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되어야 할 것들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사랑의 회복(눅7:47) 2003.8.11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1
2. 열심의 회복(계3:19) 2003.8.12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9
3. 순종의 회복(신10:13) 2003.8.13 온가족 여름수련회(새벽) 15
4. 열매의 회복(빌1:11) 2003.8.13 온가족 여름수련회(폐회예배) 21
1. 사랑의 회복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는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서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 될 것도 많이 있지만 또 회복해야할 것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삼일동안 새벽이니까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 그러나 반듯이 우리가 되찾아야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성령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크게 두 가지 때문인데 우리를 구원하고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에 그때에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가 그 모든 일들을 주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알게 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의 본질적 특성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면 또한 거기는 성령님도 계시고 성부 하나님도 계십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뿐이지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고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할 때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도 사실은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그런 고결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진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랑의 주된 대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한 교회에 등록이 되고 목양을 받아야지 됩니다. 기본적인 교리를 공부해서 기독교의 뼈대를 이해해야지 됩니다. 기도생활을 하면서 그것들을 경험해야지 됩니다. 또 적당하게 교회에서 자기의 행하여할 의무를 다 해야지 되지만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적절한 교제를 갖고 원만한 성품 속에서 생활하고 진리의 말씀들을 배워가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서 봉사를 하고 이렇게 하면서 사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들어가는 많은 준비요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야말로 요건이고 여건이며 또 신앙생활을 위한 준비일 뿐이지 실제로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정말 신앙의 핵심은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데 그 사랑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한 사랑이고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나의 인생의 모든 계획들이 재편되고 그 사랑 때문에 내 인생의 모든 계획들이 새롭게 서서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의 마음과 삶, 그리고 인생 전체에 모든 요소들이 그 목표에 집중하는 그런 삶,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성화를 이야기하는데 성화라고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성품들을, 죄성을 순결하게 만들어 가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순결이 무엇인가? 우리들이 흔히 이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순결의 개념은 하얗고 깨끗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결의 개념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신앙 밖에서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순결에 대한 개념들은 물론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순결에 대해서 그렇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순결 그러면 이것은 공적 개념입니다. 빌 공자에 공적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제해버리고 빠져나가서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순결한 사람은 죄도 없고 욕심도 없고 탐욕도 없습니다. 흠도 없고 또 순결한 사람은 과도한 욕망이나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자녀의 순결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순결은 공의 개념이 아니라 꽉 차있는 양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죄도 없고 흠도 없고 이런 것이 성경에서 순결이지만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우리가 이렇게 성화되는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들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온전케 되길 힘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되는 것, 그것이 곧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하는 순결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성화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죄성으로부터 우리를 순결케 해나가는 작용이라고 할 때 우리들이 성화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죄를 죽이면 죄가 차지한 공간이 우리의 마음속에 줄어들면서 줄어든 그 공간에 빈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줄어드는 만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거기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목표는 번성하던 죄는 모두 죽고 죄가 차지하던 그 공간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꽉 차서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주 많게 되면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항상 계시다고 하는 것과, 그 다음에 주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나같이 미천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속에 내가 꽉 차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나 한사람을 위해서 내려오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리고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시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많이 받는데 사람들이 왜 나를 시기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하나님 왜 이렇게 편애를 하십니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이 하나님의 온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연합되어있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무한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늘자원을 마음껏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연합의 관계가. 연합도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순간에 원리적으로는 연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연합이고 실제적인 연합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가에 의해서 그 연합의 정도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우리들이 틀에 박힌 교회생활을 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서 그것 때문에 저절로 증진되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죄를 죽이는 것만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역사하게 되고 그리고 그것들로 우리 속에 가득 차게 되고 그렇게 가득차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가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입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종종 우리 육신적인 삶에 있어서도 입증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 새벽에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모두 소리 내어서 대답을 해보십시오. 사랑을 하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사랑을 받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그래서 청마 유치하씨가(?) 우체국에서라는 시 속에서 그런 것을 썼습니다.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노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기뻐하고 또 그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까? 이런 뜻입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그 사랑을 아! 정말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구나. 