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Ⅱ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12월 12일
목 차
1. 하늘에 계신(마 6:9) 1997.4.27 주일오전 1
2. 하나님 아버지 ①(마 6:9) 1997.5.4 주일오전 9
3. 하나님 아버지 ②(마 6:9) 1997.5.11 주일오전 13
4. 우리 아버지(마 6:9) 1997.5.18 주일오전 20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1(마 6:9) 1997.5.25 주일오전 28
6.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2(마 6:9-10) 1997.6.1 주일오전 33
7. 나라에 임하옵시며 1(마 6:9-10) 1997.6.15 주일오전 39
8. 나라에 임하옵시며 2(마 6:9) 1997.6.22 주일오전 46
9. 나라에 임하옵시며 3(마 6:9-10) 1997.6.29 주일오전 53
10. 뜻이 하늘에서...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마 6:9-10) 1997.7.6 주일오전 60
11. 뜻이 하늘에서...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마 6:9-10) 1997.7.13 주일오전 67
12.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1997.7.27 주일오전 75
13.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1(마 6:12) 1997.8.10 주일오전 84
14.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2(마 6:12) 1997.8.17 주일오전 89
15.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3(마 6:12) 1997.8.24 주일오전 95
16.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4(마 6:12) 1997.8.31 주일오전 104
17.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5(마 6:12) 1997.8.31 주일오전 111
18.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마 6:13) 1997.9.7 주일오전 118
19.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1997.9.14 주일오전 127
2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마 6:13) 1997.9.21 주일오전 141
1. 하늘에 계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초대 교회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은 주기도문을 작은 복음서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농축하고 있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종교 개혁 후에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주기도문과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가르치는데 3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가 사도신경이라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가가 주기도문이고 십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주기도문을 작은 복음서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렌즈라고 말하고 싶다. 성경에 은혜를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복음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유 중에 하나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성경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무조건 많이 읽는 것 보다 주기도문을 공부하는 것이 훨씬 유익이 된다. 마틴 루터는 예수그리스도 이후에 최고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라고 했다. 주기도문이 본래의 뜻과 곡해되어서 이용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기도 생활을 보면 주기도문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이 복음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적인 선생들이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는 일들이 흔히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고 그때 주기도문을 가르쳐 준 것으로 누가복음 11장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주기도문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후일에 예배를 빨리 끝내거나, 목사님이 없을 때나, 중요하지 않는 예배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로서 사용하도록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주기도문을 이용하는 것은 학살이나 마찬가지이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평소에 살아가던 것의 축약판이란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알 수 있다. 주기도문이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적이지 않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곧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격히 말해서 한 사람이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거나 한 교회가 참된 영적인 부흥의 각성을 통해서 부흥을 경험하기 전에는 주기도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사람들의 가슴과 기도 속에 삶에 생생하게 역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복음적인 가르침과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교훈들도 목표하고 있는 바는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지도 주기도문을 알고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온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왜 하나님의 나라가 이처럼 더디게 오는지 하는 해답을 발견 할 수 있다. 왜냐면 성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실려 있다. 골격은 같지만 표현이 차이가 난다. 이 모순을 놓고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한다. 가장 인정받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첫 번째는 원래 주님이 누가복음에서 한번 주기도문을 썼는데 후일에 마태가 그것을 참고 해서 좀 더 세련되고 상세한 표현으로 만들어서 마태복음에 넣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각기 두 번을 가르쳐 주신 것을 현장을 마태도 누가도 목격했는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가르쳐 주신 것을 서로 보고 쓴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복음서에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 얘기가 그렇게 중요한 얘기가 아니지만 만약 우리가 두 번째 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즉시 한 가지를 배우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도 우리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차가운 법조문처럼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주문처럼 암기하는 암기용 주기도문이 아니라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는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주님의 깊은 기도 생활, 긴 기도 생활의 골격을 뽑아내어서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신을 우리가 계승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기도 생활의 패턴이고 나아가서는 우리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할 때 우리마음에 통회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정해진 기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우리가 기도하는 주기도문이 매우 낯설기 때문이다. 기도 하는 내용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기도 하는 내용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익숙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헌금 한번 해보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고 선교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 세계 선교에 대해서 기도 한다는 것은 그야 말로 썰렁한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애쓰고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영적인 전쟁과 구원의 감격이 삶 속에 있는 사람이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기도 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살지 않고 자신의 안락한 삶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태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 높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 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썰렁할까. 주기도문을 막힘없이 외우지만, 대부분 딴 생각을 하면서 외우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의 첫 시작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호칭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고 시작 하게 하셨다.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오지만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가르쳐 주고 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던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엄연히 존재 하고 계신 분이라고 오늘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공부를 하지 못하거나 지식이 떨어진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패역하고 사악하고 가증한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육체의 정욕과 마음에 소원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심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수많은 어리석은 사상과 많은 철학과 학문들이 탑처럼 높이 쌓아 올려 가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상과 지혜들을 배운다.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문화를 건설하고 문명 세계를 건축해 간다. 그 문명 세계들이 사람들을 만들어 가고 그리하여 세상은 거대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다.
누구도 그것을 거슬러 살아가기가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사상이 아무리 훌륭하고 인생에 대한 견해가 아무리 화려 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앙을 토대를 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사상과 철학은 모두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동의와는 관계없이 당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이 세상에 창조된바 되었다. 하이렛과 같은 사람도 이러한 사실을 어렴풋이 간파했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속에 불가항력적으로 던져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고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다. 하나님은 만물에 당신의 신성을 깃들게 하셨다. 인간의 피조 세계를 뛰어 넘어서 영원한 세계 속에 계시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인간의 모든 일 가운데 나타 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개입 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영원히 살수 없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열자마자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너희도 내가 존재 하는 것을 믿느냐” 주기도문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마음에 묻는다. “너희의 삶은 과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과 다른 삶이냐” 고 묻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꼭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지적인 동의에 불가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주기도문을 펼치면서 묻는 첫 번째 질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끌어안을 수도 없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간직하고 우리 곁에 살아계시고 언제나 함께 하고 존재 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 하나님은 단지 존재 하는 분일 뿐 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씀 하실 때 하나님을 하늘에 가두고 싶어서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후에 기도 제목을 보면서 주님의 끊임없는 관심이 오히려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져야 했다. 일용할 양식도 용서하는 것도 죄지은 자 들을 용서 해 주시는 것도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주님의 이런 관심에 비춰볼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 하신 것은 하나님을 하늘에 묶어 두시기 위함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지만 하늘에 계신 그 위대한 권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지만 현재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즉 주기도문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 주고 싶으셨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근심과 염려 속에서 살아왔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을 어지럽게 했을 것이다. 많은 일들로 고민 하고 갈등 하는 모습은 진지하고 그 고통은 현실 적인 것이기에 실제적이고 심각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은 동물적인 삶일 뿐이다. 깊이 고민 하고 염려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찮은 것일 뿐이다. 마땅히 인정해야 할 바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자기들의 고민스러운 모습만을 싸안고 있는 삶은 하나님 앞에 코미디와 같을 뿐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오늘도 믿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되시고 알지 못하고 방종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흥의 역사를 보면 성령의 축복이 많던 시대에는 심판도 분명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많이 느끼는 상황에서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작용이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 부흥이 일어날 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니까 그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 떨어진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여호와의 친밀함이 느껴지고 나를 사용하시고 움직이시고 감화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 버리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될 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점 정결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자신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그 중에 한 강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다. 오늘도 그분이 우리의 삶을 감찰 하시고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불꽃과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주기도문으로부터 멀어진 삶이다. 우리는 살던지 죽든지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그분 안에 존재하고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외치기 위함이다. 하늘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새삼스럽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개 하고 있다. 우주에는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식 하라는 것이다. “너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씨름하고 고뇌하다가 땅속으로 사라져 가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통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위대 하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땅에 있는 여러 가지 일로 고민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씨름 하듯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다 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각하기 쉽다. 기도를 마치 물건 값 흥정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과 줄다리기나 하듯이. 하나님을 이 땅에 있는 지극히 작고 연약한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일을 스스럼없이 자행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 할 때 는 하나님을 부르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을 창조 하신 분이십니다. 시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아주 사소한 피조물에 불가한 것이었음을 시인들은 깨달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 같은 존재이다. 하늘에 있는 많은 별들이 충돌하지 않고 온 우주를 운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별들을 움직이시고 주관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땅에 있는 일들로 마음이 복잡해지고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서 의심하려는 마음이 들 때며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 하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신앙에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구별된 자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껴지기 시작 할 때 그들은 다시한번 자신들의 본분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날 왜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멋대로 살까? 입술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고백 하면서도 삶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누구시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본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욕심이고 대적이다.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면서도 가책으로 느끼지 않고 자랑으로 생각 하는 것은 집 한구석에 붙어사는 벌레의 세균들이 건축주에게 반역의 칼을 드는 것과 같다. 친구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영적인 깊이 인 것처럼 알고 있지만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존귀와 영광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에 작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할지 모르는 사람이 느꼈다고 하는 사랑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엄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신들의 하찮은 모습을 보면서 엎드려 졌던 사람들이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생애에 영적인 전환에 대해서 생각 하면서 어느 도시에서 고서 방을 뒤지다가 고서를 두 권 발견 했다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전집 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읽어 가면서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고 티끌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학식 때문도 아니고. 에드워드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늘에 속한 성품을 발견 했을 때 자신은 티끌과 같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저작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자신은 티끌 같은 존재임을 느낀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한다면 그때 느낌은 어떠했을까. 시편과 성경 곳곳에서 선지자들의 글속에서 과장 될 정도로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을 노래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노래하고. 인간 속에서 무엇이 가장 미천한 것인지를 묘사 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온전히 순종하며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따르는 인내와 복종의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의 의견들을 내세우면 성경의 진리도 왜곡해 보려는 지적인 교만이 무엇 때문일까?
인간이 어떻게 하면 겸비하게 하나님께 영예와 존귀를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 갈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 인줄 모르고는 절대 겸비 해 질수 없다. 하나님이 만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인정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안계시다고도 하고 죽었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지구에 남아 있을 권리가 없으므로 쫓아내야 한다고도 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인간들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오늘도 하나님은 이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바라보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단지 그의 손으로 지은 바 된 비천한 인생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우리를 두신 것이다. 누가 이 진실을 전할 것인가? 죄악을 쌓아 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리고 인간을 지으신 분이시란 사실을 알려줄 사람이 누구인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지켜주시고 구체적인 삶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라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 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사소한 모든 일에 아버지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면서 여러분들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 묻는 것에 대해서도 소홀하게 여기시지 않는다.
18세기에 유행하던 사상 가운데 이신론이란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로 인정하되 철학적인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구약과는 달리 오늘날은 성숙한 시대이기에 인간이 어떻게 살던지 마지막에 심판을 관장할 뿐이지 더 이상 인간의 세세한 일에 간섭 하지 않는다는 철학이 있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이단인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범사에 우리를 향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같은 인생이 무엇인데 이 작은 일에도 천지를 창조 하신 위대한 만군의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당신의 깊은 뜻을 보이시고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 알리시는 놀라운 간섭이 우리에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방종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이 고통이겠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은혜요 감격이요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이다. 주기도문 첫 문을 열면서 제일 먼저 이런 교훈들을 배우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 말씀 앞에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하나님을 깨달으며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임을 깨닫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주기도문의 첫 호칭 중 반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늘에 계신’이란 말을 통해서 소망에 관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 하셨다. 땅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이렇게 권면하고 가르치면서 하늘에 있는 보화를 사모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때문에 살고 죽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살아 있으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추구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땅에 있지만 하늘을 추구하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을 때 고난과 시련의 생애였다. 목적 없이 고난 없는 삶을 살지 않으셨고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하늘에 상급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견디셨다.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하늘의 기업을 소망했기에 이 세상의 고난이 하늘에 상급으로 이루어질 것이란 것을 알았기에 고난 받는 삶을 사시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만약 우리에게 인생 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소원하고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하는 모든 불만족스러운 세상에서의 경험을 감당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며 위에 것을 바라고 사모하라”고 하셨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것들만 바라보다가 그 인생을 마칠 것이고 하늘의 백성들은 몸은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불만족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에 대한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시련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고 앞에 있을 영광스러운 상급과 면류관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탐욕과 범죄는 이 세상 외에는 다른 어느 것도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소개 해 주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말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우리의 참 소망이 되는 줄 점검해보면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인지 점검해보자. 근심과 고통에서 헤어 날수 없을 때,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나 만져 봤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사무쳐 나 눈물 흘리네]
잠시 후 이 고난의 바다가 지나고 눈물의 계곡이 지나며 그토록 베옵고 싶어 했던 주님이 밝고 밝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란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게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고 능욕을 받으면서도 범죄하지 않고 외길을 걸어 갈수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만났다 헤어지지만 그 나라에서는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영원한 내세에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 할 수 있는 기회를 잠시 주시는 것에 불가 하는 것이다. 여행객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타야 할 열차의 표를 사서 잠시 기다리는 대합실과 같은 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 땅에 인생은 언제든지 부르면 갈수 있게끔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고 했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희망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주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했던 교훈이었던 것이다.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불만족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원한 것들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찰나에 지나가는 것들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삶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쇠하지 않는 영광 앞에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어 하는 썩지 않을 소망을 가진 인간들이 잠시 이 세상에 썩어질 것 들을 위해 살아가면서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세상도 지나고 정욕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이 계신 보좌는 썩지도 아니하고 쇠하지도 않고 영광 가운데서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는 소망을 본향에 두었기에 나그네 길을 지나는 동안에 좋은 집을 짓지 않고 영원히 살 터전을 마련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는 내일이라도 떠나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너희들아! 너희의 본적지는 하나님 나라이기에 그 나라에 소망을 둔 백성들이 되어라” 고 하시는 것이다.
또 다른 교훈은 하늘에 계신. 이란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도움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동기로 예수를 믿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 나오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 줄 때 그들이 교회 나오게 된 이유와 목적이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변화되면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된다. 깊이 은혜를 받고 나면,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없이 살수 없네]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주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묵상할 때 우리를 얼마든지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란 것을 깨닫게 하고 싶으신 것이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 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시고 우리 인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은혜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도저히 살아 갈수 없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세상에서 포기 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신념 속에서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절망적인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그분으로 인해 소망이 있다는 사실과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늘 위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주목 하고자 한다.
‘하늘에 계신’의 의미는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강한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을 찬송할 때 예외없이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서로 상기시켜주는 일을 즐거워했다. 높은 하늘에서 온 땅을 두루 감찰 하시면서 도움의 손길을 뻗치시는 하나님이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지만 효과가 미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외치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 많고. 선교적인 한계에 부딪히는 때이기도 하다. 세상의 도덕적인 상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도도하게 흐르는 흙탕물에 맑은 물을 한 대접 붓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절망에 붙들릴 때가 많다. 우리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세상은 비웃듯이 세상은 변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 들은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라는 것이다. 지금도 하늘에 계셔서 당신이 원하는 나라, 당신이 원하는 교회, 당신이 바라보시기에 준비된 영혼에게 지금 이 시간이라도 하늘에 거룩한 능력을 부어 주셔서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실 수 있는 그 하나님, 그 하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고난 받던 시대의 선지자나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시대에서도 낙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 인간의 많은 사상과 철학 속에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실 수 있는 하늘에 능력을 우리들에게 부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초라해지고 교회가 세상을 향해 굽신거리며 아부하는 이 비굴한 교회의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오히려 받아 들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은 묵은 땅과 같이 굳어졌지만 하나님의 권능을 이 땅에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이란 것으로 기대와 소망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오늘도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하늘에 있다고 고백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늘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티끌과 같은 존재들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주기도문의 삶의 출발이다.
2. 하나님 아버지 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가르치기에 앞서서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기도를 할 때 응답 받을 제목에 매달리게 된다. 관심의 초점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 이것이 가장 간절하고 절박하게 된다(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에 축복을 주시는 것이 절박할 테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을 주시는 것이 절박할 것이다). 많은 기도의 응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견고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가하는 회의 아닌 회의를 느껴 보기도 한다. 이런 모든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도록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 수식어구를 동반하고 성경에 나타난다(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능하신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너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고 그분이 너희 아버지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님이 가르쳐 주셨다. 구약 성경 예레미야 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를 성취하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나님 자신이 누구인지 예레미야에게 반복하여 가르쳐 주신 후에 부르짖으라고 요구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렇게 기도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나 여호와가 일을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주의 말씀을 외쳤지만 그의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외쳤지만 그 백성들은 불순종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배척하고 자신을 옥에다 가둔 그 백성들을 보면서 낙담하고 좌절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내 말에 순종하여 예언하고 있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그 환경을 인하여 네가 투옥된 형편을 인하여 나 여호와가 아무 일도 행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생각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일을 성취하는 여호와라.” 그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후에 예레미야에게 부르짖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렸던 대제사장의 기도를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 땅에 두고 가는 모든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후에 생겨질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때 예수님은 위대한 기도를 시작하시기 전에 앞서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란 사실을 상기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유명한 대 제사장의 기도를 올리셨던 것이다. 죽음의 위협이 닥쳐오고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그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싶으셨다. 친밀한 아버지, 그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시려는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상기 하면서 예수님은 기도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광경을 히브리서 기자가 다시 회상 했다. 통곡과 눈물로 기도 하던 예수님이 바라 보셨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빼놓지 않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하실 이에게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했다.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깊이 먼저 묵상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쳐 기도 하고자 할 때 기도의 출발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누구신지 먼저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언제든지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었다. 땅에 있는 인간들이 감히 도전할 수 없고 반항할 수 없는 .존재에 있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있는 우리가 기억하고 나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지를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끝에 의하여 창조 되어진 피조물에 불가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에 살아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바람 속에 흩어지는 진토와 같은 인생의 존재다. 이사야 선지자는 4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사람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맞아들이지 못하게 막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쉽게 잊고 살아가는 인간의 교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피조물이라 생각한다면 교만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이 기르신 한 마리의 양이라는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탁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문 앞에 간 사람들,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 버렸던 사람들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안다. 사람은 한낮 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기도문의 첫마디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분임을 알고 출발 하는 것이다. 낮아짐 없이는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그 사랑을 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왜곡된 종교로 데려 가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에 흐르고 있는 뚜렷한 사상은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시라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출발은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열정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에서 출발 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두려운 하나님 일뿐 아니라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그것과 똑같이 하나님이 아버지란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와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만 있다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란 사실만 안다면 방종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자유화 되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구별됨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방종과 타락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의 본보기이다. 그럴 때 마다 강조되었던 교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뛰어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교리가 많은 사람들을 방종으로 흐르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대의 이런 어리석음과 결별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나 여러분들의 삶과 깊은 속을 감찰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외식인지 진실인지, 샅샅이 살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진정한 참회와 회개도 없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다는 방종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자로서 적합한 자가 될 수 있겠는가?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를 위하여 박해 받기를 싫어했고 자기 입맛에 맞는 진리를 골라서 먹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들의 특징인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그 마음을 우리 속에 다시 심어야 한다. 어디로 가든지 방종하던 세대 가운데서 세상은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는 한줌의 진토임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 겸비하며 두려워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씀이 우리가 공경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보여 주었다면 뒤에 나오는 우리 아버지란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는 그 하나님과 한 가족 관계라는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아버지라고 믿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혹 은행장이라고 생각 하지는 않았는지? 강한 완력을 지닌 해결사라고 생각 한 적은 없었는지? 지혜를 빌려주는 아이디어 뱅크라고 생각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는 믿음 없이는 주기도문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깨트려 진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녀를 드물게 밖에는 만나 보지 못했다. 깨트려 지지 않는 가정에서도 자식으로 상처 받는 부모도 있고 부모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자녀들도 많이 있다. 가정이 올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들의 신앙 교육도 똑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란 단어가 마음속에 깊이 다가 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굽어진 아버지의 경험을 가지고는 성경을 투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진정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아버지는 아버지로 돌아가야 하고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성경이 그리고 있는 문맥에서 이상적인 아버지를 봐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닮은 아버지다. 사랑과 공의와 거룩함과 지혜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그 아버지인 것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약간 멀리 있고 멀리 있으면서도 아주 친밀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으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버지. 하늘에 계시면서도 땅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깊이 개입하셔서 이끄시는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허울아래 하나님을 시시각각 우리의 필요한대로, 은행장으로, 의사로, 해결사로. 하나님을 사용하고 그 관계를 일회용 적으로 버릴 때가 많은 것이다. 이런 삶은 많이 기도해도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과 그의 손에 기르는 어린 자녀가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과 훈육과 돌보심 안에서 살아감을 힘쓰고 그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긍휼과 인자하심 속에서만 우리가 진정 인간다운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살아 갈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말은 또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환란이 많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신뢰 할 수 없고 인생을 향한 자기의 계획을 신뢰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를 붙들고 살도록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이란 사실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마지막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인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친자녀라는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기면 살아 갈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경험으로 또는 물질로, 이 세상을 버텨 보려고 한다. 힘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기의 고난과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진정 지켜 주지 못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우리가 그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자녀요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 입을 곳이 오로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자주 사용했던 호칭이 “아버지여”였다. 아버지를 붙들고 주님은 승리하셨다. 정함이 없고 쉽게 흔들리는 것은 우리 안에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환경을 바라보고 환경의 풍파를 바라보면서 고뇌하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 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이다”고.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아버지를 붙들고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매 때마다 말씀을 전하는 나 같은 사람도 “내가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나” 하는 좌절 속에 빠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의 비밀을 좇아 살아가다가도 한 순간에 내 안에 있는 가망 없는 죄성. 나를 통해서 도무지 변화되지 않고 있는 세상, 좀처럼 변화되지 않은 교회. 이런 것을 접할 때면 모세나 엘리야의 기도가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때 마다 조용히 옛날에 쓴 책 중에서 몇 페이지를 읽어본다. 내가 붙들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 그 속에서 오늘 우리의 시대를 향해서 부어주신 꿈. 나에게 말씀 하셨던 놀라운 부르심들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살고 싶은 절박한 소원이 다시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관계를 붙드는 것이다. 근거도 없이 높아질 때도, 떨어질 때도. 관계에서 떨어지므로 짓밟히듯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 갈 것 이란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형통할 때나 위기에 닥쳤을 때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붙들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삶인 것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로마로 압송되던 사도 바울이 유다글로라는 커다란 폭풍을 만나서 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버리고 모든 군사들이 죽음의 위협에 일주일 동안 휩싸이게 되었다. 모두 두려워하는 군인들에게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이 안전하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용맹스러운 군인들을 안심시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포승줄에 매인 죄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기 때문에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탈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당신 닮게 하시려고 우리의 방종을 내버려 두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단지 방종하고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계기와 수단을 만들어 준다면 청문회에 선 누구처럼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 아버지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효자소리 듣고 살았을 수도 있는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나니 그것이 방종의 기회가 되어 버리고 나니 아버지와 나라 앞에 심지어는 교회 앞에 부끄러움을 끼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지만 우리를 무조건 사랑 하시려고 아들 삼으신 게 아니라 당신을 닮게 하시려고 아들 삼으신 것이다. 돈이 많은 집안의 자식들, 명망 있는 집안의 아들들, 진정한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아들과 생각하기에 관계는 유지하고 있지만 내어놓은 자식은 꼭 있기 마련이다. 명예는 고사하고 저 아들로 인해 집안이 욕먹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자식.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그런 염려를 불러일으키는 자식이 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구원받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부끄러운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자라가야 한다. 왕이신 하나님의 집안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왕가의 풍토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빈민가에서 굴러먹던 천한 행실과 사악한 행실들을 버려야 한다. 왕손으로서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 하고 나면 전에는 마음대로 살던 그 모든 것들(마음대로 살아가던 방식). 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믿기 전에는 탈세하고 사기 쳐도 잘 넘어갔는데. 예수 믿고 나면 어림 없는 행실이 되는 것이다. 은혜의 세계에 제대로 들어오면 사소한 것 가지고도 하나님은 바르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이다. 은혜 받을수록 하나님은 사소한 것까지도 간섭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아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어느 청교도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크게 닮는 것이라고 말했다.
3. 하나님 아버지 ②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기에 앞서서 우리가 기도 하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생각 하도록 명칭을 먼저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로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 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기도 함에 있어서 먼저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실려고 이런 호칭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아버지란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인 당신을 본받게 하시려고 끈임없이 훈련 시키시고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녀 만들려고 애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을 닮은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다.
인간의 부모는 자식들이 부모를 보면서 부모의 저런 면은 본받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절대 필요하다.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불완전한 아버지가 아니라 완전한 아버지시다.
아무리 본받아도 지나침이 없다. 또한 아버지도 단지 낳으신 우리를 당신의 성품을 본받는 자녀로 기르시려고 애 쓰시는 것이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기뻐하는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배우게 하고 싶으셔서.
명목상의 아들이 아닌 실제로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우리를 보면 아버지가 생각 나는 그런 아들 되게 하실려고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신앙 생활의 모든 갈등은 . 아버지는 아버지 닮아 가게 하려 하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아버지를 본받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신앙 적인 갈등.) 그리스도인으로서 많이 성공 한 것은 많이 주님을 닮은 사람이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 마다 하나님이 생각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친밀함이 필요하다.
법적인 관계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하실 때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풍성한 구원의 은혜와 진정한 축복들을 누리면서 살아 갈수 없다.
더 크고 놀라운 특권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누리는 친밀함인 것이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 하게 된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부음 바 되어질 때 기쁨으로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이 느껴 지지 않는 사람은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다.
이론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이고 현실 적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친밀하게 내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내 인생 가까이 다가 오셔서 내 인생을 지키는지를 감지하고 경험 할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 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쓸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 형식적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명을 지킬려고 하면서도 마음에 기쁨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한나라에 대통령이나 왕이 되면 자식들이 의시대고 다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수 있게 된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과 세상이 부러워 할 수밖에 없는 특권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종종 한주간을 살면서도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 지기도 하고 멀게 느껴 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껴 지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영적인 사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생각 하고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신앙적인 시각에서 생각 하고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을 판단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영혼이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늘 젖어 들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지만 신앙 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생각 할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런 친밀함을 느끼면서 아버지 앞에 나아오도록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일주일을 잘 살았다(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살았다.) 고 하는 특징은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곁에 계시는 것 처럼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잘 산 삶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갑자기 멀리 계신 것 처럼 느껴 지고 하나님을 불러도 그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살아지고 나면 우리의 인생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 하실까? 이런 식으로 생각을 잘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 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런 것 들은 마음의 상태에서 오는 것이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 스러울때는 즐거운 것을 봐도 즐겁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가족 관계에서 자식이 아버지와 느끼는 그런 친밀함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그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과 교회의 상황을 볼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봐서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고 스스로 인생을 바라보면서 이런 것 들로 하나님이 마음 아파 하시고 저런 것들로 하나님이 근심하시는 것을 예민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떨때는 논리적으로 해명이 안되는데 하나님이 자신이 있는 자리를 기뻐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 질때가 있는 것이다. 나의 태도 말 행동들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자가 없는 것 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 것 처럼 생각 되어지는 것.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기쁨과 은혜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가책도 충만 한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이런 일을 할수 없다.
하나님도 성령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친밀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간 순간 남이 맛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맛보고 남이 경험 하지 못하는 참된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과 놀라운 은혜만을 경험 할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서 매우 가슴 아파 하시는 아픔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죄로 무감각 해지면 하나님의 기쁨도 아파 하시는 것도 느껴 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적인 정서가 없는 것이다.
애통 하여야 일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아파 하지 않고 기뻐 하고 즐거워 해야 할 일 앞에서도 즐거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와서도 늘 그 표정이 그 표정으로 시한 폭탄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와 친밀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 생활의 모형이 되야 한다.
여러분이 만약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들은 거의 없다. 거기서 누릴수 있는 것은 하늘나라에 속한 독특한 기쁨이다. 슬픔은 없다. 그곳의 생활은 성도들이 하품이나 하고 기지개나 켜면서 지루하게 지내는 일은 없다.
성경이 그려 내는 천국 생활은 항상 기쁨과 은혜와 한없는 사랑에 가득 찬 .친밀한 것들이 느껴 지면서 살아가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 인것이다.
더 이상 복되다고 말할 수 없는 그곳이 바로 하늘 나라이다.
신앙 생활은 그런 천국 생활을 어떤 의미에서 미리 맛보면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우리 마음 속에는 이전에 경험 하지 못했던 기쁨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가 경험 되는 것이다.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큰 기쁨이 우리의 마음과 심령 속에 가득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쁨의 핵심 부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그것이 친밀함 속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보내었던 말 할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 한다고 한 그런 기쁨이 여러분들 속에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셔서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은 먼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친밀함을 맛보고 그 관게를 즐거워 하는 자리로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 생활은 건조 하기 짝이 없는 신앙 생활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형식 적인 관계가 되어 버리고 진실한 사랑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체험 되어 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효도는 평소에 소원했던 부모님과의 관계를 물질로 보상 하든지 선물로 보상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니다.
진정한 효도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관계를 그 부모와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으로 부모를 소외시키는 사람은 무엇으로도 그 부모의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를 대치 할수 없는 것이다.
지혜자는 아들에게 마음을 달라고 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우리가운데는 가족들과의 관게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이니 이제는 아버지인 나를 본받고 너희는 나를 본받은 아버지가 되어서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아버지에게서 본 받은 것 들을 다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효도는 우리가 부모에게 우리의 친밀함을 보이는 것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모와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할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들께 얼마나 그런 친밀함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 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친밀함을 누리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신 것 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애를 쓰고 부모를 위해 애쓴다면 우리의 관계는 새로워 질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생각 하는 그 효도와 꼭 같은 것들을 요구 하고 계신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은총을 기억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떨어 질수 없는 아버지임을 알고 진심으로 친밀함을 느끼면서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이다.
좋을때만 이 아닌 고통 을 당하고 .그 어떤 어려움도 그 아버지는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어떤 막힌 담도 장애도 없는 그런 친밀한 관게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죄 때문에 파괴된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그 크고 넘치는 사랑이 있지만.스스로 그 사랑을 거절하고 그 친밀함을 향하여 등을 돌릴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 오웬이 말하기를 죄를 짓는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죄로부터 돌이키는 삶을 살 때 한 순간에 친밀한 사랑을 회복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늘 유지 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품을 본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자녀 만든 것이 단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서 용서를 빌고 정결케 될 뿐만 아니라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예배 할 때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구원 시켜 놓으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찾는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친밀함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면서 이후에 아뢰는 모든 기도 제목들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 있는 친밀함 때문에 늘 감격하고 기뻐 할수 있는 그런 삶이 이런 기도에 토대가 될 때에 이 주기도문이 의미있는 기도가 될수 있슴을 성경이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넘치도록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아버지는 인간인 아버지와 달라서 완전한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하나님을 기뻐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최고의 범죄이고 죄악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버지 이신 줄 모르기에 친밀함을 모르고 참된 사랑이 없이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못박아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그의 백성 삼으셨을 때 우리를 향한 넘치는 그 사랑을 보여 주셨다.
간혹 죄로 인해 그 친밀함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닫게 해 주셨던 놀라운 사랑을 생각 하며 다시 그 마음으로 돌아 갈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아버지의 그 사랑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시면서 고난 가운데서 지키시고 시련 가운데서 아파 하시는 그 아픔보다도 더 뛰어난 아픔으로 고통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 된 것이다.
이 세상은 온전한 가정보다 깨트려 지는 가정이 훨씬 많다. 부모를 닮지 말아야 겠다는 자식들이 훨씬 많다.
육신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데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었다. 일년에 열흘 정도 얼굴을 볼 수 있는 그런 가운데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친밀하게 느껴 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깨어진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비교 하면서 뭔가를 생각 해 볼려고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생각 한다.
아주 행복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
우리는 그 반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경험 하고 이것이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훨씬 쉬울때가 많이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고아나 친척 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육신의 부모로 부터는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러메도 불구하고 육신의 세계에서는 비교 할수 없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비교할 때 없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자식이 고통 받고 시련 당할 때 진심으로 눈물 흘려 줄수 있는 사람은 부모 밖에 없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도덕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존경 받을을 만 하지 못하고 혹은 여러가지 이유로 여러분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할찌라도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아픔을 가장 뼈속깊이 느낄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들의 부모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생각 나게 하시는 방법을 많이 사용 하셨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교회, 진리를 따라 세워진 가정, 그 하나님 앞에 인격 적으로 승복하고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런 개인과 가정이 이루어져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공경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그림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갈등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데로 이루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아야 할 관계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존경 하고 경외 하여야 할 관계가 무심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와 아버지와의 괸계를 배워 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깨트려 지고 망가진 관계들이 참된 사랑으로 치유되고 고쳐 지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변화들을 우리가 경험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아서 망가진 가정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육신적으로는 자식 이지만 신앙적으로는 부모가 되어서 그런 가정들을 지키고 싸메어 갈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주님이 기뻐하는 삶이 될것이다.
아버지란 말을 통해서 또 하나 우리가 받는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이시란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때로 자녀들은 내 돈 내놔라고 한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하는 아버지, 무의 도식 하는 아버지, .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고 아버지는 가정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그 아버지의 번 것으로 그 자녀들이 풍족함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 처럼 아버지란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 들을 모두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시되 물질로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공급 해 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기도문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름으로 우리의 인생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대어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다.
모든 위로와 도움이 하나님 뿐임을 알고.내 인생을 책임 져 주실 것이란 것을 알고 하나님께만 기대어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부모들이 자식들이 기대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 하는 것 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 하고 그 하나님께 기대면 살아가는 그런 삶.
