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외부강의
성화와 헌신 5-3
녹취자: 박은희
지금 여러분들이 배우고 있는 이 5과가 사실은 책 전체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입니다. 그리고 사실 내용이 너무 간단해서 그렇긴 한데 상당히 깊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래도 사실은 이 내용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이 안 드는 이유가 무어냐 하면, 이것이 여러분들이 모두 다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잘 푼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문제들을 다룰 때에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항상 여러분들이 경험했던 신앙의 경험을 여기에다 접목시켜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이해가 굉장히 빠를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경험을 스스로 평가하고 또 여러분들의 경험을 스스로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도 아주 굉장히 좋은 성취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제 한번 오늘 다룰 문제가 꽤 많은데 그래도 대개 종류들이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스터디교재로 23p입니다. 이제 11번을 한번 보겠습니다. 자, 누가 읽으십시오. 큰소리로. 자 11번. 앞자리부터 읽으십시오. 읽으십시오. 자 11번. 큰소리로 읽으십시오. 이 어두움이 이제 객관적인 어두움과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 어두우니까. 여러분, 그런 것 많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잘 살려는 마음은 있고, 그렇게까지 나쁘게 살려는 생각은 없는데 그런데 무지해서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밖에 살 수 없게 되는 경우 있잖습니까? 네, 이런 것들이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마음의 경향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영혼이 어두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내가 이미 전에 어떠한 진리에 대해서 깨달았습니다. 깨달았으면 이제 머리로 알게 되었잖습니까? 머리로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그것이 들어와서 죄를 회개해서 주관적인 어두움도 물러가게 했습니다. 이제 빛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 그렇게 살면 되겠구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심령이 부패하게 되면서부터 이제 그러한 말씀의 지식은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마음으로 그것을 붙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것이 바로 영혼의 어두움입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주 쉽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시죠?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재물을 중히 여기든지 하나님을 중히 여기든지 둘 중에 하나다.” 그러면서 어두움에 대해서 말씀하시잖습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살았었는데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물에 대한 욕심이 확 생겨나면 그러면 이 신앙의 질서들이 올바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주일을 지키지 않고 내가 돈을 버는 거에 대해서 돈에 대한 욕망이 많이 생겨나게 되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객관적인 어두움도 문제지만 이 주관적인 어두움이 우리의 실제 성화생활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어두움이 계속 물러나가길 우리들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주관적인 어두움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심령이 새로워지면 되겠지만, 객관적인 어두움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가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어두움을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들은 주관적인 어두움이 아니라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만 해주시면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서 나에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서, 설교를 듣고 깨닫고 하는 이 많은 것들은 이 영혼의 객관적인 어두움들을 물러가게 하는 것인 동시에 또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그것을 통해서 주관적인 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득 찼던 어두움들을 물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다음에 다음 문제 읽어보십시오.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나중에 답을 찾아보면 나오지만 이 성령께서 신적인 빛으로 신자를 조명하시면 죄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죄, 그리고 죄가 몰고 올 비참한 파국, 결과, 이런 것들에 대해서 현재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죄를 혐오하고 버리게 되잖습니까?