이 쓸데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실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랑 앞에서 나는 감당할 수 없어서 눈물만 흘립니다. 나는 주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몰라서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그것이 인생의 소망이 되고 생명 끈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너무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 절망이 모든 사랑의 끈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롭게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죄인이라고 계속 지목되는 한 여자가 나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너무나 싫어하는 창녀요 기생이었던 그런 여자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시몬의 집에 계시는 예수님께 들어옵니다. 그리고 향유를 붓고 그 다음에 눈물로 씻고 머리털로 씻어내고 입 맞추고 하는 그런 일을 하는데 모두 예수님의 신체적 부위 가운에 어디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입니까? 발을 중심으로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모든 신체의 부위 중에서 발이 자신이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그래도 쉬운 부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말할 수 없지만 우리 인체의 부위로 이야기할 때는 발이 가장 더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다 샌들을 신고 다니니까 샌들에 먼지 같은 것들이 들어오니까 집에 들어오면 제일먼저 발 씻을 물을 내주는 게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했습니다. 그 여자가 와서 눈물로 떨어트립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에도 자신의 사랑을 발에 표현하기에도 자신은 감당치 못할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찮은 존재라는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이 여자의 예수님을 맞이한 차이를 사랑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이 여자는 죄가 많았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함을 받고 나니까 그 다음에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도다. 왜냐하면 사랑함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참회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주님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이고 늘 사랑하여야 할 주님이시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 속에 정말 살아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참회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게 죄를 죽이는 생활, 순결해지는 생활, 참회,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 속에서 사는 삶 이 모든 것들이 각자 각자 파티큘라하게 떨어진 게 아니라 다 통합되어서 한꺼번에 유기적으로 묶여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참회가 있는 곳에 성화가 있고, 성화가 있는 그곳에 죄 죽임이 있고, 죄 죽임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이 있고, 그 충만해지는 것이 있는 곳에 거룩한 삶이 있고, 그 거룩한 삶이 있는 곳에 하나님과의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죄를 날마다 죽이고 이 거룩한 삶을 사는 이 성화의 진전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사랑의 눈물이 가득 고였을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사랑 때 꼭 처음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처음 사랑을 회복했을 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눈을 뜨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세상에 나아가서 제 욕심대로 살고 죄 죽임도 없고 그리고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도 없고 그렇게 형식에 흐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세상을 적당하게 사랑하려고 하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회개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를 사랑하거나 저를 미워하거나 혹은 이를 중히 여기거나 저를 경이 여기거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복음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아무 쓸모없고 그리고 아무 가치도 없는 나 같은 벌레와 같은 인간을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사랑, 그 은혜와 그 놀라운 사랑, 이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녹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녹입니다. 하나님이 너 이렇게 계속 죄를 지으면 너는 내가 죽여 버린다. 율법이 이렇게 우리에게 외쳐도 두렵기만 할뿐 마음이 녹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도 주님의 사랑을 입었지만 돌아서서 범죄 하는 이 더러운 인간, 지금도 주님의 속죄를 입었지만 다시 세상이 좋아서 주님을 기꺼이 버리려는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이 불결한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찢어서 피 흘리신 그 희생이 지금 내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사랑하고 있는 이 죄를 위해서 그렇게 고난당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불순종 가운데 행해서 끊임없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도 결코 굴복하지 않던 마음이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언제나 거기 서서 죄인들을 부르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등지고 살아가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인지를 깨달을 때에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복음 앞에서 우리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성화의 도상에서는 이게 마음이 녹아내리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야지 됩니다. 이런 것들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죄가 우리 안에 융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확 녹아내릴 때 그때 두 가지가 함께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죄에 대한 사랑, 죄에 대한 사랑이 함께 깨트려지면서 녹아내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고난당한 것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있는 상태에서는 그가 어떤 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한 사랑이 끊을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질기고 그렇게 강력합니다. 그런데 그게 여지없이 끊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녹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쯤 살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하는 자기 의가 거기에서 다시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녹고 자기 의에 대해서 녹으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의 진술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의 소원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고 우리 안에 있는 우세한 욕망은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너무나 그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죄 가운데 빠지고 정욕에 굴복하고 시험과 유혹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그렇게 자신의 은혜를 스스로 죽이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강화되고 있는 죄를 죽이는 진실한 참회 생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데나리온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오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는데 둘 다 탕감해주었다면 누가 더 고맙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여자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죄의 용서를 받고 이 여자도 죄의 용서를 받았는데 이 여자는 더 많이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말씀도 조금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시는 것이지 그 이유는 똑같은 화법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할 때 그 의인은 자칭 의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 그랬는데 바리새인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 사람들이 의인입니까? 자칭 의인입니다 똑같습니다. 