내가 의지 하는 그 하나님으로 인해 위로와 용기를 얻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란 말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것을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서 시련 가운데서도.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호소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 갈수 없는 인생인 것 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고 호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 자녀들을 기뻐 하시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말씀 속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주기도문에 앞서서 아버지가 하나님 되심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기억 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당신의 손으로 빚은 백성들이기에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사랑으로 관계를 맺었기에 우리와의 관게를 버릴수 없는 놀라운 사랑. 이런 것들로 살아가는 인생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포기 할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포기 하고 살아가는 가족 관계도 많다.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보내고도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자식을 먼저 보내고도. 다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게는 묻어 둘수 없는 관계이고 떠나서는 살아 갈수 없는 관계이다.
범죄하고 죽고 싶은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 관계 속에서 숙명과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운명과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은 분을 알고 그 하나님께 기대어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범죄한 사람들을 용서 하시고 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사유함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잃어 버리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의 성령으로 참된 사랑을 회복 시키시는데.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아버지란 사실을 토대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때때로 하나님과의 관게가 단절 될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단절 하신게 아니라 그 침묵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 없이 살아가는 삶.이것이 얼마나 건조하고 목마르고 견디기 힘든 삶인지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참 하나님 이신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저버리고 우리를 향한 신실하심을 포기한다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 가지 못하고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 이다.
누가복음 15장에 아버지의 사랑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를 떠났다. 고통이 찾아 오고 나서 비로서 아버지의 생각이 나게 됬다. 이것이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 나게 만들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생각 조차 하지 않고 이국 땅에서 허랑 방탕 하게 살아 갈 때도 동구 밖에서 그 아들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 아들이 용납 될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원하셨던 것은 그 아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나 물질이 문제가 아니라 아들과 잠시 잃어버렸던 그 관계. 아들을 통해서 다시 찾는 간절함의 바람이 있었기에 아들이 돌아 왔을 때 눈시울을 적셨던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인생의 갈등을 종식 시키고 고통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이지만 일시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게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뻐하고 아들은 지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체험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며 진정으로 살아있는 인생이 아니라는 뼈아픈 교훈을 가슴에 묻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붙들고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서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며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이요 보람 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 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껏 우리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해 달라고 .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되게 하셔서 일평생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진심으로 마음을 드리고 충심을 바쳐 .세상이 넘 볼수 없는 자식과의 놀라운 그 사랑을 느끼고 소유하면서 마음껏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이신 것을 온 세상에 보여 주는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기도하자
4.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지난 설교 요약: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만으로는 살아갈수 없다(법적인 관계만으로는 안됨)
친밀한 관계를 나누어야 한다. 그럴때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독특한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준수 하는 것 즉 도덕적인 실천 그것이 신앙 생활의 본질이 아니다.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을 나누고 살아갔었다.
그렇게 못했다면 무지와 죄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지.... 그렇게 부를 때 아버지께서 감동 하신 것 처럼 우리도 인격적인 관계로 그 하나님을 기쁘게 생각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기뻐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세상을 살아갈 이길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 온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가부장 적인 사회에서 계시 되었다. 하나님의 호칭을 아버지라고 예수님으로부터 배웠을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개념에 주님은 호소했다.
가정을 책임지고 가족들의 궁핍과 필요를 위해서 애쓰고 수고 하므로 그 수고의 열매를 은혜로 먹고 사는 그 자식의 관계를 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므로 께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앙이 깊어지면 은혜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볼 만큼 선교의 위대한 위업을 이루고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아버지처럼 보였을 때 그는 오히려 “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모든 경험 모든 달란트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깊이 잠길 때 하나님 앞에 겸비해 질수 있다.
주일날 생업에 종사 하면서 교회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손으로 자기의 생계를 책임 진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s나는 공로 없으나 주님이 베풀어 주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아의 출발이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믿음이 확실한 사람보다는 도덕적으로 온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는 것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관심이 많으시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뻐 하시는 것이다.
이전에도 ... 지금도...앞으로도.... 주님을 알기에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살았던지 주님이 공급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걸음이 여기 까지 온것이다.
공로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먹이고 입히면서....우리를 이끌어 오신 것이다.
아버지란 말 앞에서 우리는 떨어져서는 살아 갈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 문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이 주기기도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관계를 포기 할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주님이 물으시면서 우리를 주기도문의 정원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를 “너희들이 기도 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일차적으로는 우리아버지라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회중의 관점에서 보면 사도들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 할 때 부르라고 했던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될수 있었는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차가운 벽을 쌓고 살아가는 것이다.
6-70년도에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양을 불러 일으킨 실존주의 가운데 카프카 라는 사람이 있었다.
독일 출신이다. 그의 책속에 변신이란 제목에 실존주의 경향을 띈 소설이 있었다.
주인공이 자고 일어나니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었다. 가족들은 울고 어떻게 하면 다시 가족으로 돌려 놀을 수 있을지 토론 했다. 많은 갈등을 의 장면이 나오다 마지막에 그 벌레는 죽었고 가족들은 바로 그날 남은 가족들은 피크닉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냐면 심지어 가족 관게에서도 철저하게 우리가 될수 없이 소외 당한체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과장일지 모르지만 이런 묘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것들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고 믿게 되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 속에서 벽을 쌓고 하나 될수 없고 또 하나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만 하나 된다고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 질수 없다.
진정한 샬롬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 되고 그 화목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됨을 배우면서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도저히 하나 될수 없는 관계인데도 예수님께로부터 너희는 기도 할 때 그 아버지를 혼자 소유 하고 있는 “나의 아버지” 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의 아버지” 라고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도록 명령 받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우리라고 할수 없는 사람들, 이해 관계도 다르고 살에 추구 하는 바도 다른데...모든 운명을 공유 한 사람들 처럼 우리라고 부르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호칭하고 있는 것이 주기도 문의 가르침이다.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가 될수 없는 것이다.
너는 너 , 나는 나, 아내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부모와 상관 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형제를 포기하고 동기간들과 의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형식적인 관계는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라고 하는 관계는 깨졌기에 물질로 인해 법정에 까지 호소 하고 살아 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아름다운 대명사를 찾아 보기 어렵다. 모두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유익을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의 만족 안에서의 한계 안에서 만 우리가 유지 되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과 우리의 욕망이 충돌할 때 우리는 다시 우리를 깨트리고 나로 돌아 가는 것이다.
인간은 많은 군중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늘 외로운 것이다.
45일이 넘어서 이웃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발견 했다는 소식들은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과 손잡고 운명 공동체 적인 의식으로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들만 우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로부터 우리라고 말을 듣는 그들이 우리라고 말해야 한다.
운명을 함께 나누고 공동체 적으로 나누는 그런 우리가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 할 때 그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라고 불러라 한다고 말씀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 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문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왔고 만났다. 그곳이 바로 교회다.
진정으로 우리 아버지 라고 부르기 전에 그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의 주님을 통해서 우리가 된 사람들이다.
십자가를 알고 그 사랑 앞에서 죄인 인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믈 알고..... 그리스도 없이 사는 인생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 되기로 마음 먹었을 때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 되겠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면 이런 저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유지 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조건부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오로지 나를 살리시고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그 죽음은 나를 위한 전적인 죽음이었고 십자가 없이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노여 있슴을 깨닫고 깊이 회개 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그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의 눈에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를 볼 때 나 위해 고통 당 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우리는 세상이 눈에 보일 겨를이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순결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얼마나 부당 하고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참회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세상도 없었고 심지어는 우리도 없었다.
부모가 반대 해도 그 부모와 인연을 끈으면서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 갈수 밖에 없다고 고백을 해야 했다.
죽음의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을 얻는 길인지 알았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줄 알았기에 그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앙을 택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우리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하셨다.
관계 없는 나와 너였던 사람들을 우리로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을 생각 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참회 하지 않았다면 그들과는 우리가 될수 없는 것이다.
그 일 이면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었다.
주변에 많은 지체들 속에서 많은 허물을 본다. 교회에서 서로에게 따뜻하게 못해주는지에 대해서 불평하지만.......... 교회는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예수 믿을 사연이 없었으면 절대 예수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연이 없어서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안 믿고 불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도 진지하게 얘기 하다 보면 그들도 어느 정도는 죽음 후에 뭔가가 있슴을 생각 한다.
안 믿을 사연이 있어서 그들이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을 사연이 없기에 안 믿으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살아온 과정을 뒤돌아 보면 소설을 쓰고도 남을 만큼 수많은 길을 헤치면서 살아왔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 주인공의식이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는 최대의 주인공이다. 그런 사연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존재 그 자체가 신비해 보이기 시작 할 때 비로소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를수 있다.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걸어온 길을 알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존재의 모습을 보면서 그 뒤에 묻혀 있을 수많은 인생의 여정을 바라보면 신비한 마음이 들 수 있는사람.......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온 우주를 보고 감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 자체를 보면서 신비해 하고 감격 할수 있는 사람이 영혼을 사랑할 마음을 갖기 시작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이렇게 구원 해 주신 것이다.
십자가로 구원 받았을 때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우리 밖에 없는 것 처럼 .........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구원 하시기 위해서 전적으로 나의 인생에만 메달리신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우리의 인생에 주님이 간섭 하신 것이다.
우리의 삶을 모두 지켜 보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 적인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 까지 다 지켜 보신 것이다.
모든 삶은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가치를 안다면 너희는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 적으로 구원 하셨지만 그들은 이제 우리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우리를 떠난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거듭났다고 하면서 삶의 가치와 꿈이 거듭 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철저한 이기심이고 자기 중심 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이 모난 사람을 용납해 주도록 강요 하면서 마치 그것이 복음인 것 처럼 외치는 사람들은 외곡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우리라고 부르도록 되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 생활이 힘겹게 느껴 진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힘겨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힘겨운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를 주라 고백하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연합 속에서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도록 경륜 하셨다.
우리가 만날 때는 관계 없이 주님을 만났지만 그 다음에는 하나님 조차도 개인 적으로 소유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 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려고 생각 하지 않는 한 공동체와의 관계를 포기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땅에 부흥이 일어나기까지는 진정한 우리는 없다고 하셨다.
부흥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 된 것 과 우리가 우리인 것을 가장 잘 드러 내 보여주시는 그런 때라는 사실을 목사님은 고백 해 주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강림 하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복음으로 깨트리시고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그때에 놀라운 유니티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 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한 가족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싫으나 좋으나 우리는 한 가족이다. 가족을 모두 버리고 아버지만 얻을수 없는 것 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모든 공동체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할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 석은 사람들이다.
때로는 정말 거친것들이 많고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아예 자유롭게 하나님 한분과의 관게를 유지하면서 신앙 생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만나게 된다.
이런 사람은 큰 교회를 좋아한다. 예배시간에 찾아와도 누구인지도 모르고 숨을 수 있을 만큼 큰 교회.......적극적으로 그 교회 회원이 되기를 힘쓰지 않으면 수가 많으므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교회....... 그들은 자기 할 일은 한다고 말한다.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하고 ........대신 찾아오지도 말고 홀로 와서 예배 드릴 테니 간섭 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이런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지체들 간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회개 하고 용서 하고 용서 받기도 하고 서로 싸메기도 하고.........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명력 있는 신앙 생활을 유지 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유혹을 받을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불리워 지기를 소원 하셨던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한 가족이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가 공동체 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으며 이미 주기도문의 정원에 들어가기 전에 그 대문입구에서 걸리게 된다.
주기도문은 그 아름답고 화려한 정원에 들여 보내기 전에 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진단 해 주는 것이다. “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에게는 공동체가 있습니까?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체들이 곁에 있어서 그들을 진정으로 우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요한웨슬레는 말했다. 하나님은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없다고........
개인적으로 탁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꽃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되어간다.
교회 일하는 사람을 봐도 군에 다녀 온 사람들은 다르다. 직장 생활 많이 하면서 다듬어 진 사람들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 지를 안다. 어떻게 처신 하는 것이 공동체 생활을 유지 해 가는 줄 아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 한 사람은 이런 사회 생활을 통해서 깍이지 못한 사람이다.
이런 것이 신앙 생활과 바로 연결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런 것이다.
세련 되어 진다는 얘기는 나쁜 얘기가 아니다.
신앙 공동체이든 세상에 공동체 이든 공동체 이기에 공통으로 유지 하고 있는 것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사회에서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인사 하지 않고 지나 가면 기분이 나쁘고 교회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그것이 공통된 사회적인 특성 때문이다.
교회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수준 높은 것을 얘기 하기 전에 먼저 함께 살아 간다는 것을 기억 해야 한다.
어른 만나면 인사 해야 하고 어른 들을 젊은 이들 에게 인격 적인 가르침을 줄수 있어야 한다.
사회 생활 속에서 통할 수 있는 예절을 교회 생활 속에서도 지켜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지체를 아프게 하거나 고통이 되지 않을까....? 생각 할줄 알아야 한다.
깊이 기도 해서 하나님이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시를 받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은 자유로 할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은 비 정상 적이다.
교회 공동체와 세상에 공동체가 다르기에 무시 되어야 한다고 하는 생각들 때문에 우리라고 하는 것들이 깨트려 지는 것이다.
나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신앙 생활 한다고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매 순간 마다 사람들에게 잔소리 하는 국민 윤리 같은 시간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 가끔은 필요하지만.............
교회 생활 하면서 생각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 말, 몸가짐.........이런 것들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
교회 생활은 삼가 하는 마음이 있는 교회 생활이 되어야 한다.
깊이 기도 하면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은 다음 문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것들이 많다.
여의도에서 개신교 집회를 했는데 쓰레기가 열 트럭이 나왔다고 했다.
일주일 후에 카톨릭에서 일백 만 명이 모여서 미사를 했는데 청소부도 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고 한다.
카돌릭이 영성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교회 생활 하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지나치게 영적인 것 이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 하는 사고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 앞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통성 기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것은 자기가 가지고 가면 된다.
교회에서도 그런 것 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유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불쑥 그릇된 말로 아프게 했다면 싸우고 화해 하면 쉽게 풀릴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 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끌어 앉고 깨트려 진 관계에 대해서 자첵감을 가지면서 마음을 삭이고 삭여서 용서하고 진정으로 하나가 될려고 하는데....그것이 오늘 아침에 기도하면 내일 아침에 일어 나지 않는다. 그런 순발력이 뛰어 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무슨 사건 이 또 터지고 .......계속 해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이 뭔가 영적으로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럴수도 있지만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기 전에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인 특성과 인성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야 한다.
왜 그렇게 남들을 시험에 들게 만들고 고통에 빠트리는지.............?
말할 때 한번 생각 하고 말하고 행동 할 때 한번 생각 하고.........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서로 각자에게 필요를 안주는 사회적인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걸로 따지면 군대 같이 잘 되어 있는 곳이 없다.
그렇다고 군대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규율 때문에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를 떠난 신앙은 없고 신앙을 떠난 공동체도 없고 십자가는 공동체를 만들었고 공동체는 십자가를 통해서 유지 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입어서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아버지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정으로 우리가 될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제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구속 받은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 해야 한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깊이를 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와 같이 더럽고 추한 인생을 찾아 오신 것이 감격이 되는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힘입고 그 십자가가 내게 어떻게 나타 났는지 깨닫고 생사간에 그 사랑을 붙들고 그 사랑을 의지 하면 살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온 삶으로 받아 들이고 살아 갈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자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진정으로 주 앞에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긍휼히 여긴 것 처럼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삶 속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내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하지 않고는 우리가 될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 해 주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안에 있는 쓴 뿌리와 교회라고 하는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잘못 된 것들을 날마다 주의 성령의 은혜와 말씀으로 제거 하면서 온전한 교통이 있는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메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공동체를 허락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 해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앎으로 전능하신 그 분 앞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도록 부르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고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완전 하지는 않지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해 고난 받는 동안 왜 그렇게 그의 나라를 사모했는지 깨닫게 될것이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첫머리에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 중에는 성숙한 사람도 있고 미성숙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을 때 우리가 품기를 원한 마음은 ...” 그런즉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 의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 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셔서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주님이 당부하신 공동체의 특성을 우리의 신앙 생활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들어 보려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길은 오직 하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이 자기를 대적 하고 신령한 은혜에 대해서 눈뜰 줄 모르는 소경과 같은 제자들과 우리들을 찾아 오셔서 우리가 납득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가 납득되도록 자기를 낮추시고 진리를 이해 할 수 있게 하려고 우리의 눈높이 만큼 자신을 낮추어서 우리의 수준으로 말씀하시기를 기뻐 하셨던.... 그 주님의 낮아지심을 배우며 우리는 우리가 우리 인 것을 배워 가는 것이다.
그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이런 삶을 원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도 앞에 부를 적 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처럼 지체들과의 연합을 사랑하고 있냐고 묻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 이다.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기도와 소명으로 이루어 져 있는 주기도문은 첫번째는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두번째는 나라에 임하옵시며, 세번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이것은 하나님편을 주목 하는 기도라고 말 할수 있다.
네번째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것은 우리 편을 바라본 기도라고 말 할수 있다.
획일적으로 잘라서 말 할수 없지만 대게 그렇게 구분을 해 본다.
오늘말씀 드리는 첫번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기도였다.
이름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 것 이다.
예수님의 기도 중에 첫번째 왔던 이 기도는 아버지 즉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첫번째 간구였다.
이 기도의 내용을 살펴 보기 앞서서 두가지 사실을 점검 해야 한다.
이기도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니 즉석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기도의 페턴을 사도들에게 정리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에게 문자적으로 가르쳐 준 그 주기도문 을 그대로 기도 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니 당신이 늘 하던 기도를 짧은 문장으로 정리 해 보셨을수도 있다.
첫번째 간구에 앞서서 살펴 봐야 하는 것은 이 기도가 예수님 자신이 평소에 올리시던 기도 였다는 것이고 이 기도를 따라서 예수님이 살아 가셨다고 생각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기도 문이 왜 우리에게 기도를 빼버리고 빨리 예배를 끝내기 위한 주문 처럼 외워 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제시한 후에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적이 아니기에 그 기도가 마음 밑 마닥에서 우러 나오는 진실한 기도로 회복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상기 시켜 드린 바가 있다.
우리가 기억 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에 살아가시던 삶을 통하여 나타난 기도다.
평소에 하시던 기도가 농축 되어서 정리 된 것이다.
두번째 점검해야 하는 것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하는 이 기도가 첫번째 자리에 노여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는 순서가 매우 중요 한 것이다.
아무렇게나 주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뒤죽 박죽으로 섞어서 한 말들이 아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기도와 삶을 지배하고 있던 여섯가지 기도와 한가지 소명이 순서를 정함에 있어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탄원이 첫번째 자리에 온 것은
이 기도가 다른 다섯 가지의 기도보다 훨씬 중요 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도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기도 제목 가운데 어느 하나를 무시 하고 산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없다.
주기도문을 잘 주목해보며 두번째에서 여섯번째의 기도가 이 첫번째 기도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기도라는 느낌을 떨칠수 없다.
두번째 기도는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므로서 불순종과 죄악의 세력이 토벌을 당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경배하는 세력들이 이 세상을 지배 하게 될 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태극기가 대한 민국 안에서처럼 그렇게 존중 받는 나라가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 국기를 쓰레기 통에 넣고 불태워도 처벌 받지 않지만 이 나라에서는 국기를 옳바른 방법으로 간수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은 조항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 가지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가장 영광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므로서 불순종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세상이 회복 될 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일용할 양식들을 공급 받고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영육간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때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수 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해주시고 우리가 서로 용서 해주는 그곳에 주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기도 제목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시던 유일한 이유였으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셔야 했던 이유는 이 한가지 이유와 목적에 기여 할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셔던 목적이 될수 있을 정도로 첫번째 기도제목 은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첫번째 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것이다.
첫번째 기도 제목이 우리의 삶과 기도에 있어서 지배적이고 주도적인 기도 제목이 되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고쳐야 할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이름에 대해서 생각 해 봐야 한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높임을 받으소서” 혹은 주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 대신에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 했을까?
몇가지로 나누어서 생각 해보자
첫번째는 이름의 의미이다.
두번째는 예수그리스도와 주기도문을 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
세번째는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이며 왜 이것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
하나님께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 나신 분이시다.
그분의 영광과 존귀 앞에서 인간들은 티끌 같은 존재다.
그 하나님이 거룩해 지시거나 인간이 노력 하므로 영광을 받으시거나 혹은 모욕을 받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거룩을 돌린다) 는 뜻은 알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 나타난 이름 신앙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
이름 신앙 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한국 사람들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 (김자 남자 준자 입니다...) 이렇게 한다.
아들들은 그렇게 부를수 없다. 이 세상에서 자녀로서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깊은 존경심을 이름을 부르는데 사용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여섯자로 불러 준다고 해서 시골에 있는 아버지가 알아 주는 것이 아니다.
막 불러 준다고 해서 무슨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공경심인 것이다.
아버지라고 생각 하는 한 영원히 아버지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를 수 없다.
아버지의 손을 바닥에 벗어 놨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밟고 지나 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의관이 바로 아버지의 분신이나 마찬 가지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명예와 존중이 의관에 그대로 묻어 나는 것이다.
이런 신앙이 성경에 나타 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거의 동일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하찮게 생각 할수 있다는 것은 ...그런 신앙에 대해서 성경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깊은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사랑이 성경에서 동일하게 여겨 지고 있다.
성경이 이런 신앙을 보여준다.
구약 뿐만 아니라 신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았다. 거의 죽을껏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유혹과 곤란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고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 하면서.... 하나닝의 이름을 의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위한 열심과 이름을 위한 열심은 언제나 동일 하다.
신앙 생활의 가장 중심 되는 요체는 무엇인가? 율법과 선지자의 중심 되는 강령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신아의 요체를 가르쳐 주셨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체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이름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향한 열심은 이름을 향한 뛰어난 열심으로 나타 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함당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 한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분리되고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 된 사람을 말하고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세상과 나누어 지는 것 만으로 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구별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울 때 거룩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과 구별 되고(세상의 삶의 방식을 포기 해야 한다. 즐겨 행하던 일을 버려야 하고 .....)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셔서 주님 자신으로 충만해진 삶을 살 때 그것이 거룩한 삶인 것이다.
이름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었다.
우리는 그런 영광과 존귀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더 존귀 해 지시고 만물 위에 뛰어 날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시고 뛰어 나신 분이시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은 더럽혀 지기고 하고 찬란하게 빛나기도 하고 추락 하기도 하고 높이 올라 가지도 한다.
(열린 교회를 다니다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옮긴 것이다. 그 지방에 다른 교회 를 방문 했다. 그곳에 다니기로 하고 그곳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잘 한다면 그곳 사람들은 열린 교회를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열린 교회의 이름이 좋은 이미지로 나타 나게 되는 것이다.) 이름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높아지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고... 조국에서 유일 하게 소망이 있는 유일한 교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그렇게 취급 된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형들이 있는 전쟁터로 달려 갔다. 어린 소년 다윗은 그때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 한다.
모든 군사는 무서워 누구도 그를 상대 하지 못했지만 어린 소년은 물맷돌 을 들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욕하고 있는 장수골리앗에게 로 나아가서 물매를 돌린다. 그 자리에서 그 장수는 죽는다..... 그 골리앗의 목을 높이 쳐 들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 자의 목을 쳐 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현장에서 모욕을 받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도움이 되고 안되고가 문제가 아니라 ....모두 무릎 을 꿇고 경배 해야 할 하나님을 그 이름에 저주와 불명예를 돌리고 있는 상황을 그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명예나 유익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 하는 골리앗을 향해서 뛰어 나갔을 때 어떤 대가를 바라고 나가지는 않았다.
오직 주님의 이름은 내가 살아 있는 현장에서 존귀함을 받아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겨하 하는 것을 소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기의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처음 가르쳐 주시는 첫 번째 기도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 때 그 나라가 주님이 기뻐 하시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기도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명예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소중한 것이 많다.
우리를 세상에 살아 있게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 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함 이라고 주님이 말씀 하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이 상할만한 일이 생긴 다든지 억울한 소리를 듣게 되면 견디지 못해 한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을 보면서 ....멸시를 받는 이유로 자존심 상해 하고 뼈속 깊이 아파 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야 한다. 주님의 손으로 지은바 된 백성들이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면 사는 백성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 때문에.... 거룩한 속성 때문에...무한히 엎드려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이름은 높이 들리기도 하고 짓밟히게도 된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그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알리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주기도문적인 삶이 되야 한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든지 짓밟던지...)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어찌하면 주님의 이름을 위한 삶이 될수 있을지.... 생각 해야 한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탐욕의 하나님이 되지는 않았는지... 불결한 하나님의 이름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 보면서....우리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데 기역 하는 생애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6.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지난 시간--- 첫번째 기도 제목을 살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늘에계신 아버지 답게 존귀히 여김을 받고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를 만든 아버지의 목적인 것이다.
천사들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존재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리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기여 하는 삶을 살 때 존재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영광스럽고 거룩 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해지거나 덜해지거나 할수 없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 위에 홀로 계셔서 뛰어나신 전능하신 분이시다.
사람들의 살아 가는 삶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은 홀로 영화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가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기도 하고 없수이 여김도 받는 것이다.
성경 책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쓰신 러브 스토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해 놓은 세상에서 당신을 경배하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처음 인간 조상들이 주님의 보좌에 도전 했을때도 그들을 용서 하셨다.
어떡하든지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이 치료되고 고쳐 져서 원래 창조 하셨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는 세상 되기를 사모 했던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러브 스토리는 시작 된 것이다.
사랑 할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감동 적인 사랑의 서사시가 될 수 없다.
사랑 할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진정한 의미에 러브 스토리 인 것 이다.
자기를 대적하고 도전한 그 인생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따라 가셔서 불붙는 긍휼과 타오르는 사랑으로 구속 하시고 그들을 건져 내시고자 하는 대 서사시가 성경의 주제이다.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잠시 진노 하시지만 이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인애를 베푸시고 은총을 나타 내 주시고.... 구원 하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목 메인 음성을 성경 어디든지 듣게 되는 것이다.
온 세상을 창조 하신 것은 말씀 한마디로 창조 하셨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 해 내시기 위하여 한마디의 말씀이나 한 순간의 권능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되는 인내와 사랑과 계획과 마지막으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구원의 계획에 까지 옮겨 가게 된 것이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도 죄인 이지만 죄를 용납 하시고 용서 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 간다.
찬솧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 죄 밖에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시고 아버지의 참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오는 모든 날이 우리의 소망이 되었고 ... 우리는 부족 하지만 오늘도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경배 할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희망을 걸고 그 사랑 때문에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바라며 죄인을 용납 하시는 주님 앞에 소망을 가지고 나아 가는 것이다.
성경 속에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 하시는 것 보다 주님에게 더 큰 목표가 있슴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부활 하신후 세번째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 하는 장면... 요한 복음 마지막에 나타난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실패한 가운데 찾아오셔서 사도들 가운데서 지도자로 새롭게 회복 시켜 주신다.
요한복음20장까지는 실패한 베드로였는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어서 나타 난다.
그에게 주님이 나타 나셔서 하신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다.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이제는 완전히 실패한 채로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깨닫지도 못한채 복음을 전하여야 할 무리들을 데리고 고기 잡이를 떠났던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물으신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란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한편으로는 용기를 주는 질문 이었을테고 한편으로는 큰 충격을 주는 질문 이었을 것이다. 그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란 질문 앞에서 용기를 얻었던 것 같으다. 왜냐면 네가 나를 위해서 죽는데 까지 따라 간다고 했으면서 왜 나를 버렸냐고 물었다면 베드로는 아무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내가 나를 사랑했느냐” 란 말이 아닌 현제형의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 한 것이다. 세번이나.....
베드로의 고백은 전 존재적인 응답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질문을 하셨을 때 인간의 깊은 속 마음까지도 감찰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부활 하신 예수님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는 질문 앞에서 “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라고 대답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걸림이 되었던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것은 주님이 세번째 사랑한다는 대답이 끝나고 나서 말씀 하셨다.
“네가 젊어서는 띠 띠우고 네가 원하는 데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결박하여 원하지 않는데로 너를 데려 갈것이다” 고 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 하는 사건이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 진다. 로마가 망할 때 박해를 받아서 피 비린내 나는 고통을 당할때에 베드로가 도망쳐 나오면서 맞은편에서 나오는 주님을 만난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를 위해서 다시 십자가로 못박히고 가노라” 그때 베드로가 돌아서서 로마로 다시 돌아가고 거기서 거꾸로 메달려서 본인이 자청해서 죽었다는 전승이 우리에게 내려 오고 있다.
요약을 하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정말 사랑하는냐...정말 사랑하느냐..... ?” 아마도 베드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 만이 내 마음을 아십니다 했다.
“그럼 너는 나를 위해 죽어라” 고 하셨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신앙과 삶에 가장 실제적인 질문은 내가 어느 교파에 소속 되어 있느냐? 성경을 몇번이나 읽었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네가 얼마나 유능 하냐? .....더 근본 적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다른 질문은 이 질문에 예 라고 대답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장 실존 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서 “사랑합니다” 고백 했을 때 그 말은 “나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서 지난날에 모든 죄를 참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존재와 실존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대우 하는 걸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뒤편 성경 구절에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미리 말씀 한 것이다”고...
신앙 생활에 모든 고통과 갈등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마음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 보는 마음이 같지 않을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이 분주하고 헌신 되어 있슴에도 불구하고 고통에서 벗어 날수 없다.
베드로는 사랑한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베드로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최종적인 계획,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인생이 비록 이 세상에서 보면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 했으나 주님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으나 베드로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바쳐진 삶을 살았을 때... 태어나서 들풀과 같이 사라졌던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베드로의 헌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돌려 드릴 수 없었던 큰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자신은 비록 이 세상에서 죽어도 ...자신의 죽음과 헌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높아지시는 주님의 이름과 전파 되는 복음 때문에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님 자신은 이 일에 지칠지 모르는 열심을 품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왜 정죄 받아서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 죽어 갈수 밖에 없는 영혼들을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건져내시려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건져 내시고 끈임 없이 범죄 함에도 불구하고 찾을 때 에 우리를 찾으셔서 정결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참사랑은 무엇 때문 인가?
소망이 없는 죄인 들임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우리를 향해 기대를 가지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주님을 향한 찬양이 우리의 마음속에 충만한 때 뿐만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고통 할때도...여전히 함께 하셔서 우리를 고치시기를 기뻐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가슴져미는 러브스토리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는 한 영광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구원 해 놓으신 목적이 좌절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 같은 죄인 들을 통해서 사유하시고 용서 하셔서 새 사람 만드시므로 궁극적으로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우리를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시려고 오늘 이 시간에도 소망 없는 자들을 찾아 오셔서 용서 하시고 용납 하시는 것이다.
잃어 버린 영혼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서 노심 초사 하면서 살게 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이 아버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이 영광 되게 하려면 먼저 사람들이 복음 안으로 들어 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타는듯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반역하고 살아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활 시키고 아버지의 참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 돌같이 굳어진 마음에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고..... 진리의 빛으로 깨닫게 하는 발걸음이 복 있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릴수 있는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모욕을 받을 때 거룩한 분노에 사로 잡힐 자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주님의 이름에 거룩을 돌리지 않는 세상의 풍조..... 하나님이 창조 하신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이름을 경배 하지않는 무례한 인생들을 수없이 발견 하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놓은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켜 놓은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가슴이 불타고 있지 않는 냉담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 하실까?
언제나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내는 데는 열심을 내어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이름을 온 지면에 높이는 것이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온 지면에 두루 펼치는 일에 열심을 내어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 명예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
코메디언으로서 명성을 떨친 자매의 얘기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고 보니 자신의 인기가 추락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죽을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 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 진 것 같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 자매 뿐 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멸시 받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세상에 우리를 구원해 놓은 목표 인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주님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을 송축하고 찬송 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고통하고 아파 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살아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할 때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은 온 땅 위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고 사람이 있는 온 지면 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구별되고 그 아버지의 이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전능하고 거룩 하신 것을 생각 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 갈수 있는 세상...........
주님은 매일 이런 식으로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의 이름이 온 땅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히여김을 받지 못하는 세상을 두루 다니시면서 온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 했고 그 기도가 실현 되지 못하는 세상을 보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는 고통이었다.
예수님께서 온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그 기도가 성취 되지 않으면 이 고통 스러운 주기도문이 멈출수 없었는데..... 설마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 하셨을 분이 아니다.
꿈 꾸셨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꿈 꾸셨던 마음 이었고 아버지의 마음은 온 세상이 불 붙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온 세상에 인간들이 구석 구석 에 사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 한 분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존구히 여김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있는 기도였다.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기도 제목이 공유된다.
온땅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 돌리고 거룩히 여기는 세상은 어떻게 올까?
이 세상에 복음을 주시고 십자가 앞에 온 땅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참회 하고 아버지 앞에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 없이는 이 일이 성취 될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소원과 주님의 마음을 함께 품은 사람들이 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기도 문이 마음에 다가 오지 않는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멈추어 설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 살아 있슴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길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 내 보이셔서 온 땅을 뒤덮어 복음의 승리를 주시는 것 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고 예수님의 마음에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던 첫번째 기도 제목이 성취 될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야 될것과 주님의 이름에 명예를 돌리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고통하고 아파 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한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사자처럼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물원에 맹수처럼 자기 위안이나 혹은 살아가면서 경험 하는 작은 성취들로 던져지는 몇덩이의 고기 조각에 배를 불리는 ...야성을 잃어 버리고 동물안 안에 서커스 단의 짐승 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는 절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수 없다.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모두들 냉담하고 모두들 자기의 이름에 열심을 품는 이 마지막 시대에 남다른 소원을 , 거룩한 갈망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의지해서 싸우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서 낙심하고 좌절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승리 하기를 확신 하기도 하고 모두 힘을 잃어 버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용기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용납 할수 없는 분노와 죄악된 생각 들이 우리를 지배 할 때 ... 내 마음에 두신 주님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용기를 회복 하면서....잠시 쓰러지거나 넘어지더라도 곧바로 일어서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 하신 거룩한 계획과 목표를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주님이 처음 올리셨던 이 간구가 우리의 마음에도 뜨겁게 와 닿아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직장인으로 평범한 소시민으로 ..... 다양한 일들에 종사 하면서 일생을 살아도... 모두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기회가 주어 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든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명예를 돌려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 하면서 아버지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주님이 목말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이 기도를 드렸지만 마지막 까지도 이 기도가 성취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나라로 올라 가셨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주님의 이름은 땅끝에서 ..끝까지 온전히 여김을 받는 세상이 올것이다.
