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자기자랑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자기자랑의 파괴력(고전5:6)2004.10.3 주일오후 1
2. 자랑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왕하20:13)2004.10.10 주일오후 10
3. 자기자랑과 사랑의 결핍(고전13:4)2004.10.31 주일오후 17
4. 하나님 없는 모든 인생 계획은 악한 자랑입니다(약4:16)2004.11.7 주일오후 25
5. 자기자랑의 심리는 추종자를 얻는 것입니다(행5:36)2004.11.14 주일오후 34
6. 아첨과 자기자랑(시12:3)2004.11.21 주일오후 39
7. 신실함과 자기자랑(잠20:6)2004.11.28 주일오후 48
8. 언약백성의 자랑거리(렘9:24上)2004.12.5 주일오후 56
9. 자랑과 거룩한 추구(렘9:24下)2004.12.19 주일오후 68
10. 하나님을 추구함(대상16:10)2004.12.26 주일오후 76
1. 자기자랑의 파괴력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5:6)”
사람과 관계된 일이나 물건들에 대한 칭찬을 자랑이라고 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국어사전적인 의미이고 성경적인 의미는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언어적인 의미 이외에도 이것이 품고 있는 성경적인 사상의 배경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자랑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티펠레트’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자랑을 긍정적으로도 또 합법적으로도 묘사하고 부정적으로도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잠언에 의하면 자녀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백발이 자랑이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자랑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이고 부정적인 것들도 이미 구약성경 안에 내포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히스기아가 바벨론에서 사신이 왔을 때 자기의 무기고를 보여준 것은 자랑이었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행동으로 지적되고 결국 그것이 신앙적인 교만의 표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이 예고되기도 합니다.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이 자랑이라고 하는 단어는 ‘카우케마’라고 하는 단어이고 자랑함은 ‘카우케시스’라고 사용되었는데 전자가 35회 정도 후자가 4회 정도 사용되어서 약 40회 정도 신양성경에 나타나게 됩니다. 역시 신양성경에서도 이 자랑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양쪽 측면을 다 같이 갖고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자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설 때에 나의 자랑이 무엇이뇨 너희가 아니냐’라고 하는 것은 모두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고백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던 의미의 자랑은 모두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자랑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도 많이 나타나는데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예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자랑하는 것이라고 나옵니다.
신약에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구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이 똑같이 그런 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자랑할 때 하나님은 그 자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에게 힘과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통로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두 가지 자랑, 곧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서의 자랑과 자기 자랑 중, 신앙적으로 성화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자기 자랑입니다.
자랑이라고 하는 자체는 인정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열렬하게 자랑한다고 칩시다. 그렇게 자랑하는 당사자인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열망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 열망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최종적 목적이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는데 그때 듣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도 자기처럼 그 십자가에 대해서 참된 의미를 알고 자기가 십자가를 인정한 것처럼 그들도 그 십자가를 인정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똑같이 자기 자랑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인정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계속해서 자기, 자기와 관련된 사람, 자기와 관련된 일, 자기와 관련된 물건들을 칭찬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칭찬하는 것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수단에 불과하고 이것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는 그일, 사람, 물건과 관계를 맺고 있는 궁극적 최종자인 말하는 사람 자신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자랑의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에 탁월한 교역자가 하나 있거든. 기도도 많이 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교회에 헌신 잘하고 놀랍게 봉사하고 정말 뛰어나거든. 내가 골랐어’ 한다면 이 사람에 대한 자랑을 많이 했지만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높여지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또 테니스를 치는 사람인데 ‘우리 동네 한 사람이 있는데 얼마나 테니스를 잘 치는지 말도 못해. 아마추어라고 하는데 분명히 예전에 선수였을 거야. 펄펄 날아. 어떤 서브도 강하고 스매싱은 폭풍과 같이 밀려와. 굉장해.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사람 정말 못 봤어. 간신히 이겼네’한다면 자랑은 그 사람을 실컷 했는데 거기에서 그쳤으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마디 ‘간신히 이겼네’를 통해서 결국 이 사람에 대한 모든 자랑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동기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자기 자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굉장히 안 좋은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분쟁이 일어난 것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에게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분쟁이 일어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5장의 첫 부분에 보면 ‘너희 중 아비의 아내를 취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런 자를 너희 가운데에서 내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느냐. 나는 이미 판단했다. 내가 가면 가만 안 둔다’하는 이야깁니다. 그런 도덕적인 문제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도덕적인 문제, 부도덕한 음란의 문제와 성적 타락의 문제와 자랑이 무슨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폭격을 하듯이 음란의 문제를 지적하다가 자랑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든 본문에서 이 자랑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자랑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했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랑은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음란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또 다른 직면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자랑이 그들의 편을 다 갈라놓은 것입니다.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파로 갈라놓았고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의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사실 이 은사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교회를 참으로 교회되게 하지만 은사는 그 교회로 하여금 참으로 교회답게 일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은혜와 은사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주신 그 은사가 지금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은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미성숙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그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자기 자랑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방언 받았어? 난 통역을 받았는데 내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 또 병 고치는 사람이 ‘입이 돌아갔는데 방언이 나오겠어? 내가 고쳐줘야지’하면서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시작일 뿐이고 깊이 캐 들어가 보면 그 속에 모두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랑이 왜 그렇게 해악스러울까요? 첫째 이 자기 자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누구를 소개할 때 ‘목사님, 이 사람이 목사님 팬입니다’하고 소개하는데 팬이라고 하는 단어는 영어의 fanatic이라는 단어를 줄인 것인데 ‘열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향해서 열광하게 될 때 그 열광하는 사람을 열광 받는 사람이 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열광을 받는 우상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도저히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모로 보나 재산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공정하게 자기를 생각할 때 도저히 사람들로부터 열광적인 떠받듦을 당해서 팬을 많이 거느릴 영웅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스스로를 높이려는 우상적 경향성은 다른 사람의 팬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왜곡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마구 떠받들면서 높이는 행동 자체는 좌절된 자기 우상화의 왜곡된 표출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높아질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높이는 팬이 되어서 그 사람들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그렇게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정의 내리자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목적으로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사람, 일, 물건 등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랑하는 의도 자체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것 자체가 영광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자신의 온 삶과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거기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은 영화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욕을 받으시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모욕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때, 그리고 아랑곳없이 행동할 때, 또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인정과 같은 성질의 것을 자신이 받고자 할 때, 그것이 결국은 개인의 우상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빗나간 자기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주목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있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하는 구절이 이런 자기 자랑을 위해서 상당히 많은 격려를 가져다주는 성경 구절로 인용됩니다.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주님께 기도했더니 응답해주셔서’하는 식의 수식어구가 양념처럼 동원되지만 자기 자신이 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으면 그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서 경험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주의 구원 행동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하게 됩니까? 그리고 그런 자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는 무슨 뜻입니까?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 안에 포함되어서 묻혀있고 그와 관계되어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자신이 특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의 경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 자신이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이 성공하면 기껏 해봐야 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경쟁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잘못되면 반감을 가지면서 인간관계가 파괴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나면 밥도 사주고 선물도 준다고 하더라도 앉기만 하면 말할 틈도 안주고 자기 자랑만 계속 늘어놓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밥도 선물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자랑에 심취되어서 계속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우리가 그 사람을 인정해주기 원하는 그런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모욕당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거기에 열을 올리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추종자는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대등한 인격적인 친구가 없습니다.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니’라고 말했습니다. 편지가 날아 왔는데 봉투가 예쁘고 펼치니까 편지지도 금박으로 박은 것입니다.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는데 읽고 나서 하는 말이 ‘도대체 이 편지지는 누가 만든 거야. 이렇게 예쁜 편지지를 만들다니. 나는 갈 거야. 이 편지지 만든 공장으로’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편지의 사명이 아닙니다. 편지지가 예쁘건 금박으로 됐건 상관없이 물 흐르듯이 써내려가고 있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사연을 읽으면서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생각에 깊이 사로잡히게 만들어주는 것이 편지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우리를 주목하고 우리를 부러워하고 우리처럼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경쟁의식을 느끼고 우리가 있는 어떤 상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끔 은혜를 주신 그 목적에 정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더 심하게 발전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윗필드가 남긴 위대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로 잇따라 오직 그리스도가 기억나게 하라’했습니다.
제가 쓴 책을 읽었으면, 책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팬이 되어야지 그것을 쓴 사람이 무슨 상관입니까? 논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열린 신문에 글을 쓸 때도 많이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나를 사로잡고 나를 변화시켰는가 하는 것만을 부각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설교자 얘기가 나올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랑이 가져다주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시선을 빼앗아서 나를 주목하게 하고 나를 생각하게 만들고 나처럼 되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고 해서 뭔가 왜곡된 가치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들이 매개체 역할을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 오시는 앞길을 사람들 마음속에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요한 사도가 증거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말이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입니다. 그런 정신이 세례 요한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쇄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하는 것이 세례요한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삶을 산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지 그 손가락 자체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세례요한의 생애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생애를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두 번째로 자기 자랑을 하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가치를 좇아가게 합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지으려고 권총으로 사람을 쏴서 죽이고 돈을 빼앗은 사 건)
이런 일은 가치관의 왜곡에서 오는 일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는데 친구들 교회에는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교회당도 크고 사택도 좋습니다. 차도 고급차이고 점점 발전하는데 자기는 점점 안 됩니다. 물론 괴롭겠지만 신앙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역의 진정한 가치가 양과 수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한명의 성도만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충성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된 가치관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회가 잘 되지 않을 때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돌아보고 친구들의 성공을 보면서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복음적인 성공은 아닐 것이라고 성경을 가지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대신 교회가 안 되는 것은 오직 예배당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니까 방아쇠를 당겨서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은 것입니다.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릇된 가치를 좇게 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사람은 친구 목사님들과 만났을 때 그들이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속에서 많은 자랑을 발견했을 것이고 비교의식을 느끼고 갈등하는 많은 날들이 잠재되어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릇된 가치를 좇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가치를 좇는 것이 너무 심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만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저는 성형수술을 하는 것이 모두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턱뼈가 앞으로 나온 구조를 가지면 몸에 온갖 질병이 다 생깁니다.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서 위에 무리를 주고 턱 운동을 하는 동안에 신경을 잘못 자극해서 문제를 줍니다. 그런 경우에 얼마든지 수술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면 안 되지만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증세로 발전하기까지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는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쌍꺼풀 정도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비평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 외모 제일주의 같은 것들도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외모 지상주의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가치관의 전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라면 우리는 어느 정도 이런 것들에 맞서면서 살아가는 자세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교역자나 직원을 뽑을 때 못생긴 사람을 우선순위로 뽑아서 뭔가 세를 과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흘러가고 있는 이러한 그릇된 가치관에 저항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화; 허영심이 있는 한 자매가 귀족적인 형의 남성을 좋아해서 선을 봐서 한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지닌 모든 것이 유사상표 제품이었다. 드디어 준수한 사람과 선을 보고 그와 바람 부는 거리를 걷다가 그가 두른 목도리를 보니 영칭피아노라고 써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런 식의 잘못된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살아가게 된 이 왜곡된 세상에는 이 자기 자랑이 한몫을 한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스도인은 뭔가 여기에 거스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좋은 제품의 옷을 절대로 입지 말고 싸구려 제품만 입으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해라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오늘날 많은 자기 자랑이 일반화되는 속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열을 올리면서 진실한 삶과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야비한 경쟁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구조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찰떡처럼 함께 붙어서 흘러가는 이 시대정신의 맥을 그리스도인이 칼이 되어서 끊어놓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삶의 모습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은 이처럼 그릇된 가치를 좇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정말 중요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풍조를 낳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 번째 이러한 자기 자랑 안에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한 은혜를 고갈시키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났는데 마음이 굉장히 공허해지고 고갈된 느낌을 받으신 적 없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 자랑이 가지고 있는 영혼에 대한 파괴적인 힘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이야기했던 우모르수이, 자기 사랑, 부패한 자아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은혜를 고갈시키는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힘으로, 믿음으로 끊어버리고 자기 사랑의 요구를 거절할 때 우리의 내적인 사랑은 쇄신이 되고 영혼은 강건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자기를 감싸고돌게 되면 그 속에서 계속 자신의 영혼이 손해가 오고 고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한동안 -은혜는 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헤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솟아나서 영적으로 화장을 시켜줍니다. 그래서 질서를 잡게 만들어줍니다. 화장품이라는 cosmetics이라는 단어가 희랍어 cosmos에서 왔습니다. cosmos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화장품은 질서가 없는 판에 질서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튀어나온 부분을 어둡게 하고 들어간 부분을 밝게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질서가 잡히면서 얼굴이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사 시절에는 가끔 ‘너 왜 그렇게 살어? 네 얼굴에 다 나와 있어’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지금 개떡같이 살고 있는 것을 아시느냐고 하며 털어놓았습니다. 그것이 몇 번 맞으면서 제가 점점 더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척 보면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겸손케 하는 계기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제가 그 꼴이 된 것입니다. 한달에 한 두 번씩은 얼굴이 왜 그러느냐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그때 보았다면 ‘너 왜 그렇게 살어. 난 네 얼굴 보면 알 수 있어. 넌 지금 미끄러졌어. 죄의 지배 아래 있지? 고백해’라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8년 전에 같은 자세로 오래 글을 쓰다가 골반 뼈가 내려앉았습니다. 그것이 계속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충만한데도 사람들은 얼굴이 왜 그러냐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단에 오를 때에 항상 은혜 충만해서 올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올라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이 충전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은혜를 받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백 속에 무엇을 자랑하느냐에 달려있는 영혼 속에 일어나는 작용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면서 힘을 얻는다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노래하면서 힘을 얻었다는 고백,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면서 힘을 얻었다는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광 받으시기 원하는 열망을 가지고 자기는 잊혀진 채 그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자랑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에게 고백의 힘을 가지면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굉장히 메마른 것 같은 상태였는데 찬양을 몇 곡 부르면서 은혜를 받고나면 심령이 고양됩니다. 이것이 고백 안에 깃들여 있는 영적 작용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자랑하면 이 자체 안에 이러한 자기 안에 이미 주어진 성화의 은혜를 고갈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성화의 은혜가 계속 자기 자랑에 의해서 고갈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자랑의 동기 자체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만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 자신 안에 있는 자아의 욕구를 보여줄 뿐입니다.
자기 자랑이 일상화된 사람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기 바라는 갈망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자랑이 일상화된 사람인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을 품고 헌신적인 사람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잊혀지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무명하게 하는 장막 뒤로 숨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마음이 자기 자랑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내분비계통이 조절이 안 되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 문제를 일으켜도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이 그런 문제로 인해서 직접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분비가 안돼서 잠이 잘 안온다고 해서 그런 분비 물질들이 영혼을 공격해서 은혜를 말려버리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랑은 그렇게 영혼 깊은 곳을 고갈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랑이 몸에 배인 사람 중에 경건한 명상을 생활화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분히 이 생활이 발산적입니다. 그래서 고일 새 없이 계속 퍼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 안하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영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고이고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우리의 은혜가 고갈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서 영적으로 충전될 수 없는 사람은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썩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향성과 자세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해서 일이나 자기와 관련된 사람이나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자기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있는 사람들, 이런 모든 사람들은 결국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영혼이 이 자랑의 실행으로 말미암아서 계속 고갈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니 성화에 도움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묵상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자랑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전염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육신적인 것을 자랑 할 때 계속 맞장구를 치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계속 양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할 때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가 맥을 끊으면서 ‘미제 양복도 좋고 이태리제 시계도 좋고 러시아제 신발도 좋고 다 좋은데 너 왜 사니? 우리 인생의 참된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야. 참으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면 난 그것 다 벗어버리고 노숙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살아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한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 자랑을 일상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항로를 끊어주는 작용입니다.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진짜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인생을 결정하는 보다 더 아름답고 중요한 것이 있구나’하며 그런 것을 추구하던 사람이 돌아서서 새로운 변화된 가치를 추구해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자기도 탐구해가면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신령한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변화의 힘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불붙는 똑같은 가치관이 들어와서 그것들이 자신에게 불붙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도 이야기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통 퍼져서 가루를 누룩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의 자랑하는 그것이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가치관 속에서, 결국은 교회 전체의 영성을 허물어뜨리는 무서운 일을 하지 않느냐’그러니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순결함을 잃어버리게 하는 역할들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 또 다른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성도들이 생각하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목격하고 깨달아 알 수 있게 만드는 그런 거룩의 작용들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담하게 자기를 자랑하면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사람들, 그 속에서 참다운 가치를 찾아서 살아가는 진정한 만족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성화의 도상에서 찾아야할 가치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이 일상화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와 안정, 그리고 은혜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진정으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본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바로 할례당이라’ 고백했던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는 지체들이 그 속에서 오히려 위로를 얻고 자랑할 것이 많았던 지체들이 그런 지체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자신의 자랑이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게 되어서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정말 올바른 자랑거리, 올바른 사랑거리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을 모두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그러한 가치관의 혁신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을 결코 세속적인 삶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거룩한 삶의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자랑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왕하 20:13)”
오늘은 ‘자랑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하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유대 역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샛별과 같은 신앙을 가졌던 한 임금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히스기야 임금이었습니다. 히스기야라고 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몇 개 있을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에 포위를 당해서 희망이 없었을 때 그 외교문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더니 아침에 가보니까 앗수르 군사 18만 여명이 모두 죽어버렸다는 놀라운 역사부터 시작해서 오늘 이 보도 직전에 나오는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이제 네 생명이 다했다’하고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을 때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인생을 15년이나 연장 받았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히스기야 임금은 아사 왕과 함께 기울어져가는 유대 역사에 있어서 샛별처럼 찬란히 빛나는 신앙의 부흥을 그 땅에 가져오는 도구가 되었던 임금이었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는 히스기아와 같은 임금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길로 행한 임금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깊이 사랑하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그 때에’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히브리어의 관용어적인 표현에 있어서 반드시 앞뒤 사건의 연관관계에 있는 가까운 며칠 사이의 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가 있지만 그러나 전혀 상관이 없이 사용되는 부사구절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 시기에 두 번째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이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앞에 일어난 사건은 죽음을 선고 받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함으로 ‘내가 네 눈물을 보았도다’ 하시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일영표의 해그림자를 물러가게 하심으로 15년이나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기적을 맛보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같은 사건의 맥락 안에서 자기 자랑의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신령한 영적인 깊이와는 상관이 없이 평범한 모든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자기 자랑의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이렇게 신령하고 하나님 앞에 작정을 하고 매달렸으니 생명 걸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인데, 이러한 일사 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이적을 본 사람, 믿음으로 살아온 이 사람에게도 자기 자랑의 죄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것이지만 성경에 의하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 중 겸비함의 화신처럼 살았던 사람을 든다면 아마 욥과 다윗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생애의 많은 부분이 기록되어있고 그 기록과 시편에 토해놓은 그의 시를 볼 때 그는 겉으로만 겸비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깊이 겸비한 사람의 화신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자기 자랑의 죄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왜 인구 조사를 한 사건이 죄가 될까요? 인구 조사의 목적 자체가 싸움에 나갈 군인들의 수를 헤아리고 징발할 수 있는 말과 무기들을 헤아리는 조사였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정적으로는 문제가 안 되었지만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이 일생동안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들의 수나 말과 병기 때문이 아니라 ‘여화와가 다윗과 함께 하시니 다윗이 어디에 가든지 이기더라’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속에 그것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과 더욱 하나 되려고 하는 대신에 한번 강성해진 자신의 나라의 국력을 헤아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중심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크게 징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러한 자기 자랑의 죄는 신앙의 깊이와 상관이 없이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교회에 와서 자기의 큰 집, 좋은 자동차, 통장에 든 돈, 잘생긴 자기 자식들을 자랑하지만 신앙이 깊어지면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진 사람이 집 크다고 뻐기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의 모임에 가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왕따시키는 것입니다. 자랑의 이유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깊이 기도했더니’ 그리고 ‘주께서 내게 말씀 하시기를’이 너무나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온 회중들을 제압해보려고 하는 자랑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이 가져다주는 폐해는 그 자랑하는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기 자랑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공허하고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깊이 기도하니까 ‘내가 소싯적에 은혜를 받았을 때’ 아니면 ‘내가 정말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하면서 한참 자기 자랑과 자기 신앙의 세계가 신령하다는 사실을 떠벌이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이 모두 존경에 찬 눈빛으로 자기를 쳐다보았을 때 일장연설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 골목길이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 속에는 우리의 영혼의 힘을 말려버리는 그러한 놀라운 작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에서 힘이 생겨납니다. 그것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역대상 16장 10절에 이르기를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높이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을 많이 증거 하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싶으시겠지요. ‘샌드위치 사이에 햄 조각 끼워 넣듯이 하나님을 높이는 사이사이에 끼워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둘 다 썩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가 항상 후렴구로 붙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좀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를 붙이지만 사실 자랑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은 압니다. 그러면서 영혼이 아주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자랑,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이런 이야기들은 중심으로 많이 우러나면서 하면 할수록 영혼에 힘이 솟습니다.
