 기도하면서 살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한 시간은 너무나 작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계속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너무나 효과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들이 꺽이고 죄들이 죽기 시작하고 정욕이 싹쓸이 당하고 하면서 속에서 은혜의 틀들이 유지되고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 틀들이 더 탄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면 되겠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지속이 안됩니다. 이것을 오늘 파해 쳐보겠습니다. 왜 지속으로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안되나?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안 되는 것들을 박살내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여러분들은 이것에 대해서 거의 정확한 이해를 안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은혜를 굉장히 많이 받고 기도를 열렬히 합니다. 그리고 기분이다며 평생새벽기도 작정을 합니다. 그런데 한 두 주 나오고 안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두 주, 어떤 사람은 석 달 하고 흐지부지해집니다. 자기가 눈물 흘리면서 감동 받고 작정했는데 왜 안 나오냐고 물으면 ‘목사님, 요새 회사가 너무 바쁩니다’하는데 제발 그런 식으로 답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복음 속에 있는 비밀들을 그 정도 터득했으면 본질적으로 물어볼 때 본질적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또 ‘아이 아빠가 사업에 위기가 와서’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아이가 계속 아파서’ ‘장사가 너무 잘돼서’ 하며 모두 환경 쪽으로만 돌리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틀이 변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음속으로부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열렬한 기도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정직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면피할 지라도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심방을 가거나 상담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기도를 못합니까?’하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좀 가르쳐주세요’하면 얘기하겠는데 ‘회사가 너무 바빠서’할 때 ‘회사가 바쁜 게 아니라 네가 죄가 많아서 그런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본질로 못 들어가게 텐트를 딱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또 ‘찬송가에도 나타나있지 않습니까?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하며 자신이 너무나 연약하다고 합니다. 주님도 별로 동정을 안 하시는데 자기 자신을 그렇게 동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하기 때문에 주님의 시선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한 자는 그 약한 자가 아닙니다.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한 자를 찾는 것이지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세상이 더 좋고 육체의 게으름과 이기심이 더 사랑스러워서 기도를 실천해야할 의무를 져버리는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연약함입니까? 그런 식으로 자꾸 비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이 너 나쁩니다. 더 간교하고 기름 많이 바른 미꾸라지 같습니다. 그러면 못씁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을수록 칼날 같은 정직함 속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쓸데없는 이야깁니다. 그것은 모두 면피용으로 말한 것이라고 치고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여러분 속에는 진짜 무슨 답이 있는 것입니까? 왜 자신이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신은 답을 가지고 있을까요? 저는 별로 안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좀더 양심적이라면 이런 정도 생각할 것입니다. ‘다 제 잘못이지요.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지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조금 눈을 뜬 사람은 ‘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그렇지요’하는데 그것은 조금 답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왜 멀어지게 되었습니까?’ ‘죄 때문이지요’ ‘죄는 왜 그렇게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은혜에서 멀어져서 그렇지요’ 그러면 계속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싸운다고 약속하면 오늘 이것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내려드리겠습니다.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을 못하는 이유는 궁극적인 것은 죄 때문입니다. 은혜가 가득 차 있으면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죄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영혼의 실증과 육체의 게으름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편의상 육체의 게으름부터 먼저 설명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왜 이 기도를 열렬히 실천하지 못하는가를 해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은혜가 없어서 마음 자체가 거의 돌같이 굳어져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속적인 기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열렬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지속적이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속적인 기도라고 하는 것, ‘지속적인 기도가 성화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성화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지속적인 기도라는 의미 속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라고 하는 전제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아예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은 지속적인 기도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일단 마음으로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사람, 그 사람이 왜 지금은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없게 되었는가?’ 또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이런 열렬함을 주시고 기도의 은혜를 주셨는데도 왜 그는 자꾸 규칙적으로 기도를 실천해서 그 기도가 더욱더 활발한 생명력을 얻도록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게으름 때문입니다. 그 게으름의 본질적 정체는 삐뚤어진 자기 사랑이고 거기에서 말하는 자기는 죄에 의해서 부패한 본성을 가진 옛 자아입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땀 흘리고 피 흘리기까지 예수를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새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옛 본성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주인이고 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성령을 근심시키면서도 자기 자신의 좋은 것은 하고 싶지만 자기가 원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명백한 불순종인데도 하기 싫어하는 것이 게으름의 정체이고 그 정체가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게으름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름의 껍질을 쓰고 들어오면 경계를 받지 않습니다. 