주님은 또한 종말론 적으로만 이 일이 성취 될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비록 우리의 힘으로는 그 일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일들이 이루어 지기를 꿈꾸며 사모하면서 살아 가는 거룩한 목표를 찾아서 살아감으로 우리도 이 세상에 거룩한 백성들로 하나님 앞에 남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 남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
기독교인의 껍질을 쓰고 살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원하는 바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목표와 소원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며 우리의 겉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속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 사람들과 꼭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주기도문의 첫번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 기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발견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부름 받은 백성 들이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이바지 하지 않는 한 우리 인생들은 썩어지는 들풀과 같고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떠라!!!
영원한 기업에 대하여 소망을 가져라!!!
썩어질 것들을 위해서 심는 사람들은 그 썩어질 것들을 통해서 멸망을 거두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심고 영원한 목표를 위해서 심는 사람들은 영생을 거두고 성령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우리 모두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인생이 주님이 보시기에 ...주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 몸부림 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나라에 임하옵시며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가 왜 첫번 자리에 와야 하는지 그것이 또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살펴 봤다.
요약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주기도문의 첫 기도는하나님의 리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모든 신자들은 주님의 이 기도에 동참 해야 하고 이 기도는 모든 신자들의 첫번째 삶에 목표 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존귀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지에 따라서 존구히 여김을 받거나 업수이 여김을 받는 결정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살아오신 최대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두번째 기도 제목을 살펴 보자.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다.
나라이 이 말은 옛말 어법이다. 쉽게 얘기하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주격 조사인 것이다.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버지의 나라 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얼핏보며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없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가장 커다란 주제이다.
아록 보며 우리의 구원 은혜 부흥...이 모든 것들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만 설명 될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주님의 기도를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아직 임하지 않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주기도문은 두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말론 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모순과 불순종 하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전히 심판 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그 왕국을 세워 달라는 기도였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기도는 종말론 적인 구도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에 현장에서 부르짖지 않으며 안될 제목 들이기도 했다.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이 기도는 단지 현실 도피 적으로 종말에 이루어 질 나라가 속히 오게 해 달라는 기도만은 아니다.
이 기도 속에서 주님의 나라가 하나님 한분의 힘으로 미래의 죄악된 세상을 심판 하시고 새 하늘과 새땅이 임하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나라 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는 것을 경험 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를 흩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 되어 있다.
이 세상을 만드시고 삼라 만상을 창조 하시고 그 창조 세계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을 창조 하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릴수 있는 주권을 인간에게 위탁 하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 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우주를 다스리고 그 땅을 정복하고 통치하도록 위탁 받아었다.
처음 조상들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매우 기뻐 하셨다.
당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 하는 신앙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서 당신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 지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으로 기뻐 하신 것이다.
죄가 없던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지배 하셨다.
죄가 들어 온 것은 서서히 파고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자 커다란 방파제가 무너진 것 처럼 .....그렇게 죄는 들어 온 것이다. 죄가 들어오자 이 세상은 죄에 의해 지배 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앞에 불순종 하고 범죄 하자. 이 세상에 나라는 죄에게 팔리게 된 것이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세력이 온땅을 통치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이 없어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죄와 양립할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를 인하여 당신이 창조 하신 세계를 마귀의 손에 내어 주신 것이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인생들을 통치하고 구체적으로 지배하기 시작 한 것이다. 그는 죄를 통해서 들어온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사망을 가지고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했고 죽음을 미끼로 인간들을 허탄한데 굴복하는 피조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하나님 아버지를 송축하고 주님을 높이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 해서 허무한 피조물에 굴복하고 이 세상에 금수와 버러지 같은 썩어질 것 들을 우상으로 바꾸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헛된 피조물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는 점점 쌓이게 되고 그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더 깊이 갈라 놓은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완전히 끈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이 고통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죄의 무서운 파괴력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사람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 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반항 하기 시작 했고 사람들은 문화라는 미명아래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앙 아래서 살도록 설득하고 강요하는 잡업들을 해 온 것이다.
죄가운데서 태어난 인간들은 철철하게 그 시대가 가르쳐 준 하나님 없는 사상과 문화의 지배를 받으면서 주님이 원래 자기를 창조해놓으신 목적과는 관계가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사단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된 사람들로 범죄 하도록 만들고 이세상에서 더 악하고 범죄하는 사람들이 형통하게 살아가게 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심령속에 진정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사는 것 보다 허무한데 굴복하며 마귀에게 복종하며 사는 삶을 매력으로 느끼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창조 하신 세계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지게 되었고 .... 영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 상황 가운데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나라에 본질 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죄로 말미암아 온 땅이 사단의 수중에 들어 간 것 처럼 되었지만 하나님은 창조의 원래 목적으로 돌이켜 놓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 하기 위한 계획을 포기 하지 않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로부터 구원이라는 씨앗을 심으시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신 것이다.
그 씨앗은 점점 크게 자라 갔다. 인간의 죄로 인해 마귀에게 내어준 이 세상 나라가 무너지고 주님이 그토록 꿈꾸고 하나님이 통치 하시는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아버지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될것을 구체적으로 역사속에서 계시 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즉시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것을 예고 하시므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셨고 그 문제가 바로 죄와 관련 된 것임을 밝히셨다.
희미한 구원의 계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월이 흘러 갈수록 구체적으로 진전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땅에 많은 죄인들이 번성 하였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과 약속의 소망을 믿으며 살아가는 소수의 백성들을 한 가족으로 한 나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신 것이다.
그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태어 나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주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의해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 악한 군대로 인해 이 세상이 적군 천지가 되어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파멸하는 사령관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마귀들에게 넘겨 준 이 일들이 영적인 사건이었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방법도 총이나 칼이나 대포를 통해서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방법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 해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마귀들은 주님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 차렸다. 두려워 해서 멸하려 애를 썻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오실 때 그저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무하난 능력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제까지는 자기보다 더 강한 자가 없었기에 수많은 자들을 결박하고 자신의 통치에 복종시키면서 마음껏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이 세상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영예를 누리고 있는 마귀였지만 그들보다 훨씬 큰 권세를 가지고 오셔서 그들의 억압 아래 사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복음으로 구원 하기 시작 하셨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사실을 전파 할 때 그들을 억압하는 마귀의 세력들이 끈어지는 역사가 일어 나기 시작 한 것이다. 많은 종 노릇 한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해방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 하게 된 것이다.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그들을 해방 시켜 주시고 사로 잡아 주셨다.
예수그리스도의 해방 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 졌다.
죄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종 노릇 하던 그들을 사망으로 협박하고 굴복 시켜서 마귀의 나라를 위해 봉사 하면서 육신의 필요를 채우면 살아가는 죄에 길들인 인간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시고 하나님의 이글거리는 분노의 심판을 담당 하시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불을 끄신 것이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 지고 불의로 짓밟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고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채 살아가는 비참한 인간들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던 것이었다.
다른 무엇으로도 이 일을 할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 일을 담당 할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한 놀라운 일들을 목격 하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담당 하셨기에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우리를 향해 부어지던 하나님의 진노가 은총으로 바뀌고 우리를 심판 하시던 분노가 은혜로 바뀌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면서 죄로부터 해방을 받고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성령이 그 마음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 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이루고 악한 나라의 권대는 완전히 파멸 된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곧곧에 숨어 사는 빨치산과 같은 마귀의 세력들이 자신의 통치를 구사하려고 아직까지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그 무지를 이용해서 여전히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 인 것 처럼 사람들을 협박하고 설득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운데서 두려움 가운데 사망을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나 아직 완전히 이루어 지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남아있는 악한 세력들을 토벌하고 여전히 죄가운데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원래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과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불러 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진정한 하늘 나라에 애국 시민 일수 없다.
구원 받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세상에서 살아야 할 소명을 받게 된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신앙 생활이 비장 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다만 천당에 갈 기차표 한장을 주머니에 넣는 것이라 생각 한다면 확실하게 하나님나라에서 만날 가능성이 없다
왜냐면 그는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이것만 생각 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그 소명을 따라서 사는 사람만이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성경에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교훈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반쪽 짜리 복음을 가지고 있기에 예수 믿고도 자기 마음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소명 의식이 없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 하면서도 삶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닌 다는 이유 하나만 제외 해 놓고는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 된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라 말 할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인해 나는 천국 간다고 생각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반쪽 짜리 복음일 뿐 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고백 하면 여러분들은 아무 공로 없어도 천국으로 데려 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 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 신고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 나면 하나님 나라에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생명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책 병적 기록부가 있는 것이다.
태어나는 즉시 군인으로 등록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병적 기록부에 적어 내려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영적인 전투라는 것이다.
싸우듯이 신앙 생활 하지 않는 사람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수 밖에 없다.
싸우듯이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패배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주어졌지만 우리 밖에 많은 세상은 여전히 사망이 역사 하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교제를 구원과 함께 주셨는데 많은 환경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방해 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의 참 사랑을 알았는데 내가 다니는 직장에 많은 사람들은 아직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 대립의 구도 속에 있기에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면 투쟁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운동을 제대로 하려고 해도 결심과 결의가 필요하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 받은 백성으로서 백성으로서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소명을 따라 가려면 결심과 분투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 하다.
영원히 그는 죄를 이기지 못하고 무기력 속에서 살아 가게 될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그는 구원은 받았으나 마귀의 지배에 고분 고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주일 학교 하나를 섬기려고 해도 섬길수 없게 하는 환경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충성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과 더불어 싸우고 .............
여건과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 하면서 분투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것이다.
나를 어두운 죄악 가운데서 종 노릇 하면서 살아 갈수 밖에 없는 나를 건져 주신 예수의 놀라운 사랑...... 얼마든지 평탄 하고 안위한 삶을 살아 갈수 있다고 할지라도...
열심히 신앙 생활 하려고 몸부림 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내가 이렇게 해야만 신앙 생활을 할수 있나 하는 회의를 느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떠오르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종교에 메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살아가는 모든 삶은 전투 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귀가 우리를 무너 뜨리는 목적은 구원 받은 자로서 소명을 따라서 전혀 살지 못하게 만들고는 손을 떼는 것이다. 그것이 마귀의 목표인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싸우는 자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즉 구원시켜준 목적은 우리를 통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 하게 하려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연약한 양떼들이지만 아직 까지도 악의 세력들이 창궐하고 자기의 통치권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총매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협박하고 강탈해가는 빨치산 같은 마귀의 세력들이 득실 거리는 이 세상을 향해서는 군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전투 기록부에는 가는 곳 마다 혁혁한 승리를 이루어서 무궁 훈장에 빛나는 그리스도인 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승리를 통해서만 얻어지는데 이 승리는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 지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을 때 보다 더 편안하고 육체에 욕심을 따라서 양심의 거리낌없는 인생을 살아갈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 믿지 않고 세상에서 그냥 살아어야 했다.
일단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병사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명에 불타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은 구원 받았으나 구원 받지 않은 것 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 될것이다.
이제는 기쁨의 이유,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소망의 이유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집을 사고 좋은 옷을 사고 좋은 차를 사고........하는 것으로 만족 하면서 살아 갈수 없는 것이다. 그런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살아가려고 해도 양심에 진정한 자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신 거룩한 계획을 알고 ....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오게 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으니 교회를 다니든 직장을 다니든.....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지만 의미 있는 인생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는 분투하듯이 군사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정복하면서 오는 나라인데 자신이 죄 가운데 깊이 빠져 있으면 활기차게 신앙 생활을 할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먼저 대적 해야 하고 .... 자기의 무기력한 모든 삶들을 파하고 날마다 승리하고 이기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
영적인 승리의 소식만이 우리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당신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함께 살면서 불의 의 도구가 되어서 ....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는데 자신들은 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불순종의 소식이 들어올 때 여러분의 마음은 아픈지 묻고 싶다.
이렇게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소명이 있다 . 이 소명을 따라 살아 갈 때만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천국에 부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군인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꼭 필요 한 것 도 군대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 많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군사로 모집 한 자들은 자기를 모집 한 자를 기쁘게 하여야 하고 범사에 절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서 하고 싶던 모든 일들을 하려고 하고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아 가려고 한다면 군인 일수 없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주일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며 늦잠 자는 날이 었지만 주일 학교 교사가 되며 일찍 일어 나서 서둘러 준비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에게 주신 소명인줄 알고 나를 구원 해 주신 하나님의 목적인줄 알기에 자신을 절제 시키고 복종 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장난 처럼 하고 생각 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엄중한 전쟁인줄 모르고 살아 가는 것이다. 군인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으며.... 매 순간 자신을 절제 하면서 살아야지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교회 나오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태반이나 된다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밥 벌어 먹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고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내어 주신 것은 우주 적인 소명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병사로 부르셨다.
싸우고자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패배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사령부를 괴멸 하시고 해방을 선포 하셨지만 여전히 날뛰는 빨치산의 처지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공급 해 주셔서 날마다 이기게 해 주신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 인지 살펴보라
연약한 모습으로 자라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이지는 않는지...?. 여전히 귀저기를 차고 젖병을 빨고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늙어 가지는 않는지....?
주님은 우리를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 살점 하나 까지 주시면서 우리를 살리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 받은 병사로 소명 하셨다. 구원 받자 마자 천국의 최신 병기들을 주셨다.
전투를 잃어 버린 삶은 우리를 비참한 곳으로 몰고 갈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왕국을 위해 부르셨고 우리는 그 소명을 띄고 태어 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의 소명 인 것 처럼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8. 나라에 임하옵시며 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지난 시간에 ....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소명 받은 자들임을 얘기 해 주었다.
두번째 기도 “나라에 임하옵시며” 이 기도는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모우지 않을수 없도록 만들어 주신다.
주님의 관심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가 완전히 임하고 완성 되는 것은 주님이 재림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하나님의 창조 하신 세상에서 마땅히 경배 하여야 할 하나님을 경배 하지 않았던 불순종하던 모든 자들을 토벌하고 마귀를 마지막 결박 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 되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 나시므로 마귀에게 넘겨 준 세상의 나라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이 통치 하는 나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주님이 이 세상을 다시 구속 하셨지만 여전히 반항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리는 악한 세력들과 더불어 전투 하듯이 싸우는 .. 그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다.
오늘 우리가 생각 해 바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이미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악을 이기고 승리 하셨다.
완전히 마귀에게 넘겨 준 나라가 주님께로 돌아왔고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마귀의 권세를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백성이 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마귀의 세력들은 출몰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타락하게 만들고 범죄 하게 만들어 .... 하나님이 창조 하신 원래의 계획 되로 이 세상이 되어 지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역할 들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 져 가는 땅을 세워 나아가도록 우리를 불러 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믿지 않는 불신자와 동일 하게 여겨 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 하셔서 어두운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내신 것이다.
이것은 목표를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계획이 있는데 그것은 원래 창조 하신 목적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주님이 창조 하신 세상에 주님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경배 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졌던 세상 속에 살았던 것 처럼 그런 세상을 회복 하게 하시려고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 낸 이유가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 내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 하게 하시려고 불러 내었다고 했다.
패배를 자기의 숙명 처럼 여기고 살아 가는 자는 ....자기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건져 내었는지.... 그기에 대한 이해와 분명한 소명이 없기에 힘을 잃고 살아 가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고 모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피로 ... 구원 받았으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된 세상이 공경 하고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살아 가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강한 소망과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원하는 불붙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 바로를 굴복 시키고 애굽을 떠났지만 광야에서 잠시 맛본 감격도 잃어 버리고 결국은 광야에서 유리하고 하나님을 원망 하고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의 조상 인 것이다.
인생은 무책임 할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장난 처럼 살다갈 그런 개인이 아니다.
인생은 진지 한 것이다. 신앙은 더 진지 한 것이다.
그 신앙이 인생에 대한 진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 가장 커다란 관심 사 인가?
좋은 집... ? 유행 하는 옷이나 장신구...? 잘 생긴 형제 자매...? 쾌락....?.............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 있는한 벗어 날수 없는 소명이 있다. 그것은 그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구원 받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인생인지 책망 받을 인생인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어떤 즐거움과 만족을 경험 하고 살았느냐에 달렸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길지 않은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 하게 하는데 얼마나 이바지 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인생이 될수도 있고 악한 인생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던 예수님은....종말론 적으로 오는 그 나라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 우리 속에 끈임 없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마귀에게 충성 하려고 하는 불신앙과 죄악들을 토벌하고 그리스도를 대장 삼아서 이 세상을 정복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오는 것이다.
이 나라는 전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확장 되고 불순종 하는 세력들이 토벌 되는 첫번째 단계는 전도 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식으로든 복음을 전하면서 살지 않는 다면 소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가 능력으로 온다고 말씀 하셨지만........ 불순종 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바뀌고 변화 되는 역사가 일어 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확장되고 주님의 강력한 통치가 실현 될 때는 그 앞에는 복음 전도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과 함께 먹고 편하게 마실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 하지 못했다고 생각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 한지...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축복이 무엇인지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가 전하는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이 주인이다. 욕심을 따라서 살아가고 욕망의 종 노릇 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살고 그 죄 앞에 볼모가 되고 그의 인격의 특징이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 가게 되는 ....그렇게 살아 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반발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이 마귀가 지배하는 나라의 한 복판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 모여 살아 가고 있는 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불법과 더러운 것들이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파멸에 이를 것들이 추앙을 받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누군가가 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살아 가고 있는 인생의 추함을 발견하고 허무함을 알게 해서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는 비결을 알게 되고 회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게 될 것이다. 자신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이루어 지므로 큰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 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며 수없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삶이나 생각 하는 것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삶과 같은 것들이 일어 나는 것이다. 가끔은 사람들이 경악 한다. “ 어떻게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할수 있는가......? 이상 할 것 하나도 없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지 않고 아버지의 통치를 기뻐 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악을 교회에서 다 행할 수 있다.
단지 교회를 다녔던 기억 때문에 기억 때문에 단숨에 거룩해 지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절대 될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한 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 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경험 하고 그 마음과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삶 전체를 지배 하여 주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삶을 살아가므로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을 때 살게 하고 싶었던 삶을 살아갈 때 그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에 자신이 충성 하고 길들여 살던 나라를 떠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 먼저 결별하고 떠나야지 빛의 나라로 들어 갈수 있다
결혼을 하면 호적에서 자기의 이름을 파 내므로 한 가족을 이루고 그의 식구가 되는 것이다. 이혼을 하진 않는 한 자기의 이름을 파 갈수 없다..... 그것을 혼인 신고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똑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매 있어서도 한 사람이 옛날 세계와 결별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복음 앞에서 깊이 회심 하는 일이 일어 나야 한다. 자신이 비참한 죄인임을 깊이 알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고 싶은 깊은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 가고자 하는 마음에 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수 없다.
여러분들은 천국 가면 놀랄 일들이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수많은 친숙했던 사람들을 발견 할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진정으로 안전 한지 스스로 점검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불러 내고 있는가... 바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 하지 않는다며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놀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나라도 아니고 회개 한 사람들의 나라 인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 인지 알고 진실로 회개 하고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거스리며 살아가는 반란군의 생활을 통해서는 소망이 없다는 깊은 인식 속에서 자기의 삶에 대해서 종지부를 찍는 일 없이는 회심도 없고 회개도 없다.
언제인가는 복음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복음의 기본 적인 도가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고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고 지옥에서 불길 가운데서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광경을 언제인가는 목격 하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깊이 회개 하고 주님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삶이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나라 인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진지하게 돌아 보자. 우리의 미래를 장담 할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심과 함께 이제 확장 되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 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불의와 불법과 싸우면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 져 가는 것이다.
분명한 회심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도구라면 ..... 이 회심은 무엇을 통해서 일어 나는지 생각 해 봐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가 널리 확장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원인중에 하나는 교회 안에서 회심이 일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깊이 회개 하고 죄와 무지로 더러워진 우리가 깨끗이 씻겨 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앞에 새롭게 주님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그 회개가 언제였는지 진지하게 돌아 봐야 한다.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종교 생활을 하지 않는 다면 자신의 마음이 불편 하기에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교회 속에서 진정한 회개가 살아 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아 가지 못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다.
의와 거룩과 진리가 지배 하는 나라다. 범죄한 백성들은 예배 드릴 때 마다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발견 하고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범죄한 인간인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너는 죄인 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교회에서는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자기의 불결과 죄를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이요 진리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마다 주님과 불화한 관계를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 해야 할 것들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깊은 회심이 일어 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였다.
주님은 그렇게 회개 하는 자들을 움직이는 자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복음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충성스러운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에 충성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어느 목사님을 만났다
교회 중직자의 자녀 하나가 펑크족이라 한다. 남자가 화장을 하고 ...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그가 잘하는 것은 랩 댄스라 했다. 주일 예배를 안드리고 시편을 가지고 랩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못 알아 듣는데 아이들은 다 알아 들었다고 했다.
부모들은 그 장면을 보고 감격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 할수 있다. .......
마이클 잭슨이 올 때 기독교 개신교 에서는 동성 연애자 오지 말라고 난리가 나고
카톨릭에서는 추기경이 가서 포옹을 하고 끌어 안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서 개신교는 옹졸하고 카톨릭은 포용력이 있다고....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은 내가 믿지 않지만 언제인가 믿게 된다면 카톨릭으로 가야 겠다고 생각 을 한다면....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을 붙들고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 없이는 어떤 노력 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병든 자를 고치고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먹이고 낮아진 자들과 함께 낮아지고............... 그분이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곳에는 악마의 나라가 뚜렷하게 드러 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 가장 큰 문제는 너 좋고 나 좋고 공존 공생 하는 풍조로 나아 가기 때문에 복음에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 하였노라고 말했다.
그는 고린도 교회 들어갈 때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복음의 핵심을 말했다.
그 직전에 그는 아데네서 왔고 그곳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을 설득하려고 철학의 진리로 가르칠려고 애 썻고 논쟁에서 이겼다. 그러나 열매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자기의 경력과 사상과 ...수많은 생각 들을 통해서 복음 전도가 이루어 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 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린도로 온 것이다.
고린도는 방탕한 도시였고 유식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였다. 성질이 사나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였다.
어리석어 보이고 유식한 많은 사람들이 볼 때 무식하게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원 해 낼수 있을까..? 그는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복음이외에 것들로 실패한 아데네의 경험을 생각 하고 내심 하나님 앞에 작정 했다.
이전에 내가 많은 사상과 철학을 통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권하고 증거 할수 있지만 진정으로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오는 이 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핵심이 필요 했다는 것이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 오게 만드는 진정한 회심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나타 난다는 사실을 믿고 복음의 가치를 향해서 자신의 신앙의 닻을 다시 한번 내렸던 것이다.
아데네 갔을 때 그는 복음 자체를 가지고는 철학에 닳고 닳은 사람들에게는 복음 자체가 너무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로 포장 하고 싶어 했고 철학 적인 개념으로 바꾸어서 그들의 지성을 굴복 시키고 그 사람들의 학식을 굴복 시켜서 예수믿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패 했다.
뚜렷한 회심은 첨가 된 것이 없는 생생한 복음이 전파 되는 곳에 나타 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복음을 듣기 어려운 이 시대에 조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 해야 한다.
하나님이 강단을 세탁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위탁 한 진리를 새롭게 확신을 가지고 붙드는 교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다면 아무리 많은 교회가 세워 진다 할지라도.... 그 많은 교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을 것이다.
순전한 그리스도의 도를 말하고 십자가의 도리에 대해서 설교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너무나 참된 복음이 아닌 것에 익숙해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지연 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올바로 하고 구원 받은 자로서 함당하게 살아야 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불의와 더불어 싸우면서 이 땅에진정한 의에 통치가 이루어 지기를 위한 도구가 위하여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구원은 좋지만 그것은 나에게 너무 무거워... 이렇게 살아 가는 삶으로 만족 할테야” 그러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 대신 그 인생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손쉬운 불순종의 길이 있는데도 자기를 쳐서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세상 나라를 위해서 얼마든지 살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 가는 이유는 (돈을 벌면 누구를 위해서 생각 해야 하고 건강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 할까 생각 하고 명예가 있다면 그 명예를 가지고 어떻게 예수를 전할까 생각 하고 .....좋은 수입도 좋은 직장도....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 복음 때문이다.
어둠가운데 있던 비참한 나를 복음을 듣게 하시고 깊이 회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이 오셔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이루어 지고 나니 이 나라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 하고 살아 가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 했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경배 하고 즐겁게 살아갈 마음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이런 기쁨을 알고 살아 가는 것이다.
축복과 자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 하게 되고 행동 하기 시작 하는 것이다.
마귀에게 지배 받고 살아 가는 사람들의 삶이 숙명 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복음을 전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시작 되는 것이다.
주님이 때로는 눈물로 기도 하셨을 그 기도가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가?
그 기도를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 왔다.
마귀의 세력들은 한번 빼앗긴 하나님의 나라를 그저 버려 두지 않는다.새로운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타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형식적으로는 점령을 했지만 반란이 일어 나고 나면 실제 적으로 그 나라를 통제 하기 어렵다. 필리핀에 가면 민단아우라는 큰 섬이 있다. 그곳은 필리핀 경찰 당국에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다. 반군들이 지배 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나 관광객도 그곳은 들어 가지 는다.왜냐면 외국인 이라 할지라도 신분을 보장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분명히 그 섬이 법적으로는 필리핀의 땅인데 민단 아우 섬을 지배 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그 백성들은 그 사람들에게 세금을 바칠 사람들이 아니다.아무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에 세금을 바치고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반란이 일어 난 것이다.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대한 민국 헌법은 대한 민국의 영토는 한 반도와 부속 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북 사람이 넘어오니 우리 나라 국민으로 봐야 한다고 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이북도 우리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북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에게 세금을 내어선 안된다.
불법이다. ...그러나 불법임면 뭐 하나? 실제적으로 우리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화 통일이 이루어 져야 하겠지만 저 사람들을 기아와 고통과 억압 속에서 해방 시켜 줘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다시 빼앗을수는 없지만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결과 적으로는 자기들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죄와 세상과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공격을 해 오는 것이다. 회심하고 내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 했지만 불행하게도 싸움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앞에 긴장을 늦출수 없이 전투의 정신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전파 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 하는 가장 훌륭한 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충성이 입증 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때에.......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회심 하지 못했다면 구원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 하게 고백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 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구원이 없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건설 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나의 불충성으로 ....주님의 나라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법적으로는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마귀에게 종노릇 하는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참회 해야 한다.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여러분들 가운데 회복 시켜 주실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불붙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불신 하는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대열에 서야 한다. 우리가.......
이것이 주님이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락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 했던 이유였다.
9. 나라에 임하옵시며 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지난 시간 요약-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전도와 회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말씀 드렸다.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 을 받고 회심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영적인 특성이다.
복음을 듣고 자기가 죄인 인 것들 깨닫고 자기 속에 있던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건설 되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아무리 많이 교회 다닌 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기를 기대 할수 없다.오늘은 도전 받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게 방해 하고 도전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완전하게 이루어 지는 것은 주님이 오시는 종말이다.
매 순간 마다 우리 안에 이미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상태로 살아 가는 것 같은 경험을 많이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죄를 대적 하고 마귀를 대적 하고 살아 가게 하셨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고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있기를 바라면서 신앙 생활을 하지만........
사람들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은혜의 교제를 잃어 버리고 순종 하기 보다는 세상을 향해서 불순종 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면 그들의 모양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기 시작 하는 것이다.
이전에 있던 복음에 불붙는 능력도 없고 하나님 나라 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독특함이 없어 지는 것........ 이것이 세상과 죄다.
세상과 죄는 결탁 되어 있다. 이 둘은 끈임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이미 구원 받고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 되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불순종 하고 죄와 유혹을 따라서 살도록 유혹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든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필연 적으로 세상에서는 공격을 하고 공격 하는 전투 적인 위치에 있슴을 알아야 한다.
세상가운데 있는 죄들은 구원 받은 우리들이라도 떠나서는 살수 없다.
용서를 받았지만 죄의 영향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제하는 죄는 세상이 유혹 할 때 유혹이 주어지면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이 고개를 들고 유혹과 함께 결탁 하게 되고 행동으로 옮기며 범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운 나라가 은혜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때 기대 하는 것들을 끈임 없이 하지 못하도록 훼방 하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오게 해 달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라며 세상과 더불어 죄와 더불어 다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끈임 없이 죄 가운데로 유혹 하고 이전에 살아가던 방식으로 자기를 부르고 ...... 세상에 대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않는 다면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직접적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 하는 죄들도 뿌리 뽑고 이겨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하게 유지 되고 확장 되어 갈것이다.믿는 자들로 구원 받았슴에도 불구하고....끈임 없이 긴장 하고 살아가야 한다.
매일 도우시는 은혜와 사랑을 의지해서 영적 인 삶을 무기력 하게 만드는 죄와 싸워 이겨 나가야 견고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갈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지는 나라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이 우리에게 이루어 지게 하는 나라다.
마귀의 세력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불순종 하게 만들고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변장하여 유혹 하고 협박하고....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외곡 시키므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파괴 하고 황폐케 하는 것이다.
구원 받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눈을 들어 여러분들의 주위를 보아라.,
무기력한 삶,.... 교회 나가는지 안나가는지.....11시에 교회 나가는 것을 제외 하고는 도무지 분간 할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기쁨도 없고 진정한 분노도 없고.... 죄에 대해서 분노 할줄도 모르고 의에 대해서 마음이 타오를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 할줄도 모르는 사람들........ 이들을 움직이고 있는 자는 마귀의 세력이다.
가장 마귀가 고통해 하는 것은 한 사람의 형식 적인 신자가 어느 날 들어난 복음의 진리 앞에서 깊이 회개 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다. 절대 순종 하면서 살아가려는 사람을 가장 싫어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세상과 타협을 하고 믿음을 양보하고 적당히 살아 간다면 마귀와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 될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슴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는 마귀의 세력과 유혹들을 철저히 거절하고....내가 순종 할 이는 오직 아버지 한분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다.
신앙의 길이 마지 못하는 의무의 길이 되고 있지 않는가....?
마귀를 이기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삶을 살아 가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보라...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정결한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 우리에게 죄를 용서 해 주시는 것 뿐만이 아니라 죄와 마귀의 권세와 더불어 싸워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회개 했더라도 이전에 자기가 지었던 죄를 다시 범하기를 그리워 했다면 진정한 회개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화해도 아닌 것이다.
이전에는 숙명적으로 굴복 하면서 살아갔던 많은 죄에 대해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이기고 정복 할수 있도록 변화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셨지만 이미 주신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 하게 해서 은혜로 가득찬 삶을 살지 않고는 죄를 이길수 없고 세상과 마귀의 세력들을 이길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는 처참한 광경들을 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통로가 되는 영적인 삶을 충실히 살아 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살수 없고 행복 할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신자에게 영적인 탁월한 능력을 주셔서 영들을 분별하고 귀신을 내어 쫒게 하는 것만을 사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경건한 삶과 매일 계속 되는 영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 생활을 유지 해야 한다.
하나님앞에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우리 밖에서 도전 하는 세상에 유혹들을 향해서 거절 하면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살수 있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권능을 사모 하기 전에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 하고 기도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생각 하므로 받는 신앙의 유익들이 계속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
이따금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승리 하는 사람으로 바꿔 주지 못하는 것이다.
죄가 역사 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정지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정지 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멈추게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 돌아 보라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길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모두 태어 나는 생명이 될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군대에 입적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떤 삶을 일생 동안 살아 왔는지 모든 것을 기억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섬기는 모든 과정도 철저한 영적인 전쟁 이었슴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것이다.
천국에 군대에 입대해서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자기에게 맡겨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대신 탈영이나 일삼고 적자와 내통하는 스파이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진정한 축복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나면 잘 살아 갈수 있도록 성령이 도우신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철저히 살아 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를 유지하는 길은 자기에게 맡겨준 싸움터에서 최선을 다하고 믿음으로 살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 이다.
그러므로 분투해야 하고 충성된 삶을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라고 하심을 믿고 분투하는 삶을 살아 갈 때 우리 안에 더욱 놀라운 은혜가 유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 충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 봐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 되었는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끈임 없이 점검 해야 한다.
성령의 은혜를 당신의 백성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이루어 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 백성들이 성령으로 충만 하고 능력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게 되면 어디서든 이기는 삶을 살게 될 것 이고 어디서나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 해 가는 도구가 될 것이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데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 갈 때 성령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 해야 한다.
에베소서6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전심 갑주에 대해서 말하면서 단 하나의 공격용 무기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의 검 곧 성령의 검이다.
세상과 죄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어서 활용 될 때 죄와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의무를 이해 하면서 끈임 없는불붙는 삶을 살아갈 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 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다양한 칼이 될것이다.
죄와 세상에 공격을 받을 때 그 싸움의 상황에 이길 적합한 말씀을 생각 나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것이다.
전쟁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무기를 귀하게 생각지 않는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식을 주고도 물을 주고도 총과 칼을 바꾸려고 할것이다. 왜냐하면 싸우는 것만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 할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그 나라가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 하는데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전술과 무기와 사기이다.
