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Ⅱ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12월 12일
목 차
1. 하늘에 계신(마 6:9) 1997.4.27 주일오전 1
2. 하나님 아버지 ①(마 6:9) 1997.5.4 주일오전 16
3. 하나님 아버지 ②(마 6:9) 1997.5.11 주일오전 27
4. 우리 아버지(마 6:9) 1997.5.18 주일오전 40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1(마 6:9) 1997.5.25 주일오전 50
6.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2(마 6:9-10) 1997.6.1 주일오전 61
7. 나라에 임하옵시며 1(마 6:9-10) 1997.6.15 주일오전 70
8. 나라에 임하옵시며 2(마 6:9) 1997.6.22 주일오전 81
9. 나라에 임하옵시며 3(마 6:9-10) 1997.6.29 주일오전 92
10. 뜻이 하늘에서...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마 6:9-10) 1997.7.6 주일오전 105
11. 뜻이 하늘에서...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마 6:9-10) 1997.7.13 주일오전 117
12.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1997.7.27 주일오전 128
13.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1(마 6:12) 1997.8.10 주일오전 139
14.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2(마 6:12) 1997.8.17 주일오전 152
15.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3(마 6:12) 1997.8.24 주일오전 165
16.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4(마 6:12) 1997.8.31 주일오전 177
17.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5(마 6:12) 1997.8.31 주일오전 190
18.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마 6:13) 1997.9.7 주일오전 204
19.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1997.9.14 주일오전 220
2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마 6:13) 1997.9.21 주일오전 232
1.하늘에 계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김경애
주기도문Ⅱ 1 (1997. 4. 27 주일오전)
교부 가운데 초대교부 한 사람은 이 주기도문은 작은 복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농축하고 있는 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후에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을 가르치는데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하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가 사도신경이라면 기도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 십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주기도문을 작은 복음서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신약성경 나아가서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제각기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고 분명히 성경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데 가만히 대화를 해보면 신앙이 복음적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 중의 중요한 이유 하나는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성경을 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을 많이 읽기에 앞서서 주기도문을 깊이 공부하는 것이 무조건 성경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가르쳐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최대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만큼 주기도문이 본래의 뜻과는 곡해되어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우리의 기도생활을 보십시오. 주기도문과는 상관없는 주기도문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기도생활, 또 우리의 삶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바로 얼마나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이 얼마나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기억해야할 것은 이 주기도문이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적인 선생들이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는 일들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하였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으로 누가복음 11장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주기도문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후일 예배를 빨리 끝내거나 목사님이 없을 때 혹은 중요하지 않은 예배를 드릴 때 마지막 끝나는 순서로써도 사용할 수 있도록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주기도문에 대한 학살입니다. 주기도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가르쳐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에 살아가시던 삶에 축약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기도를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주기도문이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매우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 적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 적이지 않다는 말은 곧 우리의 삶이 복음적이지 않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한 사람이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거나 한 교회가 참된 영적인 각성을 통해서 부흥을 경험하기 전에는 이 주기도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사람들의 가슴과 삶과 기도 속에 생생하게 역사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복음적인 가르침과 사도들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그 많은 교훈들도 목표하고 있는 바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 많은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그 하나님의 나라는 주기도문을 알고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며 그 삶을 위해서 기도하는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면서도 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처럼 더디 오는지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들의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두 개가 실려 있습니다. 그 두 개를 대조해보면 주기도문이 골격은 같지만 똑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현이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순을 놓고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합니다.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는 두 가지 의견은 이것입니다. 원래 주님이 누가복음에서 한번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을 누가복음에 썼는데 후일에 마태가 누가복음을 참고해서 주기도문을 좀 더 세련되고 상세한 표현으로 만들어서 마태복음에 집어넣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 각기 두 번의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현장을 마태도 목격을 했고 누가도 목격을 했는데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가르쳐주신 것을 기록해서 서로 보고 쓴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복음서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두 번째 설을 우리들이 받아들인다면 그러면 우리는 즉시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주기도문도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차가운 법조문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그것을 한글자도 틀리지 않게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려고했던 것은 주문처럼 암기하는 암기용 주기도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고 또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니까 기도하는 방식 즉 기도의 패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깊은 기도 생활, 긴 기도생활 속에 골격을 뽑아내어서 가르쳐준 것이 바로 이 주기도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을 우리가 계승해야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배시간의 한 순서의 장식으로써의 주문이 아니라, 암기용 주기도문이 아니라 이 주기도문이 우리의 기도생활의 패턴이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삶의 한 방식을 반영하는 기도제목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간구할 때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해서 통곡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기도문을 외울 때 우리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격하고 그 주기도문 때문에 우리 속에서 통회하는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정해진 기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문제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기도하는 주기도문이 매우 낯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기도하는 내용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기도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헌금 한번 한 적이 없고, 복음을 한 번도 전해본적이 없고,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타는 심령도 없는 사람이 세계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썰렁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애쓰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고, 지금도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또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런 영적인 전쟁과 구원의 감격이 삶속에 있는 그 사람이 전도와 그리고 선교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것은 얼마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지도 아니하고 자신의 안락한 삶 이상의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태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 높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보고 그 내용들을 본떠서 앵무새처럼 조아리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도 쑥스럽고 낯간지러운 것이겠습니까? 주기도문이 바로 우리에게 그런 것이 아닙니까? 주기도문을 외우는 동안 우리는 막힘없이 외우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딴 생각을 하면서 이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러면서 이 주기도문은 마틴 루터의 말씀대로 학살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 이대한 주기도문의 첫 시작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시작합니다. 이중에서 오늘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우리가 이 속에서 복음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호칭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도록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에 관한 다양한 호칭들이 나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하나님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그대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호칭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들이 파악하기 전에 우선 오늘 성경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합니다. 먼저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하고 계신다고 오늘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공부를 하지 못하거나 지식이 떨어지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판단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고백하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패역하고 사악하고 가증한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육체의 정욕과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의 소원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방탕하게 살아가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어리석은 사상과 인간의 수많은 사고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철학과 학문들이 탑처럼 높이 쌓아 올려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많은 지혜와 사상들을 배웁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문화를 건설하고 그리고 자신의 나름대로 문명세계를 건축해갑니다. 그리고 그 문명세계들이 다시 인간들을 만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거역하겠고 누가 그런 사상과 그리고 한 시대의 흐르고 있는 그런 사고를 거슬러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상이 아무리 훌륭하고 인생에 대한 견해가 아무리 화려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앙을 토대로 하지 않는 인간의 모든 사상과 철학은 헛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동의와는 관계없이 당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만들어놓으셨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창조된바 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가운데 하이데거 같은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어렴풋이 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것은 세계 속에 불가항력적으로 던져진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세상에 지어놓으셨고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십니다. 사람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판단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온 땅과 만물위에 당신의 신성을 깃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피조세계를 뛰어넘어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세계에 계십니다. 또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인간의 모든 일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과 세상나라의 백성과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굳게 믿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주기도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너희도 내가 존재하는 것을 믿느냐?’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가증하게 살고 방종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에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이지만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찌르면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삶은 과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과 다른 삶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똑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주기도문을 펴면서 만나는 첫 번째 질문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만질 수도 없고 그리고 끌어안을 수도 없지만 그 하나님이 항상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고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단지 존재하고 계신분일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하늘에 가두고 싶으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후의 기도의 제목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의 끊임없는 관심이 하늘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했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을 위한 것이었고, 용서하는 것도, 죄지은 자들을 사하여주는 것도,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기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관심에 비추어볼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러한 표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님을 하늘에 묶어두시기 위함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하늘에 계시지만 그 하늘에 속한 위대한 권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불신자와 다름없는 주기도문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염려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여러분은 많은 근심과 염려 속에서 생활해오셨습니다. 다양한 생각과 염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근심들이 여러분의 마음자리를 메웠습니다. 많은 일들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은 진지하고 그 고통은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이고 그리고 심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고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든 삶, 이런 것들은 동물적인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깊이 고민하고 염려하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찮은 것들이고 우스운 것들입니다. 적합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우스운 이야기들을 찍어놓은 비디오테이프를 어느 케이블 방송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그중에서 2등을 한 대표작이 무엇이냐 하면 그 집안에서 기르는 아주 멋있게 생긴 포인터 종류의 검은 개였습니다. 그 개가 화장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세면대 위에 두발을 올려놓았는데 이 개가 깜짝 놀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험악한 놈 하나가 나타난 것입니다. 거울에 자기의 모습이 비친 것입니다. 갑자기 눈에 빛을 내기 시작하고 짖기 시작하더니 그런데 그 앞에서도 똑같은 소리로 똑같이 또 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울을 앞에 놓고 이것 한번 붙어? 말아? 코를 벌렁거리면서 한 10여 분간을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낑낑대는 것입니다. 개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코미디 소재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인정해야할 바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삶의 문제만을 싸안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 코미디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종 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우리들이 확신하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것을 기억하십니까? 부흥회의 역사를 보면 성령의 축복이 많던 시대에는 심판도 분명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많이 느끼는 그 상황에서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하나님에 대한 무서움, 이런 것들은 충분한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삶속에 일어나는 작용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의 부흥이 일어날 때 성령이 그 위에 강력히 임하시니까 비로소 그 성에 있는 사람들 위에 하나님을 향한 큰 두려움이 떨어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깊이 느끼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에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이 그들에게 보이실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 역사하시고, 나를 사용하시고, 나를 책망하시고, 나를 움직이시고, 감화하시고 하는 것들이 느껴지는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점점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린 다음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느껴지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기 때문에 점점 정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점점 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삶을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을 보십시오. 명백히 자신의 죗값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끔찍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들 중의 한 강도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모든 삶을 감찰하시고 지켜보시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그 진술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여러분의 삶을 불꽃과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으로부터 멀어진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외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분이시라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새삼스럽게 소개해주셨습니다. 저는 뭐 그렇게 깊은 조예는 없지만 신문이나 혹은 잡지를 볼 때 빠짐없이 들여다보는 기사는 과학에 관한 기사입니다. 특히 천체에 관한 기사를 눈여겨봅니다. 그런데 최근에 주의 깊게 신문을 보신 분들은 읽으셨을지 모르지만 그 위성에 하나의 커다란 우주의 사건 하나가 잡혔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태양에서 근래에 없었던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태양은 언제나 작은 폭발이 있습니다. 그 폭발 때문에 그 열과 빛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폭발점이 위성의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그것을 전송했는데 그 수치가 저를 많이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펑 하고 폭발하는데 그 불길이 솟아오르는데 그 불길이 위로 솟아오르는 속도가 시속 360만 마일이랍니다. 이 마일은 우리가 얼떨떨하니까 계산기를 꺼내서 곱하기를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시속 약 600만 ㎞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600만 ㎞인데 속도가 얼마가 되는가 하고 다시 3600으로 나누었더니 계산을 하니까 초당 얼마입니까?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평하고 폭발해서 그 불길이 치솟는데 그 속도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계산으로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계산을 해보니까 똑딱하는 동안에 수천㎞를 그 불길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짐작이 갑니까? 짐작이 안 될 것입니다. 똑딱 하는 동안에 계산을 해보니까 부산가는 거리의 두 배 정도의 거리를 불길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불길이 치솟아 달려가는 것입니다. 숫자가 지금 생각났습니다. 1650㎞/초속입니다. 초속 1650㎞ 이니까 서울과 부산가는 거리의 약 세배 정도의 가는 길을 1초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그 태양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신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불타고 있을 것입니까? 아무도 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우리에게는 수수께끼 같을 뿐입니다. 이같이 드넓은 우주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우리가 추측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굳이 하나님에 관한 수많은 수식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기도할때마다 너희는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너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태어나서 땅과 함께 씨름하고 땅에 있는 것들 때문에 고뇌하다가 땅속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위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몇 해 전에 학생들을 데리고 부여에 내려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물관이 많은데 가서 이렇게 보여주면서 그 박물관에서 어느 귀족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을 있던 그대로 복원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엄청난 세월이 흘렀는데 사람이 죽었는데 뼈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머리카락, 손톱 그런 것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것은 잘 썩지 않는 모양입니다. 거기 그대로 머리 있던 자리에 머리카락만 남고 손이 있던 자리에 손톱만 남고 그리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뿌연 재만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때마다 하나님을 너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하고 땅에 있는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씨름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다 보면 우리는 자칫하면 하나님을 이웃집에 있는 아저씨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도를 마치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과 줄다리기나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그렇게 이 땅에 있는 지극히 작고 연약한 한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부르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이 하나님이 이렇게 하늘에 계신 분이신 바로 온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잊혀져가는 찬양의 제목중의 하나는 온 땅과 만물을 지으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시인들은 이것이 아주 즐거운 노래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했고 하늘의 위대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 지은바 된 아주 사소한 하찮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창조의 위대한 일들을 여러분 얼마나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만드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손앞에 있는 지극히 작은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들을 얼마나 자주 인식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이 온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충돌하지 않고 운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별들을 움직이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하고 자신의 인생의 계획표에는 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 시대를 새롭게 맞이하고는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랑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곁을 떠나서 죽음으로 갑니까? 왜 우리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땅에 있는 일들로 마음이 혼잡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의심하는 마음이 들려고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에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이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우리와는 구별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껴지기 시작할 때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본분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후레자식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지 않고 멋대로 살아가면서 가문에 먹칠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 욕을 돌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입술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고백하면서도 삶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언제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하고 하나님이 온 땅위에 뛰어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성품에 대한 묵상으로 자신의 삶을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두 하나님이 누구시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본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음에 없다고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으랴? 그리고 또 하나님이 있다고 하신들 차마 그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보시겠느냐며 자기의 마음의 욕심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이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요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반항하며 살아가면서도 일호의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집 한구석에 붙어사는 벌레의 다리에 붙은 세균이 온 땅에 있는 집을 지은 건축주에게 반역의 칼을 드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의 친구나 말동무처럼 장난치고 놀 수 있는 농담하는 친구로 자신을 소개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친밀하게 농담처럼 생각하고 친구처럼 대화하는 것을 영적인 깊이인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온 땅과 온 하늘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돌려드릴 수 있는 모든 존귀와 영광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 하나님을 소개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얘들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든지 성경이 너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하도 많은 묘사를 가르쳐주고 있지만 너희는 잊지 말아라 너희가 기도할 때나 살아갈 때나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너희는 그분의 손으로 지은바 된 피조물일 따름이라. 질그릇과 같은 너희의 인생을 만드시고 빚으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느꼈다고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엄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티끌 같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생각하며 엎드려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생애의 커다란 영적인 전환에 대해서 술회하면서 어느 도시의 고서방을 뒤지던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서 팔리지 않아서 고서방에서 뒹굴고 있는 두꺼운 책 두 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것을 읽어가면서 자신은 갑자기 에드워드라는 한 사람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고 티끌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에드워즈의 뛰어난 지성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만 그의 학식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에드워즈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전능하고 위대하시고 하늘에 속한 성품을 발견했을 때 자기가 티끌과 같아지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저작을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 앞에서 티끌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을 느꼈습니다. 만약에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한다면 그때에 느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과 시편과 선지자들의 글속에서 너무나 자주 과장될 정도로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노래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무엇으로 표현할지에 대해서 티끌, 지푸라기, 벤 풀, 벌레, 하여튼 인간 속에서 무엇이 가장 비천한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애쓰면서 그것들을 통해서 인간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묘사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그렇게 온전히 순종하고 겸비하게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묵묵히 따르는 그러한 인내와 복종의 삶을 살기보다는 말이 많고 의견이 많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의 의견으로 성경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왜곡해보려고 시도하는 지적인 교만이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는 겸손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교만함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모든 무지의 죄악을 끊어버리고 겸비하게 낮아져서 하나님을 소망하고 주님을 바라며 하나님께 영예와 존경을 돌려드리는 겸비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알지 아니하고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결코 겸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손에 지은바 되어서 티끌과 같아져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처분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이 아닌 것이 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로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그들의 사고로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안계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살아있어도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처럼 지구에 남아있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지구에서 쫓아내야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당신이 만든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간들에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분이시고 우리는 단지 그의 손으로 지은바 된 비천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생들일뿐이라는 사실을 알리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 진실을 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방종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악을 쌓아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들을 지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하고 두려우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움직이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홀로 계셔서 역사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의 삶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여러분이 이번 한주간도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주님을 위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시기도 하고 승리를 주시기도 합니다. 막혔던 길을 열어주셔서 여러분 속의 기쁨을 새롭게 하시기도 하고 기도의 문을 열기도 하시고 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할 때 교제의 문이 닫히는 일도 일어나게 허락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것인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또 오후에 보려고 하는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일과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소홀히 여기시지 않습니다. 개입하셔서 간섭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아버지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면서 여러분을 섭리하시고 다스려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태어난 날짜를 아실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부르실 날도 계획하고 계시고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지 아니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18세기에 유행하던 사상 가운데 소위 이신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하나님을 철학적인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태엽을 감아놓으면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듯이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약과는 달리 오늘날은 성숙한 시대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심판을 관장하실 뿐이지 더 이상 인간의 세세한 일에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그런 사조가 있었습니다. 철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범사에 우리를 향한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실 때에 우리는 단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속에 개입하셔서 당신을 뜻을 우리를 통해 성취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인생이 무엇이 관대 나 같은 인생의 이 일에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데 인간의 이 작은 일에도 그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만군의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깊으신 뜻을 보이시고 우리가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를 놀라운 간섭이 우리에게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방종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이 고통이겠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있어서 간섭하심은 그야말로 은혜요, 감격이요, 기쁨이요,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 첫 문을 열면서 우리는 제일 먼저 이런 교훈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이 다스려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이옵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말씀 앞에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하나님을 깨달으며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이런 주기도문의 첫 호칭 중 반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을 통해서 소망이라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우리에게 땅에 보물을 쌓아두고 살지 말도록 우리에게 권면하고 그리고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있는 보화를 사모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를 공경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은 세상에 살아있으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추구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추구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땅에 있지만 하늘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면서 제일 먼저 하늘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들도록 우리에게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때 그의 생애는 고난과 시련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목적 없이 고난을 받는 삶을 사셨습니까? 한 맺힌 가운데 시련을 견디는 삶을 단지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견디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분깃이 고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상급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시실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는 삶을 사시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의 자세를 잃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인생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가장 소원하고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그리워하면서 자기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 때문에 고난을 받고 복음과 함께 시련을 당하는 모든 이 세상에서의 불만족스러운 삶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면 또한 위엣 것을 바라고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땅에 있는 것과 함께 고민하고 땅에 있는 것과 함께 염려하다가 땅에 있는 것으로 인생이 마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찾고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불만족과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 고통의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에 피할 수 없는 고난이면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위한 고난이고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시련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고 그리고 앞에 있을 영광스러운 상급과 위대한 면류관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잠시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영광과 기쁨으로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든 탐욕과 더러운 욕망과 범죄는 이 세상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부르실 그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우선 점검해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내세에 관한 설교를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까? 장례식 빼고 말입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죄악에 발이 묶이고 근심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을 때
(찬양)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봤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나 눈물 흘리네
잠시 후 이 고난의 바다가 지나고 눈물의 계곡을 지나면 그토록 뵈옵고 싶어 했던 주님이 어둠도 없고 고통도 없는 밝고 밝은 하늘의 나라에서 우리를 맞이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소망이 되기는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고 능욕을 당하면서도 죄를 범하지 않고 외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내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는 잠시 머물다 사라질 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보다 완전한 집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지지만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영원한 내세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잠시 주시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운동선수로 말하자면 게임에 나아가기에 앞서서 몸을 푸는 락카와 같은 곳이고 여행객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타고 갈 열차를 잠시 표를 사서 기다리는 대합실과 같은 곳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1967년도입니까? 6일 전쟁이 중동에서 일어났을 때 일본, 미국 할 것 없이 유학을 하던 이스라엘의 청년들과 그리고 유학은 아니더라도 유대인들이 대부분 귀국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계실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많이 하던 장사가 있었는데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보석상과 청과상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석상은 오늘이라도 보따리를 싸면 한가방 밖에 안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청과상은 왜? 매일매일 사다가 팔고 종치는 장사니까 그러니까 자기 발목을 이방의 땅에 묶을 염려가 없다는 것이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언제든지 부르면 갈 수 있게끔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나그네와 같은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주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한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에 들어가면서 하늘이라는 첫 단어를 만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신 것처럼 또한 우리가 주님의 아들인 것처럼 주님이 하늘에 계시고 이 땅도 잠시 있다 갈 곳이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하늘에 머물러 있어야할 존재인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야할 마땅한 성품을 가진 인간이 이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갈 때에 많은 고통과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세상에서 불만족을 경험합니다. 영원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찰나에 지나가는 것들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삶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 앞에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어 하는 썩지 아니할 소망을 가진 인간들이 잠시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면서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보좌는 썩지도 아니하고 쇠하지도 아니한 가운데 영광 가운데 오늘 우리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아도 나그네처럼 살고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길손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소망을 본향에 두었기 때문에 나그네 길을 지나는 동안에 좋은 집을 짓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 터전을 가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이라도 떠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의 첫 단어를 통해서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얘들아! 나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너희들아! 너희의 본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니 그 나라에 소망을 가진 백성들이 되어라. 두 번째 발견하는 교훈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이라는 이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동기로 예수를 믿게 되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유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나오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들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려주실 때 그때 그들이 교회에 나온 이유와 신앙생활의 목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인생이 무엇일까? 도가 무엇일까? 그러면서 나오면 정말 좋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나옵니다. 변화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변화되면 하나님을 왜 믿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만 끝나면 부인들이 교회에서 한 30미터쯤밖에 안 떨어진 전봇대 밑에 옹기종기 모여서 뭔가를 숙덕거리면서 주고받습니다. 무엇인가 했더니 주일은 곗돈을 주고받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그 계에 안 떨어지려고 교회에 꼬박꼬박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곗돈 타는 재미로 나오는 것입니다. 오야는 김 집사, 그 다음에 최 집사, 박 집사 할 것 없이 집사님들이 계를 만들어서 나중에는 교회에서 혼내서 다 깨뜨려버렸지만 그런데 목사님이 마음이 좋아서 마지막 번까지 타고 끝내라고 그래서 마지막 번까지 타고 끝냈습니다. 여러분 그런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은혜를 받고나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은혜를 받고나면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든지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는 다양한 동기로 교회에 나왔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바로 연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에 들어가면서 많은 기도의 제목을 주님이 가르쳐주셨지만 단지 이 기도 때문에 우리들이 승리하고 이기는 삶을 산다고는 믿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으니 너희가 살아가는 것이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의 도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외울 적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시고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세상에서는 포기될 수 없는 관계라는 신념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는 세상을 봅니다. 그런 세상을 볼 때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그렇게 절망적인 때에도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들은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다는 고백을 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신의 삶과 자신의 도덕적인 상태나 신앙의 상태에 대해서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매일 확인하고 또 하나님에게 그것을 상기시켜드려서 주님이 우리를 향한 도우심을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도록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 하늘위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마지막으로 주목하고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는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이 강한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찬송할 때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서로 상기시켜주는 일을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언제든지 그 하늘위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실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할 필요가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서 복음을 전하지만 그러나 효과가 미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외치는 사람도 적지만 외치는 사람이 있어도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선교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때입니다.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는 또한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흙탕물에 맑은 물 한 대접을 들이붓는 것밖에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절망에 우리들이 붙잡힐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 타락한 도덕적인 타락의 시류를 거슬러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하나님의 법도는 낡은 도덕률처럼 여겨지고 세상에 규칙들과 세상의 사조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도덕적인 삶을 규율하고 규제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커다란 물결 앞에서 이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이런 시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져 보이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보자고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섰지만 비웃듯이 세상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묵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땅과 하늘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늘에 계셔서 당신이 원하는 나라, 당신이 원하시는 교회, 당신이 바라보시기에 준비된 영혼에게 지금 이 시간이라도 하늘의 거룩한 능력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주실 수 있는 그 하나님, 능력과 권능을 한손에 가지고 계신 그 하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고난 받던 시기의 선지자나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도 낙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인간의 많은 사상과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간의 철학들과 함께 지치고 피곤할 정도로 다투고 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사상과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인간의 사회 속에서 통용되는 모든 사상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우리는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복음이 초라해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이 비굴한 교회시대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오히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묵은땅과 같이 그렇게 굳어져버렸지만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다시 한 번 땅에 있는 교회와 그 백성들을 기뻐하셔서 권능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있는 백성들에게 부어주시기만 하면 다시금 하나님이 다스리심이 온 땅에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날이 이를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하늘에 있다고 고백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삶의 모든 희망은 우리의 근원이 되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수를 압시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달읍시다. 그리고 매순간 우리같이 연약한 인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하고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를 붙들어주셔야 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간구하고 고대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는 티끌과 같고 벤 풀이 마른 것과 같은 이 존재들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삶의 출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2 (1997.5.4 주일오전)
2.하나님 아버지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는 주기도문의 첫 부분인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를 가르치시기에 앞서서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신지를 우리가 마음속에 새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다가 보면 자기가 기도하고 또 응답받아야 할 제목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관심의 초점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응답을 받는 것, 이것이 가장 간절하고 절박하게 됩니다. 사업이 기울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업에 축복을 주시는 것이 가장 절박한 제목이고 또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을 주시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박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응답을 많이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견고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정말 영향을 주는 것인가 하는 회의 아닌 회의를 느껴볼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방법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이런 이런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저런 저런 제목들을 위해서 간구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생각하도록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 이름은 여러 수식어구들을 동반하고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도 나타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도 나타납니다. 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도 나타납니다. 수많은 수식어구들을 동반하고 나타나는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너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또 ‘아버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 기도를 들으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도록, 나아가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인식이 이후에 계속되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주장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예수님만이 행하시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 33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다가 시위대 뜰에 투옥되어 그 예레미야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먼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예레미야에게 반복해서 가르쳐 주신 후에 부르짖으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렇게 기도하도록 너에게 요구하고 있는 나 여호와가 일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주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외쳤지만 그 백성들은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음 주지 않았습니다. 비록 선지자였지만 이와 같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자기를 옥에다가 가둔 그 백성들을 보면서 그는 낙담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말에 순종하여 예언하고 있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환경을 인해서, 네가 투옥된 네 형편을 인해서 나 여호와가 아무 일도 행하지 않고 있는 줄로 생각하지 마라. 나 여호와는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라,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후에 예레미야로 하여금 부르짖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셨던 그 유명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 땅에 두고 가는 제자들과 이후에 생겨질 모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혼신의 힘으로 기도하고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셨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위대한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상기 헸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유명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위협이 닥쳐오고, 이제는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싶으셨습니다. 친밀한 아버지,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어 그리고 자기의 뜻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상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광경을 히브리서 기자가 다시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거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기록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하실 이에게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아버지,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성품을 묵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도하고자 할 때 우리는 기도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합니까? 우리의 문제로부터 출발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디로부터 출발을 합니까? 내가 원하는 해결책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합니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언제든지 기억하도록 가르쳐주셨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인간들이 감히 도전할 수 없고, 반항할 수 없고, 존재에 있어서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시고 전능하시고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심을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모두들이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아갑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그 손끝에 의하여 창조되어진 피조물에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존재들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람에 나는 지푸라기와 같고, 바람 속에 흩어지는 진토와 같은 것이 우리 인생의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세례 요한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례 요한의 사명은 사람들의 마음을 낮아지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맞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커다란 대적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너무나 쉽게 잊고 살아가는 인간의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우리가 그의 손에 기르신바 된 한 마리의 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그 하나님 없이, 목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요, 생명과 사랑과 우리의 모든 존재가 그 하나님께 의탁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 앞에 간 사람들 그리고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야 했던 사람들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사람은 한낱 그에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도록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기도문의 첫마디에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먼저 그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개를 숙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감정과 자신의 모든 지성을 굴복시키는 낮아짐 없이는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것은 왜곡된 종교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뚜렷한 사상, 어디서든지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이 중대한 사상은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모든 사람들의 그 사랑의 출발이 어디였는지 보십시오. 그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출발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에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은 주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같이 하나님을 친구처럼 여기면서 방종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문의 이 첫 번째 장면에서 시선을 멈추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하나님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신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하나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분은 하늘에 계신 두려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 가득 차 있으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서 절대자를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똑같이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버지에 대한 의식이 없이 두려우신 하나님만을 생각한다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이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만 강조된다면 방종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날 왜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자유화되고, 삶에 있어서 도무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의 구별됨이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두려우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방종과 타락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강조되었던 교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교리가 많은 사람들을 방종에 흐르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아버지이면서 자녀들을 방종에 흐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때로는 몽둥이를 들고 회초리를 들고 자녀를 심하게 꾸지람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깊은 영성의 표지인 것 같은 오해가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대의 이런 어리석은 사고방식과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마음에 깊은 속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여러분의 선행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외식인지 진실인지를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고 지난 한 주간동안도 여러분의 삶을 샅샅이 살피시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아파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아픔과 분노를 풀어드리려는 마음가짐이 없이, 단지 “사랑의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니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는지도 모르고, 진정한 참회와 회개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말하는 방종한 그리스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자로서의 적합한 삶이 되어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를 위하여 박해를 받기 싫어한 사람들이었고, 자기의 입맛에 맞는 진리를 골라서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들의 특징이었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로 가든지 방종 하는 세대 가운데서, 세상은 어찌하든지 우리는 그 손에 쥐어진 한 줌의 진토와 같은 인생임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 겸비하며,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공경해야 할, 겸비해져야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었다면, 뒤에 나오는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오, 우리는 그 하나님과 한 가족관계라고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공동체에서 하나님이 크게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지나가면서 들으니까, 아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게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아니 나아가서는 이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 때 그때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정말 아버지라고 믿으십니까? 혹시 은행장이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었습니까? 혹시 강한 완력을 지닌 해결사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었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곤경에 처해서 무얼 해야 될지를 모를 때 지혜를 빌려주는 아이디어뱅크라고 생각하신 적은 없었습니까? 오늘 이 말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는 믿음이 없이는 주기도문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깨뜨려진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지체들을 만나보았지만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 그리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자녀를 정말 드물게 밖에는 만나보지 못합니다. 깨뜨려지지 않은 가정에서도 자식으로 인하여 상처받는 부모도 있고, 부모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자식들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 우리 마음에 정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올바르게 되어져야만 신앙교육이 똑바르게 된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그래도 가슴에 깊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 가정이야기를 해서 안됐습니다만, 저는 우리 아버님하고 초등하교 들어간 이후에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같이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앉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같이 앉아만 있으면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저도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깊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속에서 굽어진 아버지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성경을 투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아버지들은 아버지로 돌아가도록 해야 될 것이고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되도록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그 문맥에서 이 아버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입니다. 사랑과 공의와 거룩과 지혜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그 아버지인 것입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약간은 멀리 있고, 멀리 있으면서도 아주 친밀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모든 사정을 고할 수 있으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버지,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느껴지면서도 그 아버지 안에서 절제된 사랑을 배울 수 있고, 그리고 우리를 향해 아버지와 같은 위엄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을 마음속에 갖고 계시는 눈물이 있는 아버지, 우리를 바르게 가르치시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아픔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를 피멍이 들도록 때릴 수 있는 아버지, 그리고는 돌아서서 흐느껴 울 수 있는 아버지...
(찬송)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 하사
하늘에 계시면서도 땅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나의 인생을 깊이 관심하시고 개입하시고 이끄시는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도라는 미명 하에, 믿음이라는 허울 아래,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필요한 대로 하나님을 혹은 은행장으로, 혹은 의사로, 혹은 해결사로, 혹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시는 분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용하고 그 관계를 일회용처럼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삶이 바로 많이 기도해도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과 그리고 우리가 그의 손에 기르는 어린 자녀들이 된 것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 아버지의 사랑과 훈육과 교양과 그 돌보심 안에서 살아가기를 힘쓰고, 그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긍휼과 인자함 속에서만 우리가 진정 인간다운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는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아버지라는 말은 또 우리에게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란이 많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을 신뢰할 수도 없고 또 인생을 향한 자기의 계획도 신뢰할 수 없는 이런 의지할 곳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사시렵니까? 오늘 성경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붙들고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그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신바 믿음으로 마지막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친자녀라는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물질로 이겨보려고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경험으로 버텨보려고 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고난과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진정으로 지켜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은 우리가 그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요, 우리가 의지하고 우리가 도움을 입을 곳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굳게 붙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붙들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과의 강화된 관계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배워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십자가에서 자주 하나님에 대해서 부르셨던 호칭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여’ 라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여” 라고 부르셨습니다. 고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아버지의 관계를 붙들고 주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 없음과 견고함이 없고 정함이 없어서 우리의 삶이 쉽게 흔들리는 모든 이유는 우리 안에 관계를 붙들고 사는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하고 그리고 상황의 풍파를 바라보면서 좌절하고 혹은 희망을 갖는 어리석은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들이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니라.”
그러나 마귀는 어찌하든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관계를 붙들지 못하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저는 매주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때로는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나 하고 깊은 좌절에 빠진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물론 믿으시겠지요. 참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그런 소명의 비밀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내 안에 있는 가망 없는 죄악, 죄성, 그리고 나를 통해서 도무지 변화되지 않고 있는 세상, 나아가서는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교회 이런 것들을 보노라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서 그래서 “주여, 이제는 나의 생명이 족하오니” 하는 그 모세나 혹은 엘리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혹은 기도를 하고 혹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극복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럴 때마다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옛날에 제가 쓴 책 중의 한권을 꺼내서 몇 페이지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지금은 내가 살지 못하지만 그러나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 그 속에서 하나님이 오늘 시대를 향해서 부어주신 꿈,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부르심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다가오고 잠시 후에는 그렇게 살고 싶은 절박한 소원이 마음속에서 솟아납니다. 그리고 다시 그 관계를 붙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한없이 교만하게 우리를 띄웁니다. “야, 봐라. 너 만한 사람은 어디 있냐? 너 만한 사람은 눈 씻고 보아도 없다. 열린교회에 와서 말씀으로 놀랍게 변화를 받았지. 봐라, 오늘도 말씀을 들을 때 우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리고 네가 얼마나 말씀을 사랑하는지 한번 생각해 봐라.” 이것이 다 마귀가 하는 소리입니다. “사실 바른 이야기이지만 네가 돈을 사랑했냐?” 그러면 여러분은 그러는 것입니다. “맞어.” “네가 명예를 사랑했냐?” “아니.” “거봐라. 너같이 순수한 사람이 어디 있냐? 아무개를 보아라. 돈 좋아해서 믿음 버렸고, 명예 좋아해서 신앙 팽개치지 않았냐? 너 만한 사람 없어. 네 친구들하고 한번 이야기해보아라. 옛날 다니던 교회 사람들하고 이야기해 봐라. 그 사람들이 인간이냐?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짐승 같지 않냐? 그 사람들의 실패는 나빠서 실패한 것이고 네가 실패한 것은 재수 없어서 실패한 것이야. 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야. 너 만한 사람은 없어. 네가 얼마나 교회를 열심히 섬겼는지 한번 생각해 봐라. 딴 사람들은 6개월 섬기다 집어치우는데 너는 벌서 7개월째 아니냐? 너 만한 사람이 있냐? 얼마나 놀랍냐? 네가 예배에 빠졌냐? 수요예배는 좀 빠졌지만 너 만한 사람이 어디 있냐?” 막 추켜세웁니다. 갑자기 자기가 뭔가 삼층천에 도달한 것 같은 그래서 거기서 뭔가 재기해 보려고 하는데도 뭔가 공허한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 한 순간에 이제 한껏 높아졌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 높이 세워 놓고 사다리를 마귀가 발길로 뻥 차버립니다. 이번에는 높이 올라갔다가 고꾸라지는 것입니다. 팍 퍼지면서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엎드려 있을 때 마귀가 와서 이번에는 짓밟는 것입니다. “야, 네가 인간이냐? 세상에 너만 못한 사람이 어디 있냐? 너는 지옥에서 동창생해야 될 사람이다. 세상에 봐라. 누구를 봐라. 그 사람들은 은혜 받지 않냐? 너는 이것도 실패했지 저것도 실패했지?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하나라도 네가 행한 것이 있냐? 말씀을 사모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식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거야. 성경도 봐라 듣기만 하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느냐? 네가 꼭 그 사람이다.” “어떻게 가망이 없을까?” “없어.” 그러면서 한없이 밟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굴이 완전히 누렇게 떠가지고 와 가지고 신앙생활을 쉬었으면 좋겠다느니, 뭘 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쉴 일이 많습니까?, 피곤하다느니, 이제 지옥방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피곤해. 쉬고 싶어. 상처받았어. 사람들은 나만 미워해.” 그것까지.
마귀의 방법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무엇입니까? 근거도 없이 높아질 때도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높아진 것입니다. 떨어질 때도 관계에서 끊어지니까 짓밟히듯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삶이 아닙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싶었던 것은 관계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나 위기가 닥쳤을 때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그 관계 속에서 음성을 들으며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바라보는 그런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서 배의 모든 물건들을 사람들이 버리고, 그리고 거기에 모든 군사들이 죽음의 위협에 일주일 동안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두들 두려워하는 군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이 안전하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용맹스러운 군인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사람은 포승줄에 묶인 죄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 때 환경이 위급해도 쉽게 흔들리지 아니하고 또 어려움이 올 때에 우리가 쉽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지 아니하는 그런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붙들고 살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여기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것은 우리를 당신 닮게 하시려고 우리의 방종을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사실이 단지 방종하고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한 계기와 수단을 제공해 준다면, 청문회에 선 누구처럼 그런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모범적인 아들로서 효자소리 들으면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 분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방종의 기회가 되어버리고 나니까 아버지와 온 가족과 나라 앞에 심지어 교회 앞에 부끄러움을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로의 집안에서 자라난 아들이 돌아다니면서 술 먹었다는 소문까지 돌아다니고, 이런 소식들이 들려나오는 것이 교회에 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려고 우리를 아들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닮게 하시려고 우리를 아들 삼으신 것입니다. 돈이 많은 집안의 자식들을 보십시오. 명망 있는 집안의 자식들을 보십시오.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는 아들과 그리고 관계는 유지하고는 있지만 아버지가 생각하기에도 꼭 내놓은 자식 같은 사람들이 꼭 있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가더라도 그 아들이 아버지의 명예를 빛내는 것은 그만두고, 저 아들 때문에 우리 집안이 욕먹지나 않았으면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자식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그런 염려를 불러일으키는 자식이 되어졌다면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 집안에 입양이 되었으면 이제는 왕가의 풍토를 배워야 합니다. 빈민가에서 굴러먹던 그 모든 천한 행실과 그리고 사악한 생각과 그 모든 난잡한 생활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왕손으로서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만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올바로 행하지 아니할 때 우리를 매우 연단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서, 우리가 다니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주님의 이름에 누가 돌아가지 않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나면, 이제는 예수 믿지 않았을 때는 마음대로 하고 잘 통하던 그 인생에 있어서의 야비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는, 쉽게 이야기하면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믿음의 세계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야곱처럼 얼마든지 잘 살았는데, 머리 굴리면서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 속에 깊이 들어오게 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탈세하고, 사기 쳐도 잘 넘어갔는데, 좋은 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도 잘 먹고 살았는데, 예수 믿고 나서는 어림없습니다. 족집게처럼 하나님이 집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당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옛날에는 가책도 안 느꼈고, 또 가책을 느껴봐야 쉽게 잊어버렸는데,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세계를 제대로 들어오게 되면 이제는 간단하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용서도 잘 해주시더니 은혜가 깊어지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 사소한 것 가지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색을 하시면서 “네가 바르지 않도다!”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은 은혜 받을수록 나만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도 크게 짓게 되면 하나 해 놓고 싶은 것이 있는데, 조그마한 것 말고 벽 전체를 어항으로 만들어서 고기들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광어, 도다리...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선회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나는 많은 생선들, 이쪽에는 민물고기도 있고, 고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커다란 어항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교회 4분의 1만하게 말입니다. 그러면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어린 아이들이 늘 보면서 말입니다.
(예화) 어느 집안에 커다란 어항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싼 고기는 엄청 비싼데 조그마한 물고기 한 마리에 몇 만원씩 하는 것도 있습니다, 진귀한 고기를 다 사다 넣고 현란하게 산호초까지 넣고 해서 몇 천만 원짜리 어항을 멋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옆집 아이들이 놀러온 것입니다. 부모들 없는 사이에 그 집에서 마구 뛰고 노는데 화장대에 가니까 스킨로션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스킨로션을 갖다가 옆집에 있는 놈이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아보니 아주 좋으니까, 고기야 너희들도 한번 맡아 보아라 하고 어항에다가 막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고기들이 좋아가지고 막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한 병 다 넣고 나니까 고기가 허옇게 뜨기 시작하는데, 몇 백만 원어치가 물에 뜬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집 주인이 돌아와서는 몇 년 동안 구해놓은 것인데 사색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들놈이 저 구석에서 울면서 쟤가 그랬다고, 바로 옆집에 사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길길이 뛰면서 화를 내다가 쟤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딱 듣고 나니까, 알았다고 너희 집으로 가자며 야단도 안치고 손목 잡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 집에 가서 초인종 소리에 나온 아이 엄마에게 이 아이가 아주머니 아이 맞느냐고, 맞는다고 하니까 우리 집에 한번 가자고 해서는 350만원어치 고기가 죽었으니 채워주셔야겠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 생각에는 자기가 반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안 그랬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 고기를 다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아들 놈이 까불고 놀다가 야구방망이로 어항을 박살을 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고기가 땅으로 나와서 춤을 추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350만원이라고 그러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혼내지 않고 아빠한테 가서 350만원이라고 그럴 줄 알았는데 엎어놓고 반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녁 때 아버지가 들어오셨는데 뭔가를 한참 심각하게 이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빠가 다시 방망이 들고 오셔서 다시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자기 아들을 두드려 패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까짓 350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왜 아이가 이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너 같은 놈이 내 아들일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분별이 없고, 까불고, 사고를 치는 놈이 집안에서도 이러니 밖에 나가서는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들겨 팰 때 그 매는 350만원이 생각이 나서가 아니라, 누구보고 물어내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 대가를 치르고서라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해주면 그까짓 것이 무슨 문제겠느냐 그러면서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고 그리고 주 하나님의 그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청교도는 우리에게 가장 복된 것은 많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크게 닮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닮고, 그리스도를 크게 닮는 사람 만드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끊임없이 주님 닮기를 원하고, 주님 모습, 주님 성품 본받기를 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주기도문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3.6.29 구역장수련회
3.하나님 아버지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주기도문 강해Ⅱ 3 (1997.5.11 주일오전)
녹취자 : 정은숙B
주기도문 강해 Ⅱ 4 (1997.5.18 주일오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명칭을 먼저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알고 기도함에 있어서 먼저 우리가 이런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려고 우리에게 이러한 호칭을 가르쳐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또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인 당신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또 우리를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녀 만드시려고 애쓰신다는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당신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자녀들 되기를 원하십니다. 낳아놓았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모두 부모를 닮는 것은 아닙니다.