마치 적군의 병사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아군의 성으로 들어올 때에 문지기들이 서있는 정문을 유유히 통과하는 것처럼 그렇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런 육체의 게으름을 없애고 대적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육체의 게으름이 기도의 불을 끕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것이지만 육체가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영혼 혼자 기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워서 자면서 영혼에게 ‘교회 가서 기도하고 와 나 자고있을 테니’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힘이 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 지금은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어있어서 같이 따라다녀야 됩니다. 그러려니 반드시 육체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육체가 그렇게 신령한 일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체는 죄 없으신 육체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 남이 있는 동안 구석구석 죄성이 배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체는 우리들이 우리의 영혼을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다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다룹니까? 우리가 근심하고 염려할 때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담하느뇨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라’하고 인격적으로 말하는데 육신은 그렇게 다루면 안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 육체는 우리의 영적 생활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게으름을 퇴치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이 육체를 다룰 때에 노예를 다루듯이 그렇게 다뤄야합니다. 가혹하게 다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러가자’하는데 ‘힘들어 나 잘래’하면 ‘그래? 힘들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안되겠네. 자자’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기도의 열렬함을 상실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노라”했습니다. 그것이 노예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인들이 노예를 다룰 때 ‘가서 곡식을 빨리 거둬와라’하는데 ‘힘들어요’ ‘그래? 그러면 안되겠네. 어떻게 하지? 할 수 없다. 그러면 거서 주무세요’하면서 다룹니까? 감히 못 간다고도 하지 않고 꾸물대기만 해도 채찍이 날아갑니다. 노예와의 인격적인 대화, 그런 것 없습니다. 무섭게 길을 들입니다. 그러니까 노예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노예의 마음을 심어줘야 합니다. 철저하게 비인격적으로 후려갈겨서 주인이 나타나면 완전히 두려움에 싸이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양자의 영과 종의 영을 이야기하는데 종의 영이 바로 그런 두려움의 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목사님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혼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봐야하고 육체의 욕구도 들어주면서 돌봐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자야될 시간에 자고 싶다고 말한다든지 먹어야할 시간에 먹고 싶다고 이야기하든지 병이 났으니까 약을 말라달라고 하는 욕구는 우리들이 계속 들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쓰고 말 일회용 육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계속 돌봐야 합니다. 뭔가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으면 자고 싶다고 해도 철야를 해야하고 먹고 싶다고 해도 금식을 해야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노예를 다루듯이 다루라는 것은 육체가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놔 두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창조질서의 법칙에 의해서 자야되고 먹어야 되고 상처가 나서 약을 발라야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교회 가기 싫어서 텔레비전 보고 놀겠다고 하는데, 분명히 기도하러 가야할 시간인데 가기 싫고 누워서 책 보다가 자겠다는 데, 술 먹으러 가겠다는 데, 그것을 돌봐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육체에 종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안 된다'하며 단칼에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며 사는 것에 대해서 육체는 순종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었는데도 어느 날 새벽에는 그냥 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죽하겠습니까? 새벽에 일어났는데 비가 펑펑 쏟아집니다. 그러면 환경과 육체의 게으름이 딱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가 되는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는데 빗길에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주의 영광 가리지‘하며 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그래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2년 전에 부교역자 한 사람이 새벽기도에 안나왔습니다. 그래서 전화해서 죽지 않을 정도면 나오라고 했습니다. 나왔는데 기도만 열심히 하더라구요. 못나가고 보니까 아픈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한 것은 적어도 우리는 그런 정신으로 자신을 통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틈을 주지 말고 이 육체를 가혹하게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육체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너는 충실하게 종으로서 네 할 일을 다해야 한다. 반란을 일으키면 넌 죽는다’ 다 제 경험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개척교회를 했는데 신학대학원 교수로 있었습니다. 90분 수업 10시간을 강의했습니다. 야간강의가 있으니 밤 11시가 다돼서 끝났습니다. 끝나고 나도 학생들이 그 밤에 상담하자고 하고 다음날 아침에 설교라도 있으면 설교 준비하고 집에 들어오면 12시였습니다. 그때 또 배가 고프니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씻다보면 1시가 되어서야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5시에 새벽기도 가려면 4시 20분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코피가 펑펑났습니다. 구멍가게라면 ‘폐업’하고 문 닫으면 되는데 교회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있다 전도사 한 사람이라도 쓰면 새벽기도 마치고 기력을 찾아야겠다’하니까 교회가 안되었습니다. 고민하다가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져야할 십자가다. 가다가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자’ 했습니다. 은혜가 되든 말든 힘든 것은 힘든 것입니다.
