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에베소 교회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수님의 자기 소개가 주는 교훈(계2:1) 1007.9.28 주일오전 1
2. 주님이 칭찬(계2:1下-2) 1997.10.5 주일오전 14
3. 더 중요한 것을 잃었기에(계2:3-4) 1997.10.12 주일오전 26
4. 첫사랑을 회복하는 길Ⅰ(계2:4下-5上) 1997.10.19 주일오전 34
5. 첫사랑을 회복하는 길Ⅱ(계2:5中) 1997.10.26 주일오전 48
6. 첫사랑의 회복의 중요성(계2:5下-6) 1997.11.2 주일오전 57
7. 교회에 말씀하시는 성령(계2:7上) 1997.11.9 주일오전 65
8. 사랑은 전투다(계2:7下) 1997.11.16 주일오전 76
1.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주는 교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 2:1)
저는 오래 전부터 요한 계시록을 설교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가졌었습니다. 전 편을 설교한다는 것은 여러 해 걸리는 거겠지만 우선 급한 대로 1장과 2장과 3장만이라도 설교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늘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1장, 2장과 3장을 모두 설교할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아마 1장, 2장, 3장을 설교하는데 족히 1년 이상을 설교해야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시간들을 계시록 하나에만 쏟아 붇기에는 성도들의 다양한 요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선 아쉬운 대로 일곱 교회 중에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크게 깨닫게 해 주신 것들을 중심으로 몇 주에 걸쳐서 7절까지 나아가 보면 오늘 우리에게 매우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또 바로 이 본문의 말씀이 오늘 우리교회의 형편에, 우리교회의 영적인 필요에 부응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 오늘 1절부터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집고 넘어가기 전에 우선 몇 가지 사전적으로 2장과 3장의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두어야할 사전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요한계시록은 주후 95년경에 밧모라는 섬에 요한이 유배되어 있을 때 계시로 받은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글을 보면서 무슨 뜻인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상징과 숫자와 마치 암호 같은 그런 많은 상징들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지만 1세기 문맥에 살았던 사람의 문맥에는 말하자면 이심전심으로 모두 주고받아서 알 있는 그런 내용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이 계시록을 푸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요한 칼빈 같은 저명한 신학자가 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두고 두로 생각할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 계시록은 계시록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단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계시록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독특한 이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 계시록을 통해 주어지는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중요한 조건이다 하는 이런 결론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마는 먼저 1장은 서론입니다. 요한이 어떻게 밧모섬에 가게 되었으며 밧모섬에서 왜 계시록을 쓰게되었는지 주님을 만난 상세한 체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은 예수 그리도께서 요한에게 자기를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나타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요한에게 가르쳐서 그것을 기록해서 각 교회에 돌려보도록 보내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통해서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심판하시는 일이 판단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2장과 3장에 기록된 이 기록들은 4장 이후에 나타날 모든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계시하기에 앞서서 현재에 있는 교회를 예수님께서 평가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때는 이미 사도들의 말기입니다. 이때쯤은 거의 모든 사도들이 죽었다고 봅니다. 요한이 끝까지 산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요한 마지막까지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도 모두 죽고 교회는 쉽게 말하면 처음 교회와 같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줍니다. 저는 성경을 강해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순서 자체에 매우 커다란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을 교회에 말씀하시기 전에 현재 있는 교회들을 먼저 평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성도들도 어느 정도 그 심판에 참예하여서 일정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도 혹은 천사들도 성도들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성도들이 먼저 그 현재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하나님 앞에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고 전통적으로 2가지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한 해석은 여기에 나오는 교회들의 이름은 순전히 상징적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하는 이 일곱 교회의 이름은 단지 그 당시 실존하던 교회의 이름을 빌렸을 뿐이지 이것은 순전히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적하고자하는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교부들은 이 기독교회들의 20세기까지의 역사를 일곱 토막으로 나누었습니다. 각 교회가 각 시대에 해당하는 교회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가를 내리면 에베소 교회는 바로 사도들 말기의 교회고, 그리고 오늘날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시대인 오늘날의 교회는 다름이 아닌 라오디게아 교회가 됩니다. 사실 그러한 구분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흔적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될 때에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사람들이 영적인 안목을 잃어버리고, 깊은 어두움 속에 잠기며, 또 사랑을 잃어버리고, 불법을 행하고, 영적인 분별들이 떨어지며, 거짓 선지자들을 좇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나아가서는 20세기의 교회가,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차갑게 식어 있어서 종교적인 형식만 가진 교회로 나타난 점을 볼 때에 이러한 지적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너무 기교적입니다. 오히려 보다 더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시대를 따라 나누고 여기에 있는 교회들이 순전히 상징이라고 보는 대신에 이 교회가 그 시대 아시아 지방에 실재하였던 교회를 향하여 전해진 편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해석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베소, 두아디라, 버가모라고 하는 이 많은 도시는 소아시아에 모여 있는 일곱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도시에 각각 이 예수님의 계시가 편지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해진 이 편지는 교인들 사이에 회람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에베소는 도대체 어디였을까요, 이 문제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각 일곱 교회 중에서 두 교회는 칭찬만 받고, 또 두 교회는 책망만 받고, 나머지 세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서를 배열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먼저 책망만 받은 교회를 먼저 배열했느냐, 아닙니다. 칭찬만 받은 교회를 먼저 배열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칭찬과 책망을 받은 세 교회부터 먼저 배열을 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이 일곱 교회를 어떤 순서로 배열했느냐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리적인 약도를 따르는 배열도 아니고 잘잘못에 따른 배열도 아니고 주님이 맘에 드는 순서도의 배열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에베소 교회는 이 모든 순서를 놓고 이 순서에 어떤 논리가 없이 맨 앞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에베소 교회가 맨 앞자리에 올라와 있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칭찬만 받은 교회라든지 책망만 받은 교회였기 때문에 그러한 기준으로 앞자리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 앞에 지적 받고 있는 문제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문제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 그 지적 받은 문제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지적되고 있는 문제의 중요성에 비춰 볼 때 맨 앞자리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에베소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소아시아에 있는 항구에 인접한 도시였습니다. 옛말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했습니다. 아시아 지방에서 로마로 통하는 커다란 길이 세 개가 있었고 그 세 길이 에베소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처럼 에베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복음전파, 군사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거점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구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주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물건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늘 사람도 많이 모이고, 돈도 많이 모이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는 번창하고 아주 세상 적으로 볼 때 중요한 도시였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에베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은 사도행전 19장, 바울의 전도여행 세 번째 여행에서 이 도시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기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에베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아주 영광스런 광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이 에베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에 이 에베소는 마술 하는 책들을 모두 불사르면서 온 도시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도시의 복음화를 위해서 바울을 사용하셔서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이 에베소에 대해서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떠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석 달 동안을 회당에서 친히 가르치고 그리고 2년 동안을 두란노 서원을 세워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진리 안에서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게 함으로써 온 도시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 그러한 도시가 바로 이 에베소 이었습니다, 이 에베소에서 목회 하던 사람이 바로 바울의 영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가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후일 성경에는 않나 오지만 2,3세기 문헌을 살펴보면 마지막에 여기서 목회 하던 사람이 바로 요한 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부하신 대로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목회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거기서 목회를 하다가 밧모섬으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많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왜냐하면 이 에베소에서 밧모섬까지 뱃길로 100km에 불과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주님이 제일 먼저 뭔가를 판단하기 시작하셨을 때 전임 목회지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이 사도 요한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책임을 맡고 목회 하던 교회에 대해서 그 교회가 놓여 있는 현재적인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실 때에 그 전임 목회자였던 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님이 이 에베소 교회에 내린 판단은 긍정적인 판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우리는 1절을 살펴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먼저 우리는 일곱 교회를 거론하실 때 모두 주님이 꼭 같은 일을 하시는 장면을 봅니다. 즉 똑같은 어구로 시작합니다 .‘ -이가 가라사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다음에 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각 교회에 말씀하실 때마다 말씀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시는 일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각 교회에 대한 평가 작업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곱 교회 각각에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계시는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우리는 일곱 교회에 보여주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1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요한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환상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장엄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전체적인 자신의 모습 가운데 그 것을 일곱으로 나누어 각각 떼어서 각 교회에 소개해주는 것 같은 방식을 취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에도 무엇인가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교회를 판단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를 소개해주시는 그 메시지가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않나 오지만 예를 들자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말씀하노니’ 라고 하셨다면 사랑이 없는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의 성품이 사랑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는 ‘아멘 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다시 말하면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삶은 예수님이 바로 아멘 이요 충성된 증인이요 창조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신앙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아멘 이셨지만 이들은 아멘과 먼 삶을 살았고, 충성된 증인이셨지만 충성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 지만 그 분을 공경하는 삶을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을 파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2장을 보게되면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소개하시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이 에베소 교회에게 상기시켜 주시고 싶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지를 오늘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신앙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2장 1절을 열면서 에베소 교회라는 단어를 만납니다. 이 단어는 에베소 라는 말과 교회라는 말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하나의 고유 명사입니다. ‘에베소’, ‘교회’ 이것은 이미 함께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가 한 자리에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베소는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의 주인은 세상이었고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셨습니다. 이 에베소는 돈이 많고 무역이 활발한 도시였기 때문에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더욱이 이 에베소에는 온갖 미신들이 성행하고 마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대접을 받는 그러한 사회였습니다. 그렇게 이방 풍속과 마술과 미신과 인간의 사상과 신비주의 등 이런 것들을 따라가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에베소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에베소라는 도시의 모습 속에서 그 도시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도시가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들이 그저 엿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없이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으면서 물질적인 부요와 풍요 속에서 마술을 하고 미신을 믿으며 자기의 좋은 대로 살아가는 방종한 세상을 만날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말은 다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습니다.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고 그 시대의 풍조를 거스르는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방종한 삶을 자랑으로 알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방종한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세상이 타락하고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교회의 필요성은 더더욱 증대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몇 해전에 타임지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21세기와 기독교라는 논제의 글을 실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21세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혼돈한 시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황폐해질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의 어두운 역사는 인류에게 더더욱 기독교의 필요성을 점점 절실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기독교신앙의 필요성은 점점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필요성은 점점 감소될 것이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쉽게 말하면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잘못 된 곳으로 흘러가도 그 교회 때문에 소망이 있지만은 만일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면 결국은 그 도시, 그 역사의 더러운 물결에 삼켜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들을 보아 왔고 그리고 지금 이미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너무 썩었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원래 그러한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교회가 순결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정결하게 남아 있으면 하나님이 그 교회를 사용하셔서 그런 세상을 한 번 바꾸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을 한 번 청소하기 위해서 교회라고 하는 걸레를 들었는데 교회라고 하는 걸레가 세상이라고 하는 오물보다 더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청소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 ‘에베소’라는 말과 ‘교회’라는 말이 합쳐진 것에서 무엇을 느끼고 계십니까. 교회는 이 세상이 어둡고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더욱더 결심을 굳게 하고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살아가도록 자기 결심을 다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것은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세상이 썩어 가면 썩어 갈수록 참 썩지 않을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들의 삶이 바로 모든 인생의 본분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농담이나 장난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정서생활이나 여가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떤 분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하나는 여기서 신앙생활하면 제대로 하겠구나, 그런데 또 하나 드는 것은 여기서 신앙생활하면 고달프겠구나’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결국은 세상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도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성도가 예배 끝나고 돌아가 사는 곳은 산 속이나 외딴 섬이 아니라 세상의 풍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보태어서 세상의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교회와 세상을 갈라놓으려고 해도 갈라놓아지지 않습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모아놓고 산꼭대기에서 산다고 해도 인간이 모여 살면 신기하게도 그 속에서 세상이 다시 형성됩니다. 갈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갈라놓을 수 없는 세상과 교회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이 대단한 것이 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바 된 이 세상이 원래 하나님이 이 도시를 만들어 놓으셨던 그 원래의 거룩한 목적과 의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시가 되게 하게 하는 것이 주님이 의도하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역사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삶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시대의 교회의 역사가 그 시대의 교회의 역사와 관련이 없다면 교회의 영성이라는 것은 모두 헛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개인의 삶과 분리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체험, 한 시대의 역사와 단절된 교회의 영적인 삶, 이런 것들은 모두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떤 신문사에서 저에게 인터뷰를 와서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해왔습니다. ‘목사님은 왜 글을 쓸 때 조국 교회라고 쓰십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처럼 그렇게 애국자도 아니고 국수주의자도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껍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혈통주의 적인 사고방식에 매여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단 하나 내게드는 생각은 그동안 우리 교회가 역사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해서 역사를 깊이 사랑하고 이 민족의 역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가 부흥한다는데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지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고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어차피 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을 때에 그 개인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를 가지고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써 내려갈 수 있는 편지지와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이끌려 들어간 강도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은 있었는데, 자기가 주님께 받은 그 구원의 감격과 참된 사랑을 써 내려갈 인생이라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부분의 경우는 그 강도와 같이 구원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은혜, 체험 등을 맛보고, 어느 정도 이 세상에 살아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써내려 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삶과 분리된 개인의 영적인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정상적인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삶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체험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는지를 적어내려 갈 수 있는 무대입니다. 똑같은 것을 교회와 역사에게 확장시키면, 한 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역사라고 하는 그 무대는 바로 교회가 만난 하나님, 그리고 교회 속에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가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적어내려 갈 수 있는 무대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의 역사는 한 시대의 교회의 분깃입니다. 그 시대의 역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구별된 역사가 된다면 그것을 통해서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을 입증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한 시대의 교회가, 놓여 있는 그 역사가 지금처럼 패역하고, 잠들어 있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이 전에는 어두움 속에서 숨어서 했던 나쁜 짓들을 이제는 백주 대낮에서 행하고 하나님에게 대한 공개적인 모욕과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러한 오만 불손한 불신앙들이 창궐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영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시대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에베소라는 도시 속에 세워진 에베소교회는 이제 에베소 속에 흐르는 사조와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속에 있는 배금풍조와 더불어 싸우고, 에베소 속에 흐르고 있는 음란한 풍조와 싸워서 성결한 삶을 이루어 가야할 교회였습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믿고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 시대를 거스르며 살아가도록 일깨워주어야 할 책임이 에베소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독특한 은혜와 능력을 에베소교회에 부어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를 축복하시니까, 그 도시를 축복하시니까 오랫동안 수백 년동안 업으로 삼으면서 마술을 하며, 점을 치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계의 수단이 되는 모든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귀하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교회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우리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실제적인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세상과 구별된 신앙생활을 해나가지 않는 것은 교회에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서게 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세우신 주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신 것은 그의 의와 우리를 아름다운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귀한 덕을 이 세상에게 알리고 선전하기 위해서 왕 같은 제사장들로 택하여 놓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기는커녕 거기에 걸림돌이 되고 거기에 부담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잠시 우리가 그런 삶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각성하고 깨어나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를 세우신 그 목적에 부합한 인생을 살 그 때에만 비로소 행복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면 세상 속에서 즐거움을 배우고 세상 속에서 즐거워하던 것들을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거듭난 즐거움이요 거듭난 인생이 가져다 주는 기쁨입니다. 에베소교회에 에베소의 타락한 도시 한 가운데서 성도들을 불러 교회로 세워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이 타락한 도시, 하나님을 등진 역사의 한 마당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진지한 소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도시의 타락한 물결과 더불어 싸워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들의 삶을 펼쳐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지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자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이 사자는 하늘에 있는 천사라기 보다는 그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당시의 감독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감독을 하고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그 교회의 감독에게 전해준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말이 단수로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지금 잊혀져가고 있는 신앙의 교훈을 하나 받게됩니다. 잊혀져가고 있는 교훈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어떤 신앙생활이 가장 성경 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처음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택하실 때부터 오늘날의 교회를 이끌어 가실 때까지 주님이 율법을 돌 판에 만들어 놓으시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잘 믿고, 내가 직접 도와 준다는 식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있는 그 곳에 그 백성을 치는 목자를 두셨습니다. 그 영혼을 책임 맡을 일꾼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의 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 지를 배우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고, 신약에서 마찬가지이며, 교회역사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물론 우리는 카톨릭과 같이 어떤 교회의 한 제도가 모든 성도들을 예속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신교 최고의 자산은 개개인의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결심을 스스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거나 이해하기 때문에 그릇된 이단들도 나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단이 나온 것에 비하면 수많은 성도들이 수 천년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게 된 그 모든 과정들, 그것들이 가져다준 유익이 그 모든 폐해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을 폅니다.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길을 얻습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성경을 펼치면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정말 우리 스스로 많은 부분들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성숙한 신자들은 언제나 목회자들 곁에서 비켜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그래서 어리고 연약한 신자들에게 길을 내어줄 수 있는 성숙함이 있어야 됩니다. 곤란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스스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보다도 여러분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여러분의 기도로 기도의 잔을 채우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신자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독립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의 도움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방식 그 자체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에베소교회를 향해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싶으셨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대한 평가를 전달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커다란 공문을 가지고 에베소에 집어 던지고 누구나 읽어볼 수 있도록 방을 써 붙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편지는 두루마리로 되어서 인봉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 인봉은 그 교회의 사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봉을 처음 뗀 사람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그 감독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를 직접 먼저 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목양하고 이끄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우고 그 앞에서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성경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항상 매우 특별하게 부른 사람, 그리고 모든 성도들 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 있어서 자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신앙의 지도를 받고, 말씀의 더 깊은 도를 깨닫고, 그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민주적인 시대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 성경의 책임입니다.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위에 뛰어나지도 않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지도 않고,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사자가 되어서 뭇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도한다고 할 때 수많은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여러분 자신들의 후손을 사랑한다면 여러분들의 후손들이 거룩하고 경건한 목회자들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일평생 올바른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아울러서 투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미래의 목회자들을 향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한 시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수준은 자라나는 목회자 후보생들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자기의 후손들과 미래의 교회들을 책임지고 하나님 앞으로 데려갈 역량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고 있는 가에 대한 깊은 관심과 기도를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심한 책망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기에 놓여 있는 교회, 교회가 그렇게 되었을 때 교회의 영적인 형편은 곧 일반적으로 그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의 영적인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에 교인들은 모두 인정받지 못 했지만 그 교회의 감독은 유일하게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있었다는 그러한 추측을 우리는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자라는 사람 에베소 교회 감독에게 편지를 쓰도록 요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된 목자 밑에서 겸손하게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는 목양적인 관계야말로 능력 있는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 누군가에게 목양을 받기에는 너무 성숙해있다고 생각하는 어줍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은 언제나 곤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목양 아래서, 당신이 세우신 목양의 방법 아래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맛보고 목자 되신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작은 목자가 되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린 목회자들이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커다란 위기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해도 도무지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 책임이 물론 성도들에게만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목회자 본인들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건 목회자들이건 현실만을 가지고 너무 깊이 고민하지, 진정으로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는 어떤 원리 위에서야 되는 가를 가지고는 고민하지 않는 것입니다. 