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중에 인내하는 길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불가능의 상황을 넘어서(눅19:1-4) 2005.7.5 교직원예배 1
2. 마음의 가시덤불을 태우고(렘4:3下) 2005..8.23 교직원예배 9
3. 환란 중에 참으며(롬12:12) 2005.9.1 교직원예배 14
4. 하나님을 방패삼는 사람(시7:10) 2005.9.15 교직원예배 19
1.불가능의 상황을 넘어서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1~4)
녹취자 : 김용재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자 할 때에도 항상 모든 길이 순족하게만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회심을 경험하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회심전야에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 동시에 그렇게 하기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영이 우리 안에 작용하는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고 또 삭개오는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적어도 세 가지가 예수님을 뵙지 못하도록 상황적으로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 사람이 세리장이었던 사실입니다. 동족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고개를 내밀고 명함을 들이밀기에는 이 사람이 그 동안 살아온 삶이 동족들에게 지탄을 받아 마땅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득모여서 예수님을 향해 접근을 하기는커녕 예수님을 보는 것조차도 힘들 정도로 방해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득모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괜히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도 삭개오와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삭개오는 벌써 두 번째 장애물에 의해서 예수님을 가까이 가서 뵈옵기 위한 그의 목적과 기도가 좌절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세 번째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 길에 가로막힌 장애물은 키가 작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 어깨높이나 큰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그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까치발을 뜨면 능히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작은 키를 가진 이 삭개오는 수많은 인파가 에워싸고 있는 그 속에서 도저히 주님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으려고 할 때 이런 다양한 많은 것들이 주님께 가까이 가고 그분을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세리로써 일생 동족들의 피를 뜯으며 살아왔던 그 죄악된 삶 때문에 예수님께 얼굴을 내밀 수 없었던 이 삭개오와 같이 우리도 주님 만나러 갈 때 우리들이 지은 많은 죄와 주님 앞에서 살았던 부끄러운 삶들이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방해가 되고 어려움이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 인해서 그 인파 때문에 자신이 주님께 접근할 수 없었듯이 마음은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데 우리 밖에 있는 환경과 내 자신은 원하지 않는 외부로부터 오는 방해 때문에 주님을 만나러 가기 어려울 때가 우리에게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삭개오가 극복한 것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자연적인 자신의 특질이긴 하지만 작은 키 때문에 주님을 뵈올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성격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특질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들이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들은 죄와 관련되어서 나쁘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이 세상에서 창조하신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말하자면 정신적이고 영적인 지문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특질들이 죄와 결합하면 타락한 형태로 나타나고 자연적인 특질들이 주님을 섬기려는 착한 마음과 결합하면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자연적인 특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특질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런 특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죄와 관련되면 하나님 앞에 부패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이 되면 아주 훌륭한 성품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바울은 젊은 시절부터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데 따지기를 좋아하고 논리에 강한 사람이었으며 시비를 가리는 일에 있어서 혈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렬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없고 잘못된 유대교의 가르침이 들어가게 되자 그러한 논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정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끝까지 파고들어가려고 하는 뜨거운 열심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열렬한 성품은 교회를 자신의 고백과 같이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니까 얼마나 놀랍게 변했습니까? 다른 사도들이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던 기독교 교리를 기가 막힌 방식으로 전개해 놓지 않았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었던 분석을 좋아하고 논리를 사랑하던 정신은 당대의 희랍의 철학들을 모두 섭렵하게 만들었고 인간의 이성의 빛을 통해서 만들어진 그 탁월한 지성의 그릇 속에 주님을 만난 체험과 하나님의 계시의 빛들이 담겨지자 그 계시의 빛들은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셔서 하게 하신 그 본성적인 철학의 도움으로 말미암아서 탁월한 이성적인 능력을 가진 계시의 효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성으로 접근 하는 사람들에게도 무릎을 꿇게 만들어서 신앙을 앙망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이 일들을 위해서 바울의 자연적인 본성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이러한 자연적인 본성들이 주님을 만나러 갈 때에 방해가 되었던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는 길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신앙을 갖기 전에는 이러한 치열한 논리적인 본성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희랍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것을 여겼고 예수를 박해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삭개오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결국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우리에게 감격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이 사람이 이 세 가지를 놀랍게 극복했는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사람이 세리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지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그 난관은 믿음에 의해서 극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기의 동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목표는 예수님을 뵈옵는데 고정되었고 그 예수님을 뵈오므로 말미암아서 그는 단순히 예수님을 구경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기대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치 돋보기를 통과하는 빛이 모여서 종이를 태우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집중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중되지 않는 그곳에는 믿음이 없다고 말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의 목표가 선명하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이유가 또렷합니다. 그리고 그 또렷한 이유에 자신의 모든 삶의 자원들을 집중시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삶의 이유를 따라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초점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없으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삶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나간 삶이 어떠하든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이 주님이 보기에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몸이 만약 더럽다면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오류가 있고 실패가 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많은 잘못과 과오를 인해서 후회하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가고 우리의 삶은 점점 사라져 갑니다. 