(예화: 건강 진단을 받았더니 운동하라고 해서 수영을 했는데 코피가 쏟아졌다)
그 힘든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많이 헌신 하신 분들이 우리 나라에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저의 삶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구역질이 쏟아지고 코에서 단내가 났습니다. 그 때 당연히 이 육체는 반란을 일으키다가 나중에는 애원을 합니다. ‘나 죽을 것 같으니까 좀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건강에 대해 두려움이 찾아오면서 계속 육체적 게으름으로 가는 교두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노예를 다루듯이 거칠게 다루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필요합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 너무 힘든데 그래도 신기한 것은 교회만 가면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기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하다가 아침도 못 먹고 수업하러 뛰어가야 했습니다. 견딜 수 없이 너무 힘들었는데 그 때 그것을 견디며 이기게 해준 것이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였습니다.
엊그제도 어는 형제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조언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런 저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한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기도해라. 그것이 개척교회가 성공하는 비결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예처럼 내 육체를 쳐서 다루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상황에 가면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읍소 작전으로 나오면서 ‘계속 나를 이렇게 몰아가면 당신 죽는다’하면서 긍휼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아주 비정상적인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속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입니다. 그러한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리스도에게 이입시키면서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경험하는 성례전적 하나됨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참 씨름하고 있을 땐데 그 때 본 본문이 마가복음 1장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다고 되어있는 데 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내쫓아 주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집을 심방해서 고쳐주시고 숙소에 돌아오시니 각색 병든 사람이 가득 있는데 그 많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해 주시고 새벽 2시 넘어서 잠드셨겠지요.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투쟁을 하면서 살 때 그 본문을 읽으니-오랜 세월 동안 읽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 구절이 들어온 것입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는데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하면서 예수님의 이 지상 생애가 밀려왔습니다 흠 없으시고 죄 없으신 그 분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안식과는 거리가 먼 생애를 사셨고 그렇게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시면서 우리 잘 때 안주무시고 우리 먹을 때 굶으시고 우리가 쉴 때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성경 전체에 퍼져있는 진리들이- 해일처럼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하며 피곤한 하루의 사역 속에서 제자들을 잠들어있는데 예수님 홀로 곤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깰세라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나오셔서 아직은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한 캄캄한 들판 저편으로 기도 처소를 찾아서 사라지시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달려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싶었습니다. ‘예수님 좀 쉬세요. 얼마나 힘든 생애를 사셨는데’ 그리고는 그 들판에 나아가서 우리처럼 안락한 예배당도 아니고 새벽 이슬이 떨어지는 그 거친 들판에서 무릎을 꿇고 땀과 피를 쏟으시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벽기도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새벽 시간에 기도를 안 하면 오전이나 오후에 해야되는데 기도하는 시간만큼 병자를 고치실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실 수가 없습니다. 곤고한 사람들을 권면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기도하시고 깨어있는 시간에는 당신도 깨어있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섬기신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사실 그러면서 저 스스로를 호칭하기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만을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이 지상생애들을 많이 묵상하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 지 모릅니다. 육체가 게으르고 그래서 후려쳐도 눈물을 흘리면서 때로는 육체가 사정을 하면서 내 안에 있는 이 기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나를 유혹하고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그 끈을 끊어버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정말 안식이 없는, 안락함이 없는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들판에 나아가서 기도할 수는 없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집 없이 이리저리 떠돌면서 복음 전할 수는 없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책 한 권 가지지 않은 채 목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집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하고 교회 건물도 필요하고 사택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항상 이 속에 깔려있는 마음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지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기도하시던 그 예수님의 희생적인 지상생애를 묵상하면 단숨에 게으름이 죽습니다. 