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침체의 원인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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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한 믿음(창16:16-17:1) 2008.10.20 가을 말씀사경회(새벽) 1
2. 무거운 짐(민11:10-17) 2008.10.21 가을 말씀사경회(새벽) 9
3. 집중된 수고(삿15:14-19) 2008.10.22 가을 말씀사경회(새벽) 16
4. 믿음 없음(합1:2-4) 2008.10.23 가을 말씀사경회(새벽) 23
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5. 목적을 모르는 고난(욥23:9-10) 2008.10.24 가을 말씀사경회(새벽) 30
영적 침체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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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영적 침체의 원인 4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08/10/23)
영적침체의 원인 1
약한 믿음
창 16:16-17:1
I. 본문해설
II. 아브라함의 영적 침체
A. 약한 믿음
B. 온전치 못한 삶
III. 결론: 쇄신된 믿음 안에서 살아감
영적침체의 원인 2
무거운 짐
민 11:10-17
I. 본문해설
II. 모세의 영적 침체
A. 무거운 짐(11) : 도구적 원인
B. 은혜의 결핍 : 유효적 원인
III. 하나님의 해결
A. 짐을 덜어주심 : 동역케 하심(17)
B. 성령을 부으심으로써(18)
IV. 침체와 해결 사이에서
A. 기도(10-12)
-중심을 토로함
-자기약함의 고백
B. 하나님의 말씀하심(16): "이르시되"
-이 자체가 기도의 교통
-그 안에 모세의 해결이 있음
V. 결론
영적침체의 원인 3
집중된 수고
삿 15:14-19
I. 본문해설
II. 집중된 수고
III. 헌신과 탈진
IV. 회복의 하나님
영적침체의 원인 4
믿음 없음
합 1:2-4
I. 본문해설
II. 침체의 원인
A. 신앙의 논리
B. 현실의 모순
III. 침체의 극복 : 믿음
A. 하나님의 주권
B. 하나님의 영광
IV. 결론 : 성도의 기쁨
영적침체의 원인 5
목적을 모르는 고난
욥 23:9-10
I. 본문해설
II. 믿음의 양면성 : 강함과 약함
III. 연단의 목적 : 자신 안에서 발견함
IV. 하나님의 기쁨과 성도의 기쁨
영적 침체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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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영적 침체의 원인 4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08/10/23)
영적 침체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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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영적 침체의 원인 4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08/10/23)
1.약한 믿음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6:16 ~ 17:1)
I. 본문해설
우리들이 흔히 아브라함 하면은 믿음의 사람이다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래서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게 하신 이후로부터 하나님이 끊임없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하나님이 교제하시는 관계가 계속 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가 나이가 86세였는데 한 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말씀하시는 때가 그때가 99세예요. 그러니까 13년이라는 세월동안 아마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거의 끊어진 가운데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갔다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뵈옵던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무얼 잘못했길래 하나님이 그에게 얼굴을 가르시고, 13년이라는 실로 긴 세월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주시지 않는 그 긴 영혼의 침체가 왔을까 하는 것이죠. 사실 여기에서는 그 모든 내용들을 생략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 아브라함의 13년이 매우 고통스러운 영혼의 진통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만나고, 그리고 영적인 교제가 있고, 또 우리가 잠시 미끄러져도 하나님이 붙드시고 하는 이 끊임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신앙의 경험 안에서 우리들이 완전히 미끄러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브라함의 경우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의 끊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 영혼의 고통스러운 침체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이러한 깊은 단절은 여기가 처음인데 이 속에서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을까 하는 것을 우리들은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영혼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활기와 왕성한 기운, 이런 것을 잃어버리고 생명력이 희미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때에 많은 동반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현저한 감퇴,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좋은 것들, 그의 영광과 그의 사랑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용서받은 자녀라고 하는 사죄에 대한 이 세 가지 감각들이 현저하게 둔해지게 되고, 이러한 영혼의 침체 속에서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혼란된 감정 속에서 융성해져서 그래서 은혜의 원리보다는 죄의 원리가 내면의 세계를 훨씬 지배하게 되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순종하고 기쁨으로 섬기며 살 수 있는 원기와 활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영혼의 침체, 혹은 영적 침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침체는 아주 여러 가지 요인을 통해서 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러나 또 하나님 이외에 보이는 세상과도 관계를 맺고 있어요. 또, 하나님과 보이는 세상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맺고 있죠. 예를 들자면 똑같이 새가 지저귀는데 기분이 좋을 때는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우는 것처럼 들리는 거죠. 그렇죠? 똑같은 아이들의 재롱인데도 어떤 때는 귀여워 보이고 감정 상태가 매우 나쁠 때에는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거죠. 이렇게 인간은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 안에 있는 세계와 관련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이 속에서 인간의 감정과 그리고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실로 복잡하고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죠. 그래서 끝없이 인간은 이 셋과 하나님과 세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삼자, 하나님과 환경과 그 다음에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신 속에 일어나는 실로 현묘하고 아주 복잡한 작용 속에서 그런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영혼의 침체는 이러한 하나님과 환경과 자기 자신과의 관련 속에서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러한 관련의 복잡성들이 곧바로 영혼의 침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영혼의 이 침체의 문제는 죄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삼자의 연관의 관계 속에서 죄가 또 작용함으로써 그래서 우리들의 영혼을 본래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생생한 경험과 그리고 영적인 원기와 활기 속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에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새벽 시간이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자 그러면 이 아브라함에게 온 이 영혼의 깊은 침체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실 이 점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냥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고, 99세 때는 13년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 이외에 왜 이 아브라함이 이런 영혼에 깊은 침체기,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어두움의 시기 속으로 들어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단서는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하는 단서예요.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시는데 12장 이후로 12장, 15장, 17장 그래서 여러 장에서 19장, 22장 등등 여러 차례 나타나시는데, 나타내실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소개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후에 신약에서 나오는 구약에서도 이런 일들이 선지자들에게 계속 반복하고, ‘나 여호와는 이러이러한 하나님이다, 나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이러한 자기 계시의 방식이 신약에도 이어져요. 그래서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마지막 날에 될 일을 계시해 주실 때에 7교회에 관해서 각각 심판하시면서 그리고 당신 자신을 소개 하시죠. 그런데 그 소개가 각각 다 틀려요. 그러니까 당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그 자기 계시가,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당신이 메시지를 주시려고 하는 그 교회와 교회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이거죠. 그런 이야기예요. 더 얘기하고 싶지만 그냥 넘어갑시다.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계시를 하셨냐면 자, 17장 1절을 보십시요. ‘아브라함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리고 자기 계시가 나오고 그 다음에 삶이 나와요. 어떻게 살으라는 지시가 나와요. 이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게 뭐냐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게 바로 13년 동안 아브라함이 영혼의 침체기를 지나야 했던 이유예요. 그러면 결국 아브라함이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기를 지나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라는 거죠? 약한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믿음때문이었다 라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이미 아브라함이 고민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사에 대해서 약속하시자 아브라함은 자기는 씨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의 종이 자기의 후사가 될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난 자식이 너의 후손이 될 것이다 말씀하시며 그를 친히 이끌어 밤중에 바깥으로 데려가셔서 그래서 하늘에 가득히 있는 뭇 별들을 보시며 너의 씨가 저렇게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약속을 해주셨어요.
우리들이 보며는 서울에서는 별이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별 볼일이 없어요. 여기는 서울도 아니지만, 완전 시골이 아니기 때문에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수련회 같은데 가서 저 강원도나 이런데 가서 밤중에 날 맑은 날 밖에 나오잖아요. 밤에 보면 별이 진짜 별떨기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산업도 발달하지 않고 공장도 별로 없었을 때니까 그 밤에 하나님이 이끌어 나가셨을 때 그 메소포타미아 하늘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별들이 찬란하게 빛났겠어요. 그죠? 생각해 보세요. 그 별들을 보면서 헤아릴 수 없는 걸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이 하늘의 별처럼 그런 표현을 많이 썼잖아요. 그렇게 그런 하늘을 별들이 쏟아질듯이 가득 있는 그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너의 몸에서 난 씨가 저렇게 많아질 거다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보여주셨더니 아브라함의 반응이 뭐였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의로 여기셨더라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슨 믿음이 약해진것이냐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거예요.
