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영혼의 싫증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화와 싫증의 근원(요6:68) 2004. 1. 11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
2. 영적 싫증의 정체(요6:68) 2004. 1. 12 새해말씀사경회(저녁) ...........................................................................17
3. 싫증의 역사(요6:68) 2004. 1. 13 새해말씀사경회(저녁)........................................................................................35
4. 싫증의 파괴력(요6:68) 2004. 1. 14 새해말씀사경회(저녁) .................................................................................50
5. 싫증을 이기는 대책(요6:68) 2004. 1. 15 새해말씀사경회(저녁) .......................................................................69
1. 성화와 싫증의 근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이번 사경회에는 6장 68절 이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해서 “성화와 영혼의 싫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번 은혜를 나누어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싫증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싫증이라고 하는 말은 많이 나오지 않지만 싫다. ‘싫어한다.’ 라는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쭉 찾아보면 히브리어에서도 그렇고 희랍어에서도 그렇고 여러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대게 그 싫증이라는 말이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혹은 인간이 혐오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내가 너희들이 월삭과 절기로 모이는 것이 싫다. 이럴 때 ‘싫다’는 것은 아주 적극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이 싫다. 싫증이라고 하는 이 말은 대게 권태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싫증이 곧 영적인 권태감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권태감이 무엇인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신앙생활을 하다가 느끼는 이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에 대한 권태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좀 우리들이 생각해볼 게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열렬함이 사라져가면서 느끼게 되는 피곤한 권태감입니다. 그런데 이 싫증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싫증이 싫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싫증에서 그 다음에 반감으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판단하기를 이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렬함의 생기를 잃어버린 신자가 그 열렬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감정으로 나아가는 그 디딤돌이 바로 싫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다가 눈물이 마르기 전에 하나님 정말 이런 식으로 나에게 대해주시겠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 솟구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열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가 세월이 흘러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 대해서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품은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그 열렬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끼게 되는 싫증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죄 한 다음에 경험해보셔서 알겠지만 일단 범죄를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품은 다음에 그것을 꺾고 부드럽고 순전한 마음이 되어서 다시 하나님께 열렬하게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은 누구든지 다 압니다.
그러나 싫증까지 왔을 때 그 싫증을 떨어내버리고 속히 다시 열렬함을 회복하는 것은 그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권태감을 느끼고 피곤해지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내버려둡니다. 어디까지 내버려두는가 하면 열렬함을 모두 잃어버리고 싫증을 느끼다가 결국은 반감으로 가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실제로 죄를 지어서 양심에 가책을 느낄 때까지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배를 타고 가다가 이렇게 기우뚱 기우뚱 하면 침몰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면서 배를 좀 바로 잡고 구명조끼도 입고 그러면 좋은데 물에 빠져서 물고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아! 빠졌구나. 호흡이 불편하겠구나. 죽겠구나.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뒤집혀지면 빠지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음지킴도 그렇고 게으름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저 자신의 성화의 영역, 영혼의 싫증을 다룬 그런 책이나 그런 논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이게 누가 집중적으로 연구한 적은 없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영혼은 싫증에 빠질 때 그때가 있고 또 반대로 영혼은 열렬함을 가지고 있고 육체는 게으릅니다. 그때에 어느 것이 신앙생활하기가 더 힘들겠습니까? 하도 문장이 기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실제 생활의 자세가 있습니다. 총체적인 순종을 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지 된다고 했습니까? 일체의 성실함과 그 다음에 부지런함입니다.
그런데 이 성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내면의 지향성입니다. 마음에 있는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참 성실해.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항상 땀을 뻘뻘 흘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다못해 종이 한 장을 뒤집어놓아도 똑바로 놓고 뭐든지 자기 책임 맡은 것에 대해서는 꾀를 부리지 않고 정확하게 해내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경향성, 혹은 지향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마음의 지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뭐가? 이 성실함이,
그런 마음의 지향성들이 뭐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가 하면 영혼의 싫증에 대해서 방해를 받고 그 틀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성실하던 마음의 경향성들을 상실하게 되고 아주 태만하고 나태한 그런 마음의 경향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성실함과 그 다음에 뭐하라고 그랬습니까? 부지런함, 이것은 뭔가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부지런함, 그러니까 육체로서 자기에게 부가된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지런함은 무엇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가 하면 게으른 육체, 육체의 게으름에 의해서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에는 싫증이 질병이고 육체에는 게으름이 질병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이 각각 마음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마음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미 전문가가 되었으니까 뭐 설교를 들었고 책을 공부하고 있고 테프를 들었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태까지는 육체의 게으름에 대해서 가책을 많이 느껴왔습니다. 진짜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잠을 많이 자고나서 회개해본 사람이 있는가?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이 회개했습니다. 내가 책에 쓴 그 학생, 내가 이 게으른 삶이 얼마나 부패한 삶인가를 이야기하고 영적 인물들이 어떻게 새벽의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하니까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목이 메어서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많이 자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이 게으름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함께 갈 수 없는 대적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녁때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거나 철야기도를 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일찍 잤습니다. 9시쯤 되었을까 MBC뉴스를 보다가 최악의 잠자리에 드는 방식이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리모콘 탁! 끄고 잠들어버리는 것, 그렇게 잤습니다. 아픈 것도 아닌데 잠이 와서 계속 잤습니다. 그래서 종이 울려도 자고 새벽기도 갈 시간인데도 잤고 실컷 잤습니다. 자다가 허리가 아프고 오줌이 마려워서 할 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침 흘리고 꿈꾸고 계속 잤습니다. 그렇게 계속 자니까 허리가 아프고 오줌이 마려워서 아랫배를 붙들고 일어났는데 가보니까 애들은 벌써 다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다 출근하고 혼자 멍하니 있습니다. 가서 소변을 보고 그리고 창문을 한번 열고 내다보니까 해가 너도 인간이니! 그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찬송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찬송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낮인데 무슨 아침이래. 그렇다고 한낮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기도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할머니 하신 말씀이 야,썩을 놈의 육신을 뭘 그렇게 아끼니. 진짜로 썩을 것인데. 우리가 칼을 잘 갈아서 칼집에 넣어두는 것은 그렇게 매달아두려고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한번 무라도 자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이 배고프다고 하면 먹여주십시오. 굶지 말고 먹여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늘 자매들보고도 이야기하는데 아무데서나 교회에서도 일하다가 아무 곳에나 자지 말고 좀 깨끗한 자리에다가 눕혀주세요. 때 묻었으면 가서 씻어주고 자동차도 세차하는데 씻어주고 어디 찢어졌으면 꿰매고 그렇게 해서 잘 간수했다가 필요할 때는 좀 확 써야지. 매일 씻기만 하고 바르기만 하고 그리고 간수만 하고 보존만 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썩어갑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무 재미도 없지,
그런데 육체의 게으름이 그렇게 집요한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주 집요합니다. 특히 이 육신이 질병이 있거나 만성적인 연약함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게 질병이 주는 효과와 그 질병을 이용해서 안일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마음의 부패성이 어떻게 뒤섞이는지를 본인이 모릅니다. 자기 멋대로 해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넌 40%는 꾀병이고 60%는 진짜야. 이렇게 얘기해줄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조심해야지 됩니다. 결국은 그렇게 게으름이 집요한 것입니다.
그것과 더불어 싸워야 되는데 문제는 영혼의 싫증이 그것보다 영향이 더 큽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갑자기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집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게 성화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흘러야지 변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변화되면 즉시 싫증을 털어버립니다. 그리고 열렬해집니다. 그런데 육체가 아직까지 옛 습관에 의해서 게으릅니다. 그런데 영혼은 싫증이 없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서 열렬합니다. 그러면 이 영혼의 열렬함이 게으른 이 육체를 쳐서 복종을 시킵니다. 신기하게 시킵니다. 그러니까 매일 그렇게 척추가 아프고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이 자던 사람도 은혜 받으면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기가 막힙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리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혼의 열렬함이 게으른 육체를 막 잡아당겨서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육체는 부지런합니다. 하여튼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새벽 4시에는 일어납니다. 하다못해 일어나서 내복을 벗어서 이를 잡는 한이 있더라도 하여튼 4시에는 일어납니다. 그런데 드물기는 하지만 동네 생활을 해보면 옛날에는 담장도 없고 다 터서 삽니다. 유난히 부지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는데 빡빡!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눈이 조금 왔는데 그 한밤중에 일어나서 눈을 치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퍼질러 자는 사람들은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공동마당인데 그 사람 혼자 나와서 그것을 쓸고 있으니 할 수 없어서 온 집안의 사람들이 깨어나서 돕게 만듭니다. 하여튼 무슨 건수가 있든지 간에 그 새벽에 일찍 안 일어나면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부지런한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지런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생생해지면 신앙생활하기가 어떻습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어느 교수님이 논문을 낸 적이 있는데 그래서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뭔가 하면 이 새벽기도가 천지신명께 냉수를 떠놓고 빌던 데서왔다. 그래서 사실은 그게 아닌데, 기원은 결국 조선교회에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불을 간직하고 모여서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얘긴가 하면 그 천지신명께 빌기 위해서 새벽에 벌떡 일어나 목욕재개를 하고 그리고 그 추운 장독간에 가서 하얀 옷을 입고 그리고 냉수를 떠놓고 기울어져가는 달한테 비는데 그런 부지런함을 일평생 실천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확실한 것입니다. 뭔가 하면 스위치만 하나 딱 바꾼 것입니다. 장독대로가지 말고 교회로 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는 방식이 이렇게 안 하고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천지신명 안 찾고 주님을 찾으면 간단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성도 한사람이 불교를 열심히 믿다가 한순간에 확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헌금하는 것,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쌀이고 갖다가 절에다 바치던 그게 있어서 아주 확실하고 그리고 우리 교역자들이 가면 항상 문 앞에 와서 이럽니다. 처음에 그거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습관이 되어서 제일먼저 이렇게 합니다. 그래도 나무관세음 보살을 안 하니까 다행입니다. 그런 게 탁!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부지런한 사람이 부지런한 습관이 있는 사람하고 영혼이 딱 만나면 펄펄 납니다. 정말 얼마나 훌륭하겠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보면 사람이 예수 믿기 전에 인간성이 좀 인간미가 있는 사람은 예수 믿은 다음에 인간미가 좀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인간미가 없고 계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그런데 예수 믿고 나면 좀 변합니다. 그것도 많이 혼나야지 됩니다. 많이 깨져야 변하지, 어째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육체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영혼이 열렬함을 잃어버리고 싫증에 빠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육체를 영혼이 이끌지를 못하고 영혼에 의해서 육체가 이끌려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지런하니까 은혜가 떨어져도 꾸역꾸역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그런데 엎드려 잡니다. 새벽 때마다 몇 번 하고나면 그 다음에 본전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냥 자는 것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럼 크게 두 번째로 그러면 이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권태감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Weariness, 혹은 Tired 이런 것입니다. fatigue이런 피로감입니다. 권태감입니다. 그 권태가 뭐에 작용하는가는 내일 공부를 하고 그럼 뭐에 대한 권태감인가?
여러분 이런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가장 잘 경험을 합니까? 부부사이에 권태기가 옵니다. 권태기가 오지 않고 열렬함이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매일 전화합니다. 뭐해? 남편 회사에 갔는데 일하지 뭐하겠습니까. 아, 나 일해. 그러니까 보고 싶어. 그러니까 나도 그래, 5시간만 기다렸다가 만나자. 내가 버스 정류장 앞에 기다렸다가 만나자. 내가 버스 정류장 앞에 가서 기다릴까? 그런데 좀 해야지 됩니다. 좀 여성화되어야지 가정이 화목합니다.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삽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 열렬함이 사라지고 권태기가 옵니다. 뭐 언제 오는가는 사람마다 틀리지만 어째든 권태기가 옵니다. 그러면 따르릉 전화가 옵니다. 걱정할까봐. 여보, 내가 조금 늦는데, 그래. 금방 들어갈게. 그래. 그리고 끊습니다. 와서 문 열고 들어가 보면 그냥 코골고 잡니다. 여보 나 왔어. 그러니까 옷 벗고 빨리 자, 그게 권태기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권태기가 오자마자 너 죽을래, 살래 그리고 주먹이 오고 가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권태기가 사라지고 증오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권태기가 없이 사랑기에서 증오기가 넘어가는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사람이 뭐 사랑하니까 증오도 하지. 그것은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옛날에 사랑했으니까 지금 증오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말이 되지만 그게 싫증도 없이 그렇게 어느 한순간에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적대한 감정을 갖기 전에 제일 먼저 대적하기 전에 먼저 그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권태감이 오는데 그게 바로 여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싫증입니다. 그런데 그 싫증이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권태기를 잘 극복을 하면 그러면 부부생활이 원만해서 100년을 해로합니다. 그런데 그 권태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그 권태기 안에서 이제 갈등과 반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게 자라납니다. 그러다 결국은 파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결혼한 사람끼리 모여서 권태기 시리즈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네끼리만 그렇게 물고 빨고 기가 막히게 사는 것 같아도 부부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권태기가 없는 사람은 한번 나와 보십시오.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인 인간 안에는 반드시 선한 것에 대한 권태의 가능성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권태기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권태가 무엇에 대한 권태인가.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권태감입니다. 그게 목사님, 너무 불경스러운 말이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군다나 신자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왜 죄의 정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적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언젠가 상당한 권태기를 거쳐서 싫증의 기간을 거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싫증, 권태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권태는 먼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권태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너무 많이 받으면 기쁩니다. 왜 기쁩니까? 그러니까 변화를 받고 은혜를 받으면 마음의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 돈 줘서 기쁩니까? 아니 당연히 주실 때도 있습니다. 돈 줘서 기쁩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Enjoy하는 것입니다. Enjoy God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에 존재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 아들이 커서 장성해지면 기쁩니다. 더군다나 올바르게 잘 자라면 기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뭐해주는 것이 있습니까? 매일 대학에 다니면서 돈 달라고 조르고 귀찮게만 합니다. 뭘 해택을 입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는 존재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만하면 외울 때가 되었습니다. 늘 얘기합니다. 존재 자체가 기쁨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성화되면 지체들끼리 서로 볼 때에 그 존재 자체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도 행복합니다. 무슨 뭘 갖다 주어서 기쁜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존재 자체를 행복해하고 하나님이 계심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시편 73편에 나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 자신이 자신에게 있어서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즐겨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뭔가 하면 하나님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의 유업이라”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나는 너희의 유업이라.” 유업이라고 하는 것은 유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너희들이 누릴 수 있는 유산이다. 그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하고 통합니다.
두 번째가 뭔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권태감을 갖게 됩니다. 관계는 항상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그렇습니다. 의무나 책임 같은 게 서로 얽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계속 투덜댑니다. 같이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더러워, 정말 재수 없네. 그러면서 깡통을 발로 차고 생난리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습니까? 불편합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기다리면 됩니다. 나는 38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되고 저 사람은 28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되니까. 그러나 돌아서서 나누어서 버스를 타면 이상한 사람 다 있네. 저 사람 왜 그래. 기분 나쁜 일이 있어나. 잘렸나. 별 생각 다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그럼 내가 막 너무나 기쁜 일이 있어서 여보, 굉장히 기쁜 일이 있거든. 그리고 막 뛰어와서 내가 백화점에 가서 상품에 당첨되어서 밥통을 하나 얻었다고 기쁨에 차서 돌아왔는데 남편이 깡통을 차면서 어이 씨! 더러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럼 갑자기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랑이 있을 때는 여보, 왜 그래. 근심이 됩니다. 왜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어디 아파. 왜 내가 뭐 기분 나쁘게 했어. 이러는데 이런 권태감을 느낄 때는 그런 존재가 옆에 있는 것 자체가 귀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도 추스르기가 힘든데.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다 전부다 관계에 대해서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항상 이 속에서 에너지가 넘쳐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 자체가 이렇게는 감히 표현하지 않습니다. 혼날까봐.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나 자신도 지금 추스르기가 어려운데 하나님이 그렇게 살면 되는가, 안 되는가 그리고 또 뭘 또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런 것, 교회에 어쩌다 한번 위로를 받으려고 왔더니 죄를 죽여라. 경건을 추구하라. 정직하라. 게으르면 혼난다. 계속 나오는데 짜증이 납니다. 그게 모두 다 관계에 관한 권태입니다. 그런데 열렬한 사랑이 살아있을 때는 그 관계가 너무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죽도록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합니까? 자기와 같이 부족한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여겨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관계에 대한 행복입니다.
어느 날 어떤 부인이 그랬다고 합니다. 하여튼 너무 사는 게 고달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들이 매일 아침마다 돈 달라는 것도 싫고 그런데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같은 날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는 게 힘들다고 애 녀석들이 운동화를 하나 사주면 좀 살살 신지, 어디다 문지르고 오는지 두 달에 한 켤레씩 뜯어버린다고, 돈도 없는데 박봉에 사는 게 너무 괴롭다고,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 둘을 한꺼번에 교통사고로 죽고 보니까 너희 애들을 보면 지금 그 나이가 되겠구나 생각이 나는데 그 아이들을 위해서 운동화를 빨아주고 그 아이들이 학교에 늦게 간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일어나 이 자식아, 그러면서 싸우던 때가 좋았다. 그러더랍니다. 그게 다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관계에서 오는 그리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에 대한 권태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뭐가 오게 됩니까? 의무에 대한 권태감이 세 번째로 뒤따라오게 됩니다. 거룩한 의무에 대한 권태감이 뒤따라옵니다. 그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이렇게 하면 죄를 죽인다. 그러면 죄를 죽이고 순종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하지 않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주님께로부터 받는 사랑,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님 앞에 온전한 사랑이 되어갈 때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권태감이 밀려오게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해야 하는 의무의 고통만 생각이 납니다. 그게 권태감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권태감을 느끼지 않고 서로 사랑할 때는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는 가운데 부부가 더욱 하나 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부부가 사랑이 살아있을 때는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거치면 부부가 더욱 뜨겁게 하나 됩니다. 그런데 권태기가 왔을 때 큰 시련이 닥쳐서 그것을 권태감을 극복하는 기회로 삼지 못하면 멀어집니다. 당신이 좀 참아야지. 그러면 왜 나만 희생하라고 그러냐. 그럼 네가 희생한 게 뭐있나. 18년 동안 밥해주었잖아. 나는 돈벌었지. 놀고먹었냐. 그리고 대판거리 싸우는 것입니다. 이기심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게 열렬한 사랑이 살아있을 때는 여보, 나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한 남편을 만났으면 당신도 참 빛을 좀 봤을 텐데. 그럼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여보,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 과분해. 그러면 과분하다니 나는 정말 다시 태어나도- 다시 태어날 리도 없지만 그러니까 못 태어나니까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 당신에게 장가오겠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싫증이 나면 그 의무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어느 소설에 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중년 부인인데 아이들 학교를 전쟁하는 것 같이 보내고 아이들 운동화를 닦는데 하얀 운동화니까 잘 안 닦아지니까 솔로 묻혀서 닦다가 안 닦아지니까 운동화를 집어던져버리고 새로 사고 싶은데 남편이 돈을 안 줍니다. 그러니까 그 운동화를 닦다가 화장실 바닥에 앉아서 펑펑 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내가 이렇게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남편을 위해서 내 인생을 다 소비했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를 좋은 엄마라고 그러고 훌륭한 아내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그게 쥐뿔이나 나에게 행복하게 해준 게 뭐가 있는가. 그러면서 한탄을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한번 소설로 나와서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싫증을 느끼고 권태감이 오게 되면 반드시 의무에 대한 권태감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거룩한 의무에 대한 권태감이 오면 그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성화의 진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에 대한 권태감이 함께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려오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권태감이 밀려옵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들려주시는 음성,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그 속에서 느끼게 되는데 마음의 권태가 오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주님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항상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그러면 의무를 주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상실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좋으면 목소리도 듣기가 좋고 사람이 싫으면 목소리도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소리는 존재를 생각나게 하는 매개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소리도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우면 소리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끼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끼고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게 하는 의무에 대해서도 권태감을 느끼는데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또 명백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생겨납니다. 어째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 영혼의 싫증이 권태감이라고 하는 사실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그럼 궁금한 게 그러면 도대체 이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첫째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고, 두 번째는 실제적인 원인이 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첫째는 부패한 타락한 죄인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이 싫증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로 이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 탁월한 감각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인간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강력한 경향성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패성 안에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동시에 죄를 기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에서 신자 가운데 아무리 진실한 신자 안에도 반드시 죄가 있고 극악한 죄 가운데 있는 신자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만 두개가 동시에 신자의 마음에 있기는 하지만 두개가 똑같은 지배력을 갖고 존재하는 것은 한 인격 안에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를 더 사랑하거나 저를 더 경이 여기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죄는 존재하지만 영향을 거의 못 미치는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죄가 지배적으로 존재하고 은혜가 거의 영향을 못 미치는 상태에 있는 것인가 이렇게 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지. 절대로 그 두개가 똑같은 균형을 이루고한 사람에게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죄 가운데 있을 때도 은혜가 강하게 역사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가 거의 역사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은혜 가운데 있을 때도 죄가 거의 역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강력하게 역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이 죄와 은혜의 지배 둘 사이를 균형 있게끔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이제 죄의 지배아래 있는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가. 결정되는 것처럼 이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인간 속에 이 죄성이 존재하고 이 죄성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그 하나님과 화해하고 융합하면서는 그 죄성을 따라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부패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싫증들이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실체로서 이 신자의 삶 속에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싫증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반감, 그리고 무엇인가 선한 것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도 거기에 쉽게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심지어 거듭난 사람들이 그런 것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 자체의 불안전함 때문에 이런 싫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싫증은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싫증이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실제로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싫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주목해야지 됩니다. 우선 첫째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천사들의 타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지창조 되기 이전의 일이니까 영계에서 있었던 일인데 천사가 완전합니까, 완전하지 않습니까?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처음 태초에 창조하신 인간이 완전했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과 같은 완전함, 무한한 완전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는 이러했으면 좋겠다, 라고 한 그 표준에 비쳐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안 그러니까 계속 깨트려지고 변화되어야 할 필요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함입니다. 상대적인 완전함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천사가 인간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피조물이었지만 도덕적인 면에서 그렇지만 그들도 타락하고 반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많은 정보를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가 교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그 중에 한 우두머리 천사가 타락함으로 사단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단수고 마귀도 단수입니다. 둘 다 다 똑같은 이름입니다. 마귀들이 아니라 마귀, 동일한 것입니다. 단수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귀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로서 완전하게 지어졌고 그 존재적 완전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무한한 완전함은 아니지만 인간보다 훨씬 더한 완전함을 가지고 있었던 천사들도 더군다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보다 더 완전할 수 있었는데 그들도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거기서도 반드시 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인가 하면 싫증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교리적으로 궁금한 게 떠오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갈 천국에도 그런 싫증이 있다는 말인가. 나중에 하겠지만 거기는 싫증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옥에도 싫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 모두 고정된 기쁨과 고통이 있는 곳이 아니라 천국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합니까, 안 완전합니까? 그것도 고린도서에 보면 그때는 온전히 주를 보게 되리라. 그래서 믿음도 소망도 다 이루어지고 사랑은 영원하다 그러면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마주 대하고 보리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아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주님을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천사도 모르고 인자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시니라. 이렇게 마지막 심판 때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천국에 가도 우리들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추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 모종의 지식의 증가가 이루어지고 그 지식이 언뜻 언뜻 빛나게 될 적마다 찬란한 영광에 비치게 되고 거기에서 성도들은 이전에 천국에 들어온 이후에 경험하지 못했던 계속되는 새로운 기쁨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이 누리는 그 기쁨이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싫증이 없습니다.
똑같은 논리로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파헤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러니까 지옥도 똑같은 원리로 한번 가면 불, 심판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그냥 고정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천국에서와 정 반대되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알려주시지 않은 당신의 엄위한 성품과 진노를 보이셔서 실제적인 형벌이 가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이 날마다 새로운 고통이 되는 그 속에서 영원히 그 형벌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지은 이 세상에서의 그 모든 범죄가 너무나 큰 것이었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 대한 대적,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파괴한 그 죄에 그 부피와 크기가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끊임없이 가중되는 방법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이루신 그 구속의 공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한히 크신 것임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무한한 기쁨과 영광 속에서 한없이 싫증이 없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그 끝없는 고난을 통해서 이루신 중보의 공로에 부합하는 그런 보상입니다.
어째든 그래서 그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싫증이 있었고 또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더라도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뱀의 유혹에 굴복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 그 얘기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리를 가서라도 자기에게 만족을 주고 싶다는 얘기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인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면서 주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를 만물의 영장으로 돌보면서 사는 그 위치에 대한 싫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렇게 범죄 할 수가 없습니다. 열렬하고 뜨겁게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이 위치가 너무나 행복한데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범죄 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싫증이 어떻게 된 것인가? 답은 간단합니다. 이 싫증이라고 하는 결국은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악한 경향성이 되어서 우리에게 밀려들어오게 되었지만 죄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이 싫증의 가능성은 하나님 한분, 완전하신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천사도 싫증의 가능성이 있었고 타락하지 않은 인류도 싫증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을 하나님처럼 더 완전하게 만드셔야지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님을 창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피조물로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체 안에 존재하는 불안정성 때문에 그런 싫증을 갖게 됩니다. 다만 하나님은 싫증이 없으십니다. 이게 뭐와 관련이 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사실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서부터 계시록까지 보면 무관심하고 냉정하신 하나님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항상 진노하시거나 열렬하게 사랑하시거나 눈물을 흘리시거나 기뻐하시거나 우리를 격려하시거나 하는 정서로 충만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입니다.