그러면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때 ‘충성’하며 일어나는 그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전선에서 대장이 소총 들고 비오듯 쏟아지는 적군의 총탄을 철모에 고슴도치처럼 맞으면서 사격을 하고 있는데 졸병이 어떻게 그 전쟁터에 뛰어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그렇게 묵상하면서 게으름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성화에 이르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동으로 가는 길, 그런 길은 없습니다. 그런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이 왜 우리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겠고 왜 우리보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말씀 듣고 다 공부하면서 여러분 생애 가운데 가장 가슴에 와 닿은 화두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이라는 약간 어려워 보이는 단어일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쉬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은 왜 자꾸 도망가려고만 할까요? 왜 자꾸만 사라지려고만 할까요? 그것은 그 체험을 붙든다고 해서 붙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삶이 예수 따라가고 자신의 전 삶이 십자가의 정신을 구현하고 자신의 전 삶이 그 그리스도와 하나되기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삶을 살 때 그런 삶의 틀 안에서 십자가의 경험이 현재적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쳐서 자기 육체를 복종시키는 것 못지 않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무한한 감화를 줍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열렬하게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30년 동안을 사셨지만 알려지지 않은 개인적인 생애였고 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 3년의 공적인 생애를 얼마나 짙은 빛깔로 핏빛 삶을 사셨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쉬는 날도 없고 놀러 가는 날도 없고 자신의 온 마음과 삶 전부를 하나님과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서 쏟아 부으신 생애였습니다. 그것을 계속 묵상해야 합니다.
그 당시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예수님은 뭐하고 계실까? 벌써 기도하러 나가셨을 시간이다’하고 생각하면 힘이 났습니다. 그것이 게으름을 퇴치하는 아주 놀라운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성화의 전 삶, 성화를 위한 그 모든 방면 속에서 항상 상기했던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이후에 나타날 그 재림과 부활의 영광을 묵상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위한 희생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렇게 수고하지 않았을 텐데 오직 예수님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희생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핍박이 있습니까, 복음으로 말미암는 환난이 있습니까? 너무나 자유로운 시대에 예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도는 정말 마지막 남은 객관적 십자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육체를 길들이는 아주 좋은 방법은 때로는 가혹하게 다루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화를 깊이 묵상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 게으르려고 하는 육체를 사로잡는 훌륭한 방법은 기도의 규칙적 습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도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습관은 예를 들면 자기 속에 기도가 잘 되고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날 때에는 그런 틀 같은 것들이 필요없습니다. 지금 기도하고 싶어서 죽겠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이 너무 기도를 안 해서 수업시간에 들어가면 1,2학년 학생들이 바짝 말라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사서-과목이 구약이었으니 상관이 없는 과목이었습니다-리포트를 안 쓰면 점수를 안 준다고 했습니다. 그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아이들이 사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반에서 부흥이 일어났는데 아이들이 놀랍게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 한 학생의 리포트는 한참 가지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썼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죄인이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온 아주 못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도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뛰어올라갔는데 학교 뒷산 문이 잠겨있더랍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이제는 이 산도 잠가버리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잠긴 문 앞에 엎드려서 더 뼈저린 회개를 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기도의 욕구가 있을 때에는 틀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이런 욕구가 계속 우월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지탱해주는 좋은 방법이 습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나오면, 일주일이나 열흘, 2-30일 정해놓고 나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마다 자기와 싸우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5년 10년 15년 나오는 것은 자동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조깅하는 사람이 조깅을 안 면 하루가 찜찜하고 몸도 안 좋고 밥도 안 넘어가듯이 그렇게 자동으로 오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게을러지려고 하는데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는 그런 건강한 습관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려는 욕구가 있으면 그런 틀도 필요 없이 열심히 나가지만 이런 습관이 없을 때 기도의 욕구도 없으면 아예 안 가버리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쉽게 잡아당겨 버리기 때문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게으름은 영혼의 실증과 손잡을 때에 강력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거의 없는데도 교회에 기도하러 갑니다.