휼륭한 병기가 있어도 전쟁을 하는 방책이 잘못 되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아무리 방법이 좋아도 병기가 없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고 두가지 모두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싸우고자 하는 용기가 없는 군인들이라면 그들의 무장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분투하는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가 되지 않을때는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와 더불어 싸워 보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새벽 기도를 나와서 기도 할 때.... 졸린다면 잠과 한번 투쟁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게으르다면 게으름을 미워 하면서 싸워 볼려고 투쟁해야 한다.
싸우고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을 어느 하나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면 안된다.
철저하게 부인하고 철저하게 미워 하고 철저하게 싫어 하고 싸우려고 몸부림 치지 않으면 죄를 이기고 무기력을 이기는 것은 없다.
은혜를 받으면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신 사랑으로 이기고 승리 하는 삶을 살겠다는 헌신된 충성의 고백이 나올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 가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참된 기쁨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 갈 것 이다.
신앙의 모든 실패는 하나에 맞닿아 있다. 그것은 적당히 타협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곳에는 진정한 생명이 존재 할수 없다.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셔서 매일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 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살펴 보자
영적인 군사로서 살아가는 것이 대치 할수 없는 소명임을 인식 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죄와 세상에 대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 갈수 없다.
죄와 하나님의 은혜는 공존 할수 없다.
영적인 군사들은 먼저 죄로부터 떠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죄가 우리의 영적인 삶을 무기력 하게 하고 나태 하게 만들고 진정한 기쁨과 하나님을 사모하게 만드는 갈망을 앗아 가는 것이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게 못하게 하고 깨달아도 그렇게 살아 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철저하게 우리를 무기력 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생명력 있는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일주일을 잘 살다가 와야 한다.
탈세나 하고 협잡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갈구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손에 묻어 있는 피를 보실 것이다.
정결한 곳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넘치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살 때 밥 벌어 먹기 위해 살아만 간다면....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두신 것은 밥 벌어 먹기 위해서 두신 것이 아니라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 가는 일터 .....그렇게 생각 하면서 찬양 하고 살아 간다면 직장 생활도 가정 생활도 즐거울 것이고 감사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방법이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공정하게 사용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선하게 사용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뇌물을 멀리하고 국세를 받칠 자에게 바치고....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 하고 살아 가면서...순간 순간 하나님이 세상에 나를 두신 이유가 주님이 창조 하신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념 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저렇게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고 싶어 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참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와서 약속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불어 넣어 주도록 살아가는 것...그런 삶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데로 물결 치면 물결 치는 데로 흔들거리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기도 하려면 기도가 어려운 것이다.
힘을 주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각오가 없는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 준비가 먼저 이루어 진다. .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신비한 생각과 모든 것들을 마음에 묻히고 마음에 율법이 생각 나는 것이다. 율법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니 그 율법을 준행 하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단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은혜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면....” 이제는 불의한 길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서 살아야 겠다”는 결의가 마음에 역사 해야 하고 그 정신으로 일주일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분투하는 삶을 살고 우리로 하여금 죄와 타협을 거절하면서 주님의 백성 다운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면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영적인 군사로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마음속에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나태와 태만 하게 살아가는 삶을 강요 받을 때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분이 영적인 군사이고 우리들이 매일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면서 살아 갈수 있는 신령한 하늘의 은혜와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지 않으면 살수 없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끼만 굶으면 손발이 떨려서 수제비라도 먹어야 하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며칠을 굶으면서도 넉넉히 살아가는 것이다.
사는게 다 사는게 아니다.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산다고 말 할수 있는가!!
이런 것은 동물 적인 삶일 뿐이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살아 갈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들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무거워진 심령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한달 동안.... 혹은 일년...십년이 될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삼일 만 금식 하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할 인생들이 영혼의 목마름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 하는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기게 만들어 주는 힘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메달려 기도 하고 말씀을 받아 은혜를 받아 새롭게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이 원동력이 되어야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갈수 있다.,
내가 크리스챤으로서..하나님의 사랑을 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을 전 할수 있는 밧데리 역할은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파워가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불쌍하게 여겨 질 것이다.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어 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주일 오전 예배...바쁘면 빼먹고...신문 잡지 읽는 만큼, 텔레비전 보는 만큼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아니라 드라마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세속적인 삶을 살아 가면서도 이기는 것을 기대 한다면 정신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영적인 싸움은 아주 정직하다.
겉모습은 다 다르게 보여 줄수 있어도 우리의 삶을 공정 하게 정직하게 드러 날 것이다.
어떤 위장도 불가능 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허식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메달려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영혼을 돌아 보면서 세상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자신을 몰두 하면서 신앙을 돌아 보는 결심이 필요 하기도하다.
늘 지는 삶을 산다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결심을 해야 한다.
살아가다 보면 언제인가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생각 은 성령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생각 일 뿐이다.
어느 한 순간에는 우리에게도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 삼주 동안 말씀을 통해서 나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는데...내 인생은 무엇인지...? 나는 근본 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 갈수 있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인생의 목표가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 갈수 있는 능력이 필요 함니다...그러나 나는 비어 있습니다. 주님!!나의 무기력한 삶, 남들이 말하는 신앙의 기쁨은 고사하고 지리하고 지루하게 이어져 가는 신앙 생활을 단절 해 버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이 믿어 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달라고...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내가 확인 하면 내가 차라리 세상으로 돌아 가겠습니다...하는 양단간에 용기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이제는 이중적인 신앙 생활을 포기 해야 한다.”
진정한 영적인 생활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메달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힘써야 할 때 이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 되어 가는 것이다.
10. 뜻이 하늘에서...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이것은 세번째 기도 이다.
주기도문 전체를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 또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보고 받아 들여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빗어낸 기도의 제목이었다.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이루어 지는 것은 기도의 제목이 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 나자 마자 살아 있는 사실을 느끼고 ... 공기를 걷어 가지 마시고 호흡 할 힘을 달라고 기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원래 존재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기도도 마찬 가지다. 나라에 임하옵시고.... 도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 하고 주님이 이미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오시고 가까웠슴에도 불구 하고 전혀 그 나라에 들어 갈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변화 되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고 기뻐 하는 세상이 오게 해 달라고 기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번째 기도도 뜻이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주기도 문을 시작 할 때 여러분들에게 주기도문의 구도를 두가지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하나는 종말을 바라보고 아버지 앞에 드리는 기도이다.+
주기도 문이 전망하고 있는 것은 종말이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에 모든 불순종과 하나님의 나라에 거치는 것들과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 것들을 심판 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종말을 바라 본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 질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매일 매일 살아가시던 예수님의 삶에 자리가 만들어 준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삶에 자리에서 주기도문을 기도 하셨던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삶의 자리와 다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도처에서 예수님의 때와 마찬 가지로 주님의 나라가 이미 왔슴에도 불구하고 아직 까지도 그 나라를 받아 들이지 않고 옛 원수 마귀에게 복종 하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창조주 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스리고 하나님 아버지 이름을 모욕 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첫번째 기도의 제목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도 닿는 것이다.
이 기도의 제목이 바로 우리 삶에 초점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땅끝까지 정복 하고 죄인 들의 마음속에 천국이 오게 하고
부패하고 더러운 타락의 물결이 있는 곳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고 .... 성령의 권능과 은혜를 이미 우리에게 보여 주고 보내 주셨슴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리고 아버지의 통치를 기뻐 하지 않는 어둠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나라가 우리 의 삶 속 에서 오게 해 달라고 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번째도 도처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불순종 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주께서 오셔서 세상을 심판 하시고 거치는 것들을 다 도말 하사 당신의 완전한 통치를 실현 하실 그날까지 주님의 은혜의 빛 아래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사랑 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세번째 기도 역시 가슴 깊이 다가 오는 기도 제목 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주기도문의 삶이라고 거침 없이 대답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보고 진정한 크리스챤인지 아닌지 판단 하고자 하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주기도문적인 삶인지 생각 해 보면 된다.
주님 처럼 기도 드리는 사람은 주님 처럼 살아 가려고 애 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바 혹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계획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 하고 작정 한 것이 이루어 지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인가...? 이렇게... 그렇다면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할수 있는가?
먼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지 살펴 봐야 한다.
인간의 태도와 상관 없이 기필고 이루어지고야 마는 확정된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 하시기로 한 일이다. 우리는 그 날을 모른다. 성경도 그 시기에 대해서는 침묵 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시기가 매우 가깝다는 것이다.
성경은 오늘의 시대를 말세라고 부른다. 반드시 그 마지막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상관 없이 주님은 반드시 오시고 심판 하셔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 내실 것이다.
이런 것들은 누구도 거역 할수 없다.
대표적인 또 하나의 확정된 하나님의 뜻은 역사속에서도 자주 나타 난다.
그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가서 그들이 언제 돌아오게 되었는지?
주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끌려 가기 전에 그들이 끌려 갈것과 유다가 망할 것과 포로로 끌려 간 유다 백성들이 70년 후에 고토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예배 하게 될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기 전에 예고 해 주셨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었다.
바벨론 시대에 정치적인 상황 외교관계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정신...그런 실력과는 아무 관계 없이 70년을 정해 놓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기도 전에 ...이것은 확정된 하나님의 뜻이다.
또 한가지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런 뜻 들은 인간들의 태도에 의해서 지체 될수도 있고 속히 이루어 질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루어 지지 않을수도 있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해 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전히 불순종 하고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사망 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문을 여셨슴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 가길 싫어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이르기를 원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을 순종치 않으므로 .....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는 ...로마서에서 사도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싶어하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를 믿고 나면 예수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생각 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마음과 인격과 삶이 바뀌어서 그리스도처럼 성결 해 지고 하나님 앞에 고귀한 삶을 살아가게 하고 거룩해 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 받은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하고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불순종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를 거룩해 하기 위해서 구원 하셨는데 그는 여전히 세속적인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하신 것은 여러분들의 가족을 구원해 내시기 위함이었지만 여러분들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 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지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하게 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려 가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홀로 통치 하실때도 있고 홀로 이끌어 가시기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와 함께 손잡고 당신의 놀라운 계획을 들을 이루어 가기를 기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기를 기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순간이라도 여러분 가운데 가장 추악한 더러운 죄인이라도(인격적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단번에 성자와 같은 사람을 만들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그런 사람을 성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누구에게도 찾아가서 가슴을 찌르고 그 속에 억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지 않으시고 천사도 주님 자신도 아니고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과 꼭 같은 연약한 한 사람을 세우셔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오셔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이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며.......”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자유 의지라는 것을 주셨다.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무엇인가 선택 할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으셨다면 심판 하실 근거도 없을 것이다.
예수믿기 싫어 하는 사람들이 늘 시비 거리로 물고 늘어 지는 것 중에 하나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의 사건이다.
“무엇 때문에 만들어서 인간을 타락하게 했냐구...”
선악과를 다시 생각 해 보면 그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땅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 하셨고 그 속에 인간을 두셨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그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고 정복하며... 생육하고 번성 하도록 명령 하신 것이다. 여기서 다스리다는 는 것은 히브리말로 “라다” 이다 이 말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 같은 것이다. 자기 나라이기에 모든 것을 귀하게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만들어 놓은 피조 세계를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것이다.
인간이 다스리면서 어느곳을 가도 모두 자기의 지배 아래 있고 자기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 나무는 그냥 평범한 나무였다. 거기에다 하나님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 한 것 뿐이다.
“ 이 실과를 먹지마라, 먹는 날에는 넌 죽을 것이다” 고........
인간들은 온 동산을 두루 다니다가 중앙에 오면서 선악과를 보면서 깨닫는게 “나는 저 나무의 실과를 먹을수 없다..” 고 하는 것이었다.
그 나무를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과 구별 된 존재라는 것을 확인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비롯 해서 이 모든 피조 세계를 지은 하나님 이시고 나는 단지 그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은 바 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의무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가 먹고 싶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 실과를 먹고 즐거워 하면서 주님이 주신 낙원에서 사는 거이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선택 할수 있는 의지를 주셨다. 그 자유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책임도 따르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막지 못했다고 한탄 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 하여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한 실과를 먹었느냐” 고 주님이 물으신 것이었다.
요한 칼빈에 의하면 그런 것은 묻는게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추락 사고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 왜 그러냐구....?)
하나님이 기뻐 하셔서 그리 하신 것인데...이 세상에서 정확 하게 규명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최대한 인간을 놔 두신 것이다.
간섭을 하시지만 그 사람의 인격적이고 자유적인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든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감사하면서 세상의 정욕을 멀리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계속 불순종 하면서 살아가면서...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매 순간 순간 유혹 받는 것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죄를 택했기 때문이다.
순종 할수 있는 길이 있고 불순종 할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는 불순종의 길을 택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보여 주셨는데...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좋아 보여 내 뜻을 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길을 걸어 가길 원하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자기가 기뻐 하는데로 걸어가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그가 행하는 데로 두고 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 되시면 손을 보실 것이다. 하나님이 개입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가지 상황으로 깨닫게 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억지로 예수 믿게는 하지 않는다. 억지로 순종 하게 하지 않는다. (순종이란 말속에는 억지라는 말이 포함 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기뻐 복종 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런 식으로 이루어 가시기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모르고 세상의 모순과 부조와 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 느낌을 받으면서 담대하게 불순종으로 살아 갈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이런 세상을 보신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와 은혜를 주셨지만 자기 스스로 의지로 하나님을 거스리고 죄 가운데 살아가기를 즐거워 하는 인간들을 보신 것이다.
그들 속에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뜻, 무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 계획,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뜻..... 이런 것들을 하찬게 생각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신 것이다.
그런 것들은 주님의 마음에는 아픔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라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짐에 있어서 하늘과 이 땅을 비교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을 구속 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은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온전히 순종 하신 분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충성이었다.
온전히 순종 하시면서 순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주님은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순종의 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회개하라고 말씀 하신것도 이런 불순종으로부터 돌이키는 방법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짓밟히고 아버지의 이름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왕으로서 완전히 높힘을 받는 하늘을 생각 하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에 아버지의 뜻이 이 세상에 온전히 이루어 지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이것이 세상에 오신 이유라고 말씀 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 마지막 생애가 바로 순종과 복종이었다.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 되기를 원하는 갈망의 표현이 십자가 사건이었다.
이런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 할 것이란 보장이 없으면서 힘차게 살아가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오직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함 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고 자기의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물을 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이렇게 깨닫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기에 자기의 뜻이 하찮은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버린 사람들......
인생의 참된 보람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두고 살아 갈수 있도록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가 바뀌고 인생에 대한 꿈이 바뀐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고 난 후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 해야 한다.
신앙을 자기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 하면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좁은 문으로 들어 갈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자주 상기 시켰다.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위에 것을 바라보라고 촉구 했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 고난을 보면서 .....주 달려 죽으신 것이 단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붙은 욕심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 하시므로 이루고 싶어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찾게 하시고 그 뜻을 찾아 살아감으로 주님이 우리를 맨 처음 창조 하셨을 때 하나님이 창조된 우리를 바라보면서 거셨던 목표와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인생들이 되도록 ...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모를때는 직장에 다니는 이유가 토끼 같은 자식을 먹여 살리고 같이 사는 아내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었다.
이제는 같은 직장을 다녀도 돈 벌어서 밥 벌어 먹으려고 다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는 것을 생각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실현 하고 이 땅에 하나님을 순종 하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 한 개의 등불로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과 현실이 충돌할 때 우리는 기꺼이 현실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신앙을 택해야 한다.
우리의 생과 사, 우리의 행복과 불행, 고난과 형통, 생명.....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요령과 기회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의 인생보다는 더 안락 하고 편할 것이라고 보장 할 수는 없다.
보장 해 주지 않지만 ...성경에 의존해서 보장 할것이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살아 있슴을..... 이 부패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떡하면 아버지의 뜻이 내 인생을 통해서 이루어질까 갈망 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축복을 매 순간 허락 하실 것이다.
고난 당하는 것 같으나 그보다 더 큰...놀라운 기쁨이 그들 안에 주어 질것이다.
그들은 땅에 살아도 하늘을 볼것이다. 불결한 타락의 냄새가 가득 찬 곳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천국의 향취를 맛볼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 하신 것도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라고 분부하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한 결과로...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지금은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이 요원 한 것 처럼 보이지만 곧 그런 세상이 오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면서 자신이 어두운 세상에 찬란한 여명이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놀라운 사랑의 빚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는지 날마다 자신에게 물어 보라.
거스리고 하나님의 뜻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기를.......
하나님이 보실 때 여러분들의 인생은 순종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져야 한다. 살아 있으므로 주님의 뜻에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꽃이 피게 해야 한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알게 해야 하고 등불이 되게 해야 하면 등대의 역할도 해야 한다. 구원의 의미가 이런 것에서 진정한 가치가 나타 나게 될것이다.
순종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예수 믿는 자녀 삼으신 것은 우리의 순종하는 마음..... 진실한 헌신을 통해서 이세상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는 도구로 삼으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의 성공은 많은 것을 누리고 높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 하는 성공이 아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려고 하는 아버지의 뜻을 많이 성취하고 ...나 때문에 주님의 뜻이 방해 받지 않고 이루어 지도록 기여 하는 인생을 살았는지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고 이 세상에 끝 날에 주님 앞에 서섰을 때 칭찬 받을 유일한 칭찬의 제목이 될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11. 뜻이 하늘에서...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성경 속에 흐르는 대 드라마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고 인간 편에서는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사느냐 불순종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구원의 능력도 보고.... 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해 주셨다면 ...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 해야 한다. 이것이 획일 적일 수는 없다.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한가지를 지향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종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계명을 어기고 인간들이 불순종 했기에...우리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온것이다.
그 죄는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죄는 사망을 몰고 왔고.... 그 아래서 철저히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면서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모든 죄는 불순종으로 들어 온것이다. 불순종에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뜻이 있었고 그 뜻을 어긴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불순종과 죄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저주 아래 놓여 있던 인간들이 오늘 이처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더러운 죄인들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주님을 찬송 하게 된 것은 한 사람이 순종 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지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에 우리들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한분 예수 그리스도에 자기를 버리신 순종.....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뜻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 분이었다. 그리고 온전히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이 세상에 모든 죄로 말미암는 고통을 종식 시키시려고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 오신 것이다.
비천한 인간의 모양을 갖추시고 죄와 슬픔 밖에 없는 이 세상에 내려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이 아버지의 의도를 깨달아 자기를 본받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렇게 낮아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참된 구원을 얻었기에 삶과 죽음 보다도 더 탁월한 하나를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치이다.
이 세상에는 그 보다 더 높은 가치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 하시고 바라신다고 하는.... 것 보다 더 훌륭한 가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드네~~~ 이것이 신앙이다.
자기의 뜻을 십자가의 사랑의 빛 앞에서 버리고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 신앙이다.
모든 죄는 예외 없이 불순종을 동반 한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곳에는 불순종도 없다.
우리는 오늘도 찢어지는 아픔으로 주님이 기도 하셨던 것 처럼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기도 해야 한다.
왜냐 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힘쓰고 애 쓰는 것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 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짐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느껴지고 경험 되어 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요한 복음 8장에서 말씀 하셨다.
“내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도다” 고 말씀 하셨다.
사랑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순종 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불순종하며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엉덩이를 두드려 주기를 원하는 어린 아이의 심보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부패함을 용납 해주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용납 해 달라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 하시든지 나는 나의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몸부림 쳐 보지만, 기도 하고 은혜를 구해 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아파 하는 모습 인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사람과 위로는 인간이 얼마나 많이 고통 받느냐에 비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종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때로는 신앙 생활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냉혹한 아버지로 비쳐 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쳐다 보지 않구나” 그기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종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하찮게 여기는 자녀들은 아버지를 등지고 살아 갈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태양을 등진 것 처럼 그 인생 앞에 고뇌와 슬픔의 그림자를 짊어 지고 살아 갈수 밖에 없다.
온전한 순종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순종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두 가지로 말씀 드린다.
첫째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순종 해야 하고 또 하나는 적극 적인 의미에서 순종해야 한다.
소극 적인 의미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는 기도 해야 할 필요 없이 이미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순종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도적질 말라고 했다. 도적질에 해당 하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간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유를 말하지 말고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살아가는 한 여러분들의 영혼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많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충분한 것들이기에 이 말씀을 신뢰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지난 주간에 성경을 몇 장이나 읽었는지 궁금하다.
텔레비 프로는 기억해도 성경을 읽었던 것들 기억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허다하다.
일어 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그리스도 인들에게 일어 나는 일들이 일어 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별로 중요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 대로 나의 생각 되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신앙 생활은 짐승과 같은 신앙 생활이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 생활 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세상에도 고통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는 것은 순종하며 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풍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누군가가 뇌물을 가지고 왔는데.... 하나님! 받아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기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것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뒀는데.... 사업을 해 보려고 하는데.... 단란 주점을 차리려고 하는데..... )
우리가 기도 하는 것들 중 기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아는지...?
우리가 기도 하는 것들 중에 하나님을 희롱 하는 것들도 다수 있슴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십일조를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전도 해야 할까요? 기도 해야 할
까요? 하는 이런 .....)
성경을 읽고 깊이 깨닫는 사람들은 기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할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성경에 다 기록 되어 있다.
깨닫고 순종 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것이 우리가 성경공부도 하고 배우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데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우롱 하는 신앙 생활 일 뿐이다.
전심으로 순종하려고 애를 쓰다가 정말 연약하여 범죄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그 뜻을 이루면서 살아가려는 판단이 아예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은 아시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였슴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보셨던 것이다.
도처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슴 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성취하도록 부름 받은 백성들이 온몸을 던져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삶으로 방해하고 생활로 방해 하는...비극 적인 인생들을 수없이 보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여호와의 친밀한 사랑이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것이다.
모든 피조 세계가 그분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이 주리신다 한들 우리가 드리는 제물의 피와 짐승을 원하겠냐고 시편에 기록 되어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님은 속량 해 주셨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죽었던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어 주셨다. 주홍과 같은 붉은 죄가 가득 할지라도....용서를 구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화해를 경험 할수 있는 것이다.
신학교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절대로 목사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한적도 있다.
철저하게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덩어리로 뭉쳐 져서 누가 뭐래도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되면 교주가 되기 쉽다.
거기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지....?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생각 해 보았는지..?
내가 이 교회에서 이렇게 이런 마음 가짐으로 신앙 생활 해 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 진지하게 생각 해 본적이 있는지...?
겸비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하면 순종하겠다는 의지 없이는 어떤 변화도 일어 나지 않는다. 성화도 일어 나지 않고 인격도 변화 되지 않고 심령의 어떤 변화도 일어 나지 않는다.
주님은 천국을 씨 뿌리는 비유에 비유 하셨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고 다 땅속에 들어 간 것이 아니다. 공중으로 흩날리는 씨도 많았다)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순종하면서 뜻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변화를 가져다 준다.
자신이 말씀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변화 받기에는 자기가 너무 완전하고 너무 높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 하는 자들이 목회자가 된다면..... 교회 간판이 걸려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는 교주가 판을 치는 것이다. 그런 아집에 가득 찬 신앙을 성도들에게 강요 한다면....정말 불행한 일들이 일어 날것이다.
하루도 빼어 놓지 않고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이 많이 아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신 고난은 ...주님은 어떤 즐거움도 원하지 않았다. 주님의 즐거움은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 이었다.
우리와 같이 불순종과 죄로 일관했던 사람들이 주님께서는 자기 위를 넘어 가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자기가 뿌린 피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 한 것 처럼 너희들도 순종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 주님이 찢으신 고난의 길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 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순종하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대가를 치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 지지 않는다. 예수 믿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기 전에 주님을 믿으면서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과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데 드는 비용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성경을 펴기만 하면 말씀 하신다.
그러메도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 부족하다.
진리를 발견하면 그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그 뜻대로 살수 없게 하는 환경과 더불어 싸우고 투쟁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계획 되로 살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힘써야 한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비하고 무엇이든지 시키면 그대로 하려고 하는 ...자기를 비우려고 하는 마음 없이는 신앙생활에서 어떤 좋은 일도 일어 나지 않는다.
살아서 신앙 생활 하면서 좋은날 보기를 기대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온전한 순종이다. 그렇게 하려고 애쓰면서 당연하다고 생각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필요 한 것이다.
하나님이 다른 것에 있어서는 양보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는 절대 양보 하지 않는다.
하라고 하는 것은 해야 하고 말아라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그기에는 어떤 이유도 존재 할수 없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세번째 “뜻이 이루어지이다”란 기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또 소극적인 의미에서도 순종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속에는 분명하게 우리가 행하고 말아야 할것인지 말씀 하셨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것 말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필요로 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 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근면한 삶에 대해서는 말씀 하셨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할것인지 사업을 할 것 인지는 성경 어디를 찾아 봐도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어느 회사로 입사를 해야 할지는 더더욱 말씀 해 주지 않는다. 아무리 신령한 사람이라도 성경을 보고는 내가 저 사람과 결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저 사람하고 결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런 것은 알수 없다. 두 사람 하고 결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만 확실할 뿐..... 어떤 사람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한 사람이 신학을 해야 하는지..? 돈 많은 장로가 되는 것인지도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은 이단에 가까운 사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극단에 치우치기를 조심 해야 한다.
저도 들은 얘기입니다.
(어떤 부인이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 하라 했기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하는 자매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매가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서는 하나씩 물어 보는 것이다. “하나님! 잡채를 오인분을 살까요? 십인분을 살까요? 한다는 것이다. 그 자매의 말은 하나님이 그것들 응답 한다는 것이다. 부추가 비싼데 쪽파 넣으면 안될까요..? “안된다” 그러면 비싸도 부추를 사서 돌아 온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 와서 믿음 없는 남편에게 얘기 했더니 남편 말이 “근데 간장은 왜 사오지 않았어? 너희 하나님은 잡채 무칠 때 간장 넣는다는 것도 모르시나 보지...” 했다고 한다.....) 이런것은 미신에 가까운 삶이라고 밖에는 말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행하면서 살도록 여유를 주셨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자유 의지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불순종 할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 대신 책임을 져야 한다.
심지어 십계명 까지도 용감하게 짓밟는 사람들이 약대는 다 내보내고 하루살이 같은 것을 붙들고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경건하고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사는 사람처럼 고도의 외식이요. 자기의 즐거움일 뿐이다. 자기의 과시인 것이다.
누군가가 사소한 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매우 골똘히 생각 하면 큰 계명에 대해서 어느정도 고뇌 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그 후자는 모두 위선이다. 아니면 약간 종교적인 정신 도착증에 걸린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뜻은 그러메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 해야 될 경우가 너무 많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애쓰고 순종하려고 얘를 쓰는 신앙 생활이 우리에게는 너무 필요 하고 그것 없이는 하나님 앞에 순종 한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삶에 태도를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때문이다.
로마서12장에서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성경뿐 만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인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정해 져 있다.
그것을 찾아 내고 그것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해야 한다. 그것을 순종 하지않을 때 하나님은 너무 슬퍼 하시는 것이다.
내가 생생하게 체험 한 것 중에 하나가...( 한달에 교회에서 7만원을 주는데 등록금이 6개월에 45만이었다. 등록금을 다 냈는데 학기말이 끝나고 나니 성적이 아주 우수하다고 학교에서 돈을 타 가라고 하는 것이다. 은행에 갔더니 큰 돈을 주었다. 3-40만원 정도 되는.....그 돈을 받아 가지고 오면서 무엇을 할것인지 생각 했다. 결혼하고 고생만 실큰 한 것 같은데 아내에게 여행을 시켜 주자고 심사 숙고 해서 설악산 여행 티켓을 끈어었다. 전철을 타는 순간부터 좀전까지도 넘쳤던 많은 기쁨과 즐거움이 모두 사라지고 불안 하기 시작 했다.
무엇인가 마음에서 고통이 시작 되었다. 이상하다고 생각 하면서 걸어 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장학금을 받으면서 느꼈던 감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결국은 가지 못했다. 10%를 위약금으로 물로 나머지를 찾아 왔다.)
성경 어디를 뒤져봐도 신학교 장학금 받아가지고 여행 가면 안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일반 대학 학생들은 그것 타서 노래방도 가고 술도 먹고 한다하는데....
마음은 좀 불안 해도 “난 그냥 여행을 다녀 갈거야” 하면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기뻐 하지 않는 다는 생각과 성령이 슬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깊이 깨달은 것은 이런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도 주님이 그렇게 슬퍼 하시는데 살아가면서 큼직 큼직한 일들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저질로 놓고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 하시는지 아닌지는 거의 생각지 않으면서 ...... 우리 마음대로 자행자지 할때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 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과 같은 삶을 살도록 이 세상에 두신 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만 분별 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계획이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마음에 세기면서 어떡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을까? 생각 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인생을 걸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내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 하며 부어주시는 은혜 속에서 죄와 세상을 굴복 시키면서 승리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삶이 하나님 앞에서 달랐다.
순종하며 살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어다.
백 번을 순종하면서 한번을 불순종 할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 하고자 하고 애쓰고 분별하고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기를 힘썻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말씀과 기도 하지 않고는 거의 하나님 앞에 순종 하면서 살아 갈수가 없다.
늘 기도 하고 말씀 속에 살려고 해도 속에 있는 못된 자아와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자만심 들이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끌어 가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감화도 없고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적시는 기도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 하면서 살아 갈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한것이다.
순종 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 하려고 하는 용기가 기도 하지 않는 속에서는 일어 나지 않는다.
하얀 이불에는 작은 점 하나도 금방 눈에 뛴다. 까만 이불에는 새까만 먹물을 흘렸다고 그것이 표가 잘 나지 않는 것이다.
기도 속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은 영혼이 정결 하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 되어 있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슬퍼 하신다는 영적인 감각이 금방 오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령 자체가 하나님이 좋아 하지 않는 길을 걸어 간다면 ... 그런 불순종과 죄는 마음에 어두움을 몰고 오고 무감각을 몰고 오는 것이다.
무감각 하고 마음이 어두워 지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정서의 상태나 영혼에 상태에 어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며 살아 가기 위해 결단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단란 주점이나 노래방에 있어야 정서가 편안하지 거룩 거룩 하는 자리에 나와 있으면 좌불안석이다.
영화 관에서는 오랫동안 견딜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견딜수 없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의 마음이다.
주님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가라쳐 주신 것은 기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고 누가복음에는 기도 하고 온 후에 가르쳐 준걸로도 나온다. 그런 맹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기도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 해도 거의 그 기도 대로 살아갈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심령이 깨어 있으면 성경을 볼 때 “이렇게 하지 말라” 그러면 그것이 무게로 다가온다.
영이 깨어 있지 않으면 “슬퍼 하노라, 내가 너를 심판 하노라....” 하는데도 아무런 마음에 다가 오는 무게가 없이 성경을 읽기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 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 생활은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뿐이다.
그기에는 예수의 향기가 있을수 없고 그런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이 아버지의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 있지만.... 주님의 나라에 거의 기여 하는 것이 없는... 영혼을 구원 받은 것 외에는 주님을 믿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분류 되고 말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고 그 뜻을 거스리면서 사는 대가는 하나님의 징벌과 죄와 고통과 슬픔이다.
아무런 기쁨이 없고 참 빛이 없다. 교회 오면 느끼는 것은 기쁨이 아닌 갈등일 것이다.
잠시 기쁨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것도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겠다는 가치로 생각 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므로 교회 와서 확인 하는 것은 “내가 세상 속에서는 살수 없는 인간 이구나” 확인 하고 세상으로 나가서는 “나는 세상 에 살아야 할 인간 이구나” 생각하고....그런 반복 적인 생활 속에서 죄는 쌓여져 가고 하나님의 진노도 쌓여져 가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창조 하시고 구원 해 내신 계획을 회복 시키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군사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합니다.
겸비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모든 변화를 이루는 ...모든 행복에 이르는 조짐 인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배교를 해야 겠다 는 용기가 없는 한 겸비한 마음을 가지시길....
오늘도 이 어두움에 있는 나의 영혼에 주님의 뜻을 보이시옵소서....
하나님의 기뻐 하시는 뜻을 쫓아서 사는 것이 내게 기쁨이 되게 도와 달라고...
하나님의 계획에 나의 인생이 보탬이 되게 ...도와 달라고...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세번째 기도를 통해 발견 하는 우리 기도의 제목 인 것이다.
12.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하늘을 향하고 있는 기도의 제목 같은 것이(세번째 기도 제목까지) 갑자기 변해서 이 땅에 있는 평범한 기도의 제목들로 이루어 지고 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말씀이다.
약간은 세상적인 기도 제목 같은 것을 제자들에게 네번째 기도 제목으로 가르쳐 주셨다는 것을 상기 하면서 어떤 삶을 살도록 하나님 앞에 요구 받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겠다.
주기도문을 강해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누누히 강조 하는 것이지만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즉석에서 만들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아니었다. 이 기도는 주님의 삶이었다. 주님의 사신 삶의 농축이 이 기도였고 살아가시던 자리였다.
이런 삶의 자리에서 우러 나온 기도를 깊이 이해 하고 이 기도가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일관되게 평소에 드려지든 것임을 기억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도 속에서 매우 신비한 느낌을 받게된다.
적어도 당시 굶주리고 가난하던 사람들이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면서 사는 것이 당연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 하셨다는 것을 잘 생각 해 봐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시던 동안에 자기가 사시던 삶의 자리에서 우러 나온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을 기억 하자.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 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하나님의 아들 조차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사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물질 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양식을 내릴수 있는 분이셨다. 우리는 벳세다 광야에서 말씀을 듣다 허기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기적의 광경을 기억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매번 자신의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 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는다. 기적이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삶을 기적으로만 살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날들을 예수님은 평범하게 생활에 종사하시면서 사셨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롯 유다는 제정을 맡아서 회개를 보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생애의 역사를 보고 있다.