얼굴은 닮아도 더 중요한 것은 부모의 성품을 닮는 일입니다. 인간의 아버지는 혹은 인간의 부모는 자식들이 부모를 보면서도 우리 부모의 저런 면은 본받지 말아야 되겠다는 결심이 자식들에게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처럼 불완전한 아버지가 아니라 완전하신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아버지를 아무리 본받아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본받아도 혹시 아버지께로부터 나쁜 것을 배우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또한 아버지도 우리를 단지 낳아놓으실 뿐만 아니라 낳으신 우리를 당신의 성품을 본받는 자녀로서 기르시려고 애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대로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가 비로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마음이 생기게 되고 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바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보게 됩니다. 나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던 생각들이 바뀌어서 아버지가 바라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 본받게 하시려고 그래서 명목상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그래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그 아버지가 생각나는 그런 아들 되게 하시려고 애쓰시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갈등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아버지 닮은 자식을 만들려고 하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의 뜻대로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다운 사람 만들려고 하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러한 삶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많은 신앙적인 갈등을 갖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크게 성공하는 것은 많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 이제는 더 많이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이 생각이 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하여져가고 바뀌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번째로 하나님의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그 풍성한 구원의 은혜와 진정한 축복들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주신 더 큰 특권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누리는 친밀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친밀함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어 질 때 우리는 비로소 기쁨으로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진정한 친밀한 사랑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어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누리고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머리로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왜 옳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릇된 삶을 버리고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잘못된 것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웠으면서도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기 위해서 지불하여야할 하는 고통을 너무 크게 생각한 나머지 불순종하고야 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일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친밀함이 느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친밀하게 내 인생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리고 내 인생을 지키고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지를 감지하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친밀함을 우리들이 잊고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적이 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명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마음의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왕만 되어도 자식들이 으스대며 다니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세상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법적인 문제만이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지난 한 주간동안 살아 가시면서도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어떤 때는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을 여러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지시는 때와 멀게 느껴지시는 때와 있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영적인 사고 속에서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신앙적인 시각에서 생각을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늘 젖어들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만 신앙적인 방식으로 인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느끼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인생을 신앙적인 시각에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얻은 결과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때에 이러한 친밀함을 느끼면서 아버지 앞에 나아오도록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여러분 잘 사셨습니까? 어떤 분은 잘 사셨고 어떤 분은 못사셨을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잘 살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았다 성령이 함께 해주시는 삶을 살았다 할 때에 그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신 것처럼 그렇게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잘 산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무감각하여지고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게 되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게 되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친밀함입니다. 늘 내 옆에 느껴지시던 하나님, 그리고 매 순간 순간마다 나를 붙들고 계신 것이 느껴지던 하나님이 갑자기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을 불러도 그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인생을 영적인 시야에서 보면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든 것들이 마음에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는 즐거운 일을 보아도 즐겁지 않습니다. 마음이 즐겁고 기쁠 때에는 좀 언짢은 일을 만나도 좋은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가족관계에서 자식이 아버지와 느끼는 그런 친밀함으로 아버지를 언제나 대할 수 있고 그 아버지와의 관계를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과 그리고 교회의 상황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보아서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판단해서 내 스스로 내 인생을 바라보면서 이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과 저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근심하시는 것을 예민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논리적으로는 해명이 안 되는데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매우 슬퍼하신다고 하는 것들이 내 마음에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내가 잘못이 없는 것 같고 누가 보더라도 내 행동이 비난받을 행동이 아닌데도 그리고 나의 태도 나의 말 나의 행동이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어도 어쨌든 하나님이 지금 내가 이런 마음으로 이런 태도로 살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매우 슬퍼하시는 것이 내 마음에 느껴집니다. 이것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논리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게 우리의 마음에 호소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책감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네가 품고 있는 생각, 네가 가지고 있는 마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이 사람 보기에는 비난할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너무나 슬프다고 하는 감정이 사람에게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여호와의 친밀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강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기쁨과 은혜만이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가책도 충만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 성령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성령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하고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남이 맛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맛봅니다. 남이 경험하지 못하는 참된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쁨과 놀라운 은혜만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인해서 매우 가슴 아파 하시는 아픔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지게 되면 하나님의 기쁨도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적인 정서라는 것이 없습니다. 애통하여야할 일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눈물을 흘리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또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기쁜 일도 없고 그리고 즐거운 일도 없습니다. 늘 교회와도 골난 사람처럼 뭔가 시무룩한 사람처럼 건드리면 폭발할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시한폭탄 같은 삶을 삽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 생활의 모형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에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천국에서의 생활이 어떻겠습니까? 거기는 노래방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신나는,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것들은 그 나라에 거의 없습니다. 쇼핑도 없고 물건을 깎고 사는 재미도 없습니다. 큰 집을 돈 주고 사고 도배를 하고 하면서 가구들 들어놓고 으스대는 일도 없습니다. 좋은 자가용도 없고 별장도 없습니다. 거기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늘나라에만 속한 독특한 기쁨입니다. 슬픔은 없습니다. 거기에서의 생활은 항상 비록 우리의 이 육체가 아니고 이 체질이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결코 무지무각하게 하품이나 하고 기지개나 켜면서 언제 이 영원 세월이 지나갈 것인지를 지루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지내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천국 생활은 항상 기쁨과 은혜와 그리고 한없는 사랑에 가득 찬 언제나 무엇인가 하늘에 속한 신령하고 친밀한 것들이 언제나 느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지복의 상태인 것입니다. 더 이상 복되다고 말할 수 없는 가장 축복된 상태, 그것이 하늘나라에서의 생활입니다. 거기에 기쁨도 없고 정서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무지무각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천국의 생활을 어떤 의미에서는 미리 맛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면 우리 마음속에는 이전에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쁨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가 경험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맛본 적이 없었던 큰 기쁨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도 만족하게 할 수 없는 놀라운 참 기쁨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핵심부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얼마나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도 베드로 사도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보내왔던 편지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한다고 한 그러한 고백들이 여러분 속에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셔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은 먼저 여러분과 제가 그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맛보고 그 관계를 즐거워하는 자리에로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그야말로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하늘의 신령한 기쁨 때문에 충만해져서 세상에 있는 것들이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놀라운 은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가 형식적인 관계가 되어버리고 진정으로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누리고 느껴질 수 있는 친밀한 관계, 진실한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체험되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또 육신으로도 우리의 부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부모인 여러분이 자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최고의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소에 소원했던 부모님과의 관계를 한 1년에 한 번씩 물질로서 보상을 해보거나 쉽게 줄 수 있는 선물로서 보상을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일 수 없습니다. 참된 효도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관계를 그 부모와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 부모를 소외시킨 사람은 무엇으로도 그 부모의 마땅히 하여야할 의무를 대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자가 아들에게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미 가족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이제는 너희가 아버지인 나를 본받고 그리고 또 너희는 나를 본받은 아버지가 되어서 그렇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 자녀들에게 내게서 배운 아버지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또한 우리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자식으로서의 친밀함, 그리고 어버이로서의 친밀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관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이고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효도는 우리가 부모에게 우리의 친밀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희생을 통해서든지 부모와 우리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들께 얼마나 그런 친밀함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가시려고 애를 쓰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애쓰고 부모를 향하여 애쓴다면 우리의 관계는 보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 효도와 꼭 같은 것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그 은총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이 우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아버지이심을 알고 그 아버지를 진심으로 친밀하게 느끼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좋고 즐거운 일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시험을 당하고 마음속에 고통이 있는 일들까지도 그 아버지는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 사이에 어떤 막힌 담과 어떠한 장애물도 없는 그런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며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성품과 우리와 맺은 관계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자신 때문에 즐거워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죄 때문에 파괴된다는 생각을 한 번 해보십시오. 하나님과 우리 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크고 넘치는 사랑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그 친밀하심을 향하여 등을 돌릴 때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목사였던 존 오웬이 말한 대로 죄를 짓는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죄로부터 돌이키는 삶을 살 때 따라서 우리는 한 순간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사모함에 젖어들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친밀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느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늘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주의 자녀 만드신 것은 단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와서 용서를 빌고 정결케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함을 유지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그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찾고 추구하는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인해 더욱 기뻐하고 그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욕심껏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발상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떠난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서 그래서 우리가 이후에 아버지 앞에 아뢰는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 있다고 하는 그 친밀함 때문에 늘 감격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삶이 이런 모든 기도의 토대가 될 때에 이 주기도문이 의미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성령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신 그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후히 누리게 하시는 그 아버지이심을 그리고 그 아버지는 인간인 아버지와 달라서 완전한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범죄이고 가장 커다란 죄악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모르고 하나님의 참된 생각이 없이 살아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못 박아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셨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넘치는 사랑을 그 친밀함 속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간혹 죄 때문에 우리들이 그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셨던 아버지로서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금방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보여주시고 지금도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아버지의 그 사랑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고 하늘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당시 우리의 삶을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감찰하시고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의 허물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시는 엄위로우신 하나님일 뿐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시는 것은 우리를 고난 가운데 지키시고 시련 가운데서 아파하실 때에 그 아픔보다도 더 뛰어난 아픔으로 고통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깨트려진 가정이 온전한 가정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리고 그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는 자식들 보다는 그 부모를 닮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자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깊이 느끼면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준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어린 시절서부터 줄곧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서 뵈올 수도 없는 그런 먼 거리에 떨어져 살아서 일 년이면 한 열흘 정도씩이나 얼굴을 볼까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이 어머님이 그렇게 친밀하게 느껴지지가 않고 저는 그래서 어버이날이 되도 아버지의 사랑 그러면 잘 안 느껴지는데 할머님의 사랑 하면 아주 가슴에 다가오고 아주 쉽게 느껴집니다.
어제도 우리 아들놈이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책상이 있습니다. 그 책상이 지금부터 한 10년 전에 생긴 책상입니다. 할머님이 딸네 집에서 앞에다 채마밭을 일구어서 거기에 호박을 심었습니다. 그 호박을 일구어서 따다가 조그만 다라니에 담아서 평소에 그것을 하던 분은 아니었습니다. 담아서 버스 종점 있는데 가지고 가서 지나가는 행인들한테 팔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나한테 가지고 오셔서 이만한 지갑에다가 100원짜리 동전을 하나 가득 가지고 오셨는데 묵직합니다. 얘야, 내가 이거 호박 판돈인데 너를 위해서 썼으면 좋겠는데 무엇에 쓰던지간에 쓰거라 그래서 생각하다 하다가 돈을 보태서 책상을 하나 샀습니다. 저는 그 책상을 볼 때에 한 번도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자식을 알 리가 없지요. 얼굴도 기억이 안 날테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깨어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간의 사랑을 추적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비교하면서 뭔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주 행복한 사람들 제외하고는 그런 일들이 굉장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그리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경험하고 이것이 바로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어야한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훨씬 쉬울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태어나기 전에 혹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고아로 살아 온 사람들이나 친척집에서 자란 사람들 더더욱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에 다가올 리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육신의 부모로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생애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비교할 데 없는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요 자식이 고통을 받고 시련에 처하였을 때 그래도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이 부모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여러분에게 존경받을만하지 못하고 혹은 어떤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여러분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경험하는 아픔을 가장 뼛속깊이 아프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의 부모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생각나게 하시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교회, 진리를 따라 세워진 가정,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이런 개인과 가정이 이루어져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그 그림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마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신앙적으로 존경할 만하고 자식이 그 부모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정이 된다면 아마 우리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갈등이 반 이상 줄어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대로 이루어져가는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아야할 관계가 혹은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관계로 변해가기도 합니다. 존경하고 경외하여야 할 관계가 무심하고 사람같이 생각하지 아니하는 관계로 되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우리와 아버지와의 관계들을 배워 나가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 때문에 그렇게 깨트려지고 망가진 관계들이 참된 사랑으로 치유되고 진정으로 고쳐지는 그러한 복음으로 말미암는 변화들을 우리가 경험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 오히려 상처가 많고 망가진 가정들을 그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가 비록 육신적으로는 자식이지만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부모가 되어서 그런 가정들을 지키고 또 싸매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받는 또 하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과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애들이 맨날 부모한테 엄마 내 돈 내놔 내 돈 맡긴 것 내놔 내 돈이 어디 있습니까? 후딱 하면 그러지 않습니까? 엄마 내도 내놔 네 돈이 어디 있느냐 내거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 할 때 여러분 머리에 떠오르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일하는 아버지, 그렇지요? 일하는 아버지. 아침이 되도 갈 데가 없는 아버지, 아무 일도 안 하고 무위도식하는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모습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돌보지만 아버지는 밭에 나가서 열심히 가족들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번 것으로 그 자녀들이 풍족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라는 이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모두 아시고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주시되 단지 물질로 공급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공급해주시는 아버지인 것을 우리는 알게 되고 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기도문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리의 인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기대어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만 기대어있고 우리의 생사 간에 모든 위로와 도움이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것을 아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만 기대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자식 키우는 부모들이 모두 고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뭔가를 필요로 할 때를 가리켜서 품안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매일 학교 갈 때마다 가방을 들고 애들이 죽서서 아빠 무슨 돈 줘, 무슨 돈 줘, 용돈 달라는 그 구실도 여러 가지이지 않습니까? 별의 별 것들을 명칭을 붙여서 돈을 달라고 할 때 그 때 부모들은 아주 힘듭니다. 그러나 그때가 좋을 때입니다. 자식들이 다 커서 이제는 부모의 도움 없이 살아갈 때 더 이상 부모의 돌봄이 필요 없을 때 그 부모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허전한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에 있는 부모들로서 그 자식이 우리의 품안에서 기대고 그 부모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그 하나님께 기대며 살아가는 그러한 삶, 하나님의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존하기 때문에 내가 의지하는 그 하나님 때문에 때로는 위로와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통해서 이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여러분, 누구를 의지합니까? 시련 속에서 여러분은 지혜를 의지하고 여러분의 결단력과 용기를 시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호소하기를 원하십니다. 어차피 마치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매순간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영원히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인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첫머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다가오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주기도문에 앞서서 아버지가 하나님 되신 것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당신의 손으로 빚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와의 관계를 버릴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참된 것들로 살아가는 인생들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관계들을 포기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헤어져서는 도저히 못살 것 같은 부부들도 하나님이 한 사람을 데려가시니까 남은 사람은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부모님도 먼저 보내드리고도 자식들은 살아갑니다. 부모를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는데도 자식을 묻고도 부모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묻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 관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범죄 하여 어둠 속을 헤맬 때도 우리는 그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음을 압니다. 때로는 어둠 속에서 죽어버리고 싶은 고통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직감적으로 죽어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고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 없는 이 관계, 이 관계에서 우리들은 숙명과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 하나님께 기대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사유함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사랑을 회복시키시는데 그 모든 것들을 바로 하나님께서 아버지시라고 하는 사실을 토대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단절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단절과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당신 없이 살아가는 삶,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건조하고 목마르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삶인지를 깨닫게 만들어주셔서 우리고 하여금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만약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저버리시고 우리를 향한 신실하심을 포기하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고 한 번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찾을 수 없는 탕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떠나서 부모의 사랑보다 더 짜릿하고 자신의 인생을 즐겁게 하리라고 믿는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했습니다. 고통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찾아오고 나서 비로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고 아버지의 집에 대한 생각은 이내 이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국의 땅에서 허랑방탕하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때에도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이 아들의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이 아들이 용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그 아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잠시 잃어버렸던 그 관계 그것을 다시 아들을 통해서 되찾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에 간절한 바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그 시간도 아들이 돌아옴을 기다리면서 눈시울을 붉혔던 것입니다.
주기도문 강해 Ⅱ 5 (1997.5.25. 주일오전)
오늘도 우리는 모든 인생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우리들이 고통 하는 그 고통의 이유가 너무나 여러 가지지만은 그 모든 것들을 일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뻐하고 아들은 지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체험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면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생이 아니라고 하는 뼈아픈 교훈을 가슴에 묻고 그래서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붙들고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이요 보람이라고 하는 참된 고백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이번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런 기도를 합시다. 이제껏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 우리고 하여금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마음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이 내 마음 되게 하셔서 일평생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께 우리의 충심을 바치며 세상이 넘볼 수 없는 하나님과의 자식과의 그 놀라운 사랑을 느끼고 소유하면서 우리가 마음껏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표명희
주기도문 강해Ⅱ 6 (1997.6.1 주일오전)
지난 시간에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지난 주일은 마침 어버이 주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살펴 본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고 호적상의 관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정말 아버지로서 우리자녀들에게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가족의 관계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와 그런 관계를 나누길 원하시고 또 우리가 그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나누며 살아갈 때에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독특한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즘처럼 기독교라고 하는 이 신앙에 있어서 영적이고 인격적인 특성이 무시되는 때에는 자칫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 도덕적인 실천,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러나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주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풍성한 삶을 누렸던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무지와 죄악 때문입니다. 더욱이 만약에 우리가 그 하나님 아버지와 보다 더 친밀해지고 그리고 그 아버지와의 참된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또 죄와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를 지키며 살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한갓 종교생활에 지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정말 아버지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주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면서 인격적으로 감동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하나님을 기뻐 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의 관계자체를 기뻐하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기뻐하는 자들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앙의 은혜로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다시 우리자신이 하나님과 그런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시간에 우리는 또한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이름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계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호칭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웠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개념에 호소하였습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가족에게 닥치는 모든 위험을 한 몸으로 막아서며 가족들의 궁핍과 피로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함으로서 그 수고의 열매를 은혜로 먹고사는 그 자식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심으로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깊어지면 우리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또 다른 고백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고백은 은혜의 고백입니다.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살아가고 있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볼 만큼 선교의 위대한 위업을 이루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아버지처럼 보였을 때 그는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모든 지식 모든 앎 모든 경험 그리고 모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들조차도 우리의 인격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깊이 잠길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질 수 있고 겸손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주일날 주일을 못 지키고 생업에 종사하느라고 몸부림치고 그래서 예배도 나오지 못하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손으로 자기 생계를 책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긍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째든 나의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는 공로 없으나 매일 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때로 우리는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세상적인 의미에서 믿음도 확실해 보이는 사람들 보다 잘 흔들리는 것 같고 왜 그런지 도덕적으로도 온전하지 못한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시거나 공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도덕적인 삶에도 관심이 많으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이고 의로운 삶을 살아도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면 내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고 내가 사는 것은 아버지의 공급하시고 돌보는 은혜로 산다고 하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나 중심으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나서는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 할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불순종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영육 간에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염려와 때로는 분노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아들을 입히고 먹이고 그 아들의 건강과 행복을 염려하듯이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보이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버지란 말 앞에서 정말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관계 떼어놓는 살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부모와 떨어져서 잘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가끔 보면 어린 시절에 입양을 해서 외국에 가서 모국어조차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찾는 것을 보면 이것이 인간이 부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창조의 질서요 자연적인 정 일진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오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호칭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이 호칭 속에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고 우리를 자비와 사랑으로 용납해 주시는 그 하나님과의 포기할 수 없는 관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의 이 첫머리에서 성경은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차가운 주기도문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음을 알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주님께서 물으시며 우리를 주기도문의 정원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포기 할 수 없는 관계 앞 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과 삶을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 앞에 있는 단어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은 이 아버지를 너희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혹은 하늘에 계신 교회의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our father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냐고 물어본 제자들에게 가르친 일차적인 가르침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아버지의 일차적인 회중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의미는 사도들이 예수임께로부터 너희는 기도할 때 우리아버지여 하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예수님의 공생애를 지켜보고 함께 복음을 전하고 또 함께 주님의 일을 수종들며 걸어온 이 사람들이 그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시키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차가운 벽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6,70년대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실존주의 작가 가운데 카프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일 출신의 작가입니다. 그의 책속에 변신이라는 제목에 짧은 실존주의 경향을 띤 소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공이 자고 일어나 보니까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이제 열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가족 중에 한사람이 벌레로 변했으니 울고불고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하면 이 벌레를 옛날의 자기 가족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분분하게 토론하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갈등의 장면들이 쭉 나온 다음에 마지막 장면이 뭐냐 하면 결국 그 벌레는 죽었고 가족들은 바로 그날 피크닉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다시 말해서 심지어는 가족관계속에서도 철저하게 우리가 될 수없이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정도는 과장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런 묘사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것들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 속에서 벽을 쌓고 하나 될 수 없고 또 우리가 하나 되어도 우리만 하나 되는 것으로는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샬롬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 되고 그렇게 화목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 됨을 배우며 그렇게 하나 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샬롬이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관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너희는 기도할 때에 그 아버지를 너 혼자 소유하고 있는 나의 아버지 그렇게 부르지 말고 우리의 아버지라고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도록 명령 받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첫 번째로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우리일 수 없는 사람들 자연적이고 인격적인 특성 또 삶의 자리에 여러 가지 다양성 때문에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고 우리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 이해관계도 틀리고 성향도 틀리고 성격도 다르고 삶에 추구하는 바도 같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 마치 모든 운명을 공유한 사람들처럼 우리라고 부르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호칭하고 있는 이 주기도문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들이 무엇을 통하여 일어났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우리가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따로 살아가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내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남편 자식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부모 부모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식들 형제를 포기하고 동기간들과 의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형식적인 관계는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라고 하는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물질로 말미암아서 다투고 법정에까지 호소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아름다운 대명사를 찾아 볼 수 있습니까 모두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뭉쳐진 우리입니다. 모두 자신의 유익과 그리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만족을 위한 한계 안에서만 우리는 유지되어지고 자기의 욕망과 우리의 욕망이 충돌 할 때 우리는 다시 그 우리를 깨뜨리고 나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많은 군중들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인간은 한없이 고독합니다. 얼마 전에 다닥다닥 집이 붙어사는 동네에서 한 노인네가 돌아 간지 45일이 넘은 후에 비로소 발견된 사실은 우리에게 이렇게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과 손잡고 운명공동체적으로 손잡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들만 우리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으로부터 우리라고 말을 듣는 그 사람이 그래 우리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가 어디 있습니까? 운명을 함께 나누고 공동체적으로 그런 우리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고독한 때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하나님께 기도 할 때는 그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 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 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 왔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고백이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의 주님을 통해서 우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기로 하였을 때 그때 우리는 사람보고 주님의 자녀가 되기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면 이런 저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자녀가 조건부로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나를 살리시고 구속하신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그 죽음은 전적으로 나를 위한 죽음이었고 십자가 없이 내가 하나님 앞에 전적인 은혜로 지음을 받아서 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그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사람이 눈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찬송)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나 위해 고통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우리는 세상이 눈에 보일 겨를이 없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나를 위해 순결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세상도 없었고 심지어는 우리도 없었습니다. 부모가 반대해도 우리는 차라리 그 부모와 인연을 끊으면서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죽음의 길을 걷는 고난과 형극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을 얻는 길인 줄 알았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길인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을 택했고 그리고 교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교회 와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전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그렇게 홀로 서기위해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절대적인 고독과 신앙을 하나님 앞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단해야하는 그 자리에 놓여서 그 사연을 안고 하나님을 믿게 된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우리라고 부르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로 하여금 관계없는 나와 너였던 관계들을 우리로 만들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에 들어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참회하고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한 가족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 이면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지체들 속에서 많은 허물을 봅니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교회에서 험하고 그리고 서로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해주는지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만은 그 사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내가 여러분이 누구인지 다는 몰라도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을 사연이 없었으면 결코 예수 안 믿었을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참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 믿을 사연이 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안 믿고 불신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하고도 진지하게 얘기해 보면 맞아 하나님이 있기는 있을 거야 말 합니다. TV드라마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 추적 같은 것을 하면 맞아 죽음 후에 뭔가가 있을 거야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안 믿을 사연이 있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을 사연이 없기 때문에 안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될 그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저는 내 자신이 주님을 믿고 살아온 과정들을 돌아봅니다. 정말 소설을 쓰고도 남을 만큼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많은 길을 헤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모두 주인공 의식이 있습니다. 소설을 저도 못 봤습니다만 아마데우스 같은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모두그것을 보면서 화면에 시장거리에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이나 주막집에서 술병 들고 왔다 갔다 하다가 얼굴도 안보여주고 뒷모습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보면 얼굴은 거기에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주인공 일거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그 대목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전쟁 영화를 보면 소리만 나도 죽는 엑스트라 중 하나라고 총소리만 나도 죽는 엑스트라중 하나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라 와도 이상하게 안 죽고 그리고 폭탄도 피해가는 그런 주인공 중에 한사람이라고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는 최대의 주인공입니다. 그런 사연을 안고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 합니다. 사람이 존재 그 자체가 신기해 보이기 시작 할 때 그는 비로소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을 알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그 존재의 모습을 보면서 그 뒤에 묻혀있을 그 수많은 인생의 여정을 바라보며 신비한 마음이 들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온 우주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그 존재 자체를 보며 신비해 하고 감격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비로소 영혼을 사랑할 마음을 갖기 시작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전쟁 영화에 람보와 같은 주인공으로 취급하고 나머지 지체들을 총소리만 나도 죽어가고 사극영화에서 마차나 끌고 가는 마부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존귀하게 생각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았을 때에는 우리는 마치 주님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우리 밖에 없는 것처럼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풀타임으로 나 하나의 인생에만 메달리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간섭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모두 지켜보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모든 변화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까지 우리를 지켜보셨습니다. 이런 모든 삶을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방법 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가치를 안다면 너희들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구원하셨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우리를 떠난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삶의 가치와 꿈이 거듭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보십시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철저한 이기심입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용납하기보다는 자기가 용납 받는 것으로서 만족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은 모난 사람을 용납해 주도록 강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인 것처럼 외치며 사는 사람들은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우리라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생활이 힘겹게 느껴지면 그것은 공동체가 힘겨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자체가 힘겨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연합 속에서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도록 경륜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에는 서로 관계없이 만났지만 만남 다음에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조차도 너희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하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공동체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진정한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땅에 부흥이 오기까지는 진정한 우리가 없다. 부흥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된 것과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것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시는 그런 때라는 사실을 이 목사님은 우리에게 고백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강림하셔서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복음으로 깨뜨리시고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의 관로 들어가게 하실 때 그때에 놀라운 유니티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한 가족입니다. 가족을 모두 버리고 아버지만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를 버리고 지체들과의 관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걸 발견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정말 거치는 것이 많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아예 자유롭게 하나님 한분과의 관계를 스스로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교회를 좋아합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예배시간에 찾아오면 숨을 수 있을 만큼 큰 교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교회에 회원이 되기로 힘쓰지 않으면 교회에 모인 수가 많기 때문에 한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없을 정도의 큰 교회를 원합니다. 자기 할 일은 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내고 특별 헌금도 내고 할 것은 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찾아오지도 말고 관계는 갖지 말고 홀로 와서 예배시간만 빌려 달라 이것입니다. 페이는 낼 테니까 예배시간에 참석하고 은혜는 받겠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사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체들 사이에서 부딪치고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하고 그러다가 때로는 회개하고 용서를 하기도 하고 또 용서를 받기도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도 하고 서로 싸매기도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생명력 있는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유혹을 받을 때 없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워지시기를 소원 하셨던 것을 여러분은 가슴에 새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기도문 앞에서 우리가 만약에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아니하면 이미 주기도문의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대문에서부터 우리는 걸리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은 그 아름답고 화려한 정원으로 우리를 들여보내기 전에 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진단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에게 공동체가 있습니까?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체들이 당신 옆에 있어서 그들을 진정으로 우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요한 웨슬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시는 바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매우 탁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꽃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되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요즘에 교회 일하면서 도 그렇다고 해당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실망 하지 말고 교회일하면서 사람들 일하는걸 보면 군대갔다온 사람들은 참 많이 틀립니다. 협동심이 있고 방위도 포합됩니다. 틀립니다. 정말 틀립니다. 또 직장 생활 많이 하면서 다듬어진 사람들은 틀립니다. 남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압니다. 그리고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공동체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지를 압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이러한 사회생활을 통해서 자기가 깎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것이 신앙적으로 바로 연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련되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애기는 나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어차피 신앙공동체이든 세상공동체이든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른입니다. 여기 어른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사람들이 인사를 안 하면 기분 나쁘고 교회에서는 나이어린 사람들이 인사안하고 지나가면 괜찮고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기분 나쁩니다. 왜? 공통된 사회적 특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여러분이 잘하기 위해서는 신앙공동체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수준 높은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어른 만나면 인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나이든 어른들은 권위가 아닌 따뜻하고 인격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러 서로 사회생활에서 통할 수 있는 예절을 교회 속에서도 지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도를 하던 예배를 드리던 심지어는 찬송을 하던 심지어 봉사를 하던 내가 이 행동을 하는 것이 누군가 지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그의 명예를 손상하게 하거나 그 사람에게 내 행동이 고통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깊이 기도해서 하나님이 이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지시를 받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자기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는 비 성경적인 사고 방시이라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용히 와서 기도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떠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교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용히 앉아서 성경공부하고 있으면 왔다 갔다 떠들고 돌아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예배시간에 코풀고 눈물 닥은 건 자기가 주머니에 넣고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주어 가야합니다. 이것은 모두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와 세상의 공동체가 워낙 틀리기 때문에 그때 공동체 생활의 태도가 교회에 와서 유지될 필요가 없고 그것은 무시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상한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라고 하는 것들이 자꾸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나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안주는 방향으로 자신을 간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그런다고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지체들에게 그것을 그렇게 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씨름하며 기도하고 마음을 삭히고 용서하고 그래서 하나가 되도록 왜 그렇게 복잡합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매 순간마다 사람들에게 잔소리하는 국민윤리 같은 시간을 갖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사람이 깊은 기도나 성령의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요거 요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안 힘들어 합니다. 요거 요거만 자기 자신을 추스르면 힘도 안 드는 일인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말해 줄때는 엄청나게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교회생활 하면서 우리는 매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내가 하고 있는 말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이러한 몸가짐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삼가는 교회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깊이 기도하면서 진정으로 우러나오고 하나가되는 것은 다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들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여의도에서 개신교 집회를 했는데 수백 만 명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집회 후에 쓰레기가 열 트럭인가 나왔다고 합니다. 일주일 후엔가 한 달 후에 케톨릭에서 800만 명이 모여서 미사를 했습니다. 성찬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백만 명이 40분 만에 성찬에 끝났습니다. 청소부도 올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럼 캐톨릭은 영성이 뛰어나고 신령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영인 것 보다는 영적인 것 이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걸 몇 년 전에 사진으로 대조해놓아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얼굴이 후끈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왜 그래요? 그런 것은 우리가 욕먹지 않기 위해서 통성기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버린 것은 자기가 가지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산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먼저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유지 되어져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누군가의 말을 그릇된 말로 불숙 뱉어내는 말로 아프게 했다고 칩시다. 만나서 대판 싸우고 쉽게 풀릴 수 있는 데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끌어안고 깨뜨려진 우리라고 하는 그 관계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고 마음을 삭이고 삭이고 삭여서 용서하고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오늘 저녁에 기도하면 내일 아침에 기도하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무슨 사건이 또 터집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 뭔가 영적으로 죄악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건 그것입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기 전에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인 특성과 인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남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고통에 빠뜨리느냐는 것입니다. 말 할 때 한 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한번 생각하고 행동하고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하면서 나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이런 단계에서 우리가 그렇게 서로 각자에게 피해를 안주는 삶을 사회전인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게 우리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로 따지자면 군대같이 잘되어 있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군대가 진정으로 우리가 되느냐? 규율 때문에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없고 신앙을 떠난 공동체도 없고 십자가는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 공동체는 십자가를 통해서 유지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전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입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아버지 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제의 공동체라기보다는 구속받은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깊이를 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와 같은 더럽고 추한 인생에 찾아오신 것이 감격이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힘입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어떻게 내게 나타났는지를 깨닫고 생사 간에 그 사랑을 붙들고 그 사랑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 밖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온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코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자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우리가 진정으로 주 앞에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주님이 나를 긍휼이 여기신 것처럼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그런 삶 속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내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는 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 주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안에 있는 쓴 뿌리와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구조 안에 들어있는 잘못된 것들을 날마다 주의 성령의 은혜와 말씀으로 제거하면서 좀 더 온전한 교통이 있는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공동체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앎으로 전능하신 그분 앞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해 고난 받는 날 동안 왜 그렇게 그의 나라를 사모했는지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말씀 앞에서 진실하게 깨달음을 얻고 그 하늘나라의 축복을 맛을 알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이 첫 머리에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지체들의 아버지 그중에는 성숙한 사람도 있고 미성숙한 사람도 있습니다. 죄의 짐을 많이 진 사람도 있고 비교적 자유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당신자신을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당부 하셨을 때 우리가 품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그런즉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죽기가지 복종 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여러분 우리가 주님이 당부하신 공동체의 특성을 우리의 신앙 속에서 유지하기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품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들어보겠다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 잘 못된 것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이 오히려 자기를 대적하고 자신이 가르쳐주는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뜰 줄 모른 소경과 같이 무지한 제자들과 우리 같은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가 납득되도록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들이 깨달을 수 없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눈높이만큼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의 수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낮아지심을 배우며 우리는 우리가 우리인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곧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도 앞에 부를 적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는 지체들과의 연합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7 (1997.6.15 주일오전)
5.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문미경
지난 시간까지는 주기도문에 들어가던 첫머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렇게 부르도록 당부하신 주님의 명령을 새기면서, 하늘에 계신 그리고 아버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우리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부터 유명한 주기도문이 시작됩니다. 기도와 하나의 소명으로 이루어진 이 주기도문은 첫 번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두 번째는 나라에 임하옵시며, 세 번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을 주목하고 있는 그런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것은 우리 편을 바라보고 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획일적으로 잘라서 말할 순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렇게 구분을 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한 첫 번째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 중에 첫 번째 왔던 이 기도는 아버지, 즉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첫 번째 간구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점검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는 이 기도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니까 즉석에서 생각해 내놓은 머릿속에서 의 기도가 아니라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살아오신 삶,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살기 위해서 늘 기도하시던 기도의 패턴을 기도의 형태를 주님이 정리해서 사도들에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에게 문자로 가르쳐준 그 주기도문을 그대로 기도하지는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니까 이때 와서 처음으로 당신이 평소 하던 기도를 짧은 문장으로 정리해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들이 이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제일먼저 점검해야봐야 될 것은 이 기도가 바로 예수 님 자신이 바로 평소에 올리시던 기도였으며 또 이 기도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가셨다고 그렇게 우리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에 오늘날 이 주기도문이 왜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는 빼버리고 빨리 예배를 끝내기 위한 주문처럼 외워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제시한 후에 그것은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 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여러분께 상기시킨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이 주님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에 살아가시던 삶을 통하여 나타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평소에 하시던 그 기도가 농축되어서 정리 된 것임을 우리는 먼저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점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주기도문에 있어서 오늘 말씀드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고 하는 기도가 첫 번째 자리에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는 순서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뒤죽박죽 섞어서 나열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혹은 첫 문장에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한 가지 내용이 뒤에 나온 내용보다 앞에 나와야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순서를 따라서 전달해주시지 안되었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던 평소에 예수님의 기도와 삶에 지배하고 있던 여섯 가지 기도와 한 가지 소명이 순서를 정함에 있어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하는 이 탄원이 첫 번째 자리에 온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지점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이 주기도문 가운데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가 첫 자리에 나온 것은 이 기도가 다른 다섯 가지 기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단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기도 제목가운데 어느 기도제목 하나를 무시하며 살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기도문을 잘 주목해보시면 사실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나온 모든 기도가 결국은 첫 번째 기도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기도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나라가 임해달라는 기도인데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으로써 불순종과 죄악의 세력들이 토벌을 당하고 하나님께 그 복종하는 주님을 경배하는 세력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때 거기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만큼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태극기가 대한민국 안에서처럼 그렇게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나라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 국기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처박고 불태울 순 있어도 처벌받지 않지만 이 나라에서는 국기를 올바른 방법으로 간수하지 아니하면 처벌받는 조항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만 가장 잘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짐으로써 불순종 세력들이 물러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세상이 회복될 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고 매일매일 부어주시는 영육간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때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가 서로 용서해준 그곳에 주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기도제목은 그야말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시던 유일한 이유였으며 다른 모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셔야 했던 이유는 이 한 가지 이유와 목적에 기여할 때에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던 목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이 첫 번째 기도제목, 이 첫 번째 간구는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모든 삶에 있어서 첫 번째 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우리의 삶과 기도에 있어서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기도의 제목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뭔가 고쳐야 될 삶이 있고 개선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잡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영적인 상태와 삶의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 하셨을 때 우리는 먼저 이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도대체 이 이름이 무엇인가?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높임을 받으소서 혹은 주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하는 대신에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우선 우리는 몇 가지로 나누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는데 첫째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그 예수그리스도와 이 주기도문을 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름에 관한 신앙입니다. 세 번째는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며 마지막으로는 왜 이것이 수동태로 되어있는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먼저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 너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 아버지를 부를 때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인간들은 그분의 영광과 존귀 앞에서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과연 이 세상에서 거룩해지시거나 혹은 인간이 노력함으로 영광을 받으시거나 혹은 모욕을 받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찬송가운데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찬송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늘 잘 쓰는 말이면서도 사실은 그 말들 중에는 무슨 뜻인지도 우리가 모르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 거룩을 돌린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각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영광을 모아서 높이 하나님께 올려드려서 주님의 머리위에 부어드리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 된다는 뜻입니까? 우리에게 존귀가 조금밖에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존귀를 다 모아서 그 존귀와 영광을 모두 모아서 부족하지만 높이 올려서 주님께 부어드리면 주님이 존귀해지신다는 그런 뜻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몰라도 확실히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영광을 돌린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이름신앙에 대해서 눈을 떠야합니다.
(예화) 이름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고맙게도 우리들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 부를 때도 미스터 누구, 닥터 누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막 부를 수 없는 사람, 바로 자녀들은 그렇게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아버지가 철전지 대역 죄인이 되어서 감옥에 가있을지라도 자기 아버지를 그렇게 이름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세상에서 자녀로서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깊은 존경심을 이름을 부르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이름을 여섯 글자로 불러준다고 해서 시골에 있는 아버지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막 부른다고 아버지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가까운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은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생각하는 한, 그는 영원히 아버지의 이름을 마구 부를 수 없습니다.
(예화) 우리들 가운데 그런 신앙이 또 있습니다. 옛날엔 어른들이 자신들의 모자나 의관을 벗어놓았을 때, 어린 사람들은 절대 어른의 모자와 의관을 밟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위로 넘어 다니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관이 망가질까봐 밟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의관은 바로 어른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에 사람에 관한 명예와 존중이 의관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거의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하찮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면 누군가가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사랑이 성경에서는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이런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이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거의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인해서 유혹과 시험이 올 때에 이기며 승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생각날 때, 그리고 내가 큰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그때 불현 듯 생각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나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살아야 된다는 소원들이 새롭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한다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신앙, 하나님 자신을 위한 열심과 하나님 이름에 관한 열심은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대한 발견을 하나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심 되는 요체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율법과 선지자의 중심 되는 강령이 무엇이냐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율법서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신앙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그리고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주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이름을 사랑하고...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이름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이름을 향한 뛰어난 열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합당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단지 나누어지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상과 구별되어 사는 삶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기만 하면 그것이 거룩해지는 것입니까? 그럼 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과 서기관들은 왜 거룩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마와 소매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놓은 경문을 차고 다니면서 그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옷깃에 새겨두고 이마에 새겨두고 외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고 노력했고 일회에 두 번씩 금식하고 밖에서 나오는 최소 십일조까지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지 나누어지고 세상과 구별되는 것만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구별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워질 때 그때에 비로소 거룩한 사람이 되고 그때 비로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거룩한 성도들이 되기 원한다면 먼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즐겨 행하던 일들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순종하며 살던 많은 죄와 불순종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통용되던 방법대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방식의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서 주일날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지만 여러분은 대문을 나올 때 불신자인 여러분의 가족과는 구별되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와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해지지 않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주님 자신에게 깊이 붙잡히고 주님 자신으로 충만해진 삶을 살 때에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름신앙을 우리에게 먼저 알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이름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었습니다. 이름을 인해서 사람들은 낙심을 하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께 돌려드릴 존귀와 영광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존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 때문에 더 영광스러워 진다거나 우리 때문에 더 존귀해지시거나 우리 때문에 더 만물위에 뛰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은 홀로 영원하시고.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하나님 홀로 거룩하고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화) 옛날에 2-3월 즈음에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햇살이 마당에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처마 끝에 팔다리를 쭉 뻗고 드러누워서 배를 대놓고 실컷 코가 삐뚤어지게 자고 있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습니다. 축 늘어진 배를 땅바닥에 깔고 하품을 하면서 잡니다. 애들이 와서 툭툭 건드리면 게슴츠레 눈을 떴다가 또 잠이 듭니다. 그런데 한참 실컷 자고나서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이 딱 떴습니다. 그때에 정면에 시야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들어옵니다. 개는 아침인데 언제 태양이 중천에 올라왔는지 너무 놀랍니다. 개는 일어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중에 있는 해를 보고 막 짖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낮잠 잔 생각은 안하고 분명히 아침인데 어떻게 네가 벌써 중천에까지 떠있냐는 듯, 개가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짖으며 곳곳을 뛰기 시작하며 태양을 향해 항의할 때 태양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과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삶과의 관계가 그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믿어드릴까 말까, 한번 하나님을 봐드려 말아, 라며 이렇게 수없이 재고 있는 동안에도 주님은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은 더렵혀지기도 하고 찬란하게 빛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하고 높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예화) 여러분이 만약에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제주도쯤 간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여러분을 보고 매주 나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제주도에 있는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곳 목사님을 만나서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왔으니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립니다. 근데 그 사람은 그 제주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아주 반듯하게 잘하게 됩니다. 주일예배 세 번은 기본이고 새벽예배는 기초이고, 기본기가 너무 잘되어있고 깊고 지혜롭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떡하면 불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거기에 성도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모범이 보이면 그때에 목사님은 여러분을 볼 때마다 어디를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열린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만약에 열린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제주도에 있는 그 교회에 오게 된다면, 이 목사님은 그분을 반갑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주도에는 열린 교회를 본적도 없지만 그 사람 때문에 열린 교회의 이름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예를 안 들겠습니다.
제주도 교회에서 열린 교회가 좋다고 해서 더 좋아질 것도 없고, 열린 교회가 엉망이라고 비난한다 해서 엉망 될 것도 없고 원래 있는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고 완전히 교회 같지 않은 교회가 되기도 하고 혹은 조국에서 유일하게 소망이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바로 그렇게 취급 된다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다윗을 기억하실 겁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서 형들이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싸우고 있는 형들의 참전하고 있는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전쟁을 한다기에 다윗생각엔 아마 칼과 창이 서로 맞부딪치며 엄청난 싸움이 지속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갔는데 가보니까, 이쪽에 한편 군인들이 서 있고 맞은편엔 적군들이 서 있는데 웬 꺽다리 같은 괴물같이 생긴 군인이 나와서 혼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떠드는데 연설도 아니고 욕설도 아니고 가만 들어보니,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발언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하는데 아무도 그 사람을 제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연을 물어보니 그 장사와 싸와서 당할 사람이 없으니 이스라엘 군인들은 모욕을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어린소년 다윗이 내가 나아가서 싸울 테니까, 나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인들 측은 다윗에게 장군들이 쓰는 갑옷과 무장을 시켰습니다. 혹시 적장으로 나오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어른아이 몸에 그 큰 어른들의 옷들이 맞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 벗어던지고 뭇매 돌 다섯 개를 들고 날렵한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뭇매 돌을 들고 나타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는 그 적군장수 블레셋의 골리앗에게 이제 뭇매를 돌리면서 다윗은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슈욱 하고 던졌더니 그 뭇매돌이 총알같이 날아가서 골리앗의 이마 정통에 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골리앗은 두개골이 깨지면서 그 돌멩이가 뇌 속 깊숙이 박혔습니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골리앗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뛰어 다가가 골리앗의 칼을 빼내 골리앗의 목을 잘라 높이 쳐들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높이 쳐들었을 때 그것은 골리앗의 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주님의 명예를 모독하는 대적자의 머리를 자른 거였습니다.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한 사람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가 휘두르고 있는 베틀과 같은 창은 사람을 죽이는 기계였습니다. 능숙하게 전쟁을 해오면서 그 창과 그 칼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를 묻히며 사람을 죽이는 기계처럼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어온 사람이 아니었고 기껏해야 양이나 치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무장한 군인과 뭇매 돌을 들고 달려 나가는 어린아이의 돌팔매질은 견줄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뛰어나갈 때 ‘넌 던지기만 해라. 아무데도 던지든지 내가 그 돌을 미사일처럼 만들어서 저놈의 면상에다가 맞춰서 쓰러트리겠노라’는 하나님의 무슨 신적인 응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돌팔매를 하다 실패하면 그 창에 찔려 죽일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내가 나아가면 절대 죽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싸움터에서 백전노장으로 굵은 이 사람을 뭇매 돌 하나를 돌리면서 그를 대적하기 위해서 모두 잠잠해져있는데 뛰어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이 어린소년 다윗의 마음에 불붙였던 동기는 무엇이겠냐는 겁니다.
내가 이런 기름부음 받았는데 죽더라도 이름값을 해야지, 그런 거였습니까? 난세는 영웅을 만드는 법이야, 이때 바로 내가 이름을 날릴 때가 아닌가. 그겁니까? 이참에 저놈을 처치해면 다음 대선 때 이스라엘백성들이 표 몰이를 해주겠지. 그런 거였습니까? 그래도 내가 저놈을 처치해야지만 후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 라고 노래를 함으로써 민심의 향배가 나에게 기울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정치적 고려였습니까? 이런 시각을 가지고 다윗의 행동을 보는 것은 다윗에 대한 모독입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거니와 나는 네가 모욕하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면서 뭇매 돌을 던진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현장에서 모욕을 받는 그 상황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는, 이것은 내가 도움이 되고 도움이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하여야할 하나님의 이름을 지금 어느 놈이 내 앞에서 모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써 행동으로써 여호와와 할례 받은 자를 함께 모욕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저주와 불명예를 돌려드리고 있는데 그 속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뜨거운 마음이 그 순간을 참을 수 없게 만들어 주었던 겁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그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시대로 다가온다면 주기도문을 뼛속깊이 우러나오는 감동으로 외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첫 번째 이 기도를 말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명예나 자기에게 돌아오는 유익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나갔을 때 그가 어떠한 상급과 보상을 바랬을까요? 여러분 그가 전쟁터에서 죽으면 거액의 연금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뛰어 들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살아온 백성을 주님의 이름을 내가 살아온 이 현장에서 존귀의 이름을 받아야 하고 그것은 나뿐만아니라 나와함께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겨야 하는데 오늘 내 앞에서 한 이방의 장수가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욕에 동조하고 있는 그 상황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참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야 한다고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처음 가르쳐주시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 때 그때 바로 그 나라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 하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사는 인생이 아니면 그것은 정말 사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을 때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까?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소중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소중합니다. 며칠 누워서 아파보니까 정말 건강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 명예도 소중합니다. 모든 것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너희로 하여금 너희를 창조하시고 너희를 구속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예화) 언젠가 저는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오해를 받아서 심히 저에 관해서 불명예스러운 소식들을 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느낌을 기억합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그런 비난이 많은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나에게 되돌려 들어올 때 저는 인간이 이렇게 마음이 분노에 가득 찰 수도 있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그 마음에 타오르는 열이 혀끝에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며칠 지나면서 곧 저희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아, 이것이 죄인이구나. 이제껏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자신이 이렇게 오해를 받고 그렇게 나의 명예가 더렵혀지고 있을 때 이토록 내 뼛속 깊은 곳에서 잠을 이룰 수 없을 만치 분노했는데 나는 일평생 살아오면서 수시로 모욕을 받고 짓밟히는 아버지의 이름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히는 여김을 받고 멸시를 받고 있다는 현실 때문에 자존심상해하고 뼛속깊이 아파해 본적이 있는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자신을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으로 지음 바 된 백성들이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사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놀라 우신 사랑 때문에 또 한편으론 우리의 모든 존재를 능가하고 뛰어넘는 그의 거룩하신 속성 그 자체 때문에 우리는 무한히 그분을 경배하고 무한히 엎드려 그분의 이름의 명예를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송축하는 세상이 되기를 사모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주님의 이름은 높이 들려지기도 하고 모욕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름에 먹칠하려고 들면 그것도 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알리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과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직장에서 살아가는 삶, 가정에서 밥 먹고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오다가다 이웃들과 만나고 지체들과 만나고 아는 사람들과 함께 통화하고 교제하는 삶,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과 접촉하는 무수한 기회들이 모두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릴 것인가, 이 기회에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불명예를 안겨 드릴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영혼을 바라보며 살아도 영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나 하나의 말, 나 하나의 삶, 나 하나의 행동, 나 하나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거에 따라서 우리 때문에 주님이 누구신지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세상에, 주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동시에 불명예와 멸시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정말 우리가 어찌하면 주님의 이름을 위한 삶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잘못되고 죄악 된 삶 가운데 어느 부분들이 주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우리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탐욕에 가득 찬 하나님의 이름이 되거나 우리 때문에 불결한 하나님의 이름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면서 날마다 날마다 우리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데 기여하는 생애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는 성도들,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6.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2
주기도문 강해∏ 8 (1997.6.22.주일오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녹취자 : 홍연주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 기도를 살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답게 그렇게 존귀히 여김을 받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아버지의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피조물이나 인간이나 천사들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존재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 일에 기여하는 삶을 살 때 그때에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영광스러우신 분이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태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해지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덜해지거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계셔서 뛰어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삶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화로우시고 존귀하시고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이름은 모욕을 받기도 하고 또 영광을 받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기도 하고 업신여김을 받기도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살피면서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생각을 읽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경책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쓰신 하나의 장엄한 러브스토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범죄 하였고 범죄 한 그 인간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쓸어버리시고 이제 온 세계 창조의 면류관인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제 창조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심판하시고 창조의 세계도 다시 심판하셔서 무로 돌려보내셨다면 성경은 쓰여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또 써 나가야할 줄거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해 놓은 세상에서 당신을 경배하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 처음 조상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으로 주님의 보좌에 도전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치료되고 고쳐져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그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는 그런 세상 되기를 사모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러브 스토리는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이 사랑할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감동적인 사랑의 서사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 그 사랑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러브스토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였습니다. 자기를 대적하고 자기에게 도전한 그 인생을 인생들은 자신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따라가셔서 불붙는 긍휼과 타오르는 사랑으로 구속하시고 그들을 건져내시고자하는 대 서사시가 바로 성경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잠시 진노하시지만 그러나 이내 이 세상에 있는 인생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잠시 슬픔과 고통이 있지만 즉시 은총을 나타내 보여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목 메이는 음성을 우리는 성경 어디를 열든지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해내시기 위하여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순간의 권능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동안 계속되는 인내와 사랑과 계획과 마지막으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건져내시고자하는 구원의 계획에로까지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한 결같이 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지만 그러나 죄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 할 수 있고 아버지의 이름을 송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 앞에서 자신이 주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죄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오늘도 용납하시고 부르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시고 은총을 보이셔서 아버지의 참 사랑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오는 모든 날 동안에 주님의 이 사랑이 우리의 삶의 소망이 되었고 그리고 주님은 이 사랑 때문에 오늘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지키시는 것을 의심치 않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비천한 처지에 살고 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도움 없이는 어떻게 살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를 향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우리의 희망을 걸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더 큰 축복을 바라며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소망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크지만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와 죄인을 용납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 속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주님에게 더 커다란 목표가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8년 됐나요.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생애적인 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성경을 보는 순간에 사실 성경 전체를 보는 나의 이전의 시야가 잘 못 됐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성경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신 예수그리스도와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기록된 이 장면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를 실패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를 모든 실패한 사도들 가운데 지도자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까지는 실패한 베드로였는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다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근데 그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물으신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이제는 완전히 실패한 채로 인생의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깨닫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무리들을 데리고 고기잡이를 떠났던 베드로를 향해서 찾아오셔서 물으신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이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한편으론 용기를 주는 것이었고 한편으론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나를 위해서 죽는데 까지 따라간다고 말했으면서 왜 나를 버렸느냐고 물으면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가 아니라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현재형의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사랑합니다. 그렇게 세 번이나 주님은 간절히 물으셨고 베드로의 이 사랑의 고백은 전 존재적인 응답이었습니다. 이렇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그 하나님이 직접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이 질문을 하셨을 때 인간의 깊은 속마음 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또 부활 하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거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라고 까지 대답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을까요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걸림이 되었던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 세 번째 사랑한다는 대답이 끝나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성경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이 사실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로마가 망할 때 박해를 받아서 피비린내 나는 고통을 당할 때에 베드로가 도망쳐 나올 때에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주님을 뵈었죠.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노라.’ 그때에 베드로가 돌아서서 로마로 다시 돌아가고 그리고 거기서 거꾸로 매달려 그것도 본인이 스스로 자청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하는 전승이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요약을 하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마 베드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찬양)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 아시리
그랬더니 ‘그럼 날 위해 죽어라.’ 그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신앙과 삶의 가장 실제적인 질문은 네가 어느 교파에 소속해 있느냐 혹은 네가 성경을 몇 번을 읽었느냐, 네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유능하냐.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다른 질문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실존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서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했을 때 그것은 ‘나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대답입니다. 그랬더니 ‘그럼 나를 위해 죽어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은 실감이 잘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합시다. 평소에 한 자매가 형제를 맘에 들어 했습니다. 어느 날 형제가 자매를 불렀습니다. 가슴 벅차게도 그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매 날 사랑합니까?’ 물어보았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서 ‘예’ 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날 사랑하십니까?’ 두 번째 물으니까 이것은 단순히 확인이 목적이 아니라 뭔가 미래의 목표 의식을 갖고 물어보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또 떨리는 마음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더 크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말했습니다. ‘자매 나를 정말 사랑합니까?’ ‘예.’ 그랬더니 이 형제 하는 이야기가 ‘그럼 콩팥 하나만 줘.’ 이 형제는 신장염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즉시 병원으로 가서 콩팥 한쪽을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좀 과장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스토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셔서 ‘네.’ 라고 대답했더니 주님께서는 ‘그럼 죽어라.’였습니다. 하루 종일 이 성경이 걸림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향해서 지난날의 모든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존재와 실존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대우하시는 것일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경 뒤편을 읽어보니까 무심코 수없이 지나갔던 성경구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미리 말씀하심 이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든 갈등과 고통의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마음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같지 않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굉장히 분주하고 헌신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베드로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최종적인 계획,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인생이 비록 이 세상에서 보면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했으나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바쳐진 삶을 살았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들풀과 같이 사라졌던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베드로의 헌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돌려드릴 수 없었던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자신은 비록 이 세상에서 죽어도 자신의 죽음과 헌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세상에서 높아지시는 주님의 이름과 전파되는 복음 때문에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이 일에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을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정죄 받아서 죄와 사망의 법아래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영혼들을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죄인을 건져내시려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의 수렁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범죄 함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주님을 찾을 때에 우리의 죄를 씻기셔서 정결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참 사랑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십니까.
