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와 헌신 5-2
녹취자 이경순
오늘 5과 두 번째 공부입니다. 오늘 굉장히 중요하고 아주 좋은 알짜 같은 내용들로 공과교재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교재로 21페이지입니다. 책은 110페이지입니다. 1번 문제 한번 보겠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5번, 자기 깨어짐에서 말하는 신자의 자기의란 무엇입니까 ? 6번도 같이 읽어주세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를 얻을 수 있는 두 길은 무엇이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의의 기반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자 먼저 자기 깨어짐에서 말하는 의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의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을 해야 되요.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성품, 혹은 속성으로서의 의가 있고 이것을 본체적 속성 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그러한 의로운 성품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인간적인 의예요. 그래서 그것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도 의라고 부른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원래 의라고 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항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는 것, 자신의 거룩함을 방어하는 성품을 의의 성품이라고 불러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잖아요.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시리즈를 여러분들이 잘 듣고 이해를 다시 하셔야 되요. 시간만 있으면 공과공부를 하겠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잖아요. 거기에는 목적이 있을거아니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더 풍성한 영광을 나타내려는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지는 그런 계획이 있잖아요. 그 계획이 인간이 죄에 의해서 다 파괴되었잖아요. 그 계획이 좌절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해서 그쪽으로 계속 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셔요. 바뀐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할 때나 죄가 들어온 다음이나 다시 회복된 지금이나 하나님의 그 계획은 똑같이 가지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가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성품과 존재가 그런 쪽으로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못하게 자꾸 방해를 하는 거야 그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저항을 하는 거 아니겟어요.저항하는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창조의 목적을 어긋나게 하는 것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예요.이런것들이 때로는 심판으로 나타나요 경고로도 나타나요 의 그러면 떠오는 것이 심판이잖아요 그를 저항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셔야 되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은 의가 아니라 의의 발로예요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향해 가고자하는 계획에 저항할 때에 하나님이 그것들을 정리하시는 과정이란 말이죠. 그렇게 하시는 성품을 의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면 그 목적과 맞게 쭉 따라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의로운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될까요. 두려움이 될까요? 그러니까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만 기다리는 거예요. 심판하시면 나의 대적들은 하나님이 정리하시고 나는 하나님이 칭찬하시기 때문이에요 그게 여호와의 날의 양면 성이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의면 그것을 인간의 삶에 적용 했을 때 우리 인간들에서 통용되는 의라는 것은 무엇일까?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가시기 위해서인 간들에게 내리시는 지침들이 있잖아요. 율법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잖아요. 너는 이렇게 살아라. 하는 표준을 주시잖아요. 거기에 부합하게 살면 그게 의라고 하는거예요.그냥 의라고 하면 문제가 없지만 자기 의 라고 했거든 이거는 나쁜 의미예요 자기 의라는 것은 판단의 주체가 자기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의로우냐? 의롭지않느냐의 유일한 판 단자는 누구여야되요. 하나님이 되셔야 되는데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판단하는 거예요. 또 원천이 자기야. 자 무슨뜻인지 들어보세요. 구역장이니까 교리 반은 마쳤다고 생각하고 설명을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배우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런 것이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살아가게 하시는 거다 하고 깨달았어요. 