저 여자는 진심으로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달았고 그래서 내가 용서해주니까 많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너는 자칭 죄가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너를 용서해주었는데 너는 나의용서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정말 아름다운 신자의 삶을 위해서 회복해야 할 핵심이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특별한 이 사랑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 사랑이 없이는 우리들이 어떠한 동역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활동에 있어서 에너지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난감 로봇 같은데 들어가는 전지가 되는 것입니다. 밧데리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있으면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강권함을 입어서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은 있으나 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남아 있으나 그것을 못 박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동역이 남아서 못 박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꽉 차있습니까? 정말 사랑은 끊임없는 고민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말 여러분들 속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가장 커다란 관심사가 되고 여러분 안에서 그 사랑이 가장 커다란 핵심적인 것이 되어서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감격하며 살아가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예수의 사랑을 알았을 때 어두움 가운데서 흑암에 매어 곤고한 인생을 보내다가 찬란한 밝은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에 그 어두움 속에서 건져내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만을 위한 하나님의 특권인 것처럼 생각했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내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이렇게 힘입어도 되는지 대해서 깊이 아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바로 이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랑은 그냥 온 사랑이 아니라 피를 묻히고 온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그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면서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내 몸에 나타나기까지 주님의 소원을 내 소원으로 바꾸고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서 품었던 세상의 어리석은 꿈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이것은 모두 잠깐 지나는 이 세상에서의 일이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일그러지고 좌절되었던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들을 따라서 참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 인생 전체의 목표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우리의 전부라고 믿으며 그렇게 매일매일 그분만을 의지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많은 제물이나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왜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두려움, 그리고 유혹과 고난이 몰려와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 주님의 사랑이 내 중심에 있으니까 무섭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가혹한 것을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라. 그리고 목숨을 버리기까지 너희를 향해 가지고 있는 나의 이 사랑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순종하면서 살아라. 그래서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어서 신랑과 신부가 연애하는 것처럼 그렇게 연합을 이루며 살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오,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넘치면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그 풍부한 물줄기는 우리의 인격과 삶의 밭, 우리의 생활의 논 구속구석을 휘돌아 돌면서 아름다운 결실들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강퍅한 마음, 감사를 잃어버린 메마른 삶, 섬기고 있지만 어거지로 거의 버티고 있는 정도의 섬김, 눈물이 사라진 기도생활, 가슴을 찢는 참회가 없는 말씀생활 이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근원이 우리 속에서 이런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샘들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이 세상 사람들이 눈을 비비만큼 축복받지 못했어도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드날리지 못해도 우리가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랑의 비밀이 우리 안에 가득하고 우리의 머리가 백발이 되고 고았던 우리의 피부에 주름이 가득해도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눈물 흘릴 수 있는 만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속히 늙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많이 흐르고 우리가 놓여있는 삶의 상황이 너무나 달라도 우리의 본분은 언제나 한 가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여러분들이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2. 열심의 회복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어제는 주님을 만나고 회복되어야 할 첫 번째 것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선한 일을 향한 열심의 회복에 대해 말씀드리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은 교회인데 이 교회의 문제는 더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오직 신앙으로 산 교회도 아닌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적인 현상이 오늘날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하나로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닌 그래서 죄와 은혜를 동시에 소유하고 하고 신앙을 따라 사는 믿음과 세상에 따라 사는 불신앙을 동시에 소유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아울러 섬기려고 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소금도 되고 설탕도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상태가 오늘날의 교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토해 내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물을 커다란 수원지에서 저장된 물을 수도관을 통해서 물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쓰여진 관이 납으로 만든 연관이나 돌로 만든 석관이 유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물은 낮이 되면 햇빛을 받아서 미지근하였습니다. 그럼 그 물을 사람들은 받아서 그늘에 두고 식혀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시기 어려운 대낮의 미지근한 물이 토해내고 싶은 물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예수님도 그런 교회에 대해서 토해내고 싶은 그런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 이런 미지근함이라는 것은 결국 죄의 영향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적대적이든지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믿기 전에는 완전히 굳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 속한 모든 것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들이 불신자로서 살아갈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차가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구주로 영접합니다. 거듭난 후 우리가 첫 회심에서 하늘이 열리고 무한한 축복이 쏟아질 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일에 대해서 뜨거운 열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죄가 들어옵니다. 들어온 죄들이 자리를 잡고 번성하면서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형식은 남아 있고 회심과 함께 우리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회개와 함께 찾아온 아름다운 열심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도 사라지고 십자가에 대한 뜨거운 감격도 사라지고 어린아이와 같은 이 단순한 삶들은 파괴되고 게으르고 나태한 삶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심히 사라지기 시작하자 게으름과 나태함, 영혼의 싫증들로 가득하게 되고 죄가 거하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이 형성되고 그런 마음의 틀은 삶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뜨거운 열심과 진지한 몸부림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을 잃어버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죄의 영향 때문이고 세상에 대한 사랑,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가지고 온 영적 무감각이 원인입니다.