(예화) 예를 들자면, 담배를 사람들이 끊게 할 때 그때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담배를 계속 피우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주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담배에 대한 애착이나 이런 것들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제일 먼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죄를 인식하게 하고 또 그 죄의 비참한 파국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다음 3번, 세 번째 읽으십시오. 예. 그다음 문제도 같은 쪽으로 연계됩니다. 읽어보십시오. 14번. 읽어보십시오. 자 하나 더 읽으십시오. 15번까지. 16번까지 읽어야 되겠습니다. 15번 한 번 더 읽으십시오. 신자는. 그 뒤엣분 읽으십시오. 예, 여기까지만 우선 제가 풀겠습니다. 이게 한꺼번에 읽은 이유는 뭐냐 하면 이제 하나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말입니다. 13번인데 성령께서 조명하실 때 신자의 마음은 조명을 통해 드러난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랬죠? 죄를 발견하게 된 신자가 자기 부인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시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밖에서 유혹을 받기 직전까지는 그 죄가 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일단 우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와 완벽하게 하나가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것 중요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런 비유를 저는 항상 잘 드는데 여러분 왜 이런 경우 있잖습니까? 은혜를 여러분들이 받았을 때 은혜가 원래 여러분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잖습니까? 그런데 처음에 회심할 때 더더욱 은혜가 밀려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가 들어오는데 은혜가 들어왔기 때문에 ‘어이구, 불편하다’ 이거 뭐 소화 안 되는 음식 같은 게 지금 뭐 내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있습니까? 그런 적 없잖습니까? 죄도 마찬가지라 이것입니다. 죄가 들어올 때에도 똑같이 그런 식으로 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도 죄도 깃드는 곳이 우리의 마음인데 잘 들어보십시오. 마음인데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 우리의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이 본성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 아닙니까? 그거 목사님 정말 이상합니다. 죄와 은혜는 거의 상극인데 어떻게 둘 다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작용을 합니까? 그 이유는 신자 안에 부패한 본성과 거듭난 본성이 함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은혜가 들어와도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고 죄가 들어와도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그런 것들이 그러면 죄는 들어와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 깃들면서 움직입니다. 은혜는 들어와서 우리의 거듭난 본성 속에 어울리면서 이렇게 존재하게 됩니다. 존재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그 때는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불편함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쪽에 어느 순간에 부패한 본성 속에 깃들어있는 죄를 하나님께서 성령의 비추심을 통해서 그것을 딱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이 자기 안에 죄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이 계시의 조명을 통해서 탁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있구나.’ 하고 딱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구나.’라고 딱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다음에는 그것들이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 다음에는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화) 저의 아버님이 6.25때 참전한 이야기를 하시며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막 중국 공산군이 쳐 들어오니까 그거 뭐 전선이 무너지잖습니까? 그러면서 후퇴를 하는데 그 뭐 이렇게 종아리가 따끔한 느낌을 받더랍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한참 뛰는데 이상하게 장화가 묵직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군화가. 불컥불컥하면서 물이 가득 찬 느낌이더랍니다. 그래 가지고 이제 어느 지점까지 와서 한숨 돌리면서 군화를 딱 벗어보니까 피가 군화에 가득차서 확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총에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아픈 줄 몰랐는데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랍니다.
이것입니다. 바로. 그러니까 인식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딱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내안에 있다라는 것을 딱 인식을 하니까 그 다음에는 느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그 죄가 자기에게 미치는 영향과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이제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때 뭘 발견하게 되느냐 하면 ‘아아, 이게 내안에 있는 것 잘못됐다. 아, 이게 나쁜 거구나. 그리고 이걸 내가 받아들인 게 잘못된 거구나. 이걸 내가 계속 가지고는 살수 없겠구나.’ 하는 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가 앞에 부분이 죄에 대한 인식이고 두 번째가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죄를 받아들인 자기 자신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아 이게 아니구나.’ 이게 바로 이제 자기 깨어짐의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읽은 세문제가 차례 차례 차례 진전 단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자기 심판과 처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기 심판과 처벌이라는 것은 이제 뭐냐 하면, 이러한 죄를 내가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이러한 죄가 내안에서 역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내가 받아들이고 내안에서 역사한 이 죄는 결국은 말하자면 내 책임이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서 뭐냐 하면 심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러한 죄가 자기 안에 있기까지 자기가 기여한 것, 이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잘못됐다는 것을 심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기준이 뭐냐 하면 양심과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정하는 기능, 죄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는 역할을 가지고 있고, 그다음에 양심은 두 가지 역할을 갖는데 끊임없이 송사하는 것과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할 때는 율법의 기준이 딱 맞춰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을 가지고 그렇게 나를 정죄하는 양심의 도구로 삼고, 또 성경을 많이 몰라도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긴 율법 있잖습니까? 이게 양심이란 말입니다. 그걸 통해서 자기를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법정에서. 양심의 법정에서 계속 고발을 받는 것입니다. ‘네가 왜 이런 죄를 받아들였냐? 네 안에 왜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런 죄가 있냐?’