이것이 단지 연약한 몸으로 육신으로 사셨기에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모습을 교훈하기 보다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였다는 측면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얼마든지 기적으로 자신의 빵의 문제를 해결 하면서 살수 있었지만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고 또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시면서 사신데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네번째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는 양식이란 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양식은 하루 하루 육신의 생명을 연장 시켜 주고 이어 줄수 있는 식물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 하셨던 것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양식을 먹고 살아 간다. 배부르고 건강 할 때는 전혀 연약한 존재이고 먹을 것 없이 살수 없는 존재 라는 것을 깊이 인식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식물에 대해서 하루 정도만 굶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자신의 생명이 한 그릇의 밥이나 빵 하나에 자신의 생명이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많은 바쁜 일에 몰두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 할수 없는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수 있는 사람이 빵 한 덩어리 밥 한그릇... 두끼 세끼정도가 사라지고 나면 정신을 모을 수 없고 건강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욕망이나 정욕 조차도 맥을 쓰지 못한다.
그리고는 한 조각의 식물에 목마른 사람들이 된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런 존재 임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한끼의 식사만 못해도... 양식이 없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갈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의 공급 되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나는 예수 믿기 전에 좋아 하는 영화가 있었다. 대 자연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트리 같은 것을 아주 사랑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내가 변화 받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하지 않는 데도 장엄한 알프스 산맥이나 바다들 바위들 .... 수만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만들어진 계곡들.. 그때 우리는 모두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수만년이 아니라 수십만년 동안 생겨 난 것들을 보면서 그 앞에 설때에 ...우리가 100세를 살고 간다고 하더라도...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루살이와 파리가 같이 놀다가 헤어질 때 하루살이에게 내일 만나자고 했을 때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또 파리를 다음달에 만나자 하면 그 말을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존재 하는 동안에도 매일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 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탱 하지 못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기도 할 때 마다 너희 자신의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 자신은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요 양식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지음바 된 인생들이란 사실을 기억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 않고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두번째 불쌍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의지 할것이 없이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씩씩하게 살아 가는 사람을 싫어 하신다. 강한 자립 정신으로 살아 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존경을 받고 추앙을 받고 살아갈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 하신다. 하나님이 좋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 인지를 알고 ....식사 조차도 자기의 힘으로 해결 할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하는 사람.... 그래서 삶의 범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기뻐 하시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해서 화성이라고 하는 곳 까지 인간이 쏘으는 로켓트가 날아가서 우주선이 우주를 탐사하고 어마 어마 한 자료들을 보내기도 한다.
인간의 지혜는 뛰어 나지만 ....미국과 함께 놀랍게 우주 경쟁 시대를 열었던 소련을 보라.
우주선을 쏘을수 있는 나라도 빵 한조각과 버터 한덩어리를 타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지역에 비를 내리지 않거나 해볕을 너무 많이 내리신다면..... 농사를 할수 없고 커다란 굶주림이 오는 것이다.
굶주림이 엄습하면 인간이 세워 놓은 모든 문명은 지탱 할 힘을 잃어 버린다.
구 소련이 헤체 되는 것을 시사지에서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 철통 같은 군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 지니 국가가 모두 해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먹을 것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어느 역사가가 말하길 인간이 만약 먹지 않고도 살수 있었다면 인류 역사의 전쟁은 대부분 없었을 것이다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어에서 전쟁이라 말과 떡이라는 말의 어근이 같으다.
전쟁은 밀 하마이고 떡은 레헴이다. 같은 어근 에서 오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란 것과 떡이라는 것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네번째 기도 속에서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 하면서 살수 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풍족하게 살아 가고 있다. 절박한 심정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양식으로 인해 기도 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에게는 언제든지 배고픔을 해결 할수 있는 식료품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지만 이런 모든 부요함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부요한 삶을 허락 하셔서 불안한 마음으로 눈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기도 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의뢰 하였던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네번째 기도속에서 날마다 확인 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앞에 이런 은혜를 간구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을 때 마다 이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 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빚지면 살아가는 감사가 우리 속에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매일 공급 해 주시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생명을 부지 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신앙 삶 모든 육체가.....매일 베풀어 주신 양식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을 고백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육신은 양식으로 살아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양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 시켜 주시는 방법이다.
주님이 연장 시켜 주신 생명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넘쳐 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매일 부어져야 한다.
일주일 전에 먹은 양식을 가지고 오늘 살수 없고 한달 전에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아 가는 것이 쉽지 않다.
매일 아침 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은혜...자비 하신 은총을 우리 영혼이 덧입을 때...식물을 주셔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아 있게 하시는 그 근본적인 목적에 부합 하는 인생을 살아드릴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육신이 부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 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동물과 같은 것이다.
사자가 언제 사람을 공격 하는가?
배 고플때다. 맹수들은 과식 하는 동물들이 없다고 한다.
배부르면 사자건 호랑이건...먹을 것에 관심이 없다. 자기를 공격 하겠다는 위협을 느끼지 않는한 절대 공격 하지 않는 다고 한다.
우리에게 매일 내려 주신 은혜를 따라서 살아야 하는데 단지 배부르다는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영혼과 생명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있으나 단지 동물로 존재 할뿐이다.
우리는 빵 없이 살수 없는 존재들이고 양식 없이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단지 육신의 양식만으로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네번째 기도를 통해서 고백 하게 되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 갈수 l있다는 고백을 하며 매일 식탁을 대하듯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두번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기도를 통해서 첫번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경험 했지만 두번째는 주님이 기도 하게 한 것 가운데...앞에서는 양식을 살펴 봤지만 이번에는 “일용 할이” 라는 말을 주목 하고자 한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 하기를 한번 구할 때 일년치나 혹은 평생의 양식을 구하는 대신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가르치셨을까?
당시에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공급 받으면서 사는 것 자체도 대단한 축복처럼 느껴 질수 밖에 없는 궁핍하고 비난한 시대를 살았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 해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진리를 발견 할수 있는지 살펴 보자.
주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한 것은 구하기를 탐하고 이 세상에 보물을 땅에 쌓아 두고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는 복음의 한 가르침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식물이 몸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몸이 식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를 위해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소유가 있다는 것이다. 물질은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있고 인간의 육신의 목숨은 영혼을 위해서 있고 우리의 온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 한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 주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 가는 것 만큼 힘들다고 하셨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서 천국의 복을 누렸던 많은 부자들을 만나게 된다.
아리마데 요셉 같은 사람도 그랬고 빌레몬과 같은 사람도 그랬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돈 많은 부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물질이나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 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 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상기 시켰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매일 공급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 해주시는 신실함을 의뢰 하기 보다는 많은 물질을 쌓기를 원하는 것이다.
왜 인간들이 많은 물질을 소유 하려고 애를 쓰고 물질을 위해서 몸이 있는 것 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물질이 자신의 인생을 보호 할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를 물질로 해소 하려는 생각 때문에 물질에 집착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구원을 가로 막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에서 부자이고 젊고 유력한 관원인 한 사람이 “어찌해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
주님은 십계명을 말씀 하셨고 (청년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잘 지키면서 살았으므로 기뻐 했다) 그 정도라면 구원은 자기 것이라 생각 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 하셨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쫓으라 .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 그 청년은 많은 재산으로 근심 했다.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씀 하지 않았다.
왜 이 청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하나님의 통찰로 청년을 바라봤을 때 그 청년은 구원의 문제로 깊이 고민 하고 있슴을 보았다. 그러나 구원을 가로 막고 있는 중요한 문제를 부자인 젊은 관원에 마음속에서 발견 했다.
그것은 세상 물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는 물질도 하나님도 ..영생도 얻고 싶었다.
주님이 그 젊은 관원에게 문제를 삼으신 것은 부자라고 하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물질을 향해 가지고 있는 집착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그 젊은 청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현실을 보셨던 것이다.
진정한 구원을 경험 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절대적인 사랑을 말한다.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고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구원의 길로 들어 가기 위해서 구원을 선택하고 간절한 사모함이 일 때 마음에 이는 변화는 사랑의 큰 변화다.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이전에 행복해 하던 관심 즉 세속적인 행복이 전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구원 받은 신자 일수 없다. 성경에 진술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면 그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부해지고자 하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 보다는 주님을 닮고자 한다.
행복 해 지기보다는 거룩해 지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 보다는 주님께 인정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은혜의 강물에 푹 젖을 때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내가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은혜를 받고 은혜의 물속에 푹 들어 가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 쓰고 싶어 한다.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음악을 하는 작은 자로 남는 음악인들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하고 나니 그들의 재능이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나면 그 시간을 주님을 위해 사용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에 대한 사랑은 정말 지독 하다. 자식이 아비를 고소하고 형제들이 가슴에 칼을 꽂고 돌아서고 돈 으로 인해 부모를 죽이고......... 이런 것들은 쉽게 얘기해서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용할 양식이 우리의 인생을 위한 것인지 우리의 인생이 양식을 위한 것인지?... 구별을 잃어 버린 혼돈에서 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 하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가라는 것이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고통들은 인간의 탐욕에 달려 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할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행복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아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자들이 되었으니 높은 가치를 살아야 한다.
세상에 있는 많은 물질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
누구를 위해 돈을 벌고 누구를 위해 공부를 하는가?
돈을 벌고 공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표지 인것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남을 위해 봉사 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 주시고 나를 이처럼 많은 재물과 건강을 허락 해주셔서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 있게 해 주셨다는 이유로 감사 할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부하면 부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워 지고 신뢰하고 의지하면 살아가게 될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만족은 이 세상의 양식은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그들의 진정한 양식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일을 행하는 것이라”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으로 우리들이 알아가야 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사치하고 방탕 하고 물질을 사랑해서 거기에다 인생의 보람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절망적인 인간이 될것이다.
많은 사상가들도 물질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처절히 파괴 시키는 가를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권고 하고 있다.
중국에 있는 한 철학자는 돈이라는 단어를 쓸때마다 꼭 괄호안에 집어넣어서 썻다고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맑은 정신과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욕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하고 그것들이 물질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 된 것이란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에 다시 생각 하기 싫은 더러운 기억들을 신문 지상을 통해서 신물이 나도록 들었고 보았다. 오랫동안....
모든 비극의 궁극적인 비극은 물질에 대한 사랑이었다. 많이 소유 하고 있는 것이 마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성취를 이루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방법과 생각들이 사회를 좀먹고 인간 관계를 파괴 시키고 사람들 속에서 신뢰를 앗아 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들 조차도 깊이 이런 것에 물들어 살아 간다면 이 세상은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실히 일하고 건전하게 사업을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많은 물질을 주실수 있다. 그러나 그 물질을 내가 모두 쓸수 있다고 생각 하면 큰 일 난다.
그 생각은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다.
내게 있는 모든 물질이 내 마음대로 쓸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고 했다. 무엇이든 사랑하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많은 재물과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평생 사용 하고도 남을 만한 양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그 양식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 하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일주일도 아니고 한달도 아니라는 말씀을...일용할 양식이란 말씀을 하는 것을 보면서 또 하나를 깨닫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면 좀더 큰집에서 살수도 있고 차도 좀 좋은 차로 바꿀수도 있고 가난했을 때 보다도 좀더 좋은 옷을 입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모두 인정 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최소한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편이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갈수 있지만 과도하게 사치하는 삶은 주님이 기뻐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이 부분을 명쾌 하게 해석 해 주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빵과 물만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 해 나갈 수 있는 교육, 문화, 경제, 정신......이런 것들을 최소한의 혜택을 가르치는 말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단지 먹고 사는 것 만이 아니라 입는 것도 포함 하는 것이다.
그의 직업이 모델이라고 하면 값비싼 의상도 직업적인 측면에서 일용할 양식이 될수 있다.
그가 만약에 특별한 기술들을 공부하기에 필요한 여러 비싼 기자제들.... 이런 것들도 일용할 양식이 될수 있는 것이다.
저 같은 목회자들에게 평생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르쳐야 할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과도하게 구입 하는 책도 일용할 양식이 될수 있다.
마틴 루터는 모든 인간적인 교육과 문화 모든 혜택이 포함 된다. 그러나 다이아 반지는 포함 되지 않는 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사치 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 시키고자 하는 물건들이라면 일용할 양식이 될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도 주님께서 주신 이 명령을 따라서 검소하고 사치에 흐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를 발견 하게 되는 것이다.
탐닉하게 되면 결국은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면서 공급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사는 우리들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는 명령 앞에서 우리의 옷깃을 여미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돌아 보는 것이다.
진실하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리면서 이것들이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 지도록 우리 자신이 주님이 주신 양식으로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이다. 매 순간 마다 공급 해 주시는 양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살아 있다는 신앙 고백을 가지므로 주님이 주신 재능들과 물질들을 가지고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우리 자신을 복음 앞에 복종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앞에 합당한 삶인 것이다.
물질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순결한 영적인 삶을 유지 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땅에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나 오히려 오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의 문제에 대해서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이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모두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 하나에 자신의 생명까지 내 거는 ....가치가 전도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들은 그 사람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정리된 생각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질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 가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확인 할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사랑 하는 사람들이기에 모든 사람이 좋다는 물질 조차도 마다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들은 우리 삶에 주목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물질만을 사랑하면서 세상자체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세상에 물질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 영원한 것들이 존재 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또한 그것들을 쫓아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충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 줄수 있는 진실한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 하면서 살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매일 공급 해 주시는 빵 한 덩이에, 식사 한끼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교만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지난날 우리가 살아온 것도 신실한 하나님 은혜였다고 고백 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물질을 의지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성실을 의지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우리의 신앙에 실패가 없으리라는 것을 믿으면 살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네번째 기도를 대하면서 당신을 의뢰 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인 것을 주님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을 기억 해야 한다.
주님이 일용할 양식 조차 아버지의 손에 의지 하면 사셨던 것 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얼마 되지 않는 인생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주님이 많은 물질과 번영을 주실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그 물질 번영 보다 우리의 영원한 분깃인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날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에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감격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당신이 주신 축복들을 가지고 당신의 영혼들을 망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축복들로 더 많이 주님을 섬기고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마음을 이해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축복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
“주님!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시고 매일 공급 해 주시는 은혜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이오니 주 없이 살수 없는 인생을 버리지 마옵소서” 하는 이런 기도제목들을 네번째 기도 속에서 발견 하는 것이다.
13.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순간 순간 의지하면서 사는 절대 의존 적인 신앙을 부요 할 때나 가난할 때나 형통 할 때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주님이 이 신앙을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초라한 존재인지 늘...깨닫게 하시려고 이 기도를 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기도 하라고 가르쳐 준 교훈을 생각 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던 것들을 늘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생각 하던 하지 않던 순간 순간 하나님이 공급 해 주시는 물질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다. 먹는 밥이나 음료 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인간다운 삶을 영위 해 나가고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이고 이것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쌓아 놓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사치스러운 생활은 성경 적이지 않다. (분에 넘치는 생활을 사랑한다면 이것 옳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 갈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수도사 적인 삶을 대입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주님 주위에는 가난한 자도 부요한 자도 있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권세를 다 버린 자들도 있었지만 고관들도 있었다(사도행전)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감사 하면서 세상에서 누리면서 사는 것과 집착 하면서 사는 것은 다르다. 이것을 잘 살펴 보면 알수 있다.
차이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라져도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회적인 위치나 소유나 권세나....이런 것들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사모하기에 부요 해 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너무 부요해서 하나님을 의지 할 마음보다는 물질과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자신의 삶의 상황을 의지 하는데 까지 나아 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리면서는 살수 있다 (셋방보다는 자기의 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자동차도 적당한 것 타고 다니고 옷도 깨끗한 차림을 하고.........)
과도히 절약 하고 산다고 그 사람을 물질에 헌신되어 있는 자라고 할수 없다. 자기를 향해서 수전노 같은 사람은 남을 향해서도 수전노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기를 향해서는 인색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부요할수 있는 사람들...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복받은 사람이다.
물질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영적인 삶이 계속 억압받고 고통 받게 된다.
물질에 대한 탐욕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고갈 시키고 독소가 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아셨기에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들이고 먹고 숨쉬는 것이 매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게 하셔서 식탁 앞에 앉을 때 마다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려고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잘 드러나는 것이 가장 잘 드러 나는 곳은 삼시세끼 잘 먹고 사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살수 있도록 풍족한 식량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매일 매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다.
일년에 3천만명이 굶주려 죽어 가고 있다. 이 지구촌에는.........그런 속에서 우리를 이렇게 부요케 하신 것이다.
식탁을 앞에 놓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보여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 할수 있는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주기도 문의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의 의미를 복음적으로 깊이 깨닫는 다면 하루 세번씩 부흥회를 하면서 살아 갈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나에게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 가르쳐 주셨다.
이것은 양식을 위한 기도는 공동체 적인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먹어도 같이 먹고 굶어도 같이 굶어야 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주님은 공동체 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해야지만 일용할 양식이다.
모든 탐심은 나의 일용할 양식과 너의 일용할 양식의 차이를 너무 크게 벌여 놓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필요뿐만 아니라 풍부하지 못한 지체들이 가지고 있는 일용할 양식이 어떻게 공급 되고 있는 지 깊이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 가는 사람들이다.
궁핍가운데 처한 지체를 보면(먹는 것 뿐만 아니라.....) 돌아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의 일용할 양식들은.... 사람들을 통해서 채우신다.
부요한 자가 자신에게 넉넉히 사용하면서 지체들을 돌아 보지 않는 것은 매일 주기도 문으로서 자기를 정죄 하는 것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백번을 도움을 받는 다고 할지라도 적응이 되면 안된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도움을 받게 될 때 도움의 도구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죄송함, 사랑의 빚을 졌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갖지 못한 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할줄 모를 것이다.
이북에 굶주린 상태를 보면서 ....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먹어야 회개도 한다.
무조건 보낼 수 있다면 양식을 보내야 한다.
지하철을 타 보면 구걸 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는 것이 그들에게 해가 될수도 있고 도움이 될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안줄 때 내가 이것을 주면 파괴 될 줄도 모르는 저 사람의 영혼에 대한 연민이 이것을 줄수 없게 한다면 주지 않아도 되는 데 팔 뿌러 진 사람을 보면서 다리는 멀쩡하니 줄 필요가 없고 하듯이 이것 저것 구걸 하는 자의 모습을 보고 따지면서 주지 않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 나는 것이다.
우리가 순식간에 만나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영혼까지 생각 할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럴바에야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긍휼에 어울리는 삶이라 생각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일로 미혹에 빠지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동체의 기도로 드리라고 말씀 하셨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 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어려움 없이 고통 받지 않고 식생활을 이어 가고 인간 다운 삶을 이어가다 다시 만났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감사 하고 있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앞에 감사의 조건이 너무 많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공동체 적인 기도의 특성을 깊이 이해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많은 부분들이 형제와 자매들 지체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도구가 되어 지기를 하나님 앞에 사모하고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살아 가게 하는 은혜로 열심히 지체들을 섬겨서 우리 안에 공평이 이루어 지고 핍절한 자가 없도록 모든 사람들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힘으로 살아갈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이 말씀은 하나의 예표가 된것이다.
구약은 희미하게 그림자 처럼 비추이고 있는데 신약 시대가 오면서 이 그림자가 신약에 나타 나는 것이다.
쉽게 얘기 하자면 외국 영화의 배경만을 보면서 자막이 없다면 잘 이해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막이 나온다면 쉽게 이해 될 것이다.
그 배경을 구약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 나오는 한글 자막은 신약인 것이다.
구약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얻는데 광야에서 맛나를 통해서 공급 받는 것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많은 가축과 먹을 것을 가지고 왔겠지만 그 수는 삼백만명이었다. (200원짜리 라면이라 할지라도 한끼에 6억이다……. 일년을 방황 하려면 최소한6천200억 가까이 되는 라면 값이 들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 않았고 누군가가 가져다 주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들어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그 백성들을 먹이셨다.
그것은 하늘에서 맛나가 내리는 것이었다.
인간은 배가 고프면 야수성이 드러나게 되어있다.(인육도 먹었다고 한다)
먹을 것을 걱정 않고 살므로 인간 다운 삶을 살아 가는 것 뿐이다.
숨기거나 참을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적인 상황에서 들판으로 나아가니 맛나가 내려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했을때도 꼭 같이 맛나를 내려 주셨다.
이 사건이 그림(하얗게 내린 맛나를 주워 담으로 나가는 장면) 이라면 그 밑에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것으로 너희를 광야에서 먹이던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요” 이렇게 자막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건을 보여 주신 것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으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또 다른 양식이 필요한데 영혼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한끼라도 굶으면 우리 몸에 이상을 느끼듯이 매일 매일 우리의 영혼도 공급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양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 받고 나면 곤고하기 짝이 없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컬컬한 영혼에 부요함을 허락 하시는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수 없는 자라는 것을 느끼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겠다는 다짐과 결단이 생기는 것이다. 죽을것 같은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나면 다시 살아날수 있는 소생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연속 되는 것이다.
우리는 떠날지라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셔서 필요한 말씀의 은혜를 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수 없는 인생이구나 는 것을 체험 하면서 은혜와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넘어 가보자
맛나가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 맛나 없이는 살수 없었다.
오늘 아침도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 진 밖에만 내려 주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사랑을 알게 되고 특별한 사랑가운데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는 “ 너희들은 아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용기와 힘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맛이 변하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양식이 떨어진 다음부터는 다른 것으로는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었다. 맛나로 만 살아가야 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 까지…..
구별된 백성에게는 구별된 양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맛나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면서 불순종이 커지기 시작 했다.
처음 교회 와서 은혜 받을 때 하늘에 맛나 말씀을 통해서 새 힘을 받았을 때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인생의 비밀을 알았기에 영혼의 생수와 양식이 필요 함을 알고 은혜를 사모 하는 것이다. …. 문제는 시간이 감에 따라 입맛이 변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 육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씀을 읽어야 살수있다.
한국 교회 성도들 중에 설교를 마치고 나오면서 오늘 설교한 본문이 생각나는 사람은 100명중 5명이고 매일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하는 사람은 100명중에 3명뿐이라고 한다.
하나님 만을 사모하면서 쫓아가야 할 사람들이 고기국, 정욕에 좋은 마늘, 부추…. 이런 타령이나 하고 앉았으니 …. 공급해 주시는 양식 앞에서도 그 영혼은 핍절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생각 해 보라.
속사람이 새로워 지는 것을 경험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후패 해 가는 겉사람을 바라보면서 외로움과 비참함을 달랠 수가 없는 것이다.
속사람이 생명의 양식으로 날마다 새로워 져 가는 사람들은 후패 해 져 가는 겉사람에 마음 쓰지 않는다.
날마다 후패 해 져 가는 육신을 보면서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워 옴을 감사 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주님을 잘 믿으면서 살아 가는 사람들은 연로 하게 늙어 가는 것이 인생의 면류관이다.
일평생 하나님만을 의지 하면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비극은 매일 매일 공급 받은 양식이 없고 있다고 해도 말씀의 은혜를 못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일용할 영혼의 양식을 공급 받을지를 생각 해야 한다.
우선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하루에3장 씩이라도….. 능력껏…..)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정기 적으로 목회자에게 건강 진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만 살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챤들은……
말씀을 읽고 은혜 받기에 너무 바쁜 사람들은 살아있기에는 너무 분주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사람들인지 잘 아시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이 일용할 양식의 기도를 드리면서 “너희는 이미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가 내려 주었던 맛나로 살았던 역사를 기억 하라. 그 맛나를 먹으면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건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바로 알려 주고 싶으셔서 보여준 그림이었다고 주님이 말씀 하신다…”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매일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영적인 삶이 결코 건강 할수 없고 신앙 생활이 탄탄 할수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이 늘 불안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은 말씀의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말씀의 깊이가 없으면 기적을 봐도 하나님 앞에 옳게 서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이다.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늘 읽으면서 살아 가길………………
14.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1).
주기도문 강해 14번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2번)
인간은 하나님께서 매일 베풀어 주는 일용할 양식 없이는 살아 갈수 없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에 세번씩 놓인 식탁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거기에서 모든 감사가 나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 생각될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한 주님 앞에서 그 식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누구인지 확인 하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옳바로 서서 살아 갈수 없을 것이다.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용서의 기도이다.
히랍어 성경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 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들을 탕감 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우리에게 빚진 빚들을 탕감 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나와 있다.
이 기도가 늘 하나님 앞에 드려진 기도이고 다시 말하지만 이 기도는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기도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셨던 삶을 느낄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주기도 문은 매우 건조하고 신학적인 껍질이 될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 해 달라고 기도 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드린 이 기도가 공동체 적인 기도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도….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것도….모두 공동체 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혼자 믿는 신앙에 대해서는 기독교는 아는 바가 없다.
예수님 혼자 만을 위한 기도라면 이런 기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를 당신 자신이 짓는 죄 처럼 여기시면서 통회 자복 하는 기도를 드렸고 일생과 죽음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 내려오신 생애 였다.
다섯번째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인간이 죄와 떨어질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첫번째로 가르쳐 주고 계시다.
바로 앞에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씀 하셨고 인간의 육신의 문제를 말씀 하시고 영혼의 문제로 옮아 갔던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사는 일은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육신이 살아 있는 것이 주기도문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영혼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죄사함을 입어야 한다.
육신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맛나) 또 하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끈임없는 죄 용서와 끈임 없는 죄 사함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 갈수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인간이 죄와 결별 할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청중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집과 땅을 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고……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따라 갔던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그런 사람들인데도 예수님께 이 기도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 하도록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버릴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죄 사함을 벗어날수 없고 죄 사함의 필요아래 놓여 있지 않은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일용 할 양식을 공급 받는 것 처럼 죄 사함을 받지 않고는 살아 갈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용서와 죄 사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든 우리 죄를 용서 해 주셨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 죄와 결별 할수 없는 인간 들이기에 매일 매일 올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죄 사함을 구해야 할 필요가 있슴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를 영접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얻지 못한 절망적인 영혼들을 바라 보시면서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생애, 건강, 모든 시간…… 죄 사함을 얻지 못한 인간들을 향해서 모든 것들을 사용 하셨다.
죄 사함의 문제는 모든 인류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 이면 이런 죄 사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 교제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 사함의 길을 열어 놓았지만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계속 되고 있다.
이미 구원 얻은 자녀들에게도 이 죄는 결별 될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었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범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죄를 떠날수 없다.
우리는 일주일 간도 하나님 앞에서 죄 가운데서 살아왔다. 죄와 결별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죄 사함을 기도 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죄인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셨기에……… 자기를 보내시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도록 보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이 다섯번째 기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은 단지 인간들을 한번 용서 해 준것으로 원하지 않으시고 끈임없이 인간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나누고 싶은 분이시라는 것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이다.
믿는 사람들의 죄는 현제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하셨다.
반드시 회개를 해야지만 용서 받는게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두 생각 해 낼수 없다. 생각 한 모든 죄가 가슴 아프게 다가 오지도 않고 고백한 모든 죄를 죄 사함에 확신 또한 가질 수 없고 다시는 그 죄를 반복 해서 짓지 않을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이전에 행했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을 영원히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주님으로 인해 용서 받고 구원 받았다.
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에 죄를 정죄 받고 안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고 들어 가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들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보증을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죄가 남아 있으면 주님은 용서 하셨지만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문제을 가져 온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정죄 함은 없지만 신자들이 죄를 짓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그 죄 값을 치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징벌 아래 있다.
그리스도인의 죄 든지 비 기독교인의 죄 든지 …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징벌 아래 놓여 있다.
하나님을 믿은 자들에게 정죄 함은 없지만 죄를 짓고 살아 간다면 하나님이 그 인생 길에서 그 죄들을 갚게 한다.
그 죄로 말미암아 용서 받았슴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빛 아래서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그 사랑을 등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 하신 것은 멸망에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로 옮기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우리들을 사귀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만들 때 두가지 계획을 가지고 만들어 놓으셨다.
창조 하신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 인간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인간들은 한없이 죄로 인해 고통 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해 달라고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신 이유도 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은 양립 할수 없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 하시고 정죄 함 없다고 선언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만 가지고 살아 갈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혼은 오늘 죄와 슬픔과 눈물과 모순이 많은 이 세상에서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목마르게 그리워 하고 있다
고통 하는 영혼의 유일한 대안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과 사귀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들과 막혔던 죄의 빗장이 부셔지고 생명과 은혜의 빛 줄기가 어두운 영혼에 두루 비취는 것이다. 그 빛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참 사랑을 알고….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면서 내 인생에 진정한 소명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인생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행복한 인생을 살수 없다.
주님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기에 죄 많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아 갈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 하는 사람만이 가능 한 것이다.
관념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증하고 매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순간 순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 받고 즐거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 하면 살아 갈수 있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징벌 아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기에 ….. 죄와 결별 할수 없는 인간이기에 매일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변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 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그 결심이 굳고 강하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범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피로 우리를 건져 주셨지만 …. 지금도 나를 용서 하시고 나를 그 원래의 진정한 교제의 자리로 데려가 주시도록 기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히랍어 본문은 죄를 빚이라고 표현 하고 있다. 복수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 빚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빚과 같으다. 하나님은 이점에 있어서 엄격하시다.
하나님 앞에 진 죄는 하나님이 반드시 받아 내신다.
거듭 나지 못한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가 어떤 것이든 그것과 상관 없이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살아간….. 예수의 참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 죄의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사망의 죽음뿐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빚을 갚는 날들이 연기 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면 누구도 그 빚을 갚아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될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도 범죄하고 …. 진심으로 사랑하고 살지 않는 다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 사람의 삶 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불행하게 될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몰랐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부터 알았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주님을 즐거워 하면서 살아가는 방법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서 알게 되었다.
미련한 우리를 향해서도 계속 부어 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또한 보아서 알고 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껏 살아 왔다….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충만 할때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도…..
비참한 눈물을 흘릴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 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 하시네~~
우리의 영혼은 소리 지르며 요구 한다.. 보다 더 완전한 사랑을 달라고…..
주님의 사랑의 빛 아래서 살아 가도록 도와 달라고…..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에게 소리 지르고 있다.
무엇이 이것을 가로 막고 있는가…?
하나님도 그렇게 주기를 원하시는 진정한 교제, 생명의 빛을….?
오직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 가 있는 곳에 당신의 거룩한 것을 거두시는 것이다.
죄를 추구하고 죄 가운데 살아 가는 이유는 죄가 뭔가를 만족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만족을 주지 않는 다면 결코 그들이 범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사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버리고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일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어두움이 깃들게 하시고 교제가 끈어 지게 만들어 주심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고 얻은 것들이 얼마나 자기의 영혼에 위로가 되지 못하는 지를 생각 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잠시 죄악에 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상 해 줄 것 처럼 느껴 지지만 시간이 흘러 갈수록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자유와 기쁨…….. 그 아름 다운 추억들을 다시 떠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근심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게 되면 시기야 다르지만 반드시 하나님 앞에 회개 하여야 할 필요를 속사람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 당신의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회복 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범죄는 해도 죄로 인해 하나님의 불명예와 가리워진 하나님의 영광을 보상할 능력이 없다.
죄를 종식 시키는 길은 오직 회개 하는 것이다.
회개 하는 자들에게 죄를 종식 시키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았지만 매일 반복 되는 옛사람, 옛 성품으로 말미암는 죄들을 경험 한다.
그것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 처럼 죄의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그때 다시 교제의 회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밀렸던 빚을 갚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 질 것이다. 자유와 진정한 기쁨이 있게 될 것이다. 회개가 바로 이런 것이다.
매일 죄 사함을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회개를 통해서 죄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참 자유를 경험 하게 될것이다.
죄가 하나님 앞에 해결 되지 않고는 어떤 기쁨도 주어 지지 않을 것이다.
생명력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하기 위해서는 회개 해야 한다.
죄가 큰것이든 작은 것이든….. 양이 달라도 꼭 같은 것이다. 질에 대해서는…
크건 적건 … 그것을 느끼는 하나님의 생각은 동일하다.
하나님과의 생명력을 회복 하고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회복 하면서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 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 하여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행동들, 죄를 일삼으며 살아간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목적에 부합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뉘우치면서 회개 하지 않으면 생명력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사함을 간구하면 하나님이 죄를 사하여 줄것이란 것을 아셨기에 당신도 믿음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 하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도 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기도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
진심으로 회개 하고…. 진정으로 참회 할 때 …회개 할 때 베푸시는 죄사함을 경험 케 할것이다. 죄인 이라 할지라도 죄의 양 때문에 그들을 정죄 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분랴이 어떠 하든지…그들 속에 진정한 참회를 볼수 없을 때 그것은…하나님 앞에 고통을 주는 것이다.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하나님 앞에 깨어 있고 은혜와 축복 속에 살아가는 것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기도 하는 시간 마다 진실한 참회를 드리고 있는 지를 보면서 그 사람의 영성의 건강의 척도를 알수 있다.
처리 되지 않는 죄는 우리 속에 계속 쌓이게 된다. 쌓인 많은 죄는 우리 인격과 영혼 깊은 속에 누러 붙고 죄에 대한 의식 조차도 사라지게끔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 두실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뻔뻔 스러운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없다.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이 무엇을 여러분들이 꿈꾸면서 나오는지 다 알수는 없지만 ….
우리는 죄와 결별 할수 없는 존재이고, 모든 죄는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삶과 영적인 삶의 다른 점은 죄의 문제이다.
죄는 참회 하고 또 참회 하고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더 많이 예민해지고 더 뛰어나게 더러 나는 것이다.
참회 할수록 작은 죄에 대해서도 더 진지해지고 솔직해지고 깊어 진다.
진정한 회개 없이 살아 가면 반대로 아주 커다란 죄 가운데 살아 가면서도 제법 자신은 쓸만한 존재라고 생각 하고 죄에 대한 참회는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굳어진 사람으로 살아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파괴 시키는 독소이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과의 교제를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참다운 교제, 진정한 영적인 관계 회복 없이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진정한 만족이 없는 것이다.