그렇게 열심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이 마음이 미지근해지고 신앙의 형식만 남은 사람들이 어느 날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하고 나면 단숨에 첫 회심 때 가졌던 뜨겁고 열렬한 열심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식었던 마음, 그래서 신앙의 형식만 남고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뜨거운 사랑은 사라졌던 마음에 다시 회심의 불이 지펴집니다. 그리고 아주 뜨거운 열심히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열렬한 사람이 되고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는 일에 있어서 열렬하고 열심히 있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해서 냉담하거나 마지못해서 하거나 열매 없이 하면서 부담을 느끼고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뜨겁게 회개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하고 그 사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고 하는 뜨거운 열심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회복하는 것을 보는 것은 사람들에게도 기쁜 즐거움입니다. 이세상의 쓸데없는 지식을 탐구하는데 열렬하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힘쓰는 그 열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열렬합니까? 그래서 휘 라티머라는 청교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교역자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교역자는 마귀입니다. ‘그는 자기의 자리를 떠나는 법도 자신의 사명에 대해 열심을 내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부지런히 성도들의 마음속에 독초의 씨앗을 뿌리려고 합니다. ’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광고 속에 약동하면서 숨쉬는 세상의 열렬함을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한 일에 굴복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안의 죄가 담대함과 광기와 맹렬함으로 활동합니다. 담대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모하고 미친 기운이 그 안에 있고 맹렬합니다. 그 속에 있는 죄가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소원과 싸우고 은혜와 싸우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죄의 삼킬 듯한 기세를 만난 사도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그렇게 열렬합니다. 마귀의 열렬함을 베드로가 ‘믿는 자라도 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 배경이 되는 것은 로마 시대에 있었던 일인데 며칠씩 사자를 굶긴 다음 죄수들을 운동장에 두고 그런 사자를 풀어놓아서 쏜살같이 달려가 죽이는 것처럼 마귀는 쉬지 않고 열렬합니다. 세상도 열렬하고 그 무모함과 광기와 맹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야합을 하고 사는 것 이외에 새로운 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미지근한 신앙생활로 자기 안에 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맹렬하게 유혹하는 죄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공격하는 맹렬한 마귀의 공격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렬해야 됩니다. 저는 이것을 핏빛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십자가의 정신이 뼈 속까지 아로새긴 교인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처럼 때리고 찔러도 자기는 뼈 속 깊이 예수가 사무쳤기 때문에 예수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열렬하게 해야합니다. 교회 마당을 쓸든지 작은 일을 하든지 간에 열렬하게 해야 합니다. 차갑든지 뜨겁든지 결국은 우리 신앙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핏빛신앙이 뼈 속까지 베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 열렬해야 합니다.
미지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세상도 자기를 친구라고 불러주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에서 보면 이런 사람은 변절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오면 주님도 뜨겁게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한발을 세상에 두고 있으니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불결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만 뜨거운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느낄 수 벗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런 상태에 자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내버려 둘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한번 정직하게 생각해서 주님이 없으면 온마음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 고백하고 한번 떠나가 보십시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제가 어떠하든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렇게 사는 것이 지긋지긋합니다. 세상에서도 세상을 향해 이방인이고 교회에 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이방인입니다. 제 소속이 어디입니까? 저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쳐다보십시오.
이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은 하나님을 찾는 일에 있어서 열렬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큰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이 살아 계시면 저를 만나주셔야 합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여쭈어 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속에 뜨겁게 믿어질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열렬해졌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눈물 흐리며 참회하였었네
나의 마음도 뜨거웠었네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고는 설교는 들을 수가 없고 기도도 할 수 없고 복음도 전할 수 없고 성경도 읽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입을 열기만 해도 마음속이 불같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 뜨거운 열렬함이 우리 속에 역사할 때 그 뜨거움으로 우리 안의 끓어오르는 죄의 광기와 무모함 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열렬한 유혹도 이길 수 있었고 마귀의 열렬한 공격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열렬함이 우리 속에서 역사함으로써 우리들이 비로소 마귀도 이기고 세상도 이기고 나도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열렬함들 후에 그 처음 회심이 흐려지면서, 우리 안에서 보존이 되지 않으면서 흐려지고 결국은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성화의 삶에 대해서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과 생애, 지금도 우리를 향해 계속되는 예수님의 심정은 열렬함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 심장이 열렬함입니다. 그 사랑의 열렬함이 하늘 영광을 버리게 하였고 그 사랑의 열렬함이 하나님과 본체이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을 거절하고 사람의 형체로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사랑의 열렬함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살게 하셨고 피어린 통곡과 고뇌 속에서 씨름하면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신 그 분의 생애가운데 통곡하였다는 기록이 3번이나 나옵니다.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열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 때 에는 그분 안에 있는 열렬함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목표 자체가 당신자신의 행복과 안녕이 아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뼈가 깨지고 살이 찢어지고 피 흘리는 속에서도 예수님의 열려한 관심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에게 가서 꽂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땅을 위해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시던 장면에서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다가 핍박을 받는 장면에서나 병들고 소망이 없는 죄인들을 고치고 싸매시는 광경에서나 심지어는 굶주리고 배고픈 영혼에게 밥을 먹이선 때도 예수님의 뜨거운 열렬함이 베어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만나고 핏빛사랑에 접촉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런 열렬함에 불이 질러졌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렇게 예수님이 그 마음에 불지른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통곡하고 고난을 받으며 죽기까지 분투한 열렬한 순교의 역사가 곧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 복음, 그 예수에 미쳐서 그 분이 자기를 위해 열렬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으신 그 열심 때문에 자기도 그 사랑에 담겨져서 열심히 산 사람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 증거하는 일 마치려함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던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미쳤고 지금 이 시간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미지근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이 소개 될 때 묘사가 ‘아멘이요 처 충성된 증인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신 이’ 라고 묘사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열렬함이었고 그 예수님의 열렬함은 아멘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예수님이 별명은 아멘이었습니다.