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은 잘못됐다라고 딱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커다란 잘못이다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제 자기를 처벌하게 되는데, 자기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자기가 그 죄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 있는데 자기를 미워하면서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물리적으로 가해를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정으로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가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신자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실체가 뭐냐 하면 그러면서 그 다음번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고통의 실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이런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예수님을 죽게 한 그 죄를 내가 지금 지었다 그리고 그 죄를 지금 내안에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한 말하자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막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회개할 때 보면 마음이 막 아프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처벌의 결과입니다. 자기 처벌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막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아파하고 막 괴로워하는 그 과정이 뭐냐 하면 자기처벌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처벌의.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뭐를 경험하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이런 거구나 그것이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 문제에 나오는데 똑같이.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부인과 거기에서부터 자기부인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마지막에 자기 깨어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어떻게 요약이 됩니까? 죄에 대한 인식, 그다음에 자기 부인, 그다음에 자기심판, 자기처벌 그렇죠?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자기 깨어짐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해서 자기가 죄를 어떻게 이런 죄를 지었을까? 그러면서 막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워하고 그때 막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회개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이제 내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살아야지’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이 우리 속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과정이 묘사를 해놓고 보니까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입니다.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이야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깨어짐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화되고 이것이 계속될 때에 그 사람이 성화의 진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깨어짐이 없다 그러면 계속해서 뒤로 물러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익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얘기는 많이 듣고 개념은 있지만 하나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거라 말입니다. 병든 상태가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다음 문제에 나오는 게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이 항상 있게 되느냐? 이런 과정을 거치니까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런 고백이 모두 이러한 죄에 대한 인식, 자기부인, 자기심판, 자기처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 이 모든 전 과정에서 경험한 내용들을 그런 식으로 요약을 하고 표명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게 경험한 사람한테는 이 책이 너무 너무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애매모호하던 것들을 탁 탁 탁 탁 정리를 합니다. 자기의 생각으로서 이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탁 탁 탁 탁 정리를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논리를 가지고 배워놓으면 어떤 유익이 있느냐하면,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적은 두루뭉술한 것입니다. 두루뭉술한 것입니다. 두루뭉술하면 그러면 내가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알고 나면 내 안에 있는 회개의 경험이 진짜 나 자신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회개인가? 아니면 감정에 치우친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런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이런 어떤 이성의 작용인가? 이런 것들을 이렇게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이 문제를 상당히 뭐 이거와 똑같은 방식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상당히 자세하게 그것들을 다룹니다. 경험이 없으면 그런 식으로 다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가 깊이 깨뜨려지고 나면, 깨뜨려지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니까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를 위해서 그런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 한없이 죄송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렇죠? 그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핵심으로 해서 계속해서 이 체험이 도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대한 경험이 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잘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고,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고, 그리고 성실하고 이래도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특성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 전체가 위선적이 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비유를 잘 드는데 사과라고 하는 열매는 사과나무에서 맺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과를 심어놓으면 밑에서 물이 빨아 올라가면서 계절이 지나면서 꽃이 피고 영글면서 마지막에 사과가 대롱대롱 매달리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빨갛게. 따먹으면 콱 깨무는 순간에 과즙이 확 입안에 확 번지면서 그렇게. 침 흘리시는 것 좀 보십시오. 그러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사과의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것이 정상적인 방법이잖습니까? 그래 사과 비슷하게 생긴 모조품을 갖다가 사과나무에 매단다고해서 그것이 사과일수가 없습니다. 향기도 없고 과즙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번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두 개를 같이 놓고 꼼꼼히 읽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꼼꼼히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하나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하나씩하나씩 신앙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책을 쓰는 방식으로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야 됩니다.