은혜로운 설교도……….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날마다 회개의 눈물로 우리 영혼에 붙은 더러운 때들을 씻어 내어야 한다.’
그런 자들에게 불붙는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물로 씻지 못한 허물과 죄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정결케 하시고 깨끗게 하시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생애를 사용 하셔서 당신의 뜻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깨끗하게 정결 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용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예민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구원 받았지만 죄와 결별 할 수 없는 인생들이기에 매일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 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 당부를 받으면서 “하나님! 이제껏 까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구원 하셨지만 그 구원이 감격이 될수 없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이미 이루신 놀라운 일들이 감격으로 다가오고 주님이 나와 더불어 사귀어 주시도록……. 이제껏 지은 많은 죄들을 용서 해 주시옵소서
내 영혼에 진정한 자유를 주시옵소서. 주님의 죄 사함을 내가 믿사오니 나를 깨끗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죄 사함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이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것 처럼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유하심으로 생명을 누릴수 있기 때문이다.
15.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죄 사함의 기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죄와 결별 하고는 살수 없다는 것과 모든 죄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형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그 동안 살펴 보았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과 그 용서를 통해서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해야 하는 것과 죄 사함이 가지는 공동체 적인 성격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요청 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죄는 빚과 같다고 했다. 그 빚을 갚아야만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인가는 존재 할수 없기에 …..( 죄가 크든 적든 질에 있어서 같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도전 이다.)
주님이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그렇게 기도 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과 보증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죄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슴을 인식 해야 한다.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 일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뿌리에 해당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을 때 나타 나는 놀라운 변화는 “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 받지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견해에 도달 하는 것이다”
신앙을 갖지 않을때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전도를 하다 보면 죄에 죄에 대해서 말을 하다 보면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말이 내가 무슨 죄가 있냐고 말한다.
또 나보다 죄 많이 지은 사람들도 많다고 말한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마땅히 형벌을 받는 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 한다.
진짜 죄인은 버젓이 밖에 돌아 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 때 느끼는 인생에 대한 생각 이다.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무감각 하고 자기가 죄인 이라는 사실을 인정 하지 않고 그 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구원을 받게 되는 순간에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 나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고 그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는 일이 일어 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 하는 것이다.
그때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이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 할뿐 아니라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커다란 형벌이고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가 죄의 문제에서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진노아래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유일하게 피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것 말고는 어떤 길도 그 진노를 벗어 날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죄 라는 빚을 하나님 앞에 질 수 있는 능력만 있을 뿐 그 문제를 해결 할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단 하나도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 하셔서 그를 심판 하심으로서 인간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 앞에 입혔던 손해가 보상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진노의 심판을 받아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순간에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이고 죄 아래 있고 진노 아래 있다고 생각 될 때 절망하는 것이다.
죄 지은 인간…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모르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 희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이라는 것은 모래 만도 못한 존재 이다.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잠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가는데 하나님이 그를 창조 하시고 죄를 용서 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고 하는데… 그런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짧은 시간을 살다가 들풀이 사라지고 벌레가 죽는 것 같이 그렇게 죽는 것이 인간이다.
죄 사함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버러지 한 마리가 태어나서 죽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영혼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산 것이라 할 수 없다.
영혼을 향해서 만들어 주는 관건은 죄의 용서이다.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이고 그 죄 용서 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성경을 펴면 인생이 무엇이고 이 세상의 자랑이 무엇인지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묻는다.
죄의 용서를 받았는가?...
만약 당신이 죄 용서를 받지 않았다면 한 여름 날에 피었다가 지는 풀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는 기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구원에 이르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을 향한 기도 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미 구원 얻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들었던 일차적인 청취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 용서함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앞에 끈임없이 죄 사함을 기도 하도록 가르침 받는 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지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지은 죄들은 다 용서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용서를 받아야지 그렇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진정한 구원에 이를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미래의 죄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수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하나님에게는 현재 미래 과거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눈에 미래 과거 현재를 보시는 분이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지 과거의 죄만 용서를 받는다면 우리는 또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아야 할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 하는 것 보다 잊어 버리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기억 해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 하는 죄는 열개 가운데 한 두개 될까 말까 이다.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그 회개가 주님의 마음을 감동 시키고 죄 사함의 확신을 가져다 주는 통회 하는 기도는 쉽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죄로 소문나는 것은 쉽지만 회개로 소문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구하는 이 일에 대한 함정이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용서 해 주시지 않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앞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 하는 것은 과거의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 고백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에 나의 모든 죄를 고백 하고 십자가의 희생의 공로가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해 주실 것이란 기대를 갖고 고백 하고 자백 하는 것이다.
모든 죄를 다 용서 하셨다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기도 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 받았지만 죄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죄 없다고 인정 해 주신 것은( 사람을 죽이고 범죄를 했는데 임금이 특별히 긍휼히 여겨서 법정적으로 용서 해 주신것이다. 특사를 내렸다는 것이다.)
법으로서는 그를 더 이상 제지 할수 없지만 그는 역시 죄와 결별 할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신자들이 더 이상 범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 죄를 하나님의 사하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하심은 법적인 용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를 회복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면 천국에 못가는 것은 아니지만 즉시 죄 책감, 죄로 말미암는 부패….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배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깃들지 않는다.
이것을 해결 하는 방법이 우리 죄의 용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법정적으로는 이미 용서 해 주셨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죄의 무거움을 벗겨 주시고 새로운 생명과 교제 할수 있는 것들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오랜 동안 신앙 생활 하다가도 우리가 죄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 하면 처음 주님을 영접 했을때와 꼭 같은 일이 일어 난다.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생명과 은혜가 내 마음에 밀려 들어 와서 멀리 계신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 지고 그 하나님이 나와 교제 하는 것이 느껴 지는 것이다.
이것이 죄 사함을 하나님 앞에 구하면서 살아야 될 이유 인 것이다.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사람하는 삻을 살아가고 얼마나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해 나가냐는 것은 얼마나 의롭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뚜렷하고 분명한 참회 가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느냐 이다.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뚜렷하고 분명한 참회를 하고 사느냐 인 것이다.
우리속에 남아 있는 죄로 인해, 또 세상 사랑 때문에…. 깊이 고통 가운데로 몰아 넣는다.
이런 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 나는 것이다.
죄와 결별 하면서 살수 없슴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지고 패배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그 죄의 통치 아래 죄가운데 묶여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참회 인것이다.
진정한 참회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힘 입는 사람들은 죄가 그들을 애워 싸고 있지만 그러나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
가끔 죄의 때가 묻지만………
하나님 앞에서 참회를 잃어 버린 사람들은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 가운데 쌓여서 살아가는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범죄하고 죄 지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하고 통회 하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죄의 은총을 경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 사함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뻐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죄 용서를 받지 못하고 살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 갈수 있다고 자신의 행동으로 고백 하는것과 마찬 가지이다.
이 시간에도 당신과의 진정으로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 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원하지만 죄 때문에 어찌 할수 없어 하는 사람들…. 거기로부터 자신이 고통 받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을 이시간도 찾고 찾으시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도 할 때 이렇게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의 행위나 하나님 앞에 쌓는 어떤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해결 될것이라는 흔히 카톨릭에서 생각 하는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 하지 않는다.
용서라는 것은 대가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 인 것이다.
다만 그 은혜를 절박하고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죄 사함을 위한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 죄를 사하여 주도록 간절히 간청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위해서 기도 하고 늘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청산하고 지나지않는다면 점점 죄는 번성 해 질것이고 얼마 없는 은혜는 야위어 갈것이고 죄가 넝쿨을 내어 죄의 지배 아래 우리의 삶을 있게 될것이다.
신앙 생활 속에서 목표를 잃어 버린 좌절은 모든 것들은 단 한가지…죄 사함의 필요한 영혼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죄는 우리가 회개 하여야 할 필요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회개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기능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죄가 계속 쌓여 가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죄로 인해 무디어 지고 회개 하려고 해도 이것이 정말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 해결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까지도 앗아 가버리는 힘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범죄를 한다 할지라도 즉시 그 범죄가 잘못 된 것이고 그 문제로 인해 주님이 아파 하시는 그 아픔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즉시 해결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갈것이다.
문제는 점점 죄를 짓는 일에 있어서 담대해지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무디게 하고 죄에 대한 담대함을 주는 것이다.
죄가 쌓이게 되면 죄가 죄로 받아 들여 지지 않는다.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을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에 대한 감각과 함께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저 길이 아닌데 왜 저러고 살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생명 을 잃어 버렸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담대하게 살아 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럴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 까지 가게 되는데는 매일 짓는 죄를 처리 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드리는 기도 속에서 아버지 앞에 용서 해 달라고 ….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대적 하는 결과 인 것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그 죄 짐을 지고 살아가는 비참한 운명이 긍휼로 다가 온 것이다.
그래서 . “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용서 하여 주소서” 주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일지라도 죄를 회개 하지 않으면 법정적으로는 용서 해 주셨지만(천국은 갈수 있지만..) 신자들이 짓는 죄는 이 세상에서 정리 되게 한다. 범죄 하면 그의 인생을 고통 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질적인 고통일수도 있고 육체적인 것이 될수도 있고………..
죄를 회개 하고 하나님 과의 관계가 회복 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우리 인생에 있어서 숙제가 되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을 볼수 있다.
인생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당하는 많은 고통을 획일적으로 간단하게 모든 고통과 형통 하지 못한 것이 죄 때문이라고 말할수 없지만 …..
그러나 고통이야 말로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회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훌륭한 훈련의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들에게 감당 할수 없는 무거운 짐, 그 짐을 지고 걸어 가봐야 하나님 앞에 상 받을 것이 없을 것 같은….그런… 하나님 앞에 참회 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있는지 성찰 해 봐야 한다.
죄가 사라진 곳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주어지고
죄가 있는 곳에는 고통과 슬픔과 자신의 추한 삶,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으매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흘러 가는 방향은 악하고 고통 스러운 곳으로 흘러 가는 것이다.
이런 고리를 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참회 하는 것 밖에는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태 까지 걸어왔던 길,하나님의 이름을 실추 시켰고 그분의 영광을 훼방하였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는 어울리지 않은 삶이었던가를 깊이 고백하고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죄 사함과 용서를 구할 때 당신의 약속을 따라서 죄를 용서 하시고 생명의 은혜로 채워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가는데 있어서 너무 중요 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갈수 있는 심장부였기에 이 기도를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육신은 매일 부어 지는 양식을 통해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순간 순간 내리는 죄 사함의 은혜와 진정한 참회 만으로 생명으로 누리면서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정결 함을 회복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정결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애통 할수 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수고 할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선행에 대한 생각과 성경이 가르쳐 주는 선행에 대해 서 …
하나님의 자녀들 앞에서 칭찬 받아야 할 선행은 동기가 중요하다.
외적으로 나타난 행동이 아니라…….. 구제를 하던 봉사를 하던…. 그 원동력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출발 될 때 그 선행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주님과의 교제가 더 긴밀 하게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모든 선행과 섬김과 봉사…모든 일들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 막는 것도 유일하게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가 쌓이게 되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쏟아나는 하나님과의 통로를 가로 막는 것이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 주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 주님만이 아신다고…대답 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 여전히 사랑이 쏟아 나고 있었던 것이다.”
죄가 한번 두번 ….쌓이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 속에서 가로 막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 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실까…. 생각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용서의 확신을 얻고 나면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죄 사함을 위해서 늘 기도 하고 그 문제를 해결 받기를 늘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능력있는 신앙 생활 이면에는 반드시 죄를 미워하고 그 죄를 용서 하고 사하심의 은혜를 그리워 하는 그런 신앙 생활이 있는 것이다.
세번쨰는 “너희는 기도 할 때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고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것은 죄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 적인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죄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다루실뿐만 아니라 공동체 적으로도 다루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리이다.
여러분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를 쉴새 없이 뒤덮은 많은 재앙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 했는지?(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비행기 사고………..)
그 속에는 우리보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거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매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허락 하시는 것은 우리 민족의 죄악을 공동체 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떨쳐 버릴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런 일들이 일어 났을 때 조종사의 문제라고…. 관제탑의 문제라고….. 이렇게 떠들어 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깊은 불상사를 당하고 흔히 일어 나기 어려운 일들이 비극으로 닥칠 때 마다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요즘 깊은 위기를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개인적으로도 다루시지만 전체 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 깊이 눈떠야 한다.
자신의 죄를 위해서 기도 할뿐만 아니라 아직 회개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문제인 것 처럼 깊이 생각 하면 그들을 위해서 중보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임재함 속에서 신앙 생활 할 때 느껴 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깊은 염려이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한 깊은 연민…… 이때 기도 할 때 나의 죄 너의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와 나의 죄가 하나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중보 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된다.
이것이 그런 가르침의 진수이다.
죄는 공동체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간구하고 기도 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죄 교회의 죄 민족의 죄…. 이런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의 문제들이 복음을 통해서 해결 할수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거기에 우리 인생이 이바지 할수 있으리라는 기대속에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심판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용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자신들이 죄 가운데서 용서 받고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평화를 누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한 교회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회복 한 후에 생명과 은혜에 넘쳐 나게 되면 화목 하게 되는 도구로 자신이 살아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 한 인간들을 참회를 통해 화해 시키고 죄로 말미암아 단절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해서 진정한 평화와 생명의 교통을 맛보게 하는 일에 기여 하게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소명에 불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그 하나의 목표 를 위해서 기여 할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일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를 위해 수고 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를 가르쳐 주었을 때 이 기도를 들었던 이차적인 청취자들이었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그 시대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 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모든 이 민족의 교회들을 향해서 눈을 들도록 우리에게 시야를 열어 주고 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 죄 사함의 기도를 배우면서 우리자신이 죄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 묻고 싶다.
교회 안에서 일어 나는 어떤 죄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 단지 흥미 거리로 지나치고 있는지? 하나님의 교회에 상처로 받아 들여 지고 있는지?
교회가 부패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올 때……..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되고 있는지?
농담, 또는 이야기 꺼리나 되고 있다면 죄에 대한 경박하고 가벼운 생각은 여러분 자신들의 신앙 생활 에도 그대로 적용 될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공동체 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민족의 죄를 위해서도 기도 해야 하고 더 이상은 불행한 일이 일어 나지 않도록……..
이 백성이 복음의 빛 아래로 들어와서…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갈수 있도록 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백성들이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 지지 않으면 백성들을 심판 하시고 정결케 하실수 있는 무궁 무진한 방법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이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화학 무기가 오천톤이라고 한다. 마음먹고 일시에 트터리면 전방에 있는 군인들이 오십퍼센트가 죽을 것이라고 한다. )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다양한 역사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말씀 하고 계시는 것이다.
“너희들이 정신 차리고 살아라., 내가 축복해서 이 만큼 살게 했는데…나를 기념하고 나를 자랑 하지 않는 다면….그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축복 내린 것과 의도가 다르다고….”
이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깨울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교회 다워지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소유하고 있지 아니하며 이 새대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다.
벼랑으로 줄 달음 치면서도 벼랑 인줄 모르고 불길 가운데로 뛰어 들면서도 그것을 숙명이라 생각 하는 사람들이라 일깨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평안이지 재앙이 아니라고….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의와 공평이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줄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곳이 바로 교회고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자신들 속에서 이 죄를 두려워 하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정결한 교회가 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이 시대를 향해서 들려 줄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세운 것은 믿지 않는 세상을 위해서 세우신 것이다.
그런 사명을 잘 감당 할수 있도록 훈련 시키고 정결케 하시고 변화 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세상의 변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장난 하는 것 처럼 신앙 생활 하면 안된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살고 죽는 문제이고 하나님의 교회가 사느냐하는 문제이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생명 속에 살아 가는냐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죄가 공동체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만 공동체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의도 공동체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성이 멸먕할 때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는 이런 것들을 잘 생각 나도록 만들어 준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것은 죄인이 많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에 망한 것이다. 열 사람의 의인만 있었더라도……..
그 의가 미치는 보편적인 영향 때문에 그 도성이 살수 있으리라는 가망성을 성경 속에서 읽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제목 앞에서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가볍게 여기는 죄의 문제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 죄로부터 하나님의 용서와 사함을 얻고 잃어 버린 생명과 은혜를 화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 다운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끈임 없이 기도 해야 한다.
16.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주님께 용서 해 달라고 기도 하도록 가르쳐 주신 가르침은 충분히 이해 할수 있는데
그 앞에 담보적인 조건 구절을 놓고 우리에게 기도 하도록 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한 것 같이 우리 죄들을 용서 해 주옵소서”
이 기도는 담보 적인 기도 이다.
이 문장을 꺼꾸로 뒤집어 생각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하지 않는다면 주님! 우리의 죄도 용서 하지 마소서..” 하는 기도가 된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 하도록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보면서 인간의 시급한 문제는 죄 용서를 받는 것이다는 것과 누구도 죄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횡적인 관계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도 서로 범죄 하면 살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사실을 담보적인 구절이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결국은 인간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을 향해서도 죄를 짓고 그 죄 가운데서 얷메여서 살아 갈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사람들 사이에서 죄에 대한 생각도 일대의 변혁이 일어 난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빛이 삶과 마음을 비추고 나면 이웃을 향해서도 자신의 삶이 악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하심 같이….. 이렇게 기도 하라고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던 사람들이었다.
머리 둘곳 없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쫓았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기도 할 때 “ 우리가 우리에게……………”이렇게 기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 조차도 이 세상에 있는 이웃을 위해서 범죄 하지 않고는 살아갈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향해서도 끈임없이 죄 짓고 이웃에게 고통을주고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더 많이 하고 살아 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죄로 물들었던 심령이 삶 자체도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이웃과의 삶도 고통으로 만들어갈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 해야 할 것은 그렇게 헌신 된 사람들에게도 그런 당부를 하셨다면 사도들 처럼 헌신 되지 못한 우리 자신들은 이웃을 위해서 쉽게 범죄하고 죄 지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서도… 죄를 짓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런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일어 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교훈을 받은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러매도 불구하고 주님의 나라에 임할때에 서로 주님의 나라에 임할 때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기를 원하면서 서로 질시하고 미워 하고 교만한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이었다. 끈임없는 비교 의식 속에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던 이 세상에서 영광을 더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미워 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높이기 위해서 애썻던 …죄로부터 결별 할수 없는 인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종종 전도를 하거나 대화를 하다가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간 많은 사람들의 동기가 불완전한 교회 죄 있는 교회 교회 안에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죄와 약점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그만 두거나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발견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보다 더 완전한 교회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교회가 없다.
하나님앞에 거듭나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서로를 향하여 범죄하고 죄와 결별 할수 없는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에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청년이 찾아 와서 교회의 부패상을 치열하게 비판 하면서 자신이 이런 교회를 다니면 있는 신앙 마져도 잃어 버릴 것 같으니 완전한 교회로 보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스펄젼 목사님은 혹시 그런 교회를 찾거든 딴 사람은 몰라도 형제는 제발 그 교회 가지 마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들어가는 즉시 그 교회는 불완전해 질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교회 들어 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을 버리거나 교회를 버리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는 외곡된 한 표현 인 것이다.
좋으신 주님과 함께 신앙 생활 하고 싶ㅎ어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올 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 생활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속에서 배신을 당하면 당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안에서 안식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진정한 보ㅗ호자는 하나님 한분이시기에 변천하는 세상이나 시도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사람을 보면서 소망을 두는 것이 얼마나 허탄한 것이고 하나님을 미워 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낙심 할수록 교회에 대해서 실망 할수록……… 하나님 한분을 앙망 하게 된는 …믿음으로 나아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 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실망 시키거나 범죄 하거나 잘못 되어가는 어떤 것을 볼때에 그들은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을 드러 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변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범죄를 바라보고 옳지 않은 것들을 바라 볼 때 그것을 기화로 삼아서 쉽게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고 합리적인 구실을 발견 해 내는 것이다.
그가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동정을 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물러 나게 한 것이 인간적인 사건이나 주위에서 일어난 환경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 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신앙 생활 하는 정신을 잃어 버리면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마음과 행동과 그 동기까지……… 벌거 벗은 것 처럼 드러 난다는 것을 긴억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교회는 없다. 그런 교회는 있지도 않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두지도 않는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 하겠는가?
그리워서 어떻게 그 교회를 떠날수 있겠는가?
이런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고 타당한지 깨닫게 될것이다.
우리 한 사람이 인간들과의 관계를 접어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지 우리 삶을 돌아 보라
어떤 지체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참회도 하고….반복 되는 범죄로 말미암아서 마음이 상하고…. 주일날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새롭게고 정결한 삶…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주님을 보다 더 깊이 고백하고 ….삶자체가 그런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메도 지난주에 용서를 빌고 용서 받았는데도 오늘또 용서를 구하게 하고…
아침에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꼭 같은 일로 저녁에 다시 주님의 용서 하심을 힘입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 가든지 인간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이웃을 향하여 나타 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 주님이 이웃에 대해서 행하기를 원하는 대로 살아 갈수 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고 말하면서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불결한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끈임 없이 우리가 자기를 낮추고 정결함을 입어도 늘 불결한 자신을 발견 하는데…. 그 바르지 못한 죄악이 인간을 향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떤 동기에든지 이웃을 향하여 고통을 주는 삶을 되풀이 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여기로부터 자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당연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므로 숙명처럼 생각 하고 살아 가라는 것이 아니다,
끈임 없이 죄짓지 않고 정결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산다 할지라도 그러메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국 죄로부터 결별 할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웃을 향한 죄는 이웃의 마음에 고통과 아픔과 손해를 가져 오는 것이다.
평범한 경우에 이웃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손해를 본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향한 미움이 생겨 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히랍어 성경에서 복수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범죄 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 지을 가능성이 있고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일들은 혼자 하는 일들이 아니라 내가 범죄해서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피해를 받은 사람이 가해자가 되어서 이웃에게 지체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 나라수 있는 것이다.
가해자 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서…서로 범죄 하고 상처를 내고….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결국은 이런 속에서 교회가 교회 다워 지는 비결,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임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수단이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 완전해 지지는 않는 것이다.
교육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범죄 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게 거룩하게 세우는 일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죄라는 빚을 지게 마련 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시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죄를 용서 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용서 해 줄수 있냐고..?
하나님 만이 죄를 용서 해 줄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데……
분명히 인간에게도 죄를 용서 해 줄수 있는 권세가 있슴을 성경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단 이 죄는 인간 자신이 용서 할수 있는 범위가 있다.
자신에게 죄 지은 것… 그것에 대한 피해를 당한 사람은 죄를 용서 할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죄를 용서 하고 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때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여 범죄 할 때 한편으로 보면 우리가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사람을 용서 할수 있는 기회를 우리들이 부여 받는 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이미 용서 하오니 아버지여 우리의 죄도 용서 하여 주십 시오” 라고 하는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 할수 있는 권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착각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죄를 용서 할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는데 찾아가서 괜찮다고 하고 용서 해 줄수 있는 권세는없는 것이다.
피해를 본 사람이 자기일 경우에 그때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권세로 용서 해 줄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다.
자기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이웃들을 용서 할수 있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런 권세를 잘 사용 하면 하나님께 칭찬 받을 것이고 사용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둔다면 악한 종이라고 하는 주님의 책망 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용서 할수 없는 죄를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 기도 하여야 할 의무가 있슴을 기억 해야 한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멩이에 맞아서 죽어 가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돌팔메였다.
그 돌 팔메에 피를 흘리며 스데반은 죽어갔다.
이것은 스데반이 용서 해 줄것만의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당하는 아픔은 용서 해 줄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죽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 해주는 시간이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던진 돌멩이들은 하나님께 던지는 돌멩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그들을 용서 해 주시길 스데반은 기도 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는 저희 에게 돌리지 마소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아버지 앞에 중보 기도 하시던 주님의 죄 사함의 기도에서 배운 것이었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 우리자신이 용서 할수 있는 죄 뿐만 아니라 용서 하나님 외에는 용서 하실수 없는 죄에 대해서 까지 기도 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죄 사함과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서 하는 죄 사함이 가득해서 갈등과 고통이 평화로 바뀌고 대립과 반목이 샬롬으로 바뀌게 되는 세상을 창조 하시려고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미움이 살인 죄와 같은 극도의 죄악으로 하나님 앞에 계산 되고 있슴을 기억 해야 한다.
사랑이 뼈 속 깊이 파고 드는 것 처럼 미움의 감정도 우리의 패부 깊은 곳에 파고 들어서 우리의 모든 인격을 지배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다 탕감 하오니 우리의 빚도 탕감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 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기도는 담보 적인 기도이다.
만약 누군가를 미워 하고 용서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과 회개하는 자신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화해의 감격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이 기도를 아예 담보로 못 박으셨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부담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너희가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 하고 화해 하면서 살아가야 할 필요를 느낄때마다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 하고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임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받는 것도 아니다.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말씀에 은혜를 주셔서 자기의 죄 밖에 없는 지난날들을 보게 하시고 …. 허물 많은 지난 날 들을 발견 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가도록 결단 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 없이 살아 가는 삶이 얼마나 초라 한것인지 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극도로 극악한 범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감격에서 제외 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독 이 기도 만큼은 조건부로 기도 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가 순간 순간 이 기도 앞에서 큰 두려움과 의무를 느끼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사람을 한번 미워 하면 쉽게 용서 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죄의 감격을 느끼지 못한다.
죄를 짓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하지 못할 때 육신은 신앙 생활 안에 있는 것 같으나….. 몸과 마음은 한없이 무겁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들은 차가운 의무감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말할수 없는 보람 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자신의 휴식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 하게 되는 것이다.
죄 사함의 참된 은혜를 잃어 버리고 살아갈 때 인간들이 경험 하게 되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살아 갈 때 닥치는 더 큰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맛보는 깊은 갈등과 고통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죄 사함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죄는 계속 쌓이는 것이다.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더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다가 가야 죄의 문제가 해결 된다는 생각이 불타듯 하는데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다가 가지 못하는 불가의한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그리움으로 차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죄 사함의 확신이 없고 죄 가운데 드리워진 마음의 그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서기를 두려워 해서 도망 치려는 마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죄 사함은 댐이 무너져서 쏟아지는 물이 메말랐던 온 산하와 대지를 적시면서 골로루 물길을 따라 흘러 갈 때 갈라지고 건조해서 생명이라고 는 찾아 볼수 없는 그 들에 풀이 돋고 곡식이 자라고 새들이 깃드는 그런 아름다운 산하와 같은 것이다.
죄 사함은 말 할수 없는 감격과 은혜를 가져다 준다.
하나님께서 용서 해 주지 않았더라면 형벌 가운데 있을 것을…. 놀라운 은혜로 용서 해 줄 때 참되고 은혜로 살아 가야 할 길을 보게 되고 두려웠던 하나님은 매일 만나고 싶은 거룩한 생각이 우리의 삶을 메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기도 문을 따라 살고자 하는 생각이 얼마나 선택된 삶이고 복된 삶인지를 …. 협작한 길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현재적인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삶이 충만 하기에 매일 기쁘게 노래 하며 좁은 길을 걸을수 있는 것이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 만나는 감격을 느꼈다면 필연적으로 죄 사함의 놀라운 감격을 동반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질 때 우리의 영혼이 새힘을 얻고 살아가는 놀라운 기쁨을 경험 하게 될것이다.
사람들은 간음의 죄를 짓거나 교회를 빠지거나 혹은 돈을 가지고 범죄 하거나….. 이런 것들을 큰 범죄라고 생각 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몸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보다 얼마나 크고 교묘하기에 우리의 삶을 고사 시키고 영적인 삶을 비참하게 하는지 사람들은 너무나 모른다.
그리기에 끈임 없이 사람들을 미워 하고 용서 하지 않으면서도 균형 잡힌 잘 다듬어 진 그리스도 인 인 것 처럼 …. 이것은 하나님 앞에 회칠한 무덤이요. 썩은 뼈들만 가득한 외식한 무덤 같은 것임을 기억 해야 한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어떤 영성도 깃들수가 없다.
하나님은 진실 하시며 그 눈은 정직한 자를 향하시고 그 얼굴은 의로운 자를 향하고 마음이 진실한 자를 찾으신다.
진실한 하나님 이시기에 진실한 사람들과 더불어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끈임없이 자기를 위장 하려고 하고 과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 적인 특징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만족을 거의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죄 사함을 얻고 죄 사함 속에서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수립하면서 아버지 를 기쁘시게 하는 관계로 나아 가기를 너무나 바라셨기에 아들을 통해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기억 해야 할 것은 누군가를 깊이 미워 하는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아야 한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면 죄 사함에 대해서 예수님이 담보적으로 기도 하도록 가르쳐 주셨는지 깨닫게 될것이다.
산상수훈에서 미움의 문제를 말씀 하시면서 끌고 오신 것은 구약이었다.
구약에서 옛사람에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라 하였으나…… 구약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일어 날수 있는 최대의 범죄는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는 우상 숭배였다.
인간들 속에서 일어 날수 있는 최대의 범죄는 살인이었다.
그 살인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옳지 않다는 기본적인 합의가 주어진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마적인 영화나……… 이런 것들은 반 하나님 적인 사고 방식과 사단의 계괴이다.
모든 인간들 속에는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흔적이 남아 있기에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가장 끔찍한 가장 두드려 진 죄를 미움에 대해서 말씀 하시면서 끌어 오신 것이다.
누구도 사람을 죽인적이 없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피 묻은 손 피 묻은 칼들이 즐비하다.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 하지만……. 세상에 있는 법은 행동으로만 나타 내지 않으면 마음의 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우리 속에 있는 미움의 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하지 못하는 범죄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참하게 파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움의 문제를 얼마나 싫어 하시고 그 문제를 심하게 다루시는 지를 깊이 새겨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이웃을 비난 하는 침 묻은 입술과 살인에 피 묻은 칼은 마찬 가지라 했다.
밥 먹듯 살인 하는 자라면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까…?
왜 주님이 용서에 대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강하게 가르쳐 주고 싶어 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가 죄 사함의 감격과 용서의 은혜로 막혔던 둑이 무너지고 생명과 기쁨의 은혜들이 메마른 우리 삶에 충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하지 못하는 미움의 문제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17.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1).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서로에게 죄를 짓지 않고 는 살아 갈수 없는 연약한 인생이다.
그러기에 인간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
단지 이런 일의 해결은 서로를 용서 하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갈수 있는 것이다.
용서하는 삶이 현실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공동체를 염두에 두시고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신약 성경 원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미 탕감 하여 주었사오니 우리의 죄도 탕감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록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한번용서 해 준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여기서 배우게 된다.
끈임없이 죄와 결별 하고 살아 가기 어렵기에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매일의 죄 사함을 입지 않고는 우리의 영혼이 눌려서 살아 갈수 없다.
신앙 생활 하면서 범죄 할때가 있다. 이 범죄가 해결 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깃들고 하나님과의 화해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런 궁극적인 해결은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셔서 우리를 그 죄로 말미암는 영혼의 억눌림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끈임없이 필요 한것이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매우 두려운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이미 용서 하였사오니 우리 죄를 용서 하여 주옵소서” 라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 하지 마옵소서 ….라는 무서운 담보적인 기도 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용서와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 가는 것이 떨어 질수 없게 연결 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발견 하게 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우리는 일용할 죄 사함을 늘 하나님 앞에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진정한 화평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듯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도 우리의 죄 사함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끈임없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같은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었기에 다른 사람들을 용서 할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할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다.
손해나 고통이나 아픔이 … 그것을 입은 당사자가 우리 일 경우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 해 줄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주님은 이미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아셨다. 아무리 거룩하게 될려고 노력 해도 온전하게 될려고 해도….. 죄 사함 조차 필요 없는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갈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셨다.
우리는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게 뭐냐?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완전한 삶을 꿈꾸고 주님 처럼 살아 가고 싶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주님이 잘 아신 것이다.
어느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용서 해 주고 어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용서를 받는 …. 절대적인 그런 신앙 생활은 없다.
어떤 때는 내가 용서 해 주어야 하고….어떤 때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용서 하는 일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용서 하지 못하는 이유는 ….. 하나님이 기뻐 하는 일이라 깨달으면서도 ….용서 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고통을 당하고 누군가로부터 커다란 아픔을 당하였을 때 인간이 당한 그 아픔을 둘 중에 하나 밖에는 해결의 길이 없다. 자기가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하든지
스스로 그 아픔과 상처로부터 벗어 나든지 아니면 그 아픔을 준 사람을 미워 하므로서 그 고통을 잊든지……. 둘중 하나다.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하지 않는 것은 상처를 받아서 생겨나는 고통에 대한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자기에게 상처를 준 것을 떠 올리면서 미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받은 피해로 말미암은 고통을 다소간 잊을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용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우리에게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아가시다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진정한 용서의 화해를 이루실지를 보여 주실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이미 일부 보여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를 했을 때 스스로 용서 할수 없고 하나님이 용서 하셔야 했다.
오늘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이셨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 하시기 위해서 … 화목한 관계가 되어서 창조의 목적에 맞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당신의 아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느끼셔야 했다.
모든 축복의 근원 이시고 만유의 주제이신 그분이 하늘의 영과을 버리고 오셔서 피조물 중에 가장 비천한 인간으로 취급 당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온갖 아픔과 고통을 맛보셨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범죄한 인간을 용서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고 그 용서가 하나님자신이 많은 아픔과 고통을 수반 한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 주셔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천지를 창조 하실때는 말 한마디로 창조 하셨지만 죄로 말미암아 금가고 깨트려 진 당신이 창조 하신 인간과의 회복을 위해서는 말 한마디로 너희의 죄를 사하실수 없었다.
인간을 용서 하시기 위해서는 몸소 용서를 위한 선도권들 쥐고 용서를 필요 조차 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을 등진 인간들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깨트리고 난 후 용서가 이루어 질수 있었다.