우리들은 흔히 믿음을 하나님 체포하는 밧줄로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일단 세게 믿으면 하나님도 꼼짝도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자꾸 안 믿어지는데 믿는다고 최면을 계속 거는 거죠. 심지어는 감사헌금부터 먼저 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감사헌금은 받겠지마는 그게 뭐 진짜 믿음이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좀 생각을 해 보아야 해요. 성경은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객관적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자기 암시적인 믿음이 있어요. 근데 성경에서 강조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암시적인 믿음, 나는 꼭 이런게 될 거야, 되리라고 믿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도와 주셔야 돼, 이런 식의 자기 암시적인 믿음이 성경이 관심을 갖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보이는 환경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기초로 했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이루어진다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중국에 가보면 그 용경협이라는데를 한번 가보니까 줄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요. 사람이. 그거는 내가 이렇게 보니까 기술적으로 보더라도 뭐 그렇게 쉽게 떨어지진 않게끔 그렇게 해 놓은것 같더라구요. 근데 생각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이쪽 계곡에서 저쪽 계곡으로 줄을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요. 저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거기를 건너가고 또 저쪽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면 반대편으로 건너가요. 그래서 이제 박수 치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물어봤어요. 가장 열렬히 박수치는 여러분에게 내가 이제 여기에서 10년 동안 이 줄을 탔는데 오늘도 이 줄을 타고 내가 저 건너편으로 건너갈 텐데 당신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믿는다고 하겠죠. 내 뒤에 같이 타고 가자고 하면 같이 가겠어요? 안가겠어요? 안가죠. 그거는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니죠.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 것이 아니죠.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랄 때 보면 높은 곳에 올려놓고 아빠가 이만큼 떨어져서 이리 와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이 허공에다가 몸을 던진단 말이에요. 근데 한번 두번 하면 아이들이 재미가 있어서 계속 해 달라고 그래요. 근데 만약에 아이가 허공에 몸을 던졌는데 아빠가 이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중상이겠죠. 떨어져서 머리가 터지고 피가 나겠죠. 근데 안 그러리라고 하는 것을 아이가 굳게 믿는 거예요. 논리로 믿는 게 아니라 아빠가 이렇게 돌아서면 자기가 떨어져서 목뼈가 뿌러지고, 아니면 그 날이 생애의 마지막 점프가 될지도 모르는 날인데 기꺼이 그것을 하는 이유는 뭐냐면 이제껏 살아온 그 아빠의 성품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거예요. 그게 아주 훌륭한 믿음이에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어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정말 귀하게 생각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면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신들의 천지였어요. 거기가 말하자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달한 본산지였거든요. 그러니까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어요. 그리고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신들의 세계 속에 자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고 그런데 그 신들은 신뢰하기 힘든 그런 아주 조잡한 신들이었어요.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 신도 또 그 많은 신들 중의 하나겠구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인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 신들과는 당신이 다른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통해서 친절하게 보여주셔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러한 하나님을 깊이 믿고 의지할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이 믿음은 정말 훌륭하게 여기셨던 것이에요. 즉 이제껏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수 많은 신들에게 표하지 않았던 경의로서 신실한 믿음을 아브라함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신 것이죠.
아브라함이 그렇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 믿음이 진실되다는 표징까지 보여주셔요. 그게 뭐냐면 제사를 지내는 사건이었어요.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쪼개 놓았더니 하나님이 불길로서 그 제물 사이를 지나가시는 거죠. 이거는 고대의 근동의 의식과 관계가 있어요. 짐승들을 쪼개 놓고 그리고 약속을 맺는 당사자들이 함께 거기를 손잡고 핏길을 걸어서 지나게 되어 있는데 둘 중의 약속을 어기면 그렇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죽음에 이르는 약속이에요. 하나님이 당신을 믿지 못하니까 아브라함에게 표징으로서 당신 자신이 쪼갠 고깃사이를 지나가심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이 언약이 신실하다는 것을 인쳐주신 것이에요.
그런데 인제 문제는 뭐냐면 이 믿음이 항상 우리에게 한번 주어진 믿음이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중생한 신자들에게 이 믿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믿음은 마치 우리의 은혜의 상태처럼 충만하고 활기 있어지는 때가 있다고 하면 반대로 희미해지고 연약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우리 안에 심겨져서 자라기도 하고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고 하기 때문에 사도가 자기의 글 속에서 너희 믿음의 진보를 보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였던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이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뒤로 물러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인 것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라면 사실 믿음일 필요가 없고 또 믿어야 할 필요가 없겠죠. 그렇죠?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제가 지금 여기서 설교를 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될 필요가 있어요? 믿어야 될 필요가 없죠. 믿어야 될 필요는 언제 생겨나느냐면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감추어져 있을 때 그때에 우리들이 믿어야 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거죠. 만약에 이렇게 물을 부으면 물이 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지 않죠.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니까 이렇게 하면 물이 떨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면 물이 이렇게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죠. 이런 것들은 믿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냥 이런 논리로 추론을 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이성이 하는 겁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추론하지 않고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러한 논리의 작용이 아니라 한 순간에 사진이 찍히듯이 혹 하고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새겨지는 것이죠. 그것을 뭐라고 하면 성경에서 총명이라고 해요. 좀 더 쉬운 말로 말하면 오성이라고 해요. 이성은 이렇게 원인, 결과, 원인, 결과 따지는 논리이고, 오성은 사물에 대한 인상이 퍽하고 들어오는 거죠. 근데 믿음이 바로 이 오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비록 논리적으로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그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그 자식을 낳아서 그래서 대를 이을 수 있겠어요? 그죠? 그게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신실한 성품을 의지해서 그 약속을 아멘하고 믿을 때 그렇게 믿을 때 네가 그것을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느냐 라고 누군가가 물어보면 그러면 그는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겠어요? 대답할 수 없죠. 그래서 그것은 논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게 바로 이 총명, 오성으로 일어나는 일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총명에는, 이 오성에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께 대한 논리를 초월하는 믿음만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 오성에 바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눈만 뜨면 마주치는 이 모든 사물에 대한 인상, 이런 것들이 바로 오성에 찍히는 거예요.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그렇게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육신의 눈으로 환경을 보면 그 일이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환경은 소리를 치는 거예요. 그래서 눈을 떠서 이 몸의 눈, 몸의 눈으로 마주하는 이 현실들은 그런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 라고 하는 현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전달해 주는 거죠. 자기 나이가 이렇게 많고 그리고 자기 부인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벌써 없는데, 근데 어떻게 자기도 능력이 없고 아내도 능력이 없는데 거기에서 아이가 태어나서 그게 더군다나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 라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육신의 몸의 눈으로 보는 이 현실에서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속에서 결국은 보여주는 것예요. 근데 그거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는 이런 것은 논리를 넘어서는 거지만, 육신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 현실은 아주 논리적인 것들이 들어오는 것이죠. 왜 그것이 안 될지는 잘 보여주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결국은 거기에서 믿음이 약해지게 되는 것이에요.
믿음이 이렇게 약해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온전치 못한 삶이 전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16장에 보면 사라가 이런 권고를 하죠. 내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 해서 아이를 낳아달라 그러죠. 그러니까 사라의 이 말을 듣고 그리고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죠. 이것이 영혼의 침체 속으로 들어간 결정적인 동기였어요.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었죠. 그렇게 하면서 그의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거죠.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들이 운동장에 큰 원을 그리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친구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한 7~8명 손을 맞잡고 한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 서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친구들이 일자로 똑바로 팔을 펴서, 그리고 막대기를 가지고 운동장을 그리면서 원을 돌죠. 그러면 정확하게 원이 나오죠. 그런데 만약에 중심에 서 있는 친구가 중심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도저히 원이 만들어지지 않겠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이 내가 네 몸에서 씨를 낳게 해 주겠고, 그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하는 약속을 주신 것은 중심축이었어요. 그런데 이 중심축이 흔들리게 되니까 나머지 모든 아브라함의 삶은 한꺼번에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충만하였을 때 가지고 있었던 온전함을 상실해 버리게 된거죠. 그래서 결국은 삶 자체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하신 말씀이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온전하거라. 이게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하나님의 마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모든 것들은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하나님인데 너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원하는 온전한 삶에서 이탈했다, 여기서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실수가 없거나 아주 완벽함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타밈 (tawmeem, 히)’인데 상대적인 온전함을 가리키는 거예요. 상대적인 온전함을, 그런 온전함에서 이탈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럼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죠. 그게 뭐냐하면 끊임없는 믿음의 쇄신이 필요한 거예요.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어떤 놀라운 사시를 보여주셔서 그 순간에 아멘하고 아주 굳센 믿음으로 그가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은 얼마든지 약하게 될 수 있는 믿음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그런 이치에 의해서 믿음이 약화 될 수 있는 것이에요. 오히려 이 믿음은 정상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간직되기 어려운 그런 선물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죠. 음식물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냉장고에 넣어야 되겠죠. 혹은 끓여놓든지 아니면 기름 속에 집어 넣든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는데 그러나 만약에 음식물을 상하게 하려면 굳이 상하는 기계에 집어넣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상온에 바깥에 내 놓으면 그냥 스스로 음식물이 부패해서 결국은 상하는 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그렇게 부패하기 쉬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육신의 눈을 통해서 접하는 이 세상의 끊임없는 인상들은 논리적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런 인상들이 다가오면서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이 없는 한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을 신뢰하기 보다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훨씬 더 신뢰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면 믿음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쇄신되어야 하는 작용이 필요하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누가 주느냐 이거죠. 이 믿음은 도구적인 원인이 있고, 유효한 원인이 있어요. 도구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끊임없이 영향을 받을 때 이 믿음이 생겨나고, 유지되고, 지탱되지만 말씀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에는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부패한 이성으로 행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뜨겁게 주셨던 믿음은 점점 식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저는 요새 그런 것들을 참 경험해요. 뭐냐면 이제 공부를 하잖아요. 그러면 앞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몇백 년 전 사람들이고, 혹은 몇십년 전의 사람들, 이렇게 글을 쓰고 하잖아요. 참 놀라워요. 어떤 때 보면 야 어떻게 똑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도 이걸 다 아는건데,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데 이렇게 놀랍게 해 놓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요. 최근에도 한 500년 전의 책을 읽으면서 똑같은 인상을 받았는데 어쩜 이렇게 하나님에 관해서 이렇게 아름답게 서술할 수 있을까, 우리도 늘 만나는 하나님인데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이렇게 서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감격을 하거든요. 그런데서 오는 것도 참 놀랍고 그리고 잘 읽고 나면 마음이 새로워지고 아주 기쁨이 있죠.
그러나 학문을 통해서 어떤 진리에 대한 인상을 받는 것보다도 더 뛰어난 것은 뭐냐면 성경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받는 것이에요. 그래서 학문을 공부할 때는 많은 책들을 놓고 공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성경 한권을 놓고 대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놓고 이렇게 성경을 이렇게 묵상하게 되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천천히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런 여러 가지 공부나 학문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바로 읽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것이 나에게 주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은혜를 묵상하고, 그리고 받게 될 때 그때 그 순간에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그 진리의 빛, 그리고 이러한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분의 성품,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신뢰성, 이런 것들에 깊이 자극을 받을 때 그때에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이 인상은 인상이 주는 그 기쁨과 감격은 학문을 한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받는 것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죠.
