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2
녹취자: 최원정
어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 그리고 살아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살아계시다.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시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묘사하실 때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묘사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입니다. 근데 왜 예수님은 굳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묘사하고 싶으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분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희랍어로 우라노스(οὐρανός)라고 하는데 ‘하늘’입니다. 그래서 희랍어 성경에 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들’에 계신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근데 유대인들의 하늘 개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하늘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삼중적인 장소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맨 첫 번째 하늘은 우리들이 숨 쉬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늘이 악령들이 지배하는 하늘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맨 위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천사와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라고 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하늘, 세계의 모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악한 영들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거기는 감히 하나님이 침범하지 못한 그런 구역의 하늘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하늘이 바로 하나님의 하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하늘들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모든 하늘들의 주인이시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을 초월하시는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항공의 시대가 열린 것이 불과 20세기의 일입니다. 라이트형제가 맨 처음에 비행기를 띄운 게 1903년도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행기를 사람들이 자유롭게 타고 다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우주선을 띄우기 시작한 것은 정말 오래 되지 않은 일입니다. 1969년도에 아폴로 11호가 처음으로 달에 착륙합니다. 그 때도 컴퓨터가 있었습니다. 컴퓨터의 용량이 이 핸드폰의 용량이 똑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안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이 얼마 안 된 일입니다. 물론 이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에 의해 인간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구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날아다닌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는 더더욱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이 ‘하늘들에 계신 아버지여.’ 라고 가르쳐 주셨을 때에는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주기도문을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너희를 사랑하시는 분이지만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졸지 마십시오. 졸다가 유두고가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졸다가 떨어져서 제주도에서 죽었다. 얼마나 창피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높으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의식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치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이 주기도문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정말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이고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일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깔보고 그리고 조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기와 이 모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머리로는 유일신론을, 가슴으로는 다신론을, 실천으로는 무신론을 따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높고 너무나 위대하셔서 두렵고 떨리는 분으로만 알아서 무서워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정말 기독교 신앙일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라고 할 때 그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그게 바로 우리가 당신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할 때 4중적으로 성경에서 사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라고 할 때 첫 번째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자가 성부를 부르실 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위격적 아버지 되심(intertrinitarian Fatherhood)’,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창조적 아버지 되심(creative Fatherhood)’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하나님이 많은 나라와 백성이 있는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십니다.(신정적 아버지 되심, theocratic Fatherhood) 그래서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와 함께 중요한 것이 바로 네 번째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자적 아버지 되심(adoptive Fatherhood)’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 그 구원받은 사람들을 당신의 자녀라 부르시고 당신이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온 인류는 두 번째를 누렸고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번째를 누렸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네 번째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라는 이 호칭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창조적, 신정적 아버지 되심’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에는 ‘양자적 아버지 되심’을 의미하며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호칭 관습을 우리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낯선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그렇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이것은 이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우리와 함께 묶어서 예수님이 우리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을 때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아주 다른 종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냥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을 신학에서 '아콤모다치오'(accommodatio)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의 수준에 맞는 화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어린 아이 같은 이해 수준에 맞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이렇게 부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라고 번역이 된 이 단어가 헬라어로 파테르(πατήρ)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일반적인 아버지라는 단어가 아니라 가족관계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게 바로 중국에서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말로 아빠라는 단어입니다. (중국에서) '빠빠(爸爸)'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이러한 표현은 원래의 아람어 표현입니다. 근데 이 표현은 사실은 가족관계 안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아빠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인용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은 아주 놀라운 사건입니다. 앞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말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아주 높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라면 아빠라는 말은 가족 속에서 느끼는 사랑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온 인류는 서로를 자신의 살과 뼈로 여기는 가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해 하와를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그 여자를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이 고백했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는 고백을 합니다. 그게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자식도, 형제들도 모두 그렇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하는 사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빠라고 하는 이 말은 어린 자식과 아버지 사이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할 때 이 세 가지 사실을 명심해라. 첫 번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근데 그 하나님은 ‘따오’처럼 그냥 존재만 하는 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두 번째로 “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른 높고 아주 위대하신 분이시다.” 세 번째는 “그렇게 높고 너무나 위대하셔서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분이실 뿐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 너무나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처럼 그렇게 어떠한 간격도 없는 친밀한 사랑의 아버지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시고 위대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명심하면서 이 기도를 드려라.”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염된 아버지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한국의 아버지들은 너무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때로는 무시합니다. 때로는 너무 엄격해서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기 두렵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활의 본이 안 되어서 자식들의 존경을 못 받습니다. 오늘날 중국이나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들을 때 깨달음이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망가진 아버지의 개념 때문입니다.