가면 무슨 유익이 있냐하면 그 기도해야 할 시간에 누워서 퍼질러 자면서는 무너진 마음의 틀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있으면 그 시간에 새벽의 말씀도 들려오고 주위의 사람들도 기도하고, 또 자기의 본분이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거기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회복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역할을 습관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습관만 계속할 뿐 그 습관이라는 기회를 활용해서 열렬히 기도하는 것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의 습관이 계속 붙어있으면서도 사실은 거의 기도의 영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봤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런 틀이 필요 없지만 이 욕구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브레이크가 없으면 기도 될 때에는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집에 가서 기도하다가 욕구가 어느 순간 사라지면 쫙 미끄러져서 기도를 안 하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하는 그 사이에 죄들이 들어오고 정욕들이 생겨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은혜의 틀들을 신속하게 부식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적합한 틀로 순식간에 다시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다시 이것을 다 뒤집어엎는 씨름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니까 성화의 진전이 없고 싹 다 허무는 일만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진전이 안됩니다. 본전치기하기 바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수시로 은혜가 주어지기는 주어지는데 바깥으로 그 은혜가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죄의 영향을 억누르기 위해서 거의 다 소진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더디게 발전되어 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이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새벽기도를 작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습관조차도 형성을 안 합니다. 그것은 태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나가면 나중에는 외국으로 나가면 자가가도 깹니다. 그래서 한국 시간을 보면 6시입니다. 날짜 선이 바꿨는데도 몸이 그 시간에 알아서 자동으로 움직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유치해 보이는 방법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몸에 익히는라고 별의별 방법을 다했습니다. 표를 만들어서 매일 체크를 해보기도 하고 그래프를 그려보기도 하고, 새벽기도 못 나가면 아침을 안 먹는다든지, 그런데 어떤 방법을 통하든지 간에 하여튼 기도가 습관이 되기 위해서는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을 때 하고 말고 싶을 때 말고 아침에 했다 저녁 때 했다 밤에 했다 안했다 하면 습관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규칙적으로 계속해서 시간과 작업들을 동일하게 반복할 때 습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이런 세계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뒤집어지고 은혜를 받고 갔다고 쳐도 기도의 습관을 형성하지 않으면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2년 전, 3년 전에 받은 은혜를 가슴에 잘 간직하고 상당한 오랫동안 그 회심의 불씨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 훨씬 격렬한 체험을 하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회심의 불씨를 불과 서너 달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 들어가면 반드시 저 사람에게는 경건한 습관이 있고 이 사람에게는 경건을 위한 규칙적인 습관이 없는 것입니다. 열렬함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옛 성품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늘 자원이 있을 때에는 그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능히 이기고 영혼과 마음에 온전한 자유를 복음 안에서 누리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우리 안에 죄가 계속 역사하고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의 자원들이 끊어지고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 죄를 붙들고 살면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불경건한 습관에 빠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육체와의 싸움이라고 하면 넌덜머리가 나지 않습니까?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복음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여러분들이 그 죄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항하는 힘과 전략들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받으면 죄에 대한 미움이 막 생깁니다. 그런데 그럴 뿐입니다. 그때 은혜 받았다고 난리를 치니까 죄는 잠시 물러 갑니다. 그러면서 자기네끼리 이야기할 것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마. 늘 있는 일이니까. 조금 있다 다시 잠잠해지면 그 때 다시 활동하면 돼. 지금은 특별 단속 기간이니 들어가자’ 여름에 받은 은혜 가을이 지나고 겨울 오면 다 털어먹습니다. 그러면 ‘역전의 용사들 다시 모여라’하며 죄가 다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사람도 교회에 있고 강한 사람도 있으니까 특공대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싸안고 가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경건하고 규칙적인 습관이 없는 사람들은 참 신자 되기를 포기하십시오. 그렇게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어서 거기에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conformity(?)를 이루면서 기도의 세계를 형성해가지 않으면 참 신자 되기를 포기하십시오. 안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된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실험을 실컷 해봤으니 잘 알 것입니다. 어디 가서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할 때 참 신자가 되고 싶단 말하지 마십시오. 기도도 안 하면서 무슨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다 지기 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으면 ‘주님 축복 받고 한 밑천 잡아보고 싶습니다’ 할 때 ‘저는 열린 교회 다니는데 참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하면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래요’하는 것입니다. 구도의 길도 안 걷는 사람들이 그렇게 거침없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죽어도 참석하기 싫으면 보따리 싸서 하산해야 합니다. 이렇게 명백하게 복음이 보여주지 않습니까? 