깨닫기만 하면 그대로 그렇게 살수가 있어요? 안되지요. 뭐가 필요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요. 그러니까 원천이 자기에게 있는 거예요? 밖에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자기 의라는 것은 스스로 원천을 갖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원천이냐면 원천이 아녜요, 가짜 의지 가짜의 그래서 자기 깨어짐에서 말하는 그 의가 깨어져야 될 것이 바로 뭐냐면 이러한 종류의 자기의가 깨어져야되요.자기의가 깨어지면 은혜가 흘러들어오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자원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기의가 우리의 신자의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라고 하는거죠.그것은 스스로 자부하는 것예요.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겨나게 되요? 무슨 의가 생겨나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미 지난 시리즈에서 가난한 심령을 위하여 란 시리지를 들어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에 대해서 8준가 9주에 거쳐서 설교한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한때 그것은 파산선고 받은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거든요 무엇이냐면 그렇게 되고난 파산된 심령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대고 의지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예요. 이 의지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의존의 감정과 사랑의 감정 그리고 순종의 감정 이 세 가지가 하나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던 때예요, 그래서 늘 눈물이 고여있어요.하나님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시는 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절대로 씩씩하지 않아요.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씩씩할 수 있어요. 핍박 오라고 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면 약해요. 이해되죠? 그럴 때 순종하게 되는 거예요 의존의 감정과 순종의 감정 사랑의 감정 이것은 하나라 이거예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자신의 중요한 논문 중에 하나가 있는 데 ‘인간의 의존의 관계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이런 제목의 논문이 있어요. 아주유능하게 써내려갔지요. 우리가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분적으로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된다면 결국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 이예요. 그런데 인간자체가 모두 하나님을 원래 의자하면서 살게되어있지만, 그러나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그런 의존 감정이 다 깨뜨려진 거예요. 그래서 죄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시도예요. 독립하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생각 했지만 그러나 생명에서 끊어져 나간 거거든요. 죄의 결과라는 말이예요. 그렇게 된 것을 하나님이 중생을 통해서 그 의존을 회복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회심을 한때에는 한없이 두려워떨며 약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사도바울이 한 경험 아닙니까. 주여 뉘 시입니까 내가 어찌하여야 하오리까? 예전에 알던 그 사울이 아녜요. 완전히 무너지는 거죠. 그게 의존의 감정 이예요 그렇게 내가 상당히 내가 내 자신 안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겠금 상당히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잘 살아가도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의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 사람을 향해서도 사랑하면 약해져요 사랑하는 사람 눈빛하나 말 한마디에 의해서도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나요 ?
요번에 우리 직원들 보고 나한테 전부다 편지를 쓰라고 했어요. 1년에 한 번씩 하거든요. 한 장짜리 말고 두장이상쓰라고 했어요. 이만큼 들어왔어요. 다 읽었어요. 마지막 부탁이 두 가지예요. ‘목사님 건강을 조심 하세요, 또 하나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서 웃어주세요’ 부탁 이예요. 사랑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똥푸러 오는 아저씨한테 그렇게 부탁하겠어요? 웃어달라고, 한번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들을 향해서 웃어주면 마음이 모두 밝아지는 거예요. 사랑의 감정은 의존의 감정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거예요.