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땅에 내려보내는 아버지의 명령에 오직 아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며 사신 30여 년의 지상생애의 고생도 아버지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때에도 아멘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열렬함이 우리에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참되고 진실한 회개로 말미암는 그 사랑의 열렬함이 역사하기만 하면 우리는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또 충성된 증인이라고 소개됩니다. 지상생애 모두는 복음을 모르고 영적인 암흑 속에 사는 사람들, 무지해서 이 세상의 실패를 운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끝없이 복음전하며 사신생애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물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십자가가 활활 타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핏빛신앙이 여러분 속에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예수의 사랑의 강권함을 입었기 때문에 여기 있을 수밖에 없고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만나든지 나는 상관없다라는 그런 뜨겁고 열렬한 고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은 이제 당신을 향해 냉담한 이 세상을 보는 것도 지겨울 것입니다. 하물며 당신의 열렬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피를 발라 구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향해 열렬함을 갖고 있지 않다면 주님은 어디서 그 열렬함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몸도 주님께 바쳐지고 생명도 바쳐지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고 찢으신 그 고결한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열렬히 살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이 모든 것 버려서 열렬히 살지 않으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그들에게 불을 내리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때문에 흐느끼는 흐느낌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어하고 당신이 통곡하고 싶었던 기도를 그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셔서 마지막에 어두움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 그치는 그날에 복음의 영광과 그 은혜의 빛 아래서 함께 찬송하시길 주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럽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해 열렬하지 않는 모든 삶은 불결하고 더러운 삶입니다. 저는 은퇴한 후에 조용히 숲에 들어가 쉬고 싶지 않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웃고 죄인들과 함께 울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너무 할 일이 많습니다.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모두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메입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게 할 일이 많고 그렇게 열렬한 사람이 필요한데 이 선교지에 가 보고 저 선교지에 가보면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참답하게 추수할 영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갈 사람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희어지지 추수하게 된 들판을 보면서 예수님의 흐느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게으르게 살고 대충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저는 슬프고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멀리 선교지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우리 주위를 보면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모두 우리의 마음이 미지근하기 때문에 많은 할 일을 길가에 버려지는 돌처럼 내버려두고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지 않고 육신의 즐거움을 찾아 사는 일이 얼마나 주님이 세상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모둔 선한 일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대신에 구원의 아름다운 투구를 벗어버리고 거룩한 성도의 세마포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어 땅에 주저앉아서 육체의 정욕을 좇아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버린 짐승과 같은 사람을 보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두 죄입니다. 어둠가운데서 건져주셔서 진리의 빛을 알게 하셨는데 어떻게 열렬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른 많은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정말 불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깊이 회개하고 내 영혼부터 시작해서 내가 섬기는 일 모든 구석에 이 열렬함의 불이 담겨지도록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3. 순종의 회복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한가지가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열면 제일 먼저 나오는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모든 창조의 내용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창조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할 때 어떻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분의 명령 앞에 복종하였는지 보여줍니다. 그렇게 복종하던 세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은 물론이고 이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거스르는 것이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치료되고 계시록에 가서는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고 성들이 어디를 가든지 어린양 예수를 따르고 순종하는 곳이고 새하늘과 새땅도 예전의 창조주에게 복종하던 순종을 회복하는 것이 성경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전체를 볼 때 이 순종이 얼마나 커다란 주제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l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을 명령받을 때 그 명령은 대부분 불신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과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시지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이 신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애굽에서 크고 능력 있는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는 만나를 보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수많은 원수들을 파하고 이기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고 가나안 정복을 앞둔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종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가 가장 커다란 원인이지만 불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은 아무리 죄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려고 해도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을 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려고 결정하지 않는 한 불순종하는 삶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가 불순종을 선택하면 우리의 신앙의 양심은 불순종하며 살아가면 좋은 결과가 있고 이후에도 내가 만족할 것이라고 증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것은 아무 생각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미래에 대해 아무 대책 없이 하는 행동이 불순종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성경에서 볼 때 불순종하는 사람들에 대해 약속된 미래가 아주 어둡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된 미래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형벌이 예비되어 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불순종할 때 그들에게 예고된 실질적인 성경의 경고는 전자 못지 않게 어두운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들에게 징계가 있을 것과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곤고해 질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커다란 목적이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일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뿐 아니라 우리 실제적인 삶을 더듬어 보아도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나가던 그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장은 좋습니다.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키고 성찰하는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악한 욕망과 싸우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라가려고 하는 분투하는 노력도 없습니다. 당장은 아주 자유스러운 삶을 살지만 그 결과도 처음과 같았습니까? 마지막은 그 자유로운 처음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아주 어둡습니다. 