우리도 보십시오. 은혜를 받게 되면 사람이 감정이 있게 됩니다. 정서가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열렬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 죄악 된 세상이나 고통을 보면 아파하게 되고 이런 감정의 기복들을 갖게 됩니다. 이게 신적인 정서로 우리가 가득 찰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권태기가 오게 되면 감정이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렬해지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분위기 자체가 싫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의 내면에 있는 경향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도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니나노 가락이 싫고 복음성가라도 틀어나야 좋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옛 맛이 생각이 나서 그런 가락들을 다시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음악도 아무 것이나 막 들으면 안 됩니다. 잘 가려서 들어야지 됩니다. 마음을 지키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근본적으로는 그런 인간의 불안함이 연약한 불안정성 때문에 그렇다면 실제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드릴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싫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에 큰 불이 나면 무엇으로 끄는지 아십니까? 물론 요즘은 발달되어서 비행기를 많이 띄어서 그래서 바닷물이나 저수지, 왜 산에 많이 저수지를 만들어놓은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산불을 끄려고, 그것을 퍼서 갖다가 쏟아 붓는데 요즘 새로 나온 비행기는 한번 푸면 3톤이라고 합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몇 박스나 되겠습니까?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에 다 끼얹는데 워낙 불이 많이 나면 그것도 안 되고 옛날에 그런 시설이 없었을 때는 대게 하는 방법이 맞불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을 등지고 저쪽에서 산불이 막 탈 때 여기서 맞불을 놔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우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리로 가지 않고 바람이 부니까 저리로 가면서 태우면서 가는 것입니다 저 불이 막 오는데 다 태워서 태울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 맞불을 나서 꺼지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유전 같은 게 폭발해서 유전에서 불길이 하늘로 치솟을 때 그것을 전문적으로 끄는 업체가 전 세계에서 몇 군데 안 됩니다. 하나 꺼주는데 엄청 돈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한번 자세히 읽어보면서 어떻게 끄나 했더니 나는 무슨 약품 같은 것을 넣어서 끄는 줄 알았더니 폭탄을 불속에 넣어서 폭발을 시킨다고 합니다. 폭탄을 넣어서 불을 질러서 꺼버리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불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영혼의 싫증을 향해서 우리가 그 실제적으로 그 영향력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기타 등등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면서 번져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반대로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선한 일, 하나님의 은혜, 그 다음에 아름다운 의무, 이런 것들에 대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능력이 안 됩니다. 왜 도대체 인생에 목표가 무엇인지, 내가 만약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목표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만약에 살아가는 목표 자체가 단순히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확실하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싫증이 일어날 때 어떻게 인간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것들을 극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추구점이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살 뿐입니다. 왜 주일이니까 교회에 가고, 끝났으니까 이제 일주일 동안 면허증을 받았고, 또 일주일 살고, 그리고 또 가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무엇이 되어야지 되겠다. 추구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무리 강렬한 구원의 체험을 가지고 있고 격렬한 회심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과거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달려가고 싶은 푯대,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내가 모든 것을 상실할지라도 꼭 되고 싶은 그 무엇, 하나님이 바로 이런 목표를 위해서 나를 구해주셨고 바로 이런 목표를 위해서 이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이렇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다. 이런 추구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가리켜주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를 구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리를 참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창조할 때 인간을 만드셨던 그 원래의 목적대로 존재하고 살아가서 하나님의 그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는데 그런데 우리 안에 그런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부패한 성품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죄와 유혹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그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지 됩니다. 정말 제뉴인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순전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하고 순전한 신자가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내 몸에 이룰 때까지 참으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장 완전한 모본을 우리에게 끼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거기에 하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죄가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죄와 싸우고 무지하고서는 그런 은혜와 능력 안에 살아가는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그런 추구점이 없기 때문에 싫증을 금방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요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TV보는 사람들이 코미디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어느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자신의 직업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데 한 70년대쯤만 되도 사람이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이 웃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써 사람들이 서영춘씨 같은 사람이 나오면 사람들이 벌써 모습만 보고 웃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 살살이 지나간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막 웃었다고 합니다. 마음이 열려 있으니까 이상한 말 한마디만 해도 다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떠냐고 그러니까 웃겨봐. 네가 뭐 좀 하겠니. 그것도 시간이 딱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은혜 안에 있고 교회가 정말 살아있을 때는 고쳐주시옵소서. 새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도 더 알기 원합니다. 크고 놀라운 은혜를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될까요? 그게 아닙니다. 감동을 한번 줘봐. 그러면 진실한 신자가 되어 볼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뭐하고 똑같은가 하면 운동을 해서 살을 빼라고 그랬더니 뛰든지 해서 살을 빼야지 되는데 덜덜 떨리는 기계 위에 가서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덜덜 떨리면서 배 살이 움직입니다. 그게 살이 빠지겠습니까? 또 빠진다면 살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게 뛰어서 나오는 이 땀과 가만히 사우나에 드러누워서 흘리는 그 땀이 사우나에서 흘리는 그 땀은 그냥 수분이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맹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몸에 안 좋습니다. 뛰면 어떻게 됩니까? 노폐물이 함께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계속 운동을 하십시오. 그런데 힘드니까 자, 떨어봐. 그리고 딱 눕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추구점이 없습니다. 은혜를 구하는데 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 되는데 그래서 제가 늘 재미있게 질문하는 게 은혜를 주면 뭐하려고? 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 되는데, 은혜를 주면 뭐하려고? 그런 (?) 추구점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고 그 창조의 목적이 좌절된 나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까?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는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게 하나님이 나를 이래서 창조하셨고 이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그리고 내 인생에 참된 가치와 보람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시고 창조하시고 또 섭리하고 계시는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내 인생에 참된 가치구나.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안에서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보존이 되는 것이지, 그런 삶의 틀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눈 내리는 벌판 위에 갖다 던지는 불붙은 장작 한 개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첫째는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은혜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다. 대자연 한의원에 붙어 있는 글입니다. 우리 교회 앞에는 뭐라고 붙여야 하는가 하면 ‘신자는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싫증에 가깝다.’ 죄악에 가깝고 결국은 그 과정이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지 되는가 하면 신앙생활의 기준 자체를 상당히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데로 가져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보면서 무엇인가 잘하고 옛날에 하나님 섬기고 그 다음에 헌금하고 봉사하고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제법 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보면서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있는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역사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싫증에 빠지게 되기 전에 먼저 가슴에 이 은혜에 불이 심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지 됩니다. 가슴에 은혜가 식어지면서부터 식은 것만큼 싫증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영혼에 싫증이 밀고 들어오는 것만큼 육신에 대한 열렬함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에 주인을 바꾸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싫증은 다른 모든 죄의 시작과 같이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어제까지는 열렬하고 뜨거웠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차가운 마음이 되는 적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영적인 수준에 올라간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서서히 식어갑니다. 자, 부부가 서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저녁에 오면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가서 기다리고 아침에는 설거지도 안 하고 남편 통근버스 타는 데까지 배웅을 하고 도시락까지 들어다 줍니다.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을 합니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사랑하는 게 아닌가. 삼일만 더 사랑하고 다음주부터 권태기를 시작해볼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권태기가 왔는가 물어보면 ‘글쎄 언제부턴가’ 잘 쓰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아내가 외상값 받으러 온 여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접어들게 됩니다. 그게 결국 권태기는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권태를 몰아낸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 사랑하고 살면 권태가 오는 것입니다. 쉽기는 하지만 그러나 참 어렵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것들에 대한 생겨나고 싫증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것은 다른 모든 죄가 그렇듯이 마음에 작은 씨앗부터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예민합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가까이서 뭘 해줄 때 숨결만 느껴도 저 사람이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에 없이 의무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지, 그것을 인간은 금방 느끼고 강아지도 압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인간 속에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 열렬함과 이 사랑의 뜨거움이 식는 그것들을 그 증상들이 마음에 나타납니다. 그것들을 예민하게 봐야지 되는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까지 온전하게 사는 삶을 힘겹게 생각하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지 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죄가 떨어져서 그 죄를 발견한 일도 힘쓰지 않는데 하물며 싫증이 시작되는 일을 간파하고 발견하고 그것을 대적하려고 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말 금방 해소하고 퇴치할 수 있는 대적들을 권태에서 싫증으로 싫증에서 반감으로 그 반감이 결국은 죄악을 불러일으키고 커다란 침륜에 빠져서 삶이 두 동강이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시발이 어디였는가 하고 찾아갑니다. 그것조차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덫에 계속 걸리면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음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자신의 마음의 틀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루에도 수차례 변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늘의 은혜로 가득 찼던 사람이 두 세 시간 지나지 않아서 점심시간쯤 되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로 인해서 마음이 낙담하게 되는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침에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진실하고 순전한 신자가 되고 싶었는데 저녁때 유혹에 빠져서 그 죄에 대한 저항할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인간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처럼 마음은 싫증과 범죄, 유혹 이런 것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침노를 당하는데 망루에 아무도 서서 그 마음을 지켜보지 않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밥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이든지 밤이든지 규칙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고, 두 번째는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면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순간에 내 마음이 평정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내일 새벽기도에 나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깁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도 일을 멈추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나님, 내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리고 다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꼭 필요할 때 드리는 즉각적인 기도는 덜 필요할 때 드리는 길고 깊은 기도보다 더 강력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때에 다 쫓겨납니다. 전 그런 것을 참 많이 경험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한순간에 새벽기도도 하고 은혜도 받았는데 그런데 시간이 한날이 지나면서 저녁때는 설교하러 가야지 되는데 오전까지는 상당히 그래도 충만한 것 같았는데 오전 시간에 여러 가지 많은 우수사려들을 겪고 나서 정작 설교하러 갈 시간이 되는데 마음에 고갈이 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때는 내일 새벽기도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깁니다. 차타고 가면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제 영혼이 하나님 싫증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싫증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싫증을 낼 위치가 됩니까? 어떻게 그 싫증을 낼 수가 있습니까? 주제를 알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주제를 알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경이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회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회고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희망이 없는 쓰레기와 같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셔서 우리 새사람 되게 하셔서 그래서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을 때 우리가 싫증이 났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그랬을 때 가시밭길 속에 떨고 있는 한 마리 길 잃은 한 마리 양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싫증이 났습니까? 그 음성이 듣기 싫었습니까? 마음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죄 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하게 되면 이제 싫증을 내던 것이 싫증이 강력하게 가속화됩니다. 그리고 아주 강한 반감으로 정체를 드러내게 되고 싫증의 계획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유혹을 느끼고 어떤 죄를 지으려고 할 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계속 회개하고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변화가 뭔지 아십니까?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맞아. 어떻게 받은 구원인데 주님이 구원해주시지 않으면 어떤 희망도 없는 더러운 인간이 그 십자가에 보혈과 그 크신 은혜로 용서함을 받아서 주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것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주님이신데 내가 어떻게 범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그때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면서 마음이 싫증이 사라지고 정말 더 온전한 신자가되고 싶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주관적으로 달라붙어 있던 죄에 대한 생각과 이 사고들이 객관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떨어지고 싶고, 멀리 밀쳐버리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새로워지고 싶은 그런 소망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영혼의 싫증이 얼마나 빨리 오는지 모릅니다. 부지런했던 사람이 게을러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데 이 영혼이 열렬했던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했던 사람들이 육체로 마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진실한 회심을 경험하고 신앙으로 들어왔던 사람들이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들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대적들을 알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냉담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권태감을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이 마음의 싫증을 털어내고 언제나 진리와 은혜에 대한 열렬함을 간직하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영적 싫증의 정체
“시몬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6:68)
요즘은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본 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여기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방배동에 있을 때 그때도 그렇게 은혜가 없지는 않았는데 하여튼 수시로 불평이 들려오는데 왜 설교 시간이 그렇게 긴가, 그것도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관에서 눈이 빠지라 3시간을 보고도 입맛을 다시면서 나오면서 교회에 와서 3시간도 안 하고 길어봐야 한 100정도 설교했을 뿐인데 아니 그 짧은 시간에 아니 그것도 30분 먼저 찬송가 1절만 부르고 축도 시간에 도망가서 뭐 금이라도 캔다면 내가 이해라도 갑니다.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벌렁 드러누워서 TV나 볼 텐데 좀 늦게 가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와서 목사님, 왜 그렇게 설교를 길게 하시오.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대게 나에게 와서 얘기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설교를 길게 하시오. 제가 옛날에 속으로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그랬는데 나는 신경을 안 씁니다. 왜 신경 안 쓰는가 하면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설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은혜 받는 사람들만 보면서 설교한 것이지 저 구석에 앉아서 시계나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왜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쓸데없이 신경을 쓰겠습니까. 100분을 설교하고 130분 만에 예배가 끝나도 입맛을 다시는 성도들이 있는데, 설교를 하다가 마나, 이런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고 설교를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목회라고 하는 것은 그냥 들판을 가로질러서 흐르는 한줄기 강물입니다. 낙동강이 흘러가면 그냥 흘러가는 것이지 새들이 짓는다고 왼쪽으로 가고 개가 짓는다고 오른쪽으로 가겠습니까? 아니 뭐 여러분들을 개라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안 씁니다. 정말로 어떻게 하지, 성도들이 너무 길데. 어떻게 하지. 괴롭다. 그렇게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적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그런다고 내가 양보하는가 봐라. 그러다 더 길게 한 적은 몇 번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그렇게 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들은 척도 안 하는가 하면 무엇 때문인가 하면 영혼의 싫증 때문입니다. 어, 그런데 한사람이 나에게 진짜 얘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화: 심방을 가셨데 어느 아기를 둔 자매가 유아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내내 아 이를 안고 예배를 드리다보니 너무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했는데 사경회 를 통해 아이를 고용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예배당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예배 시간이 안 길다고 하면서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저 앞에 있는 성도들이 이렇게 은혜를 받는 줄 몰랐다고 고백한 이야기)
그러니까 그게 무슨 차이인가 하면 영혼의 싫증이 있는가, 없는가. 그 차이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어이 씨 못 알아듣겠네. 떡이나 주지. 그리고 갔습니다. 나머지사람들은 뭔가 하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신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모습이 우리의 인생, 신앙생활 해온 과정 속에 이 두 모습이 다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오는 적도 있지만 어떤 때는 떠서 넣어주어도 퉤퉤거리면서 뛰어나가는 적도 있습니다. 이게 원인이 뭔지 몰랐지만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영혼의 싫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영혼의 싫증의 정체에 대해서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영혼의 싫증은 신자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영혼의 싫증은 곧바로 신자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영혼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그 영혼의 변화가 가장 빨리 전달되는 곳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 안에서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모두 만납니다. 그래서 모두 다 영혼에서 일어나는 영향을 마음 안에서 지정의가 받습니다. 그것이 인격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밖에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싫증이라고 하는 자체가 영혼 안에서 싫증을 느끼게 되면 그것도 영혼의 변화이기 때문에 그 영혼의 변화가 즉시 영혼과 연결된 마음에 미치고 마음 안에서 지정의가 만나서 각각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유혹을 통해서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장성하게 자라는 것이 말씀이 자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마음속에 하나도 없고 거듭나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씨가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길가와 같은 마음이면 그냥 후르르 하고 날아갑니다. 아스팔트에 떨어진 씨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냥 날아가 버립니다. 돌짝밭에 떨어진 것은 잠시 뿌리를 내리는가 하다가 뿌리가 깊지 않아서 그냥 햇볕이 나면 탁! 타서 없어집니다. 일시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이제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서 자라지를 못하면서 말라버립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옥토와 같은 밭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딱! 떨어지면 그 마음 밭에 떨어지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래. 그러면서 받아들이면서 이 마음속에서 탁! 떨어지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이제 느껴지면서 뿌리를 내리면서 점점 커다란 나무처럼 되어서 자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쉽게 뽑히지 않는 그런 나무가 되고 또 시절을 맺혀서 열매를 맺으면 그 씨가 떨어져서 옆에 또 똑같은 나무들을 심어내서 믿음의 계절이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와서 그렇게 장성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똑같이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면서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하루에 인간이 10만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오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들 중에서 상당수는 죄악된 것입니다. 그런 씨앗들이 의식적인 생각과 무의식 속에서 계속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뿌리를 내리고 하면서 이 마음이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리고 그 죄 된 것들이 산출이 되어서 실제로 범죄를 하게 됩니다. 이때에 죄악 된 생각, 죄악에 씨앗이 뿌려져서 생각으로부터 마지막 범죄를 출산할 때까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그랬습니다.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니까 어떤 욕망과 정욕이 뿌려져서 그것들이 점점 자라서 일정하게 성장을 하게 되면 애를 가진 것처럼 이 마음속에 있는 죄는 마음에 머물러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죽어도 출산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출산을 하는 게 뭔가 하면 손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손으로 죄를 지으면 그 다음에는 이 안에 있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 내 힘으로 통제가 되었는데 밖으로 나오게 되면 그 다음에 이 죄는 죄가 저절로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름대로 활동을 하면서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조금만 더 예를 들자면 내가 돈이 없고 너무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은행을 이렇게 지나다니면서 ‘저 돈이 내 돈이면’ 했는데 점점 그런 생각이 강해집니다. 그래도 문제가 없습니다. 누르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머리가 획! 해서 식칼을 들고 가서 강도질을 하다가 결국은 잡혔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 내 마음이 아닙니다. 감옥에 가고 중형을 선고받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뭐 보통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때 그 단계별로 지정의가 각각 맡은 역할이 다릅니다. 제일 먼저 죄가 생각이 나고 상상이 될 때에는 지정의 모두 다 참여하지만 제일 주도권을 행사하는 게 뭔가 하면 지성입니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겠다. 그게 아니라 죄를 이렇게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 떠오를 때는 지성이 제일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떠돌아다닙니다. 그것은 지성에 그치는데 그 중에 어느 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마음에 품고 계속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런 생각이 딱 마음에 착상될 때에는 주도권을 누가 갖는가 하면 의지가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각하니까 너무 좋다. 이 생각을 하니까 죄인 줄 알지만 굉장히 즐겁고 뭔가 만족이 있다.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그때 그 의지가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 죄가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생각이 계속해서 발전을 합니다. 어디까지 발전을 하는가 하면 아이를 처음에 가지면 표가 안 납니다. 임신 1개월 된 사람이 임신 1개월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래도 한 4-5개월쯤 되어야지 배가 표시가 납니다. 이 아이는 계속 자랍니다. 9개월이 될 때까지, 그래서 이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려고? 나오려고. 그래서 죄도 이 속에 떨어져서 착상될 때는 의지가 있는데 그 다음에 죄가 계속 크는 것은 뭐가 키워주는가 하면 정서가 키워줍니다. 그러니까 정서가 계속 해서 그 죄악된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품으면서 그것과 타협하면서 계속해서 즐거움을 얻으면서 그 정서가 주도권을 가지고 이 죄를 키우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되면 이 죄를 산출하고 싶은 것입니다. 상상 속으로만 했던 범죄를 이번에는 실제로 저지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지성이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정서가 너무 하고 싶다고 그래도 의지가 안돼. 그러면 절대로 못 짓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죄를 밖으로 확 쏟아낼 때는 의지가 주도권을 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정의가 모두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데 영혼이 싫증이 없고 아까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싫증내지 않는 열렬함이 내 안에 있게 되면 각 단계 단계마다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섣부르게 행동을 안 하고 거기에 대항합니다. 그리고 싫증을 느끼면 이게 이제 모두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역할을 못하는가 하면 영혼의 싫증이 일어나게 되면 제일 먼저 지성, 곧 생각은 부주의해지게 됩니다. 여러분, 싫증을 내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부주의해지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합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하고 그럴 때는 가끔 누가 조끼도 떠다주고 청년들을 하고 그랬으니까 뭐 요즘은 그런 선물을 하는 사람도 없고 사실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옷이 너무 많고 그리고 그렇게 공들여서 짜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뜨개질하는 사람을 거의 못 봤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옷값도 비싸고 하니까 뜨개질하는 것을 했고 또 그렇게 해서 입고 다니면 기분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뜨개질을 합니다.
그때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애인에게 조끼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싫증이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뜨개질해놓으면 땀 새가 곱습니다. 하다가 혹시 잘못하면 몇 줄 다 풀어버리고 수틀리면 갖다버리고 다시 새 실을 사서 다시 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해보지도 않았습니까? 이렇게 짜잖아요. 이 정도가 아니고 주전자에 물을 끓여가면서 그 굽은 실을 수증기를 통과하게 하면 다림질이 되어서 짝 펴집니다. 그렇게 해서 짭니다.
그런데 남편이 벌어다주는 것 가지고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가정에서 부업을 하기로 했는데 수출품 봉제 공장에서 갖다 주면서 이것을 하라고 그러는데 그런데 이것은 많이 하면 개수 하나에 얼마를 쳐줍니다. 수 우 미 양 가를 매기는 게 아니니까.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냥 나릅니다. 그게 무엇 때문에? 싫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산 쪽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거기 갔더니 목사님이 잊혀지지 않는 교회인데 9명이 모이는 교회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9명이라고 얘기를 하니까 안 갈수가 없었습니다. 못 간다고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9명이 모입니다. 그 얘기만 안 들었으면 바빠서 못 간다고 그랬을 텐데, 그래서 할 수 없이 갔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했는지 15명을 모아났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집회를 했는데 그때 한 6월쯤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제가 좋은 구경하나 시켜드리지요. 그러더니 한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갔더니 커다란 전시장이 있는데 거기서 30년을 모시를 짜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야! 그것을 보니까 정말 대단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이 모시옷이 그렇게 소중한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가 다된 50대가 넘어 보이시는데 6월 달이니까 좀 더운데 적삼을 보여주는데 그분도 집사라면서 목사님, 이 적삼이 25년째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성성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모시짠 것을 보여주면서 서울에서 파는 그 모시는 모두 못쓰는 모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이게 서울에서 파는 것이라고 하면서 보여주는데 착착 접어서 싸놓았는데 위에는 정말 잠자리 날개 같습니다. 잘 짰습니다. 그런데 한번 뒤집으니까 그냥 날라 갔습니다. 두 줄씩 짜야지 될 것을 한 줄씩 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쪽 것을 보여주면서 값은 좀 비싸지만 전통 한삼 모시입니다. 그러고 열어서 보여주는데 그때 비로소 펴놓고 나서 한결같다는 게 이것이구나. 그러니까 땀 새가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모두 똑같이 고른 것입니다. 그리고 굵은 실로 짜서 건너뛰면 촘촘한 것을 일 미터 짤 것을 이미터를 짭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촘촘히 짭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제 이것을 입으실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이렇게 짜는데 6만5천원의 인건비가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짜났는데 이게 시세가 6만 5천원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못 입고 중국산이나 입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한결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습니다. 이런 싫증을 가지고는 그렇게 짤 수가 없습니다.
장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특징이 무엇입니까? 열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싫증이 있으면 반드시 부주의해지게 됩니다. 싫증이 나면 반드시 부주의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대형사고는 대부분 모두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입니다. 그런데 모두 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사람들이 자기 일에 대해서 열의가 없습니다. 끝까지 잘 완주하고자 하는 부지런히 결핍되니까 부주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부주의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죄 된 생각이 밀려와서 감시를 철저히 해서 처음에 생각이 밀려올 때는 그저 보편적이고 부드럽게 밀려오지 어느 날 갑자기 예배 끝나고 가는 사람보고 야, 심심한데 가다가 사람이나 한번 죽이자. 그러지 않습니다. 경제생활도 어려운데 가다가 새마을금고나 한번 털지 그래. 왜 심심하니까. 그렇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보편적이고 ‘그 정도야 다른 사람도 하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영혼이 싫증이 없고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주님 안에 온전한 신자가 되고 싶고 주님에게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 열렬함이 있을 때는 생각이 그렇게 태만하지 않고 가만히 살피면서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실 것 같다. 그리고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짜 모르겠다. 그리고 가서 목사님께 가서 물어보자. 이런 생각이 자꾸 떠오르고 이렇게 살고 싶은데 이게 성경적으로 괜찮습니까? 물어봐서라도 바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싫증을 느끼면 그냥 대충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것은 완전히 문 열린 집입니다. 죄가 들어왔다가 문이 단단히 잠겨있고 저쪽에서 사람소리는 안 나지만 개짓는 소리라도 왈왈거리고 나면 그러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기회를 보는데 문이 열려있습니다. 물론 ‘도둑 환영’ 이렇게 팻말은 안 붙여있지만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고 가보니까 신발도 하나도 없습니다. 어디 외출하려고 하면 신발이라도 잔뜩 놓고 가면 되는데. 신발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슬며시 들어옵니다. 상상 속에 그냥 자연스럽게 죄가 들어와서 그래서 돌아다닙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정서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영혼의 싫증을 느끼지 않을 때는 정서가 열렬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싫증을 느끼게 되면 이 정서가 죄를 미워하지 않고 미적지근하게 됩니다. 애매모호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예수가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사는 삶이 너무 개떡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형식적이고 불신자라고 하기에는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다 정서가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싫증을 느끼니까 이 정서가 이 죄와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는 멀어진 정서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속에서 죄가 한번 들어오면, 좋은 신자도 잘못해서 죄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읽든지 기도를 하면서 내가 이럴 수가 없지. 그리고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내가 죽기까지 나를 쳐서 복종시키리라 될 때까지 나는 이 죄와 싸워서 반드시 주님의 은혜를 받으리라. 이런 열렬함이 있어야지 되는데 그게 없어진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또 의지가 남았습니다. 의지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게 열렬함이 좀 남아 있을 때는 아무리 이 생각 속에서 죄가 왔다갔다 그래도 그것을 마음속으로 생각하지 감히 지어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의지가 안돼! 그러면서 거절합니다. 이 속에서 안달을 해도 안돼! 그럴 수 없어.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교회의 장로가 되어서, 교회 목사가 되어서, 교회의 일군이 되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탁! 떠오릅니다.