저는 그 일의 증인입니다. 예전에 집회를 많이 다닐 때 일입니다. 일주일씩 지방에서 설교를 하고 올라오면 피곤합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집회하고 금요일 아침에 다시 집회를 잡습니다. 전라도에서 목요일 저녁 설교를 마치고 금요일 새벽부터 경기도에 집회를 잡습니다. 그러면 밤새 차타고 달려옵니다. 설교를 잘했든 못했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거의 서너 시간도 못자고 밤중에 달려와서 새벽 강단에 서면 정말 기운이 없습니다. 그러면 ‘새벽에는 30분만 하고 내려오고 저녁 설교에 대포알을 쏴야지’해도 새벽에 두 시간 반을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그분의 이름에 관해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힘이 없고 영혼이 쇄약 했다가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말씀을 전하고 나면 내 영혼이 새로워진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자는 무릇 자신이 새 힘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성경에 나와 있는 고백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시 성령이 기뻐하시지 않는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자기의 마음에 고갈이 오는 것을 경험하신 적 없습니까? 누구를 헐뜯는다고 하지 않더라도 아무 내용이 없는 수다, 객담, 잠깐 스치는 조크정도는 괜찮지만 철퍽히 앉아서 시간을 죽이면서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말 자체를 위해서 늘어놓고 수다를 떠는 가운데 마음이 건조하고 고갈되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전도사 때도 항상 구역예배를 인도하면 빨리 집에 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듣고 은혜 많이 받아놓고 다과 먹는다고 앉아서 세 시간동안 잔소리하다 보면 은혜 다 털어먹고 마음이 고갈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자랑을 오늘 이 히스기야가 실수한 것입니다. 방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렇게 살아났는데, 바벨론이 신흥국가로서 이 나라와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선물을 들고 특사가 왔으면, 죽게 되었다가 주님의 은혜로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으니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 같으면 그 사신 앉혀놓고 간증이나 한번 해서 돌려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도 은혜 받고 하나님 믿게 되었을지 압니까? ‘우리에게 야훼라고 하는 신이 계신데 사실 나는 죽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야훼라고 하는 신이 내가 간절히 그분께 한번만 더 살려주셔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하나님이 아무 희망이 없는 질병에 걸렸던 나를 이렇게 건강하게 해주셨다. 임금님께 가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너희들도 할 수 있으면 나처럼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되어라’고 했으면 무슨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온 왕궁을 돌아다니며 보여줍니까? 보여준 것도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이 보물고입니다. 보물고에 가서 은과 금과 향과 모든 것들을 보여줬는데 국가의 부가 얼마나 되는 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두 번째 보여준 것이 군기고였는데 중앙에서 지방에 공급될 수 있는 중앙 무기고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군사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다음에 내탕고를 보여주었습니다. 내탕고는 왕궁과 왕의 직속부서에서 쓸 수 있는 물자를 비축한 곳입니다.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면 얼마나 오래 동안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지 물질적인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적군 앞에서 홀라당 벗은 것입니다. 이런 머저리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상식적으로 안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상식은 김일성도 압니다.
(예화: 핵개발 하는 것을 보여주라고 했을 때 김일성의 말)
주는 것 없는데 적군 앞에서 홀라당 벗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벗을 이유가 있어야 벗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 임금은 바보입니다. 그것은 극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 북한에서 미그기가 한대 넘어오면 그렇게도 좋아했던 이유는 그것을 상세 하게 분해해서 그 비행기의 한계와 적응성 능력 등을 시험해서 거기에 대응하는 무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도 불꽃 튀는 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초음속으로 폭탄을 싣고 날아가도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기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그것을 정밀하게 분석해서 스텔스기만 잡을 수 있는 레이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비행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머저리 같은 사람이 다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궁금한 것은 왜 보여줬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모험을 무릅쓰고 자랑하고 싶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깊이 인정하고 칭송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보좌에서 축출시키고 자기가 보좌에 대신 앉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데 그 영광을 인정해주는 것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니까 사람의 영광이나 자기 영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구한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보여주든지 경험하게 하든지 누리게 하든지 해서 그 모든 것들이 계기가 되어서 그 모든 것들 뒤에 있는 궁극적인 원인으로서 자기 존재를 깊이 인정하게 하고 그런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된 자신을 사람들로 하여금 떠받들도록 조장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 영광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기에 이렇게 나라를 다 거덜 낼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그것이 강력한 매력이 있는 죄일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그러하지만 특별히 이 자랑의 죄는 간음의 죄와 아주 유사합니다. 모든 죄가 그러하지만 간음의 죄의 강점은 거기에 마음이 꽂히게 되면 오직 그것 하나가 전부인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몰두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덫에 걸리게 되면 신앙의 깊이와는 상관이 없이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도 자신의 책 속에서 이 간음의 죄가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힘을 가진 죄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의 죄가 이런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죄를 보면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너무나 뻔하고 그것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나타나게 될 무서운 파괴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결과가 무서운데도 그런 죄를 짓게 되는 이유는 그 죄가 가지고 있는 강한 흡입력 때문입니다. 나방을 생각해보십시오. 불을 향해 날아드는데 부딪혀서 죽고 타서 죽습니다. 그런데 타죽는 자기 동료의 냄새를 맡는지 못 맡는지 날아들어서 타죽고 또 타죽고 뜨거워서 도망갔다가는 다시 돌아와 뛰어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 강한 흡입력이 자기 자랑의 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것을 못 이기고 자기의 보물고를 다 보여주고 군기고도 보여주고 내탕고를 보여줬으니 국력과 군사력과 전쟁이 나면 며칠이나 그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지 군사적인 저력까지도 모두 한번에 보여주었으니까 이것이 후일 바벨론이 유다를 쳐들어오는 기초가 되는 전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을 다 보여준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는, 자랑의 죄에 빠져서 자기가 고갈되고 넘어지는 사람의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의 영혼의 세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진정한 자랑거리를 소유하게 되면 자신에 관한 것은 자랑거리가 안 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옛날에는 유대 지파 가운데 가장 엄격한 베냐민의 비파인 것을 자랑했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도 자랑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자랑거리를 자신의 마음속에 소유하게 되니까 그것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그런 것들이 이제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추켜세웠겠습니까? 그 뛰어난 학문 그 인품, 단호함, 노력, 논리, 말씀에 대한 깊이, 아마 천사가 왔어도 바울처럼 목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니 찬사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자랑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 바울이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사도직을 변명하기 위해서 신상에 관한 발언을 할 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자기의 이 고백이 혹시나 자랑거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편지를 썼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자랑거리가 그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으니까 자기 자신의 자랑으로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내게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세상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자기 자랑까지도 사실은 그 세상의 정과 욕심에 속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그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랑을 통해서 그 자랑을 모두 들은 사람이 무엇을 인정하게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과 비교의식을 느끼면서 좌절하게 되고 이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본성에 깃들여 있는 경향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정말 극도의 절제된 자기 자랑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헬라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화관을 가지고와서 꽃다발을 바치면서 바울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높이면서 쓰스와 허메라고 불렀으니 쓰스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신중에 으뜸가는 신인 제우스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허메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웅변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헤르메스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구나’하면서 꽃다발을 바치고 소를 몰로 올 때 바울과 그 일행이 옷을 찢으면서 통탄해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인정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행한 유명한 연설이 있는데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희로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사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어떻게 너희가 우리를 높일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의 영성 깊은 특징입니다.
그래서 잘 보십시오. 늘 자기 자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진짜 잘났으면 똘마니들만 주위에 잔뜩 모이고 진정한 친구가 없습니다. 작은 찬미자들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라고 하는 것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흘러가고 흘러들어오는 가운데 교제가 되는 것인데 똘마니들에게 둘러싸여있는데 거기에 교제의 깊이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전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했을 때 얼마나 가슴에 젖는 말씀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누구에게 그것을 배웠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처럼 자랑할 것이 많은 분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한번 기도함으로 열두 영이나 더 되는 하늘의 천사들을 이 땅에 불러 내리실 수 있는 분이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손에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예수님이 한번도 예수님의 존재에 어울리는 인정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고, 나사렛의 촌뜨기라고 했고, 기껏해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껏해야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딱 한번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칭찬하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을 한번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당신 자신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괴로워하시거나 아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아들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히려 생애 전체에 걸쳐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신 아버지를 자랑하신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에는 자기 자랑으로 말미암는 고갈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때가 되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그를 다시 살리셔서 모든 만물을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셔서 그 분을 주라 시인하게 하시고 그분을 높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그렇게 좋습니까? 남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 인정,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서 최고로 뛰어난 성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돈 많이 바친 성도,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건 성도, 가장 많이 성화된 성도, 사람들이 수없이 박수를 쳐도 그것이 여러분들의 성화를 촉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는 그 모습을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에 의해서 바꿔놓을 수 있습니까? 생긴 그대로일 뿐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 박수 소리는 모두 허공중에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서시던 종려 주일에 사람들이 겉옷을 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높였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거기에 매료되셨습니까? 매료되셨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아마 예수님의 가슴은 배신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평정 속에서 십자가를 맞이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길들여지면 정말 안 됩니다. 그래서 전설적인 청교도 설교자 죠지 윗필드가 이야기했듯이 ‘사람들로 이 윗필드는 잊어버리게 하라. 오직 윗필드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게 하라. 세례요한의 선언과 같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쇄하여야 하리라’하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수많은 박수와 갈채 보다 하나님 그 한분으로부터 받는 인정과 사랑 때문에 더 행복해하는 성도, 그 사람이 성경에서 그리는 진정한 성화의 길을 가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해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 되면 이것은 자기 자랑을 통해 자기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가사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화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의 발자취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깊이 사랑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자기자랑과 사랑의 결핍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저는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본문을 가지고 히스기야 왕의 실패를 거론하면서 자랑하는 것은 곧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그랬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자랑이 역사의 큰 심판을 불러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러면 그렇게 자기자랑이 결국은 자신을 그렇게 파멸로 몰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자기 자랑에 골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신자들이 자기 자랑을 위해서 노력할까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한 대답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발견합니다.
이 시간에 이 엄청난 절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는 자기 자랑이라고 하는 주제에 맞는 부분만을 해설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7-8년 전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했고, 각성을 촉구하는 무겁고 어떤 의미에서 두려운 설교를 통해서도 변화되지 않던 여러 사람의 인생이 고린도전서 13장을 들으면서 바뀌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설교를 꼭 들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잘 들어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기초를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여기에서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희랍어로는 ‘페르펠리오타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본래적인 뜻은 뻐긴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이지만 정확한 번역을 한다면 뻐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뻐기지 아니하며’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boast ...(?)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실 이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기에 관련된 사실이나 물건 혹은 사람들, 이런 것들을 높이 추켜세우는 행위를 가리켜서 뻐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참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 설교를 통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뻐기는 이유, 자기 자랑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런 자기 자랑이 결국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뻐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적극적인 측면과 소극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보면 내적으로 외적으로 증명이 될 것입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이 뻐기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뻐겨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까요? 물론 좋습니다. 경험 못해보셨습니까?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할 때 사람들이 자기를 몹시 부러워할 때 느끼는 그 우월감, 얼마나 매력적인 요소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한 여성이 전체적으로 성형수술을 했는데 인생이 바뀌더라고 말했다-가장 뚜렷 한 효과는 자신감이었다)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부러운 대상이 되어본 적이 있습니까? 공부를 너무 잘해서 온 동네 엄마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 개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 자기를 부러워하고,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느 모임에 가든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사람들이 나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야릇한 열등감을 갖게 되고 그럴 때 느끼는 존경과 어느 정도의 질투, 같은 클래스가 될 수 없다는 상대적인 열등감 같은 것들을 한 몸에 받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여러분 압니까? 그 마력은 굉장히 강력한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이 소수의 사람들의 인정받고자 하는 엄청난 욕구에 의해서 역사가 움직인 것이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바벨탑을 쌓은 반역의 이유가 두 가지였는데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과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이 성을 쌓고 이름을 에녹성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강한 갈망이 있고 그것은 거의 종교성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의해서 변화되지 아니하면 사람은 생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정받으려고 하는 깊은 욕망을 떨쳐버릴 수 없고 거기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그것은 너무 일면을 보신 것 같습니다. 제 주위에는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죽기보다 싫어해서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라고 하면 차라리 그 자리에 안나오거나 매를 맞는 것이 낫지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적으로 자기 자신을 적절하게 드러냈을 때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한 지나친 자기 노출을 꺼리는 경향은 좌절된 자기 숭배 감정의 발로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인정받는 것이 과거나 현재의 언제든지 너무나 깊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좌절될 것이라는 깊은 좌절의 감정이 잘못 투영된 것이 바로 자기를 철저하게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뛰어난 스타가 되고 우상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그 감정이 돌변해서 다른 사람을 우상화시키면서 거기에 열광하는 사람으로 돌변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통하는 것처럼 이것도 통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안에 무엇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그 마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화: 스타덤에 올랐던 한 연예인이 어떤 일로 인해 인기가 하락하게 되자 그가 그리 스도인이었음에도 아침마다 죽음을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로운 자기 파괴적인 것들을 동반한 것이 바로 자기 자랑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기 자랑의 마력에 깊이 끌리는 이유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순간적인 만족과 즐거움이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거기에 일단 길들여지고 나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중독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자기자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 자기과시적인 소비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물론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이 주셔서 물질을 누리고 그것을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사용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소비가 고급화되어가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꾸고 그리는 이상은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와 같은 삶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난한 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 데도 처할 줄 아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왜곡되어서 굉장히 자기 과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허영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알고 보면 자기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강력한 욕구가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그 인정이 실현될 때 그가 느끼는 순간적인 기쁨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복의 효과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한 마력에 자꾸 끌리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로부터 오는 만족이 없을 때 인간은 그런 과시의 욕망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사랑은 내가 자랑할 때에 그 자랑에 넋을 놓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내가 그들에게 자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일차적인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사랑은 사랑하는 주체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객체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는 자랑하지 않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며 라는 뜻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사도바울이 웅변적인 증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참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힐렐과 가마리엘 중에서 가마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으며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자신을 인정받도록 만들어주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 외에도 또 로마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커다란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있어서 큰 자랑거리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니까 옛날 자랑거리들을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가 그에게서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변할 수 없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에 변화가 올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에 있어서는 변화가 올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품었다는 것이 변할 수 있습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시민인 것도 더 이상 자랑 거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관계에서 오는 진정한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 관계에서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을 좀 의아해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무엇인가 목적을 가진 것이 사랑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는 것 아닙니까?’ 맞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사실 우리의 적용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모가 아이를 낳아서 자식을 기르는데 깊이 사랑합니다. 이 아이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든지,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든지, 다 필요 없고 그냥 소시민으로서 열심히 사회적으로 도덕적이고 준수한 시민으로서 살아갔으면 좋겠다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베푸는 그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의사가 되기 위한 조건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그 사랑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의사가 안돼도 부모가 사랑해야지 의사가 안됐다고 해서 내 사랑 이제 취소라고 한다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칸트가 자신의 책 속에서 ‘친구를 사귀지만 친구를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목적으로 생각하면서 사귀어야 합니다’라고 한 것도 역시 그런 뜻에서 충고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을 우리가 깊이 경험할 때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든지간에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이용하시기 위해서 사랑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오래참고 기다리고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물론 그를 사랑하니까 그를 향하여 바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의 계획에 의해서 취소되고 다시 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이 세상에 거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있지만 불완전합니다.
어떤 젊은이 둘이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하고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한번 거짓말을 해놓고 나니까 계속 감추게 되었는데 결국 둘이 좋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거짓말이 밝혀져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사람을 속이고 결혼한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을 딛고 더 큰 목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결합이 미완성된 상태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든 그런 것이 이치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를 많이 자랑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갈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이치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의 결핍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교회나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도 가차 없이 비난하고 깎아내리면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자랑을 보면서 자존심이 상해한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다시 깎아내려서 정신을 차리게끔 한번 도와줘야 한다는지 하면서 그에게 공격적으로 덤벼드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깊이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얼마나 사랑을 못 받았으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겠습니까?