불순종하며 살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화목입니다. 기도할 수도 없고 마음의 끊임없이 솟아나던 기쁨도 사라지고 그리고 사람이 아주 천박해집니다. 세속적인 것에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기도의 은혜, 하나님과의 화목, 영적인 기쁨 이런 자기 복종의 아름다운 실천이 모두 사라지고 결국은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를 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했는데 정말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쓸모 없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하는 사람의 결과라고는 하는 것을 성경뿐 아니라 우리의 경험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순종하면서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마음을 모질게 먹고 순종해야겠다고 생각만 하면 순종하는 삶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순종하기 위해서는 결심이 굉장히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 있고 마음이 잘 정돈되어서 은혜로운 틀이 형성되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 수 있는 은혜로운 틀이 이 속에서 잘 형성되면 순종하는 것이 아주 기쁘고 쉽습니다. 불순종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강한 반역의 경향성이 이 안에 없기 때문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엄청난 희생을 동반하는 것처럼 보이냐면 이 마음과 삶의 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영혼은 죄가 거하기 적합하도록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죄가 거하기 적합한 틀이 되고 은혜가 거하기에는 부적합한 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이 비추어도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인가 자신의 영혼에 놀라운 자원을 공급받는 일이 거의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자신 속에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랑하고 정욕과 죄의 경향성이 강해졌고 그것을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의 빛이 비추면 갈등이 자꾸 사라집니다.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가려고 하면 그 자원을 필요하고 그 자원이 내 죄를 죽이고 망가진 틀을 복원하는데 도움을 주는데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면 그 빛을 부담스러워하고 거기에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이니까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틀을 가진 사람이 어느 정도는 순종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마음에 없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섬김을 받을 때 부족한 인간인데도 저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서 이일을 도와주는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짜증으로 이 일을 도와주는지 파악이 되는데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밑바닥까지 모두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어느 하나하나가 분리되어서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엮어져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전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경외심으로 순종하면서 사는 삶은 그 사람 전체가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순종하는 삶을 보면서 그 사람의 중요성, 그 충성과 불충성, 애정과 반감을 평가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너무나 율법적이구나 어떻게 우리 행동 하나하나를 보면서 그것이 우리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실까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너무나 정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매를 말씀하신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으니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찌니’ 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총체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을 고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핵심에는 우리 마음과 영혼이 자리잡고 있고 이것을 위해서는 진정한 영적인 변화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지 못하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과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면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사는 삶을 파들어가면 반드시 거기에는 자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욕구와 의지가 존재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징벌하시고 그러면서 사랑하시고 말씀을 보내서고 이제 가나안까지 주시고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이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히 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시 문명의 중심지요, 발달한 선진 문화를 누린 그 가나안 한 복판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이 세상의 창조주인 것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즉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 민족이 특별한 민족이고 행복하고 능력 있는 민족이며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임을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주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고 너희를 복 주고 복 주어서 너희만큼 행복한 민족이 없게 하고 너희를 에워싸고 멸망시키려는 나라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고 결코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만들고 그 나라를 모두 부셔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며 너희를 대적하는 나라와 민족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물같이 녹여주어 너희를 두렵고 엄위로운 존재로 만들어 하나님의 놀라운 이름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민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단순합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을 지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의 갈길을 인도하고 너희의 대적을 내가 부수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 이름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놀라운 초청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만 가지고는 그들이 행복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늘 교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행복을 위하여 너희에게 주는 이 계명을 순종하며 살아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희생이요,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봉사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우리를 위해 예비한 하나님의 행복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아도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불순종 할 때 처음에는 편하고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불순종할 때 마음의 틀이 죄가 거하기 좋은 틀로 바뀌었는데 그 때 자원도 없이 억지로 순종하던 삶을 청산하고 자기 멋대로 살면 마음의 틀과 불순종의 행동 가운데 일치가 되어 편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 일치가 일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삶이 붙어서 강한 추진력을 얻으면서 불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은혜로운 틀이 있을 때는 우발적으로 생각 없이 불순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의 은혜로운 틀이 무너진 가운데 불순종을 실천하면 마음의 무너진 틀은 불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강력하게 제공합니다. 