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헌신 6과
녹취자 : 정은숙
오늘은 6과입니다. 교재 26페이지입니다. 1번과 2번은 중요하긴 한데 책에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조금 어려워 보이는 것이 3번과 4번, 5번, 6번 정도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선 1번을 읽어보겠습니다.(본문 읽으심) 책에도 상세하고 나오지만 보통 기름을 만드는 방법, 집에서 쓰는 등불을 켜기 위해서 만든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은, 먹을 때 쓰고 하는 것들은 압착기에다 감람유를 넣고 돌려서 꽉 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기름 짜는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소에서 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절구 같은데 탁탁탁 깨트리면 깨트린 사이에서 기름이 나옵니다. 그 기름을 그대로 채집해서 쓰는 것입니다. 채집하기가 굉장히 어렵겠지요. 그러나 그 기름의 차이가 뭐냐 하면 순도가 아주 높습니다. 꽉 눌러서 짜면 아무래도 불순물이 들어가고 불순물이 들어가면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생기잖습니까? 그래서 석유도 보면 좋은 석유, 등유를 쓰면 밝고 좋지만 혼합물이 많이 들어간 석유를 쓰게 되면 그을음이 길고 불이 밝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아주 순결한 기름을 채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런 기름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순결한 불빛을 내기위해서인데 2번과 이어집니다.(본문 읽으심)
2번에 나오는 내용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더라고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아주 혼탁한 것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제쳐놓고 영적인 역사만을 우리들이 몰두하게 되면 아주 잘못된 영적인 현상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신앙을 어지럽히고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날수록 그것들을 더 순결하고 순전하게 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암시하는 것들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순결하게 기름을 짜내는 것들이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성령에 대한 경험과 은혜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경험될 때 안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지성이 앞서가고 체험과 이런 모든 것들이 뒤따라갈 때 건전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1.2번은 그런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3번부터 좀 어렵습니다. (3.4번 읽으심) 여기에 인제 우리들이 깨어짐에 대해선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텐데 설교하거나 성경 공부할 때 계속 나오는 얘기가 자기 깨어짐에 관한 내용이니까 깨어짐에 관한 내용은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깨어짐이 사실 우리는 한 가지 깨어짐,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트려지는 한 가지 깨어짐에 대해서 죽 들어왔지만 그렇게 될 때 풀리기 어려운 점들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도 도저히 못하는 일을 불신자들은 결심을 하고 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마치 본성이 변화된 것처럼 해내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특히 이런 것들은 이교도들의 헌신적인 구도의 열정 같은 것, 그런데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해명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서 전에 생각의 혼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청교도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정리를 해주어야만 우리가 오해가 없겠다하고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본성적 자기 깨어짐이란 말을 하나의 신학적 용어로 채택해서 사용한 것은 제가 아는 범위내선 제가 처음입니다. 처음 이것을 사용해서 본성적 깨어짐과 신령한 깨어짐을 대비해서 겉으로는 유사한 것 같지만 두 개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대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성적 깨어짐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에게 본성이 있습니다. 뒤에 가면 나옵니다만, 어떤 본성이 있는데 삶이라는 것은 본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그 삶의 본성에 의해 흘러가는 궤적입니다. 이 본성은 지식적으로 말하자면 본성의 빛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본성의 빛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비록 신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빛을 사람들 속에 남겨두었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럼 그 본성의 빛은 신자에게는 없는 것입니까? 신자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신령한 지식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많이 못 배워서 잘 모른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인생을 사는 도리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알았던 것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보니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생을 사는 도리와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이 본성의 빛입니다.
그런데 본성의 빛이 있는데 본성의 빛의 크기는 다릅니다. 본성의 빛을 소유한 그 빛의 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아무 생각 없이 술이나 먹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은 본성의 빛이 원래 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빛이 점점 더 감퇴되어서 짐승과 다름없이 되겠지요. 그러나 비록 예수님을 안 믿고 말씀의 깊은 은혜를 못 받았다하더라도 끊임없이 인생을 명상하면서 인생을 잘 살았던 지혜자들의 책들을 접하고 인생을 계속 명상하면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은 본성의 빛이 더 증진되어서 본성의 빛이 점점 더 많아지겠지요.