아버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꼭 장마철에 가정주부와 같습니다. 장마철에 아이들에 밖에 나가서 흙탕물을 튀기고 장난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온 몸이 완전히 흙덩어리가 됩니다. 찢어져서 팔꿈치는 까지고 무릎팍은 피가 흐릅니다. 그럴 때 부모님은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합니다. 거기 서있어라. 그리고는 ‘너는 그렇게 더러워졌으니 우리 깨끗한 집이 너를 감당할 수 없은즉 너는 개집 옆에서 하루를 지내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히 주어온 아들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친히 마당에까지 나가서 아이의 옷을 다 벗기고 그리고 번쩍 안아서 목욕탕에 데려다가 머리를 감기고 다 씻깁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힙니다. 그러면 그 새 옷에 감격하며 가만있냐하면 잠시 후 머리가 마르기도 전에 바깥으로 뛰어 나가서 흙탕물을 튀기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한 번 너를 깨끗이 씻겨 정결케 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너를 우리 집안에 들일 수 없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또 옷을 입힙니다. 아버지의 용서하시는 사랑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용서하시고 소망이 없는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갖는 기대가 없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기대를 가지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고 주님을 향한 찬양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충만한 때뿐만 아니라
(찬양)
마음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은 주님을 사랑할 때뿐만 아니라 맘속에 시험을 받고 근심이 충만해지고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고통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고치시기를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제 밤인가에 잠깐 TV를 보면서 뉴스를 보려고 틀었다가 잠시 나왔는데 한참 들여다봤어요. 쉰 살이 넘은 어떤 남자 분 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증을 했습니다. 뭐냐 하면 소년범으로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이제는 바르게 살아보려고 결심을 했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일손이 남아도는 때니까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얘기이니까 말입니다. 실업자가 너무 많은 때이니까 가는 곳 마다 신원증명서를 떼 가지고 오라하는데 신원증명에는 전과자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감옥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을 누가 쓰겠습니까.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악의 소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젊은 세월을 감옥소를 자기 집 지나들듯이 드나드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소에는 성경을 기증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대장염에 걸려 설사가 나니까 감옥소에 티슈가 있겠습니까. 근데 그중에 티슈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성경책. 그것을 찢어 변기 위에 앉았는데 사람의 본능 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화장실에서는 정신 집중이 잘 됩니다. 꼭 뭐를 읽고 싶습니다. 어느 목사님 집에 갔더니 화장실에 신약성경을 메달아 놨더라구요. 뜯어가서 볼일을 보며 폈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찢은 것이 하필이면 로마서 3장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거기서 죄송하지만 변기 위에서 참회를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만이 철저한 죄인인줄 알았는데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이 한없는 위로를 주었고 또 하나는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그러면서 그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부터 찢어진 성경 다음부터 읽기 시작해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소망 없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고치시고 변화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가슴 저미는 러브스토리도 더 커다란 구도에서 보면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해 놓으시고 구원해 놓으신 목적이 좌절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 같은 죄인들을 통해서 사유하시고 용서하셔서 새사람 만드심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이 만들어 놓은 우리를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시려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 이 시간에도 소망이 없는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그리고 어찌하든지 우리들이 불타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님을 믿는 믿음의 변화가 없이는 이 세상이 아버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수 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받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복음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최전에 사람들입니다. 타는 듯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반역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화시키고 교화시키고 아버지의 참사랑을 깨닫게 하므로 말미암아 돌같이 굳어진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의 참 사랑을 깨닫게 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살지 않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비참한 인생인지를 그의 영혼 속에 진리의 빛으로 복음의 빛으로 깨닫게 하는 이 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복이 있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립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모욕을 받을 때 심장까지 떨리고 저미어오는 마음으로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힐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주님의 이름에 거룩을 돌려드리지 아니하는 이 세상의 풍조와 그리고 오늘날 이 도시들을 보십시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날마다 주님의 이름을 경배하지 아니하는 무례한 인생들을 수없이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피로 구속해놓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놓은 당신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예에 불신자와 같은 냉담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내는 데는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던 바벨탑을 그 조상들이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고 제의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바벨탑의 건축을 위해서 온 힘을 쏟아 부은 이유 중 한 가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탑을 쌓고 우리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항상 모든 관심이 자신의 이름을 온 지면에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나라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온 지면에 두루 펼치는 그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헌신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 우리의 명예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전에 한때 우리나라 연예계에서 코미디언으로 명성을 떨쳤던 한 자매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동기를 말하는 가운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까 자기의 인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는 죽을 생각밖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자기의 이름 석 자를 불러주던 수많은 팬들이 이제는 자신을 향해 더 이상 관심 갖지 않고 등 돌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음이요 생각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그렇게 멸시히 여김을 받을 때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을 찬송하고 송축하며 살아야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가지 아니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고 할 때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은 어디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번 문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해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시며 할 때에 그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영역이 어디였다고 생각하시냐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묻는 제자들 12명 가운데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무리들 그 다운데서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범위는 어디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묘사 되었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기도에는 범위가 확정되지 않은 채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디입니까? 온 땅 위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고 사람이 있는 온 지면 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구별되고 그 아버지의 이름을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거룩한 성품을 생각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세상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어떻게 이런 세상이 오게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매일 이런 식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온 땅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시면서 주님께서는 온 땅위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그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그 기도가 실현되지 않고 있는 세상을 보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는 고통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온 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그 기도가 성취되지 않으면 이 고통스러운 주기도문이 멈출 수 없었는데 설마 이런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 속에서만 주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셨을 분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꿈꾸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꿈꾸시는 마음이었고 아버지의 마음은 온 세상이 불붙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온 세상의 인생들이 구석구석에 사는 인생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속에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이 기도제목이 공유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온 땅이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영광 돌리고 거룩히 여기는 그런 세상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을 주시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 앞에 온 땅이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아버지 앞에 돌아오는 그런 부흥의 역사 없이는 결코 이 일은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런 거룩한 소원과 주님의 마음을 함께 품은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주기도문이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 마음에 다가오는 한 그는 주기도문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그리고 때로는 멈추어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서는 오직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 살아있음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셔서 온 땅을 뒤덮는 복음의 승리를 주시는 것 그것을 통해서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그리하여서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었던 이 첫 번째 간구가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아야 될 것과 그리고 주님의 이름에 명예를 돌려드리지 않는 세상을 인해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한때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지만 그래서 사자처럼 살아야 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물원의 맹수처럼 자기 위안이나 혹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작은 성취들로 던져지는 몇 덩이의 고기 쪽에 배를 불리면서 야성을 잃어버린 동물원의 짐승처럼 서커스단의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세상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의미는 모두들 냉담하고 모두들 자기 이름에 열심을 품은 이 마지막 시대에 남다른 소원을 마음에 갖는 것입니다. 남다른 거룩한 목표와 갈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 그 이름을 의지하고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싸우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이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통가운데서 모두들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승리를 확신하기도 하고 모두 힘을 잃어버린 가운데 그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용기를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용납할 수 없는 분노와 그리고 죄악 된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할 때 내 마음에 두신 주님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용기를 회복하면서 잠시 쓰러지거나 넘어져도 곧 일어서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한 목표를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처음 올리셨던 이 간구가 우리의 마음에도 뜨겁게 와 닿아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인데 직장인으로 평범한 소시민으로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자로 다양한 일들에 종사하면서 일생을 살아도 그것은 모두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한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을 하며 살든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명예를 돌려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면서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고 주님이 목말라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이 기도를 드리셨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이 기도가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주님의 이름이 땅 끝에서부터 땅 끝에 까지 온전히 거룩히 여김을 받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종말론적으로만 이 일이 성취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이 이렇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그런 세상을 그리워하고 꿈꾸며 비록 우리의 힘으로는 그 일이 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꿈꾸고 사모하며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래서 우리 자신이 삶과 우리 자신의 인생이 그런 거룩한 목표를 찾아서 살아가므로 우리도 이 세상에 거룩한 백성들로 하나님 앞에 남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남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의 껍데기를 쓰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원하는 바가 이 세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인생의 목표와 소원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겉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속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꼭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거룩한 주기도문의 첫 번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 첫 번 기도의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목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부름 받은 백성들이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이바지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은 썩어지는 들풀과 같고 그리고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드십시오.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기업에 대해 소망을 가지십시오. 썩어질 것을 위해서 심는 사람들은 그 썩어질 것들로부터 멸망을 거두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심고 영원한 목표를 위해서 심는 사람들은 영생을 거두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인생이 주님이 보시기에 주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아온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9 (1997.6.29 주일오전)
7.나라에 임하옵시며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박효준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가 왜 첫 번 자리에 왔어야 됐으며 또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요약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주기도문의 첫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주님의 이 기도에 동참해야 하고 그리고 이 기도는 모든 신자들의 첫 번째 삶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존귀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거나 업신여김을 받는 일들이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첫 번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살아오신 가장 최대의 관심. 가장 커다란 목표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현실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표를 갖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야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이 말씀이 두 시간 동안 드린 말씀인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 기도 제목으로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두 번째 기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나라이…….’ 이 말은 옛말 어법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라가 임하옵시며’ 그런 뜻입니다. 주격조사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얼핏 보면 “그러면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없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님의 이 두 번째기도 속에서 만나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가장 커다란 주제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구원, 우리의 은혜 그리고 부흥 이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설명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 길어지면 그 다음 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이 기도를 보면서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아직 임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들이 알아야합니다. 주기도문을 시작한 맨 처음에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린 봐와 같이 이 주기도문은 두 가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 주기도문이 종말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는 주님의 기도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볼 때는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모순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인간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전히 모두 심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그 왕국을 세워 달라고 하는 기도 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주기도문은 단지 종말론적인 구도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열하게 살아가시는 삶의 현장에서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기도의 제목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단지 현실 도피적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주님의 나라가 하나님 한분의 힘으로 미래에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나라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설명을 들이기 위해서는 거의 성경 전체를 훑으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삼라만상들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 세계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주권을 이제 인간에게 위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우주를 다스리고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며 통치하도록 그렇게 위탁 받았던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첫 조상들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이 피조세계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그 뜻을 당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신앙을 갖은 인간들에 의해서 자기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감격스러우셨겠습니까. 그리고 그야말로 죄가 없던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지배하고 계시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들어온 것은 서서히 서서히 파고든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자 마치 이 죄는 커다란 방파제가 무너지는 것처럼 그리고 닫혔던 문들을 적군들이 단순히 깨부수고 수많은 적군들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죄는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들어오자 이 세상은 죄에 인해 지배를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범죄 하자 이 세상의 나라는 죄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세력이 이 온 땅을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이 없어 빼앗긴 것이 아니라 죄와 양립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를 인하여 자기가 창조하신 세계를 마귀의 손에 내어준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들을 이제 통치하고 구체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욱이 죄를 통해서 들어온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사망을 갖고 그 사망 권세를 갖고 사람들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고 이 죽음을 미끼로 마귀는 더더욱 인간들을 허탄한 데에 굴복하는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송축하고 아버지를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해서 허무한 피조물에 굴복하고 이 세상의 금수와 버러지와 같은 썩어질 것들을 우상으로 바꾸고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헛된 피조물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죄는 점점 쌓여가고 하나님의 진노는 점점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더 깊이 갈라놓아서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완전히 끊어진 세상 속에 인간들이 고통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죄의 무서운 파괴력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반항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사람들은 문화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앙 아래 살도록 설득하고 강요하는 작업들을 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들은 철저하게 그 시대가 가르쳐주는 하나님이 없는 사상과 문화의 지배를 받으면서 주님이 원래 자기를 창조해 놓으신 목적과 관계가 없는 오히려 그 목적과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위해서 충성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탄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된 사람들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더 범죄하게 만들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더 악하고 범죄하는 사람들이 형통하게 살아가게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의 심령 속에 진정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사는 일 보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마귀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삶에 매력을 느끼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지게 되었고 영광을 받으셔야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들이 범죄하고 죄로 말미암아 온 땅이 사탄의 수중에 들어간 것처럼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이켜 놓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로부터 구원이라고 하는 씨앗을 심으시면서 그 구원을 통해서 앞으로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씨앗은 점점 크게 자랐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제 이 세상 인간의 죄에 의해서 마귀에게 내어준 봐 된 이 세상 나라가 무너지고 주님이 그토록 꿈꾸고 하나님 자신이 통치하시는 그런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그 뱀에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예고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실 것을 예고하셨고 그리고 그 문제가 죄와 관련된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희미한 구원의 계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 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 땅에 많은 죄인들이 번성하였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과 약속의 소망을 믿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소수의 백성들을 두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한 나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그 그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상에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제 이 나라가 모두 악한 군대에게 빼앗겨서 적군 천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적군 천지가 되어 버린 세상 나라에 그 적군들을 괴멸시키고 파멸하는 사령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죄로 말미암아 마귀들에게 넘겨준바 된 이 모든 일들이 영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것도 역시 총이나 칼이나 대포를 통해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영적인 악한 나라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영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이 세상 나라의 마귀는 즉시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졸개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귀신들도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한눈에 알아 차렸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멸하기 위해 애썼지만 소용없는 일이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져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능력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까지는 자기보다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자들을 결박하고 자신의 통치에 복종시키면서 마음것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그리고 이 세상이 완전한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그러한 영애를 누고 있는 마귀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훨씬 더 큰 권세를 갖고 오셔서 그들의 통치 아래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복음으로 구원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사실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마귀들의 세력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졌습니다. 그 권세가 파하고 하나님ㅇ의 거룩한 통치의 권세가 그들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매여서 사망을 두려워하던 많은 종노릇 하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해방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권세보다도 더 큰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그들을 해방시켜주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하시는 이 놀라운 일들을 십자가에서 이뤄졌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과 하나님이 불화한 관계에 있고 그래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움심을 받을 수 없는 그 불화한 상태를 십분 활용했습니다. 최대한 활용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을 사망으로 협박하고 굴복시켜서 자기 아래서 그 수하에서 마귀의 나라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면서 이따금 던져주는 육신의 필요를 채우며 살아가는 죄에 길들어진 인간들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이글거리는 분노의 심판을 담당하심으로 범죄한 우리들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의 불을 끄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연출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 이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불의로 말미암아 짓밟히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범죄 하였지만 그 범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체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우리 인간들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이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한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담당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를 향해 부어지든 하나님의 진노가 은총으로 바뀌고 우리를 심판하시던 하나님의 분노가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원의 길에서 죄로부터 해방을 받고 마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이제는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성령이 그 마음 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비유를 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저 대구까지 공산군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지죠? 허리를 자르면서 연합군이 아래로 내려가고 북군이 위로 처 올라오면서 이제 공산군이 괴멸되었습니다. 분명히 이제 공산군이 항복을 하고 도망을 갔는데 여전히 공산 치하에 있는 것처럼 두려워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오던 일본의 일본 천왕의 무조건 항복에 관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본이 완전히 항복을 하였는데도 일제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일본 순사만 보면 굽실거리고 무엇이든지 섬기려고 하는 노예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자기의 나라는 이제 끝났는데도 그러나 시골 한 구석이나 혹은 어디에서든지 아직까지도 일제시대의 강점이 끝난 사실도 모르고 굴복하는 사람들은 악한 일본 사람들에게는 아주 손쉬운 지배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무지를 이용해서 굴복 시키고 항복시켜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해방 되었고 이미 밝은 도시에서는 죄악을 행했던 일본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모두 발가벗겨져서 도망을 가는 처지가 되었는데 또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창칼에 시달리면서 해방의 새로운 시대가 다가 온 줄도 모르고 여전히 옛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과 꼭같이 순사에게 굴복하고 노예와 같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은 이 세상에 진정한 광복인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완전한 광복이 왔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자유 국가가 되었고 자주 국민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마귀의 권세의 깨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지만 그래서 악한 나라의 군대는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평양이 부서지고 군 사령부가 모두 파괴 되었고 군수 기지가 모두 폭파 되고 이제 괴뢰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산적과 같은 처지로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곳곳에 숨어 사는 빨치산 같은 마귀의 세력들이 여전히 자신의 통치를 구사하려고 아직까지도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 무지를 활용해서 여전히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하고 협박하고 설득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 처럼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에서 두려움 속에서 사망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나 아직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남아 있는 악한 세력들을 토벌하고 복음의 기쁜 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불상한 인생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그 마귀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원래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과 그리고 그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그들을 불러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하늘나라의 애국시민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고 나면 우리는 모두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할 소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비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직까지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다만 천당에 갈 기차표 한 장을 주머니에 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이것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너무나 강조하고 천당만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소명을 따라서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성경의 이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교훈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쪽짜리만의 복음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소명의식이 없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 하면서도 왜 삶이 그러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 보다 조금도 낮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 다는 하나만 이유 하나만을 제외해 놓고는 세상에 있는 사람과 구별되지 않고 본인도 구별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소명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나는 공짜로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쪽자리 복음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고백하면 주님이 여러분을 아무 공로 없어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즉사할 것입니까? 그것 아니잖습니까? 신앙도 살라고 믿는 것이지 죽을라고 믿는 것입니까? 다 살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할렐루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 하니까 삶이 이 모양 이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명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가 딱 태어나면 무엇을 합니까? 출생 신고를 합니다. 애를 낳고도 서너 살, 너덧 살이 되었는데 출생신고를 안 해서 족보에도 없는 아이를 만들어 나중에야 신고하는 부모가 대학을 다 나왔으면서도 “부모가 무지하여 출생신고하기를 잊어버렸습니다.”라는 이런 각서까지 써서 벌금내고 그러고 받아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생명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병적 기록부입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에 즉시 군인으로서 등록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여자는 빼주죠?” 그런 것 없습니다. 세상에서나 빼주지 하나님ㅇ의 나라에 남자들이 별로 도움이 안 될 때 여자들 중에 말입니다. 잔 다르크 같은 용사가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성들이 왜 아멘을 안 하십니까? 다 기록됩니다. 이게 전투 기록부에 딱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명책은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대로 저장이 되고 그 다음에 이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갔는가를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는 본당에서 저렇게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왜 꼭 유아실에서만 회개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의 답변은 명백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전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우듯이 신앙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 침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실패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싸우듯이 살지 않으면 모두 패배한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싸움 같은 것 모릅니다.” 그렇죠. 싸움 같은 것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져서 떡이 되어서 누워있으니까 무슨 싸운다는 것은 일어나려고 해야지 그냥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는데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화) 도둑이 들어와서 주인더러 “저기 가서 서 있어!” 하더랍니다. 쭉 가서 서 있으니까 색연필 같은 걸로 줄을 쫙 긋더랍니다. “이 선 밖으로 나오면 너희 모두 죽을 줄 알아!” 그러더랍니다. 그리고 모두 다 털어 넣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웃 사람이 “그래……. 당신은 남자가 되가지고 줄그어 놓고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안 나왔단 말이야?” 그랬더니 그 사람이 “무슨 말이야? 내가! 남자가 그럴 일이 있어. 얼마나 나오려고 금을 몇 번이나 밟았는데?!” 그런 식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싸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역시 우리 바깥에 많은 세상은 여전히 사망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주셨는데 역시 세상의 많은 환경들은 하나님 속에서 살아가기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참 사랑을 알았는데 내가 다니는 직장의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 주님의 참 사랑을 모릅니다. 이런 것이 대립의 구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투쟁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싶죠? “아, 기도가 잘 되어야 할 텐데, 되어야 할 텐데” 그러고 살아가면 결코 기도 못합니다. “어떡하던지 해야지.” 하면 한단 말입니다.
(예화) 어제 전철을 타고 집회를 하러 내려가는데 연세가 많이 드신 아주머니하고 자매하고 그 전철 앞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들려 왔습니다.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무슨 운동을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젊은 자매가.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쉽지 않죠. 대단한 결심이 필요해요. 그런데 꼭 하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도 운동 하나 하고 싶은데도 결심과 결의가 필요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심과 싸우려고 하는 분투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영원히 무기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가 평화를 원한다면 구원 받았으나 그러나 마귀의 지배에 고분고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싸움입니다. 싸움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주일 학교를 섬긴다.” 그것은 싸움입니다. 섬길 수 없게 하는 환경과 더불어 싸웁니다. 또 충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싸우고 잘하려고 하면 꼭 옆에 사람들이 마음을 긁어 놓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 것들과 또 싸우고 여건과 싸우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분투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를 이 어두운 죄악 가운데 사망 가운데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건져 주신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얼마든지 평탄하고 안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신앙 생활하려고 몸부림치다가 “꼭 이래야만 신앙생활 하는 건가?” 라는 이런 회의를 느껴본 경험 있으시죠? 그러면서 떠오르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수많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종교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떨 때는 부러워집니다. “야! 꼭 이렇게 해야 하나?” 그러나 여러분. 살아가는 모든 삶은 전투입니다. 그러니까 싸우기를 포기하면 그 다음부터는 마구 무너지는데 마귀가 우리를 무너트리는 마지막 목적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냐면 구원 받은 자로서의 소명을 따라서 전혀 살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손을 땝니다. 그게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 설교를 들으면서 오늘 “아! 나 이렇게 살면 큰일 나겠구나.” 그리고 뭔가를 한번 결심해보십시오. 뭘 결심하든지 좋습니다. 새벽기도를 결심하든지 아니면 예배에 자주 빠지던 사람들은 예배에 안 빠지겠다고 결심을 하던지 저녁기도를 결심하던지 매일 성경을 읽겠다고 하던지 정독을 하겠다고 하던지 뭔가 하여튼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것을 결심을 해 보십시오. 결심을 하고 시행하려고 하면 즉시 여러분은 무언가 강력한 도전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목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와 같이 생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야합니다. 서 있는 자리는 싸움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나면 모두 천국에 말하자면 전투대원들로서 편성이 되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의 대대. 중고등부 중대. 1학년 3반 소대. 뭐 이런 식으로 이제 그러면서 파송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왜 왔습니까? 난 여기에 왜 왔습니까? 외국에 있을 수도 있고 학교에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교회에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여기에 내가 서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까? 사모님 형제가 오라고 했어요? 난 안 그랬는데요? 하나님이 보내셔서 그랬습니다. 소명입니다. 형제는 왜 왔습니까? 내가 오라고 했습니까? 아니죠. 오라고도 안했는데 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그래서 만난 겁니다. 여러분 이 집단이 한편으로 보면 연약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리고 또 상한 자들을 하나님이 고치시고 또 고통 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 대하소설을 써도 쓸 수 없는 수많은 인생의 사연을 갖고 온 사람들이 여기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병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고치시기도 하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잘난 사람은 한번 손들라고 해요. 아무도 안 들잖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다 못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위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십시오. 우리 모두 위로와 사랑과 용서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피조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모여서 세상에서는 나눌 수 없는 교제를 나누고 연약할 때는 붙들어주고 상처 받을 때 위로 하고 하면서 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교회가 우리의 삶이 이 것 이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두 가지 면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합니다. 한편으로는 연약한 양떼들이지만 하나니 앞에서는 연약한 양떼들이지만 아직까지도 악의 세력들이 창궐하고 자기의 통치권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총 메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협박하고 강탈해 가는 빨치산과 같은 마귀 세력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서는 군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화) 그러면 여러분. 천국에 여러분 병적 확인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자는 저기 경기도 본적진 사람들은 경기도 병무청에 가서 병적 확인서 때어 달라고 하면 30분이면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 병적 확인서를 땠다고 해봅시다. 이름 김 아무개. 몇 년 몇월 몇일 생. 그건 호적에 있는 것 하고는 틀립니다. 예수 믿은 날로 기록됩니다. 작년에 구원 받은 사람은 1996년생이겠죠. 그러면 이제 딱 구원 받자마자 군사가 딱 되었습니다. 입대를 했습니다. 배치를 했습니다. 그래서 배치를 한 것입니다. 배치를 받아서 여러분이 중고등부 선생님도 되고 유년부의 선생님도 되고 열린교회의 교인도 되고 “아……. 확실히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야지만 군인인가 보구나?”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여러분은 군인이고 직장에서도 군인이고 골목에서 왔다갔다 백수처럼 굴어도 군인입니다. 그런데 전투기록부를 때어보니까 기껏 나온 것이 그것입니다. “몇월 몇일 입대하여 어디어디로 보냈음.” 그랬더니 “탈영했음.” 그리고 징개 받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기를 주고 엿 바꿔먹음. 징개. 탈영. 탈영……. 다시 어느 소대로 배치 받았으나 탈영. 중고등부로 배치 받았으나 탈영. 여리고 전도 팀으로 왔으나 어땠고…….” 계속해서 기록이 수십 년을 살았는데 계속 탈영입니다. 그게 무슨 마음이 있어 그렇게 탈영한 것입니까? 용기가 있어 탈영한 것이 아니라 싸울 힘이 없으니까 탈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적군에 투항 그러면서 “적진에서 몇 년 동안 부역하였음.” 그렇게 하고 그리고 인생이 끝나면 그 인생이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심판하시는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의 전투 기록부에는 가는 곳 마다 혁혁한 승리를 이뤄서 그래서 무공 훈장을 빛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승리를 통해서만 얻어지는데 이 승리는 싸우려고 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을 때보다도 더 편하고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번지수를 잘 못 찾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고 그냥 세상에서 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일단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병사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소명에 불타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구원 받았으나 구원 받지 않은 것보다도 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쁨의 이유,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소망의 이유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한잔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고 재밌는 노리 하고 타락하면 그것 때문에 낄낄 거리고 좋아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행복감에 빠져서 잠자리에 드는 인생이었지만 이제 예수를 믿고 나면 그런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려고 해도 양심에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거룩한 계획을 알고 그래서 나를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오게 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제 교회를 다니든 직장을 다니든 무엇을 하든지 나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지만 그것으로서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분투하듯이 하나님 앞에 군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정복하면서 오는 나라인데 자기 자신이 깊은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 결코 활기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가 먼저 대적을 해야 합니다. 대적하고 이기고 그리고 자기의 무기력한 모든 삶들을 파하고 그래서 날마다 승리하고 이기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고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헌신된 군인을 기쁘게 하는 소식은 무슨 소식입니까? 여기에서도 우리의 동료가 이기고 저쪽에서도 우리의 부대가 승리의 깃발을 꽂았다는 소식이 헌신된 군인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영적인 승리의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고 있습니까? 여지까지도 하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던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의 십자가의 깃발이 꽂혔다는 이야기가 들려 올 때 여러분의 마음은 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당신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죄와 함께 타협하고 불의의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는데 자신들은 오히려 신앙을 갖고 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불순종의 소식이 들려 올 때 여러분의 마음은 아픕니까? 이렇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귀한 소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소명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만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천국의 병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군인의 정신을 갖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내 정부에서 발표가 나오기 전서부터 나는 이 군대 이러다 망하지 하던 사람입니다. 군인들 휴가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조회를 하고 무엇을 하는데 삐삐 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답니다. “정신이 나갔구나!” 부대마다 공중전화 다 있죠? 그러니까 보초 설 때도 삐삐오고 교육 받을 때도 삐삐 오고 총 소제할 때도 삐삐 오는 겁니다. 여자 친구, 남자 친구 할 것 없이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공중전화기로 뛰어가서 전화통에 매달리는 군인을 갖고 무슨 전쟁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랬더니 내 마음을 알았는지 국방부에서 전부다 삐삐를 압수 했잖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군인들이 신용카드입니까? 신용카드는! 군대에서 다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그 밥에 그 나물이면 다 먹고 되었지 무슨 신용카드입니다. 신용카드를 갖고 뭘 합니까? 탈영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쓸데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군대가 강한 군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걱정 안 됩니까? 다 압수해 버렸잖습니까? 세상에서는 꼭 필요한 것도 군대에서는 아주 해로운 것이 된단 말입니다. 군대 바깥 사회에 있을 때에는 전혀 악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삐삐 있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 나 우리 청년들 다 삐삐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급하면 나 부르게 말입니다. 그거 왜 안 갖고 다니지 모르겠습니다. 카드 하나쯤은 다 갖고 다녀서 심심찮게 누구보고 “나 만원만 빌려줘, 이만 원만 빌려줘.” 하지 말고. 은행에서 직접 빌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는 그것이 문제다.”이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군사로 모집 된 자 들은 자기를 모집한 자들을 기쁘게 하여야하고 범사에 절제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하고 싶던 모든 일들을 다 하고 즐거움을 모두 만끽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군인일 수 없습니다. 탈영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주일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면 늦잠 자는 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주일날 선생님이 되고 나면 주일날 가장 일찍 일어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자매들이 제대로 오려면 6시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직장 갈 때도 6시에는 안 일어났습니다. 바뀌는 겁니다. 왜? 그것이 소명인줄 알고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목적인 줄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복종시키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장난처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엄중한 전쟁이고 눈을 부릅뜨고 매 순간 자신을 절제하야 군인의 정신으로 무장하지 아니하면 승리도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복도 없다는 사실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열심히 살아간다고는 말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소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좋은 인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직장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밥 벌어 먹기 위해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그런 목적을 위해서였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어둠가운데에서 건져내어 주신 것이 우리에게 우주적인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는데 는 병사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병사로 세우셨습니다.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창도 공급하시고 칼도 공습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펼 때 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천국의 최신 병기들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싸우고자 하는 자들을 패배하도록 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이기기를 다투지 않는 자를 승리하게 하신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주님이 이제 사령부를 괴멸하시고 선포하셨지만 여전히 날 뛰고 돌아다니는 빨치산의 무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치하는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날마다 이기게 만드시고 그 안에서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한없는 즐거움들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 아직까지도 여러분 자신을 요람에 싸여서 요람에 누워서 기저귀를 차고 딸랑이를 흔드는 그런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놈의 아기는 자라지도 않습니까? 5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잖습니까? 10년 전에도 늘 그렇게 생각했잖습니까? 이제는 기저귀는 차고 딸랑이는 흔들고 있지만은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고 수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생명까지, 마지막 피 한 방울, 살점 하나까지 우리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받은 병사로 소명하셨습니다. 구원 받자마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의 최신 병기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 1년, 2년, 3년, 5년 혹은 10년이 흐른 지금 혹시 여러분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니 나아가서는 이제 싸울 의욕조차 잃어버리고 병기들은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모두 잃어버리고 군화도 너덜너덜하고 단정하던 군인의 모습은 흐트러져서 혹시 거렁뱅이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맞아. 나는 탈영했어.” 여기는 내가 있어야할 곳이 아니야. 이 모든 전투를 잃어버린 삶이 우리를 더 비참한 대로 비참한 대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우리를 왕국을 위해 불으셨고 우리는 소명을 띄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소명인 것처럼 여러분이 그렇게 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0 (1997.7.6 주일오전)
8.나라이 임하옵시며 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 박은희B
지난시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나라와 다르다는 것과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소명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두 번째 기도인 “나라이 임하옵시며”하는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모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줍니다. 주님이 관심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완전하게 임하고 완성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마땅히 경배하여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던 불순종의 세력들을 모두 토벌하고 그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움직였던 장본인인 마귀를 마지막 결박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완전하게 완성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미 마귀에게 넘겨준바 되었던 이세상의 나라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바뀌게 되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주님이 이 세상을 다시 구속하셨지만 여전히 반항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그 악한 세력들과 더불어 전투하듯이 싸우는 그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말씀을 지난시간에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아야 될 것은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이미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악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마귀에게 넘겨준바 된 세상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능히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여전히 도처에 아직도 마귀의 세력들은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더욱더 타락하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원래의 계획대로 이세상이 되어 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역할들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을 세워 나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시 한 번 강조를 드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면 안 믿은 거나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십자가에 피로 구원하셔서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들을 불러내시고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그 목표를 따라서 살아가기 원하시는 그런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졌던 세상에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을 그런 세상을 회복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내신 그 이유가 바로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신 그리스도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든 무기력과 그리고 패배를 자기의 숙명처럼 살아가는 모든 기력이 없는 삶은 바로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왜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나를 구원해 내셨는지 거기에 대한 이해와 분명한 소명이 없기 때문에 모두 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산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모든 것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고 속죄함을 입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존경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소망에서 빚어 된 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뭔가 변혁하고 그리하여 창조의 원질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서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강한 소망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불붙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의 역사를 보고 바로를 굴복시키고 애굽을 떠났지만 그러나 그 광야에서 잠시 맛본 감격도 잃어버리고 결국은 광야에서 유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의 조상입니다. 인생은 무책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장난처럼 살다가 지나갈 그런 한 개인이 아닙니다. 인생은 진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더 진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앙이 그 인생에 대한 진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가장 커다란 관심사입니까? 좋은 집이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사입니까? 요즘 유행하는 옷이나 장신구들이 여러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까? 좋은 차나 아니면 잘 생긴 형제자매가 여러분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보다 짜릿한 쾌락이나 그리고 즐거운 일들이 여러분에게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한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인생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실패하고 책망을 받을 인생인지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어떤 즐거움과 만족을 경험하면서 살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살아가는 길지 않은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게 하는데 얼마나 이바지 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악하고 게으른 인생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예수님은 종말론적으로 오는 그 나라는 어차피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끊임없이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아직까지도 마귀에게 충성하려고 하는 이 불신앙과 죄악의 세력들을 더불어 토벌하고 그리스도를 대장삼아서 이 세상을 정복해가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나라는 어떻게 오는 것이겠습니까? 먼저 이 나라는 전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제일 먼저 확장되고 불순종한 세력들이 토벌을 당하는 그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지 복음을 전하면서 살지 않으면 그는 소명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기회를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이 세상을 위해 죽게 하셨고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원래 창조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는데 아직까지도 주 오셨는지도 모르로 혹은 주 오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옛 주인이던 마귀에게 복종하면서 죄와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려고 발악하고 있는 그 불쌍한 영혼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전도를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가려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와서 불순종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바뀌고 하나님을 거스르던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모임으로 변화되고 바뀌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주님의 강력한 통치가 실현될 때는 반드시 그 앞에는 전위대가 있었습니다. 맨 앞에 누군가가 적진을 향하여서 달려가고 전쟁의 맨 선봉에 서서 불순종하는 세력들과 더불어서 복음전도를 통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먼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갈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면서 산 사람들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과 함께 평안히 잠자리에 들고 먹고 마실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죄의 무서움과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계획대로 살지 않을 때의 그 끔찍한 저주스러움, 그리고 날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죄와 악에 취해서 살아가는 그 마지막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서 눈뜨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가 전하는 그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주인이 없습니다. 그의 주인은 이 세상이고 그가 섬기는 우상은 자기의 배입니다. 지금도 그 인생을 모두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은 그의 욕망입니다.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고 그리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수없이 하나님 앞에 죄짓는 일들만 남았습니다. 죄를 짓고 나면 그 죄는 다시 그가 지은 죄를 볼모로 해서 그를 다시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죄의 종이 됩니다. 이제 죄는 그의 인격의 특징이 되었고 그의 삶은 죄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쌓여가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강한 반발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쥐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마귀가 지배하는 나라에 한 복판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를 지나쳐서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고 귀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일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는 곳은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세상입니다. 불법과 거짓과 음란과 패역이 판치고 그리고 더러운 것들이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그리고 파멸에 이를 것들이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되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까? 어느 날 벼락 맞은 것 처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 말고 또 다르게 사는 인생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보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 인생이 가장 보람된 인생이고 영혼을 향하여 의미 있는 인생이고 지금의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보여줌으로 지금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추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해 주어서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이루어짐으로서 커다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수없이 모여 있어도 살아가는 삶이 다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은 모두 전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꼭 같은 것들이 일어납니다. 가끔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어떻게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 믿는 아무아무개가 어떻게 그렇게 나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상할 것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악을 교회에서 다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언젠가 예수를 믿었던 추억, 교회를 다녔던 기억 때문에 단순히 그 사람이 거룩해지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저는 여러분의 그 착각에 탄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한 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경험하고 그래서 그 마음과 그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하여 주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이 원래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을 때에 그 인간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갈 때 그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에 자기가 충성하고 길들여서 살던 나라를 떠나는 일이 먼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먼저 결별하고 떠나야지만 빛의 나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둠의 나라를 떠나는 일이 없으면 빛의 나라로 들어오는 일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 호적에서 자기 이름을 파가지고 갑니다.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호적에서 파냄으로 말미암아 어떤 한 남자와 한 가족을 이루고 이제는 그 집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혼을 하지 않는 한 자기의 이름을 파 갈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쪽에서 이름을 떠다가 다른 쪽에다 이름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사람들은 혼인신고 한다고 그럽니다.
여러분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옴에 있어서도 한사람이 옛날세계와 결별하는 일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도를 받고 그리고는 그 제시된 복음의 내용 앞에서 깊이 하나님 앞에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사랑의 대상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바뀌고 자기가 정말 비참한 죄인임을 깊이 알고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거룩한 어떤 영적인 결단, 삶의 있어서의 어떤 깊은 결단이 있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깊은 회개 없이는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깊은 회개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서 아버지 빛의 나라로 들어가서 살지 아니하면 자기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언젠가는 심판을 받아야 할 세상이라고 하는 사실에 눈뜨게 되는 일, 그래서 자신의 이제껏 까지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삶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깊이 뉘우치고 뚜렷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없이는 그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게 되면 분명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던 교회 안에서 친숙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설교자의 양심으로 여러분에게 경고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진정으로 안전한가? 여러분은 스스로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불러내고 있는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자신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자신의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익숙해진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진실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이 반란군의 생활을 통해서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깊은 인식 속에 자기의 삶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는 일없이는 회심도 없고 회개도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기는 늘 복음을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고 복음의 기본적인 도가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고 지옥에서 불길가운데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광경들을 우리들은 언젠가는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의 다스림 그 아래서 살아가겠다고 깊이 결단하고 전에는 세상을 사랑했으나 이제는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지고 삶이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교회생활을 오래도록 하고 있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심의 증거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분명히 하고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 정말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인지 우리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심과 함께 이제 확장되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맘대로 살았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는 그렇게 살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불의와 죄악과 불법과 더불어 싸우며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는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회심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도구라면 그럼 오늘 우리들이 더 생각해봐야 될 것은 무엇을 통해서 이런 회심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가 널리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원인 중에 하나는 교회 안에서 회심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회개해 봤습니까? 언제 깊이 회개해 보셨습니까? 유년 주일학교나 첫 예수 믿을 때 그때 회심한 이야기 그때 깊이 회개한 이야기는 이제 너무 많이 써먹어서 닳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언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이 깨끗이 씻겨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 새롭게 주님만을 사랑하는 맹세한 그 회개가 언제입니까? 여러분 기억에 있습니까? 혹시 무지무각 하게 매일매일 하루하루 한주한주 교회에 떠밀리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교회를 못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못 떠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이렇게 종교생활을 해서라도 내 양심을 얼르지 아니하면 속이 편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교회 생활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대표적인마음의 특징이 바로 이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 속에서 회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의와 거룩과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나라의 지배하기 때문에 범죄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적마다 자기의 불결과 더러움을 깨닫게 됩니다.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의와 그리고 그 거룩의 성품을 발견할 때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하고 범죄한 인간인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너는 죄인이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교회에서는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그들이 자기의 죄와 불결한 모습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 속에 나와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불의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주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얼마나 불결한 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고 엄위로우시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여러분은 주님과 불화한 관계를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해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느끼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 주일 교회를 찾는 것입니까? 이 모두 회심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깊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외치신 그 첫 번째 설교가 “회개하라”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깊이 회개하는 자들을 움직이는 그 원동력을 복음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충성스러운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충성하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과 몇 일전에 만났습니다만 교회 안에 교회 중직자의 자녀 하나 있는데 펑크족입니다. 펑크족 뭔지 아십니까? 나도 사진 통해서 한번 보았는데 머리를 고데를 해가지고 이 꼭대기까지 치솟습니다. 심지어 막 50센티 60센티 이렇게 말입니다. 이렇게 세우고 말이지 그리고 그 이상한 복장을 하고 말입니다. 남자가 화장을 하고 귀고리하고 그러면서 폭주족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일본에 많은 그런 펑크족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교회의 중직자인데 아들이 그러고 다니니 싫잖습니까? 그래서 너 잘하는 것이 뭐냐? 랩댄스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어떡하든지 이 아이를 교회로 끌어들여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랩댄스를 시켰답니다. 주일 예배를 안 드리고 시편을 가지고 랩을 하라고 그랬더랍니다. 그래서 올라가서 귀고리하고 화장하고 요란 벅적지근하게 하고 가서 막 왜 그렇지 않습니까? 드러누워서 발광하는 것 있잖아요? 그러면서 시편을 하는데 어른들은 하나도 못 알아듣는데 애들이 다 알아듣더래요. 따발총 쏘듯이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놈이 본래 하는 게 그런 거니까 그걸 하라고 무대를 주었으니 얼마나 신명이 나겠습니까? 부모들은 자기 아들이 그걸 하는걸 보면서 감격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순간적으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오는가?’ 인정합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그렇게라도 끌어들여야 되지 않습니까?
마이클잭슨이 왔을 때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동성연애자 오지 말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캐톨릭에서는 추기경이 가서 포옹을 하고 끌어안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개신교는 옹졸하고 캐톨릭은 포용력이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 광경을 보면서 내 지금은 안 믿지만 언젠가 믿으면 내가 캐톨릭에 한 표 찍어주겠다 그런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을 붙들고 그 복음의 충성된 삶을 사는 것 없이는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점차 점차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점차 점차 익숙해 지다보면 자기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나라에 백성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복음을 정 반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낮아진 자들과 함께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이 박해를 받으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분이 폭력을 사용하셨습니까? 무력을 사용하셨습니까? 자기의 이를 챙기셨습니까? 세금을 탈세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박해를 받으셨던 이유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사랑을 받으셨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곳에는 악마의 나라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회심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깊이 회개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너 좋고 나 좋고 공존 공생하는 풍조로 나가기 때문에 복음의 승부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고 말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갈 때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그 핵심을 말했습니다. 그 직전에 그는 어디서 왔습니까? 아테네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수많은 철학자들을 설득하려고 복음의 진리를 철학의 진리로 가르치려고 애썼습니다. 논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자기의 경력과 그리고 자기의 사상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을 통해서 이 복음전도가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린도는 방탕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말쟁이들이 많은 도시였고 유식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성질 사나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과연 이곳에서 이 모든 이방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주님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어리석어 보이고 지혜로운 고린도 사람들에게 무식하기 짝이 없이 보이는 이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이외에 것들로 승부하려다 실패한 아테네의 깊은 실패를 경험하고 그는 내심 하나님 앞에 깊이 작정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이전에 내가 많은 것들을 배웠고 많은 사상과 철학을 통달해서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인내를 지혜로운 말로 권할 수 있고 그리고 증거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회심하고 돌아오는 이 일들을 위해서는 오직 복음의 핵심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힌 것 그것을 더 잘 알도록 힘쓰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및 그의 삽자가의 못 박힌 것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결심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고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데서 돌이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오게 만드는 진정한 회심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고 복음의 가치를 향해서 자신의 신앙의 닻을 다시 한 번 내렸던 것입니다.
