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Ⅱ
(1998-199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199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11월 16일
목 차
1. 가난한 심령이십니까?(마5:3) 1998.11.1 주일오전 1
2. 애통하는 자의 복(마5:4) 1999.4.11 주일오전 10
3. 온유한 자의 복(마5:5) 1999.4.18 주일오전 20
4. 의에 주린 자의 복(마5:6) 1999.4.25 주일오전 30
5.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마5:7) 1999.5.2 주일오전 42
6.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마5:8) 1999.5.16 주일오전 52
7. 화평케 하는 자의 복(마5:9) 1999.5.23 주일오전 61
8.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복(마1:10) 1999.5.30 주일오전 71
1. 가난한 심령이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오늘부터 새로운 시리즈로 여러분과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시리즈는 <가난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시리즈로 가난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어떤 축복을 주님이 약속하셨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봄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내면의 동기를 점검하고, 변화 받는 기회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이 행복의 전부 다는 아니지만 전혀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체로 세상에서는 많이 가진 부유한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생각되셨던 모양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하시기 전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계십니다. 만약에 물질적으로 가난한 그 사람들이 바로 복된 사람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주님은 굳이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읽은 이 5장 3절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을 때 그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의료혜택도 별로 받지 못하고 또 받았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질병상태가 워낙 중하고 결정적이어서 이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었던 온갖 병에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 가까이 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었다라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은 굳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고 그냥 “너희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예수님이 인간을 바꿔 놓으시고 고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겉모양을 바꾸고 환경을 고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환경도 고치고 사람의 인생도 바꾸고 뭔가 개혁하는 종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있지 말아야 하는 것은 기독교는 제일 먼저 뿌리를 고침으로 줄기와 가지를 고치고 열매를 바꾸는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의 불행의 곁가지들을 고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그것을 고침으로 인생 전체를 고치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뿌리가 무엇인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그 뿌리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쳐짐으로써 그의 삶이 바뀌고 고쳐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의지적인 행동,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 가는 사령부와 같은 것입니다. 수원지에 물이 맑으면 그 수원지에서 물대어 먹고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맑은 식수를 공급받을 것이나 그 수원지의 물이 오염되면 모든 산과 들과 푸른 밭과 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식수가 오염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가난하던 사람이 아주 부자가 된 경우를 보기도 합니다. 또 부자였던 사람이 매우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 공부하고는 담쌓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훌륭한 학자가 된 사람을 가끔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외부적인 환경이지 그 사람 내면의 세계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옛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생겨나거나 싫어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면 그것이 인위적인 힘으로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통하는 속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많이 바꿔보셨습니까? 인간은 눈에 보이는 삶 하나만 바꾸려 해도 엄청난 힘이 듭니다. 인간의 속사람은 인간의 힘으로는 못 바꾸는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나 혹은 나쁜 습관을 끊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런 습관의 뿌리가 되는 인간의 마음 자체, 인간의 영혼 자체를 고치는 일은 성경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안 변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기 전에 이기심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나서도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나쁜 습관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주님 알기 전에 게으르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도 여전히 게으른 삶을 살아갑니다. 남의 도움이나 받기 좋아하던 사람들은 신앙생활해도 여전히 독립심이 없고 다른 사람이나 의지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귀가 따갑도록 교회를 욕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잘하는 것이 있느냐?” “누구누구를 봐라 동업했더니 결국은 나한테 손해만 끼치고 도망가지 않느냐?” “외상값 떼먹고 가는 이의 반은 예수쟁이더라.” 그 중에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화) 예전에 직장 상사가 돈을 밝혔는데 출근할 때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콧노래로 부른다는 이야기-그 사람 때문에 오히려 복음화의 길이 막힌다.
교회에서 높은 직분도 갖고 있는 분들이 왜 그러냐하면 자신의 심령이 변화될 기회가 없었거나 아주 희귀했기 때문에, 속에 뿌리가 안 박혔기 때문에 삶이라고 하는 잎이나 줄기, 가지, 열매들이 안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심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기독교가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에게는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준 것이 참 고마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러분이 날이 갈수록 점점 예의 바르고 교회에 헌금 잘하고 착실한 신자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대는 여러분이 이제껏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왔던 그 불행한 삶, 죄악 된 삶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과나무가 되려면 사과 열매가 맺혀야지 소나무에 솔방울 대신 사과를 매단다고 해서 그 나무가 사과나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직접적으로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나서 여러분 심령에 변화를 경험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났기 때문에 예전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마음과 여러분의 영혼에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옛날에 사랑하던 것들을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옛날에 하찮게 여기던 것들을 여러분이 지금 사랑하게 되어서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삶이 바뀌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자. 변화를 받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삶의 뿌리가 되는 심령의 변화 없이는 그의 삶은 새로운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너절한 삶을 살고 예수 믿는다는 입술의 고백은 가지고 있지만 전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게으르거나 나태해서만은 아닙니다. 심지어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어떤 희망을 가지고 이 교회당에 올라오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생각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몇 시에 끝나려나.’ 입니까? 아니면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누워야 할 텐데.’ 입니까?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왔지만 여러분의 심령도 하나님 앞에 바쳐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여건 -경제적인 풍요함, 삶의 환경, 건강, 이루고자 하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소원들이 왜 안 이루어지는가, 왜 내 주위의 상황은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를 가지고 고민한 것만큼 여러분의 심령에는 왜 변화가 없는가를 가지고 고민했습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 ‘가난하다’고 하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의 가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푸토코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파산해버린’의 뜻입니다. 사업을 하다 부도를 만나고 빚쟁이들에게 몰려서 도망 다녀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은 도망가고 아내인 여러분은 자식과 함께 법원에서 나와서 어제까지 내 살림이었는데 노란 딱지를 붙이고 손대면 법에 의해서 경고를 받는다는 경고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갑자기 밀어닥친 빚쟁이들이 돈을 주지 않는다고 여러분 집의 유리창을 부수고 양복장을 발로 차면서 위협하고 여러분의 남편을 주먹으로 쳐서 피가 흐르는 광경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아이들은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빚쟁이들과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뒤흔들리는 남편과 이웃의 발길에 자녀들이 채여서 피 흘리며 우는 광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빚쟁이들은 난리를 치고 아우성을 치며 술병을 던지고 난리입니다. 해결사들까지 동원을 해서 무시무시한 어깨를 가진 건장한 험상궂은 청년들이 위협을 하며 여러분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돈 많아 보이는 어떤 이웃이 여러분에게 조용히 찾아와서 “이보게. 정말 살다보니까 끔찍한 일을 당하는구먼, 대체 빚이 얼마인가?” 물으면 여러분이 “왜 남의 살림에 자꾸 참견이요? 당신 갈 데로 가시오.”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손목을 붙잡고 “한번만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겠습니까? 그 마음, “한번만 도와주세요.”라는 애절하고 절박한 마음, 자기편은 하나도 없고 빚쟁이들이 모두 포학한 군중이 되어서 소리 지를 때에, 그 손을 붙들고 한번만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확실히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많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의롭게 살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고 가난한 사람의 등을 처먹는 세리나 술 따라 팔고 몸을 팔던 창녀나 비참하게 버림받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성경의 사실을 얼핏 아는 사람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죄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은 죄가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죄인들은 끔찍한 죄를 짓고도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생명을 누리고 주님과 친구처럼 지냈지만 더 많은 창녀 더 많은 세리들은 죄 가운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도 비참하게 멸망했습니다.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차이점은 죄가 만들어낸 차이점이 아니라 그들은 다른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심령, 파산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지었고 죄를 물먹듯 먹고살았지만 죄도 자기에게 만족이 없고 세상도 자신들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을 의지할 수 없고, 몸도 버리고 마음도 버렸기 때문에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들, 그런데 죄인을 불러 그들을 고치시는 인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사람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격 안에서 자기들조차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기대가 생겨났습니다. ‘아 그렇다. 이제까지는 우리의 인생을 받아준 사람이 없고 아무 곳에서도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에 불과했지만 이분은 아니구나. 이분은 나를 받아주시는구나. 이분을 붙들고 이분을 의지하며 살지 아니하고는 이제 더 이상 이미 소망이 없던 그 옛날의 삶을 어떻게 되풀이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 것입니다.
어디서나 늘 있는 일이지만 교회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신앙생활 합니다. 혼자서 신앙생활 하면 벌거벗었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같이 살면 인간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좀 믿어보려고 하면 교회 안에서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믿으려는 마음이 식고 식지 않더라도 자꾸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심경이 갈리고 쓸데없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안에 있는 모든 교인이 온전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저부터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못 배웠다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안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를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겁니다. 목사도 무시 안 하는데 다른 사람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사람들이 자기를 깔보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지체들에게 말합니다. “좀 무시하면 어떻냐? 사람들이 너보고 왜 그것밖에 못 배웠냐고 그러면 어떠냐? 왜 그렇게 얼굴이 못생겼냐고 사람들이 가끔 흉보면 어떠냐? 사람 보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 아니지 않느냐? 만일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이 되어있다면 그런 소리는 안 들린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자식을 주님께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아이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껏 하신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들에게 줌이 마땅하지 않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냐?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아니냐? 내가 이들의 메시아로 온 것이 아니냐? 내가 병 고칠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고 내가 좋은 가르침을 주어도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주기 위해서 온 것이지 너 같은 여자 주려고 온 것이냐?” 수로보니게 여인은 역사적으로 싸이로 페니키아 사람입니다. 페니키아 계열의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라고 했는데 자녀는 이스라엘이고 떡은 예수님의 병 고치는 은혜이고 개는 자기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치사하고 더러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까지도 정말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은 가난한 마음의 정반대인 부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뭐라고 했느냐면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러나 주님 생각해보십시오. 그집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고 배부르지 않습니까?” 쉽게 이 여인의 심중에 있는 이야기를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과 저는 다르다고 치십시다. 만일 주님이 이스라엘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손을 얹고 안수해주셨다면 주님 제게는 말로만 기도해주셔도 좋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스러우셔서 한 시간씩 설교해주셔야 할 것 같으면 저에게는 십분만 설교해주셔도 저는 감지덕지 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이 아니면 이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어디에 나아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찬양)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예화) 대구신학대학에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며 간증한 이야기- 여러 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겹치고 아무도 도와줄 길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도 사라진 것 같은데 한 달 가량 땀 흘리며 열심히 기도하던 중 “내가 너를 인도하리라.”는 선명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몇 달 후 상황을 회복시키셨다는 간증.
하나님만 바라보는 마음이 결국 우리 기도의 놀라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참 감사합니다. 그 어려움 중에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직까지 배부르고 심령이 부유하니까 이것저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부십시오. 예수님이 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주님을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계십니까? 여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것저것 핑계를 대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한 여러분의 심령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힘이 마치 오래된 신앙의 경력이나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큰 힘을 주신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떠한 능력도 간절한 마음, 하나님만 바라보는 부서진 파산선고 받은 것 같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가난한 마음, 그것 없이는 기도가 추진력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32미터씩 되는 엄청난 높이의 로켓이 큰 힘을 내고 불기둥을 뿜으면서 하늘을 향해 올라갈 때 장비가 실린 곳은 조그만 방만합니다. 나머지는 다 연료입니다. 그것도 대부분이 대기권을 벗어나기 전에 모두 타버리는 연료입니다. 가장 어린 신자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부서진 마음, 이렇게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부르짖는 가냘픈 기도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가난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부르짖을 때 보좌는 흔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심령의 가난함이 없는 상태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일주일동안 주일을 지켰다는 양심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고 애통해 하고 가슴 저려 하는 그 모든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 가난한 자는 인생을 살다가 절망 앞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그 눈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섭섭하고 야속해서 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오로지 사람이나 자신의 삶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부서진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 인생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모든 것을 내가 가지고 있어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나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영적으로 깊이가 있고 영성이 순수하다. 영성이 뛰어나다.”라는 말은 얼마나 신속하게 이런 마음으로 돌아가고 이런 마음을 평소에 유지하고 사느냐 입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기쁜 소식을 듣고 웃고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다가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우리 친구를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때 즉각적으로 자기와 같이 미련하고 못난 죄인의 기도를 들어서 자기가 위해서 기도하던 사람들을 변화시켜주신 축복에 감사하는 눈물이 흐르는 마음, 이것을 저는 영적인 순발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정에 없었지만 함께 기도하자고 이야기하는 지체들과 함께 무릎 꿇고 손잡고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역시 주님이 이 기도시간에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거들먹거림도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신앙의 부유함이나 심령의 부유함 때문에 축복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 범죄하고 살면서도 내일은 깨끗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대충 넘어가는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막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이다음에는 잘 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대충 넘어가는 그런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큰 축복과, 그 축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가난하고 핍절한 영혼의 상태, 주님이 우리를 그런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녀로 부르셨는데 자신의 삶이 그 거룩한 분의 자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추하고 너무나 더럽다고 하는 마음으로 애통해하는 그런 사람,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치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돌고 한 번도 지구와 만나는 적이 없는 것처럼 가난한 마음과 거리가 먼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일관하기 때문에 주님에 관해서 많은 말은 듣지만 주님과 만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알지만 그 사랑을 뜨겁게 느껴본 적은 없고, 주님의 순결하심에 대해서 말은 들었지만 주님처럼 순결해지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의 심령, 우리의 심령을 고쳐야 우리의 삶을 치료하실 수 있고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와야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도 변화가 오고 인생에도 변화가 올 텐데, 도무지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나날이 굳어져가고 있는 심령,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조차도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무딘 심령을 보면서 주님은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오늘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눈물 흘리며 기도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 앞에 이런 가난한 마음으로 변화되어서 정말 주님 앞에 매달리는 절박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우리의 심령에 유익이 없고, 성경을 배워도 그 말씀이 내 삶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심령입니다. 며칠 전에도 목회자 모임에 나가서 저의 이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안 변합니까? 저는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김 목사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안 변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게 기적적인 세상입니다.”
(예화) 꿈에 가운데 두 줄에 60-70% 사람들이 앉아서 열심히 듣고 있고 나머지 30-40%는 벽을 향해 참선하듯이 앉아있더라는 이야기.
그 마음이 바로 부유한 마음입니다.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맞지요? 주님 매일매일 그렇다고 말씀해주세요. 안 그런 것은 하나님이 틀린 것이지요?’ 이렇게 교회 나오는 사람이 변화를 받는다면 성경을 다 뜯어서 다시 써야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나오는데 천국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천국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잘났고 신앙생활 잘하고 자기가 다 맞는 것 같으면 왜 그렇게 기쁨이 없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천국에서 살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일 텐데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성령의 사람이 왜 그렇게 멋대로 삽니까?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돈이 저희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금과 은이 저희 것임이요 주식을 사면 오를 것이요 땅을 사도 오를 것이요 집을 팔고 나면 떨어질 것이며 동업을 하면 큰돈을 벌기 전에 동업자가 떠날 것이며”라고 해야지만 되는데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니까 ‘에이, 세상이 더 좋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반응 자체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복’은 희랍어로 ‘마카리오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히브리 성경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이 있는 자는...”의 ‘복’과 같은 복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의 복의 개념이 바뀌었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물론 물질 없이 살 수 없고 적당한 사회적인 지위 없이도 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순간 이제는 “내 인생의 참된 행복이 주님을 믿기 전의 그 행복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납니까? 인생관과 가치관이 조금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신앙을 옛날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인간의 야망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무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복은 이미 성도들이 받아서 누리는 복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뀌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 12세기 아씨씨라는 곳에 살았던 프란시스 성자 이야기-전쟁에 출전했다가 필서된 복음서를 주워 읽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삶의 이야기.