이런 본성의 빛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철학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들은 각기 발전해도 그 자체가 철학이라는 것에 의해서 본성의 빛을 확 증진시켜줄 때 그 총명을 적용해서 모든 학문의 활동들이 방향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성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역할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본성의 빛을 따라서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많은 빛은 아니더라도 본성의 빛이 있고 그 빛을 따라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고 생각하면서 죽 갑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이러한 상태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또 다른 강력한 빛이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본성의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런 빛이 비치면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본성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 방향으로 요렇게 조금 비치면서 갔는데 갑자기 이쪽에 빛이 환하게 들어오면 요 빛으로만 볼 수 없었던 부분들을 새로운 본성의 빛을 통해서 확 보게 됩니다. 그 때 보게 된 내용이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던 본성의 빛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면 이것이 워낙 크면 이것이 잘못됐다 하고 버려버리고 새 본성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또 하나 들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스크루지, 그 구두쇠있잖습니까? 스크루지 영감하면 동네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어느 날 무슨 사건이 있어서 크리스마스 때 어떤 사건으로 깊이 감동을 받아서 자기 돈을 풀어서 나눠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사람은 나름대로 그 동화 속에서 본성의 빛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성의 빛이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돈 없으면 말짱 꽝이다, 알뜰하게 살아야 한다, 절약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돈을 모아야 한다, 돈이 날 지켜준다, 이런 본성의 빛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 산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이것이 자기가 가진 본성의 빛이었고 그 빛이 자기를 인도하는 대로 이끌려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성전에 가서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면서 세상 사랑 버렸네 고백했습니까? 아닙니다. 뭔가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또 다른 본성의 새로운 빛을 본 것입니다. 아,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딱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좁은 생활이고 아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보다도 더 놀라운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본성이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산이 귀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준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실 미국사람들은 죽일 놈이라고 이를 갈겠지만 빈 라덴이라는 사람 개인적으로 보면 참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제가 읽은 자료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어마어마한 부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조 단위가 넘는 돈을 물려받은 재산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돈 가지고 중동의 부호들처럼 어깨를 겨누면서 살면 일평생 호강하면 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생고생입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변장을 하고 그리고 이동을 하면서 광야에 숨어서 삽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만나서 은혜를 받아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원래 본성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돈을 좋아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좋아하고 그 돈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삶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강력한 본성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옳고 그르고의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고 고통 받는 이슬람형제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을 버려두고 내가 사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야기가 맞는지 틀리는지는 각자 도덕적인 판단이고 어쨌든 이 사람에게는 그것이 들어온 것입니다. 더 큰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산주의가 된 것도 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공산주위가 어마어마한 것을 보장했기 때문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잘못된 것이다 사상적 깨우침이 생겨난 것입니다. 본성적 자아의 깨어짐이 아니라 사상적 깨어짐입니다. 탁하고 들어 와서 다른 방향으로 쫙 뻗어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전에 있던 것들이 다 깨트려지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전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도 아닌 이교도들인데 정말 사람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 성철스님같은 사람들입니다. 물욕이 하나도 없이 8,9년을 누워서 자지도 않고 장좌불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이렇게 종교적으로 입신양명을 해야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는 이행할 수 없는 삶입니다. 새로운 본성의 빛이 들어오고 사상적 깨우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성적 자기 깨어짐입니다.