편한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 목사님은 존경할 만 하니까 내가 존경하고, 저 목사님은 설교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도 성경이 자신들의 행동이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 각기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편한 방법을 택해서 살아가는 동안에 교회는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영적인 형편은 더욱 더 타락하고 어두운 형편이 되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사자에게 편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교회를 이끌어 가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통해 서든지 사용할 수 있고 누구의 간구를 통해 서든지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교회를 세우시고 그 한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에베소서 2장 첫 머리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속히 하나님 앞에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들 중에도 아직까지도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유리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속히 좋은 목자를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 사람을 신뢰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함께 사랑을 주고받으며 함께 주님의 진리를 알아 가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더 오래도록 지체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에 고통과 불순종을 더 할 뿐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목양을 받기에는 나는 생각이 너무 독특하고 내가 만난 하나님이 너무나 위대하다고 생각 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수도원에나 들어가셔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여러분들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원리들 앞에 정직하게 우리들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의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러한 교회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머리는 뛰어난 행정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고 인격은 너무나 훌륭해서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용납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순결해서 어떠한 죄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사람이며 뿐만 아니라 다리는 얼마나 튼튼한지 산동네를 올라 다니면서 심방을 해도 자가용이 필요 없는 사람, 1시까지 심방하고도 다음날 새벽 기도에 끄떡없이 나올 수 있는 사람,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병석에 누워서 성도들을 예배시간에 공수로 돌려보내지 않는 사람, 영력이 충만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한번도 헛방이 없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병든 사람에게 손만 얹으면 낫는 사람, 더욱이 성도들이 무엇을 대접하든지 모두 먹어치울 수 있는 말 같은 밥통을 가진 사람, 그러면서도 틈틈이 공부는 뛰어나게 많이 해서 남이 부러워할 정도의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 그러면서도 너무나 많이 기도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목회자의 모습을 보면 교회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늘 눈물 흘리며 불쌍히 여기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없습니다. 천사들 가운데서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들을 침에 있어서 당신의 사자들을 하늘의 천사들 중에서 우수한 인물을 택해서 땅에 내려보내시는 신비하고 안전한 방법을 택하시는 대신 매우 위험한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꼭 같은 형제들 중에서 똑같이 허물이 많고 연약한 한 사람을 매우 특별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매우 특별한 은혜로 그를 불러서 당신의 양떼들을 목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의 양떼들을 치고 목양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쓰러지는 목회자들을 봅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목회자가 매우 우리를 실망시키는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사자일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적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이상한 방법을 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뛰어난 종들을 세우시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뛰어난 사자가 여러분들을 목양하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목자가 아니라 목자를 붙들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신앙생활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을 입증하듯이 뒤에 아주 기가 막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일곱 금촛대는 뭐고 일곱 별은 무엇입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그 앞절에 그 해설이 나오는데,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요,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다라고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해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일곱 금촛대는 교회이고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양떼를 치고 있는 일꾼입니다. 그 감독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붙든 것도 붙든 것이고 이런 식으로 붙든 것도 붙든 것입니다.(? 행동) 이런 식으로 붙들고 설교하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불안하시겠습니까. 언젠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붙든 것입니다. 누구도 주님의 손을 해하지 아니하고는 빼앗아갈 수 없도록 열쇠를 손안에 움켜 쥔 것처럼 그렇게 일곱 별들을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붙드신 그 분은 붙드실 수도 있고 붙드신 그 분이 팽개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 매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일 수 있는 이유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실 그 때에만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최고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의 목자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원래 거룩한 사람, 원래 경건한 사람, 원래 뛰어난 사람, 원래 말씀의 사람, 원래 신령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고 계신 그 시간에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충실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붙들려 있는 그 순간에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사람과 구별될 수 있고, 여러분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놓으시면 그는 단지 여러분들 중에 가장 쉽게 세상으로 빨려들어 갈 수 있는 연약한 형제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10장을 설교하면서도 여러분들에게 깊은 간곡함으로 주지시킨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날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의 영혼의 목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심각한 책망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혼의 목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하찮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목회자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가져가실 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의 손에 붙들린 목회자를 주신다면 우리의 좋은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저는 좋습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목회자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은 체험에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종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그 교회의 어떤 성도들이 모이고 어떤 고약한 무리들이 교회를 훼방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장중에 붙들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 교회를 지키고 있는 한 어떠한 흉악한 이리도 그 교회 안에 있는 어린 양떼들의 영혼을 해할 수 없습니다. 넘보았다가는 그 손안에 붙잡힌 지팡이, 그 손안에 붙잡힌 막대기에 혼이 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것이 갖추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목회자가 없다면 그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인 사교적인 집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저는 제가 여러분들의 기도를 원하지 않는 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여러분들을 목양하고 있는 사람이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여러분들의 영혼이 얻을 수 있는 유익과 하나님의 손이 그를 버렸을 때 여러분들이 입을 영혼의 상처의 차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가에 대해서 계산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본능과 감각을 따라서 신앙생활 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몇 푼 안 되는 물질적인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두 눈을 부릅뜨는 사람들이 영적인 손해에 대해서는 너무 너무 너그럽고 그리고 관용한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주님은 당신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뿐만 아니라 이 부분을 설교할 적마다 제 마음속에는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평생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사는 것입니다. 큰 교회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유식하고 잘난 성도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아니면 어떻고, 사례금이 많은 교회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서 자신을 소진하며 한 생애를 다 살고 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할 우리의 분깃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한 사람을 그의 생애 속에서만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그는 소수의 무리들에게 설교하던 분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수만 명의 성도들을 보내시지 않았는지 우리는 궁금할 뿐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아더 핑크 목사님을 위해서 헌금한 푼돈들을 모아서 목사님은 주보와 같이 작은 팜플렛으로 자기들 가운데 깨닫게 하신 고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누구도 그것이 그렇게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고 한 세기가 바뀐 후에 그 분의 진가는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있을 때 무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지만 그 분은 죽어서 그 분의 책이 3천만부 이상이나 인쇄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교회에 새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그 분이 눈에 보이는 성공은 없었지만 얼마나 진실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샘에서 자기에게 맡겨준 영혼들과 양떼들을 위해 말씀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그 손에 붙들려서 자신을 쏟아 붇는 생애를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가 되든지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큰 교회가 되게 하실 지도 주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눈에 보이는 성공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충성되게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놓으면서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만을 위해서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사는 주님의 장중에 붙들린 삶이 주는 가치를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저도 기도하고 여러분들도 더더욱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2장 첫머리에서 이런 교훈을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을 일일이 다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여러분들을 돌아보십니다. 교회 구석구석을 다니시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행위를 판단하시고 연약한 것들을 붙드시고 고통 하는 것들을 이해하시고 아파하는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그 촛대사이를 다니시는 것처럼 (?-안 들림)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투명하지 않고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주님이 교회 구석구석을 다니시고 여러분들의 삶 갈피갈피에 개입하셔서 두루 살피시고 감찰하는 것이 두려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그러한 관계를 회복해서 이렇게 우리의 삶과 교회를 두루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니심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투명한 관계를 갖도록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회의 금촛대 사이를 다니고 계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또한 당신을 등지고 당신의 교훈으로부터 멀어진 교회들을 향한 커다란 경고의 말씀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역사를 보십시오. 주님이 한 나라에 우후죽순처럼 교회를 세우시기도 합니다. 선교의 문을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선교의 문도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런 영광스런 복음의 감격을 누렸던 처음 교회들이 있는 소아시아 땅들은 지금 모두 이슬람교의 본거지로 바뀌었습니다. 이 에베소도 지금은 황폐한 곳으로 바뀌고 기차가 지나가는 역에 마을들이 다소 모여 있는 한적한 마을로 바뀌고 복음의 영광과 타오르는 마술 책의 불길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높이던 그 은혜의 감격들은 이미 사라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주님이 두루 다니시고 많은 교회를 다니시면서 아파하시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도시를 보고 통탄해 하시던 주님이 우리 교회를 두루 다니실 때에 마음이 시원해질 수 있는 교회, 그리고 내가 내 마음에 합한 한 교회를 들어 이 역사를 움직이리니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교회,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되지 않겠습니까.
2. 주님의 칭찬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2:1下-2)
지난 시간부터 우리는 이 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교회를 향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부분까지 해설을 하면서 교회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고 세월이 흘러가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움직이시는 방법은 당신이 세운 종을 붙들어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리도 이 사실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교회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일곱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주님이 교회와 주의 종들을 돌아보시는 것이 소망이 되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면 이것은 매우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2절서부터 나오고 있는 본격적인 에베소교회를 향한 평가를 도입할 때 “가라사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가하실 때에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고 기록된 그 말씀이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전해지게 하셔서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였다는 이 평범한 사실을 오늘 우리는 먼저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이나 지금이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의 백성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말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에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확인시켜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에베소교회의 있는 사자에게 편지하도록 요한에게 당부하시면서 말씀으로 그 교회를 향한 평가를 드러내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회개하지 않고 처음사랑으로 돌이키지 않고 있는 이 교회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시고 책망하시는 대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 교회에 먼저 자기의 마음을 알리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님은 돌아가는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에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을 충분히 가르쳐 주셨고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그곳에 심으셔서 자기의 뜻과 거룩한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교회에 신자들을 책망하거나 징벌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그 교회에 이처럼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 앞에 비록 바르지 못하고 또 이전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처음 믿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말씀을 주의 종들을 통해서 그 교회에 들려주심으로 여전히 에베소교회에 안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는가를 보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그리고 구세주를 향한 진정한 우리의 영혼의 신뢰와 같은 것들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릇된 길을 걸어가거나 혹은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잠시 믿음의 길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의 본심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께 복종하며 살고자하는 마음이 아직까지도 본심이 남아있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으면서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입니다.
주님은 오늘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것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할 때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홀로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은 이 사랑하는 요한이 모두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적어 내려가는 가운데 그에게는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모두 사실이며 옳고, 말씀하시는 분은 의로우시며 우리와 이 편지를 받게 될 에베소교회의 모든 희망은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음성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해 나아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 되기 위해서는 커다란 빌딩이나 주차장이나 많이 모이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곳에서 바로 지금 이때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하시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을 언제나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이 열려지고 열려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그 시대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마음과 하나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교회, 그것이 바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자산이며 최고의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말씀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여 당신의 뜻을 보이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주님의 뜻을 충족히 보이시고 듣는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알고 부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들을 개인의 신앙생활로 적용을 시켜보아도 우리는 매우 유익한 결론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잘 깨닫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여러분들의 신앙을 비교해보면 여러분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여러분들이 귀를 기울일 때에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처지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러한 진리들이 우리 개인의 삶 속에 적용될 때에 우리는 놀라운 이해를 갖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또 우리 자신의 현 주소를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정확하게 자신의 신앙상태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삶에 대해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기준은 그분이 가지고 계시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과 이유는 정서를 함양하고 사회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거나 우리의 종교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기만족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앎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났고 우리의 신앙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참다운 구원을 경험했을 때 우리는 이 신앙과 인생의 목표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인생을 재미있고 아가자기 하게 보내든지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티끌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우리 신앙의 모든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우리 인생, 우리 신앙의 모든 목표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못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가 계속해서 거듭되는 자기 위로와 연민에 빠져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거나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자기 사랑의 인생을 가지고는 그의 삶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을 고치는 하나의 방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즈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여러분들은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글을 쓰게 하셔서 에베소교회를 깨우셨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말씀을 기록해서 주셨고 당신이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말씀으로 당신의 양떼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배 중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보여주시는 심정을 헤아리는 일에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때에 “가라사대”의 주님을 여러분들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라사대” 말씀하시는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대해서 소망 없다고 판단하시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우리를 책망하실 때 우리는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느낍니다.
오늘 에베소교회처럼 철저히 무너진 이 교회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요한으로 하여금 제일 먼저 펜을 들고 사랑하는 이 교회에 당신의 뜻을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진지하고 진실되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에 부응하며 살아가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장난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신을 향한 태도가 어떠하든지 당신이 구속하신 백성들을 향해서는 언제나 사랑이 충만하시고 자비가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을 향해서 냉담해진 사람에게조차 주님은 눈물 흘리시면서 말씀하시고, 당신을 향해 사랑이 식어진 모든 사람들에게조차도 자비로 충만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권고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시고 그 십자가의 희생 위에서 교회를 세우신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리고 주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를 늘 물으며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을 정말로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이 자기를 향해서 슬퍼하시는 잘 깨닫고, 주님을 전혀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은 물론이고 주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어느 날 주님이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충격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면서 에베소교회에 여러 가지 신앙생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선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이 계시록의 에베소교회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 눈에는 이 에베소교회가 부정적으로 들어왔습니까? 긍정적으로 들어왔습니까? 그것이 어떠하든 에베소교회를 보는 결론적인 그림은 부정적입니까, 긍정적입니까? 우리 교회가 에베소교회를 담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혹독한 책망을 맨 앞자리에서 받고 있는 장면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답은 부정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에베소교회를 보면서 이 교회가 참으로 부정적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맨 앞에서 예수님께 이러한 책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이 교회에 대해서 주님이 진노하셨는지 회개할 기회를 한번 주시고 만약에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세우신 그분이 교회를 허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에베소교회 만한 교회가 오늘날 우리 나라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 평생목회를 하면 열린 교회가 에베소교회만 해질까하는 생각을 한번도 안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교회는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행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오늘날 얼마나 보기 힘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행위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그 자체가 그저 들을 수 있는 좋은 귀를 가지고 와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것으로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형편입니다. 그래서 누가 하는 말이 목사들의 입하고 교인들의 귀만 떠다닌다고 합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입, 듣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귀, 온 몸과 온 영혼이 구원받기에는 합당치 않고 귀하고 입만 구원에 합당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형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잘 드러나고 있습니까? 행위가 없는 시대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깨닫지만 그 말씀을 깨닫고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우리의 인생의 어떤 행함의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 도무지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행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당연하고 행하지 못한 것은 다음 주일에 와서 행하지 못했다고 하나님 앞에 유감을 표명하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말씀을 잘하시는지를 보여주시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사람들을 잘 깨닫게 하시는지 그 깨닫게 하시는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포도나무를 포도나무에 심으실 때에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잎사귀나 근사한 나무의 색깔을 보고 싶으셔서 포도나무를 심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포도나무를 심으실 때 그 기대는 오직 탐스럽게 맺히는 열매, 행위가 있는 신앙, 바로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주목하면서 또한 우리의 스승 되시는 주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들에게 은혜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행위가 얼마나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사람들은 이제 행함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에베소교회는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진리를 듣고는 그 진리를 즉각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 앞에 들은 이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글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애를 쓰고 일주일동안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심으로 노력해서 말씀이 전해질 때마다 행위에서 열매가 나타난다면 저는 윗통을 벗고 춤을 추면서 이 동네를 뛰어 다녀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이 교회는 오늘날 같이 듣기 만하고 행위가 없는, 말만하고 행함이 없는 이 시대의 교회들이 따라갈 수 없는 행함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 교회 앞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본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만 그쳐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교회는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고통을 받을 줄 아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대접을 받는 자리를 좋아하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고생해야 하는 자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 큰 행사가 있어 수건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못 받았답니다. 못 받은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을 차별한다고 말입니다. 얼마 후에 그 교회가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그러자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그 주일에 교인이 20%나 줄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결국은 수고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수고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몸을 바치고,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자신의 모든 귀한 것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는 신앙 생활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어느 기도원을 갔습니다. 여름인지라 행사가 많아 10여명의 여자 분들이 땀을 흘리며 고생합니다. 그래서 밥 한 그릇 받아먹으며 수고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원을 운영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의 사모님이 제가 강사이니 같이 앉아 영접을 하며 식사를 했습니다. 그 교회는 상당히 많은 수가 모이는 교회입니다. 제가 그 교회 권사, 집사님들이 여름에 휴가도 못하고 고생한다고 하자 사모님이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정신이 있으십니까?” “몰라도 한참 모르십니다. 요즘이 어느 세상이라고 서울 땅에서 자기 일을 접어두고 이곳에 와서 봉사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 사람들 모두 급료 주고 산 사람들입니다”. 옛날에는 잘했는데 요즈음은 기도원에 가서 봉사하자면 여전도 회원들이 모여 수군거리다가 봉투를 들고 온다는 것입니다. 갈 시간이 없으니 이 돈으로 사람을 사라는 것입니다.
수고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어린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애들이 쓰레기를 어지럽히며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책망하며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찰이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자기들이 월급 준다고 하며 튀어나갑니다. 누구한테 배운 것입니까? 모두 부모들한테 배운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찰은 청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당을 관리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청소하기 싫다고 사람을 사 가지고 자신들은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겠다는 자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되겠습니까? 교회당에 오면 누구든지 허리를 굽히고 봉사합니다. 화장실에 쓰레기가 있어도 담아 버리고, 지저분한 것이 붙으면 청소하고 일찍 나와서 잘못되었으면 정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고가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무엇인가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 동생이 와서 개탄을 합니다. 자기네 교회는 제직이 칠백 명인데 오십 명 넘게 모여 제직회를 한 적을 본 일이 없답니다. 제가 그렇다면 제직회 정족수가 되냐고 묻자 나중에 목사님께 물어보니 제직회 정족수는 이미 없어졌다고 합니다. 몇 명이든지 모이면 회의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 이상 모이라고 하면 서울 시내의 교회들이 한번도 제직회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수고하기를 싫어하고 편한 것을 택하고 주를 위해서 중심을 바치는 마음이 없으니 편한 것을 택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오늘날 교회의 형편인데, 이 에베소교회는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그뿐입니까? 이에서 그치지 않고 한가지를 추가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잠시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잠시 잘하는 것은 누가 못합니까? 물론 그것도 잘 못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너무나 쉽게 마음이 식어지고 인내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맡았으면 끝까지 나는 죽고 주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희생적인 각오로 오래 참으면서 어려움이 오면 주님을 생각하고, 형통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시련이 닥치면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형통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인 줄을 알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내 있는 삶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할 때 인내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늘나라를 손에 얻으려는 사람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남이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재수가 좋아서 부자가 되었다든지 큰 뜻을 이루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롭고 고독할 정도로 견디고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자기의 뜻을 성취해간 것입니다. 그런 뜻을 세운 사람들은 모두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들이 많은 환난을 겪고 고난을 겪으며 많은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환난과 시련과 많은 유혹 속에서 든든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 인내하는 신앙생활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했지 환경을 바라보라고 했습니까? 환경을 바라보며 아무리 추파를 던져도 환경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도록 조성해주는 때가 얼마나 되리라고 생각됩니까? 환경 때문에 여건이 좋아서 하나님을 저절로 잘 믿게되는 그러한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을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의 풍파가 우리를 믿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서 우리의 신앙이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야 됩니다. 시험과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본 모습이고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걸어가는 동안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은 인내라는 덕목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난도 당하고 어려움도 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정말로 인내가 없는 시대입니다. 너무나 참지를 못합니다. 견고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내주를 가까이 하면서 걸어가는 신앙생활이 유행하고 있습니까? 보기 드문 신앙이 되어버렸습니까? 보기 드문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서 교회는 인내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습니다.
