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올곧음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올곧음의 뜻, 성화와의 관계(창17:1下) 2004.10.24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
2. 올곧음의 기원, 왜 올곧음이 필요한가(창17:1下) 2004.10.25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21
3. 올곧은 신자의 특징(1)(창17:1下) 2004.10.26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39
4. 올곧은 신자의 특징(2)(창17:1下) 2004.10.27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56
5. 올곧음의 회복과 유지 (창17:1下) 2004.10.28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73
1. 올곧음의 뜻, 성화와의 관계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이번 사경회 동안에 성화와 올곧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저와 여러분이 한번 거닐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뭔가를 하나님 앞에 행하고 또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이 원했던 대로 되지 않고 또 자기 자신이 겨누었던 목표를 따르지 않고 무엇인가 자꾸 이탈된 것 같은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사경회 동안에는 올곧음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을 좀 해설하겠습니다. 몇 주 전에 읽은 본문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바로 이 16장에서 하나님 앞에 깊이 불순종하게 되었고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낳은 불순종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낳은 이후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인해서 그 긴 시간동안 영혼의 어두움을 보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제일먼저 하신 말씀이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그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제 오늘 우리들이 읽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 보면 타밈이라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타밈’이라는 단어는 원래 ‘톰’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 이 타밈은 추상명사로서 완전한, 완벽함, 그리고 똑바름, 그리고 총체적인 온전함 그런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타밈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가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셨을 때도 바로 노아가 바로 이 타밈한 사람으로서 인정이 되었습니다.
이제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 역에는 이것이 아멘프토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티가 없는 흠잡을 때가 없는 그런 의미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그런 의미입니다. 나중에 번역되기는 햇지만 이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이 곧 벌게이트역에는 이것이 페르팩투스라는 단어로 나옵니다. 이 페르팩트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후에 영어로 들어가서 perfect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 성경에 많은 책들이 이 탐밈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perfect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단어가 신약으로 흘러들어가서는 똑같이 아멘프토스 라고 하는 단어로 쓰여 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아’는 없다는 뜻입니다. 즉 책망하다. 혹은 책망 앞에 없다. 라고 하는 단어가 붙었는데 대표적인 사용의 예가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책망할 것이 없는, 혹은 흠 없는 이라고 번역된 그 단어의 바로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종합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여기 17장 1절에서 이야기하는 타밈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 온전하다. 책망 받을 것이 없다. 혹은 이렇게 똑바르다. 올곧다. 이런 말로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만약에 이 단어를 완전무결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면 중대한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 하고 선언하고 인간 자신이 모두 불안전하고 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그 불안전이 증폭되어서 신자나 불신자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다 흠을 가진 결함이 있는 모자라는 사람들이고 죄가 있는 사람들인데 완전무결하다고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는 자체가 사실은 논리적으로 명명히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멘프토스 타밈이라고 하는 이 단어, 혹은 페르팩트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모두 절대적인 의미에서 완전무결이나 무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 어때? 말마, 그 사람은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야, 진짜 그 사람이 법 없이 살수 있는 사람입니까? 법의 보호를 받지 않고도 살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부패하고 타락하니까 그렇게 자비롭고 인자하고 인정이 많고 모범적으로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그렇게 추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나오는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가운데 너희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혹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베드로가 권면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너희로 점도 흠도 없이 되기를 원한다.” 라고 할 때 그 말도 역시 어떤 상태에 있어서 그런 절대 완전무결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흠 없는 상태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그 경향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타밈, 혹은 아멘 프토스, 혹은 페르팩트스 라고 성경이 기록하거나 번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고 명령하신 것은 지금 무엇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네 아내 사래를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네 후손을 많게 해줄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에게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13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깨트려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완전하라. 네 하는 행동이 정말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완전하다고 하셨다면 그러면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하나님이 13년 동안이나 교제를 끊으시고 13년 만에 나타나서 너 똑바로 해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만약에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불신앙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완전한 사람일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성경의 교리를 잘못 읽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탐밈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절대적인 완벽이나 완전무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올곧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올곧다’ 하는 것은 영어로 up rightness입니다. up right 라는 것이 굽지 않고 똑바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똑바른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여건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이렇게 책망하셨을 때 하나님이 문제를 삼으신 것은 순간순간 아브라함에게 스쳐가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염려 때문에 근심하는 순간적인 불신앙이나 이런 것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에게 들어가서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이 행동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붙어있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서 행동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기본적인 신앙의 노선에서 이탈한 것으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모실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프셨고 그래서 이탈된 가운데 아브라함은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음성이 들리지 않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유혹을 받습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유혹을 받으면서 순간적으로 정욕이 일어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근심이 확 밀려와서 경건한 심령을 잠깐 동안 상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저녁때는 성화되어야지 하고 눈물 흘리고 가서 밤에는 남편하고 한번 합니다. 그리고 자녀 사랑에 대한 설교를 실컷 듣고 나서 성질에 못 이겨서 애들을 한번 쥐어박기도 합니다. 그런 것까지 하나도 없는 상태가 완전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완전은 올곧음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올곧음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있고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게끔 행동하고 그분의 뜻에 맞는 존재가 되려고 하는 끊임없는 의지적인 경향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올곧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올곧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저는 크게 두 가지로 이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구원이 가져다는 효과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올곧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안 그렇습니다. 왜 저희 옆집에 아저씨는 구원을 못 받았는데 20년째 새벽마다 약수터를 갑니다. 그것도 올곧음입니다.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꾸준히 하는 것, 이게 올곧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올곧음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의지의 올곧음조차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은 아마 개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올곧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올곧음이라고는 그렇게 일컫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 올곧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전체적인 계획에 부합하는 올곧음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성화의 세계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올곧음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이 올곧음은 따라서 구원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첫째로는 이 올곧음이 인간의 믿음 안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자, 무슨 뜻인지 상세하게 친절하게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하겠으니까 잘 이해를 하십시오. 신자의 믿음 안에서 이 올곧음이 역사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공부하면서 여러분들이 배우셨지만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요소를 내포해야지만 진정으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라고 하면 단지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이런 장엄한 구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인생의 진실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수단까지 모두 포함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다. 여러분 예수를 믿기 전에 탐욕으로 가득 차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남보다 많은 돈을 모아보기 위해서 불철주야 애쓰고 노력하고 정당한 게임을 해서 돈을 벌수 없을 때는 부정직한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모으려고 애를 썼고 심지어 그것도 불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해쳐서라도 돈을 모으려고 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거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돈을 모아서 이 세상의 자원을 축적하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구원하는 방법입니까? 구원하는 방법이 안 되지요. 지금 예수를 믿고 나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들리는 것이지만 그때는 심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서 그것을 돈을 모으지 않으면 그것으로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스스로 조달하지 않으면 지상의 자원을 가지고 공급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는 관심이 좀 적다고 하더라도 이성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초등학교부터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여튼 그런 이성과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절대로 살수 없을 정도로 이성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육체적인 성일수도 있고 단순한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고 성적인 쾌락에 대해서 그렇게 뛰어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 역시 자신을 지탱하며 살게 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무게와 그 중압감을 덜게 한 수단으로 택한 그 모든 것들이 구원의 한 방법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직까지 여러분의 동의가 안 되시는 것 같은 눈빛인데 나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친절하게 하나만 더 설명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70이 넘은 어느 영국배우가 불신자임에 확실합니다. 그분이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인생의 남은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저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무대에서 숨을 거두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웃깁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즐겁게 하기 위해서 연극하는데 그런데 거기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하는데 아니 거기가 무슨 순교의 현장이오, 애국의 현장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저 사람 연극해서 몇 푼이나 받나 생각하지만 연극이라는 예술에 몰두한 사람은 그게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법에 의해서 너는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여기서 자기 폭발이 일어나 죽어버릴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것도 똑같이 그것을 구원 얻는 수단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다음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대치 품으로 대치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철학, 사상, 그리고 예술, 학문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자신의 책 ‘마그날리아디이’ 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그가 추구하는 인류역사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졌던 학문, 예술, 문학 이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이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두 번째 요소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의지가 구원 얻는 모든 길을 포기하고 나면 그다음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없구나.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인간답게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영생이라는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구나 그렇게 생각될 때에 다른 어떤 것에도 길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의지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계시해주신 그 진리를 의지적으로 꽉 붙들려고 합니다.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이 물에 풍덩 빠졌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뱃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배들이 막 자기를 건지기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저 멀리 고무튜브가 하나 있습니다. 사력을 다해서 헤엄치면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벌써 배가 이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노 젓는 것을 내미는데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사력을 다해서 저기 있는 고무튜브를 잡으려고 헤엄을 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고 마지막에 예수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마치 아무도 없는 망망한 바다인데 자기는 물에 빠졌고 그리고 저 멀리서 고무튜브 하나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사력을 다해서 그 고무튜브가 있는 곳으로 헤엄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마음속으로 깊이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강요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인격적으로 마음으로 깊이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자기를 그렇게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고 하는 믿음을 확고히 갖고 그 다음에 이제 나는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 있는 선이나 도덕이나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없으니 나는 이제 예수님만 붙들며 살아야지 된다 하고 예수님을 꽉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이 구원과 함께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올곧음입니다. 그래서 올곧음은 바로 인간의 믿음 안에서 역사하는 구원의 효과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처음은 그렇게 정말 예수님밖에는 도저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무겁고 힘들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만을 따라가겠다고 의지로 결단하고 그것을 의지로 꽉 붙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결단입니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회심과 함께 주님을 뜨겁게 영접하고 그래서 이제 예수님만 붙들고 구원받아야겠다고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꽉 붙들고 하나님 정말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내가 정말 이제는 이 세상에서 나를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박대하시면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꽉 붙들 때, 그때 특징은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분을 그렇게 꽉 붙들려고 할 때 누가 옆에 와서 그러지마, 내가 술이나 한잔 살게. 예수 붙드는 것 내일 해. 그럼 그렇게 타협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늘 나를 구원해주시면 내일 나를 이 세상에서 데리고 가셔도 좋다.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때 그것이 바로 올곧은 믿음인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게 계속 유지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지가 되면 문제가 훨씬 줄어듭니다. 그런데 유지가 잘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게 계속 유지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왜? 독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품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그리스도를 알면 저절로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 올곧음은 점점 강해지고 처음에 그 올곧음에 성향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애 전체를 보면 항상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렇게 자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빠르게 자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라기는 자라는데 거의 거듭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차이가 현미경으로 봐야지 보일 정도로 그리고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자라기는 자랍니다. 살아있는 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금씩 쌓이기는 쌓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의 수평으로 가다가 그냥 끝납니다. 어떤 사람은 똑바로 올라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급하게 올라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가 있습니다. 그럼 목사님, 저는 그 셋 중에서 아무 것도 아닌데요. 왜 그러니까 저는 출렁출렁하는데요. 그런데 그것은 틀립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렇게 자라가는 것은 영적인 수준의 성장을 가리키는 것이고 출렁거린다고 하는 것은 기복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영혼의 상태의 기복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수준과 영적인 상태는 다릅니다. 수준은 매우 낮은데 상태는 매우 좋을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것은 어마어마한 논문 같은 지식을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분이 창조주이시고 너는 죄인이다. 예수 안에 구원의 길이 있다. 그러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죄인인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고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 경우는 수준은 이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상태는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이 앞에 있는지 마가복음이 뒤에 있는지, 기도가 하다가 왜 잘 안되는지 왜 잘 안 되어본 적도 없으니까 해본적도 없고 이제 막 갓 태어났으니까. 그래도 이게 수준은 낮지만 그런데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너무 행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몰라서 그렇지 하여튼 뭐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복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끔 그렇게 수준이 낮으면 엉뚱한 사람이 와서 이상한 것을 가르쳐주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엉뚱한데 행사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멍하고 수준은 낮고 상태는 좋은 사람이 있는 교회가 목회하기는 참 편합니다. 화장실 청소 이행, 하면 가서 하고 돈 다 내놔. 그 다음날 후회할지라도 합니다. 이정도면 확실히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수준이 아주 높아도 상태가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수준이 높은데 이제 그런 사람을 보면 너무 웃깁니다. 정말 웃깁니다. 그래서 보면 사람들이 충만해 보이는데 행동하는 것은 꽝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무지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성령 충만을 받았는지 이삭이 아브라함을 낳고 그래도 할렐루야! 아멘! 그러고 지금 왜 그러는지도 모릅니다. 설교자가 올라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눈물을 펑펑 흘리고 감동을 받습니다.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옛날에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 부흥회만 한다고 하면 나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왜 꼭 강사도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어느 날 강사가 올라와서 성경을 설교하다가 갑자기 여러분, 가을에는 제가 우리 집에 갈 때 언덕을 넘어가면서 밤 하나를 항상 따가지고 갑니다. 아이가 아빠 뭐 사왔어. 그리고 손을 쑥 집어넣다가 가시에 찔립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뭔지 어떻게 압니까? 가시에 찔렸는데,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하다는 그런 뜻입니다. 손수건을 꺼내서 막, 여러분은 웃지 그 다음에는 더 자지러집니다. 그러면 제가 그 밤을 장갑을 끼고 집게로 집어서 밖으로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 발로 밟고 막대기로 깨면 밤알이 세 개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압니까? 그것은 너무 오묘한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 친구 전도사하고 둘이서 그 이야기가 나오면 쳐다보고 막 웃습니다. 교인들은 빨려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조용합니다. 그럼 담임목사님도 모르는 것처럼, 이 밤 세 개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할렐루야! 손수건이 흠뻑 젖습니다. 그날 헌금이 왕창 나옵니다. 이렇게 웃는 패역한 교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집회가 끝났는데 어느 집사님이 그렇습니다. 전도사님 저 강도사님은 성경을 무섭게 쪼개네요. 그런 교인들 데려다가 교리반 한번만 시키고 나면 그런 강사는 아주 썰렁한 집회를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수준이 낮지만 상태는 좋은 것입니다. 막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사울을 낳았다고 그래도 아멘 그러는 것입니다. 모든지 아멘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아멘 부대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상태가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상태하고 수준은 그렇게 따로 노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상태가 낮을 때는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집 팔고 어느 날은 예수팔고 그런 것입니다. 교회 바친다고 집 팔고, 그 다음날은 예수 팔고 그런단 말입니다. 이렇게 막 기복이 심합니다. 그러나 올라갈수록 기복이 잦아들게 됩니다. 그래서 상태와 수준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갔는지 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야기하다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점점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겨납니다. 그 지식이 생겨날 때마다 항상 우리의 마음에는 올곧음이라고 하는 이 의지의 성향에 쇄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항상 진실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항상 그 뒤에 신자가 하나님 앞에 똑바르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붙어있으면서 살고자 하는 의지의 성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에는 많이 결심하지만 실망스러울 정도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아예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조차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이 뭘 결심하는 것을 자기가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이런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를 중간쯤 공부할 때 아마 이런 것 배우신 것이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 가운데 하나가 수없이 결단을 남발하지만 그러나 그 결단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그때 죄의 지배아래 있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단을 하는데 그 결단을 인간이 수없이 해도 이것이 올바른 영혼의 변화를 동반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화합한 결단일 경우에는 그 결단을 이행할 수 있는 힘이 상당히 많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없고 계속해서 머릿속에서만 결단이 촉구가 됩니다. 그런데 나는 결단을 했는데 그런데 이게 이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고자 하는 올곧음을 우리 안에 효과로 가져다주시는데 그 가져다준 효과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체험적으로 알아갈 때에 이 올곧음이 계속 처음의 올곧음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뭘 깨달을 수 있는가 하면 잘 들으십시오.- 저 뒤에 계신 분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진리와 성령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진리를 사용하셔서 성령이 그 진리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진리가 없이 성령만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혹은 성령 없이 객관적인 지식만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언제나 실패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구축된 지식은 매우 위험한 지식이 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올곧음을 쇄신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만족스럽게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 오셔서 설교해주신 오 목사님이 당신의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쓰셨습니다. 개척하던 초기에 성경박사 하나가 교회에 왔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전체를 완벽하게 외우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계시록의 뭐에 대해서 물어보려면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몇 장, 몇 장인지 다 알고 있는데 문제는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럴 것입니다. 어떻게 성경을 다 외우는데 안 깨질 수가 있는가. 안 깨질 수도 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구를 수천바퀴, 수만 바퀴 돌아도 평생 우주 속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돌다가 고장 나서 우주 미아가 되듯이 인간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진리와 그 다음에 또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아는 지식을 증가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거의 연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녀도 와서 설교를 듣는데 그것도 태반은 거의 다 잊어버리고 건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고 성경을 거의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혀 쌓이지 않는 이런 평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어도 교회에서 계속 있다가보면 집사도 될 것입니다.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안 시킵니까? 아니 진짜입니다. 아니 계속 나오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범죄를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안 시키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집사, 집사 그러는데 한 사람은 머리가 하얀데 자매, 그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십이 넘은 사람을 보고 형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외국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문화상 그게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주 천박한 것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매일 싸우고 토라지고 시험이나 들고, 시험도 든 게 아니라 자기가 구덩이로 돌격 앞으로 해서 다이빙한 것이지 누가 시험을 들게 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인생 다 살고 보면 계속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구덩이 속에 똥물을 뒤집어쓰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물로 씻고 회개하고 또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계속 그 구덩이 옆에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 사람을 통해서 제대로 된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또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매일 손에 책 들고 무슨 학원에 다니듯이 교회를 다닙니다. 성경공부 1반, 2반, 3반, 하고 다닙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를 받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머리만 달그락달그락 거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결국은 다 자기가 좋아서 지식에 어떤 유희입니다. 지식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데,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런 지식의 즐거움에 스스로 빠진 것입니다. 세상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있는 올곧음이 자꾸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아주 지조가 없는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무슨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그런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을 부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걸레처럼 살았는데 무슨 주의 신부가 되겠습니까?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쓰러지고 넘어져도 계속해서 마지막에는 주 오신 날에는 내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겠다는 일관성 있는 욕망을 가질 때 되는 것이지 좀 이렇게 두드려주면 혼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다가 조금 지체들과 시험에 들면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그렇게 해서 신앙의 그 깊이가 없고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이 되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성화생활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이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하신 이 올곧음을 계속 쇄신시키고 유지하고 강화해서 나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깨달음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올곧음은 구원의 효과입니다.
또 하나는 이 올곧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시각교정을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인간의 의지는 아무 쓸모없다고 우리는 그렇게 암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아무쓸데가 없고 그리고 인간은 정말 비참하고 자기 스스로는 어떻게 설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세울 수 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맞는데 그 대신 그것을 적용을 잘 해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설수 없는 존재이다. 누가 서도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세운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훌륭한 성경적인 결론인데 적용을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도저히 설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의지적으로 결단을 하고 노력을 하는 것은 헛것이다. 그렇게 적용을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설 수 없는 것을 강조한 것은 특별히 구원에 관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가운데서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인간이 노력을 해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이런 가능성을 성경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분들은 조심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의 논문 ‘본 어게인’ 즉 중생이라고 하는 본문에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괴로워해본 적도 없고 그리고 자신이 의지적으로 그런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분투해본 적도 없고 자신의 죄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해보고 거기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을 붙들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노력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적은 이야기다. 만약에 그렇게 살던 그가 기적적인 방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필경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것이다.