진정한 용서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 보다 훨씬 힘들다.
여러분들 주위에도 용서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인생을 어둠 속에 살다 눈을 부릅 뜨고 죽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용서는 그만큼 어렵다.
진정한 용서는 살을 떼어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을 진실로 용서 하지 못하는 것은 강한 자기 사랑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미움과 적개심은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고통을 경감 시켜 준다.
그런데 용서 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격 없이는 사람들을 용서 할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격… 맛보는 화해의 즐거움을 날마다 맛보지 않으면 사람들을 용서 할수 없다.
사람들을 용서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용서를 위해서도 신앙의 핵심으로 돌아 가야 한다.
신앙의 본질적인 일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의무에 얷메이거나 무엇인가 자기를 버려서 열심히 어떤 일에 종사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은혜를 받는 다는 말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 그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다가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은 죄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세상은 오직 죄인들만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다.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셔서 짐승과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 가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 때문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적으로 자기가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그 일을 위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 났는지 생각 하는 것이다.
용서 받을수 없는 죄인을 용서하셔서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생명을 누리는 그런 용서 받은 관계가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히는 일들이 일어 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용서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기억 하시고 아들의 갸륵한 믿음과 헌신과 희생을 보고 우리를 용서 해 주기로 작정 하신 것이다. 스스로 투자 하시고 스스로 아픔을 지불 하시므로 우리를 용서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세상 살아 가면서 불평과 원망 스러운 일들이 일어 날수가 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앞에 서면 이런 것들을 모두 잊어 버리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서…….. 하나님을 완전히 등진 인생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줄 알고 버리네~~~~
살아있는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이 세상을 격멸 할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은 잠시 있다 지나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하는 사상에 우리가 젖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세상에서 유혹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오늘의 주제 처럼 사람을 용서 하고 살수 없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세상이다. 많은 고통이 있으나 잠시 이 세상이 지나고 믿음으로 살고 나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위로와 안식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공정하고 합당한 일만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 하고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도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 사랑을 의지 하지 않고 살아 갈수 없도록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 하고 믿으면서 오늘도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움의 문제를 생각 할때도 십자가 앞에 서야 한다.
우리를 향한 진정한 죄의 용서가 그저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는 더 이상 지불 할수 없는 가장 큰 값을 지불하고서야 우리를 용서 하신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기 원한다면 ….십자가의 고난이 잘 드러 나는 영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러분들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해줄 때 드러 나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용서 하시기 위해서 지불 하셨던 마음이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메도 불구 하고 용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을 용서 하면서 살아가는데 많은 비용이 들지만 용서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는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용서가 없는 그곳에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가 없다.
이 문제가 왜 이렇게 큰 문제가 되냐면 용서 하지 못하는 미움의 문제는 반드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원망을 내포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용서 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 왜 하나님은 저런 사람을 내곁에 보내시고 지금도 남겨 두고 계신가…?” 하는 것이다.
살인은 극도의 자기 사랑이다.
미움과 살인이 맥이 통하는 것은 미워 하고 용서 하지 못하는 것은 살인 이라는 것이다.
상황과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살인이 억제 되고 있을뿐이지 마음 속에는 이미 사람을 죽이기위한 피 묻은 칼을 소유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칼을 품고서는 하나님께로 오는 진정한 용서와 은혜의 감격을 누리면서 살아 갈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쉽게 용서 하지 못하는 기질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범죄하고 상처를 준 것은 쉽게 잊어 버리고 대수롭잖게 생각 한다.
진정한 사유하신 은혜의 감격을 그들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나님이 용서 해 주실때의 그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자기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 해 주지 못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 준다.
사람을 용서 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는 원망을 내포 한다. 이 신앙 생활은 사단 적인 것이다.
우리가 누구관데…..하나님을 원망하고 대항 할수 있는가?
참된 은혜의 세계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하나님 앞에 잘못 되었다고 해야 한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 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 이시다.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오직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일 외에는 ……..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이 세상이 끝난 후에 맛 볼수 있는 모든 아름 다운 복…진정한 사랑…. 우리의 심령에 감격을 불러 일으키는 모든 축복은 오로지 하나님께로만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안만……… 진정한 위로와 기쁨이 있었다고 고백 할수 있다.
그런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죄 사함을 통해서 주어 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 받았다는 확신과 진정한 자유를 얻고 나서….하나님의 강물처럼 넘쳐 나는 사랑도 알게 된 것이다.
(갈바를 알지 못할 때 그릇된 길을 버리고 옳은 길로 인도 하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았다.
강퍅할 때는 몰랐는데……. 하나님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으리 만치 세밀하게 내 인생에 간섭 하셔서 나의 걸어 가야 할 길과 궁핍 하고 있는 것, 고통 하는 것, 깊이 박혀 있는 가시 까지도 ………. 치유 하시는 진정한 은혜를 맛보았다.)
이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간에도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한다.
십자가 앞에서 용서 받은 죄인이라고…..
우리가 용서 해 줄수 있는 죄는 용서 해 주고 하나님만 용서 해 줄수 있는 죄는 용서 해 달라고 …. 그렇게 살아 가는 사람들이 되야 한다.
어떻게 용서 해 주는 것이 가장 이상 적일까?
이 일을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 해 주셨는지를 보면 어떤 용서가 주님이 바라시는 용서의 궁극적인 상태인지를 깨달을수 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 하기 위한 용서가 아니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던 것을 없었던 것으로 쳐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하는 용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용 하는 용서와 복음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서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서는 용서 해 준다는 의미는 복수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이 용서 하신 용서는 관계의 회복 , 하나님의 진노가 호의로 바뀌는 것, 원수 되었던 관계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모두 포함한 용서가 아니면 용서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다.
이제 우리는 정죄 함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두번째 보혜사 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주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고 하나님과 하나된 삶을 살아가는 비밀들을 배우게끔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 함을 받고 나면 밀려 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용서라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한 과정 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님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그 용서도 이런 의미의 용서이다.
범죄하고 심령이 무거워 졌을 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으로 만족 할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바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 해 달라고 메달리는 것은 단지 죄를 탕감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사랑을 되 찾고 싶은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되 찾아 예전 처럼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밀려 와서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대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야지 화해와 사랑과 감격과 기쁨이 들어 오게 된다.
단지 용서의 대문이 열리고 후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용서의 결과들이 몰려 오지 않는 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해 주신 말씀이다.
누가 누구에게 범죄하고 아프게 하였을 때 그를 진정으로 용서 해 준다는 것은 다시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서 그리스도안에서 아름다운 지체로 살아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사람들 안에 막힘과 원망과 미움은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해서 범죄하는 것이다.
주님은 개인적으로도 우리를 다루시지만 연대적으로도 우리를 다루어 가신다.
누군가를 깊이 미워 하고 화해가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 자신과 관계 없는 많은 지체들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범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범죄하고 나아가서는 용서 하지 못하는 문제와는 아무 관계 없는 지체들에게도 많은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용서는 개인 적인 범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으로서 범죄이고 용서 하지 못하는 아픔과 해학은 개인의 영혼의 고통을 가져 올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대한 고통과 아픔을 가져온다는 사실 때문에……. 그 책임이 매우 크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기억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용서 하셨나?
첫째 주님의 용서는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용서 였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십자가가 자기의 사명이기에 지신 것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한 사람으로 나타 나는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주님이 그토록 성취 하고 싶었던 그 일은 죄인을 진심으로 용서 하고 죄 가운데서 구해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용서 하지 못할때는 먼저 기도 해야 한다.
용서 하는 것이 단지 마음에 걸리는 뭔가를 해결 하기 위함이라면 안된다.
우선 그것이 진정에서 우러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끈임없이 우리를 채찍 해야 한다.
용서 해 줄수 있기를 기도 하는데 기도가 안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달을수 있다.
이렇게 아프게 용서 하지 못하는 마음을 ………. 하나님께 그토록 아픔을 앉겼던 죄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므로 진심으로 용서 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만약 기도가 잘 된다면 그 기도의 힘으로 용서 해 주어야 한다.
주님이 섬기는 것 없이는 용서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주님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 주셨다.
일반적으로 범죄 한 사람은 선도권을 지니기 어렵다.
하나님이 선도권을 주셨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거나 사과 하지도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
상처 받은 분은 주님 이셨다. 피해를 입은 그분이 스스로 선도권을 쥐고 죄인을 향해서 찾아 오시는 것이다.
성찬이 카톨릭과 틀린 점은….사람들이 나와서 먹는 것과 사람들을 찾아 가서 먹게 하는 것은 단순히 편의의 차원이 아니다.
후자가 복음 적이라는 것이다.
죄인들이 있는 그곳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찢으신 그몸을 보내시는 것이다.
용서가 필요한 자들에게 용서를 자유가 필요 한 자들에게 자유를 ………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사람들이 선도권을 가져야 한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먼저 찾아 가서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용서를 하고 또 용서를 빌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용서 해 주신 것은 사랑으로 인을 치는 그런 용서였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다리삼아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감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려고 이런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허락 하신 것이다.
오늘 맛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 하면서 살아가도록 베풀어 주신 은혜 임을 기억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미워 하고 용서 하지 못하는 이런 일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매우 슬퍼 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시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길을 여셨던 것 처럼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 하고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그 사람과 깊은 사랑을 나누면 살아가야 할 관계로까지 새롭게 회복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아야 될 인생들이 우리들이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보답 하는 길은 주님의 아픔에 동참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서 진심으로 용서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비참하게 살아 갈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그 상황에 서서……….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화해를 주고 하나님의 관계에 막힘이 있는 곳에 진정한 자유를 주는 그런 도구들로 살아 갈 때 … 그것이 복의 근원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한을 앉고 살아 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미워 하면서 살아 가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 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용서를 깊이 경험 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용서의 아픔 보다도 더 큰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18.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여섯번째 기도로 마지막 기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기도를 굳이 둘로 나눈다며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와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로 나눌수 있다.
오늘은 윗부분을 생각 해 보기로 하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육신을 위한 기도이고 또 우리의 죄를 용서 해 달라는 기도가 우리 영혼의 생전을 기도라면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는 영혼과 육체… 그 모두의 생명에 관한 기도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 해 달라는 것은 육체의 평안 뿐 만 아니라 영혼의 안녕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이다.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 해 주셔야지만 건강하고 옳바른 신앙 생활, 평화로운 인생 살이가 가능 한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인생이 불행 하게 되는 것이 여러 가지 고통 때문에 불행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 함이 없어도 한가지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 한가지의 고통의 원인이 주어지면 인생 그 전체의 장점과 모든 좋은 것들이 그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발견 하게 된다. 시험도 이와 같으다.
하나님 앞에 화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는 기도가 응답 되어야 한다.
이 기도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다.(가족 들 까지도..)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셨지만 동일하게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다고 하셨다.
세상적으로 보며 주님이 자기를 따라 오라고 말씀 하셨지만 당신 자신도 이 세상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갔다.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이것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신앙의 수준과 상관 없이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모든 사람이 기도 해야 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 하기에는 내가 이미 성숙 해 있다고 생각 할수 있는 자는 믿음에 세계에서는 없다.
이 세상에서 많은 신앙의 경험을 쌓고 우리의 영성을 갈고 연마한다 할찌라도 죄와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수 없다.
우리의 심령은 죄와의 싸움 때문에 때로는 상심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상심에 빠질때가 있다.
~~속에 근심밖에 근심 늘 시험하여도….~~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붙들어 줄때만 하나님 앞에 굳건한 신앙 생활을 해 나갈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만 이 시험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헌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어떤 신앙의 경력을 쌓으면서 살았는지 와도 상관 없이 이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 적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깨어서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 적이라면 모든 시험을 받는 자들에게 기도 하라고 권고 하신 것이다.
시험을 이기라고 가르쳐 주시기 전에 먼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신 사실은 많은 시사를 가르쳐 준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시험을 당하지만 시험을 이기게 하는 그 힘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슴을 보여 준다.
헌신 된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인생을 다 드리기로 한 사람들도 시험에 드는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헌신 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 시험은 그를 더 집요 하게 추격 해서 …. 떨어 트리고 참다운 믿음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잃어 버리고 …. 하나님과 하나되는 신앙 생활 하는 것을 마귀는 훼파 하기 위해서 존재 한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 버리면 안된다..
오늘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 하면서 상기 해야 할 것은 우리는 시험에 들 정도로 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 들이고 … 그 시험 속에서 건질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것을 기도 속에서 늘 깨닫고 확인하고 의지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다른 신앙의 모든 영력에 있어서도 주님 없이는 살수 없슴을 알게 된다.
신앙이 깊어 진다는 것은 점점 인생을 살아 가는 일에 있어 자신이 없어 진다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전에는 나 혼자 훌륭히 잘 살아 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기면 잠길수록…나 혼자 힘으로는 살아 가지 못함을 깨닫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어 지면 나 혼자 인생을 살아 갈수 있다는 것은 저주 스러운 것이며 하나님 앞에 심히 죄악 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 많은 것을 누리고 내 멋되로 걸어 가는 인생 길이 참된 행복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고난과 시련의 파도가 치는 곳일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어디서든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이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세상을 향하여서는 바라는 것들이 사라져 가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점점 요구 하는 것들이 많아 진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는 기도가… 점점 깊어 지면 주님 자신을 보여 주옵소서” 더 깊어 지면 나를 사랑해 주옵소서” 더 깊어 지면 주님과만 있게 하소서..” 보다 더 깊은 하나 되게 하는 마음의 깊은 소원이 생기는 것이 신앙이 깊어 지는 것이다.
모든 신앙의 영력 속에서 주님 없이는 살아 갈수 없슴을 진실하게 고백 하는 가…그 사람이 주님 앞에 인격 적으로 승복 되고 사랑에 녹은 사람인 것이다.
주님의 진실한 사랑 앞에 자신의 인격이 감동 감화 받아서 그 사랑에 감격 하는 것이 인격 적인 승복이 있는 진정한 신앙 생활의 기초 인 것이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린다는 말을 잘 몰라도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많고 섬김이란 말을 몰라도 일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님을 향한 거룩한 섬김으로 이어 지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내게 오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성경에 의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로는 설명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 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공통된 고백은 주님 없이 이 세상을 살수 없다는 것이다.
주 없는 세상에 홀로 버려 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라는 것을 … 말하는 것이다.
어느 기독교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 주님 없이 천국의 길로 홀로 걷기 보다는 차라리 주님과 함께 불 가운데 난 주님과 함께 지옥의 길을 걸어 갈것이다” 고 했다.
하나님 만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시험에 빠지지 않는 길은 하나님께 빠지는 것이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물에 흘러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느껴 지면 질수록 우리를 시험하게끔 만들어 주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점점 식어져 가고 하찮게 될것이다.
이 세상을 향한 사랑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고 진실하게….진정한 기쁨이 우리 인생을 주장 한다면 적당히 이 세상을 격멸 하면 살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없다면 무엇으로도 세상을 이길수 없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신앙 생활 하지 않는다면 상처 투성이인 세상에서 외롭게 살아 갈것이다.
전쟁에서 중간 지대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미워 하는 것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하면 세상을 마음에 두기를 기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진정한 기쁨을 잃어 버리면 살아 가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마신 주님의 거룩한 고난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는 동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 하며 살고 싶어도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시험에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험에 빠질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빠져서 한없이 감격 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주님을 찬송 하며 살아 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은 보셨기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늘 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했는데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슨뜻인가?
시험을 당하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꼭 같은 것이 아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시련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악되고 잘못되고 하는 것과 상관 없이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시련을 당하는 것이다. ) 그기에 우리가 맞서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르켜서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이라는 말을 사용 하기도 한다.
창조 적인 시험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 하기 위한 것이고
파괴 적인 시험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 아니라 근원 자체가 자신의 육체요 마귀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여기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라는 기도 제목은 바로 그분들의 용어 되로라면 파괴적인 시험이다.
시험에 든다는 것의 말에 정의는 죄에 유혹에 대해서 부패한 인간의 죄악된 경향이 연합을 해서 범죄를 하고 악에 흐르게 되도록 빠지는 것….이것이 시험에 드는 것이다.
시험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닐수 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는 것은 반드시 죄이고 하나님 앞에 범죄를 가져 오는 것이다.
시험에 든다고 하는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패한 죄된 성품이 외부적인 유혹과 만나는 것이다. 그 유혹에 이끌리는 것이 시험에 드는 것이고 범죄로 떨어 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악하기에 유혹을 많이 받는 다고 말한다.
관심이 없는 것은 눈에 들어 오지 않는 법이다.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그것은 언제나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어도 그 하나에 시선이 가는 것이다.
유혹은 처음에 자신에게 다가 왔을 때 … 시간이 흘러 가면서 반복되면 될수록 기하 급수적으로 그 유혹을 물리 치고 죄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더 힘들어 진다.
최초로 유혹이 다가 올 때 그때가 가장 이기기 쉬운 때이다.
꼭 같은 것들이 반복 되면서 생각에 자리를 잡고 둥지를 틀고 커지면 커 질수록 그 다음에는 살을 에이는 결단 없이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 질수 없다.
처음 유혹 받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유혹은 받을 지라도 시험에 들지 않고 가장 적은 힘으로 유혹을 퇴치하면서 살아 갈수 있다.
시험에 들게 되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잃어 버리고 우리 영혼에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
유혹에 빠지게 되면 범죄 하게 되고 참된 기쁨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앗아 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험에 들어서 깊은 죄에 빠지게 되면 그곳에서 벗어 나게 되는 일들이 시험에 빠질 때 보다 자연 스럽지 않다.
시험에 빠질때는 자연 스럽게 빠진다.(범죄하고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멀어지면 저절로 죄 가운데로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 한 사람일지라도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경험 하지 않고 살아 가면 단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이유로 저절로 승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어제 은혜로는 충분 하지 않고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와 사랑속에서 살아 가야 한다.
문제는 시험에 들었을 때 (빠졌을 때…) 사람들은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죄로 들어 갈때는 순식간에 들어 가 버렸는데 그 길을 빠져 나올때는 그 길이 고통스럽다.
5년전에…10년전에 빠져서 헤메던 그 시험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헤메고 있는 것이다.
잊지 말고 기억 해야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가장 안전한 것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많은 하나님 이시지만 … 시험에서 벗어 나는 동안 그 죄에 대해서 충분한 고통을 치루어야 한다.
죄에 대한 깊은 혐오감과 죄가 가져다 주었던 그 즐거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픔과 쓰라림을 맛보면서…. 유혹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짓는 모든 죄와 잘못을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모두 청산 하신다.
시험에 깊이 들었을 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 한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할 것이다고 수없이 입술로 토해 내는 것이 그의 영혼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찬양은 찬양 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 진실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수 있는 찬양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죄 가운데 깊이 빠졌을 때 벗어 나는 길은 너무 힘들기에 벗어 나오는 대신 내가 있는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상태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한 신앙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인데…이것은 나쁜 것이다.
시험은 끈임 없이 다가 온다. 유혹이 그치지 않는 한 우리를 시험에 뜨려 트리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계속 된다.
이것은 우리의 밖에서만 시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우리를 유혹 한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서 부패한 성품이 없다면 죄와 영합 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주리셨을때는 먹는 문제로… 혹은 명예의 문제로도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한번도 악에 빠지지 않을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그분의 마음 안에 부패한 본성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부패한 본성이 있다.
죄가 우리를 유혹 하면 우리는 그 부패한 본성이 발동을 한다.
그 부패한 본성이 발동을 해서 유혹과 손잡으며 신속하게 시험에 들고 죄 가운데 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싸워야 할 기도는 단지 하나님 앞에 기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게끔 만들어 주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 내고 그 시험속에서 범죄에 흐르지 않도록 급히 자신 속에 일어 나는 부패한 성품과 죄악된 심령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흐르는 죄된 성품은 끈임 없이 억눌림을 당해야 한다.
거듭 났다 할지라도 죄가 우리의 인생은 끝났지만 끈임없이 죄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의 속에 살아 있을때에는 죄가 죽는다.
은혜가 마르면 죄가 살아 나고 여러분들을 향해서 그 죄는 지배권을 행사 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죄들을 누려면 살도록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의 의미와 동일 한 것이다.
매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가슴에 새기면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활용 하면서 끈임 없이 우리 속에서 쏟아 나는 죄된 성품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들을 맛보면서 우리는 살아 간다.
하나님과 함께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 가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긴장을 벗어 버릴수 없고 순간 순간 안식을 맛보지만 그 안식도 영원한 안식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죄 가운데로 흘러 들어 가면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죄와 더불어서 싸우면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의 진정한 안식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죄와 싸우는 사람들은 알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없고 죄의 유혹이 없고 마음껏 하나님을 경배 하고 찬송 할수 있는 그런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기를 고대하고 기다리기에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 영원한 나라를 사랑하면서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시험에 들었을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험의 의미는 다윗과 같이 간음 죄를 짓는 그런 것만 시험에 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뚜렸한 죄로 말미암아 시험에 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뚜렷한 죄가 아닌데도 신앙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잃어 버리고 신앙 생활의 활기를 잃어 버린 자들을 많이 발견 하게 된다.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만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생명력 있는 신앙을 잃어 버리고 영혼의 생기를 상실 한채 살아 가고 있는 모든 생활은 시험에 든 생활이다.
그래야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교회의 모든 신앙적인 형편과 영적인 형편에 대해서 답을 줄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생명력 있는 신앙 생활을 못하면서도 뚜렷한 죄를 발견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 해야 할 것은 이 시험은 반드시 특정한 몇 가지 죄에 빠져서 넘어져서 파괴된것만 시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 있는 신앙 생활 못하는 즉 깨어 있지 못하는 삶은 시험에 빠진 삶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은 절대적으로 회복이 필요 하다.
살아 있다고 하는 느낌을 받을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할 때 감격하고 세상을 향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을 때 마음이 뛰고 죄악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말할 때 두려워 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하여 거시는 계획……….. 한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런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 해 하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고 사는 것이다.그런 일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을 내고 있다.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입술로 주님의 사랑이 놀랍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 마음과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뻐 하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병들어 있는 상태고 시험에 들어 있는 상태다.
신앙 생활이 기쁘고 감격 스럽고….. 해야 한다
새로나온 잡지의 제목이 무소유 목회였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삶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이 살아 가는 삶 즉 빈손으로 하나님을 살아가는 데 대해서 약한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것들은 흉내를 낼수 있는데 흉내 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쁨과 즐거움이 하늘의 것으로 자기를 부요케 하고 있을때만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사랑 하지 않고 살아 갈수 있다.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해당 되는 말이 아니라 성도들도 만찬 가지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하다고 고백 할수 있는 사람들만이 세상에서 자랑 하던 것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다.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아 갈수 없는 존재들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있는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어린 아이와 같은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 하지 않고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예민함과 주님의 뜻이라면 벌벌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 버린 냉담한 마음이 시험에 든 생활인 것이다.
시험은 다양한 계기 다양한 동기에서 우리에게 다가 온다.
사람을 사용 하기도 하고 환경을 사용 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이나 여러 가지 다양 한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그렇게 다가 오는 시험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 나게 만들고 급기야는 그 시험에 빠져서 그것이 죄악으로 만들고 우리에게서 십자가를 벗겨 내고 죄악의 짐을 가득 짊어 지게 하고 그 짐을 짊어 지고는 도저히 주님을 따라 갈수 없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시험의 마지막 궁극 적인 목표인 것이다.
오늘날 마귀의 이런 시험은 기막히게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로부터 벗어 나는 길을 먼저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세월이 약이 된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면 뜨겁게 사랑한 사람도 잊혀 지게 된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많이 받았던 아픔도 더러는 잊혀 진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해결 되지 못한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약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신앙 생활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1년 후나 2년 후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마주 하게 될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해결 하고 환경이 해결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인 것이다.
그 마지막 목표는 여러분들을 시험 속에서 미끄러지게 만들어서 여러분들을 구원 하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상관 없이 주기도문과는 반대 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하나님을 경배 하는 대신 세상 나라를 위해 살고 주님을 이름을 높이는 대신 자기의 이름을 높이면 사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목표 인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파산 하는 것은 육체의 건강과 명예와 …. 이런 것들을 다 소유 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살지 못하고 불순종과 죄악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성취 되지 못한채 우리의 인생이 자꾸 흘러 간다면 그것이 바로 파산 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해 주신 목적은…… 죄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구원 하셔서 악한 세상에서 보호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 하고 살아 가도록 만든 이유는…..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이름 나라 계획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 주시는 이유도 바로 이런 계획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먹이고 입히고 기르시는 것이다.
영혼의 곤고함 가운데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죄의 놀라운 은혜도 원래 계획으로 돌아 가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손이 미끄러진 우리 발을 붙드는 것도 시험에 들었을 때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이런 계획 때문이다.
우리를 바라볼 때 철저히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 덩어리 인 것이다.
그 계획을 따라서 살아 가므로 인해서 당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 해 질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에 깨닫지 못하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인격 적으로 설득 시키
시고 우리의 심령이 굳어 지면 방망이와 같이 우리를 책망 하시면서 정신 차리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시험에 드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이런 마음을 알아야 한다.
시험에 빠졌을 때 시험에서 벗어 날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다른 나라에서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다.
친구도 떨어져 나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 하는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어서 쥐엄 열매를 먹기 위해서 다녔지만 그것 마져도 얻지 못하고 비참한 자신을 바라 본 것이다.
그 비참한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 비참함을 느꼈기에 아버지께로 돌아 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서 무슨 마음이 드실까? 하나님이 나를 바라 보시면서 어떤 생각 하실까?.........
가끔은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전해 지게 해 달라고 기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느끼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만 한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떨쳐 버리고 죄 가운데 거하겠다고 발버둥 칠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실 때…………..우리 자신도 불쌍하게 느껴 질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회복 되어 지고 싶은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좌절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 가는 지체들을 보면서….저 모습을 주님이 보면서 얼마나 아파 하시고 실망 하실까..?
지금 까지 살아 온것도…..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로만 살았다.
시련을 당할때도 피할 길을 내어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 이셨다.
사람들로 하여금 상처를 받았을때도 상처 보다 큰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셨기에 우리들이 주님을 바라 보면서 신앙 생활 해 왔다.
우리가 걸어온 이 길이 사람보고 온 길이 아니기에 세상에서 풍랑을 만난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온 원인이 된 것 처럼 교회 안에서 만난 슬프고 가슴 아픈 일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하나님 밖에는 참된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셔서 살아 가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을 합리화 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유로 오는 시험이든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싫어 하는 부패한 마음과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전폭적인 순종의 마음이 결핍되었기에 그것과 만나서 시험에 들고…..아버지 앞에 순종 하지 못하는 것이다.
벗어 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충실 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늘 나를 바라 보시면서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 하는 것이다.
고난의 큰 파도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는 우리를 바라 보시면서 어떤 마음을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실까?.....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능력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련보다 크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또 말씀을 통해서….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맛보고 있는 고통 보다 크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낭만 하거나 좌절 하거나 낙심 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진정한 살아있는 고백을 드리지 못하는 일들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실때만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는 녹아 질수 있다.
신앙 생활 하면서 자기 속에 일어 나는 것들을 하찮은 것들이라고… 그런 용기와 담력을 지녀야지만 청소 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 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거나 버림을 받거나 혹은 자기의 힘으로 감당 할수 없는 큰 슬픈 일을 만났을 때 그 속에서 고통 스럽게 생각 하는 것은 인지 상정이다.
그러나 끝까지 붙들고 메달리는 것은 극단적인 철저한 자기 사랑 인 것이다.
감정에 충실하게 사는 것 만큼 하나님 앞에 거짓된 삶이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 달라고 기도 하라…
그러면 믿음을 잃어 버리고 낙심해 있을 때 하나님의 아픔이 여러분들에게 스며 들것이다.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자유로움이 없으면서도 잘못 된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할 때…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밀려 올때면 그것이 하찮은 것이라고 깊이 깨닫게 될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느껴 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뜻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 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데 필요 한 것은 직관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매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나를 향한 뜻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도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 하신 바에 귀를 기울이고…..주님이 말씀 하시면 내가 그 뜻대로 살겠노라고 하는 진실한 말씀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어느 한 순간에 당신의 마을 생각 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뜻을 깨닫고 깨달은 그 마음 위에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깊이 느낄 때 우리에게는 인격적인 승복이 일어 나는 것이다.
빛으로 나아 가고 싶고 그 시험에서 벗어 나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와 기쁨이 있는 곳에서 신앙 생활 하고 싶어 지는 사모함들이 우리에게서 생겨 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시험에 들지 말고 또 시험에 든 사람들은 시험에서 벗어 나도록….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마음이 담긴 삶을 살수 있도록 축원 합니다.
