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길가에 떨어진 씨앗Ⅰ(마13:19) 1998.1.4 주일오후 1
2. 길가에 떨어진 씨앗Ⅱ(마13:19) 1998.1.7 수요예배 16
3. 돌밭에 뿌려진 씨(마13:20-21) 1998.1.11 주일오후 31
4.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Ⅰ(마13:22) 1998.1.18 주일오후 48
5.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II(마13:23) 1998.1.25 주일오후 64
6.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마13:23) 1998.2.2 주일오후 83
1.길가에 떨어진 씨앗Ⅰ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마13:19)
마태복음의 13장은 대단한 장입니다. 여기에는 천국에 관한 비유의 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13장은 신약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할 진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언제인가 이 본분을 설교하고 싶은 소망이 저에게 있습니다. 오늘부터 수요일, 이번 주일 오후에 설교하는 것은 씨뿌리는 비유를 후일에 더 풍성한 시리즈로 열어주실 것을 기대하며 사경회 전에 여러분들이 정리된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사경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보고 보다 도약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며, 또한 그러한 기대를 사회경에 갖기를 원하는 취지로 세 번 또는 네 번에 걸쳐서 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씨뿌리는 비유는 문맥 자체가 12절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벙어리 들린 사람을 고칩니다. 그러자 그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치는 역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친 것은 귀신을 힘입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는 진실한 섬김에 대해서 반론이 생깁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에게서 참능력과 참진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갖은 문맥에서 13장에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를, 사람들은 더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제들에게는 더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있는 자는 있는 것까지 더해질 것이라는 약간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씨뿌리는 비유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10절 이하에서 나오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순이 있는 것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한가지 교훈, 또는 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제자들은 12장에서 예수님의 기적의 사건을 보고 시비를 걸던 종교지도자들보다 학식에 있어 뛰어나거나 종교적인 교육에 있어서 그들을 능가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12장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깨닫게 해주시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셔서 어떤 사람에게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비유로 말씀하셔서 잘 깨닫게 말씀해주시는 약간은 불공평한 예수님의 처사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더듬어가기 전에 결론부터 말하고 그 결론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이 있고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잎이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열매도 있는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은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 사람은 나보다 교육도 못 받았는데 저렇게 잘 깨달을까?”하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왜 그런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말씀보다 다른 생각이 훨씬 더 많이 들고 말씀의 줄거리는 생각이 나지 않고 예화로 들었던 웃음거리만 생각나는데 그것도 왜 그런 예화가 나왔는지는 모르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교역을 시작할 때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식, 학식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시간이 흘러가면서부터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실 때에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시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신앙의 초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교회처럼 한번 설교하면 90분 가까이 되고 사경에 때는 세시간이 넘나드는 설교를 들으면서 버티며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깨닫는 것이 있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아침에 이슬방울이 쉬 사라짐 같이 우리의 기억은 잘 잊혀져 갑니다. 여러분, 좋은 이야기는 여러번 들어도 별로 싫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어느 날 기도할 때에 “얘야! 오늘 내가 사랑한단다”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주님! 우리 속담에 좋은 이야기도 자꾸 하면 기분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한번 말씀하시면 됐지. 왜 매일 오셔서 사랑하신다고 하십니까?“라고 항의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좋은 이야기는 늘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있으면 참으로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성경을 읽어도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도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어떤 것인지를 대답하지 못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것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비교하면서 동의한다는 것을 찾아낸 탐구의 결과가 아니고 느낌입니다. 언제나 동일한 느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그대로 살고 싶지 않고 설교를 들어도 그대로 살고 싶지 않으며, 책을 읽어도 그대로 실천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텔레비전을 켜면 과외방송이 나옵니다. 그것을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매달려서 눈에 불을 켜고 강의를 듣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 어려운 수학 강의가 방송되면 그 이야기 그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다는 것은 문외한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문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김동리의 문학이 어떠하며 이광수의 문학이 어떠한 것을 비평가들이 달변으로 비평하면서 논해도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을 정공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차이이며 그 치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 같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진정으로 그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고 그 야기가 쓰여진 책이 그의 손에 들려 있든지 아니면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그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진정으로 제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영적인 변화를 받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때에 제게 감동을 주었던 몇 권의 책이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주면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읽으며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고 합니다. 특히 로이드 죤스 목사님의 책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왜 글을 만연체로 쓰지? 무슨 글이 그렇게 길어? 무엇인가 짤막하게 요약해서 말하지”. 결국 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요약이 되지 않는다”. ⌈부흥⌋ 책을 읽으면서도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고 합니다. ·1장을 보면 우리에게 거룩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고 8장을 보아도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10장을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바에 대해서 의식과 감각이 없으며 문외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들 때가 없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신앙의 초기에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대하소설을 30권 읽어도 1권의 줄거리가 거의 생각이 납니다. 과히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성경은 앞장을 읽고 뒤로 넘어가면 뒷장의 줄거리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원인을 대한성서공회의 발행인인 김준경씨에게 돌렸습니다. 성경의 활자가 이렇고 중간에 한자가 쓰였고 밑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잊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실험을 했습니다. 옆으로 쓰여진 성경이 나왔는데 편집체계가 소설과 같습니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앞장을 일고 넘어가면 뒷장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망⌋이나 대하소설을 생각해보았는데 가로로 쓰여진 대하소설이 없습니다. 모두 세로로 쓰여졌습니다.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세로로 쓰인 글씨는 30권을 읽어도 앞의 내용이 생각이 나는데 이것은 한 장만 읽어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제 신앙 초창기의 대단한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소설을 읽고 그 읽은 내용을 사람들이게 이야기해주면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 했습니다. 제일 촌스러운 것이 영화를 감상하고 말해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소설을 일고 그 줄거리는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설을 말해주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15년 이상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몰랐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우리 교회에 와서 죽도록 괴롭게 예배 드리시는 분은 없습니까?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합니다. 가끔 성도들이 훌쩍거리기는 하는데 매일 그 이야기가 그이야기 같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받을 수록 여러분들은 점점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까? 없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나중에 잘못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돌아가도 우리는 큰 소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을 오늘 성경이 줍니다. 세상의 지식적으로 보면 12장에서 나오는 벙어리 고친 사건을 비난했던 그 사람들이 제자들보다 더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뛰어납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못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단순한 지성의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드러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지식의 우열을 가려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경향을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말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잘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점점 깊은 은혜에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외국의 방언처럼 느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자신을 자신이 진정으로 살고 싶어하는 삶의 자리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설교를 들을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는 열심과 함께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욕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는데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의지적인 승복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을 신성 모독적인 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러 이러한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아버지! 저에게 충고를 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가 몇 년을 살더니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서 돌아와서 “아버지! 이러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제가 왔습니다. 아버지! 역시 제 인생의 경험을 가지고는 잘 되지 않는군요? 아버지는 저보다 인생을 더 많이 사셨지요?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시고 제가 어떻게 살아야할 가를 가르쳐주십시오. 이렇게까지만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도와줄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해 놓고 뒤에 한마디 토를 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속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어차피 그대로 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누구를 놀리는 것입니까? 바쁜 사람을 불러 놓고 인생의 고견을 들려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더니 막판에 가서 하는 이야기가 “어차피 그대로 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참고로 들어봅시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받고 은혜도 따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들의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가 올뿐만 아니라 그 진리와 함께 은혜가 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의 삶은 여러 모양에서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지만, 제자들의 지식이나 사회적 위치라는 것이 하찮은 것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비유를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깨닫도록 만들어 주신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에 12장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나님 향해 반역하던 그 백성들에게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을 거스르는 마음은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 마음속에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이 제자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내려 주셔서 더 많이 깨닫게 해주시고 더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의지는 이것입니다. 얼마 전 에 저는 수요일마다 약 16주에 걸쳐서 야고보서의 시험시리즈를 끝냈습니다. 시험에 든 많은 사람들이 시험시리즈를 들으며 시험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결정적인 말씀을 놓치고 더 깊은 시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이것입니다. 시험 시리즈를 설교하면 시험에 든 사람은 잘 들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미움에 대해서 설교하면 미워하는 죄에 빠진 사람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면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시험에 대해서 설교하더라도 시험에 든 사람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남을 미워하기 때문에 심각한 범죄에 빠져있는 데도 미움과 용서에 대해 설교해도 아무런 도움을 못 받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기는커녕 시험에 든 사람이 시험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더 빨리 시험에 빠져들기로 결심할 수 있고 미움과 용서의 설교를 들으면서 전에는 사람을 향해서 범죄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의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범죄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거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시험에 대해서 설교를 할 때 수요일마다 와서 그 설교의 능력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자신이 시험 속에 있어도 말씀을 듣고 자신이 처해 있는 시험의 상태를 말씀을 통해서 분석하고 거기에서 경고하거나 권면하는 것들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그 시험의 환경과 더불어 싸우고 말씀을 붙들고 실천하며 살려고 하는 삶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거기에 이은 또 다른 도전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에 그의 마음은 불붙기 시작하고 그의 어두운 눈을 열리면서 은혜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디인가를 알게 되는 깨달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 그 자체가 체험과 실천을 통해서 전승되도록 만들진 신앙의 체계입니다. 강의실에서 단과반을 수강하듯 해서 전수될 수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놓친다는 말을 가끔 합니다. 제가 들었습니다. “목사님! 요즈음 제가 말씀을 놓치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말씀을 놓치는지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즈음은 말씀이 저를 붙잡지 않고 계속 지나갑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쉽게 말해서 여러분들이 말씀을 놓친 것이 아니고 삶을 놓친 것입니다. 삶을 놓치면 반드시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할 때에 교회 한 구석에서 다른 사람은 평범하게 예배하는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고 설교할 때에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목메어 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에 불타는 마음을 안고 아파트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개에게 물리고 경비원에게 쫓겨나며 음식점 직원에게 타박을 받으며 얼마나 이 세상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렇게 복음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의 처지가 얼마나 불쌍한 가를 피부로 느끼도록 실천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고난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 타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믿음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며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향한 천국의 빛나는 면류관을 이야기할 때에 가슴벅차하며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자신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어찌하든지 살같은 빠른 광음을 주를 위해 아끼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 하늘 나라의 신령한 상급을 위해서 이 땅의 꽃으로 만든 면류관과 같은 곧 시들어질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손해본 적이 많은 사람들만이 하늘의 영광을 말할 때 벅찰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정도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당에 와서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 고상한 문학작품이나 훌륭한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태도로 여러분들이 예배에 참석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변할 수 없습니다. 코미디언들은 날마다 우리를 웃도록 만들어 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 한 날마다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살아가는 삶, 진리를 깨달은 것에 어울리는 삶 없이 진리를 즐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교도는 말하기를 “일평생 진리를 따라 살아온 성도들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청교도의 비유를 연결시켜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영혼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깨달음과 은혜의 감격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 정말로 주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 드리고 나면 여러분들이 풀리지 않는 현실적인 의문이 또 한가지 떠오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우리가 사경회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할말이 없지 않습니까?
“사경회를 끝나고 났더니 어느 어느 형제, 어느 어느 집사님이 은혜를 많이 받았대.” “어머, 그래? 나는 못 받았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았대?” “그 사람은 벌써 우리와 달라.” “왜?” “사경회 시작하기 사십일 전부터 금식을 했대”. “그래? 역시. 그러니까 은혜를 받지.” “누구누구는 은혜를 못 받았대.” “그 사람들은 어떻게 했는데?” “사경회 전까지 밥을 실컷 먹었대.” “그래? 그러니 은혜를 받을 수 없지. 누구는 사경회를 놓고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은혜를 받았지.” “누구는 계속 잠자데. 은혜를 하나도 못 받았대. 그런데 기도도 전혀 하지 않았대.” “야!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현상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절이 주절이 이번 사경회에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은혜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참석하기 싫은데 친구의 손에 이끌려서 사경에 참석에서 은혜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한 사람은 들어주시지 않고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으려고 계단에서부터 빼다가 끌려와서 앉았는데 은혜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보아야 합니까?
저는 이 말을 웃으면서 하지만 처음에는 대단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는 조화를 이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하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집회를 앞두고 많은 기도와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일시적으로 회의를 품은 적이 있었습니다. 엿장수가 엿을 잘라 줄 때에 마음에 따라 잘라 주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오랫동안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깨달은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는 행동이나 삶을 통해서 모두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늘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주절이 기도해도 마음 깊은 곳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여전히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 같고 연약한 것 같은데도 그 불순종하는 속에 그 밑바닥에서 이미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셔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곤고함을 느끼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그렇게 쌓여 있다가 들어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사고의 껍질과 같은 것이 깨어지면서 속살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살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꽂히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몰랐던 자기 자신의 내면의 간절한 갈망이 이 좋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겠다는 진실하고 간절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는 말씀의 씨앗을 뿌려보면 기가 막히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렸을 때에 그 씨앗은 순수한 씨앗이어야 합니다. 순수한 말씀이면 그 말씀이 뿌려질 때에 그 마음 밭에서 말씀이 날아가고 전혀 자라지 않으면 그는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뜻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정직하게 말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많은 자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가르쳐주는 사건을 통해서 이미 이 사건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서 그들이 누구인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씀뿐만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는 과정도 복음인데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는 대신에 예수님이 귀신을 이용해서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보여주고 싶어하시는 참진리를 피해 가는 사람들 속을 보면서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 앞에 나와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깨달음은 점점 증폭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애를 쓰면 쓸수록 깨달음은 점점 증폭되고 지식은 점점 깊어지며 하나님을 아는 은혜는 점점 풍성하게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말씀에는 밭이 나옵니다. 첫째는 길가, 둘째는 돌밭, 세 번째는 가시나무떨기, 네 번째는 옥토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밭이 나오는데 오늘은 길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길가는 밭이 아닙니다. 이 네 군데에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본문을 보면서 흔히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지 말고, 돌밭과 같은 마음이 되지 말며 가시떨기가 있는 밭이 되지 말고 옥토와 같이 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초점은 밭이 아니라 씨입니다. 그렇기에 씨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기적으로 보면은 예수님의 생애 말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씨는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방금 기적이 일어났는데도 당신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버림받을 것을 이미 길가라고 하는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대단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하나씩 더듬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가 하는 비유를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각 네 땅에 씨앗이 떨어지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씨앗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평범한 사실 한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다는 이야기가 네 번이 나오는데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한번 본문을 보겠습니다. 19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말씀을 듣고”, 20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22절을 보면 “가시나무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그 다음 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로 나옵니다. 그런데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19절에는 “듣고 깨닫지 못할 때”로 나오며 이것이 길가입니다. 그 다음 20절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견디다가 넘어지는 것”. 그 다음 22절에서는 “들으나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그리고 23절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깨닫는다는 말을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매우 아끼고 계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말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는 깨닫는 말을 쓰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시나무 떨기에 떨어졌는데, 그것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거기에 깨닫는다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근히 이 비유를 단지 두 개로 대비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과 못 깨닫는 것, 이 둘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인색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아야 새사람이 됩니다”라고 말하면 꼭 따라오는 질문은 “깨닫는 것이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시내버스가 어느 곳을 통과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입니다. 결론은 둘 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것은 네 경우 모두에 일어날 수 있지만 깨닫는 것은 오직 한 경우에 일어났고 깨닫게 될 때에는 그 결실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깨닫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히 잡히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오늘날 이야기하는 것처럼 주민등록번호를 외우듯이 머리 속에 입력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않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듣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모든 문제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드러나지만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은 자신의 상당한 협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TV나 영화를 볼 때에 중간부터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미스틱 스릴러이다. 무엇인가 신 비한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있고 끝까지 감상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작가의 머리가 대단히 좋다고 생각되는 영화나 소설은 중간부터 접하면 모른다. 쳐부수는 영 화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지만 어두컴컴한 사무실, 골목을 누비면서 괄목할 만한 장면도 나 오지 않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갑니다. 중간에 들어온 사람은 멍하게 있다가 계속 물어보다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본 사람들은 그것에 빠져 들어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에 최소한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볼 때에 집중하는 것만큼 집중해서 들으면 훨씬 더 신앙적인 유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들어와서 저 남자가 누구인가 누구이며 옥 속에 갇힌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만큼 성경을 읽으면서 앞장과 뒷장이 어떻게 관계가 있으며 시작은 어디부터이고 예수님이 유대인은 좋아하시는 것인지 싫어하신다는 것인지, 앞 단락과 뒤 단락이 만나는 것인지 다른 이야기를 하는지를 질문한다면 여러분들은 진실히 성경의 숲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사고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제목조차 사고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들어서는 정말로 신앙이 자라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말합니다. “믿음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 생성되는데 있어서의 두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하나는 말씀의 본질이며 다른 하나는 말씀의 본질이 우리에게 심기워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것은 들음이고 말씀의 본질은 그리스도께 속한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복음이 있고 그것을 정직하게 깨닫는 신자의 심령이 있을 때에 누구도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뿌리내리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나무가 심겨져서 뿌리를 내리게 되면 손보기가 어렵습니다. 묘지에 소나무 씨가 날아와서 자연적으로 발아되는 경우가 잇습니다. 조그맣게 자랐을 때에는 잡아당기면 그냥 뽑힙니다. 그런데 잊고 몇 년을 그냥 놓아두었습니다. 5년쯤 지나면 손으로 뽑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15년 지나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뿌리를 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무만 잘라버려야 합니다. 25년이 지나면 더 안됩니다. 30년쯤 되면 중장비를 불러와야 합니다.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이 있고 그런 깨달음 있으면 그런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진리의 말씀을 심으시는 것은 말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신앙의 특징을 듣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심기어지는 특징입니다. 가장 중요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상하게도 집회를 가지면 “저 성도는 잘 사는데”하고 생각되는 사람은 더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변화되어야 하는데”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거나 나와도 슬픈 기색으로 앉아 있거나 억지로 나와서 참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더해주시며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경회를 앞두고 여러분들에게 제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안 해도 좋습니다. 될 수 있으면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으십시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기 싫어서 그만 두었다고 할지라도 남들이 그만둔 이유를 물으면 그 이유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왜 변화받지 않고 이 때까지 있었는가를 물으면 이런 이유가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린 교회에 와서 남들은 은혜를 받는데 남들은 1년이 되고 6개월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이런 이유 때문에 은혜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집회에는 여러분들이 일찍 나와서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기 싫으면 조금만 하십시오. 그 대신 깨달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여기에서 듣는다는 말은 단지 들린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하는 논리를 따라가면서 귀를 기울여서 듣고 마음을 모아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떨어져 보아야만 여러분들이 길가인지, 돌밭인지, 옥토와 같은 밭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누가 압니까? 겉보기에는 부실해 보이고 형식적인 신자같이 사는데 여러분 자신의 심령도 괴로워하다가 말씀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껍질이 깨뜨려지고 나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자라고 싶어하는 옥토와 같은 마음이 있는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봐야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원고설교를 하지 않는가를 아십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이유는 여러분들을 보고 이야기하려고 원고설교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코를 박고 설교하고 청중은 고개를 숙이고 설교를 듣는데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일어나는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던 예가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집중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노력하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다가 말씀이 여러분들에게서 계속 놓쳐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삶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놓치기 전에 삶의 고삐를 놓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떠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듣는 데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조용히 “주님! 제 인생을 어찌해야 합니까? 듣겠습니다”라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래적으로 도저히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신앙이 깊어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한 푼어치를 깨닫고 나면 백 푼어치를 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깊어질 사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에게 하는 인사는 샬롬이 아니고 쉐마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인사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쉐마”. “들으라”. 그것이 하나님이 얼마나 원하시는 것이지 모릅니다. 깨달아야만 변화가 됩니다. 그런데 듣지 않음으로 깨달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 때 이런 각오를 해보십시오. “벤허, 내가 세시간 반 짜리도 내가 보고 스토리도 다 외웠는데 설교 90분 못 들으랴”는 마음을 가지고 와서 열망하십시오. 도저히 죽어도 집중이 안되면 여러분, 짤막짤막하게 메모를 하면서라도 들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들으려고 노력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여러분들에게 떨어집니다.
여러분 이 부분은 하나님 앞에 타협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통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렇게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것 없이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핑계를 댑니다. “에이, 내가 다 늙어서. 아이, 내 머리가 옛날 같은가?” 그렇다면 젊었을 때는 말씀이 쏙쏙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언제 간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팔순이 넘는 할머니인데 말씀을 읽고 듣다가 성령을 체험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너무나 슬픕니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있는 아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말합니까? 저보고 데려가라는 말도 아니고 말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깨달으려고 애를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으로 할 말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머리가 노쇠해서 듣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일곱씩이나 되어서 도저히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너무 늦게 와서”, “주일이면 피곤이 밀려와서”, “예배 시간이면 피로감이 몰려와서 그랬습니다”. 이유는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유가 되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 간에 하나님 자신도 이것을 넘어서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집중을 해야만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귀는 여러분들이 교회당에 들어서는 순간에 여러분들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헌금할 때에 마귀의 강력한 도전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느낄 정도로 많이 해본 적이 없습니다. 없을 리는 없지만 그렇게 심각한 도전은 아닙니다. 여러분,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용의 눈물⌋이나 최진실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중 영적인 전쟁을 치열하게 경험해서 스토리를 깨닫지 못해서 “마귀나 내 머리를 산란케 해서 내용을 다 놓쳤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놓아둡니다. 여러분들이 TV나 영화에 빠지고 가치없는 삼류소설에 빠져서 뒹굴거릴 때 마귀는 버려 두고 쉬자고 말합니다. 집중도 잘되지 않습니까? 드라마를 시청할 때 머리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나옵니다. 안광이 브라운관을 뚫습니다. 그리고 유리를 넘어 배우들과 만납니다. 소설 을 펴면 인물들이 살아서 올라옵니다. 소설의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만 펴면 마귀가 기상합니다. 그래서 일장을 읽고 나면 이장 읽을 때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약을 팔거나 황수관 박사가 와서 신바람 건강법을 말한다면 아마도 왜 90분밖에 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마귀는 와서 방해합니다. 그것이 마귀의 입장에서는 이렇습니다. “얘들아, 말씀을 전할 때에는 나가서 산란하게 해라. 가장 확실한 투자니라”. 이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 버립니다.
교회에 나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머리를 두드리면 “텅텅” 소리가 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오라고 말하면 오고 가라고 말하면 갑니다. 그러다가 보니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지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이 없으니 결단이 없습니다. 결단을 하려고 해도 알아야 결단을 하는데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찌하시렵니까? 왼쪽으로 가시렵니까”. 이렇게 말해도 오른쪽이 어디이고 왼쪽이 어디인가를 알아야 결단하지 않겠습니까? 칼만 들고 왼쪽인가 오른쪽인가도 모른 채 내리치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듣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싸우는 마음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시로 스치고 지나갑니다. 줄거리가 생각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씀이 들려서 지성을 타고 내려가서 우리의 가슴 밑바닥에 뚫고 내려가서 착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착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 심겨지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심겨지는 기쁨이 있으면 듣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심겨지는 기쁨이 없으므로 깨닫게 되는 것은 듣는 고통입니다.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 예배를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말합니다. “예배 시간이 몇 시간입니까?”. “보통 두 시간입니다”. “어후!” 강연을 나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교회의 예배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두 시간 또는 길면 세 시간이 다될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지루해하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모두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것이 없으면 매우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십시오. 듣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신앙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길가에 심겨진 것은 지금 말하는 그런 식으로 들은 것이 아니고, “쉐마”의 들음이 아니고 그냥 들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귀의 경 읽기 식으로 무엇인가 좋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저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즈음의 젊은 아이들이 두들이면서 혀도 돌아가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여러분들이 따라 부를 수 있습니까? 저는 못 부를 뿐만 아니라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아이들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 애들이 부르는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스타일을 신나하지도 않으며 거기에서 말하는 가사 대로 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가사의 내용과 사상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빨리 부릅니다. 천천히 부르면 어떻게 들어보겠는데 콩 튀기듯 빨리 부릅니다. 그렇기에 수없이 들어도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아이들의 마음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들처럼 되고 싶고 그들처럼 신나하고 싶습니다. 사상에 동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콩 튀기듯 지나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쏙쏙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 교과서도 이런 식으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면 얼마나 빠르게 외워지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멍청하게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소리로서 들려가도록 버려두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아니므로 심령이 점점 굳어집니다. 강팍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로 점점 굳어집니다.
여러분, 쓰레기를 묻거나 논 위에 흙을 쏟아 부어 평지를 만드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일년 이상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집을 지으면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땅을 팔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왜 그런가를 아십니까? 일년 또는 이년동안을 놓아두는 이유는 사람이 밟아 주지 않아도 비가 오고 위가 무거워져 흙이 밑으로 내려갑니다. 겨울이 옵니다. 얼어붙습니다. 그리고 녹으면서 습기가 차서 내려갑니다. 자연의 힘에 의해서 굳어지는 것입니다. 2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허허 벌판에다 흙을 붓고 누가 밟아준 적이 없어도 곡괭이를 가지고 두드려도 들어가지 않는 단단한 땅이 됩니다. 그때에 파고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심겨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그리고 굳어진 자신의 그런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데서 생겨난 심령인데도 그런 자신의 상태를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말씀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만난다면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길가에 심기워진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기워진 것이 아니고 뿌려진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가지는 깨닫지 못하면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바람에 날리고 새들이 날아와서 먹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려진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위로 받는 예화가 이것 아닙니까? “지난 주 설교가 무엇이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콩나물에다 물을 뿌리면 콩나물은 ···.” 그것은 거기에 해당되는 비유가 아닙니다. 비유를 하려면 비슷하게 하십시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생각나지 않아 예배 시간을 허공 중에 날려 버린 것과 콩나물에 물을 뿌리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콩나물은 원래 물 속에 담가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물을 뿌리면 털에 물이 묻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비슷한 비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길가와 같을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착상하지 않고 뿌리가 땅에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 밭은 더 굳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능력이 있으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씨앗이 날아가다가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뿌리가 내려야 하는데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능력이 역사해서 말씀 속에서 드릴 같은 것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암반을 뚫고 들어가고 그 속에 있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파란 싹이 돋아 날 때에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식의 능력은 없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신자가 어려움에 처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만 죄와 어려움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못 나오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반항적인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기다려야 합니다. 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란을 만나든지, 뒤통수를 맞아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씨앗이 문제가 있는 씨앗입니까? 아닙니다. 완전한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좋은 밭에 떨어지자 놀랍게 결실합니다. 그런데 이 씨가 길가에 떨어지자 바람이 불자 날아가는 것입니다. 새들아 날아와서 먹어버렸는데 그 씨는 항거도 못하고 새의 창자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창자 속에서 씨앗이 싹이 틉니까?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결국 말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이 말씀 자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개인의 심령과 만나고 그 마음과 만날 때 그 때에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결실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겨자씨를 보지 않았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참깨의 십분의 일이 될까 말까합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씨앗이 떨어져서 새들이 긷드는 큰 나무가 되는데 어린아이들에게 겨자씨가 자라서 이런 나무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아이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볍씨를 보여주고 벼를 보여주면서 두 개가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겨자씨를 보여주고 새들이 긷들게 된 나무를 보여주면서 둘이 관계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둘 관계에서 유추관계를 찾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능력, 말씀의 놀라운 권세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사경회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에 정말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번 사경회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를 만나 주십시오. 그 대신 제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다해서 들을 것이며 깨달으려고 노력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하신 진리를 보여주시면 그것대로 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만나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로 하여금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열매맺는 백성으로 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길가에 떨어진 씨앗Ⅱ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자요.”(마13:19)
(1)지난 주일 저녁에서부터 씨뿌리는 비유를 살펴보는 것은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오는 사경회에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심기워서 그래서 이전에 누려보지 못했던 수확에 축복들을 우리들이 경험 할 수 있겠는가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씨뿌리는 비유에서 나온 첫 번째 토막을 말씀을 드리다가 마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주것을 더듬어보고 그리고 못한 부분을 마저 우리들이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것입니다.