하물며 성화라고 하는 것은, 이 올곧음이 심겨지는 것은 구원의 효과이지만 심겨진 그 올곧음이 우리 안에서 쇄신되고 유지되는 것은 성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라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순종할 능력을 주시고, 죄와 싸우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지를 거슬려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깊이 가슴에 새기셔야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확고한 하나의 지침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성화를 회고할 때 성화의 도상에서 회고할 때 돌아보니까 그 시련의 길을 지나고 유혹과 죄로 가득 찬 인생의 어두운 밤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때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오직 성령님이 혼자 하셨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안한 게 아니라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도 몸부림치고 시련 속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도 쳤지만 그러나 자신의 몸부림이 자기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런 몸부림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 시험을 이기고 유혹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신 성령님의 은혜 때문에 거기에서 구출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회고하면서는 인간의 모든 의지와 몸부림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내가 이 시련과 유혹의 길에서 구출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공로 없고 주님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지 된다. 그게 백점입니다. 백점짜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의무를 보면서 분명히 앞에 의무가 놓였습니다. 왜 시련 속에 있으면 더 주님을 붙들고 올곧게 처음 믿음을 잃지 않고 의무를 행하며 살아가야 하고 유혹과 죄에 깊이 빠졌을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 앞에 깨트려져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무가 놓여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모든 노력과 애쓰는 것은 죄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쓸모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덕을 본다든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은혜의 방편에 매달리는 헌신을 느슨하게 한다든지 그러기 위한 구실로 인간의 의지의 하찮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사악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절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평가를 과소평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 의지가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교만해진다든지 자기를 과신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성화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인간의 이런 의지적인 각오와 결단, 노력, 그리고 그 올곧음에 쇄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순간순간 결단을 내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화의 길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같이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그 친구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어떻게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그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겠다고 하는 마음의 지속적인 경향성, 이게 올곧음입니다. 당연히 이 올곧음의 좌소는 인간의 마음이 되는데 인간의 마음 중에서도 특별히 이 올곧음은 인간의 의지에 자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뜻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는 사람들은, 의지적으로 하나님 앞에 애쓰지 않는 사람들은 살아온 신앙의 길을 보면 계속 갈지자로 비척거리면서 걸어온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을 때마다 새롭게 결단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야겠다는 자기 결단이 있었던 사람들의 발자취는 조금씩 흔들리기는 하지만 똑바릅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막 돌아다닙니다. 놀다가 쉬다가 아예 길을 잃어버리고 제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제 올곧음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화의 기본조건은 첫째 하나님 편에서 보면 중생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려내시는 중생이 없이는 올곧음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의지의 지속적인 경향성인데 이것은 자기가 세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의지의 경향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받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의지의 올곧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영적인 올곧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거듭나게 해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계속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 신자가 올곧음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사람에게 지속적인 은혜주심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은혜 받는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리가 그 은혜를 받지 않으면 우리들이 올곧은 상태를 유지하며 걸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뒤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올곧음은 마음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외적인 의무만 똑바로 행하는 것을 가리켜서 올곧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의무를 다 버립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거두셔도 어떤 사람은 자연적인 본성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와 동기 때문에 외적인 의무에 있어서 올곧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외적인 의무의 올곧음은 외적인 동기에도 가능하지만 그 외적인 의무 이행에 어울리는 내면의 올곧음은 하나님의 내적인 은혜가 아니면 올곧음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별로 못 받았습니다. 그러면 내면의 올곧음은 없고 외면만 똑바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올곧음이 무너져버린 상태에서는 사람이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른 동기에 의해서 외적인 올곧음만 남게 되는데 내적인 올곧음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올곧음만 남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인간 편에서 보면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중생과 은혜 주심이 필요하고 인간 편에서 보면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다. 그리고 구원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에 호소해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려고 하는 모든 방법을 전적으로 포기합니다. 이게 바로 구원 얻는 믿음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되면 이상하게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하나도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사랑하지 않던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나타나는 믿음의 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의지의 결단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구원 얻는 길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를 꽉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어떤 곳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리고 어떤 곳에서 그 무엇으로도 구원이 필요한 내 상태를 개선할 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꽉 붙드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꼭 붙들고 사정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깊이 그것을 동의하고 그 주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의지가 올곧기 위해서는 진짜 예수 밖에는 또 다른 구원이 받을 수 있는 길이 없고 그리고 예수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어떤 희망도 없으며 우리는 그분만 붙들고 그분을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올곧음의 쇄신이 일어납니다. 올곧음이 마치 바이올린의 줄이 풀어져서 이상한 소리가 나다가도 다시 연주하기 전에 줄을 조이면 소리가 깨끗이 나듯이 잠시 올곧음이 풀어졌다가도 그런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줄이 다시 팽팽하게 다시 조여지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회심이 무엇입니까? 회심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도 성화의 과정에서 회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게 되면 어떤 마음이 생기게 되면 자기가 너무 약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혼자서 살수 없다. 그리고 예수 이외에 아무 소망도 없으며 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밖에는 어떤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도 없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어린아이처럼 예수님께 약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항상 올곧음의 쇄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정말 약해져서 ‘하나님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그때에 사실은 그 마음속에서 올곧음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이 생명 다 바치기까지 내가 이 순전한 믿음을 지키리라’ 이게 바로 올곧음의 상태가 아주 최상의 상태에 달한 것입니다. 그때에 마음이 어떻습니까? 나는 혼자서도 잘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절 도와주시는 것은 필요 없고 방해는 하지 마십시오. 그런 마음일 때 이런 담대한 올곧음은 안 생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해 약해져있는 그때가 올곧음이 가장 강할 때입니다. 정말 강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 앞에 강해지게 되면 올곧음이 없습니다. 이게 흐물흐물한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립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매일하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면 현실과 조화를 이루려면, 그리고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다음에 인간 편에서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믿음과 함께 대두되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그 올곧음 속에서 성화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가져야 할 것이 그리고 믿음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래서 이 순종을 굉장히 많이 강조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인데 왜 실수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를 순종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의 이단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들이 순종하고 나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왜냐하면 순종한 것은 우리가 순종했다고 하더라도 순종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순종할 수 있도록 주신 은혜가 우리를 저절로 순종시킨 것도 아니고 잘 들으십시오. 우리의 순종은 순종하도록 하나님이 먼저 예비적인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러나 예비적인 은혜가 우리의 순종의 전제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찬송하는 것은 좋은 것인데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은혜 없이도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순종하게 하시려고 마음을 가지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순종시키실 수 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매우 왜곡되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역사하실 때 우리 없이 우리 밖에서 당신 혼자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순종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순종이 아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순종하게 하시려면 우리를 순종하게 할 수 있다는 단순한 결론을 가지고 있으면 순종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촉구한 성경의 수많은 명령과 경고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명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믿음과 순종 두 가지는 언약백성들에게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의무이고, 이 믿음과 순종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올곧음도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주님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이 날마다 쇄신되고 신자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순종하려고 믿음으로 애쓰는 곳에서 하나님은 항상 연약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올곧음을 회복시키셔서 그래서 견고한 신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연체동물처럼 흐늘거리며 지조 없던 인간을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살리신 그 사람이 똑바로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실 때 하나님은 올곧음이라고 하는 성향을 신자 안에 심으셔서 연체동물 같은 불신자의 삶을 마감하고 뼈대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만약에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말씀에 의한 쇄신도 없어서 죄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계속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나의 올곧음이 쇄신될 시간도 없이 나는 계속 미끄러진 삶을 삽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등뼈 부러진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앉아서 어그적 거립니다. 똥도 거기서 누고, 오줌도 거기서 보고, 밥도 돌아앉아서 거기서 먹고 거기가 사명지입니까? 그러니까 어디로 가라. 그 사람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올곧음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을 떠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미가 하나도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올곧음이 성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첫째로 중생과 회심으로 이루어지는 방향 전환을 유지하게 만들어줍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신자가 구원에 이르도록 회심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conversion을 하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conversion 즉 회심을 하기 되면 그 회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그 한자에서 쓸 때 그 회자가 '후회한다.'고 하는 그 회가 아닙니다. '돈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경향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turn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전에는 하나님 없이 자신을 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상식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원래의 목적과는 관계없는 삶을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치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가치기준을 잃어버리고 나면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좋은 것은 선한 것이고 자기에게 나쁜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 가치기준을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불신상태의 우리었습니다. 그러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더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는 전적으로 창조의 원래의 목적에서 이탈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인생의 고통이 물질이 없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건강이 나쁘다는 그런데서 사회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창조의 원래의 목적에서 이탈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내가 살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인생에 고통의 문제를 끝까지 캐들어 가다가 보니까 자기가 깊은 죽음이라는 영적인 죽음이라는 질병의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죄가 그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다준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자기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도저히 그 죄를 끊을 수가 없고, 거기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가 없고, 진노의 상태에 놓여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만약에 우리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를 위하여 그분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내포적인 대신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죽으신 것이 바로 우리가 죽은 것이 되고 그분이 그 모든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실 때도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내포적인 대신으로 다시 살아나셨으니 또한 우리가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엄청난 전환을 가져옵니다. 아, 이것은 아니구나. 이 질병 상태가 죄가 우리에게 영혼의 죽음을 가져왔고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이렇게 불행하게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우리가 이런 고통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 하나를 가지고 영혼의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구나. 이럴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게 회심입니다. 돌아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 이외에는 내 인생을 비극에서 건져내실 분이 없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자원과 그리고 어떤 많은 물질로도 나를 이 불행에서 건져낼 수 없으며,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많은 죄와 사망의 얽매인 내 영혼을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그리고 거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의 능력 이외에는 나를 이 모든 사망의 올무에서 건져낼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돌아서는 것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먹어야 합니다. 입어야 합니다. 차를 타고 다녀야 합니다. 집을 사야 됩니다.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그 자원 자체가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절대로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하는 태도가 옛날과 달라집니다.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에는 그게 생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절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 모든 인생을 이처럼 불행하게 만들었던 궁극적인 원인이 죽음이라는 질병이었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내 안에 여전히 죄가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것과 우리가 싸우는 것입니다. 그게 방향전환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러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그렇게 전환된 방향의 상태가 한번 바뀌고 나서 계속해서 바뀐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말로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쓸데없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은 남고 말은 할 수 있어도 온 가슴으로 이렇게 사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만약에 저절로 그렇게 살수 있을 것 같으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테입을 감아둔 시계가 계속 가는 것처럼 그냥 올곧게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 하는가 하면 올곧음이 끊임없는 쇄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곧음이 쇄신되고 그것이 계속해서 강화될 때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방향이 바뀐 이 삶을 계속 유지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향이 틀어지지 않고 이렇게 똑바로 계속 있을 수 있습니다.
한때는 예수 이외에 인생에 참된 기쁨이 없고 그것 이외에 인생 참된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끊임없는 의지의 올곧음, 이것이 쇄신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의지가 신령한 목적을 향해서 계속해서 쇄신될 때 자기가 가는 방향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위해서 이 올곧음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지속적으로 이 올곧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자, 이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지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면 자기가 왜 구원받았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예수 믿도록 그렇게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보면 공식이 참 간단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고 하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것이다. 은혜 받았다. 그러면 교회봉사 열심히 하라고 은혜주신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 대답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복음전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지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구원해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만약에 그것만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구원하신 즉시 천당으로 데려가시든지 내버려두었다가 죽기 직전에 천국으로 데려가시면 되지 왜 구원한 다음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지? 그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 믿고 지옥에 안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시킨 것이 구원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옥에 가는 것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계속 암시를 받으니까 전도할 때는 힘이 납니다. 왜냐하면 자지러집니다. 여러분, 저 지옥의 문턱 앞에서 울부짖는 식구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빨리 가서 전도합시다. 막 가서 전도합니다. 막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서 너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도장을 찍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도 그것을 실천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전도대상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왜 전도 받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장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 믿는 것이 왜 그렇게 행복한지 그리고 왜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한지를 지옥 불 말고 이 세상의 물결 속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게 하는 복음이 균형 잡힌 복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공부하며 깨닫게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창조하셨고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 비참한 죄에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18세기 경건주의를 비롯해서 오늘날에 있는 많은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 구속이 최종적인 완성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구원받았는데 이 세상사는 것은 너무 우울합니다. 왜냐하면 빨리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 이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을수록 자꾸 내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창조하고 타락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구속해놓으신 것은 여기가 끝부분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구속해서 여기서 다시 펴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간지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가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류들이 이렇게 계속해서 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입니다. 여기서 구속을 따라서 다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일대에 일어날 사건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보러 너희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고 예언한 궁극적인 종착역이 여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서 퍼져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퍼져나갈 때는 어떻게 퍼져나가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면 여기처럼 똑같이 타락하고 온 지면에 사람들이 흩어져서 사람들이 훼방하고 거역하면서 자기가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던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건에 의해서 번창해나가는 이 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왜 구속하셨는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구속하신 그 계획대로 살아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했던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사모합니다. 매일매일 사모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이렇게 살도록 남겨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늘나라 직장으로부터 지점에 발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뭐가 나쁩니까? 여기 지점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열심히 장사하고 돈벌어서 본점으로 갔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목적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밖으로는 환란과 유혹, 고난이 많이 겹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적으로 더 문제가 됩니다.
첫째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참된 마음의 경향성 안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의 참됨 경향성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목적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경향성입니다. 그런 경향성을 우리 안에 계속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경향은 지속적이고 항구적이고 죄에 빠지고자 하는 경향은 그렇게 지속적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무엇이라고 그랬는가 하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그러나 내가 악을 행하노라.” 그러니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경향성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경향성, 그 마음의 경향성은 지식도 따라가고 정서도 따라갑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하고, 아는 대로 행하려고 하고, 또 아는 대로 하나님을 느끼면서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걸어갈 때에 이 의지의 올곧음이 계속 거기에 협조하면서 갑니다. 어떤 면에서 앞서서 갑니다. 의지의 올곧음이 계속해서 거기에 협력하면서 갑니다. 그러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끊임없이 자신이 지식적으로 그 하나님을 추구해나가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정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느끼게 하시는 것을 다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이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의지적으로 결단해서 주님이 나를 구원하실 때 나에게 기대하셨던 그런 존재가 되고 주님이 나를 구원하실 때 마음을 가지셨던 그렇게 내가 했으면 하고 생각하시던 그 일을 내가 행하면서 살겠다. 그 마음의 경향성 안에서 끊임없이 의지적인 올곧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때 어떤 존재로 만드시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밀가루반죽이라면 밀가루반죽을 하나님께서는 붕어빵 틀에 집어넣어서 예수 모습을 찍어내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구원이라는 전 과정을 통해서 예수 닮은 상품처럼 그렇게 찍어내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찍히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틀에 들어가서 찍히려고 합니다. 이 두개의 싸움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음이고, 하나는 세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우리를 찍으려고 하고 우리도 또 세상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너희는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 그것이 결국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지의 올곧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계속 우리를 찍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싫다. 그렇게 안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올곧음입니다. 그 올곧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찍혀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구원계획에 정 반대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예수의 형상이 남는 게 아니라 아주 그 시대에 사람의 전형적인 그런 것을 낳는 것입니다. 돈벌고 여유가 있으면 계속 돈 주고 살 빼고 그리고 돈 더 벌면 얼굴을 부스고 새로 조각하고 그렇게 하고 몸 짱, 얼굴 짱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틀에 의해서 똑같이 찍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누가 그러는데 강남에 가면 어떤 때는 길거리에서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차례대로 성형수술한 사람입니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똑같은 제품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틀에 찍혀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사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예수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고 그 다음에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두 번째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하면 의지의 확고한 결단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의지의 확고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제 일생의 여러분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일생동안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인생을 마름할 때 여러분들의 꿈에도 그리던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10년 쯤 살고 난 다음에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으십니까? 한해가 다 저물어 가는데 금년에 여러분들이 세운 계획은 무엇이었고 그리고 12월이 끝났을 때 여러분들 만족합니까? 가슴이 아픕니까? 여러분이 마음에 가진 계획대로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조금 이루어졌다면 몇%나 이루어진 것입니까? 목표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이번 사경회에 만나주시고 그리고 은혜를 주시면 그 다음에 여러분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 은혜를 사용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애걸복걸하고 어려워하는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면 그렇게 해결해주신 그 문제의 해결이 여러분들을 구원의 계획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입니까? 물질의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가정의 화목을 주시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럼 생각을 해보십시오. 의지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죄인은 아무 공로 없다는 미명하에 그리고 죄인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이름 하에 그렇게 자신 자신의 의무를 기만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올곧지 않게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은 가뭄 날에 물도 주지 않고 사방공사하기 위해 심어놓은 묘목이 몇 년이 지나도 겨우 흙에 붙어서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비참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의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타락한 육신을 이끌기에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지가 올곧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쉽게 꺾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뭡니까? 평생 새벽기도 작정한 것이 무슨 애들 장난입니까? 찍찍 그어서 던져놓고 약속을 지키지도 않고 애들 장난입니까? 은혜를 받아서 연초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그리고 몇 주 전에 바짝 앉아서 말씀을 듣고 변화되려고 하는가 보면 삼사월 봄바람 불면 다 흩어집니다. 그게 전부 뭔지 아십니까? 올곧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 의지에 올곧음이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는 올곧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만 올곧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들 한번 발자취를 돌아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뭐가 달랐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의 크기가 달랐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의 순종적인 의지에 있어서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으니 은혜를 폭포수처럼 부어주셔도 의지의 올곧음이 없는 사람들은 다 쏟아버린 금방 빈털터리가 됩니다. 조금밖에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은혜를 가슴에 품고 내가 받지 못한 은혜는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받은바 적은 은혜를 마치 바람에 촛불처럼 생각하면서 가슴에 끌어안고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내게 주신 은혜의 분량만큼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쓰며 분투할 때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십니다.
결단을 하기는 하십니까? 나는 정말 궁금합니다. 결단을 하기는 하십니까?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돌아다니는 신앙생활이 혹시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결단을 해야 합니다. 누구 의지를 쓸모없다고 했습니까?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었습니까? 약합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려고 그러는데도 이 세상에 근심과 슬픔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사자처럼 용감하더라도 로뎀 나무 그늘 아래서 눈물 젖은 뺨으로 낙심하면서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올곧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무 약합니다. 나는 오죽했으면 젊은 교역자들보고도 얘기했는데 그렇게 약해서는 밖에 나가서 똥도 못 푼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약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약하고 흔들려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구도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도달하기까지가 얼마나 많은 난관을 만납니까? 그게 우리 신자의 일생입니다. 의지에 강력한 행사 없이 안 됩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 결단 할 수가 있습니까? 또 은혜 없이 내리는 결단이 얼마나 우리를 실망시키는지 여러분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끼 들고 결단만 남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마태복음을 읽다가 실화입니다. 한 손이 범죄 하면 한 손을 찍어버려라. 그러니까 노름을 하던 사람이 잘라버렸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잘라버렸습니다. 몇 년 후에 갈고리를 하고 화투를 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없는 결단은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결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합니까?
나는 슬픕니다, 막 너무너무 슬픕니다. 진짜로, 찬송가 한 장 빼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저 뒤에 따로 해놓고 충분히 올곧음이 있는 사람만이 부르도록, 그리고는 단돈 오백 원짜리도 안 되는 감정에 깊이 빠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통곡하면서 웁니다. 왜 웁니까?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우는 것입니다. 종종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인간의 탐욕이 엄청나게 진지한 감정을 동반합니다. 쓰레기 같은 삼류감정에 매몰되어서 그렇게 살아서 우리 인생이 겨울날에 잠깐 드는 햇빛과 같습니다. 언제 그렇게 살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약합니다. 그래서 언제 혼자 누워서 눈물로 베게 잎을 적십니다. 약합니까? 그래 나는 한번도 강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합니까? 그러니까 분초마다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강하게 하시는 은혜가 더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뭔가 하나님 안에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말씀에 입각해서 자기 결단을 내리고 그 결단에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결단을 내리는 것은 비용이 안 들지 모릅니다. 평생 새벽기도 한 장 써내는 것 뭐가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것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진짜 회개해야 합니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여러분들 아주 진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둘 중에 하나여야 합니다. 아무렇게 써낸 것에 대해서 깊이 통회하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다시 이행을 하든지 아무렇게나 그렇게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끝까지 이를 악물고 써내지 말아야지, 무엇입니까? 의지의 올곧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의지의 올곧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되게 하시고 싶으셨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그렇게 되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 애를 쓰려고 동시에 하게 하시려고 했던 그 일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욕하게 하는 비결을 배우십시오. 결심을 했는데도 이행을 안 합니다. 자기 자신을 좀 호되게 꾸짖으십시오. 그렇게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하나님의 표준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의해서 가책을 느끼고 자신을 비난하지만 야비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자기 비난을 해봤습니까? 이것도 경건의 기술입니다. 자기 비난을 해봤습니까?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그것도 못하는가. 그리고도 네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살고도 네가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 못하는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비난할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인생을 마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가게 하시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세워주고 싶은 그 사명의 지점이 있습니다, 거기 서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이 은혜 안에서 의지적으로 결단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행하지 않으면 결코 영원히 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다급함을 가지고 의지적인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2. 올곧음의 기원, 왜 올곧음이 필요한가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지난 시간에 언급된 내용들은 다 반복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올곧음 삶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완전무결한 완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하나님 앞에 일관되게 그 뜻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고 부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그런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올곧음은 거듭남과 함께 우리 안에 심겨지는 효과이고 또한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의지적인 반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다음에 이어서 이제 이 올곧음의 기원에 대해서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올곧음의 기원에 있어서 이 올곧음과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각각 다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우리 사람을 크게 그 시기와 조건과 상태에 따라서 나누면 타락 이전에 인간과 타락한 인간, 그리고 거듭난 후에 인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고 하나 더 덧붙인다면 영화된 이후에서 천국에서 사는 또 하나의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먼저 타락 전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이 마음에 올곧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정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반영하고 있었으며, 의지는 올곧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가지런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모두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이 당신만을 잘 아시지 그 밖에 피조물은 하나님을 잘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두 알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자기에게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두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정서는 하나님의 이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고 의지는 그 하나님의 뜻에 다 굴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는 이 의지의 마음 안에 생각과, 지성입니다. 생각과 그 다음에 감정과 의지가 있었다면 제일 맏형은 이 생각입니다. 혹은 지성입니다. 이성, 혹은 지성입니다. 이성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 다음에 정서가 좋고 싫고를 느끼고 그 결과에 따라서 의지는 행동을 하는 막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판단하게 하실 때 두 가지 기능을 주셨는데 그것은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낼 수 있는 정신작용이 이 시비의 판단, 이것을 우리의 지성 안에 주셨고 그 다음에는 뭔가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든지 좋다는 느낌을 갖든지, 호불호의 마음을 갖게 함으로서 사물을 판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처음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의지는 형들인 지성과 감정이 판단하는 바에 따라서 네 하고 순종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곧음 안에 있었습니다. 형인 지성이 이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행해야 한다. 그러면 즉각적으로 이 정서도 또한 이것은 옳은 것이다. 그것을 좋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이다. 그러면 싫어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이 의지의 막내는 형들이 가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타락 후입니다. 타락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이 다 뒤엉켜버린 것입니다. 우선 죄가 들어왔으니 이 생각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시비의 판단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마음아파하시는 대도 저는 좋아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대로 저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생각이 어두워지게 되니까 시비에 판단이 흐려집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허탄한 것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일에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지식들을 잘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지만 이 지성의 맏형노릇을 제대로 해서 동생인 감정을 이끌고 막내 동생인 의지를 이끌어서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그 뜻대로 하나님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데 이 형이 병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워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쓸데없는 것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에 아주 몰두하는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정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서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정서 안에다 이렇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죄가 들어오면서 이게 다 뒤엉켜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아픈 마음을 인간에게 보여주셔서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죄는 감정을 들쑤셔서 아주 더러운 것,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것을 열렬히 사랑하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지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의지 안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올곧게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죄가 딱 들어오고 나니까 의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된 것입니다. 힘은 있는데 그러나 복종할 마음의 의도가 없습니다. 제멋대로 막 날뛰는 것입니다. 이제는 형이 그러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를 해도 형을 아주 우습게 압니다. 그리고 실제로 형도 이미 이제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형이 이말 했다가 저 말했다가 오락가락하니까, 갑자기 자기를 죄로 끌고 가서 야 죄짓자. 끌고 가더니 조금 있다가 아니 이러면 안돼. 그러니까 의지가 형도 믿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데모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막 뒤엉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충동받는 대로 의지는 일관성이 없이 아무렇게나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이 세상이 전부다 미치광이가 사는 세상처럼 될 텐데요. 그래도 차는 왼쪽으로 계속 다니고 신호등도 지키고 사는데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미치광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냥 이 세상에서 왼쪽으로 통행하고 밥 먹을 때 오른손으로 먹고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면서 사는 것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사람들이 그래도 꽤 정돈이 된 것 같고 그러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면 이 인간들은 미친 것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못 알아보고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살면 사는 것이라도 걱정을 해야지 되는데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사는데 이래도 되는가. 근심을 해야지 되는데 오늘 먹고 내일 마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러고는 용감하게 지옥의 불길로 달려갑니다. 미친 세상이 아닙니까?
원래 죄 안에는 미친 기운이 돕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타락했는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중생 후, 구원받은 후에는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이 때는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있던 영혼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주실 때 회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깊이 회개하면 그 회개는 마음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변화가 회심을 통해서 마음에 미치게 되고 마음이 새로워지게 되면 생각을 어둡게 만들어주던 이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짐승처럼 먹고 마시다가 확 죽어버리면 그게 인생에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늘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인생이 그게 아니구나.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어두운 내 눈을 딱 뜨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 지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이 회복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감정이 제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여튼 돈 많고 기분이 좋으면 행복하고 슬픈 일을 만나고 마음이 상하면 신경질이 나고 그랬는데 이제는 거듭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너무 놀랍습니다. 이게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형들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동생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그들을 이렇게 중생시키시고 나니까 의지는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실 때 의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막 제멋대로 날뛰고 개판을 쳤는데 이제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의지 안에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나니까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착한마음이 생겨납니다.
올곧음을 거듭남과 함께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이 올곧은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면 어떤 마음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한결같은 마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올곧은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면 한결같은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형이 깨어나서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고 이렇게 살아야지 되는구나. 그러면 이 동생인 감정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살아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게 되면 막 기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생각을 하면 이 마음도 막 상하고 눈물이 납니다, 형들이 그러는 것을 보고 의지도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는 같이 행복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하게 되어야 할 상황에 들어가게 되면 의지도 너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게 거듭난 상태의 인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거듭난 것을 틀림이 없는데 지금 하시는 것하고는 전혀 틀린 상태입니다. 전 여전히 생각이 엉뚱한 데 빠져있고요. 마음도 하나님의 감정을 못하고 있고요. 이 설교를 듣는 순간에도 내 의지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죄에 져서 그런 상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하기 전에는 죄가 없으니까 그 상태가 계속 되었지만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고 한번 눈에 비늘도 벗겨주시고 또 마음도 이렇게 하나님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고 의지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올곧도록 하나님이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왜 죄가 아직까지도 이 속에 남아있으니까 창조주시하고는 틀립니다. 하늘나라에 갔을 때는 물론 안 그렇지만 지금은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령님이 강력한 은혜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동안에는 유리창이 깨끗이 닦여진 것 같은 상태를 지성이 유지를 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깨끗하게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그런 느낌을 다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의지도 그 뜻에 잘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에서부터 멀어집니다. 죄가 이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죄가 억눌려있고 거의 힘을 못 쓰다가 이제 기도를 안 하고 말씀에 은혜도 안 받고 그러니까 이제 옛 기질들이 막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다시 죄로 인해서 어두워지니까 그 다음에 제 멋대로 다시 하는데 믿을 수 없는 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미끄러지는 것이 아닙니까?