만약 여러분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할 때 “오 주님, 제게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나라는 제가 마음 둘 곳이 못 됩니다. 오 주님, 그 나라를 소유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내 마음에 그 나라를 주시고 이 다음에 나의 영혼도 그 나라에 이르게 하옵소서. 내가 보는 죄악으로 가득 찬 더러운 이 땅도 나의 생존함을 인하여 주님의 나라로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면 여러분은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에이, 웬 천국?’ 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아도 이 땅에 사는 자 같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라가 이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노예처럼 살아가십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던 큰 뜻을 이루고 너무너무 행복할 때 하는 말이 “온 세상이 내 것 같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들여다보면 세상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왜 자기를 주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직까지도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악한 인연에 연연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는 순간, 품에 안겼던 세상의 심장에 칼 꽂고 예수님께로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품이 그리워지지만 세상은 여러분이 칼 꽂고 간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으로 돌아가면 잘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망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옛날에 예수 믿기 위해서 세상을 배반한 것보다도 더 쓰라린 배신을 세상에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정주고 싶어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거두어들이는 이 비참한 신자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그의 노예였습니다. 지금 돌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 나라에서는 노예처럼 살아가는 예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도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화) 은혜가 떨어지면 별생각이 다 든다- 십일조 안 한다고 재정집사들이 흉볼 것이다. 내가 교사인데 교회 빠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 다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속에서 천국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런 억압받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와서 내 심령이 변화되고 주님의 천국이 이루어지면 아랑곳 안 합니다. 즐거운 곳에서 나를 오라해도 주일에는 여기 오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9시까지만 오면 된다고 해도 8시부터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내년에도 교사 임명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학식도 있고 대접받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걸레를 드는 이유는 걸레질 열심히 해서 교회 사찰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사에게 칭찬 듣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있을지 모르는 안수집사 선거에서 표를 올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좋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내가 지도 받아야할 사람이 있지만 나를 노예상태로 데려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지금 천국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가 내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억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있는데 내가 주님을 너무 좋아하고 주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지 어떻게 억압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밖에는 바라는 것이 없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늘 주님의 사랑에 목말라 살아가는 사람. 이러한 가난한 마음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바로 깨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예화) 직장 다니며 신학 공부할 때 눈물을 안 흘리면서 학교 계단을 올라간 적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살 시간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정말 내 힘으로는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람의 상황, 내가 이렇게 나쁜 성품, 하나님 앞에 늘 넘어지는 잘못된 성품을 가지고 있어 나도 내가 미운데 변화되지 않는 자기를 발견하면서 절망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놀라운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할 때는 그렇게 마음이 아픈데 끝나고 나면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주님이 나를 아신다.” 입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고 내 형편을 아시고 내 처지를 아신다.” 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속에서 이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외면적인 삶의 환경에도 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아직까지도 복음화 안 된 가정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그 가정에 심령이 가난한 누군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 자녀가 변화되지 않으면 제 인생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식탁에서 오늘도 식사를 나누는데 이분들을 천국에서 만날 확신이 제게는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엇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분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지 않으면 제 인생은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한 이불 덮고 자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아직까지도 주님을 모르는데 하나님 저는 어찌해야 좋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처절하게 주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몸부림이 내게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의 몸부림을 통해서 응답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뀌고 환경들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적으로도 이러한 기도를 필요로 하는 기도의 비상사태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 현실을 바로보고, 어려움 속에 처해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달을 줄 모르는 이민족과 이 역사를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몸부림쳐야 합니다. 유명한 사람이나 이름 있는 사람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깨어진 마음으로 그 민족과 교회를 붙들고 기도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며 부르짖을 때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누구를 부르고 계십니까? 유명한 목사나 지위 높은 교회의 직분자들을 부르셔서 천국 주시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죄인이든 부족하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든 심지어는 세상의 초가산간도 없고 마음에 둘 친구조차 없이 소외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 이렇게 파산선고 받은 것과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움만을 애타게 목말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천국을 통째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가난하고 절박한 마음 없이 신앙생활 해왔던 모든 삶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며 무엇을 하든지 이런 가난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시리즈가 모두 끝나기 전에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게 변화되어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애통하는 자의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시대마다 인간의 유행도 변천합니다만 모든 시대, 모든 인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행복해 지는 것일 것입니다. 인생에 관한 다른 견해에 있어서는 서로 상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반대되는 사상이 나올 수 있지만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는 이 명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이 세상 사람들이 복되다고 느끼는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육체의 어느 한 부분이 심하게 망가져서 고통을 느끼는 질병에 걸렸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허기짐을 느끼는 물질적인 궁핍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그 역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금방 잃어버린 그 슬픔에 흐느껴 우는 사람들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복된 사람들은 무엇인가로 채워진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복된 사람들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애통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앞으로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애통하는 사람들이 미래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이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 상태에서 복된 사람들이고 애통하며 슬피 우는 사람들은 바로 그 상태 때문에 복되다고 성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무언인가로 가득 채워진 사람들이 복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상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부요함을 버린 사람들, 그래서 심령까지 가난해진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뻗치면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도움에 목마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느끼는 만족을 모두 잃어버리고 무엇인가 자기에게는 없는 어떤 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하고 가슴앓이를 하며 애통하는 그런 사람들이 지금 그 상태가 복되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눈을 가지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의 이 모순으로 가득 찬 교훈이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아주 단순할 정도로 쉽고 명쾌하고 간단한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복 전체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복되게 되거나 무언가를 행함으로서 인간이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떠한 상태가 될 때 그 때에 그 사람이 복되다고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소유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말씀을 하실 때 누군가를 상징하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오고 절망적인 병자들이 예수님의 의해서 병 고침을 받고 주님을 따라 다니는 이러한 기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견디기 힘든 불치병에 시달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님께로부터 놀랍게 고침을 받았을 때에 그 기쁨은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귀신에 눌려서 삶의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는 살기는 살아도 자신의 인생이 아닌 인생을 매일 이어가야 하는 고통스런 사람들이 영적인 눌림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들의 기쁨은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병 낳고 또 귀신이 떠나가서 절망적인 불의의 사망에서 놓임을 받았을 때에 행복을 되찾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질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고 이제는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며 부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어도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적의 체험도 아니고 그들이 그토록 흥분해 하고 있는 생명을 되찾은 기쁨도 아니고 오히려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다다르지 않았던 어떤 상태의 사람들이 가리켜서 복되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를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변화되는 경험들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손길에 의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는 여러분은 결코 새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말씀하실 때 막연히 어떤 사람을 상정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여덟 개의 복음 모두 하나하나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애통하는 이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과 나누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바로 외로운 마음이고 외로운 마음은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고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 자신을 향해 목마른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나 선물이나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세상에 어떤 것들에 목마른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때문에 목마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시간에는 또 애통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애통하는 사람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는 의미입니까? 슬피 울고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관심을 끌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두루 살피시면서 고통 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긍휼에 넘치는 마음을 가지고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이 있는 애통하는 사람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히 경험하는 그런 세상사 때문에 애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고통아래 있고 슬픔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거의 같이 당하여야 하는 인간 공통의 슬픔이요, 아픔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기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과 같이 복음의 빛 안에서 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나 배신 혹은 물질, 혹은 잃어버린 명예나 인기, 자기가 집착하는 것들과 결별해야 하는 슬픔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삶의 구석진 곳에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슬피 우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펄펄 뛰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만 한 숨을 쉬며 눈물로 음식을 삼으며 곤고한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찾아보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어디서든지 만나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 세상이 죄악 되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 혹은 자신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당하게는 자업자득계의 고통 혹은 하나님이 잘못한 그 사람들을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때리실 때에 맞으면서 당하는 징계의 고통, 이러한 다양한 고통들을 맛보며 이 세상에서 어두운 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까? 단지 흐느껴 울고 애통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두 우리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가슴을 뜯으며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 중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눈물 속에서 살다가 인생을 마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 인간사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애통하면서 마음 한 구석으로 애통할 만한 이유를 자신에게 안겨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범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흐느껴 울고 애통하는 모든 사람들이 단지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적극적인 범죄자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상정하고 계시는 복이 있는 애통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흔히 만나는 그런 애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뭔가 주님이 상정하고 계시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지게 되었고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그리고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해준 사람들만 있으면 그것으로서 인생이 모자란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삶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자신의 영혼을 위로하듯이 “내 영혼아 이제 오랫동안 쓸 것을 쌓아 두었으니 이제 마음껏 먹고 즐기자.”라고 자기 영혼에 속삭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눈을 깨우셨습니다. 인격적인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지를 보면 그가 무엇을 위해서 땀을 흘리며 사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가치관이 무엇이고, 그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상정하고 있는 이 사람이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자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을 성찰한다든지 자기의 모습을 살펴본다든지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손가락질해도 내가 뭘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주시고 어두운 눈을 떠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대성인 중 한 분이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 하시다가 뜻대로 안 되서 사람들 손에 붙잡히셔서 죽임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이제 그분이 자기에게 주는 구원만이 가슴에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사셨는지를 관심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펼치면 느껴지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맛보았습니다. 기도하면 기도 속에서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주님이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시기 전에는 주님에 관해서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단지 흐릿한 그림에 불과했지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던 그 흐릿한 지식은 또렷한 선과 색채를 가지게 되었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자 그렇게 또렷하던 그림은 실물로 부활하고 살아나셨습니다.
(찬양)
내 주님 입으신 그 하얀 옷 난 만져 봤도다
그 향기 내 맘에 선하자 나 눈물 흘리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보았고 만져 보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첫째 변화는 주님은 그런 분인데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깨닫게 해 주시자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 사랑을 입은 성품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격차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든지 아니면 우리들이 워낙 거룩해져서 애를 쓰기만 하면 주님을 능가할 수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우리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주실 때에 그때에는 즉각적인 변화가 오는데 그은 목마름만큼 주님의 그 성품을 닮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사랑하고 싶고 주님처럼 오래 참고 싶고 주님처럼 온유하고 싶고 그리고 주님처럼 친절해 지고 싶고 주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찬 인격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만지시기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서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된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돈 있는 것만 빼면 저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고 욕을 해도 마음에 활을 맞은 자와 같이 되어서 도저히 그런 주위의 비난이나 주의 동정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심령을 변화시켜 놓으니까 아무도 그에게 욕하는 사람이 없어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 속에서 만나는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과는 거리가 먼 분이고 주님의 성품이 자신에게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인식 한 가운데는 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슬픔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병든 사람의 마음이요, 모습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1904에서 1906년경에 인도 카아시라는 지방에서 괄목할만한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부흥을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잔스턴 목사가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한국에 와서 그 부흥들을 설명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1907년에 평연 대 부흥의 계기가 마련되게 됩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이 인도 카아시 지방을 돌아보면서 기이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어른들은 다 교회 예배당을 몰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열렬하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그 부모가 버리고 간 아이들이 또 모여서 골목에서 모여 앉아서 무릎을 꿇고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아이들이 몇 명이 모여 앉아서 한없이 흐느끼며 울고 있습니다. 케세이 찰스턴 목사가 물어봤습니다. “애야 왜 이렇게 울고 있니?” 그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시는 데 우리가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깊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생각하면 자기의 더러운 성품이 생각나고 그리고 자신의 포악한 삶을 보면 주님의 온유한 인격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 주님이 생각나고 주님의 모습을 깨달으면 자기 자신의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현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오물 덩어리와 같고 쓰레기와 방불한 인간들을 위해서 주님이 자기 인생을 버리셨습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 중에서 괴수와 같은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값진 보혈로 가치 없는 우리의 가슴에 발라 구원해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하시려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자식이 되기를 스스로 거절한 그 인간들을 끝까지 찾아가셔서 그 어두운 속에서 빛을 주어 이끌어 내시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생긴 그 수많은 죄악된 상처들의 못을 다 빼내시고 말씀의 포도주와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우리를 새 인생 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함이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다가 죽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나요?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을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진 이기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닮아서 그분이 그분에 의해서 우리 안에 주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것이 창조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놓으신 그러한 존재,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들이 주님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후에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을 위해서 깊이 슬퍼하고 애통하는 후에는 우리는 크고 놀라운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의 인격, 우리의 성품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되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을 본받게 하시려고 소망 없는 어두움 가운데서 진노 아래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날마다 주님 닮은 사람으로 변해 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사이를 내었고 우리 속에 더럽고 부패한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는 어찌할 수 없고 몸부림치면 주님의 성품을 닮아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뜨고 나면 직면하게 되는 더럽기 짝이 없는 인격, 그리고 거룩의 냄새조차 깃들지 않은 인격을 가지면서도 성도라 일컬음을 받는 부끄러운 삶을 직면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가정하시는 이 사람이 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의복이나 장신구 같은 것으로 우리의 몸을 단장하고 그리고 우리의 몸에 양분을 공급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고 우리의 천박한 인격이 변화되어서 주님 닮기를 이렇게 애통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아마 가화 조각 같은 것을 날리는 것 같은 거짓된 신앙생활, 종교의 모습은 있으나 그 신앙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어버린 종이로 만든 꽃과 같은 가식적인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자리 붙일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도 눈을 들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우리 주변을 보는데 주님이 그토록 바라셨던 애통한 사람, 세상의 명예와 돈과 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도 그것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왜 하나님 앞에 이러한 너절한 인격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나님 앞에 고침 받기를 거절한 환자와 같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주님을 닮아 가는 이러한 인격의 변화가 없을까?’ 이것을 가지고 깊이 애통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종교는 무성해도 신앙은 없고 교회당에 사람들은 가득 차고 이 세상은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그 더러운 포악, 불결, 강퍅함, 완악함 이런 것들을 그대로 지닌 채 겉모습만 살짝 표현한 채 거짓된 모습을 지으며 가식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예수의 생명을 보여줄 수 있는 위대한 위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치는 자는 많지만 생명수는 말라있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죽어 가는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부르짖지만 그 사랑을 보여 줄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인 것입니다. 기독교에 관한 많은 진리들은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흩어 질뿐 진정한 인격적인 고민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철 같은 가슴과 돌 같은 마음밖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메마르고 척박한 교회들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아파하시겠습니까? 주님을 닮은 거룩한 성도의 향기가 인격적이 아니라면 그런 삶으로 주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이 무감각한 삶을 위해서라도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하나님이 내 영혼을 깊이 만지고 지나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도 그렇지만 허덕거리면서 늘 바쁘게 살던 때였습니다. 신학교를 입학하던 때이었습니다. 새벽기도 나가기만 하면은 기도할 일이 엄청 많았습니다. 직장, 가정, 직장에서의 선교, 학교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계획을 짜봐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봐라.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이게 네 모습이다.” 그렇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정말 인정할 수 없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계획을 자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 2분의 3은 하나님의 사랑, 그 앞에서 살아간 너절한 인생, 이것을 보면서 애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 신기한 것이 이 세상에는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울다가 웃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격에 고통이 가득 차면 그곳에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근데 신앙의 세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과 기쁨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뒤섞이는 것같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슬픔 속에서 기쁘고 기쁨 속에서 아파하는 이런 영성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성립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사셨는데 나는 겨우 이렇게 밖에 안 되고 있으니 이게 인간인가?’ 하는 깊은 아픔이 있는데 신기하게 그렇게 깊이 내 자신의 인격적인 더러움과 저질스러움에서 애통하고 나면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위로가 전해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의 옛 자아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오히려 기도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해 주시고 받아 주시는 놀라운 기쁨들을 경험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은 진실한 고뇌가 없으니까 슬픔이 없는 것입니다. 위로해 주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께로 오는 신실한 위로 그리고 영혼을 깊이 어루만지시는 이 아름다운 위로, 이런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사실 이런 찬송가 가사는 엄밀히 말하면 한국 사람밖에 지을 사람들이 없는데 참 어떻게 이런 가사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얼핏 보면 이게 얼마나 기분 나쁘고 건방진 가사입니까? “내 힘과 결심 약해서 나는 나를 내 맘대로 못합니다. 그러니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으십시오.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찬송의 의미는 그런 식의 배 째라는 식의 배짱이 아닙니다. 정말 자기도 자기가 싫습니다. 주님의 그 큰사랑을 받았는데 내가 왜 이런 사람밖에 못 되는지 주님이 그런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분에 넘치는 은혜로 나에게 이런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교제하고 계시는 분인데 왜 내가 그분을 닮지 못하는지 깊이 아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결심도 합니다. 애를 써보십시오. 그리고 진전이 없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게 됩니다.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 맞아.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거구나. 내 힘과 결심은 약하고 늘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이 모습 이대로 제가 주님 앞에 드리니 나를 받으십시오.’ 이 이야기는 ‘나도 어쩔 수 없어.’ 이 의미가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목마르게 하나님 앞에 애원하며 애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소월이 가시는 님에게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릴 테니 지려 밟고 그 꽃을 밟으면서 자기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십시오.”라는 이야기는 나는 이 모습을 견딜 수가 없고 이러한 인격의 나의 천박함과 주님의 사랑에 늘 눈물 흘리면서도 주님 닮지 못하는 나의 이 척박하고 더러운 이 인격을 나 자신도 견딜 수 없으니 이제는 주님이 손길을 내미셔서 마음껏 저항하지 않을 테니 주님이 원하시는 형상대로 나를 빚으셔서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인격, 좋은 그릇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통곡하는 애원인 것입니다. 이 찬송 속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애통하게 하는 애통거리가 무엇입니까?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거룩하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를 본 사람마다 어떻게 하면 나를 본 사람마다 주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나 때문에 주님이 알려지고 나를 보면서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님과의 관계를 자신들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인생이 바꾸어진 고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나오면서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옛 성품,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그 성질머리,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면서 교회와 많은 사람들에 고통을 주는 것,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허황된 꿈들을 그렇게 오래 교회생활을 하면서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포악하고 그 강포하던 그 못된 성품이 예수 믿은 다음에도 그대로 향기 묻어서 넘쳐나는 그 모습, 성령 충만한 대신 혈기 충만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대신 강포로 가득 찬 그런 변화되지 않은 성품,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를 성도라고 일컬어 주는 주위의 사람들의 칭호를 기쁘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은 저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늘 그분의 생애를 살피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의 성품이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면서 여러분도 그렇게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닮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는 너무나 커다란 격차가 있고 그리고 그리운 주님의 성품과 그리고 그분이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의 성품 사이에 너무나 현격한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말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물질과 이 세상에 있는 영화를 위해서 정신없이 몸부림 칠 때 교회의 한 구석에서 조각난 자기의 더러운 성품, 주님을 닮지 못한 천박한 마음, 쉽게 사람들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포악한 성품, 주님과는 거리가 먼 유보상품을 인해서 깊이 애통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비밀스러운 위로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애통의 비밀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동시에 위로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이 그 위로하시는 은혜로 새 힘을 얻고 성도의 삶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삶에 대한 반성에서 오는 애통입니다. 이것은 존재가 아니라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관심은 성경을 주신 목적에 의해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인격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님 닮은 사람으로 존재가 인격으로 변해 가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이 어떻게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섬기면서 사셨는지를 본받으면서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오늘도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은 착한 삶을 살게 되고 착하게 사니까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원래 악하니까 악한 삶을 살게 되고 악하게 살아가니까 그 악한 성품이 더더욱 포악해지고 악랄해져 가는 것입니다.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셨습니다. 영혼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특별한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던 때에는 ‘이렇게 괜찮구나.’ 그러나 이제 주님의 그 특별한 사랑을 입었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는데 이래도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주님과의 교제도 없는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빛 가운데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있고 우리에게는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전에는 죄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의 죄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의 종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구원받고 복음의 빛 가운데 들어오고 난 그 이후에는 이제 죄가 그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그에게 영향이 미친다고 해도 그에게는 처리하고 새로운 능력을 입으며 빛 가운데로 살 수 있는 놀라운 특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전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정하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니까 또 하나의 애통하는 이유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애통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즉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랑으로 써 내려가는 편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대해는 관심이 없는 개인의 은혜 체험 역사의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교회의 영성 이런 것들은 모두 다 거짓말입니다. 