속히 주님을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마음의 시선 영혼의 모든 눈길을 주님에게 고정시키고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어떻게 판단을 받든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만나 뵈옵겠다고 하는 일념 그분을 만나면 내 인생의 모든 숙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고정된 정신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마음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그 분을 만나는 일 이외에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삭개오가 그 모든 죄인 된 자신의 처치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뵈옵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많이 있는 것도 삭개오에게 있어서는 매우 커다란 장애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인파가 많이 있는 곳을 뚫고 어떤 목적을 향해서 그 인파를 해쳐본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내가 가는 길을 비켜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삭개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각각 다른 목적을 갖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동일하게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었으니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환경이 허락 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았을 것이고 보다 좋은 환경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고 그 움직임들은 충돌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다심 말해서 인파가 어떤 특정한 지점에 조밀하게 빽빽하게 운집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삭개오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달려가서 인파를 해쳤습니다. 달려가서 인파를 헤집으면서 예수께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삭개오가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려고 할 때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방해말고 환경으로부터 오는 방해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참된 것인지를 연단하시고 시험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때 이것이 단순한 인간의 감정인지 전인격적인 믿음을 동반한 마음의 소원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러 가지 못하게 하는 어려운 장애가 상겼을 때 비로소 그것이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는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 때 참된 믿음은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뛰어넘고자 애씁니다. 참된 믿음은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믿음이 시키는 목표를 이루고자 애씁니다. 바로 삭개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주님을 만나기 원해도 환경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요인이 참 많이 있습니다. 바쁜 일과도 그러하고 사역도 그러하고 때로는 가정,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 주변의 여러 가지 환경의 어려움들이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뜻을 세운 사람들은 이것들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에 쉽게 굴복하고 야합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환경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만들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키가 작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뵈올 수 없었을 때 그는 나무에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아마 삭개오가 처음부터 나무에 올라가겠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순순히 길을 열어주고 맨 앞자리를 내 주었다면 나무에 올라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창의적인 정신을 가져옵니다. 믿음으로 어떤 목표를 놓고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방법들을 생각해 냅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막을 때 그의 정신과 모든 이성은 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집중됩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치열하게 생각하고 도전하면서 그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을 만들어 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한 중풍병자를 지붕을 뜯고 예수님 그 앞에 달아 내린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 곳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계셨고 수많은 병자들이 줄이어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아파서 중풍병자를 상채 떠들고 와서 아마 그 줄에 섰을 것입니다. 그것이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이 친구를 낫게 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너무나 간절했더니 줄서 있는 사람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남의 집을 파기한 것을 어떻게 변상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붕을 뜯고 순서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눈길을 끌며 그 분 앞에 그 침상이 떨어지게끔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매우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같았으면 질서를 지키라고 소리를 질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질서를 어긴 잘못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뵈옵기를 원하는 믿음이 가져온 창의적인 방법에 대해서 주님께서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방법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법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들안에 있는 믿음을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세리장이었으니 이 사람의 나이가 얼마였을지는 모르지만 비록 유대인들에게는 멸시받는 직업이었으나 어쨌든 관직에 있는 사람과 비슷한 지위를 누렸고 더군다나 세리장이었으니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탐관오리들도 관리로서의 품격을 갖추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체면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나무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 이 문제를 극복했던 이 사람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러 가려고 할 때 언제나 우리를 가로막는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간절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실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물을 생각합니다. 물이 한없이 흘러옵니다. 댐을 쌓아오면 물이 그 댐을 뚫고 튀어나오지는 못합니다. 물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댐을 쌓으면 물이 잠시 갇혀있는 듯 하지만 꾸준히 그 댐을 매워서 그 댐을 담 넘어갈 생각을 합니다.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물은 끊임없이 막히면 넘어가고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돌아가는 길도 막으면 더 많이 돌아가서라도 결국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것을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일에서만 이 사실이 적용될 뿐만 아니라 또 이 교리는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이처럼 많은 것들이 가로막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할 때 때로는 양심의 송사와 마음의 가책을 받으면서 나같이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하는 내적 송사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혹은 주님을 섬기려고 하고 우리는 정말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주위의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서 주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우리의 의도가 아주 손쉽게 꺾이는 때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어떻게 일어나려고 하면 더 큰 난관이 와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꺾이고 하는 상황들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것도 극복하고 주님을 섬겨보려고 하면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성품들이 주님을 위해서 기여하기는커녕 주님을 위해서 섬기려고 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많이 좌절하고 역시나는 안 돼, 나는 할 수가 없어, 역시 내게 맡겨진 이 일은 내 분량이 아니야 하고 상황을 가지고 불변하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덮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불변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엄연한 사명을 덮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삭개오의 경우를 보더라도 절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끝날 까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화되면 이제는 내가 주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고 이제는 순결하게 되었으며 이제 내가 주님의 이일을 수종드는 것은 주님께 매우 큰 영광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때가 언제 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신명을 다 바치며 목숨까지 바치도록 헌신하였던 사도바울도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하였고 공교롭게도 그렇게 고백하던 때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이었습니다. 