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과시해서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의 만족, 그 관계의 만족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를 자랑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들, 항상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관계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과시적인 측면이 많고 뻐기려고 하는 기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격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상처의 차원에서 그런 것들을 접근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들에게 자랑을 하면 그것을 꺾고 짓밟으려고 공격적인 태도를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그 자랑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 얼마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없으면 그러겠습니까?
실제로 자기 인정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강력하고 마력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참 더운 여름날에 퍼마신 진한 설탕물과 같습니다. 차갑기는 해도 마셔서 수분의 공급이 끊어지고 나면 더 강력한 갈증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뻐기고 자기 자랑을 하게 되고 그때 사람들로부터 받는 격려와 찬사, 영광, 이런 것들로 인해서 짜릿한 만족이 느껴지지만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그 가슴속에 밀려오는 공허감과 혼자 내동댕이쳐졌다고 하는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연극배우나 공연을 하는 가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무대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열기를 뿜어내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에는 그 느끼는 만족감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인기를 얻고 싶어서 몸부림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연극배우의 말-모두 돌아간 공연장에 혼자 서있을 때 통곡하고 싶을 정도 의 공허감이 밀려온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예술은 창작자가 고독 속에서 죽고 사는 고비를 넘기면서 생명력 있는 메시지를 지닌 창작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문학작품을 읽어도 그 저자가 잔머리나 굴리면서 쓰는 사람인지 정말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피어린 고뇌의 흔적을 가진 사람인지 작품을 보면 깊이가 다릅니다. 영광은 항상 허무한 것을 가져다줍니다. 짜릿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큰 기쁨 이면에 -그것이 육적인 기쁨이기 때문에- 뒤에는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공허함이 인간의 내면속에 깊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자랑의 폐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기 자랑이 더 많이 깊어지게 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어느 한 단계로 다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바로 나옵니다. 자기 자랑이 그런 함정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서 관계에서 오는 만족은 자신 안에 말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관계에서 오는 진정한 행복은 갈증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만족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사랑해주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관계에서 오는 만족은 다른 상황 다른 시간 다른 사람 다른 이유로 받은 다양한 수많은 상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그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은 우리를 치유하는 강하고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 상처가 어디서부터 온 것이든 간에 관계의 사랑에서부터 오는 치유력은 놀라운 힘을 갖습니다. 우리를 고쳐주고 우리를 주님 앞에 다시 새롭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신다고 할 때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고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그것이 징계를 통할 수도 있고 선한 하나님의 인도를 통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지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도구로 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새로워지고 그 사랑 안에서 새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가 인생을 살아갈 때 이 시선 자체가 자기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시선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보다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한 모독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하고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30여권의 책을 썼습니다. 물론 써놓고 한번도 다시 읽지 않은 책도 있고 몇 번 읽은 책도 있습니다만 다섯 번 여섯 번 읽은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아침마다 말할 수 없이 행복감을 느끼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제일 행복한 시간은 아침에 새벽기도를 끝내고 교회 마당에서 헨델의 음악을 들으면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일곱 번째 읽었고 내일부터 여덟 번째 읽기 시작합니다. 물론 제가 쓴 글이고 제가 연구한 글이니까 각주까지 거의 외우다시피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으로 기쁨을 주는 것은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가슴까지 액체가 되어서 흘러나온 말씀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식적으로 안 말씀을 어떻게 액체화해서 가슴속에 출렁거리도록 담으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책을 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덥히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 읽는데 더 유리할 것 같아서입니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한 챕터나 반 챕터 정도 읽습니다. 너무 은혜로울 때는 두 챕터정도 천천히 읽어갑니다. 그 때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위대한 계획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는데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에 대한 묵상은 필연적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중보를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고 그분의 중보를 통해서 구속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또 실행되고 우리에게 적용되고 완성되니까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묵상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챕터를 다 읽고 나면 정말 우리는 주께로부터 나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의 과정 사이에 있는 지극히 작은 존재라고 하는 겸비함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를 읽으면서 ‘아 정말 어느 때나 이 죄와 결핍이 많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정말 그분이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날이 도대체 언제일까. 그리고 그날은 우리에게 얼마나 기대되는 날인가’하는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그렇게 시작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하는 바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관계에서 오는 사랑에 우리가 깊이 만족하게 됩니다. 그 관계에서 오는 사랑에 만족을 느끼게 되면 느끼게 될 수록 자기를 자랑해야 될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완전한 만족과 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그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말할 수 없는 공허가 밀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벌판에 버려진 것처럼 만드는 감정적인 공허함 같은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랑이 가져다주는 만족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오히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떠났을 지라도 그 사랑의 기억들이 남아서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감화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삶과 자기를 자랑하고 뻐기는 이 삶이 양립하기가 매우 힘들고 둘은 서로에 대해서 파괴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그렇게 묵상을 해도 하루 종일 그 묵상의 효과가 가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오전 정도는 잔잔히 안온한 가운데 그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묵상하면서 지냅니다. 또 성경을 읽으며 깨달은 말씀을 오후에 적용하면서 살아갑니다. 밤에는 샤워를 깨끗이 하고 들어가서 스탠드를 켜고 성화와 기도를 읽습니다. 세 번 읽었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를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십자가가 기도구나. 우리를 이런 기도로 불러주신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고 기도를 실천하면서 오는 그 깊은 고통과 어려움들을 통해서 오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비결을 터득하고 그렇게 될 때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묵상집 ‘사랑’을 펼쳐서 읽고 기도하고 잠드는 내내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눈뜨자마자 음악을 틀고 잠시 기도하면서 어제 밤에 묵상했던 내용을 생각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으로 자기 자신을 가득 채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위선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의 맛을 알고 나면 그 참사랑을 파괴하면서까지 자기를 자랑하거나 위선을 해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대가로 하나님의 은밀한 사랑을 잃어버리기를 선택하는 바보 같은 결정은 안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랑의 습관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 안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허함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진 사람들입니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깊이 은혜의 감동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관계의 행복 속에서 사는 비결들을 터득한다면 구차한 자기 자랑으로 사람으로부터 오는 자기만족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랑을 아는 관계의 행복 속에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4. 하나님 없는 모든 인생 계획은 악한 자랑입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자랑을 악한 것이라고 사도가 아예 규정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게 되면 선하게 될 가능성보다 악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자기 자랑의 특성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이 이야기에 대해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앞부분에서 신앙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면서 장사해서 돈 좀 벌어야 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악한 것입니까? 그런 반론이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살다 보면 사실을 이야기해야 되는 때가 많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잘 지내지. 나 승진했어. 그래서 좀 바빴지’하고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요즘 어떻게 지내?’ ‘나 이사했어. 방배동에 살다가 서초동으로 이사했어. 아파트 조그만 거 하나 사서 이사 갔는데 60평이나 된다고 할까?’ 어떻든 살다가 보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까지 모두 자랑이라고 입을 봉하고 산다면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 도시에 가서 1년을 유하면서 장사해서 돈 좀 벌어야 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악하다고 할 정도로 문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것이 악하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겠습니까? 저는 저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솔직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 심방가면 담임목사님께서 맛없는 음식을 드시면서도 맛있다고 하 시고 예쁘지 않은 아이에게도 정말 잘생겼다고 하셨다)
그러나 저도 담임목사가 되면서부터 거짓말을 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심방 가서 맛이 없어도 맛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맛있는 것이 별거 입니까? 맛있게 먹으면 맛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대신 ‘아주’라는 말은 붙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악할 정도로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가 심각하게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잘 생각해야 되는 것은 사도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우리가 이 도시에 1년을 유하면서 돈을 벌어야 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관심사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성경 기록자의 상상 속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사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이미 많이 터득했고 우리 나름대로 장사를 잘 할 수 있는 기술도 가지고 있고 우리가 물건도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이 도시에서 1년을 유하면서 장사를 하면 돈을 벌게 될 것이다’ 로마는 굉장히 커다란 제국이고 치안과 길이 잘 되어있어서 상품과 물건이 활발하게 오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래이션 메이쳔이라고 하는 신학 학자가 자신이 쓴 책에서 ‘로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을 냈고 모든 제국은 로마로 오는 길로 통했다. 도로를 처음 만들어 놓으면 제일 먼저 군인들이 정복을 위해서 떠나고 다음에 장사꾼이 떠났으며 이어서 복음 전도자들이 그 길로 걸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장사와 무역이 활발하던 시대였으니까 이런 비유가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장사에 도가 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굳게 믿고 여기에서 장사하면 돈을 잘 벌 수 있고 1년을 유하면서 장사를 하면 떼돈을 벌어서 대박을 터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자신의 계획과 희망에 찬 포부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것을 악하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에 훼어 플레이를 안 하겠다든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의를 한다든지 했던 것은 아닌데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 계획을 늘어놓는 것이 악한 자랑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들의 삶의 계획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계획들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악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모든 열심과 인생의 계획의 기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것과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아주 연약한 피조물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하는 그분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마치 자신이 자신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자신의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것을 허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허탄하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공허하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죄를 이야기하기보다 의미가 없고 공허한 것입니다.
죄의 영향은 그렇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생각을 이탈시켜버리고 나니까 생각이 자신의 임무가 생각 자신과 영혼을 공격하는 죄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그것을 총명에 적용해서 총명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해서 영혼 전체를 주도하고 삶 전체를 이끌어가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맞게끔 인생을 살게 하는 향도 역할을 하는 것이 생각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치도 없는 일에 몰두하면서 거기에 매달려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중요한 무기고가 있어서 적의 중요한 공격목표가 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접근하면 즉시 그것을 알리고 대피책을 세워서 무기고를 보호하는 것이 보초 서는 사람의 임무인데 보초 서는 사람이 초소에서 이탈해서 밤새도록 망치질을 한다면 중요한 시설이 적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학에는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한 지위관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전쟁을 하다보면 꼭 이길 것 같아서 작전을 세우고 군사력을 동원하고 화기를 동원했는데 적군이 훨씬 뛰어난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기록하는 것을 전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도서관에서 전사를 뒤져보면
6.25때 있었던 크고 작은 전투의 상황이 그대로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때 적군의 대장과 아군의 대장이 누군인지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몇 명이 공격하고 몇 명이 방어하면서 전선이 어떻게 돼서 마지막에 우리가 이겼는지 졌는지까지 전보가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작전은 그렇게 해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하지 않아서 진 것도 아니고 헌신을 안했거나 애국심이 모자라서 진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있어서 패배라고 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부지런하고 임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특별한 지혜가 없어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만이 그렇게 경계에 실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기능이 그런 것인데 생각이 죄에 감염이 되어버리면 자기의 본무를 이탈하고 허탄한 것에 굴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에 몰두하고 미친 듯이 살아가는 그 많은 정신력의 낭비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정신력을 많이 낭비한 대가로 우리들이 어떤 면에서 물질생활을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말할 수 없이 당신 자신이 주는 인간 안에 있는 자원과 인간 밖에 있는 자원을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허탄한 데에 생각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삶이 어디로부터 왔고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고 앞으로 우리의 인생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오로지 돈을 벌고 장사를 해서 이를 남기고 일에 몰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원리적으로 볼 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의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은 다 하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불법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유재산을 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법으로 강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법정에 호소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우리를 정신병원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방법으로 경쟁을 해서 우리들이 그것들을 많이 빼앗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을 통해서 다시 성취되는 재창조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많은 재산들을 가지고 그 재산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는 방법으로 분배가 되었을 텐데 이번에는 이 사람이 차지해서 그것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분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소명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의 업적을 이루어서 이 세상에 기여하고, 그래서 그 학문을 가지고 되지도 않는 자신의 엉터리 같은 풍설을 전파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그것들을 닦아내서 참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류문명에 기여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모두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 다니는 사람대로 그렇게 살면서 각자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뿐만 아니라 구조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참된 신자가 됨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시려고 했던 참된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거스르는 것들과 더불어서 싸우는 일에 있어서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원래 성도라는 말은 언약 언어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쓰여 지는 언약 용어입니다. 히브리말로 성도가 하씨드인데 헤쎄드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헤쎄드는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특별 자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언약관계를 이야기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의무가 따릅니다. 언약이라는 것 자체가 계약이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권이 있는가 하면 그 특권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할 우리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남다르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그냥 무거운 부담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특권인 것입니다.
왜 자랑스러운 특권이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주 중요한 의무요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 특권에서 소외될 때 사람들은 깊은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언약사상과 신앙이 굉장히 심오한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재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을 가리켜서 언약도(영어?)라고 불렀습니다. 언약사상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 고난으로 가득 찬 시대에서 하나님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이 그 시대의 개혁을 위한 아주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 유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 와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뿐 없으니 야전군 병원 응급실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입니다. 상처도 어쩌다 받아야지 오늘은 상처받고 내일은 상심하고 모레는 근심하고 글피는 유혹에 빠지고 그글피에는 죄 짓고 용서를 경험하고 다시 또 상처받으며 살아가니까 주를 위해서 군사같이 산 날은 새털같이 많은 날 중에서 하나도 없고 상처와 방황 사이를 오가면서 살다가 인생 종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요? ‘몇 년 몇 월 몇 일 거듭나고 하나님의 군대에 입대, 병들어서 3년간 장기 입원, 상처 받고 5년 방황, 7년 탈영,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다, 오자마자 상처 받고 다시 드러눕다, 병상에서 운명하다’ 그래서 세상이 안 변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고 용감하게 이 세상을 사는 그 힘이 언약사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언약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자원들을 손에 넣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재분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손에 맡겨두면 이 세상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재분배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더 탐욕스럽습니다. 도덕적 정당성이 없습니다. 비윤리적입니다. 역사의식도 없습니다. 비겁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다시 분배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이 도시에서 1년 동안 유하면서 장사해서 돈을 벌겠다며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는데 결국은 다 허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의 생명이 무엇이냐 있다가 금방 없어질 안개와 같은 것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은 그들이 미래에 돈을 벌고 1년 동안 유하면서 장사해야겠다는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은 특별히 자신을 사람들 앞에 교만하게 내세우는 자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탄한 것에 굴복된 것입니다. 기초가 없는 자신의 인생의 계획은 모두 허탄한 것에 굴복하는 자랑거리입니다.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계획을 세우든지 간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고나면 그들이 무엇을 하며 살든지 간에 그 삶을 통해서는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들이 계획을 내세우고 그것들을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발표하고 사람들이 그것들을 부러워하고 그 계획에 열심을 내는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불을 향해 날아드는 생각이 없는 나방과 같은 행동들입니다.
미친 듯이 돈을 모아서 뭐합니까? 죽어라고 뼈 빠지게 공부해서 어느 대학이나 가서 교수 자리나 차고앉아서 1년에 5천만 원 연봉 받아서 뭐할 것입니까? 그것이 인생의 무슨 재미입니까? 그것들은 모두 다 사악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의 가치는 소명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고, 살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셨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가장 잘 일하실 수 있으며 여기에 쓰임 받을 때 나는 행복하다는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을 때에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신앙과 자신의 삶이 합일되는 것입니다. 그때 역동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직원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항상 권면합니다. ‘네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기도하고 말씀만 잘 깨닫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장 많은 정력을 쏟고 시간을 보내고 헌신하는 그 일이 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되게끔 기도하는 마음과 실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부합한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네 영혼이 산다’고 말합니다.