19.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3)
녹취자: 윤은정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7번째의 마지막 기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그 기도를 여러분들에게 해설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련을 당한다는 것과 시험에 든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패한 죄성과 유혹이 만날 때 그때 우리는 시험에 들게 된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꼭 정욕적인 어떤 적극적인 범죄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어떤 생기를 잃어버리고 물러가서 깊은 침체에 빠지는 것도 동일하게 시험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을 피곤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안일하게 살려고 하는 부패한 욕망과,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주변의 환경이 손을 잡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신앙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아갈 용기와, 전의를 잃어버리고, 물러가서 깊은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게 되고,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렇게 주님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무리 헌신된 사람이라도, 또, 아무리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단을 하고 주님과의 아주 놀라운 만남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누구라고 할지라도 역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시험에 들기 쉬운 것이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처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은, 누구도 이런 기도에 있어서 예외가 될 정도로 탁월한 신앙적인 삶,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외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주님은 믿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시험의 보편성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의 보편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매 순간순간 마다 우리를 그 시험에 들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또, 시험에 빠졌을 때에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움의 손길을 늘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생활하면서 매 순간순간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또, 자기가 얼마나 믿을만한 존재가 못되고, 자신의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그릇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늘 가능성을 열면서, 늘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동안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고 살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 그것을 매우 가슴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데 오늘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쳐 주시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해 못할 말은 없습니다. 우선 한 가지 선명하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와, 악에서 구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가 짝을 이루면서 7번째 기도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시험과 악의 연관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험과 악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왜 주님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후에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셨습니까? 이것은 시험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험에 빠지면 악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 사람, 그 사람은 십중팔구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주시거나 특별히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조치를 취해주시지 아니하시면 시험에 든 그것이 결국은 어느 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데 그것은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과 악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은혜가 충만하고, 주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의 정서가 우리에게 가득하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 가득할 때에, 한편으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또,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사람들은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 악을 행하고 죄악 된 길에 빠져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삶을 살기 전에, 먼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도 따뜻한,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내 삶에 있어서 보람이 되는 그러한 주님을 향한 선한 정서가 사라지는 일들이 있고나서, 우리는 악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품어야할 진실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함, 그리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그 하나님중심의 마음, 이런 모든 정서들을 시험에 든 기간들을 통해서 모두 말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시험에 안 들어 본 사람이 있으면 한번 얘기해보세요. 들어봤어요? 안 들어 봤어요? 시험에 들면은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뭐냐하면은 정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었다고 해서, 신앙의 수준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은 말이죠. 신앙이 시험에 들었다고 해서 갑자기 교회에 안 나온다던지, 아니면 목회한 것 집어쳐 버린다던지, 그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는 시험에 들면 기독교를 택할 것이냐, 버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그렇죠? 그런데, 신앙이 좀 더 깊어 지면은 그런 식으로 선택은 안됩니다. 모든 외면적인 생활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에 들게 되면은 그 껍데기는 남아 있는데, 자신 속에 있는 거룩한 정서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은, 옛날에 복음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에 농사나 짓고, 머슴이나 하고, 종살이나 하던, 그런 천박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어떻게 그렇게 거룩하고 헌신된 삶을 살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가지고 주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불타는 정서와 서원을 가지고 그 정서가 인격을 좌우하고, 그 인격이 자신의 삶의 중심자리에서 서서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삶이 바로 거룩한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느끼는 정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닫고,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체험할 때에 내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의무감을 느끼고,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이 내게 즐거움이 되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참된 보람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정서가 있을 때에, 그때에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은 이런 것을 모두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는 내버려두고 속에서 이런 모든 것들을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서가 충만하게 우리 안에 있을 때 죄는 그것에 억눌립니다. 거룩한 신앙의 정서는 죄를 말려버리고, 죄는 거룩한 신앙의 정서를 죽여 버립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투쟁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엔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너를 죽이리라.’ 그런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게 되면 모두 하나님을 향한 그 거룩한 신앙의 정서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말려버리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빠져나간 공백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의 심령은 공백의 상태가 되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이 빠져나가면 빠져나간 만큼 속된 것이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쁨이 빠져나가면 세속적인 기쁨이 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험에 들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되는 신앙의 정서들이 모두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면서 보면은 말이죠. 목회자라고 하는 것은 얼굴만 쳐다보면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까? 보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어떤 변화가 지체들에게 일어날 때 그 변화는 얼굴에서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기뻐할 때 시험에서 벗어나고 주님을 영광중에 찬송하게 되는 거룩한 은혜 속에서 살 때 그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에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두 말라버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깊이, 세속적인 탐심, 세속적인 사고방식, 그리고는 자기의 강력한 아집, 이런 것들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사라지고 죄와 더불어서 싸워서 죄를 억누르고 이길 수 있는 그러한 신앙적인 정서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무장 해제된 다음에 여전히 시험에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험 속에 계속 놓이게 되었을 때, 마지막에 가는 길은 무엇이에요? 그것은 죄악입니다. 죄악을 향해서 가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아주 자주 하시는 권능가운데 하나가 기도하라는 것과, 그리고 시험에 들지 말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씀하시면서 그 뒤에는 늘 기도하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만큼 기도생활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테스트해주는 아주 훌륭한 말하자면은 시금석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른지, 바르지 아니한지, 여러분들의 지금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안하시는지,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어 있는지, 아니면 시험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어둠속에 있는지,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사귀는 기쁨이 있는지, 그것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시간이 무엇이냐면, 여러분들 혼자 하나님 앞에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내가 시험에 들어있는 상태입니까? 나의 영적인 상태가 풍성합니까? 가난합니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릅니까? 잘못 됩니까? 이런 것을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보십시오. 주님 앞에 홀로서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간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패턴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가르쳐 준대로 기도하고 간구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시험가운데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앞에 나아가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죄와 악이 깊고,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과의 기도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것을 발견 할 것입니다. 기도해도 차가운 거절감 같은 것들이 셔터처럼 여러분들의 눈앞에 내려져 있을 것입니다. 모두 시험에 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을 악에 빠뜨리기 위해서 시험이 여러분들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이렇게 우리를 시험에 빠뜨려서 악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 마귀라고만 말하지 마십시오. 물론 마귀도 엄청나게 한 몫 거듭니다. 그러나 마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선하고,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고, 주님만을 기뻐하는 그런 사람인데, 마귀가 우리를 유혹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고, 죄 가운데로 끌어가고, 시험에 들게 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마귀라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안에는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 이 죄와 더불어 살아가고 싶어 하는 이 부패한 본성, 하나님앞에 사는 즐거움보다, 이 세상 앞에서 사는 기쁨을 택하고 싶어 하는 이 부패한 본성이 마귀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그 본성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또 반응하고자 하는 본성이 신앙에 대해서 억제되고 있다면, 마귀의 모든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것입니다. 결국은 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어디냐 하면, 바로 악입니다. 죄악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은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은 무엇입니까? 악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의 원인이 되는 부도덕한 삶이나 사고방식,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영역에서는 악의 정의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은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 그런 인간의 행동이나, 사고, 인간의 마음, 이런 것들이 선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 앞에 선한 것과, 사람 앞에서 선한 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은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과 인간의 시선 앞에서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악은 단지 이웃을 향한 손해나, 혹은 이웃을 향한 범죄나 부도덕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악은 결국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해설해 오면서 계속 강조되었던 것이 뭐냐하면은 회복입니다.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치신 기도 자체가 이 땅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원질서를 우리들의 신앙적인 헌신을 통해서 주님이 축복해주심으로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회복하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도 사실은 그러한 하나님의 진정한 이 창조의 세계의 회복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가 결국은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상황에 이르게 된, 처음시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깨뜨려진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깨뜨려진 관계, 그 죄는 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와 악이라는 단어를 함께 연결해서 쓰기를 매우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 모든 악에 근원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가 하나님을 거스리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모든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하는 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이런 숙제를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그럴 수 있는가? 즉, 우리들이 첫 번째 기도부터 쭉 살펴본 이 모든 삶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나라에 임하옵시고, 뜻이 이루어지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용서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하시고, 하는 이 모든 주기도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몸부림은 모두 그 공통점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는 악과의 거룩한 투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서 삶에서 추구하면서 살아야 될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타도하고 배격해야할 악에 흘러버리게 되면, 그러면 이 주기도문을 올리고 있는 그 사람 자체가 이 주기도문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악한 나라를 위해서 기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주님이 의도하셨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 반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이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발견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악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속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은 처음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구속의 의미를 깨닫고, 또, 그 마음속에 있는 본성이 자기에게 증거 할 때, 원하지 않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불가해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모두 찢어서 헌신하고 싶은,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죄 가운데 흘러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피값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에 잃어버린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의 거룩한 뜻을 다시 이루어가는 도구가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구속해 놓으신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 놓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그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룩한 삶의 소명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신 것은, 이제는 우리가 죽을 죄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항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기를 방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속에 적용되어 질 때에는 주님의 거룩하심을 회방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거룩한 뜻을 가리고 있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한 거룩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싸우고, 그것들을 굴복시키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죄악 된 세상에서 빛의 나라로 소명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 속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기도문을 듣던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또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주시는 주기도문을 통해 감화를 받는 우리 모든 사람이,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 질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여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악에 깊이 빠져있고, 더욱이 그 악속에서 고통 하기는커녕, 낙을 누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아군의 진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패역한 국민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살아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관한 이 교훈을 가르쳐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지 말도록 기도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시험에 드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굽게 만들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거룩한 공로를 헛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험에 들지 말도록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향한 거룩한 구원을 취소하신다 든지, 물르신다 든지, 그러실 수 없는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흔들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흔들리지 않고, 한 번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우리를 향한 그의 중요한 계획은 이런 것으로 수립된 것입니다. 즉, 어짜피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을 취소하거나,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우리를 추방할 권세가 그에게 없다면,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궤계와 모든 권세를 모두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매우 깊이, 시험에 들게 해서, 그래서 그 시험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좋은 은혜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영적인 모든 능력들을 상실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악에 흐르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갖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거룩한 소원대신에 이 세상 나라에 대한 꿈을 갖게 만듦으로 말미암아서 그의 삶 전체가 악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악에 떨어지게, 그는 한번 우리가 시험에 들어서 한가지나 두 가지를 범죄 하는 것으로 자기의 계획이 성공으로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도 구원받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때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험은 그저 한번 들고, 들락 날락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험에 들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그를 구출해주지 않으면, 마귀가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원대한 계획은 여러분 안에 자라고 있는 불신앙과, 사라진 신앙적인 모든 정서를 힘입어서 여러분들의 삶을 점점 더 마귀가 가지고 있는 원대한 계획을 이루는 도구들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주님의 마음에 합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은혜로운 찬양이 가슴에 울려 퍼지고, 비록 높은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지만, 땅엣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가던 진실한 성도가 한사람 있었습니다. 다윗이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그를 통하여 나의 일을 다 이루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마귀에게 얼마나 눈의 가시였겠습니까? 드디어 어느 시점에서 그는 신앙이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정서들이 서서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유혹을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은 강력하게 다가왔고, 그리고 그 유혹이 강력하게 화살과 같이 다윗의 마음에 꽂혔을 때에, 그는 이미 물리칠 수 있는 신앙의 방패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무장해제 되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미워하는 죄 인, 간음의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아름다운 목소리도 살아졌습니다. 가슴속에 울려 퍼지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은 모두 사라지고, 신앙의 아름다운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은 모두 구겨지고, 짓밟히고, 꺾여졌습니다. 여리저기 날아다니면서 아름답게 노래하던 새들은 돌팔매에 맞아서 죽은 시체가 되어서 즐비하게 피흘리면서 쓰러졌습니다.
그 아름답던 신앙의 정원은 황패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이제는 악에 빠진 한 사람으로서 신앙의 즐거움과 기쁨대신 하나님 앞에 비통하게 울부짖고 있었고,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그의 눈물을, 그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셨습니다. 자, 마귀는 이정도 시험에 들게 했고,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선한 것을 내가 모두 파괴했으니 이제는 나는 성공했다. 이것으로서 나는 임무가 끝났다.’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더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몰고 가서 결국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이어서는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렇게 충성스럽고, 그렇게 자기를 향해서 거룩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그 우리아를 간악한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아주 정밀한 계획을 짜서, 그것도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후일, 자기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이여,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가 아버지 앞에 기도했던 가장 가슴 아픈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가 ‘나를 피 흘린 죄에서 용서하옵소서’ 그 살인은 간음보다 훨씬 더 깊은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를 모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빛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올 때까지 그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향한 시험하는 마귀의 계획, 그 원대하고 철저한 계획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이 사람 다윗을 시험에 들고 악에 빠지게 만들려고 하는 더 구체적이고 더 깊은 악에 빠지도록 만들려고 하는 계획을 그쳤기 때문에 그가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끌어 내셨기 때문에 그의 계획은 더 이상 성사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었고, 마귀의 집요한 계획이 계속해서 이겼더라면 우리는 구약의 가롯유다를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귀가 시험을 통해서 부패한 우리의 본성과 손잡아서 마지막에 우리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그 마지막 지점이 무엇인가? 배교입니다. 간단합니다. 배교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앙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험에 든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찬양) 내 주님 입으신 귀한 옷
난 만져봤도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주 나를 붙드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그 거듭난 본성 속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기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기념하는 생애를 살고 싶어 하는, 그 본성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비록, 선택은 우리들이 했지만, 시험에 들어있는 우리자신의 고통하는 그 처지는 하나님의 마음에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시험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시험에 빠져있는 자신의 영혼의 고통스런 상태와 어둠속에서 갈 길을 몰라서 아파하고 있는 자신의 이 상태를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 시험에 빠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시험에서, 그 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금 이전에 버렸던,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이키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이 당부 속에는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기에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대한 암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하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의 자비하신 그 성품을 믿으면서, 시험 속에서, 악에서 벗어날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도우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기를 주님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지불하셨던 고난과 희생의 흔적을 보면 볼수록, 우리의 구원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인지를 우리들이 압니다. 이것을 알고,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어떠한 계획이 있으시길래 우리 같은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에게 죄를 정하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모두 찢으셔서라도 우리를 그렇게 건져내고 싶으셨던 것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악에서 건져내어서, 이제는 그 악에서 건져내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의와 통치를 실현하고 통해서 이 땅에,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의 빛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들을 위해서 우리를 소명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왜 주님이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까? 그것은 악에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몹쓸 고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악에 빠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고통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유혹과 시험은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그 열매는 매우 씁니다. 잠시 유혹에 빠지고 죄에 빠질 때에는 미끌어 지듯이, 기름이 입술을 통해서 입안으로 흘러가듯이, 매끄럽게 빠져가지만,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시험은 악을 부르고, 악은 고통을 부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의 마음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 그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시면서 악에 빠지지 말도록 기도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받는 그 고통의 깊이와 모든 쓰라림의 깊이를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 악에 빠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면, 신령한 은혜의 기쁨의 깊이만 헤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도 우리가 함께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악을 체험해 봐야지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바보 같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빛 안에서 사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어두움이 얼마나 싫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상황 속에서 살면서 불행이 주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더듬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과의 진실한 교통, 시험에 드는 대신 빛 가운데 살아가고, 악에 빠지는 대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한 자로 살아가는 그런 삶속의 기쁨을 통해서 이러한 기쁨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의 멍에를 지고 악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웁니다.
죄악에 빠졌을 때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깊이 당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가운데서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부자연스러운가 하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험 속에서 타락의 즐거움이 고통을 능가하는 동안에는 결코 자기가 시험에 들고, 죄 가운데 빠져있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 본성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런 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깊이 빠져서 어두움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떠나서 어두움 속에서 그 악에 빠진 사람의 깊은 고통, 그것이 우리 속에서 경험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살아가면서, 때로는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주님을 믿지 않을 때는 육체가 원하는 데로 살면 되지만, 이제는 우리가 육체가 원하는 것은 부인해야합니다. 끊임없이 정욕이 우리에게 속삭여도 우리는 그 요구를 귀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것을 거절하며 살 이유에 대해서는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죄와 타협하고자 할 때 우리는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어야 됩니다. 내세의 삶을 살아다 보는 그런 전망도 가져야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생활을 부인하고 이 세상을 적당히 격멸하는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이러한 모든 신앙적인 태도, 이러한 모든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고, 살아가고, 또 살아갈 때에, 그때에 우리들에게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 빠지지 않게끔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억하십시오. 구원받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하나님만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마귀도 아주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즐거워하는 백성 만드시려고 하고, 마귀는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악에 빠지고, 빠지면 빠질수록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들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배교하는 그런 자리에까지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둘 사이에 끼어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자주, 우리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건져내셨고, 또, 어떻게 하나님이 그 놀라운 사랑을 의심할 여지없이 시험 속에서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지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어떠한 깊은 시험 속에서든지, 하나님 앞에 포기하지 않고, 그 하나님의 빛 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품과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창조의 목적을 거스려서 사는, 그런 대적하고 배교로 흘러가는 인생을 포기하도록, 주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빛 가운데 살아가고, 시험도 없고, 언제나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빠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져버리고, 어두운 속에 있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불러도 좋은 찬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찬양) 뼈아픈 눈물을 흘릴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함께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악에 빠져있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 주기도문을 붙들고 주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신 그것, 우리를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이 악의 수렁에서 건져달라고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나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이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시험에 들어있다면, 아직은 더 깊은 악에 흐르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그 시험 속에서 여러분들을 향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노리고 있는 마귀의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커다란 악, 끔찍한 타락은, 언제나 작은 관심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나는 어린아이 유괴하고 살인하는 그 사건을 보면서, 그 여자 아버지가 도시사람이에요. 대학을 나오고, 발레도 하고, 바이올린에 아주 유명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미모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지르게 될 때에, 나는 그 사람이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평범한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한 가지에 집중합니다. 돈,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이것이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평범하게 사고하던 때에 끔찍하게 생각했던 죄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아주 쉽게 정당화 되는 과정들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시험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끔찍한 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십 삼년 전 인가요? 현지에 있는 목사님이 그것도, 목사님이었다가 그만둔 사람이 아니라, 현재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가 권총으로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500만원을 빼앗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교회를 지으려고 그랬답니다. 우리는 다 웃었죠. 그런데 같은 노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상당한 동정을 보내더라구요. 그럴 수도 있다 이 얘기죠. 우리가 말이죠. 시험에 들지 않고 있을 때에 선과 악, 죄와 선에 대한 정상적이고 분명한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이지, 시험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은 이런 모든 판단은 흐려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새까만 후배들이 옆에서 교회를 하는데, 사람이 막 모이고, 교회가 커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분석해 봤더니 그 사람들이 자기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건 오직 하나있었는데, 거기는 교회를 지었고, 자기는 못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 대한 생각 하나가 사람을 살인에까지 이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생각도 하물며 그럴 찐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을 향한 욕망과 유혹에 떨어지게 되어서 깊은 시험에 들게 될 때에는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에, 신앙적인 사고가 마비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7번째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도, 듣고 있는 여러분도 주님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실 그때에만 주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매일매일 붙들어 주시고, 시험과 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거룩한 은혜 없이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도 조금도 그 구원의 계획에 부합하여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7번째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앞에서 우리가 숨이 멎는 그날까지 그치지 말아야 할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들이옵나이다. 우리를 시험에서 보호하여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의 부패한 본성으로 시험에 들었다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거룩한 사랑을 배신으로 갚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눈을 들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시험에 든 지체를 보면서 어떤 마음을 느끼십니까? ‘거, 봐라, 그런 식으로 까불더니, 꽤, 고소하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시험에 들었을 때에 ‘거, 봐라, 저 사람은 신앙 없다고 그랬지. 말짤 헛꺼구만, 꼴 좋다.’ 그럽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주님은 이미 제자들 마음속에 있는 시험에 들 수 있는 가능성도 보셨고, 그리고 시험에 들었을 때에 예외 없이 악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연약함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그 마음을 오늘 보십시오. 굶주린 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고 싶어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게 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히시고 싶어 하셨던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죄 사함을 힘입지 못하고, 정죄의식 속에서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그 어둠의 자식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용서를 향한 간절한 마음, 서로를 미워하며 용서하지 못한 채 할퀴면서 살아가는 당신의 양떼를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마음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이 대목에서 주님은 시험에 든 자들을 향하여 악에 흐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어떠한 심성을 가지고 이 기도를 가르치셨는지 우리들은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시험에 든 지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비난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치료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에 빠져있는 자들을 보면서 두 가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그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함을 입어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랑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그 시험에서 더 깊은 악으로 흐르지 않도록 우리는 그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신성에 대해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실족하면 내가 마음아파 하지 않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실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는 마음아파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신앙의 참된 기쁨을 잃어버리고,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악으로 흘러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그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던 마음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치 없는 인생들을 부르셔서 가치 있는 일들을 이루시기 원하고,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심으로 온전히 우리에게 가치 있고 중요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마음을 배워야합니다. 누가 시험에 들거들랑 우리는 깊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의 시험이 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도 죄와 악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 순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7번째 기도제목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할 때에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20.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지난주로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모든 기도를 끝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마지막 부분은 기도라기보다는 송연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면서 이 주기도문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후에 이제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해야 할 것인가를 소명까지도 아울러 가르쳐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할까 하는 것도 보여주지만 또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희랍어 본문 성경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그 앞에 왜냐하면 이란 말이 붙어있습니다. 아주 약한 왜냐하면 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차라리 이렇게 번역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주기도문을 외우신 분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우리도 그렇게 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게는 대충이란 뜻이 아니라 아주 옛날에 쓰이던 한자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의 뜻은 일의 원천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런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한자어입니다. 그러니까 일의 원천으로 이루어보건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서 왜 우리들이 주기도문을 외워야하고 또 이미 여러 달에 걸쳐서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누누이 강조 드린 바와 같이 왜 우리들이 그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적인 이유를 이 송영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들이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고,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도록 아버지 앞에 구하면서 깨어 살고 악에 빠질 때 그 악에서 구출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 속으로 들어왔는데 이제도 여전히 긴장으로 연속된 삶을 살면서 이전에 육신의 방탕과 사욕을 좇던 모든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고 세상에 속한 정욕과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성결과 의로서 옷 입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감사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과 실제로 우리 같은 죄인을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고 피흘려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아는 이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난과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속죄하신 그 대속의 공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날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주기도문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왜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상의 이유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여러분,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은혜가 메마른 사람들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요동함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든지 아니면 은혜가 떨어진 삶을 살든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이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삶을 살든지 여러분들의 상태가 어떠하고 신분이 어떠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여러분들은 모두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함을 얻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와 내 집만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 아니라 모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바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으니 이제 그들은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을 좇으며 세상의 일을 버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 성경 속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기하게 우리들이 이미 살펴본 앞에 나온 일곱 가지 제목과 묘한 연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속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즉, 먼저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첫 번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 거기는 그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곳은 그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 그곳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기도제목과 두 번째 기도제목이 나라와 연관이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도제목은 권세입니다. 두 번째 송영은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권세, 그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인데 이 권세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 권세는 세 번째 기도제목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는 기도와 맞물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권세로서 그 권세가 이 세상에 충만하여져서 그 권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김없이 이루어 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이 ‘영광’이라는 말처럼 성경에서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를 원했지만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시원한 해결을 던져주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차라리 영광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무엇이 영광이 아닌가를 해석하는 것을 영광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요한 레슬레는 이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영광은 그것 하나만 보게 하고 나머지는 그 빛이 너무나 찬란하여서 모두 어둡게 보이고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바로 그 밝은 것,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추는 영광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것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의 정확한 정의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곳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그곳에는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서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곳에는 가장 우둔하고 비참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죄인을 굴복시키고 어두운 자를 눈뜨게 해서 밝히 보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그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기도를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네 번째와 일곱 번째까지 이르는 이 네 개의 기도제목들이 이제 세 번째 소명의 요소인 영광과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이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주기도문적인 삶을 요구하고 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보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성경은 우리에게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우시려고 했던 나라, 뿐만 아니라 천상에 속한 모든 나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서 이 세상에다 자기를 인정하는 나라를 세우시려고 할 때 이것은 천국의 한 모형이었습니다. 비록 장소는 작은 에덴동산이었고 인구는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 모형을 이 세상에 심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겠습니까? 가보지 않았으니까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유치해나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그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미구에 들어가게 될 그 천국에는 오늘 우리들이 보는 세상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입니다. 만약에 다르지 않다고 하면 경건한 성도들에게 천국이 소망이 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죽은 후에 갈수 있는 그 천국이 지금과 똑같은 세상이라면 불경건하고 하나님께 승복하고 주기도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영원을 준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이 또 한 번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운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삶을 살고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경건한 심령을 인해서 고통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거룩한 나라와 영광과 권세를 그리워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우리 죽은 후에 있게 될 새로운 세상이 지금과 똑같은 세상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소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향해 소망이 어떠한지는 그 사람, 성도가 누구인지를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에덴동산에서 심어놓으셨던 그 나라는 형태는 작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와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만 이 세상에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한 인간이 그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부요한 지식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천상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 한분이 인생의 역사를 다스려 가시고 그리고 하나님 한분의 권위에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지은바 된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을 꿇어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대접해드리고 경배하고 그분의 통치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창조의 즐거움으로 아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범죄 했고 그 나라는 깨어졌습니다. 그 후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집요하게 이제 깨어진 그 나라를 새롭게 회복시키는 운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주시고 용서해주셔서 그들 속에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심으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지해서 우리에게 다시 깨닫게 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고 구속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으로 돌아가서 인간이 원래 이 세상에 만들어진 동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리고 주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경륜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한 과정이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 자녀 삼으신 그 사람 되게 이 주님의 삶과 기도가 녹아있는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심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뒤를 따라 살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영원히 주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을 얻어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거기에 무엇을 보태었습니까? 하나님이 모두 그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여러분들을 구하시고 어두움과 죄악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건져내어 주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지금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죄 가운데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알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원하는 소원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을 보내셔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늘 이 세상에 살면서 이전에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때 살았던 그 삶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인식을 여러분들 가운데 심어주신 분도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시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셔서 여러분들을 오늘날까지 데리고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신뢰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주기도문적인 삶을 살고 정말 하나님 한분으로 신앙의 고백이 되어있는 삶을 이 세상에 보여줄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놀라운 계획들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면서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해가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능력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힘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이 땅에 회복되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수준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이 마음먹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지금도 당신이 넓히고자 하는 그 땅을 당신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넓혀 가십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문을 두드리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그리스도의 이 피 묻은 복음을 전파하기 원하지만 그러나 선교의 문을 여시는 분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의 가슴에 거룩한 복음을 지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수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은 그 열심을 붙들어 사용하시는 권세 없이는 그 모든 인간의 열심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통해서 당신 스스로 당신 주권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장되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모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예수를 믿고 진정으로 회심해서 돌아와서 마음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가 찬송할 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한 자나 복음으로 가르친 자나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 자나 그 영혼을 위해 섬긴 자나 모두 주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 나라는 그분의 수중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 나라도 당신 수준에 소유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그 나라가 자기의 권세아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 나라가 자기의 나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이 세상의 모든 나라의 왕들 중에 뛰어난 왕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친히 인류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때는 역사 속에 찬란하게 드러나서 온 세계의 역사를 몸짓하나, 말 하나로 움직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씩 둘씩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사람들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사람들도 다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지도상에서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사라져버리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라가 위대한 영화를 누리게도 하시다가 때로는 그 한 나라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시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 안 되는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뼈저리게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36년 동안 지낸 것은 단지 무능한 관리들이나 무능한 왕이나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이나 아니면 일본에 앞잡이 노릇을 한 몇몇 간신들의 궤계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4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 6.25의 그 비참한 동란 그 속에서 동족이 피 흘리며 죽어가서 아직까지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아니한 역사의 이 비참한 고통도 사실은 몇몇 사람들의 야욕이 빚어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역사들은 우리들에게 아직까지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한 역사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라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이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이 나라가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몇몇 사람들의 무능과 그리고 이 로마 사람들의 뛰어난 외교나 혹은 군사적인 전략적인 전략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나라도 그 나라도 아버지의 수중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를 보면서 그 모든 역사에 뛰어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도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물방울과 같은 것들이 이 세상의 역사라면 그 파도위에 그 파도를 일으키시고 그 파도를 불러오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도 그분의 수중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나라도 그분의 수중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도 그분의 수중과 계획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보면서도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아버지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 복 받고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민족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민족이 통일을 이루어서 남과 북에 흩어졌던 고통 하던 가족들이 만나서 해후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복된 나라가 될 것인지 아니면 영구히 분단될 것인지 혹은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전대미문의 전쟁에 휩싸여서 수많은 민족이 다시 한 번 고통을 받게 될 것인지 하는 것은 모두 나라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역사를 보면서 겸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위에 놓고 이 나라의 모든 교회를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거룩한 주기도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권세가 아버지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권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려나가시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는 모두 아버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로부터 온 권세들을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권세를 통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권세와 그 권세로 위탁받아서 가진 인간의 권세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단지 몸만을 멸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의 영혼을 지옥에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만을 통치하고 다스릴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죽음 이후의 세계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행과 불행, 축복과 혹은 저주, 혹은 편의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더불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영원을 향한 우리의 영혼과 관계된 것입니다. 주님이 놀라운 그 권세를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실 때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비록 약하고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이 어두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랑하는 사도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인생이 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고 하나님의 권력이 인간의 권력과 얼마나 다른가를 아직까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만하고 어리석은 이 백성들 아버지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세상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고 권능의 여호와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권세가 아버지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찬송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 것을 찬송제목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역사 속에서든지, 우리의 개인의 삶 속에서든지 우리를 향해 절대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깜박 죽는 신앙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무엇인지 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을 보이시기만 하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권세 앞에 그 권세의 위엄을 모르고 방종하고 어리석게 구는 사람들은 바로 그가 아직까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은 세상 나라의 임금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기를 친히 다스려주시는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 앞에 껌벅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격인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이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이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인격적으로 그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이 연약하시기 때문에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연약하시거나 힘이 없으시거나 우리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우리의 불신앙의 고집을 꺾을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독자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신학의 길을 걸어가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쓰임을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편지 속에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자기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소명이라고 하는 것이 알고 보면 주님이 끊임없이 너 이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라. 하고 불러주시니까 계속 못 간다고 버티다가 그러면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한 것이 자기는 소명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다행히 얘기를 안 해주었는데도 책을 잃으면서 그 청년은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소명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명입니까. 주님은 너를 쓰겠다고 그러실 때 아, 저는 싫습니다. 저는 못 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럼 전 포기합니다. 그게 소명인가,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은 그게 아버지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입니까? 못 갑니다. 하고 계속 버티다가 버틴 것을 포기한 그것이 아버지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가 잘났기에 그렇습니까? 그런 것은 자기보다 아랫사람하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하는 행동입니다.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특정한 주님의 일에 쓰시겠다고 할 때 버티고 버티다가 그것도 스스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 치고 저기 치시니까 어떻게 더 이상 얻어맞을 곳이 없어서 주님, 마음대로 하옵소서, 하고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겠다고 손을 놓은 그것이 소명이 아니라 더 이상 반역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기준입니다. 다행히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소명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소명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주님의 권세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 이해가 가십니까?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너 잠깐 내 앞으로 오라. 저는 못 갑니다. 계속 그러니까 계속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게 그 부름에 응하는 것입니까? 세상 나라의 권세를 가진 임금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부르는 부름 앞에 임한다는 이야기는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좀 해야지 되겠다. 와라. 그럼 못 간다고 버티다가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응하는 것이 아니라 의관을 갖추고 달려가서 그동안 버텼던 것을 석고대죄하고 그리고 그냥 땅바닥에 완전히 개구리처럼 엎드려서 그 동안의 모든 죄를 이실직고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사죄를 구하고 이제는 무엇이든지 왕이여, 내게 명하소서. 그게 부르신 자의 권세를 인정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그렇게 건방진 방법을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이구, 잘났네. 얼마나 잘났기에 그래. 그것은 소명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왜 오늘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어떤 즐거운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듣고 싶습니까? 무엇을 여기서 배우고 싶어 합니까? 여러분들은 왜 하나님의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이 없는데 신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면 이런 신앙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듣는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그리고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교회 속에서 에티켓을 갖추면서 생활해야할 것이라고 하는 그 많은 지식과 경험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들려져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권세로 여러분들에게 들려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권세 아래서 순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주님의 분부를 따라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권세에 엎드려짐이 없다면 이 시간과 민방위 교육시간이 무슨 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한 견해를 들어보기 위해서 나왔습니까? 인생에 대한 한 견해를 전문가에게 청취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까? 예배는 그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에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됨은 하나님의 권세를 우리들이 인정하고 주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알지 못하던 때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주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보여주실 때 껌벅 죽는 신앙의 자세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당히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권세 앞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지 않고 그렇게까지 비굴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이 땅과 세상의 권위 앞에서 아첨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이 옛날에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나가던 방법입니다. 이제는 어두움이 우리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사망의 권세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거든 이 세상의 어떤 권세가 사망의 권세보다 더 뛰어나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떤 권세가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할 권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야 할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권위 그것 하나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의 그 신성을 인성 속에 감추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씀드려서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신 생애였습니다. 사람들의 그 어떤 권세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분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는 위풍당당한 빌라도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셨던 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분은 담대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분이 무릎을 꿇고 꼼짝할 수 없었던 권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권세였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비천한 종처럼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엎드려지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를 지나는 모든 날 동안에 그분의 전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기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이미 수많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자기에 관해서 예언해놓으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엎드려진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의 권세 앞에만 엎드려지고 복종하며 살았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도 그러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권세 앞에 엎드려져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이지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한 기회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가 아닌 것입니다. 돌이키도록 만들어주신 그 자비와 호의를 우리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권위 앞에 거스르는 방종의 기회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권세 앞에 엎드려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권세, 주님의 거룩한 뜻,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계획, 그 권세 앞에 우리는 모두 부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바로 이런 권세가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찬송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아가서 이 권세가 즐거운 권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이 권세와 권위가 숨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권세가 오히려 나를 지키고 이 권세가 주님과 동행하는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권세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권세 있으신 그분이 마치 날개로서 그 병아리들을 모으는 암탉과 같이 우리들을 그 권세의 날개 아래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안전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 권세가 아버지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즐거움, 찬송의 제목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 앞에 불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본성은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무엇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영광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모든 시선을 돌려서 하나님 한분만을 주목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모든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므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하나님이 영광자체이신 것처럼 영광자체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이름에 대한 대접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올려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이시며 따라서 이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광 돌리고 또 우리가 아버지 앞에 영광스러운 분으로 인정할 분이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한 충족한 도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에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이 송영에 먹칠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삶의 목표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삶이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이제 다시금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내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지 되는지 헛된 질문을 쓸데없이 자꾸 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드러났고 우리의 인생의 모든 목표는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 후에 사라지는 풀꽃과 같은 영광입니다. 벤 풀이 마르는 것처럼 또한 던져진 꽃이 마르는 것처럼 잠시 아름답게 빛나지만 잠시 지나고 나면 모두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영광이 인간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모든 기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해서 다른 모든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세상을 이루는 도구들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잠시 지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풀이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그랬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런 주님의 도구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있으나 사는 이유와 목적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같지 않은 사람들, 함께 먹고 마시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먹고 마시는 이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유가 세상의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우리들을 알게 하시는 것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위해서 우리는 그 일곱 가지의 모든 기도, 그 기도를 따라가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은 어김없이 아멘, 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고 끝맺고 있습니다. 아멘. 이 말은 영어로 말하면 certain 그런 뜻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히브리어로 ‘아만’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아만은 ‘굳게 하다, 든든하게 하다’라는 동사의 부사 형태입니다. 그래서 ‘굳건히 그렇게 되어지이다.’ 하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려드렸던 이 영광스러운 소명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소원하는 예수님의 소망이 배어있지 않습니까?
계시록 3장에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아멘이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 아멘으로서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아멘 하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고 세상 나라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아멘에 기여할 수 있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시는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여러분들은 그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아멘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주님이 보실 때 우리들은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면 확장되어진 아버지의 나라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까?
남극에는 약 16나라 정도가 협약에 가입해서 독점적으로 남극의 생태계와 자원을 탐사하는 기지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는 정말 정부의 강력한 후원이 없이는 웬만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어려운 그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엄청나게 많은 외교적인 노력과 재정적인 투자를 통해서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입권을 따내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한 10년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TV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그 남극에 여러 나라가 있고 한국 사람들이 가서 처음 기지를 세우고 태극기를 세우던 날 관계자들이 그 태극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뛰어나게 산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한국 사람이 세계 어느 산의 봉우리를 최초로 올라서서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서 흔들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게 바로 그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아멘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디엔가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되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감격이 있습니까? 세상 나라의 깃발이 떨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군기가 높이 올라가게 된 그 광경을 보면서 가슴벅차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소망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아멘의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디서든지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가슴벅차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아멘의 생애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껌벅 죽고 주님의 뜻이라는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엎드릴 수 있는 아멘의 마음, 이 세상의 총 칼 앞에 쉽사리 굴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의 권세 아래 굴복하는 그 순전한 마음, 그리고 미력이나마 힘을 다하여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순전 무구한 마음, 이것이 바로 아멘의 생애가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아멘이 무서운 줄 압니까? 주기도문을 모두 외운 다음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아멘. 이제는 내가 그렇게 삶으로 살겠사옵나이다. 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입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는 주께서 이미 말씀하신 마지막 때가 다가온 세상을 봅니다. 사랑은 식어가고 불법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관심이 없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에 몰두해있습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은 과연 이 어지러운 세상,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는 세상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 나라가 임해서 온 백성들이 그분의 권세를 즐거워하고 하나님께만 경배를 돌리는 영광스러운 그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나라가 다시 세워질까 의심할 때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힘은 너무나 미약해보이고 그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있는 악한 나라의 권세들은 너무나 크고 규모가 크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고 세상에 살지만 그 꿈이 세상에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을 따라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주기도문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아멘 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좇아서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 주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멘을 통해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보십시오. 불순종하는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한사람이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거기에 나타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많은 변화와 놀라운 일들을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성취해가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지금도 주님의 관심은 연약하지만 이 세상 속에서 쓰러지지만 그러나 일어서서 이 주기도문의 삶을 고백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아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아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권세를 보여주시고 그 나라가 아버지께 속하신 것과 영광이 그분께만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도 도처에 숨어있는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 아멘의 사람을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런 주님의 부르심에 부합한 아멘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 강해는 이제 넉 달 가까이 끌어온 모든 강해를 여기서 마칩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 아멘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아멘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서 주님이 보실 때 여러분들이 주기도문에 있어서 아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기에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이 여겨지지 않은 엄청난 일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시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시고 아버지의 나라를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을 보고 여러분들을 보는 사람마다 또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이 땅에 세우셔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주기도문 강해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