가장 원숙하게 성화된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이 가장 죄인이라고 가장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날 동안에 일생동안 지고 가야 할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한사람의 하나님을 섬기는 한사람이 살아있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지 죽어있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지 알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명료하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 일을 섬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러한 고백 속에서 섬겼던 사람이고 예수님을 제외한 신실한 모든 형제들이 바로 주님이 자신을 가장 영광스럽게 쓰실 때조차도 자신이 이러한 쓸모없는 죄인이라는 깊은 자각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예화) 최근에 카비넌트 신학교의 학장으로 있는 브라이언 채플목사가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미국에서도 성화에 관한 저서들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몇 안 되는 목회자인 동시에 신학자이고 저도 그분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 분이 인터뷰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자신도 신학자이고 목회자이지만 매일매일 끊임없이 싸웁니다. 육체의 정욕과 성적인 유혹 물질에 대한 욕망, 이기심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매일매일 갈등하고 싸웁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런 싸움이 자신에게 이미 끝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 이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싸움이니 한사람이 주님을 섬길 때 그 사람의 진실 됨은 이미 이런 싸움은 나에게서 끝난 싸움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싸움 앞에 자신이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죽음을 경험하는 사람, 부분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끊임없이 참회하며 자신이 얼마나 이 거룩한 일을 수종들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섬기는 자의 표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신 구속의 공로를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언제쯤이면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가로막는 방해물들이 없는 진공과 같은 곳에서 주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일들은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방해와 시험거리들이 생겨나서 올곧게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우리들을 가로막고 고난을 줍니다. 그 싸움이 여러분 안에도 있고 제 안에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길 때 내가 지는 때도 있고 내가 이기는 때 여러분들이 지는 때도 있고 우리 모두 이기는 때도 있고 우리 모두 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큰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능력을 많이 주신 것은 곧 그 사람이 주님을 크게 의지하도록 주신 기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매순간 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들이 날마다 죽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부족으로 인해서도 이렇게 어려운데 환경이 끊임없이 가로막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아주 젊은 나이에, 제 나이가 되면 제 육체가 이렇게 주님 섬기는 일을 방해할 거라고 한 번도 계산해 놓고 인생의 계획을 짜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방해가 됩니다. 최근에 서점에 보니까 신앙으로 통증을 이기는 책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보려고 합니다. 정말 얼마나 많이 방해가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 때는 육체의 약함이 게으름으로 변명하면서 영혼의 실증과 야합하고 주님을 열심히 섬기려고 하면 육체의 연약함들이 이 일을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방해물의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되도 괴롭고 저렇게 되도 고통스러운 것이 육체의 연약함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잘 해보고 싶은데 주위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 마음의 올무가 되고 시험이 됩니다. 상황과 환경이 내가 가는 그 좋은 뜻을 가진 주님섬기는 길에 끊임없는 방해와 난관을 놓고 더 악한 경우에는 나의 사역과 섬김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방해하는 악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올무를 놓고 거기에 빠져서 피 흘리고 신음하기를 기다리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들은 기뻐하고 환호하며 박수를 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 앞에 놓여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누가 이런 싸움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찬양)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만 해도 숨이 찰 지경인데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자신의 성품과 기질이 주님섬기는 길에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2.마음의 가시덤불을 태우고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4:3)
우리는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는 은혜가 없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순종할 힘이 없고, 마치 겨울에 눈이 막 쏟아지지만 내리자마자 땅에 녹아서 어디에도 눈이 쌓이지 않고 비가 쏟아진 것 같은 땅이 되는 것처럼, 그런 심령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는 끝이 없는 세계에요. 저는 요즘 신앙의 세계를 묵상하면서 정말 얼마나 이 신앙의 세계가 끝이 없는가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드넓은 신앙의 세계 중에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성적으로도 우리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가는 길은 가본 길이 아니라 늘 못가본 길이고 우리 영혼에 고통이 되는 것은 우리가 이 알고 있는 것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들 때문에 영혼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우매하여 짐승과 같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거죠. 아무튼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삶은 허우적거리고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아닌데 특별히 커다란 범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삶 전체가 무력감에 빠지고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현저히 감퇴되고 정서적인 변화를 일시적으로 경험하기도 하고 순간적인 깨달음 같은 것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 자신이 참다운 만족의 삶, 영혼의 참다운 만족이 없는 그런 영혼의 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이러한 상태에 대해 한 가지 분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씨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구요, 그래서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도 이미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비유입니다. 선지자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많이 말씀하게 하셨고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특별히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아주 뛰어난 종이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종이었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 전달해 준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 사실 탁월한 선지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탁월한 선지자를 탁월하고 좋은 시대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에 보내기 때문이죠. 그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마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활동했던 그 시대는 정말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 종교의 도는 땅에 떨어졌고 돌이킬 기회를 하나님이 수없이 주셨지만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반항하면서 결국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이 예레미야가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씨를 파종한다고 여기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씨를 파종하는데 가시덤불에 하지 말라는 거죠.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60년대에 화전민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들이 사는 생활을 본 적이 있는데, 화전민들은 그야말로 화전을 일구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죠. 산에 올라가서 그저 국유지에다가 저 산에 비탈에 올라가서 거기다 불을 지르지요. 불을 질러서 나무들과 덤불들을 다 태우고 나면은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선 그 많은 덤불들을 다 태워버렸으니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드러났고 두 번째는 거기서 태운 나무의 혹은 덤불의 재가 땅에 떨어져서 땅을 비옥하게 하죠. 그러고 나서는 거기에서 이제 바위들을 골라내고 작은 돌들을 다 솎아내서 땅뙈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소가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쟁기로 갈고 그리고 호미로 파고 해서 거기에다가 감자라도 심어먹고 살던 사람들이 화전민이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씨를 뿌리려면 덤불들을 다 태워버리고 그리고 드러난 맨 땅에 그리고 그것을 잘게 부수고 돌덩이, 돌멩이들을 건져내고 보드라운 흙이 되게 한 다음에 그 다음에 거기에다가 씨를 뿌려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해야지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들 안 하죠. 그러니까 마치 더러운 구정물에 생수가 부어진 것처럼, 혹은 덤불이 가득 있는 곳에 씨가 뿌려져요.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가 싹이 나지 않거나 뿌리가 나지 않거나 줄기가 올라오지 않거나 그랬다고는 말씀하지는 않았죠. 뿌리니까 뿌리를 내렸고 싹이 나왔고 그리고 잎이 나왔습니다. 줄기가 나왔습니다. 어느 정도의 성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성장을 할 수가 없죠. 