가끔 보면 아이들도 공부를 죽어라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애들도 그렇지만 부모가 하라, 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까지는 되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깨우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 공부를 안 하면 안 되겠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공부 안하고 가서 가스통도 배달해보고 짜장면도 배달해보고 하니까 이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거든.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고 딱 하고 깨지는 것입니다. 대개 군대갔다오면 많이 철이 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죽어라고 공부를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본성적 깨어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리를 해서 배우질 않아서 그렇지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일들입니다. 심지어는 아주 작게 건강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술을 매우 잘 먹고 담배도 많이 피웠는데 어느 날 그렇게 술을 먹다가 간암에 걸린 사람을 보고 담배를 피우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 사람을 보면서 큰일나겠구나하고 탕하고 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을 끊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이 본성적 자기 깨어짐이 발동을 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큰 혼란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신령한 자기 깨어짐이란 무엇인가 하면 이것과 유사합니다. 신령한 자기 깨어짐도 유사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신앙관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것들보다 더 큰 빛이 탁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다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가치를 향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생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본성적 깨어짐과 똑같습니다. 본성적 깨어짐이든지 신령한 깨어짐이든지 간에 깨달음의 빛을 통하지 않고는 깨어짐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본성적 빛이든 신령한 빛이든 간에 깨달음에 의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신앙생활이 뭐냐 하면 깨달음의 빛이 없는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사실은 굉장히 무서운 상태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제일 두려운 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마음에 이런 깨닫는 것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의 삶은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단정한 모습으로 예배에 나온다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좀 더 진전해봅시다. 그러면 신령한 깨어짐은 무엇이 차이가 나느냐는 것입니다.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죽어라고 구두쇠 노릇을 해서 돈을 벌어서 저축을 한 것은 모두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잘한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베짱이처럼 살면서 남의 집에 깡통 차고 가서 돈 좀 줘, 밥 좀 줘, 빵 좀 줘, 잼 좀 줘, 스프 좀 줘, 그러고 돌아다녔으면 그렇게 사는 삶이 구두쇠로 사는 삶보다 더 아름답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맞는 이야기지만 그 다음에 고통 받는 이웃들을 발견하고 그렇게 돈을 움켜쥐고 구두쇠처럼 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고 그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딱 깨닫고 그 돈 통을 풀게 된 것은 매우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닙니다. 이미 제가 여러분들에게 오늘 설교에서도 설명했잖습니까?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미학적 관점에서, 혹은 철학적 관점에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옆에 있는 다른 개체와의 어울림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까 돈을 모으고 나 혼자 누구 신세를 지지말고 살아야겠다, 나 자신을 보호해야겠다, 하는 것은 범위가 요만큼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살므로 말미암아 덕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친척들에게 개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깨트려져서 아, 이게 아니구나 내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그들에게도 나누어줘야지 하는 것은 더 크게 선한 것, 크게 아름다운 것, 그것보다 훨씬 더 크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에 완전히 기여하게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본성적 자기 깨어짐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는 신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옛날에 전도사시절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삼 천 원 이상 되는 점심을 안 먹기로 신념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요즘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것들이 중심은 이해가갑니다. 내가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야겠다. 그러면 그렇게 자기 속으로 그렇게 정하고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면 되는 것입니다. 줄을 그어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어느 목사님 한 분이 20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온 교회 앞에서 서원을 했습니다. 자가용을 안 사겠노라고, 지금 얘기 들으면 사람들이 다 돌았다고 할 것입니다. 20년 전,25년 전에는 목사가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이 사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가용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사역에 방해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불변하는 가치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가용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을 번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다 자기 본위의 만용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 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감동을 받는다면 좋겠지요. 손가락질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이웃에게 미담을 남기고 이다음에 전기에 남을 만한 이야기 거리를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대부분 개인적인 신념이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성적인 것입니다. 