지난번에 했던 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 시리지를 너무 어려워서 여러분들이 굉장히 듣기 힘들어했다고 그러는데 하나도 안 어려운 것입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전 세계에서 나처럼 쉽게 설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그게 바로 이렇게 죄가 들어와서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 이 지성의 창문이 흐려지는지를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일부분입니다. 참 좋은 신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반쯤 썩은 신자로 살다가 죽고 싶으면 그냥 사십시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데는 결심도 필요 없고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은혜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세상의 밭에 구르면 저절로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영향을 미치면서 다 혼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기질들을 다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어두워졌으니까 형을 또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은 이제 하나님이 슬퍼하시면 자기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자기도 기뻐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이게 망가져버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기분이 내키면 막 좋고 기분이 안 좋으면 하나님이고 뭐고 없습니다. 막 들이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들이 난리를 치니까 의지는 뭐라고 합니까? 형들이 뭘 하자고 그러니까 믿을 수 없는 놈들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도 이제 독립선언이다. 너희들 말 안 듣는다. 그리고 막 충동받는 데로 막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혼란이 생깁니다. 그래서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죄 가운데 빠지게 되면 머리가 막 터지는 것 같은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데 생각은 많은데 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에든 사람보고 물어보면 모든지 모른다고 합니다. 너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니? 모르겠는데. 너 구원받았니? 모르겠는데, 성화가 뭔지 아니? 모르겠는데, 그래서 은혜 떨어진 신자의 별명이 무엇인가 하면 몰라 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은혜 생활을 잘 해야 될 필요가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올곧음을 우리 거듭난 신자 마음 안에다 가져다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올곧음의 저자는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데 이 올곧음이라고 하는 우리의 거듭난 성품의 일부는 의지 안에 깃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은혜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되거나 혹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미끄러졌는데 다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돌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그 은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작용을 불러일으켜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으면 어떤 작용이 일어납니까? 예를 들자면 심령에 놀라운 기쁨이 찾아옵니다. 막 뛸 것 같이 기쁘고 가볍습니다, 어제까지는 슬프고 우울했는데 이제는 정말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가 우리에게 이렇게 역사하게 되면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참기름을 쥐어짜듯이 그냥 쥐어짜도 몇 번 짜고 쓰레기통에 깻묵 올려놓고 기름을 짜는 것처럼 아무리 짜도 기도가 안 나왔는데, 몇 번을 짜고 버린 깻묵을 올려놓고 짜봐야 기름이 나오겠나. 안 나오지, 안 나오는데 이제는 은혜를 받고나면 기도가 막 쏟아 나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마음의 정서도 풍부해져서 예전에는 불쌍한 사람이 자기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나고 이런 많은 은혜가 임하면 많은 신령한 작용들이 일어납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많은 신령한 작용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작용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은혜와 서로 배치되지가 않고 그 은혜와 잘 합치가 됩니다.
자, 예를 들자면 은혜가 임하니까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막 기도가 잘 되는데 올곧음이 은혜 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올곧은 내면의 성질을 심어놓으시면 그 다음에는 한번 기도하기로 결심하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결심한 것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하고 굳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올곧음의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이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넘어지니’ 그 찬송 좀 뺐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그것만 부릅니다. 그것도 몇 년에 한번씩 불러야지 은혜가 되지, 아침에 부르고 저녁때 부르고 이번 사경회에 부르고 그 다음에 다시 손꼽아서 그 노래 부를 날을 기다립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 뭐가 있습니까? 똥을 퍼도 그렇게 해서는 장사가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뭐가 되겠습니까?
내가 이야기를 늘 합니다. 우리 나라사람으로서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었는데 그 발레리나들이 그 발레를 하는 게 얼마나 예쁩니까?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백조에 호수를 하는 것처럼 발발 떨면서 무용을 하는 게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데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그 예쁜 치마 속에 가려져있는 다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무 다리입니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발가락을 찍어서 보여주었는데 사람의 발가락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숙연해졌습니다. 아! 진짜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
화투를 치고 노름하던 사람이 있는데 도사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잘하기에 당신 어쩜 그렇게 잘하는가 하면서 물어봤더니 이게 재질도 타고나야지만 노력을 많이 해야지 됩니다. 하면서 손을 보여주는데 지문이 다 지워졌다고 합니다. 화투를 얼마나 집에서 연습을 했는지 속이기 위해서, 오죽했으면 화투를 감추었는데 화투를 치던 사람이 너 이 자식 감추었지 하면서 칼로 확 찍으니까 봐라. 없잖아. 그래서 보니까 진짜 없더랍니다. 나중에 다 끝나고 나서 방 치우는 사람이 가보니까 피 묻은 화투장 한 장이 천장에 딱 붙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그런 기술이 있겠습니까? 집에 가서 한번 해보십시오. 붙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회개하십시오. 내가 진짜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회개하십시오. 구멍가게를 해도 되지를 않을 그 올곧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그래야지,
그래서 다른 은혜와 이렇게 합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도해야지 되겠다고 마음을 가지면 은혜가 없을 때는 마음을 가져도 내일 아침서부터도 시행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다 경험담입니다. 야, 내가 내일부터 새벽기도에 꼭 가야지 되겠으니까 깨워라. 자명종을 켜났는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식구들보고, 혹은 동생보고, 형보고 나 좀 꼭 깨워줘, 그런데 새벽기도에 뭘 가. 눈뜨고 보니까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그리고 자명종은 눌러있어, 그래서 나 좀 깨워달라고 그러니까 왜 안 깨웠어 하니까 형 일어나라고 깨우니까 벌떡 일어나더니 너 이 자식 왜 그래 맞을래? 그러더니 다시 자더랍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없으니까 결심을 해도 그것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주어지면 그 올곧음의 성품을 주셔서 그것을 수행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데 그게 아까 이야기한 기도해야지 되겠다고 하는 은혜의 작용을 충돌하지 않고 지탱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올곧게 나가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실제적으로 신자에게만 있는 특징입니다. 어제도 잠깐 설명했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올곧음이 계속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습니다. 올곧음이 있어서 해보면 올곧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다. 그러면 막 머리가 뽀개져도 하고야 맙니다. 이를 악물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올곧음입니다. 그런 것들도 올곧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뭐 약수터를 20년 동안 항상 똑같은 약수터를 계속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녔다. 그것도 올곧음입니다. 애들이 학교에 가기 싫을 때도 있고 갈 때도 있을 텐데 초등학교 6년 중 고등학교 6년 해서 12년 대학 4년을 개근을 했다. 얼마나 융통성이 없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꾸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올곧음입니다.
여러분들 뱃살이 나와서 다이어트를 해야지 되겠다. 하고 마음을 가지면 올곧음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음식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자기가 더 이상 먹으면 안 된다 하고 칼같이 끊고 주위에서 아무리 권해도 입은 조가비처럼 딱 오므리고 안 먹습니다. 그런데 이게 올곧음이 모자라는 사람은 항상 다 먹고 배부른 다음에 열심을 가집니다. 실컷 배부르고 나면 절제해야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 더 들어갈 때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올곧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올곧음이 그런 방면에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올곧음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의 목적에서 돌아가게 하시는 그런 방향에서의 올곧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올곧음입니다.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그럼 이제 이 올곧음의 좌소는 어디인가? 좌소라는 말은 올곧음이 있다면 그 올곧음이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올곧음의 좌소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거기에 올곧음의 좌소가 있는 것입니다. 올곧음이 거기에 자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뭘 혼란을 피해야지 되는가 하면 이런 혼란을 피해야 합니다. 아주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어떤 혼란을 피해야지 되는가 하면 이 올곧음의 자리가 의지에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이 올곧음을 주시고 은혜가 식어져도 이 거듭난 신자에게는 기본적인 올곧음이 있습니다. 올곧음이 있는데 이 올곧은 것을 의지가 잘 보호해주면 이게 오래갑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지가 잘 보호해주지 아니하고 의지가 펴져버리면 올곧은 것을 힘을 주셔도 이게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럼 의지 안에 심겨진 올곧음을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지가 수시로 힘을 내서 하나님이 심어주신 그 올곧음에 자기도 합치하게 하려고 수시로 결단을 내리고 거기에 계속 붙어 있으려고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그게 의지입니다. 여러분, 성화와 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것 설명한 것 기억나실 것입니다. 자, 기도를 하러 가야지 되겠는데 영혼은 기도하고자 하는 열심이 있는데 육체가 게으릅니다. 그 이야기는 마음에는 이 올곧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나는 기도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게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가 게으릅니다. 그래서 잘 말을 안 들으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영혼이 야, 기도하러가자. 육체가 나 너무 힘들어. 쉬었으면 좋겠어. 그럴 때 마음이 기도하러 가자. 그럴 때는 뭐가 있었는데 그런데 힘들어 하니까 그래도 가야지. 목소리가 한톤 내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아, 이제 기회다. 그러면서 육체가 더 꾀를 부립니다. 나는 이제 내일 가. 오늘은 죽어도 안돼. 그러니까 이제 마음이 이야기를 합니다. 많이 힘들어.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응 그럼 어떻게 하니 그리고 이제 마음도 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올곧음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보호하는 의지 작용이 퍼져버리면 이것 자체가 게으른 육체를 따라가면서 흐물흐물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자. 그러니까 육체가 나 있지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너무 힘들어.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 의지에 올곧음을 심어주셨어도 마음이 딱 생각하니까 진짜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어서 안돼. 가야지 돼.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올곧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 딱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정말 안 되겠네. 그때 힘을 주면서 뭐라고 이놈의 자식, 맞고 갈래. 걸어갈래. 예수님이 널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봐. 예수님은 너보다 더 힘들게 사셔도 새벽미명에 기도하러 가셨어. 임마. 네가 쥐뿔이나 하는 게 뭐가 있나. 어제도 밤 12시까지 TV보고 빨리 못 일어나.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의지의 올곧음이 약해지려고 이렇게 영향을 받을 때 이런 결단을 통해서 보호막을 싸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환경이나 이런 것들이 막 와도 자기가 결단을 내린 의지가 심겨놓은 이 올곧음을 딱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곧음이 보호된다고 하는 것이 뭐가 보호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은혜가 부패해지지 않고 보호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잘났습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제일 문제는 신앙생활을 할 때 제대로 모르고 이상하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디서 주워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고 적당히 갖다가 어디다 끼어 맞춘 것입니다. 쥐약뚜껑을 갖다가 참기름 뚜껑을 닫은 것처럼 그렇게 합니다. 오늘 비유가 왜 이렇게 원색적인지, 뚜껑만 맞는다고 아무 곳에다 맞추면 됩니까? 쥐약 뚜껑을 열어서 참기름 뚜껑에다 끼면 어떻게 합니까? 은혜라는 말을 어디서 듣기는 들은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은혜를 안 주시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것을 어디서 주워들은 것입니까? 그 뚜껑은 그 뚜껑이 아닙니다. 거기에 갖다가 끼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원래 성품 자체가 이렇게 약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이야기를 하는 게 약한 게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의 의지에게 얼마나 많이 권면합니까? 깨어라. 굳세어라.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담대하여라. 담대 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날 보호해줄 수 있다. 세상이 나를 도전하나. 나는 주 안에서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누가 하는 것입니까? 의지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정신 차려서 들은 사람은 아마 저의 이 설교를 기억할 것입니다. 시편 42편과 43편을 설교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때로는 깊은 낙심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을 보면서 깊이 낙심에 빠질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나. 일어나라. 주를 바라보라. 믿음을 가져라.’ 이렇게 하는 게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하고 은혜를 주시면 하지요. 그런데 은혜는 하나님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럼 어떤 사람은 영혼이 깊은 낙심에 빠져 있는데 그냥 퍼져서 못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환경이 그렇게 어렵고 막 그런데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나. 일어나라. 주를 봐라. 일어나라. 빛을 바라라. 하나님을 앙망하라. 우리 주님을 바라보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를 바라 보거라. 그렇게 의지적으로 그것을 영혼을 권고해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아까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올곧음이 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진지하게 답변하십시오. 하나님이 거듭날 때도 여러분들에게 올곧음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은혜에서 미끄러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셔서 다시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니까 올곧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나면 항상 마음에 결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의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리고 두 손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고 이제 그렇게 살리라. 이게 무엇인가 하면 의지의 올곧음을 하나님이 심어주시거나 다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호를 안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기와 한번 최근에 치열하게 싸워서 이겨본 적이 있습니까? 치열하게 싸워서 이겨본 적이 있습니까? 그럼 주를 위해 분투한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다는 것입니까? 분투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묻잖아요? 뭐가 주님을 위해서 분투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에서 제외해놓는다면 주님을 위해 분투하는 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분투가 아닙니다. 그냥 하는 것이지. 분투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는 환경과 싸우고 내적인 시험의 요인과 결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가 얘기했습니다. “일평생 진리를 따라 살아온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분투하는 것입니다. 은혜주시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보호를 하지 않습니다. 올곧음을 주셨는데 의지적인 결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고 그러는데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고 보시겠습니까? 분투하는 삶이 없는데 그 은혜를 구한 사람의 그 심령이 그 죄로 썩었지 정결할 수가 있습니까? 진짜 정결하게 살려고 하는데 능력이 모자라,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는 정말 나는 의지로 분투하지만 그러나 능력이 모자랍니다. 날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은혜언약을 통해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묻습니다. 최근에 분투한 적이 있었는지? 새벽기도를 나가야지 되는데 안 나가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육체가 꾀를 부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도 자꾸 싫증을 냅니다. 아, 나는 안 나갈래. 그때 의지가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안 된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본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해. 마음깊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의지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 너 나빠. 그것은 안돼. 사랑해야지, 예수님이 너를 위해 생명을 버리고 그렇게 모본을 보이셨는데 네가 어떻게 형제를 미워할 수 있는가. 남편을 미워하고 아내를 미워하고 그럴 수 있는가. 안된다. 그렇게 야단을 쳐서 발길로 밟아서 굴복을 시켜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삶을 안 사는 삶이 무엇인가 하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리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만 잘나서 천국에 갈 것입니다. 분투하는 노력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은혜를 부어주시겠습니까?
믿음의 길을 따라서 고난의 받으며 순교의 길을 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실 때 할 수 있으면 이 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무에 매달려서 불에 타죽고, 기름 가마 속에 들어가고, 이빨이 뽑히고, 등가죽이 벗겨져 굵은 소금이 뿌려지고, 발톱이 뽑히고 하는 것이 즐거워서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십시오. 어느 놈이 그 길을 즐거워서 가겠습니까? 싫어, 나는 싫은데 그런데 의지가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명령하셨으니까, 주님이 사랑하셨으니까. 한번 죽고 주님과 영원히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한번 살고 영원히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그 심한 회유와 핍박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 간증을 들었을 것입니다. 신사에 가는 것은 말하지도 않겠다. 창문만 요만큼 열고 고개만 까딱하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그래도 끝까지 안 했습니다. 왜 안했습니까?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죽고 자기 보는 앞에서 그렇게 아내가 모욕을 당하고 그러는 것이 행복해서 그랬습니까? 그분이, 그러니까 그분은 충성스러운 분이고 여러분은 안 충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신앙생활이 어디에 있습니까? 풀빵장수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장사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소유를 샀다고 그랬습니다. 한번 얘기해보십시오. 진짜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민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패역한 길로 달려가는 것과 그리고 마음의 무너짐과 이런 것들을 의지로 안돼! 하고 눌러본 적이 있는지 한번 말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셨던 많은 은혜가 여러분들 마음 안에서 썩었습니다. 부패했습니다. 부어주신 은혜가 많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안에 대부분 다 썩은 만나와 같이 상하고 벌래난 만나와 같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안에서 썩어서 소진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별로 사용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생명을 버려서 이루신 그 구속의 공로를 생각하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고 이 올곧음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의 의지를 아는 견고한 지식 안에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첫 번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에 이 견고함이 심겨지고 새로워집니다. 이 올곧음이 세워지고 그리고 식었던 이 올곧음이 다시 회복이 되어서 한결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자 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의 삶이 어떤 삶인지 한번 성경을 정직하게 보십시오. 주신 은혜를 속이 벌레 먹은 만나와 같이 썩히고 어떤 의지의 노력도 거의 없는 의지 박약아와 같이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갔습니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고난의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모든 것을 걸고 그리고 주위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성령께서 증거 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환란과 핍박과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했으나 내가 은혜의 복음증거 하는 이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목숨도 조금도 두려운 것으로,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노라” 누가 시킨 것입니까? 의지가 결단하고 자신의 사명을 환경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붙든 것입니다. 그게 올곧음입니다.
환란과 핍박 속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기쁨 되도다
누가 부르는 찬송입니까? 순교의 장소로, 그 짐승이 우르릉거리는 곳으로 끌려 나가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갑니다. 왜요?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의지의 올곧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대신 걸레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올곧음이 없는데, 마음은 올곧지 않고 그리고 행동은 한결같지 않은데 어떻게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겠습니까? 말이 되겠습니까? 그 삶이 순결할 수가 있습니까? 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주신 은혜가 그렇게 많은데 의지적으로 그것을 거의 활용하지 않고 살았는데 무슨 은혜를, 또 의지를 주면 뭐하겠습니까? 마음속에 넣어났다가 다시 벌레 먹은 만나처럼 썩힐 텐데 은혜를 주셔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참 인간이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 길을 따라가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헬리스쿠겔이라고 하는 청교도도 그래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참된 핵심은 실천하는 가운데 가장 인간에게 가장 잘 파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특별히 그의 의지, 하나님의뜻이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게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올곧음을 유지하고 한결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일까? 이 나라를 어떻게 하나님이 이끌어가라고 원하실까? 이 교회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 가시려고 하는 것일까? 나를 이 세상에 아직 살려주셨는데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러시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 힘듭니다. 하나님, 나를 낳으셨으니까 책임지십시오. 왜 안 도와주십니까? 그리고 징징거립니다. 도와주면 뭐합니까? 그래서 도와준다고 하면 뭐가 나아집니까? 도와주면 만사형통해서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 그러면 또 게기면서 살다가 그러다 힘들어지면 하나님, 나 힘들어요. 도와줘요. 누가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그런 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연약해서 넘어져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 절 도와주셔야 됩니다. 그럴 때 있습니다. 그럴 때 많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는 길이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관심이 있고 주님의 의지를 행하고 그 길을 가려다가 너무 힘이 없어서 쓰러졌습니다. 도와주세요.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나를 바로 저 길을 위해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나를 걸어가게 하셨는데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중간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가야지 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런 기도라면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고무신 거꾸로 신었습니다. 여리고성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힘주면 뭐하겠습니까? 거꾸로 신던 고무신 똑바로 반대 길로 걸어갈 것인데,
삶에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십니까? 나는 그게 궁금합니다. 진짜 하나님이 계십니까? 뭘 한 게 있습니까? 진짜 하나님 앞에 내가 진짜 물어봅니다. 너무 너무 하고 싶어서 죽겠는데 하나님 때문에 의지에 칼을 들어서 안 한 것이 있으면 한번 대보십시오. 나는 정말 죽어도 하기 싫은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칼을 들어서 내 뜻을 잘라버리고 한 것이 있으면 한번 대보십시오, 아니 지나가면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 손을 얹고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럼 도대체 그 의지는 무엇입니까? 어디에 쓰는 의지입니까? 결국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자기는 뭔가 계속해서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수렁에 빠져서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결단을 못 내릴까요? 가슴 아프지만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 아픔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후벼 파더라도 자신은 편하게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자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그 길목에서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올곧음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이 올곧음이 비롯될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올곧음의 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안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 올곧음을 창조하고 이미 이루어지 올곧음을 쇄신시키는 강력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강력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일평생 전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경험한 것은 벌써 젊은 시절에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이 되었는데도 그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흐느껴 우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나 사도라고나 할까, 나 수 백만 명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수백 개의 교회를 이 땅에 세운 기독교 선교의 원조라고나 할까, 신약 성경의 절반을 내가 썼다고나 할까, 이런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니라.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올곧음의 충성으로부터 올곧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올곧음의 충만으로부터 그 올곧음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당신도 할 수만 있으면 지나가게 해달라고 그 피의 잔을 마시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까? 올곧음 때문에 가신 것입니다. 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 와서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들의 선생님이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 제사장이 되고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통째로 다스리는 임금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셨지만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바치고 당신이 죽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거기에 올곧게 충성을 하려니까 할 수 없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그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아버지의 뜻이 그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고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당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신 삶은 한결같은 삶입니다. 신약성경에 이 예수님의 올곧은 마음과 한결같은 삶의 본으로 가득 찼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심방하시고 지치고 피곤하게 누우시는 그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이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잇는 올곧음이 시킨 것입니다. 당신이 의지적으로 노력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감사와 믿음이 그 올곧음을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정직하게 말해보십시오.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살 때 여러분은 티끌만큼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시는 것은 당신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 이 뒤틀린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그래도 홀로 할까, 그래서 당신에게 영광이 끼치고 그래도 그것을 즐거워할까? 생각해서 하나님이 어제 데려가실 수도 있는 사람을 오늘 이제 살려주신 것입니다.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재산이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건강이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유지하고 있는 생명이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착각하면서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어떻게 된다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창조에 유업을 우리가 받는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열심히 노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것입니까?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자녀니까 그것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주신 것은 세상 사람의 손에 있으면 창조의 목적대로 사용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여러분에게 한번 맡겨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하게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것을 해결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여러분이 누구인지 십자가가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그렇구나.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한 고난은 나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다. 나같이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주님이 구원해주셨구나. 죄 없으신 그분이 고난을 당하셨구나.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고 징계를 받으시고 죽으셨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놀라운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다. 비로소 생각이 납니다. 아,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예화: 어거스틴이 변화를 받고 다시 길거리에서 만난 옛날 애인이 따라와 아는 척을 하자 여인에게 그대는 여전히 그대지만 나는 예전에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이 죄와 형벌 가운데서 건지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내 머리를 잘라서 신발을 만들어드릴까? 내 살가죽을 벗겨서 곱게 기어서 예수님 옷을 만들어드릴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의지의 올곧음이 없이 그렇게 퍼지는 삶을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뭐를 얻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말씀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 썩어버리고 어느 한순간이 되면 하나님이 그 말씀을 다 거두어버리십니다.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올곧음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뭘 향해서 올곧은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지에서 올곧은 것입니다. 자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올곧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이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오만방자한 지체가 언젠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어도 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앞길에 축복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다. 순종하려고 하다가 안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내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행할 수밖에 없고 순종하느니 고통을 당하느니 불순종한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겠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네게 하나님의 축복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뭘 잘못하신 게 뭐가 있습니까? 뭘 잘못했기에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합니까? 물론 인간적으로 이해는 합니다. 얼마나 상황이 고통스러우면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이야기를 해야지 희망이 있지 인간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 때문에 온 것이고 나쁜 것이라면 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주님이 잘못하신 것이 있다면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을 우리를 위해 다 주신 것 이외에는 잘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사랑함으로 그것밖에 잘못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우를 합니까? 자기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다가 죄를 짓고 그리고 난관에 부딪혀서 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그렇게 삽니까? 그렇게 살아서 인생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렇게 살까? 왜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저렇게 욕할까? 그분이 뭘 잘못하셨는데 저렇게 욕할까? 그 올곧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것 신경 안 쓰고 사는 사람은 쓰레기입니다. 천국에 갈지 안 갈지 가봐야 압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압니다. 제가 보기에는 태반 가짜입니다. 가봐야 천국에서 못 만납니다. 그런 엉터리들이 천국에 가면 쓰레기지 천국이 어디 천국이겠습니까? 그래도 은혜로 들어가면, 은혜를 사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신바 은혜를 은혜로 여깁니까? 오히려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자기의 욕심거리로 바꾸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가 어떻게 하늘나라가 되겠습니까? 그럼 아무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패와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들을 누가 하늘나라에 들여보내준다고 얘기합니까?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일생을 살았는데 하나님을 위해서는 한번도 희생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것은 자기 양심을 달래려고 다녔지 어디 하나님을 위해서 다녔습니까? 말이야 바로 얘기해야지, 주일 안 지키면 양심이 괴로우니까 교회에 나온 것이지 무슨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다녔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고 그분의 뜻이면 엎드려지는 자기 승복이 없는데 언제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다녔습니까?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자기 양심을 달래려고 자기를 위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느껴지지를 않습니다. 매일 은혜타령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십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구하는 동기 자체가 비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습니다. 아주 때로는 너무 분명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인데도 발길로 차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구합니다. 난 그 사람이 은혜를 받아서 어디다 쓰려고 하는지 난 궁금합니다. 받아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아마 은혜를 주시면 주실수록 담대해질지 모릅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많은 은혜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소화시키고 많은 은혜를 가지고 힘을 내어서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고, 그리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눈물을 흘리는 자들을 닦아주고 저는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병든 자를 싸매고 상처 난 자를 끌어안는 그런 섬김의 삶을 살기는커녕 마음의 창고에서 은혜가 모두 벌레 먹어 썩어버립니다. 그리고 또 은혜를 구합니다. 결국은 은혜 없이 사는 것이 불편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뭐하겠습니까?