(예화: 예전에 집회가신 교회의 장로님의 은혜로운 간증- 젊었을 때 어느 여자와 서로 깊이 사랑했는데 그 여자의 집에서 반대를 해서 헤어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그 여자에게서 연락이 오자 수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고 싶어졌 는데 만약에 그 순간에 장로가 아니었다면 범죄 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기름부음 을 받은 한 교회의 장로이기에 범죄 해서 미끄러지면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성 도들에게 어떻게 남은 인생을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밀려 오면서 교회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자기 부인에게 이실직고를 했다는 이야기)
그게 결국은 무엇입니까? 이 속에서 확 솟구쳐서 제동을 딱 건 것입니다. 의지가 안 해! 그리고 딱 건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이 아직 싫증을 덜 느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혼이 싫증을 느끼면 그게 힘에 부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밀리면 의지가 약해져서 마치 장정 몇 사람이 무너질 때 쇠문은 견딜 수 있지만 나무문은 부러지고 마는 것처럼 의지가 현저히 힘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영혼의 싫증이 느끼게 되면 지성은 부주의해지고 정서는 죄를 안 미워하게 되고 의지는 죄를 산출하지 않으려고 투쟁을 안 합니다. 개점휴업상태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하면 그냥 마음에 죄가 안 들어와서 그렇지 들어와서 자리만 잡으면 금방 승리의 깃발을 꽂고 거기에 대세를 장악하면서 뿌리를 내리기에 너무 좋은 여건이 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게 벌써 아니 내가 어떻게 이런 죄를 졌을까? 도대체 왜 나는 생각이 그렇게 멍청하게 그 죄가 와서 그렇게 문을 두드리고 그래도 그것을 활짝 열어주고 바보같이 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발전이 되어서 쾅! 하고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아이고 왜 그랬을까?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파고 들어가면 제일먼저 영혼 속에 일어나는 싫증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지킴의 교리에 대해서 우리 교인들은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은 서점에서 ‘마음지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평신도형 말고 목회자용을 사서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마음지킴은 이게 벌써 싫증의 문제에서 마음으로 발전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린 이 예방책은 마음지킴보다 훨씬 더 먼저 탐지되고 실천되어야 할 거룩에 이르는 중요한 실천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면서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런 영혼의 싫증은 인간의 마음에 이렇게 영향을 주어서 지정의를 혼란시키고 죄에 대해서 친화적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을 죄에 빼앗기게 하고 그래서 그 죄가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자라서 그래서 죄를 깊이 심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일이 바로 이 영혼의 싫증이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마 여러분들 중에 단 한사람도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며 회개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벤자민 폴렝크린이라고 하는 여러분이 잘 아는 피뢰침을 발견한 사람이고 유니버스티브 펜실베니아를 세운 청교도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처음 죄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그 최초의 것과 싸워서 투쟁하는 것이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후에 뒤따라오는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뒤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싫증이 뒤따라서 뭐가 들어오는지 생각을 하면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 상태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잘 들으십시오. 예배시간에 그냥 멍하지 앉아서 예배 끝나는 시간이나 기다리고 뭘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가지고 가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읽으면서 그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도 않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자신의 마음을 담그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도 없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거의 영혼의 싫증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두 번째로는 이 싫증의 영향은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싫증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지만 영혼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일어난 싫증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지성은 부주의하게 하고 정서는 죄를 미워하게 하지 않게 하고 의지는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강건함을 상실하게 만들어버려서 결국은 마음이 죄로 가득하게 만들고 그것이 싫증을 내는 인격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결국은 그 인격을 통해서 살아가는 모든 삶에 실천이 영혼에 대한 싫증이 영향을 미쳐서 그래서 이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총체적인 영향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싫증은 결국은 태만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게 부주의하고 그 다음에 정서가 죄를 미워하지 않고 의지는 죄와 맞붙어서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태만입니다.
그래서 어제 영혼의 싫증을 뭐라고 정의했습니까? 권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권태감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권태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태감이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거룩한 의무에 대한 권태감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싫증의 정체가 권태감이고 그 싫증이 바로 우리에게 태만한 신앙생활을 유도하는데 이 태만한 신앙생활도 싫증이 데려가고자 하는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반감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부부생활을 예를 들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이좋게 살던 열렬한 부부, 퇴근시간이면 아내가 그 추운 겨울에 코트 입고 가서 남편이 정류장에 내릴 시간에 가서 3-40분씩 떨고 기다리다가 들어온 열렬한 부부가 멱살잡고 잡아 패면서 이 자식, 저 자식 할 때는 그때는 벌써 그런 열렬한 사랑이 사라지고 적극적인 반감과 증오심이 남게 됩니다. 그 중간에 반드시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권태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혼의 싫증도 하나님을 향한 적극 반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노골적인 반감은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하나님이 싫거나 은혜가 싫은 게 아니라 은혜에 대한 열렬한 사모함이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은 곧 이어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의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마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으로 반항하게 됩니다. 그 전 단계가 바로 싫증입니다. 싫증도 죄의 원대한 계획 속에 하나입니다. 그 싫증을 사용해서 이제 죄가 발전을 합니다. 싫증을 퇴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비옥하게 하고 생명과 그리고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사는 매우 중요한 영적생활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싫증은 이 타락한 정서의 대표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의 정신구조는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에 민첩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영혼이 싫증을 느끼게 되면 그다음에 이 싫증이 정서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결국은 타락한 정서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노래도 옛날에 은혜 받지 못했을 때 듣던 노래는 싫습니다. 그 분위기도 싫고 다 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예수 믿고 나서 또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한 적도 많습니다만 어째든 깊이 회심하기 전까지 그냥 이렇게, 그때는 물론 젊었을 때라 그렇기는 하였지만 음식점에 들어가면 좀 컴컴한데 그런 곳이 좋고 그리고 술집 분위기도 좋고 그리고 팝송이나 유행가 가락 같은 것 나오는 것도 좋고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부터 싫습니다. 하여튼 제가 제일 싫은 게 캄캄한 게 싫습니다. 혹시 제가 캄캄한 가운데 있으면 그것은 제가 순전히 전기세를 절약하기 위해서지 정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등을 많이 달았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안 킵니다. 여러분이 와보시면 알지만, 그저 이렇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켜놓고 있고 제 방에 들어와서 스탠드 하나 정도 켜놓고 그리고 생활합니다. 나는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나는 솔직히 교회를 지을 때 24시 편의점처럼 하고 싶었습니다. 하여튼 환한 게 좋습니다. 캄캄한 게 싫고 환한 게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오죽했으면 교회에도 와서 보시면 알지만 전부다 유리창으로 해서 커튼 하나 못 달게 했습니다. 왜 그냥 다 보이게, 내가 오죽했으면 이 벽 전체를 유리로 하고 싶어 했습니다. 본당만 나두고 저 위에만, 그렇게 감출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느 형제하고 자매하고 이야기하는구나. 전도사님이 형제들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구나. 그것을 다 보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2층 복도는 전부 유리로 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 공간도 넓어 보이고 얼마나 신나고 좋습니까. 그러면 전기를 지금보다도 한 두 세배 더 달아서 환하게 진짜 머리털까지 보일 정도로 그렇게 환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격도 변화 받고 나서부터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팝송이나 유행가 이런 것이 즉시 싫어집니다. 아주 즉시 싫어집니다. 내가 거의 다 꿰뚫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 싫습니다. 그리고 찬송가와 클래식 음악 같은 것, 그리고 뭔가 이렇게 들을 때 명상하고 그러기에 도움을 주는 그런 음악들이 듣고 싶어집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영혼에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이 생겨나게 되면 그게 정서에 모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서가 영향을 받게 되는데 싫증이 태만을 유발하고 반감으로 발전되는데 그런 태만에 빠질 때 정서가 바로 그렇게 피곤함을 느끼고 타락한 정서가 싫증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싫증은 대부분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런 열렬함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영혼의 싫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영혼과 싫증이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열렬함이 사라지는 것만큼 싫증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때에 열렬함을 잃어버릴 때 그때 영혼의 싫증이 계속해서 촉진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우리들이 오늘 이 시간에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생각해볼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런데 이 영혼의 싫증은 계속 우리 안에 있어서 싫증이 서서히 발전할 수 있고 일정 분량의 싫증이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싫증이 있는데 나름대로 은혜를 받고 하면 싫증이 이게 성장에 방해를 받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싫증이 나고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싫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끔 예배시간에 가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마음속에서 영혼의 약간의 열렬함이 잠깐 따뜻한 온기가 솟아납니다.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싫증이 누룩처럼 번져갈 때 딱 방해를 받습니다.
마치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 옛날에 밀가루에다가 술 약을 타서 반죽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아랫목에다 놓고 이불을 덮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호떡 해먹기 좋게 잘 부풉니다. 그런데 만약에 술 약을 집어넣어서 겨울에 눈이 오는 벌판에 내놓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럼 발효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술 약이 들어갔는데 그래서 이게 누룩처럼 막 번져갔는데 가끔이라도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그러면 차가운 곳에 내놓은 것처럼 되어서 발효가 잘 안 됩니다. 그런 정도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가끔이라도 그런 은혜를 받으면 싫증을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그러나 제약을 받습니다. 그 차가운 데 내놓았다가 다시 또 뜨거운데 내놓으면 발효가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정한 환경 속에서 어떤 상황이 되면 이 싫증이 촉진됩니다. 아주 빨리 발효가 됩니다. 누룩을 뿌린 것을 이 따뜻한 방에 넣어서 뚜껑까지 덮어놓고 한잠 자고 나면 호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찐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 부풀어나듯이 일정한 환경에서는 이 싫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 번져가서 순식간에 번져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이런 적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야금야금 신앙이 떨어지다가 한 1-2년 되다가 미끄러지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봄까지 괜찮은 것 같았는데 여름이 오기 전에 미끄러진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마음이 굳어지면서 신앙이 미끄러진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갑자기 미끄러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바로 갑자기 범죄 한 경우나 혹은 이 영혼의 싫증이 마치 술 약을 집어넣고 따뜻한 이불속에 반죽을 넣어두었을 때처럼 이 싫증이 누룩처럼 번지기에 좋은 여건이 마련된 상황이 있었던 사람, 그때는 아주 급속하게 영혼의 싫증이 폭발처럼 성장하면서 다른 사람이 2년 쯤 걸려야 미끄러질 그 신앙의 실패를 한 2-3세달 만에 그런 신앙의 미끄러짐에 도달합니다. 똑같습니다. 신앙의 회복도 서서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 불과 생사를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부흥회 때 주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끄러지는 것이나 회복되는 것이나 이게 기간이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그러면 싫증이 폭발적으로 힘을 얻어서 촉진되는가. 그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4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육체가 게으를 때, 이때에 영혼의 싫증은 급속하게 힘을 얻게 됩니다. 온 영혼에 빨리 번져가게 됩니다. 그럼 어떤 절차를 밟아서 이렇게 되는가? 아주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싫증을 좀 느낍니다. 그런데 육체가 아직도 부지런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부지런해서 육체가 게으른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아예 교회를 안 나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고 아예 막 갑니다. 그런데 이 부지런함이 배어 있는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져도 5시 30분 새벽기도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집니다. 그런데 뭐 할일이 없습니다. 잠이 깼는데, 그러니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새벽기도에 와서 거의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침체에 빠졌는데도 6개월씩 1년씩 교회에 꾸준히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가 시키는가 하면 육체가 부지런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영혼이 싫증이 누룩처럼 번져가지는 못합니다. 왜 부지런하니까. 옛말에 그물코가 10이면 걸리는 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지런하게 교회에 나왔는데 대부분 은혜를 못 받지만 그 시간마다 나와 있으면 웬만하면 10번에 1번 정도는 은혜 받을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 현장에 있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물론 더 좋은 것은 영혼도 열렬해서 하나님 내 영혼이 지금 싫증을 느끼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 오늘 이 새벽시간에 은혜를 안 주면 나 여기서 죽이든지 살리든지, 나 살게 하고 싶으면 나는 은혜를 받아야지 되겠습니다. 이러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그것은 아닙니다. 이미 벌써 영혼은 싫증이 바이러스처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꾸준히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오늘도 그냥 무슨 열렬함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은혜 받은 모든 사람들이 예배당에 오기 전에 나 오늘 은혜를 못 받으면 죽는 게 나. 그러면 나는 진짜 생사를 겁니다. 그리고 쥐약 들고 예배당에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아는 어떤 성도는 자기 딸이 교회에 가서 하도 안 오니까 오후예배에 찾으러 왔다가 은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네 교회에 가다가 눈이 많이 와서 도저히 시간에 갈 수가 없는데 이 교회는 11시 15분이 예배시간이니까 들어왔다가 은혜 받은 사람도 있고 뭐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준비가 하나도 없는데도 왔다가 그 자리에 있으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런 은혜를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덜 영혼이 싫증이 덜 촉진됩니다. 마치 술 약을 집어넣고 밖에 내다놓은 것처럼 발효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그러다 이게 어느 한계에 와서 육체가 이제는 피곤을 느끼게 되면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게을러지게 됩니다. 그때 영혼이 아무리 싫증을 느껴도 그래도 무엇인가 새벽기도에는 나가야지 된다고 하는 영혼에 호소가 있으니까 육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새벽기도를 나가지 말자. 내가 새벽기도를 나가면 사람자식이 아니다. 이렇게 결단을 하지 않는 한 뭔가 영혼이 끄는 게 있으니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정면으로 대결하는 이런 것과는 다릅니다. 무슨 이야기인 줄 아실 것입니다. 답답합니다. 예를 들자면 주부들이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는 게 행복합니까?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귀찮을 때도 잠옷 바람으로 입고 나가서라도 눈을 비비면서 가서 다시 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니까 싫증이 가득 찼어도 하여튼 밥을 합니다. 애들이 항상 학교에 가고 싶어서 밤잠을 못잡니까? 그런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여러분 자식이 별종이기를 원합니다. 자기도 그런 적이 없으면서, 그래도 애들은 아침에 지겹게 학교 가기 싫어도 그래도 가방 매고 갑니다. 왜 그게 의무니까. 그래도 뭔가 조금이라도 이 속에 끄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부지런할 경우에는 착착 움직이면서 육체가 더 빨리 순종하면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일도 한참 하다가 이 육체가 피곤을 느낍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권태감이 오고 게을러집니다. 게을러질 때는 이미 벌써 육체가 피곤을 느낄 때 게을러집니다. 그때 영혼이 싫증이 나있는 상태에서 이 육체의 게으름이 싫증이 잔뜩 나서 피곤해있는 영혼에게 카드를 내놓는데 그 카드 이름이 뭔가 하면 쉬자. 휴식이라는 카드를 내놓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육체가 쉬자고 그러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더 이상 그 의무를, 은혜 못 받은 채 새벽기도 나가지 않은 것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영혼의 열렬함이 있으면 이 자식! 그러면서 쳐서 복종을 시킬 텐데 영혼도 피곤합니다. 싫증을 이미 오래 전에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쉬자 그리고 카드는 내미는 것입니다. 그때 육체가 파업을 하면서 휴식에 들어갑니다. 그럼 이제 안 나갑니다. 그럼 그나마도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가 게으르게 의무를 하지 않겠다고 파업을 하고 장기적인 휴식에 들어가고 영혼이 싫증을 느끼게 되었을 때 둘이 합작을 합니다.
그래서 이 육체가 이런 구분자체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신령한 육체와 본성적 육체가 있습니다. 존 오웬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이 육체, flash라고 하는 이 육체를 둘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육체가 진짜 둘로 나뉘어져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이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서 신령한 육체와 그 다음에 본성적 육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본성적 육체는 죄 된 육체고, 신령한 육체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감화된 육체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그럴 때 어떻게 하든지 순종하고 싶고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그러고 육체가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대기상태에 있는 이런 육체는 신령한 육체입니다. spirit flesh 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니까 이쪽에서 내일 살고 오늘은 TV나보자. 예배에 가지 말고, 은혜 받으러가자. 눈도 오는데 그냥 집에 가서 자자. 이게 뭔가 하면 본성적 육체입니다. 두개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싸워서 이쪽 게 이것을 이겨야지 됩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잘해보자 이것입니다. 그때 항상 손해 보는 쪽은 본성적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육체 쪽이 손해를 보고 양보를 합니다.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뭔가 하면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도 분투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살수 있을까? 내가 왜 하나님의 자녀인데 이 정도밖에 못살까? 내가 어떻게 이 세상 사람하고 똑같을 수 있을까?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게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지만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떳떳한가. 이런 윤리적인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영적인 상태를 가지고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타협의 명수입니다. 그래서 항상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요즘 어디에 있어. 내가 이 정도만 생활해도 집에 가면 나보고 교회에 미쳤데. 그런데 진짜 내가 이만큼만 생활해도 괜찮아.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핑계를 대고 세상과 일반화시키고 그 다음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그것을 했다고 하는 자부심, 자기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양자 사이에 신령한 육체와 죄 된 육체 사이에 끊임없는 투쟁이 있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 신령한 육체가 죄 된 육체를 이겨야지만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할 때 그 뜻이 그 의미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게 죽이도록 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 신령한 육체가 계속 살고 영혼에 열렬함과 그 다음에 모든 육체가 신령한 육체가 되어서 열렬하게 살 때 그때 비로소 주를 위해서 훌륭하게 분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입만 동동 떠서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전 삶을 드려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통전적인 거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게으를 때 영혼의 싫증은 누룩처럼 번져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죄짓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태만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죄짓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이 다음에 어떻게 주님을 만나려고 합니까. 시간이 없는데.
두 번째는 유혹이 빈번할 때 영혼의 싫증이 촉진됩니다. 유혹이 계속 빈번해지면 이 유혹은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이면 그것은 유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런 위치에 없으니까. 물론 남편과의 전쟁이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로서의 주권이니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봐야 깨지지 않는 바가지 몇 개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납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브솔린이나 히틀러 돈조(?) 같은 사람들은 이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갈등을 느끼다가 그 다음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이면 좁은 의미에서 유혹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혹이 빈번해지게 되면 이 유혹은 항상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유혹을 통해서 집어넣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유혹이 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충분히 누르고 살수 있었던 욕망이나 이런 것들을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이렇게 일으켜버립니다. 일어나게 해버립니다. 그 힘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유혹입니다. 유혹이 빈번해지게 되면 유혹이 자극을 받게 되면 정욕이 분발해지게 되고 정욕이 분발해지게 되면 거꾸로 이번에는 마음을 통해서 영혼에 싫증이 힘을 얻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 들어가고 들어가서 영혼에 싫증이 일어나는 실제적인 변화가 생기면 그것은 다시 마음을 통해서 영향을 미치면서 그의 인격과 지정의와 모든 삶으로 거꾸로 돌아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악한 사람은 쌓은 악에서 악을 내고, 자기가 쌓은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자기가 쌓은 선에서 다시 선을 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빈번한 유혹에 자극을 통해서 정욕은 불일 듯 일어나게 되고 이때 영혼의 싫증은 가속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정욕은 점점 더 힘을 얻으면서 실제로 이 정욕이 강력한 힘을 얻으면서 우리의 마음 전체를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자기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는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인박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첫 번째 술잔은 사람이 택하고 그 다음에 두 번 세 번 먹다가 그 술을 먹고 나면 그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담배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담배를 피면 그게 즐거운 경험인데 숨쉬라고 산소가 드나들라고 만든 구멍으로 연기가 왔다 갔다 하는데 편할 리가 없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사람을 만나서 그거 하나씩 주는 느낌으로 담배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1-2년이고 피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담배에 인박이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속에서 담배가 없어도 그것을 원하는 강력한 요청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담배가 없으면 길거리에 있는 가래침 묻은 것이라도 씻어내고 펴야지 됩니다. 그런 정도로까지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정욕이 우리 안에서 싫증난 영혼의 상태에서 역사하면서 하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은혜 안에서 형성된 아름다운이 마음에 frame, 틀들을 이제 무너트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번 공기가 산소를 내보내고 그래도 맑은 것 같지 않아서 필터를 한번 청소하자. 그래서 일년 만에 이것을 다 힘들게 뜯어서 거기에 있는 필터를 다 꺼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닙니다. 이게 완전히 철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꽉 찼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공기, 여기서온 공기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년 동안 걸렀으니 그게 어마어마합니다. 그것을 전부가 꺼냈습니다. 그리고 업체에 연락해서 시키는 요령대로 해서 깨끗이 세척해서 소독까지 해서 그래서 햇빛에 바짝 말려서 끼었습니다. 그랬더니 들어오는 순간 다들 그러는 것입니다. 공기가 달라졌다고.
그러니까 마음에 틀이 은혜를 받았을 때는 뭐와 똑같은가 하면 깨끗이 청소된 에어컨의 필터와 같습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면 맑은 공기가 짝 나갑니다. 그런데 이게 시간이 오래 걸려서 청소를 하지 않고 내버려두니까 먼지가 잔뜩 낀 것입니다. 공기가 들어오면 필터링이 정화가 되는 게 아니라 들어온 공기가 여기 붙어있던 세균과 먼지를 머금고 이상한 냄새를 풍기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을 때는 깨끗이 청소된 에어컨 필터와 같이 그렇게 반듯하게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은 나도 생각을 하려고 그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나도 하고 싶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나도 하기가 싫고 이게 주파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이게 상당히 맞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버려둡니다. 그럼 매일매일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해서 이 죄와 먼지 그 다음에 정욕의 찌끼, 불순한 동기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쌓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성가대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가대 지휘자가 월급을 받는데 사정으로 몇 주 빠져 다른 사람이 대신 지휘를 했는데 그 사람이 지휘자 에게는 돈을 주면서 자기는 왜 공짜로 시키는가 하면서 싸움이 났다는 이야기)
그것은 모두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일입니까? 그게 마음이 순수할 때는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더러운 욕망이나 이런 것들이 처음에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순수함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틀은 똑같이 있는데 이미 그 속에 더러운 것들이 많이 끼면서 그 틀들이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맑은 공기가 들어갈 때도 밖으로 나올 때는 이상하게 변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그 미생물과 더러운 찌끼들을 머금고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싫증난 상태에서는 이런 것들이 과속 화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 생각이 부주의하니까 올바로 듣지 않습니다. 정서가 죄를 미워하지 않으니까 거룩하게 살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주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그리고 의지는 죄를 산출하지 않기 위해서 분투하면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데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버거운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가 이제 촉진이 되면서 마음의 틀들을 허물어트립니다. 그래서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그런 필터처럼 되어버립니다. 그게 어떤 때 그런가 하면 유혹이 빈번할 때 영혼의 싫증이 가속화되면서 이 사람 신자의 마음 전체에 틀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때에 그런 마음의 틀이 변하고 나면 그 다음에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틀과 동일한 환경을 좋아하게 되지 차이가 나는 환경을 싫어하게 됩니다.