왜 그럴까요? 가시덤불을 그늘로 가리워서 광합성 작용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콩나물처럼 자라겠죠. 더욱이 그렇게 되서 위에서 짓누르니 위로 계속 뻗어 자랄 수가 없죠. 뻗어 자랄 수가 없으면 잎과 줄기들이 무성하지 못하니까 뿌리가 자랄 수 있는 양분을 공급해 줄 수 없죠. 뿌리에 그런 양분을 공급해서 뿌리를 튼튼하게 하지 못하니까 뿌리의 발육이 더뎌져서 뿌리가 영양분과 물기를 빨아올려서 광합성 작용을 하도록 위로 올려 보낼 수가 없죠. 그러니까 결국은 위에서 누르니까 결국 그것은 줄기, 가지만 성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성장이 안 되고 모든 것들이 성장이 안 되면서 결국은 말라 버리는거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무수하게 떨어져도 그 씨가 마음속에서 큰 나무처럼 자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씨를 뿌리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가시덤불들을 태워버리는 일들이 필요해요.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몇 개월 있었습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 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들의 마음이 다 불타고 기경되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저는 아직까지도 열린교회에서 11년을 목회했지만 그런 회중들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놀라워요. 짧으면 120분, 길면 180분씩 계속되는 그 긴 설교를 90분에서 180분까지 계속되는 설교를 그 고등학교 1,2,3학년 아이들이 똑바로 앉아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빨려드는데 저는 열린교회에서 한 번도 그렇게 설교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죽했으면 얼마 안 되는 시기지만 그 때를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에서 간증을 하면서 지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Mission의 주제가를 작곡한 Ennio Moricone 의 주제가에 나오는 제목이죠. On earth, as it is in heaven이라는 제목입니다. 정말 그렇게 됩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큰 예배당, 좋은 음향 기계, 잘 짜여진 예배 순서, 그런 거 아니죠.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데 제가 얼마나 미숙했겠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그런데 차이는 뭐냐 하면 사람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리차드 십스라고 하는 청교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마음은 tender, soft, melting heart라고 했습니다. 연하고 부드럽고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의 특징이다. 나는 참 굳어진 마음들을 교회에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정말 그래요. 긴 예배당,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회개해도, 뒤에서는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날리고 친구와 이야기하고... 지난 주일에도 그랬어요. 청년부 예배에서. 어떤 사람은 예배가 끝나고 회심하느라고 자리를 못 뜨고 어떤 사람은 설교도 안 끝났는데 핸드폰 꺼내서 문자를 날려요. 정말 이러한 마음의 밭이니까 우리에게 참다운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없는거죠.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그런 정도의 비회심자와 같은 마음은 아닐거에요.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가시덤불들이 우리에게 뿌려지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우리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십스의 말과 같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은 연하고 부드럽고 물 같이 녹아내리는 그런 마음이에요. 특히 물 같이 녹아내리는 마음, 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이 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은 버터 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난 다음에 그 마음의 특성은 아주 연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그렇게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녹아내리지 못하게 하는 사람도 우리 자신이라는 이야기죠. 그래서 마음이 모두 우리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기의 마음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을 가진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복되요.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남김없이 쏟아부어져서 그를 변화시킬 거에요. 사람이 변화되는 게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아니면 금방 변화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지는 않았지만 물같이 녹아내리지는 않으니까 사람이 천천히 변하는 것이고, 물같이 녹아내리면 그 사람은 순식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요. 지지난주에 마당에서 자매 하나를 만났는데 아주 완고한 불교 집안의 자매야. 집에만 들어가면, 혼자 사는데, 누군가가 항상 옆에 있는 거에요. 말할 수 없이 두렵고 괴로운데 예수 믿을 마음이 생겼어요. 한번도 교회 나간 본 적이 없는 자매에요. 우리 교인 중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되겠으니까 날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교회 온 첫 날 회심을 했어요. 인도한 형제가 우리 교회 집사인데 그 자매 옆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는 너무 도전을 받은 거에요. 이제 5주 되었는데 매시간 마다 눈물 흘리면서 은혜를 받아요. 그래서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된대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게 melting heart에요. 녹아내리는 마음. 이게 없으니까 많은 은혜가 간간히 주어져도 간간히 이런 은혜가 주어져도 이 은혜가 이 사람을 바꾸어놓는데에 활용되질 않고 이 사람 속에 자라고 있는 가시덤불 속에서 은혜가 소진되는 거에요.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은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하고 그 사람을 부패시키려는 죄와 융합되는 가운데 소멸되요. 그러니까 내가 아까 든 비유가 정확한 비유죠. 구정물에다가 생수를 붓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은 생수를 계속 하나님이 많이 부어주시면 구정물이 계속 올라와도 아주 맑은 물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성화의 원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립니까? 최근에 언제 그랬었습니까? 그것이 무슨 이유든지 간에 십자가를 지는 고통 때문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함 때문이든지 혹은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죄 때문이든지, 무엇 때문이든지 간에 그렇게 여러분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나는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배설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를 주님 혼자 두지 마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물처럼 확 녹아서 굳어졌던 우리의 심령이 기도할 때 피의 펌프질을 하기 시작하는 그런 경험이 언제입니까? 내가 새벽기도를 하러 항상 나가면 내 뒤에서 몇 년째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요. 자매가 기도를 하는데 내가 이름도 알죠. 맨 처음에는 그랬어요. 저 자매가 얼마나 마음이 물같이 녹는 상태를 유지할까? 아마 6개월? 길면 1년? 지금 3년이 넘게 계속 그렇게 새벽마다 녹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요. 참 복된 자매에요. 여러분들은 언제입니까? 다 소용없어요.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익숙해진 성경의 지식, 교리적인 이해,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유창한 언변. 그거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안전함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오죽 했으면 야고보 사도가 그랬겠어요? 정신없는 사람들아, 마귀도 믿고 떠느니라. 물같이 녹는 마음.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 했어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고의 행복이 무엇일까? 도시에 살든지, 가난한 시골에 가서 그렇게 땅을 일구며 살든지 간에 바로 그러한 마음,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려서 그래서 언제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주님이 해주시고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그런 합일 속에서 살아가는 것. 얼마나 행복한 신앙생활일까 라고 말이죠.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이 정말 물같이 녹아내리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다양한 환경과 방법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종종 이렇게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녹아내리고 싶은 사람의 마음만 주님이 녹아내리게 하시지 하나님 없이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 가시덤불 속에서도 자족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이렇게 물같이 흘러내리게 하시지 않으셔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마음이 물같이 흘러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시간에 그것을 모두 설교할 시간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한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생각하는 것이에요. 저는 가끔, 가끔이 아니라 매우 자주 그렇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음이 깊이 녹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너무 허무해요. 저 아름다운 외모, 저 엄청난 물질, 미친 듯이 달려가는 저 쾌락에의 질주, 그리고 수없는 탐욕의 마지막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들어주죠. 이런 사실들은 이미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에요. 