이 올곧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성질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목표가 있고, 살게 하시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데 그것을 끊임없이 부합하려고 노력하는 의지의 선한 경향성과 확고한 결단입니다. 그게 바로 이 올곧음의 성질입니다.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신 분으로서 구원한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구원한 너를 내가 이런 존재로 만들고 싶다. 그래서 창조의 영광을 너를 통해 드러내고 싶다. 내가 너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면서 살게 해서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않은 창조의 세계를 너를 통해서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회복하고 싶은데 내가 너를 쓰고 싶다. 그것을 알고 그대로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의지의 선한 경향성과 의지의 확고한 결단입니다.
예를 들자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흉년을 만났습니다.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보고 돌아가라. 나는 나대로 가겠다. 그랬더니 하나는 돌아갔는데 룻은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나를 가라고하지 마십시오.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어머니와 함께 갈 것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될 것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나는 뜻을 정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확고한 것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다시는 이 음식으로 나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뜻을 정하고 물과 채소를 먹었습니다. 그것입니다. 딱 정한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기다린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래도 올라가리라. 그게 바로 선한 의지의 경향성과 의지의 확고한 결단입니다. 그런 성질이 올곧음입니다.
두 번째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올곧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뭐에 관심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이 땅에서 편안한 것, 그래서 잘 되는 것, 그리고 형통한 것, 예수 덕을 봐서 이 세상에서 잘살고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최종적인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올곧음이 있는지 없는지 여러분들이 스스로 오늘 진단해보십시오. 나중에 진단하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지만 오늘 우선 진단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가지고 고민하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거의 고민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주 휜 사람입니다. 조금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올곧음이 조금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가 여기에 없다. 하나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죽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고 나는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싶다. 그 의지의 올곧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뇌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정말 주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계속 침묵하시면 저는 한걸음도 옮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안 보여주십니다.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오늘 주제와 관련시켜서 얘기해보자면 한번 알아보기 위해서 물어볼 때는 안 보여주십니다. 일단 한번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하고 안 하고는 내가 결정하겠지만 그래도 하나님,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 한번 말씀해주세요. 절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안 보여주십니다. 누구에게 보여주시는가 하면 종이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당신의 뜻을 준행하리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인생에 가는 길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항상 충고하는 게 그것입니다. 보여주면 순종할 것입니까? 물어봅니다. 예, 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절대로, 왜 하나님이 당신 뜻이 뭐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고 수수께끼같이 감추어놓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우리보다 더 급한데 빨리빨리 가르쳐주어서 그 뜻대로 살게 해야지, 이치적으로 따져도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는 계획에 맞게 살고 그런 존재가 되고 그리고 그런 삶을 살고 그렇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내가 너를 구원하기를 참 잘했구나. 진짜 보람이 있다. 이렇게 해드리고 싶은 것이 올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목표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물질을 구할 때도 있고, 건강을 구할 때도 있고, 자녀들의 도움을 구할 때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최종적인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다 거기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입니다.
그러면 왜 올곧음이 그렇게 필요한가? 첫째는 하나님이 완전하고 올곧으시기 때문에 이 올곧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고 올곧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올곧고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완전하지 않고 올곧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 만나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지의 올곧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이 읽어보지 않았겠지만 교회 역사도 읽어보고 제 책도 잃어보고 여러 가지 경건 서적을 우리교회에 교인들 가운데 5-60%가 한달에 한권이상 읽는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책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탁월한 신앙에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늘 동행하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서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부러운 감정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은 모두 의지의 올곧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려고 의지로서 분투하던 사람들이었지 퍼질러서 그래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누워서 자고, 하고 싶으면 하구 말고 싶으면 말고, 의무를 이행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은 날은 집어치우고 그렇게 저 배짱 내키는 대로 살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짚어보십시오.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그 사람과 동행했는지 한번 성경을, 그리고 교회역사를 뒤져서 한번 찾아보십시오,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집어치우고 싶을 때 치우고, 사명 기분 내키면 사명타령만 하고 기분이 안 내키면 그것도 집어치우고 제 멋대로 살고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펑펑 울 수도 있고 진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온 백성이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빨 사이에 고기를 물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 가운데서도 그런 진지함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삼류소설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깡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날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실까? 그런 사람들은 모두 영적 소신함을 가지고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실까? 이 일을 하는 것을 기뻐하실까?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동기는 올바른가?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올곧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올곧고 완전한 사람을 찾으셔서 그들과 함께 교제하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처음에 올곧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나중에 성화되어서 올곧아졌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를 손들어서 축복해줄 정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와, 모세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아 선지자, 에스겔 선지자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도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해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첫째가 하나님은 참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투르갑,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참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겉과 속이 표리부동하지 않고 일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것입니다. 이게 무엇으로 보입니까? 가서 만져보니까 진짜 꽃입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이게 종입니다. 참된 게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이런 분이라고 계시해주셨을 때 그것과 일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된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온 성품으로 참된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음의 참된 것이 있을 때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좋아하셨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너에게는 간사함이 없구나. 표리부동한 괴리가 없구나. 그게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눈길을 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곧음을 주셨는데도 행사를 안 해서 의지로 그것을 보호하지 않아서 수시로 퍼져서 자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거짓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약한 것이 아니라 거짓되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게 거짓된 것입니다. 올곧음이 없는 것이, 세 번째는 참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올곧음을 나타내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똑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외면의 행동과 내면의 질이 일치한 생애 발자취 전체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너희도 내 아들 예수처럼 살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왜 올곧음이 필요한가 하면 내면의 올곧음이 없다면 외적인 행위가 올곧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의지에 올곧음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없습니다. 그런데 외적인 행동은 똑바로 입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위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을 집어치우는 것이 낫겠네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것은 위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배교라고 합니다. 배교적인 삶입니다. 위선이 낫습니까, 배교가 낫습니까? 둘 다 나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위선을 집어치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덤에다 회칠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에 있는 시체를 꺼내고 깨끗이 청소하면 됩니다. 왜 위선이 되게 합니까?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지, 내면을 고쳐야지, 그래서 올곧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올곧음이 없이는 최선의 행동도 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악입니다. 마음의 올곧음이 없는데 최선을 다해서 어쩌다 한번 훌륭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서 이 내면에 질이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게 방향전환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왜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까? 간단합니다. 올곧게 당신 가야할 그 길을 걸어가야 하기 위해서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올곧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뵐 수 없음을 생각하고 그리고 여러분의 의지를 채찍질해서결단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육체에 지고, 죄에 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그리고 그들로 올곧은 삶을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3. 올곧은 신자의 특징①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하)
지난 시간에는 올곧음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이제 타락 전, 타락 후, 중생 후 올곧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았고 올곧음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다는 사실과 그 올곧음의 원천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고 왜 올곧음이 필요한지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이어서 이 올곧음이 이제 이중적인 올곧음을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중의 올곧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중의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올곧음은 마음의 경향성이고 그 올곧음이 표출되어서 삶으로 나타나면 한결같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선 제일먼저 우리들이 마음과 인격의 올곧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우리의 인격이 올곧지가 않습니다. 원래 죄라고 하는 자체가 많은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는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의 그 사람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절대로 올곧은 삶이 아니고 여러 가지 모순이 뒤엉켜있는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천성적으로 성품이 똑바로 무엇인가 마음이 잘 정돈이 되고 한길로 가는 것 같은 마음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생각의 옳은 것을 택해서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그런 올곧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던 우리의 내면의 경향성과 인격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올곧게 됩니다. 또 거듭나고 은혜부터 멀어지면 혼란스러워져서 우리의 마음과 내면의 경향성이 올곧지를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나면 이미 거듭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으셨던 올곧음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게 됩니다. 그래서 의지의 지속적인 결단을 통해서 이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어놓으신 올곧음이 계속 유지되고 올곧음이 계속해서 성장하게 될 때 그때 이제 그 사람의 마음이 경향성이 계속해서 한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올곧음을 소유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음이 그렇게 한 가지 방향으로 계속 올곧게 나가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이 속에 있는 경향성을 따라서 인격이 그 올곧음이 인격이 배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한번 호주에 갔습니다. 그곳에 어느 산을 가게 되었는데 그 산에 가니까 호주 할아버지 한사람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할아버지 한사람이 산에다 많은 조각들을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가봤더니 그 당시 영국 사람들이 호주에 와서 평화로운 원주민들을 어떻게 무참하게 학살했는지 그것을 한 사람의 호주 사람으로서 일평생을 두고 그 죄를 참회하면서 거기에 그 영국 사람의 만행을 거기에 쭉 적어놓고 그 호주 원주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그런 일들을 하다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라갔다가 그랬습니다. 그분이 이제 비디오가 남아있어서 거기에서 비디오를 틀어주어서 보니까 그 동산에 생기게 된 연혁과 그리고 자기가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영국 사람들의 만행을 쭉 얘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그분의 주장이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 창조하는 모든 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고 창조된 생명이면 모든 것들은 소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생명이 어떤 생명을, 더군다나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서 그 만행에 대해서 쭉 설명하는데 그분이 신자인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지만 TV에 나오는 그분의 화면의 얼굴을 보면서 뭘 느꼈는가 하면 어린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호주 사람들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게 양쪽 다 논리가 있겠지만 그 할아버지는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틀렸고 그 할아버지가 옳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의 선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인격이, 마음의 경향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들었고 그 인격이 그 사람의 외관까지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평생을 그 산에서 내려오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렇게 올곧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지 되고 그것이 인격으로 변화되고 그 인격의 변화가 변화된 삶을 산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그렇게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올곧음을 보호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외적 행동과 실천의 올곧음입니다. 이 행동과 실천의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목적인 마음의 경향성의 변화와 그리고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곧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굳고 패역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 순간적으로 마음이 변해서 올곧은 사람이 행하는 어떤 행동 하나를 완수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올곧은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경향과 인격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자기 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거나 혹은 하나님의 목적과 자기의 뜻이 우연히 일치해서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래서 어떤 올곧음 하나를 완수해낸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지 그런 것을 가지고 올곧은 삶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올곧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올곧은 마음과 올곧은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런 삶, 이런 것들이 쭉 함께 일관성 있게 배어서 흘러나가는 그것이 바로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중의 올곧음을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성화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은 우리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하는 목표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자신의 마음의 경향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함과 죄악의 때들을 벗겨서 순결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래서 순결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되 그렇게 순결하고 거룩하게 섬겨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하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만족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 만약에 그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거기에 순종하며 살지 않고 성화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믿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복이 없습니다. No holiness, No happiness 거룩함 없이는 어떤 행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그러면 올곧은 신자, 올곧음이 있는 그 신자의 신앙생활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우리들이 이해하면 보다 더 우리 자신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면서 우리가 올곧음 가운데 있는 신자구나, 올곧음이 부패했구나. 올곧음을 거의 버렸구나.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올곧음이 있는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오늘은 세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붙어있으려는 꾸밈이 없는 의도의 결단, 이것이 올곧은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도대체 하나님께 붙어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오래도록 들으신 분들은 언젠가 제가 히브리어 다바끄를 가지고 설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다바끄 붙어있다. 혹은 부종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벽 같은데 접착제나 혹은 못에 의해서 딱 붙어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여기에서 하나님께 붙어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과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의도입니다. 꾸밈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아직 하나님께 충분히 돌아오지 않았고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도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지 않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되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너무나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을 배척하거나 떠나지 못하고 묶여있는 그런 것을 여러분 경험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음의 꾸밈이 없는 상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금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꾸밈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이득과 이익, 이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이 마음의 소원이 그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붙어있고 싶다고 하는 그래서 하나님께 딱 붙어있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꾸밈이 없는 의도, 꼭 그렇게 되고 싶다는 그런 의도,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리는 이런 결단,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의도와 결단이고 이것이 바로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더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첫째로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이제 아주 궁극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것입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나.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그 행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혹시 이 사람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갖지, 얼굴만 보기만 해도 지겨운 마음이 펑펑 솟는 사람은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요즘 귀신은 뭘 먹고 사나.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어렸을 때 기억이지만 저희 할머니하고 할아버지하고 별로 사이가 안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돌아가시면 할아버지 옆에 묻어드릴게요. 그러니까 펄쩍 뛰십니다. 그 영감 옆에다 날 묻지 말라. 살아서 본 것만 해도 충분하다. 애틋한 그리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묻어드렸습니다. 처음 묻어드릴 때는 무덤이 들썩들썩 했는데 요즘은 화해하시고 잘 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 배운 찬송가에 보면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하늘에 있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의심이 생겨서 천국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그게 아니라 천국에 대한 갈망이 워낙 크니까 시적으로 그렇게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해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없는 의도와 결단을 가진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구원에 있어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구원이 꼭 아니더라도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내가 얼마나 불행해질까? 나는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사나, 그런 마음이 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성화와 관련이기는 합니다만 내가 다른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나는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질까 두려워하노라. 그게 뭘 반영하는 것입니까? 그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의 넋두리가 아니라 범사에 어느 순간에 그분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그 집요한 꾸밈이 없는 애정과 애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애착을 끊임없이 자신의 성화에 적용시켜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존재가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바로 올곧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의 경우에 보면 하나님께 붙어있고 안 붙어있고 이런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좋은 것이고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면 평균이고 그런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방면에든지 자기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내가 왜 하나님 앞에 이런 존재밖에 되지 않을까? 내가 왜 그 하나님 앞에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이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이 어떠실까? 그러면서 고뇌한다든지 그 고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토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한다든지 자신을 끊임없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하는 모습으로 몰고 가는 자신의 악한 성향과 결별을 선언한다든지 이런 결단들은 그에게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 앞에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들에게는 끊임없는 분투와 결단이 있지만 이런 끊임없는 분투와 결단이 없는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올곧음을 상실한 신자들입니다.
최근에 몇 달 동안에 심각하게 자신은 왜 그럴까?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그것을 비쳐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친구나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은 이런 모습인데 왜 나타나는 나의 삶의 모습은 이런 것일까? 하고 깊이 고민하면서 분투하고 괴로워해 본적이 있는지 내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없으면 여러분이 올곧음을 거의 상실한 신자이거나 아예 올곧음이 없는 신자일 수가 있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 올곧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크게 둘로 나뉘는데 이 두개는 각각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첫째는 내적 연합입니다. 한번 구원하신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하면서 주님 앞에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에게서는 하나님께 붙어있다고 하는 느낌이 가끔 드는 것이 아닙니까? 가끔 듭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후에 그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경건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게 될 때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특별히 들어주시는 것 같은 친밀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내적인 연합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나가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데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내적인 연합입니다. 이런 내적인 연합을 가지고 있으면 어디서든지 눈을 감으면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깨닫는 것이 있고 그 말씀이 나에게 어떤 감화를 가져다줍니다. 쉽게 말하면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지고 그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연합을 이룬 상태입니다.
이런 내적인 연합은 신자에게 있어서 증진되기도 하고 감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시험에 깊이 빠지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 느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져도 그 속에서 예전에 느끼던 하나님이 나에게 그 사랑으로 불러주시고 흐느끼는 눈물로서 나를 불러주시고 초청하신 그런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거듭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졌기 때문이 연례적으로 그분께 연합이 되었지만 성화생활에서 우리들이 느끼는 내적인 연합은 원리적인 것 말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원리적인 연합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에 변함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신자가 붙어있는데 이게 떨어졌다. 붙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로서 예수님께 접붙여진 사람들도 배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몸에서 떨어졌다. 붙었다. 막 이러는 것입니다. 다행히 붙은 상태에서 죽으면 천당에 가지만 떨어졌을 때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됩니까? 지금도 전 세계에 있는 교회의 신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는 몸이고 그리고 더 멀리 보면 창조 때부터 시작된 모든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고 그리고 또 미래적으로 보면 죽는 날까지 구원받을 사람들이 거기 붙어있고 더 연장해서 생각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까지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 붙었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막 얼마나 막 붙었다. 떨어졌다. 그러는지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치에 닿는 이야기를 해야지, 말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께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떨어질까 두려워하노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구원문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실제적인 연합에 있어서 튕겨져 나가서 떨어진 것처럼,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백번 양보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생을 사는데 하나님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영혼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하고 곤고하고 그리고 괴로움 가운데 일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게 두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지옥에 안 가는 것만 두렵고 세상을 그렇게 살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해놓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운 물건처럼 일생을 살다가 죽는 그 운명이 두렵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그런 내적인 연합입니다.
그럼 내적인 연합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 꾸밈이 없고 동기적으로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결과가 연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런 연합을 많이 느낄 때는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연합을 못 느낍니다. 뭔가 세상에 모든 일들이 잘 굴러가지만 왠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많은 거리감이 느껴지고 그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친밀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에게는 바로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꼭 붙어있는 내적인 연합, 내적인 교제의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모합니다. 그것을 사모하기를 이 세상에 있는 금이나 은이나 명성이나 혹은 좋은 쾌락보다 더 많이 사모하는 사람, 그게 바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의도와 결단을 가진 올곧은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두 번째로 외적인 합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외적인 합치라고 하는 것은 내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려고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면 외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에 합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 받은 다음에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께 꼭 연합되어 있을 때는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상황에서 성경에 뭐라고 말할까? 그리고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여기에 보내신 것일까?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일까? 이런 생각을 계속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연합을 이루려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외적인 삶을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의지에 합치시키려고 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좀 어렵게 얘기해서 미안한데 여러분 수준에서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은혜 받으면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렇게 어렵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얘기한 게 아니라 좀더 확실하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없는 의도와 결단을 가진 신자들은 또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에 대해서 뜻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 인생 전체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뜻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개별적인 삶, 한 구간, 한 구간 안에서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 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인생 전체를 어떻게 살게 하실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깊이 회개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헌납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이제 주께 바칩니다. 당신 마음대로 요리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리고 도장을 찍어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궁금한 게 무엇인가 하면 주님은 거기다 뭐라고 쓰셨을까? 그게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거기에 막 썼습니다. 어렸을 때는 수시로 변합니다. 어렸을 때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러다가 이제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교통순경 되는 것이 꿈입니다. 여자 아이들은 간호원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중고등부쯤 가면 현실적이 됩니다. 중학교 국어선생, 그렇게 씁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가니까 이제 더 현실적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선생 될 만큼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회사원, 아니면 불 끄는 소방서, 직업들이 다 나옵니다. 나머지는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가 오면 무엇이든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지워버리고 주님께 백지위임했습니다. 빈칸만 남겨드렸습니다. 모든지 다 쓰십시오. 그러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이제 어떻게 살라고 그러실까? 선교사가 될까? 목사가 될까? 또 아직까지도 거기에 쓴 것에 대해서 미련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내가 이렇게 계속해서 정신없이 은혜 받다가 목사가 되라고 그러시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좀 빼달라고 말씀드리겠으니까. 그렇게 합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백지위임만 인생증서에 뭐라고 쓰실까 하면서 궁금하면서 은근히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가 하면 내가 그때 썼다가 살짝 지운 것 그것을 보시고 그대로 좀 써주시면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혀 다르게 쓰실 때 그때 하나님께 대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게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바보같이 잠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헌납증서를 바칠 때 그 사인했던 그 초심으로 돌아가면 주님이 모든지 간에 쓸 것 없다. 너는 이제 그만 살아라. 이러시지 않고 그래도 살 기회를 주시는 그것만 해도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앙이 떨어질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그래서 나는 그것대로 산다는 것이 없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행복하게 돈 많이 벌고 그러고 사는 그것이 이제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생이 무엇인지 철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의지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인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상황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의지와 기대가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긴 길이고 우리는 매일매일 갈래길, 샛길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보면 메뚜기 떼 옮겨 다니듯이 그렇게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참 궁금합니다. 속에 뭐가 들었을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철새처럼 날아오니까 철새처럼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그런 사람들을 church grasshopper라고 그렇게 합니다. 교회 메뚜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톡 뛰다가 저기로 가고, 저기서 톡 뛰다가 저리로 가고 진중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진지하게 결심하고 결단하기 보다는 여전히 자기 의지를 앞세우면서 하나님의 후원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올곧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후원을 받아서 결국은 신앙을 빙자해서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올곧음을 소유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최고의 가치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 명백하게 고난이 기다리고 있고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생각되면 그 고난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있어도 그 길을 갑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배후와 좋은 미래,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생각하면 그것을 담대하게 버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없는 의도와 결단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성경의 진리로 진지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의도와 결단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이 진지합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아니하고 지금의 내 상황에 주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판단하실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성경에 답이 나왔으면 명백하게 그 대답을 찾지만 그러나 성경에 대답이 나와 있지 않으면 성경에 많은 가르침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성령을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신중하고 진지하게 결정을 하고 일단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뜻에 자기 자신을 다 바치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주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의지와 그리고 진지한 결단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올곧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삶에 있어서 일관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삶에 있어서 일관성을 가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주위에 환경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대로 가야하는 길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결국은 올곧은 마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쉽게 넘어트리거나 유혹을 해서 끌어들이고 그를 변화시키거나 그럴 수 없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올곧게 걸어가는데 거기에 합치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쉽게 친구가 되지만 거기에 합치된 생각을 안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과 친구가 되고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기 가는 길을 포기하는 것은 올곧은 사람의 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어떤 신학생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턴 십 하는 신학생인데, 저 목사님, 여기에 와서 처음 뵈었습니다. 잘했다. 나도 너를 처음 본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책을 몇 권 보면서 대게 힘들었다고 그래서 왜 그러는가했더니 아주 그냥 엄청 깐깐한 사람으로 느껴지더라고 합니다. 책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이 듭니까? 그것도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면 마음의 경향성을 가지면 깐깐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부드럽고 어쩌면 내가 이렇게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가시는 분이 있을까? 친구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뭔가 마음에 거슬리니까 마음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나고 나니까 진짜 깐깐하시다고, 뭐 깐깐합니까? 그래서 내가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친구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내가 깐깐하게 안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도 보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할 것입니다. 아이고, 파기는 대게 파네. 뭐 일에다가 에에, 에이 밑에다가 일, 일 밑에 기억, 기억 밑에 알파, 아이고 머리 아파. 뭘 그렇게 파. (?)창이 나겠네. 그것도 한번 파산 되게 하기 위해서 책만 파고 누가 그랬습니다. 열린 교회는 머리 뚜껑을 열고 책을 우겨놓는다고, 그런데 안 그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쉽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뭐, 어차피 한번 사는 것.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 네 생각은 그렇단 말이지, 너 생각은 어떤가. 나도 네 편이야. 이것은 은혜를 못 받았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아버님 생각은 그러세요? 네 생각은 뭔가? 저는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기도하고 좀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속히 결정을 내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왜 빨리 알아야지만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지, 그래서 일단 결정이 딱 내려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뭐라고 해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올곧은 경향을 소유하고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좀더 하고 싶은데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이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의 두 번째 특징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있어서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직은 단지 말의 정직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경향이 올바르기 때문에 그 올바르게 말을 하지 않거나 올바르지 않은 상황을 보면 고통을 느끼게 되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 말도 올바르게 하고 올바르게 한 말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정직이라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신자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고자 하는 그 의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치되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다른 행복과 편리함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정직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입니다.