이것으로만 끝나도 한번 닮아볼 수 있겠는데 하나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교회였습니다. 순결한 교회였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점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악한 죄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교회가 용납하고 또 용납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기도 전에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거나 교회의 성직자로 세워서 그것이 마치 주님의 사랑을 펼치는 길인 것처럼 말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교회로 하여금 순결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면서 한가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사람들의 생활은 물론 그렇지 않은 계층도 많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미국의 도덕적인 수준이 한국을 능가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썩어 있는 부분은 정말로 썩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느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얼마나 할 일이 없는지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인생의 지루하고 답답한 것을 면해 볼까하고 매일 나무 아래 모여 궁리를 합니다. 그러다가 그 동리 사람들이 합의를 보았는데 하루에 한번씩 집을 옮겨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식구들은 가만히 있고 남편들만 옮겨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다른 집에 들어가 가장 노릇을 하고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삶을 살아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강점은 지도자가 될 때는 잔인할 정도로 껍데기를 벗겨서 검증한 다음에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우리들의 교회에도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복음적인 관점에서 조정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베푸는 것과 하나님의 교회의 순결을 보전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죄를 짓고 커다란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를 용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주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검증되어야 할 것은 지난날에는 비록 많은 지었다 할지라도 지금은 모두 그 죄를 청산하고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가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지켜나가지 못할 때 교회는 심히 부패하고 잘못되게 됩니다. 가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의 장로나 중직에 등용되는 것들을 교회는 막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불법과 탈법으로 소문난 사람들이 교회의 중직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만한 중대한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성직에 오르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진실된 회개에 의해서 범죄보다도 뚜렷하게 회개가 소문나기 전까지 그런 것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는 순결을 보전하고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가 순결한 교회가 될 때 세상의 죄악을 향해서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가 정결한 심령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나님을 거스르고 반항하는 이 세상의 죄악된 물결을 보면서 분노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결함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들과 함께 야합하고 그러한 죄악들이 잠시만 지나면 교회의 변형된 형태로 들어와서 교회를 흐려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 죄악된 세상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죄악의 물결을 거슬려 살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하기 위해서는 그가 순결하고 깨끗하며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결한 마음, 그곳에서 신령한 빛이 비친다고 찬송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순결하고 깨끗한 교회에 당신의 뜻을 보이십니다. 정결하게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깨끗이 닦여진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많으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순결하신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지만 교통하시는 분은 순결하기고 정결한 사람들과 교통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리스도인의 깊은 뚜렷한 영성을 소유하고 싶어한다면 여러분들은 먼저 자신의 죄와 탐욕과 모든 탐심을 버리고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작용들을 버리고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을 들어 도처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이제 경건하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깨끗하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마치 이제는 그런 순결과 거룩하고 깨끗함, 정결함 같은 것들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이고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결한 양심보다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환영을 받고 순결한 마음보다는 재치와 기지에 번뜩이는 처세술이 오히려 실제로 이익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한 이때에 에베소교회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순결한 사람들, 그리고 정결하게 된 교회,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깨끗한 동기와 신앙의 정결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성도, 이런 사람들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회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쓰시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여러분, 그리고 아무리 허기진다고 해서 개밥그릇에다 밥을 말아준다면 먹겠습니까? 아무리 밥이 고기 밥이라 할지라도 고깃국에다 밥을 말아서 맛있게 금 수저를 꽂아 주었는데 담긴 그릇이 찌르러진 개밥그릇이라면 먹겠습니까? 물론 먹을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반적으로 먹지 않습니다. 금수저가 아니라 스테인레스 수저라도 좋고 사람이 먹는 깨끗한 그릇에 콩나물국이라도 말아서 먹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고깃국이면 뭣하고 금 수저면 뭐하겠습니까? 담긴 사발이 아무리 깨끗하면 뭐하겠습니까? 그 깨끗한 원인이 개가 열심히 핥았기 때문에 깨끗해진 것인데 그곳에다 밥을 말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의 마음도 꼭 같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 세상을 향해 이루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결한 교회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곳에 당신의 뜻을 담으시고 당신의 계획을 담으셔서 이 세상을 위해 당신의 뜻을 펼쳐 보이시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반짝이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능력과 함께 순결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교회, 능력과 함께 거룩한 정결함도 넘쳐 났던 교회, 그러한 개인들은 너무나 소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정결한 교회,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않은 교회였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저는 기죽지 않을 용의가 잇는데 그 다음의 말이 완전히 저로 하여금 오금을 펴지 못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불결한 자들은 용납치 않았고 거짓된 자들은 아예 드러내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는 상당히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있어서 이 교회는 제가 허락을 하지 않으면 세상의 누가와도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회당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올라가서 신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덕을 본 것입니다. 두루 다니다가 회당을 중심으로 회당에 종교적인 사람들이 모이므로 웬만하면 올라가 설교할 자격이 주어지고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누군가가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니 말씀을 전할 때에는 주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깎듯이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즉각적인 판단이 옵니다. 끌어내려라! 가짜다. 자신은 사도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가짜다. 주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아니다. 저가 하는 모든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고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성경 자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에베소교회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들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도들이 어떻습니까?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수없이 달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하면 침묵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침묵은 아름답다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 좋아하는 교인들 좌중을 잠재우려면 성경이야기를 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말로 무지에 가까울 정도로 성경을 공부하고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주일 학교가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성경을 잘 가르쳐 주는가를 보려고 목사님이 내려가셨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너는 몇 학년이니?”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얘야, 여리고는 누가 무너뜨렸니? ”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한참 동안이나 목사님을 쳐다보면서 울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안 그랬어요”. 목사님이 기가 막혀서 “네 선생님이 누구냐?” “저 선생님입니다.” 그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오셨어요." “그래요 ○○선생” “내가 얘한테 여리고성을 누가 무너뜨렸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안 그랬다고 눈물을 흘리는데 이럴 수 있는 거요?” 여선생이 난감해하면서 “목사님 그 아이가 안 그랬다면 정말로 안 그런 것입니다. 그 아이는 아주 솔직하고 정직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너무 기가 막혀서 부장인 장로님께 쫓아갔습니다. “장로님 도대체 주일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자초지정을 설명하며 이에 대해 묻자, 장로님이 “기왕 무너진 것 교회에서 배상해 줍시다. 이제 와서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누가 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말로 무지함을 보여줍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와있지 않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90%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모두 자신이 생각해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가르침도 있지 않습니까?”하면 좀더 낳습니다.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졸도하셨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수준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느 신자가 시편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기드온에서 출판되는 파란 성경이 신약성경과 시편인데 마지막에 시편이 있으니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시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면접을 치르는데 구약성경의 세 번째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더듬거립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거짓교사들이 판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열심은 있고 쉽게 불은 붙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단이 나타나기만 하면 너무나도 기승을 부리는 것이 한국교회의 형편입니다.
이 교회는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누구 무너뜨렸냐고 물으면 즉각적으로 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 성경 구석구석 복음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가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목회자로서 가장 절망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수없이 성경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깡통일 때, 그때 정말 졸도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고도 변하지 않고, 인식도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를 공부하고 깨달으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은 이것이 목양인가 사육인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있다는 것이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하고 깨닫는,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그런 정신을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선악을 분별하고 옳은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수 잇는 이런 지식, 말씀의 지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 한가지 그 위에 더 필요했던 것은 단지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슷하게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영적으로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만 영적으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을 직시하면 즉시 말은 유사하고 비슷할지 모르지만 성령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분명한 영적인 분별력, 이것은 고도의 영적인 능력을 교회와 성도들이 소유하고 있을 때 가능해 집니다.
가끔 보면 목사님이 안식년을 갖고 나서 교회가 초토화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안식년에 교회를 비우자 사람들이 오는 것입니다. 설교할 사람을 세워놓고 가지만 일년이나 되니 겉보기에 번지르해서 세워놓았더니 올라가서 말도 되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교인들은 모르니까 가만히 앉아서 듣는데 잘못된 설교일수록 은혜가 됩니다. 그것이 은혜가 되고 완전히 사로잡히는 사람이 나옵니다. 진리로부터 멀리 떠났던 사람들이 오히려 이단적인 사고 방식에 혹해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많은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안식년을 보내주면 교회주위에서 왔다갔다합니다. 그것이 무슨 안식년입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수준 이하래서 그런 것입니다. 누가 올라가서 설교하면 저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이 성도들에게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토대 위에 신앙이 견고하게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옳고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폼을 잡고 여러분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고 해도 아닌 사람과 그런 사람을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종과 자기 스스로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사람들을 구별해 낼 수 있을 정도까지 말씀 안에서 성숙해져가고 있습니까? 영적인 분별력이 높아져가고 향상되어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에는 어린 아이처럼 첨벙대는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이제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의에 속한 것과 불의에 속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어떻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에베소교회만 같았어도 아마도 수많은 교회성장학자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생각하기는 ‘아니야, 아닌 것 같아’라고 간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만천하에 모든 사람이 알도록 드러냈습니다. 이것에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용기가 필요합니다. 참된 것을 파수하고자하는 진리를 향한 불붙는 열심, 거짓된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 거룩한 정렬, 참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욕을 받고 멸시를 받고 사람들의 고소를 당해도 기꺼이 그리할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향해서 죽고, 진리를 위해서 다시 사는 거룩한 진리 파수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을 보십시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우리는 쉬쉬하고 묻어두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말입니다. 거짓된 교리를 유포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쉬쉬하고 묻어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최근에 다락방이라고 정죄를 받아서 이단으로 판명된 교단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은 교단을 하나 창립한다고 합니다. 정말로 말씀에 깊이가 있는 성도들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판단이 섭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노략질 당하거나 피해 당하지 않도록 용기를 가지고 그들의 그릇된 것과 거짓된 것과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교회,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서 육신의 안일과 편안한 것들을 기꺼이 잃어버릴 용기를 가진 교회, 이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더 많이 하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습니다. 우선 저는 에베소교회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주님의 평가에 다다르기 전에 에베소교회가 이런 교회였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면서, 먼저 우리는 에베소교회가 주님 앞에 지적 받은 단점을 발견하기 전에 주님조차도 인정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에베소교회의 귀하고 훌륭한 점들 앞에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에베소교회 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더 중요한 것을 잃었기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게 드러낸 것과 또 내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리라.(계2:2-3)
지난 시간에는 제가 이 에베소 교회의 칭찬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들은 하나님의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칭찬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우리들의 평소에 지닌 이 에베소 고회에 대한 많은 생각이 편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들은 것은 이만한 교회가 세상에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그 수고와 행위와 인내와 순결과 뛰어난 성경 지식, 용기 이런 것까지 소유하는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참는 교회였습니다. 이 에베소 지방에는 핍박과 사상적인 박해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이단적인 사상이 창궐해서 이단적인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는 복음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난을 많이 받게 마련입니다. 사실 물리적인 박해도 많이 힘들지만 그것보다도 고도로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박해 문화적인 박해입니다. 저는 직장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상사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예전에 데인 적이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휜 사람이 오면 그 회사의 그리스도인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직장에서는 성경 공부나 그러한 일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려고 하면 모이지를 못하게 하니까 점심 시간에 계단에서 모이고 화장실 앞에서 모이고 하여튼 예수 믿는 사람이 모이면 그렇게 훼방을 놓고 박해를 하는 그런 상사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리적인 박해가 아닌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박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불러다가 억지로 술 마시게 하고 일할 때 꼭 주일날 예수 믿는 사람만 불러내어 일 시키는 그런 마음들, 이런 것들이 굉장히 견디기 힘드는 것입니다 바로 에베소 교회의 박해가 그런 종류의 박해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이 에베소 교인들이 잘 참은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박해가 와도 가족들이 박해를 참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해도 참고 또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러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견디었다고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좀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외부적인 환경이 그 자리에 서있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떠밀고 있는데도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에서 우리가 견디는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영적인 좋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가난한 처지에 떨어져 사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시대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순전한 믿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꾸준히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지 마지막에 승리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견뎌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굳게 서서 신앙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믿음뿐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그 믿음에서 흔들어서 떨어트려서 대적하려는 무리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견고해지고 얼마나 든든하게 서서 신앙 생활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라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다만 주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는 참을 수 없고 신앙이 없을 때는 견딜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을 믿음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 때문에 견디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예전에는 믿음이 없어서 쓰러지고 그 환경 속에서 인간성까지 파괴되어 버리는 그런 인생이 살았는데 믿음과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생긴 다음에는 어려움이 생기면 그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고난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모든 기쁨, 신앙의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덕, 이 모든 것들이 견고함 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지키고 그 깨달음대로 살려고 하는 거룩한 의지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작은 바람에 쓰려지는 것을 당연히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쫒아서 살아가는 것이 싫고 힘들기 때문에 시험에 넘어질 만한 바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시험에 쉽게 쓰러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마음의 정함이 없고 좋은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 모든 승리는 견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견고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니까 늘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청교도가 일평생을 진리를 따라 살아간 성도에게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하다고 말하였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최후 승리를 인정받은 사람들의 아랫 입술에는 이빨 자국이 있다고 말입니다. 매순간 순간 신앙 생활을 진지하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장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내키면 하나님을 믿고 마음이 내키면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궁핍하면 와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형통하면 잊어버리는 이런 식의 신앙 생활은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이 신앙 생활이 얼마나 진지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이 없이는 나의 인생에서 결코 성공이 없다라고 하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진지한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밀면 미는대로 욕심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이 모두 견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순간마다 여러분들은 결심으로 이어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매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았으면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리라 그리고 이미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할 때 나를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기까지는 비도 맞고 바람도 맞는 법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이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부지런한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게으른 교회가 아니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요즘 성도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교인들은 시간이 있어도 예배 시간에 늦기가 일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신앙적인 일에 있어서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부지런히 성경책을 펼쳐서 탐구하고 공부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취직시험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루에 13 시간밖에 공부하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는 고시생을 보았습니다. 무엇하려고 이 사람은 그럽니까? 취직자리 하나 얻으려고 합니다. 새벽이면 어린 학생들이 새벽반 다닌다고 돌아다닙니다. 신앙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냅니까? 세속적인 열심과 신앙적인 열심히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산다는 이야기는 다 매일 듣는 이야기입니다. 예배드리고 돌아갈 때는 이번 주는 기도 좀하고 살아야지 성경도 좀 읽고 해야지 그러다가 다음주에 와서는 주여 역시 빈털털이로 왔나이다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고백합니다. 모두 자신 속에 내재하는 죄악된 게으름을 퇴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상에도 지옥이 있습니다. 새벽기도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따듯한 이불 속이 지옥입니다.' 게으름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성도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적도 게으름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처지에 있던지 주님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열심을 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기 위해 열심을 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을 내며 자기를 섬기는 것처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열심을 품는다면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간에 반드시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게으름과 결별하지 않는 부패한 신자들이 삶이 오늘 교회에 얼마나 가득한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발빠르게 달려가고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는 조금의 노력도 들이려고 하지 않는 이 게으른 신자들 말입니다. 이런 태도의 사람들을 어떻게 진실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려면 정말 부지런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예수 믿지 않고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가정과 직장과 이 모든 일에서 그러면서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직장 가서 교회일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직장에서는 충성스럽게 열심히 일을 하여야 합니다. 가정에 가서도 열심히 살고 그 와중에서 열심을 내어서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쓰고 싶은 시간을 다 쓰고 그리고 교회에서 뭐 좀 하자고 하니까 항상 시간이 없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다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려고 하니까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못 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결국 우리의 신앙 생활은 게으른 생활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에 게으른 사람이 자기의 삶에도 게으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은 게으르면서 자기의 생활은 열심을 내고 부지런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일주일 동안 자기의 직장 생활은 너무나 열심히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직장 생활에 몰두하고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피곤을 푸는 데인 줄 알고 느긋하게 기대에서 깊은 졸음에 빠지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교인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에는 그런 교인들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잘 견디고 참고 그리고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한 교회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신 다음에 '그러나 내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러나'라는 말 한마디가 앞의 모든 좋은 것들을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고 하는 것은 접속사가 그 앞에는 장점이 수없이 나오는 데 그러나 뒤에 나오는 단점은 많은 것이 아니라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는 것인데 문제는 칭찬 받은 것이 수없이 많이 있고 뒤에 단점은 하나가 있으니까 어쨌든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단점 하나로 인하여 앞의 장점은 마치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 뒤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실패는 대부분의 신앙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실패하였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잘하여도 어떠한 결정적인 하나를 못하였기 때문에 잘한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빛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잘 안 읽고 예배도 잘 안나오고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런 사람들은 교회 등록은 되었지만 이 사람은 다시 전도를 받아야 할 사람이 지 신자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처럼 행위가 있고 인내가 있고 지식이 있고 수고와 인내와 순결이 있고 그리고 주님 앞에 성실함이 있고 그렇게 많은 것이 있었지만 한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것이 되었는데 그 한가지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자라에 오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보다 못한 교회가 많이 있었지만 에베소 교회를 이 자리에 갖다가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이 일곱 교회 중에 이 에베소 교회가 지적 받고 있는 이 문제가 모든 문제 가운데 으뜸이 되는 문제입니다. 순결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하고 많이 수고함보다도 사랑이 더 중요하고 '너희 이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교회이지만 나에게 책망 받는 것을 기억하면서 너희는 신앙 생활에서 이렇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단다'라고 하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시려고 주님이 가장 먼저 이 에베소 교회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향한 모든 섬김의 뿌리가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사랑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지를 매우 예민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입헌군주국의 왕이나 혹은 뒷방 노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의 호식이나 좋은 것으로 대접하는 것이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결정권을 갖게 하고 사랑하는 자녀나 그의 후손들이 마음을 그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조를 보십시오. 노인들을 모시고 산다고 하지만 제가 본 상당수의 가정은 그냥 노인을 데리고 사는 가정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결정권도 없고 자녀들이 마음도 주지 않고 알아서 자기네들 마음대로 먹을 것도 갖다주고 입을 것도 갖다주는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섬김이 아닙니다. 애정이 담긴 섬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든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2가지를 회복하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는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득 찼던 이 미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고 우리는 강한 반항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은 그런 미움과 심판의 관계가 변화되어서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관계가 되게 하실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은 후에 이제는 세상을 위하거나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실려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가장 커다란 기쁨은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관계에서 마음을 함께 나누는 그런 교제가 있는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주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교제 속에 반드시 흘러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애정을 가진 것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기대하셨던 바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고 그 인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경험하고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 때문에 즐겁고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당신을 사랑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즐거워하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가 있고 사랑이 없는데도 순결하고 사랑이 없는 데도 그렇게 뛰어난 성경지식을 가질 수가 있으면 어떻게 그런 열심을 낼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을 오늘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충만한 사랑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인내와 오기로 버티는 인내는 차이가 있지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증거를 많이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는데도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순결하다기보다도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아도 하나 하나 따지면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감격이 없더라도 성경 지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왜 있을 수가 없겠습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이것을 알고 이렇게 알고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더라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몸서리쳐지는 기사를 몇 일에 한번 씩 보아야 하였습니다. 빌딩 꼭대기에서 기름을 몸에 붓고 자살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신념, 이데올로기 이런 것들이 시킨 것과 사랑이 시킨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마음에 한이 맺혀서 충동적으로 죽는 것과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 자기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얻을 행복을 바라보고 신앙심에서 출발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에서 출발해서 자기를 죽을 자리에 내어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가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신앙 생활을 해 오면서 이렇게 사랑이라는 기초가 없으면서도 순결을 추구하고 경건을 추구하고 인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너희가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순결하다고 말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라고 말하고 나를 위해 충성했다 라고 말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너희를 향해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만든 동기가 무엇이었느냐? 교회 가운데 가장 깨끗한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열심히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느냐? 무엇이냐 그 동기가 무엇이냐 정말 그 속에 나를 향한 사랑이 있었느냐고 물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윤리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에게의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영적인 울림이 그 모든 윤리 도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과 관계가 없이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고 그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쉽게 이야기하면 고도의 바리세인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도덕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더 높은 가치가 되어서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를 받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사는 이유는 세상에서 칭찬 받기 위함이 아니라 혹은 자기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거룩한 하나님을 닮고 싶은 소원이 그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구별된 삶의 동기가 될 때 이것이 참다운 영적 생활에 기반을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순결은 있는데 뿌리가 사랑에 닿지 않았습니다. 용기는 있는데 그 뿌리가 사랑에 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서 판단하는 능력도 있는데 그 뿌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곳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을 보고 범죄한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거룩한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죄를 졌다면 죽이라고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들 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삶이 모든 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원리를 부정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빠진 함정이 이런 함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있고 세속적인 사람이라면 세속에 대한 사람이 있고 어느 쪽 어느 방면으로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의 인격 안에 최대의 사랑이 나라를 향해 바쳐졌다면 여러분들은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마음속의 가장 커다란 사랑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성도들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는 처음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랑 중에서 특별히 이 교회를 책망하는 것은 너희가 처음 사랑, 즉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든지 처음 경험은 우리에게 강하게 입력됩니다. 제가 많은 설교를 지금도 하고 있지만 늘 생각나는 것은 첫 설교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해도 그래도 늘 기억나는 것은 처음 사랑, 처음 자신의 인격 속에 이성에 대한 사랑이 타오를 때 그것이 꺼지더라도 처음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 이렇게 나와도 늘 기억에 나는 것은 처음 교회 오는 날, 처음 은혜를 깊이 받던 날, 어떻게 그 날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을 만났던 기억, 이것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첫사랑은 순수합니다. 사랑에 손익 계산을 하는 법이 없고 그 사랑은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나이가 20이 넘어서 주님을 만나서 회심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주님만 계시면 뭐든지 만족이 되고 충분한 것이 사랑입니다. TV 드라마에서 우리는 자주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의 시련에 부딪혔을 때 산 속에라도 들어가 살려고 결심하는 장면을 보게됩니다. 그런데 혼자 산 속에 들어가 살라고 하면 살겠습니까? 