아테네에 갔을 때 그가 복음을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아테네에 갔을 때 그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을까요? 아닙니다. 아테네에 갔을 때 그는 사도의 옷을 벗어버리고 잠시 철학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철학자의 옷을 입었을까요? 아닙니다. 어떡하든지 그는 그 복음의 자체를 가지고 아테네에 그 철학의 닳고 닳은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자체가 너무나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포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바꿔서 그 사람들의 지성을 굴복시키고 그 사람들의 학식을 굴복시켜서 예수 믿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뚜렷한 회심은 첨가된 것이 없는 생생한 복음이 전파되는 그 곳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복음을 듣기 어려워진 이 시대에 우리는 조국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단을 세탁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의 위탁하신 진리를 새롭게 확신을 가지고 붙드는 교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많은 교회들이 세워져도 그 많은 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복음이 낯설어지는 처지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순전한 그리스도의 도를 말하고 십자가의 도리에 대해서 설교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참된 복음이 아닌 것들에 익숙해져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참사랑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속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알 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가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안일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고 얼마든지 자기의 육신의 쾌락을 좇아 자기를 즐겁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강요합니까? 하나님이 십계명을 말씀하셔도 여러분이 지키기 싫다고 뛰쳐나가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지 않으십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고 구원 받았으니까 이제는 구원의 계획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고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먹고 마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즐기는 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이세상의 불의와 더불어 싸우면서 이 땅에 진정한 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구원은 좋지만 그건 너무 나에게 무거워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삶으로 만족할 테야’ 하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인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데 왜 손쉬운 불순종의 길이 있는데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세상나라를 위해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이유는 뭣 때문 입니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도 공부를 안 하면 “공부해서 남 주니?” 그러고 물어봅니다. 그렇죠? “남 주냐? 너 위해서 공부하라” 우리들은 남 주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돈 벌어서 남 주냐? 그러지만 남 주려고 돈 버는 사람들입니다. 돈 벌면 그걸 누굴 위해서 쓸까? 생각하십시오. 건강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이 건강을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명예가 있으면 그 명예를 통해서 어떻게 예수를 전할까? 생각하십시오. 좋은 직장도 좋은 일거리도 좋은 수입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 삶을 자청할 수 있습니까? 누가 강요하지 않는데 그런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도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나를 어둠가운데 살아가던 이 비참한 죄악에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안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이전에는 먹고 입고 잘 놀면 그것이 기쁨인줄 알았는데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다스리시니까 내 마음에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이루어지고 나니까 이 나라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경배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나라가 이루어졌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을 아직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 안전한 삶, 이 복되고 즐거운 삶, 이 축복과 자비가 있는 이 삶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일까 그는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구체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아니다 이럴 수 없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세계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마귀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죄의 종노릇 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결코 숙명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되겠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주님의 가장 간절한 두 번째 기도의 직면하게 됩니다. 주님이 때로는 눈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 소리가 여러분에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주님의 그 기도를 따라서 우리들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귀의 세력들은 한번 빼앗긴 하나님의 나라를 거저 버려두지 않습니다. 다시 그 나라를 정복해서 옛날과 같이 마귀를 우두머리로 하는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타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신들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형식적으로는 점령을 했지만 그러나 반란이 일어나고 나면 실제적으로 그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에 가면 민다나오라는 큰 섬이 있습니다. 거기는 필리핀 경찰당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습니다. 반군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이나 군인들은 물론 관광객도 거기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신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분명히 법적으로는 그 땅이 필리핀 땅인데 민다나오 섬을 지배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어가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은 그 사람들에게 세금 바칠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권한 없는 사람들이 세금을 걷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정부는 필리핀 정부입니다. 그들은 정부의 세금을 바치고 정부로부터 혜택을 받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는데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보십시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북사람이 넘어오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 봐야 된다고 법원이 판결을 했습니다. 이북도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저 이북의 있는 사람들은 지금 괴뢰군에게 세금을 내서는 안 됩니다. 불법입니다. 그런데 불법이면 뭐 합니까? 실질적으로 우리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야 되겠지만 그러나 저 사람들은 저 기아와 고통과 억압 속에서 해방시켜 줘야할 신성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제 이미 여러분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다시 뺏을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결과적으로는 자기들을 이롭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분을 죄와 세상과 그리고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공격을 해 오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회개하고 내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진실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했지만 불행하게도 싸움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긴장을 늦출 수 없이 전투의 정신을 가지고 군사와 같이 일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그렇게 그치지 않는 싸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치지 않는 그 싸움은 결국 어떻게 그 결말이 이어질 것입니까?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다음 주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분명히 깨달으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하는 가장 훌륭한 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충성이 입증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오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회심하지 못했다면 오늘 이 시간에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나도 그 구원의 복음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여러분의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세상의 유혹과 죄로 말미암아서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지키며 살아가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시간도 여러분은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깊이 회개하고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건설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나의 불충성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헌신되지 못한 삶으로 주님의 나라가 무너져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법적으로는 주님의 통치를 받으시면 서도 실제로는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여러분 가운데 회복시켜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불붙는 복음을 지니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흥이 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세상에 사조와 풍조와 타협하는 대신에 복음위에 부어주실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능력을 앙망하며 우리는 이 불신앙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기 위한 대열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013.6.29 구역장수련회
9.나라이 임하옵시며 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이시내
지난시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전도와 회심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히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심하는 일들을 통해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의 영적인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복음을 듣고 그 복음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이전에 자기 속에 있던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경험하지 아니하고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아무리 많이 교회 다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회심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한 사람 속에 이루어지고 그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를 따라서 성경을 배우고 또 하나님께서 또 자기를 처음에 불러주신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면서 살아갈 때에 그런 사람의 헌신된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도전받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 그것은 주님이 오시는 종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매순간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놓으셨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 그런 상태로 들어갈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지 사죄의 은혜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도 아울러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대적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들이 모였습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그들이 모여서 신앙생활 해 나가면서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가 있는 것을 분명히 믿고 깨닫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구원받았지만 타락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그 생생한 은혜의 교제를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향해서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비록 그 모양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역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놀라운 축복들이 사라져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전에 있던 불붙는 복음의 능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도덕적인 삶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독특한 기쁨도 그들 가운데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죄, 세상과 죄는 결탁되어있고 이 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받고 또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그리고 오히려 죄와 유혹을 따라 살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든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공격을 하고 공격을 받는 전투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상과 이 세상가운데 있는 죄들을 구원받은 우리들이라도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그러나 죄의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안에 있는 이 내재하는 죄는 세상이 유혹할 때 그 유혹이 주어지면 우리 안에 있던 죄 된 성품들이 고개를 들고 유혹과 함께 결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되면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때 우리에게 거셨던 기대하던 삶들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과 더불어 그리고 죄와 더불어 다투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죄 가운데로 유혹하고 그리고 이전에 살아가던 삶의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부르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다음에 깨닫게 된 삶의 목표를 따라서 살지 않고 예전에 주님이 없을 때 주님밖에 있을 때 살았던 그런 세상의 방탕한 삶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이 죄들도 뿌리 뽑고 이겨야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또 이런 죄의 정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매일매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해서 매순간 우리의 영적인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모든 죄와 더불어서 싸워나가지 않으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견고하게 역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셨을 때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이런 세상과 죄도 우리를 점점 불행하게 하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진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세력입니다. 지금도 이 마귀의 세력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아니하고 그들을 더욱더 하나님을 향해 불순종하게 만들고 그리고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을 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을 메말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다가와서 때로는 유혹하고 때로는 협박하고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므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앗아갑니다. 하나님과 나누던 그런 생명 있고 아버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느끼던 좋은 관계를 파괴해서 그래서 황폐한 신앙을 갖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거의 살 수 없고 새롭게 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놓으신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좇아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눈을 들어서 여러분의 주위를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넘치고 있는 무기력한 삶, 주님을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주일 11시에 교회 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기쁨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분노도 없는 사람들, 죄에 대해서 분노할 줄도 모르고 의에 대해서 마음이 타오를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용감하게 주님이 필요 없다고 부인하고 교회를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살아계시다고 고백하지도 못하는 이중적인 그리스도인들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마귀의 세력입니다. 가장 마귀가 고통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사람의 불신자가 한사람의 형식적인 신자가 어느 날 드러난 복음의 진리 앞에서 깊이 회개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렇지 못했던 삶들을 깊이 뉘우치면서 주님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신 명령에 절대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변화 이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내 인생을 모두 맡기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전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지도 모른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게 만듭니다. 불순종하면서도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우리에게 설득하고 유혹하는 것은 분명히 마귀의 세력입니다. 여러분이 타협을 하고 그리고 얼마든지 믿음을 양보하고 하나님께 적당히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을 택한다면 여러분을 마귀와의 관계에 있어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는 이러한 모든 마귀의 세력들과 유혹들을 철저하게 거절하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은즉 내가 순종할 이는 오직 아버지 한분이시라는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불행은 주님을 믿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자기에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 마지못한 의무의 길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계교가 바로 마귀가 우리에게 던지는 궤계입니다. 그 힘은 실로 막강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권세에 굴복하고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두려워서 투항하는 무리들을 보십시오.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구속을 받고 십자가의 정병이 되어서 영적인 전쟁터로 나갔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는 모두 패배하고 그리고 이제 마귀의 수하가 되어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귀를 이기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보십시오.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고 정결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능히 죄를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끊임없이 패배하고 승리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고 세상과 더불어 싸워 이기고 마귀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는 것은 매우 한정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확장되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 그때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와 마귀의 권세와 더불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던 사람들도 회개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면 또다시 죄와 마귀의 세력들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언제 기회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또 자기가 그동안 성령을 슬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깊이 애통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회복되고 무거운 죄의 짐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거운 죄의 짐이 벗겨지고 자유를 느끼는 순간에 이제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자기가 지었던 모든 죄를 다시 범하기를 그리워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면 이전에는 거의 숙명적으로 굴복하며 살아갔던 많은 죄에 대해서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그 죄를 이기고 정복할 수 있도록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이미 주셨지만 그러나 이미 주신 이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서 은혜로 가득 찬 삶을 살지 않고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고 세상과 마귀의 세력들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악한 세력들에게 지배를 받는 그런 처참한 광경들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그러한 통로가 되는 영적인 삶을 영적인 생활을 우리들이 충실히 해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들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도 없고 기뻐할 수도 없고 하나님도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탁월한 영적인 은사를 주셔서 영들을 분별하고 귀신을 내어 쫓게 하는 것들만을 사모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이 경건한 삶과 그리고 매일 계속되는 영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이 은혜생활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그리고 우리 밖에서 도전하는 세상의 유혹들을 향해서 거절하면서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참된 힘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능을 사모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매일 묵상하고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일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생각함으로 받는 신앙적인 유익들이 계속 열매를 맺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따금 와서 가슴이 찢어지듯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는 것이 그를 진정 승리하는 사람으로 바꿔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역사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정지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정지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멈춥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제 그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한 사람이 되어져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신앙생활들을 우리가 감당해 나가야 될 텐데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한번 우리자신들을 돌아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이 시간에도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지난시간에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모두 태어나는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에 입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떤 삶을 일생동안 살아왔는지 하나님께서는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이었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지를 아실뿐만 아니라 또 우리의 섬기는 모든 과정은 곧 철저한 영적인 전쟁이었음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의 군대에 입대해서 일생동안 살아오는 동안에 만약에 우리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대신 탈영이나 일삼고 그리고 반역이나 일삼고 적자와 내통하는 스파이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왜 성령을 주셨는지 사람들은 바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것은 단지 우리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메마르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죄를 이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즐기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를 유지하는 최고의 길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싸움터에서 최선을 지키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은혜도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충성된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 가서 찬양 부르면서 은혜를 받고 저 교회 가서 말씀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또 다른 교회 가서 훈련을 받으면서 은혜를 받고 이러면서 문전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허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하심이라고 믿고 그리고 끊임없이 그 능력을 의지하면서 분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더욱 놀라운 은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충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고 이제까지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데려오셨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인지 한번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귀하게 쓰여졌는지 우리자신이 하나님이 앞에 끊임없이 우리자신을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령의 은혜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이루어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 능력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면 그들은 어디에다 내어다 놓든지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가 실제로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때 성령의 능력을 활용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해서 말하면서 단 하나의 공격용 무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검 곧 성령의 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과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서 우리에게 활용될 때 그 때 우리가 죄와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깊이 깨닫고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준 의무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의무를 깊이 이해하면서 그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이 불붙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죄를 이기고 불순종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다가 보면 다양한 칼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작고 뾰족한 칼이 필요하기도 하고 혹은 휘두르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는 커다란 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한쪽에 날이 선 검으로는 부족해서 양쪽에 날을 세워서 휘두를 적마다 어느 한쪽에서든지 적군들을 살상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가진 칼을 소유해야 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다양한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가지런히 준비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때 하나의 깨달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칼로써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씩 둘씩 셋씩 칼로 존재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칼들이 우리의 마음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죄에게 공격을 받거나 마귀에게 공격을 받거나 혹은 세상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 그 싸움의 상황에 적합한 어느 말씀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령님이 강하게 붙잡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여 주실 때 우리는 유혹도 이기고 그리고 죄로부터의 공격도 이기고 마귀의 공격도 능히 이길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성령을 아울러 함께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무기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식을 주고도 무기를 바꿀 것이며 물을 주고도 총을 바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싸우는 것만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이기는 길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한 나라가 전쟁상태에 들었을 때 전쟁에서 그 나라가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술이고 또 하나는 무기이고 그리고 마지막은 사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훌륭한 병기가 있어도 전쟁을 하는 방책이 잘못되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방법이 좋아도 병기가 없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며 두 가지 모두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싸우고자 하는 전쟁할 용기가 없는 군인들이라면 그들의 무장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함께 기도할 때에나 그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공동체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 영적으로 건강하고 그리고 늘 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패배한 사람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에 있던 많은 교회들 속에서 공통된 모습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제일 예배순서 중에서 싫은 순서 중에 하나가 기도하는 순서였습니다. 큰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올라가서 대표기도 하지 않습니까? 올라가서 대표기도 하는 것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올라가서 하나님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다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몹쓸 죄인들입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주님 오늘 예배 끝나고 나가도 질 것 뻔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모습이 꼭 무엇 같으냐면 누가 더 곤고한지 경연대회 하는 것 같습니다. 한숨까지 쉬면서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됩니까? 우리는 어디서나 생명을 좀 볼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만큼 하나님 앞에 정직해 질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저 자신도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는 왜 맨날 그렇게만 기도를 드려서 이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모두 우울한 사람들 그리고 패배를 숙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오늘도 예배드리는 이유가 이기기 위한 예배라기보다는 잘 질 수 있도록 지면서도 덜 아파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주님 어차피 이번 주에도 칼에 맞을 것입니다. 주님 이기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진통제라도 제 때 구해서 고통이나 멎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제가 영적군사입니까 라는 책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한번 우리의 기도가 정말 분투하는 기도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다가 기도가 되지 않을 때에는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와 더불어서 싸워보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새벽기도 나가서 기도하려고 하는데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잠이 밀려옵니다. 그 잠과 더불어서 한 번 투쟁해 보려는 생각해보시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게으릅니다. 그 게으름을 미워하면서 싸워보려고 한 번 투쟁해보지 않습니까?
(예화) 어느 해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내려오는데 어느 학생이 그럽니다. 교수님 저는 요새 제가 미워서 죽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네가 좋다고 하는데 너는 왜 네가 그렇게 밉냐? 그러니까 너무너무 밉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밉냐? 그랬더니 교수님 때문에 미워졌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언제 너를 너하고 이간질 붙였냐? 그랬더니 어느 날 수업을 하는데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6시간 이상 자면 범죄입니다. 그랬더랍니다. 몸이 아프면 10시간도 잘 수 있지만 건강한 젊은이가 6시간 이상 잔다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그랬더랍니다. 그래서 안 자려고 하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육체가 10시간에 길들여져 있던 것입니다. 10시간은 자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명종을 놓고 6시간 만에 일어나려고 애를 써도 안 되고 일어나면 차이는 6시간은 누워 자고 4시간은 앉아자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이렇게 안 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고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을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미워하고 철저하게 부인하고 철저하게 싫어하고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몸부림치지 않으면 결코 죄를 이기고 무기력을 이기는 신앙생활은 없다는 말입니다. 좀 기도하려고 올라갑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일주일을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한주일은 정신없이 바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지난주에도 제가 은혜를 많이 받고 세상에 나가서 살았습니다. 직장에 보내셨고 그리고 나를 가정에 보내셨고 또 교회에 보내셔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지난 일주일동안도 제 삶은 영적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처럼 승리를 주시고 이기는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오니 하나님 오늘도 제 경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제가 일주일 동안 살아온 전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딱 써가지고 와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직장에서도 수시로 봉투의 유혹을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과 복음의 은혜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주님 이런 은혜를 금주에도 충만하게 주셔서 다음 주에도 다른 사람은 어쨌든지 나는 주님의 군사되어서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주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승리가 서린 그런 기도를 아버지 앞에 드릴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렇지만 하나님 오늘 제 몰골을 한 번 보시옵소서. 주님이 내게 들려주신 믿음의 방패는 수많은 총알을 맞고 거의 뚫어질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복음의 신발을 신고 방배2동, 방배3동, 남현동, 사당동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다 너덜너덜 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제 가슴에 달아주신 의의 흉배는 적군들이 제 심장을 노리고 얼마나 총을 쏘아댔는지 다 찌그러졌습니다. 제 구원의 투구도 그리고 진리의 띠도 하나님 모두 낡아갑니다. 하나님 오늘 이 예배시간에 나를 새롭게 무장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의의 군사가 되어서 죄악 된 세상에서 불의와 타협치 않고 그리고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주님만을 사랑하며 일주일동안 승리하며 살다가 오겠습니다. 주여 오늘도 예배시간에 하늘 문을 여시고 그리고 천국의 무기들을 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말씀을 통해서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힘입고 이제는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나를 살리고 깨닫게 하신 이 말씀과 참 사랑으로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런 헌신된 충성의 맹세가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가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참된 기쁨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실패는 하나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는 진정한 생명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혜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주셔서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영적인 군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죄와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과 더불어서 화목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와 하나님의 은혜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영적인 군사들은 먼저 죄로부터 떠난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우리의 영적인 삶을 무기력하게 하고 그리고 나태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여러분 속에 진정한 기쁨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갈망을 앗아가게 만듭니다. 기도의 모양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말씀은 듣지만 깨닫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깨닫기는 하지만 그것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이 다음 주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정말 생명력 있는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고 그리고 여지까지 살아왔던 신앙적인 삶의 어떤...
여러분이 앞으로 일주일 동안을 잘 살다가 와야 합니다. 회사에 가서 공정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말 하고 편법으로 걸어가기 좋아하고 불법을 행하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뇌물을 주고받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탈세나 하고 그런 식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묻은 그 피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정결한 그곳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넘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동안 나가서 살 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결코 밥 벌어먹기 위해 사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옛날에 저도 변화받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월급날이 되면 사람들이 그때는 온라인도 없고 그냥 25일 되면 봉투를 나눠주었습니다. 봉투 받아서 책상에 넣고 푸념을 하는 사람들. 이거 받으려고 내가 한 달 동안 다녔나.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3년 동안 직장생활 할 동안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시더니 변화 받고 나서 직상생활을 딱 시작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신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기쁩니다. 전에는 직장 어디 다니냐 그러면 사람들한테 말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변화 받은 다음부터는 너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신 것은 밥벌어먹게 하려고 두신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가는 일터이다.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얼마나 감사한가. 찬양하면서 살아가니까 직장생활도 즐겁고 가정생활도 즐겁고 감사한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직장 나갈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왜? 이렇게 일할 기회를 주셨으니까. 변화 받지 못했을 때는 아이고 지겨워 안 먹고 말지 치사하다 그거 줄려고 새벽에 또 나오라고 그러나. 새벽에도 나가고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감사하고 찬송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월급 받으려고 다니지만 내 월급은 하늘나라에 쌓여간다. 이곳에서 내가 쟁취한 그 수많은 승리, 불의와 더불어 타협하지 않고 이기면서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간 모든 삶 이런 것들은 바로 나로 하여금 주일날 하나님을 은혜가운데 만나게 만들어주는 감격적인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일주일동안의 삶을 승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방법입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은 공정하게 사용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선하게 쓰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뇌물을 멀리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뇌물을 바칠 생각을 하지 말고 국세를 바칠 자에게 바치고 공세를 낼 자에게 내고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매순간순간 하나님이 나에게 그 세상에 두신 그 이유가 바로 주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하는 삶을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매순간순간 삶으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저렇게 살아가는 방식도 있구나 믿고 그리고 죄 가운데서도 담대하고 시련가운데서도 용기를 가지고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는 그 능력과 은혜를 보여주어서 그들도 하나님의 참된 은혜의 세계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백성이 되고 싶어 하는 그런 소망을 불어넣어 주도록 살아가는 것 그런 삶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의식도 없이 주일예배 끝나고 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가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그렇게 흔들거리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기도하려니 기도가 됩니까. 뭘 한 게 있어야지. 용서해 주시옵소서. 너는 매일 기도가 그것밖에 없느냐. 지난주에도 그거더니 이번 주에도 또 그것이냐 저는 힘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벌써 3년째 계속 되고 있는 기도이다. 너 힘없는 것은 이제 마귀도 다 안다. 힘을 줘도 나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의 각오가 없는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예배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감사하다 그러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이 불현듯 찾아오십니까? 아닙니다.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 앞에서 두려워하고 감격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떠나가십니다. 그리고 비유하지면 예배라고 하는 산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내려옵니까. 아. 너 봤니 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넌 봤니? 봤지. 아. 감사하다 그러고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 신비한 생각과 모든 것들은 마음에 묻히고 그다음에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율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이요 율법을 부여받은 백성이니 이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율법에 죽도록 충성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을 각오하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예배를 은혜가운데서 드렸어도 마지막에 돌아갈 때에는 한 가지 신념에 넘쳐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제는 내가 불의한 길을 버리고 의로운 길을 걸어서 진리를 따라서 살고야 말리라 하는 그 진실한 결의가 예배 끝마치고 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역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 일주일동안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서 살아가야 됩니다. 매일매일 분투하는 삶을 살고 우리로 하여금 죄와의 타협을 거절하면서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친 백성다운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며 살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힘은 단지 주먹을 쥐는 우리의 결단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결단을 뒷받침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는 영적인 군사로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마음속에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 세상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나태와 태만하게 살아가는 삶을 강요받을 때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이런 영적인 군사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매일매일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하늘의 은혜와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한 끼만 굶으면 손발이 벌벌 떨려서 수제비라도 먹어야 되는 인생들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며칠을 굶으면서도 넉넉히 살아갑니다. 산 게 다 산 게 아닙니다. 소위 죽어가는 데 그것이 산 것입니까? 이런 게 동물적인 삶이란 말입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매순간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무거워진 심령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일주일동안 혹은 이 주일동안 혹은 한 달 혹은 일 년 혹은 수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거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들 삼일만 금식하면 삼일도 필요 없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하루만 금식하면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못할 우리 인생들이 말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하찮게 생각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기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승리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서 새롭게 새롭게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이 원동력이 되어야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제 방에 녹음기가 요만한 것이 있습니다. 거기 보니까 100볼트라고 쓰여 있는데 다 여기는 220볼트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전지를 사다 넣어놓고 건전지를 가지고 작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테잎을 딱 틀었는데 내 주되신 주 그런 거를 딱 틀었는데 내~~~주~ 이상하다 그래서 테잎이 망가진 줄 알고 다른 것을 또 집어넣었는데 또 그런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세상에 음반회사들도 나쁜 사람들이다. 테잎을 왜 이렇게 금방 망가지게 만들었나 투덜대면서 몇 번을 실험해봤는데 안됩니다. 그런데 라디오는 잘 나옵니다. 그래서 라디오는 잘나오니까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나중에 저쪽 방으로 옮겨가서 전기코드를 사서 전기에다 딱 꽂으니까 어쩜 그렇게 청아하게 테잎이 잘 나오는지 모릅니다. 깨달은 사실은 무엇이냐면 방송을 내보낼 힘은 충분한데 테잎을 돌려서 찬양을 들려줄 힘은 없는 것입니다.
교회 나올 힘은 있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힘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크리스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당신을 나는 불쌍히 여깁니다. 이럴 수 있는 밧데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시면 이런 모든 것들이 작동이 됩니다. 교회 나오는 것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파워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러는 영혼들이 불쌍히 여겨지는 것입니다. 제가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나서 그렇게 사람들이 불쌍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불쌍했느냐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왜? 저게 아닌데. 나도 옛날에는 저러고 살았는데. 그런데 진짜 말은 잘합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힘이 없는데도 자신들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쌍합니다. 그런 마음을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부어주신 사람들이 불붙는 전도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고 간구한 사람들도 성령이 이런 마음을 주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매순간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일오전예배 그것도 바쁘면 빼먹고 달랑 나와서 딱 한번 예배하고 신문잡지 읽는 시간만큼도 기도하지 않고 텔레비전 보는 만큼 성경도 안보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아니라 드라마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그런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기는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신없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아주 정직합니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날씬해 보일 수도 있고 뚱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울은 정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삶도 똑같습니다. 겉보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모습을 갖추고 저렇게 모습을 갖출 수 있지만 그러나 속일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공정하고 정직합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그 어떤 위장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허식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면서 살기에는 너무 지쳤다고 생각이 듭니까?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한 하루정도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 해보기로. 하나님만 찾아보기로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루가지고 해결을 보기에는 너무 무겁습니까? 그럼 한 삼일정도 어떻습니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휴가 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낼 수 있는 휴가 아닙니까? 아니면 죽어버렸으면 안다녀도 되는 직장 아닙니까? 한번 삼일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달라 그래서 교회에 고요히 엎드려서 그게 어려우면 기도원에 가서 혹은 자기의 뒷방에서 엎드려서 삼일동안 말씀보고 기도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일에만 한번 몰두하도록 결심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경건서적을 읽으면서 자기의 신앙생활을 한번 점검해 보기 위해서 일주일정도의 시간을 가지면 어떻습니까? 한 일주일정도 티브이를 안보기로 하고 신문도 안보기로 하고 일체의 잡다한 것을 안보기로 하고 직장이 끝나기만 하면 교회로 돌아와서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사모하는 그런 결심을 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말입니다. 수요예배 못나오던 사람들은 세 시간씩 차타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넘기 어려운 선입니까? 그러면서도 이기고 있으면 말을 하겠습니까? 늘 지는 삶을 살아가면서 한번 하나님 앞에 결심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겠지 라고 하는 이런 마음도 사실은 성령이 주신 생각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생각들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우리에게는 결단이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3주 동안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그리스도예수의 피로 놀랍게 은혜 주셔서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지 아니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렇다면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내 인생의 목표가 바뀌어야 되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비어있습니다. 주님 나의 무기력한 삶 그리고 남들이 말하는 신앙의 기쁨은 고사하고 지리하고 지루하게 이어져가는 이 신앙생활을 단절해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이 믿어지지 않는 분이 계시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옵소서.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내가 확인하면 내가 차라리 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양단간에 용기 있는 기도를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영적인 생활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힘써야 될 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강해 Ⅱ 10 (1997.7.6 주일오전)
10.뜻이 하늘에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
주기도문 강해 Ⅱ 11 (1997.7.13 주일오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 정은숙B
주기도문 강해 Ⅱ 12 (1997.07.27 주일오전)
저는 지난주까지 세 시간에 걸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 전체를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 또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보고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기도 제목이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기도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빚어내는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기도의 제목이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가 살아있는 사실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호흡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오늘 하루도 이 공기를 걷어가지 마옵시고 나에게 호흡할 힘을 공급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원래 존재하니까요.
두 번째 기도도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신 것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주님이 이미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이런 현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그런 세상이 오게 해달라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도도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시작할 때 저는 여러분에게 이 주기도문의 구도를 두 가지 측면에서 봐야 된다는 말씀을 이미 누차 드렸습니다. 하나는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종말을 바라보고 아버지 앞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이 전망하고 있는 것은 종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 세상에 모든 불순종과 하나님의 나라에 거치는 것들과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 것들을 심판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그 종말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또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살아가시던 예수님의 삶의 자리가 만들어준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삶의 자리 속에서 이 주기도문을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삶의 자리와 다르지 아니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예수님의 때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나라가 이미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그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직까지도 옛 원수 마귀에게 복종하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바 된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르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이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도 와 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제목이 우리의 삶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땅 끝까지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리고 죄인들의 마음속에 천국이 오게 하고 부패하고 더러운 타락의 물결이 있는 곳에 거룩하고 성결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자들의 마음속에 참다운 은혜와 기쁨을 부어주실 수 있는 성령의 권능과 은혜를 이미 보여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고 아버지의 통치를 기뻐하지 않고 살아가는 어두움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이 주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서 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 번째도 우리는 도처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에 도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불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거치는 것들과 불순종하는 모든 것들을 도말하사 당신의 완전한 통치를 실현하실 그날까지 무릇 주님의 거룩한 은혜의 빛 아래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세 번 째 기도 역시 가슴 깊이 다가오는 기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주기도문의 삶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해주십시오, 여러분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보고 그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자 하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주기도문적인 삶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기도를 주님처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처럼 기도드리는 사람은 그렇게 주님처럼 살아가려고 애쓸 것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이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랬는데 이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 혹은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신 계획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금방 커다란 의문에 접하게 됩니다. 한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것도 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 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이런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먹으시고 이런 일을 해야지라고 하셨는데도 안 이루어질 수 있다면 주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 분을 우리가 어떻게 전능한 하나님이시라고 믿을 수가 있겠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우리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것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태도와는 상관이 없이 그리고 인간의 태도나 인간의 불순종, 다른 어떠한 방해와는 상관이 없이 기필코 이루어지고야 마는 확정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도 그 시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우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의 시대를 말세라고 부릅니다. 반드시 이 말세의 마지막 끝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반드시 오시고 그리고 주님은 반드시 이 세상을 심판하셔서 알곡과 가라지들을 갈라내실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고 사악한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야 말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또 하나의 하나님의 확정된 뜻은 역사 속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그들이 언제 돌아오게 되었느냐 주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그들이 끌려갈 것과 유다나라가 망할 것과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그 유다 백성들이 칠십 년 후에 다시 고토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임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기 전에 예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바벨론 시대의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외교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정신 그리고 그런 실력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없이 칠십 년이라는 것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칠십 년에는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미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기도 전에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그 일을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들은 얼마든지 인간들의 태도에 의해서 지체될 수도 있고 속히 이루어질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루어지지도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런 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불순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못 박혀 죽으셔서 사망 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음에도 그 길을 걸어가기 싫어합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치 아니하므로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데 이르기 원하시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 가운데 하나는 무엇입니까? 로마서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예수를 믿고 나면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여러분의 타락하고 죄로 물든 여러분의 마음과 모든 인격과 삶들이 변화되고 바뀌어서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결해지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앞에 고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해지기를 원하시고.
그러나 여전히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좋아하고 자기의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불순종의 길을 기꺼이 갑니다. 아버지는 그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으나 그는 여전히 세속적인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을 예수 믿게 하신 것은 여러분의 가족을 구원해내시기 위함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이지만 여러분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여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지체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하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려 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홀로 통치하실 때도 있고 홀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지만 그러나 많은 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와 함께 손잡고 당신의 놀라운 계획들을 이루어가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라도 여러분 가운데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 인격적으로 거의 파탄 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단 번에 이 세상이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성자의 모습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만드실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홀로 여러분을 성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예배드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코 누구에게도 찾아가서 가슴을 찌르고 그 속에 억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지 아니하고 오늘도 하나님은 천사도 아니고 주님 자신도 아니고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과 꼭 같이 연약한 한 사람을 세우셔서 오늘도 주님의 마음을 먼저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알게 하시고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 사실은 주님이 여러분에게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걸려있는 그림 그리스도인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 가운데 정원에 굳게 문이 닫힌 집이 있고 등불을 들고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광경을 그런 그림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주의 깊게 잘 보시면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그린 것이라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런데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등불도 들고 있고 두드리시는 주님의 손도 있는데 문고리가 없습니다. 밖에서 잠그게 된 고리가 아니라 안에서 잠그게 된 고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무엇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않으셨다면 심판하실 근거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성경 이야기를 해주면 늘 시빗거리로 물고 늘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의 사건입니다. 선악과. 아니 그러면 그것을 뭐하러 만들어 놓으셨나? 그런데 사실은 그 선악과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그 속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고 말하자면 정복하며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거기에 다스린다는 말이 히브리 말로 라다인데 라다는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막 꺾고 두들겨 부수고 왕이 그런 식으로 한다면 그건 왕이 아니고 폭군이지요. 어차피 자기 나라니까 소중히 생각하고 귀하게 생각하고 그런 정신으로 온 만들어놓은 피조세계를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스리면서 인간은 어느 곳을 가도 자기의 지배 아래 있고 자기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 있는 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주님은 그 나무에다가 그 나무는 그냥 평범한 나무였습니다. 무슨 나무였는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나무였고 평범하게 과실이 달려있었는데 주님이 거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나무는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온 동산을 돌아다니다가 중앙에 딱 와서 그 선악과나무를 볼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저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나무를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과 구별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비롯해서 이 모든 피조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고 나는 단지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음 받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그 명령을 순종하며 살아야 할 의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싶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먹고 싶지 않았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업습니다. 주님이 먹지마라 생명나무 실과가 즐비한데 왜 먹지 말라고 하는 실과가 눈에 들어옵니까? 그런데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바로 그거였습니까? 선악과를 세워놓으시고 따먹지 말아라 겉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속으로는 따먹었으면 그렇게 이율배반적이실 수가 있습니까? 따먹지 말아라 속으로는 이것은 말뿐이지만 내 뜻은 이것을 따먹는 것이니라 네가 비참하게 심판을 받아서 그래서 네가 죽음에 처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하도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주님이 주신 낙원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것을 인간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유에 하나님이 주신 책임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딱 따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며 그것을 막지 못했던고 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한 그 실과를 먹었느냐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물론 주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하는 아담의 손을 하늘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이셔서 나무를 갑자기 옮겨 버리신다든지 손목을 부러뜨려 버리신다든지 그런 일을 하나님이 하실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강권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들 인간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어떤 때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어떤 때는 그렇게 못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한강대교 철교에서 후딱 하면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형사가 하는 이야기가 열 명이 자살하러 올라가면 그 중의 일곱 명은 자살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기만 올라가면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 나오니까 그것을 통해서 왜 죽으려고 하냐고 물어보면 아내가 도망갔는데 찾아달라고 하던지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는데 안 찾아주면 죽어버린다든지 그래서 요즘은 거기다가 기름을 다 발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철조망을 칠 것인가 기름을 바를 것인가 하다가 기름을 발라서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딱 하면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뛰어내려서 죽으려고 술까지 먹고 동작대교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것도 비가 많이 쏟아진 홍수가 난 날이었는데 뛰어내렸는데 물에 풍덩 빠져서 떠내려가지 않습니까? 이제 죽었구나 했겠지요. 그런데 떠내려 오다가 아래 교각에 딱 걸렸습니다. 쓰레기 걸리는데 거기서 걸렸는데 어차피 자기하고 쓰레기하고 비슷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이왕에 죽으려고 결심했으면 왜 이렇게 나 죽는 걸 방해하는 거야 하고 물속으로 도로 들어가야 할 텐데 물속으로 들어갔겠습니까? 쓰레기를 붙들고 교각위로 올라왔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리고 옷을 흔들고 있는 것을 경찰이 발견해서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뛰어내리면 다 그 교각에 걸리는가 그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뛰어내리는데 죽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각에 걸립니다.
여러분, 지상으로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가다가 소신껏 답변해보십시오. 경비행기를 날아가다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서 땅으로 추락을 했습니다. 사람이 살겠습니까, 죽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말입니다. 비행기가 추락을 했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뉴스에서 큰 화재거리가 됩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은 한국은행에 다니는데 공군이었는데 연습기를 타고 가다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서 추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4명인가 탔는데 다 죽고 자기 하나가 살았습니다. 추락을 했는데 뼈가 팔백조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 그 자체가 하나의 흐물거리는 반죽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뼈를 다 맞추고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브스를 하고 교회 와서 첫 번째 예배를 드릴 때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하셨다 그 찬송가를 들으면서 한 없이 울었다는 간증을 하는 것을 봤는데 비행기가 추락하면 대부분 다 죽습니다. 목사도 죽을까요? 그래도 목사는 좀 살려주시기 않겠습니까? 교인들이 불쌍해서라도. 죽습니다.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 났을 때 목사님 한 분이 탔습니다. 죽었습니다. 그 분도.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 사람은 목사인데도 죽게 내버려두고 왜 그 사람은 평신도인데도 추락해서 다 죽는 것이 마땅한데 그 사람만 하필이면 비행기에서 튕겨 나와서 늪지대에 떨어져서 살아나게 하셨습니까?
요한 칼빈에 의하면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리 하시는 일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 세상에서 정확히 규명해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보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를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최대한 인간을 말하자면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간섭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간섭을 하시는데도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인격적이고 자유적인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의 정욕을 멀리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계속 불순종하면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 순간 순간 유혹받는 순간에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죄를 택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길이 있고 불순종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불순종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는데 넓은 길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것인 줄을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좋은 것 같아서 택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한 그 길을 걸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그러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걸어가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그가 행하는 대로 두고 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되시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손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도저히 자유의지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어서는 이 사람이 파멸로 갈 것이 분명하다고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멀쩡하게 차를 타고 자기 길로 잘 가는데 왜 저쪽에 가던 차가 하필이면 중앙선을 넘어서 내 차 쪽으로 달려와서 뒤를 박았으면 뒷사람이 다치고 옆을 박았으면 운전기사가 다쳤을 텐데 하필 조수석에 앉아있는 나를 들이 받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억지로 예수 믿게는 안 하신다는 말입니다. 억지로 순종하게끔 안 하십니다. 이미 순종이라는 말에는 억지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기뻐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런 식으로 이루어가시기 때문에 많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모르고 이 세상의 모순과 부조화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더욱 담대하게 불순종으로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은혜를 주셨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기를 즐겨하는 이 불순종하는 인간들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짓밟히고 하나님의 뜻 무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이런 것들을 모두 하찮게 생각하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는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있어서 하늘과 이 땅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아버지의 뜻을 수종 들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취합하는 가브리엘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미가엘 천사가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그리고 모든 천국의 성도들은 함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리고 그들의 소원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이 모두 그분의 나라가 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경험하셨을 뿐 아니라 몸소 주님이 그러한 순종을 이행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평화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십니다. 계획은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신 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시면서 순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극악하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무리들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순종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불순종으로부터 돌이키는 그 방법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아버지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왕으로서 완전한 높임을 받으시는 하늘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두루마리에 나를 가르쳐 명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노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들을 순종하고 그 뜻에 복종하는 생애로 사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생애도 순종과 복종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기를 바라는 갈망의 표현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어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왜 살아가는 것입니까? 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앞으로 남은 날들이 이전에 있었던 날들보다 행복해지리라는 보장도 없으면서 힘차게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쓰고 먹고 마시고 입고 그리고 휴식을 취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쏠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의 뜻을 이루는데 자기의 뜻을 이루는 그 방법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실한 삶일 수도 있고 혹은 거짓된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의 삶을 살든지 간에 그들이 이루기를 원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고 자기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물을 때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이렇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뜻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버리는 사람 그래서 인생에 참된 보람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두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가 바뀌고 인생에 대한 꿈이 바뀐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뜻, 여러분이 꾸고 있는 그 꿈이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 모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 꿈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앙을 자기의 꿈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용 당하실리도 없거니와 그런 식으로 신앙에 접근하는 한 그는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자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촉구 하였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주 달려 죽으신 것이 단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붙은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이루고 싶어 하셨던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찾게 하시고 또 우리가 그 뜻을 찾아 살아감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맨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창조된 우리를 바라보며 거셨던 하나님의 목표와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인생들이 되도록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때에는 직장에 다니는 이유는 단지 토끼 같은 새끼들 먹여 살리고 그리고 같이 사는 아내를 밥 먹여 살리기 위해서 죽지 못해 다니는 게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승진도 하고 돈도 벌리고 퇴직금도 늘어나서 위로를 받으면서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같은 직장에 다녀도 이제는 더 이상 돈 벌어가지고 밥 벌어 먹으려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전에는 직장에 가서도 늘 기를 못 폈습니다. 자기를 밥 먹여 주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장실에 계신 우리 사장님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적어도 나는 밥 벌어 먹으려고 이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이루시리라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한 백성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 어두운 구석에 한 개의 등불로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과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찌하든지 고뇌하면서 그 신앙과 현실을 조화시켜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깨닫고 의논도 하고 아버지 앞에 호소도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현실과 신앙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기꺼이 현실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생과 사 우리의 행복과 불행 우리의 고난과 형통 우리의 생명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의 건강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삶이 이 세상에서 요령과 기회를 따라서 사는 그런 사람들의 인생보다 훨씬 더 안락하고 편할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보장할 수 없습니다. 성경도 그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성경에 의존해서 보장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이 부패한 세상에서 보호할 것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참된 사랑과 불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좆아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시로 거스르고 어기면서 살아가는 불순종과 죄악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어떡하면 아버지의 이 뜻이 내 인생을 통해서 이루어질까를 갈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놀라운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매순간 순간 축복하실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것보다 더 크고 슬픔을 당하는 자 같으나 슬픔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기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기특하게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들을 주십니다. 순간순간 현실과 타협하고 요령과 편법을 재주로 삼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에 살아도 하늘을 봅니다. 죄악의 먼지가 가득차고 불결한 타락의 냄새가 가득 찬 곳에서도 그들은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천국의 향취를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이 단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쉽고 행복하고 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아버지의 법을 파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통을 받는 세상이 오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 올 것이 요원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것도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라고 분부하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한 결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은 요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런 세상을 오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이 어두운 세상의 찬란한 광명의 날이 도래하게 하는 한 조각의 여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상급 때문에도 그렇게 살지만 주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의 빚 때문에 그 사랑에 빚진 자 되어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순종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까? 거스르고 하나님의 뜻에 거치는 자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불순종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주 작은 차이 밖에는 없습니다. 뿌리가 같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 여러분의 인생을 정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인생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으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거치는 것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지연되는 그런 불순종하고 거치는 도구가 될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된다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런 놀라운 구원의 계획은 꽃이 피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불순종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싫어하는 교만한 마음이 가져다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주님을 닮는 대신 요령과 기회를 따라서 변하는 이 세상의 죄악 된 모습을 닮아갈 것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해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향취를 풍기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통해서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외면하고 도전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냄새가 우리를 휩싸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인생 그 자체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등불도 되지 못할 것이고 소금도 되지 못할 것이고 등대의 역할 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치 있는 구원이 아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구원해놓으시고 순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예수 믿는 자녀 삼으신 것은 어떡하든지 우리를 순종하는 마음 아버지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갸륵하고 진실한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 세상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그릇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빚어놓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은 많은 것을 누리고 그리고 높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얼마나 많이 성취하고 나 때문에 주님의 계획들이 아름답게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지도록 기여하는 인생을 살아가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고 끝 날에 주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 칭찬 받을 유일한 칭찬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3 (1997.7.27 주일오전)
11.뜻이 하늘에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녹취자: 김혜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우리는 이제 세 번째 주기도문의 기도의 제목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이 대목을 살펴봐야 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대 드라마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고 인간 편에서는 그 뜻에 순종하고 사느냐 불순종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아니하는 이방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기적도 보고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도 보고, 그리고 함께 산에 올라 하나님의 보다 깊은 음성을 들었던 그런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구해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님이 우리를 구해 주셨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말을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획일적으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도 살아가는 삶의 모양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처럼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된 사람도 있지만 은혜를 많이 받고도 여전히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무엇을 하며 살든지 한 가지 그것을 지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인간의 불순종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계명을 인간들이 어기고, 그리고 인간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것입니다.