이 씨뿌리는 비유의 초점은 말씀드린바와 같이 토지가 아니라 씨입니다. 우리가 그러닌깐 주목해야할 것은 토지가 아니라 씨앗이라 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씨앗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비유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라 이렇게 생각되어집니다. 오늘 성경은 먼저 길가에 씨앗이 뿌리워진 자와 같은 그런 사람을, 그런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씨는 그 자체가 완전합니다. 그 자체 안에 이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씨가 길가와 같은곳에 떨어졌다라고하는 의미는 주님 자신에 의해서 설명되기를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아가는 방법이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달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모순과 갈등이 판을 치고, 문제가 많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불법과 불의를 인해서 고통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의를 위해서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 엄연하고 살벌한 현실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사람 한사람에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지루하고 그리고 요원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급한 생각일 뿐인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나라를 위해서 오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가이사에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것은 하나님께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물을 나누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다투는 자에게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진정한 관심사에 출발이 어디인가를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이 비유를 통해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들을 생각하도록 우리들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이 작은 씨앗 하나가 그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서 그래서 울창하게 우거져서 새들이 깃들일 정도에 그러한 울창한 나무, 울창한 숲을 이루기까지 우리는 그 씨앗과 그러한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진 큰 숲,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씨앗이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은 우리들이 앞으로 살펴 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이 떨어져서 땅에 심기워지고 거기서 성장하게 될 때에 그때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첫 번째 경우에서 볼수 있는 바와같이 씨앗이 뿌리워졌는데, 그 씨앗이 길가와 같은곳에 떨어져서 바람에 날려가거나 새들이와서 먹어버리면 그러면 그 씨는 뿌리워지지 않는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오는것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곳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있을수가 없는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초가집이나 혹은 스레트로 얹은 집이나 혹은 토굴이나 이런 집과는 달리, 기와를 얹거나, 예쁘게 지은 빌라들을 가르켜서 문화주택이라고 부릅니다.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있고, 전기가 들어오고 가스가 들어오는 그런 주택을 가르켜서 문화주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이 한 80평 정도의 아파트에 온갖 호화로운 시설을 다 해놨다고 해도 거기서 사는 사람이 식인종이라면 우리가 그 주택을 문화주택이라고 부를수 있겠습니까.
우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방법은 먼저 사람이 바뀌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꿔서 그 바뀐 사람에 의해서 세상이 변화되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행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도가 잘못 되어져 있을 때 사람들은 한 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독재 정권에 치하를 지내면서 사람들이 뭘 하나를 고치기 위해서 자기 멋대로 만들어놓은 이상한 제도나 법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방불한 불행한 처지에 떨어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이렇게 제도라든지, 혹은 잘못된 관습이라든지 그리고 그릇된 인습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인간을 한없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제도와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관습, 이런 것 그 이면을 깊히 파들어가면 거기는 역시 잘못된 인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필요하면 데모도 해야합니다. 그래서 뭔가 잘못하고 있는것들을 지적해 주어야합니다. 필요하면 사람들에게 항의를 하기도 하고, 자기에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고, 필요하면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법을 고치게 하고 제도를 바꾸게 만들어야됩니다. 그리고 인습과의 싸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기독교는 인간에 모든 불행한 원인에 궁극적인것들을 고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종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최고의 관심은 황제가 누가 바뀌느냐가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 하는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그 사람 한 사람에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그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한 사람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왜 그렇게 끊임없이 영적인 회복, 또 왜 우리가 그렇게 끊임없이, 신앙에 회고, 상처의 치유, 그렇지 않으면 과거로부터의 자유, 끊임없이 곤고한 가운데서 벗어나야하는 방법, 이런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수 없이 탐구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하는 그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이런 것들이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아니할 때 우리는 옛 삶,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속에 있는 모든 그 구조물들을 그냥 지니고 신앙생활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닌깐 이게 본성과, 실제적인 생활이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안에 주신 생명은 온전히 자유로움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의지를 우리의 것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살게 되도록 우리에게 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안에 있는 죄와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로 말미암아서 끊임없이 죄악된 본성이 생명을 억압합니다. 그러닌깐 이게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거듭난건 사실이고, 은혜받은건 사실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엄청나게 크고 놀라운데, 이것을 못 누리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왜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내 안에 기쁨이없을까. 그러나 가끔 관심을 가져보고, 노력을 해 봐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 때는 그런건가보구나, 하고 살아갑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는것에 대한 기대조차 아예 포기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넓게 자기 밖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근데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지 않아 세상 없어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면 우린 아무것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심사가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전망하고 너무 다른데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 구원받았냐, 못 받았냐 그렇게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지금 죽으면 천당을 저사람이 갑니까. 못 갑니까. 그렇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성경에 관심은 구원받은 우리들에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 두가지, 우리가 존재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고 삶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요긴한 도구들이 되는 것, 그것이 예수를 믿은 진정한 의미며, 보람이란 사실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비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안에 먼저 이루어 집니다.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 마음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가지고 있는 그 놀라운 창조력은 정말 위대합니다. 수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자, 우리 아주 쉽게 비유를 들어봅시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똑같이 예수 믿으면서도 아버지가 자식 안보고, 자식이 부모 안 보고, 동기간에 서로 안보고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천국에도 칸막이를 해야될 모양입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집사 천국 갑니까. 믿었으닌깐, 가죠. 그 사람이 천국가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기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안에 참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집니다. 그러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통용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의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의 법은 서로 용서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미워할수 밖에없는 관계에 자기가 용서를 베풉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오히려 그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줍니다. 미움의 칼을 갈아야 될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에 통치와 지배를 받는 덕분에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할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과 은혜가 그 한 사람을 불행에 구렁텅이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칼부림이 날 사이가 서로 끌어안고 목을 어긋 맡기고,(*) 눈물을 흘리는 감격적인 화해가 있는 사이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일 사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자신속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뭘 통해서 왜하면은, 말씀이라고 하는 씨앗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근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듣고 깨달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붙들고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결단코 다른 모든 말씀을 붙들고 살아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전혀 살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기를 저는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깨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깨달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고,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 오늘 성경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것, 가장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방법이 듣고 깨닫는 거인데, 첫 번째 이 길가와 같은 밭, 그래서 결국은 주님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씨앗이 떨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하는 그 밭의 특징은 듣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깨닫는 것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나이도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녀들의 신앙을 혹은 여러분 교회있는 어린이의 신앙을 너무 하찮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는 여러분들의 자녀나 주일학생들을 너무 어린아이 취급하는데서 문제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유치부 밖에 되어지지 않는 아이들이 제 설교를 들으면서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수년 동안 경험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어린아이들은 본인들이 그렇게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부모들이나, 교회의 성도들도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집중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도 말씀을 들으면서 집중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웃을 일입니다. 스펄전은 열여섯살 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기라성같은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이 모두 십대 초반이나, 늦어도 십대 후반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교회사속에 나오는 위대한 설교자 토마스 카트라이트라고 하는 그 설교자는 이미 네 살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로 든다 했던 미국의 위대한 부흥의 도구로 쓰여졌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히 만나고 회심을 경험한게 놀랍게도 4년 6개월 되던 때였습니다.
왜 여러분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전할때에 예수님이 고등학교 이상자만 입자한가 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때에 예수님이 ‘애들은 가라, 집에 가라’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어린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저는 화가나건데 팔복산에서 울려퍼진 그 청하한 음성을 팔복에 관한 설교를 유년주일학교나 심지어는 아주 어린 영아부 아이들도 함께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어른들에게 일어나는 동일한 변화를 일어났다고 저는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문제가 아니라,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지 않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은 듣지 않는 것은 들은 것이 아니라, 들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소리일 뿐인것입니다. 만약에 여직까지도 여러분들이 계속 깨닫지 못하고 예배에 나오면 인격이 고상해 지고, 뭔가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것이라고 하는 미신적인 생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오늘 이 저녁에 결별하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여전히 짐승과 같은 신앙 생활을 면할수 없습니다. 그가 만약에 조금 도덕적으로 변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참석하는 예배, 늘 오는 예배당에서 기독교적인 눈치가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눈치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 결국 자기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할수 있습니까. 그럴수 없습니다.
이런 신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녀를 가르칠때에도, 유년주일학교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젖을 빨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가르칠때에도 여러분들이 확신하셔야할 것은 그것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아이를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서 뭘 합니까. 분위기 언제까지 타고 다닙니까. 중학교때까지 분위기 타면 많이 탑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자기 분위기가 또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분위기가 우리를 새사람되게 만듭니까.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를 새 사람되게 만드는 것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러닌깐 지극히 어린아이 하나라고 할지라도 그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할것인가.
저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어느분이 특강을 하면서 간증을 하는 것을 봤는데, 세 살이 갓 넘은 아이가 그림으로 그려진 교리를 설명할때에 참회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에대해서 청교도들은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닌깐 우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들은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면 우리안에 예외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안에 서게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굳게 굳혀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확신들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교육에서 애써 수고하는 데도 지극히 작은 열매밖에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인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경우에는 어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신앙의 싸움은 무엇인가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것인가, 말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이 깊히 회개하고 주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나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너무나 감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으로 살면서 삶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것이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기하기까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지겹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아리숭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판단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자신은 자기가 신앙에서 떨어졌는지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어 있는지를 금방 알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에 이 말씀이 깨달음으로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놓친 많은 날들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솟아나게하고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 조차도 여러분들에게 소리가 되어서 들리지 않습니까.뜻도 없고, 의미도 없는 어떤 커다란 소리가 되어서 여러분들의 마음 곁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상태라면 여러분들은 매우 안전하지 못한 영혼에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싸움은 바로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 이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행복해 질수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가르쳐주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물질에 축복을 누릴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잘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그것보다도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믿음으로 살면 금보다 더 귀하고 놀라운 하나님을 소유할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닫는 것이 없는 신앙생활은 짐승과 방불한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우리들은 정말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옛날에 주님을 믿기 전에 살았던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그 말씀이 깨달아지면 깨달아질수록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심겨지면 심겨질수록 어둡던 우리의 마음 구석에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동네 한복판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있어도 구석구석 골목에 어두운 곳이 많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숨어서 귀가하는 처녀들을 희롱하기도 하고 취객들의 주머니를 뒤지기도 하고 연약한 부녀자들을 괴롭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깨달아지면서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에 밝은 진리의 빛이 비취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차점차 악한 세력들이 우리의 삶 속에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틈타는 일들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깊히 사모해야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정말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마음이 대낮과 같이 밝아지기를 원할 것이며 자신의 마음과 삶 구석구석에 모두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배해 주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악한 원수들에 빨치산이나 아니면 불순분자들이 자기의 마음에 이동네 저동네를 출몰하며 그렇게 이중에 통치를 받는 이 괴리가 있는 삶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기가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화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모든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온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조금도 진전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해져가면 거룩해져갈수록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여러분도 신앙생활할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나중에는 점점 이중인격자가 되어가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괴리를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게 떨어지거나 멀어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이 오늘 씨앗으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 씨앗은 또한 예수님 자신이기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썩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신의 죽음을 가르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씨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이기도 했습니다. 길가에 밭을 묘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종교 그리스도에게 버림을 받고 있는 상황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나라하게 예언적인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아주 간단한 공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뿌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 질때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으로 거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 마음은 결국 무슨 마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운데 거하시기를 거절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마음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내쫓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쫒아내고 우리의 구원의 은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안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마음의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마음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수 있다면 그 말을 여러분들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지막으로 인간을 심판하시는 그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 정결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쪽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의해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고, 한쪽은 안 받아들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쪽은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고, 한쪽은 듣고 깨닫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으실겁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하는 그런 강한 저항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경험하신적이 있으실 겁니다. 생각 의외로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저항이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놀랍게 헌신된 사람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날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지 안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이렇게 이런 식의 등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 우리를 구원하고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강력한 저항은 뭘 통해서 나타나는고 하니,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스릴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으시려고 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지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행복해진다는 것이 무엇이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심겨짐을 통해서 오지 않는 마음으로 영원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 속에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삶인지를 결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경험하지 못하고 눈을 감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한 것을 주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속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하고 자신 속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 세상 나라에 속해서 살아갈 때보다도 더 우울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근데 오늘 여기서 우리들이 오늘 시선을 끄는 것은 뭐냐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서 악한 자는 마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서 우리들이 즉각적으로 깨닫게 되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귀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임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깨달아지지 않는 그 배우에 마귀의 세력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는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를하고 있다고 말을 한다면 말씀이 요즘 귀에 안들어오는 여러분들에게는 매우 섬칫하고 기분나쁜 것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그런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에 씨앗이 우리안에 자라지 못하게 하는 대신에 정욕과 불신의 씨앗이 우리안에 자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헛된 욕망의 씨앗이 자라게 만들어주고, 독초와같은 잘못된 인간의 사고방식과, 아집과 패역이 우리안에 자라도록 조자가고 부채질하는 것이 그의 일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심겨져서 여러분들의 마음밭과 삶의 모든 밭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는 밭인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여러분들은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해질수도 없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인이라는 너울을 쓰고 속으로는 탐욕과 악독에 가득차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의 흉내를 내야하고 속에서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불신자처럼 살면서 자신의 양심에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에 괴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중 인격자가 되어갈 것입니다. 점점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척 하면 할수록 여러분속에는 점점 더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는 강력한 성장의 세력들이 여러분들의 삶과 인격을 지배하는 것을 경험하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밭에 뿌리지지 않는 사람들,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비교를 한다면 여기서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구원과 관련시켜서 이야기 한다면 첫 번재,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구원 못받은 경우인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는 복음을 듣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아주 강력한 불신자를 지칭한다고 말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조차도 신앙생활하면서 중도에 이런 마음으로 변해가는 경우를 얼마든지 본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악한자가 와서 여러분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인간적으로 적당한 이유를 댈수 있을 것입니다. 낮에 너무 피곤해서, 직장해서 야근을 했기 때문에, 신경쓰는 일이 많아서, 간이 안좋아서, 요새 두통이 심해서, 소화불량이 있어서, 신경쓰는 일이 많아서,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성경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앗아간 것이 두통이나,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은 것이나, 아이엠에프터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매우 부지런히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일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자신 안에 있는 그런 마음의 작용이 주어지는 말씀을 향해 반응하는 것을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기의 의지대로 자기의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방종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거나 성경을 읽어나갈 때 마음속에 그런 생각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를 가만히 보면은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증거 하셨을 때 이 천국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수단도 되었지만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복음 증거 하시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훌륭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속한 사람인가 주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훌륭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뒤엉켜서 전부다 하나님 하나님 그렇게 부르면서 살아갑니다. 그때 참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증거 하십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하고 쉬운 어조로 천국 복음에 대해서 증거 하십니다. 그때 그 천국 복음을 듣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격을 하고 그 나라를 사모하기를 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들을 때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예수를 핍박하려고 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그때는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때이기도 하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모르고 있는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 어떤 경향성이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훌륭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전하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을 거절했던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의 복음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니 이제 너희는 신나겠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복음은 천국 안에 들어온 성도들의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천국백성들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천국 백성들의 의무를 기뻐할 것이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복음을 쫓아서 살아가는 일 그 복음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 그리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행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 전혀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깨닫게 되어져서 우리에게 심겨지기 시작하며 이제껏 수 십 년 동안 쌓아 올렸던 불 신앙 그리고 죄악의 아성, 자기 아집과 불 경건하고 쓸데없는 고집, 죄악된 생각, 이런 것들이 한번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우리는 이런데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심 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 십 년 동안 쌓아 올린 죄악과 불신의 아성들을 단숨에 허물어 버리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 것과 들리지 않은 것, 사람들에게 뿌려진 것과 뿌려지지 않은 것, 아무 차이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그 하나님의 나라를 원하고 받아 드리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놀라운 역사를 불려 일으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지 않던 사람들 오늘 12장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와 같은 사람들의 삶 속에 그들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엄청나가 복을 받은 사람들 이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 비슷하지도 않은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침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언제나 그 말씀을 원하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권위와 그 영광에 찬 천국의 복음을 언제든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지 않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수난 당하게 만들어서 죽이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오시지 않은 것이나 아무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았고 가끔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놀라운 교훈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권세가 모자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사역에 어떤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상상이 가능하지만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는 이런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 사역은 모든 사람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배척받는 곳에서는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왕인 것 같지 않고 쫓겨나는 거지와 같이 사람들에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마음 가운데 오십니다. 어떤 교회 가운데 오십니다. 어떤 사회에 오시고 어느 교회 시대에 오셔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신 위대한 왕으로서 한 시대를 다스리시고 한 교회를 통치하시고 한 죄인의 인생을 변화 시키셔서 영화롭게 만드십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기도 하시고 안 행하시기도 하십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책임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원래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드려지고 깨달아 지는 곳에는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와 축복을 가져 옵니다만 받아 드리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김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론 우리 자신이 이러한 상태에 떨어지지 않게 되도록 하나님 앞에 온전히 결실하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나 자기의 경제적인 수입에 대해서 갖는 관심의 십분의 일만 자신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 드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는 일이 있는가를 반문하면서 살아간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화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적인 삶 속에 수시로 마귀에게 지배를 받는 것 같은, 마귀에게 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기억하십시오.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해결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워 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여러분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진정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마음과 의지에는 상관없이 단숨에 어떤 영향이 뒤덮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첫 번째 이단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 이동리 하나님의 나라 되어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들어봤니? 천국은 이런 것이거든,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그러니 너희는 이렇게 믿어야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고 이것을 너희들이 받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한 사람, 가르치시고 무리를 놓고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그들의 어두움 마음을 두드리시면서 진리의 씨앗을 심는 일에 열심을 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안수해 주시는 일이 아니라 죄인의 혼탁해진 마음속에 진리의 씨앗을 떨어 드리셔서 그것을 통해서 어두운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미혹하는 것들에 시달립니다. 분명히 자신 속에 정리되지 못한 죄와 그리고 죄가 있음에도 그것을 죄라고 바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지극히 자기 자신의 상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혼돈한 상태 속에서 누군가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디밀고 한번 눌러 주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과 같다는 미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까지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 사람들에게 대해서 동의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 제는 누가 제만 눌러 주었기 때문에 제는 들어가고,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 것은 용한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헛되고 헛되니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더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판단을 우리의 판단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뢰하고 순종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의 전매 특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한번에 매전 매석해서 자기가 기분 좋은 데로 하나씩 나누어주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깨달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을 심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싹이 트게 하시고 줄기와 가지가 자라게 하시고 잎이 무성하게 하시고 꽃피고 열매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일평생 이 한가지 사실을 붙들고 살면 여러분들은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없이는 아무런 좋은 것이 우리의 인생 생사간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을 이와 같이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방불한 곳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모든 사람들 마음가운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이루어지고 죽어도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좇아서 살고 말할 수 없이 넘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의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연약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이끌며 살기를 원하는 자비한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떨까요? 물론 찬양도 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기가 돌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와서 자리를 찾아서 헤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질서 정연할 것이고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때 그 예배에 정점에 도달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시간에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주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이루어진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궁상을 하거나 졸거나 딴 생각을 하거나 쓰레기와 같은 잔념에 자기의 머리를 가득 채우거나 심지어는 예배가 언제 끝나나 시계를 드려다 보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그들이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 하셨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이점에 있어서 참 많은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경험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깊은 변화를 주셔서 그들 속에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불복종하고 더러웠던 것들을 모두 내어버리고 진정으로 참회하게 되었을 때 아주 놀라운 특징이 발견되었습니다. 몇 가지가 발견되었는데 첫 째는 주체 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이 시대의 불의와 하나님 앞에 굽어져 있는 교회의 고통 하는 상황들을 말씀하실 때 지체들은 함께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랑이 자신 속에 녹아드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거대한 통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서 우리 안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하나님께 전달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느끼는 감정들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사람의 감정을 조작하려는 것만큼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속에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예배는 풍부한 정서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고 때로는 분노가 있고, 때로는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정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웃지 않고 슬픈 이야기를 해도 자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설교를 해도 사람들은 ‘저 사람 열 받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설교자를 감동 시켜도 문제는 하나님 마음, 설교자의 감동,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은 지체, 이렇게 삼각관계가 되어서 설교 시간에 흐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반응들이 일어나는데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굳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죄로 말미암아 굳어질 뿐만 아니라 영혼의 어두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변화가 그들 속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움직이고 있는 장본인이 마귀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우리 안에 심겨지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과 더불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투쟁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굉장히 오랜 기간동안 마귀의 노리개 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속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것 사람만 예수 믿는 사람처럼 변화된다면 그것보다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은 당대의 악한 자들이나 강도들이 아니라 마음은 전혀 변화되지 않고 겉모습만 종교적으로 변한 사람들, 아주 고상하게 변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같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 어둠의 나라에 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고 주님이 풍성한 말씀 가운데로 나를 부르시고 언제든지 펼치면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독일어나 영어나 이태리 어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나 아랍어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친숙한 우리의 말, 우리의 글, 우리의 소리, 우리의 정서,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인하여서 슬퍼하지 않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자책을 느끼지 아니하고 수많은 세월들을 하나님을 바람결에 흘려 보낸 그 수많은 날들의 이력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기를 싫어하고 그 이름에 반항하며 살아온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것과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어떻게 대우해 주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당신의 참다운 진리의 말씀 앞에 참회하고 뉘우치는 사람들 앞에 어떻게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귀가 판을 치고 온갖 더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참회하고 그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심겨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어제는 마귀가 들끓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으로 얼마든지 우리의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허락 없이는 결코 마귀가 들어와서 우리가 거기에 묵시 적으로나마 우리가 그의 올 길을 준비하고 그에게 화합하고 친화적인 여건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가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홀로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유린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경건하고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적 있습니까? 머리를 두들겨서 빈 통 소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은 가슴도 비어 있거나 혹은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차 있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것은 키도 민스터의 리차드 백스터가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에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에는 천국이 당신에게는 너무나도 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심겨지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해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선포된 말씀을 하루에 여덟 시간씩 내어서 여러분들이 들으시려면 정확히 한 달을 들으셔야지 들을 수 있는 양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얼마나 심겨 졌습니까? 그 말씀 중에 어떤 것들이 이제껏 여러분들의 삶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한없이 냉정한 마음으로 봐야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것도 깨닫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 심겨지는 것 없이 5년 10년 신앙 생활을 할 때 마지막 나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들은 어쩔 수 없었던 날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기를 거절한, 미워한 날들 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하셨습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이런 마음 밭은 갖은 사람들 일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오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거절당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받아 드려지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수 없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향해 어떤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 속에 찾아 오셔서 여러분들을 어둠 속에서 이끌어 내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곤고한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려는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포기해도 주님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포기하시는 적이 없으십니다. 어느 겨울에도 주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의 마음을 드릴로 뚫고 그 속에다 씨앗을 심어 놓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오셔서 다만 우리에게 뿌리실 뿐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마음에 씨를 뿌리실 것입니다. 이번 사경회에도 주님은 그 씨앗을 뿌리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씨앗들을 부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10배 60배 100배의 결심을 맺게 하실 것이고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뿌려진 것 같지도 않게 추억 속에서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사건이 되어서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누군가 신앙에 있어서 지름길이 있다고 가르쳐 준다고 그러거든 그 사람을 쫓아가지 마십시오.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지름길이 있다면 오직 이것입니다. 당신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심겨지도록 기도하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을 주관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능력이 남김없이 여러분들의 마음 밭에 뿌려져서 그 능력으로 역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뻗어 나가고 싶은 만큼 한껏 뻗어 나가게 되도록 여러분들은 그것을 허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어디에도 변화된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거의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고 사경회가 되고 혹은 예배를 드립니다. 시종일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와있지 않습니다. 뭐 하러 교회에 나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 들릴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차라리 하나님을 거슬리며 사십시오. 그것이 정직하고 솔직합니다.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기를 거절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올해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씨앗을 뿌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씨앗을 가지고 오시지 드릴을 가지고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뿌리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실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도로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판단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때가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입니다.