혼자 산 속에 들어가서 이름 없는 연인이 되라고 하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가서 농사나 짖고 살라고 하면 살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고백 할 수 있는 용기와 순수함이 바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첫사랑에는 이런 것들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런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처음 죄 가운데 살고 마술하는 고장에 태어나서 참다운 생명의 길이 무엇이고 그리고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이 누구시고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주님의 참 사랑을 복음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과 같이 더러운 인간 자신을 주님을 찾지도 않고 주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없는 그런 병들어 버린 인간을 주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먼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때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일 받으니까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해주거나 베풀어주지 않아도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부패한 인간은 그럴 힘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순수한 처음 사랑을 갖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그분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 지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또 다른 사랑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사랑이 없고 오직 세상에 대한 사랑밖에 없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깨닫고 나니까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빼앗아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복음을 진리를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 체험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생겨나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 이 때에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쁜 삶을 살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면서 신앙 생활 못하는 이유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건강이 나빠서라든지 여건이 안 좋다고 환경이 안 좋다고 말하는데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하면 사랑이 없어서 너무 힘들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집에서 여보 뭐도 떨어지고 뭐도 없고 고지서도 날라오고 라고 말한다면 결국은 돈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환경도 영향을 주지만 사랑이 충만하고 가득 차니까 그런 것들이 걸림은 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를 못 펴고 신앙 생활하는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면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그런 깊은 사랑에 빠지는 데 공통점은 열병처럼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속에 가득 있으면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은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면서 사니까 우리의 삶을 이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기던 것을 하찮게 여기고 이전에 하찮게 여기던 것을 귀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참다운 사랑이 동기가 될 때 비로소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교회에 오기 싫은데 억지로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음 주에는 교회에 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나오는 것이 더욱 칭찬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서 교회에 안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랑의 마음을 아예 다시 찾을 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의무에 얽매어서 신앙 생활을 하지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의무적으로 성격을 읽고 의무적으로 기도하고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 나오지만 그것으로 늘 깨닫는 것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여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살아가는 모든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신앙 생활을 우리가 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에베소 교회 뿐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처음 사랑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주님과의 진실한 연합이 있었던 처음 사랑의 때를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시고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격과 그리고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큰사랑을 경험하게 해준 그 자비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여러분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참 사랑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혹은 믿어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이 없이 형식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회개과 함께 하나님 앞에 한 신자의 신앙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와서 하나님 앞에 깊이 새 사랑이 되고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기 전에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런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싶으시면 하나님의 얼마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셨는지 추억하는 사람들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여러분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예수 믿도록 데려 오셨습니까? 거미줄과 같은 신앙이라도 붙들고 살아오도록 만들어 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그 때 세상에서 굶주려 산 사람, 살아도 산 것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완전히 병들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건져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만들고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제 고사리 손을 잡고 폭풍이 일고 시련의 바람이 부는 길을 하나님이 데리고 인도하신 것입니까? 여러분 중에 이제껏 나는 혼자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여기 모인 사람 중에 하나님의 사랑 없이 나 혼자 버티면서 살아온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 일 뿐이지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는 그렇게 살았던 적이 있었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모르던 그 때에도 하나님은 택하신 여러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손을 붙들고 여러분들의 인생길을 응시하며 걸어오신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얼마 안되서 드린 기도가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내 인생에 일어났던 불행한 일들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온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를 믿고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과거의 어둡던 인생에 불이 들어오고 환하게 불이 켜지고 나니까 깨달아지는 것이 바로 과거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 걸어올 수 있도록 만드는 징검다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르던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버려 두셨다고 말할 수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저한테만 미친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미친 것입니다. 그러다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도 모르고, 어린 아이가 엄마손 잡고 가다가 유괴범이 사탕 주면서 유혹하면 어떻게든 엄마 손을 뿌리치고 그 아저씨를 따라가려는 그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생활해온 사람들을 도적 맞지 않고 끝까지 지켜 오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데려 오셨습니다.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허기지고 굶주릴 때 가슴을 풀어 헤쳐서 젖을 먹이시면서 여러분들을 이끌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말고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준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사람들의 사랑은 기껏해야 눈물로 쓴 편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피로 쓴 편지입니다. 십자가에게 주님의 피는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바로 이 사랑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흘린 이 고결한 사랑에 감동을 받아서 이 사랑으로 인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에베소 교회에게 회복하라고 하시는 처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 감격이 있습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신앙 생활이 다듬어지고 이제는 제법 단정하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것도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최소한 기본 신앙은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애정도 없이 그리고 반듯하게,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왜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알려 주십니까? 왜 넘치는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함을 알도록 여러분들을 이끌어주고 죄악을 지적하고 불순종한 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여러분들에게 알게 하시고 충격을 주셔서 죄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순결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도덕적인 사람 만들어 이 세상에서 칭찬 받는 사람 만들기 위해서 입니까? 이것 모두는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일으키시려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서도 옳은 길을 몰라서 바른길을 못 가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까봐 여러분들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변화시키신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향한 피로 써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것, 바로 이 신앙의 출발이 감동입니다. 감동을 받고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대에 그 때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순종이 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 솟아나는 순결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리고 심령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진실한 인내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팔아서 지식을 사겠습니까? 사랑을 팔아서 순결을 사겠습니까? 사랑을 팔아서 칭찬을 사겠습니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베소 교회는 많은 장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을 때 촛대를 옮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엄밀하게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늘 하나님을 향한 감격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많이 아는 것과 십자가에 관해서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게 사랑이 있는 것과 사랑에 관해서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불타는 마음을 가진 이런 신앙 생활이 순결해지고 인내하고 복음을 전하고 많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가 될 때 우리는 이런 에베소 교회가 실패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왜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늘 간직하지 못하는지 하나님께서 연약할 때나 강할 때나 우리의 손을 이끌어 오셔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 하나님의 교회로의 인도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어떻게 보이셨는지를 진리로 다듬어서 여기까지 서게 하셨는지 생각하고 이런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을 부어주셔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첫사랑을 회복하는 길Ⅰ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지난 시간에 그 모든 것들이 에베소교회에는 훌륭한 장점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라고 하는 말 한마디가 모두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장점이 된 것은 수없이 많은 여러 가지였지만 뛰어난 장점을 일순간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처음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을 이루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을 갖는다라는 말을 사랑의 측면에서 말하면 일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서 비로소 처음 진정으로 자기를 그렇게 사랑한 분을 알게 된 것이고 또 신앙생활은 자기를 사랑한 그 분을 알아서 이제 자기도 그 분을 사랑하면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첫사랑을 경험할 때 그 특징은 마음에 없는 행동은 한 적이 없습니다. 신앙이 좀 들어가고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면 마음에 없어도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마음에 없는 봉사도 하게 되지만 신앙이 시작될 때 마음에 없는 것은 우리가 누가 무서워서 하겠습니까.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올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았던 모든 삶들은 대부분 모두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진정한 모든 섬김과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동기가 되어 있어서 우리의 신앙생활 갈피갈피 구석구석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녹아들었단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바로 첫사랑의 경험에 너무나 생생하고 신비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이 갓 넘은 그 해에 주님을 만나고 처음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막연한 의무감에서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처음사랑이 마음에 들어오고 난 후 모든 것이 신비로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슬퍼하시는 것도 느껴집니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릴 때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최선의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먹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져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양보할 수 없는 신앙생활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랑이 모든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거나 신자로서 독특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보다도 그 위에 가장 뛰어난 덕목이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있는 곳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받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처음사랑이 있을 그 때에는 그 속에 마음이 함께 담겨져서 하나님께 드려진 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사랑을 경험했을 때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진실되고 참되게 느끼도록 만들어줍니다. 헌금을 해도 정성껏 하나님 앞에 아무도 모르게 헌금을 받치고 돌아올 때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고 나면 그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 그러한 마음, 은혜, 사랑을 우리의 마음 속에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린 들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겠는가. 하나님이 주리신 들 인간에게 짐승의 피나 고기, 곡식을 구하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고 인간이 누리고 있는 모든 물질과 하나님 앞에 받칠까 말까 망설이고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주시고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어서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고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기부 받길 원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주나,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 앞에 우리 인간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께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자기의 마음이 드려지는 삶을 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받쳐질 그 때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사랑을 받치는 것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신앙 생활의 전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 생활의 연조가 깊어지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느 듯 몰랐던 성경도 알게 되었고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도 여러모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제법 어디 가서 예수 믿는 사람다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표를 내는 방법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주일을 지키는 기본적인 개념도 서 있으니 많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다워지고 신자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예수 믿는 표를 낼 수 있을 만큼 변해가고 있지만 무엇인가 우리 속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눈앞에 구별된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표도 같이 자라고 있는지 봐야 됩니다.
오늘날 에베소 교회가 이런 점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행위가 있고, 인내가 있고, 수고가 있고, 순결이 있고, 도덕적인 불결을 멀리하고, 말씀을 아는 지식이 있는 것을 비난하거나 조롱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보다는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인내하고, 이 모든 것들을 행하고, 이 모든 것들을 지키고, 이 모든 것들을 소유하면서 그 대가로 만약에 나를 향한 진실하고 참된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부끄러워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버리신 그 큰사랑을 은혜로 입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그 피로 속죄함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주님이 찢으신 살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휘장이 찢어졌고 주님이 자기의 옆구리를 찢어서 흘리신 그 피를 뿌리셨기 때문에 우리 같이 더러운 인간이 맨발로 그 핏길을 걸어서 아버지 하나님 앞, 그 보좌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은혜와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주님의 것이고 원래 우리의 소유였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마음입니다. 마음의 주인은 우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분의 마음의 주인은 여러 분 혼자입니다. 누구의 마음도 아니고 누구도 여러 분들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 분의 마음의 지배권은 여러 분 자신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두 받치는 신앙 생활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드리는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건조하기 이를 때 없는 신앙 생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이 지나도 자신의 마음 속에 한번도 나를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인지 말할 수 있습니까.
에베소교회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도 훌륭하고, 인내도 있고, 수고도 있고, 순결함도 있는 교회가 그렇게 결정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해나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이런 처음사랑의 때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우리도 주님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입만 열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자랑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의 속편 한 권을 탈고해서 출판사에 주었습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그 황홀한 동산에서)였습니다. 그 글에 제가 하나님을 새롭게 깊이 만난 때의 일을 적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사랑이었습니다.
신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매일 성경을 열면 하나님께서 그 열린 성경 위에 금싸라기와 같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에 대해서 온 영혼이 반응을 했습니다. 찬송을 정말 깊이 있게 부르고 찬송 속에서 깊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이 그 때였습니다.
연구실 창가에 혼자 앉아서 찬송을 부르다가 그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베푸신 사랑, 왜 하나님은 이 크고 놀라운 사랑, 그리고 비할 데 없는 귀하고 놀라운 은혜를 마치 나 한사람에게만 알려주시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귀하고 놀라운 은혜를 어디에다 예비하셨다가 이제야 나에게 펼쳐 보여주시는가 했습니다. 기도하면 한없는 달콤함 속에 빠졌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나면 세 시간, 네 시간 흘러가도 아직 하고 싶은 사연은 수없이 쌓였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주님의 참 크고 놀라운 사랑이 내 마음 속에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드리고 싶었고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은 마음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탈고를 하면서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저는 그 황홀한 동산에서 한없이 뛰어 놀았습니다. 친구들은 없지만 거긴 친구보다 좋은 주님이 계셨습니다. 저는 거기서 주님이 좋아서 뛰어 놀았고 주님은 당신을 좋아하며 뛰어 노는 저를 보며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즐거운 동상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참된 사랑의 빛 없이 살아왔던 지난 어두운 신앙의 세월들이 너무나 서러워서 울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어두움 속에서 빛을 주셔서 생명의 은혜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울었습니다.
이 사랑은 그 위대한 힘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속박과 제한과 한계를 떨쳐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진정한 반응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에베소교회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생기는 것들입니다. 훈련을 받아도 생기는 것들입니다. 많이 공부하면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훈련받고 공부하고 사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교회가 그런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눈물 없이 예배드릴 수 없고 감격 없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는 그런 시절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것에는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드러난 것은 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그런 사랑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는 주님의 눈앞에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든지 지금, 종교적인 형식은 남아있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사라져 버린 그 현재가 지금 예수님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분들의 신앙 생활은 어떤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고 자비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우리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사정을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시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는 나를 버렸다. 너는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처음사랑을 버렸다. 너는 내게서 떠났다.” 떠난 사람은 떠날 만한 이유가 있고 버린 사람은 버릴 수밖에 없는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고 예리하게 에베소교회를 정돈하셨습니다. 너희는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이웃과 지체들을 향한 사랑도 앗아갔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나뉘어질 수 없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 분들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 뿌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붙어있지 않다면 모두 세상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모든 범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거기에 뿌리박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의무적으로 사랑해야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사람을 향한 사랑도 함께 상실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과의 파괴된 관계는 사람들과의 갈라진 관계로 나타나고 갈라진 사람들과의 수많은 관계들은 조각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반영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어디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을 수선해야 되겠는가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차고 넘쳤을 때는 사랑하는 지체들간에 뜨거운 애정이 있었습니다. 함께 만나게 하셔서 함께 신앙 생활하게 하시고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시고 내가 바로 이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어서 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우리라 일컬음을 받게 하신 공동체를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노래했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 분 모두가 간증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 분들의 마음에 처음사랑이 충만하던 그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반드시 그 사랑 한가운데에 여러 분들이 있었던 그 때 주위에는 여러 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받고도 무엇을 주고도 바꾸기 싫은 교회가 있었고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 분들이 오늘 이 교회가 사랑스러워지지 않고 여러 분과 함께 신앙 생활하고 있는 지체들이 귀하고 사랑스러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여러 분들의 사랑에 이상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지체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고 무엇 때문에 교회 속에서 처음사랑을 함께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분의 이유가 타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에베소교회가 왜 처음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에베소교회 안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어려운 일들이 있었고, 사랑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주님은 한마디도 묻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게 된 상태만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 가진 속성 때문입니다.
사랑이 참된 사랑이면 그 사랑은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하고야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분들은 오늘 이 성경을 보면서 이런 것들을 느끼지 않습니까. 여러 분들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 분, 손님처럼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시간 강사처럼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섬기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나 같은 죄인이, 이 쓸데없는 인생이, 하나님의 교회의 한 회원이 되고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형제라, 자매라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이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하는 이러한 마음과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제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저는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이 교회가 여러 분들이 이 교회를 사랑하면 이 교회가 잘 될 것이라는 목회적인 소망 때문에 여러 분들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 분들이 사랑하지 않아도 여러 분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분들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시면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분들이 옛날에 쌓았던 첫사랑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주십니다. 여러 분들이 비워 놓은 의자에 다른 사람이 와서 앉고 여러 분들이 마다한 사랑하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사랑합니다. 신앙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하나님을 향한 참된 교재를 쌓아갑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에 의해서 혹은 다수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기 전까지는 건재하는 여호와의 교회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시 하나님이 피로 값을 주고 세운 교회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분 가운데 건져주신 그리스도 예수만을 사랑하면서 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받은 자들과 함께 사랑과 은혜를 나누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그가 하나님을 향해 냉담해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냉담해지고,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들을 향해 차가운 마음 굳어진 피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할 때 그렇게 생활함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전하는 이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고 계십니다. 저는 지체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교회의 불쌍함보다 그렇게 돌이켜 지체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함께 회복되어져 가야 할 지체들의 영혼의 상태를 보면서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세인과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외모는 같았습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기만 한다면 예수님이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을 그들이 가르치는 성경 때문에 한번도 비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놀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르치는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비난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또 그들이 행하는 행위를 비난하신 적도 없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예수님이 부인하셨습니까. 백화와 금채와 ? 회향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예수님이 부인하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이 해석한 성경 해석도 비난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삶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무엇을 비난하신 것입니까. 그것이 마음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중심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랑을 담은 그 마음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너희들이 만약에 그렇게 십일조를 받치고 그렇게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사는 것 때문에 너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받쳐지지 않고 있는 그것을 볼 수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너희들의 의롭고 거룩한 행위가 오히려 재앙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똑 같은 선행인데 마음이 없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 선행을 행하면 행할수록 그것은 외식이 되어버리고 주님의 진노를 쌓았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제자들 주님을 향한 진실한 애정이 있는 제자들이 섬기는 그것은 섬기면 섬길수록 상급을 약속 받는 진실한 봉사였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얼마나 성취했느냐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승패를 좌우하는 것처럼 평가받는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목회자지만 목회자들 속에서도 그렇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 성공보다 고귀하고 성취보다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우리가 소유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도 사라지고 성취도 끝납니다. 소망은 성취되면 끝나고 믿음은 바라던 것들이 나타나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 분, 정말 감격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차갑고 냉담한 방식으로밖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때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보십시오. 그 분이 여러 분들에게 찾아오시고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여러 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어둠 속에 헤매고 있을 때마다 수시로 나타나고 찾아오시는 주님이 차가운 피를 가지고 나타나신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우리가 그 앞에 나왔을 때 그 분은 우리를 뜨거운 당신의 피의 샘에 적셨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그 분의 붉은 피와 그 분의 뜨거운 피를 불어넣어 주시고 그 분의 불붙는 애정이 우리의 마음 속에 불붙여 주심으로 차가운 가슴에 불을 지피시고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횃불을 밝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깨닫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한없는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일기장이고 우리의 인생의 이력입니다. 허물과 고통과 범죄밖에는 우리에게 당한 것이 없지만 주님이 우리를 향한 갚으심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어린 아이이면서도 어른 흉내를 내길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나이가 들어 성숙할 때는 성숙한 모습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만 마음 속에 흐르는 사랑의 마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저는 게르너라고 하는 예술가가 새긴 판화를 좋아합니다. 그 사람의 작품을 제가 산 것만 세 개정도 됩니다. 투박한 목판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고 중년은 훨씬 되어 보이는 약간은 나이든 어느 남 성도가 못 박혀 가시면류관 쓰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장면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선 하나 하나가 가슴에 참 깊이 다가옵니다. 여러 분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끌어안은 늙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왼쪽 뺨에 자기의 왼쪽 이마를 맞대고 흐느껴 우는 장면입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끌립니다. 그 판화 밑에는 독일어로 이런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여 나의 목자 나의 생명 샘
나의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되시며
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제 것이옵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분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 가는 기쁨을 주님이 누구에게 주십니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도 저를 사랑하여 저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밀려올 때는 그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이 언제나 우리에게 넘쳤습니다. 올 때는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교회에 오지만 말씀을 깨닫고 돌아갈 때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신성한 결심이 우리에게 언제나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얽매였던 죄악에서 풀려 나오는 놀라운 신비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신앙생활하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의무에 불과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은 가지고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보십시오. 예수 안 믿으면 큰일나고 구원받으면 금세 발 복을 할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보면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 분은 정말 복 받은 구원의 신앙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정말 시시할 정도로 초라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떠밀면 떠미는 대로 밀리고 마귀가 유혹하면 유혹하는 대로 끌려가고 죄 가운데 살아가고 이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죄악을 친구 삼아서 동침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 분들의 신앙 생활을 점검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앙의 모든 기준을 여러 분들이 이제껏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많이 알고, 무엇을 많이 체험하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신앙인으로 만든다고 하는 그릇된 사고방식과 결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시면 주님 앞에 대답해야 되는 것입니다. 네가 처음사랑을 가지고 지체들을 사랑하느냐 물으시면 주님, 사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둘러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분들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지 하나님은 여러 분이 변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오직 그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실패했을지라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숙명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을 때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고 고백하는 것과 네가 과거에 나를 버린 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면 할 말은 없지만 많은 실패와 도덕적 허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사실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과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던지, 싫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라고 둘 중에 하나밖에는 대답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같은 사랑을 잃어버린, 사실상 실패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자비롭게도 회복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만약 이 회복의 길을 알려두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을 읽기도 전에 2장에서 덮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계하라. 돌이켜 처음행위를 갖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떨어진 것을 말씀하십니다. 떨어진 것,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은 한번 잃어버리면 숙명처럼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처음사랑을 여러 분들이 아무리 강력하게 느꼈다고 하더라도 신앙 생활이 추억만으로는 안됩니다. 옛날에는 내가 승리했는데 지금 죄의 권세의 발아래 목이 밟혔는데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처지만 불행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현재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처음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만 사랑하고 그 후에는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저는 바울의 생애를 읽어가면서 숨길 수 없는 분명한 것 하나는 시련과 고난이 많은 인생을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마치 혜성이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더 강렬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고난과 시련이 가득한 세상을 달리면 달릴수록 바울의 마음 속에는 굳이 처음사랑을 회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날마다 새로운 사랑이 불붙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새로운 사랑, 새로운 은혜, 말할 수 없이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사도의 마음 속에 불붙어서 그로 하여금 추억을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임하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신앙생활이며 살아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에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랑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 분들이 무엇인가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분들의 신앙 생활에 기쁘고 좋은 날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 구원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그 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이제 하나님이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것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다고 했는데 옛날에 언제 한번 살아난 옛사랑의 추억이나 먹고 이제는 실패를 친구 삼아서 마지못해서 교회 다니고 코가 꿰어서 억지로 신앙 생활하면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고통을 또 한 몸에 짊어지고 자유롭게 하셨는데도 죄의 멍에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비천하고 불쌍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구원이 기쁘고 즐겁다고 찬송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에는 있지도 않으면서 가사에 나오는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회칠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위장하고 거짓말하고 자기를 꾸미면서 그럴 듯하게 보여서 사람에게 옳지 않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기보다는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죄인에게는 훨씬 소망적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떨어진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떨어진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다가 떨어진 곳이 어디입니까. 어느 지점에서 놓쳤습니까.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 분들의 마음 속에 들어오고 그 사랑이 여러 분들을 어거할 때 여러 분들도 삶의 갈피갈피에 사랑이 배어있었던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저는 가끔 그런 것을 봅니다. 새롭게 은혜 받은 지체들이 집이 멀어도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새벽기도에 나와서 앞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글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성전에서 가슴을 두드리던 세리의 기도가 생각나게 하는 기도를 드릴 때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느낍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어디서, 왜 떨어졌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지금 살기가 너무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회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자신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지만 이제는 회복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이 신앙 생활이 고통스럽다거나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므로 주님이 마음 아파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참다운 믿음의 길을 걷지 않는 나를 통한 성찰이 아니라 단지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니까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어도 그것이 소중하고 고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이 서럽지도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진리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의 맛도 모르고 참다운 복음의 감격도 없이 살아가고 죽은 사람처럼 살아갔던 그 수많은 날들이 서럽고 지겹지도 않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세상에서 타향살이 같은 인생을 삽니다. 주님이 주신 아름다운 교회에서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하고 살아야하는데 매일 교회에 다녀도 낯선 손님처럼 다니지 않습니까. 이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신앙 생활이 서럽지도 원통하지도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공로는 없지만 회복을 주시면 이전보다도 더 빨리 어디선가 ‘휙’ 떨어져버리고 다시 고통스런 옛 자리로 돌아가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바 개가 토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돼지가 그 씻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눕는 그것이 실패와 회복을 반복하면서 살아온 우리의 신앙 생활이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 생활을 가지고 성도가 되고 이름 값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숙명적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수께끼 같이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쉽게 얘기하면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적이 없으니 결국 우리가 죄가 좋아서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첫사랑이 날아간 것입니다. 생각을 한다고 해봐야 기껏 생각을 끝까지 한 뒤 마지막에 직면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버린 그 지점을 찾아내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쾌합니까. 즐거운 일입니까. 좋은 일입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고, 은혜 주시는 일을 좋아하십니다.