좀더 한번만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그것이 인생을 편리하게 살아가고 행복해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실 정직해지면 편리한 적도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이 굽은 세상에서는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면 고난을 많이 받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한번 정직해졌는데 정직해진 대가는 즉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정직해지면 대가가 금방 돌아옵니다. 금방 돈이 들어오든지 아니면 고통을 피하든지 뭐 다양한 성과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정직해지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직해지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정직해지는 것 말고 정직해지는 것이 많은 희생을 불러옴에도 불구하고 그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고 정직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경험하는 즉각적인 위로와 편리함, 그리고 행복 이런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정직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정직입니다. 그런데 이 정직은 올곧음이라고 하는 성향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두 번째로, 올곧음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 정직함을 그렇게 칭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아주 쉽게 얘기하면 정직함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올곧은지 올곧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직을 양보하고 시시각각으로 변심을 하면서 카멜레온처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올곧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직을 잃어버리고 부정직해지는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데로부터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부 정직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탈하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그 인격적인 특징이 된 사람이 그게 올곧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올곧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편하기만 하면 자기의 편리성을 위해서 결단을 하고 부 정직을 선택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올곧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부 정직한 사람은 뭔가 이렇게 올곧은 삶을 살기위해서 분투하든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수시로 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변심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우리나라와 같은 한국사회에서는 정직해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얼마나 엉터리 같은 나라인지 한번 보십시오. 우리 교회가 연말이면 공인회계사가 직원들 한 7명이 와서 일주일동안 감사를 합니다. 이제 감사의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리고 감사했다고 해서 감사발표를 했습니다. 복도에서 내가 만났습니다. 우리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어야지 되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좀 샅샅이 감사를 잘해주십시오. 그래서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그럽시다. 그랬더니 예, 목사님 알았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7-8명이 와서 일주일동안 꼬박 해서 내가 감사한 비용이 하나도 안 아까웠습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서류를 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또 우연히 만났습니다. 내가 그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면 그것도 자연스러운 게 아니지, 감사를 부탁한 사람은 사회에서도 감사기관에 사람과 감사를 받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도 복도에서 만났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정말 놀랬습니다. 웬만한 주식회사보다도 더 깨끗하게 해났습니다. 그래도 지적상황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하니까 있다고 해서 광고를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 중에 지적상황이 나오는데 그것은 여러분, 분식집에서 밥 먹고 영수증을 달라고 그러면 기다란 종이를 줍니다. 라면 한 그릇 삼천 원, 써주는 것이 있습니다. 볼펜으로 죽 그어서 줍니다. 그것은 사실 아무 법정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문방구에 가면 더미로 싸놓고 팝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가서 밥 먹고 가면서 영수증이나 몇 장 주세요. 그러면 백지를 뜯어줍니다. 그러면 살살 긁어서 회사에 청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수증은 제가 알기로는 작년까지 십만 원까지만 회사에서 통용됩니다. 십만 원이 넘는 것은 정식 세금영수증으로 세무서로 들어가는 영수증으로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직원들에게 다시 그랬습니다. 지적이 나왔으니까 정부에 들어가는 그 영수증으로 해라. 그 영수증이 번호가 다 붙여있어서 발행을 하면 세무서로 가는 모양입니다. 뭘 하나 이런 것을 사면 얼마요, 이천 오백만원입니다. 깎아주세요. 막 그러면 이천만원에 해드리겠습니다. 가지고 오시오,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천만원을 주고 영수증을 달라고 그러니까 기다란 종이 사는 것 거기에 이천만원을 쓰기에 이것 말고 진짜 영수증을 달라고 그러니까 그럼 이백만원 더 내세요. 무슨 나라가 그런 나라가 있습니까?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이 꼴 밖에 못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그런 엉터리 같은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떨리는 것입니다. 아니 돈이 무지하게 많아서 그까짓 것 이백 원짜리를 샀는데 영수증을 주면 이십 원만 내면 된다고 하면 그까짓 것 막 주지만 아니 영수증을 하나 받아서 그래, 영수증 이것을 그것을 안 주고 다른 영수증 받았다고 칩시다. 누가 우리를 잡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안 그러면 경찰서에서 와서 우리를 닦달을 합니까?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윤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회계사는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양심 있는 교회 있는 교회에 다 전화 걸어서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회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을 씁니다. 일억을 주고 물건을 사왔는데 그 영수증을 주세요, 그러니까 천만 원을 더 달라고 그랬습니다. 영수증을 안 받으면 일억 원에 해주지만 영수증을 달라고 그러면 천만 원을 내야지 된다고 하니, 아니 종이 한 장 받기 위해서 천만 원, 이백만원, 삼백만원, 천만 원, 이천만원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같은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금년에도 하느라고 애는 썼습니다. 그런데 100% 완벽하게 못한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러니까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자, 그리고 힘을 쓰는데 보통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의 문제이니까. 생명이 오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핍박의 상황에서는 생명이 오가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럼 그런 경우에 정직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한번 부정직해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치루면서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이 무슨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희생의 길입니다.
나는 어떻든지 간에 하여튼 100%로 적용하면서 살아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병나갈 게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이 사회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니까 완전하지 않은 것이 있고 또 법이라고 항상 현실을 앞서가기보다는 현실을 뒤따라오게 되니까 그런 불편함과 비합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하게 지키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법을 이용해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살면 이 세상에서 정직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 정직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한순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의 가치가 오래도록 그 뜻을 저버리고 편의를 누리고 행복해지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올곧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인정을 합니다. 사업을 하거나 뭘 하든지 간에 이 세상의 법이 완전하지 않고 문제가 많다고 하는 것, 내가 충분히 인정을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 정직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지 여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부 정직해진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에 의해서 괴로워하고 그 정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의도가 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올곧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는 이런 올곧음이 없이 하나님의 위해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아첨입니다. 마음에 내가 동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꾸밈이 없고 순수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꾸밈이 없고 완전하시고 순결하신 그 하나님을 내 마음에 본받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다가 행동으로 열심을 내어서 좋은 신자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럼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일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아첨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땠습니까? 죄를 짓고 불순종하면서도 아주 제사에 열심을 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아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알랑알랑 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합치된 생활을 하려고 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는 그런 것 없이 어떤 종교적인 형식을 화려하게 하고 잘 해서 그래서 한번 그때 정성을 들여서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려고 하는 살아있는 예배나 제사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그릇되게 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시지 않도록 그 하나님 앞에 알랑알랑 거리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아첨입니다.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그런 하나님 앞에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라 큰일을 못하고 작은 일밖에 하지 못해도 커다란 헌신을 못하고 조금밖에 헌신하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 꾸밈이 없이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가서 살살거리고 아부하듯이 자신의 인생의 어떤 행복을 얻어 보기 위해서, 혹은 궁지에 몰린 자신의 인생에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올곧고 그리고 정직하신 하나님을 본받고 그렇게 올곧고 정직하신 하나님을 자신이 섬기면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뇌하지 아니하고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자기 어려운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살살거리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하는 그런 것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보이고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모두 엉터리입니다. 저는 요즘 근대화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왜 이 민족은 그렇게 부정직한지, 부정직한 것은 뭐와 통하는가 하면 용기가 없다는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비겁하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정직해지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화: 신학교에 함께 다니던 어느 전도사가 섬기던 교회의 중고등부를 섬기고 있었는 데 주일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실 대 로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
왜 우리 민족은 그런지, 어느 나라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항상 똑바로 사는 게 아닙니다. 독일민족을 보십시오. 히틀러가 그렇게 나쁜 짓 할 때 히틀러가 투표하니까 93.7%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인가 하면 히틀러 혼자 한 게 아니라 독일민족 전체가 그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사 앞에 깊이 참회했습니다. 지금도 전범을 찾아내서 처벌합니다. 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봐야 합니다. 저런 바보 멍텅구리가 어디에 있는가 합니다. 우리가 그런데 그것을 꼭 닮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사는지, 우리가 개인이든지 역사든지 간에 항상 올바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판단을 내릴 때 신중해야 합니다.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시간이 흘렀는데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깊이 사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일이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도 이 나치 나쁜 놈들이 600만씩 800만씩 살인을 하고 이런 나치가 지금 독일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끊어낸 것입니다. 철저히 사죄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좀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제가 하나 예언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이 세계 사회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질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월남에 갔습니다. 갔더니 거기는 아직까지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지하 교회의 총회장이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간부들이 다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의 교회들을 다 소개하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월남 말을 할줄 모르니까 모여 앉았습니다. 월남 선교사에게 내가 지금 하는 말 통역하라고 해서 통역했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의 한사람으로서 40년 전의 이 땅에 우리 군인들이 와서 당신들 나라의 전투에 참여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자신들도 죽은 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고 한국의 한사람으로서 당신들의 나라에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참회하면서 용서를 빈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하겠다고 그랬습니다.
미래를 향해서 살자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러지 말았었어야지 되었지만 그때는 그게 옳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으니까. 잘못했을 때는 그것을 잘못했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짓입니까? 가서 피 같은 젊은이들이 거기서 오천 명이 죽고 거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학살했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대다수는 민간인이었습니다. 회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자기의 잘못을 용서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일들을 되풀이하며 살아갑니다. 이게 모두 다 부 정직에서 오는 소치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질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옳게 살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판단했는데 옳지 않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잘못된 길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비겁하게 변명하고 도망 다니지 말고 정직하게 나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잘못했다고 그러고 우리 모든 이웃들은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민주사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은 없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느 한순간에 마음이 돌변해서 그냥 아사바사 하면서 하나님 앞에 뭔가 하는 것처럼 살살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종교적인 아첨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다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느 순간에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우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피가 맺히고 고난이 오고 시련과 아픔이 있어도 자신의 인생 앞에서 정직해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지고 역사 앞에서 정직해져서 그래서 올곧은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합니다. 누가?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데 그런데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주님께 연합되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자신의 삶과 행동들이 객관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이 뜻과 합치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객관적인 뜻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가 무엇인가 하면 성경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울로 역사를 보여주시고 그 거울을 통해서 지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이 변천하는 세상의 사고 속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진실한 판단이 무엇이고 그리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해줍니다.
나침판도 없고 아무 것도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항해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보면서 항해한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왜 바다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일렁거리고 배라고 하는 것은 여기 저리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하나를 목표를 하고 가야지만 올바른 항로를 정하고 갈수 있습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역할을 해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올곧은지 올곧지 않은지를 잴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가 있습니다.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펴고 내가 이 뜻대로 살았는가. 산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고 살지 못한다면 그 말씀의 기준 앞에서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하고 진실하게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러 자세가 있는 사람이 완전하지는 않아도 올곧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항상 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항상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올곧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번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고 그리고 주님의 뜻 앞에 자기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양식입니다. 그것 없이는 그를 신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자기 복종 없이 육체의 정욕과 혈기가 원하는 대로 삶을 이끌어 가면 그는 지옥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첫째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는 지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뜻과 의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은혜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정열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하면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게 인생을 사는 이치가 이런 것이구나.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깨닫고 묵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성령님이 그렇게 살수 있도록 그렇게 힘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29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기 가운데 힘을 얻고 고난 가운데 위로를 얻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낙심해서 모두 잃어버리고 이제는 아무 기대도 없이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떨어진 것처럼 그렇게 낙심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일깨워서 그로 하여금 영혼을 소생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깃들어있는 은혜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도 별로 없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힘을 공급받으려고 하는 의지도 별로 없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올곧은 사람이 아닙니다. 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똑바로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고 이런 것이 하나님을 향한 아첨입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첨입니다. 왜 세상으로 못 가는가? 무서워서 못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세상에 못 가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신자입니까?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들입니까? 그게 정말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의 모습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을 섬기면서도 그분을 사랑하는 담력이 없는 사람들, 그게 진짜 신자입니까?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이 올곧은 신자들에게는 있는데 그 갈망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낯모르는 길에 차를 몰고 가면 가장 보고 싶은 것이 이정표입니다. 이정표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면서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다음에 한번 이정표가 나오면 한번 보자. 거기에 자기가 가야할 목적지에 화살표를 그렸으면 그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그 화살표를 따라 갈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향해 올곧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의 정체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아주 쉬운 결론을 하나 내릴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한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거의 없다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성경 한 장 들쳐보지 않고 들쳐 봐도 건성으로 장수나 채우면서 읽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정성껏 묵상교제를 만들어서 한국교회 어디에 가서 찾아봐도 그런 묵상 책을 주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게 정성껏 만들어서 내다 팔려고 만든 게 아니라 여러분 보라고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었는데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교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진지하게 듣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온통 산란해서 도대체 신앙을 상담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에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을 정도로 무지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다는 뜻입니다. 복잡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조직적으로 잘 가르쳐주면 가르쳐줄수록 짜증이 납니다. 살기 싫은데 자꾸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머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자꾸 가르쳐주려고 하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어떤 좋은 선생을 만나는가에 달려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마음에 어떤 의지를 가지고 말씀에 접근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거기서 경험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힘과 격려를 얻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의 정체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 깨달음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식적으로만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상고하면 깨달음과 함께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동기를 회복시키시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놀라운 인내의 능력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은 올곧은 사람이거나 올곧음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마음에 확 퍼져버린 경향성대로 그렇게 나태하고 태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서도 유언을 남기려고 하는데 뭔지 아십니까?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일년에 한번씩 운전면허를 따는 것만큼만 공부를 하면 교회가 변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열심이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연예인들 사진을 모으는 열심만 가져도 교회는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다음에 하나님을 뵈려고 합니까? 수없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서 말씀을 퍼부으시고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글로 책으로 소리로 영상으로 수없이 하시는데 그 많은 것들을 다 거절하고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올곧음도 없이 걸레 같은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가서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하십니까? 아마 시베리아 벌판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말씀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곧 올곧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에 대한 갈망이 간절하게 남아 있으면 그가 비록 미끄러졌다고 하더라도 올곧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미끄러졌지만 그는 다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그런데 나는 참 걱정이 되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 일주일, 이주일, 한달, 석 달 거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고 아무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달은 것이 없고 그 말씀에 대한 감격이 없는데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근심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떤 강심장을 가진 사람들인가요? 그런 사람들이 올곧은 사람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행적 은혜 없이는 갈망도 없지만 의지의 꾸밈없는 결단을 통해서 갈망이 유지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갈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싶고 깨닫고 싶고 막 사모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선행적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행적인 은혜 없이는 말씀을 향한 진실한 갈망이 생겨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런 갈망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은 끊임없는 의지의 결단을 통해서 유지됩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갈망하도록 우리를 자극시켜주신 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 없이 부요한 마음이 되어서 미끄러지려고 하는 자신을 책망하고 의지적으로 자기를 일으켜 세우고 자기를 타이르고 결단하고 그리고 용기를 주고 하는 이런 자기의 의지의 결단과 진실한 참회 없이는 하나님이 아무리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의 대한 갈망을 부어주셔도 그 올곧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갈망들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간증을 막 쓰고 잉크가 마르기전에 타락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맥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을 가짜로 만난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자기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붙어있기 위해서 내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고 자신의 외적인 삶에 있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려고 하는 노력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켜 주실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마음을 모두 열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마음을 닫고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거기에서 세상과 내통하면서 즐거움을 누리고 거기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가서 발길로 차서 짓밟아서 깨트리시지는 않습니다.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깨트려지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깨트리시고 뉘우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감화를 주셔서 죄를 회개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완고한 마음이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 생각해보십시오.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이런 마음의 올곧음이 없고 이런 하나님께 끊임없이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의지적인 결단,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노력,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을 행하고 그 뜻에 부합하려고 하는 용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그 뜻대로 부합하려고 하는 그런 사모함, 이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은혜는 부패했고 그것을 여러분들은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진전이 없이 진탕에 빠진 자동차마냥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은 짧고 이제 점점 세월은 갑니다. 주님을 위해 살날이 얼마 없습니다. 인생 다 살고 났는데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은 돌아가셨고 하나님이 너를 이 세상에 창조하고 이 땅에 머물게 하는 동안에 나는 존재하는 너를 보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게 전부다. 한순간도 너는 나를 섬긴 적이 없다. 그런 인생의 판단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때 여러분들의 손에 들려진 천국티켓이 그렇게 기쁨이 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미끄러짐이 이런 신앙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4. 올곧은 신자의 특징②
“아브라함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하)
지난 시간은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고 순수한 의도와 결단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런 순수한 의도와 꾸밈이 없는 결단은 그로 하여금 정직한 삶을 살게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정직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어떤 편의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가치 있다고 믿는 그런 태도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따라서 올곧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서 살고자 하고 또 그 말씀을 따라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올곧음을 소유하고 있는 신자의 특징을 두 가지 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제에 이어서 네 번째가 되겠는데 네 번째는 결단에 대한 참된 열심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있기 위해서 꾸밈이 없는 의도와 결단을 갖는데 마음에 올곧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순수한 의도와 결단에 대해서 참된 열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참된 은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첫째로 받은바 은혜의 힘과 분량에 따라서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신자 안에 있으면 있고 없으면 하나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각각 그 올곧음의 분량은 약간씩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올곧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많이 그 속에 형성된 사람들은 그 분량이 크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삶을 살고 어떤 난관과 고난, 어려움 속에서도 한번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의 원하시는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그 목표를 양보하지 않고 굳세게 한길을 걸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올곧음의 분량은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자, 어떻게 해서 다르게 될까요? 우선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올곧음의 첫 번째 분량이 다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실 때 그 은혜의 크기가 각각 다릅니다. 질은 같지만 은혜의 크기가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은혜의 크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의 마음에 아주 순결해지고 하나님을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아주 굳건한 올곧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만약에 그런 은혜가 분량에 있어서 그렇게 크지 않다면 적은 분량의 올곧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혼동하지 않아야 할 사실은 이런 것입니다. 양이 적은 것과 불순물이 섞인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 물이 있습니다. 가득 차 있으면 많은 것입니다. 여기에 한 삼분의 일 밖에 안 차있으면 적은 것입니다. 꽉 차있으면 두 사람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만 삼분의 일밖에 차있지 않으면 한 사람의 갈증도 해갈시켜줄 수 없습니다. 모자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의 차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올곧음을 소유하게 될 때 그 올곧음의 분량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올곧음의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올곧음을 소유하고 순수한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는 자기에게 주신 은혜의 힘과 분량에 따라서 첫째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의도와 결단을 가지고 있고 범사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려는 경향을 갖고 세 번째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의 깊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을 때 이런 up rightness 이런 올곧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큰 분량일 수도 있고 작은 분량일 수도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힘과 그리고 그 분량은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간에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는 크기의 분량은 다르지만 그러나 순수한 올곧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간구하고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리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그 뜻에 부합하며 살려고 애를 쓰고 순간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서 신앙을 양보하면서 세상과 타협을 안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는 결단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의 올곧음은 보존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보존하려고 애를 쓸 때 하나님의 추가적인 은혜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데로 행할까 말까 갈등을 강력하게 느끼는데 그것을 꺾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죄는 죽고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초기에 하나님 앞에 뭘 바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물질을, 그런데 그때는 결혼하기 전인데 월급도 작고 생활도 어려운데 그것을 마음에 생각한 것을 바치려고 하니까 바칠 때는 바치겠다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를 드렸는데 바쳐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것을 바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내가 물질이 없어서 한동안 궁핍하게 살아야 될 생각을 하니까 너무 힘이 들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은혜가 떨어집니다. 결국은 이겼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어린 나이지만, 그래서 물질을 드렸는데 그때는 뭐 이렇게 이름을 써내고 그러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잘못이 아닌데 그때는 그런 것 써내는 것 자체도 너무 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기도에 갔다가 교인들이 모두 돌아가고 목사님도 돌아가신 다음에 꽤 많은 액수의 돈을 강대위에 올려놓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갈 때의 그 발걸음이 그렇게 은혜 충만하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불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를 꺾고 순종하게 되어서 올곧음을 의지적으로 지킬 때에 하나님의 추가적인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 올곧음이 강화됩니다. 그때 올곧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드리는데 여러분들은 여기에다가 그런 식으로 헌금을 하고 가지 마십시오. 정말입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니까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언제도 한번 지하실에 있을 때 보니까 새벽기도를 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누가 여기다가 한 2-3백만 원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것입니다. 그게 그 어린마음에도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게 갈등하기까지 은혜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으나 딱 이기고 의지로 결단하고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해야지 된다. 그리고 딱 이행을 하니까 그 순간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자유로워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올곧음이 그렇게 방황할 때보다도 더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올곧음이 점점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올곧음이 처음 은혜를 크게 받아서 크게 심겨진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의지에 부당한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붙어있고 정직하게 말씀을 사모하면서 살려고 할 때 이 올곧음이 점점 성장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때 순수한 것입니다. 순수하면서 이 물의 양이 많아지듯이 올곧음의 양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은혜에서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기도도 안 합니다. 기도도 올곧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은혜 받아서 내일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은 조금밖에 안 힘듭니다. 그러나 십년을 지속하는 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런데 게을러서 그렇게 기도생활도 안 합니다. 그리고 기도생활도 안 하고 그러고 삽니다. 그러면서 보니까 은혜가 점점 식습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은혜가 점점 식다가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쉬운 길이 보입니다. 부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자꾸 수시로 타협하면서 사니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가슴 속에서 점점 식습니다. 그렇다고 이사람 속에 올곧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럴 경우에는 은혜에서 미끄러질 경우에는 순수한 올곧음이 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불순물이 섞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올곧음의 양이 작은 것과 불순물이 섞여서 그것이 오염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이 사정에 의해서 이만큼이 안 되고 사분의 일밖에 안 됩니다. 그래도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서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순수한 물의 양은 사분의 일인데 실제로는 이분의 일입니다. 더 많습니다. 그런데 사분의 일은 순수한 물인데 거기 더러운 하천물이 이분의 일이 섞였습니다. 그러면 절대적인 물의 양으로 보면 이것도 사분의 일이고 아까 물만 있었던 것도 사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이것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어떻게 되기 때문입니까? 오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의 분량은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염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의도, 하나님께만 붙어있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가 변질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된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있겠습니까? 그런 게 존재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상황에서든지 영혼이 하나님께 붙어있고 그래서 실제적인 영적인 연합을 누리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것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대답을 못합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분량이 작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오염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참된 열심은 전인으로서 그 목표를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결단에 대한 참된 결심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참된 열심이 있으면 온 마음과 뜻을 전인으로서 그런 결단의 목표를 굳게 붙잡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성화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그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케 하고자 함이라고 하는 그 성경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왜 그 성화를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성경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희생을 치루서든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맞는 존재가 되고 그 뜻에 하나님이 구원받은 나로 하여금 되게 하시려고 하는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그렇게 우리들을 변화시키시려고 하나님이 택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에 우리를 통해 새로 빚으시려고 하는 그 존재의 모습으로 자기가 변해가고 그래서 자기가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하나님의 그 원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우리의 인격과 마음이 변화를 받아서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목표로 생각하고 그것을 굳게 붙들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아니면 중간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 생각하고 있는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최고의 가치는 모든 다른 가치 있는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도달하려고 하는 가치이고 중간에 있는 가치들은 언제든지 그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있으면 버리고 포기할 수 있는 가치들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체계들이 그렇게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인생의 큰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단번에 달려갈 수 없으니까 많은 작은 목표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목표들을 세우고 그 목표 하나 하나를 이루어갑니다.