3. 돌밭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말씀을 인하여 핍박이나 환란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우리가 지난 주일과 수요일 두 시간에 걸쳐서 길가에 뿌리워진 씨에 대해서 우리들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제 돌밭에 뿌리운 씨입니다. 오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곧 넘어지는 자라. 아주 앞에 나온 것보다는 훨씬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두 번째 경우를 통해서 굉장히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첫 번째와 같은 상태가 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아주 오래된 상태가 되면 결국은 교회를 떠나지 않겠습니까? 물론 계속 다닐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참된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에서는 정말 이렇게 오랜 동안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고통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말씀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경험을 하니까 또 경험을 했으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자! 이번에는 돌밭에 뿌려진 것입니다. 돌밭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밭은 이런 밭입니다. 흙이 있기는 있는데 속에 돌멩이가 흙보다 훨씬 많은 밭입니다. 그런 밭은 밭을 갈아도 손을 집어 넣고 이렇게 땅속을 긁으면 돌멩이가 몇 씩 붙잡히는, 그것도 큰 바위가 아니라 이런 주먹만한 돌멩이들이 많이 붙잡히는 그러한 밭이 바로 돌밭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돌들이 있고 위에 세월이 흐르면서 흙이 생겨서 흙이 어느 정도 층을 형성하고 있고 밑에는 흙보다 돌멩이가 훨씬 더 많고 돌멩이 사이사이에 흙이 있는 그런 경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요게 길가에 뿌려진 씨앗하고 좀 틀린게 뭐냐하면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그 얘기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전할 때에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깨달았다는 표현은 안 나옵니다만 뭔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다가온 것이 있었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도 그에게 전체적인 복음은 아니지만 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진리에 속하는 어떤 것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었고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리고 거기에 감동도 있었고 거기 에 대한 인격적이 반응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는 훌륭한 신앙으로 데려가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그러나 깨닫고 감격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속에 심겨져서 깨닫고 열매를 맺는 정도라고 할까요 그러는 것들이 이런 밭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그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는 그 모습만을 가지고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얼마큼 심겨 졌는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을 때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말씀을 받아들일 때의 그 모습, 그 태도 밖으로 드러나는 그 표정,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 신앙적인 체험이 가져다 주게되는 여러 가지 형태, 이런 것들은 분명히 표가 나게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태도가 마치 새마을 연수 교육을 받는 것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는 변화가 일어날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이 마음속에 심겨져서 그의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말씀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때 그때에 말씀이 심겨집니다. 말씀이 심겨질 때의 그 사람의 태도는 확실히 겉으로 뭔가 표가 드러납니다.
예를 들자면 세례요한이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든지, 이전에는 많은 죄를 자기가 숨기면서 살수 있었는데 말씀을 듣고 나고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이 자기의 죄를 토해내지 않고는 뱃길 수 없는 회개를 불러온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감정이 모두 메마르고 감정을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황폐한 마음이었는데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나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 풍부한 정서를 가지게 되어서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바 그 은혜 때문에 그 사람이 커다란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난다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워낙 강하게 와서 닿을 때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옳지 못한 영적인 상태와 말씀의 권세가 가져다주는 능력이 충돌을 일으킬 때 그때 사람들은 말씀을 듣다가 어떤 영적인 힘에 압도되어서 정신을 잃다가 쓰러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특별히 그 말씀이 우리의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에게는 그 깨달음이 단지 지식적으로 깨닫는 것 이상에 어떤 표징들을 바깥으로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단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늘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신 어떤 정보나 지식들을 제공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을 때에 당신의 마음을 담아서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습니다. 이 성경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하나 있는데 빈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말 잘합니다. 사줄 마음도 없으면서 야! 언제 한번 저녁 한번 먹자. 그래 진짜“나. 왔는데!” 그러면 “아! 시간이 없어서” 그러고 말이야 음식점에 가서 구두끈이나 열심히 매려고 합니다. 그리고, 빈말 참 잘합니다. 괜히 뭐 별로 예쁘지도 않는데 “세월이 거꾸로 먹는 것 같다”든지 아니면 뭐 다 파파 할머니가 된 사람보고 “처녀 같다”든지 말이지 그 나보고도 말이지 “결혼 하셨어요?” 아부를 해도 비슷하게 해야지 흰머리가 나는데 빈 말 참 잘합니다.
제가 목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정말 어려웠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매일 그러셨습니다. “김전도사! 너는 빈말 잘해야 한다. 목회 하려면 빈말 잘해야 한다.” 그 할아버지 목사님은 정말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심방 가 가지고 저는 지금도, 지금은 많이 고쳤습니다. 심방을 가다보면 그때는 애들이 왜 그렇게 많았습니다. 애들이 보면 잘 생긴애도 있고 못생긴 애도 있고 여러 가지 있습니다. 나는 잘생긴 애들만 “참 잘 생겼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코가 줄줄 흐르고, 걔네 엄마는 빨래도 안해 주는지 지저분한 애들이 뭐가 잘 생겼습니까? 말 안합니다.
그 목사님은 누구든지 코가 줄줄 흐르는 놈을 번쩍 들면서 야! 이쁘다. 하는데 뒤에서 아이구 돼지같이 생겼네! 그리고 또 볼에다 입을 맞춰 주십니다. 빈말을 참 못했습니다. 음식 대접을 받아도 제가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맛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면 진짜 맛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밥 먹고 이 음식이 조리가 잘못 되어 가지고 배를 부여잡고 사택으로 뛰십니다. 심방 하다가 이제 뭔가 볶이는 것입니다. 음식이 뭘 좀 잘못 조리 되어 가지고, 그래도 아! 맛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본다. 그러십니다. 빈말을 참 잘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못하십니다. 괜히 한번 지나가는 소리로 “누구든지 예수 이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런 것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풀어 가는 것은 사실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셨던 그 마음이 성경 속에 담겨있는데 그 풀어 가는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 속에서 살아서 솟아올라서 우리의 돌같이 굳은 마음에 전수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신병자가 누구입니까? 정신병자가 괜히 모두 슬퍼하는데 혼자 낄낄거리면 무섭습니다.
밤에 심야에 전철 타고 주욱- 가는데 옆에서 한사람이 다른 사람 피곤해서 다 자는데 웃는 것입니다. 처음엔 뭐 좋은 일이 있다 했더니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밤중에 말이지 무섭워서 일어나서 저쪽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웃는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잠시 후에 폭력을 쓰는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코미디 같이 설교를 듣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흐느끼시면서 말씀하시는데, 낄낄거리고 웃지 않으면 주로 우리에게 막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모두 좋아서 우스워서 어쩔줄 모르는데, 어디서 꺼이꺼이 울고 있으면 그게 얼마나 코미디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전달되어지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스폰지를 향해서 물이 스며들어 오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스며들어 올 때에 그때에 어떤 정서적인 감동이나 감동을 받는 표가 없다면, 한, 두 주 없는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그런 것이 뭔지 지금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병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매주 그럴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가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후회하는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의로움을 깨닫고 자기와 자기 이웃에 있는 죄에 대해서 분노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서 감격을 하는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완전히 시골은 아니지만 어느 서울에서 떨어진 지방에 설교를 하러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설교를 했지요.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끝났는데 웬 연세 드신 자매님 한 분이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전도사님!” 그래서 “전도사는 내가 목사가 된지 언젠데!” 지금 누가 전도사라고 그러나 “이러구 보니까 10년 전에 옛날에 교회에서 만난 자매입니다. 그때도 결혼했었습니다. 그러더니 다 있는데 막 쓰러질듯이 우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사람 이름도 가물가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 울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에게 감동을 줄 때도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신자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뜨겁게 뭔가 솟아오르는 격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물론 그것자체를 추구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지무각하게 듣는 사람에 다름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런 것들이 잘 억제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주책없이 억제를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잘 통제하는 방법을 잘 배워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인 경험을 하고 쓰러지고, 졸도하고 기절을 해도 안 바뀌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요히 눈물을 흘리고도 일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고 말씀이 우리에게 심겨지는 과정은 단지 지적인 전달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마음이 우리에게 심겨지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의 참된 마음을 알고 나면 자기에게도 어떤 정서적인 영향이 옵니까?옵니다. 어떻게 옵니까?
처음에 저 사람이 참 마음에 안들고 저 사람 말로만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아이구 쥐뿔이나- 이러구 살았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의도적은 아닌데 우연한 계기에 그 사람의 마음의 진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보기에는 틱틱거리고 매일 쥐어박는 소리만 하는데 알고 보니까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 일어납니까? 아! 정말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또 어떤 때는 그렇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뭐 어쨌네, 어쨌네 하는데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이거 순 도둑이여. 자기를 이용해 먹는 그런 놈팡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요? 분노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니, 인간 사이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에 그때에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다면 그 사람 하나님보다 더 높은 사람입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 얘기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경험한 평범한 인생살이를 통해서 한번 유추해 보십시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이야기가 방언처럼 들리면 그런 상태 자체가 병들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깊이 그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데 오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입니다. 가끔 여러분들은 은혜 생활에 있어서 혼란을 경험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 깊이 공감이 갈 것입니다. 뭐냐하면 나의 이 건조하고 메마른 상태를 생각하면 이 은혜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은혜가 필요하다고! 그런데 그래서 은혜를 안받는 것은 아니지마는 은혜를 원하면서도 회의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아무 아무게 형제, 야! 그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 은혜를 받는데 이 사람은 눈치고 뭐고 모두 순교시키고 은혜를 받는 거야. 그게 뭐냐하면 말씀을 들으면 혼자 듣는 거야? 영화 구경하는데 떠들면 안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 자기가 감동을 받았으면 감동을 받았고, 눈물이 나오면 틀어막고 울던지, 그것도 못 견디겠으면 밖에 나가서 울고 와서 예배를 드리던지 할 일이지 꺼이꺼이 소리를 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만나고 슬퍼한다는데 그것도 가서 때려 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참 그렇게 은혜 못 받는 내가 못난이지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봐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눈동자가 초롱초롱 한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면 먼저 나와서 은혜를 받고 이 형제는 특수한 인간입니다. 일주일동안 잘살면 잘살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못살면 못살았으니까 회개하며 은혜를 받고 엎으러 메치나 뒤로 메치나 하여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몇 달 있다 보면 뒤로 물러가 앉아 있는 겁니다. 장소적으로 뒤로 갔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가 있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 감격도 사라지고, 그 은혜도 사라지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에는 안개가 자욱히 끼고 말이지 그래가지고 오뉴월에 병든 닭 모양 예배당에 와서 매일 졸고 그렇게 맥없는 신앙생활 하는걸 보면서 이제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나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는지 혼동에 빠지는 겁니다. 아! 그러면 둘 중에 하나를 부인해야 하거든 이 사람이 이렇게 막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현재의 삶을 부인하던지 아니면 옛날에 받은 은혜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던지 그런데 가만히 보면 옛날에 받은 은혜가 무슨 신비한 은혜를 받은 건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괜히 은혜 받은 것이 아니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늘 고백하기를 “나는 말씀 아니면 못 산다.!” 매일 이러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 아니면 못 산다고 그러고 은혜를 받고 격렬한 반응도 보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기쁨도 나타나고 그리고 무엇인가 변화 받은 증거가 조금씩은 나타났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되지 않아서 완전히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있고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감동도 없는 그런 상태에 와 있는 사람 오히려 말씀에 대한 반발심이나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속에서 자라고 있는 그런 실패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상상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늘 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바라보면서 어떤 반응이 오느냐 하면, 그렇게 은혜를 받고 “아멘! 할렐루야” 이러는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다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신앙생활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고 그런걸 빼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10사람 중에서 90명이 도달하는 곳은 뭐냐하면 윤리 문제입니다. 윤리문제.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도덕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삽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나오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요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잠자는 것도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에 잠자는 것이 그냥 직장 다니는 사람이 피곤해서 엎어져서 자는 거다 생각했지만 여러분들이 침대 위에 누워있거나 구두를 짊어지고 누워 있을때에 그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말하자면 여러분의 인생이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인생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영역이 신앙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신앙과 삶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신앙과 삶은 구분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뉘어질 수는 없는 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자! 그렇게 신앙과 삶이 나누어질 수 없는데 신앙과 삶이 쪼개어지거나 나뉘어지거나 구분되어질 수 있는지 모르지만 분리될 수 없는데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그렇게 해 나가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이 속에서 말이지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독특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내적인 원동력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하지만 삶은 살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자 그런데 거기까지는 생각은 할 수 있는데 정말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은 그로 하여금 그렇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솟아나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치고 싶어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격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적인 충전이 없이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진정한 변화는 포기하고 단지 외형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도 해야한다, 저런 것도 해야 한다, 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율법들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자신을 끼어 맞추려고 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바로 이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이겁니다.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씀을 들으면서 커다란 체험, 여러분들도 수시로 봤을 겁니다. 그런 것을 그러던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게 삶도 없고 도덕도 없고 견고함도 없고 모두 무너져 내려 버리고 막판에 가서는 신앙생활을 막 해버리고 아예 하나님까지 막 봐 버리는 이러한 패역한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다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말씀이 뿌려졌을 때 감동을 받는데 살며시 마음에 심겨졌느냐 충격적으로 심겨졌느냐 강력한 충격을 동반했느냐 조용한 깨달음이 있었느냐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심겨졌는데 그 속이 돌밭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푹 심든, 사르륵 심든, 어떤 충격적인 체험과 함께 말씀이 심겼던 아니면 고요하게 스며들듯이 심겼든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밭입니다. 돌밭이라! 내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상은 됐는데 착상된 다음에 뿌리를 내려야 되는데 뿌리가 즉시 돌멩이에 가서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땅과 식물의 성장은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정말 볼 때에 멋있는 나무, 아주 쑥 자란 나무, 뭘 보면 아느냐하면 나무를 이렇게 잘라 버리면 압니다. 딱 자르면 나무의 나이테가 나오는데 빛이 잘 들고 기름진 땅에서 자란 나무는 나이테와 나이테 사이에 간격이 쭉쭉 뻗어 나갑니다. 간격이 넓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 나쁜 땅에서 자란 나무는 잘라보면 나이테와 나이테가 아주 좁거나 붙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1년 동안 자랐는데도 별로 성장을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번에 “충무”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 왔습니다. 거기 SFC 의 어린 지체들이 모여 있는데 거기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 왔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바다까지 못 나가보았습니다만, 지난번에 갔을 때는 배를 이렇게 태우고 사공이 금강 쪽으로 가면서 바위 산 위의 나무를 가리키면서- 1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1미터 몇 센티라고 하던데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말을 곶이 듣지 않습니다. 상당히 많이 뻥이 붙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1000년 되었다고 합니다. 신라 시대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1000년을 자랐는데 1미터가 조금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라보면 나무 테가 발견이 안되는 것입니다. 바위에 간신히 붙어 가지고 조금씩 물기를 먹고 거기에 얇은 흙에 붙어서 자라면서 거기에서 강한 비바람을 맞으면서 그 속에서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땅과 식물의 성장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뭐냐하면 이 씨앗이 떨어지는데 못 자라게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마음의 밭이라고 하는 것이 틀림이 없는데 그러면 이 돌멩이가 의미하는 것이 뭐냐? 이거고 또 하나는 그러면 왜 넘어졌느냐 하는 이것입니다. 결국 결론은 뭐냐하면 말씀을 인하여 핍박이나 환난을 인하여 넘어지는 것이 돌밭에 뿌려진 씨앗, 거기에서 난 신앙의 나무에 말하자면, 결국 신앙의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는 견디나 그러나 말씀을 인하여 핍박이나 환난이 올 때에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도 그랬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어느 지점에 주목을 하느냐하면 말씀을 인하여 환난과 핍박이 올 때를 주목합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이 사람이 넘어진 것은 말씀을 인하여 환난과 핍박이 왔을 때 넘어졌다. 우리는 말씀을 인하여 환난과 핍박이 와도 이기며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이런 식의 논리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강조점은 말씀을 인하여 환난과 핍박이 왔기 때문에 이 나무가 넘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환난과 핍박이 불어 올 때에 나무가 쓰러지는 것이 정상이라고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은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나무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시련이나 박해를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시련이나 박해를 당할 때에 쓰러지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점은 핍박이 여기서 강조점이 아니라 돌멩이가 땅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무가 자라지 못했다는데 중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강조점으로 옮겨가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려고 하면 박해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방향의 차이가 있지만 핍박과 박해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기만 하겠습니까? 마귀가 여러분들이 이제 세상 돌아다니면서 술 먹고, 나쁜 짓 하고 온갖 못된 짓 다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면서 살다가 이제는 손들고 와서 주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하는데 마귀가 여러분들을 보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어어. 너 믿는구나! 충성스럽지 못한 귀신은 그럴지 모릅니다. 마귀가 만약에 자기네 나라를 포기했다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림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려고 할 때 은혜를 받고 마음이 평정되고 예수의 참된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을 이어가려고 할 때에 결정적으로 거기에 칼 디밀면서 여러분의 그 은혜로운 신앙의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하는 놈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기억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신앙 생활에서 이 점을 계산에 넣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들은 중요한 오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진공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교회 다니면서 어두움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무엇인가 하나, 둘, 셋 깨달으기 시작하면서 캄캄하던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 속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에 그때, 불안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 속에서 여러분들을 실컷 속여먹어서 이때까지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의 자녀 사표 내게 하고 그리고 신나게 종처럼 부려먹었는데 그런데 이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마귀 이거 아무 것도 아니잖아? 이놈이 이거 괜히 큰소리 친 거 아니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어린이들 동화에 나오는 아기가 통곡을 하면서 웁니다. 엄마가 “울지 마라 호랑이가 온다.” 해도 대성통곡하면서 웁니다. “울지 마라 곶감 줄께 울지 마라” 뚝! 그칩니다. 밖에서 호랑이가 듣고 있다가 야! 곶감이 나보다 더 무서운 놈이구나. 마지막 죽을 때에 유언을 남겼는데 “얘들아! 곶감을 조심해라!” 이 영험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곶감을 조심해라 하니까 “곶감 어떻게 생겼냐?”아무도 모르는 신비에 쌓인 존재입니다. 약은 여우가 와 가지고 “호랑이 선생님들은 무서운 것이 없겠네요.!” 멍청한 호랑이가 “꼭 하나 있어!” 무엇입니까? 곶감! 어떻게 생겼어요? 몰라! 누가 아는 사람 없어요? 본 사람이 없어. 어느 날 여우가 이상한 탈을 하나 쓰고 여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우는데 울음소리가 독특합니다. 곶감! 곶감! 그러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부복해 버렸습니다. 식민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우는 굴속에서 호랑이들이 날라 오는 고기를 받아먹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똑똑한 호랑이 하나가 이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저놈이 도대체 누구이관대 우리 백수의 왕인 호랑이를 심지어 잡아먹기까지 하다니 이럴 수 있느냐 죽어도 한번 붙어 보겠다. 아니면 저 굴속에서 지낸 지 3년도 더 되었으니까 옛날에는 용맹스러웠어도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고 몇몇 특공대를 조직해 가지고 어른들 몰래 “돌격 앞으로!”해서 탈바가지를 벗겨 보니까 여우입니다. 윗목에는 호랑이 가죽이 득실득실해요. 여우가 호랑이를 잡아먹은 것입니다.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인생이 패배 자체를 숙명처럼 생각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알고 보니까 저거 아무 것도 아니쟎아! 이렇게 생각되기 시작할 때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가 누구겠어요? 마귀의 존재 아니겠어요? 가만 내버려 두겠습니까? 반드시 개입하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여러분들의 삶을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할 때에 여러분! 마귀가 우리에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는 우리에게 보태줍니다. 그래서 신앙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갈 때 형통하게 해줍니다. 돈도 벌게 해주고 이러면서 그릇된 길로 가게 해주는가 하면 어떤 때는 또 쓸데없이 공포와 두려움을 주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을 해나갈 때 마귀가 이런 식으로 역사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환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핍박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런 신앙이 있다고 가르치면 거기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건 거짓말 신앙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신앙이 없습니다.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능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스타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참 진리를 쫓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이면 핍박과 환난은 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박해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쓰러졌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전라도 지방에서 오신 어느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라도 지방에 내려갔었습니다. “여기는 어떠세요?” “목사님! 우리 지방은 감사하게도 요즘도 핍박이 계속 있습니다.” 핍박이 있는 게 왜 감사해요? 핍박이 있으니까 오히려 교회가 부패하지 않고 목회자들이 정신차리고 교인들이 똑바로 살아서 복음이 확장된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이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방법은 교회를 핍박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끼리 핍박하면 안됩니다. 그건 싸움이지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을 하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겁니다.
무엇하고 똑같으냐하면 요즘에는 잘 없지만 옛날에 시골에서 사마귀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사마귀가 몸에 나서 막 긁어대면 두어 달 있으면 긁어서 바이러스가 옮겨져 가지고 더 많이 콩 튀긴 것처럼 잔뜩 낍니다. 그것을 돌에다 문지르고 그럽니다. 문지르면 거기서 바이러스가 나와 가지고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박해를 하면 오히려 환난이나 박해를 받으면 정상적인 말씀에 서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박해를 통해 축복을 받습니다. 왜 아멘을 안하십니까? 할렐루야! 박해를 받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박해와 환난이 오게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더 강력하게 뻗어나가는 그런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냐 하면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해주고 나중에 5세기에 가서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부터 급격하게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무조건 교회에 가서 출생신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저절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된 것입니까? 기독교가 국교라고 하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라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러십시오. 못나옵니다. 없습니다. 다 부패했습니다. 정부의 끔찍한 보호를 받는 종교 치고 생명이 있는 종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박해받는 곳에는 참된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가 이어져 나옵니다. 열매를 맺고 뻗어져 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런 논리를 가지고 보면, 쓰러진 이 경우의 문제는 만약에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이 사람의 경우에는 환난이나 박해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돌밭에 뿌려진 것이 문제가 된 겁니다. 씨도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밭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돌밭입니다.
자 그럼 적용을 해야되지 않습니까? 그게 뭡니까? 뭐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본문을 보면서 가슴에 깊이 다가오는 것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이 돌멩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상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충돌하지 않는 한 받아들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옵니다. 자기의 마음이 곤고하니까 할렐루야! 아멘! 또는 격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까 그 형제처럼 꺼이 꺼이 울 수도 있고 아니면 졸도 할 수도 있고 온갖 난리를 다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외형을 보고 말씀이 얼마나 깊이 심겨지고 있는가를 직접 연결 지어서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니 그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100% 반영해 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니까 좋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한 주일에 세 번씩 설교를 하는데 그것만 들어도 과한데 뭘 집회에 가면 쫓아옵니까? 거기 가보니까 여기서 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한 이야기를 또 하지 여기서도 안해 준 이야기를 왜 해주겠습니까?
우리 교인들이 더 좋고 또 가면 또 쫓아옵니다. 그랬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언젠가는 그 말씀이 좋은 것 같아도 본질적으로 나를 변화시킬 때는 그 말씀이 달콤하고 신나고 좋은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노출하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승복 받고 싶지 않던 그 부분을 찌르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쓰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나옵니다. 뭐냐하면 두루말이를 먹어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말이를 먹습니다. 입에서는 너무 너무 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배에서 내려가니까 어떻게 됩니까? 심히 쓰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을 듣는 것 자체는 기쁘고 감동적인데 속에 들어와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 아집, 인간적인 선입견 그 다음에 복음을 자신의 상식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하는 마음 이전에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개똥 철학 같은 신앙 생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충돌을 하게 될 때에 그때에 양보를 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뿌리를 못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격렬한 체험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면서도 마귀가 와서 툭 건드리면 핍박입니다. 환난이나 핍박을 그렇게 집요하게 보내지도 않습니다. “계속 믿을 거야?” 이 한마디만 해도 “으-악” 쓰러지는 사실 마귀의 협박이요 핍박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합니다. 결국은 죽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진짜로 와 가지고 우리를 해치고 그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뭐 괜히 폼재지요. 계속해서 깨닫고 계속 하나님을 사랑 할거야? 그러면 “그래 할거다!” 그러면 금방 도망간다고. 그런데 그만 그 한마디에 녹는 것입니다. “으-악” 그리고 자기 혼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뭘 몰라요? 그까지 것 모를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신앙이 돌밭과 같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코미디 같습니다. 뭐 좀 하는 것처럼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고 떨기는 왜 떱니까? 도대체 정신이 없어서 옆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막- 그러다가 마귀가 와서 스윽- 한번만 하면 -으악- 하고 쓰러집니다. 그게 뭡니까?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처음에 아멘! 하고 받았던 말씀을 비난하면 안돼요. 우리는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한다고. 으응- 그건 가짜 였을거야. 그건 참 말씀이 아니었을거야. 아니면 허풍이었을거야. 아니 허풍이 아니라 조금 심겨진데도 마음에 커다란 찔림을 가지고 심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는 자체대로 받아들이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이상은 안 받아들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돌밭에 뿌려지는 그러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됩니다. 더군다나 이제 그후로 계속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내면에 있는 돌멩이와 같은 아집, 선입견, 신앙, 교만 뭐 다양한 죄의 문제 이런 것들을 자꾸 건드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제 그 싸움 자체가 너무 지겨워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문제삼지 않는 그러한 그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와 같으냐 하면 성경을 뷔페로 생각하는 것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죽- 차려놓고 이쪽 코스에서부터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파란색으로 좍 나가서 레위기는 피가 많이 나옵니다. 붉은 색으로 시작해서 좍- 해서 요한계시록 황금빛까지 쭉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기서부터 지나가는 것입니다.