대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놀면서 꽤 부리는 사람들보다는 신앙이 좀 낫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영혼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면 몰두하면서 헌신하는 외면적 삶과 내면의 기도가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체가 말하자면 죄를 죽이고 죄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속임의 교리 후반부에서 개별적인 의무 이행에 있어서 죄를 죽이는 효과를 설명할 때 바로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은 자랑 자체는 교만의 죄를 구성할 정도로 큰 것이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인간들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지존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겸비한 고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허탄한 것에 대해서 열심을 품고 살아가는 그 모든 치열한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입니다. 인생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이를 그런 식으로 허비할 권한을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야고보 선생이 지적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계획이 교만의 죄를 구성할 정도의 자랑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에게는 자신의 생명이 아무 것도 아니며 그 생명의 주관자가 주님이시며 자신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할 가장 비천한 존재들이라고 하는 자기 부족에 대한 인식,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식이 이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이고 죄이며 그러한 가운데에서 세우는 모든 자신의 계획과 비전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자기 자랑에 불과합니다. 악한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고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분투하면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도 안하던 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순종하면서 살던 때일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계획을 거스르면서 제멋대로 사는 삶의 에너지가 되는 자원은 자기 자신 안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계획을 따라서 살게 하는 그 아름다운 삶의 자원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하고 안개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인식도 없고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의지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신 계획을 실현해 가는데 가치를 두는 인생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을 때 그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탈한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붙들어주고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신앙, 그 신앙 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인생의 계획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과 의논한 인생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의 계획은 토막 나 있습니다. 자신의 눈에 선하고 상황에 부합하는 것들을 행할 뿐이지 전체적으로 이 일을 행하고 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지에 대한 명료한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 벌어먹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오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그에 대한 모든 자랑은 결국은 어떠한 수사어구를 동원하든지간에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은 서두르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공부할 결심부터 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면허 따는 만큼도 공부를 안 하고 어떻게 기독교를 파악합니까? 하나님과 은혜의 세계의 구조가 2만개의 부품으로 만드는 자동차보다는 복잡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자동차 면허 시험에서 달려가고 멈추는 것이나 나오지 무슨 구조가 나옵니까? 그런데 그만큼도 공부를 안 하고 절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뜻을 세우고 신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놓아서 창조 주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왜 나를 만드셨고 예수님이 왜 나를 구속하셨고 구원하셔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계획은 무엇이며 죄가 어떻게 이 은혜의 계획에 저항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 죄를 이기고 내가 쓰러지고 넘어지면서도 분투하고 싸워 이기며 결국은 주님이 내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주신 소명을 완수해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생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 모든 미래에 대한 계획과 인생에 대한 모든 생각,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품는 모든 열심, 이 모든 것들은 다 허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견고한 지식 속에서 세워져서 하루하루의 삶이, 그 속에서 성취되는 개별적인 의무의 이행들이 어떻게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갖지 않고 살아가면 우리들이 세우는 인생의 많은 계획들이 결국은 허탄한 것들에 대한 기대요 자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는 사도가 이것에 대해서 깊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늦은 감은 있지만 더 많은 세월이 흐르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왜 삽니까? 여러분들은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시지요? 은혜를 주시면 뭐하실 것입니까? 변화되기를 갈망한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꿈꾸고 있는 변화가 어떤 종류의 변화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많이 기도하신다고 하는데, 여러분, 기도하고 염려하는 바 타개해야할 상황은 왜 타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왜 개척해야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문제로 삼고 환경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고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취업을 위해서 혹은 사업을 위해서 혹은 여러 가지 자신의 신상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여러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왜 그렇게 필수적인 것일까요? 한번 여러분 스스로 답해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많은 계획은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언제나 이같이 성경은 우리에게 기초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점검하도록 부르는 것입니다. 단지 오늘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 보시기에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이 세상에서 복 받고 하나님 몰랐을 때 보다 더 많은 이 세상의 자원을 누리면서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에서 비롯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첨입니다. 그런 아첨을 통해서 자기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은 아직 변화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삶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이유는 죽음의 목적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대답을 내릴 수 없으면 여러분들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한걸음 더 인생을 나아가봐야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들처럼 궁리를 해서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칩시다. 그가 자신이 왜 이 도시에서 돈을 벌어야 되는지, 그리고 이렇게 돈을 버는 것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한 도시에서 장사해서 돈을 벌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조금 일하고 많이 임금을 받는다고 칩시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사람을 동물적으로 만족하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람 있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한 선명한 계획을 모른 채 세월에 떠밀려서 사람들과의 경쟁 속에 휘말려 들어서 그들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은 결코 이 캄캄한 세상에 별같이 빛나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구원해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덕을 선전할 수 없으며 죄와 죄의 결과로 고통 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대안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제시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쓰러진 역사를 다시 세우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은혜와 거룩이 넘치지도 않거니와 넘치는 은혜와 거룩으로 교회의 담을 넘어서 고통 하는 이 세상에서 역사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조류 속에 모두 떠밀려가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이름을 부르며 떠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떠내려갑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러분과 같은 젊은 시절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왜 살아야 하나, 그리고 내가 왜 이 길을 가야하나, 그리고 내가 들어선 이 길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나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신 목적을 성취해 가시나, 거기에 대한 소명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속에 잠재되어있던, 여러분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것들이 그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에서 오는 열등감, 이런 것 모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두셨고 이 자리는 나 아니면 서있을 수 없는 자리이고 여기에서 생명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통해 나는 기쁘고 주님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사람이 정말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보석처럼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반이 없는 모든 삶의 계획들은 악한 자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인생의 길을 물어야 합니다. 물으면 하나님이 안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변화되게 만드십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서 되는 존재가 아니구나’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과 빛으로 새로워지고 한번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신앙의 에너지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쏟아놓으면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어느 방향에 쏟아놓아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허무한 일에 헌신하는데 그 많은 에너지를 쏟거나 혹은 적절하게 그 에너지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역사의 소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삶을 소유의 개념에서 보지 말고 가치의 개념에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한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살아서 우리 모든 인생의 계획이 자기 자랑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사색하고 명상하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5. 자기자랑의 심리는 추종자를 얻는 것입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행5:36)”
사도들이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아주 혁혁한 복음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기적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대조적이겠습니까? 유대교는 차갑게 식어있고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 이제 막 일어선 나사렛 예수에 의해서 전파된 새 종교는 사람들이 참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변화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강력한 임재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상황을 지켜보고 큰 어려움이 닥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을 따르던 많은 백성들의 마음이 바로 사도들에게로 옮겨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이 주모자인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없애버리려고 결단을 하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그 때에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바리새파의 훌륭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당시에 가말리엘과 힐렐이라고 하는 두 학파가 있고 그 두 사람이 바리새파 유대교이 거두였습니다. 이 사람은 비록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학문이 있고 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하의 무리들이 이 사도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끌고 왔을 때에 사도들을 밖에 나가있게 한 다음에 조용히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타일렀습니다. 그때 그 연설 속의 한 대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비록 유대인이었고 바리새파 사람이었지만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들이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가 죽일 수도 있고 박해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전파하는 사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나온 출처가 인간에게서 나온 것 같으면 결국은 무너질 것이고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상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이들을 박해해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설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드다라고 하는 사람의 역사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너희들도 알거니와 드다라고 하는 인물이 있지 않았느냐? 유대인 드다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사상을 받았다고 하면서 깃발을 치켜들었고, 사백 명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를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음성인가 하고 사람들이 잠시 눈길을 주었지만 결국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흩어졌으니 사람으로부터 난 사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핍박하지 않아도 결국은 사라지게 마련이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무엇을 지향하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 이 대목 속에 나오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드다가 자랑하매 사백 인이 따르더니’라고 했습니다. 드다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가르침과 사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사상, 다른 교의 가르침 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가르침이었다기보다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었음을 여기에서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드다는 그 가르침의 기반을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세웠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나쁜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이미 네 번의 설교를 통해서 샅샅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자기 자랑이 의도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여기에 보니까 드다가 그렇게 자랑을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드다를 높이며 드다를 따랐던 사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 속에 깔려있는 심리적인 의도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만들려고 하는 데에 자기 자랑의 목표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대등한 관계에서 사람들을 사귀고 교제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와 교제하는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대등한 관계에서의 교제를 나누지 못하고 항상 자신이 더 우월해지려고 하고, 자기의 자랑을 듣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자기를 추종하게 만들어주는 데에 자기 자랑의 야비한 계획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교제하며 살다보면 대등한 관계에서의 교제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선배로서 후배를 끌어안고 스승으로서 제자처럼 사랑해주고 선생으로서 학생처럼 돌봐주고 하는 일들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에 자신의 목표를 두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를 자랑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록 스승과 제자의 관계,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자기를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대신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자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하나 되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드다는 자기를 자랑한 사람이었고 그 결과 사백 명의 열렬한 추종자를 얻었으니 그의 자랑이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결국 자기를 추종하는 무리들을 만들게 하려고 하는 사악한 지배욕의 발로, 사악한 우월감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감동하는 사람, 자신을 높이고 기리는 사람, 자기를 칭찬해주는 사람을 만들어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이 자기 자랑을 일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혀있는 경향성이고 그 자랑이 가고자 하는 바이니, 어찌 자기 자랑의 경향성이 예수님을 높이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로 섬기고 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신자의 의무와 양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높이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길이요 새로운 가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 자랑의 허무함을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며 그 자기 자랑을 통해서 자신을 따르고 자신을 치하하고 자신을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보여주고 또 우리가 참된 가르침을 그들에게 가르쳐 줄 때에 그들이 우리를 어느 정도 존경하게 되고 우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참된 가르침과 바른 진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동안에 그들이 주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자원이나 개인적이 특징 때문에 우리를 따르고 우리를 높이게 되고 우리에게 헌신된 사람을 만든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그리스도만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나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는 또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가르친 것은 결국 그들이 직접 본받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바울을 통해서 배우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가르쳐준 바울을 잊고 그 바울이 있게 만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랑이 결국은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사악한 시도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여야 하고, 더욱이 사실을 과장하거나 사실을 더 많이 부풀려서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은 실수를 지나쳐서 적극적인 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하고 그분의 이름만을 높이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그 모진 고난을 겪고 핍박을 받으며 신사참배에 반대하면서 옥살이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고 그들을 애국지사로 추대하여서 정부에서 훈장과 상을 주고자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치하게 그 상을 거절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은 나라에 충성하기위해서 투옥하고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다가 보니까 나라에 유익을 준 것인데 만약에 그것이 상 받을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이 받으셔야할 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훈장과 수많은 국가 유공자의 그 명예를 스스로 거절하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았던 한 성도로 남기를 자처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만들기 위한 잠재의식의 발로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기는 죽고 주님을 드러내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운영하는 모든 것에 배여 있어야 하고 우리의 언어생활에 배여 있어야 하고 특히 교회가 혹은 개인이 주님 앞에서 예배를 진행하거나 혹은 모든 예식을 거행함에 있어서도 이 정신이 샅샅이 그 모든 순서마다 배어있어서 결국은 사람은 감추어지고 주님이 드러나는 이러한 일이 일상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사명의 catchphrase는 구호에 그쳐야 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하여 그 속에서 그것이 원리가 되고 실제가 되어서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기 자랑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이 가장 자신의 생애에 알맞은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신념의 모습입니다.
결국 드다는 뛰어난 재주로 자신을 자랑했고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니 자신의 기도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드다는 죽임을 당했고 그렇게 드다가 죽임을 당했을 때 드다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충성심도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결국 드다의 자랑이 자기 자랑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사상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모든 열심이 하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웅변적으로 입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자신을 나타내기를 두려워하고 우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내게 자랑거리가 없다고 선언하던 수많은 초대교회의 성도와 사도들, 그들의 결말은 어떠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의 칼날에 죽어갔고 고난의 가시밭길에서 쓰러져 유명을 달리 하였지만 그들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 복음을 전파해준 사람이 죽으면 죽을수록 그 무리는 점점 불어났고 순교의 피를 먹고 교회는 점점 강력한 피를 가진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차이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드다는 자기를 자랑했지만 사도들과 헌신적인 성도들은 예수를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해주니까 예수를 전해준 그 사람은 잊어버렸어도 그들을 통해 전파 받는 예수 그리스도는 잊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 모두 그 고난의 피를 마시고 강력한 군대와 같은 교회로 어두운 세상을 누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드다가 죽자 드다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흩어졌지만 사도들이 죽자 그 순교의 피를 머금고 교회는 더 강력한 군대같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자기 자랑과 예수 자랑의 차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주님만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일을 매우 두려워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고 추종하는 그것을 즐겨서는 아니 되고 매우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여나 그들이 나를 따르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것이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 아닐지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서 저들의 영혼에 어떤 해와 악이 끼치지 아니하도록 깊이 근신하고, 나는 잊혀지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생각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신자를 볼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는 그를 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이상적인 존재의 방식입니다.
오늘 드다를 보십시오. 자기를 열심히 자랑했고 수백 명의 추종자를 얻었지만 자신이 죽자 그 사상도 드다가 가르친 모든 진리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듯이 모두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흩어질 때 가르침도 무너졌고 드다도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될 삶은 그런 삶이 아닙니다. 구석구석에서 삶의 매 순간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억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낮아지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6. 아첨과 자기자랑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3)”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특별히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인생이 곤고하고 고난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시편 103편에서도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곤고하게 되는 것은 지존자의 말씀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곤고하게 되고 사슬에 묶이게 되는 그 말할 수 없는 부자유함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지존자를 멸시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 당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경건하게 분투하면 고난이 옵니다. 세월이 떠밀면 떠미는 대로 바람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진지하게 분투하다가 보면 반드시 거기에 남이 겪지 않는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우리를 고난으로 몰아넣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려고 분투하면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우리에게 죄가 있고 분투하고 걸어가려고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에도 잘 해당이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제3의 고난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 제3의 고난은 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팔자가 세다고 할 때의 고난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팔자라고 설명합니다. 그 팔자라고 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에 인과응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원래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정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무책임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러면 누가 정했답니까?
제가 이름 붙인 제3의 고난은 대개 그 사람의 올바르지 않은 삶의 태도에서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김세윤 박사는 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르지 않은 태도이다’ 결국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계속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 태도는 성품의 발로입니다. 성품에서 비롯되어서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곧 태도이고 그 태도가 계속 되어질 때 그 사람의 성품으로 그려간 인생의 궤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난 사람인데도 자꾸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과는 깊이 연루되어서 이해관계를 같이 하기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로부터 어떤 피해나 도전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냥 그 사람을 마주 대할 때 왠지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사람은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누구에게도 모두 본성적으로 어떤 것을 인식해서 이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또 어떤 것들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본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고 그 도구를 통해서 판단을 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을 옳다 그르다 이야기하기 전에 그런 사람으로부터 오는 느낌, 인상 같은 것들을 안 좋게 만들어낼 때 그 사람의 인생이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악의가 없는데 계속 다른 사람과 부딪히게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아주 선하고 좋은 뜻을 갖지 않고 자기에 대해서 대적하는 감정을 갖거나 대적은 아니더라도 어디 가더라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가 따뜻하게 받아들여지는 진실한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까, 점점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고 방어적이니까, 그 사람들로부터 피해 받지 않기 위해서 또한 동일하게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습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오래 살게 되면 사람 자체가 닫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계속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험들을 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성품이 그어놓은 궤적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삶에 대한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이 태도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복음 안에서의 거룩한 성화와는 분리된, 잘잘못을 이야기할 수 없는 제3의 것이냐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태도는 반드시 우리의 본성과 연결되어있고 우리의 본성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만지고 지나가든지 혹은 죄가 만지고 지나가서 영향을 끼치든지 혹은 두개가 함께 영향을 미치면서 어떤 때는 좋은 면으로 어떤 때는 나쁜 면으로 작용을 하게되어있는 것이 인간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일반적인 관찰에서 볼 때에도 한 사람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킴으로서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기독교의 변화의 방식이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항상 부분적인 수선에 불과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목회를 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강의는 부담이 없습니다. 한번 외치고 감동을 주고 돌아오면 끝입니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욕을 하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함께 생활하며 사람들을 목양하고 돌본다고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사람이 계속 고난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계속 은혜를 받아도 그 태도가 잘 고쳐지지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13년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시간 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 연단이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 저를 교수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니 전도사들 중에서는 좀 여유가 있게 살았는데 같이 섬기는 자매가 여러 가지로 어려웠습니다. 심지어는 차비가 없어서 교회에 못 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시켜서 돈을 보내줬는데,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매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신앙도 좋고 주님 만난 경험도 있고 일생을 주님만 위해 살겠다는 뜻도 확고한데 태도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그 자매를 지켜보니 그 자매가 험한 세월을 살아왔는데 성품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목자이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의 진가를 평가하고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누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 사람을 탐구하겠습니까?
그러니 교회에서 사랑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니 좀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회심해서 기초 공사하고 건물이 지어져 올라가는데 왜 다 안 지어졌느냐고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그 자매는 살아온 삶의 태도가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신앙으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있어도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 자매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매와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자매보다 신앙이 좀 안 좋고 날라리처럼 굴어도 인간적인 자매가 좋지 소리 질러도 메아리도 오지 않는 자매는 싫은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풍겨나는 향기나 인격, 여유, 이런 것들의 분위기가 가까이 다가가고 함께 하고 싶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전적으로 성화의 문제와 분리된 그야말로 순수한 태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깊이 캐 들어가 보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문제와 맞닿아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서 그것을 누가 가르쳐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불러서 ‘내가 너 도와 줬는데 왜 와서 고맙다는 소리 하지 않느냐? 엽서라도 한 장 보내면 안 되냐’ 했더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황당해했습니다. 자존감이 강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상했겠습니까? ‘너는 깨트려져야 하니 내가 주님의 도구가 돼야 겠다’고 마음먹고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했습니다. ‘너는 삶에 대한 태도가 틀렸다. 너 인생을 그렇게 살면 굉장히 힘들다. 너 힘들게 살아왔지?’ 그랬더니 그 자매에게 그 사건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의 비늘이 벗어지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다 생각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기분나빠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다 모아놓고 설교할 때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매가 울면서 이야기하기를 아무도 그런 것을 가르쳐주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설교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으면서도 태도를 180도 고쳐놓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교육 자체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육 자체가 성경 가르치려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선생님들이 세수도 안하도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이 닦는 법, 발 닦는 법, 세수 하는 법, 똑바로 앉아서 밥 먹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주일학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생활을 가르쳐주다가 성경을 가르쳐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화: 강원도 탄광촌으로 봉사활동 나간 이야기-교회마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씻겨 주기부터 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다 돌보는 것이 목양입니다. 둘러보면 ‘저 자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참 고난스런 인생을 살겠다’ ‘저 형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많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칠 텐데 어쩌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삶의 태도입니다. 그 삶의 태도가 결국은 태도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과 성화의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속 고민하면서 변화되어야 하지만 그 교육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모델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가장 중요한 이치는 엄마 아빠를 모델로 보고 배우라고 가정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가정은 계속 세워지고 아이들은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경건한 부모의 신앙을 보면서 자라게 하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문제는 가정이 그것을 못 가르쳐준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망가진 사람인데 어떻게 자녀들에게 가르쳐주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된 것을 못 배우고 이상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자꾸 보니까 만성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유익은 교회에 와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 이것이 커다란 교육적인 효과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공사 중이니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사 단계를 상당히 뛰어넘어서 완공되어가고 있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우리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제가 알려드린 이 시각을 가지고 주위에 있는 지체들을 보십시오.
(예화: 10여 년 전에 한 지체가 시집을 보내달라고 하기에 기도를 많이 할 것, 옷을 예쁘게 입고 화장을 곱게 할 것,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인사를 잘 할 것, 이것을 잘 지키면 2년 안에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삶에 있어서 태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위해서 오늘부터 내가 자랑하기로 뜻을 세운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내가 높아지고 싶다’고 어느 날 선언하고 자기 자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본성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경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억제되지 않고 계속 흘러나와서 삶의 한 태도를 형성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깊이깊이 더듬어 가면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3이라고 분류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 안에 반드시 그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게 되면 자기의 그 자랑에 깊이 심취하는 사람, 즉 자기를 추종하는 무리를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 대해서 구차하게 생각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말입니다. 그래서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그를 추종하는 똘마니들은 있지만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아름다운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는 세워지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랑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에 대한 찬미자가 되어줄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그렇게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그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힘들어하시지만 한편의 논문 같은 설교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10편정도 다 듣고 나면 두꺼운 한권의 책이 되는 것 같은 설교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속에서 뼈대가 세워지면서 신앙의 골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못 받으면 낙지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컵에 담기면 똑바로 선 것 같지만 접시에 올려놓으면 퍼질러서 누워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할 때 본받지 않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뼈대가 분명하게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자기 그릇에 우겨넣으려고 해도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의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뼈가 없어서 컵에 담으면 컵 모양, 사발에 담으면 사발 모양, 퍼진 접시에 던져버리면 쫙 누워서 펑퍼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낙지 신자라고 합니다. 어디에 집어넣어도 거기에 적응하는 신자, 그런 신자를 만들어서 뭐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교리적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서 어떤 확신과 신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연단하시는 하나님’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깊이 자극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동시에 이런 삶의 태도, 성화되지 못한 인격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러나 거기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치 죄와 거룩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아디아포라의 문제로서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러한 삶의 태도들에 대해서도 깊이 배우고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경륜이 있는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똑바른 가르침을 좀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삶의 태도들을 실제적으로 고쳐나가야 합니다.