만약 누군가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나 아무도 모르는 우리 치부를 드러내고, 우리의 과거를 말하고 다닌다면 여러 분들과 저는 그를 죽여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기 때문에 죽여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죽여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실패를 마주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서 하나님을 버린 사실을 인정하고 그 앞에 하나님과 마주해서 고백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하게 회복도 안됩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습니다. 영적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지 몇 년이 되셨습니까. 한번 손꼽아 보십시오. 여러 분들 가운데는 십 년이 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해결이 되는 때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해결이 되었습니까. 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도 공소시효가 있는데 그저 세월이 흘러가면 하나님은 기억이 희미해지고 어영부영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죽었고 죄는 이겼습니다. 우리는 그러는 동안에도 종교적인 모습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직분도 높아지고 교회 후배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교사도 되고, 구역장도 되고, 영혼들을 가르치는 선생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들 첫사랑을 버렸지. 너희들은 엄청난 것을 버린 거다. 차라리 그것을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고 앞에 있는 것이 없었으면 너희들은 더 좋았다. 앞에 있는 것은 가지고 있고 그것은 버렸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게 생명적인 것을 버렸지만 나는 너희에게 회복의 길을 주었다. 너는 생각하라. 고이 생각하라.” 오랜 세월을 실패와 어둠 소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오는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알고 그 처음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기도하고 안타까워했습니까.
그러나 여러 분 이젠 그러지 마십시오. 그 대신 하나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서 제가 어디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내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만약 보여만 주신다면 제가 발가벗고 주님이 보여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이 옳았습니다 하고 기도 한번 드리는 것이 옛 추억에 연연해하며 백 날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나중 사랑은 첫사랑보다 더 크고 놀라울 수 있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크게 두 번 만났는데 처음이 첫사랑이고 두 번째가 두 번째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사랑 백 개를 주고도 두 번째 사랑과 못 바꿉니다. 나의 나된 것은 두 번째 사랑 때였습니다. 두 번째 사랑이 나는 사로잡았을 때 나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나에게 첫사랑을 돌려준다고 해도 나는 그것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만난 하나님이 너무나 크고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성경을 볼 때마다 이것이 시간적인 첫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는 마음을 굉장히 많이 갖게 합니다. 이것은 단지 기계적인 시간적인 첫사랑이 아니라 내 가슴에 가장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새기시는 그 최대의 감격일 때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 분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가는 날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습니까. 저는 이 시간도 이런 하나님의 참사랑의 빛을 잃어버리고 의무감에서 허허로운 신앙 생활, 마치 먼지가 일어나는 신작로를 코를 틀어막고 걸어가는 것 같이 탁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마음 깊이 흐르는 연민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삶 전체를 통해 우리의 힘을 다해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해서 자신의 몸을 조각조각 찢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듭나는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따로 새롭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넣어주십니다. 그래서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할 때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 받으실 그 때만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프로그램을 바꿔 놓으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아가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미 그 마음의 고통과 영혼의 어둠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분의 피 값을 보면서,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치룬 한량없는 그 고난과 어려움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우리 같은 사람과 다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모두 흘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엊그제 읽은 로이드 존슨 목사님의 설교집이 생각납니다. 목사님은 웨스트 민스튼 체플에 있는 교인들에게 설교 중에 말했습니다. 여러 분, 여러 분 중에 누가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미친 짓입니다. 여러 분들은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럴듯한 말로 유혹하고 말해도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있는 분이 계시거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 버리십시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고 지금 저의 설교를 듣고 있는 누구 한 사람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너무나 잘 알고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차가운 신앙 생활하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가장 고통스런 것이 사랑 없이 형식에 매여서 종교생활 할 수밖에 없는 당신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는 것만큼 하나님에게는 고통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행했습니까.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당한 대접을 하셨고, 언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근거 없이 이유 없이 멀리하신 적이 있습니까. 죄 가운데 갈 때도 거룩한 그 분이 죄 가운데까지 쫓아오셨습니다. 불 가운데를 지나갈 때 우리가 주님의 손을 마다하는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돌맹이같이 단단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고 이 전에 많은 죄악들을 도말하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어도 주님의 이 성품은 동일합니다. 여전히 주님의 이 성품은 우리를 부르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 아래로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이러한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변명을 찾고 구실을 찾는 것만큼, 열심을 내는 것만큼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식어지게 되었는가. 왜 내 마음에 흐르던 보혈의 뜨거운 피는 사라지고 나는 이제 공허한 가슴을 안고 신앙 생활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데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받쳐야 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 누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비난해도 주님이 나를 옳다하시면 옳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나는 차라리 그 버림받는 대가로 주님의 사랑을 되찾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여러 분들을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나게 해준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피해 다니고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멀어지는 일도 신물이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 피곤한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여러 분들을 사랑하지 아니 하시면 주님은 버려 두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도 끝나고 신앙과 세속 사이의 갈등도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고민도 종식되고 마지막 심판을 위해서 살찌면서 그 심판에 적합한 자로 준비되는 것이 바로 버림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분들이 어떤 형편에 처했는지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분 자신의 힘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 사랑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압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몸부림쳐 보십시오. 언제나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여러 분들은 그 처음사랑을 되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릴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잃어버릴 수 있었지만 찾을 때는 전폭적인 하나님의 도움, 전폭적인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 없이는 여러 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나날들이 고통 가운데 때로는 이 고통을 그냥 끌어한고 못 다한 하나님의 관계에서의 사연을 가슴에 묻어둔 채 인생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 분, 저는 여러 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받치는 사랑을 한번도 하지 못하고 그 사랑의 고백이 담겨진 우리의 삶을 받쳐본 적도 없이 그렇게 인생을 마감한다면 우리가 태어나 살았던 이 어두운 날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픈 날들이 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구속해주시고 주님 사랑하고 한번 살아보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셨는데 그 많은 생명의 날 동안 우리는 주님 앞에 미운 물건이 되고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거치는 것이 되어서 그렇게 인생이 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알 수 없는 불꽃 같은 사랑을 안고 고난과 시련이 가득한 세상에서 왜 그렇게?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사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우리들이 살다가 가야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분 이 생각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여러 분 호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람이 불지 않는 날 호수는 풍경을 보지 않아도 호수 위에 어린 주변의 나무와 길과 구름 심지어 날아가는 새까지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 분 바람이 불고 물결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바로 호숫가에 서 있는 빌딩도 수면 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의 편견과 자기 중심적인 변명과 이런 사고방식들을 그대로 늘어놓고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자기 앞에 무릎 꿇고 그대가 옳다고 인정해 주면서 그때서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깨달으려고 하는 그 겸비하지 못한 마음이 모든 생각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 생각,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오늘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그것은 겸비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올바르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군가를 용서하라고 누군가와 화해하라고,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즉각적으로 여러 분에게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라, 즉각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이 선행을 베풀라고 하시는 것이고 주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불쌍했으면 나에게 선행을 베풀라고 할까 하는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 하는 것들이 떠오릅니까.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 그 하나님의 명령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네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데 차라리 내가 입술을 깨물면 깨물었지 내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혼나면 혼났지 내가 너는 용서할 수 없어.’이것이 인간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겸비한 마음 없이는 누구도 자기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깊이 낮아지고 겸비해지는 길을 우리들이 들어서야만 되는 것입니다.
5. 첫사랑을 회복하는 길Ⅱ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中)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능 속에서 나타나는데 제일 먼저 어디서 떨어지는 것을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떨어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참 좋지만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면 떨어지는 적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처음 사랑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돌이킴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돌이키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맏음을 가지고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과 더불어 싸움하며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도 아시기 때문에 돌이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에베소 교회와 같이 모든 면에 있어서 뛰어났지만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늘 주앞에 정죄받고 있는 이 교회조차도 주님께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로 오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본 것은 회개에 있어서 지성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어느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온전한 신앙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온전하지 못한 것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행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성찰하고 생각하는 일들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격정적인 감정의 회개가 있기 전에 먼저 중요한 것은 정직하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를 가지고 바른 자리에 우리가 서 있을 때 하나님 다시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잃어버린 기쁨도 다시 찾고 잃어버린 은혜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떨어졌고 따라서 어느 자리로 우리들이 돌아가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거나 무감각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죄가 많아서 라기 보다는 하나님앞에 깨달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와 우리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게하는 모든 회개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제일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가기 시작하면 제일먼저 반응이 오는 곳이 어디냐하면 우리의 행동이나 우리의 마음이나 또 이런 곳이 아니라 제일 먼저 반응이 오는 곳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이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각을 갖게 되는 이러한 작용들이 샘각하게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그렇게 잘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말씀, 그렇게 꿀과 같이 달게 자기의 마음에 다가오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둔해 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동안에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회복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맛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몸이 아프던지 병이 들게 되면 자리에 눕기 전에 제일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음식이 맛이 없습니다. 지금은 그런 분 안계시겠지만 옛날에 담배 많이 피워 보신분들 있쟎아요. 그것이 아주 기가 막히게 건강에 대한 척도가 됩니다. 몸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면 담배 맛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회복이 되면 다시 변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가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제일 먼저 영혼의 회복을 염원하게 될 때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맛이 살아납니다. 제가 그것을 경험한 것이 언제인가 하면 결혼하기 전에 처음 회심을 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때 신앙은 냄비같이 뜨겁기만 하고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어떻게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뜨겁고 진실했지만 몇 년 가지 않았습니다. 푸르륵- 식어지고 다시 깊은 영혼의 어두움에 빠졌는데 그로부터 몇 년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부끄러운 날들이 흘러간 후에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우리를 불러낼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한참 곤고하고 세례 받고 한 4-5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일주일에 몇 번씩 술 먹고, 담배피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돌아다니고 쓸데없이 방황하고 그랬지요. 그러면서도 주일날 교회와서 어린이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토요일날 술을 먹고 잔뜩 취해서 누워도 일요일은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안가면 설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다시 또 담배 한대 피우고 양치질을 하고 그리고 은단 씹으면서 가는 겁니다.
그 입에서 무슨 설교가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회개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나는 회개를 안하는데 그것을 들은 아이는 회개를 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얼굴이 뜨끈뜨끈합니다. 그때 왜 나 같은 사람을 설교를 시키셨는지 우리 목사님도 이해가 안가요. 하긴 그때 잡혔으니까 교회를 못떠났지요. 몇번 빼먹으려고 그랬는데 양심이 허락을 안해요. 왜냐하면 내가 없으면 예배를 못드리는데 정말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놀러 캠핑을 가도 주일날 아침에는 왔습니다. 주일학교 예배 인도하러 왔습니다. 물론 그 전날은 술 잔뜩 먹고 텐트에서 자고 새벽에는 일어나서 예배드리러 간다고 그러고 올라오고 그랬습니다. 정말 연구대상 이었지요. 연구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지만 연구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사는데 무슨 기쁨이 있겠어요. 그렇죠?
직장에 다니는데 누가 모임이 있다고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야!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는 것도 버거워 죽겠는데 무슨 밥벌어 먹으려고 직장에 나와서 거기 또 예배를 드리러 가냐? 그랬는데 그때 워낙 곤고했어요. 가을이었는데 그래서 제가 가을을 좋아해요. 가을에는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이끌려 갔습니다. 갔는데 컴컴한 창고에 앉아서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의자도 없이 종이 뭉치 위에 쭈구리고 앉았는데 되게 궁상스럽더라구요. 그리구 쭈구리고 앉아가지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을 부르고 그 다음에 거기에 형제 한 사람이 있었는데 형제가 ccc 교제를 가지고 인도를 하더라구요.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한번, 두번 나가기 시작하는데 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말씀을 배우고 하나 하나 깨달아 가면서 마음속에서 "나도 성경을 읽고 싶다" 라는 마음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솔직이 말해서 그때 교회 다니는데, 저는 우리 교회 와서 설교 안듣고 딴청 부리는거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5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편도 설교가 기억에 남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뭔가 들어 봐야지 그러는데 다 듣고 나면 안개 속을 헤매는것 같아요.
그랬는데 거기 앉아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구원의 도리부터 배워 나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입맛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식당에서 밥먹는 시간이 아깝고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기로 제의를 했어요. 사무실에서 12시를 기다리고 있다가 땡! 치면 모이면 12시 5분이면 만나요. 그래서 25분 동안 도시락을 먹고 그리고 30분동안 성경 공부를 하는데 입맛이 살아나는 겁니다. 도시락 먹는 입맛도 살아나고 말씀을 듣는 입맛도 살아났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말랐는지 56키로그램에 키가 1미터 74센치 허리가 27이었습니다. 무슨 전설 듣는 것 같습니까? 진짜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밥을 못 먹는 겁니다. 말씀에 의한 입맛이 살아나고 은혜가 내 마음에 들어오고 평강이 오기 시작하니까 입맛이 살아나면서 급격히 건강이 좋아지는 겁니다. 지금은 얼마냐고? 묻지마요. 건강이 그렇게 좋아져요.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 확실히 느낀 것은 사람이 회복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나는 것은 동일합니다. 제 한번의 경험이 아니라 지체들 속에서도 그런 경험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오셔서 "목사님! 저는 지금 영적인 상태가 이렇거든요? 저렇거든요?" 이야기하지 않아도 대게 90% 정도는 알아요. 예배 시간에 만나면 아! 저 사람은 지금 살아나고 있구나!, 맛이 가기 시작하는구나. 그 사람의 삶을 내가 다 모르지만 또 자기가 다 보여주려고 하겠어요?
그렇지만 뭘 보면 아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잃어버린 미각이 회복되고 있는지 사라져가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드러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교회의 존재 그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왔는데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열심을 내라던지 아니면 죽도록 충성을 하라던지 누군가 나를 위해 서 순교를 하라던지 그렇게 말씀 하시지 않고 너희는 먼저 생각하라는 겁니다. 사실은 교회가 이지경이 되었는데 생각할 시간이 있습니까?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음 사랑의 회복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모르기 때문에 굉장히 고통받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을 저는 말씀을 전하고 상담을 하면서 봤습니다. 그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처음에는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그렇게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고 부패한 것을 깨닫고 그것과 함께 깨달은 것이 뭐냐하면 그 죄인을 향해서 말할 수 없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그걸 깨닫습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갈피 갈피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사랑이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변화 받고 나서 그거였습니다. 교회에 갈 때 전에는 가는 이유가 뭐냐하면 주일날 아이들 예배 빵구 내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교회에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은혜고 뭐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가다가 보니 그것이 끝나고 나면 바로 주일 예배가 시작되니까 붙잡혀 예배를 드리는 그런 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회복되게 되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갈피갈피에 사랑이 들어가요.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나오는 거예요. 직장 다니면서 점심 시간에 그러고 모이고 그러는 것도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니까 그리스도인의 삶 갈피갈피에 사랑이 들어가니까 그런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삶 자체에 생기가 돌고 참 생명의 은혜가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의 사랑이 식어질 때는 무엇을 해도 신앙에 도움이 안되는 데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 갈피갈피에 사랑이 들어가게 되니까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내 신앙에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내 신앙에 도움이 되요. 구제하는 것도 길피갈피에 사랑이 들어가니까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지고 물질에 대한 사랑이 멀어지게 되요. 봉사하면서도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처음 사랑이거든요 그러다가 빠져 나가게 되는 겁니다. 빠져나가게 되고 그 다음에는 신앙적인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본성은 이것 가지고 신앙 생활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겉모습은 옛날 것이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그러나 무엇인가 자기의 가슴과 영혼속에 젖어오는 깊은 원동력이 마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래서 곤고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하면 열심히 교회 일이나 하나님 섬기는 일을 매몰 시켜 보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바쁘게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면 한편으로는 보상의식도 생기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옛날 같이 뜨거워질거다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으면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것을 매몰시키시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고 할 때 상대적으로 함께 섬기고 함께 할 때는 무언가 되는 것 같은데 홀로 조용히 앉아 있으면 역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깊은 공허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도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시도를 하다가 점점 더 무기력감에 빠지면서 급기야는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려 놓고 그 사랑을 회복 시켜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무엇을 해도 안되니까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안됩니다.
이 생각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보다 급하고 전도하는 것보다 급하고 자기가 어떤 하나님의 일에 매몰되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시는데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 생각을 하는 것은 공상을 통해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뭘 생각해야 하면 내가 예베소 교인인 너희들을 향하여 판단한 것을 너희들이 기억을 하고 그리고 내가 너희들이 살아온 이 삶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렸는데 그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생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먼저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나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것을 먼저 듣고 깨닫는 일 없이는 회복을 위한 생각함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생각은 무조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그것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하는 일이 있어야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삶의 표준과 그리고 삶의 진정한 기준 신앙의 참다운 기준에 대한 성경의 제시가 있고 나서 비로소 내 모습 내 삶이 어떤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직하게 자기의 상태에 대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영혼에 소망이 된다는 사실에 동의를 안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을 가지고 싶으냐 하면 자기의 살아가는 삶을 합리화 시켜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에 대해서 정직하게 우리 상태를 보여 줄때 그 빛 앞에서 우리가 비로소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렇게 깨달을 때에 비로소 이 처음 사랑의 회복을 위한 회개에 들어가는 생각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잔인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말씀이라는 거울을 앞에 놓고 하는 말이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구 얼굴이 제일 예쁘니?" 그렇게 묻는 난 누군지 모르겠는데 백설 공주에서 나오는 마녀같이 그러는 겁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예쁘니?" 그런데 거울은 늘 거짓말은 안하고 백설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대답을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화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깨뜨렸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화가 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고 말할 때 자기가 백설공주같이 그렇게 거짓말이라도 거울이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건 백설공주가 아니라 뱃살공주입니다. 제가 웃으면서 이야기 했지만요 오늘날의 교인들의 말씀에 대한 부정직한 태도에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각도 안되고 참된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것이 "회개" 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처럼 중요한 사랑 하나님 앞에 잃어버리고 살아갔던 생명처럼 귀한 이 사랑의 회복 시켜주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에게는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참회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을 이제는 기분 나쁘게 생각을 하고 그런 설교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채 종교에 익숙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상태가 병들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으면 떠날수록 더욱 더 분명하고 찬란한 빛을 내뿜는 거울과 같은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들의 모습이 어렵고 비참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모습 앞에 스스로 절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보다 더 분명하고 보다 더 찬란한 진리의 빛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깊이 병들고 상처가 깊은 사람일수록 보다 예리한 칼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고 마음이 부패해지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식어 버린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하고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돌이키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는 자를 보여 줄 수 있는 정직하고 분명한 말씀의 거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과 아픔을 싫어하기 때문에 생각이라고 하는 정직한 방법으로 아버지 앞에 서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어느 산부인과 학회에서 재미있는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마지막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무통분만 하지말자 이야깁니다. "무통분만"그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은 가족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될 거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자녀를 낳을 때에 인위적으로 통증을 없애는 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본능적인 모성애를 굉장히 많이 감소시킨다는 겁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저는 그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사로서 그 말에 대해서 목회적인 동의를 합니다.