큰 젓가락을 가지고 말씀의 뷔페를 먹습니다. 창세기 1장 난 진화론자니까 이건 마음에 안들고 다- 이렇게 하고서 자기 좋은 것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것이 신앙이 되겠습니까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에 적합하지 않은 편견, 아집, 멍청한 생각, 그리고 죄에 대해서 결별하지 않으려고 하는 죄에 대한 사모함,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노출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은닉,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줄 아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뿌리를 내리되 그러한 돌멩이는 건들이지 말고 지나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더 못 자라는 겁니다. 말씀 자체가 자신 속에 심겨지지 못하고 자신의 그릇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질식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핍박이 조금만 와도 견딜 수 있는 뿌리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떠한 반응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격렬할 수도 있고 점잖게 할 수도 있고 눈물 펑펑 흘릴 수도 있고 콧물 흘릴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안 나오고 조용히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않아요? 그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뿌려진 다음에 그 씨앗이 그런 것들과 걸리는 겁니다. 양보를 안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여! 내 마음속에 심겨지되 나를 모두 용납하고 나를 부수지는 말고 내게 적응하면서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거라. 그런 사람의 마음이 존재하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의 마음이 좋아하는 나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안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가지고 목회자들은 가끔, 인간적인 배신,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왜냐하면, 처음에 말씀 듣는 것 보니까 무너지고 막- 난리가 났거든? 그렇게 은혜를 받다가 금방 아무 것도 아니듯 쓰러지고 나가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적인 배신,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마음 밭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최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근본적인 자신의 변화를 싫어하면 모두 두 번째 케이스에 해당될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신데 하나님의 나라는 부수면서 다가옵니다. 여러분 속에 세워져 있는 잘못된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적군과 승리를 하고 싶지만 그러나 전쟁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돈주고 나라를 팔고 사기전에야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내주겠느냐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돈 받고 내어 주시겠어요? 마귀가 자기 세상의 나라를 하나님께 돈 받고 내어 주겠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결국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고 완전히 속에 내면의 세계가 새로워지기를 택하던지 아니면 그만 두든지 둘 중에 하나지 자기는 자기 속에 있는 아집과 변화되지 않는 것들이 파괴될 때 오는 고통은 하나도 안 느끼고 말씀이 가져다주는 축복과 은혜와 그런 행복은 그대로 느끼고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양수겹장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지 불가능한 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의 마음이 마귀에게 완전히 지배를 받을 때 평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때 평화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마귀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투쟁을 하고 있을 때 평화가 있겠습니까? 질문이 어렵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이루어질 때 평안하다는 것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 마귀에게 항복해 버리고 말하자면 악한 세력이 우리의 마음속을 지배하는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다음에 세상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갈등하는 나라가 평안하겠습니까? 전자입니다. 항복하고 완전히 져버리고 나면 평화가 찾아오는 겁니다.
여러분! 캄보디아에 전쟁을 기억해 보십시오. 정부군과 반군이 싸우고 있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사이공에서도 그랬습니다. 아오자 입고 밀짚모자 쓰고 가다가 아가씨가 주머니에서 뭘 주물럭 주물럭하고 가더니 수류탄을 휙- 던지고 도망가는 겁니다. 그러나 팀과 도망가고 정부군이 항복하고 나니까 총소리가 들리기는 들렸는데 그 총소리는 사람 죽이는 총소리가 아니라 축포 터트리는 소리였습니다. 평화가 온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속에 있는 돌멩이와 같은 요소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변화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 속에 심겨지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 한계는 한참 있다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즉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곧 넘어지는 자요. 곧 넘어지는 겁니다. 말씀을 인하여 박해가 올 때 툭 치니까 그 자리에서 금방 넘어지는 자입니다. 마치 신앙이 전혀 없는 자처럼- 보십시오. 한때 말씀을 인하여 감격을 하고 뒤로 물러서면 그래도 말씀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좀 고상하게 물러섭니까?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떨어지고 마음속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밑바닥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부잣집 뜨물 통이나, 가난한집 뜨물 통이나 위의 맑은 물 따르고 나면 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음식 찌꺼기지 부잣집에서는 그 속에서 금이 나옵니까? 아니면 무슨 쌀이 나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속에서 받는 도전이 이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그 우리의 옛 자아 우리의 편견, 우리의 아집, 우리의 개똥 철학, 이런 것 하나도 못 부순다는 말인가? 대답은 뭡니까? 그렇다 입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앞에 나오는 땅 이런 것은 뭘 말하느냐하면 사람의 노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놓여 있는 상태를 그대로 이 비유에 투영을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좋은 밭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좋은 밭이라는 이야기는 물론 파내도 돌멩이가 안 잡히고 허공을 휘저어도 가시나무 떨기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좋은 밭입니다. 그러나 성경하고 모순됩니다.
성경에는 그런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뭐가 그 마음속에 형성되었는가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사람들 중에는 순결한 사람이 없고 그렇게 옥토와 같은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자연적으로 있을 수 있다면 성경을 바꿔 써야됩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여러분들이 그 사람 법 없이 살 사람입니다. 그 사람 마음은 옥토와 같아. 어쩌면 마음 밭이 그렇게 고와. 그렇게 말 할 수 있겠지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없이는 그런 밭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될 수 있다면 그건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너 왜 이렇게 밖에 열매 못 맺었니? 제 밭은 돌밭입니다. 머리에도 돌, 마음에도 돌. 저는 돌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미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옥토라고 하는 그것은 무엇을 내포하고 있느냐 하면 이런 사람은 이미 옥토입니다.
이 사람도 만약에 죄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주 아집 덩어리입니다. 아니 주님 없이 살아 왔는데 아집이 없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지 않고 형성된 모든 것들은 전부다 하나님 앞에서 거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이 철학 없이는 못 살거든요? 자기의 인생에 대한 견해 없이는 못 삽니다. 그런데 견해 중에 어떤 것은 좋은 견해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그런 것 얼마나 좋은 철학입니까? 요즘과 같은 때에는 더 요긴한 철학 아닙니까? 예를 들자면 무슨 또 약속을 어기는 사람 나는 상대도 안한다. 그것도 좋은 철학입니다. 자기는 실천을 할테니까. 그 다음에 뭐가 있겠습니까? 한번 나를 배반한 사람은 다시 안 본다. 그런 것도 무슨 정치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뭐 이런 온갖 이상한 것들 가지고 나름대로 하나씩 세상 속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것 하나씩 골라서 삽니다. 그렇게 계속 오래 살고 나면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가 좋은 그런 것들이 자기 인생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마는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지 않은 인생에 대한 철학, 견해, 사상, 고집, 신념, 신조, 규칙, 개인적인 규범,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들을 만나는데 반드시 문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게으르고 나태했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매일 엄마가 치닥거리 해주어야 하고 아빠가 돈 대주고 사고 치고 나면 할아버지가 돈 보태주고 매일 이러고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건수 올리면 누가 도와 줄 거다. 사고는 내가 치지만 그러나 돕는 자는 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의타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해도 늘 의타적이야. 늘 가자고 끌어야 교회에 나오고, 발로 차야지만 똑바로 앉고. 이런 신앙 생활을 한다고. 그러나 반대도 있쟎아요? 워낙 혼자서 잘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예뻤고 좀 커서는 공부를 잘했고, 직장생활에서는 유능했고 그리고 상사가 된 다음에는 부하들을 잘 통솔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야단 맞아 본적도 없고 워낙 똑똑 한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칭찬만 받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책망 받는 것은 견딜 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형성된 것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아는 은혜의 물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거치는 것들을 가져다준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모두 거치는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거치는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열심이 있었습니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흠 없을 수 있어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는 흠이 없다고 자기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유대인의 지파에 속했습니다. 정말 훌륭했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잘 산 그것 때문에 나중에 뭘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만나게 했다는 겁니다.
가마리엘의 문화에서 학문을 배우고 이런 모든 과거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기의 인생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만들어주는 좋은 특징 좋은 조건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못 만나게 되는 장본인이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 인생에 없을 때에 유익하던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그것을 배설물 같이 여긴다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깊이 잠기는 것에서 형성 된 것만 하나님 앞에 귀하고 나머지는 반드시 부작용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옥토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고집도 가지고 있고 나도 누구에게 말싸움해서 지기 싫어하는 내 인생의 신조가 있고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안보는 신념이 있습니다. 자기주의 주장이 있습니다. 무골호인 같은 사람이 신앙 생활 잘 하는 것 보았습니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사람들은 성격적으로 신앙 생활 잘 못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 자체가 커다란 바위 덩어리입니다.
철학 자체가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간들 어떠하리 안간들 어떠하리 거기에다 말씀을 막 쪼개고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이것은 옳고 이것은 아니구나 이렇게 지적인 작용이 막 일어나는데 그러면서 삶이 성결해지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뭘 그렇게 자꾸 따지나! 그냥 엉기덩기 어울려서 한세상 믿다가 죽으면 되지. 그게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 있습니다. 제 마음에도 있습니다. 제 주장이 있습니다. 싫은 사람 있고 좋은 사람 있고 이런 주장, 저런 주장 다 있습니다. 있다고 해서 이것이 모두 돌밭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겁니다. 그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난 아무 것도 아니구나!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남김없이 자기가 모두 부서지고 주님의 사상 주님의 은혜 주님의 놀라운 지식만이 자기의 모든 것을 지배해주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마음은 이 속에 모든 것 다 가지고 있어도 그 밭은 이미 돌밭이 아니라 어떤 밭? 옥토와 같은 밭입니다. 자연적으로 옥토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나오는 경우는 결국은 뭘 우리에게 명백하게 일러주는가 하면 이건 단지 한 사람이 아집이나 독선이나 신앙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나 내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숨걸고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나라가 고사 되더라도 자신의 아집, 자신의 편견, 자신의 잘못된 인생의 철학은 바꿀 수가 없다라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 아닙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열심을 내도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하나님 은혜를 받고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여러분 속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그 돌멩이를 끔찍이 사랑하며 사는 동안은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환난이나 박해가 안 왔기 때문에 그냥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러고 다니지만 언젠가 말씀을 인하여 박해가 일어나면 여러분들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서 만났던 것들은 그야말로 바람결에 흩날리는 추억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삶의 근본적인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이 장난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12장에서 만났던 유대인 지도자들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처음부터 예수님께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면 할렐루야! 아멘!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찬송 부르면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는 예수님 말씀 없이는 못살아! 하며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어떻습니까? 감격은 있었고 눈물도 있었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문제는 자기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자기 속에 있는 아집, 편견, 그리스도가 기반이 아닌 삶의 수많은 그런 잘못된 요소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끔찍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로 발견된 겁니다. 조나단 에즈워드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선포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두 번째 케이스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은 요한을 통해서 일어나는 부흥은 참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참된 것이라기보다는 진실한 메시지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말씀의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이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경계를 했습니까? 그런데도 그건 참된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 없이 계속 교회를 다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대한 감각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사랑이나 감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 속에 얼마나 놀라운 재창조가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아멘! 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단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알았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에게는 자랑거리가 되는 것아 아니라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이 깨닫고 그렇게 밖에 못살았냐 할 때에 우리가 할 말이 있습니까? 그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애들이 숙제 안해 와서 하는 말이 뭐예요. “몰랐습니다.” “잊어버렸습니다.” “까먹었습니다.” 마찬가지 말인데 반복해서 말합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 알았는데, 다 깨달았는데. “안했습니다.” 왜? 나는 내 안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내 안의 아집을 더 사랑했습니다. 내 안의 고집, 내 안에 있는 편견, 내 안에 있는 인간적이고 주워들은 잘못된 그런 내 자신의 철학, 어설픈 인생의 견해 이런 것들을 나는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세상나라에서는 삐까 뻔쩍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에게 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하는 동시에 오히려 자신 속에 세상의 나라가 심겨지는 것을 기뻐한 그런 식의 선택을 한 사람으로 비춰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밭이 숙명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내일부터 사경회 합니다. 오기만 하면 무엇을합니까? 사경회하면 뭘 합니까? 그 밭 가지고 나와 가지고 주님! 상식만 건드리지 말고 상식적으로 다가오시옵소서. 주님! 제 선입견이 말씀보다 한 수 위 아닙니까? 제 밑에서 노실려면 오십시오. 이런 식으로 말씀 듣고 참석해서 나오지 않는 닭똥 같은 눈물 흘리고 그게 뭡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면 얼마나 코미디 같겠습니까? 이건 뭐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매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감사한데 왜! 우리 속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거부합니까? 요즘 독자들에게 부쩍 많이 받는 질문! 독자들도 그렇고 “목사님 책을 보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게 뭡니까?” 당신 한글도 모릅니까? 만난다는 것이 만나는 것이지 뭡니까? 그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만난다는 것 하고 좀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럼 설명을 친절하게 해줍니다.
만난다는 것은 여러분! 반찬 사들고 지나가다가 뒷집 아줌마 만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호떡 사 가지고 오는 아줌마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아줌마! 오랜만이네? 응! 그래!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새댁? 저요. 슈퍼에서 두부하고 콩나물 사 가지고 오는 길이야. 요사이는 IMF 시대라 반찬값도 많이 듭니다. 나는 호떡 사 가지고 가는 길이야. 잘 가!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호떡 사 가지고 오는 아줌마를 만났기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습니까? 그런 건 만난 것이 아닙니다. 만난 것은 만난 것이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 다른 경우 예를 들어봅시다. 그것보다 조금 더 한 경우, 전철을 타러 가는데 오래간만에 누가 와서 어깨를 툭 치는 겁니다. 어! 10년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야! 너 진짜 반갑다. 오늘도 우리 동창목사님 한 분 왔습니다. 딱 10년 됐습니다. 미국에 갔는데 요즘 우즈베키스탄의 선교사로 있습니다. 나오고 보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정말 오래간만이라고- 끌어안고 가서 제방에 가서 같이 식사까지 했습니다. 반갑기는 반갑습니다. 아까 동네 집 아줌마 만난 것보다는 사건은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바뀝니까? 두고봐야 알겠지만 아직은 안 바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에 가다가 모르고 지갑을 떨어뜨리고 갔습니다. 형제가 주워서 “자매님! 자매님!” 불렀어요. 왜요? 얼굴도 못생겼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자매님이 이 지갑을 떨어뜨리고 가셨어요. 그래요? 그러고 준 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은 인생에 영향을 준 만남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종류가 있고 차원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못 만나고 가는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적은 거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와서 주님 안녕하십니까? 주님한테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는 것도 이상하지요? 하나님! 저 왔습니다. 그래! 너 왔냐? 그리고 특별한 느낌은 없어도 하나님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스펄전이 16세 때 시골교회 잠깐 갔다가 목사님이 시골 교회에서 말씀 전하는데 졸았습니다. 교인이 3명밖에 없는데 1명이 졸았으니 3분의 1이 졸은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이보게 젊은이! 눈을 들어 예수를 보게!‘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 아닙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그런 것들은 결국은 반드시 우리의 삶에 어떤 깊은 변화를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그런 돌멩이들 그냥 가지고 황금을 보기를 돌처럼 하라고 그러는데 사람들은 돌을 보기를 황금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 돌, 머리의 돌, 가슴의돌, 모두 부여안고 내 평생 이 돌 이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 가지고 있었던지 그 어떻게 합니까? 생겨난 것을 그걸 누가 갔다주었든지 어떻게 합니까 여태까지 붙들고 살아온걸 괜찮습니다. 할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앞에 그런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돌멩이들 가지고는 이런 돌멩이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보다는 하나님 이런 것들 모두 부수시고 내 안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나무를 심으시옵시고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심겨져서 내 안에 이런 것들을 모두 파괴시키시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이런 잘못된 사상과 사고의 돌멩이보다도 훨씬 하나님의 나라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그 통치의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겠사옵나이다. 하면서 비우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것은 돌밭이 아니라 옥토와 같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애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것이고 그 만남이 여러분들의 생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의 물을 먹고 은혜의 햇빛을 받아도 자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물의 수질이 나쁘거나 햇빛의 질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돌밭에 심겨진 나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돌멩이에 막혀서 뿌리가 못 내려가는데 물을 아무리 많이 부으면 뭐 합니까? 물만 부으면 뿌리가 썩어 버립니다. 그리고 햇빛이 많이 비추어지면 말라버립니다. 어떻게 합니까? 근본적인 해결을 하기 전에는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신앙이라는 세계에 들어와서 이방인과 같은 생활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 이젠 어느 쪽을 택하실 차례입니까? 내일서부터 말씀의 씨앗은 뿌려집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대답을 하실 차례입니다.
4.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돌밭에 뿌리 운 것은 결국 지난주에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상당히 장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굉장히 많은 신자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이 두 번째 경어(*)를 굉장히 많이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 말씀의 뿌리가 계속 땅속 깊히 박혀 들어가야지만, 견고함이 있고, 견고함이 있는 것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화려한 꽃을 피우느냐하는 문제도 결국은 뿌리가 얼마나 건강하고 그리고 든든하게 땅에 박혔는가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은 그리고 잠시 기쁨으로 받지만은 그러나 말씀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곧 쓰러지는 것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 비유 두 번째 것을 읽으실 적마다 주의하라는 말씀을 드렸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제는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온 게 강조점이 아니라 뿌리가 약하다는 것 그것이 강조점이다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말이죠, 핍박이 없다면 참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갈등을 전혀 느껴보지 않았다. 갈등이 없는 신앙생활을 했다. 그건 가짭니다. 우리가 참 신자이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어 있고, 참된 신자라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말씀으로 인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박해와 핍박을 경험하게 끔 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박해와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을 때마다 쓰러진다면 그것을 어떻게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강조점은 환난이나 핍박 자체가 너무 커서 신자를 완전히 말하자면 신앙에서 도망가게 만들고, 배교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으로 인한 핍박과 환난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견고함의 깊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처녀적 신앙은 모릅니다. 너무 그렇게 자아도취하지 마십시오. 시집가봐야 압니다. 시집가서도 즉시는 모릅니다. 애를 하나 낳아봐야 압니다. 하나를 낳아도 바닥까지는 안 드러납니다. 둘 낳아보면 그것도 연년생이나, 쌍둥이 낳아보면, 드디어 믿음의 현주소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총각 때 믿음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모릅니다. 직장들어가봐야 압니다, 자기 마음대로 책임도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졸병 땐 모릅니다. 책임이 주어지고, 혹시라도, 이런 사태가 오면 짤릴 수 있는 중견 관리자가 되어서 이중장부 쓰라고 협박이 들어오고, 그런 상황이 되어봐야지만, 이 총각의 믿음이 진짜 옛날 총각 때 믿음이었나, 그것은 그때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해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 경우에 이렇게 곧 쓰러지게 된 것 이것은 결국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박해나 시련이 너무 많아서 쓰러진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뿌리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강조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모로 하나님이 많은 가르침들을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뭡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좀 뿌리를 내리려고 그러는데, 돌멩이와 같은 자기가 아직 많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면 사정 볼 것 없이 땅 속으로 쭉 뻗어야지 그래야지만, 그 나무가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하기에 나무가 이렇게 서 있으닌깐 ‘어휴, 저거 늘 그 자리에 잘 서 있네’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무는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충청도에 있는 어떤 나무는 1200년 묵었다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큽디다. 두 사람이 끌어안아도 그것을 한 둥치를 못 안을 정도로 큰 나문데, 식물학자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하루에 열 두 드럼에 물을 먹는답니다. ‘별로 놀라지도 않네! ’ 암튼 열 두 드럼을 먹는답니다. 그러니 그 뿌리가 얼마나 박혀 있겠습니까. 땅 속에 뻗었으면은 마구 뿌리가 원하는 대로 마구 뻗어나가야되잖습니까. 물을 찾고, 영양분을 찾아서 뻗어나가야지만, 땅을 움켜쥐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지 않겠습니까. 내려가려다 보닌깐 돌멩이가 있는 것입니다. 피해 가려고 보닌깐 또 다른 돌멩이가 있는 겁니다. 살살살살 피해가지고 가닌깐 이 뿌리가 나무가 굵을려면은 뿌리가 굵어야되는데, 근데 이돌 저돌 피해가다 보닌깐 돌 사이로 뻗어나간 그 뿌리가 얼마나 가느다랗겠냐 이겁니다. 그러닌깐 자라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람만 후~불면 쓰러져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옵니다. 어느 날 말씀을 들었습니다. 깨달음이 왔습니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 기쁨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 맞어, 하나님에 진리의 세계가 바로 저거야, 저렇게 살아야해, 그리고 아멘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얼굴이 확 피어나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고 얼굴엔 힘살이 쭉 빠지기 시작합니다. 근데 문제는 뭡니까. 그게 이제 뿌리를 내려야 되잖아요? 그러닌깐 말씀이 이제 좀더 깊히 들어갑니다. 그래서 깊이 들어가는데, 속에서 말씀이 좀 뿌리를 내리려 그러는데 그 속에 단단하게 뭉쳐있는 이 돌멩이 같은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 이게 안 허물어지는겁니다. 그러닌깐 피해갑니다. 피해갔더니 그 옆에는 또 인간적인 사고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또 피해갑니다. 그러닌깐 여태까지 신앙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던 그런 이상하게 뒤틀린 자기 가치관이 또 옆에 있는 겁니다. 또 피해갑니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하나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하나도 안 깨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뭐냐면,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안에 사시길 원하신다면 내 사고방식에 쉽게 빨리 적응하는 방식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참 잘났습니다. 그러닌깐 ‘주님 제가 주님께 순종하겠나이다. 내 사고방식과 충돌을 안 일으키는 한’ 이렇게 단서를 붙이닌깐,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본질이 고침을 받아야지 새 사람이 되는데, 아니 이렇게 뛰고 저렇게 뛰고 다 빠져나가서 결국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그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만든 그 본질적인 문제는 변화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닌깐 대부분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 오면 어차피 이 사람은 말씀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했으닌깐, 환난과 핍박은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닌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씀을 버리고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이 누구인지 분간해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맨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하는 사람, 그러다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깊히 괴로워하는 사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무너지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는 자기를 안 무너 뜨릴려고 몸부림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괴로워하는 모습은 거의 아주 비슷합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그 인상을 쓰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 사이에서 혼돈을 했습니다. 우와, 진짜 깊히 들어가는구나, 그런데, 다 알고 보닌깐 하나님의 앞에서 자기를 양보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겁니다.
근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정말 진정한 변화가 없는 겁니다. 성경이 보는 우리는 누구냐면 부분적으로 가가지고 칠이나 좀 하고, 나사 몇 개 바꾸어서 새 사람이 될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우리를 묘사를 안 합니다. 어느 신학교가 우리를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우리를 만약에 비유를 하자면은, 여러분 바닷가 같은 곳에 가보면은 여름에도 생산을 잡지 않습니까. 여름에 생선을 아주 잘 썩지 않습니까. 직접 보지 못해서 잘 말은 못하겠지만, 바닷가에 산 사람들에 의하면은 꽁치 통조림 그런거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바다에서 금방 잡아 왔을 때는 통조림 회사에서 절대 안사간답니다. 그럼 언제 사가냐면 이제 아슬아슬할 때 가격이 폭락했을 때 사간답니다. 그 때 왕창 사가지고 가가지고 통에다 집어놓고, 수백도시에사 놓고 완전히 녹이듯이 쪄가지고 만든 것이 통조림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통조림이 참 쌉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우리를 비유하자면은 이렇게 막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긴데 낚시군에게 입이 한번 찢어졌다든지, 아님 지나가다가 다른 물고기한테 물려서 지느러미가 너덜너덜 한다든지, 아님 지나가다가 바위에 긁혀서 살이 찢어졌다든지, 아님 물 속에 돌아다니다가 넘어져서 뼈가 삐었다든지,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상태가 아니라 비유를 하자면 여름날 생선을 잡아다가 궤짝에다 잔득 담아놨습니다. 미처 냉동보관을 못했더니, 근데 아주 더 깊히 썩어 들어가면 생선이 아주 문드러집니다. 그렇게 된 상태가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닌깐 자기가 마치 조금만 바뀌면 굉장히 좋은 사람이 될 것같이, 그렇게 자기도 이야기하고, 남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와서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우리 남편은요, 법 없이고 살 사람입니다. 참 자상하고, 가정적이고, 다른 사람한테 잘하고, 그 사람 못됐다고 하는 사람 없고, 만나는 사람마다 좋다고 그러고, 돈도 있고, 그저 한가지 조금 부족한 게 있다면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 여러분 그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성경이 보는 인간은 속속들이 완전히 깊히 썩어있는 겁니다. 형체만 겨우 남아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닌깐은 이런 식으로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의 사고방식, 가치관, 인간의 의지, 삶에 대한 어떤 나름대로의 독특한 철학, 이런 것들이 그 썩은 뱃속에 있는 게 뭐겠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이런 것들을 그대로 말씀이 인정을 해주고, 이런 것들을 피해서 지나가라고 그럴 때 그걸 피하고 나면 뿌리가 갈 때가 없습니다. 그러닌깐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핍박이 오면 쓰러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의 삶이 견고하지 않은 이유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한 사람의 영혼이 예수를 믿게 될 때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본질적인 변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회개,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성도의 영광스러운 죽음,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버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고, 좀 수준에 맞게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말해주면 안되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복음을 원액 그대로 죄인에게 먹이면 졸도하닌깐 그러닌깐 살아가든지, 졸도하든지, 둘 중에 한다는데, 졸도하닌깐 여기다가 조금 입맛에 맞게끔 복음에다가 물을 좀 타서 먹이면 그러면 현대인들이 좀 잘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 잘 받아들인다는 것 이면에는 무슨 사상이 깔려 있냐면은 그렇게 해서 물탄 복음의 물을 먹고, 진짜 참된 복음의 물을 먹으면 그러면 이 속에 그런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 잘못된 가치관, 세상적인 사고방식, 이런 모든 것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 참된 복음의 물은 들어가면은 반응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녹여버리든지, 아니면은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들어가다가 목구멍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와락 다 토해버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참된 복음이 들어가다가 이 복음의 약 기운에 이 속에 있는 게 전부다 썩어 문들어져 가지고 변화 되가지고 완전히 새 사람 돼 가지고 고치든지 아니면 자기가 싫어서 내려오다가 그 돌멩이하고 부딪혀 가지고 바깥으로 다 토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난데, 물 탄 복음은 먹는 겁니다. 먹으면 내려갈 때 이 속에 있는 암적인 요소들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계속 들어가면 서서히 타협가운데 변화되리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안 변하는 사람들은 안 변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신앙이 우리 안에 심겨져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죄인들이 정직하게 복음 앞에 직면해야 하는 겁니다. 복음의 진리 앞에 직면해서 자기가 그 복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인지, 거부하는 사람인지, 검증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심겨지지 않고, 말씀을 거부하고,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려고하면 이렇게 돌밭 위에 뿌려진 그런 씨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세 번째 케이스가 나오는데 이번에 씨는 어디에 뿌려졌냐하면은 가시떨기에 뿌려졌습니다. 가시떨기라는 것은 가시가 원래 이렇게 솟아올라서 위에서 덤불을 일으키면서 자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툭하고 떨어지닌깐 가시떨기가 뻗어있어도 속에 나무가 이렇게 비어있지 않습니까. 관목같은 거 보면 이렇게 땅바닥에 엎드려서 들여다보면은 통로가 쭉 보이는 것처럼 공간이 있단말입니다. 그래서 떨어졌습니다. 흙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떨어지닌깐 쭉 자라는 겁니다. 뿌리가 내려가고 쭉 자라는데 문제는 더 이상의 성장을 계속할 수 없는 겁니다. 왜냐면 위에 가시덤불이 가득하닌깐 이제 나무가 자라다가 부딪히게 되면 이것을 막 뚫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덤불이 있으닌깐 계속 자랄때를 찾는 겁니다. 그런데다가 가시덤불 사이에 있으닌깐 햇볕이 가리워져서 햇빛을 잘 못보게 됩니다. 그리고 콩나물을 어두움 속에서 기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콩을 뿌려놓은면 계속해서 물만 부으면 그 어두움 속에서 쭉 자라게 됩니다. 햇빛이 들어가는곳에서 콩나물을 키우면 우리 먹는 콩나물 같은 콩나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콩나물이 되는게 아니라 콩나무가 됩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근데 이 것은 결국은 예수님께서 아예 설명을 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면 세상에 염려와 재리에 유혹이라 그랬습니다. 세상에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이 말하자면 성장을 질식시키는 케이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입니다. 재미있는 게 뭐냐하면 앞에 나온 첫 번째 케이스, 두 번째 케이스, 세 번째 케이스는 모두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땅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경우는 다른 게 뭐냐하면 지금 옥토에 뿌려진 것이나, 그 다음에 길가에 뿌려진 것이나, 문제에 어디에 있냐면 그라운드 자체에 있었습니다. 뿌리에 내리는데에 문제가 됐었습니다. 근데 이것은 뿌리는 내리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뭐가 문제가 됐냐면 이건 아래에서 문제가 된 게 아니라 위에서 문제가 된거란 말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말씀이 마음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무슨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같은 것을 굉장히 많은 부분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인생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의 내용 그 자체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닌깐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그 뿌리가 뻗어 내려갑니다. 적어도 최소한 땅 밑에서는 어떤 방해가 안 주어지는 겁니다. 뻗어내려 갑니다.