본성적인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기가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거의 90%이상이 자기 의가 되기가 십상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자기 신념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대충 이해하셨을 겁니다. 자기 신념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뉘우치는 자기 비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답 안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목회 철학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없다, 무슨 얼어 죽을 목회철학이냐 그런 것 없다 그럽니다. 상황 상황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되지 무슨 목회철학이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설교에 열심을 내니까 설교에 목숨을 거셨죠? 그럽니다. 그러면 할 일 되게 없다, 목회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설교 하나에 목숨을 거냐, 그럼 설교만 하교 선교는 안 하냐, 선교는 생명 안 걸어도 되고 설교에만 생명을 걸어야하는 것이냐 반문하는 것입니다. 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본성적인 깨어짐, 자기 결심으로 세워진 삶의 방향이나 목표 이런 것들을 굉장히 높이고 신령한 자기 깨어짐에서 오는 거룩한 삶의 산물로서 오는 도덕과 혼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이 막 뒤섞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굉장히 많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흉내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이 혼란스러운 기독교 상황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글을 더 쓰면 엄청나게 많은 평야입니다. 벌판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들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성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조차 혼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그런 신념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신령한 깨어짐이 없이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타임지에 보니까 미국을 너무 사랑하던 두 명의 젊은이가 어떻게 극렬한 테러리스트가 되었는지 특집으로 나왔습니다.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미국에 한 일 년 동안 유학도 합니다. 미국을 너무나 동경합니다. 너무나 사회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이 잘 되어있고 민주적이고 이런 것들이 퍼펙트한 사회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을 흠모하는 것입니다. 친미주의적이 된 것입니다. 미국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친미주의적이 되지 반미주의적이겠습니까? 그런데 몇 차례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이 사람들이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도저히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자기들이 단지 이슬람 국가의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는 그렇게 미국을 사랑했는데, 짝사랑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자기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몰라서 그랬겠지 그러다가 두 번, 세 번, 네 번, 거의 짓밟다시피 인생을 망가뜨려놓으니까 그 다음엔 극렬하게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본성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미국은 나쁜 놈들이다, 이런 것들이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는 잘못된 사회다, 이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해주기 위해선 더 많은 폭탄을 던져야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렬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헌신적인 무장괴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 시키는 것입니까? 본성입니다. 본성의 빛은 본성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본성보다 더 강한 본성이 들어와서 예전에 삶을 이끌어내던 본성을 정지시키거나 파괴시켜버리고 새로운 본성의 삶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전의 본성은 미국을 좋아하고 친미주의적이었는데 새로운 본성이 들어와서 이제는 미국을 미워하고 혐오하고 적대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고자가 점잖게 충고를 합니다. 미국,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읽고 깨우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점잖게 타이르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이 본성의 빛입니다. 이 본성의 빛을 나쁘다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요즘 직원들이나 교역자들이나 만나기만 하면 운동하라, 운동하라고 합니다. 저도 운동을 안했는데 건강을 잃어버리고 나서 하려고 합니다. 매일 6,7킬로 많으면 12킬로씩 매일 걷습니다. 옛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본성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운동 안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 선명하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딱 딱 딱 연결이 되면서 내 몸에서 나타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하는 마음으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좋은 것이 뭐냐 하면 다른 것은 제가 조금씩 해봤는데 시간이 아깝습니다. 러닝머신을 뛰어도 뭘 할 수가 없고 수영도 그렇고 한데 걷는 것은 시간이 낭비가 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여러 사람이 걷는 것도 싫고 혼자서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에 대해서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창조, 사랑과 구속, 사랑과 종말, 사랑과 질투 이런 것에 대해 묵상하면서 6킬로 7킬로 8킬로 죽 걷는 것입니다. 계속 반복하니까 본성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 걸으면 힘이 들고 몸이 안 좋습니다. 그러니까 걷는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본성의 빛은 좋은 것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서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본성을 깨트려서 사회에 유익이 되는 공통선을 추구하는 본성을 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성의 대치, 본성의 변화는 가져오지만 본성 자체를 새 본성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옛 본성이 방향을 각각 다르게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런 본성의 바뀌어짐을 통해서는 자기의 행복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가던 인간이 하나님, 하면서 돌아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어짐은 오직 신령한 깨어짐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성적 깨어짐에는 자기가 잘못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래서 내가 불행해졌구나, 후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해서 깊이 깨트려지고 죄에 대한 사랑에서 깨트려지고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지는 이 신령한 자기 깨어짐의 진수는 본성적 깨어짐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이해 되시지요? 