허공에 뜬것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이 어떤 것이든지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그리고 신앙의 체험이 어떤 것이든지 여러분이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체험이 아니면 저는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그 삶과 오늘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 사이에 존재하는 그 현격한 격차 때문에 하나님 앞에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전에 말씀드린 것과 똑 같이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면 예수님처럼 혹은 예수님 이상으로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압니다. 아무리 애통하며 흐느껴 울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성경대로 살아도 주님의 인격체는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아무리 자기를 죽이며 피 흘리는 싸움을 싸워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섬기며 살려고 애쓸지라도 예수님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무궁하게 살수도 없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수도 없고 그분이 해 놓은 것 같은 위대한 일들을 우린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영혼을 소유한 사람들은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저앉게 만들지 않고 영원히 그런 삶을 추구하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울어도 눈물로는 갚을 수 없는 큰사랑을 느끼면서 감격할 때마다 즉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받은 비할 때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사랑 무엇으로 갚을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버리신 그 고귀한 희생의 사랑을 받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특별한 사랑을 입었는데도 그렇게 특별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면서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비천한 인생들을 위해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시고 자기의 몸을 갈아서 우리를 위해 구속 제물로 주셨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둘입니다. 하나는 그렇게 우리를 자기를 버리신 주님을 위해서 우리도 분골쇄신하며 살든지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에는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을 미워하면서 애통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는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이 없습니다. 눈을 들어서 이 세상을 보십시오. 이 세상은 입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뒤를 발자취를 쫓아갈 섬김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지만 주님의 능력으로 오는 나라이지만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확장하지 아니 하시는 나라입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과 복음의 빛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살던 옛날에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믿고 교회 다니고는 있지만은 진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배교에 가깝고 이단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 조국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바로 목마르게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누구를 통해 이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가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어주게 하고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고, 고통이 있는 곳에 진정한 위로와 화평을 주기를 원하는 그러한 마음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데 누구를 통해 이 일들을 이루어 가느냐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알 수는 없지만 구원받고 이 시간에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보다는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목메어 어찌하든지 주께서 피 흘려 죽으셔서 구속하신 우리의 손으로 주님처럼 섬기기를 원하고 못 박혀 죽으신 발로 구속하신 자신의 발로 주님이 다니셨던 곳을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지체되고 있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은 쉽게 쟁취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애통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의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못 박히신 주님의 희생을 통해서 얻게 된 덤으로 받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이 지구상에 가장 작은 교회, 한 모퉁이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이름이 없고 빛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명예와 권세나 이 땅에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보상이 약속되어 있지 않아도 그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셨은즉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을 섬기리라고 하는 착한 결심들이 우리의 삶을 움직여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왜 그런지 자꾸 지난날들이 회고됩니다. 근데 일생을 살면서 요즘처럼 절박하게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나를 향해 쓰시는 주님의 역사는 은혜와 사랑의 역사였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그를 위해서 해 드릴 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배반으로 갚고 주님의 특별한 사랑은 언제나 저의 무관심 속에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삶으로 되갚아졌다고 하는 후회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월이 흐르고 사십이 넘고 오십을 바라는 시절에 서게 되었습니다. 남은 날보다 지나간 날들이 너무나 많은데 나의 삶 중에 어느 부분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렸을까요? 정말 단 10분이라도 하나님이 내가 이 땅에 살아서 이 손으로 섬기는 것 때문에 마음이 시원하시도록 기뻐하신 적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안팎에 많은 대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수많은 유혹이 있고 우리 안에는 그 유혹과 손잡으려고 하는 더러운 욕망들이 있어서 주님만을 위해서 온전히 살기에는 너무나 소심하거나 주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는 집착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큰 은혜를 입고도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더 뻔뻔스러운 것은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제대로 울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나를 위해서 보여주신 피 어린 모범의 길을 쫓아가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가책도 없는 우리의 차가운 신앙생활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던 그 이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꿈을 단순화하여야 합니다. 궁사의 시위를 따는 화살이 오직 과녁 하나를 향하여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꽂히는 것처럼 우리는 잠시 지나는 이 인생의 길에서 너무나 많은 것에 성공하려고 하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일에는 모두 실패해도 한 가지 일,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우리의 인생이 주님에게 보탬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되겠다는 그 목표하나는 성취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은혜를 생각하며 그 사랑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 자신도 아찔할 수 없는 수많은 대적이 우리를 에울 때 그때마다 우리는 가난하고 처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호소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나의 인생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는 애통하는 탄원으로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3. 온유한 자의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늘 예수님께서는 온유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말씀하신 이 세 번째 축복인 이 온유함을 세상이 너무나 포악하고 거칠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 거칠고 포악하고 강포하기 때문에 이런 온유함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마련입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빛을 빛나고 추우면 추울수록 작은 불꽃의 가치는 매우 높이 평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온유하다’라고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선 ‘온유하다’라고 할 때 이것은 사람이 마냥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라는 것은 그냥 사람이 좋고 무걸 호인처럼 이 사람이 뭐라 그래도 웃고 저 사람이 뭐라 그래도 웃고 그러는 우유부단한 성품과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모세를 참 좋아합니다. 모세에게서는 제가 꼭 배우고 싶은 것이 지도력입니다. 물론 영적인 인물이었고 뛰어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많이 배우고 싶은 것은 지도력입니다. 그 말 많고 패역한 수백만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한 손에 거머쥐고 광야를 지났던 그 불새출의 지도력을 저는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특별히 저같이 약하디 약한 사람들은 모세로부터 강한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를 보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떠올립니까? 사도 요한을 생각할 때 느끼는 느낌하곤 다릅니다. 왜 그런지 사도 요한하고는 같이 앉아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할 것 같은데, 모세랑 앉아서 먹으면 밥이 꼭 걸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은 그의 뛰어나고 놀라운 지도력과 거룩함과 단호함 때문입니다. 그는 단호한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신들을 섬기고 간음을 했을 때에 그는 동족들을 칼로 수없이 죽인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유모가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단호함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성경은 가리켜서 말하기를 모세는 “비난받을 때의 온유함이 지면의 승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우유부단하고 무걸호인과 같은 흐느적거리는 성품을 가리켜서 무리들이 온유하다고 그러는 것을 잘못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들에게 둘러 싸여서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물을 받는 중에 예수님을 옆에서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 일을 항거해서 망치시는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그러한 일은 부당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어차피 자기를 버리시고 생명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때리는 사람에게 항의하셨습니다. “네가 왜 나를 때리느냐?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한번 말해 보라. 만약의 내가 말을 잘못하지 아니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라고 항의하셨습니다. “화 있을지 언저” 입을 여시면서 쏟아져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심판과 경고의 음성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마냥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라고 느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화 있을지어다” 하면서 입을 여실 때 쏟아져 나오는 그 경고와 심판의 말씀은 오히려 불붙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경고를 말씀하실 때에 분명히 예수님의 두 눈은 그 땅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행해지고 있는 공공연한 죄악을 주목하시며 이글거리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자기의 서신서 속에서, 그리스도인인 형제들을 대하면서 여러 번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그렇게 분내고 그리고 과격하게 말한 것은 잠시 온유함을 잃어버리고 포악해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단호함은 온유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온유함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온유함입니까? 온유함은 그렇게 무걸 호인처럼 마냥 좋은 것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군가에게 아첨하면서 사탕발림을 하는 아부의 태도도 온유한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온유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 온유함은 오래 참고 인내하며 핍박과 고통을 당해도 복수하지 않고 사랑하는 친절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과 성품이 그리스도 예수께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온유함, 자연적인 온유함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착한 사람 있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지 않지만 천성 자체가 착해서 왠지 남을 배려하고 천성 자체가 착해서 화가 나도 좀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물건을 집어 들든지, 주먹다짐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온유함은 그런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온유함은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비교적 가치가 적은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항상 한 사람의 자연적인 성품보다는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변화된 성품을 주목하고 그것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온유함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보십시오. 성경에서는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온유한 자가 온유하게 되기 전에 먼저 애통하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애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애통하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인격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는 마음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지 못한 애통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온유함 자체를 추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온유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온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온유는 겉으로 만들어 낸 행동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 우러나온 내면의 세계가 빚어낸 그런 삶이고 그러한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계속 살아가면 하나님의 성품을 계속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과 거치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의 성품은 점점 포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다음에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원래 성격이 아주 포악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많고, 굽은 기질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하지 않고 살아가는 잘못된 내면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마음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인생을 위해서 이 세상의 자기를 위해 오셨구나.’ 하고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하신 것을 깨닫게 되자 그분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게 되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우게 되었고 배우면 배울수록 주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사람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까 사실 자기의 인격과 자기가 닮고 싶은 예수님의 인격 사이에는 좁힐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거칠고 강포한 삶을 사는데 익숙해왔고,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 속에는 그런 강포하고 포악한 기질이 남아 있어서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기가 입은 작은 손해를 커다란 복수로 갚아 버리려고 하는 강퍅한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살고는 또 오늘도 주님 앞에 자기가 사랑하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과 교제하고자 할 때에 그분을 닮지 못한 자신의 성품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자기의 인격이 매우 미운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리고 여러분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수없이 한다 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의 성품과 인격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여러분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 한 분밖에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래서 그분 때문에 인생관이 바뀌고 그분 때문에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그분 때문에 인생 자체의 목표가 바뀐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을 몰랐을 때 결코 존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이나 은같이 많은 것들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 같은 이 짐승과 다름없는 포악하고 거친 인간이 온유하신 주님의 성품을 본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마음이 자꾸 생길까요? 매순간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속에서 자기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응답 속에서 그런 주님과의 교통 속에서 주님의 성품이 느껴지기 때문이고 그 성품이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자신이 닮지 않는 주님의 성품들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변화되지 않는 이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성질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성질을 부리지 않으면 간에 가서 열이 고입니다. 그래가지고 온 몸이 열 받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 성질을 부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 때려 부수고 내일은 통장에서 돈 다 꺼내고 다 사다가 다시 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주님을 알아도 주님의 성품을 닮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성질을 부리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주님과 교제하고자 할 때에 그 주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생각나면 우리는 그렇게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쓸 데 없는 짓을 했구나.’ 지금도 나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시는 온유한 주님 눈빛 앞에서만 희망이 있지, “화 있을진저” 하시는 눈빛의 주님 앞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러한 온유한 성품과 그러한 온유한 마음이 없으면 난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깨닫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성품을 본받는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깊은 고통과 아픔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픔이 없으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의 삶과 인생 자체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뭘 하나를 생각해도 ‘남들은 어떡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찬양)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시니 그 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 자국 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네 죄를 인함이라 하실 때 곧 내 짐이 풀렸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
곧 대하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주님이 자기를 지켜보시는 눈빛은 동정의 눈빛이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음성입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주님의 온유한 성품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설 때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찰 속에서 자기에게 그런 온유함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고통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애통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질을 부릴 때는 부리지만 그리고 나서는 즉시 화를 낼 때에 시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아픔이 뼈마디를 찌릅니다. ‘아, 주님이 어떻게 온유한 성품으로 그 긍휼과 인정에 넘지는 태도로 나를 지키시고 다뤄 오셨는데 내가 이렇게 포악하구나.’ 그것을 마음속에서 깨닫습니다. 그래 어떻게 합니까? 이 일은 벌써 일어났고 나도 내가 너무 미운데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아픕니다. 아프니까 웁니다. 애통하게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같은 인간이 살아서 뭐 하겠습니까? 주님의 그런 성품을 본받지도 못하고 주님의 그 고결한 사랑 때문에, 속죄함을 입었는데도 주님의 아름다우신 성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비천한 죄인입니다. 하나님, 저도 제가 너무나 밉습니다. 어떻겠으면 좋겠습니까?” 아파하고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러니까 그렇게 아파하면 반드시 주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 앞절에 나오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희랍어 성경에는 “그들만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만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애통하는 사람이 자기도 어찌할 수 없어서 주님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자기의 존재와 현실적으로 자기의 상태 사이에서 깊이 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 거기에는 주님이 위로를 해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 네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 나도 안다. 그건 잘못됐고, 너는 더 많이 변화해야 한다. 내가 네 마음을 안다. 너도 나를 닮기 위해 그렇게 아파하는 거 내가 너 안다. 네가 너와 함께 하겠고, 잠시 네가 성질을 부렸지만, 그러나 내가 너를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 이제 다시 나와 함께 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자꾸나.” 그리고 주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런 위로의 세계는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주님 닮지 않는 모습을 인해서 아파하고 애통하니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으니까 한편으로 그렇게 애통해 하며 ‘나는 왜 이 모양밖에 안될까?’ 생각을 하니까 교만해질 수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위로가 주어지니까 또 좌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좌절하면 성격이 굽어집니다. 그렇게 안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겸손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좌절하지 않게끔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이고, 주님을 닮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 주님이 그러시는데, 너는 아직 공사중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언젠가 공사가 끝나고 나면 나아질 거야.’ 그런 희망을 가지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잘못한 것을 주님 앞에 자복하고 새로운 말씀과 은혜를 힘입어서 다시금 새로운 주님을 닮은 생애를 위해서 자신을 투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정말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은 온화한 향기를 풍겨나기까지 그의 인격을 대할 때 주님이 생각나게 되는 그 어떤 것이 조금이라도 있게 되기까지는 그는 무수하게 하나님 앞에 남들이 모르는 수많은 날들을 애통하며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죽는 연습을 수없이 한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비결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밖에서건 느끼는 모든 인간의 고통은 인간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가가 말하기를 인류의 역사는 뭔가 놀라운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어떤 몇몇 사람의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물줄기가 돌려집니다.
(예화) 히틀러 같은 사람 하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유대인을 미워했습니까?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유대인을 미워했습니다. 16살인가 열 몇 살 때, 유대인 자매를 사랑했습니다. 아주 사랑했는데, 그 자매가 다니고 있는 공장의 주인이 겁탈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완전히 불행의 구렁이로 몰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적개심에 불타는 사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한 순간에 ‘다 죽여버려’ 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육 백 만 명의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가만히 보면, 우리의 불행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그리고 성품을 통해서 옵니다. 가끔 상담을 하거나 심방을 하다가 그 상처가 하도 많아서 눈물을 흘리거나 아파하는 지체들을 봅니다. 그 뒤에 누가 있겠습니까? “목사님, 우리나라에 산이 너무 많은 것이 상처가 돼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공기가 나빠요. 흑흑.” 그런 사람 없습니다. 다 이면에는 누가 있냐면 다 사람이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에게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성품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었으면 좀 착해져야 됩니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들이 덕을 봐야 됩니다. 아멘을 안 하는 거 보니까 전혀 동의 할 수 없는가 보죠. “목사님, 이 거칠고 험한 세상의 두 눈을 부릅뜨고 양손의 쌍권총을 차도 가지고 살까 말까인데 착하게 하고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사람하고 똑같이 살아가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하나님의 위로, 그리고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독점적인 축복, 이런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졌지 척박하기 이를 떼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말입니다. 내가 다시 한 번 못 박는데, 말이죠. 교회 안에서는 목사가 여기 올라가서 “여러분! 우리가 주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외치는 소리 이외에는 불날 때 말고는 큰 소리를 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교회에서 성질을 내면서 큰 소리를 내거든 그저 추운 겨울에 길 잃어버린 강아지를 본 것처럼 생각해야 됩니다. ‘너무 불쌍하다. 그 추운 겨울에 그 강아지가 달달달 떨고 있구나.’ 그런 사람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야 됩니다. ‘아, 그대 이름은 짐승,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형제, 어찌하면 좋을꼬?’ 그래야 됩니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러는 사람이 밖에 나가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교회밖에 나가면 안 믿는 사람밖에 없고,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지 뻔 한 것입니다.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완전히 깡패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알려지겠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을 보면서 깊이 아파하는 애통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의 그 놀라운 비밀, 여러분 아십니까? 정말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앞에 깊이 아파하고 절망하고 ‘하나님, 나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하고 자기의 모난 성품과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난 성품 때문에 아파할 때에 주님이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런 음성은 들어 본 사람들만이 안다고, 그 사람과 주님의 그런 대접을 양식으로 삼아서 할 수 없는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서 자신의 인격이 변화되지 않은 것을 인해서 깊이 고민하고 아파해야 됩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목사님, 저는 고민이 있습니다.” “뭐냐?” 수 십 개 교회가 아파트 단지에 개척을 했는데 다 떠나고 두 교회 남았는데 그 중의 한 교회니까 그래도 목사님이 무엇인가 잘하셨을 것 아닙니까? 250여명이 모이는 교회인데, 열심을 내다가 시간 좀 지나면 연세든 분이 자꾸 교회를 떠납니다. “왜 그러냐?” “이 교회는 장로는 안 세우나?” 하고 떠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게 뒷문을 활짝 열어 놓으라고. 그 사람들이 장로 되는 것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것 중에 10분의 1만큼이라도 ‘나는 이렇게 오래 교회 다녔는데, 왜 인격이 이렇게 개격일까? 나는 왜 예수님을 만난 게 분명한데 왜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주님의 향기를 느끼지 못할까?’그렇게 자기의 변화되지 않는 인격을 가지고 10분의 1만 고민해도 정말 그 사람이 장로 안 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온 교인이 가만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도 그래도 자기도 그렇게 세우고 싶은데, 도저히 자기가 인격적으로 동의가 안 된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교회는 요한복음 3장 16절만 좋아하다가 병들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거기서 제일 강조되는 것 믿기만 하면은 저절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새롭게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랬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까 난 수지 맞았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예수의 참사랑을 알고 주님의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자신의 진정한 내면의 세계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살면서도 추호의 반성이 없는 사람, 양심의 화인 맞은 사람들, 성경은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들만을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참 사람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의 성품을 닮지 않은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는지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닫게만 되면 눈물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애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를 힘입지 않을 리가 없고, 그런 긍휼과 사랑을 입을 때, 하나님께 그에게 새 소망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사셨던 생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향해 완강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오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중하시고 섬뜩한 경고를 바라셨지만 비록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의 눈길에서 사랑을 느끼고 오랜 동안 주님을 떠나 살아 왔어도 지금은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해도 어찌하든지 주님의 성품을 닮고 살고 싶어 하는 형제들을 어떻게 대우하셨습니까? 무례하게 덤벼드는 어린 아이, 나무라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고 그들을 안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같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까이 다가와서 낮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죄 많은 고통 하는 여인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대우해 주셨습니까? 안식일을 고단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주님의 생애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시던 생애였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혀서 살을 찢으시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를 못 박고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당하게 된 그 끔찍한 형벌을 가슴 아파하시면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모르옵나이다.’라고 우리편에 서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변명해 주셨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온유한 성품이셨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혹은 다른 많은 사람들 만나서 성질을 부리고 포악하게 굴면 다른 사람들은 그 앞에서 굴복할 수 있습니다. 왜?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 자기가 마치 무엇인가가 되는 것처럼 우쭐거리는 것은 정말 부끄러움 위의 수치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만이 수치스러울 뿐입니다. 그를 기르는 부모를 수치스럽게 하는 사람이며 함께 사는 아내나 남편의 부끄러움을 발라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저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을 만날 적마다 꼭 물어보는 것은 어느 교회에 다니냐고 꼭 물어 봅니다. 질문 자체가 그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어느 분에게서 신앙생활을 했냐고 물어 봅니다. 질문자체가 그를 목양했던 그 목자에게 영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목자를 만나게 하고 그런 교회에서 자라게 하고 저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그 배후를 움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 갈수록 온유한 사람들의 가치는 점점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화) 제가 간 교회에서도 다른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흥강사가 와 가지고 온통 휘저어 놓고 간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은혜를 받았는데 한쪽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저 자매 일어나봐.” 일어납니다. “젓가슴이 왜 이렇게 커.” 설령 진리의 요소가 그 집회 속에 있었더라 하더라도 신앙이란 게 인격적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리 나와.” 머리 누르고 “다음 달에 망한대.” 그런 식으로 예언하고 말입니다. 요즘이 어떤 시댄데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마십시오. 부흥사가 그렇게 해놓고 가니까 교인들이 일어나서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이단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단만 아니면 다 되는가? 그건 아닙니다. 이단만 아니면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고 여러분은 들어줘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시장에서 반찬거리 살 때 몸에만 해롭지만 않으면 아무거나 사다 먹습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그런 신앙생활에 대해서 좀 신물을 내야 됩니다.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자는 말입니다. 매일 인격적인 신앙생활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도 인격적인 신앙생활이 되려면 자신의 주님을 닮지 않은 성품 때문에 그 인격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런 하소연이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더 강포해지고 사랑은 식어지고 불법은 행해질 것이라 했습니다. 조급하여서 참지 못하고 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은 온유함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가 된 것입니다. 온유한 성품을 주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가치는 점점 빛나게 된 것입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대판 싸움을 하고 성질을 부릴 때마다 전 옆에서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3~4년 전도한 거 저 성질 때문에 다 까먹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성품을 가지셨는지 깊이 생각하고 그분의 성품을 닮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기도 가운데 많은 시간을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일하고 봉사하는 기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하나님 앞에 오랜 시간 신앙생활 하면서 바뀌지 않는 자신의 인격을 향한 고민이 없다면 그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 아름다운 주님과의 만남,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온유한 성품들을 본받아가고 또 그러한 온유한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감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도 주님의 그 살아가셨던 삶을 뒤를 따라가는 그런 삶이 될 것입니다.