비유를 하자면 이런거죠. 뭐냐면 샘에 물이 있는데 그 샘에 뒷집 아저씨가 생수를 떠온 거를 옆집 사람이 좀 빌려다가 플라스틱 그릇에 받았더니 그거를 또 앞집 사람이 빌려다가 바가지에다 담고, 그거를 엄마가 가서 바케스에다가 다시 빌려와서 그거를 다시 컵에다가 담아서 먹는 것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것은 직접 그 샘에 가서 이른 아침에 안개가 살포시 내리고, 아무도 없는 그런 숲속에 들어가서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놀라서 도망가는 토끼들도 있고 그 짐승들이 있는 거기에서 그러면서 이 물을 걷어내고 무릎을 꿇고 그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그런 것에 비유를 할 수 있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끊임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끊임없는 환경,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 사래가 오늘 새벽기도 나온 여성도들처럼 믿음이 충만했더라면 남편이 약해졌을 텐데 오히려 옆에서 도와 줬을 텐데 이 사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잡아땡겨서 끌어서 내리는 그런 역할을 하던 그런 믿음이 없는 여성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더더욱 그런 환경에 의해서 이 믿음이 실추되고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은 아브라함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약속을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 이 믿음의 쇄신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미끄러지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문자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면서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에게 진실한 믿음을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니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끊임없이 간구하는 가운데 믿음이 쇄신될 것입니다. 그런 쇄신된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 보다는 우리의 영혼의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훨씬 더 견고히 하면서 우리들이 미끄러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마지막으로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많은 근심과 그리고 낙심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미끄러져서 본래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그럼 여러분들의 한번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 과정을 추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끊임없이 그 약속에 대한 인상이 새겨지기를 육신의 안목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 세상의 것들에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까?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말씀의 감미로움 속에서 여러분들의 믿음이 쇄신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약한 믿음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처음 회심하고 주님을 붙들었을 때 가졌던 그 온전한 삶에서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어두움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오늘 새벽에 기도해야 할 최고의 기도의 제목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상실하면 우리의 삶은 미끄러지게 되어 있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외도하는 삶, 신앙에서 외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에 호소하게 되고 그릇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함께 기도할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데 우리에게 주셨던 이 믿음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우리가 쇄신된 믿음 속에서 주님께 나아가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 함께 열심히 기도하다가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의 쇄신을 주시옵소서. 은혜의 쇄신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환경을 더 의지하며 우리의 믿음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사오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달라고, 믿음을 쇄신 시켜 달라고,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나 믿음에서 멀어졌던 저희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달라고 우리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2.무거운 짐
“10.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 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 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 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민 11: 10~17)
I. 본문해설
어제는 영적인 침체의 원인으로 약한 믿음을 우리들이 꼽았습니다. 오늘 이 민수기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서 영혼의 침체의 요인을 하나 더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만나를 내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만나는 무슨 식물의 씨앗과 같은 구슬같은 것이 새벽마다 지면에 가득 내리는 것이었고 그것을 거두어서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찢기도 하고, 혹은 가마에 삶기도 해서 그래서 떡이나 과자같은 것을 만들어서 먹었는데 그 맛이 기름을 섞은 과자의 맛과 같았다 그랬습니다.
이렇게 감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식량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데 11장에서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악한 말로 원망을 하면서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셔서 진 저 끝에서부터 화재가 나서 그래서 타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라서 모세보고 살려달라고 했더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불이 멎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시 또 펑펑 울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도 먹고, 생선도 먹고, 참외도 먹고, 수박도 먹고, 후추, 파, 마늘, 이런 걸 먹었는데 여기에서는 정력이 쇠약해지도록 맛나만 먹는구나 그러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모세가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사정을 토로한 장면이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이예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모세가 아주 분명한 영혼의 침체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세의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첫째는 도구적인 원인과 그리고 둘째는 유효적인 원인입니다. 도구적인 원인으로서는 이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250만명에서 300만명정도 까지 됐을것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런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지도자로서 이 광야의 길을 가야하는데 그러한 짐이 이 모세의 영혼의 깊은 침체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모세처럼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죠.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에 보면 모세 못지 않게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많은 사람들도 아주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고난의 길을 가면서도 주님과 함께 동행했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또 하나의 요인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의 결핍이예요. 이것이 영혼의 침체의 유효한 원인이 되는 것이죠.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 생각하다가 오늘 새벽에 아주 좋은 예화가 비유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맨발로 왜 TV 같은 데서 보면 못을 쭉 박아놓은 판을 그 위를 걸어가는 것을 본적 있죠. 그게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지는데 우리들도 그걸 할 수 있다고 하네요. 못을 듬성듬성 박아놓고 걸어가라고 그러면 그거는 중상을 입을 일이지만 못을 촘촘하게 아주 많이 박아놓으며 그게 뾰족해 보여도 발바닥 하나에 못이 100여개 이상이 된다고 하면 체중 자체가 두발을 올려놓으면 분산이 되기 때문에 이 못이 아무리 뾰족해 보여도 실린 체중 자체가 문제가 안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초심자들도 맨발을 벗고 그 뽀족한 못으로 만든 위를 걸어가는 것을 봤어요. 근데 그렇게 혼자 홀로 걸어가면 좋지만 쌀 한 두가마 쯤 지고 걸어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병원에 당장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질 거고 아마 그 못판은 피바다가 될 겁니다. 그렇죠? 그런거죠.
쉽게 이야기 하면 짐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침체속에 빠뜨리거나 회복으로 돌아가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은혜가 결핍된 상태에서는 이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마치 쌀가마를 지고 못박힌 그 판 위를 걸어가는 것 같은 것이예요. 그래서 짐을 덜어내면 그것으로서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죠. 그러면 이 세상에 제일 미련한 사람들이 충성스럽게 끝까지 그 짐을 지고 자기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일거예요. 그 짐을 확 집어 던져 버리면 영혼의 침체에서 휙 벗어난다고 할거 같으면 누구든지 그 일을 한번 해보겠다고 맘 먹지 않겠어요? 오늘 모세도 얼마나 사는게 괴로우면 결국 마지막에 하는 말이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이 인간들을 내가 낳았습니까? 내가 이 인간들의 애비입니까? 내가 이 사람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 사람들을 마치 애미 없이 아이를 낳은 아비 마냥 그 젖먹는 아이를 마음에 품듯 이 백성들을 품고 그 먼길 열조들에게 맹세한 그 땅까지 나를 들어가게 하십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원망하면서 마지막 고백이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하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함과 약함은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주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용사처럼 보이고 큰 일을 감당하는 종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은혜에서 결핍되기만 하면 그 모든 무거운 짐이 이 영혼의 깊은 무게가 되어서 이 영혼의 이런 곤고함을 가져오는 것이예요.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능력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예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구원을 받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그가 살수 있는 시간과 모든 것들이 제한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쨌든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 우리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거죠. 교회 역사를 보면 진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신선 놀음하듯이 그렇게 사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모두 분투하면서 살았어요. 모두 분투하는 삶을 살았어요. 휴식이라는 것을 미워했어요.
최근에 존 칼빈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아주 깊은 찔림을 받았어요. 그 탁월한 신앙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칼빈 선생이 열심히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며 힘에 지나도록 수고를 했습니다. 그때 주위에 있는 동료들이 말렸습니다. 칼빈 선생님 너무 무리하십니다. 그때 칼빈이 역정을 내면서 하는 말이 그대는 지금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우리는 지금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일세, 그분이 만약에 지금 와서 우리가 놀고 쉬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분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지금은 우리가 힘써 일해야 할 때이네 라고 타이르면서 그렇게 분투하던 사람은 결국 50대 중반도 되지 못해서 돌아가셨어요. 과로사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각기 섬기며 살 수 있도록 건강과 그리고 재능과 그리고 이 세상의 육체의 자원들을 주시고 또 영적인 자원들도 주셨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며 힘에 지나도록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련해 보이고 병신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날에는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하였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거운 짐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만큼 더 많은 은혜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지난 올림픽 때 펠프스가 맞나요? 그 미국 수영 선수가 인류 최초로 올림픽에서 8관왕인가 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수영을 잘하대요. 그죠?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수영을 잘하더라구요. 근데 뭐 말 들으니까 팔도 다리도 보통 사람보다 특별하다고 해요. 수영방법도 특별하고. 근데 그 선수가 수영하려고 탁 서 있는데 같은 남자지만 참 부러울 정도로 잘 생겼더라구요. 그리고 몸매가 어쩜 그렇게 날씬한지 진짜 고기, 그 사람보고 펠프스라고 하는 사람에게 미국 언론에서는 펠피쉬라고 한대요. 물고기라고 하도 수영을 잘해서, 고기도 여러종류가 있잖아요. 복어도 있잖아요. 복어. 근데 이 사람은 복어하고는 거리가 멀어 꽁치같이 날씬해가지고 어쩜 그렇게 수영을 잘하는지 참 대단하더라구요. 그래서 요새 운동을 좀 소홀히 하고 그러니까 배가 나오니까 우리 딸도 우리 집사람도 만나기만 하면 배를 찌르면서 이렇게 어떻게 할거냐고 하는데 참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예요. 근데 맨날 하는 얘기가 너무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그러는데 아, 이 사람 먹는거 보니까 감당이 안되요. 한끼에 그 사람은 하루에 먹는게 무슨 12000kcal를 먹는대요. 12000kcal 면 상상을 못하는 거죠. 우리가 보통 먹는거는 2400kcal가 기준인데 삼겹살 먹고 열심히 하면 4000kcal가 되는데 이 사람이 식사를 하는데 무슨 12000kcal를 먹어치우는데, 아침 식사를 적어놓았는데 그 오므라이스처럼 생긴거를 5그릇을 먹는대요. 거기에다가 에너지 드링크 1200kcal짜리 하나 마시고 지금 제가 기억이 잘 안나는데 하루에 12000인지 한끼에 12000인지 생각이 안나요. 하여튼 신문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먹는량을 쭉 적어 놓았는데 어마어마한 계산해 보니까 요만한 바구니로 하나 가득 먹는데 근데 어디 배가 나와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하게 먹는데 근데 어마어마하게 운동량이 많으니까 그것들을 소화해 내는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이 내가 먹는 거 만큼 그렇게 먹고 아침에 요쿠르트 하나 먹고 때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물 속에서 잠수해서 영원히 못 나올거예요. 그래서 우리 물 속에서 보는 고기들이 죽어서 배 내놓고 쓰러져 있는 것처럼 아마 그 사람도 수영장 바닥에서 발견될 거예요. 어마어마하게 운동량이 많으니까 어마어마하게 먹어대는 거죠.