죄가 왜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죄는 사망을 몰고 왔고, 그 죄와 사망은 모든 인간들에게 왕 노릇 하였습니다. 그 아래 철저히 지배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죄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들어왔습니다. 불순종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정해 놓은 뜻이 있었고, 그리고 그 뜻을 어긴 인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불순종과 죄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사망가운데 있는 인간들이 예수의 참 구원의 피로서 구원을 받고, 저주아래 놓여 있던 인생들이 오늘 이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더러운 죄인들이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을 찬송하며 경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한 사람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순종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았지만, 그러나 한 사람이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 분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그리고 사망으로부터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분 예수그리스도의 자기를 버리신 순종, 자기를 버림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히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아래 놓여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누구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잘 아신 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죄로 말미암는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존귀한 몸으로 비참한 인간의 모양을 갖추시고, 죄와 슬픔밖에 없는 이 세상에 스스로 내려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얻고 구원받은 그 백성들이, 아버지의 거룩한 뜻과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서 자기를 본받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그렇게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특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그 복종으로 말미암아 참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삶과 죽음보다 더 탁월하게 뛰어난 가치 하나를 붙들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치, 이 세상에는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그것을 바라신다고 하는 그것보다 더 높고 훌륭한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찬양)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네
이게 신앙입니다. 자기의 뜻을 그 십자가의 사랑에 비답해서 자기의 뜻을 버리고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 그것을 붙들고 그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죄는, 모든 죄는 예외 없이 불순종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곳에는 불순종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돌아보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찢어지는 아픔으로 주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쓰고 애쓰는 모든 것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요, 자기의 인생의 계획을 성취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짐승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쉽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느껴지고 경험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는 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겠다. 라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불순종하며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기를 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보 아니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부패함을 용납해 주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고 나를 기쁘게 하는 그 삶을 하나님께서 용납해 달라고 하는 그런 마음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생명이 있는 신앙생활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렇게 담대한 사람도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나는 내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무지한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봅니다. 영혼의 곤고함 때문에 애쓰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따금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갈구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순종의 길을 많이 걸어가고, 스스로 불러들인 영혼의 고통으로 인해서 아파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위로는 인간이 얼마나 많이 고통 받느냐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냉혹한 아버지로 비춰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때가 없습니까? 세상에 내가 이렇게 고통 하는데도 하나님은 쳐 다도 안 보시는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하찮게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태양을 등진 사람처럼, 그 인생 앞에 고뇌와 슬픔과 고독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순종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순종하며 살 것입니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순종해야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우선 소극적인 의미에서 순종해야한다는 의미는, 기도할 필요도 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적질을 하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을 버려야합니다. 성경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유 댈 것도 없이 거기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있는 한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아가고 있는 한 여러분의 영혼에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 기록 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게 하기에 거의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하고 이 말씀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왜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지난 주간에 성경을 몇 장이나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어제까지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지난주에 읽은 성경부분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를 기억하실 수 있습니까? 혹시 TV 프로는 기억해도 너무나 건성으로 읽었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까지 성경읽기를 끝냈고 오늘은 어디부터 읽어야 되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TV를 보거나 신문을 보는 시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성경읽기에 보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몇 달씩 몇 년씩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허다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런 일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은 성경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살아간 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내가 알아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짐승과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는 모습이 자신에게도 고통이요, 하나님에게도 고통이요, 세상에도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는 것은 순종하며 살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풍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뇌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받아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기도해 볼 필요가 거의 없는 기도의 제목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목사님! 이번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기왕에 그만 둔 것 잘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사업을 해 보려고 합니다.” “하십시오.” “목사님! 개업을 하려고 하는데 기도 좀 해 주십시오!” “뭡니까?” “단란주점을 하나 차리려고 합니다. 열린 단한 주점!” 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데 왜 합니까? “목사님, 노래방을 차리려고 합니다.” 그것도 기뻐안하십니다. 그 노래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술 마시고 노래하고 하긴 요새 노래방에서는 복음성가도 나온다고 그러지만 거기 와서 찬송 부를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도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십일조를 제대로 해야 되겠습니까? 말아야 되겠습니까? 기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희롱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못 바쳤으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입니다. 주님 제가 오늘 전도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하나님 우롱하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파하라!’ 하나님 오늘 기도 할까요? 말까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니까 성경을 깊이 읽고 깨닫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서 기도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무슨 기도 해 볼 필요가 있습니까? 가끔 가다가 말도 되지 않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와서 기도를 오랫동안 했다고 해서 그런 거를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시느냐 말입니까? 아마 응답해 주실 거라면 성경에 다 있다. 라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리고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을 배우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깨닫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읽고 성경을 탐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는데,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전심으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쓰다가 정말 연약하여 범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그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해서 판단이 아예 없는지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기도를 들으시면서 당신이 살아가는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의 뜻을 보이셨지만 그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처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성취하도록 부름을 받은 백성들이, 오히려 그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삶으로 방해하고 생활로 훼방하고, 온 몸을 던져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 하도록 방해 하면서 살아가는 비극적인 인생들을 주님은 수없이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된 사랑을 누구에게 보이십니까?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이 누구에게 넘쳐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을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죄인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의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냉소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하나님께 내 인생의 소작료를 드려야 하느냐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적당히 챙겨서 하나님께 드릴 테니까, 하나님 더 이상 내 인생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것이고 모든 피조 세계가 다 그 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혹시 하나님이 주리신다 한들 우리가 드리는 제물의 피와 짐승의 고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형벌 받을 죄의 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속량해 주셔서 노예에서 자유인을 삼아주셨습니다. 몸부림치며 살아도 사망의 길에 갈 수밖에 없는 죽었던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살리셔서 원수 되었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진노아래 놓여있던 처지 대신에 은혜를 받는 처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홍과 같이 붉은 죄가 우리에게 가득할 지라도,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담대하게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치는 인생들입니다. 여기 오래있었으니까 관심이나 혹은 많은 시야들이 신학교를 중심으로 많이 열려져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신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하면서, 정말 마음 중심으로 저 사람만은 목사 되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기도 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 저 사람, 저 사람 제발 딴 건 다 해도 목사만은 되지 말게 해 주십시오. 왜? 우매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아집과 고집에 덩어리처럼 뭉쳐져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거기에는 하나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식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면 교주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뜨려지고 그래도 뭔가 확증이 있기 때문에 신학교에 왔을 것 아닙니까? 거기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보다 덜한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신앙의 세계에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말입니다. 한 번이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말입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이 교회에서 이렇게 이런 마음가짐으로, 신앙생활 해 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겸비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면 순종하겠다. 라고 하는 의지가 없으면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격이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영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심령의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역사 하는가 주님의 비유를 들어 보십시오. 주님은 천국을 씨 뿌리는 비유에 비교하셨습니다. 주님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그 씨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땅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에 떨어졌습니다. 바람이 부니까 그 땅에 떨어진 씨는 떨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 흩날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참 진리의 능력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의 세계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말씀으로 변화 받는 사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변화 받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완전하고 높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 몽매한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간판은 교회 간판을 비춰도 그 안에서는 교주가 탄생하는 겁니다. 더욱이 그런 아집에 가득 찬 신앙을 성도들에게 강요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정말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 합니다.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이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고난을 보십시오. 주님은 아무 즐거움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최고의 즐거움은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 구원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불순종과 죄로 일관하여 살아왔던 사람들이, 주님께서는 자기 위를 넘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가 뿌리신 그 피를 밟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원하셨으니, 내가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아버지께 전적으로 그 뜻을 순종한 것처럼, 너희들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느니라. 그리고 또 한편으로 주님이 당하신 그 찢으신 고난의 길을 우리는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순종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대가를 치룰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거기에 정말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결심하기 전에, 주님을 믿으면서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과,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저울로 재어보라 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경을 펴기만 하면 오늘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인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 부족합니다.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면 그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그 뜻과 살 수 없게 하는 환경과 더불어 싸우고, 마음의 불순종과 더불어서 투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싸우고 투쟁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힘쓰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써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비하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그대로 하려고 하는,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 없이는 신앙생활에서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살아서 신앙생활하면서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적어도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것에 있어서는 양보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하심이 없습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행해야 할 것이며,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세 번째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기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도 순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경 속에는, 분명하게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말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것 말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필요로 하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근면한 삶에 대해서는 강조하셨지만, 그러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할 것인지 사업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느 회사로 입사를 해야 될 것인지는 더더욱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령한 사람이라도 이 성경을 보고는, 내가 저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이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그런 걸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람하고 모두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만 확신할 뿐, 확실할 뿐 어떤 사람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한 사람이 신학교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면 돈 많은 장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그것도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방배동에서 집을 팔고 사당동으로 이사 가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성경에 획일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단에 가까운 상상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극단에 치우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저도 들은 이야기 인데, 어느 한 부인이 범사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하라고 그랬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 여쭤보고 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서는 하나씩 물어보는 겁니다. “하나님 잡채를 5인분짜리를 살까요? 6인분짜리를 살까요?” 그러면 그 하나님도 참 이상한 하나님이시지, 응답을 하신답니다. “5인분!” 그러면 5인분을 집어넣는 겁니다. “주님, 부추가 비싼데 쪽파를 넣으면 안 될까요?” “안 된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비싸도 부추를 산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남편에게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그런데 간장은 왜 안 사왔어?” 그러더니 하는 말이 “너희 하나님은 잡채 무칠 때에 간장 넣는다는 것을 모르시나보지?” 그건 미신에 가까운 삶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로 행하며 살 수 있는 여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자유의지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도 불순종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신데 장바구니를 들고 가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건 살 때마다 2분씩 기도한다던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물건 띠어오는 사람은 수없이 기도만 하다가 말겠습니다. 하나 띠어 올 때마다 2분씩 기도하면, 괜찮습니다. 잘못 샀으면 사다놓고 밤에 너무 많이 과용했구나! 하나님, 제가 너무 쓸데없이 낭비를 많이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됩니다. 다른 계명들은 심지어 십계명까지도 용감하게 짓밟는 사람들이 약대는 다 내보내고 그리고 하루살이 같은 것을 붙들고 말이지,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것처럼, 고도의 외식이고 자기 즐거움입니다. 자기 과시입니다. 여러분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누군가가 사고한 문제를 가지고 골똘히 생각을 하면 큰 계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고뇌하고 있는가를 봐야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후자는 모두 위선입니다. 아니면 약간 종교적인 도착증에 걸린 사람들이든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될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필요하고, 그것 없이는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하도록 하라’ 성경뿐만 아니라 또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인도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를 찾아내고 그거를 찾고, 또 그거를 따라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순종하면서 살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굉장히 슬퍼하십니다. 저는 생생한 체험을 한 것이 하나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얼마나 가난 했겠습니까 말 할 것도 없습니다. 한 달에 교회에서 7만원을 주는데 등록금이 6개월에 45만원이었으니까, 이해가 안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내가 등록금을 다 냈는데 학기말이 끝나고 나니까 성적이 아주 우수하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돈을 타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갔더니 증서를 주는데, 그것을 가지고 은행에 갔더니 돈을 주었습니다. 얼마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꽤 큰돈이었습니다. 한 삼사십 만원 되는 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가지고 이렇게 오면서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을 했습니다. 등록금은 이미 냈겠다! 이걸로 무얼 할까 그러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결혼하고 그 때가 한 3-4년 지났을 땐데 고생이나 실컷 시켰는데 이김에 집사람 여행이나 시켜주자! 그리고 그것도 굉장히 심사숙고해서 지금 대우빌딩에 있는 거기에 가서 그 중에 돈의 한 삼분의 이 정도를 딱 띠어서, 설악산 여행 티켓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 티켓을 주머니에 넣고 전철을 타는 순간부터, 조금 아까까지 느꼈던 기쁨과 즐거움이 모두 사라지고 불안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고통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 참 이상하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 걸어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내 마음에, 아까 장학금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래서 감사하던 마음이 모두 사라지는 겁니다. 결국은 못 갔습니다. 10퍼센트를 위약금으로 물고 나머지 돈을 찾아 왔습니다. 성경의 어디를 찾아봐도 신학교 장학금을 타 가지고 어디를 여행을 가면 안 된다는 게 안 나옵니다. 일반대학 학생들은 그걸 타 가지고 술도 먹고 노래방도 간다는데, 왜 못하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좀 불안하고 그래도 ‘아이, 내버려둬 갈 거야! 그러고 가면 가는 겁니다. 누가 말리겠습니까?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 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슬퍼하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때 저는 아주 깊이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요런 사소한 일 가지고도 주님이 슬퍼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큼직큼직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저질러놓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는 지 기뻐하시지 않는 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지 않으면서, 우리 마음대로 자행자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살도록 두신 것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만 분별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참다운 계획이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가를 마음에 새기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을 걸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특별히 부어주신 능력 속에서, 죄와 세상을 굴복시키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삶이 정말 하나님 앞에 달랐던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고 아버지의 뜻을 정말 이루도록 살았습니다. 백 번을 순종하다가도 한 번 불순종하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하고 또 애쓰고, 또 힘쓰고 더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애를 쓰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사랑과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놀라운 축복들을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거의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없이는 순종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늘 말씀에 젖어 살고 늘 기도에 젖어서 살아도, 이 속에 있는 못된 자아와 제멋대로 살려고 하는 이 자만심들이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끌어 가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감화도 없고, 그리고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적시는 기도 없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거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순종하는데 들어가는 그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려고 하는 그런 용기가 기도하지 않는 속에서 일어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얀 이불에는 요만한 연필자국 하나만 나도 금방 눈에 뜁니다. 시커먼 이불에는 거기다 먹물을 쏟아 부어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기도 속에서 깨어 있으면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영혼들은, 영혼이 정결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슬퍼하신다. 그런 느낌이 그런 영적인 감각이 금방 옵니다. 이게 깨어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령 자체가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불순종과 죄는 마음에 어두움을 몰고 오고, 무감각을 몰고 옵니다. 그럼 무감각하고 마음이 어두워지게 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정서의 상태나 영혼의 상태와 어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뭔가를 결정하는 일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니까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노래방에 있거나 단란주점에 가서 니나노를 해야 마음이 편안하지 거룩거룩 찬송을 부르는 자리에 있으면 좌불안석입니다. 영화관에서는 그렇게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죄인의 마음입니다.
정말 주님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을 기도 속에서 기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고 또 기도를 하고 오신 후에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런 맥락에서 보며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정말 기도하면서, 자기가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거의 그 기도대로 살아갈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심령이 깊이 하나님 속에서 깨어있으면, 성경을 볼 때 이렇게 하지마라 하는 것이 무게로 다가옵니다. 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내가 너를 슬퍼하는 구나 그러시면 어떡하나 하나님이 나를 슬퍼하시는 구나 이렇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영이 깨어있지 못하면 ‘내가 너를 슬퍼하노라’ 그러면 슬퍼하시라지.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어이구 또 겁주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지키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 뭐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고민하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멋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뒷돈이나 대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식의 신앙생활은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 뿐입니다. 아무리 오래 이런 식으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해도 여러분은 살아서 좋은 날 볼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차가운 종교 껍질로 하나 변하고, 내면의 세계는 모두 썩어질 인간의 더러운 탐욕과 죄악과, 자기기만과 그리고 자기 이기적인 욕심덩어리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의 참된 향기가 있을 수 없고,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아버지의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지만. 여러분 결국은 오랜 인생을 살았어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님의 나라에 거의 기여한 것이 없는, 아니면 영혼의 구원받은 것만을 제외하면 주님을 믿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런 사람들로 분류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살아가지 않고, 그 뜻을 거스르고 살아갈 때에 받는 대가는 하나님의 징벌과 죄와 고통과 슬픔, 아무런 기쁨이 없고 참 빛이 없습니다. 매일 매일 살아가지만 교회에 오면 느끼게 되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갈등입니다. 잠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도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겠다는 것을 가치로 생각하면서 돌이키지 않으니까, 교회 와서 확인 하는 것은 아 내가 세상 속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고 확인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 돌아가서는 아 내가 세상에 살아야 할 인간이구나. 확인 하는 겁니다. 돌아와서는 하나님 뜻이 아닌 것을 깨닫고 또 돌아가서는 또 어쩔 수 없이 살고 이런 속에서 죄는 쌓여져 가고 하나님의 진노는 쌓여져 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르고 그리고 하나님께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갔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내신 계획을 회복시키려 하나님의 군사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몸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무엇이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증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겸비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모든 변화에 이르는 모든 행복에 이르는 신앙을 버리고 배교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용기 용기가 없는 한 겸비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나는 낮아져야 하리라 그리고 하나님 오늘도 이 어두움에 있는 나의 영혼에 주님의 뜻을 보이시옵소서. 그리고 나의 마음에 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쫒아서 행하는 삶이 나의 즐거움에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나의 인생을 보탬이 되는 인생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세 번째 기도를 통해 발견하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4 (1997.8.10 주일오전)
12.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 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녹취자: 정윤미
지난시간 까지 우리는“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세 번째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다음에 나오는 기도는 갑자기 앞에 나왔던 마치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장엄한 기도의 제목들이 갑자기 변해서, 그래서 아주 이 땅에 있는 그런 평범한 기도의 제목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약간은 세상적인 기도처럼 보이는 이 기도를 예수그리스도께서 네 번째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늘 이 네 번째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삶을 살도록 요구받고 있는지 우리가 살펴보아야 될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강의하면서 여러분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지만,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즉석에서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그러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기도를 너희가 했으면 좋겠다한 그런 의미에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 기도는 바로 주님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이 사시던 그 삶의 농축이 바로 이 기도였고, 이 기도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예수님이 살아가시던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우러나온 이 기도를 우리들이 깊이 이해하고, 그리고 이 기도가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일관되게 드려지던 평소의 기도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도에서 매우 신비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적어도 당시 굶주리고 가난하던 사람들이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사는 것이 가했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무엇이든지 창조하실 수 있고, 만드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성품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사시던 그 삶의 자리에서 우러나온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자기의 삶속에서 우러나온 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 자신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의 일용할 양식과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나는 제자의 일행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조차도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사신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으로 이 물질생활을 해나가고, 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아가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얼마든지 양식을 내리실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뱃세다 광야에서 말씀을 듣다 허기진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시면서 오병이오의 축복 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던 그 기적의 광경을 우리는 기억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매번 자신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며 사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이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삶을 기적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보다 더 많은 날 동안 예수님께서는 평범하게 생업에 종사하시고, 그리고 물질로서 사용하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는 재정을 맡아서 회계를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지극히 인간적인 생애를 우리는 여기서 함께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단지 예수님께서 연약한 몸으로 육신에 거하며 이 세상에 사셨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교훈하기 보다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라는 측면이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얼마든지 기적으로 자신의 빵의 문제를 해결하며 사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고, 또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시면서 사신 데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이제 어떻게 하나님을 이 인생살이에서 의지하며 살아가야 될 것 인가 하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위해서 이 네 번째 기도를 우리에게 친히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양식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자 합니다.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셨을 때, 이 양식은 하루하루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이어줄 수 있는 그런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양식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배부르고 건강할 때에는 전혀 우리가 연약한 존재이고 또 먹을 것 없이 살수 없는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식물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던 사람들도 3일정도만 굶고 나면, 그것도 너무 깁니다, 하루 정도만 굶고 나면, 그다음에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생명이 한 그릇의 밥이나, 혹은 한 개의 빵 한 덩어리 혹은 한잔의 음료수에 자기의 생명이 달렸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고, 이러 저리 달려가고 그리고 수많은 바쁜 일에 몰두하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많은 계획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빵 한 덩어리, 물 한잔, 밥한 공기 국한사발 사라진지 두 끼 세끼가 지나고 나면, 정신조차도 모을 수가 없고, 심지어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건강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욕망이나 정욕조차도 맥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조각의 식물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먹는 한 끼의 식사가 없고, 한 끼의 양식이 없으면, 너희들이 도저히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너희들이 깨달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을 공급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 너희들은 비로소 알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아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놀랍게 변화되기 전에 좋아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 자연을 찍어 놓은 다큐멘터리 같은 것 지금도 아주 좋아합니다. 남녀가 사랑하고, 울고 지지고 볶는 것이야 말로, 제가 가장 안보는 영화나 tv프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내가 변화 받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도, 장엄한 알프스 산맥이나, 혹은 넓은 바다, 그리고, 수만 년 동안 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진 바위들, 그리고 수 만년 수십만 년을 통해서 형성된 그러한 계곡 같은 것들을 봅니다. 그때에 우리는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느끼는가하면, 아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하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지방의 집회 내려가서 신문을 보다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돌멩이에 사람이 이렇게 작대기도 긁고, 동그라미도 긁고, 내가 보기에는 초등학생 장난한 것 같은데, 그것이 세계에서 희귀한 문화재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4천~5천 년 전에 원시인들이 거기에다 그림을 그려놓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가 5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에도 그 돌멩이가 기계로 판 것도 아니고, 돌멩이나 이런 것들로 두들기거나, 금속이나 그런 것으로 팠을 텐데, 5천년이 지났는데에도, 그 글자두께가 1cm가 되겠습니까? 5cm가 되겠습니까? 그런 데에도 5천년이 지났는데도 그냥 있습니다. 여러분 서울에도 보면, 고인돌이라고 해서 지석묘가 있는데, 그 놓여진지 1만년씩 되는 것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5천년 1 만년씩 되는 것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5천년이 지나고, 만년가까이 지났는데에도 그 돌멩이가 달아서 없어지지 않고 그냥 있는데, 하물며 금강산이나 이런 데에서 사진으로 보면 계곡에 물이 하도 흘러가서 달아가지고, 거기에 구덩이가 생기면서, 말하자면 세공을 해놓은 것처럼 바위들이 깎여나가면서, 물을 타고 흘러가는 그런 계곡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마한 세월이 흘렀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수 만년 아니라, 수 만년 가지고는 되지 않고, 수십만 년 수백만 년 동안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 설 때에 인생이 70이고, 강건해야 80이라고 성경이 이야기를 했는데, 많이 양보해서 100세를 산다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지나가는 이런 영원한 세계는 그만두고, 존재하는 자연의 세계 앞에서도 우리의 인생이라 고하는 것이 마치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인생입니다.
(예화) 하루살이하고 파리하고 같이 놀았습니다. 그런데, 파리가 놀고 헤어진 다음에 하는 말이 하루살이에게“야, 우리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도저히 내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파리는 “누가 다음 달에 만나자고 이야기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영원한 시간의 흐름에 속에 살고 있는 매우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존재하는 동안에는 강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동안에도 매일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자신의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그런 지극히 연약한 존재임을 오늘 주님은 이 네 번째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기도할때마다, 너희는 너희 자신들의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 너희들 자신은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요, 양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은바 된 인생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고,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강한 자립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존경을 받고, 추앙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이 얼마나 큰 줄을 알고, 그래서 식사조차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비천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그 주님 앞에서 주님의 도우심 없이 살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그래서 삶의 범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참 잘났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과학이 발달했는지 이제는 화성이라고 하는 곳까지도, 인간이 쏜 로켓이 날아가서 우주선이 우주를 탐사하고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보내옵니다. 확실히 인간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뛰어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뛰어나면 무엇 합니까? 미국과 함께 그렇게 놀랍게 우주 경쟁시대를 열었던 소련 한번 보십시오. 그렇게 지혜롭고 우주선을 쏠 수 있는 나라도 사람들이 쭉 줄을 서서 빵 한 덩어리와 버터 한 덩어리를 타기 위해서 1킬로씩 2킬로씩 장사진을 치고 늘어진 장면들을 여러분은 TV 매체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비를 내리시지 않으시거나, 혹은 햇빛을 너무 많이 주시거나 혹은 비를 좀 더 내리시거나 하며는 그 지역이 농사가 안되고, 농사가 안되면, 커다란 굶주림이 옵니다. 굶주림이라는 것이 엄습하게 되면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문명은 지탱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탱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나는 그 구소련에 해체되는 과정을 시사지 같은 데에서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군인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철통같은 사람들입니다. 핵무기를 관리하고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철통같은 사람들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지니까, 국가가 모두 해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먹을 것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가가 그랬습니다. “인간이 만약에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존재이었다면, 인류 역사의 전쟁은 대부분 없었을 것이다”먹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히브리어에서 전쟁이라는 말과 떡이라는 말이 어근이 같습니다. 전쟁은 미르하마고 떡은 레헴입니다. 같은 어근에서 옵니다. 그들은 전쟁이라 고하는 것과 떡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네 번째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싶어 하셨던 복음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분의 생애를 봅니다. 우리는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 가운데 절박한 심정으로 내일의 양식을 어쩌면 하나님이 안주실지도 모른 다고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 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에는 먹을 것이 많고, 언제든지 우리에게는 가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많은 식료품들이 우리에게 지천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모든 부요함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이처럼 부요한 삶을 허락해 주셔서 지금 당장 매일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눈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삶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침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시대에 그렇게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의뢰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 없이 살수 없는 그런 자신의 존재를 이 네 번째기도 속에서 날마다 확인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런 은혜를 간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을 때 마다 우리는 이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의 사랑에 빚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감사가 우리 속에 넘쳐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이렇게 매일 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양식을 통해서 생명을 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 우리의 모든 육체가 또한 매일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양식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단지 양식으로 살아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양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연장 받은 생명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이웃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속에 넘쳐나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속에 매일 매일 새롭게 부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 전에 먹은 양식을 가지고 오늘 살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우리들이 한 달 전에 받은 은혜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매일 매일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을 우리의 영혼이 덧입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식물을 주셔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시는 그 근본적은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하나님 앞에 살아드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바로 육신이 부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것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동물과 같습니다.
(예화) 누가 그런 문제를 냈습니다. 사자가 언제 사람을 잡아먹느냐? 언제 사자가 사람을 공격합니까? 정답이 무엇일까요? 배고플 때입니다. 그래서 맹수들 중에는 과식하는 동물이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과식을 하면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배부르면 사자건 호랑이건 그것으로 끝입니다. 먹을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이러한 은혜, 그것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데, 단지 배부르다는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있으나 그 사람은 인간으로써 살아있다고 보기보다 동물로서 존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며, 양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우리는 단지 육신의 양식만으로 살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이 네 번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은혜 그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고백을 하며, 우리는 매일 식탁을 대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할 필요를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 기도를 통해서, 첫 번째는 우리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경험했지만, 두 번째 우리들이 주님이 기도하게 하신 것 가운데, 앞에서는 양식을 살펴봤지만, 이번에는 일용하리라고 하는 이 어구를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한번 구할 때에 일 년치나 혹은 평생의 양식을 구하게 하시는 대신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뮬론 이 당시에는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 자체도 대단한 축복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궁핍하고 비난한 시대를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처럼 부하기를 탐하고 이 세상에 보물을 땅에 쌓아두며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는 커다란 복음의 한 가르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시므로 써 식물이 몸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몸이 식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를 위해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소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있고, 인간의 육신의 목숨은 영혼을 위해서 있으며, 우리의 온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공식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가치가 전도된 삶을 사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속에서도 천국의 복을 누렸던 부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들도 그랬고, 빌레몬과 같은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주위에 신실한 신앙을 가진 돈 많은 부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 인고하니, 물질이나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우리에게 또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신실하신 공급하심을 의뢰하며 살기 보다는 많은 물질을 쌓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인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고 애를 쓰고 마치 그 물질을 위해서 몸이 있는 것처럼 인생 그 전체를 물질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듯이 써버리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물질이 자신의 인생을 보호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모든 불안을 물질을 통해서 해소해 보려고 하는 그러한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애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비록 그것이 물질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부자이고, 또 젊고 그리고 유력한 관원이던 한 청년이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주님께 물었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10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청년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에 깃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그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을 했고 또 실제로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써 주님께서 어찌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하는 질문 앞에 하신 말씀이 너는 계명을 행하라입니다. 10계명을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도라면 구원은 제 것이 틀림이 없군요.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들을 행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쫓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시킨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믿기 전에 자기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까? 주님은 그 청년에게 그래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 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 사람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놀라운 통찰로 그 청년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에, 그 청년은 분명히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싶어 하고 영생 얻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한 문제를 주님은 그 부자인 젊은 관원의 마음속에서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물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물질도 손에 넣고, 그리고 하나님도, 영생도 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문제로 삼으신 것은 부자라고 하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물질을 행해 가지고 있는 집착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그 부자인 젊은 청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주님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진정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정말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진실하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일평생을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들도 죄에 빠지고 그릇 된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택하고 그 주님의 은혜로 자신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커다란 변화는 사랑의 변화입니다. 사랑의 변화입니다.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이전에 행복해 지고 싶어 하던 그런 열망이 세속적인 행복에 대한 관심이 전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신자일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진정으로 변화 받게 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면, 그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부해지고 행복해 지고, 떵떵거리고 잘 사는 것 보다는 주님을 닯고 싶습니다. 그리고 행복해 지기 보다는 거룩해지기를 원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보다는 주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가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간절한 갈망을 가져보신 적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갑이 있습니다. 물에 빠집니다. 물에 빠지면 군인들은 손을 높이 듭니다. 손위에 무엇이 있습니까? 총이 있습니다. 왜 몸은 다 젖어도 좋으니, 이 총은 젖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당장 물 건너가서 적군들하고 싸워야 되니까, 이 물을 은혜의 강물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 은혜의 강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푹 젖을 때에 그 때에 그 은혜의 강물에 젖어서 들어가기만 하면, 그것은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은혜를 받고, 은혜의 물속에 푹 들어갔습니다. 그 재능을 누구를 위해서 쓰고 싶을까요? 주님을 위해서 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주님을 위해서 쓰고 싶어 합니다.
우리나라 복음성가 가수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합니다만, 사실 굉장히 세상 적으로 볼 때에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는데에도 그들이 놀랍게 변화되어서 음악계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 이교회 음악을 부르는 구석에 있는 한 사람으로 변화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듭니까? 촉망받는 성악가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는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 이외에 찬송하지 아니하리라 말합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그들의 재능이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시간을 누구를 위해서 쓰고 싶어 할까요? 주님을 위해서 쓰고 싶어 합니다. 그 은혜의 물에 들어가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합니까? 안사모합니까?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때에 제일 높이 들고 은혜의 물속에 안 집어넣으려고 높이 쳐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 지갑입니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독한지 하는 것은 가끔 신문을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고소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집어넣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돈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가슴에 칼을 꽂고 돌아서고, 심지어는 몇 푼의 돈 때문에 부모를 찔러 죽이는 패역한 자식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일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공급받는 일용할 양식이 우리의 인생을 위한 것인지 우리의 인생이 양식을 위한 것인지 그것을 구별을 잃어버린 사람의 혼돈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쉽게 이야기 하면, 세상을 사랑하며 살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 때에 우리에게 하루 입고, 하루 먹고, 그리고 하루 육신의 피로를 채우면 그것으로서 우리는 족하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 세상에서의 모든 고통, 물질로 말미암은 모든 고통과 아픔은 결국 인간들의 탐욕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이 기도를 할 때마다 주기도문에서“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살도록 이 세상에서만 행복하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아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자들이 되었으니, 이제 너희의 삶이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들은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쓰여 질수 있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 위해 돈을 버십니까? 누구를 위해 공부하십니까? 여러분, 공부를 해서 남을 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표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주시고, 나를 이처럼 많은 재물과 그리고 높은 지위에 건강을 허락해주셔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부름을 받게 해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하면 부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워 질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정한 만족은 이 세상에서는 단지 일용할 양식을 얻으면 충분하다고 믿고 그들의 진정한 양식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나의 양식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이를 행하는 것이라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기쁨으로 우리들이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치하고 방탕하고 물질을 깊이 사랑해서 거기에다 인생의 보람을 걸고 사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우리는 정말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상가들도 물질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처절하게 파괴시키는 가를 신앙밖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많이 권고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어느 철학자는 돈이라는 단어를 쓸 적마다 꼭 괄호 안에 집어넣어서 썼다고 합니다. 그처럼, 이 세상에서 영생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맑은 정신과 그리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욕과 그리고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고, 그 가장 예민한 욕망과 그리고 인간의 그 정욕이 바로 물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에 정치사에 다시 생각하기 싫은 그 더러운 기억들은 우리들은 여러 해 동안 신문지상을 통해서 쉰 물이 나도록 맛보았습니다. 그런 모든 파국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물질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마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성취를 이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사고방식들이 사회를 좀먹고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들 사이에 신뢰를 모두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러한 생각에 깊이 물들어서 살아간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실히 일하고 그리고, 건전하게 사업을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많은 돈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을 모두 내가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물질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이를 더 사랑하거나 저를 더 사랑하거나, 혹은 이를 중히 여기거나 저를 경이 여기고, 무엇이든지 사랑하는 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과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몇 년 혹은 몇 십 년 치 혹은 몇 백 년 치의 양식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 양식은 무엇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 양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일주일도 아니고 또 한 달도 아니라는 말씀을 주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는 것이 또 있습니다.
나는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을 무조건 죄인시하는 그런 풍조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일각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사랑하셔서 돈을 주시면, 여러분은 좀 더 나은 집에서 살수도 있고, 그리고 보다도 좋은 차량들을 가지고 다닐 수도 있고, 예전에 가난했을 때보다도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인정을 하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최소한의 그리스도의 삶이 편의롭고 여유로운 삶은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 과도하게 사치한 삶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아주 명쾌한 해석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빵과 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교육, 문화, 경제 정신 모든 최소한의 혜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단지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입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직업이 만약에 모델이라고 한다면 그가 입고 다는 값비싼 의상도 직업적인 측면에서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만약에 매우 특별한 어떤 기술들을 공부해 나가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한 매우 중요한 기자재들이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평생 성경을 연구해가고 가르쳐야할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도하게 구매하는 책도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인간적인 교육과 문화 모든 혜택이 포한된다. 그러나 다이아반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치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물건이나 이런 것들은 결코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명령을 따라서 검소하고 사치에 흐르지 않는 삶을 살아할 의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탐닉하면 결국은 사랑하게 됩니다. 깊이 빠지면,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결국은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를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사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는 주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는 자못 우리의 옷깃을 여기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돌아보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각양 좋은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면서, 이것들이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지도록 우리자신이 주님께서 주신 이 양식으로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매일매일 기도하고 그리고 매 순간순간마다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살아있다 라고 하는 이 신앙고백을 가지면서 우리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능들과 주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보다도 넘치게 주신 모든 물질적인 축복들을 가지고 이웃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우리는 우리자신을 복음 앞에 복종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한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물질을 사랑하고 그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이 순결한 영적인 생활을 이어간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나, 오히려 오는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있으나, 오히려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이 빛과 소금이 됩니다. 모두들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 하나에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거는 가치가 전도되는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들은 그 사람들 속에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 복음 안에서 정리된 생각과 그리고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질을 뛰어 넘는 초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들 물질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본질인줄 알았는데, 물질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은 그 하나님의 백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 하는 물질조차도 마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들은 우리의 삶을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물질만을 사랑하면서 세상 그 자체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이 세상에 물질 그 넘어 무엇인가 영원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또한 그것을 쫓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진실한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손안에 있고, 그리고 우리는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그 빵 한 덩어리 식사 한 끼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것도 신실하신 하나님 덕분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포기될 수 없는 관계임을 하나님 앞에 날마다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몇 푼 안 되는 물질을 의지하고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에 실패가 없으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름을 받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네 번째 기도를 대하면서 우리는 주님이 당신을 의뢰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 것을 주님 자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일용할 양식조차 아버지의 손에 의지하며 사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우리의 얼마 안 되는 인생을 그렇게 사랑해야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물질과 번영을 주실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그 물질 그 번영보다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날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주시는 축복들을 가지고 당신의 영혼을 망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들로 더욱 주님을 섬기고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우리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고 매일 매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이오니 주님, 주 없이 살수 없는 우리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우리는 이런 기도 제목들을 네 번째 기도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5 (1997.8.17 주일오전)
13.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2)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녹취자 : 홍연주
지난시간에 우리는 일용할 양식 중에 첫 번째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우리 홀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원하시지 않고 주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바는 오히려 우리가 순간순간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신앙을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고통 받을 때나 형통할 때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초라한 존재들인가 깨닫게 해주시려고 우리에게 이 기도 하면서 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주님의 교훈을 받으면서 우린 늘 그 주님이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어 했던 것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싶었던 것들을 늘 우리들이 붙들고 기억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거기서 조금 더 진전된 이야기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처럼 순간순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그 물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먹는 밥이나 음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모든 것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나가고 인간이 원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하나님의 계획을 좇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 이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회자가 사례금을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했더니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아야한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기를 기도한다.’ 여러분 우리는 뭔가 성경을 봐도 유별을 떨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 속에 깔려있는 생각을 중시해야합니다. 같은 산상수훈에 보면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찍어버리라 하는데 그 사람 손은 남아나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정리가 필요합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돈을 쌓아놓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우는 것 하나는 이것입니다. 일용할양식의 범위가 어디인지는 사람마다 다소 다를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사치스러운 생활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런 사치스런 생활 분에 넘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사랑하고 있다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은혜를 받으면 생활이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식비지출이 조금 많아 질 수도 있고 옷을 사 입다가 매일 중고품 사 입다가 새것 하나 사 입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때에는 아이들을 그저 밥 먹이고 학교 보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면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의 정서를 위해 음악도 교육하고 그러기위해 피아노나 악기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들 사도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수도사적인 삶을 대입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다소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도 있습니다. 그것이 비성경적이거나 반 복음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아주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었고 또 부유한 것을 유지하면서도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권세를 모두 버린 사람도 있었지만 주님을 따르던 고관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예들이 나옵니다. 중요한건 무엇이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감사하면서 어느 정도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사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을 때에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것을 매우 사랑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살펴보면 알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라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권세나 자기의 사회적인 위치나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사모하기에 부유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있던 교회 목사님이 교인들 집에 심방을 가서 집을 샀다든지 혹은 사글세로 있다가 전세로 옮겨 갔다든지 혹은 가게를 넓은걸 얻었다든지 하면 당신 자신의 일처럼 그렇게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너무 부요하고 사치하게 살아서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 보다는 물질과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자신의 삶의 상황을 의지할 수 있게 되는데 까지 나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만 있으면 옮겨 다니는 셋방살이 보다는 여러분 자기의 집을 모두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것도 다른 동네 말고 비싼 이 방배2동에 한 채씩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오지 않아도 가까운데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도 결혼해서 속히 집을 사되 인천이나 광명이나 천안이나 이런데 살지 말고 방배2동에 될 수 있으면 가까운데 살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다하게 부를 누리고 그것에 탐닉하고 그것을 사랑하며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해서 예수를 믿고 지금은 큰 교회 열심 있는 집사님이 됐습니다. 부인 하시는 말씀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변화된 것이 뭐냐 물어봤더니 이분은 아주 간단하게 간증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변한 것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는 주머니에 몇 만원 돈이 있지 않으면 늘 불안했는데 그래서 꾸어서라도 주머니에 돈을 넣고 있어야하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토큰하나만 있어도 마음 편안하고 걱정이 안 되고 근심이 안됐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을 누리되 물질을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도히 절약을 하면서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물질에 헌신된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 자기를 향하여 수전노 같이 사는 사람들은 남을 향해서도 수전노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대부분 입니다. 또 자기를 향해서 과도하게 너그러운 사람들도 그것은 자기를 향한 탐욕에 치우치기 때문에 사람들을 도와줄 여유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를 향해서는 인색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부유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물질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삶이 계속 억압을 받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삶을 고갈 시키고 우리의 영적인 삶에 독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들이고 그리고 매일매일 우리가 살아있고 이 세상에서 먹고 숨 쉬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가 모아놓은 재산 때문이 아니라 매일매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매일매일 식탁 앞에 대할 때 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생활 하게하시려고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이 또 한 가지 사실을 지난주에 추가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안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은 어디에서 발견하십니까? 왜 나에게는 하늘이 안 열리는 것일까. 왜 나에게는 번쩍하는 것이 없을까. 왜 나에게는 간증집에서 나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발견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속에서 잘 드러나는 것 하나가 삼시 세끼 잘 먹고 사는 것입니다. ‘에게~’ 그러겠죠? 바로 그 마음이 예수 없는 마음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가서 ‘선생님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요.’ ‘선생님 전 선생님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천하에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왜요.’ ‘안 굶고 살잖아요.’ 요즘 밥 굶는 사람 봤냐고 누구 놀리냐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사니?’ ‘통장에서 돈 빼서 먹고산다.’ 이게 세상 사람들 생각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믿는 사람에게 주는 양식만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지 않도록 풍족한 식량을 주셨습니다. 요즘 식량이 모자란다고 하죠? 다 무엇 때문입니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부의 80%를 단 10%가 흥청망청 쓰고 20%를 가지고 90%로 백성들이 나눠 먹다보니까 이북과 같은 소말리아 같은 상황이 나오는 것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곡창지대에 아무것도 인위적으로 계획하지 아니하고 풍성하게 농사를 지으면 전 세계에 식량난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돈 벌려는 탐욕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먹지 않고 사니까 이런 고통스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주님이 매일매일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까짓것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마른 빵 한 조각과 국한그릇 놓고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 낡은 성경위에 안경을 벗어놓고 하나님 앞에 중심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발견합니까? 매이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도처에 굶주려 죽는 많은 사람들 일 년에 지금도 3000만 명이 굶어서 죽어갑니다. 북한인구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일 년에 3000만 명씩 굶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고 그래서 매일매일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조금 있다 점심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밥은 봉사부가 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어김없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봅니다. 화려하지 않은 식탁 소박한 식탁을 앞에 놓고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보여주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수련회 때 김복남 전도사님 간증을 들으면서 인생의 행과 불행이 끝이 없이 상대적인 것이구나 알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이렇게 건강하게 하시고 또 우리가 무엇인가 생업에 종사하게 하셨습니다. 또 잠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리십니다.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어김없이 우리들에게 공급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서 다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을 날마다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이 가르쳐주셨던 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의 의미를 복음적으로 깊이 깨닫기만 하면 우리는 하루 세끼가 바로 부흥회입니다. 하루 세 번씩 부흥회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고 매일매일. 우리 어렸을 때는 제일 무서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밥 주지 마라.’ 그거 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주 부모님들의 협박이었습니다. ‘밥 주지 마라.’ 하면 겁이 났습니다. 근데 요즘은 ‘밥 주지 마라.’하면 ‘햄버거 사먹으러 갈 거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영적인 상태가 좋을 때만 양식을 공급해주셨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아멘하고 잘 봉사할 때만 공급해주셨습니까? 말씀 듣고 은혜 충만할 때만 공급해주셨습니까? 어그러진 길로 가고 심지어 불순종하고 나아가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파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며 살아가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의 불순종과 반역된 태도 하나님을 향해서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거역하고 거스르며 살아가는 가운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먹이시고 입히셔서 감사하지 않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잘 묵상해보십시오. 정성껏 밥상을 차려 정갈하게 냉수까지 떠서 남편에게 밥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먹지도 않고 숟가락을 놓고 돈 벌어다 주는 것 다 뭐하고 반찬이 뭐냐며 한 번 말하면 ‘내가 너무 소홀했나.’ 그럴 것입니다. 그 다음엔 한 개 두 개 더 얹어 놓습니다. 그 다음 발길로 차면서 ‘이게 뭐야! 왕처럼 모시라고 했잖아.’ 그러면 은근히 화가 날것입니다. 그 다음에 한 번 더 차려 갈 테지요. 그 정도만 되도 열녀입니다. 더 차려가지고 갔는데 또 발로 찹니다. ‘지가 굶어 봐라.’ 나 같으면 밥 안차려줍니다.
여러분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묵상해보십시오. 주님이 그 손으로 우리의 체질의 연약함을 아셔서 우리가 무얼 먹고 어떻게 영양을 공급 받아야 할지 주님이 헤아리시면서 우리에게 밥상을 가져다주는데 못된 후레아들 녀석들이 감사도 안하고 고맙다고도 안하고 자녀들 식사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갖다놓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어려서부터 시키십시오. 안되면 밥 주지 마십시오. 한번 안주면 겁을 안 먹지만 세 번만 안주면 복종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자기를 길러주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부모에 대한 감사. 그것과 함께 비로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우리들이 교육을 시키고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태도가 불손하고 했는데도 주님이 변함없이 우리에게 공급해주셨습니다.
(찬양)
오 신실 하신 주 오 신실 하신 주
하나님께서 날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모든 것들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같았으면 자존심 상해서라고 공급해주지 않았을 텐데 우리의 태도 우리의 신앙의 상태 심지어는 신불신의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아가게 만드셨습니다. 이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 저는 몇 해전 이 주기도문을 묵상할 때 이 우리에게 라는 부분이 가슴에 가장 깊이 와 닿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공동체적인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얘기하면 먹으면 같이 먹고 굶으면 같이 굶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나에게만 일용할 양식이 공급되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특별히 믿음의 공동체에게 일용할 양식이 함께 공급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용할 양식뿐만 아니라 지체들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도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기도문을 살피며 가장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 중에 하나가 주기도문의 공동체적인 특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성품을 유지하면서 교회생활 하려고 하는 곳에서는 교회다운 교회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등록할 때 심방 안 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등록하는 교회가 있다고 하니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싫으면 하나님 안 믿으면 됩니다. 왜 사람들은 그러는 지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공동체적 특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님 자신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주님 혼자셨다고 할 것 같으면 급하시면 기적을 일으켜서라고 떡 한 조각 만들어 드셨으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공동체적인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일용할 양식이 밥 세끼만 먹는 게 아닙니다.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해야지만 그게 일용할양식이라면서요.
모든 인간의 사악한 탐식은 어디에서 비롯하냐 하면 나의 일용할 양식과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의 차이를 너무 크게 벌여놓는 것입니다. 너는 라면 세 개만 끓여먹어도 감사해야한다. 하지만 나는 좋은 집에서 좋은 차타고 좋은 것 안 먹으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용할 양식의 심한 격차. 탐심이 만들어낸 정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연약한 지체들 풍부하지 않는 모든 지체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일용할 양식이 어떻게 공급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마음을 기울여야합니다. 그게 바로 섬기는 사람이고 주기도문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지체들에 대해서 얼마나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까.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 안됐다 생각하고 돌아서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요, 우리에게 섬기도록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달란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형제들을 보고 궁핍가운데 처한 사람들을 보면, 그것이 꼭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가 알기론 우리 교인들 중에 굶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일용할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신학생들 등록할 때가 다가옵니다. 그 등록금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공부를 해야 주의 일 할 것 아닙니까. 그 모든 것들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섬기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특별히 지정헌금 제도가 있습니다. 아무나 이렇게 봐서 불쌍하면 돈 들고 가서 주면 받겠습니까. 또 받으면 얼마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말고 써서 내요. ‘아무래도 저 형제가 곤궁한 것 같다. 한 5만 10만 보내줄까.’ 자기 이름 안 밝혀도 됩니다. 아무개 지정 헌금. 하면 교회서 배달해줍니다. 밝히지 말라고 하면 안 밝힙니다. 그런 제도가 있습니다.