사실은 더 많이 말하고 싶은데 제가 오늘 완전히 설교 소나기입니다. 이거 끝나고 나서 또 80분을 설교를 해야합니다. 어쨌든 본성적 깨어짐과 신령한 깨어짐의 결정적인 차이는 뭐냐하면 빛이 들어오고 옛 본성을 버리고 미워하고 하는 것들은 비슷한데 신령한 깨어짐에는 자기 죄에 대한 깊은 깨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에 대해서 깨어지고 나면 본성적 자기 깨어짐에서는 볼 수없는 새로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합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계획하신 모든 계획에 함께 어울리는 그러한 아름다운 본성적 자기 깨어짐, 거기에서 비롯되는 새 본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집에서 인테리어를 하거나 장식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잡지에서 예쁜 집이나 건물을 보게 되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 집에서 사는 것은 불편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지어보고 싶은 욕망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집을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 집의 주인이 미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인지 아닌지는 무엇에 의해 판단이 되는 가하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하나하나는 다 예쁜 것을 사다놓았습니다. 그런데 전체가 안 어울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고리 하나를 예쁜 것을 사왔습니다. 예쁜 저고리를 사오고 그 다음에 치마도 예쁜 것을 사왔습니다. 두 개를 같이 입었는데 위에는 예쁜 저고리인데 밑에는 미니스커트입니다. 신발은 샌들이고 머리에는 카우보이모자를 썼습니다. 하나하나 가게에서 살 때는 정말 예쁜 것을 골랐습니다. 모자 가게에 가서 보니까 카우보이모자가 제일 예뻐서 카우보이모자를 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씩 사서 네 개를 다 입어보니까 완전 코미디가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갔을 때 이게 제일 예뻐도 이것을 집에 갖다 놨을 때 어울릴까를 생각해서 두 번째 예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갖다놓으니까 전체가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어떤 하나가 참 아름다운 삶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전체를 창조하신 전체의 계획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연결될 때에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늘 이야기하는 프라이머리 뷰티, 첫 째 되는 아름다움입니다. 나머지가 세컨더리 뷰티, 이차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특정집단, 특정한 사람, 특정한 시대에만 좋은 것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아름다움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본성적 깨어짐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고 신령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합치의 현상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가장 사모해야 할 것은 본성적 깨어짐이 아니라 신령한 깨어짐입니다. 본성적 깨어짐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신령한 깨어짐을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돈만 모으고 사는 것이 최고가 아니지,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더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원인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울려 퍼져야 될 것은 도덕적 설교가 아니라 복음적 설교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깨닫고 신령하게 깨트려질 때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의 전 삶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고 그의 삶이 아주 도덕적인 삶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본성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느냐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6번 본문읽으심)이것도 제가 논리적으로 나누어본 것입니다. 본성이 선천적 본성과 후천적 본성으로 나뉘고 후천적 본성은 다시 죄와 상관이 있는 본성과 상관이 없는 본성으로 나뉘게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통된 본성을 주십니다. 선천적 본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다 돌보기 위해서는 로봇처럼 한 기계에서 찍어낸 것 같은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교회를 하나 생각해봅시다. 교회의 사명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알려서 주님을 향한 경배자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목표입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세상 끝날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 단순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작용과 활동은 얼마나 다양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별의 별것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교회 안에 모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그 교회가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사람은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잘 섬겨서 새가족위원도 나오고 돈이 많아서 건축할 때 헌금도 많이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출판을 잘 하는 재능이 있어서 이것을 얼마나 잘 만들었습니까? 정말 선수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냅니다. 이번에도 발령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좋은 형제자매들을 다 준비하셨다가 보내주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좋은 대학 나오고 대학원 나오고 해서 갈 길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유능한 사람이 아니면 제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구제하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항상 저는 한 사람을 쓸 때에는 일 년 연봉이 얼마인가 그 다음에 그 사람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여하는 것이 얼마나 될까 계산해서 후자가 전자보다 많아야 사람을 씁니다. 