모든 문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게 문제가 아니라 은혜가 결핍된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신 무거운 짐을 일단 벗어놓으면 그러면 고통은 좀 사라지고 이 시련은 좀 벗어나겠지만 그러나 무거운 짐을 벗었다고 해서 곧바로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게 뭐냐면 너 혼자 그 짐을 지지 말고 너 중에 장로나 그리고 유사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내게로 나아와라 그러면 내가 너를 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발견하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섬기면서 나아갈 때 우리의 자연적인 재능도 교회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어 지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성령 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일을 이루어 가시는 거죠.
자 생각해 보십시요. 교회의 일을 행하는데 건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를 짓고,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실내 장식을 하고, 전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전기를 고치고 이렇게 함께 일한다면 그야말로 환상의 팀이 아니예요. 그건 자연적인 팀이예요.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자연적인 재능으로 이루어지지만 각기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한 가지 목표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같은 성령의 부음을 받을 때 그때 그들이 한 목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 성령은 우리의 은혜의 근거이고,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니 땅을 파는 사람도, 집을 세우는 사람도, 실내를 장식하는 사람도, 전기를 끌어오는 사람도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행하게 하심으로 그들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서 이제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을 그들도 만나게 하시고, 또 모세가 사랑하던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사랑하시며 짐을 덜어 주님을 섬기며 이 길을 걸어가게 하셨던 것이예요.
이런 침체와 해결 사이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였던 것, 하나님이 모세에게 해주신 것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는 말하기를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백성을 내게 맡기사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사실 어떻게 보면 불평과 불만 같지만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자기 중심에서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하는 자기 약함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해 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큰 고통을 주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주님을 실로 잘 섬기고 있고 이 모든 섬김과 헌신이 자기의 능력에서 비롯된것이라고 믿을 그런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많이 감당하는 사람들을 수시로 깨뜨리시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약함을 하나님 섬기는 삶 속에서 발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중심을 토로하고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일을 감당하면 감당할수록 겸비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가 약한 인간인 줄을 깨닫는 사람이 있고, 섬기면서 분수에 모르게 교만해지고 자기의에 빠지는 인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영적인 어떤 원리들이 작용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서로 다른 결과가 오게 되는 것이예요.
오늘 모세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11장에서는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세가 12장에서는 미리암과 아론을 비롯해 백성들이 자기의 지도자로서의 직분에 도전하고 망발을 하는데도 온유함이 모든 지면에 있는 사람보다 뛰어나게 그렇게 위기를 넘기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이 11장에서나 12장에서나 모두 큰 것이었지만 12장에서 주님의 은혜에 굳게 붙들리게 되니까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함과 강함 그 사이에 있는 아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결국 약해지는 것은 주님이 붙드신 손을 놓을 때 약해지고 주님이 그들을 붙들고 계실 때 강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을 기도하면서 섬기게 하십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작은 일을 맡겨도 많이 기도하면서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굉장히 중요하고 큰 일을 맡겼는데도 거의 기도하지 않고 언감생심, 자기의 상식과 그리고 유치한 재능으로 그 일들을 처리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고 그에게 일을 맡겼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영적인 원리하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예요.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돌아갈 때에는 편하고 좋지만, 배짱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투덜거리고 이 백성들처럼 불평하고 그리고 원망하고 그리고 지체들과의 관계를 상하게 해서, 결국 그를 움직이고 있는 동기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진실한 믿음이요, 영혼의 원리가 아니라 육적인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해 나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교회에서 주일 예배 드리고 도망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가 고통을 받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자체가 이미 문제이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여지도 없어요. 교회가 고통받는 것은 그래도 그 교회를 사랑한답시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중심에 와서 그렇게 일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살지 않을 때 그들이 지고 있는 그 짐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악함과 은혜를 떠난 영혼의 곤고한 상태를 드러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겨줘도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상채기를 내고 고통을 주는 것이예요. 그 중심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죠.
큰 일을 맡아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깨트려 지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아요. 반드시 언젠가는 대형사고를 치고 내요. 애들 자전거, 세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브레이크가 안 잡혔다 그래봐야 그저 앞에 있는 친구 자전거하고 부딪힐 뿐이예요. 만약에 한 40톤 짜리 트럭 위에다가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무거운 돌멩이를 싣고 150km를 질주하다가 브레이크가 안 잡혔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사람 죽어야지만 차가 멈춥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직분만 맡고 하나님의 일만 많이 맡으려고만 하지 말고 맡고는 중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며 모세처럼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은혜의 역사를 함께 경험해야지만 여러분들이 그 중심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예요.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에 직면한 모세가 자기의 연약함을 토로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이 기도가 믿음이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그가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워낙 하나님을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의 불평하는 기도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할 때는 불을 내려 온 진을 태우시더니 모세가 이 완악한 백성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며 죽여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이 사명을 누가 맡겼는데 투덜거리냐고 야단을 치시는 대신에 조용히 오셔서 네가 진 짐이 그렇게 무거우면 내가 너를 외롭게 혼자 그 짐을 지도록 만들어 주지 않겠다, 내가 너와 함께 짐을 질 사람들을 세워주마 라고 친절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모세는 광야에 들어와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기 전에 그는 애굽의 왕궁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좋고 영화로운 그 생활을 접고 광야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을 때 그의 생애 전체는 헤아릴 수 없는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40년의 세월동안 그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으로 당신의 교회를 감당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르켜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했던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모세가 그렇게 충성스럽게 광야의 교회를 섬긴 것은 그보다 더 완전한 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이스라엘 교회를 섬기실 그 헌신의 모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 당신의 교회를 짊어지고 광야에서 그 고통스러운 괴로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 자기와 함께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애굽을 출발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성을 다하는 목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혹은 칼에 찔려, 혹은 불에 타서, 혹은 진이 갈라져 지진이 일어남으로 전쟁속에, 질병속에 죽어가는 심판을 받고 죽어가는 무수한 백성들을 두 눈으로 보며 늙어가야 했습니다. 아마 모세의 마음속에 광야의 이스라엘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위로와 참다운 안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어 영원한 생명으로 그를 데려가시고 그의 인생은 마쳤습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 감당할 수 없는 초인적인 그 힘으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 완악하기 짝이 없고 끊임없이 헌신하며 자신을 내어 주고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 이적의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음부과 같은, 간부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고질적인 타락한 성향과 더불어 싸우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는데 그 초인적인 이 사명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그 위대한 힘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그게 바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의 생애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라는 이 장면은 수없이 되풀이 되는 장면이고, 이것이 바로 모세로 하여금 영혼의 침체 속에서도 주님을 위해서 이 무거운 목회의 짐을 감당해나가게 하는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맡은 짐이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울 때는 좀 쉬기도 해야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짐들을 덜어낼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짐을 덜어낸다고 해서 우리들이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이르시되 하신 것처럼 그렇게 그 자체가 기도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교통일진대 이 교통속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얻으며 주님이 이 사명들을 감당해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실한 소원을 품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목마름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죠. 이 세상에는 어차피 참다운 성도의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참다운 성도의 진정한 안식은 영원한 죽음 이후에나 볼 수 있는 안식입니다. 바로 그 세계에 참된 안식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 안식을 그리워하고 그리고 탄식함으로 바라보는 동안 주님을 만날 소망을 가지고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죠.