인격과 삶이란 건 분리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쌓은 선에서 선이 나오고 마음이 쌍인 악에서 악이 나온다.” 말씀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를 맺힌 나무는 나쁜 나무입니다. 착한 사람은 행동 자체가 착합니다. 착한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오히려 유익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상처가 있어도 자기의 상처보다는 자신의 상처 때문에 상처를 받아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착한 인격에서 흘러나옵니다. 온유한 삶, 온유한 성품은 삶 자체를 온유한 성품으로 만들어 줍니다. 단호함과 결단, 용기, 기백, 그런 것들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평정을 깨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축복은 평화입니다. 온유와 평화는 하나입니다. 성질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폭발하기 전에 불붙는 과정에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폭발하면 그 순간에 뒤집어지니까 평정을 잃어버립니다. 끊어 올린 게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립니다. 자기는 식었는데, 자기가 폭발했기 때문에 불붙은 저 사람이 불붙으니까 다시 자극이 옵니다. 자극이 오니까 다시 솟아오릅니다.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한사람 있으면 여러 사람이 지옥처럼 됩니다. 정말 이런 악순환들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애통하는 자의 위로의 복을 말씀하신 후에 온유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까?
(예화) 제가 아는 목사님, 참 좋으신 분입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어디를 멀리 심방을 가셨는데, 옛날에 차도 없었던 시대에 양복을 깨끗이 입고 가는데, 옆에 있는 아가씨 자꾸 인상을 막 쓰더랍니다.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왁’ 하는데 오바이트가 나는 것입니다. 얼굴부터 다 뒤집어쓴 것입니다. 얼마나 성질나겠습니까? 웃으면서 수건으로 닦으면서 “다 토하셨어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니까 “괜찮습니까?” 그러다가 대화를 하면서 “뭐 하시는 분이세요?” “목사입니다.” 자매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아, 역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깡패입니다.” ‘아니, 깡패가 저럴 수가.’ 쓸데없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란 것이 잘 드러내는 사람 있습니다. 뭐 좋습니다. 숨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인격으로 책임질 수 없으면 말 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판거리 싸우다가 “나도 말이야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 이야기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가 될수록 이런 사람들이 너무 그립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 단호함과 결단은 있지만 주님의 온유한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보는 사람마다 주님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이거야말로 정말 큰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돈으로 몇 십만 원 주는 것보다 강남구의 땅 좀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게 히브리 시대의 문맥에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 땅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레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 자체는 서러움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조를 아브라함이라고 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다음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다가 요셉의 때에 거기로 내려갑니다.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역시 남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땅을 줬지만 바로의 땅을 빌려 준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던 새 왕이 나오니까 종들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땅을 통해서 주종 관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전제국가는 개념 자체가 가산제 국가입니다. “이 땅이 누구 땅이냐?” 물으면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그게 아니라 “우리 왕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린 거기에 세 들어 산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주종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땅입니다. 이 성경이 쓰여질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는데, 요건은 무엇 때문입니까?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돈을 준다, 뭐를 준다 해도 가슴 저리도록 감동을 주는 것은 땅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에게 있어서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한편으로는 가장 귀한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포악하고 강포한 세상에서 온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손해를 많이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온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한 것들입니다.
또 실질적으로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정복합니다. 어떻게 정복하는지 보십시오. 온유한 사람들이 돈 주고 땅을 정복하지 않아도, 돈 주고 땅을 사지 않아도 마음이 온유하고 온유한 주님의 삶을 보여주는 주님의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서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의해서 땅이 정복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저 사람은 나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낮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온유합니다. 그러면서도 무곤충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뭔가 주관이 뚜렷하고 분명한 가치관이 있고 단호함도 있는데 자신의 이익에 관한한 자신을 비우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친절히 대해주고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복수할 마음을 품지 않는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 그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되고 고개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저 사람은 내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비록 돈은 나보다 적고 사회적인 지위는 나보다 높지 않지만 그가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온유함 때문에 왠지 압도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온유한 사람들은 온유한 때문에 사람들에게 잠시 무시당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을 만들어 주는 온유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못났고 지도력이 신통치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고 짓 밝히는 것과 온유하기 때문에 참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참고 온유한 성품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놀라운 권세를 주십니다. 요즘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설교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들어온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감명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입니다. 더 좋은 교회가 있습니다. 더 좋은 교회는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다가 마음이 식어져서 설교에 대한 감동이 식을 때도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의 삶을 보면서 도전을 받는 교회, 그 교회가 더 좋은 교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한결같지 않습니다. 항상 밥 잘 먹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교회. ‘아 정말 저렇게 변화되는구나.’ 그렇게 처음에는 하나님 말씀 들리는 말씀을 통해 감화를 받다가 마음이 변했을 때라도 설교는 인정을 못해도 자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의 삶을 보면서 자기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교회, 그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보십시오. 그렇게 포악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면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주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진실한 변화를 사람들로 하여금 갈망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게 바로 세상을 정복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는 입으로 입을 열어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예수의 참된 사랑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고, 또 한편으로는 삶으로도 여러분의 인격 자체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는 감화 받은 성품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통해서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성도들을 보면서 그 성도들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대해서 경외심을 갖게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함의 열매를 맺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 의에 주린 자의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주님께서 네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이 네 번째에 온 사실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있어서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저것 말씀하시다가 지금 이걸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자신의 영혼에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게 되었을 때 파산 선고 받은 사람이 희망이 없는 것처럼 처절하게 가난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와 죄로 가득 찬 세상을 인해서 아파하며 눈물 흘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그런 죄인 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 온유함을 깨닫고 주님의 온유함을 닮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되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 후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이며 또 그런 사람들에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차례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인’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의’에 대해서 먼저 ‘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하기 전에 인간이 무엇을 구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드는 늦은 시간까지 인간의 머리속을 지배하는 가장 주도적인 사고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마음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은 무엇입니까? 물론 먹고 입고 마시고 보는 여러 가지 많은 욕망들이 우리의 삶을 규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더 큰 욕망이라는 것은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인간에 모든 불행은 인생이 마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본분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이 자기의 인생에 행복을 과도히 추구하다가 보면 오히려 인간이 불행해 진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정신입니다. 보십시오. 인간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극대화 될 때, 그는 즉시 마음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이렇게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은데 행복해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행복하게 못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며칠 전에 우리는 자기의 부모를 칼로 살해하고 석유를 끼얹어서 불까지 지른 패륜아의 살인 사건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접하면서 물론 사랑했던 아들의 손에 의해서 비명에 죽어간 고인에 대한 때문에도 마음이 아팠지만 자기 부모를 그렇게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에 마음은 얼마나 지옥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부모가 일으키는 갈등 속에서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고민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었습니다. 자기가 행복하려고 행복해지는 것이 자기의 인생에 최고의 숙제가 되고 추구점이 되고 나니까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부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것만큼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에 대한 미움과 그리고 복수심이 싹트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행복을 간절히 찾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동안에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성경은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은 자기가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할 때 인간이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에 삶도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삶에 추구점과 관심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뀌지 않은 사람에 변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변화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도 자기의 행복만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것들을 만족하기 위해서 그러한 행복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삽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 마음에는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자기의 삶 속에는 행복해질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무능한 아버지,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어머니, 그리고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아내나 남편, 자기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기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식들, 그리고 여러 가지 자기 삶에 놓여있는 환경들이 자기의 삶을 행복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자기를 꽉 채웁니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만큼 그의 마음속에는 상처와 미움, 복수심, 원망 이런 것들이 가득 찹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인생에 참다운 행복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사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아까와 같은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은혜 속에서 살고 싶은데 이런 나의 간절한 소원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은 똑 같은 논리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자기의 이 마음의 소원을 방해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 미움에 대해서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못하게 되는 무지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그는 이제 은혜를 받으면서 그의 관심에 초점이 다른 데로 옮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무능한 아버지나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 아내나 남편, 혹은 잘못된 자식들이나 자기가 놓여있는 삶의 환경들이 자기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은혜를 받으면서 똑같이 ‘저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은혜 안에 살아야 행복해 질 수 있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고 싶지만 죄가 나를 가로막고 있듯이, 저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될 사람들인데 그러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는 삶에 초점을 포기 할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 고통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집안이 변화되는 것 아닙니까? 한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 사람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지시하셨겠습니까? 이것은 기도에 문제라기보다는 삶에 있어서 추구하는 초점을 가히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결코 무엇을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너희의 삶에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행복을 고상하게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집약하면 먹고 입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초점입니다. 다만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마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육신을 위하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욕망입니다. 나 자신을 즐겁게 하면 그것으로서 인생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먹고 입고 마시고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인생이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 말고 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자기의 행복이 거기 있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자기의 육신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언뜻 보면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음식을 탐하는 것보다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산수와 풍경이 좋은 명승지를 관람하는 것이 훨씬 더 고상해 보일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멋있는 옷을 입을 수 있을까?’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시장 저 백화점을 누비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좋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탐구하는 것이 더 고상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없으면 모두 세상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정신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고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역시 그것도 주님이 없으면 세상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자기를 만족하게 하고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미친 듯이 살아가지만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반문이 생겨 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실제 경험해 보면 만족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만족이 있으면 우린 행복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예술에 깊이 심취한 사람들은 좀 가난하고 헐벗어도 예술에 대해서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복되도다”라고 하시는 말씀은 희랍어로 ‘마카리오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구약에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이 있는 사람은”이라고 말할 때 그 복과 같은 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복을 이야기하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선택된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성도로서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에 커다란 질병이 있어서 의사를 찾아 온 사람, 그 사람의 간절한 바람은 그 질병으로 말미암아 계속되는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오자마자 끔찍하게 단위가 높은 진통제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진통제를 강력하게 투입하면 여러분이 보는 눈앞에서 여러분의 다리가 기계톱으로 잘려나가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입니다. 통증이 계속될수록 계속 단위를 높이면서 진통제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잊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의사가 있다면 의사로서의 양심을 져버린 사람입니다.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의사를 찾아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굳이 의사를 찾아 온 이유는 이 세상에 단지 주사기와 진통제를 든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해달라고 의사를 찾아 온 것입니다. 이 고통이 잠시 잊혀지는 고통이 아니라 완전히 병에 근원을 찾아내서 병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서 병에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거기에 합당한 처방을 해서 진통제가 잠시는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진통제를 맞아야 할 이유가 없이 건강한 사람으로 그 통증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의사에게 나오고 의사가 시키는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가 아닌 다른 것들로 만족을 누리면서 스스로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마치 마약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누리는 만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사람은 인생에 진실을 볼 수 없는 사람으로 차츰 망가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무언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마취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쾌락에 미친 사람, 주님을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성공에 목매는 사람, 사업에 성공을 위해서 목매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먹으나 오직 사업 하나로 그 일념으로 살아가는 사람, 잠꼬대를 해도 사업, 그리고 눈을 떠도 사업, 사람을 만나도 사업 거기에 미친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취미 생활에 미친 사람도 도저히 신앙이 들어갈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이 좋은 시간에 여러분은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조기 축구에 미친 사람은 한참 판돈을 걸고 옆 동네 사람들과 내기를 할 시간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산에 오를 시간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제 막 첫 번째 상영하는 영화가 중반전에 접어들었을 시간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예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제시하셨던 예술이나 자기 사상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똑같이 마취 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랑 때문에 결국은 생에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의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뭔가 흐릿한 추구점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삶에 초점이 바뀌어지지 않은 채, 어중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부른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불만족으로 차 있고 이 세상에 육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럼 무엇이냐? 오히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행복 자체를 추구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아가는 인생이 될 때 부수적으로 맺히는 효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찾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면서 그것을 추구할 때 부산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이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인간에 삶이 얼마나 헛된지를 말했습니다. 저자도 잃어버린 어느 시인의 한 시가 생각납니다. 정확하게 외울 수는 없지만 스토리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행복은 무지개와 같은 것, 붙잡으려고 산을 넘어 달려가면 저 만치 멀리 가네. 또한 산을 넘어 무지개를 붙잡은 것 같았지만 내가 다가가면 저 멀리 있네.” 하는 내용입니다. “인생은 결국 이렇게 일평생 속아서 사는 것인가 보구려.”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항상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했던 사람들, 더욱이 오늘 성도에게 약속된 이 ‘마카리오스’의 축복을 누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육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했을 때는 행복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몰랐을 때였고 행복이 무엇인지 골똘하게 생각하던 때는 이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길에 들어선 이후에 일이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원칙이 더 잘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행복 자체는 우리들이 추구해야 될 목표가 아니라 우리들이 추구해야 될 목표는 다른 것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른 것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의를 말할 때 여러분은 제일 먼저 칭의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칭의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여기서는 칭의 보다는 오히려 성화 쪽에 가까이 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여기서 상징하고 계신 어떤 한 그리스도인, 복 있는 그 사람은 지금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까에 대해 목말라 있는 사람이기보다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과 함께, 주님과 사랑을 나누며 주님을 기뻐하면서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를 가지고 고민하는 성화에 있어서 의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당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인은 무엇일까? 이 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들이 무엇의 의가 아닌지부터 생각하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는 자기를 자랑하는 그런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뽐내는 그런 의가 아닙니다. 그런 의는 항상 진정한 의미의 의에 대한 목마름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교회에서 외식하는 사람들은 외식, 밖에서 밥 사먹는 의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외식하는 사람들, 즉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항상 곤고하고 병들어 있습니다. 외식을 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에 목마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주님의 의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외식할 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외식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흉내내기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추구와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추구와 갈망이 없는 행동을 해보라고 요구를 받는 것이니까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대해 보라는 것도 고민이지만 그건 그래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안 사랑하는 것처럼 대해보라는 것은 고문입니다. 어렵습니다.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는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자랑하기 위한 그런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말씀하는 의는 형식적인 의가 아닙니다. 앞에 이야기와도 통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형식적인 의가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만큼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리고 ‘이 정도면 내가 평균은 될 거야.’ 그런 자만심, 이런 것들에서 오는 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는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는 데서 오는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친 데서 누리게 되는 효과입니다. 은혜를 받고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셔서 주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게 의입니다.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주님과 함께 사랑을 나누면서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 그게 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라고 말할 때 흔히 일반적이고 도덕적인 의를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에 사회 현실이 어떻고, 오늘날에 국제 정세가 어떻고,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사이에 정의가 어떻고,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공평이 어떻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의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의입니다. 백날 이야기 해봐야 별 뚜렷한 효과가 없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도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죠?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해집니다. 좋은 세상이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점점 괄목하리만치 나빠져 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모두 개인적인 의 없이 사회적인 의를 찾는 것이 얼마나 신기루와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불화하였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고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그 사랑 때문에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바뀔 수 있게끔 그의 마음속에서 개인적인 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마음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사람으로 고쳐질 때 전쟁은 사라집니다. 아무리 많은 무기를 만들어 놓았어도 이것을 사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도 균형과 부의 공정한 분배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법을 만들어서 많이 버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지 등쳐서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금을 적게 낸 사람들이 적은 세금을 내고도 많은 혜택을 누릴 때 신나지만 많은 소득을 벌고 대부분을 빼앗긴 사람들의 마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세금이 적은 것 같습니다.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10만 불인가 받는 사람에게는 5만 불을 세금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끔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20만 불, 30만 불, 100만 불을 벌면 그 비율은 점점점 올라가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이 세금을 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의가 이루어지는 진정한 변화 없이 이 세상을 단지 제도와 억압을 통해서만 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그것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공했다고 할 것 같으면 공산주의에서 이런 성공을 가장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산주의와 같이 강력한 정권,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인간 자신 안에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다스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인간은 내버려둔 채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제도를 만들고, 억압을 하고, 어떻게 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공평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그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람의 마음에 진정한 변화 없이는 세상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이십세기만큼 평화에 대해서 노력을 많이 한 세기가 없었다고들 말합니다. 국제연맹, 국제연합 모두 이십세기에 태어났고 수많은 나라들이 전쟁에 끔찍함을 경험한 후에 모이기만 하면 전쟁이 사라지는 세상에 대해서 꿈꾸면서 평화를 모두 추구했습니다. 자유 민주 국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도 그랬습니다.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련은 나쁜 나라인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배워 왔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어느 대표가 전략무기 제한에 관한 협정을 미국과 쏠티 했습니다. 미국과 협정을 맺은 다음에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들도 저렇게 평화를 눈물로 사모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십세기만큼 끔찍하게 전쟁을 많이 겪은 때가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오천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전쟁이 평화를 그리워하는 금세기에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그토록 고민하고 갈등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종교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돈 많은 자들이 돈 없는 자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끔찍한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좋은 세상이 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금방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힘들 정도로 빙빙 돌아가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방법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사실은 복음만큼 지름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되면 제도가 아무리 나뿐 것이 있어도 세상은 그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노예제도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가 없기 때문에 동일하게 노예를 부리는 노예의 주인도 지금 우리사회에는 법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쓰여지던 1세기의 노예 주인들보다 더 벌 많이 받아야 될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 통합니다. 공산주의에서 사람도 영혼도 모두 부정하고 단지 물질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사상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지나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도 돈으로 계산하고 사고판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데 제도는 없는데 노예도 있고, 노예주인도 이 세상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돈을 가지고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노예 주인처럼 군림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악한 마음이 돈을 매개체로 해서 인간을 억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노예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데 권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권력을 통해서 악랄한 노예 주인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우리는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돌아 가보십시오. 1세기 성경에 쓰여지던 때는 노예제도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자기의 노예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좀 더 노예에서 해방 된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분명히 외면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저 사람의 노예의 주인이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둘은 서로 서로를 형제처럼 생각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봉사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예를 자기의 형제처럼 생각하며 대우해 주었습니다. 종과 자유인이 하나가 되었고 헬라인과 유대인이 서로 끌어안고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모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언제한번 미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미국은 정통적으로 노동조합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요즘은 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읽은 책을 보니까 미국 대통령이 무서워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중앙은행장이고 또 한 사람은 노조 총 지도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돈을 찍고 싶어도 은행장이 “싫어.” 그러면 못 찍고, 노조에는 파업을 해도 두 달 동안 월급을 줄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회사가 두 달 동안 놀고서도 버틸 수 있는 회사는 거의 없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철저합니다. 그리고 일정 수의 직원들이 모이면 노동과 관련된 기관에서 회사를 방문해서 노동조합을 만들도록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예화)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조그만 가내공업 회사를 차린 이야기- 하나님이 자기를 여기에 보내신 어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왔으며 선교사적인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서 직원들에게 이익금을 정당하게 분배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고용하니까 직원들이 사장의 진실을 알게 되어 노동조합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투쟁을 하고 그러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의 목표자체를 어떻게 하든지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의 돈이라도 훔쳐서 자기만 떵떵거리고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보편적인 기업가가 가지고 있는 욕망에서 해방되고 다른 목표를 갖게 되니까 그런 의가 사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탈세할 이유도 없고 이중장부를 만들어야 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의가 없이는, 의로운 사람 없이는, 의로운 변화 없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관계의 회복이 없이는 그가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생활 속에서 의를 찾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썩었는지 한번 보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차선이 잘렸습니다. 여기서는 이곳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여기에 무슨 영업장소가 하나가 있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이 여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잘라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완전히 이 집을 위해서 잘라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교통 흐름을 볼 때 거기에 끊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저거 그냥 자른 것 같지 않다. 분명히 찾아가서 밥 사주고 봉투 좀 줘서 잘라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엇하나 우리 사회에서는 진짜 법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우리는 이미 어떤 일이 이루어졌다 건물 하나가 들어서서 준공검사를 받았다고 하면 ‘또 뭐 좀 줬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이 사회에 부정과 부패, 도덕적인 불의들이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 긍극적인 원인을 캐 들어가면 제도가 잘못되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물론 제도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해결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주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주님의 통치를 사모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바뀌기 전에는 그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이 도덕적인 사회가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회의 공평, 정의 이것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이루어진 영적인 의입니다. 그런 거룩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결과로서의 도덕적인 의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말 그런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을까? 변함없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행복이 되시고 우리가 주님에게 즐거움이 되는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내가 될 수는 없을까?’ 이런 목마름이 바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목마름이 있습니까?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뚜렷한 욕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고 나서 제일 먼저 찾아오는 변화는 욕망의 변화입니다. 세상에서 놀던 즐거움이 이제 즐겁지가 않습니다.