(예화: 직장에 다니실 때 업무적으로 연관이 있는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과 같이 제 주도로 출장을 가게 되셨는데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어울려 카바레에 가게 되었는 데 어둑한 곳에서 춤을 추는 그들을 보며 어울려지지 않는 마음이었다는 이야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자기의 마음하고 맞는 그 틀 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틀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영혼의 싫증을 잃어버리는 것이 유혹을 받음으로 과속 화될 때에 그때 필터에 먼지가 잔뜩 낀 것처럼 그런 상태가 될 때 선명한 복음이 선포되고 오후 예배시간마다 사람을 발가벗겨서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리고 교역자가 성경을 가르칠 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지옥이다. 이런 식으로 칼로 그 뜻이 가르쳐주는 선명한 가르침이 있는 그런 상황을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싫어합니다. 그러면서 기껏 하는 이야기가 너무 사랑이 없다. 사랑이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러면서 영혼의 싫증이 노골화됩니다. 반감으로 벌써 이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해결책이 무엇이겠습니까? 회개하면 마치 세제로 닦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한번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정신은 새롭게 되어서 아이큐가 70에서 100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새롭게 되어서 자기의 영혼의 모습이 어떤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수 없다고 하는 결단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혹을 계속 받을 때 영혼의 싫증은 누룩처럼 번져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방치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염려로 마음을 빼앗기는 환경이 될 때, 희랍어로 염려하다. 근심하다는 마음이 쪼개진다는 의미를 원래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분산이 되는 것입니다. 분산이 되게 되면 무엇인가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염려하게 되면 마음이 나누게 되고 그렇게 마음이 나뉘게 되면 그렇게 쪼개진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 자신을 열렬하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하기 위해서 더 열렬히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알아서 거룩해지려고 간절히 그것을 추구하고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참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셨던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가지고 고뇌하고 안타까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염려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나뉜 마음을 가지고는 영혼에 열렬함이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열렬하던 사람도 이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밀려오게 되면 한 순간에 마음의 열렬함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차가운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의 육체는 신령한 육체와 그 다음에 본성적 육체가 갈등을 일으킬 때 염려하는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 육체를 지원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신령한 육체가 급격하게 힘이 떨어지고 그 다음에 본성적인 육체가 강화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염려도 모든 염려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염려도 성경에 의하면 두 가지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염려가 있고, 생명에 이르는 염려가 있습니다. 영혼의 싫증을 촉발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열렬함에 불을 붙이는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어떤 염려,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큰데 나는 왜 이렇게 불순종하면서 사는지. 내 모습 이대로 이제 받아들여달라는 배짱이 이제는 없다. 하나님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왜 하나님 나의 가족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내 마음에 한을 풀어주시렵니까? 이런 근심이 있을 때는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누어지는 역할을 세상에 대한 염려나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나누어지게 하고 신령한 근심과 염려는 나누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간절하게 하고 열렬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염려로 인해서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빼앗기게 되면 영혼의 싫증이 과속화 되고 관심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축소되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꽉 찬 상태가 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 때문에 흐느끼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한 인격 안에 함께 공존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뭔가 하면 그럼 이런 염려와 근심의 근원이 어딘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의 부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훌륭하고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할 때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싫증을 느끼게 되면 이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때에 염려로 마음이 나뉘게 될 때 영혼의 싫증은 폭발적으로 힘을 얻고 번져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죄책감을 상실할 때 이때 영혼의 싫증은 가속화되기 시작합니다. 싫증을 간직한 채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다른 길은 없고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싫증이 발전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마음으로 충만해졌을 때는 차가운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을 향해서 열렬한 마음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뜨거운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러면 그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고 영혼의 싫증을 간직하면서 마지못해서 의무를 이행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싫증은 퇴치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자신이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왜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열렬함이 없어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생활은 마음에 열렬함이 없으면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내 생애 소원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것 가지고 멋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실제로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진짜로 원하면 그렇게 살려는 노력을 하고 자신의 모든 삶의 존재와 이유와 목적이 거기에 꽂혀서 그래서 그 목표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이 재편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는 안 하고 그냥 다른 사람이 모여서 말할 때 다들 너 왜 사니? 물어보면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돈 좀 만져봐야지 되잖아.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뭐 좀 한번 큰일을 하다가 죽어야지 되잖아. 이렇게 할 때 한사람이 나타나서 아니야.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다. 그것이야 교회에서 가르쳐준 답이지 자기 답인가. 자기 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이 녹아 있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어야지만 자기 답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싫증을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는 것은 결국은 게으르고 나태하고 타협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밖에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 가책이 있을 때는 투쟁하게 됩니다. 얼마나 강력하게 투쟁하는가는 그 가책의 정도와 비례합니다. 그렇게 투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가책이 절대 없으면 절대로 투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싫증을 간직하고는 힘입고 열렬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은 간직한 채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힘에 부치게 되고 열렬함이 모자라니까 죄와 싸울 수 있는 자원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은 그러다가 죄와의 싸움에서 밀리고 결국은 지고 양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악함이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이 너는 지금 죄에 지고 있다. 그리고 열렬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모습을 봐라. 그러면서 찔림을 느끼고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제 이 신자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어려운 말로 신학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열렬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광신자다.
누가 그러는데 교회에 와서 말씀을 계속 듣고 은혜를 너무 받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하는 이야기가 너무 어렵다. 그렇게까지 믿을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가 얘기합니다. 몇 명이나 될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너는 아니다. 너는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니다. 몇 명이나 될지는 걱정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모두 지옥을 간다고 너도 같이 따라가겠는가.
이것은 이미 벌써 예수님에 의해서 예고된 것입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는데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은 많고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길이 협착하고 험해서 찾는 이가 매우 적다. 어두움보다 빛이 소수이고 부패하는 세상보다는 소금이 소수이며 넓은 길로 가는 사람보다는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생명 길로 가는 사람들이 소수이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신이 영혼의 싫증 속에서 태만하고 나태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원래 신앙생활은 이런 것일 것이다. 라고 신학화 작업을 하면서 자기가 이 신앙생활이 옳다고 강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배교적인 삶으로 떨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제 영혼의 틀들은 고착이 되어서 은혜에 의해서 회복하기 어려운 그릇된 틀을 마음속에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들이 싫증을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의 경험을 보십시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품을 보면서 감격했습니다. 심판을 받고 완전히 나라가 멸망한 상태에서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노래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 신실하심, 궁창에 맞닿을 듯 드높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죄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두려워 떨며 감격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영혼의 때에는 흐느끼면서 주님의 얼굴을 구했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도록 예배의 자리에서 격리된 때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고난의 때를 이기고 시련의 때를 극복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감당할 수 없이 유혹하고 밀어닥쳤지만 그때마다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시뻘건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그 피 묻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망도 핏빛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가장 커다란 죄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그들에게 어떻게 객관적인 사건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떻게 차가운 뉴스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서 구원해주시고 다시 한번 갱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까지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싫증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으며 옆에 있는 형벌 받는 강도 한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던 못 박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싫증을 느끼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열렬한 생애였습니다. 열렬하게 생각하고 불붙듯 느끼고 불꽃처럼 타오르듯이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생애에서 어떤 피곤함이나 그리고 나약함, 그리고 영혼의 싫증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핏빛 생애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준 신앙생활의 본보기는 뜨거운 모닥불과 같아서 오늘도 그분의 생애에 가까이 접하는 사람들 모두 그 마음이 뜨거운 불이 옮겨 붙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도대체 냉담한 신앙생활, 싫증으로 가득 찬 영혼을 무겁게 끌어안은 채 주님 앞에 살수 있는 삶이 무슨 삶입니까? 거룩한 삶은 구호에 그치고 진실한 신앙생활은 우리 입에서만 맴돌지 정말 우리게 그런 열렬함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그런 열렬함이 없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찢고 핏빛 인생을 사신 예수님 앞에서 싫증을 간직한 채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그런 구역질나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위기 속에서 가끔 주님 앞에 나와서 물질이나 구걸하고 우리 자식 출세나 시켜달라고 말하고 사업이나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신앙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은 세상이 불붙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핏빛 열정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피와 땀과 눈물의 생애를 사시다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산화시키신 것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이 이런 열렬한 마음으로 영혼의 싫증을 죽이고 마음의 열렬함을 간직한 채 예수 믿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한해를 살 수 있다면 100년을 한 나라의 제왕으로 사는 것보다도 더 원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는 그런 신자들, 예수님이 오늘도 그런 신자들을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의 싫증을 버리고 이런 열렬함으로 돌아오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싫증의 영향력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어제는 싫증에 정체였습니다. 오늘은 싫증의 영향력, 싫증의 파괴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음속에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함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도 자신들은 오히려 주님께 반문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하는 주님의 말씀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이런 상태가 바로 싫증이 없고 예수님에 대한 열렬함이 지배하고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화의 진전을 보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영혼의 열렬함이 우리 속에 계속 살아서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속에 있는 열렬함을 잃어버리게 되면 싫증이 오고 그것이 영혼의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과 만나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반감으로 삶의 대적으로 그렇게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영적인 축복들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오늘날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에서 많이 미끄러진 채로 살아가는 그런 삶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이 시간에 싫증의 파괴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보겠는데 우선 성경전체를 살피면서 싫증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크게 두 번째로 싫증의 파괴적인 능력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도 싫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그리고 그 의무에 대해서 느끼는 권태감입니다. 그렇지만 죄가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그 싫증은 오늘 이미 죄가 들어와 버리고 우리의 마음이 많이 뒤로 물러가고 부패하게 된 상황에서 느끼는 그 싫증과는 종류와 차원이 틀렸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도 싫증의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천지창조 이전에 천사들의 타락의 경험을 보더라도 분명히 그 천사들 가운데도 싫증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서 이런 싫증의 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만큼 완전하게 무한히 완전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 각각 싫증의 요소들이 깃들어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그런 싫증이 우리에게 인간에게 원래 있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인정을 해야지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 느꼈던 싫증은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그때 보여주시는 은혜, 그리고 하나님이 이 창조된 주인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정말 놀랍도록 이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정말 좋은 상황 속에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더 위로 올라간다면 천사들의 경우에는 어땠을까요? 천사들의 경우에는 영계에 있었으니까 거기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그 광휘와 그 아름다움은 지상세계에서 아담과 하와가 경험하는 것 못지않은 무궁한 그 완전함과 찬란함이 그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천사가 비록 불안전하게 창조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처럼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싫증을 느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싫증의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늘나라의 영광의 찬란함이 가져다주는 그 희락과 기쁨과 비교될 수 없는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나 그리고 천사들의 타락이 하나님 앞에 커다란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그런 타락이었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있는 이 죄를 기뻐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반역하는 마음이 그 어려운 가능성을 뚫고 결국은 하나님께 범죄 해서 이 창조한 세계에 그 타락과 오염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우리들은 사실 그 이야기와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무죄 상태가 아니니까. 이미 벌써 죄가 들어와 있고 죄가 편만하게 지배되고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여전히 내 안에 부패한 성품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나의 영혼 안에 불러일으키는 이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어서 타락을 하게 되었을 때 그때에 인간에게 이 죄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죄의 결과가 결국은 죄책과 오염으로 나타납니다. 죄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책임이고, 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그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 속에 남게 된 그 부패한 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남의 집 울타리를 부스고 그리고 그만 차가 뛰어 들어가서 그 집에 기르는 돼지우리를 들이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통사고를 낸 것입니다. 그러면 경찰서에서 먼저 오게 됩니다. 그리고 딱지를 끊게 됩니다. 요즘은 얼마인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2-3만도 내고 그렇게 이제 교통사고가 나면 큰 사고든지 작은 사고든지 일단 안전운전 위반으로 딱지를 끊습니다. 그렇게 벌금을 당국에 내야지 되는 것을 죄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돼지도 받았으니까 돼지 값도 물어줘야지 됩니다. 그렇게 돼지 값도 물어주고 벌금도 내는 것이 죄책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돼지우리에 차가 박혔으니 방금 출고한지 얼마 안 되는 새 차를 들어 받았으니 앞에는 다 찌그러지고 그 돼지 똥이 본넷트 유리창까지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끌어내었습니다. 그래서 벌금을 다 내도 차를 고치고 닦아내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것을 오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벌금을 내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벌금내야 할 죄에 대한 책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모두 전가시켜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해주시고 죄책을 모두 제해버리고 났으니까 그 다음에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찌그러진 차, 돼지 똥으로 범벅이 된 그 본넷트 이런 것은 닦아내야지 됩니다. 그래야 차를 끌고 다니지, 그렇다고 차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성령님을 주셔서 죄가 우리를 지배하던 원리를 다 깨트리시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지만 그들이 싸우지 않으면 단 한 평도 땅을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쓸 때에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성화되어서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그런 아름다운 행복과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완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싫증이 있게 되면 그 다음에 이렇게 우리가 성화를 위해서 힘쓰면서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고 삶 속에 묻어있는 이 부패하고 더러운 것들을 제해버려서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영혼의 열렬함이 있어야지만 자신이 정결해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지고 변화되려고 애를 쓰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중간에 신자가 되다가 마는 것입니다. 마치 장작이 난로에서 타다가 반쯤 타다가 꺼지는 것처럼 그런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 영혼의 싫증이 그냥 액면적인 싫증이 아니라 이 속에 남아 있는 그 부패한 성품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이 부패한 성품은 죄로 말미암는 오염이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오염된 부패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고 주님을 원망하려고 하고 주님이 인간을 만들어놓으신 창조의 계획대로 살지 않고 거기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셔서 우리를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하는데 거기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기가 여전히 이 온 우주의 주인이고 인생의 주인인 것같이 그렇게 살면서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 오염된 부패한 성품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적 육체와 결합을 가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게 살기 위해서는 노력을 안 해도 됩니다. 불순종하기 30일 작전, 그런 것 안 해도 괜찮습니다. 새벽기도 안 가기 40일 경연대회, 그런 것 안 해도 그냥 퍼질러 자면 안 가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고 성경을 읽지 아니하더라.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살아가면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하고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매일 성경을 읽어야지.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것가지고도 안 되니까 성경을 안 읽으면 아침을 안 먹는다. 기도를 안 하면 점심을 안 먹겠다. 그리고 매일 굶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벽기도를 해야지 되겠다. 그러면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명종도 하나가지고는 안 되고 두개를 맞추어놓습니다. 2월 달부터 6시로 당겨지는데 그럼 이제 5시 30분에 하나 맞추어놓고 5시 35분에 하나 맞추어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번 누르고 자니까. 그래서 옛날에 제가 맨 처음에 은혜를 받았을 때는 항상 새벽기도에 가겠다고 -제가 얘기했습니다. 본성이 원래 게으른 사람이라고 우리 할머니가 매일 너 그렇게 게을러서 이 다음에 뭐해먹고 살래. 매일 그러셨는데, -눈물을 흘리며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자명종이 눌려있습니다. 잠결에 누르고 그냥 퍼질러 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시계를 멀리 갔다가 둔 것입니다. 그래서 따르릉 울리면 그것을 끌어가다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그 시계도 눌려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그 시계를 누르고 또 잔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가다가 넘어져서 오강을 밟았습니다. 그러니까 참 선한 일을 한번 해보려면 온갖 난리를 다 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뜻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항상 뜻이 서있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항상 칼날을 세우고 살아야지 됩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아직 총성은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보초를 서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뭔가 할 수 있는 것이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잠이 오면잠이 오는 대로, 먹고 싶으면 먹고 싶은 대로, 놀고 싶으면 놀고 싶은 대로 그냥 그렇게 살면 결국은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도 그것을 가리키십시오. 정말 쓸모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먼저 알아야지 될 것은 그렇게 부패한 본성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영혼의 열렬함은 이런 우세한 본성을 지니고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게 육체가 그렇게 부패해서 게으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매질을 하고 야단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이 열렬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수 없어. 그래서 육체가 조금 쉬자. 그럴 때 안돼!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해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이게 영혼의 열렬함입니다.
그런데 이게 싫증에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그게 아담과 하와와 천사들이 무죄 상태에서 싫증을 느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런 더 힘든 상황에서 싫증을 느낍니다. 아담과 하와가 싫증을 느꼈어도 갑자기 육체에 타락한 본성하고 만나지는 않습니다. 왜 가능성만 있었지 실제로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실제로 타락한 본성이 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싫증에 빠지게 되면 그러면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체가 휴식이라는 카드를 내놓습니다. 쉬자. 그래. 그래 쉬자. 그렇게 되면 영혼이 이 육체의 게으름과 손을 잡고 외출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냥 거룩한 신앙의 의무에서모두 이탈해버리고 미끄러져버립니다. 그렇게 하면서 파국으로 가게 됩니다. 지금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들이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싫증이라는 명사보다는 싫어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 싫증, 싫어함,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주어로 해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싫증이 없으신 분입니다. 원칙적으로,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너희를 싫어하시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싫증을 내신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모두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싫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불쾌함,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에 우리 안에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아파하시는 그런 불쾌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신실한 성도들은 권태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렬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시편 42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았던 이유는 그 권태감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권태감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그 권태감 때문에 깊이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바끄”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이게 접착제 같은 것으로 인해서 벽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삶은 하나님과 달라붙어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들을 피하고 주님이 더럽게 여기시는 것들을 모두 멀리 하면서 매일매일 마음을 살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던 궁극적인 목표는 다바끄의 삶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 그 삶을 위해서 우리 그 많은 성도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리적으로 볼 때 구원받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세례를 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렇게 말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희랍어 성경에 원래 나와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밥티즈테 에이스토 오노마 하면서 밥티즈테는 세례를 주라, 그 다음에 오노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데 그 “의로”라고 하는 것이 목사인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대신해서 너한테 세례를 준다. 그 뜻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데 그 삼위일체의 이름 속으로 내가 주는 세례를 통해서 너의 영혼이 Ace into입니다. 연합되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교리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면 내가 말하는 사람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듣는 사람이 ‘아, 저 목사님이 까만 가운을 입고 오늘 이 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대신해서 세례를 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100사람이면 99명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래 의미는 그게 아닌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니까 아무에게 그런 세례를 주면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거듭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어야지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도저히 연합될 수 없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면서 너는 연합되라. 하나님께 연합될 수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라. 연합이 되겠습니까. 말고 안 됩니다. 인간이 그것을 100% 가려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구원받는 신앙의 고백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세례를 받게 될 때 이때에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과의 연합이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그래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일에 있어서는 성부 하나님이 계획을 하시고 우리의 구속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대속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 사실을 믿어지게 해서 그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나머지 두 분을 배제한 가운데 한분만 계신 그런 사역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성부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그때도 성자와 성령이 계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는 때에도 성부와 성령이 계셨고 그리고 마지막에 성령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도 성자와 성부께서 같이 계십니다. 이게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볼 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그럴 때 그것 역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한 성자 예수님과의 연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속으로 연합된다고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그 연합의 사역에 있어서는 성자가 주가 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얻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속으로 연합되게 되면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는 직접적으로 연합이 이루어지고 성부와 성령은 그 연합 속에 함께 참여하시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도들이 구원과 함께 이루게 되는데 이 연합은 한번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면 영원히 그 연합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좀 게을리 해도요? 그럼요. 그럼 좀 더 담대해져서 술 한 잔 먹어도요? 두 잔을 먹어도 그 연합은 깨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더 한번 마음에 있는 얘기를 해봅니다. 교회에 잘 안 나오면요? 그래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막살아도 되겠네요? 끝까지 듣고 말하십시오. 그것은 원리적인 연합이고 그 원리적인 연합을 기초로 실제적인 연합이 있습니다. 원리적인 연합은 변하지 않는데 실제적인 연합은 수시로 변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도 다릅니다. 은혜 받았을 때 틀리고 은혜 떨어졌을 때 틀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물론 틀리고 그 사랑이 식어갈 때 틀리고 완전히 하나님께 돌아섰을 때 또 틀립니다. 그래서 이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성화되고 순종하는가에 의해서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그 사도 바울이 내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할 때 그때에 사도 바울이 두려워했던 것은 원리적인 연합이 날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뒤로 미끄러져서 실제적인 연합을 상실한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쳐서 십자가 아래 복종시키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자기 속에 있는 이 죄된 육체가 하나님께 거슬려 살려고 하는 이 육체가 영혼의 싫증과 만나서 자꾸 불순종하고 성화에 반대되는 길을 걸어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이 실제적인 연합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실제적인 연합을 바로 구약의 성도들이 다바끄의 연합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날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정결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쓸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연합되시는 그런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정말 하나님 때문에 느끼는 행복, 그리스도 때문에 맛보는 영혼의 참된 안식과 즐거움은 원리적인 연합을 기초로 실제적인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고 봐야지 됩니다. 원리적인 연합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한 가지 사실, 그리고 예수님은 한번 구원한 자는 끝까지 안 버리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믿고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십시오. 그 짐승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짐승처럼 살아가면 이렇게 말씀으로 잘 가르쳐주고 교훈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면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게 해주는 이런 것이 싫은 것입니다. 마치 불량기가 있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사랑, 엄마의 관심, 철저한 교육 이런 것에 대해서 반감을 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양아치 소굴에 누워서 술이나 마시고 본드나 흡입하고 이러는 분위기가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양을 받으라고 그러니까 사육이나 받으려고 그러고, 무슨 여기가 동물농장입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에 싫증이 생길까봐 그렇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어떤 권태감을 느끼면 그것이 곧바로 그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낳고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낳게 되었을 때 경건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갈급했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았을 때 이제는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지 않는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했는가. 그러면서 불안해서 잠 못 이루는 그런 처지에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렇습니까? 진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정말 나의 삶에 있어서는 어쩜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없는가. 내가 왜 진실해지지 못할까? 내가 예수를 믿고 20년이 지났는데 왜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싫은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일까. 그러면서 무너져가는 자신의 인간성이나 신앙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이게 그런 사람들을 모아놓고 교회가 천명이 모이니 이천 명이 모이니 만 명이 모이니 동물농장 크기 차이지 주님이 바라보실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이런 모든 일들이 영혼의 싫증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이런 싫증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을 향한 싫증이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싫증과 사랑은 한 인격 속에 공전할 수가 없습니다. 싫증은 사랑이 사라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고 싫증이 가득 찼을 때는 그 속에 어떤 사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믿음의 타락이다. 신앙의 타락이다. 뒤로 물러간다. 미끄러진다 하는 모든 것을 마치 교회도 안 나와서 개판으로 살고 술이나 먹고 바람이나 피고 탈세나 하고 감옥이나 가는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보다도 오늘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어제 그 주님과의 느꼈던 그 연합이 오늘 재현되지 않는 것 이게 넓은 의미에서 신앙의 타락이고 뒤로 미끄러진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통전적인 거룩입니다. 교회에서만 거룩해진 것은 그것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정말 은혜 받고 거룩해졌으면 자녀들이 볼 때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지. 아내가 볼 때에 변했어야지 됩니다. 부모님이 보실 때 내 아들, 내 딸이 변했어야지 됩니다. 그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성도들의 일평생의 기도의 제목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지 됩니다. 언제까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살아가면서 그런 생각이 안 듭니까? 어떻게 저 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내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 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자체가 싫증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싫증이 문학적인 묘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제쳐놓고,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뜨겁게 사랑할 때는 그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그 연합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 연합이 사랑을 저절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실하고 뜨겁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실제적인 연합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 같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런 연합에 최고도로 느낀 사람의 고백이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연합이 느껴진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제 좀 주의해야지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연합이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 인간성의 이렇게 혼돈되어서 섞이는 그런 연합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역사적으로 이야기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연합이 이루어졌는데 내 안에서 나는 나고 주님은 주님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둘 사이가 갈라진 개체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의 신비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최고도의 사랑의 상태가 아니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실제적으로는 당신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라고 물어볼 때 내 인생의 목표는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참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한 최대의 고민이 무엇이어야지 되는가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온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이제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제 계속 촉진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싫증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싫증을 내실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오히려 질투하십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니 왜 이해를 못하시는 사람처럼 그렇게 얘기합니까? 아니 지나갔는데 어떤 남자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어떤 여자와 만나서 너무 반갑다고 그러고 길거리에서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때 여성분들 질투를 느끼십니까? 아니 질투를 느끼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의 남자가 남의 여자를 안아주는데 질투를 왜 느낍니까. 상관이 없기 때문에 질투를 안 느낍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이 그런다면 그건 일납니다. 오늘 저녁에 볼일 좀 생깁니다. 그게 바로 질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질투사이를 막 바로 오가십니다. 싫증이 없습니다. 싫증이 있다면 그것은 교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막 바로 사랑에서 질투로 오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나로 하여금 질투하지 못하게 하라. 그래서 어떻게? 나만 사랑하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역사를 보면 결국은 이 성경 전체의 드라마가 이 싫증과 열렬함에 싸움입니다. 그래서 싫증이 시작되면서 죄가 시작이 되고 타락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인간은 이미 벌써 보편적으로 인간성 안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권태감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 돌아온 역사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하고 도망치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도 만약에 이런 싫증이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깨끗이 정리하고 끝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런 싫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에서 비극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짝사랑이 생겨납니다. 우리를 싫증내실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한 당신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면서 당신이 원래 창조했던 목적이 이탈된 채로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더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행위로 보이시고 그 구원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들을 여전히 열렬히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나게끔 계속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친 그런 방탕과 타락과 반역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끊임없이 도망치고 도망친 방탕과 타락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성경 전체의 역사가 결국은 인간의 싫증과 하나님의 그 열렬함 사이에 숨고 숨는 숨바꼭질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싫증을 이기고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함으로서 성경의 대 드라마가 마감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역사를 보실 수 있는데 그 심판의 역사 또한 하나님이 싫증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싫증이 나면 그 다음에는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어떤 상황도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열렬함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야단치고 혼내서라도 새로운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이끄시고 다듬으시려고 하는 노력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다가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인간들이 그렇게 싫증을 느끼는 것만큼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은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지 않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가장 기뻐하는 그곳에서 인간을 통해 가장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싫어하고 기뻐하는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가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목적을 이탈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동의할 수 있는 그렇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그런 기쁨과 희락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하늘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맛보는 즐거움입니다. 그 나라는 지루함이나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의 인생이 다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천국에도 싫증이 없고 지옥에도 싫증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 성도들이 함께 거하게 되는데 거기에 가게 되면 하나님의 천국이 만약에 우리 주일학교 다닐 때 교회에서 가르쳐준 거기에 가면 생명수 물이 흐르고 과일도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데 불고기는 없지만 과일도 있고 열두 대문을 금으로 만들고 유리바다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만 있다고 그러면 얼마나 싫증이 나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뭐 유리바다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바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몇 천 년 보면 그것도 싫증이 안 나겠습니까? 영원히 살 것인데, 몇 천 년 보면 싫증이 안 나겠어요. 그리고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만 아무리 좋아도 한 삼사만년 살아봐.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그런데 거기는 싫증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파헤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드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쓴 히븐 엔 헤럴이라고 하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저작 속에 나타나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논문이 있습니다. 거기 읽어보면 아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의 그 찬란한 기쁨은 계속 증폭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천국은 몇 만 년 몇 천 년 천국보다는 지금 천국이 훨씬 exciting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천국도 진화하는가. 진화가 아니라 들어보십시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날까요, 열등할까요? 뛰어납니다. 그래서 거기는 성경이 없습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얘기했듯이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때의 거울은 대게 돌을 반질반질하게 만든 석경이나 혹은 구리거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맞대고 보리라. 그때는 주님을 이렇게 하나님의 그 찬란한 영광의 세계를 마주대하고 보니까 지금 아는 것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눈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차이에 있어서 천국에 성도들과 지금 지상에서 죄와 싸우고 살아가는 이 타락한 세상에 성도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면 새가족반 공부도 없습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여기에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신학박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다른 피조물들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입니다. 개미가 인간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할 때 6개월 연구하고 인간에 대해서 모두 뀄다. 그러면 우리가 진짜 그 개미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진짜 개미다. 그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껏 까지 보여주신 것이 많지만 천국에서는 더 많은 것을 보여주셔서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식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지가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식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지가 드러날 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어떤 의지를 가지고 계신지를 하나님도 인간에게 모두 보여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여주어도 인간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감쳐져있는 것을 조금씩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주 조금 보여주실 때 거기로부터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쳐서 이전에 지상에서나 천국에서 누릴 수 없었던 엄청난 영광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경이 이미 다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 중에서 가장 작은 것, 나같이 공로 없는 사람도 사랑하신다. 하나 알게 되었을 때 한사람의 인생이 뒤집어집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구나. 알았을 때 5-60년 살았던 인생이 뒤집어지고 완전히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맛본 그 작게 비쳐준 그 빛 때문에 일생을 완전히 잘못 산 것을 후회하면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빛을 경험하고 그 기쁨과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더하면서 살고 결국은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다가 한사람을 죽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러니 천국에서 비추는 그 영광의 빛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열을 비추어주셔도 하나밖에 파악되지 못할 정도로 죄악 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열을 가르쳐주시면 거의 열을 알 수 있을 정도까지 이해나 이런 것들이 뛰어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살짝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의 빛이 비추면서 그 모든 성도와 천사들이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자라게 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갑니다. 그러면서 그의 의지에 관한 지식도 자랍니다. 왜 그 의지와 지식에 관한 지식을 아는데서 자라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에 진전입니다. 그러니까 찬란하게 계속해서 비추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뿐이라
그 영광 예루살렘 성 빛나는 곳이라
그렇게 찬란하게 비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깊이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하면 영원히, 그러니까 그렇게 될 때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파괴하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 창조의 세계를 망가트려놓은 이 패역한 죄인들이 그렇게- 우리 흔히 영원한 복락이라고 그러잖아요. 그게 바로 그것입니다.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찬란한 영광 때문에 무한히 즐거워합니다. 누구의 공로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우리에게 있어서 이 지상에서만 찬송제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서도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그 죄에서 구해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 어린양, 우리 예수가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영원무궁토록,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정말 장난 같은 삶입니다. 얼마나 잠깐이면 지나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이제는 얼마 있으면 은퇴하고 죽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인생 그 자체는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달리기선수와 같은 것입니다. 42.195킬로를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막 달려가면서 40킬로 다가왔을 때 운동장에 들어설 때 이제 벌써 끝이네. 더 달릴 때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너무 슬프다. 괴롭다. 세상에 그러면서 자꾸 달릴 구간이 많을 때는 참 좋았는데, 시작할 때는 참 좋았는데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세상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결국 우리 인생에 모든 목표가 그 나라를 가려고 그렇게 분투하면서 달려갑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나이가 드는 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조금만 더 달리면 된다. 그리고 젊어서 싱싱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이게 이제 10킬로밖에 못 달렸습니다. 저게 언제 와, 에고 너 나를 안 부러워해도 나도 너 안 부럽다. 나는 이제 곧 간다.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마쳤으니 그 후로는 나를 위해 예비 된 의의 면류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영원히 그렇게 여기서 진짜 설교 한편만 들어도 그렇게 기쁘고 돌아갈 때 진짜 인생을 새로 살 것 같고 성경공부 한 시간만 제대로 배워도 정말 마음이 뜨거워져서 이제 주님의뜻대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한 날들이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한데 거기서 주님 자신이 직접 당신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비쳐주실 때 그때에 느끼는 기쁨은 이 지상에서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을 때보다도 무한대로 곱하기를 하면 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 전부를 다 팔은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싫증이나 느끼고 육체의 게으름과 수시로 야합하고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안 되겠지요?