(찬양)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하나님을 그렇게 의존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의에 빠지면 이런 감정이 없는 거예요. 이게 문제예요.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의가 어떻게 나타 나냐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까는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이거는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산에 한번 내려갔는데 어느 장로님이 밥을 사주는데 젊은 분이예요 제 책을 몇 권만 읽었어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을 텐데 저한테 자기를 소개하는 데 “제가 부산에서 주의일 을 많이 하는 장로입니다. 거기까지는 내가 참았는데 그다음에 눈을 크게 뜨면서 이 고장에서 나만큼 주님의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이분은 상당한 정신착란 증세에 지금 빠졌구나! 그러고 내가 웃었어요. 삼일동안 집회가 끝났어요. 마지막 날 찾아온 사람이 한사람 있었어요. 그 장로님 이예요. 장로님이 내손을 붙잡더니 고개를 깊이 숙이면서 ‘목사님 내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발견한 걸까요? 그렇죠. 자기의 의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를 알게 된 거죠 . 그런 식으로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잘할 때 있지요. 그리고 실제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어요. 그것은 사실이에요 똑같은 우리자신을 보더라도 잘 산적이 있고 엉망으로 산적이 있잖아요.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산적이 있고 마구 개기면서 교회에 고통을 준적도 있잖아요. 우리가 생각해도 양쪽의 경우가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차이가 현저하게 나니까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잘 되었을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자기 의에 빠질 수가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 잘 되게 하는 자원이 하나님 앞에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선과 은혜의 큰 자원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되는 것이 뭐냐면 우리가 구원 받은 거예요. 그 원천을 활용할 수 있게 된거예요.그러니까 처음주님 믿을 때만 주님을 의지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원천이 예수 안에 있으니까 그 원천에 잇대어서 그 자원들을 공급받을 때마다 항상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의 가없는 거예요 자기 의에서 깨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어는 한 순간에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 성령님의 도움임 ,그 앞에 있는 자신의 패역하고 아무 자원도 없는 자신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 의가 쓰레기와 같다는 것을 깊이 보고 그것을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의존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이 그렇게 주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면서 파절인 기도를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마음으로 의존하지 않는데 어떻게 간절해질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간절해진다면 그것은 하나의 겉모습이고요.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요. 복음적 생명으로부터 멀어져요. 이정도면 아마 거의 이야기가 된 거예요
두 번째 문제가 뭐냐면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없이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의로웁기 때문에 그 요구에 부합할 때에 하나님과 교통 할 수가 있는 거죠. 이것을 얻는 방법이 둘이예요. 율법을 다 지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됨으로 얻는 방법이 있고.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잖아요. 두 번째는 복음을 통해서 얻는 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멀리는 제사로 나타나는 거예요 분명히 죄인이고 그대로인데 그 제사행위를 통해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인이 참회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잠시 그 의를 만족시킨 사람으로 받아들이시는 거죠. 이런 것들이 나중에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것들이 일시적인 의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의롭게 우리가 되는 거죠. 영원히 단번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들을 대면해 주실 수 있는 그런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거예요. 물론 그런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데 불순종하고 살아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고 어쨌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다음에 7번을 누가 읽어주세요