이 케이스는 굳이 우열을 가린다고 말할 것 같으면은 두 번째 케이스보다는 훨씬 덜 패역한 케이스입니다. 두 번째 케이스는 아예 그런 돌멩이 같은 자기 사상을 쥐고 있어서 아예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려고 하면 어림도 없다 이런식으로 반응하는 스타일입니다. 근데 여기서는 적어도 땅에는 문제는 없습니다. 씨앗이 뿌려져서 마음껏 뿌리가 뻗어내려가는겁니다. 그래서 무슨 그 말씀에 뿌리가 내려오지 못하도록 이렇게 가로막고 있는 돌멩이와 같은 무지막지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든지, 가치관이라든지, 잘못된 철학이라든지, 이런것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닌깐 뿌리가 내려갑니다. 그러닌깐은 사실 이런 케이스에 있는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올바르게 되어있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기쁨도 있고, 내려갑니다. 근데 여러분 뿌리도 자라고 줄기도 자라지 않습니까. 근데 뿌리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뿌리가 든든하면은 위에 줄기, 가지가 무성하게 자랄거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 말은 반만 맞는겁니다. 왜냐하면 뿌리라고 하는것도, 뿌리 자체가 생장을 하는게 아니라 이게 뿌리가 뻗어나가는 힘도 결국은 어디에서 나오냐하면은 위에서 이 줄기와 가지가 이렇게 자라면서 광합성 작용을 해가지고 여기서 신진대사가 일어날 때 그때에 더 많은 양분들이 순환을 하면서 이렇게 하면서 자라게 되는거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자라는거지 않습니까.
제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감자 어떻게 심는지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뿌리종류닌깐, 감자를 깍두기 썰 듯이 쪼개는데, 무조건 쪼개면 안되고, 쪼개는데에 씨눈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을 고운재에댜가 묻힙니다. 고운 땅에다가 뿌립니다. 그리고 덮어두면 어떤 것은 이거 하나에서 여러개 맺힐수도 있고, 어떤 것은 몇 개 안 열려 있습니다. 뭘 보면 알수 있습니까. 물론 땅 파보면 알지만,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서 아주 파랗게 말하자면 감자나무가 아주 번성하면 그건 파보나마나 잡아 땡겨보면은 이게 파랗게 올라오다가 비실비실하게 쓰러진 것 보다 굉장히 많은 수에 감자열매가 맺습니다. 그러닌깐 뿌리 혼자서 땅에 뿌리를 박음으로서 뿌리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위에 올라온 이 성장의 모습과 깊은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통찰하나를 제공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별로 거부반응도 없고, 그리고 참된 신앙을 알고 싶고, 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참된 복음에 대한 저항감이나, 잘못된 충돌을 마음을 일으키는 마음이나, 아니면은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나 이런것들이 없는데도 내 신앙이 잘 자라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이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문제는 뭐냐면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케이스는 모두 땅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땅에 문제가 돼서 뿌리도 못 내리거나, 뿌리는 내려도 금방 쓰러지거나, 아니면은 뿌리를 쭉 내려 가지고 멋있게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케이스는 땅은 문제가 안됐는데, 위에 식물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닌깐 이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그러닌깐 감자가 뿌리는 뻗는데 위에는 아무것도 안 나오고, 뿌리만 멋있게 뻗어나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고구마도 위에 자랍니다. 자라서 거기에서 광합성 작용을 통해 가지고 거기서 양분 이런 것들이 줄기와 뿌리 사이를 오가면서 그렇게 하면서 성장이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뿌리가 튼튼하닌깐 더 많은 양분을 끌어올려서 위에 식물을 든든하게 해주고, 위에 식물이 든든하닌깐 아래 뿌리로 말하자면 강한 성장을 할 수 있게끔 여건을 제공해 주어서 뿌리와 가지가 아름다움 조화를 이루면서 뻗어나가는 겁니다. 그 문제까지는 우리가 이의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근데 문제는 뭐냐하면은 이 비유를 볼 때에 뿌리가 문제없으면 모든 것이 다 잘 된다라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에 어떤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여기에 나오는 이 세 번째 케이스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주의깊게 이 비유를 잘 들여다보면은 이 세 번째 비유는 여기에 안 드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라고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 바로 이거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케이스는 거의 동일해 보이는데 세 번째 케이스만 달라보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땅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냥 뻗어 나가는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에서 성장을 못하도록 가로막는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뿌리에 까지 영향을 주는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리켜서 의심을 여지도 없이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뭐냐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의 신앙생활에 성장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인 무엇이냐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영적인 싸움에 구도만을 강조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이 비유자체가 매우 생소하게 들릴 줄 모릅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왜 이 신앙이 자라고 성장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앞에서 길가에 뿌려진 씨앗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말하자면 마귀가 와서 빼앗는다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획일적으로 영적 전쟁의 구도로만 말씀하시지 않고, 이번엔 생활의 염려, 재리의 유혹, 이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겁니까. 인간 안에 원래 존재하는 겁니까. 물론 이제 보닌깐 그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와가지고 생활의 염려를 주입시킨다든지, 마귀가 와가지고 유혹을 와가지고 유혹을 한다든지 하는것도 말 자체가 성립 안 하는것도 아니지만, 마귀가 아무리 우리에게 염려를 집어 넣을려고 하고, 우릴 유혹할려고 해도 뭐가 안 이루어지면 범죄가 성립할 수 없습니까. 내적에서 반응을 하지 않으면 혼자 쑈하다가 가는 겁니다.
이 동네에도 가끔 봄에 무슨 카페 골목인가 하는데를 가면 막, 오라고 보여주면서 알아듣지 못한 방언같은걸로 하여튼 자기네 집에 오면 좋다고 오라고 하는데, 목사가 거기를 지나가는데 거기서 아무리 와서 내 앞에서 쇼를 하고 좋다고 해도 옛날이야 같겠지만, 요즘엔 갈 수가 있겠습니까. 괜히 헛수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혼자 그러다가 끝나는 겁니다. 똑같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유혹하고, 마귀에게 아무리 우리에게 뭘 집어넣을려고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우리들이 거기에 대해서 동의학도 손잡아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마귀가 사람들에게 들어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진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귀신들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귀신 들리는 건 초대교회에나 있다고 하는데, 그건 거짓말입니다. 분명히 들어옵니다. 근데 기억해야할 것은 뭐냐하면은 마귀하고 예수님하고 유하점은 뭐냐하면 예수님도 준비된 마음에 오시고, 마귀도 예비된 마음에 방문합니다. 그러닌깐 자기쪽에서 마귀가 자기 안에 거하는 것을 상당히 용납하는 마음으로 정말 영접하지 않으면은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런 마음에 준비, 이것이 결국 뭐냐하면은 솜닫는(*)반응이라는겁니다. 물론 마귀는 우리에게 염려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권사님이 꿈을 꾸는데 여러분 옛날엔 넝마주의가 있었습니다. 맨처음엔 할아버지들이 많이 했었는데, 나중엔 젊은이들이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전에 아이들이 울면 망태할아버지온다고 했습니다. 망태는 넝마 담는 망태입니다. 아마 그 망태에 일곱명정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큽니다. 그 다음에 넝마주의들이 가지고 다니는 롱찝개 있습니다. 굉장히 깁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근데 이것을 그 권사님이 매고 있더랍니다. 앞에서 시커먼 옷을 입은 뭐가 가고 있더랍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이 아니라 마귀였답니다. 그런데 가면서 자꾸 시커먼 보자기 같은 것을 자꾸 뿌렸답니다. 근데 그것을 자기가 그 망태를 매고 가면서 계속해서 집어 넣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뿌려주겠지, 그만 뿌려주겠지하면서 계속 담는데 이 마귀는 계속 언덕을 넘어가면서 뿌리고, 또 뿌리고, 나중엔 언덕 끝까지 지고 올라가는데 그 다음에 계속해서 뿌리는 것을 주워 담는데, 이게 점점더 무게가 가중되닌깐, 거기에 깔려서 질식을 할 상황이 됐는데도 이 찝게로는 그 떨어진 검은 쪼가리를 주워서 계속 넣고 있더랍니다. 그게 결국 뭐냐면 염려와 근심을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 줍니다. 가끔 생활하면서 갑자기 불안이 우리에게 엄습하거나, 평화를 확 잃어버리게 되거나, 이런 것들이 마귀에 영향으로 오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을 해야합니다. 마귀가 염려를 뿌린다고 해서 우리가 저절로 그 염려에 사라잡히는 것 아니고, 그 염려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저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염려를 아멘 하면서 받아들일 때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아멘 이라고 하기는 이상하지만은 하여튼 염려에 대해서 뭔가 동의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유혹에 대해서 손을 아무리 내밀어도 잡지 않으면은 관계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거기에 대해서 언젠가 손을 탁 잡는겁니다. 손만 탁 잡으면은 기다렸다는 듯이, 강력하게 잡아당겨서 끌어 안아주고, 말하자면 놓치를 않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세상에 마귀입니다.
근데 오늘 성경에 뭐라고 말하냐면 이러한 세상에 염려, 재리의 유혹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는 겁니다. 선입견도 하여튼 다 괜찮아도 이런 것들이 계속 위에서 눌르면서 우리의 신앙이 지라지 못하게 하닌깐 결국은 뿌리도 성장하지 못해서, 결국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비유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뭘 만나냐면은 이제 세가지를 만나는 겁니다. 믿음의 씨앗이 온전히 자라지 못하게 하는 적어도 세가지 내지 네가지의 적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첫째는 땅의 딱딱함입니다. 두 번째는 땅이 딱딱해도 어떻게 세월이 지나고 , 소라도 와서 지나가면은 그럼 언젠가 그 뿌리가 내릴지도 모르는데 그거 마귀가 와서 먹어버리는 겁니다. 두 대적이 나왔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땅속에 박혀있는 돌멩이들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하면 위에 자라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말씀에 나무를 짓누르고 있는 그런 가시나무떨기와 같은 것들이라는겁니다. 근데 이것은 바로 어디서 나온것이냐면 자신 속에서 성장하는것들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패역은 같은 마음에서 함께 성장을 하게 되는겁니다. 그래서 은혜가 무성하게 되면 죄는 서서히 고사되기 시작합니다. 죄가 창성하기 시작하면 은혜는 서서히 말라서 말하자면 거의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다름없을 정도로 나아가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불순종과, 죄악이 이 마음속에서 발동을 하게 되고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제 문제는 그 다음이니다. 근데 그 위에서 자라서 성장을 못하도록 짓 누르는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은 세상에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 이 두가지가 지금 짝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근데 세상에 염려하고 하는 것은 원인이 되고, 재리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가 되는것이다라는 얘기입니다. 자, 뭐냐하며은 유혹, 재리라고 하는 것은 재물로 말미암아 보게되는 이득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유혹입니다. 근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객관적인 유혹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들이 반응을 한 유혹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인격이 고상해서라기 보다도 이미 목사가 됐으닌깐 술집에서 아무리 오라고 유혹을 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고 싶지도 않지만, 가고싶은 마음이 발동한다고 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이런 사람들에게 오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유혹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직접적으로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돈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혹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쪽에서 손짓을 하고 있지만, 이미 마음과 결탁이 됐기 때문에 이것은 순수하게 객관적인 유혹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객관적인 유혹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혹을 안줍니다. 순수하게 객관적인 유혹은 죄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는게 아닙니다. 무슨 영향을 주겠습니까. 어차피 그 내가 이렇게 교회오는 길에 이 사람 저 사람이서 술집에 오라고 유혹을 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영향이 가겠습니까. 내 신앙생활과 무슨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닌깐 순수하게 객관적인 유혹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유혹이 될 경우에 말하자면 유혹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제 주관적인 반응이 맞물려서 이제 이루어질 때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쓸데없는 데에 욕심을 품었기 때문에 갑자기 마음속에서 은혜가 사라지는 경험들을 굉장히 여러번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스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은, 무슨 예쁜 옷 하나 사입고 싶다는 욕망이 거기에 막 반응을 하면서 온갖 상상을 일으켜서 좋은 은혜로운 마음들을 모두 날라가 버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혹은 좋은 차를 굴리고 싶다는 그런 욕망 때문에 갑자기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던 고상하고, 향기로운 마음들이 일시에 송두리째 날라가 버리는 것이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고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은 필연적으로 재리의 유혹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의 유혹을 받게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첫 번째 교훈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염려와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고 살아야될 사람들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고 사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사람들이 결국은 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때문입니까. 결국은 염려 때문입니다. 또 염려가 사랑을 불러오고, 사랑이 염려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네 애들이 전부다 길 건너서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뭐 동네 사람들이 다 염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집 애들이 길을 두 번 세 번 건너서 학교를 간다, 교회를 간다, 체육관을 다닌다 그럴 때는 염려가 됩니다. 왜 길을 몇 번씩 건너야하나, 육교는 없나, 길을 안 건널 수는 없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사랑이 염려를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염려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생활의 염려는 고상하게 어떻게 하면 예수믿는사람답게 살수 있을까, 왜 나는 인격적으로 비참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을까, 그런 수준높은 염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의 염려는 무슨 염려입니까. 쉽게 얘기하면 생존을 위한 염려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그런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 육신을 기쁘게 할까, 이런거지, 어,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해야하는데, 왜 아무개 형제는 그것밖에 안될까, 어떻게 하면 그 자매가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생활이 거룩한 생활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름옷 없으면 봄옷 없고, 겨울옷 없으면, 가을옷 입고 살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돈이 있으면 좀더 예쁜 것 사입고, 없으면 누더기 같은 거라도 하나 걸치고, 원래 본바탕이 멋있으닌깐 다 조화를 이루겠지, 그렇게 생각 하고 사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 생활의 염려가 이렇게 쭉 파고들어오게 되고, 살아하게 되면 이 염려의 범위는 계속 넓어져 갑니다. 사랑하게 되면은 염려의 범위는 넓어져 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살아하게 되면은 염려의 범위가 점점점점 넓어져 가는 겁니다. 그러닌깐 그 부모가 자식을 많이 사랑하면 별개 다 염려가 되는 겁니다. 암튼 별의별 말하자면 최악의 상상을 다하면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고, 관심이 없으면은 염려할게 없습니다. 결국 이 세상 에서의 생활자체에 대한 깊은 염려,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게 만드는 깊은 염려, 이것의 기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할 우리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진실하고 순전한 사랑이 그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활의 염려에 기반이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 거기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우리에 가치관을 모두 내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은 결국은 가치관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아름답게 자라지 못하도록 위에서 억누르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뿌리도 자라지 못하고, 결국은 결실하지 못하게끔 만들어버리는 그러한 힘이 생활의 염려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영혼에 대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식물학자가 화초 두 개를 심어놓고, 하나 앞에 가서는 늘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하나 앞에 가서는 최고로 기분 나쁜 상상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답니다. 똑같은 조건을 주었는데도 이 한숨쉰 식물은 거의 성장을 하지 못하고 말라가는에 비해서 늘 최고로 마음이 기쁠 때 하루에 한번씩 찾아가서 자기의 기쁜 마음을 표하고, 노래를 불렀던 그 화초는 아름답게 피어나더라는 겁니다. 뭐 얼만큼 설득력 있고,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염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기력을 되찾지 못하도록 가장 커다란 방해의 요소가 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닌깐 잘 좀 보십시오. 왜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는데 어렸을 때는 그래도 신앙이 순수하게 잘 들어가다가 나이먹고 사회인이 되면은 이상하게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때문 입니까. 여러분 젊은이들하고 나이 어린 사람들, 연로하신 분들 다 섞어놓고, 집회를 하면은 말씀에 대해서 깊이 반응을 보이면서 회심하고, 변화 일어나는 프로테이지는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말씀 전하러가서도 고개 푹 숙이고, 다리 꼬고 팔장 끼고 깊이 주무시는 분들은 대부분 말하자면 연세드신 분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해야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면 오래 살 수록 또 교회 오래 다니면 오래 다닐수록 우리의 마음이 더 연해지고, 부드러워지는 대신에 이렇게 딱딱해 지고 돌같이 굳어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이냐면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을 받기보다는 피부를 맞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오는 염려로부터 비롯되는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본적인 것들 그래서 말하자면은 이 세상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먹고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나는 비록 가난하여도 그저 우리가 다투지 않고 사닌깐 그저 우리가 채소만 먹어도 육선이 가득한 것 보다 참 행복하다, 만족하다 그렇게 말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그래도 사람들이 만족을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세상에대한 강한 사랑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들어 망하는 회사가 많은데, 언젠가 한번 제가 얘기를 드렸더니, 중소기업을 하는 사장이 빚더미에 올라갔다고 유서를 써놓고, 투신자살을 해서 죽어버렸습니다. 죽어버렸는데, 이십억을 빚을 졌는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큰돈이죠. 죽은 다음에 재산을 다 정리하닌깐 사십억이래요. 우리 계산으로는 이십억 빚졌으면, 사십억 털어가지고 이십억 갚고 나머지 이십억가지고 새 출발하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그 얘기했더니, 옆에서 그 사람이 제게 그래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거밖에 못한다는 겁니다. ’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기울어지고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이 좌절될 때에 피눈물나는 그런 사나이에 사연을 아느냐 이겁니다. 난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하고 그런 사람하고는 레벨이 틀리다는 겁니다. 그러닌깐 왜 그렇습니까. 쉽게 얘기하면 우리는 사랑할 돈이 없으닌깐 이십억 사십억 그렇게 얘기하면 사십억 가지고 이십억 갚아 버리고, 이십억 가지고 살아가면 되지 우린 이렇게 한달에 몇 천만원에 이자가 나오는데 떵떵거리며 살지, 이자 또 맡기면 또 이자 나오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게 아니랍니다. 그런 성취를 사랑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사랑하고 이어가던 사업 자체가 자기 먹을게 있느냐 없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차피 사업할 때 먹고 살려고 한게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삶에 목표를 가지고 시작을 했고, 사랑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빚더미에 올라가게 됐다닌깐 땅을 팔면 돈이 남고 안남고, 정산을 하고 나면은 나머지가 생기고 안 생기고 그런게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러닌깐 아까 아침에 말씀드린, 농부에 지적하는 마음과 정 반대의 마음이 삶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닌깐은 사십억에 돈이 있는데, 이십억 빚을 졌다고 투신자살을 해서 죽습니까. 그리고 그걸 또 사나이라고 하는 사람도 참,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그것밖에 못하냐’ 그러닌깐 결국은 사랑이 우리에게 이런 염려를 가져다 주는겁니다. 그러닌깐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겁니다. 하나님도 살아하라 그게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라.