(찬양)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나라 임하시고 뜻 이루어지이다
그런 찬송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그런 지극한 사랑의 아버지. 그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그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그리워서 사랑의 추억 때문에 눈물이 확 쏟아지는, 그런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누구도 이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렇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하나님을 언제나 그렇게 어린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그런 아빠로 부르도록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의 서문이 보여주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두렵고 떨릴 정도로 위대하신 분이시라면 우리가 그분 앞에 그분을 함부로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면 그분 앞에 엎드리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것, 이것이 첫 번째 하나님에 대한 개념입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보시고 당신은 아빠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아버지 되신 그 본을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무 높고 위대해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농담 속에서도 하나님을 들먹이는 그런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갔다면 모두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주 티끌 같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너무 높고 위대하셔서 나 같은 것들은 먼지처럼 후~ 하고 치워버릴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약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도 초대교회가 일꾼들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자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강조하시면서 우리에게 구약을 통해 우리가 미처 배우지 못한 하나님의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머니 같은 하나님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엄격하고 때리지만 엄마는 우리를 어떤 일이 있어도 감싸고 사랑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데도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불효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뜻과 유사합니다. 그렇게 재산을 나누어 가져서 방탕해서 탕진해버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근데 아버지는 그런 재산을 탕진해버린 것을 티끌만큼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아들을) 걱정합니다. 그러면서 동구 밖에 나아가서 혹시 아들이 오나 하고 매일매일 기다립니다. 사실 그런 것은 아버지가 하는 일이 아니라 엄마가 하는 일입니다. 근데 이것을 아버지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무엇이냐면, 이것을 맨 처음에 듣는 사람들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 아버지를 제시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높고 위대한 아버지는 그런 방탕한 자식을 죽여 버리면 되고 사람 시켜서 그 사람 잡아와! 하고 명령하면 잡아서 끌고 올 수 있는 권위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보면 아버지가 황제인데 자식을 죽여 버리는 예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 한국의 역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셋인데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습니다. 나중에 분란이 일어납니다. 형제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가족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왕국의 후환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가리키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조리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가족들이 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추운 날씨에 눈이 펑펑 내립니다. 작은 등불이 밝혀집니다. 따뜻한 화로가 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엄마입니다. 엄마는 밖에 나가서 대문을 열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잘 때라도 집을 멀리 떠난 아들이 돌아 왔다가 문이 잠겼으면 못 들어오고 돌아 갈까봐,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엄마의 바느질 하며 기다리는 그림자가 종이 문에 그림자가 비칩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목숨까지도 대신 바칠 수 있는 그런 유일한 사람이 엄마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게 바로 우리 아빠라는 말 속에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는 엄마 같은 아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너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도 아까운 것이 없으신 엄마 같은 아빠다. 그래서 내가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그 하나님은 너무 엄격하고 높으시기 때문에 나같이 자격이 모자라는 사람은 그 아버지가 관심을 안가지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사랑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기도의 깊이와 수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심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을 가지고 그 하나님 이 세계는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 세계는 왜 창조하셨고 인간은 왜 만드셨고 교회는 왜 생겨나게 하셨는지를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입니다. 높고 위대하셔서 두려우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게 될까요? 로마서 5장 8절에서 찾아보십시오.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림을 보면,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자연은 무슨 의미가 있고 인간이 사는 세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지를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이제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창조의 아버지 되심을 능가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깨달으려면 창조세계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해결하심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 세계와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계획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깨뜨려집니다.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해결하십니다.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그 명칭을 예수님이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가족 삼으신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인데 또 다른 자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한 가족으로 불러서 그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온 인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될 날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이루어질 이러한 아름다운 인류사회를 위해서 종자씨를 뿌리셨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인 핏줄입니다. 보혈 때문에 핏줄인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체들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우리가 정말 특별히 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서로를 사랑하는 핏줄인 형제들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형제들을 아주 작은 이유 때문에 미워하고 질투하고 서로 싸우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사건 중 하나는 자식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단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그것을 아주 아파하고 자기 일처럼 여기면서 지적해야 합니다.
그럼 결론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 높고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아끼는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행복은 하나님 아버지의 좋은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하고 또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잘 전하는 목회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