나는 요즘 세상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졸업 후 삼분의 이가 직업이 일정치 않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의 삼분의 일이 학원과외 선생입니다. 이런 나라도 없습니다. 아니 학원과외 선생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게 영구한 직업이 아닙니다. 임시직입니다. 일년 있다가 다른 학원으로 가고 그러니까 직업 활동이 불안전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한번 가리켜서 몇 백 만원을 받는 고액과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액과외를 하는 사람이 중학교 1학년 때 고액과외를 시켜서 그 선생님에게 고 3까지 고액과외를 시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직업이 항상 불안정합니다. 이게 사회적으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공무원 시험을 보면 무슨 최하급 공무원 시험이 200대 1, 250대 1이고 어디에선가 정보부서에 있는 우리 교인이 이야기하는데 무슨 주차장 관리인 2명을 뽑는데 1500명이 왔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석사 박사도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 책이 나왔는데 무슨 책인가 하면 면접 잘하는 법, 그런 책도 나왔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입사면접 학원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봐주는데 얼마씩 하고 거기서 면접 보는데 걸어가는 발걸음까지 시작해서 옷 입는 색깔, 그 다음에 머리모양, 눈썹 그리고 그 다음에 화장하는 요령까지도 다 가르쳐주고 그 사람의 얼굴에 따라 머리를 어떻게 해야 될지 이미지도 바꾸어주는데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했더니 효과가 있어서 수십 군데도 떨어졌는데 그렇게 해서 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그 학원도 밥을 벌어먹고 삽니다.
그러면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이제 학원에 가자. 그러면 그 중간에 수많은 목표들이 이제 등장합니다. 우선 학원 비를 마련해야 합니다. 학원 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그래서 입사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서 머리를 파마를 하든지 생머리를 하든지 뭘 하든지 얼굴에 찍어 바르고 그리고 옷도 맞춰서 입어야 하고 이게 모두 다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입사하기 위한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어느 회사에 가려고 다 준비를 해서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까지 다 모아났는데 갑자기 그 회사가 뽑기는커녕 인원을 오천 명을 줄인다고 그러더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습니다. 그러면 학원수강생도 필요 없고 그 다음에 사놓은 옷도 필요 없고 머리까지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중간목표와 최종목표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 존 오웬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 이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내 영광이요.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어디서 듣기는 들어서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무슨 영광을 돌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빙빙 돌리는 것입니까?
그래서 존 오웬이 자신의 책 속에서 아주정확하게 못을 박습니다. 한 사람의 참된 신자일 경우에 그의 궁극적인 비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그것은 고백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의 모든 것들이 그 목표를 향하여 재정리된 사람, 그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고백은 있는데 삶이 정돈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과감하게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선택을 해서 그 의무를 행할 것이요, 그리고 그쪽으로 가는 모든 것들이 다 정돈되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올곧음이 있는 사람의 목표는 다 그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고 참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 참된 신자의 인생의 비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교인들 같은 경우에는 다 그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답을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교인이 설교를 듣고는 은혜를 못 받았는데 밥 먹다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몇 몇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완전히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를 보고 은혜를 못 받았는데 말하는 교인들을 보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을 믿어서 복 받고 성공하겠다. 그런 것이든지 그게 아니라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 말만 너무 믿지 마라. 그 외에는 다른 답을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꼭 그렇게 말을 해야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고백만 있는 사람들이 참된 신자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참된 신자가 되어야지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서 모든 것들이 재정리된 사람, 그리로 달려가기에 적합한 삶의 체계와 이 모든 틀들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여러분들에게 묻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그러면 묻고 싶은 게 이것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포기해본 적이 있는가? 너무 너무 하고 싶은데 다른 것 다하고 싶기도 하고 할 수도 있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여건도 갖추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면 참된 신자가되는데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누르고 한번 포기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하기 싫고 여건도 그것을 할 수가 없고 그리고 하기를 원하지도 않지만 참된 신자가 되는데 그 일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꼭 그 일을 해야지 되기 때문에 너무나 하기 싫은데도 결단을 하고 그 의무를 수행해본 적이 있는가. 그래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없다면 삶의 정비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고백과 실제의 삶이 따로 노는 것입니다. 그런 따로 노는 삶이 훌륭해 보이면 훌륭해보일수록 뛰어난 위선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또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가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한다. 이것은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그 일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목표인데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을 향해서 그것을 최종적인 목표라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다른 많은 것들을 이런 존재가 되고 이런 구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중간목표로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다가 보니까 교회도 말씀이 있는 대로 가야지 되겠고 또 목양도 받아야 되고 또 그래야지 되니까 내가 직업도 가려서 가져야 되겠고 뭐 등등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올곧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해서 결단을 내린 후에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열심을 냅니다. 단지 고백으로만 만족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 고백이 실현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그래도 또 문제가 남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참된 신자가 되고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면서 창조의 목적, 구속의 계획에 부합한 인생을 산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이게 너무 총체적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개별적인 실천에 있어서 꾸밈이 없는 의도와 결단에 헌신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 그분을 잘 섬기면서 사는 것은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최종적인 목표 말고 매일매일 제시되는 개별적인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개별적인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별적인 목표에 대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진짜 거짓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호박씨를 가는 것입니다. 왜 이 다음에 그런 그리스도인이 될 테니까 하고 마음을 먹으니까 양심에 약간 자유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고 결국은 은혜가 승리해서 나는 그런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하고 거룩한 인격을 가진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매 순간 분투하면서 인생을 살 때 비로소 그런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한국교회의 역사에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우리가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대목이 있는데 들어보십시오. 성경에 술을 먹고 담배를 피지 말라는 말이 안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과정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은 아편을 복용하지 말고 마약을 복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것을 우리가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져다주는 파괴적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초기에서는 도박, 일본 사람들이 나쁩니다. 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의식을 잃게 하기 위해서 동양화인 일본 그림을 만들어서 화투를 엄청나게 많이 보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투전이라고 해서 심지를 가지고 했습니다. 이제는 본격적인 그림이 등장해서 많이 시골에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밀주를 해서 술을 담가먹도록 내버려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늘 술에 취해서 다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보고에 의하면 그 어린나이의 한 10살쯤 넘는 애들까지도 어떤 애들은 술에 취해서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다 술에 절어있고 모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 내기를 하고 화투를 치고 그래서 집문서를 잃고 심지어는 자기 부인도 갖다가 잡혀먹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까 인륜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이러지 말자. 하고 줄을 그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개화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 문제가 생겨납니다. 무엇인가 하면 교인들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이 세상이 술집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이제 선교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이 장로교 역사에 나옵니다. 연도는 내가 지금 기억이 안 나는데 모여서 진지하게 회의를 한 끝에 지침을 선택합니다. 그 지침을 각 노회로, 그리고 각 교회로 보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낭독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지침에 보면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세상에 요즘 술집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것은 개탄할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당장 가서 세상에 있는 술집의 문을 닫을 수는 없으나 우리는 기독교인, 야수교인으로서 이것은 명심을 하자. 그리고 온 교인이 이것을 지키도록 예배 시간에 낭독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옵니다. 교인은 건물과 집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그것을 술집을 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지 말 것이며 그들에게 세도 받지 말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온 교인이 힘을 모아야 한다.
얼마나 그때 사람들이 지금보다 생각이 깊은지, 요즘은 교회 안에 모여서 매일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그 다음에 좋아하고 그러지 은혜와 거룩이 주어졌으면 그것이 교회의 담을 넘어서 이 세상에 흘러넘쳐서 그래서 역사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삽니다. 그런 고민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고민을 합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 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겠다. 그리고 마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런 뜻은 고상한데 실제의 삶에 있어서 아주 호박씨 까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계속 흐르고 나이는 들면서 심령은 계속 무디어지는데 언제 그런 진실한 신자가 되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개별적인 의무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화: 어느 교회 옆에 큰 술집이 생겨서 온 교인이 열심히 그 술집이 없어지도록 기도 를 했더니 그 술집이 망했고 그 술집에서 그렇게 자기의 술집이 없어지기를 위해 서 기도한 사실을 알고 소송을 해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망했다며 배 상하라고 그런데 교회에서 한 말이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망한 게 아니라며 발 뺌을 했다는 내용)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네 집을 술집 안 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건물을 가지고 술집이나 도박장, 야한 댄스클럽, 카바레 이런 것을 빌려주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옛날초대교회 같으면 다 치리감입니다. 그런데는 대부분 돈을 많이 주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월세 받는 돈을 그만큼 못 번다고 할지라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실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개별적인 은혜 하나, 하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열심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면 마음에 올곧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열심이 있습니다. 이런 올곧음 없는 사람들은 커다란 목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네. 찬송을 부르고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주님 이외에 사랑하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지만 다 사탕발림입니다. 실제의 현재의 삶에 있어서 호박씨 까는 삶을 삽니다. 표리가 부동한 삶을 삽니다. 그게 바로 올곧음이 없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진짜 오늘날 신앙의 지조라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까? 한국교회를 움직인 신앙이 바로 그런 지조신앙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는 결혼한 사이이니 우리가 그 신랑을 배신할 수 없다. 일사각오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주를 위해서 한번 죽으면 한번 죽지, 여러 번 죽는가. 한번 주를 위해서 죽으면 그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이런 신앙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온 힘을 다해서 자기에게 부여된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 일에 있어서 열심을 냅니다. 누가? 마음의 올곧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이런 열심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열심 자체를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불꽃처럼 산다고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열렬한 삶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한 동이의 양초라도 되는 것처럼 그 양초의 사명은 자기를 모두 태워 빛을 어두움에서 밝히는데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영혼과 온 마음과 온 뜻과 육체의 온 힘을 다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과 그 목표를 위해서 자기를 태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죄와 그리고 더러움, 그리고 불결과 그리고 불순종을 이기고 게으름과 나태함을 타파해서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진실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을 모든 섬김에 있어서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이 목표는 그렇게 간단하게 쟁취할 수 있는 그런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우주적이고 지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삶에 있어서 그 열심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열심만도 못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열심만도 못하고 입시를 앞두고 공부하는 학생들의 열심만도 못합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이 쟁취될 수 있겠으며 그 집요한 죄의 세력들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열렬한지 한번 여러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과로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오를 완수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일하다가 죽어버립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저는 항상 그 나라에 가서 기회가 있으면 그 나라가 치룬 전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이 저의 취미 중에 하나입니다. 언젠가 한번 동남아의 어느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뭘 보여주었는가 하면 그 나라에 반역하던 사람들을 처단하는 광경을 담은 그런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에 가서 그런 곳에 가봤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것을 실물처럼 인형을 만들어서 했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여자를 이렇게 눕혀놓고 사지를 다 묶었습니다. 그리고 저쪽 꼭대기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쇠 덩어리인데 그 쇠 덩이가 도끼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그게 저쪽에 매달려있는 것을 탁 줄을 풀면 진동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딱 닫는 지점에 죄수가 두 팔과 두 발을 묶고 있는 것입니다. 횡 하고 날아오면서 그 어마어마한 도끼날이 이게 시계추처럼 운동을 하면서 사지를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동남아 쪽에 가도 옛날에 자기에 나라에 반역을 하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 아 하노이에서 봤습니다. 미군들이 자기네 나라에 쳐들어왔을 때 미군과 미군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는 장면을 민주인사를 죽이는 그 장면을 거기에 다 담았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민족도 외외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뭘 보는가 하면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각 나라와 민족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서운 광기를 행사했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거기에 갔더니 무슨 일이 있는가 하면 실물을 만들었는데 나라에 반역한 사람을 거의 크기가 이만큼이 되는 집게를 가지고 실제로 혀를 꽉 눌러서 그것을 잡아당겨서 혀를 뽑아버립니다. 그게 맨 정신으로 상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주님이 오시면 없어지고 말 그 아무 것도 아닌 나라를 위해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무참하게 살육하는 그 끔직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자기의 나라를 지켰구나.
또 반대로 그 나라에 저항한 사람들은 그 나라말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역으로 그렇게 죽임을 당하면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터키에 갔을 때도 깊이 마음속으로 참회를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속으로 참회를 했는지 성벽이 두개가 놓여있는데 오스만 터키가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 벽은 도저히 넘기가 어려운 벽입니다. 그런데 넘으려고 하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역사를 설명해주는 선교사 이야기가 사다리도 필요 없고 사람이 죽은 시체가 쌓여서 성벽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밟고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성벽과 성벽 중간의 길이가 내가 보기에는 한 3-400미터가 되는데 그 성벽 사이에서 이제 첫 하나의 벽을 넘고 쳐들어온 오스만 트르크 족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로마군대가 거기서 싸우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과장을 좀 해서 성벽과 성벽 사이가 핏물로 가득 찼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자기네 나라도 아닌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 죽고 자기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죽어갔는데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분투하고 이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그렇게 죽기를 무릅쓴다면 선교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저는 신체의 묘미를 잘 모르지만 의학적인 근거가 없는지 잘 모르지만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이제 달리기를 하면 건강에 좋다고 해서 달립니다. 내가 한 5-10년 동안 거의 달리기와 상관없이 살다가 중년이 넘어가면 어느 순간에 달리기를 하려고 해보면 자신에 대해서 엄청나게 실망을 합니다. 200미터를 뛸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100미터만 넘으면 폐가 찢어질 것 같습니다. 저도 중 고등학교 때는 꽤 달렸습니다.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러나 20명이 천 미터를 뛰면 한 5-6등 정도에 들어올 수 있는 실력이 되었습니다. 100터 달리기를 해도 그래도 제가 제일 기분 좋게 잘 달렸다고 하는 것이 고등학교 때 14초 2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내가 지금 뛰면 한 15초면 뛸 걸 그랬는데 목사님 재보십시오. 18초에도 못 뜁니다. 지금 보니 진짜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달리기를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너무나 실망하는 게 200미터를 못 뛰겠습니다. 100미터만 뛰어도 심장이 터지는 것 같고 폐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내 생각에 그렇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저 가만히 앉아서 새근새근 숨을 쉬며 사니까 폐활량이 다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뛰기 시작하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말하자면 심장에 압박이 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폐가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극복하고 계속 하루 이틀 삼일 사일 이렇게 뛸 때 그때에 심폐기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 같은 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김영삼 대통령이 잠깐 수술을 하려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나이가 70이 되었는데 그 심폐기능이 20대라고 그랬습니다. 매일 하루에 4킬로씩 걸었는데 그 길이 적은 길이 아닙니다. 매일 다니니까 이 기능이 좋아진 것입니다. 말씀드린 요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폐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반복해서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그 심폐기능이 강화되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고상하고 놀라운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힘들어서 그 목표만 가지고 있고 그렇게 힘든 것 때문에 그렇게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적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는 도저히 그런 삶을 향해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퇴화합니다.
최고의 가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며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가고 적어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죄 가운데 망가진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헌신된 일군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의 열심이 매일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애쓰는 그런 체육을 하는 사람의 열심만도 못해서 뭘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바둑을 잘 두지 못하지만 바둑의 역사에 보면 일본의 기사 가운데 토욜국(?)이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기사가 둘이서 대국을 했는데 한 사람이 졌습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억울하니까 그 한을 못 풀고 그 속에서 푹 엎드려졌는데 피가 입에서 확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기보가 아직까지도 전해 내려옵니다. 아니 바둑돌 하나 놓고서 이기면 어떻고 지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거 하나 가지고 졌기 때문에 사나이로서 피를 쏟으면서 단상에 엎드려서 죽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오락만도 못합니까? 열심이 있습니까? 올곧음이 없고 그것들이 죄에 의해서 오염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열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초대한국사를 읽으면서 그렇게 감동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올곧음이 가져다준 치열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에 그 성도들이 그 고난을 당하면서 글들을 읽으면 마치 정몽주의 시를 읽는 것 같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건 간에 내가 임을 향한 일편단심이 어떻게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신앙화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잔인한 핍박과 고난을 이겼습니다. 수없는 투옥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큰 집게로 발톱을 뽑히고 그리고 등가죽이 벗겨져서 소금뿌림을 당했습니다. 난장을 당해서 피가 터져서 죽고 말이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발가벗겨서 성적인 고문을 해서 남편을 기절하게 만들고 이런 비인간적이고 야비한 박해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바로 올곧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고 그 사명대로 살려고 하는 치열한 열심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연약한 자도 받아주십니다. 부족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연약한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있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용납될 때 이대로 용납된 것은 은혜였지만 자신이 그 모습 그대로 있고자 하면 주신바 그 은혜는 부패해버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도저히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의 모습, 그 더러운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것은 매일 앉아서 그 노래를 부르라고 우리를 건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모습도 받아주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이제 그 옛 모습을 버리고 십자가 앞에서 더 가까이 가야지 되겠다. 내 모든 것이 그분께로 받은 은혜니 그분께로부터 받은 그것을 위해서 나도 달려가겠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너무 열심이 없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연약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연약함이 아니라 순수한 올곧음의 부패한 것이 섞여서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이 안 난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순교한 사람들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중국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받다가 너무 그 사람이 망가지니까 당국에서 석방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교도소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들여보내주지 않으니까 옆에다가 움막을 치고 아직 내가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의 분량이 안 끝났다며 자원해서 옆에다가 감옥을 만들어놓고 자기 스스로 감옥살이를 하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생각하십시오. 지금은 오뉴월입니다. 푸른 계절입니다. 따뜻한 봄날이고 따뜻한 여름입니다. 모든 만물이 다 푸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나 이렇게 푸르고 따뜻한 봄날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최고로 기독교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언제나 이런 날들이 계속되지 않습니다. 낙엽이 다 떨어지고 북풍한설에 흰눈이 펑펑 날릴 때 그때도 푸른 나무로 서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이렇게 약하게 살아서는 그 날에 상록수로 서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탄식하겠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다시 올 때에 너희 중에 믿음을 보겠는가. 주님이 우리 시대에 교회에 많이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을 단순히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거룩이 교회에 담을 넘어서 매일 자신의 상처와 갈등이나 붙들고 거기서 뱅뱅 돌고 아무 것도 못하는 그 무기력한 자기 연민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 안에 채우면서 자기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거룩이 자기 자신의 벽을 넘어서 타인과 이 세상에 스며들고 그리고 주를 위해서 세운 교회를 위해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참된 열심에 대한 오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이 이런 올곧음에서 오는 진실한 참된 열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게 누구인가 하면 외적인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항상 내면과 단절된 외적인 의무의 수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으로 꽉 차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가운데 수행되는 외적인 의무의 열매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두개가 분리작용이 일어나면 분리작용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이 됩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음에 없는 행함,
그래서 세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영적으로 교회가 무기력하고 타락했을수록 교회를 웅장하게 지으려고 애를 썼고 외관을 화려하게 해서 특별히 웅장하게 해서 사람들이 거기 앞에 섰을 때 주눅이 들도록 만들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사라진 그곳에 교회를 아주 웅장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자신을 아주 외소하게 느끼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의 권위가 사라질 때 나타났던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의 화려한 역사와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신앙의 역사는 반대로 쌍곡선을 이룹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실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언제든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려는 사람들은 과도히 자신의 선한 행실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를 쓰거나 사람들에게 칭찬을 갈망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왜 그들의 즐거움이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하면 벌써 중대한 변질이 그에게 온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할 때는 자신이 참된 열심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내가 이런 일도 하고 이런 헌신도 하고, 교회에서 이런 직함을 가지고 이런 봉사하고 그리고 성실하게 그런 일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꾸밈이 없이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받으셔서 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점령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를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나이다. 하는 이런 고백은 있지만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산 것이라. 그런 고백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쫒고 선지자 노릇하고 이런 이런 선행을 했습니다. 그 고백은 있습니다. 너무나 그런 일들에 열심 했기 때문에 놀러갈 시간도 없었고 뭐도 못했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과 동시에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나는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혔도다. 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기고 분투하는 사람, 그러면서 동시에 열심이 분투하고 애쓰는 사람, 그러면서 동시에 언제든지 무릎을 꿇고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하는데 주님을 찾으며 마음이 하나님 앞에 녹는 사람,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나는 살아도 주의 것이고 죽어도 주의 것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고 계십니다.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까이. 그런 내면의 세계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정 반대입니다. 분명히 마음의 올곧음이 있고 참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소수이지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앞에 있는 사람들과는 여러 가지로 틀립니다. 우선 첫째로 어떤 점에서 틀리는가하면 선한 양심을 지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서 선한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떻습니까? 꾸밈이 없습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겸손합니다. 꾸밈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겸손한 것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방해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올곧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이 형제를 위해서 짐을 지는 일이라면 자기와는 가장 관계가 먼 형제를 위해서라도 무거운 사랑을 기꺼이 지지만, 잘 들으십시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수하게 사랑의 짐을 지는 일이라면 자기와 아주 먼 관계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도 기쁨으로 그 짐을 지지만 진리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라면 자기와 피붙이처럼 지내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올곧은 사람입니다.