나는 그래도 구원 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섬기는 것없이 무위도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참 슬픕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날에 주님을 어떻게 뵈올려고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살아온 날들 중 대부분의 날들은 주님을 섬긴 날이 없고, 그저 자신 하나를 간수하면서 살기에 급급했고, 그나마도 주님이 섬기면서 살도록 사명을 맡겨주신 경우에는 또 그 사명을 하찮게 여기면서 그렇게 아무렇게나 감당했고, 그나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그 동기가 주님을 위한 동기가 아니라 지 이름 내고 자기가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그저 제 멋에 겨워서 그 일을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매달리는 은혜의 생활없이 혈기와 육신으로 그 일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라고 박수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그런 사람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모세의 생애를 보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데도 이 무거운 짐 앞에서 하나님 앞에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힘겨워 할 수 있었다면 그만 못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더 많이 우리의 짐이 힘겼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중심을 토로하며 자기의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당신과의 교통을 허락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피할 길을 제시해주시는 것을 발견하면서 우리가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짐이 무거우니 은혜가 결핍되지 않도록 다른사람보다 배나 더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십시요. 기도속에서 중심을 토로하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십시요. 그리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교통해 주시는 것이 그 모든 문제의 해결임을 굳게 믿고 주님을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적 침체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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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영적 침체의 원인 4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08/10/23)
3.집중된 수고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 던지고 그 곳을 라맛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의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삿 15:14~19)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삼손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아주 해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사들 중에 20년 동안을 통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사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아직 왕을 세우지 않았을 때에 그 땅을 왕을 대신해서 정치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다스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쇼페터라고 하는 것은 재판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그 사사들이 다스렸는데, 삼손의 시대에는 그 아래쪽에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 나라가 굉장히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히 하는 일이 별로 없고 늘 옆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해서 먹고 사는 호전적인 민족이었고 일찍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그 말이 블레셋이라는 말에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이 상당히 강해졌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수시로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스라엘에 삼손이라는 힘이 장사인 지도자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단 말이죠, 그게 여간 자신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삼손을 체포하기 위해서 가진 계략을 다 쓰다가 거기에서 데릴라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통해 미인계를 써서 삼손을 사랑에 빠지게 하여 이 사람을 체포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삼손이 밧줄에 묶인 채 나오게 되는데 그 때 까지만 해도 삼손은 자기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그 비밀을 데릴라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어쨌든 체포가 되어서 결박 당한 채 끌려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블레셋 사람이 삼손을 인계 받기 위해 나올 때 삼손이 다시 괴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과 전투하는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이 사람이 원래도 이 사람이 힘이 있었지만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를 철저하게 묶어버렸는데 힘을 쓰니까 마치 그 팔에 묶은 줄들이 불 타는 삼같이, 뭐 삼줄이 불타봐야 재 아니겠어요? 후두둑 끊어지면서 자기를 붙잡으러 온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에요. 여기서 집중된 수고가 이루어지게 되요. 이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나왔지만 삼손에게는 포로가 되어 끌려 나왔으니 무기가 있을 리가 없죠. 마침 보니까 죽어서 얼마 안된 나귀의 턱뼈가 있었어요. 그것을 손에 붙들고, 뼈가 보면 짐승이 죽으면 살부터 썩잖아요. 그래도 뼈는 샛뼈일 수 있겠죠. 세월이 더 지나면 그 뼈도 삭겠지만 어쨌든 그 뼈를 가지고 그들과 싸우게 됩니다. 병사들과 싸우는데 무기를 든 사람들과 틀림없이 싸웠을 텐데 하여튼 이 사람은 무예에도 뛰어난 사람이었겠죠, 어쨌든 거기서 일천 명의 사람을 나귀 뼈로 때려 죽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춤추듯 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였겠죠, 춤추듯 하며 자기에게 달려드는 그 일천 명의 군사를 모두 때려죽이는 대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어차피 죽인 그것이 기적으로 한번에 쓰러진 것이 아니었고 나귀의 턱뼈를 휘둘러서 물리적인 타격을 가해서 사람들을 쓰러뜨려 죽인 것이라면 어마어마한 수고를 들이지 않았겠어요? 한 방에 정수리를 맞아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천 번을 휘둘러서 타격을 했어야 했는데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죽지 않잖아요. 그런 일들을 이 사람이 얼마 동안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하루 종일 싸웠지 않겠어요? 쓰러졌다가 다시 덤벼들고 다시 덤벼들다가 쓰러지는 그래도 명색이 군인인데, 이 사람들은 굉장히 포악스럽고 용맹한 사람들로 전해져요. 그리고 기마병들이 있어서 그들이 빠른 운송수단을 타고 이웃 나라를 약탈하는 거죠. 농사를 지을 때에는 가만히 내어 버려두고 추수 때에 가서 약탈해 가지고 와서 그것을 먹고 사는 민족이었어요. 그러니까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이 사람들을 후려치면서 하루 종일 이 일을 위해 했을 때 그 엄청난 에너지가 이 일에 들어갔겠죠. 육체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잠깐만 한눈을 팔아서 칼 끝에 목이 스치기만 해도 사실 죽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집중된 정신과 자기의 온 힘을 쏟아 붓는 그 엄청난 수고와 노동 속에서 이 일들을 이루어 가게 된 것이죠. 그렇게 엄청난 일들을 이루어 가면서 결국은 이 사람들을 쓰러트린 거죠. 시체가 가득한 거기에서 그가 노래하기를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 시체를 쌓았다,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그래서 더 이상 위협이 없을 바로 그 때에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 던지고 하나님께 심히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너무 목이 마르니까 이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남아서 만약에 자기에게 달려든다면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완전한 탈진의 상태에까지 들어가게 된 거에요.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17절 이후에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약함과 강함을 아주 짧은 성경 구절 안에서 함께 보게 되는 거죠. 나귀의 턱뼈를 흔들며 춤추듯 수 많은 사람들을 피투성이로 만들며 죽이던 그 블레셋의 장한 용사들을 마치 어린 강아지들 때려 눕히듯이 그렇게 때려 눕혀서 언덕 위에 온통 블레셋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 채우던 그 사람이 이제는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내가 이제 목 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겠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일천 명의 군사를 때려 죽였지만 누가 안 죽고 살아남은 인간이 한 둘 있어서 나에게 달려들어오면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항거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면, 그러한 헌신과 수고를 보면서 그 사람은 항상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많이 헌신하고 특별히 어떤 일에 이어서 집중된 수고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애를 쓰며 헌신할 때에 그 때에 남들이 보기에는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그 강함 뒤에는 항상 이러한 약함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강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자랑할 것이 부득불 있다면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그렇게 약한 곳에서 주님의 은혜가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삼손처럼 괴력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을 때려죽이고 하는 이 엄청난 수고를 하고 대 역사를 이룰 때에도, 물론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이 크고 놀라운 역사 뒤에는 물 한 모금이 없어서 이제 주저앉아 하나님 앞에 자기는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연약함을 함께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결국은 자신이 아무리 훌륭하게 헌신한다 할 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라맛레히에서 큰 전투를 벌이기 전에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신의 권능이 이 삼손에게 임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한 이것은 선지자로 부르는 소명에 나오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특별한 은총을 입혀 주셔서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실 때에 임하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지자나 사사들에게는 최고의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의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신의 충만한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이 엄청난 일들을 이루었던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큰 여호와의 신의 권능의 임함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루었다면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죽게끔 내버려두실 리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신의 놀라운 권능이 임하면 이러한 한 모금의 물쯤 못 마신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안되게끔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일까, 우린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신의 권능이 임하여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는 아주 특이한 강함과,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주저앉는 아주 지극히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동시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아주 놀라운 일을 하게하실 때에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힘이고 내가 원래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러한 은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행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이 삼손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잠시 전에 임한 사람, 그래서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의 역사를 이루었지만, 그러나 잠시 후에는 한 모금의 물이 없어 주저앉아 하나님 앞에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한탄할 정도로 탈진하게 되는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이 본래의 자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사상적으로 교만하지만,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섬기고 일하면서 사실은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이죠. 왜냐하면 수시로 하나님께서 자기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집중된 수고 속에서 어떤 때에는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일을 하게하고 하는 속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과대한 평가를 갖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렬하게 헌신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자신을 바치면서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이바지 하면서도 탈진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 잠시 이야기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특이한 열심으로 사는 사람의 이면에는 그러한 지극한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잠시 전에는 여호와의 신의 권능을 주셔서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루게 하신 후에, 잠시 후에는 한 모금의 물이 없어 주저앉아서 이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낙심하고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없어서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러한 양면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인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결국은 삼손을 회복시키시는 장면이 이제 뒤에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데 어떤 방법으로 회복시키시냐 하면,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라맛레히라고 하는데 여기서 라맛이라고 하는 말은 언덕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높은 곳을 라맛이라고 그래요. 레히는 턱 혹은 뺨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턱뼈로 사람을 때려죽이니까 그 높은 곳을 턱뼈의 언덕이다 뭐 그런 정도로 부른 거에요. 사실은 은밀하게 말하면 그 높은 곳에서 물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 라맛레히의 높은 곳을 터치시니까 그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물을 먹고 이 사람이 정신이 회복되었다, 소생되었다 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 샘을 엔학고레이라고 하는데 엔이라고 하는 말은 샘이고 학고레는 그 부르짖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 부르짖는 자의 샘’ 이런 뜻이 되었거든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부르짖으면서 이 엔학고레의 샘에서 물을 먹고 회복을 하게 되는데, 이 이름 자체가 아주 재미있는 것이죠. 그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 결국은 여기에서 삼손이 깊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비록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하여 일생 동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위대한 일을 여기에서 이루었다 할 지 라도 자신이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앉아 죽게 되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육체의 피곤함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까지 깊이 침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그 뒤에 보면 정신이 회복되고 소생하였다 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 상태에서 주저앉아서 낙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샘을 터뜨려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는 것이죠. 그것을 먹고 육체와 영혼에 큰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죠. 육체에서는 그 물을 먹음으로 회복이 되었다고 하지만 정신과 영으로서는 어떤 회복을 가져왔겠어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임하여 자기가 온전히 헌신해서 그 큰 일들을 이룰 때에 혼자서 그 큰 일을 싸워서 이겼지만 그러나 자기가 목말라 쓰러져 죽게 되었을 때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적적으로 샘을 터져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돌보신다고 하는 그런 은혜의 감격이 있었던 것이에요. 이러한 은혜의 감격이 결국은 이 삼손으로 하여금 탈진한 상태에서 회복되도록 만들어 준 것이죠. 결국 이러한 모든 일들이 기도를 통해서 일어난 것이죠. 그래서 이 삼손이 하나님 앞에 이러한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는데, 고레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천천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 크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해요. 원래의 의미는 외치다라는 뜻이에요. 부르다, 외치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처절하게 이 사람이 온 영혼과 정신을 다해 하나님 앞에 절명의 마음으로 부르짖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건져주신 것이죠. 하나님을 당신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가까이 계십니다. 