사람이 정말 외로운 것은 숲 속에 혼자 있을 때 외롭지 않아요. 도시 속에 외로워요. 주위에 사람들이 고요할 때 외로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소음들이 들려올 때 그 속에서 자기가 배제된 느낌을 받는 거에요. 인생이 얼마나 철저히 소망이 없고 이 세상이 얼마나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것을 깊이 숙고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물체가 있으면 우리의 감관이 이것을 봐, 이것을 봐가지고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요동칠 뿐이에요. 물질적인 탐욕, 세상의 변화에 우리의 마음이 요동칠 뿐이에요. 사물이 있으면 우리의 눈은 이 사물을 보기 위해 있지만 우리의 지성은 이 사물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있는 거에요. 그 너머에 있는 그 실재가 무엇인가.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몄을 면류관, 높은 지위와 아름다운 명예, 좋은 생활환경들, 이런 모든 것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마음의 소욕을 잠재우고 그것들을 보면 그것들이 잠깐 지나가는 것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그 너머에 있는 불변하는 가치들을 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거에요.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지존하신 하나님께 피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되요. 녹아내리는 거죠. 그러면서 모든 것이 헛된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요. 그리고 그 욕망을 지워버려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지워버리는 가운데 우리가 정말 혼자 살 수 없는 존재, 이 세상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어도 이 세상과 우리는 전적인 타자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요. 그러면서 비로소 우리의 눈을 들어서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을 바라게 되요. 위의 것을 우리들이 눈을 들어서 바랄 때 그 위의 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요? 없죠. 살아온 모든 삶이 그걸 말해줘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죠. 며칠 동안은 길을 걸어가든지 음식을 먹든지 내 마음 속에 반복되는 한 토막의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 내가 주님께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제가 주님의 자식인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돼. 하고 있는 일,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지식, 그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신앙생활을 잘해야 돼. 그래서 여러분들이 늘 물처럼 녹아내려야 해요. 물같이 녹아내려야 해요. 늘 휴지를 휴대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리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도록 뜻을 세워야 해요. 구체적으로 조언을 주자면, 빈들에 서야 해요. 하나님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마음을 주실 때에는 항상 그 사람들을 일상적인 삶에서, 일상적인 마음에서 하나님이 광야로 불러내셨어요. 모세가 그랬죠? 그렇죠. 모세가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데 이드로의 집에서 목동들과 함께 어울려 일할 때에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사이로 부르셨어요. 그 뿐만이 아니죠. 광야는 아니지만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해저물 무렵이었을거라 믿어지는데, 그발 강가에 섰었죠. 홀로 있는 그 시간에 주의 말씀이 임했죠. 예수님이 권능으로 충만해지시기 전에 유대광야에서 40일을 외롭게 보내셨죠. 세례요한이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경험을 했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아라비아의 광야로 갔었죠. 사도 요한이 마지막 날에 될 위대한 계시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단절된,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 밧모에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죠. 그래서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빈들에 서는 마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것, 내 영혼의 시선을 분산시키던 일상적인 것들, 중요해 보이고 가치 있었던 것들이 사실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눈뜨고 나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다 버려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먹는 것이든 입는 것이든 듣는 것이든 보는 것이든, 그러고 나면 자기를 속박하던 많은 것들 속에서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최근의 저는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서 반성을 좀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죄를 지은 것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너무 내 자신의 정서를 방탕하게 내버려둔 것 같아요. 그래서 당분간 기도하기에 도움이 되는 음악 이외에는 안 듣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그런 결심들을 하고 나니까 경건에 매우 도움이 되요. 음식도 마찬가지에요.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먹는 즐거움을 위해서는 당분간 음식을 대하지 말자. 그리고 음식을 대할 때 어떤 기대도 갖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요. 주님이 주시는 본성과 계시의 빛 아래서 무엇이든지 활용을 하세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가시덤불 같게 하고 주님을 온전히 앙망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러면 비로소 심령이 가난해지고 정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떠한 희망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가 참 예배를 드리는 중이고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기도의 음성 중 한 톨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섬길 때 하나님은 그의 티끌 같은 섬김을 통해서 하늘같은 영광을 받으셔요. 그 녹아내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이 주님의 사자가 되는 것이고 녹아내리는 그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 속에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에요. 한 사람의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 사람의 외모나, 소유, 지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한 사람의 진정한 탁월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가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속하라. 마음의 할례받지 못한 가죽들이 있어요. 이것들을 베어내라는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3.환란 중에 참으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12:12)
녹취자: 이민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다가 보면 눈앞에 펼쳐진 환경이 우리를 낙심하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이 세상이 불안정하고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끼고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당신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때 우리들은 낙심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환경이 너무 어렵고 그리고 막막하고 그리고 가고자 하는 길은 있는데 그 길로 인도하는 좋은 조건들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방해요인들이 떠오를 때 우리가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들이 믿음이 충만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소망을 갖지만 믿음이 없으면 우리들이 환란과 많은 어려움 장해가운데 그대로 우리의 마음까지 갇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눈에 보이는 사물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소망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환란과 어려움들을 딛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서 걸어가며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란 중에 참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환란 중에 참는 것, 우리가 뜻을 세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많은 환란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에는 박해가 있어서 맘 놓고 예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큰 환란이 있었지만 오늘날은 그런 환란은 비교적 적지만 그러나 오늘도 우리에게 뜻을 세우고 목표를 따라서 살아가려고 할 때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그리고 그런 것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환란이 되어서 불같이 폭풍같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다에 치는 파도가 조가비들을 점점 더 단단하게 하듯이 인생사에 밀려오는 이 많은 환란들은 우리의 성격과 우리의 모든 성품들을 연단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도 그 사람을 가리켜서 순전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그렇지만 환란의 불 가운데 들어가고 나니까 그 속에서 많은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욥 자신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이며 죄인이며 정결하게 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그런 불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환란을 통해서 이 욥은 자기가 하나님께 더 온전히 나아가고 순전한 사람이 되기를 마음 속으로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했습니다. 