제가 가끔 학교에 있을 때 제자들이나 동역자들이나 만나서 최고의 애정을 표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내가 내 감정이 그 형제를 향해서 최고로 고조되었을 때 표현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 한 나는 항상 네 편이다. 지금 했습니다. 그게 나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몇 사람이 안 됩니다. 네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 한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네 편이다. 그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지만 네가 하나님 편에 안 서면 나의 이 넘치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 사이에 국물도 없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기가 막히게 성경의 정신을 반영합니다. 애정도 반영하고, 난 언제나 네 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나는 당신의 영원한 꼬봉입니다. 그 뜻이고 내가 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너는 영원히 내 똘마니다. 그 뜻입니다. 주님을 배제하면 항상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그게 아니라 나는 영원히 네 편이다. 그렇게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연합되어있다. 단 네가 하나님 편일 때, 편이 아니라면 그때는 국물도 없다. 우리의 인연은 끝난 것이다. 칼로 긋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올곧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약함과 악함을 사람들이 혼돈합니다. 세미얼 볼턴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악함은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불순종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의도로 말미암아서 죄를 진 것이고, 약함은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히 모자라고 능력에 부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된 것을 약함이라고 말한다고 구별했습니다. 그러니까 올곧음이 있는 사람들도 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왜 그 올곧음의 분령이 작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악한 것은 본인 자신의 어떤 변질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막 뛰어갑니다. 건강합니까. 안 건강합니까? 탕 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돌부리를 차서 공중에 있다가 떨어졌습니다. 언젠가 한번 옛날에 지하실에서 어떤 아가씨가 뛰어오더니 대짜로 짝 엎드려졌는데 핸드백이 열리면서 콤팩트가 열릴 정도로 넘어졌는데 안 되었습니다. 마치 야구장에서 슬라이딩을 하는 것처럼 짝 넘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돌부리에 탁 걸려서 허공에 한번 돌더니 넘어진 것입니다. 여기까지 까져서 피까지 흘렀습니다. 그래서 뇌진탕으로 죽었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탁탁 털더니 에이 누가 돌맹이를 여기다 났어. 그리고 일어나서 다시 걸어갑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뛰어올 때도 건강했고 넘어졌을 때도 건강했고 일어나서 다시 갈 때도 건강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다음 비유입니다. 딱 하고 걸려서 붕 뜨더니 짝 뻗었습니다. 안 일어납니다. 가보니까 다리가 부러지고 뇌진탕 상태입니다. 건강한 것입니까, 안 건강한 것입니까? 안 건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이런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해도 우리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항상 착각하는 게 이렇게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안 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서 저기 돌부리가 나오면 가기 전에 사람이 점점 장도 망가지도 염통도 망가지고 창자도 꼬이고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돌에 걸려서 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범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올곧은 사람도 넘어집니다. 그 대신 그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이제 결단에 대한 참된 결심을 이야기했는데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꾸밈이 없고 즉각적인 회개입니다. 이게 올곧은 사람의 ABCDE 다섯 번째 마지막 특징입니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졌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죄를 짓든지 자기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전혀 악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올곧은 사람이라고 해도 죄를 안 짓습니까? 죄를 짓는데 그 죄를 짓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그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고 나서 마치 죄에게 피해를 본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죄를 지어놓고 자기가 한 이야기가 그렇게 말한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너 왜 그랬나. 하와가 따먹어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 왜 그랬는가. 뱀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 때문에 넘어진 적이 있는데 넘어진 것은 자신의 책임이지만 그러나 올곧음이 있는 사람들도 넘어집니다. 그런데 이미 심령이 부패해서 올곧음이 오염되어버린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넘어져서 금방 털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올곧음을 소유한 사람들도 사소하게 실패하고 범죄하고 넘어질 때도 있고 또 낙심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올곧은 사람의 특징은 꾸밈이 없고 즉각적인 회개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올곧음을 상실하고 그 부패한 사람들은 한번 넘어지면 거기 주저앉아서 안 일어납니다. 그게 3달, 4달, 6개월, 1년이 갑니다. 그리고 아예 엎어진 그 길에서 죄가 주는 국물을 마시면서 거기서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곧은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올곧은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넘어집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 안에 올곧은 경향성이 오염되기 전에 그 실패가 가져다준 고통과 하나님께 드렸을 불명예를 생각하면서 꾸밈이 없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잘못했습니다. 합리화하고 그러려고 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데 자기 스스로 떨어지는 행동을 했습니다. 떨어질 때는 그랬는가보다 하다가 즉시 뉘우치면서 다시 붙들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꾸밈이 없고 즉각적인 회개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이 심령의 올곧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올곧은 사람에게는 항상 이런 자기반성과 회개가 있습니다. 왜 올곧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을 행동을 할 때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이 마음에 올곧음이 부패한 사람들은 자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면서 그러면서 자기의 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인정하지 아니한 부패한 성향 때문에 마음의 올곧음은 점점 더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올곧음이 있는 사람들은 실패했을 때 꾸밈이 없이 그리고 즉각적으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리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 그래서 너는 옳지 않다. 책망을 받는 그 고통보다 참되신 하나님 앞에서 떨어져서 살아가는 그런 소원함을 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더 사모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올곧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의 태도입니다.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열심은 죄로 인해서 꺾이는 것 같을지라도 즉시 그렇게 죄를 지었을 때에 꾸밈이 없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즉각적으로 죄를 뉘우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잠시 중단되는 것 같지만 꺾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열심을 품게 되고 다시 은혜를 받게 되고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자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 어디에 완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그 말씀 자체가 완전무결이나 무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끊임없이 행하고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일관된 경향성입니다.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실패하고 죄를 지은 것을 잊어버리는 적이 없습니다. 그는 꾸밈이 없는 태도로 즉각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그 무엇보다도 더 사모하고 힘씁니다. 몸부림치면서 그 뜻대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게 올곧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 정직히 행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너는 그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그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었더라. 이 모든 성경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넘어지는 것 같으나 그러나 결국은 일생을 다 살고나면 끊임없이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온 사람이고 그는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평안할 때나 고난이 겹칠 때나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얼마나 속히 날아가는지 이루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언제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고 당신께 오라고 부르실지 그 날을 알 수 없고 주께서 부르실 때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인생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그 많은 날들을 열심은 있으나 무지해서 그 모든 올바른 길로 행하지 않고 그릇된 길로 행합니다. 길을 알고 있으나 순수한 열심이 없어서 결국은 그 길에서 수없이 미끄러지고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아서 그 귀한 세월을 흘려보냅니다. 너무나 많은 날들을 침체에 빠져서 성화의 도상에서 뱅글뱅글 돌고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 가나안을 보지도 못하고 엎드려죽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도 보았고 약속도 받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약속대로 산적은 별로 없습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픕니까? 우리에게는 진리의 빛이 있고 주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있고 복음에 대한 경험이 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고 그분이 피 흘려 죽으신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려고 하는지 가는 목표가 너무 분명합니다. 남들은 일평생 그것을 찾지 못해서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죽는데 우리에게는 그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맛보지를 못하셨습니까?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어떤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은혜의 힘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아직도 지식이 모자랍니까? 어떻게 죄를 이기는지 배우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죄가 우리의 거룩한 삶을 파괴하고 어떻게 은혜가 더러운 죄를 파멸시키는지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되는지 우리는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많이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올곧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열심이 식었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신앙의 가락들은 멎었습니다. 작은 잘못에도 자신의 죄로 인해 마음아파하실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어린아이처럼 회개하고 용서를 빌며 새 삶을 다짐하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어디에 갔습니까? 그런 동안은 우리의 심령은 부패하고 우리의 많은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방종하게 살아가는 이유와 구실들이 되었습니다. 입술로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욕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의무를 행하지만 마음은 바쳐진 적이 없고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곧지 않았기 때문에 의무를 행했지만 그 의무에 행한 그 열매들은 항상 신 포도주나 아니면 썩어버린 과일들이었습니다.
올곧은 마음이 없고 올곧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삶도 한결같지가 않았습니다. 충동과 자극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성화의 길을 걸어온 우리의 삶은 비척거리는 갈지자의 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복음을 점점 우습게 아는 강퍅한 사람들로 변해갔습니다. 주님이 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불러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복음을 간절히 증거 하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우리를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올곧음을 다시 회복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수님께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온 영혼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고 모두 다 바쳐서 주를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눈을 들어서 희어지는 밭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서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과 교회의 담 넘어 있는 어두운 세상과 신음소리를 들으면 그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이 위하여 피흘려죽으신 세상입니다. 지금 주님이 오시면 다시 한번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걸어가셨을 것입니다. 누가 가렵니까? 누가 예수의 사랑을 가슴에 안고 불속에라도 들어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존귀와 영광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에게 채우기 위해서 주님이 택하신 백성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어두운 이 세상의 진리의 불을 밝혀 참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외치고 자신의 온 몸을 기름삼아서 태워서 예수 믿는 길이 무엇이고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 그 사랑을 받은 피조물로 이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그들에게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역사 속에서 무책임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는 속히 부패했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많은 은혜의 교리들은 색욕거리와 바꾸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지 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귀한 인생입니까? 예전에는 불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고집대로 영 죽을 이 세상 사랑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얼마 남지 않을 생애를 주님을 위해 다 사용해도 모자라는데 매일 자신의 상처나 끌어안고 주님이 주신 많은 은혜를 부패한 육신과 더불어서 뒤섞어서 마음의 올곧음이 없는 오염된 상태에서 힘겨운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그 쓰레기와 같은 신앙생활을 이제 그만두시지 않겠습니까? 지겹지도 않습니까?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그 어거지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 영혼의 위로를 얻었습니까? 구원의 확신을 얻었습니까?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줍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무치게 만들어주던가요? 쓰레기와 같은 삶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엎드리신 그 지점에서 우리도 엎드리고 주님이 피땀을 흘리고 기도하신 그 동산 지점에서 우리도 피를 쏟으며 기도하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신 그 골고다의 길, 거기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신 질수 없어도 통곡과 눈물로 주님을 따라가며 울던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야지 제자들처럼 예수를 버리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약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이 약합니까?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살리시고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 죄를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의 힘과 능력을 여러분들에게 주셨는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인생의 난관도 그 은혜의 능력으로 헤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여러분 왜 약합니까? 약하지 않습니다. 정말 강합니다. 약하지 않습니다. 이제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정말 올곧음으로 그 순수하고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살고 넘어졌을 때는 깊이 회개하고 즉각적으로 다시 주님 앞에 매달리는 올곧은 신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약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5. 올곧음의 회복과 유지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지난 시간에는 올곧음을 소유한 신자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이틀 동안 드렸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으로서 그러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런 올곧음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리고 또 그것을 회복한 후에는 어떻게 그것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화에 있어서 이 올곧음은 이미 나흘 동안 살펴본바와 같이 성화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우리 안에 형성하시는 이 올곧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부합한 존재가 되고 또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표로 하셨던 그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방편이 되고 이 올곧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가 계속해서 부패한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분량이 각각 다 다릅니다. 그래서 큰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항상 올곧음이 크게 있고 적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적은 올곧음이 있지만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이 올곧음이 양이나 크기가 문제가 되지만 그 올곧음이 순수하게 있을 때는 나름대로 자기 수준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 부패한 것들이 섞여서 이 올곧음이 오염이 되게 되면 그의 삶 전체, 인격 구석구석에서 이 올곧음의 상태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신 올곧음의 은혜는 계속해서 의지적인 결단 속에서 그 올곧음을 형성하고 올곧음 속에서 살아가려고 결단할 때 그때에 꾸밈이 없는 결단 속에서 이 올곧음이 유지된다는 말씀을 이틀 동안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이런 올곧음의 회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 될 것인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마음의 쇄신을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이런 성경의 증거는 로마서 12장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너희가 지금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변화를 받아.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그 변화가 마음과 인격과 삶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 들어가는 문이 마음이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영적인 변화를 받아서 그 변화가 영혼을 변화시키고 그 영혼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에, 마음의 변화가 삶의 변화에 미치게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 다음에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렇게 살아라. 그게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이다.
여기서 본받다 하는 것은 희랍어로 수수께 나티조 하는 단어인데 국화빵을 찍어내듯이 일정한 틀에 계속해서 찍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이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똑같은 사람으로 찍어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틀에 찍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틀에 찍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이 예수님의 틀에 놓고 우리를 찍어서 예수 닮은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창조했지만 타락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틀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구속하셔서 그 예수님의 틀에 찍히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고나서 우리끼리 모여서 산다고 해도 해결이 안 되지만, 왜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들이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서 산꼭대기 같은 곳에 우리끼리 따로 떨어져 산다면 조금 세상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해결책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밖에 있지만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곤충학자가 그랬다고 합니다. 가만히 유리항아리 속에다가 개미를 넣고 들여다보니까 80%는 열심히 일하는데 20%는 놀더랍니다.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20% 노는 개미를 젓가락으로 다 꺼냈다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처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보니까 그 80% 가운데 한 20%가 다시 노는 개미라고 합니다.
똑같이 우리들 속에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모여서 산다고 하도라도 우리가 항상 신령한가요? 항상 하나님의 백성답게 삽니까? 왜 대답을 안 합니까? 항상 하나님의 백성답게 삽니까? 아멘은 무슨 아멘입니까? 돌았나. 왜 그렇습니까? 아니 문맥을 알고 얘기를 해야지. 그러니까 항상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그게 세상입니다.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다면 산꼭대기로 올라간 수도원들이 다 거룩해졌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부패합니다. 다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이 세상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으면 이 세상이 강력한 영향으로 우리를 찍어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찍어냅니다. 세상이 우리를 찍어내서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찍어내려고 하는데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젊은이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다르고, 신앙이 없는 젊은 처녀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다 똑같이 비슷비슷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일들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틀에 찍혀서 예수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국화빵은 한번 밀가루 물을 붓고 뚜껑을 덮고 익으면 그대로 되지만 이게 되지도 않는 인간이 예수의 틀에 찍혀서 나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생긴 대로가 처음부터 예수를 닮아서 태어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 한분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닮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닮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 자기는 예수님과는 너무 거리가 먼 자기입니다. 그래서 부셔버리고 뽀개 버리고 깎아 내버리고 그래서 고쳐야 합니다.
사실 우리 딸이 미운 애가 아닌데 딸을 낳아서 한 백일 때쯤에 성경공부를 하는 곳에 내가 데리고 갔습니다. 그랬는데 우리 제자가 지금은 목사가 되었는데 남의 딸을 번쩍 안더니 아이고 착하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얼굴을 이렇게 보더니 야, 너 견적이 많이 나오겠다. 괘씸한 녀석 같으니! 아직도 정비공장을 안 보내도 다 예쁘다고 그러는데 그게 그렇게 딱 들더니 견적이 많이 나오겠다. 그러니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난 그 모습이 진짜 견적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한 18층에서 떨어진 옥떨매처럼 태어난 게 옥상에서 떨어진 매주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게 우리입니다. 얼굴을 만지지마. 얼굴을 얘기한 게 아니라 여기를 얘기한 것입니다. 여기가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견적이 많이 나오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차로 견적을 내서 수리비를 모두 지불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해가 빠르십니다. 예수님이 일차 견적을 내서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덜 고쳐진 부분이 상당부분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이렇게 견적을 나왔는데 그 견적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이렇게 고쳐야 합니다. 합계, 금액, 이렇게 나왔는데 일생동안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며 자기를 죽이고 살 것, 이상 끝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일생동안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살면 그 모습을 상당히 가까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모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원천은 결국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의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인간이 살게 되어있고 그 마음을 의식적으로 이 마음을 감추어야지 되겠다고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그 마음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우리 딸이 중학교 1학년인데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좋아합니다.
(예화: 일주일이 넘게 딸과 부모와 헤어져 있다가 만났는데도 엄마보다 아빠에게 안기 며 반기기에 나중에 엄마 서운하시기에 왜 그랬는가 하고 물었더니 저절로 그랬 다며 그게 사람의 마음에 있는 틀대로 사람이 행동하고 움직인다는 이야기)
여러분들이 그래서 진짜 진실한 신자의 삶을 살고 올곧은 사람, 올곧은 행동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굽은 것들을 먼저 펴서 그 올곧음을 회복해야지만 올곧은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쇄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회개의 유익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마음의 틀을 바꾸어줍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지난 죄를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교회에 가니까 목사님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회개하라고 하는데 집에 와서 가만히 보니까 매일 주일날 교회에 가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니까 그럼 하지 뭐, 그까짓 것 합니다. 더러워서. 내가 회개하겠소, 이래놓고 한 장 씁니다. 하나님께 내가 이런, 이런 죄를 지었으니 본인은 이와 같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차후에는 여사한 사례가 없도록 각별히 주의할 테니 금번만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 아무 아무개,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그렇게 외부적인 행동의 어떤 잘못된 것들을 깨닫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머리 숙여서 이해하면서 잘못했다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또 이런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했는데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뭔가 불안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때는 그게 좋아서 죄를 졌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뭔가 벌하실 것 같은 그렇게 벌을 주시게 되면 그때에 일어나게 될 일이 뭘까? 사랑하는 아내가 먼저 죽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내가 죽는 것일까? 이러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나 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부도가 나서 회사가 뒤집어지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이 어디 다치지는 않을까? 이런 식으로 공포 속에서 억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잘못했다고 그럴 때 그 두려움이 진실하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해도 하나님 앞에 잘못을 뉘우치는 원인이 죄에 대한 형벌로 말미암은 두려움일 경우에는 그것이 진실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면 진실한 회개는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물론 양심이 율법을 통해서 내가 행하는 일이 죄라고 하는 것을 인식해야지 되고, 두 번째는 그렇게 죄를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죄를 지은 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벌주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끼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내가 이런, 이런 죄를 지은 것은 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다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한 얼마나 야비한 배신이었는가. 그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뭘 잘못하신 것이 있으신가.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위해서 생명을 주시고 이제껏 까지 입히고 먹이시고 사랑해주셔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주셨는데 내가 왜 그분이 그렇게 가슴아파하는 죄를 지음으로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에 다시 한번 내가 못 박았을까? 생각하니까 그렇게 예수님께 대우한 자기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해드린 죄를 깊이 회개하며 그래서 예수님이 가슴아파하셨던 그것을 자신도 어느 정도 느끼며 용서해달라고 비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행하지 아니하리라고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입니다. 이런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물론 죄가 아주 깊으면 그렇게 회개를 했는데도 실제로 하나님이 용서해주신 용서의 실제적인 경험은 나중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째든 그렇게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빌 때 우리에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 하면 마음이 쇄신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을 잘 연구하고 그 빛 아래서 영적생활을 탐구하다가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탄하게 됩니다. 어떻게 감탄하게 되는가 하면 어차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다 대가를 치루셨는데 그러면 잘못했다고 반성문 한 장 쓰면 용서해주시면 되는데, 학교에서 용서해주시듯이,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의 죄를 율법을 통해 인식하고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해드린 것 때문에 두려워하고, 형벌 때문에 두려워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싶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참견 없이 살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를 통해서 그것을 회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지었는데 자기 힘으로 그 죄를 회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그 의지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의지의 마음을 깊이 회복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고 나서 가만히 보니까 바로 자기의 이런 죄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나에게 항상 사랑과 자비밖에 베푸신 것이 없는 예수님을 자기가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해드리고 그 심장에 못을 박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예전에는 죄가 가져다줄 형벌이 무서웠는데 이번에는 죄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같이 이 비루한 인간 때문에 그렇게 배신을 당하시고 아파하실 것을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고 그리고 가슴에 그렇게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회개하고 막 아파합니다. 회개가 아주 깊어지며 실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여러 번 봤습니다. 실신까지 합니다. 그렇게 아파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아픔의 과정을 겪게 하시는가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과정을 통해서 뭘 깨닫게 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아픔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많이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참된 회개의 영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참되게 가슴아파하며 자기의 죄를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인해서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그 고난의 아픔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하신 이 고난이 얼마나 큰지를 깊이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 어떤 효과가 생겨나는가 하면 아이들이 불에 한번 덴 아이들이 불 그림만 봐도 도망가듯이 이 죄를 싫어하는 경향성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그 죄를 위해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깊이 통증을 느끼는 가운데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 안에서 올곧음을 잃어버리고 범죄하며 하나님 앞에 가식된 삶을 살게 했던 죄가 바로 그런 경험을 통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배속에 여러분들의 커다란 암이나 아니면 염증으로 몰고 가는 균이나 이런 암세포가 있다고 칩시다. 약물을 투입해서 그것을 죽이든지 아니면 방사선 치료를 해서 빛을 쬐면서 그 암세포들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암으로부터 온 염증을 구출을 받습니다. 그런데 속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겉은 멀쩡합니다. 여기다가 계속 소독약을 바릅니다. 그게 낫겠습니까? 소독약을 바르고 연고를 바르고 별 난리를 다합니다. 그게 낫겠습니까?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이렇게 진실한 회개, 그것을 통해서 마음이 아프도록 자기가 쇄신되는 변화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속에 깊은 거짓과 가식, 그리고 죄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에다가 빨간약을 바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형식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사경회에 나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속에 균이 있으면 약을 투입해서 죽여 버려야지 빨간약을 바른다고 낫겠습니까? 우리의 몸에 무서운 질병을 일으키는 균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그것을 소독해서 죽여 버려야지만 해결이 되는 것이지 빨간 보자기에 싸면 안전합니까? 파란보자기에 살까요? 유리그릇에다 넣을까요? 아니면 플라스틱 그릇에 넣을까요? 놋그릇에 넣을까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죄는 이런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죄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 한 죄는 신경 안 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생활을 하는데 죄가 불편한 게 뭐가 있습니까? 교회에 가도 배속에 따라가고 집에 가도 따라가고 회사에 가도 따라가고 그래서 교회에 가서 성질 버리고 집에 가서 골내고 집에 가서 배짱부리고 자기 생긴 대로 어디에 가서 사는데 죄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향한 공격입니까, 아닙니까? 나는 이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이 죄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마음을 들여서 회개하고 예수님이 바로 지금 이런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아파하게 될 때에 마음의 쇄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틀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회개가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그러니까 똑같은 죄에 대해서 반복될 수도 있겠지만 회개할수록 자신의 죄가 끝없이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를 안 하고 살면 살수록 내가 뭔 죄가 있나.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심지어는 나만 만 같으라고 그래. 저만 같으면 온 세상이 지옥이 되지.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이 올곧음을 잃어버린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원래는 회심과 함께 우리에게 올곧음을 주셨는데 결국은 죄와 불순종 때문에 우리의 올곧음이 오염이 되어버리고 올곧음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지조도 없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갈망도 없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의도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도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열심도 없고 죄를 지었을 때 꾸밈이 없이 즉각적으로 회개하려고 하는 자세도 결핍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벌써 이미 마음에 틀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회개한 가운데 죄를 짓기에 적합했던 마음의 틀이 변하여 거룩한 삶을 살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선한 일을 행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는 익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갑니다.
우리 딸이 그렇게 달려올 때 나선형으로 꺾어져서 아빠에게 가야지 되겠다. 생각을 하면서 4층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오랫동안 마음에 엄마 아빠 둘이 있는데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면 말로는 그렇게 안 하지만 심정적으로 아빠가 필요하다. 더 좋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주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 둘이 누워있으면 들어와서 발길로 밀면서 내려가서 자라고 한 3살 때부터 그랬는데 그때부터 그 애는 종자가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뒷방으로 데리고 가서 너 솔직히 고백해봐라. 엄마가 더 좋니, 아빠가 더 좋니? 그러면 이 아이가 하는 말이 그런데 내가 고백한 것을 엄마가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마음속에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표출이 된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저러던 녀석이 이제 대학에 들어가고 시집갈 때쯤 되어서는 통계적으로 그러는데 우리 딸은 일편단심일 것이라고 믿지만 엄마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경향성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틀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올곧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쇄신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두 번째는 이렇게 회개를 해도 끊임없이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를 좋아하고 올곧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틀로 끊임없이 자기가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가려고 하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서 싸웁니다. 그러면 거기에 저항해야지 저항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살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우리가 있었던 옛 모습으로부터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해방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물론 우리들이 거듭나고 변화가 되면 너무 놀랍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과거는 가능성을 가지고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고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올곧은 이런 것들을 다 잃어버려서 꾸밈없이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진지한 의도들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옛 성질머리 그거 안 죽습니다. 다 살아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저 사람이 그렇게 되어오기 전에 방황을 많이 했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마치 무슨 피해자인 것처럼 목회자를 잘못 만나고 교회를 잘못 만나고 남편. 시댁 등등 자기는 빼놓고 다 틀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러는데 아, 이 사람이 저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가시밭길을 걸어왔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영국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시던 박식하시던 어느 목사님이 편지를 남기고 사라 졌는데 내용이 자기 인생에 실수가 있는데 아내를 만난 것과 목사가 된 것이라고 하며 애인과 도망을 갔는데 그 애인은 게이였다. 대학에 다닐 때 동성연애자였는 데 주님을 만나고 돌이켜 신학교를 가서 주의 길을 갔는데 은혜가 떨어지니까 오 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야기)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요즘 시중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치유가 어떻고, 저 치유를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치유는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치유는 무슨 놈의 치유입니까! 절대적인 치유는 없습니다. 부모님 때문에 상처를 받았는데 주님께 치유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떨어져봐. 가엽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는가요. 하고 또 나오지. 그게 결국 정답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그렇게 불안전한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놀랍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속에서 우리들이 계속 은혜 가운데 살 때는 놀라운 변화가 유지됩니다. 그래서 옛날의 틀로 마음이 돌아가려고 계속 시도를 할 때 거기에 저항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간다. 다시 내가 옛날의 그 성품, 내가 행하던 그 습관으로 돌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마음아파하실까? 그러면 여러분은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애굽 타령을 했지만 단 한번도 애굽으로 돌아간 놈이 없습니다. 못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리워해봐야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깊이 회개하고 마음이 쇄신된 다음에는 그 쇄신된 상태에서 이 속에서 새 틀이 아니라 옛 틀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마음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대항해야지 됩니다. 그 대항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이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올곧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쇄신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한 참회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은혜를 달라고 많이 기도하지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뭘 달라고? 하나님, 은혜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게 은혜를 구하는가. 은혜가 없으니까 마음도 메마르고 너무 곤고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주십시오. 네. 은혜를 주면 어떻게 할 것인데? 하여튼 은혜를 주어야지만 제가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안 된다. 왜요? 은혜를 주어봤자 너는 도로 또 썩힌다. 왜 은혜를 주시지만 그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그 은혜를 지키면서 살아야할 올곧음의 의무에 대해서 헌신을 안 합니다.