(찬양)
나 세상 자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그런 변화입니다. 욕망에 먼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백퍼센트 완벽하게 욕망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도적인 감정, 주도적인 욕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신앙생활 해가는 사람 속에도 가끔은 세상을 향해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이 가끔은 들 수가 있습니다. 또 가장 방탕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도적인 욕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가장 강합니다. 그리고 가끔 드는 세상에 대한 욕망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는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것은 그냥 식욕을 느끼는 상태가 아닙니다. 정말 먹을 것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배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됩니다. 마실 것이 몸에 들어가고 먹을 것이 충분히 배속에 차기까지 그 욕망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나서 금식을 자주 했습니다. 언젠가 한번 일주일 금식을 작정하고 금식을 했는데 이틀짼가 지났는데 먹고 싶은 것들이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물론 금식하면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는데 이거는 주도적인 욕망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 같은 직장에 있는 다른 자매 하나도 금식을 하고 있었는데 뭘 엎드려서 열심히 씁니다.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금식 끝나면 먹을 것을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을 게 떠오르는데 심각합니다. 들리는 소리가 없는데도 귀에 들리는 걸 환청이라고 합니다. 환취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음식은 없는데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중에도 탕수육이 그렇게 먹고 싶었습니다. 결국은 이틀째 날 그것도 근무시간에 밖에 뛰어나가서 탕수육을 사먹고 들어왔습니다. 갈 때는 행복했는데 올 때는 우울했습니다.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에 들어와서 가득 채우기까지는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배고픔의 욕망이고 목마름의 욕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원초적인 욕망을 말씀하셨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가운데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당시 형편으로 볼 때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실감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이 배고파서 떠오르는 것이 음식밖에 없는 사람에게 금강산 가자고 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 배 멀미를 하면서 왜 가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가 자기에게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겠다는데 “싫어요.” 그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는 것입니다.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며”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의 의가 우리의 마음에 채워져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욕망,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고자 하는 욕망,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고자 하는 욕망, 주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는 있는데 주리고 목마른 지속적이고 절실한 욕망이 아니기 때문에 실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목양실에 앉아있는데 우편물이 하나 왔습니다. 뜯어보니까 “스위스로 오십시오.” 그렇게 써있습니다. 그리고 카다로그를 멋있는 것을 보냈습니다. 펼쳐보니까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에 대해서 그림처럼 묘사를 해놓고 칼라 사진으로 두툼하게 팜플렛을 만들었습니다. “값도 쌉니다. 일단 한번 와 보십시오.” 그러면서 쭉 보여 주는데 순간적으로 ‘어휴, 가고 싶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까 ‘에이, 거기 가서는 뭘 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위스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아닙니다. 진짜 가고 싶으면 앉으나 서나 거기 생각이 나고 무엇을 하든지 눈에 선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목마름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자기의 몸속에 들어와서 채워지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든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꼭 배부른 흥정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 주님이 저를 만나 주시겠다구요? 뭐 한번 와 보세요.” 그런 마음, “주님이 제게 은혜를 주시겠다구요? 제가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마음, “주님이 저를 변화시켜 주시겠다구요? 글쎄요. 한번 해 볼까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 속에 흐르고 있는 주도적인 마음이 아닙니까?
어느 날 신문을 이렇게 보니까 요즘 집집마다 자기 자녀들 교육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가끔 수능시험 문제를 보니까 우리들이 옛날에 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했던 것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논술고사 시험 문제 같은 것이 나오는걸 보면 ‘내가 책을 이렇게 여러 권 쓴 사람이지만 내가 이걸 쓸 수가 있을까?’ 그런 문제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좋은 방법은 신문에 쭉 상세하게 실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백과사전을 계속 읽게 하는 것입니다. 빌게이츠도 백과사전을 가지고 공부를 해서 대학교 2학년에 중퇴를 했는데도 세계적인 인물이 되지 않았느냐는 달콤한 이야기까지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대학에 들어가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백과사전을 특별히 만들었는데 값이 사십 몇 만원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집 사람 보러 그랬습니다. “우리 아들이 이걸 사주면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쟤가 이걸 사다주면 열심히 읽을지는 궁금하다. 사다 놓고 안 읽으면 무용지물인데 한번 당신이 물어봐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의 집사람이 가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와서 하는 이야기가 그러더랍니다. “굳이 사주시겠다면야.” 그래서 안 사줬습니다. 왜 사줍니까? 그 돈에 보태 가지고 삼 년 동안 사고 싶어 하던 기독교 대 백과사전을 샀습니다. 너무 비싸서 힘들었는데 어느 목사님이 40% 할인해서 자기가 사 주겠다고 소개를 해 줘서 사다 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배부릅니까? “내가 너희를 만나고 싶다.” “뭐 굳이 만나고 싶다면야.” “내가 너의 기도에 응답해주고 싶다.” “뭐 그런 것씩이나.” “내가 너를 변화시키고 싶다.” “글쎄, 뭐 굳이 변화시키시겠다면 한번 해 볼까요?” 이런 식의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주님이 보시기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변화되기를 목말라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자기 속에 어떻게 하면 주님의 형상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성화에 대한 몸부림이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교회를 나와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에 대한 목마름이 없이 의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니까 만족도 경험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갈급함이 없으니까 행복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주님의 뜻이, 주님의 거룩한 계획이 내 마음속에 이루어져서 어떡하면 내가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내 인생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처절한 목마름이 없으니까 만족도 경험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를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서 주님의 의가 충만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세상이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짓을 하면서 세상이 흘러가고 있는데도 세상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거나 어떡하면 이 세상이 내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의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면 신자처럼, 세상에 나가면 불신자처럼, 세상 사랑하는 친구들 만나면 세상 친구처럼, 그리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만나면 성도들의 친구인 것처럼 그렇게 박쥐와 비슷한 삶을, 이중적인 삶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이 우리에게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복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소유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통치를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실 때 주님이 오셔서 친히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을 의로운 마음과 삶으로 바꾸어 놓으실 때 거기서 우리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한없는 축복과 그리고 거룩한 사랑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의로운 통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속에 온전히 이루어진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은 우리 속에 그런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와 불순종입니다. 좌와 불순종이 하나님의 통치를 향해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 맛보는 그러한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는 그래도 여행을 하면서 위협은 느끼기는 느끼지만 그래도 덜 느낍니다. 우선 우리나라는 총이 많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상한 악당들의 무리들이 일어나서 방배동을 점령하고 너희는 나한테 세금을 내라고 하고, 사당동은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이런 식으로 나라 전체가 반역하는 무리들로 뒤끓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나라가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를 모두 굴복시키고 주님이 친히 통치하셔서 주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에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우리 밖에 있는 삶, 모두 거기에 순종할 때 그때 진정한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처음 들어올 때는 천방지축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제 멋대로 살았지만 들어오고 나서 즉시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어서 이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 때 비록 이 교회가 땅에 있지만 이 속에서 우리는 하늘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이 세상도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데도 왜 그런 세상이 되지 않고 있는지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의 교회와 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꿈꾸는 불굴의 욕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변화되기까지는 결코 내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과 은혜로운 교제를 다시 찾을 때까지는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칭찬하고 좋게 말해줘도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고 하는 강한 욕망, 실제로 주님이 그런 일들을 이루셔서 우리들을 만족하게 해주실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줄기찬 욕망을 가지고 목마르고 배고픈 마음으로 주님의 의가 우리 속에 우리 밖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고 하나님에 대해서 목마른 사람들이 너무나 적은 때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시간도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보물을 인해서 헐떡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하나님이 온전히 오셔서 자기를 다스려 주시고 교회 속에 주님이 오셔서 온전히 교회를 다스려 주시고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심으로 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달라고 그렇게 목마르며 하나님 앞에 헐떡거리는 마음으로 갈급해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오늘 이 시간도 찾으셔서 그들에 영혼을 만족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예외 없이 응답될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배고프고 주님이 그렇게 오셔서 다스려 주실 때까지는 행복할 수 없이 눈물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그를 다스려 주시고 그가 기도하는 교회와 세상을 다스려 주시므로 그를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다섯 번째 복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는가 하면 긍휼히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 앞에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다섯 번째 복은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 다음에 올까요? 여기에도 무엇인가 의미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법하고 마음대로 사는 대신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살고 싶어 하고 또 그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자기의 마음과 삶 속에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의롭게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빠지기 쉬운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고 바르게 살면서 자기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위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도 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주님께서는 다섯 번째 축복을 네 번째 복 다음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긍휼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기에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커다란 축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을까요? 우선 긍휼이라고 하는 말은 논리를 초월한 자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하다는 마음이 드는데 저 사람이 왜 불쌍한 사람이 되었을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상태를 보면서 불쌍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세우셔서 열두 사도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떼들에게로 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마태복음 9장이 나옵니다. 거기서는 예수님이 왜 자기의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십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리하며 고생한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보면 “내팽개쳐지고 괴롭힘을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까 그 백성들은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쳐진 것과 같은 신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누군가가 와서 많이 괴롭게 해서 고통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양떼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실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며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사도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물론 보내실 때에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셔서 그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어떤 그림이 떠오릅니까? 양떼들이 많이 있는데 목자는 간 곳이 없습니다. 원래 양이라는 짐승은 자기를 보호할만한 방어 기능이 거의 없는 존재입니다. 목자는 사라져 버리고 양들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이리저리 흩어져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나타나는 이리와 맹수들이 와서 하나씩 둘씩 물어갑니다. 다행이 어떤 것들은 상처만 입고 도망쳐 나온 양들도 있지만 많은 양들이 하나씩 둘씩 뜯어 먹히고 있습니다. 슬피 울기는 하지만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셨던 모습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으로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없고 아무 능력이 없기 때움에 악한 짐승들이 와서 뜯어먹어도 아무 힘없이 뜯어 먹히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말이 맞는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이 모두 다른 사람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형편이 괜찮았으면 불행해질 염려가 없는 사람이 사람을 잘못 만나 불행해진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의 불행은 자신은 아무런 불행해질 만한 이유가 없고 단점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일방적으로 불행해지거나 악한 세력들에게 뜯겨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술 팔고 몸을 팔던 창녀나 기생, 또는 다른 사람의 돈을 부정부패로 착복하던 세리 등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모두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이 복음을 잘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술 팔고 몸 팔고 부정부패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할 수 없어 몸을 팔고 부정부패를 했습니까? 자신은 그냥 당하기만 한 것입니까? 살고 보니 어느 날 자기는 부정한 세리가 되어 있었고 몸이 더럽혀진 여자가 되어 있었습니까? 아닌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그런 생활을 좋아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몸을 팔며 술을 팔아 돈을 버는 식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림이 보여주신 그림, 즉 양떼들이 마구 찢기는 모습은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자기가 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셨습니까? 어쩔 수 없이 불행해지셨습니까?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유혹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지만 누군가 와서 이들을 괴롭히고 더러운 삶을 살도록 내동댕이쳐진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면서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의사인데 환자 한 명이 실려 왔습니다. 다리는 심하게 상하고 온몸은 피투성이입니다. 의식은 살아있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 그냥 놓아두면 금방 죽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겠습니까? 먼저 응급처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의사는 그 사람이 다친 이유가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응급처치를 하는 대신 죽어가는 환자에게 왜 이렇게 다쳤는가를 따져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환자는 자신의 부상경위를 한참이나 설명하다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의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중입니다. 그런데 부상경위를 듣고 환자에게 훈계를 합니다. 제대로 못해서 사고를 당했다고 말입니다. 이 의사의 마음속에는 ‘너는 당하는 것이 옳다.’라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죄하는 것이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전혀 안 믿어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본 것보다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바람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펄럭이는 빨래를 보고 바람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그것은 상관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냥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무덤에 누워있는 사람들 중에 이유 없이 누워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교회당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 치고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꼭 믿어야 할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 풀리지 않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문제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인생의 갈등이 심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때문에 등등 마음이 곤고하고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내가 이렇게 엉터리 같이 살아온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마음대로 살아왔는데 제 인생은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영접했을 때 우리가 가졌던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은 주님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해온 일들이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짓고 방탕하게 살아온 삶을 잘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에도 자녀가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예쁜 옷에다 더러운 것을 묻히고 왔다면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 매도 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 옷을 입고 갔어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피를 묻혀왔다고 야단을 치겠습니까? 아마도 옷은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망가뜨리면서 다쳤을지라도 그것을 뒤로하고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향할 것입니다. 만약 보물이 아까워 아이를 야단만 친다면 그 사람은 친어머니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인 것입니다. 물론 생각은 할 것입니다. ‘왜 값비싼 도자기를 깼을까? 우리 아이는 왜 그렇게 칠칠맞을까?’ 그런 생각은 하겠지만 당장은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피가 낭자 하는데 그런 생각이 나겠습니까? 자기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생각지 않고 병원으로 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물론 그 행위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아이가 왜 다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재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상태, 생명이 위험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너무나 불쌍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간에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주님이 용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이란 이렇게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볼 때 “잘됐다. 그렇게 술만 퍼마시더니 당해도 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든지 상관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래서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기 그런 사람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런 사람을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런 복된 삶을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너무나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다음부터 인간의 마음속에는 물론 선한 마음도 조금은 있지만 포악하고 악독한 마음이 번성한 나무와 같이 자랐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눈물 흘릴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너무 불쌍하다.’라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을 얼마나 자주 봅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까? 마지막이 되면 될수록 세상은 더욱 강퍅해지고 메말라져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아픔보다는 쾌락을 좇아 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바지하는 삶을 택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라도 내가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대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제가 그 건물의 한 블록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보고 돕겠다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고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며 감격해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등산복차림으로 지하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겠다고 왔습니다. 순식간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사람을 구조하겠다고 몰려든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직도 우리의 국민의 마음속에는 따뜻함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경찰이 그곳에 들어갔을 때 백화점에 있던 물건과 지폐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동전만 남은 채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시멘트 더미에 깔려 비참하게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돈을 뒤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세상에 이런 때가 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포악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을 듣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병자가 일어난 것을 보았으며 귀신이 쫓겨나고, 문둥병자가 고쳐지는 것을 현장에서 모두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어도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 팔복산까지 쫓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오늘날로 말하면 상당히 교회에 모범적인 출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신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병 고침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또한 어떤 위험이 있습니까?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광포하고 포악한 삶을 살아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악랄해지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랄한 것 아십니까? 인간의 본바탕이 그렇게 악한 것입니다. 포악하며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들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 성품을 본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다른 하나는 자기가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쉽게 표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내가 또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가 함께 가야만 우리의 삶과 성품이 바뀌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과 성품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어떻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끔찍한 맹수를 몇 마리씩 키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법이나 양심이나 혹은 신앙생활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은 그것은 마치 그 맹수를 단단한 우리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우리에 단단히 가두는 것과 같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예화) 동물원에 가면 우리에 갇혀 사자가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 사자를 우습게 여겨 과자도 던져주곤 합니다. 그런데 어린이 동물원에 웅덩이를 파고 사자를 넣어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에 그것도 아이가 아닌 어른이 올라가서 놀다 안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일대일이 된 것입니다. 사자가 팔을 뜯어먹었습니다. 10년쯤 전에 일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누워 졸고 있을 때는 우스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자 맹수로 변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은혜를 받으면 악하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싶은 마음 있지만 그것이 우리 안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무너지면 우리 안의 짐승은 길길이 뛰어 다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방배동에 호랑이가 일곱 마리쯤 뛰어다니고 있다고 합시다.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라.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도 우리가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랍도록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경험할 때 공통적으로 ‘그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오고 주님의 사랑이 경험되어지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서는 아무 희망이 없으며, 우리는 정말 쓸모없는 죄인이고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님이 살라고 하시는 삶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악하게 살아왔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주님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나쁘게 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잘못된 길로 가고 목자의 길이 싫어 방탕한 길로 갔는데도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서 불순종한 죄를 보시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찢기고 비참하게 된 모습 자체를 보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주님이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데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구나.’ 그렇게 주님의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를 깊이 체험할 때 바로 그때에는 우리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이 나 같은 사람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처럼 나도 또한 많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픈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용납해 주시는 것처럼 나를 용납해주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체험하는 것과 주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밀접한 관계보다는 핵심적인 원리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자비를 많이 경험하면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운 성품을 경험하고 나면 담대한 마음이 생겨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의로운 삶을 살아갈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는지, 그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한없이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그 사람을 보면 사랑할 수 없고 실망스럽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쓸데없는 사람을 이렇게 불쌍히 여겨서 나를 사랑해 주셨다.’ 그러니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쓸데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도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해주셨는데 나도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고픈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과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랑에 감동되어 하는 선한 일은 선한 일을 행하면 행할수록 그런 선을 행하는 우리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쓸데없는 사람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나같이 가치 없는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새인들은 그와 반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점점 더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르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세리와 창기와 같이 잘못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미움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들을 더욱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느냐 내 사랑으로 사랑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은 인생을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열심히 반듯하게 살도록 애썼는데 그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한 그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감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애를 써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못사는 사람을 보면 ‘너도 인간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마음 아프셨던 마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원수들이 와서 그들을 방탕한 길로 걸어가게 했다고 할지라도 악한 세력의 손을 잡았기 때문에 걸어간 것이지 혼자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통당하는데 자신들도 책임이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은 지금 누구 책임인가가 마음에 떠오른 것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피투성이가 되고 목자 잃은 양같이 이리저리 유리하며 굶주리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보시면서 주님이 너무나 마음 아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그러한 사랑을 모르는 죄인들이 ‘소망이 없구나. 인간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양식은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물과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일용할 양식으로 살지 모르지만 우리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 우리에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항상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모두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실패하곤 합니다. 실패하고 범죄 하거나 우리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불행한 웅덩이에 빠지고 나면은 몸부림을 쳐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의 불행을 스스로 해결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도와달라고 빕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마음을 아파하면서 자신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몸부림치며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상당한 이유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처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고,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마음에는 평안이 없으며 삶에는 풍랑의 연속임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는 우리를 먼저 훈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 받는 원인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주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주시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내 자신이 너무 싫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에 힘입으면서 또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실패했지만 앞으로는 더 나은 삶으로 주님을 기쁘시고 하고 이전에는 불행했지만 앞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소원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실패하면 또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입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긍휼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딱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한번 기회를 주셔도 우리의 실패는 한번이 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 없는 죄인의 양식이 무엇인가 하면은 물과 떡이 아닌 하나님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이 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족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용서와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구하면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걸어 다니다가 넘어져서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자기 집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에 누구도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부모만큼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을 간직하시고 이 세상에서 찢기고 다친 사람들이 자기 집에 와서 긍휼과 은혜를 입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만, 그리고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시시 때때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셔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긍휼을 경험하게 하셔서 실패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은 우리 생활에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곁에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을 가끔 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람이 격려하고 북돋워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끝까지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기 힘들고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더 큰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사람이 격려하고 위로해 주는 것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자기 열등감에서 해방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경험하면 그는 그런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만이 열등감을 느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사람들도 열등감을 느낍니다. 얼굴이 못생긴 사람들만 열등감을 느끼는 줄 알았는데 잘생긴 사람도 열등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마음의 부조화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커다란 원인이 망가진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에 죄가 가미됩니다. 그것이 죄와 연결되어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을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으면 그런 것들이 고쳐집니다.