늘 싸우는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카드를 가지고 가서 마구 써서 빚에 계속 몰렸습니다. 아내가 계속 바가지를 긁으니 남편은 고난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원에 올라가고, 철야하는데, 카드 안 쓰면 되지 기도원은 왜 가고 철야는 왜 합니까? 삶의 태도와 습관이 잘못 돼서 온 것이면 기도한다고 해결됩니까?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흐르는 성품의 발로이고 은혜는 하나님 앞에 충만함을 받을 때에 밀려오는 것인데 삶의 태도를 결단하고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속 술 먹으러 가는 습관을 가진 채 술 끊도록 도와달라고 중얼거리며 기도하고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무슨 소용입니까?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면 여러분 인생에 행복은 없습니다. 계속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항상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 의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자랑이 바로 그러한 성질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러한 삶에 대한 견해를 아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자랑을 늘어놨다고 합시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 넋을 놓고 침을 흘리다가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될까요? 간음하고 살인한 죄에 비할 수 있을까요? 배교한 죄에 비할 수 있을까요? 잠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산 태도밖에 더됩니까? 그런데 그것이 계속 그 사람의 삶을 곤고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저해하고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자랑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히브리 시에서 평행법입니다. ‘아첨하는’과 ‘자랑하는’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입술’과 ‘혀’가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끊으시리니’가 공통으로 걸립니다. 그러니까 아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거기에서 그 마음을 따라 작용하는 입술과 자기 자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에서 움직이는 작용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입 안의 혀, 이 모든 것들이 다 동일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끊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아첨’은 성경적으로 볼 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아첨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아첨은 올곧음을 상실한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행동입니다. 두 가지 의도에서 그런 일들이 행해지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받을 지도 모르는 진노, 하나님의 심판, 이런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짐짓 의로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없이 주일에 교회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무슨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 안나오면 일주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안나오고 만다’고 하는데 그것은 더 나쁜 짓입니다. 마음 없이 예배드리는 사람이 한대 맞는다면 아예 안나오는 사람은 대여섯 대 맞아야 합니다. 마음에도 없이 나와서 건성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배교에 가까운 일이라면 아예 안 나와 버리는 것은 배교입니다.
제가 우연히 한국교회사 자료를 읽으면서 1920년대에 서울에 있는 100년 넘은 역사를 가진 어느 교회의 당회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당회록은 회의한 결과를 적는데 그 당회록은 완전히 징계기록이었습니다. ‘아무개는 수시로 교회를 결석하기에 당회가 불러서 엄히 주의 경고하였으나 계속 교회를 결석함으로 출교하기로 하다’ 출교는 거의 이단자에게 내리는 excommunion입니다. 천주교식으로 말하면 파문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는 술을 먹었다고 하는데 불러서 사실을 조사하니 사실이었다. 엄히 꾸짖으니 그가 통절히 회개함으로 견책하기로 하다’ 심지어는 딸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그 어머니를 엄청나게 징계한 것도 나옵니다. 이렇게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려고 했던 선조들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으니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자체가 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까봐 미연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예방주사 맞는 식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또 반대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는 없지만 하나님께 아첨하면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신다고 여기고 진실한 영혼의 변화 없이 하나님 앞에 짐짓 꾸며내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기대하면서 잘 보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변형된 기복신앙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께 대한 아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참 모습이 뭔지 자기가 잘 들여다보기를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진짜 잘 된 사람이어야지 잘 한 것처럼 보여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아첨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어떤 올곧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나 인격적인 변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계속 하나님 앞에 아첨하면서 사는 것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확연하게 구원 못 받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때 사람들이 세례 받으러 수없이 밀려올 때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면서 고함쳤던 이유도 바로 죄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많이 떨렸지만 요한이 볼 때에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뉘우친 참회가 동반된 회개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첨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올곧음이 없이 행하는 모든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보이려는 행동, 이런 것들은 모두 아첨에 불과합니다. 내용을 먼저 갖추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변화를 받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렇게 내면의 세계가 갖춰진 참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아첨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으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어떤 위협이나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는 그렇게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 사람에게 아첨해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고자 할 때 그 사람에게 아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될 것은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과 옳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기대하면서 그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에게 대한 아첨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 사람을 향해서도 진실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물론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아첨에 기여하는 몸의 기관이 입술로 묘사된 것은 너무 멋있습니다. ‘우리가 입술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얼마나 립 서비스가 믿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아첨입니다. 이것이 앞의 두 아첨과 틀린 이유는 이것은 진심으로 행하는 아첨입니다. 그러면 그 아첨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대상이 하나님과 사람일 경우에는 그 사람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자기가 받을 지도 모르는 두려운 심판이나 해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는 자격이 없지만 아첨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어떤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첨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아첨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경계합니까? 자기 자신이 두려워서 아부를 좀 해야 합니까? 그런 것이 아닌데도 소위 이야기하는 이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자기 아첨은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동기는 앞의 첫 번째 두 번째와는 좀 다릅니다. self flattery(자기 아첨)는 진심으로 자기 자신 편을 들어주어서 자기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어떤 의무로부터 이탈시키거나 혹은 이미 이탈되어서 죄에 빠진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아첨하고나면 양심의 가책 같은 것들이 현저하게 감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커다란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 있으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첨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첨을 하게 되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고 정직하게 서서 자기 자신을 고치기보다는 자기가 하나님의 의무로부터 멀어져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죄악 된 상황을 정당화하는 일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아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감추어진 것이 없이 모두 드러나는데 자기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아첨으로 누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 무슨 소용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당연히 올곧음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패역한 사람이고 굽은 사람입니다.
세 가지 경우를 이야기했는데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것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인 본질과 동일본질이라고 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다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런 자기 자랑의 발로는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경우에든지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고의 중심 자리에 온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중심 자리에 오시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이 될 때 그것이 진짜 경건한 신앙생활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늘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 주간 동안 입술에서 맴도는 찬송이 있습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결국 용감하게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 굳게 붙어있고자 하는 올곧음의 경향성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을 당해서 손상당하는 자신의 행복보다 집착해야할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고 받은 바 그 은혜의 에너지를 교회의 담 안에서 개인 경건의 차원에서 부패시키고 다시 은혜를 받고 하는 것은 힘든 것이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받은 바 그 은혜의 에너지를 가지고 이 교회의 담을 넘어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용감하게 살아갈 때 거기에서 받은 바 그 은혜들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만 돼서는 안 됩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람만 되어서는 안 되고 뱀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은 무섭게 책을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좋은 신앙서적 뿐 아니라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이 나라와 민족이 걸어온 길 가는 길, 조국의 교회가 걸어온 길 가야할 길,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밝게 해주는 책들이 손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과 함께 눈물 흘리고 그것과 함께 고뇌하고 그것과 함께 슬퍼하고 하면서 신앙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낙지처럼 살아가는 신자들이 되어서는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많이 생산해서 교회 담 밖으로 집어 던져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접시 같은 세상에 가면 퍼질러 자고 컵 같은 세상에 가면 고추 서고 사발 같은 세상에 가면 앉아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역사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자랑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품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에게 자기가 행하고 있는 많은 파악되고 파악되지 않는 수많은 삶의 옳지 못한 태도들, 그것들의 근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떨어진 것인지 파고들어서 오로지 하나님이 가치 판단의 중심에 있게 하시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인생의 중앙에 계시게 해서 그 하나님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셔서 자신의 인생의 나아가는 길을 판단하고 방향을 밝힐 수 있도록 하고, 성도의 모든 즐거움이 역시 우리 인생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기 시작하면 벌써 그 자신의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런 것들을 놓고 볼 때 결국은 그런 자기 자랑의 습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수많은 대적자들을 만들어냅니다. 추종자 몇 명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은 드다가 도달한 결론과 똑같이 되고 맙니다. 흩어질 사람들입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정말 만족하고 그 안에서 행복한 사람, 그래서 그 안에서 즐겁고 그것을 인하여 기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행복하고 그 안에서 즐겁고 그 안에서 안식하고 그 안에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 자랑을 일삼으면서 살아가는 이 삶의 태도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아주 심각할 정도로 영혼의 상태와 관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오늘 내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고 내 삶 한복판에서 역사하고 계신 최고의 가치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은혜가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육신에 속한 것들을 자랑하고 그것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비굴하게 하고 그들을 우리에게 속하게 만들고, 그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어서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들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 입술도 그 혀도 끊어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끊는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심판용어입니다. 파괴와 함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자원으로 해서 날마다 더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가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7. 신실함과 자기자랑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20:6)”
지난주에는 아첨과 자기 자랑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아첨은 하나님께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데 자신에게 대한 아첨이 자기자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자기 자랑과 신실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잠언은 문맥이 길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짤막짤막한 경구들이 이어져서 잠언을 이루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잠언은 문맥을 찾는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담처럼 짧게 압축된 말로서 그것들이 연결되어있는 것이 이 잠언 전체의 구절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의 앞뒤 내용도 다른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6절 한절만 정신 차리고 보면 자기 자랑과 신실함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많다’ 혹은 ‘많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하는 대목에서 ‘인자함’이 ‘하스도’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로 나옵니다. 그것은 ‘헤세드’라고 하는 ‘인자’ 혹은 ‘자비’를 가리키는 단어 뒤에 삼인칭 남성 단수 소유격 접미어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인자함’이라는 뜻이 됩니다. ‘자랑 한다’는 말은 ‘이끄라’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소리 지르다’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의를 소리 지르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리요’하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몇 개 안되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헤세드’는 70인 역에서는 ‘엘로스’로 또 신약 성경에서도 역시 그렇게 번역되었는데 특별히 이것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그 자비로운 은총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랑한다고 했으니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그 헤세드를 자랑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라고 했으니까 이 헤세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자, 은총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은 성도가 다른 이웃을 향해 베푸는 은혜로운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헤세드는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자비와 인자를 가리키지만 그것을 또한 연장선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고, 그들을 섬기고 돕는 그 행위 자체도 헤세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서 6장에 ‘사람아 주께서 네게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이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라고 할 때 그 ‘인자’가 바로 지금 말씀드린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께로부터 받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헤세드를 베푸는 것, 그것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러한 자기의 인자한 자비의 행위를 큰소리로 외치듯이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하니 이것은 곧 자신의 선에 대한 자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자가 이것을 기록할 때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으니 이 자기 자랑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 헤세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특별히 언약관계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헤세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시드라고 하는 피동 명사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성도이고 우리말로 성경에서 시인이 노래할 때 ‘경건한 자’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은 아닙니다. 결국 성도라고 하는 자체가 언약 언어입니다. 언약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 언어입니다. 언약 언어인 성도는 곧 하나님의 헤세드를 일방적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특징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은총적 사랑인 헤세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큰 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받은 헤세드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매우 커다란 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속에는 항상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적 사랑에 대한 감사가 가득 차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만든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적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가지고 계신 인생의 모든 계획이야말로 가장 선한 것이라고 믿으며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바로 헤세드의 사람들이며 곧 하시드, 즉 성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동기가 많이 있습니다. 가장 저급한 동기는 순종 안하면 하나님 앞에 얻어맞을까봐 무서워서 순종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순종이 절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순종의 동기일 수 없습니다. 그 못지않게 또 사악한 동기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한 일환으로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첨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기복신앙을 깊이 파헤치고 가면 이런 아첨적 신앙과 많이 만나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 아첨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복 신앙 자체가 사람들을 이런 아첨으로 인도하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참된 순종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존 오웬은 자신의 저작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순종의 참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진정한 동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형벌을 피하거나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가장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그분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신앙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가장 선하다고 믿고, 아직 이성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살아봐야지 입증되는 부분도 있지만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의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순종의 동기인 것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우리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은 우리 미래에 대해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을 가장 선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성경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느냐는 질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헤세드에 대한 경험입니다. 성도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이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들이고 그랬기 때문에 그 헤세드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가장 선하신 분이시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가장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 수 있도록,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치열하게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지면서도 남긴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를 저 풀무불 속에 넣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시려니와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선한 계획은 삶과 죽음 사이를 초월한다고 하는 아주 훌륭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심판에 대한 공포만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양심을 일깨우고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복음적인 회개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적인 회개는 하나님의 이 은총적 사랑인 헤세드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고 깊이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은혜 아래 굴복하는 것, 그래서 그 은총적 사랑에 빚진 자임을 자각하고 그 안에서 행복해 하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받을 그 은총적 사랑에 대한 기대, 지금 받고 있는 이 은총적 사랑의 경험과 혜택 때문에 그 은총적 사랑을 배반하고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거절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군사들을 향한 고백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 주의 사자가 지난 밤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기를’하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깊은 감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나타난 하나님의 그 크신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그 포악하던 사울이 변해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사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헤세드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것이고 그 언약의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헤세드를 행하며 사는 것은 그런 헤세드를 받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 때문에 사람들에게 헤세드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원이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마치 자기의 것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베푸는 모든 이웃을 향한 헤세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헤세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추론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웃을 향해서 베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헤세드를 유일한 원천으로 한다고 하면 불신자들이 요즘 같은 연말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물질과 시간을 나누는 그 모든 섬김들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헤세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경험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하는 본성의 빛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고 그것은 불신자들에게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영적 선(spiritual goodness)은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본성의 빛에서 비롯되는 본성적 선(natural goodness)은 그들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조차도 전혀 행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망가진 상태로 내버려 두셨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은 지옥을 방불 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망가트려서 파괴해버릴 세상이 아니라 회복할 세상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죄가 급습하여 사람을 모두 망가트렸지만 여전히 상당한 부분의 본성의 빛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면 양심이 편안하고 격려를 받고, 악을 행하면 고통과 번민 속에 사로잡히도록 상당부분을 남겨두셔서 본성의 빛을 따라서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환경보호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이미 많은 환경적인 배려 속에서 창조 세계의 연대를 꿈꾸며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레이첼 카슨이라는 사람의 평전이 나와서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그는 시인의 마음으로 과학을 하는 사람이었고 환경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한 미국인이었습니다. 특히 살충제의 사용을 극력 반대하던 뛰어난 환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평전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향해 사랑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사랑하라.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어진 창조세계의 동창생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모든 환경과 함께 어울려서 존재하게 될 때 인간이 참으로 인간일 수 있다고 노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레이첼 카슨을 가리켜서 시인의 마음으로 환경을 노래한 과학자라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우리의 선조들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감나무에 입이 다 떨어지고 빨간 감이 매달리면 맨 위의 네댓 개는 안 따고 놔둡니다. 어릴 때는 너무 높아 막대기가 미치지 못해서 안 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금기였습니다. 까치가 와서 먹게 내버려두는 까치밥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치도록 자기 자신을 닥닥 긁어서 다 소진해버리는, 그리고는 자기에게 없는 자원을 얻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무자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 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마음으로 창조세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도 헤세드입니다. 그런데 그런 헤세드는 반드시 언약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빛을 주어서 사람과 주위에 있는 사물들에게 선을 행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이 기쁘고 유쾌하지만 악을 행하면 번민을 느끼는, 그래서 용서한 피해자는 행복할 수 있지만 가해자는 영원히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본성의 빛에서 나오는 많은 선한 행실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대 자체가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제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총체적인 계획을 따라서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의 선한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한 헤세드의 선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의 범위 안에서 선하게 여기는 바를 따라서 본성의 빛을 좇아 행하는 선입니다. 그런 선도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필요하고 그랬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회개할 날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찾을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지금 불신자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자가 언약의 백성들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헤세드를 베풀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헤세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헤세드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헤세드를 베푼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원천은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니니 자신이 행하는 헤세드에 대해서 사람들 앞에 소리치듯이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혹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이런 헤세드를 베풀도록 선행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그 헤세드에 대해서 깊이 자랑하고 노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반부와 함께 후반부에서 대칭을 이루는 구절이 하나 나오는데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리요’ ‘충성되다’고 번역된 부분은 ‘에누미’(?)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정확히 번역하면 ‘충성된’의 의미는 아닙니다. 이 단어는 추상 명사인데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온 부사 형태가 우리들이 기도할 때 쓰는 ‘아멘’이라고 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그렇게 되리라’의 뜻입니다. ‘아만’은 원래 굳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역형 동사로 쓰이면 ‘믿는다’는 의미가 되고 사역형 수동태로 쓰이게 되면 ‘양육하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아만’이라고 하는 동사는 신실함, 혹은 견고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충성됨이라고 하는 번역보다는 신실하고 견고한 정도로 번역하면 이 ‘에누미’의 원뜻을 가장 잘 반영하는 번역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신실하고 견고한 사람을 누가 찾을 수 있으리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헤세드를 행하면서 그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신실하고 견고한 신앙 인격과 합치할 수 없는 성향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신실한 사람, 하나님을 향해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헤세드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헤세드의 비밀, 견고함의 비밀, 신실함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자기의 인자한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실합니까? 어떤 사람이 견고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어떤 사람이 파도치는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헤세드에 깊이 감화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의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적 사랑이 이 헤세드의 은총, 언약 관계 안에서 받은 이 언약적 사랑인 은총적 애정인 이 헤세드에 대한 깊은 감화, 그것이야 말로 그가 하나님 앞에 모든 선을 행하고 이웃을 위해서 자비를 베푸는 온전한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적 사랑, 헤세드에 대한 깊은 감화가 없다면 그는 껍질뿐인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없고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적 사랑의 위대함 보다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쓰레기 같은 선행의 장점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칠 수가 없을 것이며 그 경향성 아래서 그는 외식을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사모해야 할 가치는 이 세상에서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훌륭한 가치이지만 그 가치는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가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 가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해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판이나 상황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이것이 갖는 가치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의 특징은 신실함입니다.