즉 환란을 통해서 자신이 정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환란을 당할 때 우리들이 주님 앞에 보여야할 덕목은 잘 참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참아야 합니다. 당할 때는 왜 이런 환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 불이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가열하시는 것이고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의롭고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불붙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두드리시지만 보다 많은 대부분의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옳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두드리시고 우리가 아직 정금같이 되기에는 거리가 먼 불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로 사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래 참는 것입니다. 참는 데에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선한 의지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지성과 정서와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서 손상되지 않고 보전되었을 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의지가 상하거나 꺾어지고 나면 지성도 소용없고 하나님 앞에 펑펑 우는 눈물도 소용없고 목숨을 버리는 결단을 남발하는 것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면 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 선한의지의 중요성을 심각할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의 교리를 잘못 적용시킨 오류이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의지가 꺾이지 않고 휘지 않고 잘 보존된 것은 그 사람의 겉 사람이 아무리 후패하고 그가 주위로부터 아무리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무지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단순한 믿음 속에서 선한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고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의지조차도 ‘그게 우리 것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게끔 해주셔야 그 의지가 보존되지 그 의지가 우리 것이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교만이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신앙의 초기에 심지어 신학교에 다니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의지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운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생하여 안다고 해서 아는 그것이 과거의 일어난 일을 망가뜨리거나 우리 마음대로 하지 않듯이 하나님이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신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의 행사는 하나님의 앎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 의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운 의지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의지가 그 자유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고 그 뜻을 이루며 살아가려고 하는 그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에 거기에는 사변적 지성이 있고 실천적 지성이 있습니다. 사변적 지성의 목표는 단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지성의 목표는 진리가 무엇인지 인식한 다음에는 행함에 있어서 선함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사변적 지성과 실천적 지성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이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변을 넘어서 실천의 삶을 살게 하는 그런 종류의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잘못을 하고 죄를 짓고 나면 때로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피해자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마귀가 나를 꼬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하와처럼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으나 육신이 연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고 엄밀한 의미에서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피해의 당사자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행동, 잘못된 삶의 끝은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 뒤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자꾸 작용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악을 행할 때는 악한 의지가 작용해서 그 일을 했고, 그렇지만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가 악을 행했을 때는 왜 그 일을 했는가, 거기엔 작용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수많은 유혹이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법의 강력한 힘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건 우리로 하여금 작용하게 하는 원인이라기보다는 있어야 할 것이 빠진 결함 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 있으면 자유로운 의지가 선을 찾아가 선한의지의 상태가 우리 안에 잘 보전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 안에서 작용하도록 그렇게 자기를 충분히 채우지 못한 것은 누구도 원망 받을 사람이 없고 자기 자신의 전적인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책임이 인간에게 귀속되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속에 꽉 차있을 때는 이런 선한의지가 보존됩니다. 여기에 환란가운데 참는 그것은 바로 그 선한의지를 지키기 위한 변질되지 않으려는 저항의 몸부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많은 수고와 항상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무엇하나도 가만히 있는 것이 없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화)
컵이 있으면, 밖에 요인은 이 컵을 해체하려고 하고 응고된 유리는 자기의 특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담겨진 이 물은 끊임없이 밖으로 퍼지려하고 응고된 이 유리는 이 물을 밖으로 퍼지지 못하게 강한 힘으로 담아두고 있습니다. 힘과 힘이 균형을 이루고 대칭을 이루니까 지금 이 물이 이 컵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질되려고 하고 그 선한의지에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그런 것들이 이 속에서 작용이 계속 강하게 일어나고 그런 쪽으로 가려고 힘이 쏠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저항하는 인내는 굉장한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선한의지를 보존하려는 것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선한의지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많이 깨닫고 선한의지가 없는 사람보다는 진리를 한 쪼가리만 깨달았어도 선한의지를 보존한 사람이 이 땅에서 훨씬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 선한의지를 잘 보존된 사람인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분만 알고 선한의지를 겨우 보존하고 있는 사람과는 비교될 수 없는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인내는 바로 그런 선한의지를 보전하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 인내의 뚝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도 보전되고 그 인내의 성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자신에게 주신 가장 좋은 것들이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 인내는 인내하게 하는 힘 자체가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랑장에서 말하길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참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많이 참아야 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 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여러분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그대들 가슴에 있는 선한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꺾이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마어마하던 그 성이 단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진리를 알았든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분주하게 살았든 비유를 하자면 조종실을 강탈당한 열차와 같은 것입니다. 선한의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간으로 존재할 때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지식의 수준, 이런 것은 모든 수단입니다. 마지막에 그것들이 빚어내는 작품이 선한의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그 뜻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가려고 하는 그 선한 의지. 그것이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면서 인정해주신 사람들은 바로 그게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게 오래도록 보존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아주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았어도 이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학문이 조금 모자라도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다른 사람같이 탁월함에 있어서 좀 떨어져도 그래도 이 선한의지를 잘 보존하고 있으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더 많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의 유언 적 명제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진리를 붙잡는다.’