그런데 지옥에도 싫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냥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심판의 부활로 새로 빚어진 몸을 가지고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지옥에 들어갔으니까 어차피 죽지 않고 그 속에서 불도 있고 고통도 있고 그 다음에 천사들도 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얼마나 탁월하게 잘 적응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에 고통을 받을 때는 정말 괴롭고 부자연스럽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훌륭하게 거기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예화: 예전에 아시던 어느 맹인 목사님이 지압을 하셔서 가끔 받으셨는데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동반으로 한달에 한번씩 영화 관람을 하면서도 전혀 불편 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내용)
그런데 처음부터 안 불편했겠습니까? 아니 처음에는 몇 번이고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마음을 먹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빠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장애를 당하고 그래도 마음이 낙천적이고 쉽게 뭔가를 접는 사람들은 굉장히 활기찬 삶을 살아갑니다.
(예화: 이태리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아라고 하는 가수가 자기 일생에 대해서 언급한 내 용에 사고로 인해 눈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절망을 극복하는데 1시간 30분 만에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새 인생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 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마음을 굳히니까 절망이 희 망으로 변했다는 내용)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하는가 하면 지옥의 고통이 아무리 치열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 되는 고통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영원히 인간이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기서도 적응이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온 사람이이야 지옥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겠지만 한 30만년 있은 사람은 이골이 나서 그래도 요령껏 불속에 들어가는 방법도 터득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장되지만 어째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조나단 에드워드는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아주 명료하게 얘기합니다. 지옥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 반대로 천국과 정 반대로 그래서 이렇게 가려져 있었던 하나님의 폭풍과 같은 진노를 조금씩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 드러날 때마다 온 몸을 불태우는 강렬한 고통과 진노에 대한 무시무시한 두려움과 실제적인 고통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의 고통도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중됩니다. 역동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하면 영원히 무궁히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 형벌이 정해진 시간만 받으면 되는 형벌이 아니라 영원하고 무궁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하고 무궁한 형벌을 인간이 감당할 때 그 인간의 고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으면서 영원히 계속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하실 수가 있는가 생각되지만 그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죄가 들어온 그 근원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죄와 야합해서 살아간 인간의 모든 일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지만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그 창조의 계획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도 없고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 위한 진지한 자기 몸부림도 없이 회개의 수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의 세계의 목적에 이탈해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모두 좌절시키고 그 목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고 그 인간의 처절한 반역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죄는 전능하고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에 그 죄의 크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무궁한 것이고 그 영원무궁하고 무한한 죄에 대한 형벌은 역시 무한하고 무궁한 형벌로 베풀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옥의 싫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요즘은 군대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옛날에는 가면 진짜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군대갈 때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기념 촬영을 하고 동리 모든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군대에 갔습니다. 못 먹고 두들겨 맞고 고단하게 일하고 그렇게 집에서 TV나 보면서 뒹굴면서 게으르게 살던 녀석이 군대에 가서 한 67개월만 한번 굴려보십시오. 거기서 선배들에게 얻어맞고 그냥 줄서고 눈치 없어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고무관 소리 듣고 말이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리게 뱅글뱅글 돌다가 그때 휴가를 왔습니다. 와서 옛날 같으면 엄마! 그럴 놈이 충성! 그렇게 하는데 웬 충성이니 효도나 해라, 웬 충성이니, 그리고 들어옵니다. 여기 앉아라. 괜찮습니다. 앉아라. 그러니까 네, 하고 앉습니다. 군대 생활이 재미있었겠습니까? 재미는 무슨 재미야. 가서 죽어라 고생하고 얻어맞았는데, 군대생활 지루하지 그러면 그 애가 누구 놀리느냐고 합니다. 얼마나 고달픈데 지루해,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결론을 내리자면 이 지상에서나 잠깐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싫증과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리고 이 싫증과 싸우지 아니하면 우리가 만약에 아무렇게나 일생을 살다가 그냥 지옥이나 가야지 되겠다고 마음을 가지면 그러면 이 싫증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자가 되고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해주시지 않으시면 일생을 살면서 단 한순간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 같은 인간을 잠시나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고난당하게 하시면서 나를 구원해주셨는데 이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싫증을 내면서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너무 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고 뜨겁게 주님을 섬길 날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될까요? 살아있는 날 동안 우리가 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많은 나이가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20대만 해도 인생에 이런 복병이 도사리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왜 건강했습니다. 이틀, 삼일 정도는 안 자고 공부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같이 공부했던 우리 동생뻘 되는 동급생들이 형님만 보면 정말 좌절이 느껴진다고 그랬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렇게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문제는 내가 게으르고 나태하기 때문이지 마음만 먹으면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닙니다.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그리고 전에는 이틀 밤 삼일 밤 세워도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하루 밤 세우면 이삼일 사흘 일주일씩 후유증이 오고 그리고 이십대의 정신으로 막 몸부림치며 살면 벌써 건강에 위협이 오고 무리가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건 계산에 넣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런 것 모두 고려하고 이제 우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정말 얼마나 그런 날들이 우리에게 계속될까요? 우리에게 남은 날들은 얼마나 짧은 날입니까. 우리가 그런 그 짧은 날들이 지나가고 나면 이제 주님을 이 땅에서 더 섬기고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시간들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도 있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손도 있고 그리고 받은 은혜도 있고 주님이 우리를 부족하지만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도 있는데 영혼의 싫증 하나에 이 모든 것을 다 흩어버리면서 그렇게 권태감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내는 이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할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뜨겁게 주님께 매달리고 열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싫증을 제해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간절함을 주님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간절하고 열렬한 삶을 사셨는지를 기억하고 우리들을 그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열렬함을 간직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싫증의 파괴력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8)
베드로만 그랬던 것만 아니라 우리도 한때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그러면서 정말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든지 일평생 주를 위해 순교하겠다고 하든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나에게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러던 때에 한두 번씩은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한두 번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번에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렇게 열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솔직히 말해서 저는 불만이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그 강도가 저희 개척교회 때만큼 못합니다. 난 냉정하게 생각해서 요즘 설교가 개척교회 설교 때보다 많이 퇴보했는가 하면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오히려 10년 동안 목회하면서 참 저 자신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고 그리고 때로는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은혜는 좀 덜 끼칠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의 부족 때문에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점점 더 은혜를 많이 주신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개인적으로 개척교회 할 때 이루어졌던 설교를 보면서 어떤 때는 아쉬운 생각도 갖습니다. 이럴 때는 열정은 있었지만 더 좀 세미하게 쪼갰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10년 전에 토해놓은 설교들이 하자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째든 그렇게 아쉬운 마음도 들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한번 하면 지금은 좀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때는 지금보다 성경도 좀 덜 알았고 신학적인 깊이나 또 죄인들의 마음도 분석하는 것도 지금보다는 좀 예리함이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10년 동안 여러분들이 나를 많이 단련시켰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어떤 인간인지를,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떤 의미에서 선생입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이 없었으면 내가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서 이 싫증도 이게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면서 배운 것도 있지만 사실 여러분들을 보면서 이 싫증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미 한 2년 전서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모로 저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참 우리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듯하게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목사님이 뭘 배웠겠는가. 오늘도 목사님 좀 가르쳐주자. 그리고 미끄러지고 거스르고 목양도 안 받고 그러면 글쎄 나는 또 그것을 통해서 배울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 여러분들은 배우는 것이 없으니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서비스를 안 하셔도 또 배우는 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올바르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런 것을 통해서 참 많이 배웁니다.
그런데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사실은 11월 초까지도 교회를 개척할 꿈도 안 꾸고 있다가 12월 12일 날 결국은 교회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폭풍과 같이 하나님이 역사하셨겠습니까.
(예화: 개척을 해야 될지에 대해 갈등을 겪으시며 밤새 뒤척이는데 마태복음의 말씀이 떠올라 확신 가운데 마음을 굳히셨다는 내용)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여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그러면서 진짜 하나님이 보내주시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러고 나서 한 3주 후에 교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 폭풍처럼 휘몰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진짜 하나님이 영혼들을 보내어주시는데 토요일 날 교회 개척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 주일 새벽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교회에 가봤자 혼자 문 따고 예배드릴 텐데, 그래도 개척한 첫날 개신데 새벽기도를 안 나가면 역사에 길이 남겠지. 그리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8명이 새벽예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5시에, 그만 퍼질러 잤으면 무슨 망신이겠습니까. 아마 열린 교회 10년사에 역사책에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영혼들을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양떼를 보내어준다는 것만 기억을 했지 그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라고는 잘 염두에 못 두었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수없이 왔습니다. 오는데 정말 이게 좋은 교회의 목사님 밑에서 잘 배우고 신앙생활 하고 이런 사람들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다 다른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지 거의 염소에 가까운 양들만 오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또 그때 개척했을 때 왔던 사람들이 상처받을라. 상처받지 마십시오. 옛날 얘기하는 것이니까. 거의 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험악한 당신, 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강해. 양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빨도 크고 뿔도 꽤 있고 근육질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통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람들이 꺾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보다 설교 내용은 좀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막 부어주셨습니다. 어떤 예배 시간에는 사람들이 우느라고 설교를 계속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하여튼 심방을 가면 집집마다 테입이 제일 적은 집에 라면박스 하나였고 그렇지 않으면 라면박스 두개, 지하실에서 조잡스럽게 만들었는데 하여튼 개척한지 3년 만에 문서 선교부 매출이 1억이 넘었습니다. 교회보다 일년 예산이 테입 파는 부서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집마다 가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거 전부다 정가를 주고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스로 테입이 가득합니다. 매일 그것 듣고 사는 것입니다. 학교에 가서도 도서관에서 공부는 안 하고 테입만 듣고 직장에 가서도 듣고 하여튼 그렇게 하면서 열렬하게 들었습니다. 오늘날은 참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떤 때는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으니까 그 갈급한 영혼들이 뿔도 들어가고 이빨도 사라져서 풀 먹기에 적합한 이빨이 되고 근육도 다 사라지고 진짜 염소에 가까웠던 양이 진짜 양에 가까운 양이 되었습니다. 양이 되었다고 그러면 또 교만해지니까 양에 가까운 양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영혼의 싫증이 없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사라집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제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광야에서 진짜 어디서 뭐 하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구는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농심 라면 300원짜리 하나만 끓여먹어도 한 끼에 10억이 들어갑니다. 그 가마솥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300만 명의 물을 끓이려면 컵라면 하나만 먹어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도저히 아무 대책도 없는데 하나님이 뭘 내리십니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첫날 막 뛰어가서 그것을 거두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탄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만나라고 한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웬 떡인가 그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뇨. 그것이지만 우리말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게 웬 떡인가. 그 웬 떡을 먹으면서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이 세상에 이런 식으로 양식을 공급받아본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새벽마다 바가지를 들고 들판에 나가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찬송했겠습니까? 하얗게 내린 그것도 아무데나 다 내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동하면 이동하는 진 가장자리에만 하얗게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 해가 나면 모두 스러져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갖고 와서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서 떡도 만들고 과자도 만들어먹고 그랬습니다. 꿀을 섞은 과자와 같이 양념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이 그렇게 맛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했을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굶는다, 먹는가 하다가 여러분 옛날에 그렇게 배곯고 가난해서 진짜 밥도 못 먹고 수제비로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야지 먹고 살다가 쌀 한가마니 사다가 윗목에 났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쌀을 항상 방에다가 보관을 했습니다. 손님이 오면 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감격을 했습니다. 그때는 만나 거두러가자. 그러면서 찬송했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만나를 내려주시니, 그러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바가지를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만나 거두러 가자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에이씨 또 만나야. 바가지를 무릎에 탁탁 치면서 매일 맛대가리도 없는 만나를 먹나. 이게 도대체 뭐야. 그러면서 만나를 걷으러 갑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길에 잔뜩 만나를 가지고 오면서 뭐라고 그랬겠습니까? 에고 먹고 살려니까 이 짓하지, 옛날 왕년에 우리 생각해봐. 애굽의 고기 가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싫증을 느낀 것입니다. 만나에 육신적인 맛에도 싫증을 느꼈고 그것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대해서도 싫증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싫증은 오늘 왜 그렇게 싫증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어제 두개 한다고 해놓고 시간이 너무 가서 한개만 한 것입니다. 스토리가, 왜냐하면 그것을 마저 하면 10시 40분에 끝낼 것 같아서, 그러면 오늘 아무도 안 올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할 수 없이 양보하고 둘로 쪼갠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싫증의 역사에 대해서 한 것이고, 오늘은 싫증의 파괴력에 대해서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싫증의 가지는 강력한 파괴력입니다. 그 파괴력의 중요한 것만 모아봤는데도 다섯 가지정도로 파괴력이 나타납니다.
우선 첫째는 은혜의 마음을 파괴합니다. 뭐가? 싫증이 은혜의 마음을 파괴합니다. 싫증은 즉각적으로 저지르는 커다란 범죄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 싫증이 우리 안에 있는데도 그것을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털어내지는 데 이 싫증 자체가 죄라고 하는 인식이 없습니다.
요즘 많은 독자들이 게으름을 읽고 있습니다. 정말 많이도 읽습니다. 나는 그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지 몰랐습니다.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게으름이 이렇게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것을 모르니까 자기가 게으르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회개한 적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죄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길거리를 가는데 위에서 건축자제물이 떨어져서 머리가 찢어지고 피가 줄줄 흐르고 껍질이 덜렁덜렁 거리는데 다친 줄도 모르고 일주일씩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프니까. 그런데 그런 병은 무섭지 않습니까? 왜 두개골만 부서지지 않았으면 가서 꿰매고 약 바르면 일주일만 지나면 꾸덕꾸덕 낫습니다. 처음이야 보기 싫겠지만 다시 머리가 자라면 괜찮습니다. 무슨 큰 문제가 없습니다. 어차피 중고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식습관 같은 것이 잘못되어서 서서히 질병적 요인이 잘못되어서 발전되면 이때는 뭐 갑자기 터져서 고름이 흐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암 같은 것으로 발전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멀쩡하던 사람이 가보니까 며칠 못살겠다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뭔가 커다랗게 눈에 보이는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가책을 느끼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가책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으름이나 영혼의 싫증은 더더군다나 영혼의 싫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방약 없이 우리 속에 침투해서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는 암세포처럼 퍼져갑니다. 그리고 이 싫증이 극대화되어서 나중에 반감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죄가 산출될 때에 가서야 비로소 가만히 더듬어보니까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보니까 어느 한순간에 마음이 식어지면서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때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오늘 김기현 집사님이 기도를 했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싫증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에 대해서 싫증을 안 내시는데 언감 생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낼만한 그런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싫증을 냅니다. 그게 얼마나 죄송한 일이고 얼마나 그게 잘못된 일입니까? 그런데도 여러분 가운데 영혼의 싫증을 낸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회개하고 기도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것 같이 치료제나 예방약이 투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이 싫증의 바이러스가 들어와서 우리의 전 영혼과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강력하게 이제 제일 먼저 들어와서 파괴하기 시작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의 마음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받고 나면 마음의 틀이 형성됩니다. 이 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가 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을 사용하게 된 용어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전 3-4세기 경으로 올라가면 그리스 사람들이 인간 속에 있는 성향을 설명할 때에 이런 틀,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결정한 주도적인 경향 이런 것을 이 틀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틀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자면 disposition 성향입니다. 그리고 propensity 지향성입니다. 뭔가 어느 한쪽으로 자꾸 가려고 하는 그런 성질입니다. 그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틀입니다. 그 틀이 은혜 안에 있을 때에 틀과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 그 틀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단의 공격은 집요한데 그 틀을 내버려두면 잠시 유혹이 성공해도 그 유혹이 그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가 하면 마음으로 들어와서 공격을 하면 은밀하게 침투해서 그래서 마음의 경향성, 이 지향성, 제 표현에 의하면 마음의 틀을 허물어트립니다. 그래서 경향성이나 지향성 이런 것들이 은혜 아래 있을 때에 하나님을 닮으려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이 일정한 은혜 받은 사람의 경향성이 있습니다. 다 알잖아요. 왜 그렇게 처음 듣는 것처럼 생뚱 맡게 그렇게 쳐다봅니까? 고개를 끄덕 끄덕여야지 기분이 좋지. 다 알잖아요.
은혜 받으면 오늘 왔는데도 또 오고 싶고 또 오고 싶고 목사님에게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 오고 은혜 받으면 그렇게 됩니다. 뭐라도 하나 교회에 갖다놓고 싶어 하고, 뭐라도 하나 드리고 싶고, 화장실 청소라도 하고 싶고 하여튼 뭐라도 그렇게 하고 싶은 그게 전부다 뭔가 하면 은혜 안에 있을 때 마음의 지향성, 경향성, 성향, 제 표현에 의하면 은혜의 마음의 틀입니다. 이것을 싫증이 공격을 합니다. 이것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면으로 도끼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살살 와서 좀을 먹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 지나면 상당 기간동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는 점점 싫증 때문에 이런 틀들이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이 지나면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그런 은혜의 마음을 파괴하는 일을 바로 이 싫증이 선도적으로 주도합니다.
그래서 싫증이 먼저 가서 쭉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약화시켜놓으면 그 다음에는 이제 유혹이 들어가고 죄가 들어가고 하면서 그러면서 본격적인 파괴의 활동들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싫증이 생겨나게 되면 그 싫증이 마음에 바이러스처럼 파고들어가니까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싫증에 잘 영향을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싫증에 영향을 덜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실려야 하는 것은 모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음이 실리지 않고 하는 일, 그게 뭔가 하는 것입니다. 숨쉬고 눈 껌벅이는 이런 것을 빼놓고 마음이 실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소변 마려워서 화장실 가는 것, 때 되면 밥 퍼먹는 것, 졸리면 퍼져서 자는 것, 리모콘으로 키고 TV보는 것 이런 것 마음에 안 실려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데 마음이 안 실려서 되겠습니까?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안 실려도 되겠습니까?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마음이 안 실려도 되겠습니까? 성경을 가르치는데 마음이 안 실려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안 실려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영혼의 싫증에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사람은 멀쩡한데 골병든 사람처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영혼의 싫증을 간직하면 자연스럽게 무슨 생활을 하면 딱 좋은가 하면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는 곳에 가면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아주 거기에 딱 맞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싫증이 들어와서 은혜의 마음을 파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정직한 복음의 선포가 있고 바로 옆에 친한 지체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기뻐하고 진리의 칼날 앞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고 하는 그런 것들이 전부다 다 신경과민처럼 느껴집니다.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광신자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구역장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는데 여러분들도 가면서 한권씩 보십시오. 서점에서 내가 갖다놓으라고 그랬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수 있을까” 그 책을 제가 쓴 책은 아니지만 갖다놓았습니다. 몇 년 전에도 그 책이 나와서 읽혔는데 구역장들은 다 써서 2월 둘째 주까지 리포트를 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은 리포트를 안 내도 되니까 그냥 사서 보십시오. 그것을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영적인 거장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 인류역사에 있어서 그렇게 몸부림치는 사람이 정말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성도로서 몸부림치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읽더니 이 사람 신경쇠약증에 걸린 사람이 아니냐고, 아니 대충 살면 되지 나는 왜 이렇게 많이 잤을까? 나는 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절제가 없을까? 그리고 그렇게 지독하게 자기반성을 하니 이게 신경쇠약이지, 신경정신적인 증상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게 자유지,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지 주님이 자유를 주셨으니까 이제 아무렇게나 먹고 돼지처럼 살자,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가서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마음으로 실려서 하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왜 싫증이 바이러스처럼 들어와서 은혜의 마음을 전면적으로 공격해서 파괴한 것입니다. 모두 헝클어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는가 하면 싫증이 들어와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은혜 받은 사람의 경향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달려가고 싶고 말씀을 사모하고 단 하루만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하지 않아도 컬컬해서 견딜 수가 없고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지향성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런 경향성, 이런 성향들이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하는가 하면 싫증이 이렇게 파괴적인 역사를 일으킵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실천을 파괴합니다.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기도의 실천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에 마음이 뒤따라가야지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뒤따라가지 않으면 반드시 티가 납니다.