제가 이번에 ‘죄와 은혜의 지배’ 를 2년 썼습니다. 2년 썼는데 2년 동안 거의 그 책 생각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쓰기 위해서 참고 자료를 복사한 것만 허리까지 찰 정도였습니다. 제가 직접 읽은 책이 150권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을 써 놓고 나면 어떤 유익이 있냐하면 독자들에게도 유익이 있지만, 저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서 한번 철저하게 탐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성화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더 많이 탐구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눈물 나올 지경이지 사실 더 많이 탐구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계속 자라가고 그러는 것이 이제 말하자면 이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공부 가르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냥 공부 가르칠 정도로만 그게 아니라 ‘이 기회에 내가 한번 자기 깨어짐 에 대해 공부를 해봐야지’ 그렇게 딱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책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나 그다음에 또 제가 설교한 다른 부분이나 다른 책이나 이렇게 보면서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뭐 자기 깨어짐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한 책이 또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책이 오히려 가장 많이 설명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하면서 가장 참고를 많이 해야 되는 책이 뭘 것 같습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물론 그것도 그런데 더 풍부하게 참고할 것이 많이 나온 게 뭐냐 하면 ‘마음지킴의 교리’ 입니다. ‘마음지킴의 교리’에 보면 이 부분을 여기서보다 훨씬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참고하면서 그러면서 이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 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깨어짐의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깨어지는 게 복음적인 깨어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감격이 있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경험이 있단 말입니다. 그분 때문에 죄가 용서받았고 또 우리가 지은 좌가 그 분의 죽으심 안에서 파괴되고 또 그렇게 죄에 대해서 깊이 애통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함께 살리시니까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그다음에 16번까지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17번입니다. 17번인데 누가 읽어보십시오. 빨리 빨리 읽어 보십시오. 네. 참 신기한 게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심판과 자기처벌을 거치게 되면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하다가 보면 너무나 고통스럽잖습니까? 그렇죠? 심지어는 그 고통이 마음의 고통일 뿐만 아니라, 회개를 많이 하다보면 육체에까지 고통이 오잖습니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뭐냐 하면, 그 고통이 기분 나쁜 고통이 아닙니다. 경험해 보았으니까 알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아프기는 아파. 그런데 그러면 달콤한 고통이냐?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뼈저리게 아프니까 그렇게 표현 할 수는 없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 나쁜 고통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영혼이 이미 벌써 그러한 성경적인 회개를 할 때에 이 회개가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감지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고 하는 것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예화) 자, 이게 적합한 비유일지는 잘 모르겠는데 요즘은 애들을 우유를 먹여서 많이 기르는데 옛날에는 엄마가 모유를 많이 먹였잖습니까? 요즘들은 또 많이 먹이데요. 그런데 이게 먹기는 좋은데 뗄 때 문제라 뗄 때. 뗄 때 이놈이 안 떨어지잖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도 보면 애들 젖을 떼게 할 때에 돌쯤 되어서 그만 떼야 되겠는데 하여간 죽어도 안 떨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젖꼭지를 물려버리면 퉤 뱉어버리고 엄마젖 달라고 떼를 쓰잖습니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냐하면 거기에다가 금계랍이라고 아십니까? 아주 쓴 약. 캡슐. 이렇게 뜯으면 그것을 엄마 젖꼭지에다가 바릅니다. 뭐 별짓 다해보았습니다. 우리 애들은 젖을 안 먹었으니까 그런데, 우리 집안에서 보면 어떤 때는 젖에다가 털을 이렇게 붙여가지고 시커먼 털을 붙여서 “이제 너 컸기 때문에 엄마젖 없어졌다. 털 나왔다. 이제 못 먹는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제 그게 또 떨어지지. 그러면 이제 안 됩니다. 그러면 금계랍을 바르는 것입니다. 애가 먹어 보려고 젖꼭지 이렇게 무니까 엄청 쓴 것입니다. 그 금계랍이 얼마나 씁니까? 아! 그러니까 이제 한동안 안 먹는 것 같은데 얘가 터득을 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한 두 세 번만 쓰면 그다음에는 젖의 원래의 맛이 살아납니다. 그 다음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마치 똑같이 회개가 자기 깨어짐이 고통스러운 경험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그러한 고통이 마치 그 달콤한 젖꼭지에 짐짓 발라놓은 그런 쓴 약과 같아서 이 고통이 지나고 나면 생명의 젖을 먹을 수 있다라고 하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 한 대로 달콤하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 나쁜 고통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자기 깨어짐이라고 봐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당하게 하는 동기가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 다음에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고 그리고 내안에 이렇게 더러운 것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나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나를 용납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갖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룟 유다처럼 되는 것입니다. “오 내가 무지한 자의 피를 흘렸도다.” 그러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서 목매어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죄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끼긴 느꼈는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용납해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비록 잠시 실패했으나 그분께로부터 영원히 떨어지기 싫고 그분과 함께 붙어있고 싶다 그런 사랑이. 마지막에는 뭐냐 하면 이런 자기 깨어짐의 과정 속에서도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집중이 굉장히 힘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끔 보면 이제 새 가족 반에 이렇게 딱 들어와 보면 말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게 설교를 듣고 깨어지든지 뭐 성령을 받고 깨어진 사람들을 막 쏙 쏙 쏙 쏙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옛날에 이런 십자가를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간증을 하고 뭐 현재의 십자가가 어떻고 과거의 십자가가 어쩌고 그러는데 나는 현재도 그렇고 과거도 그렇고 요즘도 그렇고 별로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진짜 변화 받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오래갑니까? 