7번은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미덕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예요. 앞으로도 설교를 하거나 책을 쓸 경우에는 이 미덕이라는 단어를 아주깊이 주목 을 해서 보셔야 되요. 우리들이 흔히 쓰는 미덕 이라는 것은 어떤뜻이예요? 미담을 만들어 내는 그러한 덕이지요. 미덕이 뭐예요 양보 하는 게 미덕이다 보기가 좋다 그런 뜻이 예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미덕이다. 또 질서와 차례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 미덕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보기에 좋다는 뜻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손해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럴 때에 그것을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이거든요. 기독교에서도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 미덕은 비슷한 개념 이예요 그런데 비슷한데 틀려요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미덕이라는 것이 좋다 나쁘다는 기준이 절대적일수가 있는가, 보편적인 것은 어느 정도 있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문화적인 차이예요. 여러분 밥을 먹을 때 한국에서 밥그릇을 놓고 밥을 퍼먹잖아요. 밥그릇을 들고 퍼먹으면 빌어먹는다고 그래요 옛날에는 그리고 항상 몸이 밥을 따라가는 거에 대해서 그러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밥이 여기 있는데 퍼서 밥이 오게 해서 먹어라 이래야지 빌어먹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이 체면도 없이 개할듵듯이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일본 가서 그렇게 먹으면 아주 예의 불손한 사람이에요 반드시 공손하게 밥그릇을 들고 입가까이에 놓고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뭐가 미덕이야 이거죠? 상대적이라 이거죠 물론 우리나라에서 살인하는 거 나쁘고 중국에서도 살인하는 게 좋다고 얘기를 안 해요. 일본에서는 될 수 있으면 살인 많이 안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그런 기본적인 룰들은 통일되어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통일되었다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각자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한다 이거죠 그렇죠, 기준이 변한다고 이런 것들이 모두 가변적 이예요 그런 것은 사회의 일반적이 도덕통념과 관련이 있는 미덕이고 그 미덕도 자꾸 변한다 이거죠. 여러분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안 되는 거 같아요?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여러분들은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나쁘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이거죠 왜냐하면 잘 보세요. 여러분들은 다 구세대이거든 저도 구세대이거든요 우리는 항상 밖에서 안에 들어가면 ‘탈모 ’그래서 극장이나 학교 같은데 이것을 벗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누가 만들어놓은 법칙이냐 이거예요. 예전에는 나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안그래래요 왜냐하면 한번은 대화할 기회가 있었어요. 왜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느냐 그 입장을 이야기 하는데 여자들은 머리스타일이 부하잖아요. 애써서 썼어요. 햇빛이나 이런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교회오는거예요. 이것을 벗으면 짱구가 되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자기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싫은 거예요. 또 심지어는 결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머핀케익마냥 쑥 들어갔어요 또 어떤사람들은 머리가 벗겨졌어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쓰고 다니는데 자꾸 벗으라고 그러니까 수치심을 유발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모자를 쓰고 온 것이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강제라도 벗겨야 되고 안 벗으면 쫒아내야하는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이 절대적인 기준일수가 있냐고요. 그래서 옛날에는 그런 것 쓰면 상상도 못했어요. 지금은 용인하는 분위기예요, 극장에도 더 이상 모자 벗으라고 써놓지 않아요. 왜냐면 옛날에는 극장이 건축비 아끼느라고 경사가 져있어었요 그래서 머리좀 숙이세요. 그랬어요. 지금은 가파르게 되어있어서 앞사람이 고깔을 써도 다 보여요 그래서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어째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가 있냐 이거죠. 1960년에 윤복희라는 여자가 신세계 앞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커트를 입고 튀어나왔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세로다 그랬어요. 지금은 다 그러고 돌아다녀요. 그게 기준이 뭐냐 이거예요. 아니 잘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젊은 사람들하고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성경을 벗어나고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도록 강요 하는것이 않은 것에 대해서는 좀 자유로울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누가 지어준 기준이냐 이거죠. 언젠가 한번 머리 물들이는 거 한참 유행일 때 머리물들이고 어떤 신문사에서 기자들 몇 명이 와서 나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목사님은 구세대이기 때문에 말이 안통할지도 모르지만 하기에 얘기해보자 통하자 머리 물들이고 이러는 게 우리나라에 이 전통적인 한민족의 특성은 흑발 직모인데 그러기에 너희들이 정말 대학교육을 받은 자냐? 