올바른 영적인 원리에 의해서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섬기고 그 분을 위해서 혼신을 다하여 애쓰고 수고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많이 일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훨씬 멀어지게 되는 것은 잘못된 원리에 의해서 그 일을 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자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예전에 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이런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훨씬 멀어져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과 상관이 없이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 더 가까이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들, 하나님 그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놀고, 하나님의 일에 태만하고, 방종하고, 자기의 고집대로 행하고, 무엇에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사명을 발로 차버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시는 율법과 의지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거스르고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혀 있습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아도 그의 마음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일은 하지만 영혼은 깊은 침체 속에 잠겨있는 그런 상황인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보고 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작은 직장을 경영하고 있는데, 직원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녀석은 와서 늘 출근부에 도장 찍고 그리고 농땡이만 쳐요. 이것 좀 들어라 그러면 들랍신다 라고 또 아랫것들을 불러요. 보는 사람이 없으면 내팽개치고 내버려둬요. 아무 것도 안 해요. 그리고 돈 타가는 날은 기가 막히게 와서 돈을 타가요. 그렇게 농땡이를 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여러분의 사업을 위해 수고해요. 직원들이 다 가도 팽개치고 간 기구들을 정돈하고 청소하고 아침이면 제일 일찍 와서 하고 경영이 안 좋을 때는 근심하며 어떻게 해야 이 회사가 잘 될까 고민하면서 그렇게 애쓰고 뭐 조금 잘 되면 그것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고 자기 이익에 어느 정도 초연해서 이 사업을 위해 올바르게 애쓰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둘이 일하다가 다쳤어요. 전자의 사람이 일하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일도 안 하는 게 꼭 사고를 친단 말이야, 어디가 다쳤대? 머저리 같은 자식, 그러고 가겠죠. 그러나 후자의 사람이 다쳤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랬을까? 훨씬 가까이 다가가지 않겠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와 미리암과 아론이 커다란 분쟁에 휩싸였을 때 모세의 편을 들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에게는 꿈과 이상으로 나타났지만 내 종 모세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니 마치 친구가 친구에게 말함과 같이 대면하여 내가 말하였다. 왜냐하면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훨씬 가까이 가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렇게 충성되게 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 계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에게 충성되게 사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 계시는 거에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어느 시간에 집중된 수고를 하게 될 때에 그 때에 탈진도 오고 미끄러지게 되는데 그게 사실 일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하면 일을 좀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일 자체에는 우리를 탈진시키게 하는 힘이나 우리를 회복시키게 하는 힘이 없어요. 다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수고 할 때에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많이 집중된 수고를 한 후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기도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삼손이 집중된 시간에 자신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의 신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블레셋 군사를 때려죽이는 대 역사에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이 끝나자 그는 온 힘이 탈진하여 주저앉아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려 그렇게 많이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마음을 굳어지게 하였다면, 아마 이렇게 큰 역사를 하고도 그가 아주 현저하게 미끄러져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그 마음에 불이 붙어서 그 일을 했지만 원망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불평 속에서, 그리고 우리는 혼자 일 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일 하잖아요? 그 속에서 결국은 사람들로 인하여 분쟁하게 되고 마음이 갈라지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에 집중된 수고 끝에 오는 마음의 미끄러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이 삼손은 그렇게 큰 역사를 이루고 나서 거의 탈진해서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도 엔학고레라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아서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신의 능력에 사로잡혀 엄청나게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갈을 느끼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마음을 향하고 그 분께로부터 오는 절실한 도움을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셨어요.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레위의 한 곳을 터쳐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을 때에 삼손은 아마도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에 하나님이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통해서 반석을 쳐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게 함으로 자기의 민족을 먹였던 그 역사적인 사실들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언약을 따라서 자신의 백성들을 대우해 주셨던 것처럼, 내가 지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죽게 되었을 그 때에,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전에 조상들에게 행하셨던 위대한 일, 예전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였지만 오늘은 자신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 하나님을 새롭게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마음의 회복을 주신 것에 틀림이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위험한 사람들은 많이 일하면서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위험한 사람들 입니다. 언젠가는 부딪힐 곳에 가서 부딪히고, 자기가 섬기는 섬김의 그 모든 것이 영혼의 원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라고 하는 그 사실을 언젠가는 보여주고, 보여주는 그것은 결국은 교회에 큰 상처와 고통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가 사람 보기에는 많은 일들을 섬겼을지라도 결국에는 살아온 그의 길은 끊임없이 분쟁과 고통을 일으키고 그리고 많은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기도의 샘에, 은혜의 물 속에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나귀의 턱뼈는 흔들었지만 엔학고레의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수는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결국은 사람이 보기에는 커다란 수고를 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핍절한 사람이 되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이 위대한 일들의 원리를 하나님 앞에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강함은 하나님 앞에 순간일 뿐이에요.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그 손에서 놓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끝)
영적 침체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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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영적 침체의 원인 4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08/10/23)
4.믿음 없음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합 1:2~4)
이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던 그 가까웁던 시기에 예언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이제 아직 완전히 나라가 점령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벌써나라는 사람들이 이미 마음이 많이 변질되었고 심지어는 이제 기회를 틈타서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고 부귀를 누리려는 인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왕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권력과 암투, 그 속에서 적국을 의지하여 영달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기세를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깊은 영혼의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침체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의 논리와 현실의 모순인 것이에요. 신앙의 논리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징벌하고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고 기도를 응답해주시는데, 그러한 신앙의 논리가 현실 속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죠. 신앙에는 분명히 논리가 있고, 그리고 그 논리에는 우리들이 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 이해가 되는 신앙의 논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복에 복을 더하셔서 그들로 이 땅에서 형통케 하시고 또 그의 자녀들에게도 복을 주셔서 이 땅의유업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죠. 반면에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미워하시고 그리고 책망하심으로 그들을 하나님 앞에큰 고통에 빠지게 하는 것이신앙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논리가 우리 앞에 그대로 전개가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다 이렇게 인정을 하게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인정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이 모순이 있다 이거에요. 그 현실이 신앙의 논리를 정확하게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 하박국이 지금 고통스럽고 괴로워하고 있는것은 하나님과 원수 맺은 이방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을까, 이런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 민족들 안에서 적국과 내통하고 부귀영달을 꾀하고 악을 행하고 동족을 향하여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침략을 받았을 때에 재빠르게 일제의 앞잡이들이 되어서 나라를 팔아먹고 부귀와 영달을 누리던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때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라가 그런 것은 아주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나라의 기강이 서고, 모든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잠시 영달을 위해 나라를 버리면 그 후에는 멸망한다 라고 하는 가르침이 분명하게 새겨질 때 그 때에 우리들이 공평과 의를 따르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에요. 어쨌든 지금 현재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이런 앞잡이들이 생겨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느꼈으면 그래도 그저 신앙이 없으니까 했을 텐데, 명색이 선지자고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사람인데도 이게 극복이 안 되는 것이죠. 현실의 모순 때문에 극복이 안 되는 것이에요.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이 하나님 앞에 소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지자인데도 이러한 영혼의 침체에 빠질 때가 있다면, 그만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도대체 신앙의 논리와 현실의 모순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깊은 영혼의 침체에 잠시나마 빠지게 된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문제에요. 믿음이 없다는 것. 그것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항상 당신의 공정한 성품에 따라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시지만, 항상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방식으로 다루시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하던 이 때에, 비록 일부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악을 행하고 바벨론에 구속이 되어서 그들과 내통을 하여 땅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볼 것 같으면 잠시 일어나는 그 일이 지극히 모순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잠시 불공평하게 보였던 그것이 결국은 공평하게 일이 처결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역사를 움직이지 않으시고, 때로는 악인이 번성하는 대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의인을 에워싸고 공의를 굽게 하는 상황이 되었는 대도, 마치 하나님은 참견하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처럼 역사가 굴러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지혜로 통치하고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기각하지는 못하는 것이죠. 이러면서 이 하박국은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고 그리고 심지어 때로는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기 때문에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해서 교만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들을 삼키되 잠잠히 계십니까? 하며 하나님의 무능에 오히려 도전하며 하나님이 과연 의로우신 분이신지를 묻는 이러한 잘못까지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것 보면서 그는2장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지자에게 주시는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신앙의 논리를 현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 때에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원래 이 믿음은 보이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믿는 것이아니라, 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믿는 것이죠.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은 보지못하는 것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되어서 그 증거로서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신자의 삶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까? 믿게 되었다 하더라도 무슨 현실의 상황이 바뀌어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 것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졌길래 이 깊은 영혼의 침체로부터 일시에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현실의 신앙의 논리는 하나님이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사는 신앙의 사람들을 복 주시고, 하나님께 거스르고 대적하는 악한 인간들을 징벌하신다는 그것이 진리의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일을 공평하게 행하심으로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하나님이 주재자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시인이 현실 속에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시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의심하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일들이 진짜이루어질까? 하고 파수하는 곳에, 성루에 섰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루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파수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 거기에 서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망루에서 볼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악인을 징벌하기 위해서 이방의 군대들을 이끌어서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와서 그 악한 자들을 파멸하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역사가 진짜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지를 보기 위해서, 파수대에 서서 망루에 몰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리고 자기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시는 지 봐야겠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께서 3장에서 이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긴 노래를 부르도록 하셨는데, 이 노래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보여주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 도대체 거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내용이 무엇을 배경으로 하고 있냐는 것이에요.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져서 그래서 바벨론의 군대들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쑥밭으로 만들고 그리고 많은 사람을 죽이고 도륙할 때에 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이 겪게 될 비참한 멸망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에요. 이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한 무화과나무의 잎이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식물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고 등등으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그냥저절로 그러한 것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바벨론의 군대들이 쳐들어와서 초토화시켜버렸기 때문에 있었던 무화과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는, 아주 쉽게이야기하면 군대들이 싹 쓸고 가서 나라가 황폐해진 상태를 이야기한 것이죠. 놀랍게도 이 선지자는 그렇게 나라가 멸망하여 비참하게 짓밟힌 폐허가 된 상태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겠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예언활동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인데,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것이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처럼, 혹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기뻐하며 혹은 그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토로하는 것이죠. 