궁핍하고 연약에 처한 형제 지체들을 바라보면서 그 일용할 양식도 하나님이 채우시는데 그 일용할 양식을 채우시는 방법이 바로 사람들을 통해 채우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내리십니다. 우리 밥 먹고 삽니다. 농사가 잘 되어야 합니다. 농사 하나님이 지으십니까. 하나님 그렇게 안하십니다. 수고한 농부들이 있습니다. 애를 쓰고 그 농산물을 유통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기위해 수고한 가장이나 집안의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지체들을 향해 공급해주시는 원리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돈을 넉넉하게 벌 것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좀 부족하게 벌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자신이 누리고 자신이 넉넉하게 쓰고 지체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매일매일 주기도문으로서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흩어져서 구제하고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물질의 궁핍 때문에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도울 수 있는 이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또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백번을 도움을 받아도 거기에 적응이 되면 안 됩니다. 나는 많이는 아니지만 도와주면서 여기에 적응이 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웬만큼 도와주는 것에 대해 그렇게 감격도 안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빚진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절대 거기에 적응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남의 도움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 그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게 될 때에 도움의 도구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죄송함 사랑의 빚을 졌다는 느낌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없습니다. 그러면 도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영적인 삶에 커다란 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생들에게도 늘 말합니다. 가서 도움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가서 노가다라도 해서 돈을 벌어라. 방학 때는 돌짐이라도 지고해서 스스로를 돕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도움 받는 것을 죽을 때 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런 자립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열심히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북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도와야 하냐 말아야 하나.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굶어가는 사람들이 먹어야지만 회개를 하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죽는데 무슨 대안이 있겠습니까. 열심히 보내야 합니다. 일단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래전에 깊은 갈등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기만 하면 몇 사람씩 만납니다.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 하는데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안줬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와서 아주 결정적인 한마디 말이 저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습니다. 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해가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안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데 그것은 각자 판단의 차이라 정죄 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말 안줄 때에 이것을 주면 파괴될지도 모르는 저 사람의 영혼에 대한 연민이 줄 수 없게 한다면 안주는 것이 맞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팔 부러진 사람을 보면 다리는 멀쩡한데, 그리고 다리 부러진 사람 보면 팔은 멀쩡한데 이런 생각으로 안주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순식간에 만난 그 사람을 보면서 영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까지 신경이 안갑니다. 그럴 바에야 주는 것이 훨씬 더 그리스도의 긍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차를 타고 다니니까 전철을 탈 일이 없지만 가끔 타면 늘 천 원짜리나 오천 원짜리를 가지고 다니며 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일에 있어서도 미혹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동체의 기도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성도들이 어려움 없이 고통 받지 않고 식생활을 이어가고 인간다운 삶을 이어가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가끔 얼굴이 수척하고 여윈 형제자매들을 만나지만 사실은 자기가 살 빼느라 안 먹어서 그렇지 양식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조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 공동체적인 기도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형제와 자매들 지체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도구가 되어 지기를 하나님 앞에 사모하고 이런 점에 있어서 분명하게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매일 살아있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이 은혜 때문에 열심히 지체들을 섬겨서 우리 안에 그런 공평이 이루어지고 우리 안에 핍절한 자가 없도록 모든 사람들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힘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이런 복된 공동체가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의 예표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은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비쳤는데 신약시대가 오면서 이 그림자가 신약에 나타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외국영화를 보지 않습니까. 죽 화면이 나옵니다. 영어를 좀 한다고 해도 워낙 빨리 얘기한다거나 불란서 영화나 독인 영화나 우리가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 해도 안 들리기는 마찬가집니다. 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나오고 아들이 나오고 뭔지 모릅니다. 밑에 한글로 자막이 나오면 압니다. 그 그림을 구약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 나오는 한글 자막은 신약입니다.
구약에 보니까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입니다. 어떻게 얻었습니까. 이것은 특별히 뭘 염두 해 두신 것이냐 하면 광야시대 때 일용할 양식을 만나라는 것을 통해 공급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났습니다. 올 때야 먹을 것을 가지고 오고 가축을 몰고 왔겠죠. 그런데 삼백만 명입니다. 얼마나 큽니까. 200원짜리 농심 신라면만 해도 한 끼에 6억입니다. 삼시 세끼는 18억이고 삼십일이면 540억입니다. 일 년을 방황하려면 최소한 6200억 가까이 라면 값만 듭니다. 10년은 6조 2000억이고 사십년을 방황했으니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었습니까, 해적질을 했습니까. 아니면 누가 먹을 식량을 헬리콥터로 실어다 줬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먹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열린교회 몇 명 안 모이는데도 야유회 가보니까 프라이팬에 고기를 들어부어도 뚝딱입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300만 명 어떻게 먹여 살렸을까. 아마 모세의 엄청난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나오고 얼마 안 되서 식량 다 떨어졌습니다. 난감한 것입니다. 못 먹으면 약속은 뭐하고 가나안은 뭐하고 젖이 흐르면 뭐하고 꿀이 흐르면 뭐하겠습니까. 지금 굶어 죽게 생겼는데.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보지도 못하고 상상해보지도 못했고 그리고 예측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백성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얼마나 신기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배가 부른 상태에서 오늘날 같이 우리들이 잘 먹고 사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매일 아침 여의도 광장으로 나가라. 내가 너희에게 일용할 만나를 주리라.’ 하면 아마 갈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냥 일반 미 먹고 살래요.’ 그런데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이제는 완전히 주리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배가 고프면 야수성이 드러납니다. 옛날에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나는 인육을 먹었다.’ 그런 책이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에 나온 책입니다. 일본군이 전쟁 때 미군한테 대피합니다. 가위바위보 해서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여서 그 자리에서 뜯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살아 나온 사람이 수기를 쓴 것입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요세푸스의 역사에 보면 예수님 시대의 역사가 이었습니다. 70년에 디도 장군이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 시켰을 때 실제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늘은 이집 아이를 삶아먹고 내일은 저 집 아이를 삶아먹는 그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금은 안 그럴 것 같습니까? 똑같습니다. 인간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인간다운 삶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사는 것이지 정말 굶주리면 피 터지는 야수성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숨기거나 참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배고픔을 향한 인간의 모습니다. 그런데 그런 절대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이 약속한대로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하얀 서리 같은 것이 내렸는데 이렇게 긁으니까 긁어지는 것입니다. 긁어서 가지고 와 물만 섞어서 반죽을 해 굽고 찌고 부치고 하니까 꿀 섞은 과자같이 맛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감격이 얼마나 놀라웠겠나 생각해보십시오. 물질 자체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지만 그것을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매우 초자연적인 방법에 감동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온 천하에 내렸습니까? 이스라엘이 진 치고 있는 그 가상 자리 빈들에만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하나님이 모르고 거기에 내리셨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엔 안 내리고 가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찬양)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마음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여기사 주여 주여 먹이어주소서
만나가 온 들판에 하얗게 내리고 얼마나 신기했겠습니까.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만해도 정말 가난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급우 중에 몇 명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 마음씨 좋은 선생님이 계실 때에는 아이들에게 밥을 한 숟가락씩 모아서 같이 나누어 먹곤 했습니다. 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겨울에 수업하고 끝나는 시간인데 눈이 하얗게 퍼부었습니다. 옆에 있던 아이가 ‘눈이 쌀이었으면 좋겠다.’
여러분 하나님이 특이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일용할 것만 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이 모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해가 뜨고 나면 썩고 벌레가 생겨 못 먹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나갑니다. 처음 내렸을 때 오늘도 내렸을까 안 내렸을까 불안해하면서 나가서 보면 하얗게 내려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 제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우상을 섬길 때에도 그 다음날 아침에 만나가 하얗게 내렸습니다. 범죄 했으니까 질이 좀 떨어졌겠죠? 3등품? 아닙니다. 똑 같이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살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림입니다. 하얗게 만나가 내리고 사람들은 바가지를 들고 그것을 주우러 가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장면이 그림이라면 그 밑에 뭐라고 나오냐 하면 ‘너희 조상들이 알지도 못하던 것으로 너희를 광야에서 먹인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라고 자막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결국 그런 사건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으셨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이제는 그렇게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또 다른 양식이 필요한데 그것이 영혼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한 끼라도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 몸에 이상을 느끼듯이 매일매일 우리의 영혼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야할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양식은 곧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 변화 받고, 요즘도 그런 지체가 여럿 있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신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곤고하기 그지없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십니다. 마음이 곤고하고 하나님 앞에 때로는 원망하고 불평해도 교회 나와 예배를 드리고 혹은 아침마다 성경을 펴면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을 보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지 보여주셔서 잘 감동 받을지 모르는 나 같은 인생을 감동 시켜주셔서 그래서 그 말씀을 받아먹고 나면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하는 진실한 결심이 마음속에서 솟아나오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라앉은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나면 다시 살아 날 수 있을 것 같은 소생함과 은혜를 누립니다.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믿고 체험하면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불안 합니다. 일주일동안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했는데 오늘도 교회가면 만나가 내렸을까. 의심하는 반 믿는 마음 반 그리고 나왔는데도 우리는 주님에게서 잠시 떠났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 거기 계셔서 곤고한 심령으로 찾아왔을 때나 혹은 충만한 마음으로 찾아왔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의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인생이구나 이것을 마음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감격 속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넘어가보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만나가 그렇게 맛있고 그 만나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만나만 먹고 나면 전쟁 할 힘도 생겨나고 싸워서 이길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사람들이 싸우려고 넘어와도 ‘너희 우리 같은 것 먹어봤냐. 너희는 기껏해야 죽 끓여먹고 빵 구워먹고 나왔지만 우리는 하늘의 만나를 먹은 사람이다. 우리는 오늘 아침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온 천하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 진 이 하나님의 놀라운 만나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너희들은 이것을 아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기와 힘과 권능을 얻는 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자 점점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맛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만나를 먹다가 서서히 ‘이 만나는 계속 먹기에는 질린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나를 공급받으면서 그렇게 감격하더니 이제는 바가지 들고 나오면서 ‘또 만나야’ 그러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긁어오긴 오는데 내 신세 딱하다.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고 정력에 좋은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좋은 것 많았는데 하나님은 반찬도 안내려주시고 맨날 만나야.’ 그래도 가야지 가서 한바가지 긁어가지고 오면서 투덜투덜 대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부터, 양식이 다 떨어진 다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것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로지 만나로만 살아야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로만 살아야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구별된 백성은 구별된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러면서 만나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불순종은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똑 같습니다. 처음 교회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인생이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숨도 쉴 수 없고 병든 자처럼 되어서 완전히 질고에 빠져있던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았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핍절하고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게 되었습니까. 인간이 살아있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있어야지 정상적인 삶을 이어갑니다. 육신의 사람이 살아있고 속의 영적인 사람이 살아있어야지만 정상적인 인생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은 좋은 것을 먹고 해서 건장하게 되고 이상은 없는데 속사람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겉 사람을 위해서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인생들이 속사람은 거의 일 년 이년 혹은 몇 년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영혼의 양식이란 것은 먹은 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어떻게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핍절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만나를 먹여주셔서 말씀을 받아먹으면서 영적인 속사람이 새 힘을 얻게 되었을 때 환경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겉 사람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데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말 사모합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뭐냐 하면 인생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구나, 물로만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내 영혼에도 생수가 필요하고 내 영혼에도 양식이 필요하구나. 그리고 실제로 한번 배불러보고 나니까 인생을 정말 어떻게 살아야지만 인간답게 살고 어떻게 살아야지만 하나님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것이 이제는 관심에서 멀어지고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내 영혼에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 있으면 내가 살 수 있겠다고 하는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하실이면 어때 물 나오면 어때 퍼내면 되지. 축축하면 어때 예배시간 길면 어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입맛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사나? 말씀으로만 살기에는 너무 먹고 싶은 것이 많아’ 하면서 죽었던 옛날입맛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 탐욕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종 하는 사이에도 하나님의 만나는 내립니다. 문제는 바가지를 들고 안 나오는 것입니다. 빈 바가지와 같은 심령이 되어서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만나는 옛날 만나하고 좀 틀리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얻으면서 그렇게 감사하며 살게 되기를 하나님은 너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말씀을 사랑하십니까? 성경 읽습니까? 충격적인 얘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 교인 100명중에 예배당 문을 나설 때에 오늘 설교한 성경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100명중 5명이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100명교인 중에 3명입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살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이미 애굽은 떠났습니다. 광야 길로 나와서 하나님의 만나를 먹으면서 가나안 가기를 사모하면서 하나님만을 쫓아가야 될 사람들이 주저앉아서 정력에 좋은 마늘 부추 타령이나 하고 앉아있으니 그 사람의 영혼이 풍성하게 내린 하나님의 양식 공급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앞에서 핍절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십니까. 얼굴은 못생기면 거울을 보다가 돈 싸들고 가서 성형수술도 합니다. 광대뼈를 잘라서 턱에 붙이고 엉덩이 살을 뜯어서 다른 곳에 붙이고 쌍꺼풀 수술도 하고 귀도 뚫고 코도 뚫고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의 외모를 가지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겉 사람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합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후패해가는 겉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 외로움과 비참함을 달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하늘의 만나 생명의 양식으로 날마다 새로워져가는 사람들은 후패해져가는 겉 사람에 마음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날마다 이렇게 후패해져가는 육신을 보면서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워져가는 날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연로하며 늙어가는 것이 인생의 면류관입니다. 왜냐하면 일평생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허물어져가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영혼의 만족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위기에서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비극이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일들에 있어 무감각 합니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매일매일 애쓸 수 있는 사람들이 영혼의 굶주림에 대해서는 도무지 돌아보지 않고 그 일을 위해서는 너무나 바쁘기 짝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일용할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으면서 살아야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루에 정 안되면 두 장씩 석장씩이라도 능력에 닿는 범위 안에서 읽어가며 하나님이 그 읽는 성경읽기를 통해서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밥을 안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끼 정도는 건너 뛸 수 있습니다. 성경읽기도 너무 바쁘다 보면 하루정도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못 먹었어.’ ‘왜?’ ‘너무 바빠서’ ‘몇 끼나 못 먹었는데’ ‘밥 못 먹은 지 석 달이나 됐어’ 그런 사람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석 달 동안 밥 못 먹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너무 바빠서 3년 동안 안 먹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느 건강진단 센터에 갔더니 항목에 1. 당신은 아주 건강합니다. 2.건강한 편입니다. 3.조심하셔야합니다. 4. 나쁜 편입니다. 5.아주 위험합니다. 6. 살아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목회자에게 건강진단을 받아야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면서 무엇으로 살려고 하십니까. 주님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고 살아야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다는데 잡지를 읽고 TV를 보는 시간보다도 성경을 읽는 시간을 못 내고 살아간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그리고 영혼의 회복을 바랍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까? 말씀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일주일동안 말씀과는 거리가 먼 이런 삶을 살다 오니 주일의 예배가 건조한 것입니다. 늘 말씀 속에서 고민하고 말씀 속에서 은혜 받고 말씀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던 사람들은 주일에 설교들을 때 졸거나 다른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앙상하게 뼈대만 남고 속사람은 모두 말라비틀어져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다름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령을 누가 지배하고 무엇이 우리의 심령을 먹여 살리고 있고 무엇이 우리의 심령으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게 하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빠요? 무엇이 그리 바쁩니까? 누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읽고 말씀에 은혜받기에 바쁜 사람들은 살아있기에 너무 바쁜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세 번 예배드리는데 그것 절약해서 얼마나 잘 살려고 하십니까. 그것을 절약해 모으면 얼마나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받기에 바쁘다고 칩시다. 그 시간을 도려내어서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그 쓰는 시간을 하나님이 축복하실까요? ‘얘들아 나오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만나를 준비하였노라’ ‘하나님 거기까지 가기에 너무 바쁩니다. 구워서 갖다 입에 넣어주시면 모르거니와’ 여러분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매일 무엇으로 살아야 되는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주셨을 때 ‘이 일용할 양식의 기도를 드리면서 너희는 항상 내가 이미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의 내리는 만나로 살았던 역사를 기억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그 만나를 먹으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사건이 바로 신약시대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입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며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서 미리 보여준 그림이었노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 나와서 예배시간에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아도 여러분이 매일 성경을 펼치며 은혜를 받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영적인 삶이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결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탄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안 되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신앙생활이 늘 불안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가운데 하나는 말씀의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 김복남 전도사님 간증을 들으며 느꼈습니다. 남편이 죽을병에 들었습니다. 놀랍게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감사하고 믿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금방 간증까지 하고 다니다가 식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깊이가 없으니까 기적을 봐도 하나님 앞에 옳게 서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후일 주님을 믿고 신학을 하고 말씀에 깊이 들어가니까 더 큰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결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14.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녹취자 : 조원정
지난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지고 두 주간에 걸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6 (1997.8.24 주일오전)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베풀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생들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에 세 번씩 자기 앞에 놓이는 식탁 앞에서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감사가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를 보면서 많은 교훈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한 주님 앞에 날마다 식탁 앞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고 그 식탁을 통해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일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은 진리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복습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다음 기도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세 시간에 걸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조금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탕감하여 주옵시고 하는데 이것이 도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들을 탕감하여 혹은 우리의 빚들을 탕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실로, 이미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그 빚들을 탕감하여 주었나이다. 이렇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다섯 번째 기도인 죄 사함의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이 기도가 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느껴야 됩니다. 만약에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주기도문은 매우 건조하고 아무것도 아닌 신학적인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매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기도드릴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선 드린 이 기도가 공동체적인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혼자 믿는 신앙에 대해서는 기독교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 기도도 예수그리스도 혼자만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기도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신성을 감추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지만 그는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았어도 죄는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우리들이 짓는 모든 죄가 당신 자신의 죄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일생과 그분의 죽음은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생애였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선 예수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다섯 번째 이 기도는 우리에게 인간이 죄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첫 번째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앞에서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인간의 육신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즉시 예수님의 관심은 인간의 영혼의 문제로 옮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약간의 물질과 건강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이 사는 일은 일용할 양식의 문제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육신이 되고 육신이 살아있는 것이 주기도문적 삶이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죄 사함을 힘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신은 매일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공급받으며 살아가지만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양식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끊임없는 죄 용서와 죄 사함을 힘입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드리는 이 기도를 드리시고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서 인간이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주기도문을 듣던 청중들이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우리도 버리지 않았던 배와 그물을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등졌던 사람입니다. 집과 땅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서 길을 따라 나서고 어디 가는 것도 없고 예수님 자신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도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던 사람들입니다. 헌신되고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따르기로 자기의 것을 이미 포기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그 제자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기도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도록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배와 그물도 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등진 사람들 이제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죄 사함을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죄 사함의 필요아래 놓여 있지 않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지금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도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처럼 죄 사함을 얻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의 용서와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죄 사함의 용서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지고 임마누엘의 샘에서 우리의 더러운 죄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우리의 모든 범죄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인간들은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매일 매일 올리는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죄 사함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아직까지도 십자가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정한 죄 사함을 얻지 못한 절망적인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던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죄 사함을 힘입지 못하고 살아가는 정죄 받은 영혼들을 건져내고 구원하기 위해서 받쳐진 생애였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애, 자신의 건강, 자기의 모든 시간과 마음을 아직까지도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죄 사함의 문제는 모든 인류들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을 포함한 우리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며 진정한 죄 사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참된 위로와 사랑,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 하나님의 참다운 교제 이런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죄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죄 사함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 이 사람들에게조차 죄는 결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샘에서 그의 보혈로 깨끗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었고 죄 사함을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여전히 범죄 한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죄를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쓰는 사람도 죄와 결별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일주일간도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하지만 죄와 결별할 수 없이 살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구원해주실 인간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은 온전했습니다. 그분은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처럼 죄 사함을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매일 구하는 것처럼 늘 죄 사함을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죄인들을 향해 어떤 마음들을 갖고 계시는지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야 할 인간들의 마음을 인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아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그리스도는 자기를 보내시고 인간들을 위하여 자신을 재물로 바치도록 보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다섯 번째 기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은 단지 인간들을 한번 용서해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믿지 아니한 것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고 그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 정죄되었고 지옥에 갈 것이지만 믿는 사람들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한 번에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회개를 해야 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생각해 낼 수 있습니까? 생각한 모든 죄가 가슴 아프게 다가올 수 있습니까? 가슴 아프게 다가온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습니까? 고백한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런 사람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받은 고난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우리는 이전에 행했고 앞으로도 짓고 있는 모든 죄들을 용서받았습니다. 영원히 단번에 제물로 자기를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들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참다운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해방 하였도다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구하십니다. 사실입니다.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에 우리들이 정죄 받고 정죄 받지 않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이 비록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보증을 얻었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으면 주님은 용서하셨지만 이것이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문제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은 없지만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이 죄짓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그 죄를 여러분이 죄 값을 치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이 징벌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죄든지 비 그리스도인의 죄든지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미 믿은 사람들, 정죄함은 없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죄 짓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인생길에서 죄들을 갚으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생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빛 아래에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등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옮기기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와 더불어 사귀고 싶어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들어 놓으실 때 두 가지 계획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목적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도록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파괴를 가지고 왔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과 그 모양을 일그러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만들어진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육신의 욕심과 정욕을 좇아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는 그런 비참한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들은 한없이 고통 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 너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매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은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용서하시고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셨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은 단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은 지금 오늘 죄와 슬픔과 눈물과 모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고통 하는 영혼들의 유일한 대안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들과 사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에 막혔던 죄의 빗장이 부서지고 생명과 은혜의 빗줄기가 어두운 죄인의 영혼에 두루 비치는 것입니다. 그 빛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에 거꾸러지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해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고 그것이 내 인생의 진정한 소명이 되고 기쁨이 되는 그런 인생이 아니고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도 행복한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에 죄 많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있는 사람 단지 관념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정하고 매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순간순간 느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받고 즐거워하며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징벌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그리고 제가 정말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그 결심이 굳고 강하여도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하나님 앞에 범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십자가의 피로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셨지만 지금도 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용서하시고 나를 진정한 교제로 데려가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희랍어 본문은 죄를 빚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복수로 표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진 빚이 한둘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기억하기도 싫은 경험입니다. 아버님께서 사업을 크게 하다가 부도라는 것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도 이야기만 나오면 남다른 감회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부도가 나니까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아버님은 자식들한테도 어디로 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밤중에 도망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쫓겨 오다시피 왔습니다. 할머니가 사시던 단칸방에 모여서 지내고 있는데 밤이면 빚쟁이들이 거기까지 찾아오는 것입니다. 술병을 가지고 와서 술병으로 양복장 유리를 부수면서 찾아내라 그리고 해결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친척집에 가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야 빚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구나” 빚을 준 그 사람이 빚 받기를 포기를 하지 않는 한 결국 빚을 진 사람에게는 조금과 같은 자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절대 빚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를 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종종 봅니다. 교회가 많은 빚에 시달리면서 목회자가 빚쟁이를 피해서 피신을 다녀야 하는 동역자들을 볼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빚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점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합니다. 반듯이 받아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은행돈은 은행 빚은 떼먹어도 하나님께 진 빚은 떼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하나님이 반드시 받아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에서 거듭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가 어떤 견해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반드시 언젠가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서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지은 죄의 빚을 하나님 앞에 갚아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는 길은 사망의 죽음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빚을 갚는 시간들이 연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불현듯 그 연기된 모든 기간들이 끝나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될 때 누구도 그 빚을 갚지 않고는 피해갈 사람이 없는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그 사람들의 죄를 죽음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범죄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살아가지 아니하시면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의 평화가 원래 없이 살아가던 세상 자녀들의 삶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불행해 보이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부터 몰랐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주님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방법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록 연약하고 미련한 존재들이지만 그 존재들을 향하여 계속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껏 까지 살아왔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충만해지고 성령으로 가득할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고
(찬양)
비천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난 이 찬송만 부르면 은혜가 됩니다. 충만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쓰라린 맘으로 탄식하며 죄 가운데 몸부림 칠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소리 지르며 요구합니다. 보다 더 완전한 사랑을 내게 주시고 주님의 사랑의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진실한 교제와 은혜의 빛 아래 주님을 즐거워하도록 내 영혼을 도와 달라고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에게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무엇이 하나님도 원하는 진정한 교제, 하나님도 그렇게 주기를 원하시는 생명의 빛, 이런 것들을 가로막고 어두움 속에서 무지와 고통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손이 짧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막았으며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가 가득한 곳에 당신의 은혜를 거두십니다. 당신 자신의 놀라운 교제의 축복들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가 좋아서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좇아갑니다. 죄를 추구하고 죄를 찾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는 죄가 신자들에게 무엇인가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만족을 주지 않는다면 결코 그들이 범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서 쾌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불순종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속에서 깊은 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고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어두움에 깃들게 하시고 교제가 끊어지게 만듦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고 얻은 것들, 죄로 말미암아 얻은 것들이 자기의 영혼에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하는지를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경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시 죄악의 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상해 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우리 영혼의 진정한 자유와 기쁨,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던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신의 영혼에 비참한 상태에 대해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가운데 있게 되면 시기는 다르겠지만 반드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필요를 우리의 속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를 통해서만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과 교제를 회복시켜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죄라고 하는 무서운 빚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값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있을지언정 죄 값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범죄는 해도 그 범죄로 말미암아 받은 하나님의 불명예와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상할 능력이 없습니다.
집요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추적을 종식시키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에게 죄의 문제를 종식시키십니다.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만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옛사람, 옛 성품으로 말미암는 죄들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죄 사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교제의 회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밀렸던 빚을 다 갚고 나면 어떻습니까? 개운합니다. 빚을 갚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볍습니다. 빚에 시달리던 사람 그 마음속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자유와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빚을 지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놀라고 개 짖는 소리에도 놀랍니다. 빚을 모두 갚고 나면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회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매일 죄 사함을 받아야 된다고 주님이 가르쳐 주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죄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참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할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가 쌓였을 때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이 회개하는 우리를 받아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회개의 기도를 들어 주셨을 때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무거운 짐이 벗겨진 것 같은 참된 자유가 우리들에게 경험되게 됩니다. 정서가 살아납니다.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 놀러가도 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껏 웃고 떠들다가 빚 갚을 것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해집니다. 빚에 대한 채무의식이 기쁨과 모든 것들을 자꾸 앗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지은 것들이 하나님 앞에 청산되고 해결되어 지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결코 아무 기쁨도 없습니다. 늘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여러분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생명 있는 관계를 회복하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됩니다. 그 죄가 큰 것이든지 적은 것이든지 양에 있어서는 달라도 질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큰 차로 싣고 가는 것도 똥이고 바가지에 든 것도 똥입니다. 질에 있어서는 똑같습니다. 그것이 크든 적든 하나님이 느끼는 적대감은 동일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회복하면서 주기도문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죄가 가져다주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불명예, 주님을 마음을 아프게 한 것과 하나님 앞에 죄를 일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뉘우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런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으므로 반복되는 자신의 죄들을 처리하고 죽이는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떠한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성품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사함을 간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당신도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이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지은 우리의 모든 잘못들을 진정으로 참회할 때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죄 사함과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죄지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결코 죄의 양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지은 죄의 분량이 어떠하든지 그들 속에 진정한 참회를 볼 수 없을 때 그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의 영성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깨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매 기도하는 시간마다 진실한 참회를 드리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성이 얼마나 건강한가 하는 지를 책정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처리되지 않은 죄는 우리 속에 계속 쌓입니다. 죄는 더 많은 죄가 그 위에 쌓이게 만들고 쌓여진 많은 죄들은 우리의 인격과 영혼 깊은 곳에 눌러 붙고 이제는 죄의 대한 의식조차도 사라지게끔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가책 받을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존재들이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참된 기쁨이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여러분이 이렇게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이 무엇을 꿈꾸면서 교회에 나오고 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 모든 죄는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진정한 참회 없이는 우리는 어떠한 생명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삶과 신앙 속에서의 영적인 삶이 틀린 것이 너무도 많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이상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는 죄를 죽이고 죽이고 참회하고 참회하는 삶을 살수록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이 더 예민해져가고 더 뛰어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회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참회는 작은 죄에 대해서도 더 진지해지고 솔직해지고 깊어집니다.
참된 참회 없이 진정한 회개 없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면 반대로 아주 커다란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제법 자신은 쓸 만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죄에 대해서 도무지 참회하지 않는 굳어져버린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영적인 삶을 파괴시키는 독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과의 교제를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최대한 누리는 만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과의 참다운 교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진정한 영적인 관계의 회복이 없이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인간은 진정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손에 넣고 무엇을 누리고 귀가 무엇을 즐거워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설교도 여러분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로운 말씀이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회개의 눈물로 우리의 영혼에 붙은 더러운 때들을 씻어냅니다. 그렇게 눈물로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붙는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물로 다 씻지 못한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들을 이번에는 성령의 불로 태우십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깨끗케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주기도문의 삶들을 살아가게 하시고 그 사람들의 생애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아무리 그릇이 없어도 아무리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개 밥그릇에 밥 말아 먹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차라리 손바닥에 받아먹었으면 먹었지 아무리 빗물에 깨끗이 씻겼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 그릇이 깨끗해 보인다 하더라도 개 밥그릇에 밥 담아서 물 말아 먹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정결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 예민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구원받았지만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너희는 매일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로 하여금 이 기도에서 피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이 당부를 받으면서 우리는 이런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까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를 구원하셨지만 그것이 나에게 감격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이미 이루신 이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와 주님이 오늘 우리와 더불어 사귀어 주시도록 이제껏 지었던 나의 많은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영혼에 진정한 자유를 주시옵소서. 주님의 죄 사함의 약속을 내가 믿사오니 하나님 나를 깨끗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죄 사함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사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으로 생명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기도문 강해 Ⅱ 17 (1997.8.31 주일오전)
15.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죄 사함을 위한 기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죄와 결별하고 살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과 그리고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형벌 아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그 용서를 위해서, 실제로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라고 하는 말 속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죄 사함이 가지는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통해서 요청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죄는 빚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빚을 갚지 않고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큰 범죄하는 사람과 작은 범죄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크든 적든 그것은 질에 있어서는 모두 꼭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하나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는 용서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을 때, 그것은 바로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는 약속과 보증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 하나님의 죄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뿌리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견해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전에, 그리스도 바깥에 있을 때, 신앙을 안 가지고 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면서 죄의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를 진 것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또 나보다 죄 많이 지은 사람들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교도소에 갔을 때 교도관들이 이야기하기를,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히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진짜 죄인은 교도소 바깥에 돌아다닌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을 때에 인생에 대해 느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또 그 죄가 어떠한 결과를 자기에게 가져올 것인가 하는 사실도 결코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직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구원을 받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바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할 때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자기의 존재를 새롭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커다란 형벌이고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그 죄의 문제에서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오로지 자기 죄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노아래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도망칠 수 있는,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이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라는 빚을 하나님 앞에 질 수 있는 능력만 있을 뿐이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단 하나도 하나님 앞에 갚을 수가 없습니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는데, 심판을 받을 뿐이지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인간을 심판하셨더라도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 앞에 입혔던 그 손해가 보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진노의 심판을 받아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순간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이고 그리고 자기가 죄 아래 있고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인간은 잠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 죄 지은 인간 그리고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희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죄가 얼마나 무섭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더라면 이 죄 아래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겠습니까?
저는 어저께까지 포항에 내려가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포항은 얼마나 태풍이 몰아오는지 그야말로 집채만 한 파도가 해변에 밀려왔습니다. 물보라가 날려서 해변을 거닐 수 없을 정도로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파도가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다를 워낙 좋아하니까 둘째 날 바닷가에 가서 산책을 했습니다. 긴 길이었는데 그런데 저는 바다를 본 것이 아니라 모래를 보았습니다. 모래를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바닷가에서 이 파도가 친지 몇 년이나 되었을까? 누가 그것을 대답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바위가 부서지고 또 부서져서 자디 잔 모래가 되었습니다. 그 모래가 도대체 몇 만 년의 세월을 거쳐서 바위가 모래로 변했을까? 질문은 하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래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모래가 대선배입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잠깐 태어나서 그리고 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 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셔서 당신 자녀 삼으시려고 하는데, 그러한 죄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극히 짧은 시간동안 80년이나 혹은 90년, 혹은 60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살다가 그저 들풀이 사라지고 벌레가 사라지는 것같이 그렇게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 사함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의 태어나고 죽는 것은 버러지 한 마리가 태어나서 죽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해서 살지 아니하면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영원을 향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관건이 바로 죄의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은 정말 놀라운 것이고, 이렇게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자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묻습니다. “죄 용서받으셨습니까?” 아니라고 말하면 성경은 즉시, “당신은 그저 한 여름 날에 피었다 사라지는 풀과 같은 존재입니다. 당신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인생에 대해서 무슨 견해를 가지고 있든지, 또 무엇을 위해서 살든지 무엇을 추구하든지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든지 당신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든지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 용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는 이 기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구원에 이르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을 향한 기도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그 기도를 들었던 일차적인 청취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은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르침 받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 앞에 깊이 고백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지난 과거와 그리고 현재와 우리 미래에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을 모두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미래의 죄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에게는 현재, 미래, 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눈에 미래와 과거와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만약에 우리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과거의 죄만 용서를 받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또 용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하는 것보다는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죄는 열 개 가운데 한 개도 될까 말까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그 회개가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죄 사함의 확신을 가져다주는 진정으로 통회하는 기도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소문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만 회개로 소문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구하는 이 일의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용서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단지 과거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나의 모든 죄를 그분 앞에 고백하면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희생의 공로가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자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는 그 모든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면, 오늘 다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느냐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러나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 것은, 쉽게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고 살인하고 범죄를 했는데 임금이 특별히 긍휼이 여겨서 그 사람을 법정적으로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특사를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으로서는 그를 더 이상 제재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역시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신자들이 범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범죄 합니다. 그런 죄를 어떻게 처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데, 하나님의 사하심을 얻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하심은 법정적인 용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를 회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면 그 범죄 때문에 천국에 못 가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즉시 우리의 마음속에는 깊은 어두움과 죄책감 그리고 죄로 말미암는 부패,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삶이 이런 것들의 지배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진정한 평안,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의 은혜가 우리에게 깃들지 않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법정적으로 이미 용서해 주셨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죄의 무거운 짐들을 벗겨 주시고 깨끗케 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교제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에 회개할 때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우리가 죄 지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 처음 주님을 영접할 때와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밀려오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넘칩니다. 그리고 죄의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대신에 생명과 은혜가 내 마음속에 밀려들어와서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지고 그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교제하시는 것이 깊이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을 하나님 앞에 구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비밀, 영적인 생활의 진정한 비밀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 용서를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훌륭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뚜렷하고 분명한 참회가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얼마나 의로운 사는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분명하고 뚜렷한 참회를 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죄와 결별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연약함으로, 때로는 우리 속에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혹은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복종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범죄하고 그 죄를 짊어집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우리를 깊은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언제든지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와 결별하며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죄에 에워싸여 있고 죄에 의해서 수시로 다소간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죄에 지고 죄에 패배해서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죄의 통치 아래 죄 가운데 묶여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진정참회입니다. 진정한 참회를 통해서,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힘입는 사람들은 죄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지만 그러나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가끔 죄의 때가 묻고 불결의 때가 묻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회개로 씻어버리고 정결하게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참회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 죄 가운데서 쌓여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비록 범죄하고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 죄에 대해서 통회하고 참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이 사실 자체가 이미 죄를 용서하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죄 사함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 사함을 진정으로 기도하고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역설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회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깊은 무게를 느끼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의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과의 교제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원하고 그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의 회복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어찌할 수 없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거기로부터 자신이 고통 받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오늘 이 시간에도 찾고 또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죄 사함의 감격 없이 살아가는 것은 생명의 감격 없이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첫 번째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입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을 오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기도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우리의 행동이나 행위나 하나님 앞에 쌓는 어떤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흔히 가톨릭에서 생각하는 이런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는 대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절박하고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죄 사함을 위한 기도의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 빼놓지 말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간청해야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늘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청산하고 지나가지 않는다면, 죄는 점점 번창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은혜는 점점 야위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점점 넝쿨과 줄기를 뻗으면서 여러분의 모든 영적인 삶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 죄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무력감,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과의 모든 단절, 그리고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목표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그러한 좌절, 이 모든 것들은 오직 단 하나의 문제, 죄 사함이 필요한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는 우리에게 그가 회개해야할 필요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또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계속 쌓여가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죄에 깊이깊이 무디어져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려고 해도 이것이 정말 나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고 그리고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 받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간절하고 절박한 그러한 마음까지도 앗아가는 힘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무리 범죄한다고 하더라도 즉시 자신이 범죄한 것이 깊이 잘못된 것이고 범죄했을 때 주님이 느끼셨던 아픔을 우리도 동일하게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크게 범죄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죄를 짓는 일에 있어서 점점 담대해지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점점 무디어지게끔 만들고, 그 무디어진 것이 죄에 대한 담대함을 점차 더하게 해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화) 얼마 전에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하는 가수가 죽은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극장에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그와 비슷하게 차려입고 온 사람들은 모두 입장료를 받지 않고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살아있을 때 그 사람과 꼭 같은 분장을 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죽은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택시운전수였습니다. 어느 날 택시를 몰고 가면서 늘 하던 식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열심히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뒤에 타고 있었던 사람이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였습니다. 그가 콧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보통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한번 노래를 불러보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졸지에 택시운전수에서 세계적인 팝 스타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인가를 결혼했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에게 외동딸이 하나 있었는데 죽은 다음에 집안을 뒤지니까 딸아이에게 선물한 장난감만 일곱 트럭이 나왔다고 하니까, 장난감이 얼마나 비쌌을까가 아니라 그 집이 얼마나 큰집이었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큰 집이었기에 일곱 트럭의 장난감이 묻혀 있어도 표시도 안 날 정도의 집이었을까, 그런데 그는 말년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기자들이 그의 집에 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선가 무슨 타는 냄새가 나는데 누릿한 달걀껍질 타는 냄새입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냄새이냐고 물으니, 우리 집안에는 타는 게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계속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다가 이 기자가 소스라치듯이 놀랐습니다. 그 가수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인터뷰를 하는데 담배가 타들어가면서 손가락을 태우는 냄새였습니다. 하도 이야기를 열심히 하다가 자기 손가락이 타들어가면서 냄새가 온 방안을 진동하는데도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약중독자였습니다.
죄가 깊이 쌓이게 되면 그 다음에는 죄가 죄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담대해지고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을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에 대한 감각과 함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 생활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러고 살까, 저게 아닌데 저 길이 아닌데 왜 갈까?”, 답답하지 않습니까? 그 길이 아니라고 해도 못 알아듣지 않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리고 함께 죄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담대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상태까지 가게 된 데에는 우리들이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짓는 죄를 처리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빚도 계속 갚으면서 쓰면 부담이 적습니다. 그런데 안 갚고 계속 쓰면 쓴 것이 몇 푼이 안 되는데 점점 쌓여 엄청난 액수의 돈이 되어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드리는 기도 속에서 아버지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기시를 간구하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자비하신 주님이십니까?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는, 또 아버지의 눈에는, 죄 그 자체가 아니라 죄 짐을 지고 고생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이 긍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주님이 열어주셨으니,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느냐, 그러면 하나님이 법정적으로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지만 그래서 구원받게는 해 주시더라도 신자들이 짓는 죄는 모두 이 세상에서 정리가 됩니다. 어떻게 정리가 되느냐, 범죄하면 하나님이 그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통 가운데로 그 인생을 데려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우리 인생에 있어서 숙제가 되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고통 가운데 몰아넣었던 문제들로부터 우리가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당하는 많은 고통과 형통하지 못하는 것을 획일적으로 간단하게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아주 훌륭한 훈련의 도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무거운 짐, 그러면서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짐을 지고 걸어가 봐야 하나님 앞에 상 받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다고 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짐을 여러분이 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 앞에 해결되지 못한 죄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그런 고통의 시간들을 길게 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 모두 자신을 성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진 그곳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부어집니다. 죄가 있는 그 곳에는 고통과 슬픔과 좌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은 추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은 악하고 고통스러운 곳으로 흘러갑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의 고리를 끊는 길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어떤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보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여태까지 걸어왔던 길,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 그리고 우리의 손과 마음으로 행했던 많은 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분의 이름을 실추시켰으며, 그분의 영광을 훼방하였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 얼마나 어울리지 아니하는 삶이었던가 하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고 깨닫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잘못을 깊이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죄 사함과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따라서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은혜로 채워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능력의 심장부에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매일 매일의 양식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순간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죄 사함의 은혜와 진정한 참회 없이는 주님이 이미 주신 생명을 생명으로 누리며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렇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와 은혜 속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결함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이 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수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경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선행에 대해서 자주 생각을 합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선행에 대한 생각과 그리고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선행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다른가? 완전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앞에서 칭찬받아야 할 선행은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이 아니라 동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제를 하던 봉사를 하던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출발될 때, 그 선행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께로 우리를 더 가까이 데려가서 주님과의 교제가 더욱 긴밀해 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속에서 모든 선행과 섬김과 봉사와 모든 아름다운 일들의 원천이 되는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 통로를 가로막는 것도 유일하게 죄입니다. 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한쪽으로 범죄하면서 한쪽으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나 가능하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죄가 의도하는 것은 우리 영혼 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통로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는 동안은 범죄를 해도 즉시 회개하고, 죄의 문제가 생겨도 그 사랑 때문에 즉시 하나님 앞에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시몬 베드로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을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그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그 사랑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도 하나님 앞에 쉽게 해결될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죄가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쌓이게 되면 그 죄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 속에서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단 막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바치고 섬기기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생각하며 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고 넘쳐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정결한 삶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에 우리로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원동력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이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용서의 확신을 받고나면 즉시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 없는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회개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해결받기를 매우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능력 있는 신앙생활, 충만한 신앙생활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이렇게 죄를 미워하고,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고 사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그리워하는 그런 신앙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나의 죄’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죄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다루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다루십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한 죄를 개인적으로만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를 쉴 새 없이 뒤덮은 수많은 재앙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다리가 끊어지고, 건물이 무너져서 수백 명이 시체도 없이 깔려죽고, 비행기기 떨어지고, 흔히 일어날 수 없는 연속되는 재앙들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저의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우리나라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느낌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간 사람들, 다리가 끊어져서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된 사람들, 평범하게 시장 보러 갔다가 건물이 무너져서 깔려죽은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는 우리보다 의로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우리보다 훨씬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 틀림없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경건한 사람들이 거기에도 끼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죄악을 공동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조종사의 실수냐 관제탑의 실수냐 하고 떠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깊은 불상사를 당하고 흔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비극으로 닥쳤을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점에 있어서 깊은 위기를 느낍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 앞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개인적으로도 다루시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도 다루신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런 점에 깊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의 문제,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있는 죄의 문제를 자신의 것인 것처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들을 위해 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도 여러분이 체험을 통해서 이미 경험하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때, 쉽게 이야기하면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신앙 생활할 때, 그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염려입니다. 그리고 또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나와 같은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데, 그때 그 기도하는 마음은 나의 죄와 저 사람의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와 나의 죄가 하나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중보하게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러한 가르침의 진수입니다. 이렇게 죄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구하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시야를 넓혀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죄, 교회의 죄, 그리고 민족의 죄, 이러한 죄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죄의 문제를 복음을 통해서 해결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거기에 우리의 인생이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의 의와 심판과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이 죄 가운데로부터 용서받고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목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어야지만 이러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회복한 후에 생명과 은혜에 넘쳐나게 되면, 그는 자신이 화목하게 하는 도구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화목케 하는 도구로, 어떤 화목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한 인간들을 참회를 통해 화해시키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고,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거기에서 오는 진정한 평화와 생명의 교통을 맛보게 하는 이 일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소명에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 헌금하는 것, 봉사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섬기는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하는 기대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일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에 이 기도를 들었던 2차적인 청취자들이었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그 시대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이 모든 민족의 교회들을 향해서 눈을 들도록 우리에게 시야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죄 사함의 기도를 배우면서 우리들의 죄에 대한 태도가 어떤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죄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그것이 단지 흥밋거리로 지나치고 있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몸인 교회의 상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까? 죄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고 교회가 부패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또 우리들 속에서 그런 죄의 요소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되고 있습니까? 농담거리나 되고 이야기 거리나 되고 있다면 죄에 대한 그런 경박하고 가벼운 생각은 여러분 자신들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개인의 신앙행활 속에서도 분명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죄를 공동체적으로 다루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민족의 죄를 위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우리 민족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이 죄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백성들이 모두 복음의 빛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 백성들이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정결케 하실 수 있는 무궁무진한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저는 엊그제 신문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화학무기가 5천 톤인데, 맘만 먹고 일시에 터뜨리면 전방의 군인 50퍼센트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결국 이러한 다양한 역사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쉬지 않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들이 정신 차리고 살아라. 내가 너희를 축복해서 이제 이만큼 살게 해 주었는데, 이제 너희들이 나를 기념하고 나를 자랑하지 않는 민족이 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축복 내린 것과 의도가 다르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능력이 없는 민족일진데, 깨울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교회다워지고 진정으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소유하고 있지 아니하면, 이 시대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벼랑을 향해 줄달음질치면서도 그것이 벼랑인 줄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불길 가운데 뛰어들면서도 이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일깨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의와 공평이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자신들 속에서 죄를 두려워하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정결한 교회가 되지 아니하면,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이 시대를 향해 들려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세우신 것은 바로 믿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고 정결케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그리고 세상의 변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장난하는 것처럼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놀이삼아서 신앙생활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취미생활이나 여가선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살고 죽느냐 하는 문제이고, 하나님의 교회가 사느냐 하는 문제이고, 그리고 이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죄가 이런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또 하나의 위로를 발견하는 데, 죄만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의도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에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는 이런 것들을 잘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문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것은 죄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열 사람의 의인만 있었어도 그 의가 미치는 보편적인 영향 때문에 그 도성이 살 수 있으리라고 하는 가망성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제목 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가볍게 생각하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반드시 하나님의 용서와 사하심을 얻고 잃어버린 생명과 그리고 은혜를 회복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을 위한 주님의 기도가 가르쳐 주시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16.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녹취자 : 조원정
주기도문 강해Ⅱ 18 (1997.9.7 주일오전)
지난주에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하나님을 향한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앞에 담보적인 조건 구조를 놓고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구절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함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담보적인 기도입니다. 즉, 이 문장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을 해 보면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이시여 비오니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 기도야 말로 가장 두려운 기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우선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죄 용서를 받는 문제이다. 누구도 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롭게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횡적인 관계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도 서로 범죄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담보적인 그 앞의 구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함 같이 이렇게 말한 것은 결국은 인간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서만 아니라 인간을 향해서도 죄를 짓고 또 죄 가운데서 얽매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사람들 사이에서의 죄에 대한 생각도 일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착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빛이 그의 삶과 마음을 비추고 나면 이웃을 향해서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악한 삶이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이웃과 사람들을 향해서도 충분히 범죄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함 같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때 자기의 처자와 형제와 부모를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로서 어디로 가는 곳 없이 정처 없는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그 분을 쫒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이렇게 기도하라 즉,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조차도 이 세상에 있는 이웃을 향해서 범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죄짓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그 선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들을 더 많이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해서 죄로 깊이 물들었고 죄로 물든 이 심령이 삶 자체도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고 타락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고통을 만들어 가는 그런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조차도 이런 당부를 하셨다면 하물며 사도들처럼 헌신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은 이웃을 향해서 얼마나 쉽게 범죄하고 죄 지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관계가 깨트려 지고 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계에서도 죄를 짓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결국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교훈을 들은 사람들은 배와 그물을 모두 버려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주님의 나라에 임할 때에 서로 예수 그리스도 좌우편에 앉기로 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질시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끊임없는 비교의식 속에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더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높이기 위해서 애썼던 죄로부터 결별할 수 없는 인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완전한 공동체를 찾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우리는 종종 전도를 하거나 대화를 하다가 믿음을 버린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가게 되는 동기가 불완전한 교회 혹은 죄 있는 교회 혹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죄악과 결점과 약점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그만두거나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다 더 완전한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교회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 거듭나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서로를 향하여 범죄하고 죄와 결별할 수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 목사도 어느 날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당신이 교회의 부패상을 치열하고 실란하게 비판하면서 자기가 이런 교회에 다녀서는 신앙이 자라기는커녕 있는 신앙도 잃어버릴 것 같다고 말하면서 목사님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까? 좀 좋은 교회 없습니까? 그런 교회를 나를 좀 소개 시켜 주십시오. 말에 능한 찰스 스펄전 목사는 그에게 정곡을 찌르는 반문을 했습니다. 그런 교회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형제가 그렇습니다.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제는 제발 그 교회를 가지 마십시오. 아 왜 그렇습니까? 목사님. 당신이 들어가는 즉시 그 교회가 불완전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그런 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교회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 들어가면 완전한 교회에 있던 사람들이 그 사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어하는 것에 대한 왜곡된 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늘 어찌하든지 하나님께로 늘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과 합일된 삶을 살고 싶고 좋으신 주님을 향해서 어찌하든지 사랑을 고백하고 싶고 그러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수많은 요소와 더불어 싸우기를 원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마음을 바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이 올 때 고통을 겪지만은 그것을 통해서 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었던 많은 곳에서 배신을 당하면 당할수록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자기의 진정한 보호자시며 이 세상에 진정으로 신뢰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이시기 때문에 변천하는 세상과 쉽게 변하는 인간들에게 소망을 두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허탄한 것이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인지를 오히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할수록 순결해집니다. 낙심할수록 더 정결해집니다. 교회에 실망할수록 썩어가는 교회위에 홀로 존귀하신 하나님 한 분을 앙망하게 되는 이러한 신앙으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대신에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고 어떡하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마음을 바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실망시키거나 혹은 범죄 하거나 잘못되어가는 어떤 것들을 바라볼 때 그들은 자신 속에 있는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변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범죄를 바라보고 혹은 자기에게 사람들이 범죄를 하거나 혹은 옳지 않은 것들을 볼 때에 그것을 기화로 삼아서 아주 쉽게 신앙으로 멀어지고 뒤로 물러갈 수 있는 합리적인 구실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합리적이고 다양한 이유들을 들으면서 동정을 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물러나게 한 것이 단지 사람이나 혹은 인간적인 사건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정신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행동 심지어는 우리의 모든 행위의 동기까지도 낱낱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앞에서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과 뜻과 행동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있지도 않거니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주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완전한 교회가 있다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겠습니까? 그리워서 그리워서 그 교회를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고 타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인간들과의 관계를 접어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난 주일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지체들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참회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일주일 동안 살았던 실패와 반복되는 범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고 주일날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새롭고 정결한 삶 보다 더 위엣 것을 찾고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신 우리 주님을 보다 더 깊이 고백하고 삶 자체가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에 고백이 되기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을 지나고 다시 돌아오면 우리는 우리의 결심대로 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 주일날 참회하였던 기도의 제목들이 오늘도 여전히 참회할 제목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시 돌아보면서 또다시 지난주와 같은 결심을 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행하기 싫기 때문에 못할 때도 있지만 마음이 그렇게 원하지만 믿음이 약하여 그 일을 못 행하며 살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매일 매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지난주에 용서 받았는데도 오늘 또 용서를 구하게 만듭니다. 아침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입었는데도 저녁때 다시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힘입기를 원하는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든지 그 인간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주님이 이웃에 대해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 말하면서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불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가 자기를 낮추고 아버지 앞에 끊임없이 정결함을 입어도 늘 불결한 자신을 발견하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불결과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죄악이 인간을 향하여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수 없는 것 같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향하여 범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기에든지 이웃을 향하여 고통을 주는 삶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도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당연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지을 수밖에 없고 이 죄를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야 된다. 누가 나보고 나의 죄를 지적하거나 성경이 지적하면 어차피 인간인데 이런 식으로 죄에 대해서 합리화 하거나 정당시 하자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끊임없이 죄짓지 않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죄로부터 결별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이웃을 향한 죄는 이웃의 마음에 고통과 아픔과 손해를 가져옵니다. 평범한 경우에 그런 이웃으로부터 이웃의 범죄로 말미암아 손해와 고통을 본 사람들 마음속에는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향한 미움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히랍어 성경에서 복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범죄 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고 한 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 어떤 의미에서는 스치고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죄지을 가능성이 있고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결코 우리 혼자 하는 일들이 아니라 서로 서로 어떤 때는 내가 사람들에게 범죄 해서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피해를 받은 그 사람들이 가해자가 되어서 이웃에게 지체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한편의 가해자 한편에 서 있는 사람 혹은 피해자 한편에 서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서 서로 범죄하고 상처를 내고 살아가는 것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비결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임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결코 어떤 물리적인 수단이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 교회가 완전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의로운 삶들을 가르치고 이웃을 향한 예절들을 가르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그런 것들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인간들 자신이 그 교육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주거나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완전하게 거룩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범죄하고 서로에게 죄라는 빚을 주고 맙니다.