화장품을 영어로 코스메틱(Cosmetic)이라고 합니다. 희랍어의 코스모스(Cosmos)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코스모스란 우주, 또는 질서를 말합니다. 화장품은 말하자면 얼굴의 질서와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장을 많이 하고 다니는 것은 질서를 많은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물론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밀려오고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불쌍히 여겨주시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인가를 깨닫게 될 때에는 마음의 질서가 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때는 얼굴이 심히 어둡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망가졌던 마음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 후에 열등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고 나서 열등감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이젠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만물을 지으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잘났다고 교만하져서 사람들 사이에 가면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자랑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욕합니다. 그러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니 주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자기같이 쓸데없는 자를 위해 겸손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과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한없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다가 주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비참하게 겸손하게 낮아지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교만하게 살아온 날들이 더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생각이 바뀌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마음들이 다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도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긍휼히 여기려고 애를 쓰고 악하고 포악한 성품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매일 매일 힘써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고 정말로 희망 없는 이 인간을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구나. 그리고 주님이 나를 그렇게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았으면 내가 얼마나 비참해졌을까?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주님의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위에서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제일먼저 그 사람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도 예전에 저 사람과 같았지. 나 자신도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나도 이만큼 하나님을 믿으며 올바른 길로 걸어가게 된 것은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불쌍히, 그리고 긍휼히 여겨주는 마음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이 되기는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받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생활이 아니면 이런 긍휼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당에 나와 가장 힘써야 할 일은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성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한 두 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경험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게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게 해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형편없는 인생이 정말 놀랍게 변화되어 주님의 그 모습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기실 때에는 반드시 사람들을 통해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해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여러분 처음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회개하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청년시절에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정말 작은 교회였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누덕누덕 기운 방석 이삼십 개와 소리를 펑펑 내며 불똥 튀며 타는 톱밥난로 하나, 그리고 다 부서진 풍금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고 앉아 예배를 드릴 때 삐걱거리며 흘러나오는 풍금소리가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그날 처음 교회로 돌아갔을 때의 느낌은 오랫동안 고달픈 여행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씻고 깨끗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것과 같은 마음,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마음. 무엇이 그것을 느끼게 해주었을 까요? 그곳에 화려한 건물이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평안한 마음을 준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아왔는데도 주님은 거기 계셔서 저는 떠났지만 저를 기다리시고 제가 돌아갔을 때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간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바로 이 말씀이 우리게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까? 아무리 돌멩이와 같고 강철과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 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여러분이 죄와 고집과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불행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여러분을 감싸시면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심히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실 때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위대한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정복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시되 창이나 칼이나 협박이나 공포를 가지고 우리를 정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어떻게 하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려서 좋으신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인지 깊이 깨달은 사람, 그래서 주님의 긍휼을 많이 입은 사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비바람이 불고 풍랑이 심히 부는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는 작은 배를 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 씩씩하게 인생을 혼자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혼자 인생을 살고 가슴에 남은 것이라곤 미음과 원망과 한 맺힌 슬픔과 마음의 병밖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 우리를 인도해줄 목자가 필요하고 우리가 고통 받고 아플 때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우리의 영혼의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토대로 악한 우리의 성품을 누르면서 이웃과 사랑하는 지체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그런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을 더 많이 경험케 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풍파 많은 세상을 신앙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는 복이 잇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시는 이 복은 여덟 개의 복중에 가장 최고의 복에 속합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뵈옵는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시는 이 복은 모든 복 가운데 최고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주님의 관심이 이 세상에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의 관심과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주위를 마음으로 환기시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마음이 무엇입니까? 이 마음은 지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은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또 그러면 이 마음은 우리의 의지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성경으로 볼 때 이 마음은 우리의 인격의 중심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행동과 그리고 우리의 의지 그리고 우리의 정서를 움직이는 심장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음으로 찾습니다. 죄를 지을 때도 마음으로 먼저 죄를 짓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도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지 혹은 하나님이든지 혹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한 사람의 마음 전체를 지배하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지배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매우 많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돌아오도록 명령하실 때 “너희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 너희는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마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겉모습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주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인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그럴듯하게 교회에 다니는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우리의 마음도 그러하려니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모르는 사람가운에 한 사람이 그 마음의 주인인 우리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처럼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갖는 것을 제외하고는 영적인 뛰어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교회 생활과 습관을 따라 다니고 있는 교회 출석,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다듬어져가고 있는 우리의 외적인 도덕생활, 이런 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변화도 없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새로워지는 갱신도 없는 사람이 단지 종교적이 가르침과 교육을 통해서 얌전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을 가리켜서 설교자 토마스 왓슨은 말하기를 ‘길들여진 마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이 반영된 신앙생활인가에 대해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물론 우리는 오랫동안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 기독교적인 예의가 우리 몸에 베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나와서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우리가 그런 가르침을 많이 받으면 진정한 영혼의 변화, 마음의 새로워짐 없이도 소문난 죄악을 저지르고 끔찍하게도 신문에 발표되는 그런 불행한 일들은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청아한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팔복산까지 좇아와서 산 위에 좌정 하시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히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통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농토와 부모를 버리고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헌신적인 추종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배와 그물을 다 버린 자들은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나를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바친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그가 교회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고 어떤 신앙의 경력을 가졌든지 나이 많은 사람이건 어린 사람이건 그런 것은 관계없이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못 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이런 형식과 사람의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의 영역에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거름 냄새가 가득한 밭을 일구면서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사람은 거룩한 성전에 무릎을 꿇어도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잊혀진 신앙의 관심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주님과 만나지 못하는 우리의 갑갑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얼마나 그럴듯하게 핑계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쁘고 고달픈 생활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힘겨운 고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경을 다른 곳에 쓰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오랫동안 기도할 만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뵈옵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를 찾으면서 하나님과의 대면함이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불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정결함이 없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자기의 성품을 보이시고 자기의 뜻을 알리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지위나 명예 그가 누리는 부, 심지어 그가 행하는 신앙의 열심이나 헌신과 관계없이 그의 마음의 정결함을 보시고 그에게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만나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습니까? 외면적으로 비난받을 것이 없는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우리들이 만족하고 있지는 안습니까?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씻을 기회를 찾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랄까요? 모세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 뱀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처럼 아마 우리의 그럴듯한 신앙생활 속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마음의 더러움이 우리 눈앞에 그대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아마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경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도원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청결해야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그들의 영혼 속에 비친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정결케 하는 비결이 속세를 떠나는 것이라고 할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주님을 잘 뵈옵기 위해서 속된 도시를 떠났고 인생을 정리하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속세로부터 멀어진 숲 속에, 높은 산에 수도원은 위치했고 그들은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결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환경이 우리를 정결하게 해준다고 할 것 같으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부패한 세상 때문에 범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완전한 세상이었고 아직 죄가 들어오지 않은 깨끗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피조 세계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범죄했습니다. 인류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결코 누릴 수 없는 완전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시조였는데 그들이 바로 그 환경에서 범죄 했던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굶주림이라는 환경이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께 짓밟혀서 한 맺힌 환경 속에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이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 죄악 된 욕망들이 솟아 올라왔고 그것이 그들을 더럽혔고 범죄 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더러운 죄의 샘들이 솟아나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육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패하고 더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육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학교를 다녔던 인생의 선배들에 비하면 오늘날 학생들이 학교 다니는 것은 호강하면서 다니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 심지어 책상이 부족해서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엉덩이를 하늘로 올리고 필기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방이 없어서 보자기에 책 몇 권과 도시락을 말아서 허리에 둘러메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다니던 학생도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은 가방에서 꺼내고 반찬은 주머니에서 꺼내는 아이들도 몇 있었습니다. 신문지에 꼬기 꼬기 싸온 소금이었습니다. 한 반에 백 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는데 아마 선생님이 그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 다시 기억하기 싫은 세월입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모든 환경이 더 좋아 졌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무리 인간들이 몸부림치고 애를 써도 결국은 그렇게 부패하고 더러운 세상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안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고치고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정결하게 되면 더러운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은 하늘을 누리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교육으로 결코 정결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 살피면서 우리의 마음의 더러움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목욕을 하고 회개의 눈물로 목욕을 하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고 그분의 임재를 누리면서 사는 빛 안에서 사는 하나님 자녀의 삶이 어떻게 복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청결함이 그렇게 귀하다면 우리도 그렇게 청결하게 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해야 그런 청결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청결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청결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된 공백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논리적으로나 성립할 수 있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종교들 가운데는 깊은 묵상과 침잠을 통해서 끊임없는 자신의 노력으로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고 하는 종교들이 우리 주위에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의 정결함이란 공백상태에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씻겨지는 것, 그것이 마음의 정결한 상태는 아닙니다. 마음의 정결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한 번 마음의 정결함을 잃은 우리가 어떻게 정결해 졌는지를 회상해 보면 아주 쉽게 이해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하고 우리의 마음이 세상 사랑으로 얼룩지고 더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었고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렇게 감격해 하던 말씀에 의한 감화의 세계도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이 즐겁지 않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의 기업들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지 않을지 모를 정도로 불결하고 더러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런 더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신령한 기쁨이 없고 신령한 기쁨이 없기 때문에 더 더욱 세속적인 데서 그 즐거움을 맛보려고 하는 부패한 습성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죄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누리는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많이 범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은 더더욱 불결해지고 그래서 이제는 희미하게라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런 소망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정결하게 됐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두 말할 필요 없이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그가 한 것이냐? 하나님이 한 것이냐?” 같은 그런 말장난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회개는 하나님께서 그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의 결을 따라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장작을 패는 사람이 나무를 가로로 눕혀 놓고 통나무를 도끼질하는 법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회개하도록 준비된 마음에 역사 하셔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정결해지기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정결하지 못한 마음일 때 경험하게 되는 고통과 손해를 기억하고 정결한 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때 누리게 되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둘 사이를 비교하면서 마음에서부터 정결하게 되고 싶다는 소원이 제일 먼저 생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정결하게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어느 한 순간에 마음에 정결함을 잃어버린 채, 죄 가운데 살면서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의 빛, 말씀의 거룩한 기쁨들을 그리워하면서 참회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강력하게 회개하게 하십니다.
회개를 하고 나면 우리의 죄가 더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이전에 그렇게 친숙했던 우리의 더러운 행동과 마음들이 불결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그것을 버리게 되는데 그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공백의 상태에서 더러운 것들만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더러운 것들을 몰아낼 때 함께 몰아내는 것만큼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차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결함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서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상태가 정결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순결은 빈 마음이 아니라 꽉 찬 마음입니다. 주님 한 분에 대한 사랑이 너무 가득 찬 나머지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상태, 이것이 순결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이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과 그저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기 때문에 정결한 사람들과의 차이는 사랑의 감격입니다. 마음에는 변화가 없고 바리새인과 같이 그렇게 자기의 살아가는 생활만 도덕적인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보겠다고 선언하시는 이 방식대로 청결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결할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도덕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주 우리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차가운 도덕주의자나 경박한 윤리주의자가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이나 도덕적인 삶에 대한 보상이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동기이지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때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거룩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나 도덕적인 삶에 대한 보상이 동기가 되어서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열심히 깨끗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빠집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이 그들의 깨끗한 삶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더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끗한데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캄캄한 영혼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알고 주님의 그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기 때문에 그래서 정결해진 사람들은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이나 도덕적인 삶에 대한 보상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결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했고 주님을 대면하면서 체험하게 된 주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들이 주님을 닮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고 그래서 주님의 삶을 흉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홀로 흉내 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도덕적인 삶을 살면 살수록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살아 계신 성령이 마음에 오셔서 그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정결함을 가지고 시름하는 진실한 신자에게는 교만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복음의 빛을 비춰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행동에 어울리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까 아니면 다행스러울 때가 많습니까? 우리는 그런 존재들에 불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지키고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하고 그런 마음의 정결함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해가 되는 삶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더러운 행동들이 나오고 더러운 행동과 더러운 삶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순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 즉 더러운 탐욕과 육체의 더러운 욕망들을 날마다 죽이는 죄 죽임의 실천 없이는 우리의 마음이 정결함을 유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죄는 우리가 죽이면 죽임을 당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아니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죽일 수도 없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죽이게 하시는 이도 성령님이시고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은 우리의 수도자적인 실천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정결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홀로 하시면 될 텐데 왜 우리에게 우리가 죽일 수도 없는 죄를 죽이는 삶을 실천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죄를 죽이시는 주체이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이시지만 성령님은 홀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정결한 마음이 되기를 사모하면서 순종하고 죄와 더불어서 싸우는 사람들이 순종한 것만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령이 너희의 마음의 죄를 죽일 터이니 너희는 가만히 기다리고 보라고 말씀하지 않고 성령과 하나 되어서 이 땅에 있는 더러운 지체들을 죽이고 거룩한 하늘의 성품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청결한 자는”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청결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청결함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찬 상태이고 청결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들이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회개와 이 세상에 더러운 욕망들을 죽이는 죄 죽임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정결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우리 마음의 더러움에 대해서 성령님께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대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진짜로 싸울 때 성령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이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청결한 마음을 위해서 실제로 여러분이 순종하고 노력할 때 성령께서는 즉시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마음의 정결함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성령님도 잠시 쉬시면서 여러분이 순종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신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도 끝이 없고 죄에 져서 한없이 더러운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자신의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워서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는 삶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자신의 마음의 더러움을 인해서 고민하는 대신 그 마음의 더러움 때문에 맛보지 못하는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버리고 범죄하고 부패한 삶을 살면서 이 세상에 기쁨을 맛보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는 죽기를 작정한 사람의 행동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세상의 많은 지위나 높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 주님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 거기에 주님이 오셔서 주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거기서 뵈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의 청결함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 안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흠 없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대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복된 것은 바로 청결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을 늘 뵈옵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부패하고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참회하는 눈물로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의 더러운 상태를 뉘우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마음 되기를 사모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성령을 통해 도우심으로 끔찍한 죄인을 정결케 하셔서 다시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겨울철 밭에서 쥐불놀이를 할 때 인분 구덩이에 빠진 아이를 본 엄마가 먼저 아이를 씻긴 이야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러움으로 덮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죄 때문에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기도는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 사랑해. 그러나 씻고 이야기하자.”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깨끗이 씻고 나면 하나님의 큰사랑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도저히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강물처럼 밀려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못 느낀다고 해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 살던 그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만 우리의 인생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자식이 그 사랑을 의심하고 다른 길로 가면 문제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하고 똑 같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즉각적으로 우리는 출애굽기가 생각납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서 “나 여호와를 보고는 살아남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교차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없는 것입니까? 볼 수 있다면 없다고 선언한 명백한 출애굽기에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볼 수 없다면 오늘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이 선언은 또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이 모두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자이시며 인격적인 절대자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적합한 설명입니다. 그분은 영이십니다. 영적 존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가끔 보았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한 매개체를 사람들이 본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본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뵈었다고 한 것도 하나님께서 매개체로 사용하신 그것을 본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본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영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생각은 우리 동양인의 심성과 매우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는 흔히 “네가 그렇게 있으니 속이 다 보인다.” 이 이야기는 입을 벌리고 망원경을 넣어서 내장을 들여다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양심이 실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양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부학적으로 어디서 양심을 찾을 수 있습니까? 사랑을 볼 수 있습니까? 사랑을 만질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실제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자이시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때로는 우리 마음으로 만지는 것이 우리 육신의 감촉으로 만진 것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분이지만 지금 말씀을 전하면서 저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이 제 안에 계신 것과 예배하는 우리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질 수 없고 우리의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 그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현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주님을 느낄 수 있다는 진리를 증거하는 시간에 제 곁에 계시고 제 안에 계시고 제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느껴질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주님의 그 큰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체험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죄의 영향을 많이 받고 부패하고 더러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이 수시로 위협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더 잘 뵈올 수 있는 기회들을 더 많이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찬양)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구름 같은 이세상의 인생살이가 잠시 지나고 죄와 슬픔에 의해서 수시로 가려졌던 우리의 마음의 눈이 정결하게 되고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오물들이 없는 나라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수시로 느끼고 수시로 경험하고 그러면서도 희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때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며 그때에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가졌던 교제가 우리에게 가져왔던 즐거움과 기쁨을 능가하는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들이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기 전에는 주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님을 보고 나니까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교회도 안 다니고 살 수 있는가?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영혼의 정직한 갈망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헐떡이며 갈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명예나 권세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간절히 사모하고 흐느끼듯이 목메어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을 뵈옵는 것이 우리 영혼의 소망이고 거룩하고 그윽한 눈 빛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혼의 간절한 갈망인 것입니다. 한 번 뵈옵는 그분의 자비로운 얼굴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과 낙담 속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신령한 힘이 되고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한마디의 따뜻한 음성은 우리로 하여금 낙심과 실패 속에서 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때에도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주님의 친밀한 임재하심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여기 계시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성품이 마치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주님의 심장의 박동이 전해오는 것과 같이 주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가 있습니다. 그 행복을 무엇과 바꿀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로서는 주님의 그런 사랑과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영혼의 특권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늘 그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청결하지 않기 때문이지 늘 청결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산다면 그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느끼면서 수시로 그분을 뵈옵는 은혜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 올 때 얼굴이 찬란하게 빛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를 보면 그렇게 정결한 마음의 상태에서 거의 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았던 소수의 사람들을 우리는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에 살아있었지만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았고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사자와 같이 거룩하고 용맹스럽게 살았습니다. 