교회를 한번 짓고 보니까 이제 남의 교회에 가보면 이 교회를 누가 얼렁뚱땅하고 돈이나 많이 뜯어갔는지 아니면 교회를 누가 맡아서 불철주야 애쓰면서 정성껏 만들었는지 금방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누가 많이 벗겨먹고 도망갔구나. 이것은 진짜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좋은 업자를 만나서 지었구나. 그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뭘 하든지 간에 마음이 실리지 않는 것은 표가 납니다. 그런데 사실 시간이 좀 흘러야 표가 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즉시 표가 납니다. 표가 나는 게 아니라 다른 일은 마음이 없어도 일단 해놓고 나중에 가서야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한 일과 비교하면서 이것 봐. 이게 틀리잖아. 그러니까 그때 그 사람이 열심이 하는 척 했지만 마음은 없었던 것이야. 이렇게 판단이 가능한데 기도는 애초부터 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영혼에 열렬함이 있을 때에 기도도 열렬해지는 것이지,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 상태에서 이 기도가 열렬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척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오셔서 이 교회는 좀 소리도 지르고 뜨겁게 기도하지 않나 그러는데 제가 주장하는 게 저도 옛날에 기도원에도 다녀봤고 부흥회를 하면 양쪽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박수도 쳐봤고 뭐 별짓 다해봤습니다. 그런데 다 쓸데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입니다. 제가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성령이 정말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게 하면 소리 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소리를 지르면 성령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이 기도의 영적인 측면을 육적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보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솟구치면서 도저히 하나님 앞에 소리 내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의 힘이 연약하고 소리소리 지를 때 이 기도의 방해를 받는 지체들도 생각하는 것이 은혜 위에 덕을 더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가 되지 않을 때 주여 주여 그러면서 소리를 치고 이렇게 하면서 책상을 흔들고 두들기고 하면서- 우리 책상은 붙어서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영혼의 싫증을 간직한 채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것이 영혼의 싫증을 육체가 털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영혼에 병이 있으면 영혼에 칼을 대고 약을 주입하기 시작할 때에 영혼이 고쳐지면서 나머지 부분도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치 암에 걸린 사람이 누어서 계속해서 배위에 연고 바르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기도는 영혼의 싫증을 가지고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나서 나중에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처음서부터 아예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님을 믿은 날들을 이렇게 반성해서 보면 확실히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할 때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영혼의 뜨거움을 간직했을 때에 열렬한 기도가 가능했지 냉담하고 싫증이 난 영혼을 가지고 가슴 저미면서 열렬히 기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죄가 들어와서 기도를 파괴시켜서 쓸모없는 신자로 만드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첫 번째 단계부터 얘기하자면 맨 처음은 영혼에 열렬함이 있습니다. 열렬함이 있는데 그 열렬함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사실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환경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직장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 거짓말입니다. 직장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교회에 시간을 지켜 나와서 기도하고 그러지는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의 은혜가 꽉 차면 만원버스 속에서 손잡이를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기도하게 되고 전철에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떠밀리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기도하게 되고 그리고 점심시간에 하도 곤고하면 옥상에 올라가서 벤치에 앉아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정말 바쁜 것에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예수님 믿고 난 이후로 이제껏 까지 게으를 래야 게으를 수 없게 여건이 마련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바쁘고 부지런히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한배반 이상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자신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가장 열렬한 기도를 드리던 때가 내 생애 있어서 가장 바쁘던 때였습니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자는 것은 꿈도 못 꾸고 그리고 화장실에 앉으면 한 컵씩 피를 쏟는 그런 때에 주님을 만나고 참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간직하면서 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그렇게 비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많이 늘었고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어떻게 교인들을 다루고 교회를 이끌어갈지는 알았는데 그때 처음 복음의 의미를 알고 그 영광스러운 부흥을 경험했을 때, 그때에 가슴을 찢는 것 같은 그런 그 피맺힌 기도들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을까? 그런데 제 생애 있어서 가장 살인적으로 바쁘던 때, 정말 너무너무 바쁘던 그때 제가 가장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곤고하면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밖에 나와서 난간에 기대어서서 안양시를 내려다보면서 기도했습니다. 10분만 눈을 감고 기도를 해도 한없이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디서든지 간에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정류장에서 가로수를 붙들고 기도하면 민족을 위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거의 그런 말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데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그렇게 준비되어 있어야지 됩니다. 마침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쌀이 가마니에 가득 들었습니다. 그런데 찔러보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쿡! 찌르면 쌀이 나오면서 이렇게 보고 일등급이네,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쌀이 꽉 차있으면 탁! 찌르면 쌀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은혜에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을 가지고 있으면 탁! 치면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 한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 있어서 상황은 기도할 상황인데 기도 개시 할 때 기도가 탁! 쏟아져 나오지 않고 쌀이 꽉 안 들어있으면 쑤시면 안 나옵니다. 툭툭 치면서 계속 쑤셔야지만 나옵니다. 그렇게 준비가 안 됩니다. 이게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기도의 실천에 게으르게 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나와서 기도하다가 그 다음에는 옥수수 빼먹듯이, 이빨 빠지듯이 오늘은 나가고 내일은 젖히고 모레는 또 쉬고 글피는 나가고 그글피는 다시 안 나가고 이러면서 살다가 몇 주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쉬고 내일은 못 나가고 그러면서 모레는 안 가고 글피는 그글피는 그냥 자고 결국은 하루도 안 나갑니다. 기도에 있어서 게으르게 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육체가 게으름에 빠지는데 그것을 통솔할 수 있는 힘을 영혼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싫증이 빠지니까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가면 기도에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어거지로 교회는 나옵니다. 기도하러 나오는데 실컷 졸다가 가거나 횡설수설하다가 가거나 아니면 한 한 시간씩 두 시간씩 엎드렸다가 갔는데 마음이 기도한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는 그런 때, 뭐라고 그냥 애쓰면서 씨름하면서 기도하기는 했는데 공상과의 씨름이었습니다. 잡생각과의 씨름이었지 무슨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온갖 오가는 잡동사니 생각하고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그러다 결국은 집에 갑니다. 그러니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다 네 번째 가서는 도저히 그것도 지탱할 힘이 없습니다. 내용이 없으면 형식이 지탱이 잘 안 됩니다. 잠시까지는 되지만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의무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가서는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의무를 경멸합니다. 여러분들 그런 얘기합니다. 에이씨 기도만 하면 제일인가. 뭐 어느 책에서 보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기도만 그렇게 열심히 하면 되겠어. 통전적이고 모든 것이 종합적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기도도 하지 말고 거룩한 삶도 안 살고 이렇게 해야지 균형이 맞는 것이지. 거룩한 삶을 안 살고 그러고 기도만 하려고 그러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도가 게을러서 기도의 실천을 이행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 기도에 있어서 능력을 잃어버리고 하는 것들의 단계에 오게 되면 육체의 게으름이 주도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초창기에는 육체가 아직까지도 열기가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영혼이 끌어만 주면 달려가서 기도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싫증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게 싫증으로 바이러스를 침투시키고 그 다음에 뒤따라서 육체의 게으름과 손잡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죄악이 봇물이 터지듯이 밀려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선봉장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자신의 경험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분명히 내가 왜 그렇게 열렬하게 쏟아져 나온 기도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눈뜨고 보니까 기도의 능력이 모두 사라지고 그리고 의무를 경멸하기까지는 하지 않지만 그러나 기도의 의무를 행하는 것, 다시 말하면 기도하러 가는 것 자체도 이렇게 힘든 정도의 사람이 되었을까? 그때 뭐 많은 이유를 댑니다. 회사가 바빠지고, 요즘 불경기고, 몸이 피곤하고, 시계도 망가져서 종이 안 울리고 이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하지만 그것은 모두 상황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진정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런 얘기하면 그냥 그렇겠네. 그러지만 속으로는 말도 안 되지, 말도 안 되고말고 그렇게 합니다. 또 속아주는 것처럼 넘어가는 게 그게 또 목회라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싫증은 기도의 실천을 파괴합니다. 바이러스처럼 들어와서 파괴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의 미각을 파괴합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십시오. 시편 119편이 하나님 말씀의 영광의 장이라고 불립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이라고 믿어지는 이 시인이 일생을 살면서 고난과 역경, 기쁨과 환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혜롭게 하나이다.” 혹은 “주의 말씀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입에 송이 꿀 보다 더 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인이 73편에서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노라” 그게 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데 은혜 안에 있는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지혜롭게 합니다.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살면 내가 너를 기뻐하겠니. 그러면 가슴아파하면서 회개하면서 주의 말씀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나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뭔가 하면 말씀의 미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73편의 시인은 침체에 깊이 빠지고 나더니만 “아침마다 징책을 보나이다.” 말씀이 너 이렇게 살면 안 되지. 그렇게 살면 짐승이야. 그러니까 에이씨 하나님은 나만 미워해. 아침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야단쳐. 아니 한번만이라도 좀 좋은 말을 하면 어디 덧나. 이런 반발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싫증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천하 없이 고상한 말이면 뭐합니까. 유두고가 왜 떨어져 죽었습니까? 설교자가 후져서 그랬습니까? 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까? 사도 바울의 육성 설교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구원한 정말 역사 속에서 그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힌 특권이었는데도 결국은 졸다가 떨어져서 죽어버렸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싫증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너희들도 가려느냐 예수님이 물으시니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더 들려주십시오, 더 알고 싶습니다.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은 다 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영혼이 싫증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싫증은 말씀의 미각을 앗아갑니다.
어렸을 때 사실 소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까?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 소고기를 사주실 때가 있습니다. 소고기를 사주셔도 한번도 볶아먹은 적은 없고 무를 잔뜩 넣고 물과 무를 집어넣고 그리고 고기를 조금 썰어서 집어넣는데 사실은 반은 기름입니다. 그런데 그 국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거나 혹은 아주 놀랍게 행운이 뒤따르는 날에는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그리고 그 무채를 만들어서 볶을 때 진짜 무채를 한 세 숟가락 먹으면 그 속에 고기가 하나씩 묻혀서 나오는 정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도 고기를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 건강하게 뛰놀 때는 안 사줍니다. 그러다가 독감이라도 걸려서 된통 앓으면 그때서야 사주는데 이게 맛이 없습니다. 입맛이 독감에 걸려서 어느 것을 먹어도 입맛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아니 입맛이 있을 때 사주지, 그러니까 저는 어려서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한번 독감에 걸리면 된통 앓습니다. 요즘도 한 일년에 한번 독감을 앓거나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독감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왜냐하면 그 독감을 교역자들이 앓으면 당장 손해 보는 게 교인들이니까 예방주사를 다 맞습니다. 의무적으로, 독감을 앓고 집에 누워있을 그런 권리가 없다. 제가 솔선해서 먼저 맞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독감을 앓지 않았습니다. 먼저 맞습니다. 그런데 독감에 거리면 요즘도 그냥 신음소리를 내면서 이틀, 삼일 누워서 푹 앓아야합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기다렸다가 다 나은 다음에 사주면 되는데 한참 독감에 걸려서 정신이 없어서 인사불성일 때 그때 사서 무나물에다 볶아주는데 이게 나무토막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변했습니까? 입맛이 변한 것입니다. 미각 세포가 고열에 시달리면서 잠시 다 죽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그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가끔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요즘은 설교가 은혜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뭐 대놓고 그렇게 말은 못하지만 빙빙 돌리는데 나도 작가인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편지와도 금방 알지,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래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혹은 독감에 걸리면 입맛이 떨어질 때도 있다. 좀 기다려보자. 그렇게 입맛이 떨어집니다.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니 이렇게 입맛이 살아있을 때는 하나님이 야단치면 내가 정말 주님의 친자식이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야단치시지.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사생아였으면 하나님이 날 이렇게 야단치시겠는가. 정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구나.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이 칭찬해주시면 감격하면서 내가 한 게 뭐가 있는데 하나님이 칭찬해주시는가.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면 시편 31편에서의 시인처럼 “주를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곧 사람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긍휼한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그러면서 이 풍랑 인하여 주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그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예화: 어느 전도사님이 좋아하는 자매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여자 집에서 반대하며 구 박을 받고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성경을 폈는데 이사야 41장10절의 말씀을 보고 자신을 위로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하며 울면서 돌아왔다 는 내용)
이게 미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미각이 사라지고 나면 똑바로 살아라. 그러면 씨, 나만 미워해. 이게 모두가 어디서 오는가 하면 영혼의 싫증의 유무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는 정서가 너무 풍부합니다. 눈물을 그렁거리며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자가 실수를 해서 이삭이 아브라함을 낳는데 그래도 아멘! 모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제 정말 늦잠을 잤는데 그래도 아멘! 이게 모두다 영혼의 싫증이 없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지금 그 당사자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누구에게 불명예가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내가 하겠습니다. 아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여기 20명도 안 될 것입니다.
(예화: 교회 개척 후 성도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제직회를 하는 과정에서 쓸데없는 돈을 줄이자는 말이 나와 이것저것 건의가 되다가 휴지 를 쓰는 문제에 대해서 찬반이 엇갈리다가 은혜 받고 눈물을 닦을 때 질이 안 좋 은 휴지를 사용함으로 눈 안쪽에 고름이 맺혀지는 부작용으로 인해 좋은 펄프 휴 지를 지금까지 사용한다는 내용)
그런데 영혼의 싫증이 생겨나게 되면 그런 휴지가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휴지가 필요합니까. 365일이 가도 바짝 말라서 어떤 감동도 없고 진짜 돌부처 눈에 눈물이 흐르면 흘렀지 그 사람 눈에 눈물이 흐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말씀의 미각 때문입니다. 그런 말씀의 미각을 영혼 안에 싫증이 앗아가는 것입니다. 이 싫증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에 대한 싫증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의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권태감과 싫증입니다. 그것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싫증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교리에 대한 싫증입니다. 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복음, 교리에 대한 싫증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복음을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사셨다. 그게 복음입니다. 또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대표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시고 또 삼일 만에 살아나셨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여러 가지 이야기로 불신세계에 대해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쳤지만 그 모든 핵심적인 요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으신 그 죽음이 죄인인 나를 위해 대신한 죽음이었고 죄인인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한 죽음이었고 그리고 죄를 지은 이 모든 사람들 중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한 대표적인 죽음이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 때문에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선택받은 자녀들인 우리들이 덕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 바로 그리고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온통 관심사가 어디로 가는가 하면 실제적인 것, 요즘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실제적인 설교를 해야지 교회가 부흥하지, 실제적입니다. 그런데 그 실제적인 것을 너무 많이 좋아하면 안 됩니다. 복음 안에서 복음을 토대로 실제적인 것은 좋지만 그러나 복음의 싫증이 난 사람들을 데리고 실제적인 그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교회에서 울려 퍼져야 할 메시지가 아니라 회관에서 울려 퍼질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19세기에 18세기부터 합리주의가 일어나면서 19세기에 유럽의 교회들이 급속하게 이제 18세기이후로부터 시작해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20세기까지 교회가 급속하게 이제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싫증을 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누가 아니래. 네가 아니라고 그랬어. 아니, 네가? 아니. 봐. 우리 다 맞다 그러잖아. 그런데 뭐 누가 아니래. 그런데 뭐. 그건 다 있다고 치고 그 다음에는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것을 설교해보란 말이야 이 사람들아.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실제적인 것을 해보란 말이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누가 아니래. 다 아는 얘기하지 말고 실제적인 것을 이야기해봐. 이게 바로 이제 합리주의가 일어나면서 과학주의가 일어나면서부터 이제 사람들의 실제 생활의 요구들이 늘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대한 경험이 함께 있게 되면 그 경험을 가지고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사셨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 복음을 경험한 것을 가지고 실제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할 텐데 이 복음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아무렴 뭔 상관이 있어. 속으로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설교단이 다 망해버립니다. 그야말로 그냥 망해버립니다. 망해버려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게 역사에 실제로 나옵니다. 주일날 낮에 모여서 듣는 설교 제목이 이런 것들입니다. 감자를 먹는 유익,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부활절 날에는 설교제목이 무엇인가 하면 생매장당하는 끔찍함,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양들은 가두어 기르는 것보다 놓아기르는 것이 좋다. 이게 역사의 자료에 나오는 진짜 주일날 울려 퍼졌던 설교제목들입니다.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감자의 유익, 그러면서 이제 영양학적으로 감자를 분석하면서 뒷집 누구도 감자를 먹고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실제적이겠습니까? 그리고 흩어져서 돌아가는 동안에 교회는 계속 문을 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싫증은 하나님의 구원방법과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방법인 복음 자체에 대한 반감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 복음이고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이 구원하는 방법이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복음과 함께 무슨 낱말이 붙었습니까? 교리라고 그랬습니다. 복음교리에 대한 싫증이 촉진된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여러분,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쓰여 진 것인데 그것을 한번에 이해하게 만드는 게 이 교리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이해하고 있으면 어떤 강점이 있는가 하면 아직 성경의 내용을 샅샅이 다 모른다고 할지라도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교사 리바이벌이라고 하는 책에서도 그런 얘기를 썼는데 김밥을 쌉니다. 김밥을 쌀 때 우선 김을 좋은 것을 사다가 펼치고 그 위에 밥을 고슬고슬하게 해서 식초를 쳐서 쭉 얹고 거기에다가 이제 김을 완전히 내보낸 다음에 해야지 됩니다. 습기가 차면 김밥이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김을 모두 선풍기로 바람을 불어서 밥풀 사이사이에 있는 김을 다 쏟아내어서 온도를 떨어뜨린 다음에- 나도 잘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균일하게 펴고 그 위에다가 이제 우엉, 그 다음에 단무지, 시금치, 소고기, 햄, 게맛살 등등을 골고루 다 넣습니다.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김밥 싸는 발로 마는데 숙련된 주부는 이것을 짝 말았을 때 한번에 정 가운데 딱 옵니다.
그런데 실호도들은 말이지 일본말을 써서 미안합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은 밀면 한쪽에 가서 쏠립니다. 그래서 김밥이 옆구리 터진다고 합니다. 다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김밥이 쭉 되는데 그런데 궁금한 게 무엇인가 하면 시커먼 덩어리가 올라왔는데 이 속에서 뭐가 들었을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이쪽서부터 이렇게 펼쳐서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펼치면 모두 들고 뭐도 들고 아는데 그런데 가다가 시금치를 넣었는데 시금치가 모자라서 여기까지 넣고 뒤에는 안 들어갔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여기 햄을 넣었는데 햄이 짧아서 여기까지 넣다가 끊어졌습니다. 그런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굵었다, 가늘었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 가운데로 한번만 딱 들어보면 까만 김이 있고 가운데 하얀 밥이 그 다음에 거기에 단무지 등 뭐 뭐가 다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은 일곱 가지를 집어넣고 쌌구나. 이렇게 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게 바로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쭉 계시록까지 얘기하는데 조금씩 조금씩 다 다릅니다. 시대가 틀리고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틀리니까.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생각하고 쓴 것이지만 요한복음은 헬라인을 생각하고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각 다르니까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나타내주는 게 교리입니다. 그것을 복음을 토대로 해서 세운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지금 6장 68절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싫증에 관한 설교를 닷새 동안 듣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현재 6장 68절에 의미가 무엇인가도 깨달았지만 어디를 읽든지 간에 아!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봅니다. 아이고, 이 친구 싫증났구나. 이렇게 보다가 하나님 왜 우리만 미워합니까? 이 친구도 싫증났구나. 읽다가 세상으로 가야지 되겠습니다. 이것도 또 싫증났구나. 이게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교리가 가져다주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설교를 같이 들을 때 이 신앙에 강력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절 한절 풀어가면서 듣는 것을 읽을 때 아, 하나님이 창세기 35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아,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좀더 크게 창세기 전체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역사하시면서 인류의 역사가 개벽이 올랐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또 시편에 넘어오면서 하나님이 시인들을 이렇게 경험하면서 이렇게 했구나. 이런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만 가지고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어디를 보든지 간에 전체적으로 아, 이 사람이 구약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싫증낸 사람이었구나. 오, 회개했네. 세상에 다시 열렬함을 회복했구나. 이런 것을 이렇게 보면서 보는 눈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보면 어떤 설교는 한편을 들었는데 한편 들은 것 갖지 않고 성경 전체가 옛날에 있었던 지식이 확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교리적인 설교가 그런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이렇게 같이 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처럼 이번 주 1절, 다음주 2절, 3절, 4절, 5절 이렇게 가는 것도 듣고 그 다음에 천지창조의 목적, 그래서 한 8주 동안 듣고 죄와 은혜의 지배, 그래서 한 22개쯤 설교를 이것을 두개를 같이 가면서 들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영혼의 싫증이 없고 열렬함이 있을 때는 이 복음의 입각한 교리들을 배우는 것에 있어서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집을 쌓는 것처럼 재미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그렇게 천지를 창조하셨구나. 아, 그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구나.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이 이렇게 절묘하게 천지창조의 교리와 연결이 되는구나. 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못 박히셨구나.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런 원대한 계획이 있었구나. 아, 그런데도 우리 인간에게 아직도 부패성이 남아 있구나. 이게 죄와 은혜의 지배가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이러면서 막 알아갈 때마다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집을 탁탁 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성경 한 20절 쯤 읽은 다음에 착하게 삽시다. 그리고 끝나면 분노가 치밉니다. 집을 지어야지 되는데 재료는 안 주고 잘해봅시다. 그리고 끝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 그리고 끝납니다. 다 듣고 나서는 틀린 얘기는 하나도 없는데 맞는 얘기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가슴이 설렁하고 배가 고픈 느낌이 듭니다. 다 갖다가 하나 깨달았습니다. 그럼 하나 갖다놓고 또 깨달았습니다. 또 갖다놓고, 그러면서 집이 잘 지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독교의 사상이 다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있으면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저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너무 어렵다고 그러면 물론 기도를 해줍니다. 한번도 거절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성숙하지 않았을 때 기도하는 게 얼마나 미신적이라고 하면 너무하지만 너무 좀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기중기 사다놓고 거기에 손을 대고 많이 주문을 받게 기도해달라고 그러고 말이지, 쇠 덩어리에 손안 대고 기도 안한다고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뭐 별의별 우스운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신앙자체가 아주 맹목적이 됩니다. 그게 잘 되면 모르지만 한번 사고를 내보십시오. 그럼 또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런 일을 왜 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그러면 그렇게 자신이 없이 살면 되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벌써 쌓여진 사람은 점점 질문이 줄어듭니다.
저는 외부에서 온 교인들과 거의 상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난관을 뚫고 하도 나를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좀처럼 안 만나고 부목사님과 만나라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은 상처도 받았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게 맞다 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두 시간, 어떤 때는 두 시간 반씩이나 얘기하는데 대부분은 질문으로서 가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왜 집이 지어지지 않은 사람이 질문하는 내용이 그게 무슨 내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들어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 듣고 난 다음에 죄와 구원, 목자와 양, 두개 주고 나서 다 듣고 나서 그래도 질문이 있으면 다시 오면 내가 다시 만나주겠다고, 그 다음에 만나서 더 질문이 있습니까? 그러면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 교리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강한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들을 영혼의 싫증이 모두 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이렇게 되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하나하나 이해하면서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첫 번째, 두 번째 그러면 뭐가 이렇게 복잡해. 간단하게 말해서 뭔가. 간단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꾸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들어보십시오. 이북이 남입니까? 우리나라입니다. 내 동포입니다. 언어가 틀립니까, 먹는 밥이 틀립니까, 얼굴색이 틀립니까, 입는 옷이 다릅니까? 그런데 이북서 남한에 넘어온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서 생활하기 전에 3개월 이상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도 나오면 살수가 없다고 합니다. 세상이 달라서, 더군다나 우리들은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데 천국의 룰대로 살아야지 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보이지도 않는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간단하게 얘기합니까?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보고 뭐가 이렇게 복잡합니까? 가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전철을 어떻게 타는지 알아, 매일 사기나 당하고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카드 쓰는 법을 알겠습니까, 회수권사는 방법을 알겠습니까? 뭐 알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영혼의 싫증이 없을 때는 정말 알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고, 깨닫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열렬함을 간직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깨닫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싫증을 느끼게 되면 복음교리에 대한 이런 열심이 사라지고 그리고 결국은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싫증이 복음에 대한 싫증으로 이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은혜의 능력을 파괴하게 됩니다. 은혜에는 반드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는 우리에게 힘을 주고 그래서 그 힘을 가지고 우리들이 은혜가 없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합니다.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은혜가 없었을 때는 도저히 그 까다로운 남편과 살수 없었는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정말 그 영혼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그래서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은혜 받지 못했을 때는 진짜 그 아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까 이제는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습니다. 사랑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전에는 용서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용서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를 사랑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저는 그렇게 등산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등산을 하는 사람이 대게 조난 사고를 당합니다. 그리고 등산을 하다가 사고가 많이 납니다. 예를 들자면 겹질려서 다리를 삔다든지 내려올 때 특히 그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언제 그런 일이 생겨나게 되는가 하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지 됩니다. 첫째는 산을 내려가는 힘은 있는데 요령을 잘 모르거나, 또 하나는 산을 내려가는데 올라오느라고 힘이 다 빠졌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발을 이렇게 떼어서 어디를 밟아야지 되는가 생각하면서 안전하게 하려고 이렇게 하면 힘이 드니까 발을 이렇게 들면 그러면 사고가 납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 가운데 탁구선수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들어갈 때 탁구 쪽으로 방향전환을 해서 체육 쪽으로 들어가겠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나는 탁구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탁구 치는 법을 가르쳐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을 데려다가 거의 살인적일 정도로 체력훈련을 시켰습니다. 매일 10킬로미터를 구보를 하는데 10킬로가 말이 10킬로지 그 여자애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3달을 훈련을 받더니 애가 얼굴이 새카매지면서 완전히 다른 애가 되었습니다. 아주 단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말도 못하게 스파르타식으로 시킨다고 합니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산을 뛰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니 야, 축구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뛴다면 내가 이해가 간다. 그런데 5그람도 안 되는 탁구공을 때리는데 그렇게 모래주머니를 달고 살인적인 훈련을 받아야지 되느냐고 그랬더니 지금도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아이의 말이 잊혀지지 않고-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말은 그때는 전도사였는데 전도사님은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모든 운동의 기본은 체력이라고 합니다. 체력이 없으면 정교한 기술이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말이 재미있잖아요. 체력이 없으면 정교한 기술이 나올 수가 없다고, 나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체력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야지만 정교한 기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체력이 비축되어 있으면 에너지가 남기 때문에 힘이 들어도 이렇게 하면 더 서브가 강력해질 것이야. 아니면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못 받을 것이야. 하면서 최선을 선택해서 하는데 체력이 모자라면 최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힘이 덜 드는 쪽을 자꾸 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미스가 나고 그 다음에 발을 밟고 움직이는 것들이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게임에서 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과 5그람도 안 되는 작은 공하나 그것을 가지고 하는데도 기본적으로 강인한 체력이 없으면 정교한 기술이 안 나온다. 이게 영적으로도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집니다.