어느날 집에 있으면서 우편함을 뒤져보는데, 전도지가 들어있었습니다. 하트모양에 아주 예쁜 전도지였는데, 아주 예뻤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닌깐 ‘행복해지렵니까.’ 써져서 속으로 ‘그래’하고 열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행복해 지는 십계명 해서 1, 생수를 많이 드십시오. 2 햇볕을 많이 받으십시오. 3. 양질의 소금을 섭취하십시오. 4. 좋은 친구를 사귀십시오. 계속 이렇게 넘어 가더니, 마지막에 예수님도 믿으십시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의 사은품이 되어버렸구나’ 그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살아하는 것을 가지고는 이런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해보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만 있으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전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면 다른 사람의 사랑은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해보십시오. ‘주님 주님만을 내가 사랑하면서 살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나는 충분합니다. 주님이 나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저는 주님을 즐거워하는 그 자체가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합니다. ’ 그래서 거기서 한 단계 더 높이 뛰어올라가서 어렸을 때는 ‘주님 집을 주셔서 사랑합니다. 자녀 주셔서 주님 찬송합니다. 주님 주님이 나에게 사업에 성공을 주셨기에 저는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런 데서 뛰어넘어서, ‘무화가 나뭇잎이 마르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주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찬송할 수 있는 한계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 살아하는 사람에 모습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주님이 내게 계심으로 정말 나는 그 주님 때문에 만족합니다. 라고 하는 이런 신앙 이것이 바로 염려를 극복하면서 사는 길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일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야합니다. 주님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때 여러분 부럽습니까. 안 부럽습니까. 자매가 여기서 이렇게 후질근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돈 있는 사람은 지금 예쁜 승용차 지붕에다가 스키 매달고 진부령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외제 스키복 입고 그리고 외제 선글라스와, 구두를 신고 한제인 그사람이, 국산인 그 사람이 놀러가고 있습니다. 안 부럽습니까. 이렇게 말하닌깐 조금 부러운것도 같죠? 여러분 얼마나 화려합니까. 정말 좋지 않습니까. 아임엠에프를 비웃듯이 왜 최고급 호텔에서 그저 멋있는 그런 폼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얀 백설이 쌓인 산을 배경으로 하면서 안락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한잔에 몇 만원 하는 술을 먹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걸 생각해야합니다. 그런 화려한 형통하는 모습을 보지말고, 그 모습이 지나고 그런 상황이 지나고 날때에 홀로 있는 시간에 그가 마음에 어떤 일들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을 해야합니다. 낮에 돈 있고 버는 사람있을 때에는 그렇게 우아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한껏 술에 취해서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벽을 맞이하고, 아픈 머리통을 부여잡고 아침에 잠을 깼을 때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 지내는 밤들을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곤고할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꽃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이 모두 부러워하는 그런 종류의 만족이 우리에게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돈이 두둑히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그 돈 때문에 짜릿짜릿하게 맛볼수 있는 수많은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지 말아야할 적도 있고, 또 못 누릴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외로울 때나 그리고 즐거울 때나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함께 위로를 받을 때에는 우리가운데 함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홀로 외로울 때는 외로워서 하나님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고통 가운데는 고통속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맛보고 싶어하고, 시련속에 있을 때에는 시련속에 있기 때문에 주님에 의로운 오른팔에 붙잡혀 살아야할 필요를 더 많이 느낍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상황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상황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이 세상을 향해서 반응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닌깐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닌깐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계속 깨달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되냐면 주님이 나에게 이런 깨달음과 은혜를 주실 때 주님이 나를 마지막에 데려갈려고 하는곳은 오직 한곳이다. ‘내 구주 예수만 더욱 사랑’ 주님 이외에 다른것들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정도로까지 주님만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고 싶으셔서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겁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경험할수 있는 기쁨이 있고, 그리고 승리에 대한 신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계속 깨닫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엇인가 말씀 자체에 대한 저항은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뭔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향해 날라오는데 자기 앞에서 확 흩어져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그러한 영적인 생활에 낭패를 경험하는 분들은 대부분이 사랑의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닌깐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하나님이 뿌리뽑지 않으십니다. 기억을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끔찍이 자기의 마음을 다해서 그래서 세상을 살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마땅히 하여야할 염려는 안하고 세상을 향해서만 염려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게 가지나무 떨기가 짓눌러서 신앙이 자라지를 못하고 하는 그런 상황이 되면은 유래(*)되지 않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하나님 내 영혼이 왜 이렇습니까. 내 영혼이 지금 질식되고 있나이다. 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근데 미안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속에서는 그런 기도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안 나옵니다. 기도는 하고싶은 방향대로 자기 맘대로 막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동차는 가다가 좌회전, 우회전, 유턴, 돌격 앞으로, 충돌, 자기 마음대로 하지만, 기도는 그렇게 안됩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은 속에서 내 양심이 대답하는 겁니다. ‘주님, 주님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양심이 메아리를 칩니다. ‘거짓말’ 그럽니다. ‘주님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 메아리를 칩니다. ‘말로만’ 그러닌깐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마음에서 공허한 메이리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우리가 그 기도 자체를 통해서 막 변합니다. 그러닌깐 기도를 하게되면 기도 자체에 의해서 우리가 막 추진히 변해 갑니다. 그래서 진짜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 흘리면 허리가 끊어지도록 기도하고 나면은 거룩해지는 자신을 진짜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죄와 더불어 싸울 힘이 없었다가 그런 기도를 하고 나면 죄와 더불어서 싸울 수 있는 힘이 막 밪데리 충전되듯이 충전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기 전까지는 아이고, 이거 한번 따 먹어봐! 한번 만져봐! 이러던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충전이 되고 나면은 ‘아니야!’하는 단호함이 생기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나는 부족해도 마음과, 기도가 같은 방향으로 가면 기도가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겁니다. 놀라울 정돌 추진력이 있습니다. 근데 기도하고 마음에 방향하고 따로 놉니다. 그러면은 막 속에 부르짖으라는 소리는 어디서 들었지 않습니까. 마구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양심에서는 더 큰소리로 메이리를 칩니다. ‘거짓말이야’ 그럽니다. 밤새도록 기도해봐야 목밖에 쉬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천사가 성도들이 울리는 기도가 향내가 되어서 거기에 다 담아서 보좌위로 올리는 겁니다 ‘주님 받으십시오. 열린교회 성도들에 기도에 향내입니다. ’ 주님이 기도에 향내를 맡으시고,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성도들에 기도가 응답되는 것 아닙니까. 근데 아예 올라 가지고 않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일단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기도는 마음을 꿰뚫고 나가야지만 고대에 교우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악한 세력들이 있는 두 번째 하늘을 관통하고 세 번째 신령한 보좌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까지 올라가는겁니다. 그게 바울이 생각했던 삼층천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사람은 삼층천이라고 하닌깐 자기는 칠층천을 봤다고 합니다. 여러분 칠층천은 없습니다. 뭐 높은것일수록 좋은 건 줄 압니까. 유대인의 사고에는 일층에는 새들이 날라가는 하늘이고, 이층은 공중 권세잡은 자들이 있는 하늘이고, 삼층은 더러운것들이 범접할수 없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에 성도들은 기도할 때 이랬습니다. ‘쏘자, 쏘자, 성도들이여 쏘자’ 뭘 쏩니까. 기도에 화살을 쏘자는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두 번째 하늘을 뚫고 신령한 보좌에 이를 때 까지 우리가 쏘자. 그게 어떻게 쏘자는 겁니까. 높이 올라가서 기도 하는게 기도를 쏘는겁니까. 아니면은 소리지르면서 기도하는 것이 기도를 쏘는겁니까. 문제는 기도에 강도는 마음의 시위에 팽팽함에 달린겁니다. 이 기도에 힘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은 뭐냐면 화살촉도 뾰족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기도 할때도 헛소리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뭔진 모르지만, 다 잘해주시옵소서’그건 꼭 뭐하고 똑같냐면, 화살촉 대신 화살촉 끝에 구슬을 매달아 쏘는것과 같습니다. 그러닌깐 분명하게 ‘주님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옵나이다. 내 신앙생활에서 이것을 절단하는 것이옵니다.’ 아니면 ‘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이것을 얻기 원하옵니다. ’ 라고하는 분명한 것, 그 다음에 두 번째 요소는 이 시위가 얼마나 튼튼하냐는 겁니다. 그래서 튼튼할 때에 그 때에 탁 쏘면 날라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기도의 추진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마음에 시위가 든든하면 강력한 기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관심과 기도가 거꾸로 나가는 겁니다. 사랑과 기도가 거꾸로 나가는 것은 꼭 뭐와 같냐면은 실 고무줄에다가 금 화살을 먹인거나 마찬가집니다. 이게 나갈수 있겠냐는겁니다. 그러닌깐 벌써 그렇게 초점 자체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속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기도가 말하자면은 그 기도와 일치를 이루지 않는 겁니다. 그러닌깐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기도에 반영인데 그러닌깐 결국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와 지금 쉽게 얘기하면 말씀이 떨어져 가지고 열매 맺어서 멋있게 자라는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창상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건데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창상함은 결국은 그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충만한 곳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가리켜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야, 저 사람은 참 신령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참 주님의 사람이야’ 라고 말 할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뭐가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지, 은사 많이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재주 좋은 사람 기독교적인 비즈니스에 도 튼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자신이 그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지배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 속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러닌깐 결국은 위에서 가시떨기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짓누르는 것이 생활의 염려라고 말하는 것을 사랑과 관계시켜서 말하면 이것은 말하자면은 세상나라란 말입니다. 그러닌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 충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속성상 거짓말입니다. 속성상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이 뭐냐면 이러한 염려와 사랑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들은 더 깊히 깨닫게 됩니다. 땅에 떨어진 그 씨앗이 내리자 마자 어린이들 동화에 나오는 잭의 콩나물처럼 한꺼번에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뿌리를 짝 뻗어가면서 단숨에 그런 큰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자라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라갈 때 이런 가시떨기 나무와 같은 방해물을 제거하는 실질적인 신앙생활에 한 원리를 배우는겁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즉시 즉시 우리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이 뭐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우리에게 이 깨달음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성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창상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가지 의무를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하면은 영원한 기도제목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엇인가 깨닫게 되었을 때 그 때 우리들이 만약에 우리가 사랑해야 될 분이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이고 하나님만이 깊히,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모든 관건이 달린 문제라고 생각할 때 그때에는 순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것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파고 들어오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대한 사랑은 절대 가치에서 상대가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상대가치로 떨어지게 되면 그다음에 불순종의 수 많은 가능성과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수 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고, 오히려 하나님께만 충직하게 순종하고, 그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길이 너무나 어렵고 피해갈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오는 겁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정상적인 선택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의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준행할수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기를 비롯해서 광야에 여정을 기록한 글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이 뭐냐하면은 제단에다가 율법을 낭독한 후에 피를 뿌리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을 낭독한 후에 모든 백성이 아멘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피는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 것은 죽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결국 뭐냐하면은 하나님을 만나고 깊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을 회복하고 나닌깐 그들의 절대적인 의무로 돌아가는겁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그것이 돌아가는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방향으로 우리의 인생이 가야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겠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겐 죽음 뿐이옵나이다. 란 의미로 피를 뿌리는겁니다. 그러닌깐 하나님의 참 사랑과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깊히 깨달은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상대적인 가치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을 한것입니다. 절대라고 하는 것은 대를 끊는다는겁니다. 짝을 이룰수 있는 것이 없다는겁니다. 어깨를 겨를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닌깐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마다 여러분들이 그 말씀에 대한 순종,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최대의 응답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하나님앞에서 우리자신의 마음속에 되새겨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말씀에 대한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절대 가치에 대한 신념을 더 불붙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할수만 있다면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최대의 가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들이 실천하고 누릴수 있다면 그 이상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사랑하면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런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닌깐 이 밭은 얼마든지 변화될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 드렸던 것 가운데, 좀 이상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돌멩이가 가득한 밭도 옥토가 될 수 있다라는 말씀 드렸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니, 인생을 여태까지 살아왔는데, 자기 주관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자기 가치관 없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나름대로 인생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으며,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고, 교회는 이러한 집단이어야한다는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고 그래도 인생을 이제껏까지 바보같이 아니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자기 중심대로 뭐가 없다면은 그것은 그 사람 뭡니까. 정신병자입니까.’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에 말하자면은 그 말씀에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그대로 자신 속에서 수용해서 자신속에 있는 그런 거짓된 가치관과 잘못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그런 것들을 그냥 부시면서 지나갈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은 그런 돌멩이들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은 사실은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런 가치관이나, 주관, 아집 그런 것들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는 겁니다. 누구나 다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다가올 때에 그것을 양도하고 말씀에 권위를 더 인정하면서 거기서 자기가 녹아지는 반응을 보이느냐 아니면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 대한 경험이나, 가치관, 주관, 이론, 철학 이런 것들을 더 강하게 붙들고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곧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닌깐 이것도 결국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든지 이런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만 사랑하면 참 좋겠죠. 그렇지만, 그릇된 사랑이 우리를 타고 올라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 가지나무 덤불에 은혜의 불을 지르는 겁니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탑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얼마 안 하신 분들이 여기 많은데, 짧은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뭘 느끼냐면 마치 자신 속에 성자가 될 가능성과, 배교자가 될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느끼신 분들이 굉장히 많으실 겁니다. 왜, 은혜를 충만히 받고 그러면 자신속에 뭐가 확인되냐하면은 내 영혼은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고 싶은 겁니다. 다른 반응을 보이면서 사는 삶은 다 새빨간 거짓말 같습니다. 그건 진짜 내가 아니라 진짜 나는 주님만을 순결하게 사랑하고, 주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주님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고싶어합니다.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 선포될 때 여러분 속에 눈물이 있고, 참회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겁니다. 근데 또 한편으로 보면은 정반대의 정말 하나님 마음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자신 마음대로 수하에 놓고 싶어할 정도로, 이렇게 자기의 패역함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싶어하는 이런 배교에 가까운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근데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사랑에 불붙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날 때 그때에 그런 배교에 가까운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하는 패역한 기운은 거의 찾아 보기가 힘든겁니다. 왜, 그 은혜의 불에 모두 태워져버린 겁니다. 뿌리는 남아 있지만은 태워져버린겁니다. 그러닌깐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한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날마다 우리가 순결하게되어가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라고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 나는 나는 이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을수 없는 사람이고, 다른 것을 살아한다고 해서 내 인생에 참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단호한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숙명이기도하고,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이 현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이 우리안에 계속 불붙으려고 할 때 세상에 대한 사랑은 사라질것이고,염려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염려에 대해 자유로워지면 재리에대한 유혹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질식시킬수 있겠습니까.
5.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2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지난주에는 시간이 좀 부족했습니다. 왜 이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신자를 사로잡아서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하느냐하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첫째로부터 시작한 것이 무엇이었냐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 중에서 형식적인 대부분의 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속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나서 진리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도록 짓누르면 그 역시 형식을 넘어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사랑싸움입니다. 사랑싸움인데 이 말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예전에 신앙을 가지지 않을 때와는 다른 사랑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앙이라는 나무는 그런 다른 사랑의 보호를 받으면서만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부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크게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큰 은혜를 잔뜩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큰 사랑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어렸을 때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 조흥은행 22층 빌딩이었습니다. 높은 지대에 있는 더 높은 빌딩도 있었지만 층수로는 그것이 최고였습니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그 부인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저 빌딩을 줘도 안 바꿔.” 지금은 당연합니다만 어렸을 때니까 그 말이 굉장히 새롭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도 강남에 102층짜리 빌딩이 지어지면 아이 하나를 데리고 가면서 “나는 저거 줘도 안 바꿔.”라고 하려했는데 건축을 그만 둔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참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확 밀려올 때, 그때 평안이 우리에게 함께 옵니다. 그 평안의 근거가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랑의 변화입니다. 우리들이 조바심을 하고 안타까워하고 쩔쩔매고 이러는 것이 모두 무엇의 문제냐면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의 문제.
(예화) 오늘 아침은 주일 아침이 아닙니까? 어제 늦게까지 심방을 하고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감자국을 먹으면서 집사람과 얘기를 했습니다. “IMF시대, IMF시대라 해도 아직은 살만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의 초점을 생존에 맞추면 아직까지도 이 월급 가지고 충분히 산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 어릴 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연탄 100장을 들여놓고, 쌀 한 가마 들여놓고, 김치를 담가두면 다른 집은 몰라도 우리 집은 겨울걱정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불안의 이유는 삶의 표준자체를 너무 높이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높이 잡은 것 자체가 결국은 사랑에 많이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밥만 먹으면 사나?” 그것은 밥 다 먹고 남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밥만 먹고 사나? 여자는 무엇으로 사나?” 밥으로 살지 무엇으로 삽니까? 여자나 남자나 밥으로 삽니다. 삶의 표준 자체를 너무 높이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죄를 자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나면 강물과 같은 평화가 우리에게 쭉 밀려들어옵니다. 우리 자신도 저항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옵니다. 그런 평화가 밀려오는 것의 근거를 캐서 어디서 오는가 보면 사랑이 바뀐 것입니다.
(찬양)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그렇게 세상에 대한 사랑이 바뀌고 나니까 막 조바심하고 유혹받고 했던 것들이 사라지면서 평강이 우리에게 쭉 밀려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변했기 때문에 전에는 세상으로부터 유혹받았던 것을 유혹받지 않고, 염려하던 것을 염려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매님들에게 말합니다. 아직까지도 철철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를까 염려하고 있습니까? 천국의 화장품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은혜의 화장품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옷 속에 감추어진 우리의 존재가 주님 앞에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인데 무엇을 두른들 그것이 누더기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살도록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적어도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말씀이 우리에게 막히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불을 가슴에 품는 것과 같습니다.
(예화) 돈이 아무리 좋다지만 그런 짓을 해서 되겠습니까? 마약을 입수해서 온다는 정보가 다 있다고 합니다. 의족, 의수, 발바닥 심지어는 다리미, 다리미 밑판에 숨겨오는데 금은보석을 숨겨오는 것은 정보가 없으면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 얼마만큼의 금을 가진 사람이 어느 비행기에 탔다는 정보가 현지에서 있으니까 직감해서 뒤지는 것입니다.
외국 갔다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 나를 한 번도 보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금을 요만큼 감춰오는 것이 아니라 가방에 하나 가득 가지고 들어 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요?”, “네”, “그럼, 저리로 가세요.”합니다. 몇 번을 드나들면서도 다 그렇게 다녔습니다. 물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런 것 안하게 생긴 사람이니까 그랬는지 모릅니다. 보면서 ‘이 사람 참 그런 것은 안하게 생겼다.’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것은 잘생긴 것, 못생긴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랬습니다. 세관에서 걸렸다고 하면 ‘어떻게 세관에서 걸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보가 있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약을 들여온다고 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세워두고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미련하게도 비닐봉지에 마약을 몇 겹을 싸서 먹었습니다. 그것은 1g에 수 천 만원입니다. 0.000몇 g을 타면 십만 원 짜리 1회분 주사액이 되니까 1g이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작은 밀가루 포대만한 것을 가져다 놓고 몇 십억이니 몇 백억이니 합니다. 그러니까 모르게 만들어서 급한 마음에 비닐봉지 몇 개를 감아서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속에서 터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혀를 찰 것도 없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을 신자가 사랑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불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려면 세상을 마음대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세상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있는 한 염려와 유혹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염려와 유혹은 놀랍게도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더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쭉 뻗어 올라서 결국은 우리를 배교의 상태까지 몰고 갑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말씀의 씨앗이 자라겠습니까? 예배드리러 와서도 맨 생각하는 것이 ‘아, 가게에 어느 물건이 잘 나가는데, 물건을 받아 놔야 할 텐데, 다른 대리점에서 빼앗아 갈 텐데.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으로 꽉 차 있는데 되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일날 예배당에 들어오는 순간 세상을 잊어버립니다. ‘오늘은 주의 날이다. 하나님 비추소서. 주의 은혜와 안식의 즐거움을 오늘 우리 영혼에 두루 비추소서. 우리가 주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물건이 팔리면 어떻고 덜 팔리면 어떻습니까? 남으면 어떻고 밑지면 어떻습니까? 그런 생각을 딱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니까 그렇게 못합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성경봉독을 장로님들을 시켰습니다. 올라와서 기도하실 분, 뭐 하실 분 이렇게 올라와 있는데 남 대표기도하는 시간에 성경복독을 하는 장로님이 계속 무슨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올라가서 읽으시라니까 “성도여러분, 오늘 성경 본문은 요한복음 3원 15전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야채장사를 하는 분이니까 하루 종일 앉아서 “배추 한 단에 얼마, 얼마 남는데…몇 전 남는데….”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장로님, 올라가서 성경 읽으세요.”하니까 “요한복음 3원 15전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은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이것은 누가 도와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사랑의 싸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믿는 이 백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려는 데서 일어납니다. 문제라기보다 말하자면 우리 신앙의 철저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주님이 매우 싫어하시면서 여호와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얼마나 천박한 말입니까? 어떤 면에서든지 질투가 고상해 질 수 있습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고상해지기 힘듭니다. 천박한 말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수준으로 내려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질투를 보셨을 것입니다. 질투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마음에서 솟아나는 질투를 느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질투의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단순히 미워하는 감정보다도 더 격렬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하나님이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대해서 입니까?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감정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정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영적인 생활 그런 것이 존재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영적인 생활의 기초 그 자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하게 유지되고 계속해서 불붙어 오를 때 우리는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 수 있고 신앙적으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불붙을 때 사람을 향하여 긍휼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고 용서해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불붙을 때에만 비로소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맡겨줘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맡은 직분을 하찮게 생각해서 팽개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지극히 충성하면서 보답 받는 것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으로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궁극적으로 캐들어 가보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옳은 일을 위해서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안일함보다는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자체가 없으면 이미 신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향한 사랑을 품고 있는 신자들에게 그것이 결국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말씀을 못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말씀을 깨달아도 그 말씀이 계속 자라서 결실하지 못하도록 위에서 끊임없이 찍어 누릅니다. 그래서 결국 씨를 아무리 뿌려도 싹은 날지 모르지만 결실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결실이 안 되고 오히려 풍성하게 결실을 맺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나무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기에서 맺히는 모든 열매가 이웃을 기쁘게 하는데 세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열매를 맺으면 사랑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열매가 맺힙니다. 탐욕, 죄, 음란, 폭력, 광폭, 패역 이런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끊임없는 고통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는 신앙, 참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앙,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가지는 깨어진 마음, 상한 심령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젖은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젖은 인격, 이것이야 말로 깨어있고 살아있는 신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 염려를 가져옵니다. 세상에 초연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염려를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의 문제, 세상의 염려를 해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염려를 해결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입니다.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아도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재리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이 불경건한 세상에서 정말 순결하게 사는 비결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그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을 버리고 세상 앞에 굴복함으로써 받게 되는 이익이 주는 기쁨보다 주님과 사랑을 나누면서 얻는 영원의 즐거움이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만이 순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비롯한 많은 종교개혁 이후의 청교도들은 늘 그들의 신앙 속에서 빼버릴 수 없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초기 한국의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신앙과 내세 신앙입니다. 특별히 내세신앙은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덧없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을 온전히 의지하고 여기에 모든 애정을 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결국 영원을 향하여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겠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늘 이 두 가지를 매일 매일의 경건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회상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입었으니 충성스럽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덧없는 곳이라는 인식입니다. 이 두 가지 인식이 항상 그리스도인의 충성된 삶의 주춧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친 듯이 일하고 미친 듯이 타락해 버리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치 교회에 예수를 믿으러 왔는지 일을 하러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신앙의 기초도 없고 영적인 생활도 견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일 저일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자신도 파멸하고 교회도 파멸시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기초가 잘못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면서도 그들의 소망 자체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성취에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잘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지만 그것이 영원을 향해서 어떻게 의미를 갖는가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이 즐겨 명상했던 것은 내세에 대한 소망입니다. 세상이 헛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또한 얼마나 헛된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들은 잠시 세상과 함께 지나가지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충성된 마음과 하나님 앞에 살았던 그 진실한 신앙은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도 소망도 모두 성취되고 예언도 패하지만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충성된 삶을 살고 주님의 일을 하는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데 그 사랑이 완벽하게 성취될 수 있는 곳이 내세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늘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 우리 주님 밖에는 의지할 분 없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세에 대한 명상은 경건한 신앙의 선조들이 경건을 유지하는 굉장히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잃어버린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끊임없이 고통이 오거나 혹은 세상에 대한 염려가 우리를 엄습하고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싹트려고 할 때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염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리의 유혹으로부터 훨씬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가져다주는 것은 약화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세상사랑은 죄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얼마나 죽이면서 살 수 있느냐하는 것이지 세상 사랑을 완전히 죽였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은 세상을 향한 사랑이 다시 소생할 수 없게끔 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게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말 좋고 그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 생활을 잘 하는 동안에는 약화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살면서 이 모양 저 모양의 근심스럽고 염려스러운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갑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통로를 분명하고 튼튼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염려가 생기면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믿음이 없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염려가 됩니다. 하나님, 이것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즉시 그 염려를 평강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바꿔주십니다. 할렐루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꿔주십니다. 고쳐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니까 염려가 우리 안에 자라고 그 염려가 자라다 보면 세상의 사랑에 뿌리를 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계속해서 그 나무가 자라면 말씀이 결실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매주일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까? 이것도 모자라기 때문에 수요일에 다시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있다면 동네 온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살아서 매일 모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텔레비전 같은 것은 다 치워버리고 모두 저녁 때 모여서 예배드리고 아이들과 손잡고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와서 또 살고 이런 것이 가장 이상적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개인적으로 예배하고 공적으로 함께 예배하고 기도 속에 잠겨서 사는 것들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 속에 말씀의 씨앗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세상 사랑의 씨앗,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받게 하는 말씀의 결실을 가로 막는 나무들이 우리 안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제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도하기 전까지 염려가 가득차고 걱정이 차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주님을 슬프게 하다가 깊이 기도하며 회개하고 나면 주님이 기도 속에서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믿음이 없는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너희가 어찌하여 염려하느냐.” 하나님의 경고와 책망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는 참회합니다.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신자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잠깐 잊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방패요. 주님은 나의 산성이십니다. 주께서 나를 보호하시니 누가 나를 해하겠나이까? 내가 방백과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 낫사옵나이다.’ 하면서 하나님만 온전히 의뢰하는 사랑이 우리 속에서 다시 솟아납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시로 주십니다. 이렇게 하면 말씀이 우리 속에 심기고 말씀이 우리 속에 자라기 시작합니다. 쭉 자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의 본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행복을 주십니다. 평안을 주시고 거기서 맛보는 아주 달콤하고 놀라운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에 대한 인식과 사모함을 가지고 세상이 주는 달콤한 기쁨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결실하게 됩니다.