그 다음에는 불순종이 아주 의도적이 되고 정교해 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어서 불순종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기가 더 많은 쾌락을 위해 불순종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니까 기도하려고 하고 은혜를 받으려고 하려해도 출산하는 수많은 죄가 다시 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틀에 영향을 미쳐서 더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그 불순종의 죄들은 다시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곤고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자신의 영혼 안에 아무런 하늘자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쓰디쓴 죄의 열매들을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느끼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고통이나 마음의 괴로움을 통해 자신의 문제의 본질을 보게 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잠시 좋은 것 같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계획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얻을 수 있는 어떤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그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의 열매를 가져오고 우리의 영혼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또한 불순종의 끝이고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손하면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기가마 곁에서 국물을 얻어먹고 마늘과 파들을 먹었지만 광야에서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 만나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셔서 수시로 말씀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언제나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우리는 언제나 불순종하고 끝은 너무나 쓰디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려고 하는 것도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도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이고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려는 것도 순종하는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순종하면서 사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 자신을 타일러서 우리의 참된 행복과 존귀와 그리고 성도로서의 영광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그 분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에 순종하는 삶에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과 존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는 예수님이 충분히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충성스러운 생애였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앞에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셨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가장 커다란 낙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복음의 비밀과 은혜의 빛을 내려주셨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의 커다란 목적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고 우리의 빛된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는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삶이 궁국적으로 어떤 삶인지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참된 신자가 되었을 때 그 때 그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하나님 뜻을 자기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그대로 순종하고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땅을 고치고 나라에 임하시는 그 광경을 자신의 삶을 통해 목도하면서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 자기와 같이 미천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에는 지는 것을 기뻐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면 자신은 가리워지고 영광의 빛이 사라지고 무명하게 되고 장막 뒤에 숨어있을 지라고 데 개의치 않은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과 하나님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난 사람, 돈 많은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예전부터 사면을 두루 살피며 온전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고 온전히 순종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소중한 사람은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바로 인간들이 깨트린 불순종의 삶,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법을 저버린 불순종과 죄들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생애였기 때문에 그분은 처음부터 탁월한 순종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오죽하였으면 그분의 별명은 아멘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우리의 별명도 아멘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늘 하셨던 말씀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하면 어찌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겠느냐?’ 였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로다
어린아이처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내가 잘 순종할까 그리고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가정, 사업, 직장생활 교우관계의 많은 삶이 밭이라고 한다면 순종하는 삶은 넓은 밭 한 가운데 솟아나는 샘과 같습니다. 순종하는 삶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순종하려고 하면 그 속에서 물이 솟아나면서 자녀의 교육의 밭에도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니 기도도 그렇게 못해 주었는데도 그 물이 흘러가서 그 아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업하나에 매달려서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은 사람도 생겨났는데 그런데 신앙의 변화를 받고 나니까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면서 살까 생각하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니까 순종의 물이 흘러나와서 사업이 일어나는 원리입니다. 중요한 건 내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면 신기하게 거기에서 솟아 나오는 물이 고민하는 들판으로 흘러 들어가서 열매가 열리고 곡식이 자라는 것입니다. 많이 깨트려지고 변화되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나면 메말랐던 밭에 곳이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자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께 순종하려는 자를 찾으시면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 때로는 울때도 가난할 때도 웃을 때도 부요할 때도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있고 낮은 지위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이든지 간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하면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복종하는 살을 살아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이 하나님께 친밀히 되고 기쁨이 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순종하지 못하면서 고민하는 많은 문제들, 염려하고 가슴을 졸인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하면서 생활의 염려와 미래의 불안 괴로움과 마음을 쓰는 그 고통의 마음 씀을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변화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다해 열렬함으로 게으름을 죽이고 영혼의 싫증을 죽이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의 삶을 살아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보실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많은 축복들을 누리면서 주님의 영광들을 드러내면서 사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4. 열매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11)
그리스도인이 참신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참신자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커다란 명예나 부귀, 권력을 소유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하나님은 큰 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작은 사람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커다란 빌딩들이 많습니다. 그런 건물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높은 건물이 아니더라고 이 세상에는 예쁘고 아름다운 건물이 많이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이나 하늘 끝까지 맞닿은 것 같은 산들만이 세계의 명산이 아닙니다. 금강산은 그렇게 놓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보고 감탄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유명하지 않고 많은 물질이 있어서 그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해도, 높은 권력을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노력하고 애쓰지만 우리가 모두 그렇게 부자가 되고, 공부를 잘해서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는 석학이 되겠습니까? 저는 모든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 의지하고 살아도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자 그릇으로 빚으셔서 금 그룻도 만들고 은그릇도 만드시고 또 큰 그릇도 만드시고 작은 그릇도 만드시고 접시도 만드셔서 다양한 그릇으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학생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가정의 주부가 되면 열심히 그 일을 감당하고 사업을 하면 큰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두 다윗같이 되고 모두 요셉같이 되고 모두 다니엘같이 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보실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운명에 매여서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게 사는 삶도 하나님 앞에 다 기억되고 비록 자신이 그렇게 커다란 사람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아 하나님 앞에서 구김이 없는 삶을 사는 것도 모두 기록이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은 곧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를 많이 맺으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커다랗고 높은 빌딩이나 산처럼 그렇게 쓰임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심어놓은 그 놓으신 자리에서 게으름 때문에 열매를 못 맺고 나태함과 싫증을 방치하고 죄를 붙들고 삶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어디에 심겨졌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박이라는 열매를 볼 때마다 저는 참 신기합니다. 