오래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며칠 가지 못해서 툴툴 털어버리고 마음속에 심겨져있던 그런 생각들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는 그 진지함을 견딜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누가 나한테 이야기 했는지 잊어버렸는데 한 댓 달 되었나? 그랬습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있는데 생전처음 교회를 다녀보려고 마음을 먹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싶어서 교회들, 큰 교회들이나 여러 교회들을 여러 군데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다는 소문이 들리니까 우리교회 지체가 “네가 기왕에 신앙생활 할 거면 그럼 한번 열린 교회 한번 와봐라” 그리고 데리고 와서 이제 주일 하루를 지켰답니다. 그러고 마지막에 가는데 가기 전에 물어봤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린 소감이 어떠냐?” 그렇게 물어봤더니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랍니다. “나는 생전 처음 교회 나오기 때문에 뭔지는 모르는데 그런데 몇 교회 다녀보면서 느낀 소감이 이교회는 좀 틀리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뭐가 틀리냐고 그러니까 절대로 이교회에서는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에 하나 태도를 분명히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믿을까 말까 하는 상태로 계속 있기는 되게 부담스러운 교회랍니다. 그래서 믿든지 안 믿든지 태도를 확실히 해야 될 교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죄인의 마음이 이게 얼마나 많이 변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있어서 소망이 되는 것은 뭐냐 하면 한번 나왔다고 하더라도 명료하게 진리를 진리 되게 가르쳐주어서 그래서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생명에 이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담이 없는 예배, 간단하고 부담이 없는 예배, 미친 짓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어디있냐고요? 그것은 있잖습니까? 그런 예배를 계속 드리면 교회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그 복음의 효력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효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말씀의 효능이 아닙니다. 말씀은 마치 사람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껍데기들을 확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벗겨 버렸을 때에, 나를 좀 용납해달라고 걸어 나오기도 하고 욕하고 뒤돌아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신 분이였지만 그 분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습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했던 제자들이 설교할 때에 특징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는 믿을지 말지 애매모호한 태도를 지녀도 상관이 없었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서 외칠 때에는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었단 말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시로 흔들린다 이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때에 이런 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뭐냐 하면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아하, 나는 해야 된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이게 그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자체가 성화의 영역에서 인간의 순종을 동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의지가 박약해서 그냥 아무렇게나 이렇게 막 꺾여버리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그 사람들은 은혜받기도 힘들고 받아도 보존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의지가 올곧은 사람들 있잖습니까? 성품적으로 뭘 한다고 그러면 꼭 하고야마는 그런 성격,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일을 향해서 결단을 하게 되면 그러면 아주 놀랍게 그런 이런 자기 깨어짐의 과정에서도 그 고통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그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갈망을 유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자 18번. 이 원리가 뭐냐 하면 저 표현이 참 좀 그렇죠? 사실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섬긴다, 무엇을 바친다, 그러고 봉사를 한다그럴 때에 우리는 그것이 굉장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이 정말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섬기는 사람 자신입니다. 섬기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될 때에, 그 섬기는 사람이 바치는 섬김도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됩니다. 그거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자신이 먼저 바쳐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8장에도 보면 뭐라고 하면 “너희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렸고 물질도 드렸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헌신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용납될만한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용납되는 것은 둘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의로워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지든지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진정한 자기 깨어짐과 참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져서 주님께 받아들여지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자는 우리의 몫이 아니니까 후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주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가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결국은 뭡니까? 그가 의로운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비록 그가 죄를 짓고 옳지 못하게 살았어도 중심에 깊이 통회할 때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받음직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그 은혜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연합 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자기 깨어짐이 많습니다. 잦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기 깨어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의무를 이어갑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만한 헌신에 모자란다 이것입니다.