여러분, 이럴 때 있을 것입니다. 죄와 싸우는데 다 이겼는데 그대로 할 힘이 없습니다. 어느 형제가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모두 듣고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왜? 그러니까 죄 죽임의 교리를 다 들었거든요. 그것을 듣는 것도 사실 보통 인내를 요하는 게 아닙니다. 90분짜리 26개니까,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래서 잘했다. 그런데 그 교리에 의하면 죄가 맨 먼저 유혹을 할 때 그것에 끔찍한 비유가 나오는데 산에서 텐트를 치고 자다가 눈을 떠보니까 물컹 하는 게 있는데 이렇게 큰 구렁이었습니다. 소리치면 이 뱀이 물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날카로운 칼이 하나 잡히고 그리고 눈을 떠서 보니까 뱀이 찌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서 머리를 대고 있어서 골수를 한번에 맞혀서 찌르기만 하면 제 아무리 팔뚝처럼 굵은 구렁이라고 할지라도 벌써 한쪽은 내 배위에 걸치고 올라가고 있는데 한번 내려찍으면 꼼짝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죄가 그렇게 최초로 유혹할 때 마치 징그러운 뱀이 텐트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정교한 칼을 가지고 그 머리를 난자하듯이 처음에 그렇게 죄가 들어왔을 때 콱 찔러 죽여라. 그것이 죄에서 승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렇게 가르치셨지요? 그랬지. 그런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하지요? 뭔데? 죄가 들어왔는데 죽이기 싫습니다. 그렇게 징그럽고 아주 더럽다는 느낌이 안 들 때는 어떻게 하는가. 이게 바로 무엇입니까? 싫증이 들어와서 영혼의 싫증이 역사하면서 마음속에 있는 그 은혜의 능력을 파괴해서 죄에 대해서 대항하기는커녕 이미 그 죄에 대해서 항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빼앗아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그것은 처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벌써 들어와서 죄의 지배 속으로 사람을 상당히 끌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죄가 이미 이 속에서 모든 틀을 허물어트리고 주도적인 경향이 되었을 때 그 죄가 좋지, 이게 벌써 경향이 되었는데, 틀이 되었는데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틀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이렇게 살고 싶은 경향성들이 있는데 한참 있다가 죄가 들어와서 지배를 바꾸게 되면 새로운 경향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주일날 놀러가고 싶고 안 하던 술도 다시 하고 싶고 담배도 손대고 싶고 그리고 같은 모임이지만 기도하러 동그랗게 모인 모임보다는 고스톱을 치기 위해서 동그랗게 모인 모임이 더 좋고 그리고 같이 노래 부른 모임이지만 교회에서 이렇게 찬양을 부르는 모임이 노래방에서 소리소리 지르는 게 좋고 이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경향성이 일단 생겨나게 되면 자꾸 삶이 그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변해갑니다.
그런데 바로 싫증이 이런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싫증은 태만과 부주의를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결국은 태만은 육체의 게으름과 야합해서 힘들지 않게 살아가려고 하고 그래서 분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이 부주의는 지성과 야합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꼼꼼한 신앙생활, 주의 깊은 신앙생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집요하게 생각하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이런 경향,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싫증난 영혼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싫증난 영혼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생활, 대충하는 신앙생활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온전해지는 성화의 삶이 그들에게 있어서 도전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은 바로 꼼꼼함과 주의 깊음, 심사숙고, 집요함, 철저함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것인데 영혼이 싫증에 의해서 잠식되어버렸는데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잠들어있다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 하면 영혼의 싫증이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는 상태,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그 싫증이 최소화되어서 열렬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그러면 즉시 반응하고 그리고 위험이 닥치면 즉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이런 상태가 바로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그것은 개혁의 의지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고치려고 하는 의지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사람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서 계속 변화된 새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엇이 있어야지 되는가 하면 끊임없이 자기 검증이 있어야지 됩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랬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렇게 살면 안돼! 그러면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에 맞는가, 이렇게 판단하면서 검증을 하는 기능이 있어야지만 아, 이것은 내가 부인해야지 되는 것이구나. 아, 이것은 내가 이렇게 해야지 되는구나. 이런 것을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합니다. 영혼이 싫증에 빠지게 되면, 왜 철저한 삶을 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안 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온전해지려고 하는 것은 목표가 있어야지 온전해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온전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가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 의해서라도 넌 그렇게 살면 안돼. 너는 지금 잘못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승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승복하지 않습니까? 승복을 하지 않으면 자기를 고쳐야지 되고 힘이 들어가니까. 그런데 영혼이 이미 싫증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분발해서 수고하고 고통을 지불하면서 자기를 바꿔야 할 의욕 자체가 이 영혼 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 합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개선을 하기 위해서는 분발을 해야지 되고 분발을 하기 위해서는 희생과 수고가 필요한데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희생과 수고가 뒤따라도 내가 이렇게 희생해도 수고하고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하나님께 내가 더 많이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내가 더 온전해질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목표가 자기를 계속 불붙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미 그런 것들이 영혼의 싫증으로 인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야 될 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아주 비효율적이고 비성경적인 신앙생활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하는데 냅둬. 왜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야. 성경이 그렇게 얘기를 안 하는데 아, 이렇게 살수 있고 저렇게 살수 있는 것이지 그게 어디 있는데 내가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기 싫다는데, 그게 결국 무엇입니까?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데, 자기가 뭔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데 자기가 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고 싶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난 싫다. 난 그렇게 하기 싫다. 내가 그렇게 하기 싫다는데 뭘? 이것은 진짜 나쁜 죄입니다. 왜냐하면 모르고 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서부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싫다. 일단은 나는 이 점에 있어서는 내 멋대로 하고 그리고 나중에 회개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자. 그런데 이렇게 지은 죄는 잘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20년 전에 지은 죄를 아직도 회개하지 못하고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어둠의 터널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모두 다 영혼의 싫증이 가져온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이 생겨나게 되면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새로운 도전이 가져다줄 영혼의 유익보다는 그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자신의 수고와 고통이 훨씬 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혼의 싫증에 빠지게 되면 처음에는 마음에서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다가 시간이 지나가면 결국은 그 사람의 삶 자체가 결국 흐트러지게 됩니다. 그리고 싫증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감으로 그 반감이 결국은 죄를 잉태하고 그 죄를 산출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미끄러지게 만들어 계속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싫증은 죄가 미리 우리의 영혼 속에 들여보낸 특공대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영혼의 싫증이 바이러스처럼 퍼트려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지내게 만들고 그래서 그것이 죄의 산출로 이어지게끔 만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에 심으시고 우리를 포도나무로 심으시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극상품포도나무였습니다. 들 포도만 맺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결국은 영혼의 싫증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인 모습입니다. 영혼의 싫증을 간직하고 주님 앞에 정말 사랑받는 삶을 살수 없고 그 싫증을 간직하고는 우리들이 온전한 신자가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우리도 이 영혼의 싫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행복해질 수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고난이 올 때 불행하거나 시련에 직면할 때 우리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불행하고 고달플 때는 우리의 영혼이 가득 찼을 때였고 고난의 길을 걷고 시련이 겹치고 핍박을 받았어도 우리의 영혼이 열렬함을 간직했을 때는 언제나 주님과 동행했고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싫증이 영혼에 미치는 엄청난 파괴력을 기억하면서 이 싫증을 미워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싫증을 이기는 대책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어제는 싫증의 파괴력에 대해서 우리들이 진지하게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 마지막에 뭐가 나와야지 될까요? 이런 싫증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제일 중요한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태까지 못 나오신 분도 마음아파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목회 자료실에서 서비스를 했습니다. 그래서 인쇄소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주일날 오시면 새벽부터 밤에 설교한 것까지 전부다 18편쯤 설교한 뼈대를 상세하게 간추려서 그래서 얇은 팸플릿 하나 사면 설교 골격이 이렇게 모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열심히 노트하신 분들은 허무할 것입니다. 힘들게 이렇게 계속 기록했는데, 내가 늘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내버려두고 잘 들으면 풀 서비스가 됩니다. 목회 자료실에서 이제 밤새워서 다 만들어서 주일날 아침에 여러분들이 받아보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니까 오늘은 노트를 포기하시고 전문적인 사람들이 훨씬 더 잘하니까 거기다 맡기고 우리 말씀을 들읍시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못 들으신 분도 오늘 잘 들으시면 해결책이 나옵니다.
그래서 대책을 많이 얘기할 수 있는데 저는 오늘 여기서 여섯 가지 대책을 차례대로 말씀드리려고 하고 제가 믿기로는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여섯 가지 대책만 활용을 한다면 충분히 영혼의 싫증 정도는 이기고 일생동안 불붙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는 영혼의 싫증을 이기는 대책 첫 번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하나님을 찾는다. 라고 할 때 그 “찾는다.”라고 하는 말에 원 뜻이 무엇인가 하면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간에 그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의 자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전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만나주신다는 약속이 많이 나옵니다. 신명기 4장 30절에 보면 “거기서 네가 하나님을 구하리니 거기서 네가 나를 만나리라” 그랬습니다. 호세아서 5장 마지막절과 6장 첫 절에 보아도 그렇게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야 비로소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다시 말해서 이제는 우리가 예전에 버렸던 그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지 되겠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신다. 하나님이 찢으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이고 또 하나님이 치셨지만 그러나 고쳐주실 것이다. 그런 약속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실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영광스러운 만남이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알겠는데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기에 어떻게 찾는가? 뭐 하나님이 어디 숨으셨는가. 그래서 이 찾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시편 42편에 보면 시인이 뭐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그게 무슨 얘기인가 하면 팔레스타인에 가면 가을이 되면 사슴의 교미기입니다. 사슴이 교미 때가 되면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 벌판으로 나오는데 그때 이제 암컷은 암내를 풍기고 수컷은 발정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 이제 발정기가 되면 수사슴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타는 듯한 목마름이 옵니다. 그때 맨 처음에는 짝짓기를 하려고나왔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짝짓기보다 급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목마름입니다. 그래서 물을 찾기 위해서 벌판을 달려가는데 물이 어디 그렇게 있습니까. 그러면 헛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결국은 뜨거운 태양아래서 엎드려 죽습니다. 죽으면서 본능적으로 앞발로 흙을 파다가 죽습니다. 그 시인은 그렇게 죽은 사슴의 시체들을 종종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는데 그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바로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아주 중요한 힌트가 주어집니다. 아, 그러면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목마름이 있다는 것이구나.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이해하기가 쉬워졌는데 그러면 그 찾는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을 찾는다는 궁극적인 상태는 무엇인가? 그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럼 거꾸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찾기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너무 목마른 시인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 시인이 이제는 내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교회 봉사를 열심히 시키면 될까요? 그래서 계속 승진시켜서 그래서 누구 말대로 장로로 올려 보내주면 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럼 또 뭘까요? 하나님이 복을 쏟아주셔서 그래서 졸지에 뒷골목의 풀빵장수에서 국무총리를 만들어주면 그러면 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지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상태는 무엇입니까? 뭔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치되게 하지 못하게 하는 뭔가 방해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니 (?)상상력을 동원해보십시오. 예를 들자면 남녀가 사랑에 깊이 빠졌는데 어느 여성이 그 남성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목이매입니다. 그래서 밥도 잘 못 먹을 정도가 됩니다. 여성이 그렇게 목이 매어서 그래서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그렇게 그리워합니다. 옆에 있을 때 그렇습니까? 남편한테 그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내가 알지. 옆에 같이 있을 때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만날 수 없게끔 무엇인가 거리가 있고 그리고 방해물이 있을 때 그러나 감정은 정리가 안 되었을 때 그때에 바로 그것이 열렬하게 찾는 감정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한다고 그럴 때 그 추구점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영적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합에 대해서 이미 지난 시간에 상세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그럴 때 그 추구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연합, 더 요약해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거듭날 때 이미 원리적으로 연합되었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연합의 상태는 우리가 얼마나 성결해지고 얼마나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온전히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이 연합은 촉진되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고 거리감이 많이 생겨나기도 하고 거리감이 사라져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놀라운 연합의 감정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이 시간에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 연합을 온전히 이룬 상태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말씀이 모두 고도에 연합의 상태를 가르쳐주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원리적인 연합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에 원리적인 연합을 물론 기초로 해서 실제적인 연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여러분이 쓰는 용어로 하자면 어떤 때는 그렇게 기도가 잘되고 예수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갑니다. 가기 전까지 그렇게 아이들이 유치부 때부터 교회를 다닌 애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안 믿어진다고 하고 헛소리를 합니다. 가서 은혜를 잔뜩 받고 나서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그랬더니 정말 어떤 책에서도 읽어볼 수 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그런데 오늘은 내 마음에 계십니다. 그게 바로 실제적인 연합을 회개를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그렇게 묘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연합을 추구하게 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 여태까지 잘 안 되었는데 그럼 지금 해볼까? 그래 뭐 다음주부터 연합하지 뭐, 그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러 가지 자기 속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로막는 방해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밖에서 환경적으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그러면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요인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고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또 구원하실 때 내가 있기를 원하는 위치로 돌아가고 또 내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아름답게 촉진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아름다운 연합이 촉진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내 속에 부패한 본성이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자신 안에 본성이 있을 때 그것과 한 덩어리가 되어서 움직이지 않고 잠시 잘못해서 부패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있으라고 한 위치를 떠나라고 하는 일들을 하지 않고 혹은 금하신 일들을 하면서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자기의 내면속에서 솟아오르는 주님을 찾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느끼게 되면 자기가 그렇게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는 그 부패성과 손을 잡지만 이게 영원히 그 부패성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와 더 많이 하나 되고 부패성과는 잠시 통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을 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가 무엇이고 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순종하려고 하는데 이것들이 왜 나를 방해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이기는 비결이 무엇이고 이 죄가 어디로부터 오고 어떻게 내가 마음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무엇이고 내가 죄를 지었을 때는 어떻게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지 이것을 집요하게 그 대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다 더 세미하게 자기를 비쳐주고 밝혀줄 수 있는 그런 말씀의 검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닭 집에 가면 닭을 잡아서 토막을 칠 때 무엇으로 합니까? 칼로 합니다. 그러면 의사가 사람을 뉘어놓고 가슴을 찢고 심장을 수술할 때 무엇으로 합니까? 칼로 합니다. 그런데 그 닭 자르는 칼로 심장을 수술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리 이 환자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불가능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간단한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게 사고가 두루뭉술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두루뭉술한 사고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 내가 죄와 더불어 계속 싸우는데도 질까?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아야지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가 용서를 경험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런 수많은 의문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렇게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일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쉽습니다. 나는 오늘 밤새워 새벽 6시까지 하자고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볼까요? 신기록한번 세워볼까요? 아니 판소리도 흥이 나면 열 몇 시간을 한다고 하는데 왜 못하겠습니까. 제일 어려운 것은 설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설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 그럼 목사님이 책읽기가 어렵다는 것이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모든 설교는 무슨 뜻인가 하면 제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고 한사람의 신자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이지, 나는 한번도 설교하기 위해서 책을 잔뜩 쌓아놓고 그리고 오늘 성도들에게 오늘은 무슨 설교를 해서 한번 뒤집어놓을까 하고 연구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교는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싫증은 어떤가 하면 제가 이 싫증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늘 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이 싫증의 비밀을 터득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터득하게 되었고 그것을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 파고들어가니까 이해들이 생겨났고 총체적으로 싫증에 대해서 가르쳐준 위대한 사람들은 없지만 언뜻언뜻 그들이 총체적으로 이렇게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언뜻언뜻 싫증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도 참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해서 아 이렇게 해서 싫증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이것을 제가 가본 곳으로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설교는 침만 튀면 나오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지 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물론 설교하는 순간에도 성령님이 붙잡아주셔야 됩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할 내용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인 깡통을 설교단에 올려놓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빈 머리통에다가 그 말씀을 집어넣어주시고 텅 빈 가슴에 불을 넣으셔서 어눌한 입술에 말을 주셔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입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인격을 사용하셔서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한 시대에 위대한 설교자로 살겠는가.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한 시대에 진실한 신자가 되겠는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일분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설교자가 뭔데? 그 목회가 뭔데?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고 그러는데 상처받을 게 없습니다. 솔직한 얘기니까. 모두 진실한 성도가 되어가는 한 과정에서 주님이 여기 세워주셔서 제가 여기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설교가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이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두루뭉술한 말씀으로 만족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하나님을 추구한다. 이것이 영혼의 싫증을 털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라고 할 때 그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실한 연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한사람의 신앙의 견고함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그 견고함, 고린도 전서 15장 58절에도 말하기를 “더욱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나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점점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를 지키시리라” 그런 견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견고한 신앙을 유지하는 비결은 계속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나무는 참 견고하구나. 어쩜 이렇게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도 않고 역시 이 나무가 참 견고하구나. 그렇게 이야기할 때 숲 속에 살아있는 나무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콘크리트 바닥에 꽂아놓은 전보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이 있을 때 비로소 견고함이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견고함이 어디서 나옵니까? 아니 우리 흔히 이야기할 때 그 사람 원래 그 성격이 무던하고,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무던하게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교회에 붙어있으면 뭐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이제 붙어 앉아 있으면 나중에라도 들을 귀라도 생기지만 엎어져서 자면 그게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견고해지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목표가 있어서 그것을 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주안에서 나에게 주신 이 사명을 이루어야지 하겠다. 그리고 이 사명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당하신 그 고난에 남은 부분들을 내가 채워가는 비결들을 배운다. 이러면서 큰 목표를 향해 가게 될 때 그때에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그렇게 견고함이 없는가. 받은바 은혜가 적어서 견고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갖다가 부르르 끓었는데 겉에만 익고 속에는 하나도 안 익은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받은바 은혜가 적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를 받아도 추구점이 없습니다. 오늘 은혜 받고 그 다음에 다음 사경회를 기다립니다. 어떻게 하면서? 마치 언덕에서 눈이 오면 비료부대를 타고 내려가듯이 그렇게 나태한 신앙생활 타고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그리고 다음 사경회 때 나를 올려줘. 그러고 있습니다. 끌어올려주면 다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갑니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매일 사경회 하면 좋겠다고 하는데 매일 사경회를 하면 사는 것은 언제 살 것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랬는데 조명기구가 교회에 와서 매일 수리중이면 세상은 뭔 빛을 보고 살겠습니까? 참 적절합니다. 다시 한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랬는데 연중 365일 교회에 와서 수리중입니다. 그럼 언제 세상에 빛을 줍니까? 맞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견고함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추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 추구, 거기에서 견고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혼의 싫증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싫증이 수시로 깃듭니다. 그러나 거기를 향해서 추구하고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더 많이 닮고 싶고 하나님, 제가 예수를 믿은 지가 30년이 되었고 나이가 이제 50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30년 동안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내게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은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붙들어주신 은혜와 사랑은 큰데 실제로 보면 나는 겨우 20대 주님 만난 첫사랑이나 그리워하고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를 돌아보고 정말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고 온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예수만 믿고 한번 한밑천 잡아보려고 그러면 말이지, 예수 믿고 말이지 한번 부자 되는데 도움이나 되어볼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들어오면 이제 기독교 신앙이 혼란스러워지게 시작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복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축복을 하나님 앞에 구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그런 복을 빌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더 연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내 안에 산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으시면 나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찾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컬컬한 마음에 위로나 받으려고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슨 막걸리입니까?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여러분들의 신앙의 목표가 잘못 잡혔으면 고쳐야지 합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추구할 때 그때에 싫증을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하면 첫째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온전한 의도를 가져야지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고 구하고 행하고 그 뜻에 맞게끔 순종해서 내 삶이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이 받아주실 만한 삶이 되도록 삶에 전 방면에서 총체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쇄신하고 왜? 마음이 수시로 싫증을 느끼고 이 싫증을 극복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마음을 쇄신하고 각성해서 이 의무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려고 할 때에 이것을 태만하게 해도 좋다고 유혹하는 모든 방해와 타협에 대해서 거절하고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될 때 그때에 영혼의 싫증을 털어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단언하면서 말하는데 이런 하나님을 향한 전 삶에, 자신의 삶에 모든 방면에서의 하나님을 향한 이런 추구가 없을 때에는 그가 영혼의 싫증을 간직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천사도 싫증을 느꼈는데, 무죄 상태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도 싫증을 느꼈는데 여러분들은 죄 중에 태어나서 거듭났지만 아직까지도 죄의 부패한 본성이 여러분들에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싫증을 안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진짜 여러분들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인가. 그것을 아는 시금석이 있습니다. 가슴 저미는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오늘도 가슴이 아프도록 기도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이 세상이 하나님을 향하여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괜찮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있습니까?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로 뭘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좀 일찍 데려가셔도 좋으니까 이것은 꼭 들어주셔야지 되겠습니다. 가슴에 맺힐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게 있습니까? 있냐고 물으니까 그때서 만들어내면서 그냥 자기 자신이 굉장히 고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처럼 그런 위선 말고 정말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그런 기도제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향한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처럼 살수 없을까’ 그 책을 읽어보면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가 없이 싫증을 안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어떻게 그리스도와 더 온전히 하나 될 수 있을까? 그 하나 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되는 요소와 싸우면서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려고 할 때 그때 비로소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실제적인 연합이 주어지고 그 연합을 추구해가는 사람들은 쉽게 그 싫증을 떨쳐버리고 보다 더 나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천당에 데려가시려고 예수를 믿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의 우리의 인생에 삶 마지막 결과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예수 믿고 지옥에 안 가고 천당에 가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지만 왜 지옥은 고통스러우니까, 천당은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동기 자체가 너무나 세속적인 동기로 천국과 지옥을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의하면 진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에 그 성도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거기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송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고 거기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음부에서 주를 찬송할 자가 누구이겠사옵나이까.” 그랬습니다. 지옥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고 주님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날마다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아빠가 목사님인데, 그런데 이제 장례를 지낸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애들 둘과 목사님 부부가 앉아서 이제 쓸쓸하게 성탄절 케 익에 불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둘째 형에게 물어봤습니다. 형, 왜? 우리 형이 천국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네. 그랬더니 그 둘째 형이 하는 얘기가 야 임마 너는 모르는구나. 왜 형, 천국은 매일 크리스마스야.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벗어버리고 아, 거기서 그렇게 기뻐하며 하나님 찬송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천국과 지옥을 그렇게 그냥 벌을 안 받고 그냥 관심의 초점 자체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양질의 생수가 흐른다며, 그리고 온갖 과일이 다 있다며, 노동도 없고, 그냥 앉아서 기타나 치면서 놀면서 매일 오락회나 하고 과일이나 따먹고 그렇게 한다며, 천국! 그러면 거기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도 노동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아, 여러분들은 참 신학적으로 대단합니다. 성도들이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 다음에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어떻습니까? 또 언뜻언뜻 나타나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때문에 한없이 감격하면서 우리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 이름을 찬송합니다. 모두 다 노동입니다.
그렇게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그것은 삶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천국 데려가려고 예수를 믿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중에 해주시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떻게 우리가 이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렇게 함으로 참된 인간에 삶과 위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게 하시려고 주님이 예수 믿은 다음에 즉시 데려가지 않으시고 잠시 이 땅에 살려두신 것입니다.