(예화: 여대 축제에 강의하러 가면서 고급 카메라를 가지고 갔는데 잃어버린 이야기)
저는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조잡할까?’생각했습니다. 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다시 가보면 없어지는 것입니까? 거기에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은 범죄입니다. 도서관에서 책 빌리고 안 갖다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적으로도 점유이탈물횡령죄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예화: 외국의 소년들이 길거리에 떨어진 과일을 나무 밑에 놓고 가더라는 이야기)
피 끓는 외침으로 이 민족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너는 정직해지지 않고서 별짓을 다해봐라 잘사나’ 이 모든 것들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치루는 어마어마한 비용입니다. 정직해지기 위해서 우리들이 치러야할 희생이 많지만 부정직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손해는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우리가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이 나라라고 하는 실체 자체를 믿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83%가 다시 태어나면 이 나라에서 안 태어나겠다고 하는 질병도 궁극적으로 캐 들어가 보면 결국은 부정직에서 시작됩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신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외면과 내면이 일치되는 신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런 시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가 막힌 선교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조금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이 세상이 너무나 캄캄하기 때문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의 가치를 물질적인 번영이나 명예에 두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생의 가치는 그것보다 훨씬 높은 것입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는 행복을 인생의 최상의 가치로 삼고는 이러한 가치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자신이 희망이 있고 이 역사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얼치기들 때문에 망한 나라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순종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피 끓는 젊음을 이 역사를 개조하는데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 시절에 베짱이처럼 농땡이 치며 살면 안 됩니다. 저도 교회에 사람이 늘 북적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이 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좋지 할일 없이 오고가는 것은 싫습니다. 죄 짓는 것 빼놓고는 무엇을 하든지 좀 열렬히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끝내고 나면 자기가 해야 할 다른 의무로 돌아가야 합니다. 치열하게 분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부패한 정치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장 썩고 뇌물 받는 공직의 한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장 부정직한 제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래서 돌멩이 맞으면서 한번 빛답게 살아보십시오.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하는 것을 보여주고 피를 토하면서 죽어도 그는 성도로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이 없는 젊음은 미친 망아지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생각해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연약한 지체들을 생각해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거룩한 소명을 받았는데도 주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악함을 생각해도 눈물이 쏟아지고, 이 민족을 생각해도 눈물이 맺히고, 조각난 이 민족의 역사를 봐도 가슴 아프고, 동강난 한반도를 봐도 가슴이 쓰라린 그런 젊은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첨이나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는 이 경건한 특성과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는 이 경향은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성품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자기의 인자함을 많이 생각하고 그러한 행동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자랑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만 자랑합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지를 압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왜냐하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성실하신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니까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은 자기는 그런 헤세드를 받을 아무 자격이 없는 미천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헤세드의 경험은 거룩의 경험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매일매일 받는 헤세드의 사랑이 아침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이상하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까. 내가 아무 공로도 없고 아무 선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사랑하실까? 정말 놀랍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감사와 은총적 사랑인 이 헤세드에 대한 감격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헤세드를 자랑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헤세드의 경험이 마르고 나면 자기의 헤세드의 장점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한 경험이 언약 관계 안에서 그치지 않을 때에는 자기의 악함과 그 헤세드를 받을 자격이 없는 비천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결과가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고 자기에게 은총적인 사랑인 헤세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서 반감을 갖던지 열렬한 추종자로 만들던지 그렇게 되는데 어느 쪽엔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믿음의 비밀은 자신 안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로 우리를 점점 데려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고 만물의 찌끼와 같이 더러운 존재일 뿐이며 위대한 것이 있다면 자기같이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진 언약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에게 값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적 사랑인 하나님의 헤세드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혹시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한 것도 자기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서 결국은 그 자랑 속에서 자신은 잊혀지고 그 약한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자랑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신실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런 자기 자랑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침마다 새롭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은총적 사랑의 경험 속에서 살아갈 때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들은 에누미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신실하고 견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8. 언약백성의 자랑거리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9:24上)
지난 시간에는 자랑하는 것은 신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토록 자기 자랑을 미워하시고 그 자랑하는 것의 악을 지적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자랑하며 살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에스겔과 함께 비록 구약의 선지자였지만 인간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와 예레미야서를 보면 인간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림 같은 묘사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롭게 해주실 때 그들의 영혼과 성품과 마음 안에서 어떤 쇄신의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해학처럼 묘사하는 선지자가 바로 에스겔과 예레미야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제 인간 안에 많은 악들을 묘사하는 가운데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기서 인간이 자랑하는 것이 인간의 부패함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언약백성 안에 있는 윤리는 자기를 자랑할 수없게 되어있음을 다시 한번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명령을 내리시면서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먼저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이런 명령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명령이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미 이 주어진 명령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인간들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언약관계 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고 있지만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선민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강력한 긍지를 가졌습니다. 땅도 없고, 임금도 없고, 나라도 없고, 영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뭘 믿고 그렇게 강력한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과 맺은 언약, 그 언약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강력한 자부심이 땅이 없고, 유명한 임금이 없고, 영토가 없어도 그들로 하여금 자긍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려고 할 때 자꾸 언약관계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하고 비교를 해서 나의 이 언약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기대되는 의무를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관계 자체를 자신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언약관계가 있어서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언약관계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복종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언약관계 안에 있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은혜와 사랑, 자비와 보호, 위로와 가장 많은 영적인 은사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받을 때는 언약관계 안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러므로 너는 내 백성이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지, 그리고 의무를 제시했을 때는 그런 의무 없이 방종하게 세상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이 그런 식의 일관성 없는 생각과 삶의 선택이 그를 계속 부패한 삶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신자가 누구이고 그 언약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 축복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 의무 자체가 자랑스러워집니다.
(예화: 전도사이셨을 때 어느 엄마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자랑하는데 학교에서 한 반에 10등 안에 드는 학생들만 남아서 공부를 가르치고 나머지 애들은 집에 가라 고 하면서 자기 딸이 상위권 안에 들어서 남아 공부한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는 내용)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조금 그런데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나도 막 살걸, 저렇게 막 자랑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그러고 마치 똑같이 달리기를 하는데 나에게 모래주머니 세 개 채워놓고 제는 운동화 신겨놓고 달리게 하는데 그게 어떻게 경쟁이 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의무에 대해서 긍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랑하는 것과 자랑을 금하는 것이 곧 그것을 얻고 참는 것까지 정죄한다고 이렇게 문학적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랑을 하는 것을 정죄한다는 것은 그것을 의지하고 사람들에게 표명해서 이제 이상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으려고 하는 욕망을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를 찾고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동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오늘 여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고 세 가지로 나옵니다. 그중 첫째가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지혜를 자랑하지 마라. 그리고 또 용맹이 있는 자들은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그 다음에 또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 이야기는 용기나 부, 혹은 지혜 이런 것들을 도무지 얻으려고 하지 말라.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 이렇게 논리적으로 균형을 가지고 생각을 해야지 되는데 묵상을 하지 않으니까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여러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받는 모든 고난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서 오는 고난이 아니라 그들 중에 상당한 부분들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오는 고난이다. 설교한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했습니다. 안 들은 것처럼 그렇게 쌩뚱맞게 그렇습니까?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안 바꿉니다. 그러면서 냅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그런데 그럼 안 됩니다. 그럼 지구를 떠나십시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니까 자기 혼자서는 망가져도 됩니다. 자기가 그것을 너무나 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그것을 다 견뎌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지구를 떠나서 우주복 입고 우주공간에서 혼자 살다가 생긴 대로 거기서 먹고, 거기서 놀다가 죽으면 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같이 삽니다. 내가 변화되기 싫어, 내가 성화되기 싫어, 그래서 나의 삶에 대한 태도도 고치기 싫어, 자기가 불행해지는 길을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다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어느 통계에 보니까 70%이상이 자기 아버지가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자기들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자기 자식들이 자기를 좋아하나 두고 보라. 나는 중간에 서서 위에도 아버지가 계시고 아래도 아들이 있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내가 얘기합니다. 물론 우리들의 아버지 가운데는 진짜 나쁜 사람도 많습니다. 진짜 성품 자체가 악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은 자식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만큼 아버지가 나쁜 아버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도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가 안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진짜로 자식들이 아버지를 생각할 때 아, 우리 아버지 나쁘다. 사실은 아버지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인생을 좀더 살다보면 알게 됩니다. 태도가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지적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진솔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으면 부인이 가끔 이야기를 해주지만 잔소리라고 듣고 아이들은 감히 폭압적인 아버지의 군림 앞에 아버지 사는 인생의 태도가 잘못되었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없고 또 이런 것을 판별할 수는 있지만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가풍이 올바로 되어 있고 비록 신앙이 없어도 인간이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서 확실히 정리된 가풍을 가지고 있는 집에서는 그런 것들이 많이 제거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보면 올바르게 정도를 따라서 인생을 살고 예의를 갖추면서 사는 사람들은 깊이 성화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가정교육을 똑바로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자기의 죄를 인해서 울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하나님의 교리를 터득하고 그렇게 난리를 쳐도 자기 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성경에 의하면 누구에 의해서 가르쳐지게 되어 있는가 하면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서 가르쳐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잠자리가 알을 낳듯이 그냥 사람들이 물고기나 잠자리가 알을 낳듯이 그냥 자생적으로 곤충이 번지듯이 이렇게 번지게 안 하시고 배속에 넣어서 그것을 태어나게 하시고 동물처럼 낳아놓고 어디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놈을 품고 그리고 새나 짐승들은 자기가 일어나서 움직이면서 벌레라도 잡아먹을 수 있으면 부모하고 헤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품고 시집 장가갈 때까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부모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경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보고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를 못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었을 때 아담이 아직 자식을 안 낳았는데도 하나님이 경륜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기서 부모를 통해서 참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어떤 것인가 하면 부모 자신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태도를 안 고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럴 때는 태도가 이래야지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런 것을 안 고치면 냅둬. 이미 늦었어, 내가 왜 고쳐, 힘들게, 난 이대로 살거야.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웃에 대해서 사랑이 없는 행위입니다. 왜 자기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왜곡된 친구의 상을 심고, 왜곡된 인간의 상을 심고, 결혼하면 왜곡된 부모의 상을 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성화되지 않으면 부부가 만나서 인생을 생긴 대로 살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징벌하시지 않아도 아주 못된 자식이 거기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3,4대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고 그 헌신 때문에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서 사는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배교입니다. 배교는 아니지만 배교적 태도입니다. 무슨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까? 난 생긴 대로 살겠다. 건드리지 마라. 그러면 하나님 앞에 그런 식의 태도를 가지면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을 선언하고 나가면 되는데. 그러면서 무슨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름대로 또 원합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것은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런 삶이 바로 짐승 같은 삶입니다. 짐승 같은 삶은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짐승 같은 삶이 아니라 모든 기회를 포기한 반지혜적인 삶입니다. 이게 짐승 같은 삶입니다. 그런 식의 태도로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행해서 무엇인가 고치라고 합니다. 나와의 관계도 고치고,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도 고쳐라. 그리고 어떤 것들은 네가 변화되도록 하라. 이게 죄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힘든 것입니다. 나는 전혀 온유하지 않은데 예수님의 온유를 보여주면서 너 성품이 못 되었구나. 고치라. 예수님이 그러면서 온유한 사람이 되라. 나는 진짜 교만이 충만한데 이것이 일평생 나의 살아온 방식인데 하지 마라. 그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강력한 반발을 하는 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거기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강도만큼 자기 안에 죄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 강도가 곧 자기 안에 가득 찬 죄의 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완고한 경향성입니다. 패역입니다. 자신이 그런 삶을 택하면 하나님이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를 미워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에게 안식을 주지 않습니다.
그럼 나는 묻고 싶습니다. 자기는 누구에게 안식을 준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인격으로 누구에게 안식을 주겠습니까. 충동적인 사랑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평화로운 안식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해 전에 나왔던 복음성가에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다고 그래서 주님이 쉬 쉴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지쳐서 쉬기를 원해서 새들이 날아왔는데도 자기에게는 너무나 가시가 많아서 찔리고 그래서 다 날아가고 다시 오지 않는데 그렇게 가시나무로 가득 찬 것 같은 그런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삽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 자원을 아무리 손에 많이 넣어도 그가 살아가는 삶은 영생의 삶일 수 없습니다. 지옥을 방불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20년 후보다는 훨씬 지금이 잘 고쳐집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하기 어려운 예화였는데 누가 만약에 들으면 자기 얘기가 나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나를 욕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름을 감추고 내가 얘기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뭘 도와주었는데 고맙다고 하지 않아서 내가 불러서 야단친 이야기, 내가 얘기했지요?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태도가 잘못된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시체말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고 자기들이 잘 알고 사랑하니까 그것을 참 진심은 그런 애가 아닌데 왜 태도를 그렇게 하니 하고 내가 다가가서 고쳐주지만 그리고 또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그럴 때 야, 네가 전도사면 다냐. 네가 무슨 시아버지냐, 그리고 덤벼들 것 같으면 얘기하지 않습니다. 심리적으로 라포가 형성되어 있으니까 믿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그 자매가 일생을 살면서 나 같은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날까? 궁금합니다. 결혼해서 남편이 그렇게 얘기해주겠습니까? 그런데 그 남편은 이해 당사자입니다. 시집에 잘해, 이 사람아 그게 인간의 도리야. 그럼 부인이 밤새 생각하는 게 자기엄마 아빠니까 그렇지.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기회가 쉽게 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예까지 다 들어서 설명을 해야 합니다. 버선까지 벗어서 내가 보여주는데 더 이상 어떻게 노골적이 예를 들어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고쳐집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성령을 강력하게 받아서 변화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다가 벼락을 맞는 일이 있어도 성령을 받아서 변화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 확률만큼이나 적은 확률입니다. 왜 성령님은 우리의 성품의 구조를 사용하시고 그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보면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결혼들을 합니다. 진짜 제가 아는 형제자매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자매가 얼굴도 예쁘고 부자 집이고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남편 되는 사람도 최고의 학부를 나와서 의사고 결혼했는데 다 부서집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태도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태도를 내가 애기한 것처럼 그 태도를 보면서 진심은 그렇지 않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네 옆에서 있는 것은 네 태도를 고쳐주기 위함이지, 그런 정도로 성숙한 남자가 그런 정도로 영적인 수준이 낮은 여자와 결혼을 하겠습니까? 그런 정도로 이해를 할 수 있는 여성이 말도 되지 않는 그 인격을 가지고 있는 형제와 왜 만나겠습니까? 흔들리는 돈 몇 푼에 사람이 흔들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여러분들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전인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복음에 불타도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이게 특별한 신앙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보편적인 가치의 토대 위에 서야 합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서는 태도가 잘못되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어도 어려서는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합니다. 나이가 좀 들어서 청소년이 되면 싸가지가 없다고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조금 더 크면 사람이 아주 못되어 먹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더 들면 어떻게 합니까? 노망이 빨리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수 있습니까? 지나가는 곳마다 가시를 뿌리면서 지나갑니다. 어쩌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빨리 거두어 가시는 것이 당신의 영광의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럼 거두어가시라고 내가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변화되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변화되게 하실 때 그것을 강력하게 거스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말씀에 의해서 자기 자신이 태도를 고치고 바뀌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보여도 실전에서 부딪히면서 자기 자신이 깨트려지는 것에 비하면 백분의 일의 비용도 안 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런 지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게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너무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다트 엘로힘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한 지혜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이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지식은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인식과 그 다음에 이해입니다. 지혜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들을 모두 꿰미처럼 꿰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드리는 말로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이렇게 꿰는 실입니다. 그래서 그 구슬이 지혜에 의해서 잘 꿰어져도 목에 이렇게 걸려질 때 진짜 비싸고 좋구나. 하는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진짜 좋은 구슬인데 이렇게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다닌다고 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좋은 실을 갖고 꿰었는데 전부다 플라스틱 알갱입니다. 그럼 아무리 훌륭하게 꿰었어도 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지식과 지혜의 필요성이 그런 것입니다. 지식은 지혜를 촉진하고 지혜는 지식을 (?)이게 만드는데 지식의 양이 많고 값지면 지혜에 의해서 꿰어질 때 찬란한 값진 지식과 지혜의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호세아 선지자가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내 백성이 망한다고, 왜 바로 이런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 호세아서 4장에서 탄식하는 것이 바로 그 지식입니다.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다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버려야 했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그 다음에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니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리라. 마치 지식 폐기론자처럼 그렇게 사도 바울이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사도가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쓸데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쓸데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다 그렇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이상한 얼개를 만들어서 예수를 못 보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 보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을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데 그 지식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그 지식을 그렇게 한탄하면서 쓰레기와 같고 배설물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두를 이야기하는 반지식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 위대한 지성 속에서 떠내려가는 (?)가 정죄되어야 합니까? 만약에 그런 지식이 없고 지성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리스도 교회를 그렇게 이끌어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율배반입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문제를 삼는 것이 혹시 너희 가운데 지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혜는 필요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여러분들은 긴 인생을 살아야 되는데 지금이 아주 적기입니다. 난 이렇게 보면서 여러분들 주위에서 보면 은혜를 많이 받아도 이 삶의 태도가 잘못된 사람들은 은혜를 자주 쏟습니다. 그리고 삶에 변화에 고난이 많습니다. 그 고난이 다행히 그에게 다시 적용이 되어서 그를 변화시키고 이러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떠돌이처럼 계속 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쳐야지 됩니다.
그래서 항상 얘기하는데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특별한 가치는 그 아이들을 예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딱 놓인 보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착하고 좋은 아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절바른 젊은이, 그리고 이웃을 깊이 사랑하는 젠틀한 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래야 합니다. 내가 그래서 교역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나는 여러분들이 국제적인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어를 비록 못하고 독일어를 잘 못해도 좋으니까 젠틀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 정장한 기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배인 교역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 교양은 우리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높은 지식은 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할 수 있습니다. 교양은 모든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줍니다. 아주 놓은 지위에 있는 사람도 교양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그다음에 아주 가진 것이 없이 그렇게 이 사회에서 바닥에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라도 교양 있는 사람을 대할 때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사치한 사람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교양 있는 사람은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삶의 지혜입니다.
난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은데 진도를 나가야지 되는데 하나만 딱 더하고 하겠습니다. 내가 나중에 본격적으로 언제 한번 (?)열고 하겠으니까 예수 잘 믿는 자매가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고난을 당합니다. 물론 시집도 예수를 믿는 집입니다.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그래서 고난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심오한 고난인가 싶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를 잘 믿는 그 며느리를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한 그 부모 입장에서 보면 감당이 안 됩니다.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신앙을 가졌다는 애가 그 모양인가. 만나기도 싫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며느리 하나 들어와서 자기 집 전체를 가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가서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다고 주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주님도 입장이 참 곤란합니다. 저들을 어떻게 하나,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제가 가끔 결단하고 보따리 싸서 가서 내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때린 것은 아니고 설교할 때 흔들었습니다. 교통정리를 확 해주고 왔습니다. 시어머님 당신은 그따위로 하면 안 되고 며느리 너는 그러면 안 된다. 너는 남편이 되어서 그게 뭔가. 제 자리를 찾아서 너는 여기, 당신은 여기, 지켜라. 며느리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당신도 망가졌고 당신만 망가진 것이 아니라 너도 망가졌다. 다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혼자서 할 때는 안 나타납니다. 사람이 망가졌는데 부모가 익숙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워낙 헤어질 수 없는 사이인데 결국 누가 질 것인지 져서 익숙해질 것이 아닙니까? 그럼 부모에게는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형제가 명백하게 심하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굴러들어온 며느리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우리 며느리를 내가 미워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펑펑 울고 기도하고 나서 그 다음에 오전에 다시 뒤집어지고 오후에 다시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 힘든 세상에 그렇게 사는지, 그래 냅둬, 그대로 살거야. 우주로 가십시오. 왜 그 많은 사람에게 고난을 줍니까?