기도의 세계가 없는데, 결심하지 않고 그렇게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도 없고 세계도 없고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 대한 묵상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가끔 모여서 와르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면서도 여러분 중 상당수는,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결의가 있습니까? ‘이번에 은혜를 받으면 이 회심의 불씨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난 주님이 이번에 주시는 이 은혜의 불씨, 회심의 불씨를 나는 유지하겠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내 삶의 양식도 바꾸고 스타일도 바꾸고 시간 계획도 바꾸어서 그것을 가장 우선 순위로 놓고 살겠다’하는 구체적인 생각을 하냐는 것입니다. 그냥 은혜 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어떻게 한번 가서 컬컬한 것이나 모면해보려고 왔다면 여러분들은 하늘나라의 쓰레기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엎드려진 것이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입니다. 애굽을 안 떠났습니까, 용기가 없었습니까, 믿음이 없었습니까, 기적을 안 봤습니까, 수고를 안 했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다 엎드려졌습니다. 제가 일생에 여러분들을 목양하면서 가지고 있는 가장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큰 교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들에게 전해주고 죽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내몰릴 데가 없습니다. 저는 이제 다 털어놓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가 지속적이 되지 않고는 결코 여러분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고 성실한 신자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신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또 그냥 돌아가서 되면 기도하고 안되면 말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다음 수련회에 와서 똑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래서 규칙을 세워야합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어느 장소에서 나는 기도한다. 그런데 도저히 그것을 세울 시간이 없다면 직업을 바꾸십시오. 그것도 못하게 할 정도면 잠을 줄이든지 그것도 안될 정도라면 직업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신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를 소진해서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고 사업을 해서 누가 영광을 받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누구의 이름을 빛내고 죽는 것입니까? 과감하게 바꿔버리십시오. ‘나는 이렇게는 살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물으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참 신자가 되려고 하는데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지금 이 환경에 어떤 변화를 주지 않고는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둘 중에 하나를 주십시오.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든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양단간 해결을 주십니다.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 안에서 말할 수 없는 달콤함들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십니다.
열렬한 기도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은 죄라고 했고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의 첫 번째는 육체의 게으름인데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첫째 가혹하게, 둘째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셋째 경건한 습관을 수립함으로서 다룹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산에서 내려가지 말고 오늘이 겟세마네의 밤입니다. 그러니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작정을 하십시오. 내가 일생을 살면서 항상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내 영혼과 마음의 틀들을 지킬 수 있겠다고는 작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도 작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약하고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일 내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디에서 기도하겠습니다는 사실 상당부분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도 도와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새벽에 교회에 나오면 제일 좋습니다. 1-2주나 3-4주 하고 말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작정하지 말고 숨쉬는 날 동안 끝까지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을 세우고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트려지는 것은 내 마음대로 못하고 죽을 때까지 열렬한 기도 속에서 사는 것은 내 결심으로 못하지만 그러나 내가 오늘 말씀 들으면서 내 육체의 게으름을 계속 다룰 수가 없어서 결국은 그놈에게 지고 패배했는데 오늘 다루는 방법을 알았으니 가혹하게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개별적인 싸움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은 기도 생활을 위한 규칙이 성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습관을 가져옵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되면 그 기도 시간에 나아가서 백지 펴놓고 글로 쓰다가라도 오겠습니다. 그리고 헌금 통에 넣고 오겠습니다. 이것까지는 내가 하나님 앞에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하고 결단을 내리십시오. 건넌방이어도 좋고 교회여도 좋고 여러분 집 뒤에 있는 뒷산이어도 좋고 집 가까이에 있는 지하실 교회여도 괜찮습니다. 결단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 규칙 속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수시로 마음을 길어내려고 기도하고 그 마음에서 길어내어진 그 기도의 피를 계속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기도에 바르는 작업들을 매일매일 써버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규칙적인 습관이 없으니까 마음이 기도하기 싫어지며 아예 기도할 기반 자체가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에 하나님이 오셔서 책망하실 때까지 오지부동도 안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할 짓입니까? 개도 서너 번을 이야기하면 알아듣는데, 집회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 사경회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죽어라고 혼나고 혹은 경고 받은 다음에 눈물 뚝뚝 흘리고 다시 미끄러져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가 어떻게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삶이 뒤따라야 그 고백이 고백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이 육체의 게으름라고 했고, 또 하나는 영혼의 싫증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하고자 하는 어떤 욕구가 있었는데 그 욕구가 사라져서, 한때는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어떤 일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 같은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전에는 기쁨이 되던 그 일이 이제는 노동으로 여겨지는 상태가 싫증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이 참 싫증을 잘 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싫증이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과 관련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싫증입니다. 