세례요한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끊어질 것 같이 만나고 만났다가 끊어지는 주님을 뵈옵는 우리의 신앙의 경험에서도 이처럼 행복을 느끼거늘 하물며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을 맞대고 보는 미래의 행복은 얼마나 크고 놀라울까요? 그러나 이 큰 행복을 하나님께서 미리 맛볼 수 있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오랜 동안 죄 가운에 살고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워져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는 마음이 너무 어두워졌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여러분을 당신 앞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회기의 눈물로 정결케 되고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할 때 성령님은 여러분 마음속에 오셔서 역사하심으로 여러분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셔서 순결한 사람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정결한 마음속에서 주님은 다시 여러분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인격적인 교제를 갖게 하심으로 지고의 행복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축복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7. 화평케 하는 자의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또 다른 사람들은 싫어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렬히 찾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나이가 많이 든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연령과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사모하는바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소원하고 자신도 평화 속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그렇게 사모하고 원하는 평화가 손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찾아오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일곱 번째 복이 여섯 번째 복 다음에 온 것을 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여”라고 말씀하신 후에 비로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얼핏 보면 쓸데없는 질문 같지만 이 질문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마음이 청결한 자를 말씀하신 것은 마음이 청결한 가운데 하나님을 뵈옵는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화평을 이루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 아름다운 본문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는 화평이란 무엇인가, 누가 화평케 하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화평케 하는 사람의 복이 무엇인가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팔복 가운데 오늘 이 일곱 번째 복만큼 오해되는 복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미 평화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 우리 속에 이미 너무나 오랫동안 이 평화와 화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 화평은 이전에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배운 평화와는 거리가 먼 화평임을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평화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얻어 보려고 애쓰고 힘쓰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한 이유로 이십세기만큼 평화를 위해서 인류가 헌신적으로 노력한 시기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가공할 무기의 발달은 한 번의 전쟁으로 수십 년 동안 일구어 놓은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간의 생존자체가 지구상에서 불가능해질 정도의 무기로까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공포가 깃들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들은 전쟁만은 막아야 된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라와 나라 간에 협약을 맺고, 많은 나라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전쟁이 없는 세상을 가꾸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전쟁을 막기 위한 군대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류는 그렇게 헌신적으로 평화를 노력한 바로 금세기에 두 번에 끔찍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전쟁 속에서 죽어가고 다쳤습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죽어가고 아름다운 삶에 터전들이 황폐하게 되어 가는 비참한 전쟁의 결과를 보았음에도 다시 한 번 그런 끔찍한 전쟁을 겪었으니 그것이 2차 대전입니다. 2차 대전 중에 죽은 수많은 사람가운데 소련 군인만 이천만 명 이었다고 한다니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독일 국민 가운데 세 사람 중에 한 명이 죽었습니다. 다른 나라는 어느 정도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전쟁에 동원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무기에 살상되어 가는 비참한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지구 이곳저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전쟁의 소문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평화를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이렇게 분쟁과 다툼은 끝이 없고 어디서도 평화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너무 확대해서 나라와 나라만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만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는 점점 살기 좋아지고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이 물질적인 여유에 넘치는 것 같은데 그 만큼 행복해졌느냐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기 위해서 자라나는 세대를 잘 가르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점점 더 강포한 세대가 태어납니다. 그런가하면 사람과 사람사이에 신임은 깨어지고, 사람들은 열렬히 평화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 평화가 유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강퍅해지고 포악해져갑니다. 지금도 11시나 12시다 되어서 교회에서 자매들이 혼자, 전철도 끊어져서 택시타고 간다고 그러면서 골목길로라도 걸어간다고 나가는걸 보면 마음이 불안해서 놓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이 삼 십 년 전만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보이는 이 악한 것들, 평화가 깨어진 사회의 더러운 모습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는 부분적이었고 은밀하게 진행되던 것들 이었는데 이제는 백주에 행해지고 아주 노골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강포해져서 이제는 자기의 작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삼십 년 전에는 차가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싸울 일도 없었겠지만 차를 대다가 차를 못 대게 한다고 때려 죽이고 공중전화를 걸러 갔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오래 거니까 왜 오래 거냐고 때려죽이고 옆에서는 빨리 끊으라고 그러니까 내가 길게 하는데 왜 네가 끊으라고 그러냐고 때려죽이고, 이런 일들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예외적이고 아주 희귀한 사건이 아니라 늘 반복되는 그런 일들, 이제는 이런 평화가 깨어진 상황 그 자체를 우리들이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못 느끼지만 평화로운 사회 속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은 얼마나 커다란 충격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은 이미 성경에 예고된 바입니다. 마지막대가 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짐승과 같아지고, 물질문명은 발달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해져서 이렇게 참지 못하고 평화를 잃어버린 이런 삶들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 예고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점점 참된 평화는 소설이나 혹은 상상 속에서나 나오는 것들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평화를 잃어버린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모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라고 하는 것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평화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욕망이 충돌하고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나라와 나라의 욕망이 충돌하고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어디서 우리들이 평화를 찾아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열렬히 평화를 원하지만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헐떡거리듯이 평화를 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헐떡거리는 또 다른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꺼이 평화를 깨트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적인 모습입니다. 한편으로는 헐떡거리며 평화를 찾고 또 한편으로는 헐떡거리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평화를 허물어야 하는 이 비극적인 존재가 인간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화평’이라는 단어는 결코 하나님 없이 인간 사이에서 노력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종류의 화평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완성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르쳐서 평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평화입니다.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는”이라고 하는 부분, 희랍어 성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 무엇 하는 자는”이라는 말이 “만드는 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에이레네를 만드는 자는”, 그런데 ‘에이레네’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히브리어에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샬롬을 만드는 자는”, “샬롬을 빚어내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성경 본문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 인간이 샬롬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가?’ 물론 타락한 인간, 하나님과 샬롬이 깨어졌던 인간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창조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러한 샬롬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얍복 강가에서 원수를 맺었던 야곱과 에서가 목을 어긋 맞대어 끌어안으며 통곡하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화평입니다. 두 사람이 끌어안고 서로 뜨겁게 포옹하며 펑펑 울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이제 내 아우를 죽도록 미워했었는데 ‘이제는 복수하지 말자.’ 에서가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두 사람이 얍복 강에서 끌어안고 함께 얼싸 안았을 때 그들의 마음에는 서로를 헤치고 싶은 적대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진정한 사랑이 두 사람 사이의 마음에 가득 찼던 것입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에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화평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늘 당부합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열렬히 사랑해도 두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결혼이 깨트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은 인류 최초이면서도 최고의 사랑의 고백을 남겼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 나의 분신이여.”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대가 아프면 그것이 곧 내가 아픈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보다 더 진한 사랑의 고백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잠시 후 아담의 마음속에는 하와를 향한 원망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 때의 일 이었습니다. 이제 아담에게는 더 이상 하와가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 아니라 혹 중의 혹이요. 살은 살인데 자신에게는 암 덩어리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시게 한 그 여자가 내게 주므로 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사이에 무슨 불화와 분쟁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손잡고 선악과로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다정한 부부가 있겠습니까? 선악과를 따고 하와가 한입 먹고 그리고 남편에게 주었을 때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답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랬는데 두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하나님과의 화목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에 더더욱 인간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샘솟는 욕망에 더 충실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종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 속에 있는 죄의 소원을 만족시켜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자기의 욕망을 다 드러내고 함께 다툰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디에도 평화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이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가 바로 그런 종류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평화인 것입니다.
(예화) 돈 많은 집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유산 상속의 이야기-세 아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었는데 미처 나누지 못한 유산 문제로 세 아들의 다툼이 있는데 둘째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러면서 은혜를 받아 유산에 대한 욕망을 버리게 되어 형과 아우에게 자신의 변화된 생각을 전하면서 자신은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형과 아우도 좋은 생각으로 결정하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거기서 형제들이 큰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욕망을 따라 살면 미친 듯이 질주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인생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은혜도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집안이 그 사람 하나가 변해서 그런 싸움이 종식되고 변화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평화로운 것은 없습니다.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평화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향해 끊임없이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저 정도 밖에 안 될까?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아버지를 향한 원망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교육을 잘 못시켰나? 먹이기를 잘못했나? 왜 우리 애들은 저 모양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평화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망과 갈등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평화는 어떻게 성취되느냐 하면 인간이 변함으로서만 성취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이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화평을 깨트리게 만드는 자기 안에 있는 이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예화) 가난하게 살던 두 형제가 광산에 금을 캐러 간 이야기- 강 건너편에 있는 광산에 노다지가 쏟아진다는 소문을 듣고, 두 형제가 강을 건너 광산에 가서 노력한 결과 큰 덩어리의 금을 캐 갖고 오는 길에 배 안에서 서로의 마음 가운데 혼자 갖고 싶은 욕망으로 갈등을 겪으면서 형이 금 덩어리를 강 한복판에 던져 버리므로 형과 아우 속에 있는 갈등을 없애므로 예전에 사랑했던 형제간의 사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화평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이야기는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지 누가 그 강 한복판에서 그것을 집어던지겠냐는 것입니다.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내가 가서 주어 오겠습니다. 교회나 사게. 없습니다. 버린다면 교회 앞에다 버리세요. 인간이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요만큼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살점을 요만큼 떼어 놓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그의 영혼이 변화되지 않고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위한 추구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강요해서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안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부지런히 남북을 오가면 전쟁은 안 나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총 칼을 버리고 휴전선에서 내 형제, 내 아우라고 끌어안고 흐느끼면서 기뻐하는 그 일은 정치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총 칼을 땅에 묻어버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는 참된 변화가 일어나서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던 그 사랑을 깨닫고 평화를 잃어버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간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그 때에 이런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평화를 만들 수가 있는가? 우리는 그런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해서 만드실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러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 자신이 먼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떻게 평화의 사람이 됩니까?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 마음속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 우리가 비로소 그런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그곳에서 우리가 완충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쫓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지를 때 그래 “너 가져.” 이렇게 말하므로 그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행복의 가치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욕망을 성취하는 맹목적인 욕망충족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평화를 만드는 이 일은 희생이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보시며 가슴 아파 하시던 일이 무엇 이었습니까? 당신이 끔찍이 사랑하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려서 불화 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등진 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능력은 있었지만 회복할 수 있는 힘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화평한 관계를 부셔버릴 수 있는 힘은 있었지만 그렇게 부서진 관계를 다시 치료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화평케 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화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사람이 먼저 와서 무릎을 끓고 비는 것이 화해인데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불해야할 희생의 대가를 하나님께서 친히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파괴했기 때문에 인간이 지불해야 했던 그 대가였는데 하나님께서 대신 지불해주시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해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돌아가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찬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어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을 가르쳐서 화목제물로 죽으신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 제물이 희생으로 바쳐져서 죽임을 당하므로 원수 맺었던, 평화가 없었던 두 사람 사이에 화해를 만들어주어서 평화가 흐르게 해준 그 사건이 바로 화목제물 이었고 그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을 생각해보면 화평케 한 자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기의 직책이 바로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고쳐주는 그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는 반듯이 사람들 사이에 깨트려진 관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린 죄에 대해서 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벌은 이스라엘 백성들 보는 가운데서 받는 벌입니다. 심하면 백성들 가운데서 쫓아내거나 혹은 죽임을 당하므로 백성들과의 관계가 끊어져야 하는 형벌도 당해야 됐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잘못했는데 그 잘못한 결과가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서 자기를 끊어지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사람들이 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들어주는 그 일이 제사장이 하는 일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은 아주 직업적이고 못된 제사장이 아니라 은혜로 충만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제사장이었다면 이 제사장은 눈물로 매일매일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저 죄인,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다시 화평케 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살아가야 되는 저 인생, 어쩌면 좋을꼬?’ 하며 그를 위해 제사를 드려주는 그 제사장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화목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화해를 깊이 경험한 용서받은 죄인이 그렇게 하나님께 용서받은 큰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자신들의 삶에 자리로 돌아가서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툼과 분쟁으로 이런 평화가 깨트려질 때에 자기를 희생시켜서 그 사람들을 화목 시키고 하나님의 그런 평화가 그 사람들 속에도 실현될 수 있도록 희생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제사장의 일 이었고 그 제사장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이런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큰사랑을 입어서 구원받은 자녀로 만들어놓으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여기에 설 때까지 우리의 신앙의 경험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전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먹을 것, 입을 것만 있으면 짐승처럼 기분 좋게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주님을 만나고 깊이 깨달으니까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혼자도 씩씩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어느 날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하나님 저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가난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러더니 자기의 죄를 보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려서 우리를 섬기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온유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자기처럼 하나님의 이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화해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보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더 청결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찌하면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뵈옵는 사람이 될 수 있을꼬?’ 이렇게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것이 결국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해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과의 화해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주님이 그를 그렇게 준비시키면서 삶의 현장에 두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사명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많은 교육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겉모습을 어느 정도 바꾸어놓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고칠 뿐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참된 화해가 무엇인지를 알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가 변화되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고, 그들에게 주님의 그러한 화해의 초청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한 속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그들에게 깨닫게 할 때 그들이 무엇으로도 고쳐지지 않던 그들의 영혼이 고쳐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자신이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그 화평을 사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파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숙명아래 놓여있던 사람이 변화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천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도 홀로 하시지 않는 그 일을 우리와 더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이 일들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명인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한번 눈을 들어서 우리 자신의 옛 삶과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삶에 한계선상에서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인생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랑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고, 스치며 만나는 사람들이라도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살고 보면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날 목사님께서 빵을 드시려고 바게트 빵을 썰면서 좌우에 칼날이 있는 것을 모르시고 빵을 썰므로 손이 베어서 피가 흘렀다는 말씀
마치 하나님과 관계가 고쳐지지 않은 채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간절히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고 자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불행해지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마치 제 손에 들렸던 칼등에 날선 칼과 같습니다. 정말 자기는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의지가 없는데 생겨 먹기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입니다. 반드시 그 사람과 스치는 사람은 화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무엇인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해주고, 그래서 이 사람의 환경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자신을 바꾸어 놓아서 하나님 앞에 새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숨질 때까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담배를 피워보신 분들은 알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못 피우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감옥 속에서 그렇게 사람들이 그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그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닙니까? 저도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물론 담배를 많이 피는 것도 해방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필수 있도록, 옛날에 오상순 씨마냥 밥을 먹으면서도 한쪽 손에 담배를 들고 먹었다고 그랬답니다. 밥 한번 먹고, 물 한번 마시고, 담배 한번 피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담배를 딱 끊고 나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욕망에 매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가 되어서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무엇이고 우리가 그렇게 평화를 깨트리면서 까지도 얻고 싶어 하는 헐떡거리는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만족보다 우리와 그토록 십자가를 통해서 화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누리는 행복이 정말 크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체험하게 될 때, 그 행복을 알게 될 때 저절로 그런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우리 자신이 원하지 않게 우리 때문에 화평을 깨트리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고 오히려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충족하게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그 평화가 흘러나와서 사람들을 화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우리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되 몸부림치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주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우리들이 온전해지기를 포기하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작은 잘못 하나에도 가책을 받아야하고 작은 잘못 하나에도 뉘우치며 새사람 되기를 매일 다짐하며 참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를 여기에 두신 목적 데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화 합니까? 또 그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적대감이 사라진 것이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보좌를 에워쌀 때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건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없애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마치 둑이 터지고 밀려오듯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밀려오도록,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누구에게도 그렇게 쏟아 부어 본적이 없는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뜨거운 사랑이 항상 충만한 그런 관계가 되어있을 때 우리는 그 관계를 가르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평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화평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주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무서워 할 필요가 없고 그리고 고통가운데서도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이 그들에게는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동기를 점검하고 주님과의 거룩한 교제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그 평화를 알 때는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지고 나면 생기가 감돌았던 우리의 신앙의 정원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며 흐르던 시냇물이 멈추고 그리고 즐겁게 노래하던 새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마음속으로 우리의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살았던 우리의 삶에 대해서 뉘우치며 예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을 등진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열렬한 소망이기 때문에 당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녀들을 언제나 당신 곁으로 부르셔서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를 주시고, 돌이키는 자에게 화해를 허락하시고, 하나님 앞에 관계를 새롭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에게 그러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첫째는 이 세상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 세상을 화평케 해서 평화가 흐르게 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평화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그 평화가 우리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평화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를 통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많은 화평케 하는 자들과는 달리 다른 방식으로 화평케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화평케 하면서도 자신 속에 있는 욕망을 포기하는 희생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이 자기를 버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의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와 그리고 인생관을 새롭게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죽여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희생시켜서 그 희생에 포기해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 가는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알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우리가 그렇게 주님과의 화해를 가지고 사람들을 화평케 하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아, 저 사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화평케 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큰 믿음만 믿음이고, 적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까? 큰 교회만 교회고, 작은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까? 큰사랑만 사랑이고. 작은사랑은 사랑이 아닙니까? 멸치도 고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들이 온전히 변화되어서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그래서 정말 헌신적으로 주님의 그 화목케 하시는 사랑을 진짜 피 어린 눈물과 희생으로 전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것은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풀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만약 화평케 한다면 내가 너희를 매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주마.”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너무 사랑하신다는 간증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화목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만들어주는 도구로 쓰임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감격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놀라운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서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을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특별히 자신이 이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간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을 때에 바로 “여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그래서 화평케 하는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심지어는 그 화평케 하는 그 복음 때문에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마르지 아니하는 기쁨과 충만한 즐거움, 그 거룩한 환희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넘쳐나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이 세상 사는 동안에 평화의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8.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복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마 5:10)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선, 예수님의 핍박받는 자를 위한 축복의 말씀이 입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 뒤에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이고 그 하나님과의 화해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 그래서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믿는 사람,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과 샬롬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어서 애를 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바로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화를 위해서 수고를 하는 데 그 사람들은 왜 박해를 받아야할까요? 왜 화해를 원해서 애를 쓰고 수고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적개심을 심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박해하게 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캐들어가기 전에, 어떤 것이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이 아닌 것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광신 때문에 피해를 받는 것은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시끄럽게 이단의 문제가 나오고 열광적인 신도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고 그들에게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는 것이야말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광신으로 인해서 박해를 받는 것은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도 아닌 어떤 신앙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데서 오는 세상과의 어떠한 충돌도 의를 위한 박해가 아닙니다.
(예화)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에서 여름에 문을 열어 놓고 열렬히 통성기도하고 찬양하며 구역예배 드리자, 동네에서 항의가 들어오고 경찰이 쫓아올 때, 사람들은 예수 믿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힘든 것은 아파트 주민들이 아니겠는가?
(예화) 오래 전에 교회마다 차임벨을 울리는 유행이 있었는데 여러 교회에서 불협화음으로 울리자, 시민들이 항의를 하고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시켜서 교계는 발칵 뒤집히고 서명운동까지 했었는데 그런 것은 박해가 아님.