이런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이외에 누가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만이 죄를 진정으로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권세를 가지신 분인데 어떻게 인간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오늘 성경을 토대로 보면 분명히 인간에게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단, 이 죄는 인간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범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죄 지은 것, 그것에 대해서 피해를 당한 사람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죄를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범죄 할 때 한편에서 보면 우리가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들이 부여 받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사하여 준 것 같이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이미 용서하오니 아버지여 우리의 죄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는데 찾아가서 괜찮다고 하는 그런 권세는 없는 것입니다. 피해를 본 사람이 자기의 경우에 자신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권세로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러한 권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권세를 주시고 자기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범죄하고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 그 이웃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바르게 잘 사용을 하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거나 땅에 깊이 묻어 둔다면 분명히 우리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는 주님의 책망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위해서도 이웃을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의 돌멩이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유능하게 충만한 성령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증거 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돌팔매질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돌팔매에 맞아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 죄는 스데반이 용서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아픔 같은 것은 용서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죽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주는 시간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데반을 향해 던진 돌멩이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돌멩이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배교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설교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이 광경에 대해서 스데반이 모두 자신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스데반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을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하나님 앞에 그들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아버지 앞에 중보기도 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기도에 배운 것입니다. 그 정신을 물려받았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 우리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죄뿐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죄 하나님 이외에는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간구해서 우리들이 사랑하는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죄 사함과 인간들이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는 사람들 사이에 주어지는 죄 사함이 가득해서 갈등과 고통이 평화로 바뀌고 대립과 반목이 샬롬으로 바뀌게 되는 그런 세상을 이 땅에 창조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예수 믿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미움이 살인죄에 맞먹는 살인죄와 같은 극도의 죄악으로 하나님 앞에 계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것처럼 미움의 감정도 우리의 폐부 깊은 곳에 파고들어서 우리의 인격과 모든 삶을 지배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다 탕감하오니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담보적인 기도입니다. 만약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과 회개하는 자신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화해의 감격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담보로 못 박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부담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너희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화해하면서 살아가야할 필요를 느낄 때마다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야할 의무가 있는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느 것이 담보적인 기도입니까? 주님 우리가 주님께 헌금한 것처럼 주님도 우리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범죄 한 자들에게나 심지어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전혀 기도하지 않는 자들에게나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고 매일 만나를 내려 주셔서 그들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십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만 말씀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도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자기의 죄 밖에 없는 지난날들을 보게 하시고 허물과 죄 밖에 없는 지난 모든 날들을 하나님 앞에 발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결단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극도로 극악한 범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에 감격해서 제외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유독 이 기도만큼은 조건부의 기도로 우리가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때 우리는 순간순간 이 기도 앞에서 커다란 두려움과 커다란 의무를 느끼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얼마나 크고 놀라운 영향이 미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동일하게 나로부터 말미암는 죄 사함의 감격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얼마 안 되는 목회생활을 통해서 이렇게 돌아보면 마음에 쉽게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하고 한번 미워하면 성격적으로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넘치는 하나님의 사죄의 감격을 수시로 맛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못 봤습니다. 사죄의 감격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여러분 느껴지십니까? 죄를 짓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육신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 같지만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죄의 힘에 억압을 당하며 한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죄 가운데에서 흐느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고 이전에 기쁨으로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던 모든 일들이 차갑고 무거운 의무감으로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신의 말할 수 없는 보람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의 휴식을 빼앗아 가고 나의 정신적인 수고를 빼앗아 가고 내가 그 시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아니하면 즐겁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앗아간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죄 사함의 참된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 때 인간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살아갈 때 닥치는 더 커다란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맛보는 깊은 갈등과 고통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맛보게 되는 깊은 갈등과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죄 사함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죄는 계속 쌓입니다.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더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점점 더 피합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지만 나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이전에 나에게 그런 놀라운 사랑의 빛을 비춰 주셨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속에서 불타듯 타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주님이 오라고 부르시면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이러한 불가의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움에 차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죄 사함의 확신이 없고 죄 가운데 드리워진 마음의 그늘로 말미암아서 다시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서기를 두려워해서 도망치려고 하는 이 마음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얻지 못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는 감격적인 죄 사함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시간은 그에게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죄의 놀라운 확신이 밀려오는 순간 비유를 하자면 커다란 죄의 둑이 산과 산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계곡 사이를 거기에는 온갖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댐이 무너지고 붕괴되면서 갇혔던 어마어마한 물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쏟아진 그 물들이 온 산하와 대지를 적시면서 골고루 물길을 따라 흘러갈 때 갈라지고 건조하고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그 들에 풀이 돋아나고 풀이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고 곡식들이 자라고 벌레들이 날아들고 새들이 깃드는 아름다운 산하로 변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았던 그 놀라운 순간들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죄 가운데 형벌 받을 길 밖에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은혜로 용서해주실 때 잃어버린 기쁨이 회복되고 다시금 삶의 목표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하고 다시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참되고 영원한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고 한없이 두려웠던 하나님은 달콤한 하나님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거룩하고 진실한 소원들이 우리의 삶을 에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른 땅과 같이 건조하고 풀 한포기 나지 않고 새들도 날아와서 깃들 곳이 없는 말라비틀어진 가시와 엉겅퀴만이 가득했던 그 땅에 죄 사함의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생명과 은혜가 깃들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꽃들이 피어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주기도문을 따라서 매일 매일 살아가려고 하는 삶이 얼마나 선택받은 삶이고 얼마나 복된 삶이고 비록 협착한 길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험난한 시련과 난관 밖에는 우리 앞에 당한 것이 없어도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놀라운 기쁨과 은혜가 우리에게 인생을 주장하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기쁘게 노래하며 좁은 길을 걸을 수 있고 멸망에 이르는 그 넓은 길을 걸어가는 안일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대신 하나님을 위해서 시험을 파도를 헤치고 고난의 물줄기를 건너서 하나님의 구원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그 일에 보람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이 모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의 죄 사함의 놀라운 은혜와 감격에서 시작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감격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배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느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죄 사함의 놀라운 경험을 동반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놀라운 은혜가 주어질 때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고 살아나는 놀라운 기쁨과 변화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만약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아버지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을 텐데 그건 너희들이 기도해도 용서해 주지 않겠지만 그러나 너희는 아예 그렇게 기도를 하라. 왜?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주님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매일 매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저주를 맹세로 단 서원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음의 죄를 짓거나 혹은 교회를 빠지거나 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범죄 하거나 이런 것들만 가지고 굉장히 커다란 범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몸 밖에서 일어나는 범죄보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교묘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고사시키고 우리의 영적인 삶을 비참하게 메마르게 하는지 사람들은 너무나 모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참 균형 잡히고 잘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신앙생활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는 회칠한 무덤이요 썩은 뼈들만 가득한 외관은 멀쩡한 그런 외식하는 무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영성도 깃들 수가 없습니다. 잠시 뭐가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곧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정직한 자를 향하시고 얼굴은 의로운 자를 향하시며 그 마음은 진실한 자를 찾으십니다. 진실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들과 더불어 마음이 통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학교에 있었던 것이 목회에 도움이 될지 아니면 손해가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학교에서 있으면서 보면 수없이 학생들을 만납니다.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불과 십분도 안 걸립니다. 가만히 들어 보면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다 좋은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의 행동을 본 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가 하고 있는 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내 마음에 까지 와서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온 그 말은 사람의 마음까지 와 닿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좋은 얘기를 해도 그 이야기가 목 위에서 나오는 이야기인지 배 밑 깊은 곳에서 나오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이 대개 허합니다. 늘 좋은 것을 말하고 좋은 것에 대해 감격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늘 생각에 그치고 자신의 삶은 그렇게 진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진실을 이야기 할 때에는 마음속에서 깊은 반발과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더불어서 교통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진실하고도 아주 깨끗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때로는 멀쩡하고도 가식된 사람보다는 더러우면서도 진실한 사람이 훨씬 더 하나님 앞에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회칠하려고 하고 위장하려고 하고 사람들 앞에 과시하려고 하고 그러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만족을 거의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진실해지지 않는 대가로 사람들로부터 구걸하는 그 만족이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만족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는 자신의 심령에 빈 잔이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마음속에 있는 깊은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모함 주님 자신이 오셔서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온전히 만족을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최선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늘 고백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 기도를 하라고 주님이 일러 주셨을 때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죄 용서를 못하는 우리들을 정죄할 수 있는 빌미를 찾아내서 이 조건적이고 서원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 속에서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고 죄 사함 속에서 생명의 놀라운 충만함을 받고 죄 사함 속에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수립하며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그런 관계로 나아가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원하셨고 너무나 바라셨기 때문에 아들을 통해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얘들아 너희가 나한테 죄 사함을 힘입지 않고는 하루라도 살아갈 수 있겠니? 너희의 육신은 일용할 양식으로 사나 너희의 영혼은 나로부터 말미암는 끊임없는 긍휼의 베풀어 주는 죄 사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단다. 그렇지? 아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는 것 같이 너희도 또한 너희에게 죄 지은 자들을 끊임없이 용서해서 너희 공동체 가운데 미움과 반목과 원망이 쓴 뿌리처럼 자라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요 속으로는 미움과 투쟁이 지배하고 사랑과 기쁨이 사라진 악한 나라가 되는 이러한 일들이 없어야 하느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를 고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는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가를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만약에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알 것 같으면 이 죄를 왜 예수님께서 심각하게 우리에게 담보적으로 기도하도록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속에서 예수님께서 미움의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당장 끌고 온 것은 구약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옛 사람에게 이른 바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무슨 얘깁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을 향해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범죄는 무슨 계명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인간들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범죄는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살인이었습니다.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꼭 그것이 옳지 않다 하는 기본적인 합의가 주어진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주의적인 영화나 이런 것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반 하나님적인 사고방식과 사단의 궤계입니다. 모든 인간들 속에는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성품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생명을 죽이는 그 일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러분 가운데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죽일 수 있습니까? 죽여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 죽여 본 적 있습니까? 개도 못 죽였지요? 불가능합니다. 끔찍한 구약의 가장 두드러진 미움의 예를 말씀하시면서 끌어 오신 겁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이미 피 묻은 손 피 묻은 칼들이 즐비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와 놀라운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이 세상의 법은 마음속에 있는 죄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미움의 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범죄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참하게 파괴하고 우리를 밑도 끝도 없는 무기력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깊은 징벌로 우리를 데려간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것이 미움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자기가 그렇게 놀라운 축복들로부터 제외되었음에도 이것이 문제일거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것에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서로 하나님의 백성들 여기서 우리가 우리에게 한 것은 2차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지만 1차적으로는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냐 너희는 그렇게 기도하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하나님이 미움의 문제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움의 문제를 용서하지 않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심하게 다루시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어떤 설교자는 이웃을 비난하는 침 묻은 입술과 살인에 사용되는 피 묻은 칼은 마찬가지다고 했습니다. 침 묻은 입술은 곧 피 묻은 칼이요. 이웃을 향한 미움과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심지어는 자기에게 죄 짓지도 않았는데 여러 가지 다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는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부터 끊어 놓고 우리를 고사시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한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모르고 사고가 나서 사람을 죽인 경우 말고 저는 죽여야지 하고 쫒아가서 죽인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사람이 밥 먹듯 살인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처리를 하면 좋겠습니까? 그는 거기에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입니다. 판사들이 판결을 내릴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러이러하게 살인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이는 본인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한 것이요 또 이 사회로부터 스스로 존재하기를 마다한 것이기에 본인의 이러한 범죄의 정신을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을 영원히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합니다. 달나라로 보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인도로 보내 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깊이 눈을 뜨고 왜 주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를 이렇게 강하게 가르쳐 주고 싶었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가 죄 사함의 감격과 용서의 은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기쁨이 부여해 주는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로 하나님과 우리에게 막혔던 둑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생명과 기쁨과 놀라운 은혜들이 우리의 메마른 삶을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미움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기도를 우리에게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생각을 지금 하고 계십니까?
주기도문 강해Ⅱ 19(1997.9.14 주일오전)
17.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녹취자: 이병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주님이 가르쳐주신 용서의 죄사함의 기도, 그 앞부분에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용서해 달라는 그 말씀을 드리면서 결국,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할지라도 서로에게 죄를 짓는 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씀 드렸고, 또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인간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지 이러한 일에 대한 진정한 해결은 서로가 서로를 깊이 용서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모습을 이루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기도의 성격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용서하는 삶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공동체를 염두에 두시면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원래 이 신약 성경은 원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미 탕감하여 주었사오니, 우리의 죄도 탕감하여 주옵소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미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용서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한번 용서해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오늘 여기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한 번의 죄사함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죄와 결별하면서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께 부터 내리는 죄사함의 은혜와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매일 죄사함을 입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눌려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여러분이 범죄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가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어두움이 깃들고,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말미암았든지 그 범죄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고통이 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셔서 우리를 그 죄로 말미암는 영혼의 억눌림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한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기도는 우리에게 매우 두려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이미 용서하였사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말하면,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무서운 담보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다시 한 번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용서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사함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이 얼마나 떨어질 수 없겠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우리는 일용할 죄사함을 하나님 앞에 늘 구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일용할 죄사함을 사하여 주셔야 우리의 삶이 진정한 화평을 누리고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듯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도 우리의 죄사함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하나님 앞에 구하고, 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같은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권세를 하나님께로 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죄짓지 않는 자들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없지만, 손해나 고통이나 그 아픔이 그것을 입은 당사자가 우리일 경우에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 있는 그런 권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해당초서부터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무리 거룩케 되려고 노력을 하고 온전하게 되려고 노력을 해도, 그렇게 온전하게 되고,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서 죄사함 조차 필요 없는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살아가면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게 뭐냐?” 혹은,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그게 뭐냐?”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완전한 삶을 꿈꾸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서 주님처럼 살아가고 싶지만, 실제로 제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큼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닮고자 끝까지 애쓰지만 결국 주님을 온전하게 닮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은 잘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주님을 닮고 거룩해 지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속에 있는 인간의 부패한 성품과 죄악된 심령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는 것처럼 형제들을 향해서 범죄하고, 자매들을 향해서 범죄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때에 진정한 해결은 무엇입니까? 서로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용서만 해주거나, 어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받는 처지에 있는 그런 절대적인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하고, 어떤 때는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이런 처지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하는 일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렇게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들이 마땅히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바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으면서도 그러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하는데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고통을 당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커다란 아픔을 당했을 때, 그때 인간이 당한 그 아픔은 둘 중 하나 밖에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스스로 그 모든 아픔과 상처로 부터 벗어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준 사람을 미워함으로써 그 고통을 잊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름을 계속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상처를 받아서 생겨나는 고통에 대한 마취제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나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어서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받았을 때에 자기에게 그런 상처를 준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가 자기에게 입힌 고통을 기억하면서,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받은 피해로 말미암는 고통을 다소간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앞으로 당신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면서 살아가시다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실 지를 보여주실 것이었고, 또 부분적으로 일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용서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 주님이 아무런 희생과 고통 없이 인간을 사유할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고통은 시작됐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범죄를 용서하고, 진정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 받은 인간이 화목한 관계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당신의 아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느끼셔야 했습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시고, 만유의 주재이신 그 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으시고, 피조물 중에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취급을 당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온갖 아픔과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범죄한 인간을 용서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이 용서가 하나님 자신의 많은 아픔과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 주셔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는 말 한마디로 창조하셨지만,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금가고 깨뜨려진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말 한마디로 너희의 죄를 사할 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도 말 한마디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는 몸소 용서를 위한 선도권을 쥐고,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조차 하지 않는 이 세상의 하나님을 등진 인간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서 누추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서 고난과 결핍을 모두 당하시고, 자기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시며 사신 것으로도 우리의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의 역사를 일으키고, 그것에 동참하며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 속에서도 용서가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바로 그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모두 깨뜨리고 난 후에 비로소,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용서는 마치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 보다 훨씬 더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주위에 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 하나 때문에 인생을 완전히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눈을 부릅뜨고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용서가 얼마가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정말 살을 에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결론을 우리가 도달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역설적으로 강한 자기사랑입니다. 자기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용서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누군가로부터 커다란 고통을 입고, 손해를 입어서 여러분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 고통 받는 속에서 그렇게 아픔을 당하는 사람의 유일한 희망은 자기의 상처가 아플 적마다 자기에게 죄지은 자의 이름을 떠 올리면서 그를 미워하는 것이 그 미움과 적개심은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경감시켜줍니다. ‘용서하라니! 용서하고 나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 아픈 것은 남아 있는데..’ 이제 누군가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용서해 버리고 나면, 순간순간 밀려왔던 그 아픔과 많은 고통에 대해서 이제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까?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간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용서하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향한 감동 없이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격,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맛보는 화해의 즐거움들을 날마다 경험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고, 또 역설적으로 우리들이 그렇게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처럼 주님과의 진정한 화해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떠한 많은 죄로부터 사함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용서를 위해서도 우리는 신앙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일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의무에 얽매이거나, 혹은 무엇인가 자기를 버려서 열심히 어떤 일에 종사하는 것,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말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 그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실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우리는 아주 누추하고 추악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죄사함의 용서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고, 매 순간 순간 지체들의 호의 깊은 용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죄인들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죄인들은 아직 까지 주 앞에 나와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용서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생각을 가지고 어둠속에 있고,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죄인들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용서를 못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있어서 가장 커다란 것으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주제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나는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삶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때, 성경을 펴면 성경은 오로지 하나만 묻습니다. 용서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 주셨습니까? “아니, 나는 용서받지 못했지만”하면, 성경은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 없이 이 세상에 살다가 죽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짐승 하나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짐승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도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가능해졌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현재적으로 자기가 용서 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은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진정으로 용서해주셔서 화목될 수 없는 관계를 진정한 화목으로 이끄셔서 하나님과 생명과 은혜를 누리는 그런 용서받은 죄인의 관계가 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를 찢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기억하시고, 아들의 그 갸륵한 믿음과 헌신과 희생을 보고 우리를 용서해 주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투자하시고 스스로 아픔을 지불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십시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린 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불평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원망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모두 사라지고, 왠지 살아가는 것이 가득 먼지가 쌓인 신작로를 걸어가는 것처럼 피곤하고 목마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서면, 이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 되어서 주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머물러 있던 그런 하나님을 완전히 등진 인생들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가 비로소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될 줄 알고 버리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적당히 이 세상을 경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지나가는 세상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하는 사상에 우리가 젖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유혹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심지어 오늘의 이 주제처럼 사람을 용서하며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는 세상이고,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으나, 잠시 이 세상이 지나고 믿음으로 살고나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위로와 안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 이 세상에 공정하고, 합당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하고 잘못된 일이 일어나도 이것이 곧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믿으면서, 우리들이 오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미움의 문제를 생각할 때도 십자가 앞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불하셨던 그 희생을 보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 진정한 죄의 용서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는 더 이상 지불할 수 없는 가장 큰 값을 지불하시고야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깊이 체험할 때, 우리들도 그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주님을 위해서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기 원한다면, 그 십자가의 고난이 가장 잘 드러나는 용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많은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곧 바로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지불하셨던 주님의 마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주님이 많은 대가를 지불하신 것처럼, 주님이 오늘 하나님이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을 용서할 때 고통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용서할 때 아픔을 느낍니다.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이 죄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용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수 있고, 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이렇게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살아가는데 많은 비용이 들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는 더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용서하면서 살아가는데 많은 비용이 들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는 더 많은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는 그곳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담보적인 기도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면, 주님도 나의 죄를 사하지 마옵소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기도를 올리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문제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됐느냐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의 문제는 반드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고,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왜 하나님이 저런 사람들을 내 곁에 보내셨으며, 또 지금도 내 곁에 남겨두시는 것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인이 왜 일어납니까? 살인은 결국 이 미움의 문제와 관련된 살인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 아주 극도의 나타남이 바로 살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인은 극도의 자기 사랑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너는 죽어줘야 되겠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미움과 살인이 맥을 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결국 미워하는 마음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그 마음은 곧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상황과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살인이 억제되고 있을 뿐이지, 마음속에는 이미 사람을 죽이기 위한 피 묻은 칼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칼을 품고 어떻게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우리들이 누릴 수 있겠으며, 그 칼을 품고서야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로 부터 오는 진정한 은혜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위에 한번 여러분 잘 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그 기질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범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주 쉽게 잊어버리고 대수롭게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정한 사유하심의 은총 위에 사유하심의 은혜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실 때에 어떠한 감격이 있었는지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유하심의 감격을 우린 얼마나 자주 누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실 때, 그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감격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지 못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는 이 신앙생활이 결국 사단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항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미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려워하거나 겁내 하시지 않습니다. 결국 신앙의 참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왜 아멘을 안 합니까?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이 무슨 나쁜 일을 행하셨습니까?
(찬송)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오직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일 이외에는 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맛보고, 이 세상이 끝난 후에 맛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복, 진정한 사랑,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 감격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축복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어디에서 옵니까? 사랑이 어디에서 옵니까?
(예화) 제가 한 35세 쯤 됐을 때 일입니다. 그때 한번 우연히 고난 주간에 70까지 산다면, 반 토막쯤 되는 삶을 주욱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해서 35세가 되도록 세상을 살 때까지 정말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이 없고, 또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내 자신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남은 35년의 세월이 지나온 35년과 같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하나님과 나에게 즐거움이 되겠는가?’ 그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면서도 크게 감격했던 것은 그렇게 우울하고 고통스럽고 사람들로부터 상처도 많이 받은 그런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면서 그래도 인생에 있어서 행복한 때도 있었지 않은가하고 생각해보면, 그 유일한 행복이 언제였느냐 하면, 주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가 받고 있는 그 동안에는 그래도 내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은 정말 축축하고 그리고 칙칙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날이 있고 즐거운 날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 만난 이후의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죄사함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과 진정한 자유를 얻고 나서야 하나님의 강물과 같이 넘치는 사랑도 깨달았습니다. 갈 길을 모를 때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내손을 이끌어 그릇된 길을 버리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도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강퍅해서 몰랐지만, 하나님이 어떤 때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으리만치 주님은 세밀하게 내 인생에 간섭하셔서 나의 걸어갈 길과 내가 궁핍하고 있는 것과 고통하고 있는 것과 내 마음 속에 깊이 박힌 가시들까지도 헤아려서 섬세한 손끝으로 뽑아내시고, 나의 마음과 모든 성격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기초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던 하나님의 태도를 이제는 눈물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신 마음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그릇된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 속에 진노가 쌓였고, 분노가 쌓였지만 용서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신 다음에는 그릇된 길로 걸어갈 때, 주님의 마음은 안타까운 눈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똑 같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쌓여가도 우리가 그릇된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은 참으시고, 심지어 도저히 하나님의 참으실 수 없으실 때는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때리시면서도 주님의 마음이 눈물을 흘리며 때리시면서도 어루만지시며 우리를 이끄시고 돌이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함에 대한 경험 아닙니까? 주님은 이처럼 우리를 한번만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서하고 당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이끄시고 더 새롭게 이끄시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냐고 묻거든, 우리는 단지 주 앞에 용서받은 죄인들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셨으나 탕자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여! 나는 하늘 아버지께 범죄하였사오니,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아버지의 집의 품꾼중의 하나로 여겨주옵소서!’ 고백했던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주셔도,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주님이 용서해 주신 죄인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짊어지고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으나, 우리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주님!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는 이 세상을 주님처럼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가 용서해줄 수 있는 죄는 우리가 용서해 주고, 우리가 용서가 용서해 줄 수 없고, 하나님만 용서해 줄 수 있는 죄는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용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를 보면, 어떤 용서가 주님이 바라시는 용서의 궁극적인 상태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냥 죄를 지었지만 없었던 일로 쳐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하는 용서라는 의미와 우리 복음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서라고 하는 의미는 같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용서해준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와 통하느냐하면, ‘복수하지 않겠다.’ 이것이 곧 용서입니다. ‘누가 나에게 그런 나쁜 일을 했지!’ ‘잘못했습니다.’ ‘됐어!’ ‘고만해. 내 더 이상 얘기 안하겠어. 내 용서한다. 어! 용서한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라! 용서할 테니까? 다시 그런 식으로 하지 마라.’하고 돌아섭니다. 그것으로서 관계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누가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용서한다 이 말은 복수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죄 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형벌 받아야 할 죄인들인 것을 보고 용서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내가 죄인입니다.’ ‘알았어. 내가 용서한다. 너희들을 다시 용서한다. 그리고 죄지은 자들은 궁극적으로 보내는 그 지옥에 너희를 들여보내지 않겠다.’ ‘주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알았어. 더 이상 이야기 하지마! 이것으로 끝이야, 내가 너를 용서할 테니까? 너 그래! 용서 받았다.’ 그리고 도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을 때 이 용서는 관계의 회복, 하나님의 진노가 호의로 바뀌는 것, 거기에서 나아가서 원수 됐던 관계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바뀌는 것을 모두 포함한 용서가 아니면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의 죗값을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죄함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두 번째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오셔서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는 비밀들을 배우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고나면,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지거나 죄의 무거운 짐을 확 벗어 버리고 가볍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받고 나면 즉시 밀려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죄 용서에 이어서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한 과정이었다고는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었던 그 용서도 이런 의미의 용서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에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었을 때, ‘됐어. 더 이상 내가 묻지 않겠어. 내가 용서했어.’ 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여러분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아마 하나님 앞에서 그런 식의 하나님의 용서 밖에는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범죄하고 우리의 심령이 무거워지게 되었을 때, 주님이 우리를 ‘그래! 너희가 죄 지었지만, 내가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것 가지고 우리가 만족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죄를 고백하고,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은 단지 죄를 탕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되찾고, 예전처럼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와서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용서라고 하는 대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뒤따라서 화해와 사랑과 감격과 기쁨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단지 용서의 대문이 열리고, 후속으로 일어나는 모든 용서의 결과들이 밀려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공동체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범죄하고 아프게 하였을 때, 그를 진정으로 용서해준다고 하는 것은 다시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아름다운 지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무슨 용서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그러한 막힘과 원망과 미움은 자신들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해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도 우리를 다루시지만 연대적으로도 우리를 다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여러분이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마음에 용서하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으로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들의 범죄와는 상관이 없는 많은 지체들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범죄할 뿐 아니라, 또 용서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그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와는 아무 관계없는 지체들에게 까지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주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용서는 이미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으로서의 범죄이고, 용서하지 못하는 아픔과 해악은 개인의 영혼에 고통을 가져 올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대한 고통과 아픔을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매우 크다는 사실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용서하시는지 보십시오. 주님의 용서는 우선 첫째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은 단지 그 십자가가 자기의 사명이기 때문에 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그 일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토록 성취하고 싶으셨던 그 일은 죄인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진심으로 그들을 죄 가운데서 구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에는 먼저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용서하는 것이 단지 몸과 마음에 걸리던 일들을 해치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그것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하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채찍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둘 중 하나는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는 죽어라고 기도 안 되든지, 아니면 용서할 마음이 생기면서 기도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오든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용서할 마음을 달라고 계속 기도하면서 기도가 안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이 작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주님이 내가 그렇게 잘 되던 모든 기도를 다 앗아갈 버릴 정도로 그 하나님께 그렇게 고통을 안겨드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아프게 해드리는 죄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진심으로 용서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기도가 잘 되면, 그 기도의 힘으로 가서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는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빌 때, 왕이 그 하인들에게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면, ‘괜찮다.’ 여러분과 저는 그런 식의 뭔가 폼 나는 용서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이 될 때, 용서하지 못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께 죄지은 사람이 얼마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감화를 입고 와서 ‘정말 제가 형제께 너무나 잘못했습니다. 자매! 내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용서를 빌면, 폼 나게 ’괜찮아‘ 이런 용서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섬기는 것 없이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범죄한 사람은 선도권을 지니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선도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거나 사과하지도 않았는데도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상처 받으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신 분은 그분 이셨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입으신 그분이 스스로 선도권을 쥐고 죄인들 향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찬이 개신교에서 하는 성찬이 그렇게 안하는 교회도 있습니다만, 성찬이 카톨릭하고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나와서 성찬을 먹는 것과 성찬을 들고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단순히 편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후자가 복음적이라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있는 그곳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찢으신 그 몸을 보내주십니다. 찾아가셔서 용서가 필요한 자들에게 용서를 그리고 자유가 필요한 자들에게 자유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사람들이 선도권을 가져야 됩니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하고, 또 용서를 빌 수 있어야 한다는 하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하여 완전히 의로우시고 우리는 완전히 악하지만,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서의 문제는 어는 한쪽이 완전히 의롭고, 어는 한쪽이 완전히 불의한 그런 경우 아주 드뭅니다. 무엇인가 동등한 가치가 제공했을 지라고, 그 와중에서 한 사람의 미움이 미움으로 갚아지고, 그 미움이 더 큰 미움으로 되돌려지고 하는 속에서 서로 범죄하고, 서로 죄들을 지으면서 서로 하나님의 용서와 서로간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더러워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이런 것들을 종식시키는 진심어린 용서였고, 완전한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용서해 주신 것은 결국 사랑으로 인을 치는 그러한 용서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다리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감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가슴에 새기면서 주님의 그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은 오늘 우리들이 맛보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실한 사랑이 바로 그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베푸신 은혜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매우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어는 집회를 갔는데, 도저히 설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설교하기 힘들고, 올라가니까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온통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났더니, 저는 이제 그렇게 말했는데, 자기네끼리 모여서 대체 무엇 때문이냐 이야기를 하다가 기도실에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사람들 속에서 서로 지도자들끼리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고 나니까, 그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놀라운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 용서하심으로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되기를 너무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이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거든, 그 사람과 깊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관계로 까지 새롭게 회복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면서 자신을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것은 이제 우리의 생명, 우리의 육신, 우리의 소유,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살아야 될 인생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보답하는 비결은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서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원망과 한과 미움이 서려서 그 고통 속에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갈 수 없는 그 상황에 그런 자리에 여러분이 서서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으로 화해를 주고 하나님의 관계에 막힘이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를 주는 그런 도구들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모든 복의 근원이 되는 비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한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안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해결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 아픔과 한 속에서 또 다시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 곁에 진실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자기가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용서의 아픔보다 더 큰 놀라운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 강해 Ⅱ 19 (1997.9.14 주일오전)
18.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녹취자: 백지영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옵소서라는 다섯 번째 기도를 네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로서는 마지막 여섯 번째 기도인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도 굳이 둘로 나눈다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와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윗부분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육신을 위한 기도이고 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영혼의 생존을 위한 기도라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영혼과 육체 그 모두의 생명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우리의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또 우리의 영혼의 안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요, 꼭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야만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생활 그리고 평화로운 인생살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이 크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여러 가지 고통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때때로 깨닫습니다. 모든 것이 남이 보기에 부족함이 없어도 오직 한 가지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한가지의 고통의 원인이 주어지면 그 사람의 인생의 전체의 모든 장점과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이 그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도 역시 그래서 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건강하고 하나님 앞에 화목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가 주님 앞에 응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한 이 기도를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고 하는 데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를 처음 부르실 때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그 주님이 동일하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주님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지만 주님 자신도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르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모두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다 따라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기도가 그렇지만 특별히 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는 신앙의 수준과는 상관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드려야 할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에는 내가 이미 성숙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아무리 신앙의 많은 경험을 쌓고 우리의 영성을 갈고 연마한다할지라도 우리는 죄와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우리 자신 속에 일어나는 죄와의 싸움 때문에 상심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심령이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처럼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세상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붙들어주실 그때에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굳건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만 이 시험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순식간이라도 시험에 빠져서 깊은 영혼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이 기도를 영원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기도제목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헌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의 경력을 쌓으면서 살았는가 하고는 상관이 없고 더더욱 그가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떠한 인생을 살려고 계획을 하는가 와는 상관이 없이 이 시험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깨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라면 그러면 모든 시험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시험에 질 수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도록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자신에게 시험을 이기라고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줍니다. 그 중에 우리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시험을 당하지만 그러나 시험을 이기게 하는 그 힘 시험을 이기게 하는 궁극적인 능력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헌신된 사람도 시험에 들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도 시험에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생을 다 드리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 시험은 더 집요하게 그를 추격해서 그를 시험에 떨어뜨려서 그 안에 있는 참다운 믿음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앙생활을 모두 훼파하기 위해서 마귀는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이렇게 매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상기해야 될 것은 우리는 매일 매일 시험에 들 정도로 약하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고 그 시험 속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도 속에서 늘 깨닫고 확인하고 의지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를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앙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참으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결국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의미는 점점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와 꼭 같은 것입니다. 전에는 나 혼자 훌륭하게 살 수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기면 잠길수록 나 혼자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어지게 되면 나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저주스러운 것이고 하나님 앞에 심히 죄악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내 멋대로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의 참된 행복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비록 고난과 시련의 파도가 뒤웅 치는 곳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신앙생활,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 나와 동행하고 합일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참다운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그 하나님 자신을 구하게 되는, 이것이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는 점점 바라는 것들이 사라져가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점점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져 갑니다. 주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만 더 깊어지면 주님 자신을 보여주시옵소서, 더 깊어지면 주님 나를 사랑해주시옵소서, 더 깊어지면 주님과 함께 있게 하옵소서, 보다 깊은 사랑으로 보다 더 깊은 하나 됨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마음의 소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영역 속에서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얼마나 진실하게 고백하는가, 그 사람이 바로 주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되고 그 사랑에 녹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위에서 훌륭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상당히 헌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그 인격이 녹아진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주님의 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감격이 없습니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 앞에 자신의 인격이 감동을 받고 감화를 받아서 그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의 기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훌륭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학벌이 없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비천한 영적인 생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몰라도 주님을 훌륭하게 섬기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고, 섬김이라는 말을 몰라도 일평생 살아가는 삶이 주님을 향한 거룩한 섬김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내게 오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성경에 의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도 말로 설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는 이 세상에 살 수 없고 주 없는 세상에 나 홀로 버려두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형통함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곧 고통이요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독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 없이 천국의 길을 홀로 걷기보다는 차라리 주님과 함께 불 가운데 난 지옥의 길을 걸어가겠노라.”
어느 영역에서든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시험의 영역, 그 시험의 영역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켜주실 분, 또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를 건져주실 수 있는 분 그분이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상기시켜주시고 또 상기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만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께 빠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앙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험으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물에 흘러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우리를 시험하게끔 만들어주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점점 식어가고 하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한 사랑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고 진실하고 거기로부터 오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의 인생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적당히 이 세상을 경멸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없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겠으며 주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죄와 동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끔 지켜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만 바라보며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험과 시련 속에서 상처투성이의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입술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해도 중요한 것은 그런 고백하는 신앙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께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회색지대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전쟁에 있어서 중간 지대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 세상을 마음에 두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리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불러주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같은 인생들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마신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고난이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하여 움직이는 동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의 놀라운 축복들을 모두 깨달아 알면서도 전혀 그것에 의해서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람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들어도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이 우러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하며 살고 싶어도 도저히 기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시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험에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것이 우린 인간입니다.
먼 곳에서 보시지 마시고 여러분 주위에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서 한없이 감격하던 사람들이 십년을 갑디까, 20년을 갑디까?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옛날에 하나님이 자기를 죄와 어둠 속에서 불러주시고 짐승과 같은 신앙생활 속에서 빛으로 이끌어주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거나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작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각양 좋은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시험 속에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것을 마음에 담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이 여기서 구별해야 될 것은 시험을 당한다는 것과 시험에 든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 되고 우리가 잘못되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무엇인가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우리들이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적인 시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주시기 위한 시험이지만 파괴적인 시험은 우리에게 축복주시기 위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아니라 이미 그 근원 자체가 자기의 육체요 마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기서 주님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신 이 기도제목은 바로 그분들의 용어대로라면 파괴적인 시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다고 하는 말의 정의는 죄의 유혹에 대해서 부패한 인간의 죄악 된 경향이 영합을 해서 범죄를 하고 악에 흐르게 되도록 빠지는 것, 유혹에 빠지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시험에 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는 것은 반드시 죄이고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범죄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든다고 하는 이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패한 죄 된 성품이 외부적인 유혹과 딱 만난 것입니다. 만나서 그 유혹에 이끌리는 것 그것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범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악하기 때문에 유혹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관심이 없는 것은 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관심이 없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언제나 많은 다수 가운데 하나가 있어도 거기에 시선이 가게끔 마련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다가 인생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 많이 발견하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교회가 스타렉스를 하나 샀지 않습니까? 사기 전서부터 길거리만 나가면 길거리 전체가 스타렉스만 보입니다. 지나면서 우리가 사고 싶은 것이 저것인데.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무 상관도 없고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할 때가 되면 계속 그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있을 때 형제 하나가 아주 고통스럽게 호소를 합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인데 동이 아주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조심해야지요. 특별히 젊은 여인들이. 밤이면 여름이 되니까 문도 활짝 열어놓고 속옷 바람으로 아녀자들이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공부방 유리창을 열면 건너편 집들이 보인답니다. 그것을 보지말자고 해도 창문만 열면 말하자면 젊은 여자들이 내복바람으로 다니는 것을 보면서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생각할 것이 뭐가 있냐고. 하나 나는 알 수 없지만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은 있다고 하니까 심각해서 그게 뭐냐고 그래서 넌 건강하구나 그랬습니다. 젊은 청년이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뭔가 정욕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쉽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죄 된 생각을 하고 구체적으로 거기에 생각이 말려들고 빠져들어 가게 되면 그것은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은 제일 처음에 자기에게 다가왔을 때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고 죄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최초로 유혹이 다가올 때 그때가 가장 이기기 쉬운 때이고, 똑같은 것이 반복되면서 생각이 자리를 잡고 둥지를 틀고 커지면 커질수록 그 다음에는 정말 살을 에는 결단이 없이는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맨 처음 유혹받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유혹을 처음 받을 때 그때 즉시 물리칠 수 있어야지만 유혹은 받지만 시험에 들지 않고 가장 적은 힘으로 유혹을 퇴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시험에 들게 되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시험에 들었을 때 그 시험을 우리의 영혼에 매우 파괴적인 효과들을 가져옵니다. 우선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되면 범죄하게 되고 유혹에 빠져서 범죄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참된 기쁨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모두 앗아가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질 때는 기름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쉽게 빠져들어 가고 그리고 즐거움과 함께 범죄하지만 그 자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맛보았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살을 에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시험에 들어서 깊은 죄에 빠지게 되면 거기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되는 일들이 시험에 빠질 때보다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질 때는 자연스럽게 빠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늘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인간은 저절로 죄 가운데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범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그들을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참 사랑 안에서 매일 매일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단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오늘 죄를 저절로 이기고 승리하는 신앙생활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제 은혜로 충분하지 않고 매일 매일 새롭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시험에 빠져버렸을 때 그렇게 시험에 깊이 빠져버린 속에서 사람들은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죄로 빠져들어 갈 때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게 순식간에 빠져들어 갔는데 벗어나올 때는 그 길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5년 10년 이전에 하나님 앞에 시험을 들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시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늘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의 영혼의 가장 커다란 안전은 시험에 들지 않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시험에 빠졌을 때 그 시험에서 벗어나는 동안에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시험에 빠져서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충분한 고통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깊은 혐오감과 그 죄 속에서 죄가 가져다주었던 즐거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픔과 쓰라림을 맛보면서 유혹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짓는 모든 죄와 잘못을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모두 청산하십니다. 죄 가운데 빠져서 시험에 깊이 들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죄 가운데 깊이 빠져서 시험에 들어 있는 그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 이런 고백을 수없이 입술로 토해놓는 것이 그의 영혼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찬양할 만한 이유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진실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렇게 죄 가운데 깊이 빠졌을 때 벗어나오는 길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벗어나오는 대신 아예 벗어나오기를 포기하고 내가 있는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상태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나는 충분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나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시험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이 시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시험에 든 자들은 시험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것만이 더 큰 범죄를 하지 않는 길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 속에서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보다시피 시험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죄의 유혹이 그치지 않는 한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오고 그리고 유혹이 그치지 않는 한 우리를 시험에 떨어뜨리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바깥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바깥에서 아무리 죄가 우리를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부패한 성품이 없다면 죄와 영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당하신 분이였습니다. 주리셨을 때는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을 당하시기도 하고 혹은 명예의 문제를 가지고 시험을 당하시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도록 유혹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한 번도 한 번도 악에 빠지실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분의 마음속에는 부패한 본성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패한 본성이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면 우리는 그 부패한 본성이 발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 부패한 본성이 발동을 해서 유혹과 손잡으면 우리는 아주 신속하게 시험에 들고 죄 가운데로 빠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까지 싸워야 할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단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고, 시험에 들게끔 만들어주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우리가 그 시험 속에서 범죄에 흐르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급히 우리 자신 속에 일어나고 있는 이 부패한 성품과 죄악 된 심령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부패한 성품 심히 죄 된 성품은 끊임없이 억눌림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 안에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죄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는 일은 끝났습니다. 지배는 끝났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죄의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속에 살아있을 때는 그 죄가 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면 죄는 살아납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는 죄는 묻혀있지만 성령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죄는 다시 고개를 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서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이 주님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철저히 우리 속에 있는 그 부패한 죄들을 누르며 살도록 깨어 있으라고 하는 가르침의 의미와 동일한 것입니다.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활용하면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죄 된 성품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은혜들을 맛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사랑과 은혜를 맛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은혜를 많이 맛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참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행복하고 그리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긴장을 벗어버릴 수 없고 그리고 끊임없이 순간순간 안식을 맛보지만 그러나 그 안식도 영원한 안식은 아닙니다.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고 하늘가는 밝은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속에 근심과 걱정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죄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면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은 죄와 더불어서 싸우면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진정한 안식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은 죄와 싸우는 사람들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고 죄의 유혹이 없고 우리 마음껏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을 사모하며 살아가기를 고대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영원한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시험에 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 시험이라고 하는 의미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단지 다윗과 같이 여인을 보면서 유혹을 받아서 죄에 빠져서 간음죄를 짓고 하는 그런 것만이 꼭 시험에 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뚜렷한 죄로 말미암아서 시험에 드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런 뚜렷한 죄가 아닌데도 신앙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의 활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험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위해서는 단지 어떤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깊은 죄에 빠지는 것만이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생명력 있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진정한 생기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신앙생활이 시험에 든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이런 교회의 모든 신앙적인 형편과 영적인 형편에 대해서 답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시험에 들고 하나님 앞에 예전과 같이 생기 있고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못하면서도 뚜렷한 죄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시험은 반드시 특정한 몇 가지 죄에 빠져서 넘어져서 파괴된 것만이 시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거룩한 뜻을 분별하고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지 못하는 깨어있지 못한 모든 삶이 시험에 든 삶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험에 든 삶을 위해서는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를 보아도 살아 있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교회들 아닙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할 때 감격하고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을 때 마음이 뛰고 그리고 죄악 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말할 때 두려워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거시는 기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한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더 이상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은 무엇을 먹고 내일은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 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인생을 즐겁게 살고 쾌활하게 살고 그리고 즐거움 속에서 쾌락을 얻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또 입술로 주님의 사랑이 놀랍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교회생활을 통해서 주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실제 마음과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병들어 있는 상태요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들이 기쁘고 감격스럽고 즐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사람들이 그저 격려를 해서 만들어 낸 즐거움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어제 잡지가 9월에 새로 나왔는데 그 잡지의 토픽(topic)이 무소유 목회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왜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이 살아가는 삶 그렇게 빈손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약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흉내를 낼 수 있는데 그런 삶을 흉내 낼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흉내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가득히 채우는 즐거움과 기쁨이 하늘의 것으로 자기를 부요케 하고 있을 때에만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습니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하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이전에 자기가 세상에서 자랑하던 것들을 하찮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사랑을 바치고 주님을 사랑할 때 맛보는 그 즐거움과 은혜가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내가 오늘 느끼고 감격하는 사람들만이 이전의 즐거움을 느끼던 것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들이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있는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진정한 기쁨이 우리 속에 있을 때 그 즐거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확증되어질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닌 것들은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예민함과 그리고 주님의 뜻이라면 벌벌 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을 잃어버린 모든 냉담한 삶 냉담한 마음이 곧 시험에 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시험은 다양한 계기 다양한 동기에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고 환경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이나 여러 가지 다양한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시험의 목표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간에 시험의 목표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급기야는 그 시험에 빠져서 그것이 죄악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벗겨내고 죄악의 짐을 가득히 짊어져 주어서 그 짐을 지고 도저히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시험의 마지막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마귀의 이런 시도는 기가 막힌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먼저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세월이 약이 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도 잊혀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많이 받았던 아픔도 더러는 잊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약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지금 참된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하고 참된 신앙생활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바로 요 지점에서 1년이나 2년이나 3년 뒤에 다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이 해결하고 환경이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목표는 여러분을 시험 속에서 미끄러지게 만들어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이 없이 주기도문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세상을 찬송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대신에 세상 나라를 위해 살고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사는 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내면서 사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을 만들어버리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파탄 됐다고 말하지요? 인생 파탄을 맞았다. 여러분은 그 인생의 파탄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는 훌륭한 사업을 하고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가 왕창 무너져서 알거지가 된 사람을 보고 인생 파산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들딸들과 좋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있다가 이번 사고 난 것같이 비행기 사고를 만나서 모든 가족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면 파산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신문을 보면서 다른 사람도 모두 가슴 아프지만 마지막 선교사가 죽은 가족들의 죽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어린 아이 하나가 네 시간 동안 살아 있다가 마지막 숨 거둔 소식을 들으면서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세상에서는 파산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서 파산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비록 모든 재산과 모든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명예를 그대로 모두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진실한 계획을 따라서 살지 못하고 불순종과 죄악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계획들이 성취되지 못하고 있는 채 우리의 인생이 자꾸 흘러가고 있다면 그것이 파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습니까? 죄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이처럼 악한 세상에서 보호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살다가 지치니까 숨 좀 돌리려고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고기를 먹다가 토장국을 먹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죄악 된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어서 주의 자녀 삼아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계획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 주시는 이유도 바로 이런 계획을 위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곤고하고 죄악 되었을 때 그 죄 가운데서 건져내어 주셔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죄의 놀라운 은혜도 바로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원래 계획으로 돌아가서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죄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 주님의 손이 미끄러지는 우리의 발을 붙드시는 것도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라볼 때 주님은 철저히 우리의 인생 자체가 계획 덩어리입니다. 그 계획을 따라서 살아감으로써만 당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인격적으로 설득시키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눈물어린 사랑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의 심령이 굳어지면 때로는 방망이와 같이 우리를 책망하시면서 우리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든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개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시험에 빠졌을 때 그 시험에서 벗어나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공갈치고 야단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빠진 사람이 그 시험과 죄악에 빠진 상태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가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을 나가서 다른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그렇게 많은 돈을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친구도 떠나고 돈도 다 떨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혐오하는 목부의 신세가 되어서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돼지우리 안에서 쥐엄 열매를 주워 먹기 위해서 다녔습니다. 그것도 없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아, 나는 비참하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너무 불쌍한 인생이다. 그 마음이 누구의 마음이냐 하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되니까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내가 아무리 신양생활 잘 하는 것 같아도 우리는 가끔씩은 하나님이 나 보시면서 무슨 마음 드실까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면서 어떤 생각 하실까? 한번쯤은 그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계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느끼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떨쳐버리고 계속해서 이 죄 가운데 거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발버둥질칠 정도로 그렇게 마음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실 때 시험에 들어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불쌍해하실 때 그때에 우리 자신도 불쌍하게 느껴질 때 그때 우리를 하나님께로 회복되어지고 싶은 소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자기는 못 봐도 남은 잘 보는 법 아닙니까? 불행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낙담하고 좌절하고 혹은 세상의 작은 즐거움 때문에 신앙의 큰 기쁨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가는 그런 지체들을 볼 때 전 즉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모습을 주님이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주님이 얼마나 실망해 하실까?