그러니까 영혼 하나하나가 거듭나고 태어나는 것에 대한 뼈아픈 진통을 지불하면서 목회를 할때는 교인들 하나 하나가 귀해 보이고 그런 것 없이 몰려오는 경우 있거든요? 그때에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몰려와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다를겁니다. 어느 교회에서 그랬더래요. 신도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교인들이 억수로 밀려 오는거예요. 한 주에 몇십명씩 등록을 하니까 새신자 관리하기 보통 복잡하지 않아요? 그것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목사님이 사무실에서 카드 정리를 하면서 혼자 투덜대는 거예요. "에이- 요즘 교인들은 왜 우리 교회만 이렇게 몰려 오는 거야!" 이건 확실히 무통분만이 가져다 준 모성본능의 상실 아닙니까? 자기가 달동네에 떨어진 신발 신고 돌아다니면서 개에게 물리고 아파트 경비원에게 욕을 먹으면서 한사람 한사람 건져내서 몰려온다면 그는 아마 그렇게 말할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깨닫고 하나님앞에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일들을 위해서 무통의 치료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결국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정말 돌아가서 처음 사랑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는 한번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는 그저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신앙 생활에 익숙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적응 하면서 살아가는 생명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인이 훨씬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들이 왜 이런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몇해 전에 이 2장을 읽으면서 생각이라는 거기에 부딪쳐서 헤어 날수가 없었습니다. 제 신앙에 커다란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진정한 회개의 출발은 부르짖고 울고 데굴데굴 구르고 무언가 번쩍이는 빛을 보는 것이 그것이 회개의 참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는 생각하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말씀의 거울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처음 사랑을 회복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미각이 살아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이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살려 내시는 방법은 언제나 동일해요. 여기서 뭐냐하면 당신의 선하신 성품으로 당신의 말씀을 사용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시는 겁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내 심정을 좀 알아달라고 호소 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그것을 잠시 잊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먼저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전수 받을때에 그때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첫사랑 없이 살아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이 내 눈에 그렇게 크고 엄청나게 보이던 나의 피할수 없는 사정 그리고 나의 고통스러운 환경이나 나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가게 억압하는 모든 여건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상황에 뛰어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돌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치게 되면 우리의 소위가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그 사랑에 부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불순종하는 삶,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합니다. 여러분! 우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더불어 싸우십시요. 그리고 나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던지 하나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시요. 불쾌하다면 어느날 나타나셔서 내게 침을 뱉으시고 내가 못됐다면 한차례 때리시고 내가 불쌍하다면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시고 주님 마음대로 하시되 하나님 주님의 마음을 내게 정직하게 내게 보여주소서. 내가 정직하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주님이 나를 더럽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나를 씻을 것이요. 주께서 나에게 바보 같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지혜곱게 되려고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하시면 내 얼굴을 쓰다듬는 주님의 손을 붙들고 저는 감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주님의 마음을 제가 정직하게 깨닫고 나를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서만 내가 관심을 가질수 있도록 하나님 정직한 모습을 내가 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보증해요. 다른 기도는 내가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기도만큼은 정말 잘 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사람만 고통스러운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랑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것 처럼 절기를 지키고 성일을 지키고 마음에도 없는 제사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 곁을 빙빙 도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보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더 고통스러워요.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뜨거운 열심으로 당신을 향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을 찾아오셔서 사랑을 잃어 버린것을 책망하시지만 마음에 담긴 진정한 의도는 그 사랑이 없음을 책망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그 사랑으로 하여금 그렇게 부르실려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들에게 잘못을 지적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셔서 예배소 교인들에게 너희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혼내시는데 결국은 최후 통첩 입니까? 다시 말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으니까 이제 나는 너희들과 관계가 끝이다" 라고 말씀하시려고 온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이 교회에게 이것을 보이신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없이 살아가는 이 예배소 교회를 보인것이 하나님에게도 얼마나 고통인지를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이제 이 백성들을 하나님이 불러 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요. 우리가 만약에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정말 주님의 은혜로 살아 있는 것이라면 정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느냐 생각을 해 보십시요.
어느 성경공부 모임에 갔는데 오전에 성경 공부 모임을 다 끝내고 갔더니 나보고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해요. 나는 점심 얻어 먹는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뭘 사주겠느냐 했더니 된장찌개 를 사주겠대요. 그러면 얻어먹어야지 "가자" 가서 점심시간에 날이 쌀쌀한 날이었는데 된장찌개를 "보골보골" 끓고 있는데 정말 먹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도를 해달래요. 6-7명 모였어요. 그래서 기도를 했는데 옆에 있는 어느 권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어떻게 기도를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뭘 잘못한 것이 있나? 충격을 받으셨대요. 왜! 무슨 총격을 받으셨나요? 제가 이렇게 기도를 했거든요. 하나님! 우리가 이 음식을 먹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주님에게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놀라운 사랑을 입어서 구원을 입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보좌 앞으로 다시 불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행하셨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주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와는 상관이 없고 죄와 함께 있을수도 없는 그 분을 죄인으로 정하시고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께 동시에 버림을 받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구하려고 주님을 버리셨고 우리를 부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가난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형벌 받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을 정죄하시고 주님에게 고난과 형벌의 멍에를 씌우셨습니다. 주님이 그런 놀라운 사랑으로 자기를 다 쏟아부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단지 형식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르 그렇게 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아들을 쪼개어 십자가에 매다실때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사랑하실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아들을 못박으실 때에 우리를 향해 부어지던 그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해 느끼고 가지면서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것, 하나님 앞에서 누리고 있는 그 은혜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쪼개진 육체를 타고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것 중 단 하나도 따라서 보혈이 묻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눌 거리를 방황하고 어두운 세상속에서 고통하며 살 여러분들 이렇게 나와서 함께 예배 드릴수 있는 이 교회도 보혈이 묻어 있습니다. 찢어진 주님의 육체를 가르고 피를 흠뻑 묻힌채, 여기에 섰습니다. 여러분들 옆에 있는 지체들도 그렇게 주님의 찢어진 옥체를 통과한 사람들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 하시고 오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주시지 아니 하셨다면 우리는 이러한 좋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수 없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진노는 그 분이 당하시고 은혜는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고난의 형벌을 주님이 친히 당하시고 위로와 사랑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사신분도 바로 그분 이었고 우리를 사신 분도 그분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자기의 찢어진 육체를 보혈을 묻어 통과한 그래서 만들어진 교회 그렇게 탄생된 우리를 향해서 자기를 찢으신 장본인 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만약에 주님에게 사랑스럽고 기쁘지 않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현저히 욕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것을 주셔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신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제 다시는 세상을 의지하거나 너를 버린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죄가운데서 너희를 건져내어서 어둠의 나라에서 너희를 빛으로 옮기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시고 존귀하게 만들려고 비참해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덕을 기리며 그 주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한것 아닙니까? 나머지는 다 그 다음입니다. 무얼해먹고 살던지 어떤 일을 하던지 무엇으로 섬기던지 어디를 가던지 어디에서 살던지 무얼 견디던지 그건 나중입니다. 문제는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 주셔서 우리를 그 피로 사신 것은 이제 다시는 우리가 세상이나 육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그 분을 사랑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잃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십시요.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실때에 한번도 형식적으로 다가오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수없이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다가 오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들려주는 한마디의 진리의 말씀, 여러분들을 꾸짖으시는 한마디의 충고 여러분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한 두가지의 하나님의 선물, 심지어는 여러분들에게 공급해 주시는 일용할 양식, 모두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메인 사랑의 눈물이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형식으로 사랑을 대신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입니가? 그게 정말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고 축복받을 백성들의 주님을 향한 태도냐는 것입니다.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입니다. 믿음의 비밀은 사랑의 비밀인것 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육신의 이에 의한 염려 어떻게 무얼 먹고 살지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서 방황하고 헤매는 동안에 주님과 여러분들의 관심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어떤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보여 주셔서 우리를 그 피로 구원 하셨는지 생각하고 한번도 농담처럼, 장난처럼 마음에도 없는 빈 말로 여러분들을 찾아 오시지 않았다면 그 예수님의 참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니라. 충격적인 말 아닙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니라.
이것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자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불붙는 진노를 보여 준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된 그 놀라운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의 위대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사랑에 마음이 녹지 않고 그 사랑에 항거하며 살아가는 그 패역한 죄인들이 받을 그 형벌이 그 죄인들을 향해 퍼부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례할 것이라고 하는 사도의 확신을 말한것입니다. 더욱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해 부어지는 그 놀라운 사랑을 방종의 기회로 삼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막 보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포기한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어두움과 곤고함이 깃들 뿐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지존자를 멸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외면 했기 때문에 스스로 어둠속으로 걸어 간 것이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크고 놀라운 사랑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종의 형체를 입기까지 겸비해지신 그 예수의 희생과 고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인생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가서 선지자가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아! 주께서 너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나니- 그것은 천천의 금은이나 만만의 수양이나 수 많은 짐승과 혹은 수많은 송아지나 혹은 많은 예물을 가지고 주님앞에 갈 것인가? 그런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나 내가 어린 송아지나 무엇으로 주님께 제사할꼬? 그것이 아니라 사람아! 네게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께서 보이셨느냐. 그것은 겸손히 주와 함께 동행하고 인자와 공의를 행하는 것, 요약을 하자면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나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앞에 이런 사랑의 주님앞에 사랑을 드리지 않는 것은 무언가 빠진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드린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그 사랑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애정이 우리의 모든 섬김에 깃들때, 제사로 드리는 송아지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수양의 가름과 많은 예물로 주앞에 가져 올때에 싣고 오는 마차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 겠습니까? 사랑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모든 제사가 주님에게는 노염거리가 되었고 제사 드리는 동안 참는것이 주님께는 고통이 되었기때문에 계속 제사를 그런식으로 드리는 자를 차라리 징벌하겠다고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우리는 하나님앞에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들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나오는 요소가 "회개하고" 입니다. 인제 비로소 생각을 하게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사랑에 부응하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이 부패한 본성에 대한 그 본성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깨닫게 되면 그러면 그때에 슬픈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이 안들면 인간도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의 큰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감동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사랑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 했습니다. 그때에 무슨 감정이 안 생긴다면 그건 로보트지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양심에 화인을 맞고 심장에 철판을 깐 사람이라도 이것만 생각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심장을 녹이시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할수 있어요. 저는 요새는 안 해보았지만 난 요새는 닭 못 잡을것 같아요. 잡을수 있겠어요?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 이야기가 특수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군다나 실수로 죽인것이 아니라 여럿을 그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그렇게 죽이는 그것은 보통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은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만, 김 대두 라는 사람 기억을 하지요? 18,000원인가 얼마를 강탈 하기 위해서 7명 인가를 죽인 희대의 살인범 입니다. 사람 죽이고 고춧가루 1봉지 빼앗아 가고 그런 사람 입니다.
6. 첫사랑 회복의 중요성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 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5下-6)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로 처음사랑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돌아가야 되는가? 그래서 생각하고 그리고 또 회개하고 또 처음행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다 말씀하신 다음에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를 덧붙이고 계십니다. 만일,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 고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은 우리는 아무도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만약에 “나는 하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써 세우신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는 다 안다.” 그렇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하고 꼭 같이 신성모독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특별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끝이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실 때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사야53장에 약속하신 바와 같이 많은 씨를 볼 것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도 참으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당신이 당하는 그 끔찍한 고난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성부와 성자께서 스가랴 6장에서 인간을 위한 구속의 약속을 하실 때에 이미 그 성부와 성자는 이 세상에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면 단지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서 많은 열매들이 맺히게 되리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생애에 이미 우리들에게 이러한 예고의 말씀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밀알이 썩어서 하나가 죽게 되므로 많은 것들이 그 속에서 살아날 것을 예고하신 것은 그야말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에 그 부활과 그 십자가의 속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될 수많은 교회들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흔히 말로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셨다.” 사실 우리는 별로 가슴에 다가오는 감동이 없이 “피로 값 주고 샀다.” “피로 값 주고 샀다.” 그러는데 사실 잘 묵상해보면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난 교회들을 볼 때 피묻은 교회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피가 묻은 교회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피 흘리고 죽으셨기 때문에 교회를 사신 것입니다. 교회만 사신 것이 아니라 그 교회자체가 한 영혼, 한 사람, 한 지체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지체들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서 성도라 일컬음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성도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의 사랑도 감히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자기 몸을 버려 자기의 피를 주고 사신 교회와 그리고 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가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정말 끝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보면 더 잘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사람들이 부족하고 교회가 때로는 영적으로 매우 침체되어서 부도덕한 일들을 교회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거나 혹은 올바로 깨달은 사람들이라도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잘못된 신앙의 풍조들이 교회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그런 교회가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잘 보십시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교회가 거의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특성을 다 잃어버리고 가장 비참하게 말라깽이와 같이 되어버리고 마른 뼈와 같이 되어 버렸는데 때로는 하나님이 거기에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들이 깨어서 일어나고 어둠 속에서 죄악의 길을 걸어가던 당신의 백성들 속에 전광석화와 같은 하나님의 영적인 각성의 충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이 실로 오래 만에 들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찢고 통회하고 나면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회복됩니다.
죽어가고, 마른 뼈와 같은 교회들이 군대와 같이 일어나고 잠자고 타락한 길을 걸어가던 백성들이 성결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살기로 피 떨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맹세와 헌신을 다짐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시므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하고 철저한 어둠 속에 가리워져 있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버리시지 않는 한 역시 그 교회는 거룩한 교회요,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과 같이 희망을 가질 것이 별로 없는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잠들어 있는 조국의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고 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어두운 시대를 지나지만 교회를 향한 다함이 없는 사랑이 언젠가는 조국의 교회를 깨우고 하나님의 교회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세우시고 싶어했던 정결하고 능력 있고 거룩한 교회로 거듭나게 하시리라고 하는 소망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도 하나님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멸시하고 사랑 없이 돌멩이를 던질 때에도 주님께서는 오히려 자기를 떠나버린 패역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던지는 돌멩이를 사랑하는 교회와 함께 맞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새롭게 일어나게 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너희는 처음행위를 가지라.”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권면하시고, 타이르시고, 사랑으로 권면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그 넘치는 사랑입니다. 교회를 향한 이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이 믿어지지 않거들랑 그 교회 속에 한 지체가 되고있는 우리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충만하고 믿음으로 가득한 삶을 살 때에만 주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어두운 길로 들어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추적하시고 결국은 주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깨닫게 하셔서 생명을 버리고도 이 세상에서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셔서 결국은 당신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며 당신이 마련해 놓으신 땅에서 영원히 살 수 밖에 없도록 죄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타이르고 권면하고 추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건지고 당신과의 관계로 돌이켜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원의 계획은, 그리고 이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는 여호와의 열심은 너무나 치열하고 뜨겁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냉담함을 뛰어넘고 우리의 패역함을 더 초월하는 그런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결국은 죄 가운데 살아가고자 하는 그 백성들을 꺾고 회개 시켜서 당신과의 참된 관계로 돌이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은 누구도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있는 그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우리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지극히 사랑으로 충만하고 자비로우신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자비로 오늘 에베소교회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식어버린 그 사람들을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을 두드리시고 그들의 마음 문에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셔서 그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그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불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없애버리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상충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너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며 영원할 것을 주님이 예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그 촛대를 옮겨버리시겠다.” 쉽게 얘기하면 교회를 없애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주적인 교회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고 파멸시킬 수 없습니다. 우주적인 교회라 함은 영적인 교회요, 이 세상의 믿는 모든 백성들의 연합이요, 나아가서는 천상에 있는 성도들과 구원받은 모든 무리들의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적인 교회는 무엇에 의해서도 파멸될 수 없고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역에 세워놓은 교회는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없애실 수도 있고 쓸어버리실 수도 있고 다시 세우실 수도 있습니다. 지급 에베소는 그렇게 사도행전 19장에서 두려움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가운데 경험했던 그 놀라운 부흥의 흔적은 사라지고 에베소에교회가 있었다고 하는 흔적만이 그 에베소시에 남아있습니다. 복음으로 번창하던 도시는 모두 사라지고 기독교와 선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지역에 있는 교회는 정말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지키시지만 그러나 더 이상 주님의 경고가 이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교회가 수없이 권고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권고를 무시한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 교회를 파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 교회를 세우신 그 피묻은 손으로 다시 허물고 촛대를 치우실 때에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폐하시고 촛대를 옮기실 때 세상에 있는 원수 마귀들과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이 세상은 얼마나 웃고 얼마나 조롱하겠습니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겠노라고 말씀하실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청하면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노중에서 멸하시면 열방의 수많은 백성들은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막상 자기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으나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자기의 능력으로는 이 백성들을 인도할 수가 없어서 결국은 노중에서 멸하였다고, 그렇게 온 세상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조롱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처럼 교회가 문을 닫고 교회가 하나님이 떠나시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 때 마귀는 박수를 칠 것이며 세상의 불신자들은 조롱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피로 값 주고 세우신 한 교회를 당신의 피묻은 손으로 스스로 헐고 그 촛대를 옮기실 때 그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복음 전도하고 싶어하시던 그 영혼들이 오히려 교회와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드러내고 망하고 떠나가는 교회를 조롱하고 혹은 이교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이 뛰어난 사도들과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생애를 바쳤던 모든 지역들은 이제는 거의 회교도들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얼마나 주님의 명예에 손상이 가겠으며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행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명예가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또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복음의 권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롱을 하고 한 교회가 망하는 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비웃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기를 포기한 교회 당신을 사랑하면서 세워져야할 그 교회가 설립의 근본적인 정신을 잃어버리고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소명을 저버렸을 때 그런 모욕을 감수하시면서도 하나님은 그 지역에 있는 교회를 처분하심으로 당신의 교회의 건강함들을 지켜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생각하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방종의 기회로 삼거나 혹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된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가지고 우리들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속히 하지 아니하는 게으름과 나태의 빌미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라는 경고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껏 이렇게 버티고도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교회에 이런 식으로 가도 괜찮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도 내가 살았는데 뭐 내가 부족하지만 어차피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이대로 살면 되는 거지.”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교회를 촛대를 옮겨버리시게 만든 하나님의 교회의 백성들의 불신앙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명이 무엇이고 세워져 있는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 거룩한 진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하는 그 모든 원동력과 그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원래자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원을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그 기대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버린 최종적인 증거는 사랑의 소명을 저버리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룩한 보혈의 공로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일차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교회를 새우신 것은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도 아니고 심지어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부차적인 소명입니다. 