마지막으로는 그런 선한의지를 간직한 채 기도에 힘써야 됩니다. 제가 요즘 기도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시간이 절대적인 시간의 길이에 있어서 현저히 짧은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현실생활에 대한 분주함을 뜻하는 것이며 그 분주함이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을 점령했기 때문에 주님을 모셔드려서 좌정하시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빈방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분주히 애쓰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시간이 없고 바쁘다 해도 사실 자기 하고 싶은 것은 다 합니다. 결국은 환경은 애꿎은 핑계일 뿐이지 실제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좌정하게 하실 만한 마음의 공간이 없는 것이 시간의 외연으로 뻗치면서 시간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현저하게 선한의지를 지키며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선한의욕이 상실된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절대적인 시간의 길이에 있어서 현저히 모자라기 때문에 시간을 떼어놓고 일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시간을 깨뜨리지 않겠다는 형식적인 결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혹시 이렇게 시간의 길이를 확보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고 할지라도 기도가 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늘 기도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무릎을 꿇는 형식 속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쏟아 붇는 간절함 속에서 그 분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그분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 안에 있는 부자유하게 하는 것들과 더불어 싸우고 분투하는 데 자신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쏟게 됩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과 짧은 시간 속에 교통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때 기도에 있어서도 경제성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곧바로 쑥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언어들을 그 임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기도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들어갈 때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분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은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 앞에 바쳐서 기도하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기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기도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어느 청교도 한사람은 기도할 때 자신이 충분히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새벽기도에 엎드려져서 일어나지 않는 삶을 매일매일 살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청교도 중에 유명한 러더포드라는 사람입니다.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그대들의 영혼을 지켜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여러분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많이 엎드려야합니다. 우선 절대적인 시간에 있어서 장시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꺾어진 선한의지가 그 은혜 안에서 치료되고 보존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하나님을 방패삼는 사람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방패는 자기의 전신을 보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방패로 허공을 날아드는 상대방의 칼을 막아내기도 하고 수없이 쏟아져 소낙비처럼 내리는 불붙은 화살들로부터 자기의 몸을 숨기기도 해요. 그러니까 방패가 자기를 막아주기만 하면 일단 치명적인 위협으로부터 보호가 되는 거지요.
다윗의 시를 보면 유난히 방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마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시편 2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영광이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때에도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서 황급히 도망을 가면서 지은 시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 앞에 방패를 많이 노래했습니다. 오늘 군인이었던 다윗이 여호와가 자신의 방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설명을 덧붙이는 데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다’ 라고 하는 거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고난이 일반적인 고난이 아니라 때로는 소낙비처럼 퍼붓는 화살의 공격을 받을 때가 우리의 인생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칼과 창은 어디서 오는지 알지만 소낙비처럼 오는 화살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그리고 그것을 쏜 자를 찾아내기도 불가능합니다. 또 찾아낸들 그가 너무도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때 유일한 피난처가 방패그늘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에베소서 6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악한 자들의 불화살을 맞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것은 꼭 그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환경과 많은 것들이 압박을 하면서 우리를 집중적으로 겨냥을 하고 우리를 넘어뜨리기로 작정을 하면서 온갖 화살을 날려 보내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시련의 때이고 시련의 때에는 대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시험의 때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방패이신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정답은 너무 간단하지요. 우리의 그늘이 되는 그분께 피하면 되지요. 그리고 우리의 방패가 되시는 그분 아래로 도망가면 되지요. 십자가 그늘 아래 숨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구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늘은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겠다는 의지가 깃들인 그늘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분의 의지에 반해서 우리의 영혼을 탈취하거나 우리를 해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는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간단한 정답이 나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화살이 날아오는 것 같은 공격을 받을 때 믿음에서 이탈하거나 시험에서 지거나 시련을 만났을 때 낙담하여 엎드려져서 손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영혼의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항상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냐면 하나님은 사용하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향유하려고 해요. 즉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즐기려고 하고 그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용하려고 해요. 그런데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면 환란 날에 이렇게 방패 되신 주님의 그늘 아래로 피할 수 없게 하는 삶이에요.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즐거워할 수 있는 원천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분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수단들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용하고 이용하고 하나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의 것,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것을 사용해서 이룰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욕망, 그것은 즐거워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구도에서는 그가 시련을 만날 때 절대로 그가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렇게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불가능한 것이지요.
자신은 그렇게 고난을 만나고 혼자 있는 것같이 외로울 때 그렇게 고백하고 싶을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안돼요. 입술로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데 정말로 방패 되신 하나님의 그늘에 있는 것같이 그렇게 거룩한 평정을 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이번에 L.A.에 집회를 갔는데 마지막 하루가 남았어요. 은혜를 많이 받은 목사님들이 저를 디즈니랜드를 보여 드릴까요,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보여 드릴까요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런 건 안 보여줘도 괜찮은데 내 소원하나 들어달라고. 이 L.A. 바닥에 나를 많이 사랑하던 은사님 한 분이 계신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으면 찾아서 나를 데려다 달라고.