이제껏 우리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었습니까? 고난을 만나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고 시련을 당할 때도 피할 길을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견딜 수 없는 쓰라린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상처보다 큰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람보고 신앙생활 해 왔습니까? 환경을 보고 신앙생활 해 왔습니까? 이제까지 신앙생활 해 온 것이 좋은 일만 일어났기 때문에 신앙생활 해 왔습니까? 여러분은 그럴지 몰라도 전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오랜 동안 신앙생활 해 오고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교회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내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을 준 것도 신앙생활 속에서였고 가장 큰 사람들로부터 아픔을 받은 것도 교회 안에서였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그것과 함께 세상 밖에 있던 사랑하던 모든 친구와 좋은 모든 이웃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여러분밖에는 제게는 친구도 없습니다. 여러분밖에는 제게는 이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맛본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맛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주셨고 그리고 이기심과 더러운 죄악으로 똘똘 뭉쳐진 아집 덩어리의 인생을 파괴하시고 깨뜨리고 새롭게 어루만지셔서 주님의 형상 닮은 사람들로 만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날 수 없는 사랑하는 교회 속에서 상처도 입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해 왔다면 벌써 교회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 앞에 사는 이유는 내가 어차피 우리가 어차피 신앙생활의 이 길이 사람보고 걸어온 길이 아니라 하나님 보고 걸어온 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풍랑을 만난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교회 속에서 만나는 슬프고 가슴 아픈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 밖에는 참된 소망이 없구나 하는 것들을 깨닫는 기회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셔서 이제껏 우리는 살아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시험에 드는 것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어떤 이유로 온 시험이든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부패한 마음과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전폭적인 순종의 마음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그것과 만나서 시험에 들고 하나님을 떠나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마음에 충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주님이 오늘 나 같은 사람을 바라보시면서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 고난의 큰 파도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어떤 마음을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실까?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능력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련보다 크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여러 가지 수많은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맛보고 있는 고통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우리들이 안다면 우리는 결코 낙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해서 시험 속에 들어 있으면서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진정한 살아있는 신앙의 고백을 드리지 못하는 일들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실 때 그 때에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에 녹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하찮은 것이라고 늘 씻어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지녀야지만 그 청소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서 고통하고 좌절할 때 사람은 다 쓰라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거나 혹은 자기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 속에서 마음이 고통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매달리는 것은 철저한 극단적인 자기사랑입니다. 감정에 충실하게 사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거짓된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을 내게 심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내게 심으셔서,
(찬양)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낙심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아픔이 여러분에게 느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자유로움이 없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밀려들면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을 먼저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에도 아이들이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매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어제도 누군가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애를 때리고 야단을 치는데 3학년 4학년까지는 말을 듣더니 애가 점점 커지니까 때리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그러느냐 대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입니다. 우선 부모로부터 부모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느끼기 전에는 먼저 부모가 너는 왜 이렇게 엄마 마음을 모르냐 얘기하기 전에 엄마 마음이 무엇이고 아빠 마음이 무엇인지 아이에게 알려주어야지 느끼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대화를 하고 그 아빠의 마음이 무엇이고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이에게 충분히 알려주고 그리고 그 아이가 그것을 깨달을 때 그때에 그 부모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직관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매일 매일 새롭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도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주님이 다만 말씀하시면 내가 그 뜻대로 살겠노라고 하는 그런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에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을 깨닫고 깨달은 그 위에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우리들이 깊이 느낄 때 그때 우리에게는 인격적인 진정한 승복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시험 속에 살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참된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 시험 속에서 무엇보다도 존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간 자신의 어두운 그늘 아래 처해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 빛으로 나아가고 싶고 그리고 그 시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와 기쁨이 있는 곳에서 신앙생활 하고 싶어지는 그러한 사모 함들이 우리에게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에 들지 말고 그리고 또 시험에 든 사람들은 시험에서 벗어나도록 그래서 이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주님의 마음이 담긴 그러한 삶을 우리들이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녹취자 : 유병화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일곱 번째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여러분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를 여러분에게 해설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련을 당한다는 것과 시험에 든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패한 죄성과 유혹이 만날 때, 그 때 우리는 시험에 들게 된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꼭 정욕적인 어떤 적극적인 범죄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어떤 생기를 잃어버리고 물러가서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것도 동일하게 시험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을 피곤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안일하게 살려고 하는 부패한 욕망과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주변의 환경이 손을 잡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신앙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아갈 용기와 전의를 잃어버리고 물러가서 깊은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주님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무리 헌신된 사람이라도 또 아무리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단하고 주님과의 아주 놀라운 만남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누구라고 할지라도 역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시험에 들기 쉬운 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처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구도 이러한 기도에 있어서 예외가 될 정도로 탁월한 신앙적인 삶,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외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주님은 믿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보편성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이러한 시험의 보편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매 순간마다 우리를 그 시험에 들지 않게끔 붙들어 주시고, 또 시험에 빠졌을 때에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움의 손길을 늘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순간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또 자기가 얼마나 믿을만한 존재가 못 되고, 자신의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그릇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능성을 열면서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동안도 여러분이 만약에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고 살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 그것을 매우 가슴 아파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오늘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쳐 주시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랬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해 못하는 말은 없습니다. 우선 한 가지 선명하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와 악에서 구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가 짝을 이루면서 일곱 번째 기도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시험과 악의 연관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험과 악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왜 주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후에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셨습니까? 이것은 시험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험에 빠지면 악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 그 사람은 십중팔구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주시거나 특별히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조치를 취해주시지 아니하면 시험에 든 그것이 어느 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그것은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과 악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은혜가 충만하고, 주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의 정서가 우리에게 가득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 가득할 때, 한편으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가득한 가운데에 또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악을 행하고 죄악된 길에 빠져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기 전에, 먼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도 따뜻한,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보람이 되는 그러한 주님을 향한 선한 정서가 사라지는 일들이 있고 나서 우리는 악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진실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함, 그리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그 하나님 중심의 마음, 이런 모든 정서들을 시험에 든 기간들을 통해서 모두 말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에 안 들어본 사람 있으면 얘기해 보십시오. 시험에 들어봤습니까 안 들어봤습니까? 시험에 들게 되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뭐냐면 정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다고 해서 신앙수준이 어느 정도 높아지고 나면 시험에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교회 안 나온다든지 목회하던 것 집어치운다던지 그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는 시험에 들면 기독교를 버릴 것이냐 택할 것이냐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신앙이 깊어지면 그런 식으로 선택 되지 않습니다. 모든 외면적인 생활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에 들게 되면 그 껍데기는 남아 있지만 자신 안에 있는 거룩한 정서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지식의 집적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옛날에 복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농사나 짓고, 머슴이나 하고, 종살이나 하던 그런 천박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어떻게 그렇게 거룩하고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었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가지고 주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불타는 정서와 서원을 가지고, 그 정서가 인격을 좌우하고, 그 인격이 자신의 삶의 중심자리에 서서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그런 삶이 바로 거룩한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없으며 그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느끼는 정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닫고,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체험할 때에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의무감을 느끼고,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이 내게 즐거움이 되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참된 보람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정서가 있을 때에 그때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은 이런 것을 모두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는 두고, 속에서 이런 모든 것들을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서가 충만하게 우리 안에 있을 때, 죄는 그것에 억눌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신앙의 정서는 죄를 말려버리고, 죄는 거룩한 신앙의 정서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투쟁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너를 죽이리라.” 그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게 되면 모두 하나님을 향한 그 거룩한 신앙의 정서를 말려 버립니다. 말려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빠져나간 공백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심령은 공백의 상태가 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것이 빠져 나가면 빠져 나간 것만큼 속된 것이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쁨이 빠져 나가면 세속적인 기쁨이 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에 들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되는 신앙의 정서들이 모두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면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얼굴만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떤 변화가 지체들에게 일어날 때, 그 변화는 얼굴에서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기뻐할 때 시험에서 벗어나고 주님을 영광중에 찬송하게 되는 거룩한 은혜 속에서 살 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습니까!
시험에 들었을 때는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두 말라 버리고, 그 다음에는 깊이 세속적인 탐심, 세속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자기의 강력한 아집 이런 것들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사라지고, 죄와 더불어 싸워서 죄를 억누르고 이길 수 있는 그러한 신앙적인 정서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무장 해제된 다음에 여전히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험 속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마지막에 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악을 향하여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자주 하신 권면 가운데 하나가 기도하라는 것과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씀하시면서 그 뒤에는 늘 기도하라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만큼 기도생활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테스트 해주는 아주 훌륭한 시금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른지 바르지 아니한지,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 여러분이 시험에 들어 있는지 아니면 시험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여러분이 어둠속에 있는지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사귀는 기쁨이 있는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시간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혼자 하나님 앞에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내가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 입니까, 나의 영적인 상태가 풍성합니까 가난합니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른 관계입니까 잘못되었습니까 이런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 보십시오. 주님 앞에 홀로 서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보라는 것이지요,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간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패턴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주님 앞에 간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시험 가운데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 입니다. 죄와 악이 깊고,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기도해도 차가운 거절감 같은 것들이 셔터처럼 여러분 눈앞에 내려져 있을 것입니다. 모두 시험에 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이 여러분을 악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 시험이 여러분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이렇게 우리를 시험에 빠뜨려서 악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 마귀라고만 말하지 마십시오. 물론 마귀도 엄청나게 한몫 거듭니다. 그러나 마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선하고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주님만을 기뻐하는 그런 사람인데, 마귀가 우리를 유혹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고 죄 가운데로 끌어가고, 시험을 들게 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마귀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안에는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 이 죄와 더불어 살아가고 싶어 하는 부패한 본성,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보다 이 세상 앞에서 사는 기쁨을 택하고 싶어 하는 이 부패한 본성이, 마귀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그 본성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또 반응하고자 하는 본성이 신앙에 의해서 억제되고 있다면 마귀의 모든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것입니다. 결국은 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악입니다. 죄악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은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은 무엇입니까? 악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의 원인이 되는 부도덕한 삶이나 사고방식,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영역에서는 악의 정의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은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사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 그런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 인간의 마음 이런 것들이 선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과 사람 앞에서 선한 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과 인간의 시선 앞에서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악은 단지 이웃을 향한 손해나 혹은 이웃을 향한 범죄나 부도덕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악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가 주기도문을 해설해 오면서 계속 강조되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회복입니다 회복! 예수그리스도의 이 가르치신 기도 자체가 이 땅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원 질서를 우리들의 신앙적인 헌신을 통해서 주님이 축복해 주심으로써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사실은 그러한 하나님의 진정한 창조의 세계의 회복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가 결국은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상황에 이르게 된 처음 시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깨뜨려진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깨뜨려진 관계 즉, 죄는 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와 악이라는 단어를 함께 연결해 쓰기를 매우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모든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하는 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이런 숙제를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그럴 수가 있는가? 즉, 우리들이 첫 번째 기도부터 살펴본 이 모든 삶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에 임하옵시고, 뜻이 이루어지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용서 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는 이런 모든 주기도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몸부림은 모두 공통점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파괴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는 악과의 거룩한 투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서 삶으로 추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타도하고 배격해야 할 악에 흘러버리게 되면, 그러면 이 주기도문을 올리고 있는 그 사람 자체가 이 주기도문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악한 나라를 위해서 기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주님이 의도하셨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 반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이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발견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악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은 처음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구속의 의미를 깨닫고, 그 마음속에 있는 본성이 자기에게 증거 할 때에 원하지 않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불가해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모두 찢어서 헌신하고 싶은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죄 가운데 흘러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반항하고 불순종한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핏 값으로 주님이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에 잃어버린 이 세상을 향한 창조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다시 이루어 가는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구속해 놓으신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에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룩한 삶의 소명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신 것은 이제는 우리가 죽을죄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항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기를 방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질 때에는 주님의 거룩하심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거룩한 뜻을 가리고 있는 악한 것들에 대한 거룩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싸우고 그것들을 굴복시키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죄악된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소명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 속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기도문을 듣던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또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주시는 주기도문을 통해 감화를 받는 우리 모든 사람이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여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악에 깊이 빠져 있고, 더욱이 그 악속에서 고통 하기는커녕 낙을 누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아군의 진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패역한 군인들 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살아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정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시험에 관한 이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지 말도록 기도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시험에 드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굳게 만들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거룩한 공로를 헛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기를 이 시험에 들지 말도록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향한 거룩한 구원을 취소하신 다든지 무르신 다든지 그러실 수 없다는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흔들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흔들리지 않고, 한번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향한 그의 중요한 계획은 이런 것으로 수립된 것입니다. 즉, 어차피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을 취소하거나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우리를 추방할 수 있는 권세가 그에게 없다면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궤계와 권세를 모두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매우 깊이 시험에 들게 해서 그 시험 속에서 하나님께로 받은 좋은 은혜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영적인 모든 능력들을 상실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악에 흐르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서원 대신에 이 세상 나라에 대한 꿈을 갖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 전체가 악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악에 떨어지게 - 그는 한번 우리가 시험에 들어서 한 가지나 두 가지를 범죄 하는 것으로 자기의 계획이 성공으로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도 구원받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그저 한 번 들고, 자기가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험에 들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그를 구출해 주지 않으면 마귀가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있는 원대한 계획은 여러분 안에 자라고 있는 불신앙과 사라진 신앙적인 모든 정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삶을 점점 더 마귀가 가지고 있는 원대한 계획을 이루는 도구들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주님의 마음에 합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은혜로운 찬양이 가슴에 울려 퍼지고, 비록 높은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가던 진실한 성도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다윗이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를 통하여 나의 일을 다 이루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마귀에게 얼마나 눈에 가시였겠습니까! 드디어 어느 시점에서 그는 신앙이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정서들이 서서히 빠져 나갔습니다. 그 때 유혹을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강력하게 다가왔고 그리고 그 유혹이 강력하게 화살과 같이 다윗의 마음속에 꽂혔을 때에 그는 이미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신앙의 방패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무장해제 되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미워하는 죄인 간음의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도 사라졌습니다. 가슴 속에 울려 퍼지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은 모두 사라지고, 신앙의 아름다운 정원의 꽃들은 짓밟히고 구겨지고 모두 꺾여 졌습니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새들은 돌팔매에 맞아서 죽은 시체가 되어서 즐비하게 피 흘리며 떨어졌습니다. 그 아름답던 신앙의 정원은 황폐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이제는 악에 빠진 한 사람으로서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 대신 하나님 앞에 비통하게 울부짖고 있었고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그의 눈물과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셨습니다. 자, 마귀는 이 정도 시험에 들게 했고, 다윗이 가지고 있던 주님을 위한 선한 것을 내가 모두 파괴했으니 이제는 나는 성공했다 이것으로써 나는 임무가 끝났다 생각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더 몰고 갔습니다. 그는 더 몰고 가서 결국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이어서는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렇게 충성스럽고 자기를 향해서 거룩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우리아를 간악한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아주 정밀한 계획을 짜서 그것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했습니까? 그가 후일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이여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가 아버지 앞에 기도했던 가장 가슴 아픈 기도 가운데 하나가 나를 피 흘린 죄에서 용서 하옵소서, 그 살인은 간음보다 훨씬 깊은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그런 죄를 모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빛으로 다시 나올 때까지 그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향한 시험하는 마귀의 계획, 그 원대하고 철저한 계획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이 사람 다윗을 시험에 들게 하고 악에 빠지게 만들려는 더 구체적이고 더 깊은 악에 빠지게 만들려는 계획을 그쳤기 때문에 그가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끌어 내셨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더 이상 성사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었고, 마귀의 집요한 계획이 계속해서 이겼더라면 우리는 구약의 가롯유다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귀가 시험을 통해서 부패한 우리의 본성과 손잡아서 마지막에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그 마지막 지점이 무엇인가, ‘배교’ 입니다. 간단합니다. ‘배교’ 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앙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험에 든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찬양)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난 만져 봤도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거듭난 본성 속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기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기념하는 생애를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비록 선택은 우리들이 했지만 시험에 들어있는 우리 자신의 고통 하는 그 처지는 하나님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시험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시험에 빠져있는 자신의 영혼의 고통스러운 상태와 어두움 속에서 갈 길을 몰라서 아파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 시험에 빠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시험에서, 그 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금 이전에 버렸던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삶으로 돌이키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주님이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 속에는 이미 악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하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믿으면서, 시험 속에서 악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기를 주님이 그렇게 원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하여 지불하셨던 고난과 희생의 흔적을 보면 볼수록 우리의 구원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인지를 우리들이 압니다. 이것을 알고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어떤 계획이 있으시길래, 우리 같은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 내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에게 죄를 정하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모두 찢으셔서라도 우리를 그렇게 건져내고 싶으셨던 것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악에서 건져내어서 이제는 그 악에서 건져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통치와 의를 실현하고 ( ? )에서 이 땅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 돌아오는 일들을 위해서 우리를 소명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왜 주님이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말씀으로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까? 그것은 악에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몹쓸 고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악에 빠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고통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시험은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그 열매는 매우 씁니다. 잠시 유혹에 빠지고 죄에 빠질 때에는 미끄러지듯이 기름이 입술을 통해서 입 안으로 흘러들어 가듯이 매끄럽게 빠져 가지만,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시험은 악을 부르고 악은 고통을 부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의 마음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 그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면서 악에 빠지지 말도록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받는 그 고통의 깊이와 모든 쓰라림의 깊이를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 악에 빠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면 신령한 은혜의 기쁨의 깊이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도 우리가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악을 체험해 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매우 바보 같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빛 안에서 사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어둠이 얼마나 싫은지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상황 속에 살면서 불행이 주는 고통이 무엇인지 더듬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과의 진실한 교통, 시험에 드는 대신 빛 가운데 살아가고, 악에 빠지는 대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삶 속의 기쁨을 통해서 이러한 기쁨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의 멍에를 지고 악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웁니다. 죄악에 빠졌을 때, 그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깊이 당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부자연스러운가 하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험 속에서 타락의 즐거움이 고통을 능가하는 동안에는 결코 자기가 시험에 들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 본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런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깊이 빠져서 어두움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떠나서 어두움 속에서 그 악에 빠진 사람의 그 깊은 고통, 그것이 우리 속에서 경험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살아가면서 때로는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주님을 믿지 않을 때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지만, 이제는 육체가 원하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정욕이 우리에게 속삭여도, 우리는 그 요구를 귀 기울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것을 거절하며 살기 위해서는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고자 할 때 우리는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내세의 삶을 바라다보는 그러한 전망도 가져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 생활을 부인하고 이 세상을 적당히 경멸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신앙적인 태도, 이러한 모든 마음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고, 살아가고, 또 살아갈 때, 그 때에 우리들에게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끔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억하십시오, 구원받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만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마귀도 아주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즐거워하는 백성 만드시려고 하고, 마귀는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악에 빠지고, 빠지면 빠질수록 우리를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들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배교하는 그런 자리에까지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둘 사이에 끼어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자주 우리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건져 내셨고, 또 어떻게 하나님이 그 놀라운 사랑을 의심할 여지없이 시험 속에서도 보여주셨는지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어떠한 깊은 시험 속에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그 하나님의 빛 된 도움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창조의 목적을 거슬러서 사는 그러한 대적하고 배교로 흘러가는 인생을 포기하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설득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빛 가운데 살아가고 시험도 없고 언제나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빠지고 하나님을 떠나서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저버리고 어두움 속에 빠져 있는 자들을 향한 초청을 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불러도 좋은 찬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찬송)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함께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악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 주기도문을 붙들고 주님의 아들이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고로, 우리는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이 악의 수렁에서 건져 달라고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나이다’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이고, 여러분이 만약 시험에 들어 있다면 아직은 더 깊은 악에 흐르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 시험 속에서 여러분을 향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의 영혼을 노리고 있는 마귀의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커다란 악, 끔찍한 타락은 작은 관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는 최근에 일어난 그 어린아이를 유괴하고 살인한 사건을 보면서 그 여자가 아버지가 도지사라면서요, 이북 5도지사. 대학을 나오고 발레도 하고 바이올린에 아주 유능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미모 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죄를 저지르게 될 때, 나는 그 사람이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평범한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한 가지에 집중한 것입니다. 돈!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이것이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평범하게 사고하던 때에 끔찍하게 생각했던 죄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아주 쉽게 정당화 되는 과정들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들 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시험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끔찍한 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잊어버리셨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십 삼년 전인가요, 현직 목사님이, 그것도 목사님이었다가 그만둔 것이 아니라 현재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 목회자가 권총으로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500만원을 빼앗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 하니까 교회를 지으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웃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노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상당한 동정을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있을 때에 선과 악, 죄와 선에 대한 정상적이고 분명한 판단이 가능한 것이지, 시험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이런 모든 판단은 흐려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새까만 후배들이 옆에서 교회를 하는데 사람이 막 모이고 교회가 커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석해 보았더니 그 사람들이 자기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있었는데, 거기는 교회를 지었고 자신은 못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대한 생각 하나가 사람을 살인에 이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생각도 하물며 그러 할진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을 향한 욕망과 유혹에 떨어지게 되어서 깊은 시험에 들게 될 때는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 신앙적인 사고가 마비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곱 번째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도 또 듣고 있는 여러분도, 주님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실 그 때에만 주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매일매일 붙들어 주시고, 시험과 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거룩한 은혜 없이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을 입고도 조금도 그 계획에 부합하여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곱 번째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앞에서 우리가 숨이 멎는 그날까지 그치지 말아야 할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시험에서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우리의 부패한 본성으로 시험에 들었다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셔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거룩한 사랑을 배신으로 갚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눈을 들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험에 든 지체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느끼십니까? ‘그것 봐라 그런 식으로 까불더니 꽤 고소하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시험에 들었을 때, ‘그것 봐라 저 사람 신앙 없다고 그랬지? 말짱 헛거구만. 꼴좋다.’ 그럽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주님은 이미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시험에 들 수 있는 가능성도 보셨고, 시험에 들었을 때 예외 없이 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연약함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그 마음을 오늘 보십시오. 굶주린 자들에게 그 양식을 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게 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히시게 하고 싶으셨던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죄사함을 힘입지 못하고 정죄의식 속에서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그 어둠의 자식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용서를 향한 간절한 마음, 서로를 미워하며 용서하지 못한 채 할퀴면서 살아가는 당신의 양떼를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마음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이 대목에서 시험에 든 자들을 향하여 악에 흐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어떠한 심정으로 이 기도를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들은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시험에 든 지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비난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치료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빠져있는 자들을 보면서 두 가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자신이 그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함을 입어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랑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그 시험에서 더 깊은 악으로 흐르지 않도록 우리는 그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심성에 대해서 사도는 말했습니다. ‘너희 중 누가 실족하면 네가 마음 아파하지 않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누군가 실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는 마음아파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신앙의 참된 기쁨을 잃어버리고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악으로 흘러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은 찢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던 마음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치 없는 인생들을 부르셔서 가치 있는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심으로 온전히 우리에게 가치 있고 중요한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누가 시험에 들거든 우리는 깊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시험이 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도 그런 죄와 악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 순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일곱 번째 기도제목을 통해 이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20.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녹취자: 김미영
지난주로써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모든 기도를 끝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마지막 부분은 기도라기보다는 송영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면서 이 주기도문은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후에 이제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해야 될 것인가 하는 송영까지도 아울러 가르쳐 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까 하는 것도 보여주지만 또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희랍어 본문 성경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그 앞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아주 약한 ‘왜냐하면’ 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차라리 이렇게 번역하면 좋다 생각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주기도문을 외우신 분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우리도 그렇게 외우고 있습니다.
그 ‘대개’는 대충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주 옛날에 쓰이던 한자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의 뜻은 ‘일의 원천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입니다. ‘일의 원천으로 미루어보건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 이옵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서 왜 우리들이 주기도문을 외워야 하고, 또 이미 여러 달에 걸쳐서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누누이 강조 드렸던 바와 같이 왜 우리들이 그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 가야되는가 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이 송영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아야합니까? 우리가 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살아야합니까? 우리들이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고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아야 하고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도록 아버지 앞에 구하면서 깨어 살고, 악에 빠졌을 때 그 악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살아야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왔는데 이제도 여전히 긴장으로 연속된 삶을 살면서 이전에 육신의 방탕과 사역을 쫓던 모든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고, 세상에 속한 정욕과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성결과 의로써 옷 입은 삶을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감사에 대한 보답으로써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과 실제로 우리 같은 죄인을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고 피흘려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아는 이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공로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속죄하시는 대속의 공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날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왜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상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은혜가 메마른 사람들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은 요동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든지 아니면 은혜가 떨어진 삶을 살든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는 삶을 살든지 여러분의 상태가 어떠하고 신분이 어떠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여러분은 모두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함을 얻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와 내 집만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 아니라 모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바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제 그들은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을 좇으며 세상의 일을 버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송영 속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기하게 우리들이 이미 살펴본 앞에 나온 일곱 가지의 기도의 제목과 묘한 연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송영 속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즉, 먼저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 부분을 이렇게 시작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 거기는 그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 곳은 그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기도제목과 두 번째 기도제목이 나라와 연관이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도제목은 권세입니다. 두 번째 송영은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권세, 그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인데 이 권세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 권세는 세 번째 기도제목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하는 기도와 맞물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아버지의 그 놀라운 권세로써 그 권세가 이 세상에 충만하여져서 그 권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김없이 이루어 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이 영광이란 말처럼 성경에서 정확히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를 원했지만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시원한 해석을 던져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차라리 영광을 해석하는 것 보다는 무엇이 영광이 아닌가를 해석하는 것이 영광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 요한 웨슬레는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광은 그것 하나만을 보게 하고 나머지는 그 빛이 너무나 찬란하여서 모두 어둡게 보이고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바로 그 밝은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영광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것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의 정확한 정의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곳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그곳에는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써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곳에는 가장 우둔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죄인을 굴복시키고 어두운자를 눈 띄어서 밝히 보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기도를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네 번째와 일곱 번째까지에 이르는 이 네 개의 기도 제목들이 이제 세 번째에 송영의 요소인 영광과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이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주기도문적인 삶을 요구하고, 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우선 송영은 우리에게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the kingdom’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시려고 했던 나라뿐만 아니라 천상에 속한 모든 나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이 세상에다 자기를 인정하는 나라를 세우시려고 할 때 이것은 천국의 한 모형이었습니다. 비록 장소는 작은 에덴동산 이었고 인구는 두 사람 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 모형을 이 세상에다가 심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겠습니까? 가보지 않았으니까 알 수가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나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이후에 들어가게 될 그 천국에는 오늘 우리들의 보이는 세상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입니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경건한 성도들에게 천국이 소망이 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는 천국이 지금과 똑같은 세상이라면 불경건하고 하나님께 승복하고 주기도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영혼을 위해서 준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이 또 한 번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운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삶을 살고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경건한 신념을 인해서 고통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거룩한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그리워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우리 죽음 후에 있게 될 새로운 세상이 지금과 똑같은 세상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소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향한 소망이 어떠한지는 그 사람 성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에덴동산에서 심어 놓으셨던 그 나라는 형태는 작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와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한 인간이 그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부요한 지식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천상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비록 거기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 한 분이 인생의 역사를 다스려 가시고 그리고 하나님 한 분의 권위에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지은바 된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을 꿇어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대접해 드리고 경배하고 그 분의 통치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창조의 즐거움으로 아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범죄 했고 그 나라는 깨어졌습니다. 그 후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집요하게 깨어진 그 나라를 새롭게 회복시키는 운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용서해 주셔서 그 들 속에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심으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다시 깨닫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구속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으로 돌아가서 인간이 원래 이 세상에 만들어진 본분인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리고 주님을 찬송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경륜하신 것입니다.
그 중의 한 과정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으신 것이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그 사람들에게 이 주님의 삶과 기도가 녹아있는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뒤를 따라서 살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영원히 주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거기에 무엇을 보태었습니까? 하나님이 모두 그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여러분을 구하시고 어둠과 죄악의 권세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져내어 주님 자녀 삼으셨습니다.
지금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죄 가운데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알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을 보내셔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늘 이 세상에 살면서 이전에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때에 살았던 그 삶을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인식을 여러분 가운데 심어주신 분도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셔서 여러분을 오늘날까지 데려오시고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신뢰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고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신앙의 고백이 되어 있는 삶을 이 세상에 보여 줄 때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놀라운 계획들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면서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능력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힘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이 땅에 회복되는 일에 이바지 하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이 맘먹고 원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지금도 당신이 넓히고자 하는 그 땅을 당신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넓혀 가십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문을 두드리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그리스도의 이 피 묻은 복음을 전파하기 원하지만 그러나 선교의 문을 여시는 분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의 가슴에 거룩한 복음의 불을 지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이 그 열심을 붙들어 사용하시는 권세 없이는 그 모든 인간의 열심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통해서 당신 스스로 당신의 주권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장되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모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진정으로 회심해서 돌아와서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가 찬송할 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으로 가르치는 자나,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자나, 그 영혼을 섬긴 자나, 모두 주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 나라는 그 분의 수중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 나라도 당신 수중에 소유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그 나라가 자기의 권세아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 나라가 자기의 나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 왕들 중에 뛰어난 왕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친히 인류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때는 역사 속에 찬란하게 드러나서 온 세계의 역사를 몸짓하나 말 하나로 움직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씩 둘 씩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사람들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사람들도 다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도상에서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사라져버리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가 위대한 영화를 누리게도 하시다가 때로는 그 한 나라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시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뼈저리게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36년 동안 지낸 것은 단지 문명한 왕이나 부패한 관리들이나 아니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몇 몇 간신들의 궤계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 6.25의 비참한 동란 그 속에서 동족이 피 흘리며 죽어가서 아직까지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은 역사의 이 비참한 고통도 사실은 몇 몇 사람들의 야욕이 빚어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역사들은 우리들에게 아직까지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한 역사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들의 교회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라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이 나라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몇 몇 사람들의 무능과 그리고 이 로마 사람들의 뛰어난 외교나 혹은 군사적인 정략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나라도 그 나라도 아버지의 수중에 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그 모든 역사위에 뛰어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볼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도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물방울과 같은 것들이 이 세상의 역사라면 그 파도위에 그 파도를 일으키시고 그 파도를 불러오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도 그 분의 수중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나라도 그 분의 수중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도 그 분의 수중과 계획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보면서도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복 받고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민족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 여러분이 먼저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민족이 통일을 이루어서 남과 북의 흩어졌던 고통 하는 가족들이 만나서 해우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복된 나라가 될 것인지 아니면 영구히 분단될 것인지 혹은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전대미문의 전쟁에 휩싸여서 수많은 민족이 다시 한 번 고통을 받게 될 것인지 하는 것은 모두 나라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역사를 보면서도 겸비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위에 놓고 이 나라의 모든 교회를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거룩한 주기도문을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권세가 아버지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권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는 모두 아버지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권세들을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권세를 통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권세와 그 권세를 위탁 받아서 가진 인간의 권세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단지 몸만을 멸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 영혼을 지옥에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만을 통치하고 다스릴 뿐 아니라 인간들의 죽음이후의 세계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행과 불행, 축복과 혹은 저주, 혹은 편의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더불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영원을 향한 우리의 영원과 관계된 것입니다. 주님이 놀라운 그 권세를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실 때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비록 약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이 어두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랑하는 사도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인생이 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고 하나님의 권력이 인간의 권력과 얼마나 다른 것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만하고 어리석은 이 백성들, 아버지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고, 권능의 여호와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권세가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성령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찬송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찬송제목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의 찬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역사 속에서든지 우리의 개인의 삶속에서든지 우리를 향해 절대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껌벅 죽는 신앙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을 보이시기만 하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권세 앞에 그 권세의 위엄을 모르고 방종하고 어리석게 구는 사람들은 바로 그가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특징은 세상나라의 임금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기를 친히 다스려 주시는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 앞에 껌벅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격인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이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이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인격적으로 그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이 연약하시기 때문에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연약하시거나 힘이 없으시거나 우리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우리의 불신앙의 고집을 꺾을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독자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신학의 길을 걸어가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쓰임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편지 속에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자기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소명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주님이 끊임없이 ‘너 이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돼라’ 하고 불러 주시니까 계속 못 간다고 못 간다고 버티다가 ‘그럼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는 소명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건 소명이 아닙니다.
다행히 얘기를 안 해줬는데도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그 청년은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소명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명입니까? 주님이 ‘너를 쓰겠다’ 그러실 때 ‘아 싫습니다. 전 못 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전 포기 합니다’ 그게 소명 아닙니다. 소명은, 그게 아버지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입니까? 못 간다고 계속 버티다가 버티는 것을 포기하는 그것이 아버지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냐 말입니다. 얼마나 자기가 잘났기에 그럽니까? 그런 거는 자기 아랫사람하고 줄다리기 하다가 하는 행동입니다.
전능하시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특정한 주님의 일에 쓰시겠다고 할 때 버티고 버티다가 그것도 스스로 그만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 치고 저기 치시니까 어떻게 더 이상 얻어맞을 데가 없어서 주님 마음대로 하옵소서. 하고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겠다고 손을 놓은 그것이 소명이 아니라 더 이상 반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기준이라고?
다행히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소명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많은 소명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주님의 권세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 이해가 가십니까?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너 잠깐 내 앞으로 오라’ ‘아 저는 못갑니다. 못 갑니다’ 그랬더니 계속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게 그 초청의 다시 말하면 그 부름에 응하는 것입니까?
세상 나라의 권세를 가진 임금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부르는 부름 앞에 응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너는 나를 위해 뭘 좀 해야 되겠다 와라’ 그러면 못 간다고 버티다가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응하는 것이 아니라 의관을 갖추고 달려가서 그동안 버텼던 것을 석고대죄하고 그리고 그냥 땅바닥에 완전히 개구리처럼 엎드려서 그동안의 모든 죄를 이실직고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사죄를 구하고 이제는 무엇이든지 ‘왕이여 내게 명하소서’ 그게 부르신 자의 권세를 인정하는 삶이 아니면 말이지 어디서 그렇게 건방진 방법을 배웠느냐는 말이지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이고 잘 났네 얼마나 잘났기에 그래. 그건 소명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왜 오늘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어떤 즐거운 이야기를 여러분은 듣고 싶습니까? 무엇을 여기서 배우고 싶어 합니까? 여러분은 왜 하나님의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이 없는데 신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면 이런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듣는 것, 내가 아는 것,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그리고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교회 속에서 특히 에티켓을 갖추면서 생활해야 될 것이라고 하는 그 많은 지식과 경험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들려져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권세로 여러분에게 들려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권세 아래서 승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주님의 분부를 따라 살아가야 되겠다’라고 하는 권세의 엎드러짐이 없다 라면 이 시간과 민방위 교육 시간이 무슨 다른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한 견해를 들어보기 위해서 나왔습니까? 인생에 대한 한 전문가의 견해를 청취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까? 예배는 그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에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됨은 하나님의 권세를 우리들이 인정하고 주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주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보여주실 때에 껌벅 죽는 신앙의 자세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당히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권세 앞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지 않고 그렇게까지 비굴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이 땅과 세상의 권위 앞에서 아첨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이 옛날의 이 어둠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 나가던 방법입니다. 이제는 어두움이 우리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사망의 권세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거든 이 세상의 어떤 권세가 사망의 권세보다도 뛰어나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권세가 우리를 굴복 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릎 꿇어야 할 권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야 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권위 그것 하나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의 신성을 인성 속에 감추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 분의 생애는 한 마디로 말씀 드려서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신 인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그 어떤 권세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에게 그 분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는 위풍당당한 빌라도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셨던 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 분은 담대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 분이 무릎을 꿇고 꼼짝할 수 없었던 권세는 하나님 그 분의 권세였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 분이 비천한 중처럼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엎드려지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를 지나는 모든 날 동안에 그 분의 전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이미 수많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자기에 관해서 예언해 놓으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엎드려진 삶이었습니다. 그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권세 앞에만 엎드려지고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죄 없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도 그러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엎드려져야 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이지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한 기회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가 아닌 것입니다. 돌이키도록 만들어 주신 그 자비와 호의를 우리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권위 앞에 거스르는 방종의 기회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세 앞에 엎드려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권세, 주님의 거룩한 뜻,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계획, 그 앞에 그 권세 앞에 우리는 모두 부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이러한 권세가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권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찬송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아가서 이 권세가 우리에게 즐거운 권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이 권세와 권위가 숨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권세가 나를 지키고 이 권세가 주님과 동행하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권세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권세 있으신 그 분이 마치 날개로써 그 병아리들을 모으는 암탉과 같이 우리를 그 권세의 날개아래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안전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 권세가 아버지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즐거운 찬송 제목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 앞에 부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영적인 본성은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영광이 무엇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시선을 돌려서 하나님 한 분만을 주목하게 만들어주는 그러한 모든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하나님이 영광 자체인 것처럼 영광자체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이름에 대한 대접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올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 주신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며, 따라서 이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광 돌리고 우리가 아버지 앞에 영광스러운 분으로 인정할 분이 하나님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위한 충족한 도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에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이 성령에 먹칠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삶의 목표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삶이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이제 다시금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내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 헛된 질문을 쓸데없이 자꾸 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드러났고 우리 인생의 목표는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위해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 후에 사라지는 풀꽃과 같은 영광입니다. 벤 풀이 마르는 것처럼 또한 던져진 꽃이 메마르는 꽃처럼 잠시 아름답게 빛나지만 잠시 지나고 나면 모두 쓰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영광이 인간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모든 기회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찬란해져서 다른 모든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세상을 이루는 도구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잠시 지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그랬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러한 주님의 도구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 있으나 사는 이유와 목적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같지 않는 사람들, 함께 먹고 마시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먹고 마시는 이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유가 세상의 사람들과 같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위해서 일곱 가지의 모든 기도, 그 기도를 따라가는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은 어김없이 아멘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고 끝맺고 있습니다.
‘아멘’ 이 말은 영어로 말하자면 ‘certainly’ 그런 뜻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히브리어 ‘아만’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아만은 ‘굳게 하다 든든하게 하다’라는 동사의 부사 형태입니다. 그래서 ‘굳건히 그렇게 되어 지이다’ 하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려 드렸던 이 영광스러운 소명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소원하는 예수님의 소망이 배어 있지 않습니까?
계시록 3장에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아멘이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을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 아멘으로써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아멘’ 하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고 세상 나라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아멘에 기여할 수 있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시는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여러분은 그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아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주님이 보실 때 우리들은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면 확장되어진 아버지의 나라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까?
남극에는 약 열 여섯 나라 정도가 협약에 가입해서 독점적으로 남극의 생태계와 자원을 탐사하는 기지를 설치했습니다. 또 거기는 정말 정부의 강력한 후원 없이는 웬만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그룹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엄청나게 많은 외교적인 노력과 재정적인 투자를 통해서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입권을 따 내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10여 년 전 인 것 같습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TV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그 남극에 여러 나라가 있고 그 남극에 한국 사람들이 가서 처음 기지를 세우고 태극기를 올리던 날 관계자들이 그 태극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뛰어나게 산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한국 사람이 어느 봉우리 정상을 최초로 올라서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서 흔들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발견합니다. 이게 바로 그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아멘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디엔가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되어졌다는 소식이 들릴 때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감동이 있습니까? 세상 나라의 깃발이 떨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기가 높이 올라가게 된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 벅차고 즐거워하는 그런 소망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아멘의 생애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디서든지 주님의 나라가 확장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가슴 벅차하는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아멘의 생애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껌벅 죽고 주님의 뜻이라는 말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엎드릴 수 있는 아멘의 마음, 이 세상의 총칼 앞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의 권세아래 굴복하는 그 순전한 마음, 그리고 미력이나마 힘을 다하여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러한 순전 무구한 마음, 이것이 바로 아멘의 생애가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아멘이 무서운지 압니까? 주기도문을 모두 외운 다음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 이옵나이다 아멘. ‘이제는 내가 그렇게 삶으로 살겠사옵나이다’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입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는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마지막 때가 다가온 세상을 봅니다. 사랑은 식어가고 불법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관심이 없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이러한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과연 이 어지러운 세상,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는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 나라가 임해서 온 백성들이 그 분의 권세를 즐거워하고 하나님께만 경배를 돌리는 영광스러운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나라가 다시 세워질까 의심할 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힘은 너무나 미약해 보이고 그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있는 악한 나라의 권세들은 너무나 크고 규모가 크다고 믿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고 세상에 살지만 그 꿈이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을 따라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주기도문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아멘’ 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좇아서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주님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멘’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보십시오.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한 사람이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에 거기에 나타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많은 변화와 놀라운 일들을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들을 성취해 가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지금도 주님의 관심은 연약하지만, 이 세상 속에서 쓰러지지만, 그러나 일어서서 이 주기도문의 삶을 고백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아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그런 사람들의 아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권세를 보여주시고 그 나라가 아버지께 속하신 것과 영광이 그 분께만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도 도처에 숨어 있는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이 아멘의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런 주님의 부르심에 부합한 아멘의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강해는 이제 넉 달 가까이 끌어온 모든 강의를 여기서 마칩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 ‘아멘’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아멘이 여러분의 삶속에 녹아들어서 주님이 보실 때 여러분이 주기도문에 있어서 아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기에 도무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일들을 위해서 기도해온 것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여러분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시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시고 아버지의 나라를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보고 여러분을 보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이 땅에 세우셔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