일차적인 소명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안 백성들이 모여서 내주 되신 주를 참사랑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교회를 거기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성도들의 사랑을 회복시킬 수 있는 교회,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식어진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왔을 때에 그 사랑을 새롭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 어떤 능력에 함께 하심이 있는 그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교회당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 이 교회당을 떠나서 일주일동안 살았던 삶과는 비교되지 않는 어떤 제3의 삶이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우리들이 살아가고 우리들이 고집하는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장단을 맞추는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가전제품은 한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하지만 여러분들이 어떤 교회에서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영혼이 달린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편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능력이나 이적을 행하는 기이한 일보다도 더 시급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 안에 깃들어 잇는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감화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멋대로 살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거룩한 사랑에 부응하지도 못하는 인생을 살면서 “괜찮겠지” 생각하고 왔던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찬송하고 기도할 때 알지 못하는 어떤 커다란 힘이 그들을 압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 어떤 놀라운 인격이 그들을 뒤덮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는 이 세상의 화려한 나의 모든 인생의 형통함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를 깨닫게 만들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찬송하면서 내 인생의 진정한 본분이 무엇이며 오늘도 그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살이에 골몰해 있는 나를 보시면서 아파하시며 당신과의 관계로 부르시는 내주 되신 우리 주 예수의 사랑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당에 나아올 때는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나왔지만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우며 주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에 부응하는 그 처음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영혼의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서 구원받은 자에게 주신 일차적인 소명, 내주 되신 구주를 참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소명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해줄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기 전까지, 지금도 다 안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목회를 하는 선배 목사님들이 공개적으로 “나보다 이 교회를 더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는 이 교회에 집도 바쳤고 퇴직금도 바쳤고” 그런 얘기 할 때마다 “아이고 되게 잘난척하네” 말은 안 해도 속으로 그럽니다. 지금 와서 이렇게 보면 전부는 이해가 안 가지만 부분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아 그렇구나!” 그분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소유를 바치고 젊은 모든 20년,30년의 세월의 모든 소유와 꿈을 교회에 묶고 울어도 거기서 울고 웃어도 거기서 웃을 정도로 자기를 다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교회는 사랑스러워지지 않는데 그 교회는 사랑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저도 집회에 나가면 우리교회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교회당의 강단에 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강대상만 천 이 백여 만원정도가 된다고 하는 그런 데에 서서 열린교회 교회당 만한 성가대가 찬송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교육관 만한 화장실을 지나서... 의자 이거 하나 오 만원인데 그 가게에 가서 벌벌 떠는 마음으로 샀습니다. 그래도 분위기 맞추려고... 그런데 이런 것을 비웃듯이 의자 하나에 이십여 만원씩 되는 의자들이 주욱 줄지어 있는 그런 교회에서 설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우리교회 강단에 섰을 때만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 바쳐야 됩니다. 돈 내라는 얘기 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있어서 여기다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섬기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바쳐야합니다. 그럴 때 그 교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어지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교회에 건축헌금 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예 당신의 살을 찢어서 벽돌을 쌓고 자기의 피를 짜서 미장을 했습니다. 당신의 눈물로 교회의 바닥을 깔았습니다. 당신의 육체를 찢으셔서 우리 백성들을 그 피 길을 밟으며 하나님 앞에 걸어나와 교회당에 모일 수 있도록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탠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당에 보태었지만 주님은 교회 그 자체를 당신의 육체로 세우시고 당신의 피로 바르셨습니다 그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분이 오늘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큰사랑이 교회와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단서 앞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없고 처음 사랑으로 돌이킴이 없는 자들을 향해서 내가 이러한 심판을 예비했지만 그러나 나도 이러한 심판과 이러한 재앙이 너희의 교회에 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애타는 마음을 우리는 그 속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해 보려고 버리적거리면서 삽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에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꼬.” 그래서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추슬러 주를 위해 봉사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잠 오는 눈을 부비며 기도를 하기도하고 피곤한 몸을 추슬러 글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향한 그 예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에 비하면 우리가 이렇게 버리적거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그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바다와 같이 넓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가랑잎과 같이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사소하기 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수시로 이 에베소 교회처럼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갚을 수 없는 이 은혜 앞에서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마음하나를 순전하게 지키면서 비록 산을 옮기는 위대한 일은 못했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순교하는 일은 못했지만 작은 섬김 하나 , 사소한 봉사 하나도 그 모든 섬김과 봉사의 동기가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는 그 첫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라고 하는 이 고백하나를 우리들이 간직하고 살다가 우리 주님 앞에 가야지 그분 얼굴을 기쁨으로 뵈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크고 그 처음사랑으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러나 너희에게 니골라당을 미워하는 그런 좋은 게 있다.” 이 니골라당은 극단적으로 율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려고 했던 방종주의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너희들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고도 있고 인내도 있고 순결도 있고 그리고 거룩도 있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하려고 하는 열심도 있었고 도덕적인 정결함도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렇지는 않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에베소교회가 그리스도예수를 향한 모든 사랑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차가와 졌고 식어졌지만 그러나 그들에겐 사랑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과 같이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저럴 수는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남아있지만 이들이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신앙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이름값을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랑을 깡그리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불붙는 뜨거운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첫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해 원하시는 것은 불붙는 처음사랑,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에 사무쳐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어찌할 수 없었던 그 지나간 날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때문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한 분에 인생의 모든 목표가 매달리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나를 기뻐하실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불붙는 뜨거운 사랑, 그 사랑에서 비롯된 이웃사랑, 형제사랑, 지체사랑.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인해서 오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니골라당의 행위를 여러분은 미워하고 있으며,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니골라당과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극단적으로 무시하고 불신자와 방불한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적당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적당한 사랑은 사랑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고, 넘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 교회에게 이 처음사랑을 회복하라고 부르고 계시고 이 처음사랑을 회복치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가 적당히 주님을 사랑하는 처지 아닙니까? 남아있지만 불붙지는 않는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은 사랑이지만 처음 사랑은 아니지를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에베소교회와 함께 그 자리에 서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이 경고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를 스스로 버리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깊은 부패와 사랑을 잃어버린 죄악의 어두움에 떨어진 이들에게 회복을 보이신 것처럼 또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경고와 돌이키라는 요구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또 다른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인 것을 깨닫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고 지난날들의 삶을 돌이켜 이런 처음 사랑을 붙들며 살도록 도와 달라고 아버지께 호소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7. 교회에 말씀하시는 성령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2:7上)
몇 주째 예수그리스도께서 평가하셨던 일곱교회 가운데 첫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무시하고 짓밟는 니골라당들을 미워했습니다. 주님도 미워하셨습니다. 주님이 문제로 삼으시는 것은 이들이 모든 사랑을 저버린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뜨거웠던 그 열렬한 사랑, 그것을 잃어버린 것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제로 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기로 부터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처음사랑에서 비롯된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이 마지막 절은 이러한 모든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판단, 회복의길, 경고. 모두 끝난 후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는 대단히 진지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요한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요한이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기록이 되어졌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특이한 말씀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제일 먼저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한가지 진리를 먼저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은 교회에게 언제나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언제나 교회에게 말씀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부활승천 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이제 그 보위에 앉히시고 그에게 천하를 다스리시는, 특별히 교회를 다스리시는 권세를 예수그리스도께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그런 권세와 놀라운 권능을 주시고 성자 예수에게 모든 권세를 위탁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방편이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구원하고 싶으십니다. 그러면 누가 그일을 하십니까? 성령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깊이 회개하게 하시고 싶으십니다. 그러면 성령을 보내셔서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시게 하시고 싶을 때에도 성령을 보내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이 언제나 교회에 말씀하시지만 그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라는 사실을 오늘 여기서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왜 이렇게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 희귀한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계속해서 7절을 해설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령이 교회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언제나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모여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 교회를 향해서 하시고 싶어하는 말씀이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주의 종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에 하시고 싶어하는 그 말씀을 전달해 주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그 일을 잘 하고 있으면 그는 거의 모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모든 일에 유능하고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가 만약에 그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안 하는 불충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고 싶어하는 음성, 주님이 그 교회를 향해서 그 교회의 전반적인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영적인 형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바를 성도들 위레 뛰어나게 먼저 하나님의 존전에서 깨닫고 그것을 그 백성들에게 들려 주는 것, 이것이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직무이고 그것을 행하면 그는 거의 모든 일을 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교회를 향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성령이 교회에, 여러분들의 교회에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 개인의 영적인 생활과 또 신앙의 생활, 나아가서는 그의 모든 인생살이, 삶, 이것과 교회와는 분리될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여러분들의 개인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없습니다.
(예화) 전에 있던 교회에서 하나님이 그 교회를 기뻐하지 않고 마음 아파하신다고 하는 확증들을 굉장히 많이 보여 주셨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특별히 젊은이들의 음란이었다. 교회 안에서 피임도구가 발견될 정도 였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 지에 대해서 귀기울이지 않았 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얼마후 이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 이 죽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 랬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누구도 왜 하나님이 신실한 성도들을 죽음으로 데려 가실까? 우리에게 한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계실텐데 우리의 신앙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고 있는가? 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눈감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개인적인 교회에 대한 인정과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적인 안목에서 이 교회를 볼 수 있도록 교회와 여러분 개인의 삶을 영적인 사진기로 찍어 놓는다면 여러분들은 아마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여러분들은 교회라고 하는 곳에 탯줄을 대고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 안겨있는 태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말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보실 때마다 마음에 벅차 오르는 정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서는 무엇인가 주님으로 하여금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해서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미 없이 자란 후레자식입니다. 그 자식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요한 칼빈은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어머니처럼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라고 말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교회에 언제나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그것은 속삭이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레와 같고 번개와 같고 천둥과 같은 소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저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가 어느 시기에 깊이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그때를 우리는 각성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기도하다가, 성경을 읽다가 “아! 이거구나 혹은 이것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얼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를 알게될 때에 그때 그 소리는 속삭이는 음성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할수 있게끔 속삭이는 소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분명하고 뚜렷하고 그리고 웅장한 소리로 우리에게 다기오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하셨는데 그때에 여러분들이 겨우 들을 귀가 열렸기 때문에 그 음성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들에게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할말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이 순결한 삶을 살고 진실한 삶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이 그들을 칭찬하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인정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말씀을 하고 싶어하시고, 그 백성들이 참된 신앙의 길에서 미끄러지고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면 빠질수록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향해서 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인가 그 백성들을 질타하고자 하는 음성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속사람 이든지 우리의 겉사람 이든지 칭찬은 좋아하고 책망하시는 것은 싫어합니 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책망하시고 우리를 일깨우시려고 하는 그 동안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경고의 때가 지나고 나면 그 경고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깨서는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 더더욱 이 계시를 전달해주는 사람이 사랑이 충만했던 사랑의 사도 그 요한이, 그것도 자기가 목회 했을 지도 모르는 그 교회를 향해서 이 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나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이 없지만 하나님의 인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일들이 필요하고 이것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경고하시는 것이 당신의 거룩을 지키는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내를 끝내시고 행동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오는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주님 앞에 나올 적마다 들려주시는 일관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을 전달하는 일에 신명을 바쳐 왔습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이 교회를 크고 위대한 교회로 만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여기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최고의 영광과 비젼은 하나님께서 수시로 내 백성들에게 이루고 싶어하시는 바를 전달해 주는 것이 그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이며 그의 영광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전하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자의 영광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서 목양자로 부름을 받은 저는 주님이 여러분들을 향해서 여러분들의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저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모두를 돌아오게 하는 일은 제 수중에 속한 일들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속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불현듯이 책망하시거나 불현듯이 한 교회와 한 민족을 심판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커다란 곤경에 몰아 넣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날 동안 참으시고 그에게 꾸준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꾸준히 반복해서 지루하도록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도록 말씀하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당신의 마음을 남김없이 전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그가 남김없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하나님께서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피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들에게 선명하게 하나님이 도전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때로는 그 말씀이 부담이 되어서 회피하고 싶지만 고개를 돌려도 끊임없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아 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여러분들을 향한 그 마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너무나 패역하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굳어져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있지만 그 사랑이 그의 굳어진 마음 때문에 다시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그 처음사랑이 우리에게 가져왔던 진실한 하나님음 향한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 살았던 순결한 삶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너무나 크고 놀랍고 위대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도 주님의 그 사랑은 돌맹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인자와 같은 강팍한 심령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도 지금 이 시간에도 죽이고 있습니다. 죄 가운에 하나님을 거스리며 살던 흉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도 이 시간 정결케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형식만 남아있고 마음에 교만으로 가득 찬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부족하여 하나님께 자기가 아무 것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을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사오니 이제 빈손 들고 앞에 나오는 이 죄인을 받아달라고 통회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서 거듭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개를 돌리려하고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그 더러운 인간의 의로 치부를 가리고 나무숲, 바위틈에 숨으려고 하는 그 부패한 우리들의 모든 사악한 욕망들과 어리석은 자기 은닉의 본성을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슬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수 없지만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자기를 버려서 피 흘리신 예수의 구속하신 사랑을 찬송하고 주님은 당신이 이루신 그 구속의 사업을 찬송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그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해 주시는 그런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미가서를 보면서 저는 그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산들이여 그리고 땅들이여 변론하자.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못해준 게 무엇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들으면서도 불순종하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며 그 사랑을 배반으로 갚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주님은 당신이 지으신 땅과 당신이 지으신 산들을 증인으로 불러모으면서 “내가 내 백성을 위해서 안 해 준 것이 무엇이며 내가 내 백성을 위해서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냐.”고 호소 하셨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주님이 이런 호소를 하실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당신이 보여주신 그 기가 막힌 은혜를 드러내시면 그것으로 족하시지만 그 분 안에 있는 사랑은 그 완악한 인생들을 버려 두시지 아니 하십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부당하게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잃고 첫사랑의 감격도 사라진 채 마른땅을 걸어가는 것과 같이 무미건조하게 살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여러분들을 처음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흑암과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는 그 흑암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알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던 여러분들이 그 처음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여러분들의 인생의 모든 고민을 해결 받았을 때에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그 어두운 때에 하나님께서 그 어두움 속에서 쌓여진 죄악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에게 잠시 진리의 빛을 주신 것은 맛을 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그 진리의 빛에 힘을 얻어서 회복된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일어나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많은 날들을 살아오셨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강팍하게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신 자비와 인내를 하나님 앞에서 완악한 고집으로 주님을 거스르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들을 인정해주어도 하나님이 “넌 없다” 하면 우리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하찮케 생각하고 인정 안 해 주어도 “나는 너를 안다” 주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면 우리는 거기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이 음성은 하나님의 종들이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이 언제나 이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문제는 거기에서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의 태도인 것입니다. 신앙은 과거나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시지만 여러분은 잊지말고 기억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굳어지게도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유아세례를 문답을 해서 대부분 합격을 하셨는데 제가 권면해드리는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믿는 집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이 온유해져서 신앙이 가슴에 새겨지든지 신앙에 면역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극악한 부랑자와 천하에 패역한 놈들이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입증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거듭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가르침이 있는 데도 그런 패역한 무리들이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패역은 이 세상나라의 패역이 아닙니다. 내 백성, 내 사랑을 입은 백성들의 패역함, 하나님을 완강히 거스르고 그 하나님께 불복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완악한 생각들이 바로 하나님깨서 미워하시고 고통하시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경건에 열심을 내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런것에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경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들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대해서 깨닫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진지해지고 온전해지고 시험가운데서는 그 하나님의 거듭되는 말씀을 붙들면서 옳다 인정함을 받기까지 자신을 정결하게 아버지 앞에 세우려는 이런 진지한 노력이 없이 말씀을 흘려 보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스르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바로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의 심령이 깊이 썩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봄날에 내리는 이슬비는 산천초목에게 단비임에 틀림없습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그 비 때문에 싹이 나고 잎이 돋지만 죽은 고목은 그 비 때문에 속히 썩어 들어가는 것과 꼭 같은 원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에게 언제나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말씀을 계속 하시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 교회와 그 개인들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저는 설교하러 다니면서 그 사람들이 거기에 왜 나왔는지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집회면 집회에 예배면 예배를 통해서 나에게 무얼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가? 그것을 듣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노력도 없는 사람들이 거기 모여서 무얼 하는 것입니까? 무얼 하려고 거기 나와 모여서 쭈그리고 앉아서, 교회 하루 안 나온다고 누가 벌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나온 거 아닙니까? 다리를 꼬고 눈을 지그시 감고 팔짱을 끼고 등에 기대어서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어떤 말씀을 듣고 자기가 고쳐지고 바뀌어져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을 잃어버린 성도들, 이런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죄악의 연속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하나님 앞에 미움입니다. 가식이고 외식입니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진지한 영성이 그들의 삶에 깃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강팍하게 세우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오만과 방종과 하나님을 향한 무시와 대드는 것과 강팍한 마음을 가지고 그의 인격이 움직여 지고있고 그 인격이 그의 모든 삶을 창출해 내는데 그의 신앙에 대해서 무슨 추억을 가지고 있든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나는 그 하나님을 안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버리운자 같으나 세상에서는 죄인이라고 지목받아도 순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나타나시고 아무것 없어도 마음이 파산선고를 받은 것처럼 가난하게, 오직 주님의 도우심 하나에 목매인 영혼들을 찾아 내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함께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명의 은총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샘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낍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메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맏는 자여 어이할꼬.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그런 사람들을 살려내게 하시려고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어 있으면 그가 누구를 살려 내겠으며 죄로부터 그들을 건져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내고 건지셨는데 만약에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것에 즐거워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영혼들을 건져내겠습니까?
그러니까 성령이 하나님의 교회에 하시는 말씀에 관심이 없는 교회에서는 전도되지 않습니다. 전도대도 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들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보고 여호와 앞에 무릎꿇으라고 말하는 것은 새빨간 위선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신 분이면 그 하나님이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분인지 네가 삶으로 나에게 좀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순결하신 분이면 그분이 얼마나 순결하신 분인지 한번 내가 너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면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한번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동역자 한 사람이 제가 같이 있던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목회자가 그 교회에 온다고 소문이 나니까 청년들이 좋아가지고 들어오는 목회자를 붙들고 아직 설교도 안했는데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자랑을 하는 겁니다. “형님 청년들이 내가 오니까 사랑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좀더 두고 봐라” 아니나 다를까 몇 달이 지난 다음에 자기가 목회를 하면서 고통받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뭐냐하면 자기가 맨 처음 그 교회에 올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손을 잡고 그렇게 뜨겁게 감격하던 그 자매가, “목회자로서 내 성격 같았으면 그 기둥 뒤에 의자 치워 버렸을 겁니다.” 안놓으면 땅바닥에 앉겠어요. 설마 그 더러운 바닥에? 그러든지 그래도 안되면 아무개 ! 보이는 쪽으로 나오라고 그랬을 겁니다. 그 목회자는 착하니까 그 얘기도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매주일 그 기둥 때문에 설교가 안되는 겁니다. 기둥도 크면 말도 안해. 그 교회기둥은 작아요. 그런데 그 자매가 워낙 조그맣거든요. 그러니까 딱 맞아요. 몸은 안 가려도 얼굴만 가리면 돼요. 그런데 말씀이 복음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처음의 사랑은 변하여 그 기둥 뒤로 숨는 겁니다. 그리고는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집에까지 가서 말이죠. 그 설교를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야! 오늘 그양반 설교 죽여 주더라.” 그 얘기는 무슨 얘긴가 하면 진짜 자기가 죽은 게 아니라 “웃긴다” 이거죠. 그 형제가 나한테 와서 얘기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또 봤대요. “뭔데?”하니까 그렇게 설교를 안 듣고 기둥 뒤에 숨더니 헤어지는 날은 쓰러질 듯이 통곡을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그 동안 목사님 설교 회피하고 돌아다니면서 목사님 욕한 것 용서해 주세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니까 아무말도 안했답니다.