싫다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 먼저 배워야 될 것은 예의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여러분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예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나 폐를 끼치고 않고 교회 생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기의 광신이나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무례한 행동 때문에 당하게 되는 박해는 그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의를 위한 박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통성으로 부르짖고 원래 우리 구역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싶지만 나보다 이웃을 생각해서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신앙화해서 그냥 밀어붙이듯이, 대결하려는 듯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박해를 의를 위한 박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인격의 허물로, 인격이 모자라서 우리가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승화시키거나 미화시켜 박해를 당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간음죄를 지은 모든 사람이 다윗이 되겠으며 옥에 갇힌 모든 사람이 바울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실지로 교회 안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예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할 때 여우 우는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아주 기분 나쁜 소리였습니다. 새벽시간보다 밤에 그 소리를 들으면 정말 소름끼칩니다. 자꾸만 사람들의 원성이 들려 그러지 말라는 권면을 하자, 기도 안 되면 책임지겠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전도사님에게 핍박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사단이 보낸 사람이다. 내가 기도가 잘되는데 시기한 사단이 전도사를 통해서 나를 누르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이기는 길은 굴하지 않고 더 적극적인 신앙으로 대항하며 물리쳐야한다.’라고 분명히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 헛된 망상입니다. 그런 것은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에서 나온 것입니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열심 있는 신자들 가운데는 항상 이런 경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광신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거나 박해를 받으면서, 그것이 마치 자기가 고난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들어 왔을 때, 기도 시간에 온 교인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방언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방언기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항상 양보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들이고,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은 양보해선 안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뒤틀림은 사소한 것들을 위해선 목숨을 걸고, 본질적인 것들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는 불균형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 제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공경함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자신을 돌아보면 고칠 수 있고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을 대결국면으로 치달아 가는 것이, 마치 신앙적인 영웅주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그랬습니다. 종을 치지 말라고 하면 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지금은 종치는 곳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 때는 신문에 나고 서면운동을 하고 드디어 붉은 영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정권과 일전을 벌여야 된다는 식으로 했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미국만 가도 이층교회나 지하 교회는 말도 붙이지 못합니다. 교회 하나 서려면 동네 주민 전부 모여 놓고 공청회를 해서 통과되어야 합니다. 우리처럼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도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을 때에 상급이 있는 것이지, 부도덕하고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못하고 눈치가 없어서 이 세상에서 쓸데없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어서 박해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위해서 박해받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을 종교적으로 포장해서 당하는 고난도 의를 위해서 받는 박해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정말 피나는 민주화 투쟁기를 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다 투옥이 됐고 심지어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메고 거리에 뛰어나오기도 했고 그런 사람들이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광경도 목격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야말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개인적인 신념이나 확신, 정치적인 견해, 이런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을 가리켜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것이 잘못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도 잘한 것이고 일제 시대에 탄압에 항거한 것도 잘한 것이며 나치 치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치와 더불어 싸운 것도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고유한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상이나 주의, 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떤 인본적인 확신, 그런 것들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위 말하는 인간의 사상과 정치적인 견해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갖게 된 신앙적인 신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면, 사람들이 흔히 목숨을 거는 사상이나 정치적인 견해라 하는 것도 얼마나 가변적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나라가 한참 시끄러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군인을 월남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군인들이 월남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에 수많은 노래를 만들어서 초등학교에 보급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가는 것은 인류의 부름이며 세계평화의 사도로서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 뒤에 이미 정치적인 흥정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이제까지 만들어 놓은 정치 체제 가운데서 최근 들어서 공산주의보다 역사적으로 이미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훨씬 이상적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체제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남북이 통일된다 하더라도 공산화가 되는 통일은 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유 민주주의 통일이 되어서 국민에게 주권이 있고, 국민이 뜻을 모아서 원하는 정권을 세우고 지도자를 뽑아서 나라를 다스려 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그런 자유스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까지 도달한 결론이지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간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수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거기서 정글을 누비면서 전투를 하다가 입은 고엽제 피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병상에서 고생하고 있고, 부상을 입은 사람이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침상에 누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부상을 입고 나라에 귀국하던 때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그런 희생이 대단히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월맹에 대해서 아주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가 월맹을 가리켜서 우리의 적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상처 입은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월맹에 가서 피 묻은 그곳 사람들의 손과 악수하고 서로 끌어안고 이제 돈을 주고받고 물건을 갖다 팔고 하는 친구로, 동반자로 변하고, 과거에 있었던 일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이제 좋은 사이로 새 출발하자고 했습니다.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제는 그들이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상관없이 그렇게 교역을 하고 이웃으로 살아가는 나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경험입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로,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단적인 교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추종하기 위해서 박해를 박을 때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교회를 잠들어 있거나 혹은 이단적인 신앙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들만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해받는 것을 좋아했고 심지어는 순교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정말 받는 고난과 박해가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위한 핍박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들이 박해를 받으면서 어떤 종교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고 또 박해를 받으면서 어떤 것들을 그의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게 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그런 것들은 의를 위해 받는 박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마음속에 설교자를 향해서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자기의 주장과 견해가 없는데도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수가 있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의 생애가 잘 증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계층의 편에 서고 싶어 하셨습니까?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을 원하셨습니까? 환경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불행하게도 예수님이 어떤 견해를 가지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분의 생애는 그런 견해를 위해서 일하신 생애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이 시대에 오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여당, 야당 중 어느 편이 되시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생을 민주화 투쟁으로 살아온 대통령을 지지하시겠습니까? 대쪽판사로 일생을 살아온 야당총재를 지지하시겠습니까? 공산 사상을 지지하시겠습니까? 민주사상을 지지하시겠습니까? 또한 이 어려운 시대에 국제 경쟁에서 상아 남기 위해서 노심초사하고 노사문제와 이런 것들에 휘말려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재벌총수들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붉은 깃발을 흔드시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노숙자들의 편이십니까 아파트 주민들의 편이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더라도 아마 예수님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실 것입니다. 그분은 야당편도 아니고 여당 편도 아니며 공산주의 사상의 신봉자일 수도 없고 플로레탈리아의 편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본가나 중산층만 지지하고 상대할 수 있는 분이실 수도 없습니다. 미국을 우리의 우방으로 보느냐 약탈자로 보느냐에 대해서 예수님이 명확한 의견제시를 하실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지도자 앞에 가서 비난을 퍼붓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자들의 편이셨던 것만도 아니고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관심은 이 세상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인가를 하셨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사회계층 어떤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쳤습니까?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당해야 했던 것들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선동가이셨습니까? 팔복산에 수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오늘 설교하시는 것이 로마정부가 싫어하는 설교였습니까?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때려 부수자 로마제국”하며 주먹을 불끈 쥘만한 선동적인 내용이 여기에 들어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주린 자들을 먹이시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계층 사람들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켰습니까? 죽은 자를 살려서 불쌍한 과부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정권에 도전하셨습니까? 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까? 빌라도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예수님이 빌라도 정권에 대해서 위협이 되는 어떤 선동적인 일들을 하셨습니까? 민중들을 규합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셨습니까? 수수께끼입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했는지 성경을 통해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민란을 일으키고 자기의 동족을 수없이 살해한 바라바는 놓아주라고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주린 자를 먹이시는 가난한 자들의 친구와 이웃이 되어주셨던, 그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저의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분 마음속에는 이렇게 답하시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어차피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에만 이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뭘 했습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하고 능력을 받은 다음에 그들이 로마를 때려 부수고 싶어 했습니까? 그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규합해서 쳐들어갔습니까? 아니면 기적적인 능력을 가지고 로마의 병사들에게 어떤 위협이 되는 어떤 일을 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한 일은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소상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어차피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지만 사도들이나 제자들은 살아서 더 많이 섬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박해를 했는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어떤 정치적인 견해나 어떤 사회적인 신념이 없었는데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아마 그분도 왜 그렇게 받는지 몰랐고 또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이 왜 그렇게 박해를 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예화) 어느 어머니가 딸이 예수를 믿는다고 무지하게 박해를 하며 표독스럽게 수없이 패고 성경책을 버립니다. 보다 못한 옆집 사는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저년이 교회에 미쳤다고함. 취미생활도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것 내버려두라는 그 사람의 말에 어쨌든 교회는 싫다고 함. 이는 그 아이가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가정에 어떤 손해를 입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싫은 것이며 그 이유는 자신도 말할 수 없음,
이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신 것은 무슨 일을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박해를 받은 것도 간단합니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변화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 세상에 나갔을 때에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가 빛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 빛이 될 때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빛으로 변해 있는 우리를 보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저 사람 좀 봐. 우리와 같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소망이 세상에 있지 않아. 우리와 같이 직장생활을 해도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그 빛으로 나타난 우리를 보면서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 우리를 통해서 자기도 빛으로 살아가도 싶은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자기들과 똑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에게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안 믿는 사람에게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렇게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덕 위를 구르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이고, 캄캄한 밤중에 들린 하나의 손전등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끝까지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며 어둠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빛을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이곳에 와서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들어와서 불 켜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은 빛 가운데서가 아닌 어둠 가운데서 행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어서 주님 닮은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 말을 안 해도, 비추임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넌 그렇게 살면 안돼.”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없이 포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인간이하야.”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돈만 움켜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모습자체를 보면서, “그래 너는 돈과 함께 망할 거야.”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겠습니까?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 여러분의 입장으로 돌아가도 이해가 되는 경우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은혜 많이 받은 사람하고 멀어지고 싶어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세상의 친구보다 당연히 은혜 많이 받은 사람과 가까워집니다. 자기는 전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순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왜 저렇게 살까? 유별나다. 꼭 저렇게 믿어야 되는가? 신앙에는 도대체 피와 땀밖에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똑같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주일날 보면 거의 다 압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에 어울리는 신자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때 감동을 받고 가슴을 저미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거나 최소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아예 그런 마음이 없고 주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는 그 일 자체에 기쁨과 흥미를 느끼는 그런 사람들은 그런 설교도 싫어하고 그런 분위기도 싫어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이 있고 눈물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눈물 흘리는 분위기에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는 늘 초상집이라고 불평합니다.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반듯하게 앉아서, 경박하고 천박한 태도가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더 깨달으려고 하는 예배의 분위기를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막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그런 예배의 분위기는 숨막히며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코미디 같은 설교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어차피 신앙을 장난처럼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논리에 의하면 이런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정말 주님을 몰랐다가 어느 날 주님이 오셔서 그 마음에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갈망을 주셨습니다. 돈과 사랑하는 가족, 유족한 생활환경, 남이 부러워하는 유족한 삶의 환경, 이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꿈결과 같은 것이고 지푸라기와 같은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어떠한 상태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혼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번영하는 인생 밑바닥에 입을 벌리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지옥의 커다란 불구덩이 같은 것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찾는 마음을 간절히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면 염려되는 것들이 없었는데 앉으나 서나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것입니다. ‘아, 주님이 나를 좋아하실까? 주님이 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서 신앙의 파산 선고 받은 사람처럼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죄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람들이 나만큼만 살라고 해.” 이러면서 떠돌아다니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자기가 부패하기 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내가 죄인 중에 정말 괴수와 같습니다.’ 하며 자기를 정결케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인생을 성질나는 대로 살았고, 그것이 마치 자기의 박력인 것처럼 생각했는데, 어느 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 있는 신성을 비천한 인성에 감추시고 그리고 섬기는 자로 오셔서 온유하게 사신 그분을 뵈오면서 깊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온유하신 모습으로 나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셨는데 그 사랑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포악하게 살아가는 자기의 이 모나고 더러운 성품을 깊이 회개하고 아파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서 정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와 자비하심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기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고 주님을 더 친밀하게 만나는 대면하는 관계가 되고 싶어서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의 불순종과 자기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이 더러운 죄들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을 갖고 그런 하나님과의 샬롬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화목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고 나면 그 자체가 세상으로서는 아주 싫어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믿기로 작정된 사람들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참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을 제외해 놓고는 우리는 아주 기분 나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 이유는 없습니다. 어쨌든 싫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유를 댈 수 없고 이유를 모르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니까 하나님 닮은 우리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뱀을 싫어하는 사람은 도마뱀도 싫어하고 방울뱀도 싫어하듯이 그들은 하나님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은데 하나님을 빼닮은 우리가 좋겠습니까? 왜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종교적이었지만 종교적인 것과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였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겨도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다는 것은 바로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서 세상과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유를 대라하면 이유는 대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유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싫기 때문에 예수님 닮은 너도 싫다는 것입니다. 손해를 입혀서라기보다 너희가 빛이니까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라고 붙이지만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는 예수님의 재판 장면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니까 죄가 있어야 되는데 증인들이 각기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도 증거가 맞지 않고 무식한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성전을 허물겠다고 한 것을 증거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한 것이며 실제 성전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들은 율법에 사형을 시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두 세 증인의 말이 딱 맞아서 일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추종자가 아니었던 빌라도조차도 이 사람을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그들의 편에서 일하려 해도 예수를 죽여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죽이라고 소리 지른 것은 자기들이 어둠 가운데 있었는데 주님이 빛으로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의 착한 행실을 뵈오면 뵈올수록 자신들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이요 사실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 예수님 때문에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폭로되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폭로되는 것을 보면서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내 모습이었습니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어떻게 살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서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은 이 20세기에 3천만 명이라는 사람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순교를 했다면 믿지 않으시겠지요? 사실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화롭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때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은 이 자유주의 국가에서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변해도 사도들이 이 로마시대에 당해야했던 그런 끔찍한 박해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죽음의 핍박 같은 것은 안 올지 모르지만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팔복의 사람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이 주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될 익은 곡식인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나가게 하심으로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태도를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적대적인 사람들인지 혹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인지를 주님께서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생애는 박해만 받으신 생애였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랑도 받으신 생애였습니다. 박해가 열렬했던 것처럼 사랑도 열렬히 받으신 적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조금 마음에 찔리긴 하지만, 그래도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 찬송을 눈물로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피나는 박해를 받으셨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셨을 때도, 예수님이 그런 뛰어난 능력과 권세를 갖고 진리 자체이셨으며 인격적으로 흠이 없는 분이셨지만,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오히려,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되심으로써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셔서 빛이 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인지, 아니면 어둠 속에 여전히 속한 사람들인지를 그 빛을 통해서 자기를 향해 보이신 그 태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미 믿을 사람이 있고 안 믿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정직하게 전해지면 헐떡거리며 그 복음의 샘물에서 퍼 마시고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그 깨끗하고 맑은 복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아주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한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를 보고 주님을 만난 것처럼 매우 기뻐합니다.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의 참 뜻을 찾았다면서 말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런 간증이 따라다닙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참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삶의 모범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당신이 아니었다면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간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미워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은 위험하다. 너만 잘났느냐? 왠지 쟤가 신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기분이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말이나 삶 자체가 자기를 정죄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빛이 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빛이 비추면 모든 세상이 빛을 사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들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왔습니다. 부끄럽긴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을 것입니다. 갖고 싶어도 예수님 때문에 갖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당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의 미천함으로 당해야 했던 핍박 빼고, 엉터리 신앙 때문에 감정주의에 빠져서 자기 착각 때문에 당한 이유 있는 핍박 빼고 다 제하고 나서, 우리들이 정말 순수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오직 우리가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당한 애매한 핍박은 얼마쯤 될까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정말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것들로 행복해지기보다는 이런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표지판과 같은 존재,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닮아 가는 성도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왜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까? 그가 뭘 잘못했습니까? 대적들이 그를 잡아넣으려 샅샅이 조사했지만 아무 흠이나 허물 혹은 실수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잡아넣었습니까? 하루 세 번 씩 하나님을 향해 기도한 것이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손해를 끼쳤습니까? 그런데 왜 잡아넣어서 그 사자굴 속에 던져 그 의로운 사람을 죽여버리려 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자기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박해받았던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박해받았던 유명한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들이 그렇게 처절한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거짓선지자들로부터 그렇게 박해를 받고 백성들과 임금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야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들은 인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 시대의 사람과 달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지 대신 적이 되었고 하나님 편에 서 있는 동안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셔서 주님의 그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신 것은, 우리를 바로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 하나의 등불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렇게 여러분을 불러서 이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우치는 이유는,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독특한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셔서, 오늘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우리의 속사람이 정말 변화를 받아서 이런 팔복의 사람들이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가책을 받아서 주님을 믿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해서 우리를 박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진정으로 제대로 된 신앙을 갖게 되면 신앙을 토대로 해서 이 세상에서 안일하게 살아보리라는 흥정 비슷한 신앙은 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사람이 가는 길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당하는 길이라면,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불행한 길이라면 우리가 왜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야 됩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많이 닮아서 주님의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다른 거룩한 존재가 될 때에, 이 세상에서 박해만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보람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게 해주시고, 우리 때문에 어둠에 사로잡혀 있던 세상 한 구석이 무너지는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건져낸 많은 영혼들이 우리 때문에 예수님의 품에 안기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박해를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받을 때 오히려 우리와 매우 특별한 상태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정말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셔서 박해를 받는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정말 친밀함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스데반으로, 그가 예루살렘의 첫 번째 순교의 재물로 바쳐졌을 때,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들이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구세주이셨다는 사실을 아주 장쾌하게 증거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그 사람의 메시지는 불같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귀를 막고 듣지 않고 이를 갈면서 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돌멩이를 들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 사람들 앞에서 스데반의 표정이 어떠하다고 했습니까? 천사와 같이 얼굴이 찬란하게 빛나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각 손에 들려진 돌멩이에 의해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지만, 그 때에도 그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되풀이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모르는 놀라운 비밀을 핍박을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에 일어나는 공통적인 감정은 두려움과 고통 대신에, 충만한 기쁨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박해받을 때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다니엘과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시대 때 복음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핍박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가족을 버리고 그리고 집안에서 파문을 당하는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예수 믿기 원한다는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화) 로마 황제가 그 보고를 듣고 “다 옥에 가두라.”고 했을 때 신하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옥에 갇히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잡아서 패라.” “그것은 더욱 안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맞으면 더 크게 기뻐하고 선택된 사람들의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그 피 묻은 몸으로 더 열렬히 복음을 전합니다.” “죽여라.” “그것은 더욱 안 됩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마지막 소원은 죽음에까지 이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하면 예수님을 만난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늘 죽음에 까지 이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폐하,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성도로 변화되고 나면 이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은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형식적으로 주일 날 덜렁거리며 나왔다가 돌아가는 깡통 같은 사람 수만 명보다 이런 진실한 신자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 앞에 나타나서 참 신앙이 무엇이고 진정으로 예수 믿는 기쁨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서 말의 가루보다 한줌의 누룩이 필요하고 잠자는 수많은 사람보다 깨어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여러분이 참된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일터에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불의에 빠진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얻게 되고, 사랑을 모른 사람들은 사랑을 알게 되며, 주님을 몰랐던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면서 주님을 알고 싶어 하는 놀라운 도전들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셔서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건져내셔서 아직 죄 많은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팔복강해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