특별히 신령한 의무에 대한 싫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속하는 것들에 대한 욕구가 강력하게 솟구칠 때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욕구가 감퇴됩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뒤집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성품, 신령한 것들에 대해 싫증이 날 때는 반대로 이 세속적인 것들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열렬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런 싫증을 자꾸 내는데 그런 싫증이라는 실체가 마음과 영혼이 은혜로운 틀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그래서 은혜의 지배 아래서 지, 정, 의의 인격적인 요소들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서 은혜의 틀들이 유지되고 있을 때에는 영혼이 항상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싫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갈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은혜가 많이 있는 사람들이-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 계속 역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무지함에 대해서 계속 고민합니다. 텅 비어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은혜의 틀들이 전부 유기적으로 함께 매달려 있는 것이지 독립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 은혜의 틀들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죄가 깃들기에 적합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마음 자체가 영적인 것,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싫증을 냅니다. 왜냐하면 관심사 자체가 방향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관심사와 육체의 협조,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면서 열렬히 기도하고자 하는,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다 결합되었을 때에 진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데, 육체는 그래도 습관이 있어서 기도 시간에 가서 무릎을 꿇었는데 이 영혼의 미각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의 틀들이 무너지면서, 마음과 영혼의 틀들이 변질되면서 이 영혼에 대한 관심이 육체와 세상, 정욕에 대한 기대, 이런 것들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이 의식 세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는데 머리가 요구하는 것은 그대롭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떻게 하든지 관심이 바뀌어버린 마음의 경향을 붙잡아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 과정 자체가 이것을 붙잡아 오는 것입니다. 붙잡고 굳어진 마음을 하나되게 하려고 기도하면서 계속 시도하면 그 과정을 통해서 관심사가 다시 돌아갑니다. 그러면 다시 기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잡아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그리스도의 지 상 생애를- 묵상하기도 힘들어지고 육체를 쳐서 그렇게 복종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게으름과 영혼의 싫증이 딱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고 싶지 않고, 놀고 싶고, 쉬고 싶은데, 영혼이 싫증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이 육체를 야단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둘이 딱 달라붙으면서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은 은혜의 힘을 비웃으면서 기도에 대한 태만으로 확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남아있는 은혜로 깔딱거리면서 물위에 떠있는 그 사람의 목에 연자맷돌을 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잠수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그렇게 게으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계속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원리를 알면서 체계적인 죄의 계획, 은혜의 틀들을 무너뜨리고 기도의 세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간교에 대해서 전체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통찰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접근하면서 이것들을 꺾어야 합니다. 가끔 말씀 들으면서 자극이나 한번 받고 부흥회에 가서 은혜나 한번 받으면서 그것으로 뭘 해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성화의 삶은 남이 살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영혼의 싫증이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육체가 게으르려고 몸부림을 쳐도 영혼이 싫증만 느끼지 않고 갈망만 하면 피곤해도 기도하러 나오고 힘들어도 기도하러 나옵니다. 자더라도 기도하다가 자겠다고 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영혼이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싫증만 내지 않으면 육체는 어느 정도 통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맛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육신의 게으름보다 영혼의 싫증이 먼저 옵니다. 영혼이 싫증 낼 때에 육체의 게으름이 뒤따라오면서 깊은 물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의 영혼의 싫증은 어떻게 방지하고 퇴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영혼의 싫증이라는 것 자체가 죄의 영향입니다. 영혼의 싫증이 생기기 시작하면 영혼 자체가 열렬함을 용납하지 않는 틀들을 마음속에 형성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이런 싫증이 가득 깃들어 있는 상황에서 열렬히 기도하려는 것은 눅눅하게 젖은 텐트 안에서 습기를 잔뜩 먹은 성냥불을 켜는 것과 같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혼의 싫증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열렬한 기도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의 의무까지 파기하게 될 때까지는 그 이전에 무수한 징조가 나타나도 그것을 다 무시해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도가 도저히 안되고 기도할 힘도 없게 되어서 나는 거의 죽게 되었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자신이 너무 기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을 겨우 그때야 생각합니다.