이것을 예언적인 현재, 혹은 예언적인 과거라고 해요.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선지자에게 눈을 열어주시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현재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그러면서 선지자가 오히려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고 있었을 때는 영혼의 침체에 빠지고 낙심하던 사람이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짓밟히는 비참한 환란을 경고받으면서 오히려 그 현장을 미리 보면서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노래를 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노래하게 되었는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고 나름대로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을 그 때에는 비록 평화가 다소간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이 하박국 선지자는 깊이 낙담하고 영혼의 침체에 빠졌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니까 비록 나라는 망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자신의 집도 모두 멸망하여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무화과 열매도 없고 외양간에 소들도 다 약탈당한 상태가 되었다 할 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당신의 약속하신 바 대로 악을행하는 자들을 징벌하시고 그리고 의를 행하는 자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이 세상에 온전히 보여주시는 때가 왔기 때문에, 이 시인은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하여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죠, 번영할 때에 오히려 갈등하고 침체에 빠졌던 이 사람이,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멸망할 지경에 가서 오히려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그래서 약한 믿음, 혹은 믿음 없음은 우리의 영혼의 침체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오늘 우리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내 상식과 생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태로 가는 중간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을 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우리들이 육신의 질병이 있을 경우에 많은 돈을 내고의사를 찾아가서 우리의 병을 고칩니다. 고치는 그 과정을 보면 그 의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죠.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많은 돈을 냈는데도 오히려 그 치료하는 한 순간을 보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보다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주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때로는 고통스러운 치료의 과정을 밟게 하고, 심하면 우리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해체해서 거기에서 목숨을 넘나드는 위험한 수술을 감행할 때 그 모든 계획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말할 수 없는 큰 괴로움을 주는 살인자처럼 여겨질 수 있어요. 그러나 치료의 계획의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요. 왜냐하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서 결국은, 하나의 목적,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그 목적을 향하여 우리가 간다고 하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최종적인 계획을 알고, 또 믿을 때에 생겨나는 삶의 상황에 대한 변화된 시각이에요. 이 하박국 선지자는 지금 이렇게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 거기에서 멈추니까 이 상황은 마치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상황이 되고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삶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그럴 바에야 자기도 막 살아버렸으면 하고 후회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 믿음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보니까, 결국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당신이 이 온 세계를 통치하고 직접적으로 다스리신다고 하는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통하여 이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에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처한 상황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쁘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섭리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형통하고 기쁠 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하고 또 고난을 받고 괴로울 때에그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그 믿음으로 참았던 것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이 모순된 현실속에서 우리를 결국은 하나님의 뜻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실 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죠.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을 하고 아주 존귀하게 되는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펼쳐지는 그의 삶은 이러한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형들에게미움을 당하고, 부모와 떨어져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고, 팔려간 그곳에서도 투옥 당하고 모함을 받는끊임없는 시련을 당하며,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하기는커녕, 해와 달과 열한 별 그 아래라도 있을 수 있다면 좋았을, 그런 환경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그런 한 과정 한 과정을 모두 그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과정으로 사용하셔서, 결국 요셉에게 일어난 가장 불행한 일은 가장 영광스러운 일들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은 모든 것을 설명해서 아는 것은믿음이 아니죠.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모순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성취하셔서 극복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참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갖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이 선지자는 그런 믿음이 없었을 때에는 방황하고 침체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에는 아직도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고 그 시련 속에서 모순된 현실속에서 살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의 찬양으로 빛나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럼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서 이 사람에게 이런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라는 것이죠.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과 인간의 편에서 보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회의에 가득 찼던, 의심이 가득 찼던 이 사람의 마음에 안개가 걷히고 찬란한 빛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 하셨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물러나고 밝은 빛이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충만한 믿음 안에서 살래, 아니면 끊임없이 의심하며 방황할래? 하면 누가 후자를 택하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은혜를 많이 받은사람도 그 믿음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지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만나는 경험이 없이는 한 때 믿음을 가졌다고 할 지라도 이 믿음은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살아간다고 하는이것은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것이죠. 믿음은 한 순간에 붙들고 그 다음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붙들고 믿음의 효과와 작용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가야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고 생각하기보다 이 세상의 현실에 코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때는 충만한 믿음이 있었다고 할 지라도 그 믿음이 항상 그 사람을 살게 하지는 못해요. 믿음은 계시의 말씀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생각하면서 논리대로 생각하며 마음이 흔들리는 시간 못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속으로 자신의 마음을 밀어 넣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훨씬더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뜨고 마지막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 속에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와 사실들은 우리의 육체를 통해 들어오는 거에요. 그러나 이 육체를 통해 들어오는 사실들은 우리에게 항상 공평한 진리를 전달해주지 않아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모순된 일들은 우리의 육신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이지만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지식은 오히려 우리의 육신의 눈이나 감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죠. 그 영혼의 감각을 통하여 끊임없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만질 수 있게해주는 내용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한 때는 믿음이 좋았느니 어쨌느니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담쌓고 세상 염려와 근심에 코 박고 살면 왕년에 훌륭한 믿음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각오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죠. 2장 1절에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런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답을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절대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것들을 움직이시는 궁극적인 주권은 하나님에 있으므로 하나님에게서 이 모든 대답을 찾으리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답을 주시는 것이죠. 그러므로 항상 나의 인생과 삶 속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든지 간에, 문제는 이 세상 속에 있지만 답은 이 세상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실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으니 나는 이 상황은 눈에보이나 이 상황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대답을 하시는 그 정답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하겠노라 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이죠. 그 때에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의지하고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게 되어서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활동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다시 할게요. 자신의 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이 현실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영혼은 움직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움직이면 되잖아요. 돈 없으면 돈 꾸러 다니면 되고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고 싶으면 사치하고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 것들은 영혼의 움직임들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에요. 그러나 만약에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이 모순된 모든 일들에 대한답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해야 되겠노라고 할 때에 그 때 영혼은 육신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이 모든현실은 믿지 않고 오히려 잠잠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데 이 때에 영혼 안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이거죠. 성도의 기쁨은 바로 이렇게 남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알고 그래서 현실 속에서는 모두 낙심하고 시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모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게 바로 믿음의 삶이에요. 그래서 믿음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변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영혼을 집중시키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영혼이 끊임없이 활동하지 않으면 이 믿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잠시 눈앞에 펼쳐진 혼란스러운 현실 때문에 낙심하고 영혼의 침체에 빠질 때마다 내가 진리의 빛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멀어졌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영혼의 활동인 이 믿음이 현저히 사라졌구나 생각하면서 육신의 두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살던 삶을 돌이켜 영혼의 움직임인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해야 되는 것이고,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당신의 뜻을 보이심으로 믿음이 없는 것을 극복하고 침체에서 진정한 기쁨의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에요. (끝)
영적 침체의 원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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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의 원인3 08가을말씀사경회 새벽(08/10/20)
영적 침체의 원인 4 가을 말씀사경회 새벽(08/10/23)
5.목적을 모르는 고난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 23:9~10)
본래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객관적인 것에 모든 원인을 돌리는 것은 사실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침체는 육체의 질병과 유사해서 어떤 사람은 똑같이 찬바람을 쐬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은 심한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이렇게 각각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두 가지 작용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조절 작용하고 외부의 환경의 변화에 대한 대응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이럴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결국 생명을 잃는 것이 되요. 그래서 자기 스스로 조절 작용을 해서 우리들이 신진대사라고 그러죠. 세포도 만들어내고 피도 만들어 내고 뼈도 만들어 내고 이렇게 하면서 스스로 자기조절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바깥에서 어떤 환경의 변화가 올 때에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날이 추워지면 온 몸의 살갗의 세포들이 응축되고 따뜻하면 온몸이 풀어지고 하는 그런 작용들이 우리 안에서 있음으로써 우리자신을 보호하고 환경으로부터 우리자신을 지키는 것이죠.
영혼도 똑같아요. 영혼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영혼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조절 작용을 해요. 육체의 생명은 육체가 그 일을 하지만 영혼의 생명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계셔서, 우리의 심령 안에 계셔서 그래서 우리의 다시 살아난 영혼으로 하여금 영혼의 생명의 근원이 되셔요. 그래서 그것으로서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는 은혜를 주시고 또 외부적인 환경에 대해서도 반응하게 하시는 거죠. 근데 그것이 반응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에 마음 자신에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반응할 때 우리들이 각각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에 영혼이 건강하고 영정인 생명이 충만해서 은혜가 넘칠 때에는 외부적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고 그래도 그것을 신앙으로 소화해 내면서 우리들이 이기게 되는데 반대가 될 경우에는 외적인 어려움들이 오게 되면 그러면은 그렇게 해석을 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힘들이 현저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전자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더 매달리고 은혜를 구해야할 그런 상황이 후자의 사람에게는 주저앉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영적인 침체를 객관적인 원인만 가지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그런 뜻입니다.
유혹과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에게는 유혹이 되는 것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유혹이 되지 않을 수 있죠. 왜냐하면 유혹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죄를 사람에게 집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마음에 경향성을 사용해서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어떤 사람에게 술을 좋아하는 경향성이 있다면 술에 냄새만으로도 많은 유혹을 받겠지만, 술 자체를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술 자체를 좋아하는 경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술로 그 코에 냄새를 맡게 해도 유혹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유혹에 원인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우리의 영적인 침체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볼 때에 그러한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그렇지 않은 환경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침체로 들어가게 되더라.. 그럴 경우엔 우리들이 그것을 영적침체에 한 객관적인 원인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이제 다섯 번째에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다섯 번째에 요인이 뭐냐면 목적을 모르는 고난이라는 거죠.