정말 신앙생활을 지리멸렬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말 지리멸렬합니다. 그리고 지리멸렬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게 우유부단합니다. 우유부단한데 특별히 어떤 문제에서 우유부단하냐면 사랑의 문제에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서 우유부단합니다. 그래서 사실 자기가 신앙으로 보면 다른 사람보다 오래 믿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제까지의 신앙생활의 경험이 오늘 자신의 이 고통스러운 상태를 해결하거나 경감하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이렇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노장이 되는 신앙생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마치 신앙의 세계 자체가 한번 휘 돌고나면 무엇인가 마스터 한 것 같이 착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리 많은 이적을 보고 놀라운 기적을 보고 권능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려가면 바닥까지 내려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놀라고 깨닫습니다. ‘아, 내 신앙이 이것 밖에 안됐었나.’ 그것을 이제 알았습니까? 바닥으로 내려가서 완전히 바닥을 긁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교회에 가거나 사회에 나가면 자기를 그렇게 대접 안 해주고 “허~, 목사님이신데…. 허~, 교회의 직분을 맡으셨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이 자신의 내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 거품과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육 간에 소망이 없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누구든지 내려갈 수 있는데 그 바닥도 무한합니다. 내려가고 내려가도 끝이 없습니다. 더 내려가도 한 없이 내려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말씀의 감격이 있던 사람이 그럴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말씀이 계속 뿌려지고 말씀이 계속 뻗어나가 강한 생명의 기운이 솟아난 거기에서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결실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거기에서 열매를 끊임없이 맺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인정받는 역사가 일어날 때 정말 풍성한 신앙이 됩니다. 옛날에 깨달았으면 뭘 합니까? 문제는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자라는데 잠시 후에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끊어지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세상 사랑의 씨앗이 속에 박혀서 그것이 더 울창한 숲을 이루어 이전에 자랐던 말씀의 나무를 뒤덮어 버리고 결실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는데 옛날의 신앙생활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현재적으로 그런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느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히 세상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고 따라서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부터 누구도 “이제 나는 뗐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위험은 도사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런 일들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와 재리로부터 받는 모든 유혹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견고하고 풍성해지지 못할수록 비온 뒤에 풀들이 돋아나는 것처럼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수히 떨어져도 결실치 못하고 잠시 싹을 틔우다가 가시에 짓밟혀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굉장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감격도 있고, 은혜를 받는 것 같아도 결국은 견고해지지 못하고 결실도 하지 못합니다. 씨가 뿌려져서 무수히 싹을 내고 무수히 줄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감격과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가시에 짓눌려서 결실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의 중심부에 있는 것들은 결국 세상의 사랑을 누를 수 있는 영적인 건강함이 없기 때문에 이런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생각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깊이 새겨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똑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때는 말씀이 깊이깊이 뿌려져서 새겨지는 때가 있는가하면 어떤 때는 말씀이 도무지 심겨지지 않거나 끊임없이 감격과 깨달음은 있는데도 도무지 열매를 맺어서 풍성해지는 변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들을 가르치셨는지 상기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천국의 많은 진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 중의 작은 일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천국에 관한 교훈과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셨는지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지 공부하고 탐구한 결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분의 마음에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일들이 있었고 어린아이였을 적부터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들에 핀 백합이나 공중에 나는 새나 맷돌을 가는 아낙네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적용시키는 것들을 배워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책에 기록돼있던 구약의 여러 진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서 마음속에 깨달아지고, 그것들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깊이 뿌려지고, 그 뿌려진 것들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고, 열매 맺혀지는 경험들을 예수님께서 모두 하시면서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진리를 소개하는 자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진리이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나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갔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사람들에게 뿌려지기 전에 자신 속에 이 말씀이 결실하는 놀라운 은혜들, 말하자면 그 말씀의 놀라운 능력들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뿌리셨을 때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들이 결실하지 못하고 짓밟혀 버리는 것을 얼마든지 주님은 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이같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진리의 참된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사람들에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분명하고 정확한 가르침을 주시기까지 예수님께서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사셨는지 우리는 돌아봐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많은 여인들이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틀림없이 많이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따라 왔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고난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는 예수 그리스도 뒤에서 슬피 울며 따라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려서 여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꽤 긴 말씀 이었습니다. 십자가조차 지실 기운이 없고 온몸이 피로 낭자한 그 몸으로 어떻게 말씀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던 수만 명이 모인 곳에서의 연설이 아니었습니다. 흐느껴 가슴치고 통곡하며 따라오는 소수의 여인들만이 들을 수 있는 그런 독백에 가까운 말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인하여 울지 마라. 너희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에 대해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통곡과 눈물로 우셨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당신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이 이 세상에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아버지를 위해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살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고자하는 그런 소원함에 불타고 있다면 분명히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매일매일 살아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찌르며 다가오는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눈 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성경을 읽으면서 아무것도 마음에 와서 부딪히는 것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읽어도 예전에는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환희에 차서 읽던 성경의 구절들이 이제는 차가운 문자로 남아서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먹이 되어 버렸습니까? 이게 왜 그렇다고 생각됩니까?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성경의 지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염려와 불평과 여러 가지 불안한 마음들이 그리고 유혹받아서 지기 시작하는 죄의 범죄한 마음들이 하나님의 신비하고 은혜로운 진리를 통해서 받았던 예전의 은혜와 감격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받는 감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마음으로 설교하느냐는 것은 누가 설교하느냐하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느냐하는 것은 어느 본문으로 설교하느냐 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격하던 사람들이 그 감격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이제 감동하기에는 너무나 진리를 아는 지식이 그 사람의 머리에 가득 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져 가면서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한 고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속에 적용되지 못하고 말씀 자체가 우리의 삶속에 오히려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주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사랑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 기초해서 세상의 염려가 가득 찬 마음에는 천사도 말씀의 씨앗을 뿌려 결실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서 염려하라고 끊임없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제자들에게 조차도 너희들은 생활의 염려로 너희의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여러분입니다. 그리고 그 여러분들의 마음을 진정한 의미의 주인인 주님께 바치는 것도 주인인 여러분들의 몫인 것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받는 영적인 깊은 은혜와 사랑을 생활 속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곧 우리의 신앙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즉각 이렇게 반론할 것입니다. “한두 번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해서 신앙이 죽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두 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한두 번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방치하도록 내버려두면 일 년이 갈지 이 년이 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그 중에는 십년 가까이 만난 사람도 있고 혹은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이 장소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5년 전에 만났던 사람을 다른 장소에서 만났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심겨지지 못하는 고통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하나님이 미국에도 계시고 러시아에도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통해서 공급받는 영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비밀을 자신의 죄와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두 잃어버리고 밑천이 거덜 날 정도로 모두 파괴되어버린 영적인 세계를 지진 사람이 회복되기에는 분명한 계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자연치유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고쳐주지 아니하시면 영혼이 망가진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주님이 마음 놓고 말씀하실 수 있는 우리의 마음 하나 밖에는 주 앞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까? 우리에게 무리가 될 정도로 많은 재물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까? 우리 중에 집을 판 사람이 있습니까? 땅을 판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기로 작정한 적이 있습니까? 실재로 죽는데 우리 자신을 내어던진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았던 우리의 마음, 그리고 가진 재물도 없고 남이 부러워할 만한 지식도 없지만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우리는 분명히 다른 사람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리고 때로는 세상의 엄습하는 염려로 인해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눈물 흘리고 고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 능숙하고 능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신앙생활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소용되기를 원하는 사람, 때로는 염려가 우리의 마음에 엄습해 오고 유혹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차지할 때 황망히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영토를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범했던 것에 대해서 주님의 마음으로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건성으로 사랑해 주셨습니까? 말로만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를 보여주셨습니까? 주님의 그러한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한 것이 있었습니까? 깨달은 사람도 어그러지게 살고 한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도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맙니다. 주님이 홀로 영광 받으실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에 우리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상황을 바라보면서 평강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유혹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처지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무엇이 난 것이 있습니까? 다만 매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믿음이 부족하여 염려하고 근심하고 재리의 유혹에 빠질지라도 한 번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후회합니다. 이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며 우리의 모든 소유,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인치시기를 원하고 당신의 것을 삼으시기를 원하는 우리의 신앙적인 자아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또 다른 불신앙의 자아가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당신의 것 삼으시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과 마음 구석구석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쓰임받기를 원하는 그런 삶속에 살게 하시려고 부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날마다 확인할 뿐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주인으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하나 주관하고 그것을 붙들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 무능한 주인의 모습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주님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와 감화와 성령의 도우심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주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가진 이 씨앗을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뿌리십니다. 여러분, 결실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밭을 원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씨 뿌린 자를 원망하겠습니까? 씨 자체를 원망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대대적인 각성과 묵은 땅을 기경하는 진정한 변화가 없이는 늘 울어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늘 회개하는 모습과 우리 자신의 죄악된 삶에 대해서 자책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서 끊임없이 자복함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세상 사랑의 뿌리를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불태워서 없애버리고 우리의 마음이 정말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랑해서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무장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말씀가지고 장난하며 보내는 생활밖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방해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이 박혀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그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모두 바쳐진 상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을 드러냅니다. 세워질 수 없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번성할 수 없는 그곳에 아버지의 왕국이 견고하게 서게 됩니다. 늘 흔들리던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단이 와서 흔들 수 없는 그런 믿음의 왕국이 건축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이 가지고 계신 중요한 관심사 하나를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결실치 못하는 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씨 뿌려지는 것이나 혹은 싹이 나는 것이나 줄기, 가지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상당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뿌려져서 깨닫고 감격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한 번도 감격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다가와서 자신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자체가 엄청난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워낙 길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 있는 곳에 돌밭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씨가 뿌려져서 후 하고 불면 공중에 날아가 새가 와서 먹어 버리는데 한 사람이 말씀이 뿌려지더니 후 불어도 날아가지 않고 후후 부니까 속에서 파란 싹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길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기적과 같이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떻게 저럴 수가!” 하면서 놀라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솔직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주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고, 줄기와 가지가 올라오는 모든 것이 결국은 결실하기 위한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그러니 여러분,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부흥회에 가면 “아멘”을 많이 합니다. “믿습니까?”그러면 “아멘”을 크게 하면 복 받는 줄 알고 입을 쫙 벌리면서 “아멘!”합니다. 그런 소리를 부흥회를 하면서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꼭 설교 속에 자주하는 말은 “Say amen by alive.” “당신의 삶으로서 아멘을 말해주시오”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남다른 취향을 가졌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을 보여야 합니다. 결실한 열매를 보이십시오. 어둠속에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건져내셨습니까?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까? 좋습니다. 감격하였습니까? 좋습니다. 분명한 참회가 있습니까? 좋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든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지금 있는 곳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말씀 듣고 놀랍게 은혜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주님의 사랑받고 너무나 감사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한없이 눈물을 흘렸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그러다가 또 요즘은 다시 감동 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왠지 잘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아도 패역은 고쳐지지 않고 결국 말씀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 과정은 많이 나타나는데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궁극적인 축복과 번성의 증거들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열광하면 그것이 곧 자기가 이미 자신이 열광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두 번째 밭에 뿌려진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기쁨으로 받으나” 거기에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돌밭이었지만 쉽게 얘기하면 말씀에 의해서 자존심, 아집, 고집, 인간적인 잘못된 사고방식, 개똥철학 이런 것이 하나도 안 부서져도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때 “할렐루야 아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아! 하나님의 은혜!’ 그러면서 잘 하는 말이 “주가 나를 고치셨네.”합니다. 고치긴 무엇을 고칩니까? 걸어가면 여기서 덜그럭덜그럭 하는 돌 소리가 가득 납니다. 그러고는 나중에 무슨 생각을 하냐면 ‘아! 말씀의 감동을 받는다는 게 이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살지 않는 생각은 안하고 말씀에 대해서 감동을 받는 지체들 자체를 보면서 ‘다 쓸데없는 짓이다. 나도 왕년에는 그랬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잘못 위에 또 다른 잘못을 더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이제 흙 속에 돌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돌 속에 흙이 가끔 섞여있는 밭으로 변합니다. 돌멩이가 많이 섞여 있는 밭이 나중에 변해서 콘크리트로 가득 찬 밭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결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뒤집어지고 졸도시키는 체험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요점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심겨져서 뿌리가 내리고 줄기, 가지가 뻗어 올랐는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열매를 맺었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체험 그 자체를 자랑하는 것은 정말 경박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쳐드릴 수 있는 것은 말씀에 대한 극적인 체험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물론 말씀에 대한 체험 없이 뿌려져서 그것이 싹이 나고 잎과 가지, 줄기가 뻗어 나가는 일 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도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이 여러분 속에 심겨졌습니까? 그래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감격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더욱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말씀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훨씬 더 주님을 잘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더 아름다운 결실을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국 열매를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생활의 염려,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결국은 주님이 이 세상과 그렇게 작별하시면서 생명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초월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마지막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 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을 족한 것으로 알고 우리의 진실한 사랑이 날마다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지고 부어지는 삶을 살도록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방법, 주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부어져서 그 은혜로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잠깐 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손잡으며 주님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며 성장 할 것입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들은 거목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요긴한 도구들로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오늘 이 마지막 비유, 이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혹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런 말씀 나옵니다. 결국 앞에 나오는 세 가지 경우는 이제 마지막 이 비유를 말씀하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지막 부분에 중점적으로 강조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가끔 말이죠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참 그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를 믿어도 변화 받기 전에는 하찮은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들을 봅니다. 또 인격과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 믿기 전에는 참 미천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변화되고 나니까 참 거룩하고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놀랍게 변화되는 경우를 얼마든지 우린 보지 않습니까.
옛날에, 예수를 아무리 많이 믿고 신앙 생활 했어도 그를 한참 경험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 내리는 결론이 “그래 개꼬리 삼 년 묻어둔다고 황모가 되겠느냐”
황모는 사슴 꼬리털입니다. 그런데 그 황모가 붓을 만드는 재료로는 최고입니다. 그 붓은 지금도 굉장히 비쌉니다. 사슴 꼬리털로 이렇게 해서 묶어서 붓을 만들면 아주 최고의 붓입니다. 그런데 개꼬리를 잘라서 붓을 만들면 개발새발,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은 붓 타령을 안 하지만 그러나 진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은 이 붓, 먹, 그 다음에 종이 이런 것들을 아주 심사 숙고해서 선택을 한단 말이예요 최상으로 그래야지만 실력이 나오잖아요 여러분을 보고 나서 마지막 내린 결론이 변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는 예수 믿는 사람 너울을 썼는데 결국 경험해 보니까 그게 그거구나 마지막 내리는 결론이 그렇치 뭘 또 은혜를 받았느니 뭐가 됐느니 하면서 소문을 내고 돌아다니는데 마지막 결론은 그래 그렇치 “개꼬리를 삼 년 묻어둔다고 황모가 되겠느냐” 그런 결론을 내리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우리는 참 한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치 않습니까 내가 예수 믿기전에 말이죠, 한 때 말이죠 뭐 믿었다가 믿었다기 보다도 교회생활하다가 떠나갔는데 한참 청소년기니까 그런 생각 할수도 있는데 하여튼 말이죠 지겹게 싫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따지기 좋아하고 그리고 말잘하고 또 술도 안 먹으니까 융통성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타적이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말이죠 그런 사람들 아주 질색을 했습니다. 모두 무엇 때문이냐면 인격적으로나 삶에 있어어나 열매가 없는 삶이란 말이죠
여러분 이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말 하자면은 새로운 접붙임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에 새로운 접붙임을 한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죠 그랬으면 이제 여러분들은 지금쯤이면은 예수를 안 믿었으면은 살지 않았을 그러한 새로운 삶의 열매들이 여러분 속에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옛날에 좋아하던 것 여전히 좋아하고 그리고 바꿘거라고는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것 그것도 착실하게 왔다갔다 하지 않아서 목회자를 신방다니게 만들고 다리 아프게 만들고 입 아프게 만드는 그러한 신앙 생활 이라고 할 수 없는 신앙생활 그런것들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해 놓으신 목적이겠는가. 어디한번 진지하게 되물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람들 중에는 이세상에서 직업에 종사하다가 다시 말하면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만 좇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몇 백명에 한 명씩만 나오면 충분합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말이죠. 다들 생업에 종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어냐 하면은 겉으로 들어난 삶에는 예수를 안 믿었어도 공무원 생활 믿었어도 공무원 생활 하고 있을 것이고 그렇치 않아요 내가 사업을 하면 사람이면 예수를 믿었어도 사업을 할 거고 안 믿었어도 사업을 할거고 놀고 먹는 사람이면 예수를 믿었어도 놀고 먹을 거고, 그건 좀 말이 안되죠 예수 믿었으면 일 하면서 살아야지 놀고 먹으면 안되죠 어쨌든 그러고 살아갈텐데, 그러고 살아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로이드 죤스 목사님이 언제한번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느 집회에 갔는데 은혜가 많이 끼쳐졌는데 젊은 청년 하나가 나와서 고민을 하는거예요 목사님 저는요 지금 신학교를 다니는데 쫓아 갈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도저히 어려워서 신학공부를 감당 할 수가 없데요 그 나라만 해도 이제 말하자면은 놀아리로 목사 되는 것은 불가능한 나라 였으니까. 그 왜 그러냐 그러니까. 사실요 제가 빵굽는 사람 이거든요 빵을 열심히 굽고 있는데 어느 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았더니 그 목회자가 설교자가 자기에게 오더니 당신은 아무래도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당신을 신학하라 그러시는 것 같소 가서 신학을 하시오 그래서 자기가 거기에 아멘을 했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 앞에 벌 받을 것 같아서 빵굽던 것 집어치우고 이제는 와서 말씀으로 빵을 구우려고 그러는데 그게 구워지지 않는거예요 잘 실력이 모자라서 반죽도 잘 안되는 거예요 맨날 망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로이드 죤스 목사님이 그랬어요 도로 빵을 구우십시오 양심에 가책 받지 말고 당신은 그게 천직입니다. 지성도 모자라고 능력도 닿지 않는 당신을 하나님이 그렇게 불렀으리 없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다 어떻게 목사가 되겠습니까. 양심에 개의치 말고 내가 책임 질테니 빵굽는 대로 돌아 가십시오 그래서 요새는 열심히 빵 구우면서 아주 성령 충만하게 산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오늘날 말이죠 60년, 70년대, 80년대를 지나면서 이런게 유행처럼 번젔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죠 오죽했으면 신학교 갔더니 신학생을 너무 많이 뽑아났어요 그래가지고 다들 은혜롭게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번쩍들어요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굉장히 진지해요 그런데 그 진지한게 우리한텐 우습게 보였죠. 왜 그러냐 그랬더니, 취업에 대책은 서 있습니까 그래서 신학교 선생이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대책도 없이 이 많은 사람을 뽑아 놓으면 이걸 어떻게 다 일자리를 구합니까 그러니까 그 교수님 대답이 더 재미있어요 머리가 허연 노인네 였는데, 예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런것들이 유행처럼 번젔거든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열매를 맺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유별한 삶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꼭 그러한 유별한 삶이 아니라, 여러분 똑같이 예수 믿기 전에 예수 안 믿었어도 공무원 생활하고 예수 믿었어도 공무원 생활하고, 사업은 사업하고, 교수면 교수고, 장사를 하면 장사를 하더라도 열매가 달라야 되잖아요. 여러분이 만약에 슈퍼를 하든지, 가게를 한다고 합시다. 가게하는 사람의 최고의 목표는 뭐예요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겁니다. 싸게 물건을 파는 것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싸게 주는 거예요 그렇치 않습니까. 이익을 많이 남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생각하는 자기 사업의 열매는 기껏해 봐야 돈을 얼마나 남겼는가 그리고 가게를 해서 본전다 빼고 이익이 몇 푼어치 남았는가, 그게 그 사람이 생각하는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 가지고 여행도 가고 그다음에 나중에 그 걸로 관도사고 묘지도 사고 장례비용도 지급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인생에 열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었어도 장사는 계속해야지 그렇치 않아요 그럼 어떻할거예요. 예수를 믿어도 장사는 계속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다음에는 열매라고 생각 하는 것들이 이제 좀 거기에서 한발짝 더 변화된 사고로 나아가야 되잖아요 전에는 돈만 벌고 이익이 남으며는 할렐루야 했지만 이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치 않아요. 주일날 예수를 믿고 나서 주일날 더 잘되는 가게 문 닫을수 있는 것도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알량하게 문 닫으면 월요일 날 두배 팔게 해 주실 것이다. 그걸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게는 이제 인생의 목표 자체가 돈버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라는 생각의 전환이 온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또 다른 열매 이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지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 말고도 다른 열매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알던 형제 하나가 신학교를 열심히 다니다가 아무래도 소명이 아닌 것 같아서 집어쳤습니다. 그리고 집어치고 가게를 하나 냈는데 신발 가게를 냈습니다. 신발가게를 내고 자기가 복음의 신발을 신고 뛰어다녀야 될 사람이 신발 가게를 하고 있으니까 이 이래도 되는가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예요.
그런데 이제 진실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그리고 신발가게를 했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학교 다니다가 집어치고 가서 돈 벌겼다고 구멍가게 처럼 하나 만들어 놓고 신발을 팔고 앉아 있으니 그것도 대학까지 나와 가지고 사람들이 이렇게 들여다 볼때는 정신나간 놈팽이로 보일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앉아서 신발을 팔면서 말이죠. 그런 말이죠 새로운 하나님의 자기를 통해서 맺기를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신발사기 위해서 오는, 대개 신발은요 같은집에서 자꾸 삽니다. 저두 구두를 사는데 아크리스 백화점 1층에만 가서 삽니다. 열컬레 가까이 샀어도 다 거기가서 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아는 사람이 있고, 깍아주고 그래서가 아니라 그냥 가까우니까 가게되고 헌구두 맡겨났으니까 새 구두 사게 되고 뭐 그렇게 되더라고요, 단골로 그냥 대접은 못 받아도 늘 다닙니다. 그러니까 신발, 그건 이제 떨어질때가 되면, 그땐 또 옛날 이었거든요 그러니까 특히 고무신은 잘 떨어지잖아요 떨어질때만 되면 그사람이 또 오고 또 오고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거기에서 전도사가 됐더라면 하지 못했을 많은 일들을 그 신발가게에서 했다 이런 얘기죠.
그리고 마음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 사업을 통해서 나에게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하는 그런 충만한 기쁨이 있더라 그러니까 가끔 신학교도 때려 칠만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이야기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면 이제는 뭔가 세상 사람들과는 그 사람들과 꼭 같은 직업에 종사해도 맺히고자 하는 열매가 뭔가 다른 삶을 살아야 되지 않아요. 얼마나 슬픕니까 야 너 왜 그러구 다니느냐 나는 직장에 자부를 느낀다 너 왜 직장에 자부를 느끼냐, 돈 많이 주거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 너는 왜 직장 안짤릴려고 애를 쓰냐, 월급 많이 주거든.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기껏 해서 생각하는 것이 그저 월급이나 많이 주고 돈이나 많이 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말이죠. 살아가는 삶의 목표 자체가 바뀌지 않는 것이예요 월급만 많이 받을수 있다면 무슨일이라도 하고, 말이지 신앙이라도 양보할 각오가 되어있는 것이죠.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정말 주님이 맺길 원하시는 그런 열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깨닫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든지 직장생활을 하든지 간에 자기의 실현을 위해서 직장 생활하고 사업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한 칠년 팔년 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감사한 제목이 될 수 없어요 열매와 관련해서 이야기할때마다 그런 생각이 늘 듭니다. 8년 인가 직장생활하는 가운데 3년은 사표를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런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실력이 모자라서 이 직장에 총 집합했고, 나는 재수가 없어서 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수준에 안 맞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다. 이게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불행한 일 이냐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니니까 늘 언제든지 전깃줄에 다리하나 들고 날아가려는 새 모양으로 직장생활 하는 거예요 그러니 누가 인정해 주겠어요 인정도 못 받고 말이죠. 늘 뭔가 불만으로 가득 차서 출근하면 퇴근시간 기다리고 퇴근하면 놀러 갈 생각이나 하고 그러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죠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은 참 패인과 같은 생활 일거다 그런생각을 하게 되면서 후에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서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에수님을 믿고 나니까 말이죠 뭔가 새로운 삶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제가 다니던 직장도 덕을 참 많이 봤습니다. 왜냐하며는, 필요할때는 전에는 칼 같아요. 5시에 동절기 퇴근이거든요 직원들이 4시50분서부터 손 씻으러 가기 시작합니다. 아니 퇴근하고 가다가 씼으면 어디 던 나요, 왜 그거를 퇴근 후의 시간을 사용하냐 이거죠. 45분부터 부지런히 나아가서 손씻는 사람 뭐 하는 사람 그렇게 해 놓고 딱 55분에는 퇴근할 옷 다 갈아 입고 가방까지 옆에 놓고 인제 애국가 나오기만 기다리는 거예요. 애국가 하고 나면 다 뛰어요. 출근할 때 뛰는 사람 퇴근 할 때도 뛰더라고요. 무슨말인지 알아요 출근할 때 뛰는 사람이 퇴근할때도 뛰어요 그러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변화를 받고 보니까 아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내 내가 생각한 사람 있었어요. 구약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가든지 간에 항상 거기에서 인정을 받고 복에 근원이 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졌어요 그래서 성실하게 일 했습니다. 주께 하듯이 이런 말이 있잖아요. 왜냐하면 열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예요. 한없이 비참한 생각이 들고, 그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셔서 이 직장에 두신 것은 나름대로 나를 통해서 거두시기를 원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돈 말고 다른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직장에 다닐 때 선교지로 출근을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기서 그렇게 은혜를 배푸셨어요. 그래서 동료들이면서도 사석에서는 나보고 전도사님이라 그랬어요, 그땐 뭐 사실 전도사도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이렇게 직장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내 마음에 기쁨이 있었고 충만한 은혜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은 오르는 월급이나 그런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사실 쉽게 얘기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변화 받고 보니까 직장 생활을 하다가 보면 내 돈을 써야 될 때도 있고 말하자면은 직장에서 주는 돈 가지고 모자랄때도 있고 서슴없이 제 지갑을 털어서 직장의 일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는 아직까지 못 받은 돈이 꽤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은 왜 그러냐 하면은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또 다른 열매를 보았기 때문이예요. 그 직장 밥 벌어 먹는 일터라고 생각 했을 때에는 밥 밖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여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이고 선교지이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헌금하는 마음으로 직작을 위해서 돈을 쓸수도 있었고 그럴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이제 열매들을 이렇게 맺겠금 해 주신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다니면서 맛 볼 수 없는 열매란 말이죠. 내가 그 직장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알게되고,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내가 들어감으로써 내가 서로 희생을 해서 두 부서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는 속에서 내가 들어가서 윤활제가 되는 거죠 이 사람의 짐을 내가 좀 져주고 이 사람의 짐을 내가 좀 져주고 그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내가 찾아서 하고 많이 흘러가서 한 십년정도 흘렀으니까 제가 맡은 일을 한사람, 두사람, 세사람 여러대를 거쳤죠. 같은 동료로 있던 사람이 높은 간부가 됐죠. 그리고 나서 문서창고를 뒤지면서 새까만 후배죠 우리에겐 그 사람이 뒤지면서 그러더래요. 이사람이 누군지 얼굴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왜냐 그러니까 이 사람 왜 이렇게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고, 덕분에 요즘 내가 괴로원 죽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말이죠 열매에 대한 관점과 생각을 좀 변화되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여기서 주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 열매가 여러분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월급이 올라가는 것이나 땅이 늘어나는 것이나 빌딩의 층수가 올라가는 그 열매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이것은 이 열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한 사람의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변화를 주시고 변화된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을 통해서 인생을 통해서 성취되고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열매를 여기서 가르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인격 속에서 맺치는 열매이고 섬김과 관련해서 보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그런한 번영을, 번영, 번영을 보여주는 것이라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전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던 사람이 인내 할 수 있는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 이전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할 때에 조금밖에 열매가 없었던 사람들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 그리고 자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자신의 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의현장 전체에 대한 제 해석이 이루어지게 되는것이예요.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고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직장을 단지 밥 벌어 먹는 곳이라고 생각을 안 한단 말이예요. 그렇치 않습니까. 무언가 이 속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는 곳이요 그리고 이러한 일환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새워주신 곳이다. 이러한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라고 하는 말씀인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이러한 결실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를 삼년, 오년, 육년, 십년 여기서 말한대로 반대로 말하자면 삼십년, 육십년을 예수를 믿어도 말이죠. 백년까지 믿은 사람은 많치 않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인격이란 것이 너무 일천하고 천박하고 말이죠. 무엇인가,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깃들여서 안식을 얻을수 있고, 그리고 고통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많은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수 있고, 긍휼과 동정을 얻어낼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오히려 포악해지고 정죄하기 잘하고 말이죠, 단죄하기 잘하고, 사람 판단하기 잘 하고 그리고 불같은 말하자면 옛습관들이 다시금 살아나서 사람을 죄 가운데로 몰아가고 하는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모습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은 결국 인격속에 열매가 없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치 않습니까. 열매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들이 말이죠.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들이 이 모양 저모양으로 섬기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여도 중요한 것은 말이죠.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는 우리안에 이루어진 나라를 능가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안에 이루어진 나라를 능가하는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섬김을 통해 성취되는 것은 매우 드문일이다.
이 말씀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영혼을 가르쳐 봐도 사실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 생활을 똑바로 해서 말씀으로 열매를 많이 맺어서 자신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 무언가 하는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 그래서 그나라를 맛 본 사람들은 영혼을 가르쳐도 항상 이 영혼에게 말하자면 그러한 천국의 맛을 보게 해 주고자 하는 의욕이 있습니다. 그러한 천국의 진정한 맛을 그 안에서 맛보고 자유를 누릴 때 까지는 쉬지않고 이 영혼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타일러서 일깨우려고 하는 그러한 강한 의식이 있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천국의 무엇인지 모르고, 참되게 예수 믿는 것과 거짓되게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차이를 모르고 그랬기 때문에 그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다니는 것이고, 몇 개의 단어, 하나님, 교회, 은혜, 이런 몇 개의 단어를 생활속에서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르치면서도 형식적인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갈등을 하지 않는 것이예요 왜, 유유상종이니까. 자기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을 보면서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지체들이 그렇게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는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이미 그런 껍질을 한번 깨뜨리려서 자신속에 아버지의 나라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신앙을 용납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맛본 사람들만이 그런 은혜를 알지 못한채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 할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두움 속에서 진리와는 거리가 먼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연민이 없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진리의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속에 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었을 때 그때에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의식은 뭐냐 하면은 어둠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핏기를 잃은 영혼들 그리고 참 진리의 빛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어두움 속에서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 그런 영혼들에 대한 연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이러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결실들을 우리들이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도 그렇고 우리의 섬김에 있어서도 역시 동일하게 그러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놀라운 발전입니다. 발전이란 말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놀라운 변화입니다. 작은 한 톨의 볕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가 올라오고 거기에 뿌려진 한알의 씨앗이 죽게되자 거기에서 때가 되매 한줌의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발전이 아니라 말하자면 새로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모입니다. 분명한 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말이죠 제가 요새 늘 강조 하는게 뭐죠. 사람이 잘 변한다, 안 변한다. 안 변한다 그런데 말이죠. 제대로만 신앙이 들어가고 그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 하면은 정말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정말 발전이라고 보기는 굉장히 어렵다 이거죠. 예수 믿은지 오년 십년이 지나도 믿기 전에 맨 하던 거짓말 하고 나쁜짓 하더것 그대로 하고, 정도만 조금 떨어지고 말이죠 정도만 떨어졌는데 그대신 거짓말 하던 방법이 더 교묘해 지고 말이지 그런거 어떻게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자신의 말씀을 떠난 삶 속에서 합리화하는 그런 것들을 배워 나아가는 그런 간사스로운 신앙 생활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그런 일들이 참 강하게 일어 납니다.