제일 먼저 조짐은 영혼으로부터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내가 지금 처해있는 때가 시험이 아닌가’하면서 깊이 경계해야할 때가 언제냐면 하나님의 은혜 부어주심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 것 같을 때입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서든, 예배시간에 설교를 통해서든, 기도를 통해서든, 무엇을 통해서든 하나님이 더 이상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 그 때가 자기가 지금 영혼이 미끄러지고 있는 시험에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벌써 이 영혼이 실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부어져 내리는 것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성향들이 불일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 부어주심이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부어주셔도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싫증을 내는 영혼에게 열렬함을 다시 회복해주는 방법도 결국은 죄를 죽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싫증을 내기 시작할 때 빨리 대응할수록 그 싫증을 쉽게 열렬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오래 내버려두면 싫증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혐오의 감정,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싫증 정도가 아니라 은혜로운 분위기나 은혜 자체에 대한 저항 같은 것들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라가지 않도록 싫증이 나기 시작할 때에 즉시 그것을 퇴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자꾸 타일러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라고 제가 말씀 드렸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싫증을 내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하고 무릎을 꿇고 다시 어제 말씀드렸던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정직해지고 마음으로부터 기도를 드리려고 애를 써서 마음에 없는 기도의 언어가 쏟아져 나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언어를 잡아들이며 굳어진 마음을 펌프질해서 그 피를 기도의 제목에 바르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 싫증은 아주 쉽게 사라집니다.
죄가 모두 없어져야 싫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죄의 지배 아래 살 때는 죄가 커다란 줄기가 되어서 경향성으로 흐르고 그 위에 끊임없이 영향을 공급해주는 정욕들이 달라붙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경향성들은 단번에 없애지 못해도 간헐적이지만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단숨에 이 죄짓고자 하는 정욕들은 싹 정리가 됩니다. 싫증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끈질김 같은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자주 싫증이 나는데 싫증 그 자체는 죄의 본성의 뿌리 같은 엄청난 그런 힘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싫고 예배드리기 싫고 말씀듣기 싫고 성경공부 하기 싫고 성경 읽기 싫고 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설교 한편이라도 잘 듣고 흡족하게 은혜를 받고 나면 다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형제 자매들 만나서 하나님에 관해서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퇴치가 됩니다. 육체의 이 고질적인 게으름보다는 훨씬 다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통해서-마음이 활동하고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서-싫증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싫증은 싹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다시 생겨나지만 정욕과 함께 싹 사라져 버리고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끊임없이 기도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두 대적을 처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신자되기를 원한다고 하고 말씀에 은혜 받기를 원하고 하면서도 그러한 열렬한 기도생활을 지속적으로 누리지 못하는데, 기도생활 자체가 단속적인데 이렇게 두 가지만을 하나님이 이미 주신 그 성령의 은혜로 적절히 다루면 그렇게 마음에 불을 붙인 이 기도의 열렬함을 불씨를 계속 간직하면서 지속적인 기도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으로부터 받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형성이 되면 우리는 사실 성화엥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있고 그것이 계속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고 그 지식 안에서 계속 자라나갑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끊임없이 도우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합니다. 그러면 사실 성화를 위해서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갖춰지는 것입니다. 성화 그 자체의 initiative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여러분들이 지금 소원이라고 하는 참신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고 우리 하나님만 사랑하며 사는 것도 가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도 가능하고 주님이 보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던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지불해야하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를 엄격하게 다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상생애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의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기도가 되든 안되든 나는 이것을 실천한다라고 하는 의무를 세워놓고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헌신하고 거기에 실제적인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영혼의 싫증을 끊임없이 죄 죽임과 함께 -정욕과 함께- 매일매일 처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높아 보이던 위대한 삶들이 여러분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그 지식을 가지고 정말 그렇게 사는 일만 남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같이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깊이 결단하고 그렇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화를 위한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