자, 기가 막힌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인간적으로 제대로 대우를 해주는 회사입니다. 그러니까 아 그렇습니까. 매달 봉급을 3백만 원씩 드리고 그리고 퇴직하시면 다른 회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의 퇴직금을 드립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내일 퇴직할까, 모래 퇴직할까?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준다는데. 잘릴까? 구조조정이 안되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낯도 모르는 사람을 불러다가 회사에 들여보내서 거액의 퇴직금까지 준비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노후를 염려하지 말고 이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일하라. 그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위해서 영광스러운 상급과 말할 수 없는 그 영광스러운 상급을 예비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를 위해 살 때 고난을 받아도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라. 그 뜻이고 천국의 안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주님을 위해서 근심하면서 사는 상황이 오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말라. 내가 보험 들어났다. 예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룩한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통전적인 거룩입니다. 통전이라고 하는 말은 전체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통해있다는 뜻이고 또 모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통전적인 거룩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영혼, 삶, 생각, 직업, 교회, 세상, 가정 이런 것들이 나뉘는 게 아니라 모두 하나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삶에 통전적인 삶에 있어서 통전적인 거룩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어느 성도가 교회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잘하는가? 물어봤더니 하는 이야기가 열린 교회에 와서 참 감사한 게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게 너무나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교회에서 사는 것은 교회에서 사는 것대로 살고 그것은 목사님이 담당하시고 세상에서 나아가서 사는 것은 또 인생의 선배가 필요했는데 이제는 말씀을 듣고 나면 아주 명쾌하게 세상에 나아가서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지 명백해집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신앙을 잴 때에도 우리가 통전적인 평가를 가지고 재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담임목사 말을 잘 듣고 그리고 헌금이나 듬뿍듬뿍 하고 그리고 뭐나 사서 교사들 많이 밥이나 먹이고 뭐 그게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계속 하십시오. 계속 하시는데 누가 그렇게 섬기는데 싫다고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나아가서는 아주 비양심적인 기업가입니다. 그리고 파렴치합니다. 그리고 직원들 임금 안 주고 떼먹고 아주 근로자들을 부당하게 대우를 해서 업계에서도 짠돌이로 소문나고 탈법하고 탈세하고 불법을 행하고 이러고 살아갑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는 또 그냥 박수치고 찬송하고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말이지 그렇게 아멘 하고 말이지, 그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이 있는 집사로, 열심 있는 권사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에 나아가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통전적인 거룩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다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가증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삶이 통전적인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지 될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면 세상에 나아가서도 그 뜻대로 살아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아, 목사님 세상을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아 자기가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나도 압니다. 다 해봤습니다. 배추장수도 해보고 무장수도 해보고 떡장수도 해봤습니다. 그래서 어느 할머니가 떡 팔러 나갔더니 개시도 안 했는데 와서 떡은 안 팔아주고 청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그런 것도 해봤습니다. 공직생활도 해봤고, 관리자도 해봤고, 교수도 해보고, 작가도 되보고 다 해봤습니다. 얼마나 세상을 많이 알기에 그런지, 물론 어쩌면 여러분만큼 타락을 못 해봤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안합니다. 또 이렇게 얘기해서 아니 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빨리 목회자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시간이 많으니까. 여러분만큼 타락을 못해봤을지는 모르지만 그렇지만,
나는 그것도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포도주 감별사가 있습니다. 코를 몇 백만 불의 보험을 듭니다. 그 사람들은 스킨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나 위스키를 보고 이게 몇 년 산 브랜드 술인지 거의 알아 맞춥니다. 그런데 멍한 사람보고 이게 포도주 여러 가지를 놓고 먹어보라고 하면 한 들통을 먹고도 이게 그것 같은데. 먹어봐야 맞을 압니까? 된장을 잘 담구는 사람은 된장 뚜껑만 열어보고 이것은 못써, 이것은 맛있어. 다 압니다. 뭔지 모르는 사람은 국자로 퍼먹어 봐도 그게 다 그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얘기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은 세상을 모르십니다. 얼마나 세상을 잘 알아서, 나도 세상을 알 만큼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통전적인 거룩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거룩하게 살라고 그랬는데 세상에 나아가서 그대로 살다가 보니까 힘듭니까, 안 힘듭니까? 힘듭니다. 교회 안에는 다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예의상 그렇게 해야지 된다는 것을 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오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말자. 그래서 교회에서의 삶은 거룩하고 세상에서의 삶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자. 그게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살던 삶입니다. 그리고 핍박도 받고 고난도 받아야 되니까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어두운 세상을 그렇게 믿음으로 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 믿음으로 살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놀라운 하늘의 위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그래서 악한 사람들의 악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결국은 그 속에서 높이십니다. 요셉을 감옥에 쳐놓고 죽여 버리려고 그렇게 모함을 하고 별짓을 다 했지만 결국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섭리 속에서 보호하시는 것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그런 통전적인 거룩의 삶의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뭐 할일이 없으셔서 교회에만 계시고 밖에는 안 계십니까. 교회에도 계시지만 밖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교회에서 봉사할 때만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맨 친구 것 커닝이나 할 때도 하나님이 거기에도 계십니다. 세금 안내고 탈세하고 그럴 때 세무사와 만나서 속닥거리는 거 하나님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업을 하면서 그렇게 기름 짜듯이 종업원들 쥐어짜서 월급도 제때 안 주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그렇게 기업하는 그 현장에도 주님이 계십니다. 또 남의 집에 고용원으로 가서 그래서 월급 받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지만 제대로 봉사 안 해서 주인에게 늘 저 사람 나가주었으면 하고 그렇게 불성실하게 직장생활 할 때에도 거기서도 주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다 합계를 내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주님 앞에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 그런 통전적인 거룩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목적이고 우리가 성화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바로 이런 삶의 전 방위에 있어서 전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그분이 나를 구속하신 은혜를 한없이 찬송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자기가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일이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면서 자기의 직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일하면서도 교회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직업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에 종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장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것 같으면서 하나님을 한번도 섬긴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한 나라의 제상이었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고위공직자로서 봉급생활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이게 이방 사람의 눈에 비친 다니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에스겔 34장에도 가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말하노라. 이것은 양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내 양을 먹고 유리하였고 내 양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내가 복수하리라. 가장 거룩한 일을 하고 있어도 가장 파렴치한 직업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태도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구두를 만들어주는 구두수선공이면 정성을 다해서 잘 만들어주십시오. 세탁소 주인이면 세탁을 깨끗이 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정화하는데 기여하십시오. 법관이면 법대로 공평하게 법 판결 하고 권력기관에 있으면 뇌물을 받지 말고 공정하게 사리를 판단해서 국가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이것이 통전적인 거룩의 삶입니다. 결국 이 거룩의 삶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 토대 위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통전적인 거룩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지만 그 통전적인 거룩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삶은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으로부터 영향이 미치고 그 마음과 온 인격은 그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영혼이 싫증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통전적인 거룩의 삶을 부르짖는다고 해서 그게 통전적인 거룩의 삶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기심으로 가득 찼는데 내가 왜 예수를 위해서 손해를 봅니까. 내 마음이 이기심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는데 어떻게 내가 세상 자랑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 영혼 속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만 하면 이 세상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주일날 교회에 나올 때는 그렇게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나옵니다. 그리고 은혜를 갈망하는데 예배가 끝나면 다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같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가봐야 또 죄짓고 돌아올 게 뻔한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원에 들어가서 몇 년씩 안 내려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는 것은 좋지만 가서 5-10년씩 물론 특별히 기도원에 뜻이 계셔서 하나님이 두신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고 어두운 세상으로 내려와야지 빛을 보지, 매일 수리중입니다. 매일 공사 중입니다. 물론 늘 공사 중이지만 그러나 어째든 그래도 좀 빛을 비추어야지 되는데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통전적인 거룩을 주장하는 것이 요즘 무슨 균형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본질을 가볍게 생각하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그리고 무슨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죽이고 그렇게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삶에 있어서 거룩이 나타나야지 됩니다. 누가 아니라고 합니까, 누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신령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인간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삶이 겉만 반드르르한 삶입니다. 겉이 정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삶입니다. 왜 그렇게 열매가 없고 말만 무성하고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회칠한 무덤 속에 뭐가 있었는가. 당시에는 무덤을 이렇게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속으로 지면하고 똑같아서 열고 들어가는데 지저분하니까 하얗게 칠했습니다. 열고 들어가 보면 썩어가는 뼈다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적인 삶은 거의 무시하고 그리고 모든 삶에 있어서 거룩을 드러내야지 된다고 통전적인 삶을 이야기하면서 경건한 추구를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은 복음의 원리를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신령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지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지 됩니다. 왜 아가서 4장에도 나옵니다. 잠근 동산이 있고 그 안에 가니까 덮은 우물이 있고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니까 우물의 근원인 봉한 샘이 있습니다. 그 우물의 근원인 샘에서 이 물이 흘러나와서 그래서 주위를 두루 적시고 그것이 시내가 되어서 흘러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꽃을 갖다가 심지 않아도 샘이 솟아 나와서 시내가 흘러가면 그러면 거기에서 계속해서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풀들이 자라고 씨앗들이 떨어져서 귀한 약초가 자라면서 값이 나가는 아주 훌륭한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웁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살고 싶다. 본받을 힘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 본받을 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은 야유회 같은 곳에 갈 때 수건 같은 것을 만드는데 그것을 나누어줄 때 교역자들에게 몇 번을 당부하십니다. 공정하게 그대로 나누어주라고, 그래서 수건을 난 안 만듭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언젠가 누구에게 수건을 안 주었더니 교회에 와서 얼마나 큰소리를 치는지, 나도 헌금했는데 왜 수건을 안 주냐고, 사람을 차별하느냐고, 인간이 이기심으로 가득 찼는데 미쳤다고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합니까?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거룩은 통전적인 거룩이지, 그 말 한마디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게 넘쳐날 때 내가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을 때 그때에 주님을 위해 살 마음도 생겨나고 죄지은 자를 용서할 마음도 생겨납니다. 그리고 불쌍한 자를 구제할 마음도 생겨납니다. 바로 그런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해야지 됩니다.
어떠십니까? 진짜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까? 처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첫사랑을 경험할 때 여러분, 정말 기적 같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이 지구상에 벌레처럼 붙어사는 나를 기억하시고 만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그리고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 정말 놀랍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이런 감격, 하나님 앞에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워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점점 주님의 마음에 아픔을 드리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이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생애 목표로 삼을 때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존재로 스스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실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많이 사랑을 받았고 어떨 때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셔서 그들이 주님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존재들이 되었는가. 그래서 그렇게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서 통전적인 거룩의 삶을 주님과 연합된 가운데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었는가.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전 늘 대하는 성경의 인물을 보면서 성경의 기록을 찾으면서 살펴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만을 높이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니까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기게 하시고 다윗을 당신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셨구나. 그리고 반대로 어떨 때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셨는지 범죄하고 나니까 다윗의 하는 짓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하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찬송하고 경배할 때 기뻐하셨지만 원망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 아파하셨구나. 이런 것들을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공부해나가고, 두 번째는 교회의 역사의 인물들을 통해서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밀한 내면의 세계를 밝힌 기도나 자전적인 이야기, 이런 것들이 도움이 상당히 됩니다. 뭐 이렇게 했더니 내가 예수 믿고 돈만 벌었다. 이렇게 했더니 내가 전도를 많이 했더라. 이런 것들도 읽을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내가 이렇게 살았더니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고 그리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이런 삶을 산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읽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보면 전기 같은 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지가 보여 지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데이비드 브레이너의 일기를 읽었는데 그게 아마 본격적인 내면의 기록을 읽은 첫 번째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웨슬리의 일기도 읽어보고 뭐 조지 윗 필드의 일기도 읽어보고 그랬는데 그런데 꼼꼼하게 4-5번 읽고 매년 한번씩 읽으려고 결심한 책은 그 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읽는 순간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까?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나보다 탁월하게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는데 그를 절대로 시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도전을 받았던 것이 생일날 산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일날 미역국 먹고 집에서 좀 놀아야지.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안 되지. 그리고 폐결핵 3기의 몸을 이끌고 눈 덮인 언덕에서 기도하는데 결국 하루 종일 기도하고 나면 각혈을 해서 피가 그 눈 위에 시뻘겋게 번집니다. 또 뭐 일기를 넘길 적마다 오늘은 별을 보고 기도하러 들판을 나아갔다. 생각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땀을 흠뻑 젖으며 기도했다. 돌아오는 길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이게 1년에 한번이라면 따라하겠는데 이게 며칠에 한번씩 하니 그때 겨울이었습니다. 11월쯤 되었는데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건너 방에서 늘 새벽기도를 했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나도 산으로 가야지 되겠다. 브레이너도 했는데 나라고 못하겠는가. 그리고 이제 새벽에 옷을 입고 11월쯤 되었는데 집에서 내려오면 총신 대에 산이 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작은 박스 하나를 깔고 그리고 거기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와 이게 11월 중순 때였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한 2-30분만 엎드려 있으면 땅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는데 무릎까지 다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입이 붙어서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한 한달이나 다녔나. 그래도 꾸준히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중에는 안 되어서 스티로폼을 하나 가지고 갔는데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브레이너드 시절에도 스티로폼이 있었을까? 이게 또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갔는데 돌은 왜 그렇게 많은지 무릎이 아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러다가 이것은 내 분량이 아닌 것 같다. 엎어져서 기도하는 동안에 무릎 찌르고 돌하고 싸우고 추위하고 싸우고 그런데 확실한 것은 있었습니다. 졸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결국은 아, 정말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이 있었을까? 선교비를 성도들이 걷어서 주는데 그렇게 괴로워했습니다. 이 피 같은 선교비를 쓰면서 선교에 진전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피눈물 나도록 괴로워했습니다. 결국은 과로사로 죽습니다. 29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죽는데 그것을 보면서 그러니까 고난도 많았지만 수시로 그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으로 내 자신이 가득 찼다.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이 어제와 다르다. 주님이 나에게 은혜만 주셔도 이렇게 행복한데 우리 주님이 계신 그 하늘나라는 얼마나 기쁠까? 아, 빨리 갔으면.
이게 비교가 됩니다. 그러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울고 길거리에서 서서 그 책을 읽다가도 울고 교수연구실에 앉아서도 울고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수 있을까? 그때 비로소 반성이 생겨났습니다. 교만해질 래야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도처에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 책을 읽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삶을 보고나니까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이 내 삶의 도처에 널려있고 이정도 사랑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이라고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어떤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나. 그게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았던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항상 똑같이 사랑을 받았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랑을 그렇게 받았다고 할지라도 느끼는 경험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빛줄기같이 쏟아져서 그래서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고백이 생겨납니다. 더 많이, 그때 생각을 합니다. 그때 나는 지금의 나와 뭐가 다른가. 그럼 아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떠오릅니다. 그때는 내가 예배를 이렇게 안 드렸어. 그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섬기지 않았어. 그때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나태하고 싫증을 내지 않았어. 그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마음이 그때 마음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고 더 온전해지고 싶은 갈망들이 생겨나면서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때 싫증들이 털려져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두 번째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영혼의 싫증을 느끼지 않을 때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싫증이 없을 수가 없다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싫증이 없고 열렬할 때는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 충만히 계시든지 계시지 않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본다고 할 때 그 사람이 항상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바라며 그렇게 처절하게 나가는 시인들의 기록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바라는, 죄 가운데 있던 은혜 가운데 있건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의뢰하는 믿음의 근원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집중하게 될 때 그때에 바로 우리의 영혼의 싫증들이 털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은혜 안에 있을 때, 혹은 은혜를 향한 최소한 갈망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분산이 되지 않고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죄와 부패한 영향력이 우리 안에서 누룩처럼 번지게 되면 그러면 이 관심이 다 갈려집니다. 그래서 뭔가 초점이 없어집니다. 물론 세상적으로는 초점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상적인 초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미 권태감을 느낀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권태감을 느끼는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혼의 싫증을 느끼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가 그런 싫증 속에서 우리의 시선이 자꾸 분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면 세상은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에게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비전이나 목표 자체도 신령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되기 전에는 누가 집을 샀다고 그러면 갑자기 집에 오면 비참해진 것 같고 누가 좋은 차를 샀다고 그러면 갑자기 자기 자신이 너무 비감해지고 누가 애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그러면 자기도 공부를 못했으면서도 자식들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게 되면 그런 것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자녀들을 볼 때도 어쩌면 뉘 집 애는 그렇게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내면적으로 거듭나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무엇이 되든지 간에 각자 이 세상에서 살아갈 텐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보통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악의 사람으로서 높은 지위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다운 지위를 가지고 살면 더 좋습니다.
그리고 또 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그러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내게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 이런 것 한없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집중하고 주시할 때 그때 우리의 싫증들이 털려져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도 말씀을 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말씀을 우리가 품고 살려고 하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집중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의 영혼의 싫증들은 털려져 나갑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영혼은 날마다 주시하는 바가 있습니까? 날마다 영혼에 주시하는 바가 있습니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 안에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성도의 영광스러운 기업,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예수의 날까지 여러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영광스러운 성화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응시하고 그렇게 변화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응시하는 집중된 마음, 이것이 바로 여러분 속에 쌓여가는 싫증을 터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것과 함께 짝을 이루는 네 번째 비결은 마음을 쏟아놓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해를 합니다. 마음을 물같이 쏟는다는 표현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붓습니다. 쏟아집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것을 들고 있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이것을 붓고자 하는 쪽으로 그렇게 저항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는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떠한 저항도 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의 경향성과 모든 지향성들이 한쪽으로 쏠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실제로 마음을 쏟아놓는다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분산되어 있던 마음이 집중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그 마음이 모든 지향성과 경향성이 하나님을 향해서 외골수로 흐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이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나 세상을 향해서 쏟아놓는 것이나 쏟아 부어도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은 다 쏟아 부으면 끝나는데 그런데 실제 우리 속에 있는 이 마음은 아무리 쏟아 부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가만히 보면 기도가 안 될 때는 할 수 없고 기도가 되기 시작하고 기도 속에서 마음이 쏟아져내려가기 시작하면 이게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해도 해도 시간이 모자라고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몇 시간씩 기도를 해도 기도는 또 다른 기도를 불러오고 기도는 또 다른 기도를 불러오고 왜 쏟아낼 수록 마음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쏟아내면 쏟아낼수록 그 마음이 다시 하나님을 가득차는 것을 느껴집니다. 이게 바로 마음을 쏟아내는 체험의 신비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때에 마음을 쏟아 부을 때에 그때 하나님 앞에 깊이 마음을 쏟아 붓게 되면 이 쏟아 붓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의 정화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 곧 자기 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자기 깨어짐은 반드시 마음을 쏟아 붓는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죄를 참회하고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철저한 자기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집중되고 온전히 그 하나님께 마음이 쏟아 붓는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진실한 참회와 회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물론 관념적이고 지식적인 회개는 경험할 수 있지만 체험적이고 복음적인 의미에 영적인 회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쏟아 붓는데 이제 이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 가장 모든 방면에서 다 마음을 쏟아 붓는 일이 필요합니다. 심방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마음을 쏟아 붓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청소를 하면서도 쏟아 붓는 일이 필요합니다. 제 자랑은 아닙니다만 전도사 때 토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철야를 하는데 교회가 크지는 않지만 사찰 혼자서 청소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청소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9시쯤 가서 웃통 다 벗고 와이셔츠 바람으로 이제 혼자 청소를 합니다. 한 2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딱 1시간 30분 동안 하고 나면 땀으로 러닝셔츠가 몸에 달라붙을 정도로 그렇게 힘이 들었습니다. 그때 할 때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내일 여기에 지체들이 오는데 여기에서 한번 너희들 하나님의 은혜의 맛 좀 봐라. 그리고 혼자서 걸레를 빨아다가 깨끗이 비닐 방석 엎어놓고 앞에 닦고 뒤에 닦고 마지막에 줄까지 다 맞추고 닦는 곳이 어디인가 하면 강대상입니다. 닦을 때 그때는 새 걸레로 닦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닦습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서 내일 설교할 텐데 그런데 하나님 은혜를 주셔야지 됩니다. 그것도 이렇게 새것이 아닙니다. 다 낡아서 밖에다 내놓아도 엿장수도 안 주어갈 그런 강대였습니다. 깨끗이 닦으며 하나님 역사해주셔야 됩니다. 은혜를 주셔야지 됩니다. 그게 마음을 싣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그렇게 할 때에 그때에 사실 싫증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방면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해야 되지만 가장 그렇게 적용하는 것이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영역이 있는데 그게 기도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면 기도의 영역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싫증을 영혼이 느끼는 상태에서는 불붙는 기도, 그리고 그 기도가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 그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영혼이 뜨겁고 열렬할 때 기도가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모두 가진 사자의 기도였다고 만약에 말한다면 그 열렬함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는 어흥! 하는 소리는 남아 있는데 발톱도 송곳니도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그 소리만 들립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싸워도 마귀가 그래도 영적인 사자의 이빨로 물어야지 작살이 나지 잇몸으로 깨무는데 아무리 약한 마귀라도 그게 잘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웃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어흥! 하면 그러면 뭐가 되는가 하면 머리가 잘린 삼손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머리카락이 있을 때는 꼼짝도 못했습니다. 까불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다 깎아버리니까 막 간질이고 괴롭히면서 놀리는 것입니다. 덩치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힘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의 싫증을 느껴도 기도할 때 폼 잡는 게 일생 밴 것인데 어디에 가겠습니까? 그리고 언어도 뭐 주님 제가 참된 신자가 되고 싶고 그러면 양심이 그렇게 말합니다. 야,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영혼이 싫증을 느끼는데 네가 무슨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목사님이 가르쳐준 얘기고 네 마음에 있는 얘기는 세상이 더 좋지? 그러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게 괜히 폼만 내는 사자입니다. 이빨도 다 빠지고 발톱도 빠져서 무슨 힘이 있습니까. 영혼의 싫증을 간직하고는 영력이 있는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하면 마음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어떻게 쏟아 붓는가. 그래 오늘 쏟자. 철커덕 열고 부르릉 이게 됩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을 쏟는 것은 먼저 마음을 열고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서 물을 길어내는 것처럼 시작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는 것 같아도 그 기도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서 그래서 달가닥거리지만 조금씩 쏟아내면 기도를 퍼 올리면 올릴수록 다시 그 마음속에 기도가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게 이게 기도하는 마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안 하는 사람은 못해서 계속 안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길어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마음이 모아지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막 사망과 싸우면서 머리를 흔들면서 마음을 지키면서 하나님, 그렇게 부르면서 잠깐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쏟아집니다. 금방 또 닫힙니다. 그러면 생각합니다.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마음이 더 많이 열리면서 그 다음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막 쏟아져 나올 때 마음을 그렇게 쏟아놓을 때 그 쏟아진 마음을 통해서 진실이 흘러넘치면서 그 과정을 통해서 이마음의 틀, 즉 마음의 경향성이나 지향성, 마음의 성향 같은 잘못되었던 것들이 바로 잡히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영혼의 싫증을 느끼면서 기도하지 않은 심령과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부르짖어갈 때에 그 마음의 작용하는 틀이 다릅니다. 그런 변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이 수시로 쏟아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1년이 지나가고 5-6개월이 지나가도록 거의 눈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자기 자신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인해서 어린아이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그렇게 처절하게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이 되는 적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싫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언제입니까? 얼마큼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으면서 나는 하나님 없이 살수 없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견딜 수 없고 그리고 어떻게 해야지만 내가 나도 어쩔 수 없는 이 부패한 본성, 더러운 죄, 고난 받는 환경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부르던 찬송가에 얼굴을 묻고 그리고 그 찬송가가 여러분들의 눈물에 젖어 너무 가슴이 아파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왼쪽 가슴에 피멍이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실 때 열렬한 사람들입니까? 어찌하든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마음 가진 대로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데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는 적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처절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는 이런 일들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섯 번째입니다. 싫증의 마지막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싫증은 중간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혼의 싫증은 그게 끝이 아닙니다. 끝이면 그래도 덜 경계해도 되는데 끝이 아니라 영혼의 싫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반감을 갖게 되고 그 반감은 결국은 죄가 되어서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산출하려고 합니다. 출생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범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밖에서 범죄 한 것이 이번에는 올무가 되어서 나를 사로잡고 죄에 의해서 나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영혼의 싫증의 궁극적인 계획이고 목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영혼의 싫증이 권태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 권태감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의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는 대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결국은 반감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범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구원해놓으신 그 목적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로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최초의 계획을 영혼의 싫증으로 구체화시킨 것이 이게 죄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죄의 싫증이 우리 속에 들어왔을 때 전적으로 외적이 침입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내통하는 첩자들이 있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부패성입니다. 이게 영혼의 싫증과 만나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싫증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감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제적인 불순종으로 그래서 우리의 총체적인 삶 전체를 구원받았으나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채 살아가려고 만드는 것이 이 싫증의 계획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내가 영혼의 싫증을 느낄 때 이 싫증에 순응하며 살 때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등지게 되고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히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 마지막의 결과가 어떻게 비참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이때 영혼의 싫증을 몰아내야지 된다고 생각해야지 됩니다.
마지막으로 싫증의 부당함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싫증을 느낄 때 뭘 생각해야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싫증 없는 사랑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싫증 없는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가장 놀라운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화목제물로 삼으심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살았는데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아죽게까지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 싫증을 즉각적으로 가지고 십자가에 가서 못 박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바로 핏빛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살을 찢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피를 쏟으시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대해서 싫증을 낼 수 있는가.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가.
언제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셨을까? 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셨을까? 죄인 중에 괴수인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시고 순전하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오히려 여쭙고 싶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배반하고 하나님을 향해 싫증을 내고 싫증의 계획은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싫증을 친구처럼 끌어안고 우리의 부패성과 내통하면서 우리 안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내버려둔다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도리에 있어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세상의 유혹이 이런 일들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세상의 손과 어떻게 악수를 할 수 있겠고 바로 그 입으로 세상이 예수님께 침 뱉었는데 어떻게 그 세상과 입 맞출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때에 우리는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고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을 때 그렇게 가슴아파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바벨론의 70년의 포로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조금 은혜를 베푸셔서 이 백성이 조금 소생하고 기적적으로 이 고토에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이 백성이 다시 죄를 지었으니 제가 얼굴이 뜨뜻해서 주님 앞에 말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슴아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영혼의 싫증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저의 영혼에 싫증이 가득 찼을 때 그렇게 기도해도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런 세상에 태어나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다가 20대 초반에 주님을 만나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좋은 신자였던 적도 별로 없고 주님을 위해 훌륭하게 섬긴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인생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예수님 없이 지냈던 인생은 다시 태어나도 돌아가고 싶은 인생이 한부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날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오지도 못했고 예수님을 훌륭하게 섬기며 살아온 적도 없지만 그러나 내가 예수님 말고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주셔서 나로 인생의 곤고한 날에 예수님 만나게 하시고 일평생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미끄러졌을 때나 충만할 때나 예수님은 나에게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목표였고 이제 남은 인생을 위하여 예수님 없이 지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 영혼 안에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싫증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은 일들을 회고하고 인생 전체를 이끌어온 하나님의 계획을 회고하면서 우리의 정서를 따뜻하게 덥힐 때 그때 우리의 지성이 정신을 차리고 의지가 다시 이 모든 어두움과 이 암흑을 떨쳐버리고 빛 가운데 살고자 하는 소원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서 우리는 이 세상 끝까지 결국 우리는 주님 없이 살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삶의 완성입니다. 죽음은 마치 캄캄한 어두운 밤바다를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밤바다를 동행하는 이도 없이 그 바다 위를 걸어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주님께 싫증을 느끼면서 열렬히 찾고 목말라하고 있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은 그때 우리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기뻐하는 재물은 정말 우리를 그때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가장 궁극적이고 아름다운 목표는 영혼을 잇대어서 사는 것이고 죽음을 뛰어넘어서도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는 그것을 찾아서 사는 삶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지를 생각하면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돌덩어리와 같이 굳어졌던 여러분의 마음이 녹기 시작할 것입니다. 차가운 구리같이 굳어졌던 여러분들의 뺨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에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한없이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주님을 섬기고 그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피 묻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조국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고 그리고 교회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온 세계에 역사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계절이 오도록 그래서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싫증을 털어버리고 열렬함과 사랑으로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세상이 되기를 꿈꾸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살아야 될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화와 영혼의 싫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