(예화) 제가 벌써 한 20년 전 일이요. 제가 주일학교 선생 할 때 일인데, 그때 제가 한 참 은혜를 받았을 때인데, 여름 성경 학교 때 애들이 하나를 전도해 왔어요. 물 론 많이 전도해 왔는데 그 중에 한 아이가 생각이 나서 그래요. 이 녀석은 키도 크고 얼굴도 선해요, 이름은 가물가물한데 얼굴이 선하고 머리는 스포츠를 깎았 는데, 얼굴은 멀끔하게 생긴 녀석이 두 가지를 잘하는데 춤을 잘 추고 또 하나 는 욕을 잘해요, 근데 얼마나 욕을 잘 하냐하면 완전히 이건 욕쟁이예요. 욕으로 말을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마침표 직전에 욕으로 끝나요. 이게 골목에서 욕 대 장이었던터라, 그런데 이게 교회에 들어왔는데 이게 교회에 들어와서도 입만 열 면 욕을 시작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물어 볼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욕이예요. 이 거는 제가 볼 때에는 질병이더라고요 질병 그 애를 한번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 다. 그렇게 욕하면은 안된다. 욕하면 안된다. 그런데 야단을 맞고 뒤어 앉아서 뭐라고 입을 움직움직하는데, 직감적으로 그것도 욕이라는 걸 내가 알 수가 있 었어요. 입만 움직이면은 욕이예요. 그런데 그것도 참 신기하더라고요. 공과 공 부를 하는데 그 때 공과책이란 게 뭐 이렇게 선생 혼자서 들고 하게 되어 있는 데, 그걸 인제 메모 해다 놓고 그 다음에 이렇게 놓고 가르치는데 어느 날 하루 가르치데 말이죠. 뭐 신학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가르치는데 그렇게 감 동적인 것도 아니고, 당연히 공과 책에 나오는 이야긴데 이놈이 거기서 갑자기 이러고 장난질만 치다가 처다보더니 갑자기 눈이 시뻘게지기 시작해요 그러더니 말이죠. 거기서 막 뜨거운 눈물이 그 주근깨 닥지닥지한 볼을 타고 좍 흘러 내 리고 그게 계기가 됐어요 그런면서 부터 성경공부하면서 애가 변하기 시작하는 데 꼭 뭐 같이 변하냐 하면, 배추가 살아서 펄펄 뛰던 놈을 소금물에다 집어넣 으면 완전히 야들야들하게 변하잖아요. 은혜의 소금물에 쑥 들어갔다가 나오니 까 애가 말하자면 번개 맞은 고양이 같이 말이죠. 힘이 쭉 빠지는 것 얼굴에서 독기가 빠져나가요 독기가 빠져나가고, 난 번개 맞았단 표현을 쓰는데, 독기가 좍 빠져나가고 그리고 선해지는 거예요. 얼굴이 그리고 매 맞아도 안 고쳐지고, 욕을 먹어도 안 고쳐지는 그 욕이 말하자면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성경을 읽고, 그런데 그때에 받은 느낌이 뭐냐 하면은 한 주 말씀을 전하고 그 다음주 오면은 변하고, 전하고 그 다음주 오면은 또 변하고 또 변화 고, 또 변화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어린 마음에도 제가 느낀 것이 뭐냐 하면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능력이 있을수 있구나,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도 있구나 그리고 육 학년 때까지 가르치고 떠나 왔습니다만은 그 비슷한 예를 교회에서 간혹 봅니다.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빨리 빨리 변하는 거예요. 사람이 안 변한다. 사람이 얼마나 안 변화는 줄 아느냐 제가 그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이렇게 옥토와 같은 밭이 되었는데 사람이 안 변한다는 이야기가 아나라, 왜 이렇게 사람이 안 변하냐, 이 이야기는 땅에 문제가 있다. 이야기에요, 땅에, 그래서 말씀이 떨어져서 자라려고 하는데, 세상의 유혹과 사랑이 세상의 염려가 그게 마음으로 파고 들어와 가지고 말씀이 마음으로 자라지 못하도록 짖발아 버리는 거예요. 못자라죠, 변할 수가 없고, 또 하나는 뿌리를 내리고 이게 뿌리가 뻗어 나가야지만, 위에 많은 줄기가 뻗고 거기에 열매가 맺히는데 문제는 뭐냐, 자기 아집, 독선, 위선, 자기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 선입견, 이런 것들이 있어 가지고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과 충돌할때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용기가 되있는 사람이니까. 말씀이 그런 모든 것들을 피해서 뿌리를 내려야 하니까 뿌리가 뻗어 나갈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런데 올바른 밭,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려고 하는 부드러운 밭, 그리고 그 말씀이 뿌리를 박고 내릴 때에 그 말씀을 모두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 깊이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결실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밭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에 그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없을 정도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예요. 이렇게 쉽게 인간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변화들이 인간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시간 안에 어려운 변화들이 인간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시간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 내가 항상 말씀 드리는 게 그거예요. 가슴에 큰 돌, 작은 돌 잔뜩 끌어안고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던 신앙의 경력은 자랑할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얼마나 열매를 맺겠습니까. 문제는 정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충분히 자신 속에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그 신앙 속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의 뻗어 내려간 그 신앙의 경력, 그거는 정말 누구도 추월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거둡니다.
결국 마지막에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결실입니다. 그 말씀 때문에 길거리에 떨어진 거, 아예 뿌리도 못 내렸다. 돌 밭에 떨어진 거, 뿌리는 약간 내렸는데 말라죽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시나무 떨기에 떨어진 것은 줄기 가지도 올라 왔는데 대도 올라오고 잎사귀도 맺었는데 결국은 열매를 못 맺었다. 그리고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때로 방황 할 때도 있고 참과 거짓 사이에서 주저주저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유혹을 받아서 마음이 가라앉아서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것들조차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것을 극복한다고 하는 것은 한가지가 전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결국은 마지막에 그런 모든 변화의 과정을 거처서 승리를 하고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랬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 열린교회를 나중에 십 년 뒤에 역사를 쓴다고 봅시다. 십 년이면 역사 쓰기에 너무 짧지만은 하여튼 한 삼십 년 지나고 섰다고 칩시다. 그 때 열린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속에서 변화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는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이 역사 속에 분명해 졌을 때, 열린교회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어려움들, 방황, 뭐 또, 그러면서 이런 모든 일, 어려움, 닥쳤던 고난, 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고난을 받아서 다 찌그러져서 지금은 다 흩어졌다. 그게 무슨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냐 이 말이예요.
신앙을 간증하는 사람들도 와서 보면은 결국은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은 사람들이 간증하는 거예요 저는 젊은 시절에 술 먹고 방황하며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목사님을 욕하고 집사님들하고 주먹 다짐하고 싸우고 말이죠. 돌아다니면서 교인들 욕하고 다니고 나쁜 짓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요즘도 그렇게 삽니다. 그게 뭐 간증거리가 되냐 말이예요. 듣는 사람이 에이구 잘났다. 저는 요. 목사님 깡통이었습니다. 교회 와서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교회 오는 것은 그저 언제 예배 끝나나 그런 소망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 왜 이렇게 깁니까. 설교 끝날 때까지 천장에 있는 등이 몇 개인가를 몇 번씩 세어도 안 끝났습니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 요즘도 계속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열매예요. 그래서 주님이 비유를 말씀 하셨잖아요. 열매를 안 맺어도 주님이 농부가 말이예요. 거름도 주고 두루 파고 하면서 이 나무가 다시 소생할 수 있도록 주인이 찍어버리지 못하도록 그렇게 보호해요. 그 농부의 그 심정은 마지막엔 무엇이겠어요. 열매를 못 맺는 나무를 거기에 두어서 뭐하냐 땅만 상하지 않느냐 찍어 버리자.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은 이 나무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농사하는 마음으로 다가오셔서 기르시는 거예요. 착각하지 말라고요. 주님은 다 생각이 있으셔서 다가오시는 거예요. 다가오셔서 우리가 죄에 빠져서 더러워졌을 때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 우리는 공로 없지만 또 건져주지 않습니까 어두움 속에서 헤매일 때에 이게 뭔지 도대체 신앙의 길이 뭔지 불신앙의 길인지 모르고 그저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말갈 때 소갈 때 다니던 인생을 코 꿰어서 하나님의 교회에 데려다가 앉혀놓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발로차고, 몽둥이로 개 패듯 패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셔서 데려다 놓고 그렇게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의 귀를 열어 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슬플 때에 하나님게서 용기를 주시고 고난을 능가하는 기쁨도 주십니다. 어두운 길에서 빛을 보내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병들었을 때 병을 고쳐주시고 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싸매어 주십니다. 그렇게 고쳐 주시는게 결국 무엇입니까. 인생 평생 그렇게 하나님께 애프터 서비스만 받다가 죽을거예요. 아니라 그랬어요 아니라 그러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이 여러분들 심부름꾼이예요. 망가지면 고쳐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말이예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얘야. 이제 나도 너 고치는데 지쳤다. 이제 너 계속 고쳐서 손 안 본대가 없는데 그래도 도대체 열매라고는 안 나오니, 얘야 너는 오늘 패기처분 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불러가시면 인생이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 그 얘기죠. 똥차를 가지고 자주 카 센터에 왔다갔다 하니까. 이 사람은 한번 찾아 갈대마다 돈 버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뭐라 그러냐 하면, 내가 새차를 샀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 나는 되게 미안한데 왜 그러냐 그러니까. 아저씨 그 차는 옛날에 패차 했어야 되요. 그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A.S를 받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말이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국은 주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마지막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열매 맺는 백성되게 해 주시려고 주님 불러 주신 것 아니예요. 그렇치 않아요 그렇게 우리가 결국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갈등, 고민, 괴로움 이런것들을 이기고 극복을 해서 마지막에는 결국은 나 혼자서는 도저히 맺을수 없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또 교회를 여기에 새워 놓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습니까. 여기 이 비유 전체에서 말하자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는 부분이 뭐냐하면은 열매예요. 열매, 그러니까 결국은 돌짝 밭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시 떨기와 같은 밭이 되서는 안 된다. 길가와 같은 밭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이었기 때문이예요. 열매가 그런 밭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제 우리는 여기에서 열매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열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밭에 달렸다고 하는 것이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뿌리는 자, 적당한 광선 그리고, 씨의 질 모든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그것을 받아드리는 밭 자체가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죠. 주님이 돌짝밭에 뿌려진 씨든. 가시나무떨기에 떨어진 씨든지 간에 지금 주님께서는 동일한 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쉽게 얘기하면은 돌짝 밭에 뿌려진 씨에는 물도 안 주고 비료도 안 주고 그리고 옥토 밭에 뿌려진 씨에는 계속 물도 주고 보호 하셨다는 얘기가 아니라. 똑같이 농부가 공을 드린다 하더라도 그렇게 밭이 다르게 되면은 그러면 결과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예요.
그래서 언제 한번 자기 간증에서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광양만인가 어딜가면 정부에서 땅을 거의 거저 주다시피 하니까 거기로 가서 한번 농사 잘 지어가지고 이 가난을 면해 보자 그래가지고 같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설득해 가지고 가서 말하자면은 심었는데 꽝이더라 이거죠 왜냐. 소금끼가 있어서 하나도 안나요 그러니까 목사가 우리 데리고 와서 죽을 고생 시켜 놓고, 말만 믿고 뭐 믿음으로 하면 된다 그래서 씨뿌렸더니 열매도 못 맺고 우린 이제 굶어 죽게 생겼다고 막 두들여 패 더래요. 그래서 그랬데요. 나 패면은 나 자꾸 눈을 뜨면은 당신들 보게 되니까. 나 팰려거든 부대를 뒤집어 씌우고 패라. 그래야지 내가 너희를 안 미워하지 않을 거 아니냐. 그러니까 부대를 뒤집어 씌우더랍니다. 그래가지고 누가 때렸는지도 모른데요. 그러니까 땅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 열매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데, 자기를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열매만 맺으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가는 방식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먼저 말하자면은 우리 자신들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예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옥토가 차이가 뭐냐 이거죠. 두 가지를 얘기 합니다. 듣고, 깨닫고, 마지막 세 번째가 결실입니다. 세 가지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듣고는 여러분 보다시피 앞에 두 밭에서도 반복해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세 번 나오죠 자 보십시오 19절에 나옵니다. 뭐라고 나오냐 하면은 아무나 성경 말씀을 듣고 나오죠. 길가에 뿌려진 경우에도 들었다 그죠. 두 번째 돌밭의 경우에도 20절에 보면은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이것도 듣고입니다. 그런데 기쁨으로 받고가 추가되죠 그죠. 그리고 세 번째는 말이죠. 가시나무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들으나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도 들었다는 것이 나오죠. 그리고 좋은 밭에 뿌리웠다는 것도 들었다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듣고라는 것 이 자체에는 말하자면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근데 듣고 나서 다른데서는 나오지 않는 한 단어가 거기서 나오는데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깨닫는 것이 무언인가에 대해서 천국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가끔 저도 설교중에 그런말을 은연중에 종종 사용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깨닫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그게 뭐냐,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그렇게 안 살면 무슨 소용이 있냐 그런 얘기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본문에 비춰서 볼 때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은 돌밭에 떨어진 경우 뭐라고 표현했냐고 하면은, 기쁨으로 받되 그랬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 마음에 떨어졌을 때 그 말씀에 대해서 말씀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다면은, 기쁨으로 반응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는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도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깨달았다는 겁니다. 거기는 거기대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뻐했고, 아멘하고 받았다 이거죠. 그리고 눈물도 흘릴수 있고 거기에 어떤 감동도 자아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결실에 이르는 깨달음이냐 이거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결실에 이르게 하는 깨달음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단선적으로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결실에 이르기까지에 깨달음의 긴 과정이라고 우리는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거 보지 않습니까.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아주 놀랍게 깨달음이 옵니다. 그래 맞아 그리고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통회하기도 합니다. 또 회개하기도 합니다. 뉘우치기도 하죠 그러나 여러분 한번의 그런 뉘우침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지속적이고, 그래서 일관된 깨달음이 필요하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밭 우리의 삶에 잘못된 습관, 우리의 인생의 밭 자체가 말하자면 거대한 트렉터가 지나가면서 전체적으로 갈아 업는 것 같은 그런 지속적인 것이 필요하다 말이죠 밭이 있다면 그 밭에 가서 삽으로 파서 군데군데 엎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트렉터 같은데다가 쟁기 같은 것을 매달아서 한번 밭 전체를 깊이 골 깊이 갈아서 그래서 다시 그 흙을 뒤엎어서 그 흙 속에 산소가 들어가고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그래고 그 흙이 다시 정돈이 되어서 말하자면은 잡초가 우거졌던 밭이 변해서 묵은 땅이 기경되는 것 같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지속적인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것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많이 경험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제가 말을 하면은 고개를 끄덕 거릴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놀라운 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살았던 삶이 잘 못 됐다는 것을 깊은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깊이 깨닫습니다. 다시는 그런 삶을 안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깊은 회개와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쁨을 주지 않습니까. 깨달음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말씀이 너무나 답니다. 기쁩니다. 그러면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들이 깊은 갈등을 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말씀 속에서 축복을 받는데 깊이 갈등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은 무얼 우리에게 깨닫게 하냐하면은 그것은 단지 단순하게 은혜를 받다가 뒤로 미끌어 지거나, 물러나는 것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그런 경우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다가 마치 이 두 번째 밭의 비유처럼 처음에는 말씀을 받으면서 기쁨으로 받아 드리는 거예요. 자기는 그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좀 더 시간이 흘러가면서 말씀이 계속해서 다가올 때에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사상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멈추는 겁니다. 그리고 진리가 깊게깊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국은 어느 순간에 자기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 말하자면은 그런 잘못된 완고한 그런 세상에 대한 견해, 인생에 대한 견해, 신앙에 대한 그릇된 사고방식, 잘못된 개인의 철학,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있고,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양보할 수 없다는 자신의 볼래의 모습을 결국은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거는 진정한 의미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말이죠. 말씀을 전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번 말씀을 듣지 않았는데도 신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사고 전체가 깊이 파여져서 기경되는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자면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잠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것이 기쁨으로 받아드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얼마 안 들었는데도 말씀이 계속 자기를 주장하면서 신앙에 대한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근본적으로 다 갈아엎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후에도 동일하게 진리에 속한 말씀을 들을 때에만 그 영혼이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을 하면 무엇이든지 자기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게 반응하는 요소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이야기하는 결국은 결실하게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에 번쩍하고 와 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계속 깨달아 지면서 그 말씀에 의해서 일관되게 영향을 받고 깨달아 가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이런 식의 변화가 이루어 진다면 뒤로 안전히 미끄러지는 일이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물론 걸어가다가 신앙생활해 나가다가 너무 영적인 상태가 힘들면은 엎어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미가서 7장의 말씀처럼 나는 엎드려지나 다시 일어날 것이요. 결국은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있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은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있다 말이죠 내가 걸어온 신앙의 길을 부인해 버리는 것과 내가 걸어 온 길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면서도 내가 힘이 없고 부족해서 못 걸어간다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자라고 할 때 이 깨닫고 라는 말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더 많은 깊은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저 앞에서 이야기하는 순간에 기쁨이 있어서 아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에 잘못된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서 깨달아 지면서 잘못된 사고 방식이 축출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지속적으로 잘못 엉켜진 그릇된 사고들이 추방되고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걷어지고 마음속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깨닫는 진정한 깨달음이 그에게 심겨져서 그래서 그것이 지속적으로 깨달음 이 깨달음을 낳고 깨달음이 삶을 낳고 삶이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주고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이 거룩을 가져다주고 거룩에 대한 체험이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가 깨달아 지는 그런 긴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번 할렐루야하고 눈물 흘리고, 아멘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깨달음이 계속 될 때에 삶이 안 변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 이거죠.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듣고 깨닫는 것은 뛰어 넘어서 삶을 고치려고 하니까 그러니까 위선자들이 나오는 겁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자기는 하나도 그런 마음이 없으면서 좋은 말 혼자 다 늘어놓고 아무도 없을 때에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말이죠. 거룩한 채 행동을 하는 구역질 나는 모든 외식들이 바로 그런데서 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깨달음이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한 생각들이 옛 잘못된 생각들이 축출되여 나가는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엔 이럽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는 그대로 두고 이미 하나님 은혜만 주시면 된다는 생각을 한단 말이죠. 그런 것들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한단 말이죠.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 속에 있는 돌맹이와 같은 이런 것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을 때 그 말씀의 영향력이 우리 속에 있는 잘못된 것들을 이렇게 다 고쳐 나가도록 만들어져야 되요 그래서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강력하게 변화를 받는 비결 중에 하나는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무엇이 아니고 무엇이 옳은가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늘 가져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교를 듣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계속 들으면서 그러면 이런 건 신앙이 아니었다. 아 이런 것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구나. 아 그것도 정상적인 신앙은 아니었구나 그런 것도 신앙이라고 할 수 없구나 이런 식으로 아닌 것들이 계속해서 자신 속에서 속아져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아 이것이 참된 신앙이구나 아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구나, 아 그렇구나, 이것이겠구나 그렇치 신앙이 그래야 되겠지 하면서 한쪽으로는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아닌 것들이 쫓겨나가고 한 쪽으로는 올바른 것들이 들어아야 된다는 말이예요. 이게 예레미야서에 얘기하는 뽑고, 파멸하고, 한편으로는 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작용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지속적인 작용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자 그러면 이제 깨달음을 하나님께서 계속 우리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과정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 배울 수 있죠. 아주 쉽게 깨닫기만 하고 삶이 없다든지 깨닫는 거는 잘 깨닫는데 사는 거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는다든지 이런 편의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가 가지고 있는 많은 위험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끊임없이 삶이 없고 우리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풍성한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삶도 돌아보아야 하지만 먼저 우리의 삶을 더듬어 들어가 보면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깨닫는 것이 진정한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도달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이것부터 고쳐야 된다는 하는 것입니다. 고쳐져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이제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결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뭘 얘기하냐 하면 ‘듣고’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세 가지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듣는 것과 깨닫는 것 깨닫는 것과 결실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은 신앙적인 행동이어야 하죠 그죠,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은 우리에게 분명한 근거를 가져야 된단 말이죠. 내가 행동하고 행하는 것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이 올바른 근거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바로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결과가 나에게 이러한 삶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반성을 할 때도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성격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라는 끊임없는 질문이 제기 되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그러한 깨달음이 결국은 ‘듣고’라는 듣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명까지 통 털으면 천국의 시작은 들음이고 천국의 성취는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는 것은 열매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듣는 것, ‘듣고’라고 할 때에 결국은 듣는 것을 통해서 참된 깨달음이든지 기쁨으로 잠시 말씀을 받는 것이든지 똑같이 결국은 그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면은 ‘듣고’라고 하는데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오늘 성경 읽기표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만은 성경은 늘 읽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 자체의 일부가 되어야 됩니다. 그것은 무슨 숙제를 내 주고 아니면 공부를 하는 것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경을 늘 읽어 가는 것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떼어 놓을수 없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요. 운전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늘 운전면허증을 휴대하는 것처럼 성경을 늘 휴대하고, 그 성경을 읽음으로써 거기에서 삶과 삶의 규칙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기초적인 요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일주일을 살아가는 개인적인 예배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공적인 예배에서 여러분이 공적인 예배에서 여러분들이 혜택을 못 누리는 면이 너무나도 많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모든 신앙 생활을 이 열린 교회 예배 하나에 다 걸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공적인 예배에 대치 될 수는 없지만, 그것만큼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주일 동안 얼마나 죄악된 세상에서 쉽게 물드는 사람인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예배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아무 것도 모르고, 성경을 팽개쳐서 먼지가 가득 차고 기도의 골방에는 거미줄이 끼고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상태가 되어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면은 그저 계속해서 거미줄이야 끼어라. 벌레들아 기어다녀라 그리고 나오는데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예배의 정신에 의해서 산 사람들만이 예배에 왔을 때 감격을 누릴 것이라고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커다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일과표를 만들어 보십시오 텔레비젼 보는 시간은 1시간 30분, 기도하는 시간은 십분도 안되고 말이죠. 잡지책 보는 시간은 30분 말씀 보는 시간은 3분도 안되고 말이죠. 그렇게 해가지고 축복받는 신앙생활을 하겠냐 말이죠 여러분 뭘 가진 게 있어요. 우리 다 두드려 보면은 뭐 은혜받았다고 하지만 두드려 보면은 다 퉁퉁거리는 소리나는 빈 통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열심을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예배 하나님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이제 한시간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한 상태에서 삶을 살다가 와 가지고 한번에 대 청소해서 할 생각 그런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그리고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을 깊이 하셔야 됩니다. 목사님 너무 바빠요. 목사님도 한번 직업 전선에서 살아보세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IMF 시대에 사업하는게 뭐 장난일줄 아십니까. 그럼 난 말 하고 싶이요. 천국에 가기에는 너무 바쁘시군요. 지옥에 모인 사람들이 바쁜 사람들이 모인 곳이예요. 주님을 생각하기엔 너무 바쁜 사람들 영혼을 대비하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들 여러분 만약에 지옥 가보게 된다면, 갈리는 없지만 가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예요. 왜 이 세상에서 유능하고 바쁘게 살았던 사람들 거기 대부분 다 모여 있을 거예요. 왜 죄가 지옥에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아니 우리는 분명해야 하는 것이예요. 개인적인 예배에 성공하면서 일주일 살다와 보십시오 그러면 공적인 예배에 여러분 커다란 불이 붙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예배라고 하는 이 커다란 번제단에 여러분들이 제물로서 드려진다고 했을 때에 우리 하나 하나를 번제 단에 드려진 고깃덩이라고 혹은 제물이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는 때때로 말이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다가 다 식어진 심정으로 물 묻은 고기처럼 되어서 이 제단에 나옵니다. 거기에 올려질 때에 우리는 냉담하고 얼음덩이 같았는데 화력이 워낙 세면은 냉동된 삽겹살도 익히거든요. 그런 심령으로 나왔다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뜨거워 지고 변화 될수도 있죠. 물론이예요. 그건 사실이예요. 또 그렇게 냉담하고 차가워진 사람의 소망은 불붙는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매일 그런 식으로 예배에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강퍅함과 차가움을 더하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일주일 동안 말씀을 들은 대로 살고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예배하면서 은혜의 불을 유지하며 살았다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것을 예배의 시간에 주 앞에 드리면서 우리의 예배가 불꽃처럼 타오르고 드려지는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분명하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습니까 거기에서 기쁨을 느낍니까.
여러분 오늘 성경 읽기표를 나눠 드렸습니다. 여러분 한번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성경책 갈피에 끼어 놓고 한달 후에 열어봐요 동그라미가 얼마나 처져 있는지 보십시오. 여러분 의식없이 매일매일 생활이 이끄는 대로 살면 넉달이 지나도 허연 성경읽기표 밖에는 여러분의 성경책에 꽃여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결국엔 결실하게 하시는데 듣는 과정이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예요. 그래서 제가 늘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들으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분주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에는 너무 귀하신 분이다 이말이예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먼저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허락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묵상을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또 다른 깨달음을 낳고 그 깨달음은 실천을 낳고, 실천은 새로운 경험을 가져오고 새로운 경험은 자신의 깨달은 내용들을 확인하게 만들어 주고 하면서 일관된 신앙 생활을 해 나가며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이런 자신의 아집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서 새로운 사람으로 지음 받으려고 할 때에 그 일관된 깨달음은 결국 우리의 인생에 열매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인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격에 있어서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이 귀한 섬김을 다 하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귀한 도구로 쓰시는 놀라운 역사들을 얼마든지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그런 밭이 되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깨닫도록 그렇게 내어 드리는 그래서 우리 속에 하나님 앞에 깨닫도록 그렇게 내어 드리는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잘못된 돌맹이와 같은 사고들이 깨뜨려지고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결실에 감화와 놀라운 은혜를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