콩알만한 씨에서 커다란 수박이 매달리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대추나무를 보면 수박보다 나무는 크지만 열매는 크지 못합니다. 잣나무는 대추나무와는 비교할 수없이 크지만 열매는 아주 작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그만 대추씨 심으시고 ‘왜 너는 열매가 수박 같지 크지 않느냐 ’고 말씀하시지 안습니다. 각 나무는 각 나무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큰 열매가 맺도록 심으신 나무에서는 큰 열매가 맺고 작은 열매를 맺도록 되어있는 작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대추나무가 비록 수박보다는 크지만 대추나무에 대추가 많이 열려서 빨갛게 익어가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잣나무가 서 있어도 잣은 또 그런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신분이나 상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당사 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살아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저는 진리를 연구하여서 복음 진리의 빛을 깨닫고 복음의 비밀에 대해 깊이 알아가면서 사랑이 점점 자라는 것을 봅니다. 이 세상적인 지식과 신령하지 않는 지식은 사랑의 불을 끄지만 복음의 비밀들에 대한 지식이 비추면 자신의 참모습과 부족한 모습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비밀들을 끊임없이 가르쳐주다고 죽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가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우선 첫째는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그 다음에는 그 복음진리를 맛보았던 사람들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고 마지막은 나 자신의 구도자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소화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은 공부를 많이 해야합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후회가 듭니다. 예수 믿고 열심히 몸부림치면서 살았지만 꼭 필요한 것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그리고 탁월한 청교도와 종교개혁가를 보면서 그들의 지식의 깊이와 한없는 깊은 영성,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루 말 할 수 없는 해박함,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의 역사를 살피는 탁월하고도 일관된 역사관, 시야를 보면서 한없이 나 자신이 왜소한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때로는 낙심도하고 투덜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분투한다고 한들 나를 그 뛰어난 영성과 지성 앞에 무릎을 꿇고 울게 만들었던 교회역사상 서넛밖에 없는 그 사람처럼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그분들은 알프스 산맥 같았고 그 분 중 몇은 히말라야 산 같았고 몇은 에베레스트 산 같았지만 저는 그런 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뒷동산같이 영성이나 인격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자라지만 그리고 무슨 산이 될지는 모르지만 다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지식의 빛 아래서 그 지식이라도 붙들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고 내 삶에서 게으르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고3처럼 공부하고 신학교 입학하는 학생처럼 기도하고 내일이면 주님 앞에 부름 받을 사람처럼 설교하면서 살아서 그 산이 뒷동산 같아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맺은 열매는 탁월하고 놀랍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분은 그분들의 나무이고 나는 나라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시면서 너는 어떻게 칼빈처럼 공부도 못하냐 너는 어떻게 오웬처럼 영적인 깊이도 없냐 넌 그렇게 에드워드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이 탁월하시 못 하느냐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대로 이 자리에서 맺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열매에 대한 소원이 무엇인지 헤아려 열심히 하나하나 맺어 가는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면 하나님 앞에 기쁨을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열등감과 비교의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경험이 부족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 앞에 받은 사람이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리스도인이 사업을 하면 세계최고가 되고 공부를 하면 판검사가 되고 기술을 가지면 세계최고의 장인이 되어야 믿음 좋은 사람처럼 여겨지는데 어차피 아무리 믿음을 잘 가져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수가 정해져 잇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이미 자신에게 주신 지식의 빛을 붙들고 내 인격이 주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열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선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서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나를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신앙이 놀랍게 네 인생에 역사하는구나 능력이 모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고 기쁨과 소망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저는 신방가면 부인보고 남편이 변했느냐고 물어봅니다. 부인이 정말 변했다고 하면 남편이 정말 은혜받고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이 안나오면 남편이 무엇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내와 갈등을 일으키다가 아내가 교회 나와서 말씀을 듣고 복음진리를 받으면서 놀랍게 변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보고 놀랍게 변하니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는 것은 인정하기가 싫은데 그래도 너가 변하는 것은 사실이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너를 변하게 하였느냐 고물을 때 부인이
내 안에 사는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러면 그것을 남편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하던 남편들이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라는 것은 인정하기 싫은데 남편이 변하는 것을 보니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 남편 안에 들어오셔서 답답하던 사람을 바꾸어서 하나님 사랑하고 사려 깊고 가족들을 따뜻하게 돌보고 기도하고, 못된 성품을 죽이는 온유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살아 계시다라는 것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내 가까이 사람들이 내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런 사람을 구석에 두겠습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맡아서 해나가는 일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분부를 따라서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그 은혜가 모두 사용되어야 합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은 정직하고 근면하고 합법적이고 창의적이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은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럽게, 주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충성스럽게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 열매로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드러낼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이고 더 많이 주십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날마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축복의 진수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아름다운 연합 속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 받는 끊임없이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위한 하늘 자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하늘자원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곤고하던 사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받은 많은 시간과 물질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모두 살게되기를 하나님이 꿈꾸시기 때문에 가치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말씀의 빛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다시 새롭게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계획에 따라 사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회복되어야 할 것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