마지막 자 읽으십시오. 자, 빨리 읽으십시오. 자, 이런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 결국은 자기 깨어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자기 깨어짐이 무엇과 무엇에 대한 깨어짐이라고 그랬습니까?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이라고 그랬잖습니까? 자, 그러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 깨어짐이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죄를 계속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본질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적의라 그랬잖습니까? 적의는 다시 둘로 나뉘어진다고 그랬죠? 그게 뭡니까? 반감과 적대감이지 않습니까? 반감과 대적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쪽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죄에 대해서 안 깨집니다. 그러면 형식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쪽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자기 의가 뭡니까? 자기스스로 하나님 앞에 용납되어질만한 존재라고 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충분히 섬기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됩니까? 우리의 모든 소망아신 예수그리스도를 의존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그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제가 지금 몇 번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그럴 때에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의지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중보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없다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거슬리는 죄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내적으로 계속되고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도 없고 이게 독립하려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냉랭한 세계에 그냥 있는데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이것입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 섬긴다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결국은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섬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선 어떻게 됩니까? 외적으로는 뭔가를 행하는 것은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 자기 속에서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해서 그래서 그 생명이 나를 살리고 예수의 생명이 나를 죽는 데에서도 소망을 갖게 만들고 고난도 이기게 만들어주는 이런 생명이 역사하는 힘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진짜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 삶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러니까 내적으로 이런 죄를 죽이고 그다음에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서 주님을 의지하고 이래야할 의무를 기피하는 대신 몸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때우고 막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렇게 하게끔 만들어주는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다음에 그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서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이 느끼는 성취동기입니다. 성취동기.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허무한 일에 많이 굴복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 그 동호인 모임 같은 것 있잖습니까? 그렇죠? 무슨 낚시 동호회. 산악동호회, 무슨 뭐 심지어는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동호회 그런 것도 있습니다. 별것 다 있습니다. 그러한 동호회, 하여튼 옛날 라디오 모으는 동호회, 별것 다 있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의 열심은 굉장합니다. 아, 기억하시죠? 엄청나게 굉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열심은 굉장합니다. 그런 열심하고 비슷한 열심이란 말입니다. 그 무슨 동호회 한다고 해서 자기가 무슨 지위가 올라가고 그러는 게 아닌데도 거기 그렇게 애착을 갖고 한다 이것입니다. 헌신적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을 겉으로는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께 없는데 나름대로 그것도 일이니까 본성적인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성취감을 주고. 그러니까 그 속에서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그런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존재자체, 그 존재자체가 하나님께 받아질만한 존재가 되고 그러한 마음이 우리의 삶속에 스며들어서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받쳐질 때에 하나님이 그것들을 가지고 망가진 이 창조의 세계를 고쳐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깨어짐이 없는 신앙생활은 모두 가식이라 이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외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먼저 기도해야 됩니다. 먼저 기도해야 됩니다. 진정한 자기 깨어짐이 매일 매일 반복되도록 성령께서 도와달라고 그리고 마음을 고정시키고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버리면 절대로 자기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으면 인간의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