그분은 참 성자 같은 분이었습니다. 조직신학 교수님이었고 제가 2년 동안 그 분을 조교로 모셨습니다. 3년 정도 ? 2년 정도? 모신 것 같네요. 그 분은 이 땅에 살아있는 제가 만난 성자와 같은 분입니다. 아버지가 부산에 지주였습니다. 아주 부자였어요. 그 분이 1930년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에 유학을 했고 머레이 교수 밑에서 배웠습니다. 지금 아흔 네 살 이십니다.
고려신학교에 교수로 계실 때 채플실에 들어가면 학장님이 눈물로 기도를 하고 계시곤 했다고 합니다. 종이 정말 불비해서 직원들 월급도 못 주고 두 분밖에 안 계시는 직원들 생활비도 못 줍니다. 그리고 울면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 교수님이 집에서 땅문서 하나 가지고 와서 이거 팔아서 급한 대로 직원들 월급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다 주님을 위해 쓰신 분입니다. 제가 그분의 제자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계신 목사님이 많이 수소문해서 교수님 계신 곳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과일 한 바구니하고 꽃다발 하고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조교로 있을 때 일흔 네 살이었으니까 지금 아흔 네 살이 되셨죠. 노인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셨어요. 그분 사돈이 박윤선 박사님이세요.
여덟 명의 자녀들이 다 잘되었습니다. 의사 박사 교수 목사 그렇습니다. 이미 손자가 벌써 40, 50 된 나이니까. 그 자손들이 그렇게 오라고 해도 안 오시고 내가 왜 아이들에게 폐를 끼치느냐고 싫다고 혼자살고 계셔요. 부인은 7년 전 에 돌아가시고. 정신이 초롱초롱하셔서 저를 알아보셨어요. 제가 절을 했지요. 다리까지 불편하셔서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못 일어나시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 이렇게 아파트에서 혼자서 이렇게 사시면 얼마나 외로우세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94살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를 안 믿으면 몰라도 예수를 믿는데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항상 함께하시는데..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어요. 외로워 보이셨는데 .. 외롭긴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그래서 나같이 따르는 사람도 많고 아직 나이 젊은데도 외롭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나는 내 곁에 사람이 없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데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어요. 비행기 타고 오면서 많이 눈물이 났어요. 지금 귓가에 많이 맴돌아요. 주님이 함께 계신데 뭐가 외로워.
아 그래 맞아 내 옆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안 계셨었구나 누가 정말 외로울 때 그렇게 고백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근데 안돼요. 그런 고백이 안 돼요. 주님이 정말 필요할 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받으시옵소서 내가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합니다. 이렇게 한 순간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실로 긴 세월동안을 그분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해요.
그래야지만 정말 주님을 누려야 할 그 순간에 ‘외롭긴 뭐가 외로워 예수 안 믿으면 몰라도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데’ 책보고 기도하고 그렇게 지내시죠. 문을 닫고 오면서도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며칠만이라도 모시고 같이 있고 싶었어요.
지상에 남은 마지막 스승이신데 내가 저렇게 되었을 때 자식들도 다 떠나고 교인도 없고 이제 너무 늙어서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도 없고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는 독자들의 편지도 없고 너무 구닥다리기 때문에 가까이 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전수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고 우리 집 사람도 먼저 여의고 나 혼자 남았을 때 그 때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 까 그래야 될 텐데..
오늘 보세요. 다윗은 여호와가 아무 사람에게나 방패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올곧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자신을 통해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올곧은 마음의 상태, 이것이 정직한 마음이에요. 그냥 거짓말하지 않고 사기 치지 않는 그것이 아니라 마땅히 정위 되어야 할 방향으로 올바르게 정위 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은, The heart of goodness의 마음은 선함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의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에요.
근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을 시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까지 그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이, 올곧은 마음이 얼마나 공격을 받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거기에서 실로 긴 세월동안 마치 자신의 마음이 마치 자신의 생명인 것처럼 그렇게 그것을 지키고 하나님을 향해 시종일관 같은 마음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 애썼던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올바른 목적을 향해 정의 되어있는 그 마음을 가지려고 애를 쓴 장구한 신앙의 몸부림이 있었기에 오늘 이 환난의 날에 ‘주님은 나의 방패이십니다.’
27편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이까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저도 30년을 회심하고 신앙생활 했어요. 근데 신앙생활은 정말 어려워요. 어렵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인간이 내가 큰 시련을 만나고 인생을 살다가 종종 이처럼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며 쏟아지는 빗발치는 수많은 화살들을 만날 때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방패로 하여 그 뒤에 숨어서 그분을 반석삼아서 정말 평안을 누리기까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동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하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어떠한 행복도 찾지 않는 그 장구한 세월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런 종류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마음 자체가 하나님 밖에서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미워해야 해요. 아주 더럽게 생각해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합일하고자하는 우리 안에 있는 신실한 마음의 경향성을 훼손시키지 아니하고서는 그러한 경향성을 충족시킬 수가 없는 것이에요. 어거스틴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인상 깊은 말을 남겼어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거짓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 진리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유명한 명제 ‘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 선생님 만나느라고 아무것도 못보고 그냥 왔습니다. 그렇지만 L.A.에 있는 어떤 관광명소보다 제게는 더 큰 기쁨이었습니다. 지금도 머리에 뱅글뱅글 돌아요. 외롭긴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면 방패 되신 주님 뒤에 숨을 수가 없어요. 매일 매일 그분 안에서 행복을 찾고 그 분 안에서 기뻐하고 그러다가 특별한 환란의 날이 올 때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분의 방패 뒤에 숨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인이 고백한 또 다른 고백을 우리도 경험합시다. 주를 사랑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31편에서 시인이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늘 가치를 바라보고 사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환난중에 인내하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