여러분, 제가 진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교회를 처음 개척했는데 하나님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을 너에게 많이 보내주겠다고 그래서 나는 다른 것은 안 떠오르고 ‘많이’ 라고 그래서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왔는데 야. 정말 강적, 숙적, 천적, 하여튼 구르다, 구르다 하여튼 진짜 도저히 될 가능성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오는데 대단합니다. 하여튼 얼마나 회개를 하는지 설교를 하다가 울음소리 때문에 더 이상 설교를 진척하지 못하는 정도가 있을 정도로 그렇게 회개를 하고 심지어는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강하지만 저도 또 만만하지 않습니다. 천적이 숙적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안 오려면 말라. 그리고 설교를 주일날 짧으면 90분, 길면 140분씩 설교를 했습니다. 11시에 예배를 시작해서 2시 20분에 끝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뭐 죽기 살기하고 한번 해봅니다. 끝나고 나오면 그냥 회개하고 그렇게 하기에 나는 일년이 지나면 3-400명 그렇게 모일 줄 알았습니다. 웬 걸 깊이 회개하고 그 다음에 눈물을 닦고 나서 지극히 완악해지고 그 다음에 다시 또 기도해서 더 강력한 말씀을 전하면 그때서야 또 회개하는데 원래 이게 달았던 쇠가 식으면 더 굳어집니다. 무섭습니다. 강적을 만나봐야. 그때는 터져라 그렇게 했습니다. 야, 정말 대단합니다. 인간의 그 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렇게 완강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그러다가, 처음에는 누가 울고 회개하더라, 그러면 막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스럽고 그랬는데 그 다음서부터는 누가 목사님, 누가 엄청나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눈물, 콧물, 휴지, 두통 말도 못합니다. 그러면 두고 보라고 그래. 기대해봐. 언제 그 성질 다시 나오나봐. 조금 있으면 나온다. 두고 봐라. 아니나 달라. 조금 있으면 은혜가 떨어지면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팍 다시 일어납니다.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성화가 많이 되었습니다. 개척 초기에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나는 진짜 쓸모없는 목회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립니까?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진짜 여러분들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입니까? 어째든 옛 틀로 계속 돌아가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거기서 싸워야 합니다. 안 싸우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회개를 많이 한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회개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왜? 회개의 열매만이 회개가 참된 것이라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의 쇄신 잊지 마십시오.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의지의 행사에 힘을 쓴다. 입니다. 이 의지는 무엇을 향한 의지일까요? 그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되겠다. 나는 일평생 그것이 소원이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는데 이제 내 일생 다 살고 난 다음에 주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잘했다. 이렇게 내가 행한 모든 일생동안 삶의 발자취를 보면서 예수님이 궁극적인 판단자로서 너는 정말 잘했다. 이렇게 인정받고 싶다고 하는 그 일을 위해서 의지를 행사하는 것, 부단히 그 의지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소위 개혁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을 은혜의 교리라고 하는 것을 잘못 배워서 그래서 마치 그저 우리는 가만히 이렇게 누워있으면 주님이 오셔서 구원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두 팔로 껴안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이해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은 성령님 혼자 거듭나게 하시지만 자기가 구원받았을까? 구원을 못 받았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하지도 않은 사람이 더군다나 다 잘한 성년이 그렇게 분투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고백대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추측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괴로워해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이구나. 내가 어떻게 해야지 되나. 그리고 나의 일생에 있어서는 정말 주님밖에 없구나. 이런 진지한 죄에 대한 고민과 그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가 없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말씀의 빛을 받으며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이며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복음적인 회개를 하나님 앞에 해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칠 때 그때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화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이 성화는 성령님이 성화를 시키시지만 인간이 성화되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화시키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성화를 위한 자발적인 참여와 기꺼운 노력이 있을 때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고 하는 이런 변화의 은혜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의지의 행사를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앞세울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의지는 없고 심지어는 그 의지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싶다. 이게 아니라 나는 나대로 되고 싶은 데가 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나대로 살고 싶은 내 인생의 계획이 있다. 그리고 고무신을 신고 거꾸로 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실 것이다. 나에게 하나님이 그래도 마음을 가지시면 나를 돌이킬 수 있을 것이야. 하나님이 마음을 가지시면 그래도 나에게 올곧음을 다시 새롭게 해주실 수 있을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먼저 우리들이 이런 의지의 행사에 힘을 써야 하는데 그 힘을 쓰는 것을 크게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가 의지의 행사에 힘을 쓸 때는 먼저 우리들이 올곧음을 잃어버렸을 경우에, 올곧음을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그 올곧음을 다시 찾게 해달라고 하는 일에 있어서 의지를 행사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아니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절대로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 수없이 결단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야. 이제 하나님만 사랑할 것이야. 그렇게 계속 그러다가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왜 헛된 결심만 계속 난발을 하니까. 그때는 진지하게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하고 혈서까지 써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가 그 결심을 이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성령님 홀로 하시는 것이라면 아니 하나님이 뭐 때문에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 편지를 쓰십니까, 성령님께 직접 쓰시면 되지. 성령님께 편지를 쓰셔서 아무 아무개 인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성령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면 되시지,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렇게 쓰시는 이유는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마음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하나님 나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정말 이 모습 이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주십시오. 제 마음을 새롭게 하옵소서. 제 영혼을 제 심령을, 제 온 인격을, 제 온 삶을 하나님 변화시켜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마음을 주님이 어루만지셔서 바꾸어놓으십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 다음에 만약에 마음의 올곧음을 지금 지니고 있고 어느 정도 약하기는 하지만 순수한 올곧음이 자신 안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의지를 행사해야 할까요? 끊임없이 순간순간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뭐가 덜 따라와도? 이게 덜 따라와도, 이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덜 따라와도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애들이 자라다가 보면 다 공부하기 싫어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몇 살 안 되어서 그냥 공부밖에 몰라서 열심히 공부하는 애들도 물론 있습니다. 엊그제도 신문을 보니까 어떤 애가 미국도 별로 나갔다오지 않은 애가 한국에서 시험을 봐서 미국에 10개 대학에 다 합격했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부러워하지 말라. 그것도 정신병의 일종이다. 그런데 그런 애들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보면 공부하기 싫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기 자식한테 이놈의 자식 공부도 안 하고, 막 그러고 도대체 내가 너에게 안 해준 것이 뭐가 있나. 돈을 벌어오라고 그랬는가. 쌀을 팔아오라고 그랬니? 먹여주고 입혀주고 신겨주고 책사주고 공부나 하라는데 그러는데 자기도 안 했으면서, 내가 다 압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하는 이야기 반복해서 레코드판을 트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들에게 그렇게 왜 못 하니 하면서 너에게 다른 것을 하라고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라고 그러는데 하는 그런 말을 안 합니다. 안 하고 싶은 심정을 충분히 아니까.
그러면 이제 애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공부를 그렇게 안 하려고 할 때 그래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는 것이다. 다 각자 공부를 해야지만 먹고 사니. 누구도 보면 공부도 안 해도 훌륭하게 되고 누구도 되고 누구도 되는데 하며 꼽으면서 그래. 그것도 다 네 팔자지, 그리고 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시킨다고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안 시키고 내버려둡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깡통이 됩니다. 아니 꼭 뭘 벌어먹고 산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웬만큼 공부를 해야지 하다못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에 가서 설교라도 들으면서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닙니까? 아니 뭐라도 알아야지 세상사는 이치를 알아야지 살아갈 것이 아닙니까? 하다못해 기계를 하나 만지려고 그래도 매뉴얼을 읽어야지만 밥통이라도 만질 줄 아는데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인생사는 도리도 모르고 내나봐야 완전히 망가진 자동차 굴러다니는 것이지 물론 밥이야 먹고 살겠지요. 그러나 밥만 먹고 어떻게 삽니까? 물도 먹어야지, 살아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든 자기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살아야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공부를 하기 싫어도 야단을 쳐야 합니다.
우리 아는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하도 공부하라고 닦달 하니까 엄마, 왜?, 엄마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 좀 했수, 그러더랍니다. 못 했다고 그러니까 그런데 뭘 그러우, 이만큼 하면 되지, 요즘 애들이 그렇습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를 못 했어도 자식이 그런다고 기가 죽으면 바보 엄마 아빠입니다. 더 패야 합니다. 할말이 없으면 우선 패고 봐야 합니다. 너는 입으로 말하지만 나는 몽둥이로 말한다 하고 패야 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멋진 말을 남겨야 합니다. 논리로서 안 당하니까, 아빠는 공부 좀 했어요? 못 했지. 그런데 뭘 그러십니까? 그때 막 줘 패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문장을 남깁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팼다면 너한테 이런 억울한 소리는 안 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명문장입니까? 고로 네가 이렇게 얻어맞으면 네 자식이 아빠 공부 좀 했어. 그렇게 물어볼 때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애들은 다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잡아 패서라도 공부를 시키면 그 고비가 딱 넘어갑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게 됩니다.
똑같습니다. 내가 아직 마음이 덜 따라가도 생각이 이게 옳다. 마음은 하기 싫은 것을 하자. 유혹을 할 때 감정은 무시하고 머리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고 다음에 가면서 그래도 감정은 따돌리고 멀리하고 둘만 가면 안 됩니다. 그것도 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면서 빨리 와. 둘이 손잡고 빨리 따라와. 맞고 따라올래. 천천히 따라올래. 빨리 따라와. 그리고 가면 나옵니다. 그래서 참 신기한 게 노는 애들과 따라다니면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애들과 에워 쌓여서 공부를 하면 그렇게 또 공부가 하고 싶어집니다. 어떤 마음은 있고 어떤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둘 다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을 자극하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올곧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순간순간 그 올곧음을 지키기 위해서 개개의 의무를 행할 때 의지를 가지고 행사를 할 때 그 의지적인 행사가 자기 안에 있는 올곧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다음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 목적을 늘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이 왜 나를 구원해주셨고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희생당하셨을 때 주님이 내게 거신 기대가 무엇이었을까?
고등학교 다닐 때 지방에서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실 지방에서 특별히 공부를 잘해봐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에 올라오면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보니까 아이들이 쭉 이야기를 하는데 시골서 올라온 애들이 학교에서 1-2등을 하지 않은 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수재소리를 듣던 애들이 학교에 와 있습니다. 그중에 집이 가난하고 시골에서 서울에다가 친척집에 보내서 어려운 살림에 농사를 지어서 뒷바라지를 하는 그 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집 어려운 것이나 그 집이 어려운 것이 우리는 도시에서 어렵고 그 애는 시골에서 어렵고 그저 박자가 좀 틀려서 그렇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난 한번도 그렇게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우리 아버님이 애쓰시고 할머니가 애쓰시고 정말 내가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냥 내 인생이니까 내가 열심히 해야지 되겠지. 그냥 그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애는 그 어린나이에도 항상 마음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엄마, 우리 아빠 그 많은 나이에 막내인 나를 낳아서 아직까지도 허리가 휘도록 그렇게 농사를 지어서 일하고 그 쌀을 팔아서 등록금을 올려 보내는데 내가 이렇게 밖에 공부를 못 해서 어떻게 하나. 무거운 부담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지만 잘못 받으면 즉시 찢어버립니다. 이것이 혹시 부모님들의 눈에 띄면 어떻게 하나. 실망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럼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겨우 이렇게 살려고 보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하루에 한두 번만 생각해도 아무 생각이 없이 그렇게 희희낙락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상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외에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거룩해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자기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그 희생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그때 그 사람이 거룩해져간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 가족반을 오면 계속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화두로 떠오릅니다. 그게 바로 여기에 이렇게 맥이 이어집니다. 늘 부족해서 살아갑니다. 마지막 숨질 때까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잊혀지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 얻은 한 죄인일 뿐이다. 그게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게 우리를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동기를 제공해줍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전체적으로만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리고 그 구속의 목적을 마음에 늘 새길 뿐 아니라 그 새긴 바 이 사실을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이 사실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살다가 보면 매번, 매번 이 일을 해야지 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 판단의 기준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 마는가. 이것만 생각하면서 결단을 하는 것은 예수 믿기 전에 했던 방식입니다. 그게 아니라 이제 기준이 내가 이일을 하는 게 유익이 되는가, 안 되는가. 그것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일을 선택하는 그것이 과연 나를 구원하시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그 예수님의 그 구원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일까? 이것을 개별적인 의무의 실천에 있어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맡겨진 어떤 신앙적인 책임이 있어서 그것을 완수한다고 생각될 때도 그것을 막연하게 하는 것, 혹은 내가 교회의 집사인데. 혹은 내가 이 일을 잘 안 해놓으면 목사님이 혼낼 텐데 아니면 내가 그래도 이만큼 예수를 믿고 살았는데 이것도 못하면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나는 원래 성질이 뭘 맡았으면 끝을 보는 성질이 있어, 이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은 적은 가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그런 어떤 의무를 완수해내려고 할 때 항상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물질을 드릴 때 물질은 다 내게 아니다. 왜 이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구속의 은혜에 참여하게 될 때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은 사실은 그분의 은혜로 내게 주어진 것들이다. 예전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의 주인이 나였고, 내 재능의 주인이 나였고, 내 인생의 주인도 나였고, 내 미래의 주인도 나였기 때문에 내가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내 행복이 기준이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이제는 내가 기준이 아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예수님께로부터 다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내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의무를 행할 때 그것이 당연히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요구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지의 행사가 매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개가 동떨어지면 안 됩니다.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왜 삽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호박씨를 까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아주 더러운 가식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 총체적인 고백과 개별적인 삶이 합치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올곧음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고 부패하지 않고,
마지막 세 번째, 위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위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위선을 이해하는 것과는 성경의 관점이 다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오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선을 구별하자면 좁은 의미의 위선과 그 다음에 넓은 의미의 위선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좁은 의미의 위선입니다. 위선의 구분에 있어서, 좁은 의미의 위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선의 구분의 좁은 의미의 위선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함으로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받고 싶어 할 때, 그게 좁은 의미에서의 위선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별로 기도안하다가도 사람들이 지나가면 거룩하게 기도하는 척 한 것, 또 금식을 하면 소문이 안 나게 조용히 해야지, 금식을 하면서 입술은 하얗고 머리는 감지 않아서 비듬이 흐르고 얼굴은 슬픈 기색이 흐르고 이런 모습으로 사람 앞에 나타나는 그래서 자신이 금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할 때 위선입니다. 또 사람이 없을 때는 돈을 바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소리가 잘나게 높이 들어서 동전을 뚝 떨어트리는 것, 철렁 하고 소리가 나게.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위선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좀 악질적인 위선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에도 사실은 사람들에게 많이 빠지게 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그런 것,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남이 보는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자기가 영광을 받기 위함이고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기를 싫어하는 행동 때문에 이런 실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위선입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이 신랄하게 이런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 탄핵을 받았던 죄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래도 조금만 신앙이 들어가고 그래도 좀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좁은 의미의 위선에 빠질 때도 있지만 그 다음에 언급하려고 하는 넓은 의미의 위선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럼 넓은 의미의 위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좁은 의미의 위선이 의도를 가지고 선을 행해서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좁은 의미의 위선이라면 넓은 의미의 위선은 마음에 없는 모든 선한 행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채 행하는 모든 선한 행동이 넓은 의미의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천성적으로 사람들에게 자기를 들어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자리 같은 것을 절대로 안 하려고 그러고 사람들에게 생색을 안 내려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첫 번째 이 좁은 의미의 위선의 죄에 빠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좀 적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위선에 죄에 빠질 가능성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의 위선은 마음이 실리지 않은 모든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 그것이 넓은 의미의 위선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예배를 드림으로서 사람들이 내가 예배에 왔다는 사실을 다 인정해서 아무개 집사, 대단하네. 오늘 같은 화창한 날에 예배를 드리러 빠지지 않고 잘나오고, 그런 칭찬을 나는 좀 받고 싶어, 그런 의도가 없어도 마음을 하나님을 만나야지 되겠다는 진실한 마음의 의도가 결핍된 채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있는 것이 위선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들이 위선이 해석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이게 위선이라면 그만두지요. 뭐, 그럼 되겠네요. 아니 그래서 내가 절대로 안 하는 게 내가 옛날에 전도사로 있을 때 예배가 끝나고 가면 담임목사님이 저기 서서 나가는 교인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루는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뭐가 감사할까? 그래서 나중에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니 와주셔서 감사하다니 그것은 사실 자기의 당연한 의무인데. 그래서 내가 그 다음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절대로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나가면서 목사님의 손을 붙잡으면서 계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야지, 감사할 게 도대체 뭐가 있는지, 그래도 아무 말 안 하면 화나는 줄 알 테니까 반갑습니다. 그 정도 이야기하지. 반가운 것은 사실입니다. 안 나오던 사람이 나왔으니까.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럼 목사님, 신앙을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아니, 솔직히 이야기를 해서 이렇게 나와서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 해도 제가 얼마나 많이 투자를 하고 힘을 많이 기울이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진짜 보통 노력가지고 안 되는 것인데 거기에다가 마음이 안 실렸으면 교회에 나와서 버티고 앉아있는 것도 위선이라고 그러면 제가 섭섭합니다. 그러면 관두십시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관두십시오. 누가 겁이 납니까? 관두십시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배교적 행동입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그런 것입니다.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해라, 그런데 공부를 안 합니다. 이 자식, 그리고 딱 때렸습니다. 아빠 엄마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 안 그러겠습니다. 잘할게요. 그래도 부모로서 마음이 자꾸 아픕니다. 야, 정신 차려, 집중 좀 해. 그리고 딱 때렸더니 죄송해요. 제가 다른 생각을 했는데 이제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런데 계속 반복이 됩니다. 그럼 부모가 이놈이 진짜 맞을 때 잘못했다는 말이 진심인가 거짓말인가. 이게 혼돈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만 해도 그 놈은 자식으로서 나쁜 놈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때리니까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왜 때립니까?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뭐 공부를 못 해서 밥 먹지 못하면 엄마에게 밥 달라고 하겠어요.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계속 때리면 내가 경찰에 이를 거야.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것은 그 집안에서 잘릴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의결할 의사가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번 더 나가서 뭐라고 이놈의 자식 하고 딱 때리면 그 아이가 무릎을 꿇고 아까 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이럴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확 박차고나갑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후레자식입니다.
애들이 너무 놀기를 좋아해서 몇 번을 맞았는데도 까마귀처럼 자꾸 잊어버리면서 자기 의무를 이행하지 안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워낙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꾸지람을 들었을 때는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 게 그게 제대로 사람정신이 들어있는 인간이지 때린다고 그래요, 우리 갈라섭시다. 이게 무슨 자식과 부모가 부부입니까? 갈라섭시다. 그러고 계속 때리면 일러버릴 것이라고. 경찰이 네 애비냐, 가라. 그리고 그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갈라설 이미 관계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전에 아무리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해보라고 하십시오. 대게 겁나네, 엄청 겁나네.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하나님이 그런다고 눈이나 껌뻑 하실 줄 아십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교회에 안 나올 것입니다. 뭐 나오는 것도 대단한데 마음을 왜 안 바치는가 하고 계속 그러고 그런 것이 위선이라고 하고 힘들어서 못 해먹겠습니다. 관두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진짜 부실한 목사 하나 둬서 네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는데 진짜 모든 잘못은 내게 있다. 내가 목사를 혼내줄 테니까 너는 돌아와라. 하나님이 그러실 것이라면 꿈 깨세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아니 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마음은 하나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예배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달콤하고 행복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지겹습니까? 그래서 은혜 받은 날은 일찍 끝난 날입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뿐 12시에 끝나는 것, 그리고 시계나 만지작거리고 그게 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그것은 나오나 안 나오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 그 다음주에 안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엄청 무섭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때리면서 너는 이놈의 자식, 그따위로 살면 내 아들도 아니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매달려서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 용서를 빌면서 바지자락을 붙들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지 말이지, 흥 이제야 본색이 나오네, 다리 밑에서 주어왔지. 그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가는 놈입니다. 그런 나쁜 녀석이 어디에 있어, 고아원에 전화해서 받아주지 말라고 그래야지.
당연합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참 하나님의 자식과 사생자가 그런데서 들어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얼마나 지겹습니까? 수학시간에 영어책을 꺼내놓고 뒤에서 수학강의를 들어도 지겨운데 마음은 다른데 가있는데 지금 코드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데 마음 없이 예배당에 나왔는데 그게 왜 그렇습니까. 내가 진짜 여러분들에게 진짜 말하고 싶습니다. 왜 그런지 진짜 묻고 싶습니다. 왜 예배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까? 간절히 일주일만 기도하고 와봐. 여러분들이 인생이 바뀝니다. 아니 왜 그렇게 삽니까? 그런 식으로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다 위선입니다. 그러면 왜 거기에 나와 있을까요? 자기를 위해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앉아 있는 것이 싫은데, 밖에서 나돌아 다니는 것보다 덜 힘든가보지, 그러니까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들을 간직한 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게 넓은 의미의 위선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위선에 대한 혐오감이 없이는 진실한 신앙생활도 없습니다. 위선에 대한 혐오감, 위선을 미워하는 신앙생활이 없이는 진실한 신앙생활이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실하다고 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 한분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는 느낌이 들면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빛 앞에서 자신이 정말 옳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제 모습이 이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도 제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 저도 어떻게 저를 바꿀 수 없는데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저를 바꾸어놓으시지요. 그래서 제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위선과 거짓에 대해서 구역질이 납니다. 그게 뭐합니까? 하나를 해도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람이 주님을 만날 가능성이 많지, 수천의 의무를 다해도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다못해 교회에서 마당을 쓸어도 마음을 담고 하나님 앞에 주님을 의식하면서 쓰는 사람이 좋은 말로 강대에서 우렁차게 설교하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거룩한 일입니다. 다 더러운 것입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모든 종교생활, 마음이 실리지 않은 예배생활, 마음에 없는 의무의 행함,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더러운 것입니다. 위선입니다. 진실해지려고 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안 믿어지면 믿어진다고 그렇게 폼 잡지 말고 정직하게 얘기하십시오. 하나님 진짜 안 믿어집니다. 그리고 마음은 정욕으로 달려가는데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맹세를 하지 말고 하나님 내가 이렇게 기도는 하고 있지만 마음은 정욕으로 가득차있고 죄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이 두 사이에 끼어서 내가 너무 곤고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떠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더러운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면서 진실 된 신앙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렇게 진실 되게 살아가려고 깊이 몸부림을 치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진실해지려는 아픔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승화시키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정말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빚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사람으로 빚어져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올곧은 사람들이 됩시다. 정직한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올곧게 살아가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성화와 올곧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