무슨 대한민국의 특성이 흑발직모냐 그러면 기껏해야 민족적 정체성을 까만 머리에 파마하지 않는 생머리를 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정체성을 유지해서 뭐하냐? 한나라의 정체성이 그렇게 시시하게 만날 깎아버리는 그런 머리카락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 뭐하냐. 노란 물들이고 싶으면 물들이는 거죠 파란물들이고 싶으면 파란 물들이는 거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지 그런 것을 보고 너희들이 빨간 머리는 기분 나쁘고 까만 머리는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까만머리난 동네에서 사니가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무슨 상관이냐고요 내버려 둬라 결국은 까만 머리로 돌아온다. 금방 돌아왔잖아요, 돈 줘도 안 해요 이제는 다 까만 머리하고 다니잖아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미덕을 설명하는 게 그런 거예요 이런 것들은 전부 부분적이고 시간에 따라서 자꾸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신학적으로 미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원래 가지고 계신 계획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에는 너그럽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거예요 바보 같은 거예요 그런데 보세요. 공산당에 의해서 러시아정교회가 망할 때 저기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대포소리가 들릴 때 교회에서는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을까? 축도할 때는 이 각도가 몇 도가 되어야 하는 거 성경적인가? 그게 성경에 어디나 옵니까. 쓸모없는 것에 목숨을 건다 이거예요 미덕이란 뭐냐면 하나님이 원래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어요. 그러면 한 번에 다 이루어지지는 않지않잖아요 거기를 향해서 조금씩 이행하는 것 그것이 미덕 이예요 이 교회를 짓기 전에 이 예배당을 짓기 전에 머릿속으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먼저 그림을 그립니다. 작자의 마음속에 천정은 하얗게 칠을 하고 기둥도 하얗게 칠하고 아래는 보드를 붙이고 이쪽은 칠을 하고 아래는 카펫을 깔고 의자는 장시간 설교해도 부담을 안느끼겠금 편한 의자를 놓고 색깔은 이렇게 맞추고 다 구상한 게 있잖아요, 그런데 일꾼둘이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사람들이 막 돌아다니면서 지멋대로 일하던 그 방식을 가지고 이 교회에 와서 일하는 거예요. 제가 지휘봉을 들고 등산화를 신고 진두지휘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들어와 보니까 이 판 데기를 전부다 엉터리로 붙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북 뜯었어요. 그리고 이따위로 일을 하느냐 당신들이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당신네 집이면 이렇게 하겠느냐 다 뜯어라 어떻게 그렇게 일을 해놓을수 있느냐, 막 야단을 친 거어요. 왜 야단을 쳤을까요? 전체적으로 하긴 하는데 전체적인 이 교회당을 짓고자 하는 그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거예요 딴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사학이 되는 거 그게 사학의 개념 이예요 미덕의 삶이라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우리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고 우리를 건강하게 하시고 여기에 살아가게 하시는 목적이 창조의 목적을 전체적으로 회복하는데 기여하는 삶을 살게하시기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쪽을 향해서 계속 가는 것이 미덕의 삶이예요. 불순종하고 거기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은 사악한 삶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미덕 이예요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 받고 새로워지고 그러면 그 힘을 가지고 거기에 미덕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미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 이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탁월하게 빛나는 사람 어두운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밤하늘에 샛별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8번은 안 해도 됩니다. 9번과 10번을 한꺼번에 두 개가 같은 질문이거든요. 의롭게 살려는 인간의 노력은 다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필요하다 부분적으로는 맞아요. 그런데 몇 가지 점에서 틀려요 첫째 어디서 틀리느냐면, 우리가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삶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훌륭하게 의로운 삶이라고 할지라도 또 조금 의로운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 구원을 얻는데 도움을 안 된다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이 물건이 있어요. 그런데 10억 원짜리야 예요. 그런데 이것을 너무나 사고 싶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물건을 사러 갔어요. 두 사람이 갔는데 한사람은 돈이 많아요. 10만원이 있어요. 