그렇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좋은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구석구석에서 다 해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각자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 앞에 더 훌륭하게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몸이 건강해도 손가락 하나가 부러지면 제대로 일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하나가 다 건강한 몸이 되고 아주 유능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제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못해보리라고 확신하는데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나면 잔디밭에서 서너 바퀴 뱅글뱅글 돌지 않습니까? 너무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한 번 어떻게 하는거냐고 물으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한 번 돌고 영원히 똑바로 못 서는 수도 있으니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들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풀밭에서 공중에서 여우 돌듯이 돌아서 탁 섭니다. 나도 한 번 좀 그렇게 돌아서 탁 서보면, 지난 번 체육대회할 때 가장 간절했습니다. 그 넓은 풀밭에서 막 뛰어오다가 공중에서 제비돌기 두 번쯤하고 탁 서면 얼마나 박수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안 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이 결집됩니다. 무엇에 의해서 결집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의해서 결집되어서 우리에게 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자기의 목적으로 품고 막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교회가 덩치가 크다고 해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덩치가 커야겠지만 크다고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난번에 보니까 450킬로 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외출하려면 기중기로 달아서 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큰일을 합니까? 큰일은 큰일입니다. 버스도 뜯고 타야하니까요. 신체가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그냥 뚱뚱해져서 몇 만 명 모인다고해서 큰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균형이 잡히고 탄탄해져서 옛날에 무하마드 알리 같은 사람 보십시오. 별명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130킬로입니다. 130킬로짜리 거구가 10여라운드를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130킬로가 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팥죽처럼 퍼지기만한 130킬로도 있는 것입니다. 둘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등치가 커지는 것 뿐 아니라 기름이 빠진 상태에서 탄탄하게 기본 하나하나가 유연하게 움직여야지만 싸움에서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다양하니까 획일적인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통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주셨어도 후천적으로 본성이 각각 주어질 때도 다르지만 환경과 교육에 의해서 각기 다르게 발전합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이 어떤 사람은 퉁소 부는 사람이 돼서 음악의 달인이 됐고 어떤 사람은 기구를 만드는데 있어서 공장장이가 됐고 어떤 사람은 집짓는 사람이 되고,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죄가 들어오지 않아도 그렇게 됐을 거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는데 기가 막히게 재능을 가진 사람이 나왔을 거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음악 하는데 도사가 나왔을 거고 농사도 못 짓고 음악도 못하지만 글을 글 써서 감동을 주는 사람들도 나왔을 거고 그 사람들이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펜을 만드는 사람이 나왔을 거고 잘 써내면 그것을 책으로 내는 재능 있는 출판인도 나왔을 거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상관없는 후천적 본성입니다. 후천적 본성이 자라면서 계속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천적 본성 중에서 죄와 상관이 있는 본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섞여있지만 자라면서 계속 죄의 영향을 받습니다. 타락한 본성이 계속 촉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성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깨어짐은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들이 빛이 들어오는 것과 함께 진리로 말미암아 성령이 그들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들의 본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칼빈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마귀가 우리 인간의 마음을 타면 미친놈이 탄 것 같아서 우리를 막 휘몰기 때문에 미친놈 널뛰듯 하지만 성령이 우리 마음에 타시면 마치 우리 마음과 성령님 사이에 딱 일치가 이루어진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숙련된 기수와 같아서, 못된 기수는 타서 말만 잡습니다. 그런데 숙련된 기수는 타서 잘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칼빈이 인용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데 우리의 본성에 있어서 익숙한 분입니다. 본성을 거스리지 않으시면서도 본성 속에 깃들여있는 죄의 우리를 거룩하고 순결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순응하는 거룩한 사람들로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시려고 할까?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이 선할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본성에 빛이 들어온다든지 아니면 오기가 생긴다든지 해서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거의 영광을 안 받으십니다. 받으신다 해도 조금밖에 안 받으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냐하면 그 사람이 악한 사람에서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 우리가 본성을 중요시하게 보는게 ‘너, 공부 똑바로 해, 안 하면 용돈도 없고 반 죽는거야’ 그래서 그날 그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상급도 사라지고 징계도 사라지면 다시 퍼집니다. 그러나 아이가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서 내가 이렇게 해야되겠다 라고 본성을 갖게 되면 마음을 먹고 그것이 반복되어서 본성이 되면 부모가 감시 안 해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본성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인격 안에서 항구화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악하게 살아가는 놈을 그냥 다구쳐서 어쩌다가 한 번씩 삶을 살게 하려면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런데 그사람이 본성적으로 바뀌어서 착한 사람이 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바꿔놓기 위해서 애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모든 사역이라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이런 본성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에 맞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다양한 작용들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