아다시피 이 욥은 하나님한테 환란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장은 선악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빛을 던져줍니다. 즉 경건한 하나님에 백성들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이 세상이 왜 모순된 일이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모든 선악간의 있는 것들을 다스리시고 그리고 통치하시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일들이기 보다는 마귀에게 허용해서 일이라는 1장에서 보여주는 것이죠. 물론 우리에 재앙이나 자연적인 악들이 모두 이처럼 마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작정과 허락 없이는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살기에 충분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1장에 보면 그저 평안하던 상황에서 갑자기 엄청난 재앙이 욥의 집안에 닥치게 됩니다. 순식간에 자녀들이 죽고 양떼들이 도적질을 당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모든 가축들을 불태우고 하는 이러한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시대는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아브라함과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일 것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믿음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랄 커다란 환란을 당하고 커다란 부자였고 그리고 꽤 능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그는 불행하게도 그저 아무것도 없는 그런 빈털터리의 신세가 되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신으로 났으니 또한 적신으로 가리라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는 이심이 홀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지어다“ 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라고 그렇게 독설을 퍼부을 때에 그 어리석을 여자라고 책망하고 자기에 믿음에 순전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 보면 욥이 심히 고통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양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리스도인의 신자의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어떻게 보면 훌륭한 믿음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믿음 자체가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짧은 기간인데도 그렇게 출중한 믿음을 가졌던 이 사람이 흔들리면서 방황하고 그리고 영혼의 침체를 겪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자신은 왜 이 환란과 고난을 당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이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그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구나. 8절에 그래서 고백하기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안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니 하며 그가 왼편에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만약에 이렇게 환란을 당할 때에 하나님에 욥에게 나타나셔서 사실은 마귀가 너를 시험하는 거고 나중에는 니가 결국은 이기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너에게 줄 복이 지금 당하는 환란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수시로 찾아오셔서 힘내라 그리고 용기를 잃지 말아라 하면서 하나님이 격려 하셨다면 왜 이 사람이 그런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침체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그렇게 다루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 환란을 당하기 전까지 늘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았을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에도 환란을 당하게 되니까 하나님과의 그런 교통까지도 끊어지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탁월한 신앙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그 자신 안에 그 강함과 어울리지 않는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이 되었습니다. 적신으로 났으니 또한 적신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신자도 여호와여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홀로 그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하는 믿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은 어디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두려워하고 약하고 그리고 떨고 있으며 침체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러한 깊은 시련을 통해서 자신을 닫고 있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연단의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연단의 목적이 바로 자신 안에서 발견한 목적이지요. 우리들은 믿음이 없을 때에는 항상 모든 문제를 생각할 때에 이 세상에 자연적인 사물의 이치 정도로만 생각을 하죠. 큰 돌이 돌에 부딪히면 맞은 돌이 부딪히면 움직인 돌이 작은 돌을 때리면 그 돌이 움직여서 다른 돌을 때리고 이렇게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작용 속에서 이 세상에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 물리적인 사고방식이잖아요. 이 똑같은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내각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기 보다는 주위의 환경 속에서 발견하죠. 내 돌이 움직였으면 어느 돌이 와서 나를 때렸을까? 그리고 그 돌은 또 무엇이 움직인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항상 자신은 피해자의 위치에 있고 다른 사람은 끊임없이 가해자기 되는 것이죠. 그 때에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들을 욕하고 그들과 다투게 되는 것이죠. 이러는 동안에 사실은 자신은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마음과 사상 속에 하나님은 제외된 채 방황하게 되는 것이죠. 욥기는 바로 이렇게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뛰어 넘어서 저 멀리서 그 모든 것을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을 보게 만드는 것이죠.
(예화) 요즘에 그런거 거의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우리 어렸을 때는 교회에서 인형극만 하면은 애들이 까무러치도록 좋아했습니다. 커다란 박스에서 불빛이 비치고 작은 인형들이 나와서 손도 움직이고 목도 움직이고 팔도 움직이면서 사람들이 대사를 하면은 꼭 그것이 인형이 직접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됐지만 사실은 선생님들이 이 실을 붙들고 위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그러면서 인형극을 하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런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고 볼 때에 자기가 고통을 받으면 그 원인은 반드시 당한 사람에게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 없을 경우에는 이럴 수 있죠. 어느 돌이 굴러 내려와서 나라는 인간을 쳐서 돌 같은 나를 움직였는데 그 돌이 굴러 내려온 걸 원망할 수 없겠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때리기 위해서 굴러 내려온 돌을 붙들어 주지 않은 걸 원망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하면서 끊임없이 이 문제의 원인을 환경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이 큰 시련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은 연단될 필요가 있는 존재다. 이것은 엄청난 발견이에요. 그는 하나님 앞에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고 또 실제로 모든 삶에 있어서 온전을 꿈꾸며 살았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결국은 그가 자신이 연단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에요. 여기에 연단이라는 히브리말이 어디에 사용하는 단어냐 하면은, 금을 제련하는데 쇠 같은 것들을 녹여서 끊임없이 녹여서 금을 제련하는데 사용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에요. 금을 캐잖아요. 그러면 금덩어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가루들이 돌에 섞여 있어요. 그걸 금광석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거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옛날 원시적인 방법을 얘기하면, 그걸 잘게 부셔서 물에다 끊임없이 띄워요. 부유법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은 그 물에 물결과 거품에 의해서 물체의 비중에 각각 달라지면서 금붙이는 금붙이대로 모래는 모래대로 나눠지게 되죠. 그러면 그렇게 해서 얻은 금들이 있는 거죠. 또 개울에 그런 금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모으기도 하는데 사금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금가루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 거기에는 금이 아닌 이물질이 많이 있는 거죠. 그걸 녹이는 거예요. 녹이면 타서 없어질 것은 타서 없어지고 그리고 남은 것들은 각각 비중에 틀리기 때문에 액체로 된 그 물속에서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타버릴 것은 타버리고 위로 뜰 건 뜬단 말이죠. 그럼 그 비중에 차이에 의해서 그 금만 다시 걸러내는 것이에요. 그것을 계속 여러 번 반복하면 그것이 순금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놔두면 순도가 떨어지는 금이 되어서 현저하게 가치가 적은 그러한 귀금속이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녹이는 과정을 가리켜서 ‘단련한다’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 있나 내가 무얼 잘못한 게 있나 생각만 했었는데, 지금도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 자신은 단련된 필요가 있는 인간이고 끊임없이 단련될 때에는 자신이 더욱 더 존귀하게 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는 얘기에요. 그래서 결국 연단의 목적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움직임은 하나님이 한마디의 명령으로 하실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맑은 하늘에 잠시 후 구름이 끼고 비가 오게 하실 수도 있고 큰 비를 멈추게 하실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 할 수도 있고 부자인 사람을 가난하게 하실 수도 있지요. 저도 어제 들은 얘긴데 어느 교회에 전도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고 너무 막막하니까 복권을 사서 하나님한테 좀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더니 그게 큰돈에 맞아서 그걸 가지고 교회를 지었다는군요. 그래서 우리도 한 번 해볼까... 참 하나님은 어쨌든 그렇게 다양하게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이루실 수 있죠. 그런데 우리를 연단하시는 건 그렇게 안되요.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이 방망이 하나 들고 오셔서 신앙생활도 안하고 그저 흔들흔들 하는데 이 자식 좀 성화시켜야 되겠다. 그러고는 망치로 뻥 하고 치면은 갑자기 그 사람이 고도의 신앙의 인격을 가진 깊은 영적인 사람이 되느냐 하면 그렇게 안하시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실컷 놀다가 금식기도 기간을 정하고 성화를 위해 목숨을 걸자 하고 삼일 만에 응답받게 할 거 아니예요. 근데 그렇게 안하세요. 그게 하나님의 큰 특징이죠.
그래서 결국은 욥도 자기 자신이 연단되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는 뭐냐하면 자기가 지금 당하는 연단의 목적이 결국은 위에서 내리는 불, 그 다음에 스바에의 도적떼들 그리고 광풍이 불어서 집이 무너지는 것,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시기 위한 방법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환란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이 나를 바꾸고 변화시키시려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결국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이 세상에 부한 사람이 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연단을 당할 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믿음이 주의 것이 되도록 정결해지고 정금과 같이 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리를 고치시려는 환란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존재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그 큰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쁨이 곧 성도인 우리의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당한 환란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이렇게 큰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서 깊이 변화되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욥과 같이 이렇게 연단을 당하고 강력한 고난 속에서 눈을 뜰 수 없는 괴로운 시련의 날을 만날 때 마다 우리는 우리를 정결하게 만드셔서 연단하여 정금과 같이 우리를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어진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금이 함유되어 있는 물질만이 강력한 불길을 받아서 끊임없이 녹여지고 녹여진 그 속에서 또 다시 정제되고 정제되는 것처럼 주님이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백성들만이 이런 끊임없는 연단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주님 앞에 바로 세우고 변화시키고 또 새롭게 하는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의지하고 변화되어 정결케 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일로 연단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 때에 원망하고 이 연단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그리고 사람과 관계가 깨뜨려지고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으니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 분이 아신다. 그러므로 나를 이렇게 단련하시는 이유는 내가 금과 같이 하나님께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여 깨끗게 하시기 위함이시라 생각하고, 주님 한분을 바라보고 주님이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자신 속에서 걸러내려는 악과 더러운 불순물들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하고 주님 앞에 깨끗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온전히 바꾸어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의 원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