한사람은 돈이 적어요. 10원밖에 없어요. 그래서 둘이 가서 이거 저 10원밖에 없는데 주실래요? 그러니까 ‘야 10억짜리를 어떻게 10원에 주냐? 안 돼 그랬어요. 그래서 떨어졌어요. ‘저 아저씨 저는 이사람 보다 만 배나 더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얼만데 ?10만원 있거든요‘ 저한테 파시면 안 돼요? 정가가 10억 원인데 10만원에 살려는 놈이나 10원에 살려는 놈이나 주인입장에서 보면 둘 다 도둑놈이라는 거죠. 아주 명쾌한 비유죠. 그러니까 우리가 의로운 삶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잖아요. 사람마다 차이가 나잖아요?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값 주고 구원을 사려고 한다는 것은 둘 다 터무니도 없는 아주 싸구려라 이거예요, 무슨 뜻인 줄 알죠? 그러나 그런 개념이 아니라 구원을 얻겠다는 개념이 아니라 은혜 받은바 소명에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면서 살았다고 할 경우에, 주님을 섬기면서 산 삶. 성화의 삶이라고 할 경우에는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게 아니에요. 보세요.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하인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렇게 맡겼어요. 주인의 입장에서는 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사실 주인입장에서는 다 합해서 여덟 달란트 밖에 안 되는데 그거 돈도 아닐 수도 있어요. 돈 있는 사람한테는 돈도 아닐 수도 있어요. 내가 아는 목회자 한사람이 봉고를 몰고 시골서 올라오는데 고속도로 앞에서 젊은 애들이 외제차를 타고 가다가 쾅 하고 박아서 봉고를 왕창 찌그러먹어더래요 그래서 갓길에 세우고 야단을 쳤대요. 무슨 운전을 그런 식으로 하냐고 차선도 안 지키고 교회차를 이렇게 망가뜨려서 어떻하냐고 그랬더니 아저씨 정말 죄송하다고 그러더니 자동차 뒤에 가서 봉투를 하나 꺼내 주면서 아저씨 가서 잘 고쳐서 쓰세요. 그래서 얼만지도 모르고 은혜 받으러 가는 길에 얘 내들하고 싸워서 뭐하랴 많이 찌그러졌지만 그냥 가자하고 집회 장소에 도착해서 세어보니까 천오백만원이 들어있더래요 봉고 하나값 보다 더 많이 들어있더래요 어떤 바보 같은 집안의 애들인지는 모르지만 싹수가 노랗잖아요. 돈 많은 사람한테는 그까짓 거 천오백만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우리집사람이 한번 강남의 백화점에 갔는데 구르마. 에다가 뭘 많이 사가지고 가는 주부가 있더래요 그래서 ‘아주머니 이거 정말 맛있겠네요.’ 이거 얼마 주셨어요? 그러니까 ‘몰라요 ’하고 지나가더래요.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이게 얼마냐 이렇게 계산을 안하는 거예요. 필요하면 그냥 사가지고 가는 거예요. 가격하고 상관없이, 그러니까 주인이 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그까짓 거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그거 뭐 남기면 얼마나 남겼게고 그랬겠어요. 그런데 주인이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회로 삼잖아요. 왜? 그것은 자기 자신이 그들에게 베풀어준 은혜 자신들에게 맡겨진 소명에 대해서 얼마나 충실했는가에 보이는 대한 시금석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화에 의해서 한사람이 의롭게 살았다 한사람이 매우 의롭게 살지 못했다 하는 거 적은 차이가 아녜요 엄청나게 큰 차이예요. 절대로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다 일방적으로 다 쓸데없는 놈이다 그렇게 안하신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자기의 사랑스러운 아들처럼 대하고 어떤 사람은 많이 고쳐지고 새로워져애할 그런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대하시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그런 점에서 틀리다는 거예요.
마지막 문제는 잘못된 이유가 뭐냐면,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은혜 안에는 소명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주신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하도록 충성스럽게 자기 자신이 순종하면서 살 때에 그 은혜가 강화 되는 거예요 10번에서 반복되는 질문 이예요. 원인론적인 동기가 되는 거예요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 뜻에 맞혀서 살고 싶은거예요죠 그러니까 은혜가 의로운 삶의 원인이 되죠! 그렇게 의로운 삶을 실천하고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은 은혜를 계속 부어주셔요 그러니까 또한 의로운 삶은 은혜 받는 비결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목적론적인 삶의 동기가 되는 거예요 이 두 개가 같이 계속 흐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면 호수가 두 개 있는데 갈릴 리가 있고 밑으로 내려가서 사해가 있어서 사해는 막힌곳이예요. 위에서 내려오는 물 의양과 증발하는 양을 비교할 때 증발하는 양이 많은 거예요 물이 증발하면서 염분이 많은 그런 물인데 아무것도 못살죠. 사람이 투신자살해도 둥둥 뜬단 말이죠. 그거에 비해서 얼마 되지 않는 갈릴리호수는 깨끗해요 흘러들어오고 계속 흘러나가는거예요. 고기가 많이 살고 아주 아름다운 바다예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 그 은혜는 부패해 버리는 거죠. 은혜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주신 목적을 깨닫고 거기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그때에 은혜 받는 삶이 계속 촉진이 되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영광을 돌리며 사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