이게 뭡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한번 마음이 정해지고 주 앞에 살기로 했으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시는 그 말씀은 우리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동물과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한때 진리를 많이 깨달았던 순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여러분, 서경을 알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들도 낯 모르고 강팍하던 지체들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 좋죠? 그래서 얼굴이 확 피어나고 다시 교회에 잘 나오면 서로 모두 보기 좋죠.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결국은 궁극적인 한 목표를 위한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와 같은 영혼을 하나님이 살려 주신 것은 단지 주님이 너희를 만나 주실 때 얼마나 감격스럽고 신비한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체험을 주신 것이 아니라 문제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주신 은혜를 의지해서 이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살아가라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새롭게 사는 삶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여러분들이 들은 설교를 기억하고 있는지 나는 심히 의문이 갑니다마는 기억하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천하지 않고 살았으니 기도했을 리가 없고 기도하지 않았으니 기억할 리가 없는 겁니다. 날마다 나아올 때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만 느껴진다면 신앙생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서 들을 때마다 아! 그 말씀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 , 내가 오늘 삶에 고민하고있는 그 말씀 , 아! 늘 듣던 말씀 하나님이 요즘 우리교회를 향해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그 말씀. 여러분들은 친숙하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스스로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의 거대한 종교 집단이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주택을 아름답게 지어 놓아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식인종이라면 그 첨단주택을 여러분들은 문화주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건물이 있고 아무리 그 교회당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동물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그 교회는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 신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이렇게 교회에게 말씀하시는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당연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마치 귀 없는 자처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무엇인가 하니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귀 있는 자는 ... ” 왜 이렇게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신다. 말씀하시는 대신에 이미 예수님께서 이 편지를 써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주어도 에베소 교회의 극히 소수의 사람밖에는 이 편지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주님이 믿음도 없게끔 미리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심히 적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렇게 깨어있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사랑을 버린 그 곳에는 깨닫지 못하는 무지함이 반드시 함께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어두움이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어두움이 있고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인 혼미함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바른판단을 기지고 살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뜨겁고 간절하고 열렬한 그 처음사랑의 감격을 유지하고 살 때에만 우리는 인생과 신앙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단하고 신앙생활하며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안전합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분별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기 쉬운 것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오늘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면 처음 행위도 잃어버리고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면 나아가서는 처음행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해 드리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기억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마음을 우리는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지식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신앙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집과 교만과 독선으로 얼룩진 신앙의 이력인데 그것 가지고 여러분들의 신앙의 거울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매 순간순간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고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의 빛 앞에서 비춰보지 않으면 생명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만하고 거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아버지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막혀진 그 교제의 담장에서 단절된 교제에서 오는 끊임없는 고통을 그대로 받으면서 오기와 인간의 배짱으로 버티고 있는 그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 아닙니다. 피가 흐르고 터져나와도 주님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참회 하는 자, 그리고 주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은 항상 옳고 난 항상 잘못 되었습니다. 오늘 내게 임한 이 많은 고통과 하나님과의 모든 단절과 내 영혼의 모든 상처도 오직 주님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입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믿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우리가 주님의 그 큰사랑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실패하고 똑같이 연약하지만 눈감으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한가지 소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며 가진 것 없어도 주님을 소유하며 또 주님께 소유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남보다 공부를 많이 했나? 큰 교회를 하나? 많은 지식이 있나? 그렇다고 해서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있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주님이 미워하시는 나를 나도 미워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나도 걸어가고 싶어하면서 실패 속에서도 한결같은 그 처음 사랑을 간직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할수 있으면 내 뜻을 버리고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는 바를 좇아서 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이고 그것 빼면 우린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만나 주셨고 또 만나주고 계시고 주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에베소 교회를 보십시오.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니까 그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들이 많은 정결한 행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분별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성령이 자기들의 교회에 하시는 말씀보다는 자기의 상식과 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런 삶을 살아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은 요즘 여러분들을 향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거스르면서 사는 삶을 매우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눈물 흘리지 않을 때에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인도하고 싶어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손을 뿌리치며 거스르는 다수의 많은 영혼들을 인해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자기의 , 자기자랑, 그리고 자신의 교만과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패역한 마음을 고쳐서 겸비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고 육신에 받은 세례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다시금 그 보혈의 피로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씻고 마음에 할례를 받는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을 흑암과 어둠 속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의 빛으로 옮기셨을 때에 여러분들이 주님밖에는 아무도 귀한 분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그 처음사랑의 그 열렬함을 간직하면서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살아가기를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를 향해 진노하지 아니하시고 이 같은 사랑과 이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보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음성 앞에 나아오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8. 사랑은 전투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下)
지난 시간에 7절을 중간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그 교회에 끊임없이 보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고치는 교회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 갈피 갈피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든지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보여주시고 그래서 이즈음에 하나님이 교회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라고 하시는 말씀은 뒤에 나오고 있는 말씀뿐 아니라 앞에 나오는 모든 말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에베소 교회의 모든 형편에 대해서 다 말씀해 주셨지만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이미 이렇게 내가 모든 마지막날에 되어질 일들, 모든 교회들에 대해서 판단하기 전에 제일 먼저 이 에베소 교회를 평가하고 에베소 교회가 부딪치고 있는 이 문제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내가 알려 주어도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 보여 주어도 그것을 들을 사람은 소수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주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불행은 고난이 오거나 역경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의 비바람에 휩싸이거나 환란의 폭풍 속에서 고통하며 울부짓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안타깝게 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를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재앙인 것입니다. 폭풍은 지나가고 뒤웅치는 파도 한가운데서 시련을 한 몸으로 감당해 나가면서도 주님의 음성이 그의 귀에 들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는 한, 그는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시련도 이기고 환란도 이길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환란이 무슨 문제가 되겠으며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해 주시는데 불 가운데로 지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너무 자주 하나님을 향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까지도 함께 잃어버리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비극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해 내신 것은 이제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원하는 바대로 살게 하려고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어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이끌어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이제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대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안목에 좋은 대로 판단하고 우리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고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은 모두 옛사람의 습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제는 내 멋대로 살아가는 모든 삶은 종식되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실을 믿고 그 분이 흘리신 거룩한 보혈이 나의 불순종과 죄악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이렇게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주님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이 내가 원하는 대고 살아가는 자행자지 하는 삶은 십자가에 함께 못박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삶을 영원히 포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우리가 이렇게 우리 멋대로 우리 마음대로 방종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나는 내 소견에 옳고 내 주장과 내 안목과 내 정욕에 옳다고 생각되는 대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죄를 빚어냈고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 보혈의 참사랑을 안 사람들은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이 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헤아려서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주님이 내 인생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며 살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때로는 폭풍과 우레처럼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든지 우리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도 함께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저로 먹게 하리라.” 이렇게 마지막으로 7절 하반절에 기록함으로써 이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평가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약속을 오늘 우리들은 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에베소교회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지금 전쟁이나 전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 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빠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건져주신 그 처음 사랑에 불타서 지체들을 사랑하던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마치 무슨 전투를 하는 교회인 것처럼 생명나무 실과를 다시 약속하면서 이제 그들에게는 그런 것을 주어서 얻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무얼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처음사랑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차갑게 식은 이 에베소 교회가 그 처음 잃어버렸던 사랑을 회복하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사랑으로 충만했던 그 믿음의 행위를 회복하는 것은 커다란 전쟁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처음사랑을 잃어버려 본 적도 있고 또는 회복해 보신적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 주님이 우리에게 처음 가르쳐 주신 말할 수 없이 귀하고 복된 사랑을 잃어버리는 데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안목에 좋은 대로 내 소견에 좋은 대로 그리고 내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그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처음사랑을 잃어버릴 때에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지만 그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정말 우리가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처음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깨닫고 그 사랑을 회복하는 일에 마음을 바쳐서 주 앞에 회복을 위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그는 결국은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아름답고 귀하고 놀라운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 줍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 마치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랑을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처음사랑을 회복해야 할 이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숙제는 많았습니다. 그들은 우선 하나님 앞에서 전에 사랑으로 충만했을 때에 가졌던 그 마음을 회복해야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 없이도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말씀의 지식이 있고 행위가 있고 수고가 있는 이 모든 삶을 아니라고 부인해야 하는 그러한 싸움이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 채 세상의 방탕한 죄악 가운데 흘러갔으면 양심도 그를 정죄합니다. 사람들도 그를 정죄합니다. 그랬을 때 자기가 주님을 버렸고 자기는 지금 하나님을 떠나서 방탕한 쾌락을 맛보거나 방종한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범죄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느날 말씀을 통해서 자기안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많이 있지만 이것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고 사실에 있어서는 마음속에서 진실한 하나님을 향한 처음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잘못된 것이고 그 사랑이 내게 없음으로 인해 내가 이 모든 것들을 회복하고 다시 되찾기 전까지는 내가 하나님앞에서 껍데기밖에 없는 신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하나님의 사랑 마음을 녹이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행위에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깃들도록 만들어 주었던 그런 처음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이 만약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이제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 커다란 싸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처음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영적인 손실들과 신앙의 모든 손해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처음사랑을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 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던 것과 그런 사랑 없이 적당히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를 모두 버리신 주님의 생애와 비교할 때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깨닫는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리고 구체적으로 돌이키고 삶을 고쳐서 결국은 처음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던 그 처음사랑이 우리 안에 다시 역사하는 이러한 신앙과 사랑의 회복이 우리에게 찾아와야 되는데 이것은 커다란 싸움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처음사랑을 상실한채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미건조한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또 하나 잊지 말고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뿐 아니라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채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다시 되새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있지만 그것을 되찾는 사람들은 잃어버리는 사람의 수와 같이 많지 않고 소수라고 하는 사실이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싸우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것 없이는 진정한 기쁨과 은혜가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신자에게는 거룩한 기쁨이 있습니다. 유혹을 이기는 신자에게는 신령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환란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이기는 사람들에게는 담대함과 믿음의 확신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이기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셔서 참사랑을 주시고 그 은혜를 주신 것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하게끔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방법은 이기는 승리를 통해서 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승리보다 더 값진 가치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늘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사도 요한이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받들어서 우리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들이 처음사랑을 잃어버렸구나 이제 너희들이 그 처음사랑을 잃어버렸는데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그 사랑을 잃어버렸고 이제는 너희들이 그 처음사랑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을 너희에게 다 가르쳐 주었다. 가르쳐 주는 것은 나지만 가르침대로 너희들이 살아서 처음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너희 자신들이고 그것은 너희에게 커다란 싸움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수시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 최고의 경배와 사랑이 되고 싶어서 우리마음의 자리의 보좌를 차지하려고 하는 쟁탈전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우리의 마음속에 우상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까지 버리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소유나 우리의 어떤 목표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남김없이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보다도 더 크신 분이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에게 전폭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이나 인간들과 나누어 갖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독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에 의해서 독점되고 그리고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 그것으로 우리가 온전히 만족할 때 그 기쁨과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랑, 주님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때에 우리가 그 사랑에 온전히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 이런 속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적인 문제가 우리 모든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를 제일 먼저 불러 세워서 그 교회를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우리에게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할 필요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기도록 명령하시는 그 분이 바로 이기신 예수그리스도 였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을 아울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가 가까워서 당신이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실 때가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예비된 악의 도구들은 모두 일어섰고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형틀이 준비되고 있었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오는 그 때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열심히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면 올수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욱더 자기의 양떼들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 한 분께 모으고 그분께만 경배하고 그 분만을 사랑하고자 애쓰시면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섬기면서 살아오셨다가 마지막에 오늘 이렇게 부활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우편에 않으셔서 당신의 교회는 향하여 당신이 가지고 계신 영적인 왕권과 우주적인 주권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이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기 전에 에수님께서 어떻게 최후를 마치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를 당신이 흘리시는 피로 모두 적시셔서 그 교회들을 보혈의 피로 사실 준비들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죄 가운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불행한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의 보혈을 흘려 그들을 그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는 첫 열매들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난, 아버지 앞에 올라가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처음에는 이 잔이 지나칠 수만 있다면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시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바꾸어서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결국은 그 응답을 받아내셨던 그 믿음의 기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진노를 홀로 감당 하셨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더러운 모략을 그대로 받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던 고난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가시관을 쓰시고 형벌을 받으시면서도 만유의 주시요,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자기가 지으신 그 인간들로 인해 치욕과 고난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참게 하셨던 그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사랑을로 이기고자 하시는 믿음이 시킨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순간 순간 막아서는 수많은 유혹과 사단의 궤계와 인간들의 수많은 박해와 협박들을 더불어서 싸우시면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주님의 생애가 이미 우리에게 사랑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싸움을 요구하시는지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 은혜 안에 살아야 할 그 피로 빼어낸 바 된 고귀한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향한 처음사랑.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처음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싸우는 용사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가운데 찾아와서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철저히 항거하나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시골에서 이런 과일들을 가꾸면 그저 여름 같은 때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슬그머니 들어가서 무도 뽑아먹고 사과도 하나 따먹어도 그저 애교로 봐 주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수박을 서리하러 들어간 사람을 원두막에서 지키는데 들어왔으면 나가라고 소리치면 되는데 총으로 쏘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요즘은 “서리”라는 낭만이 없습니다. 원두막에서 총들고 지킵니다. 잘못하면 맞아 죽습니다. 과일하나 따먹으려다가 맞아 죽습니다. 살벌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누구 주머니에서 오천원 짜리 한 장만 훔쳐보십시오. 개 패듯 팰 겁니다. 가만두지 않습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 몇 개만 주워와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가게 주인이라면 당장 112에다가 전화 할 겁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의 소유와 자기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세상이 와서 빼앗아 가고 마귀가 와서 그 처음사랑을 짓밟았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얼마나 싸우는 자세로 그 사랑을 지켰습니까?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분투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처음사랑과 말할 수 없는 그 은혜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투쟁하고 계십니까?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지 않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내 재물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벌벌 떨고 그 재물하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했던 것처럼 내가 그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지 아니하였던 것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나의 안일하고 허튼 신앙의 자세가 나로 하여금 나의 신앙을 잃어버리도록, 나의 사랑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점점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저도 저 자신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랍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가면 정말 내 인생이 이제 주님의 것이 아닌 게 어디 있나.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주님이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그 십자가 앞에 주님!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주님이 받으신 그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고 이제 내가 그 십자가 아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제는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고백하고 기도한 것도 진실이었고 오늘 또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차가운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내 안목에 좋은 대로 살고 수시로 들려오는 내 안에서 외치는 믿음의 음성을 거절하고 안목의 판단을 따라서 살아가는 주님 떠난 이 생활도 아까 고백했던 그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생활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신앙생활의 진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은 신자들에게 불변하는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시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새고 하시기 위해서 결심하시거나 회개하시거나 참회 하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다릅니다. 뭔가 주님을 향해서 고백하는 사랑은 진실하지만 불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을 아무리 우리가 말로 “영원토록 사랑한다는 이야기 영원토록 했죠. 그런데 그 영원토록 사랑이 왜 3일도 못가요? 무슨 영원이 3일 입니까? 요새는 영원이 3일 인가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바로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얼마나 훌륭합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말하잖습니까? 그런 처음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또 잃어버린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고 그것을 되찾고 살아가는 삶은 싸움과 마찬가지인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사랑과 그리고 잠근 동산과 같은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와 이 처음사랑 거기에서 비롯되는 진실한 모든 삶, 사랑이 넘치는 이 모든 성도의 생활 . 이것을 유지하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장난처럼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진지하고 싸우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에 입각해서 묻고 싶습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참 놀랍습니다. 저도 1년 동안 하나님 앞에 돌아봅니다. 마른 뼈와 같고 죽은 자와 방불한 인생들을 하나님이 살려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주님을 향한 태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과 말할 수 없는 인자하심을 보여 주셔서 죄 가운데 있을 때는 회복을 주시고 유혹 받을때는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주셔서 우리를 오늘 여기까지 하나닙이 데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지난 1년 동안 믿음을 위해서 한번 입술을 깨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배반할 수 없어. 난 주님의 뜻대로 살거야. 주님이 나에게 명하신 것이 내게 아무리 무겁고 어렵더라도 주님이 내가 이것을 행하므로 기뻐하신다면 나는 이것을 향하면서 살 것이야.“ 주님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성취하고 이루시기 위해서 오래 참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승리 하셨던 것처럼 매 순간순간 분투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위해 살고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자기를 견고히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굳게 마음먹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간 적이 얼마나 있는지 우리 이 추수감사절에 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싸우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열매를 그의 인격과 신앙 안에서 거둬 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고 주님의 사랑을 배반으로 되 갚는 불효막심한 일들은 우리들이 수시로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과 더불어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이나 사람이나 여건을 바라보면서 적당히 뒤로 물러가고 사랑을 잃어버린 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구실과 합리적인 이유를 발견해 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한 그 수많은 회복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친절과 사랑을 보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교회였는데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해야 할지를 주님이 친절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알려 주셨습니다. 회복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교회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마음을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주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지난 한해동안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수없이 많지만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감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수시로 우리 교회를 향해서 또 저 개인을 향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시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 번 두 번 마음을 보이다가 우리의 그 드러내는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우리는 즉각 자존심이 상해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마음을 우리가 알아드릴 때나 알아드리지 않을 때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리가 돌이킬 때까지 당신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뒤로 미끄러져서 침륜에 빠질 때에 우리를 보고 고통 하시는 주님의 아픔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회개하는 자들을 맞으셔서 그들을 어떻게 새롭게 하시고 싶어하시는지 우리보다도 더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의 회복을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 말할 수 없이 귀한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만큼이라도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이만큼이라도 아버지 앞에 작은 열매를 1년 동안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그 사랑에 전적으로 힘 입은바가 컸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 마음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이지만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그 마음 때문에 감동을 받아서 많이 타락할 사람들이 덜 타락하고 완전히 미끄러져서 내동댕이쳐질 사람들이 그래도 거미줄 같은 믿음을 붙들고 주님 안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1년 동안 먹이고 입히신 것도 이러한 사랑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분명히 하나님자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여러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찹 사랑을 회복하는 일에 전투하는 자세로 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되찾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사랑, 그것은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 되었습니다. 지치고 곤고하고 힘들어 보일 때는 우리는 히브리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죄인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던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와 더불어 싸우되 예수그리스도처럼 죄인들을 용서하는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는 않은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우리의 신앙의 허리띠를 동여매어야 될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은 이제 추수할 곡식이 거둬지는 때입니다. 그리고 잠시후면 그 거두어진 곡식들이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져서 창고에 보관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앞에서부터 낫이 베어져서 낫에 의해 베어져 쓰러지는 곡식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제 금년 얼마 남지 않은 이 때를 여러분들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시는 이 말씀이 바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채 건조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려고 하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경고와 마지막 사랑의 초청인 것을 알고 이 추수감사절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 깊이 이런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에 도전장을 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1년 동안 그런 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있었고 부실한 신앙생활의 열매로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심에도 불구하고 유리하고 방황하며 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기의 죄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어두운 죄악 길에서 주님의 사랑을 등지고 살았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지나간 날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나간 날보다 더 중요한 남은 날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정말 천한 인간의 몸으로 구유 위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면서 이제 우리는 금년을 또 보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 남은 한해동안에 신앙의 허리띠를 동이고 여러분들이 자신이 잃어버린 신앙의 귀한 하나님의 선물인 이 첫사랑을 회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이 추수감사절에 신앙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의미를 쉽게 알기 어려운 한 구절을 들려줌으로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판단에 끝을 맺고 있습니다. ”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의 말씀은 즉시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 한가운데는 두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약을 알게 하는 나무였고 또 하나는 생명나무였습니다. 그 실과를 거기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나무가 어떤 효과나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생명이 붙은 이것은 모두 귀하고 좋은 것이라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 생명나무 , 생명의 실과 . 하여튼 생명은 좋은 것입니다. 죽음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 제일먼저 아담과 하와를 저주하시고 앞으로 있을 일들을 예고하신 후에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속히 그들을 좇아내고는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시고 하나님의 천사들인 그룹을 배치해서 누구도 그 생명나무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그 실과를 손대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동산을 쫒겨난 후에 제일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생명나무실과는 주님이 주셨고 그 생명나무 실과는 말할 수 없이 귀하고 죽음과는 비교되지 않는 값진 것이었지만 범죄 했을 때에 그 생명나무 실과는 인간의 접근을 거절한 채 그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 중앙에 홀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구도 그 거룩한 땅 거룩한 나무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심판의 화염과 당신의 천사들인 그룹들을 배치 하셔서 그 생명나무를 지키셨습니다. 누구도 접근해서 따먹을 수도 없고 그것을 맛볼 수도 없었던 그 나무를 오늘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을 향한 처음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싸우고 결국 주님을 향한 처음사랑을 다시 회복하고 쟁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그 생명나무 실과로 나아오는 길을 열어 주셔서 처음 조상들이 누리지 못했던 그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음에서 이긴 성도들에게 약속된 영생과 은혜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미래에만 주어지는 종말론적인 약속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잃어버린 처음사랑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 안에서 강물과 같이 넘쳐나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바로 생명입니다. 사랑의 빛을 잃고 주님을 향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 영혼에는 죽음의 그림자기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주님의 마음을 보여 주셔도 감동 받지 못하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도 함께 슬퍼할 수 없는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교회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나면 하나님의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그 교회와 개인 안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사랑을 되찾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값진 선물입니다. 그런 생명을 주시니까 그 생명을 통해서 이제 사랑을 지켜나가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믿음의 열매를 지켜나갈 수 있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은 교회 안에 주님이 게시는 것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한 2년 전에 집회를 갔습니다. 한 500명쯤 모이는 교회인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어떤 성도 한 사람이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성도가 이런 아야기를 해요. 그가 10년 가까이 그 교회를 다녔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나니까 이상하게 교회당은 그대로 있는데 그 다음주에도 교회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렇게 눈물이 흐르더랍니다.주님이 자기를 바라보시는 마음이 자기에게 느껴지니까 주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보면 슬퍼서 눈물이 흐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이 기뻐하시니까 그 기쁨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역사가 일어나더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그 교회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이 그 성도의 마음 가운데 계실 때 그에게는 주님이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처음사랑을 회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주십니다.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제 무엇으로 주님만이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우리 안에 홀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의 사랑을 홀로 받으시려고 하는데 그 사랑을 빼앗기 위해서 다가오는 수많은 도전과 시험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싸울 수도 없고 생명의 그런 은혜 없이는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고 믿음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은혜 없이 누구도 향기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생명의 놀라운 은혜, 향기로운 하나님의 사랑의 부으심, 생명의 은혜, 교제의 축복.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만 우리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비취고 모든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만 우리의 최고의 사랑을 바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호서 저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이 주님의 말씀을 마칩니다. 마치면서 우리들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런 처음사랑을 회복하기를 너무나 원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삶 구석구석 갈피갈피에 우리의 행위가 주님을 향한 고백이 되고 고백한가운데에는 주님을 향한 그 처음 뜨거운 사랑, 불같은 사랑, 불꽃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과 함께 우리에게 역사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사랑을 부디 회복하고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금년에 하나님 앞에서의 매우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 응답받고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이 은혜를 새기면서 그런 처음사랑으로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불꽃처럼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시록의 에베소교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