지혜가 다 갖추어지고 나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과 사람을 맺어줍니다. 갈등과 갈등을 봉합시킵니다. 그러면서 스치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게 이 세상을 치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은 세상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망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망가진 사람도 쓰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세상은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치유하는 사람은 치유 받은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치유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뒤집어 봐도 생긴 대로 살겠다는 사람을 다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은 안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잠시는 할 수 있습니다. 왜 콩거풀이 씌었으니까. 전에 얘기했습니다. 어떤 자매가 터프한 것을 되게 좋아하고 그랬지만 요즘 매일 맞는다고, 콩커풀이 씌니까 터프한 것도 보이는 것입니다. 여성전력이 너무 많습니다. 결혼하지마라. 위험하다. 저 남자는 그래도 했는데 하는 이야기가 그 젊은 시절에 수많은 사람이 그렇게 따라다녔다는 것은 매력이 강력하다는 것이 아니냐고. 그런데 계속해서 가정에 상처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인격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앎에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충동적인 사랑은 그런 지식이 없습니다. 눈에 껍질이 쓰이면 그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며칠을 가는지 한번 보십시다. 내가 아직까지도 교회에 그 지체들이 다니고 있으니까 내가 뚜껑을 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자신 있게 얘기하는데 그것은 6개월도 안 갑니다. 3개월이면 바닥이 다 드러납니다. 그게 바로 육에 속한 사랑, 충동적인 사랑의 한계는 그것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얼굴 좀 못생기고 성격이 좀 틀리고 그래도 진지하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지금 잘 지어진 사람 말고 공사 중인 사람, 잘 지어졌는데 더 이상 공사가 안 되는 사람 말고 좀 덜 지어졌어도 공사 중인 사람을 찾아서 가라. 그러면 하나님이 만져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변화된 삶을 살아라. 내가 오죽했으면 그렇게 구체적으로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게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문제를 삼는 것은 그런 것을 자랑하지 마라. 난 인생에 있어서 지혜가 있고 그리고 나는 이런 면에 있어서 달관했다.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용맹을 사랑하지 말라.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현대 사회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한 국가의 현실적인 중요한 관건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고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이것이 국가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급선무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정신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전자가 없으면 외부에 의해서 먹히고 후자가 없으면 나라가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폭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임금들이 흉년이 들면 자신의 부덕함을 뉘우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용맹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제 일의적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 필요합니다. 여러분, 제가 몇 주 전에도 설교한 가운데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에 담을 넘어서 역사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 민족이 회복해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가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뭐 친일전력을 가지고 막 싸우고 그러는데 진흙탕에서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솔직히 프랑스처럼 4년 동안이 아니라 36년을 일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럼 누가 거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관리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교수가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언론기관이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정직하게 용기 있게 내가 신문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상을 다 캐보니까 친일파가 있다. 그리고 신문을 다 뒤져보니까 옛날에 친일적인 기사를 썼어, 그러면 민족 앞에 속죄를 해야지 됩니다. 잘못했다고 그래야 합니다. 저 사람도 했는데, 그건 저 사람 보고 하라고 하고, 그리고 계속 안 하면 그 사람을 야단쳐, 자기는 해야지. 그럼 누가 뭐라고 그랬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잡지사인데 옛날에 이런 전력이 있다. 미안하다. 그래서 모두 다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것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와도 다시는 이런 역사의 룰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차라리 폐간을 하겠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산다면 그럼 누가 그 과거를 관계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오늘날 독일이 나치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 이야기하면 다 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군국주의의 후예라고 그러면 다 동의합니다. 중국, 일본부터 시작해서 피해를 받았던 동남아까지 모두 동의합니다. 난 확신합니다. 난 역사가는 아니지만 일본이 돈이 많은 부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막아야 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런 소인배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겠습니까? 용기가 없어서 그런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거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란서가 독일에 4년 동안 있었고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4년이라면 아마 달랐을 것입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누가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북한에서 그것을 정리하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리스트를 잡아보니까 너무 많은 것입니다. 대부분이 다 연루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 정리하고 그리고 지독한 사람들을 빼고 나머지는 다 용서해주었습니다. 정착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왜 그러는가 하면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축소판이 우리 각자 각자 속에 있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 부성원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이 정체성을 가지고 이 어두운 역사 속에서 살아갈 때 용기가 없이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유혹이 밀려오고 그런 고난과 박해가 오는데 용기가 없이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용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찾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문제는 그것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고 일구어나가는데 하늘자원이 필요합니다. 이 땅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땅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자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처럼 조직적으로 교회를 지었습니까, 선교사를 파송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뭘 하셨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돈 통을 맡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천상의 자원을 무한히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러나 지상의 자원을 함께 가지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나가셨습니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아침에도 교회에 일찍 나와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묵상하는 가운데 똑같은 그런 결론에 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이 세상에서 머리 좋고 영리해서 다 뺏겼습니다. 말도 안 되는 놈들이 그것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그리고 물질을 가지고 자기 것처럼 차지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정반대로 대치되게끔 활동을 합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기업은 아예 돈을 벌어서 열심히 사탄 교회에 갖다 바치는 그런 기업도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지 될까요? 좋은 품질로 물건을 만들어서 벌어서 사탄 교회에 갖다 바칩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그 돈을 걷어서 그것으로 교회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넘어트리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실제입니다. 벌써 10년 전에 통계로 미국에 5만 명이 넘는 사탄 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업 활동을 해서 그것들을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왕이면 공부도 열심히 남보다 뛰어나게 해서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고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경영해서 더 많은 노력으로 더 많은 재산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가지고 신개발을 하는 사람은 남보다 더 뛰어나게 개발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사정을 해서 기술을 빌려가고 빌려가서 꽃이 필만 하면 다시 새로운 기술로 넘어가고 하면 그런 인노베이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장악하고 그 창조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질을 추구해서는 안 되지만 물질을 떠나서 살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젊은 사람들에게 조금 장래성만 있어 보이면 내가 이야기를 합니다. 야, 남의 집에서 월급 받고 일하지 말고 한 10년만 열심히 고생한 다음에 너의 사업을 직접 하라. 큰 꿈을 가지고 해라. 그럼 어떻게? 남의 집에 있어봐야 월급이나 받고 안일한 삶을 살지 모르지만 네가 한 기업을 일으켜서 큰 나무가 되어서 거기에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깃들게 하라. 얼마나 좋은 하나님의 일인가. 이렇게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추구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자랑하지는 마라. 그럼 뭘 자랑하라고 하는지 너희에게 진짜 자랑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나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그러면 사실 그게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설 아니까 자랑하지, 진짜 하나님을 알면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그러더냐고 그러니까 저마다 다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라고 그렇게 합니다. 예레미야라고 그렇게 합니다. 뭐 주저리 주저리 하는데 베드로가 올바른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대단하다. 정말 잘했다. 어쩜 너는 머리가 그렇게 똑똑하니. 이렇게 칭찬하시는 대신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 되도다 그러나 그것을 네게 알게 하시는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그 모든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 자신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자랑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자랑하라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뒤집어서 이야기를 하면 사모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자랑거리는 대게 사랑거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어떤 것들에 의한 것을 자랑하면 그 자랑거리는 관심거리고 또 사랑거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랑거리와 사랑거리는 항상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음이니 할 때 그 십자가가 바로 사랑거립니다.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으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미련해지기를 택했습니까? 제물이 없이 살기로 결심하고 금욕주의를 선택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용기를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하는지, 이게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이게 히브리적 표현이 우리말 표현하고 비슷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를 어떤 것을 사랑하면 거기에 마음이 모두 쏠리면 나머지는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방식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의 사회에서 보면 세상을 미워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만 사랑하려고 하다가 보면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하니까 마치 미운 사람을 보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적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다른 것들도 필요하고 가치가 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마치 다른 것들은 아무 관심이 없고 심지어는 모두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 그 자체가 히브리적 사위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제대로 깊이 알면 자기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나야 자랑할 것이 없지. 내가 인생을 사는 지혜도 있지만 그런 것 자랑 안 해. 나 있지. 용기도 있는 사람이지만 나 그런 것은 예수 믿고 나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다 버렸어. 난 그런 것 자랑하지 않아. 그리고 나 물질도 좀 있지만 그런 것 자랑하지 않아. 그러나 내가 자랑할 것이 하나 있지. 그게 무엇이야. 자기하고 나하고 똑같이 하나님을 믿지만 어떻게 자네하고 나하고 똑같겠어. 나는 성자와 같고 너는 짐승과 같은데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진짜 하나님을 알면 그렇게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거룩에 대한 경험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고 하는 자체는 거룩을 경험해간다는 이야기와 동의어입니다. 거룩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결국은 자기가 하찮은 존재이며 도덕적으로는 비천하고 불안전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게 해주는 효과가 도덕적 거룩의 경향에서 우러나오는 존재론적이고 도덕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게 된다고 하는 이 다트 엘로힘의 사상은 결국은 신약으로 넘어가서 그노시스 크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사상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이 어떻습니까? 그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품을 수 있습니까? 원해서 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사람이 그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가 뭘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고 받은 내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주신 하나님의 자랑스럽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자랑거리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으로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참으로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푯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만이 인정받으시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의 인생, 자신의 가진 것,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의 목표들은 그 궁극적인 목표를 위한 부차적인 작은 목표들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참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바입니다. 나아가야 할 바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뭐가 가장 부러우십니까? 사람들과 이렇게 비교할 때 뭐가 그렇게 부러우십니까? 어떤 것들이 부러우십니까? 삶의 지혜, 용기, 제물, 그런 것도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핵심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는 그것, 그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습니까? 보다 놓은 질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큰 집에서 사는 것이 높은 질의 삶이 아닙니다. 진짜 높은 질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서 인간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배우면서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자랑과 거룩한 추구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9:24下)
자랑거리라고 하는 것은 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고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혹은 경험하더라도 거기에 흥미가 없는 경우에는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깊은 산속에 땅이나 일구면서 감자밭이나 가꾸어서 끼니나 연명하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커다란 낚싯대 하나를 길거리에서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어디에다 쓸 예정인지 모르고 그것으로 고기를 낚을 때 얼마나 고기가 잘 잡히는지, 그것보다 품질이 나쁜 것으로 낚시를 할 때 얼마나 불편한지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이 낚싯대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랑할 리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 낚시에 정신을 온통 팔렸던 사람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거의 정신질환 수준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매주 토요일마다 낚시를 가서 주일날까지 낚시를 하고 밤 11시에나 집으로 들어오니까 낚시하는 사람들의 아내는 말이 있습니다. ‘낚시과부’라고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낚시하는 사람들하고 사는 여자들은 남자가 그 취미에 빠지면 일단 과부신세가 된다고 합니다. 등산을 가거나 여행을 한다거나 하면 아내가 늘 따라나서겠지만 그 바닷가에 바다낚시를 하러 가서 오래도록 그 장화를 신고 낚시를 한다든지 밤새도록 등을 하나 켜놓고 거기에 매달려서 모기에 물리면서 낚시를 하는 남편을 따라가서 그 취미에 동참하기란 진짜 그가 체험적인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인 무엇인가 만남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예화: 직장에 다니는 어느 남자가 직장에서 하는 낚시대회에서 일등을 해서 상장과 상 품을 받았다면서 아내를 속이면서 자신이 일등을 했기 때문에 안 가면 안 된다고 구실을 내세워 부지런히 가게 되었고 또한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낚시를 좋 아해 직장에서 자기의 낚시용품을 관리하는 가운데 작은 칼 하나를 거금을 주고 산 것을 보고 같이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 칼을 보고 부러워하는데 하나도 안 부러워하면서 그것을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가 하니까 붕어 배를 가르는데 사 용한다고 하기에 느낀 점은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칼을 부러워하지만 취미가 다른 사람은 그 칼이 아무리 비싸고 어렵게 구했어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 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이야기)
자랑거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거기에 연루되어있고 그것을 즐기고 좋아하고 뭔가 거기에 관심이 있을 때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지 그게 깊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선지자가 용맹이 있는 사람은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부가 있는 사람들은 그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하고 못 가진 사람은 그 자랑을 들으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자기도 그런 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불타고 가져야겠다는 그런 욕망의 충동을 더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언약백성들 속에 이루어져야 할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백성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린 삶입니다. 이것이 언약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들이 용기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하고 또 그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결코 악한 것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용맹, 지혜, 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데 너무나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런 자원 자체를 거부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그러지 않습니다. 왜 그것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길과 가치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사랑하고 그것들을 붙들고 살던 옛날에 가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말미암아 버렸기 때문에 그들 안에는 다른 것들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 안다는 것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좀 알지. 너희들이 뭐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는 지식을 이해할 수 있겠어. 나도 그렇게 어릴 적이 있었지. 그렇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만들고 그분 앞에 낮아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곧 우리 수준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얘기해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제 지혜나 용맹,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들이 부, 이런 것들을 자랑하느냐. 너희들이 그런 길과 가치를 아직까지 추구하고 있는가. 너희들이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나 여호와를 아는 것이란다. 그리고 나 여호와를 알면 너희들이 자랑할 수 없지. 그런데 이것은 결국은 너희들의 자랑거리는 너희들의 추구거리기 때문에 진정으로 너희들이 그런 것들을 자랑하면 너희들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될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나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나 여호와를 아는 것과 그 다음에 인자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며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다르게 나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도아도아 오펜 나를 아는 것, 이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엔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키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영어의 에트 정도의 뜻입니다. 그래서 키, 아니 아도나이 나 여호와는 오세, 행하는 여호와다. 무엇을 헷세드, 인자와 미슈파트 공평과 혹은 정의와 그 다음에 쩨라카 이것은 여기에서 우리말로 정직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정직이 아니라 의로운 행동입니다. 의로운 행동을 하는 여호와. 어디서 하는가 하면 바아렛트, 그 땅 안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들이 제일먼저 첫 번째로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아렛트 그 땅 안에서 어딜까요?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그 땅입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 그 삶의 현장 안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행하는 여호와라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게 바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키로 연결된 이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나를 아는 것, 그것이 곧 뭐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를 아는 것, 곧 이러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 그것이 너희의 자랑거리다. 나를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깨닫게 되는 첫째는 바아렛 그 땅 안에서 이러이러한 것들을 행하는 여호와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자와 공평, 그리고 의로운 하나님의 행동, 모두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성품이 구체적으로 어디로 흘러나오는가 하면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 안에 흘러나옵니다.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 들어와서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참으로 우리를 향한 헷세드, 인자 혹은 그 자비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불의 가운데 고통을 받을 때 악한 자를 멸하시고 의로운 자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는 것은 하늘과 진공상태에서 맛보는 것이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그런 성품을 맛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 자신의 성품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의 실제의 삶 속에서 맛보게 해주시는 것처럼 너희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바로 이 땅 안에 실제의 삶 속에 살면서 너희들이 인자를 행하고 공평을 사랑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곧 나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감동을 받아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거기에 붙잡혀서 그래서 우리들이 인자를 행하고, 공평을 행하고, 의로운 일을 실천할 때 과연 우리가 그렇게 행한 것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이게 자랑거리다고 말씀하시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심으로서 언약백성들이 추해야지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그 삶의 현장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구호를 만드는 것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민족들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처럼 구호를 좋아하는 민족이 없습니다. 구호를 참 좋아합니다. 지금 21세기가 되었으니까 그렇지 1995-6년도에는 교회마다 전부다 다 21세기를 준비하는 교회, 뭘 준비하는데? 궁금합니다. 21세기를 준비하는 젊은이. 뭘 준비하고 맡기에, 실제적으로 볼 때 구호는 돈이 들지 않고 희생도 안 드는데 실제 그 땅에서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흘려보내면서 사는 그 삶에는 많은 희생과 그리고 대가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행하심으로서 그 땅 안에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성품의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현장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은 현장성이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추상명사를 살아하는 것은 책임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한없이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를 정말 꺾어야 합니다. 작년에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이 많이 있지만 혼자서 그 깨달음을 붙들고 많이 울었던 깨달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꼭 다시 한번 반복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시든지 적으시든지 그러십시오.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을지라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바쳐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절대로 외롭지 않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삶의 현장성입니다. 한 사람을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데는 대가가 따르지 않지만 지불해야 할 희생이 없습니다. 왜 그들이 나 좋아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서 내가 애쓴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앞에 얼마나 많이 절망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서 자기가 얼마나 그러니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끝까지 사랑해본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사랑이 사실은 형벌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양보하고 한 존재에게 맞는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살을 깎고 뼈를 가하는 고통을 동반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보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람이 아니면 뭡니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앞에 형용사가 붙어야 합니다. 덜 익은, 그래서 난 여러분들에게 젊은이들이니까. 1부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만 여러분들에게 꼭 하는 말은 사색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질적으로 높은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삶에 대한 자기의 잘못된 태도 같은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발견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발견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인생에 고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기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입니다. 신앙 안에서 안 고쳐지면 다른 곳에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하는데 이 말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냅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지구를 떠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어느 한곳에 모이면 그게 바로 이 땅에 임한 지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여러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삶의 희망의 현장성입니다.
그래서 교회(?)지나면서 저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런데 이런 사실은 구호는 아닙니다. 구호는 이렇게 사사조로 떨어집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뭐 이런 식으로 사사조로 떨어집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그러는데 이것은 사실은 하나의 수필 같은 문구지만 그래도 깊이 동의하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그래, 우리 흐르는 강물처럼 살자. 그런데 그 강물이 무엇으로 흐르는지 아십니까? 피와 눈물과 땀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헌금 몇 푼 한다고 해서 그게 흐르는 강물처럼 되는 게 아닙니다. 깨끗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보면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이제 눈가에 주름도 가고 제품이 맛이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무지합니다. 그리고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가시밭길이 인생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태도가 고쳐져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아주 오래도록 은혜의 물에 잠겨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에 대해서 말씀의 빛을 받으며 깊이 사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변화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까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대화를 하면서 나누면 정신연령은 15-6세 정도 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답답합니다. 나 답답한 것은 답답한 것으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끝나지만 삶의 인생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스스로 그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만 미워해. 그게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현장성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만큼만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런 삶을 살아가는 한도 내에서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삶이 묶이고 그 삶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삶의 유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은 그 아는 것만큼 결국은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 삶은 또한 하나님을 아는 수단이 되어서 이 두개가 순환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회오리바람처럼 불면서 이렇게 고양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구약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삶이고 신약적인 용어로 ‘그노시스’ 크리스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삶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바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장성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삶의 구체적인 양태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세 가지로 나타내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자와 공평과 정직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쩨다카, 의로운 삶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쩨다카와 쩨렉은 똑같이 의라고 번역이 되는 단어인데 쩨렉은 내면의 질을 의미하는 것이고 쩨다카는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구체적인 의미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나오는 말 중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이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 멜키는 왕이고 세덱은 의입니다. 그래서 의의 왕입니다. 이 세덱은 내면의 질이고 쩨다카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흘러나온 삶의 행동입니다. 그 쩨다카를 여기에서 정직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를 잠깐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헷세드입니다. 이 헷세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호의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헷세드 하나님의 인자, 혹은 자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헷세드가 아닙니다. 그런 사랑을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 때문에 그 관계를 기초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으로부터 선을 베푸는 그 은총이 바로 헷세드 입니다. 그런데 이 헷세드라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을 받는 사람이 그런 헷세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헷세드는 어떤 일을 행한 것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서의 헷세드가 아닙니다. 이 헷세드가 신약에서 가장 장엄하게 나타나는 것은 구원의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백성들이 헷세드를 행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무 공로 없고 자격이 없는 죄인인데 언약관계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헷세드를 받아서 그 헷세드 때문에 사람들에게 또 헷세드를 베푸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향해서 전혀 의로울 것이 없고 심지어는 자기를 대적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에게까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그 헷세드를 그 땅 안에서 삶의 현장 안에서 그것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그 가운데 있는 언약백성들 안에는 어떤 마음이 있는가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헷세드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채의식이 곧 그가 바아레츠, 그 땅 안에서 실제로 희생을 하면서 헷세드를 구현하는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적용하면서 설명하면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헷세드의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입었습니다. 그 부채의식을 성화 안에서 간직하고 있을 때는 가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고 그들을 위해서 삶의 현장 속에서 피 흘리기까지 희생을 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헷세드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베풀면서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채의식이 사라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저런 인간, 저런 인생, 바보 같은 녀석, 저런 인간이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있겠나.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러면 다시 아까 얘기한 대로 이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로 들어올 때 버렸던 부와 가치를 갖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뮈시파트입니다. 공평입니다. 뮈시파트 라는 말은 샤파트의 분사형입니다. 샤파트는 재판하다입니다. 그래서 분사형 쇼페트가 되면 명사형인데 분사형이면 사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뮈시파트 앞에 띵을 붙여서 그래서 결국은 판단한 것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게 결국은 공의, 혹은 재판, 이런 뜻이 되는 것이 됩니다. 여기는 공평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뮈시파트는 무슨 일을 행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행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이게 신앙의 길로 올곧게 가다가 사람들이 이렇게 휘는 것, 불순종과 죄로 이렇게 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가다가보면 장애물을 만나면 휩니다. 그런데 올곧게 희생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신앙의 가치보다 그것을 걸어감으로 말미암아 당해야 할 희생의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이 되면 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사는 것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판단 앞에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는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그런 올곧은 삶을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삶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겉보기에 그럴 뿐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사과나무에 사과를 실로 매단 삶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쩨다카의 삶입니다. 의로운 행동의 삶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로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그 표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현장 속에서 넘쳐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지식의 결과입니다. 결국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자랑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용맹이나 부나 지위를 자랑한다. 그러나 용맹이나 부, 지혜,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 없는 것입니까?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용감한 것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고, 그리고 더더욱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데 차이는 이 사람들은 그것이 목표가 되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지금 막 생각이 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신이 인간에게 주신 달리기의 능력은 10초 밖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10초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깨고 9초 8이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훈련과 인간의 탁월한 체력도 있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육상화의 눈부신 발전입니다. 그 운동선수들이 신는 운동화가 얼마쯤 가는지 알면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봉주 선수가 신고 뛰었던 그 마라톤 운동화가 약 26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대회 한번 끝나면 아마 못 쓸 것입니다. 그것을 6개월이나 1년 전에 제작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막 달려서 골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선수를 내보낸 나라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뭘 자랑하겠습니까? 막 자랑하는데 그 선수를 대서특필하면서 아무아무개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서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엄청난 기록을 수립하면서 조국의 명예를 빛냈다고 막 띄우지, 운동화를 사진 찍어놓고 운동화가 기가막히다고,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이게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자랑이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자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혜도 필요합니다. 용맹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자랑거리는 되지 않습니다. 자랑거리는 이것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인자를 행하고 공평을 행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삶을 실천해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성품을 구현하면서 삽니다. 그래도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우리가 행한 인자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보여준 공평이나 우리들이 실천한 의로운 행동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운동선수의 발에 신겨진 그 운동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자랑해야 할 것은 결국은 무수히 많은 성경구절에서 그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우리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그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언약백성들의 삶이요, 언약백성들의 의무입니다. 그들의 생활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만년필이 있어서 자랑한다고 칩시다. 다른 사람은 더 좋은 만년필을 자랑한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만년필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논리가 맞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만년필을 자랑했는데 다른 사람은 이것보다 비교도 안 되는 만년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이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똑같은 논리로 우리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의 삶의 추구 점으로 삼고 있다면 우리가 넘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린아이와 같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로이드존스 박사가 자신의 회고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를 가다가 고서점에 들렸는데 다 떨어진 책 두 권을 구했습니다. 펼쳐서 읽는 동안에 몇 페이지를 읽지 않아서 자기가 큰 산과 같이 위대한 사람 앞에 서있는 아주 어린아이와 같이 초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꼈는데 그가 읽은 책이 바로 다 낡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이가 가져다준 그런 비교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의 전화점이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인생의 탄탄대로를 달리는 앞길이 보장된 사람들, 우리가 삶이 좀 불안하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은 잘 먹고 잘 지내다가 내일은 좀 덜 먹고 불편한 곳에서 자는 것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는 환경의 안정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으로 이미 버린 이 세상의 길과 가치와 같은 가변적인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과 함께 발견하게 된 불변의 가치를 꾸준히 따라가는 삶, 그것입니다. 그게 잘 사는 삶입니다. 그게 훌륭하게 사는 삶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 사람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는 사람인지, 혹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기되 그 섬기는 과정에서 오는 어떤 이득들에 집착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우리 밑바닥을 흩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어떤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드러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의 삶은 휘청거리는 갈지자의 삶이 아니라 올곧게 걸어가는 삶이 될 것이며 그렇게 올곧게 주님을 추구하며 걸어가는 삶 속에는 신앙과 인생에 대한 지혜가 아주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나 여호와는 이런 일을 행하는 여호와다.” 라고 말씀하신 속에는 우리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 공평, 그의 의로우심을 맛본 것은 기도실이나 아니면 예배를 드리는 현장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단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 자신도 우리를 가치 없다고 생각할 때 주님이 더러운 죄인을 용납해주시는 그 친절함 안에서 주님의 자비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공평을 경험했습니다. 불의한 자들의 압제로 인해서 눌리고 고통 받을 때 하나님께 호소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옳다 인정하시고 대적하는 자들을 악하다고 하나님이 지적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당신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아는가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하는 사람들의 자랑거리를 위해서 추구할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오늘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높고 깊고 넓고 순결하게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할 때, 그때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인생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에워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부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올곧은 신앙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 속에 남겨두신 하나님의 선물이오, 표상입니다. 남들은 인생이 황혼으로 저물어갈수록 점점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만 시인이 고백했던 바와 같이 “내가 백수가 되어서 주의 조도를 전하리이다.”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스승이 되고 어버이가 될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언약공동체의 생명이 이어져온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드는 호크마, 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아서 그래서 정말 이 세상에서 헛된 것들에 대한 자기 자랑 속에 인생을 묻지 아니하고 정말 지혜롭게 슬기로운 자들의 일생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하나님을 추구함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대상16:10)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다윗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일정한 곳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다윗 성에 들어오는 광경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제 자리를 이탈하게 된 것은 아벡의 전투 때문이었습니다. 아벡의 전투에서 이제 블레셋 사람들에게 궤가 빼앗기고 그 빼앗긴 궤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면서 이제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되고 그 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몇 개의 과정을 거쳐서 이제 지금 여기 다윗성에 이 법궤가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이미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그리고 이 법궤는 종교적 이상의 정치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었으니 이 법궤와 함께 하는 자가 정통권을 가진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오늘 법궤가 들어올 때 이렇게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 것도 사실은 신앙적인 이유가 대부분이었지만 동시에 이 다윗의 성으로 들어오는 이 법궤로 인해서 사울의 집안을 모반하고 왕권을 차지했다고 하는 모든 수모를 씻어버리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정통적인 왕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 다윗이 신앙적으로나 그리고 자신 개인적으로나 이 법궤가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법궤가 들어오고 나서 이제 이 다윗 시대에 그 유명한 성가대가 조직이 되고 그 자연스럽게 조직된 성가대가 그 법궤를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찬송하면서 이제 힘 있는 찬양이 이 다윗성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제 이 찬송가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 자기 자랑이라고 하는 우리 주제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매우 요긴한 본문이 되기 때문에 오늘 역대상 16장을 본문으로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라.” 결국 우리들이 8시간에 걸쳐서 쭉 자기 사랑의 근본이 무엇이고 자기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이미 가져다준 폐해가 무엇이며 그리고 결국 자기 자랑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고갈시키고 영적인 관심사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것입니다. 이 자기 자랑은 끊임없는 부패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사랑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를 많이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사람은 점점 자기중심적이고, 옛 자아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이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되고 끊임없는 자기 자랑들은 충돌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극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욕구와 탐욕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순결하게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자기 자랑과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당연한 반대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끊임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이 되고, 자기를 교만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자신의 인생의 길과 가치에 있어서 판단을 자기중심적으로 향하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찬양에는 반드시 힘이 있습니다. 자기를 향한 찬양에도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향한 찬양에는 반드시 자기를 향하게 만들고 자기를 높이게 만들고 자기를 향한 목적을 가지고 걸어가는 자신을 강하게 힘을 불어넣는 그런 역할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종교에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자들이 군대를 파송하거나 애국심을 고치시킬 때도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히틀러나, 러시아나, 혹은 유럽의 연합군과 전쟁할 때 극한전쟁터에 내몰리면서 자주 사용했던 방법은 그들에게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군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음악이 들리도록 만들어서 애국심을 고치시켰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므솔린 역시 이런 방법으로 사용했고 동양에서는 삼국지를 읽어보아도 전쟁할 때마다 음악이 군대들의 사기를 높이거나 적군의 사기를 꺾는데 사용된 역사적 자료들을 흔히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들리는 노래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부르는 노래, 자신이 부르는 찬양에는 그 자체에 강력하고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은 일종의 자기 찬양입니다. 자기 찬양을 인간이 계속 하게 되면 그 찬양이 지향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끊임없이 그 길과 가치로 몰고 가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송도 그런 힘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주 그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당신 자신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의 성품을 이해하게 되고 그 묵상과 찬양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의 관심사가 하나님께 집중되고 영혼이 고양된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찬양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좋아하셨지만 찬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당신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좋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찬양과 어울리는 마음의 경향성들이 쇄신되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을 통해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질 듯 간직되었다가 쏟아져 나오는 찬양생활이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에 하나님을 찬양할 어떤 은혜가 거의 없었는데 입을 열어 힘들게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보니까 그렇게 부른 찬양이 마치 메마른 펌프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쏟아 부은 한사발의 유수처럼 역할을 해서 그래서 이 속에서 많은 물들을 길어 올리게 하는 것처럼 억지로 부른 찬양이 점점 마음속에 은혜를 불러일으키면서 영혼 모두를 실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일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자주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찬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찬양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찬양할 수 있을 때는 찬양할 수 있기 때문에 찬양하고, 찬양할 수 없을 때는 그대로 내버려두면 위험하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데는 바로 이런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의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이 칭찬을 받으시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찬양할 때 그 안에 있는 죄와 이세상의 길과 가치에 대한 욕망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시선이 고정되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그것은 성도의 마음을 실어 올리는 찬양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 레코드판처럼 반복해서 돌아가는 녹음 테입 같은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별로 영광을 안 받으십니다.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을 통해서는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다윗이 감격적인 순간에 여호와의 법궤를 받으며 한없이 즐거워하면서 사람들을 시켜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호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성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그 이름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될 때 영혼을 하나님께 집중시키고 쇄신하는 찬송의 놀라운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나도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운데 그런 꼴 같지 않은 나에게 누가 상담을 좀 하겠다고 합니다. 피하래야 피할 수가 없어서 붙들었는데 상담하러 온 내방자가 꼭 사는 게 나처럼 삽니다. 그러니 답은 있습니다. 그래서 얘기하면서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안 좋아하신다. 다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답은 다 알려주고 그 꼴에 손잡고 중보기도를 해주고 나면 돌아올 때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별로 은혜를 못 받은 것 같은데 해준 내 마음속에는 정리가 되고 진짜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 하는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해야 할 신앙이 다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사는 게 워낙 꼴 같지 않으면 저하고 똑같이 사는 사람을 하나 보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 효과가 생겨나겠습니까? 그렇게 올바른 것을 이야기할 때 자기는 그렇게 뭐 살고 싶겠습니까? 살고 싶으면 그런 침체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하다가보니까 말하는 가운데 은혜의 말을 하고 하나님 중심에 대화를 하고 그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이 안에서 쇄신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죄와 마귀가 우리를 쓰러트리는 방법도 무궁무진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일으키시는 방법은 더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효과인가 하면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는 그 사람 속에 나타나는 영혼의 효과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은 뭘 가지고 있는가하면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까? 자기 자랑을 한번 하는데 입이 바짝 마르고 가슴이 공허해지는 적이 없습니까?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은 그런 공허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화: 어느 부인이 강남에 살면서 섬기는 교회가 시내 한복판에 있어 아침 일찍 주일 학교를 섬기느라 그 당시에 전철이 없어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 두 분이 탔는 데 그분들도 교회에 주일학교를 섬기느라 일찍 가는 모습이었는데 가는 동안에 계속 강남의 아파트 시세에 대해서, 땅값에 대해서 말을 하느라 긴 시간을 세상 자랑의 말을 하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주일학교 애들을 섬기러 가는 모습에 마음 이 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우리의 이 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삶과 모든 생활의 원천이 되는 샘입니다. 그래서 어느 동리에든지 가면 예로부터 이 우물은 매우 중요하게 관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거기에다가 뭘 집어넣는다든지 해꼬지를 하면 마치 귀신에게 큰 벌을 받는 것처럼 어려서부터 주입시키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샘이 그처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자기를 많이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자랑을 통해서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좌절을 느끼게 만들고 이렇게 되고 난 다음에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가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열등감이나 비교의식 같은 것을 심어주어서 좌절하고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그런데서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방향으로 그것이 나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해서 경건의 상처를 입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너무 경건한 사람은 그렇게 지 자랑을 늘어놓는 우리 같은 사람을 보고 짐승처럼 생각하며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대신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어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경건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발견되기 위해서 모두 버리고 주님께 나아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버린 것들을 다 모아놓고 자랑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 안에는 그런 공허함이 깃드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그 영혼이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많은 떡과 많은 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배고프고 목이 마를지라도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그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그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주 선명하게 우리의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여호와를 자랑하는 자의 삶이 곧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의 삶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와 연합되고, 그분을 닮고, 그분의 성품처럼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들은 자기 자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기 전에는 친구들도 많았고 오고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목회를 하고 나니까 친구라고 그럴 것도 없고 만나야 다 목사님들이고 하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생활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아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개개인으로서는 주님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모이면 관심사가 개개인이 추구하던 그 관심사로부터 이탈된다고 하는 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교제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영향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만난 아름다운 교제들은 항상 그 안에서 주님을 전심으로 찾아가려는 지체들이 분투하는 경건한 구도의 자세를 배웁니다. 그리고 삶을 통해 보여주는 구도의 자세를 말로만 듣는 구도의 자세보다 훨씬 정확합니다. 말로 듣는 구도의 자세가 만약에 약대(?)라고 할 것 같으면 눈으로 보는 구도의 자세는 실제로 그것을 보여주는 영상물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정도의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본을 통해서 구도의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영상이라면 자신이 직접 그런 구도의 길을 찾고 걸어가 보는 것은 실제로 그 아름다운 불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랑거리가 되지 결코 자기 자신이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의 교제 속에서 만연해있는 은근한 자기자랑과 뻐김, 그리고 자만심과 자기를 나타내보이고자 하는 노골적인 자기자랑 같은 것들은 대부분 그의 관심사와 추구점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고 그리스도 예수와 더욱 연합되려고 하고 그분께 더욱더 온전히 발견되려고 하는 이 구 도의 추구점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날마다 자기를 죄와 불결에서 깨끗하게 하려고 하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려고 하는 모든 성도들이 진지한 구도의 탐구는 항상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를 잊도록 만들어주고 이 구도의 길을 걸어간 자신의 공로나 자신의 노력을 잃어버리게 만들어줍니다. 오히려 그런 구도의 길에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도움이 되어주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은혜가 계속해서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그런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힘과 도움, 그런 은혜로 말미암아서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을 자신을 절대로 자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만 남아있습니다. 끊임없는 고갈과 황폐함, 관계의 파괴나 혹은 건조함을 가져다주는 자기 자랑 때문에 자기를 허비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자랑하며 높이는 삶을 살아서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늘 만족을 누리고 기쁨을 얻는 부요한 영적 삶을 살 것인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들이 선택해야 할 기로인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오류와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령한 특성들이 무시당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함도 필요하지만 뱀 같은 지혜로움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삶의 실제에 적용한 사람들은 삶의 태도도 올바르게 고쳐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한 사람이 되고 걸어가는 발자국 그 자체가 따라오는 신앙의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본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산 사람들의 삶의 기로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향취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묻어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서 그리스도의 향취가 풍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이겠으며, 그분의 자녀이겠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연합되기를 갈망하며 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면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지만 더더욱 자기 자랑에 있어서는 더더욱 온전해져서 도무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 높이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화와 자기자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